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침체의 교훈 - 재정 정책 VS 금융 정책
리처드 C. 쿠 지음, 김석중 옮김 / 더난출판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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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 책을 통해 바로잡고자 하는 세간의 통념은 크게는 금융 위기 때 전가의 보도처럼 집행되는 통화 정책의 허점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실례(實例)로 소위 말하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통화주의자들이 경기를 조절하는 기본적인 방식은 금리를 이용하여 통화량을 증감시키는 것인데, 여기에는 대부자와 차입자가 항상 균형있게 존재한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즉, 경기 침체로 디플레이션이 우려될 때 낮은 금리로 통화량을 증가시키면 저비용으로 대출을 받으려는 차입자를 통해 증가된 통화량이 민간에 공급된다는 뜻이다. 저자는 통화 정책의 허점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구성의 오류(fallcy of composition)'는 금융 위기의 촉발 원인은 아니지만 가속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현상은 어떤 사람(기업)에게는 적절한 행동이 모든 사람(기업)에게 적용될 때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야기하는 것을 가리킨다. 경기 침체기에 개별 주체가 채무 상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적절한 행동이지만, 민간 부문 전체가 채무 상환에 매달리면 뱅크런(bank run)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자산 가치의 연쇄 폭락과 기업의 도산을 불러와 경기 침체를 심화시킬 수 있다. 이때 기업의 목표는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부채 최소화로 이동하며, 차입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진다. 차입자의 부재가 현실화되는 셈이다.

특히나 일본의 경우처럼 기업의 영업 활동은 원활한데 부동산과 같은 보유 자산의 가치가 급락한 경우, 기업은 악화된 대차대조표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양호한 현금 흐름을 동원하여 부채를 최대한 빨리 해소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통화 정책 기조를 고수하여 금리를 제로로 낮추고 은행에 유동성을 공급해도, 아무도 차입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자산 가격의 하락과 경제 활동의 둔화가 해소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처럼 차입자 부재의 위기 상황을 '대차대조표 침체'라고 명명하고, 민간의 부채가 해소되고 차입 심리가 회복될 때까지 정부가 대신 나서서 재정 적자를 감수하고 경기를 부양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논거를 받아들이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재정 건전성을 외면한 채 무리한 토목 공사와 같은 경기 부양책을 남발한 실패의 세월이 아니라, 심각한 디플레이션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던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게 해 준 유효 적절한 회생기간이었던 것이다. '대차대조표 침체'기에 동원된 재정 정책이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은 암에 걸린 마라톤 선수를 대회에 다시 출전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시키지 못했다는 비난에 불과한 것이다. 저자는 2008년 금융 위기에 대한 해법 역시 미국 정부의 과감한 재정 정책을 주문하고 있는데, 당시의 FRB의 대처가 얼마나 올바른 것이었는지는 버냉키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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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트 라인 - 보이지 않는 균열이 어떻게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가
라구람 G. 라잔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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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산업 종사자의 기여도를 측정하는 가장 직접적인 척도는 그 직원이 회사에 벌어준 돈이다. 여기서 돈은 일과 가치 모두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p251

폴트 라인(fault line)은 '지진 유발 단층선'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2008년 금융 위기를 둘러싼 많은 분석들과 그보다 더 많은 요인들 중에서 저자는 불건전한 정치적 개입과 국가 간의 무역 불균형 그리고 각국의 금융 제도의 간섭 현상을 핵심 단층으로 꼽는다. 아울러 특정 개인에게 최대한의 이익과 제한적인 손실이라는 매력적인 유혹을 발산하는 금융계의 인센티브 제도가 도처에 흩어져 있던 폴트 라인을 한곳으로 모아 지진을 촉발시키는 방아쇠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의도한 결과'보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비 효과를 불러오는 복잡계로 진화해왔다. 폴트 라인으로 다가가는 지각판의 전진은 충돌과 균열이라는 '의도'를 조금도 내포하고 있지 않지만, 대지의 경계(nomos)를 지키지 않은 그들에게 모이라(moira)는 파국을 선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더구나 그 의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양심과 맞닿아 있지 않고 오히려 샤일록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결과는 '의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시하지 않은 것'으로 전회(轉回)한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정부는 저소득층의 주택 마련의 꿈을 현실화하고자 신용 확대 정책을 도입하면서, 대출 장벽을 한껏 낮추어 낮은 신용등급으로도 기존보다 더 많은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채무의 상당 부분을 공기업이 되사는 방식으로 국가가 보증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시장에 보내면서 신용 창출의 수레바퀴를 가속화했다. 날마다 오르는 집값에 사로잡힌 저소득층이나 대출 건수에 목맨 금융 브로커나 유권자들의 표에 도취된 정치인 모두 행복한 나날이었다.

