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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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는 바른 마음(right mind)이 아니라 바르게 보이려는 마음(righteous mind)을 갖고 있다"이다. '바르게 보이려는 마음'은 자신과 타인의 '관계'라는 구조 위에 세워진 도덕 감정이며, 추상적 저항과 일상적 순응을 동시에 내면화할 수 있는 힘이다.

인간 개체에게 사회성은 생존 전략으로 출발하여 문화의 발원지로 진화한 선천적 구조물이다. 우리는 과학이 발달할수록 생물학적 DNA의 영향력을 중시하지만, 특정 사회가 부여하는 공기와 같은 문화적 습속 역시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습득되고 내면화되는 강력한 심리 기제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자연이 새겨놓은 초고 위에 경험을 써나가며, 회상을 통해 지나간 경험을 서사로 재구성한 집적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험을 다시 쓰는 '자기 정당화'이다. 우리가 경험을 재조립하는 이유는 평판과 호혜성에 기초한 사회적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에서 우리의 도덕 감정을 구분짓는 기반은 대략 6가지-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충성심/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이다. 우리는 각각의 기반에 민감도가 다른 DNA를 갖고 태어나며, 다른 경험을 겪고, 다르게(정확히 말하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기록한다.

배려와 공평성에 마음이 기운다면 당신은 추상적 저항을 내면화할 가능성이 크고, 충성심과 권위에 마음이 기운다면 당신은 일상적 순응을 내면화할 가능성이 크다. 배려와 공평성은 다른 가치를 배제하는 경향을 가진 반면, 충성심과 권위는 다른 가치를 자신에게 수렴시킨다.

저항이 추상적인 이유는 공감의 영역이 위선으로 쉽게 변질되기 때문이고, 일상이 순응적인 이유는 공감의 영역이 비도덕에 쉽게 함몰되기 때문이다. 결국 도덕 감정이 직면하는 문제는 타인과의 '공존'이며, 여기서 자유와 평등의 대립항을 묶어주는 '박애'의 끈이 '요청'된다.

'박애'는 이성이 정념의 노예라는 흄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지 않는다. 타인과의 상호 교감은 자신과의 상호 교감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경험을 다시 쓰는 '재구성'의 자리에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놓는 일이며, 매번 잊지 않고 채우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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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 살인자는 현재 적용되는 법적, 정신의학적 기준에 따르면 미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정신이상이 아니며, 냉정하고 계산된 합리성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냉담함이 합쳐져서 기괴한 범죄행각을 저지른다. <진단명:사이코패스> p24


현대 사회는 사이코패스들에게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은신처인 동시에 화려한 성공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인셉션의 낙원이기도 하다.


공감하지 못하지만 냉정하고 합리적인 그들은 미디어가 전파하는 가상의 진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포착해낸다.


사이코패스는 태어나고 소시오패스는 길러진다. 두려움이 거세된 자연물은 가공(架空)의 

아름다움으로 가공(加工)된 인공물로 진화한다.


이 인공물은 숙주의 생명을 빼앗으면서 증식하는 암세포의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숙주에 

기생하면서 자족하는 기생충의 고요함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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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더스 - 전 지구적 상생을 위한 이주 경제학
폴 콜리어 지음, 김선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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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는 국가간의 소득격차가 유발하는 인구의 대이동이며, 이주자의 소득 증대라는 기대감과 유입국의 저비용 고효율의 노동력 확보라는 기대감이 맞물리는 현장이다. 이주는 유입국과 유출국 모두에 다양한 사회적 여파를 발생시킨다.

유입국의 원주민들은 공동체 의식의 약화에 직면한다. 공감과 선의에 기초한 동료애는 소득의 재분배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인데,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대의가 이주 공동체의 확대를 불러오면 이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연대감을 훼손한다.

이주자는 유입국의 효율적 경제에 편입되어 현저한 소득 증가를 보이지만, 사회적 자본의 상실이라는 반대급부에 시달린다. 아울러 고국의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를 지며, 유입국의 문화와 관습에 직면하여 동화와 자율의 기로에 선다.

유출국은 이주자의 송금이라는 보험에 가입하여 단기원조의 효과를 누리지만, 숙련 노동의 상실이 불평등 격차를 확대시켜 장기 성장성이 훼손된다. 남은 자들의 소속감이 약화되어 외부자 심리 같은 비도덕성의 증가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주자들은 사회적 다양성을 확대한다. 다양성은 사회의 탄력성을 높여 경제적 부를 증가시키고 다채로움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지만, 상호 배려에서 오는 협력과 관용의 미덕을 약화시키는 부식 효과(腐蝕 效果)의 역기능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이주 공동체가 유입국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도 고유의 생활양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을 때 가시화된다. 이주의 가속화가 '한계점'을 넘기 전에 예방과 동화 정책이 병행되어야 하는 대목이다.

'현명한 이기심'은 이주의 부작용을 염려하고, '빈곤층에 대한 연민'은 이주의 자유를 역설한다. 두 입장은 다양성과 연대성을 대립항으로 놓지만 문제의 본질은 내적 만족감이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되면 소속감이 약화된다는 사실이다.