모든 주체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확신하는 '꼬리 리스크(tail risk)'에 올라타서 높은 수익을 누리던 이 시절은 나무 막대를 꼽아놓은 모래성을 허무는 게임에 하나씩 손을 추가하는 작업이었다. 모래를 쌓는 과정이 끝나자 이제는 조금씩 모래를 허물어내야 할 때가 왔다. 마침내 균형점을 지탱하던 모래 한 알이 제거되는 순간,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는 이미 열차가 롤러코스터의 최상단에 멈춘 후였다.

누구도 파국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질주하는 열차에 브레이크가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지스함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누른 군인이 지하 벙커에 대피한 수백명의 민간인의 살상을 현실로 체감하지 못하듯이, 수수료가 높은 채권을 판매하는 금융 브로커는 해당 상품의 구체적인 실현물을 눈 앞에서 확인하지 못한다. 그의 일의 가치는 무형의 보람이 아니라 수익률로 환산되는 돈의 무게를 다는 저울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기대' 가설은 정념의 위력을 은폐한다. 욕망과 결합한 정념은 경계선을 설정하지 않고 확장해 나아가는데, 이때 이성은 정념을 제한하기보다는 그 방향을 정당화하는 일에 주력한다. 인간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판단이 수시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이다. 사회적 이성은 최선의 선택이 모여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비합리성의 파도를 미리 발견하고 경고하는 최후의 망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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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뒤흔든 아편의 역사 - 15~20세기
정양원 지음, 공원국 옮김 / 에코리브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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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편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아편전쟁'을 떠올린다. 여기에는 음험한 속내를 품은 서양의 장사꾼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중국인들을 아편에 중독시켜서 단결력을 와해하고, 도자기를 사들이는데 쓰인 은(銀)을 아편 밀수로 되찾으려는 계략을 꾸민다. 사회가 마비될 정도로 아편중독이 퍼지자 중국 당국은 아편 무역을 금지하지만 결과는 비참하다. 보스턴의 항구에서 바다로 내던져진 차(茶) 상자들은 아메리카의 독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만, 상하이의 항구에서 바다로 내던져진 아편 상자는 서양 제국주의의 포탄세례를 불러온다. '아편'에 담긴 사회적 의미는 약자를 탄압하고 갈취한 역사의 얼룩인 것이다.

선악구도가 명확한 이 통념은 여러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로 아편은 서양 제국주의가 들여온 것이 아니다. 아편은 해양 무역이 활발하고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명대에 동남아시아를 거쳐 들어왔으며, 이미 의약과 미혼(迷魂)의 목적으로 상류층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아편은 집안을 방문한 손님에게 체면치레로 내놓는 귀한 상품이었으며, 담배 문화의 전래와 더불어 하류층으로 서서히 전파되는데 여기에 교제와 담소의 장(場)인 차 문화가 결합되면서, 점차 대중적인 문화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상류층은 다기(茶器)를 수집하던 문화적 취향을 코담뱃대로 이어가면서 대중과 분리된 아편 문화를 고수했다.