공존이라는 말에는 공공성이 함축되어 있다. 소규모 공동체들은 이익단체의 성격만이 아니라 상호 연결망 속에서 서로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어야 공동체의 의미를 갖는다. 국가라는 상위 정체성은 여기에 공공성을 부여하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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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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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헤겔의 사유는 모든 개체를 아우르는 '완전한 체계'(System)의 추구로 요약된다. 헤겔 이후의 사상가들은 그가 남긴 바벨탑이 불가능을 추구했던, 몰락한 이상의 흔적임을 받아들이고 두 갈래의 길을 떠나는데, 한 쪽은 반성과 재생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폐허의 잔해물을 고고학자의 섬세함과 상상력으로 탐구하여 새로운 방법론을 발견하려는 무리들이었고, 다른 쪽은 폐허란 생(生)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상의 탑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무리들이었다.

 

니체는 후자의 길을 탐색하고 개척했지만 전자의 길이 버릴 수 없는 물음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혼돈의 디오니소스를 갈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며, 아폴론을 질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은폐의 장막이기 때문이다. 그는 혼돈의 찬양자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아폴론의 평정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는 그의 말 속에는 아름다움은 혼돈의 와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관조의 평온 속에서만 머무르는 것도 아니라는 조화의 요청이 담겨 있다.

 

'없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부정은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자의 무리들이 외치는 원초로의 회귀와 타락한 현실의 해체는 오직 타락한 현실이 '있기'에 가능한 언명이다. Chaos가 Cosmos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Chaos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 역시 Cosmos가 선사하는 질서에 대한 자각이 '있기'에 가능한 언명이다. Cosmos를 '없음'으로 돌리는 것은 니체의 주장처럼 본질을 관통하는 음악에 담긴 시의 언어가 아니라 침묵으로 모든 것을 전달하는 '염화시중의 미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이심전심은 언어를 폐기한다. 언어가 폐기된 자리에서는 이심전심도 소멸한다. 음악은 열정에서 태어나지만 언어로 대변되는 인간 정신의 형상화를 거쳐야 비로소 세계에 내려앉는다. 신적 정신은 몰아(沒我)이자 자신을 향한 관조이기 때문에 전달하는 영혼이 아니라 머무르는 영혼이다. 머무르는 영혼은 생(生)이 있더라도 그것을 잊은 상태이므로 태풍의 눈처럼 광폭한 비바람을 외부에 분출하면서도 고요함에 머무르고 있으니, 언제나 홀로 존재한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유한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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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철학 - 중판
조가경 지음 / 박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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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주체적 사유를 객관적 사유에 대해 하나의 「교정안」(矯正案)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그의 교정책은 현실의 진리를 파악함에 있어서 객관적 사유가 평형을 잃었던 측면을 견제 내지 보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며, 결코 그 자체로 완전한 진리 체계일 것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다." p222

선행하는 자연철학자들의 학문적 성과와 대결하여 '자연학(physis)에서 인간학(logos)로의 전환'을 모색한 소크라테스와 영웅주의를 숭상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전통을 타파하고 좋음의 형상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상한 플라톤의 사유는 내전(stasis)에 빠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교정안'이었다.

보편이성을 전제로 엄밀한 관찰과 실험에 기반한 자연과학의 성과가 인류 전체의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희망과 달리 대량 살육의 전쟁으로 마감한 현실의 폐허를 딛고, '사유'하는 주체에서 '존재'하는 주체로의 전환을 모색한 실존철학 역시 허무와 회의주의의 극단에서 생(生)의 의지를 되살리려는 몸부림이었다.

전쟁이 유발한 '주관적 언어 상태', 곧 말의 의미가 타락하는 전환기를 맞아 전자는 자연학의 절대적 기준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정치학의 절대적 기준을 세우려고 노력한 반면, 후자는 초월적 대상과 단독으로 마주한 주체적 사유를 제시하여 세계 안에 있지만 세계를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반(反)구성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실존철학의 입장은 일견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떠올리게 하는데, 소피스트들이 상대성에만 몰두하여 하나의 합의된 원칙을 부정하고, 사회적 소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한 것과 달리 실존철학은 궁극적으로 실존의 '결단'을 거쳐 절대적 초월성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존재'의 목적을 저버리지 않았다.

실존철학은 실존을 시간성 위에 놓인 유한한 존재로 파악하지만 이때의 유한성은 '제한'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한정짓는 '확보'이다. 존재자는 확보된 자신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미완성의 자유로운 결단을 촉구하면서 신을 향한 수직적 믿음뿐만 아니라 세계와 교섭하는 수평적 물음을 통해 초월에 접근하고자 한다.

실존철학은 비합리적 직관주의를 바탕으로 과학적 합리주의를 포섭하고자 하였고, 실존을 지성의 선행조건으로 삼아 진리인식의 가능성을 담보하려 하였다. 우연적으로 세계에 던져진 존재의 필연성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종래의 모든 가치를 전복한 일체의 무(無) 위에 정화와 재건의 공간을 창출하려는 적극적인 의의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정립과 반정립의 통일 시도는 그들의 원천적인 대결의 대상이었던 헤겔의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지만 실존 자체가 역리(逆理)를 포함한다는 면에서 받아들일만 하다. 다만 "결코 그 자체로 완전한 진리 체계일 것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던 출발점의 열린 개방성은 방황하는 자의성의 한계를 봉합하는데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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