둘째로 아편은 서양의 신기한 물건, 곧 양화(洋貨)에 대한 중국인들의 동경을 채워주는 상품이었다. 아편 문화가 강남을 거점으로 서서히 유행하고 있었지만, 대륙의 거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절대 물량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때 인도에서 아편 생산 독점권을 얻어낸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서더 공장들'에서 거대하고 정교한 공정을 동원하여 아편을 공산품처럼 대량 생산해냈고, 여기에 중국인을 포함한 '지방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운송과 소매 판매에 가담하면서 아편 문화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 1834년 개별적인 영국 상인들에게 자유 무역을 허용한 조치는 아편 밀수를 급증시켜 '아편전쟁'의 시발점으로 작용했다.

셋째로 아편이 훌륭한 환금작물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내륙의 농부들이 대거 재배에 나서면서 국내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화폐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넷째로 아편은 제국주의의 침탈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탈을 막는 중국 당국이 군제를 개혁하고 서구에 맞서서 개혁조치를 가능하게 해 준 주요 수입원이었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면 일본이 대륙 침탈을 위한 재정 사업으로서 아편 재배를 활용하면서 민족 감정의 표적으로 지목되어 일시적으로 사그라들었지만, 일본 세력에 맞서는 국민당과 홍군도 역시 대륙을 장악하기 위한 재정 사업으로서 아편 재배를 적극 권장했다.

아편 문화는 강제로 중국 대륙에 이식된 바이러스가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린 습속이었다. 물론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이 아편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적극 활용한 측면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아편을 애국주의의 상징으로서 악마시하는 현대의 관점은 역사를 단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는가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아편의 일대기를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나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와 같은 현대 소비문화를 규정하는 이론 틀을 그대로 가져가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선대의 현실을 후대의 이론에 꿰어맞추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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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해부학 - 살인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는 방법
마이클 스톤 지음, 허형은 옮김 / 다산초당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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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유전자"라는 것은 없고, 흉악 범죄자들의 과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별한 양상의 학대도 없으며, '반드시 악을 양산하는' 원인도 없다. 대신, "위험 인자" 메뉴라는 복잡한 재료가 존재한다. p468

악은 태어나는가, 길러지는가의 물음에 대해 저자는 위와 같이 대답한다. 선천적 악인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저자의 입장은 자신의 책을 수많은 연쇄 살인범의 잔혹하고 끔찍한 살인 행위들로 채우고 있다는 사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왜 도저히 갱생의 가능성이 없는 악마 중의 악마라고 해도 루시퍼의 재림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어렵게만 보이는 이 물음을 하나의 예를 통해 이해해 보도록 하자. 여기 11년 동안 최소 5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여자들을 강간, 고문하고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있다. 그는 사이코패스 진단에서도 최상급인 40점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고, 연쇄 살인범들이 통상적으로 갖추고 있는 청소년기의 3가지 징후(방화, 동물학대, 야뇨증)도 모두 확인되었다.

가석방 없는 3차례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를, 수감 후 15년이 흘러 기자가 교도소로 찾아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혹시 지금은 피해자들의 가족들에게 일말의 미안함이나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지 않느냐고.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에게는 그 여자들이 모두 물건과 다름없었고, 여기서 나가게 되면 다시 똑같은 일을 저지르겠다고.

이쯤되면 이 연쇄 살인마는 갱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악마가 틀림없어 보인다. 여기서 시계를 돌려 그의 부모들의 삶을 살펴보자. 매춘부인 그녀가 임신 중에도 자주 마신 술의 알콜이 태아의 뇌를 손상시켰다면 어떻게 봐야 하는가? 폭력 성향이 강한 그의 아버지가 임신 중인 그녀를 수시로 구타하여 태아의 정서를 망가뜨렸다면 어떻게 봐야 하는가?

혹은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가 유아기에 부모의 부주의나 고의에 의해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면, 그래서 그 아이의 자아가 발현된 후부터는 완전한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보였다면, 이런 경우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을 입으면 인격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철도 노동자 게이지의 사례를 통해 명확히 입증된 바 있다.

무조건적인 처벌은 악을 일상에서 음지로 몰아내는 일시적인 배제의 효과를 갖지만, 어설픈 자비심은 추가 범행의 여지를 넓혀서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한다. 저자가 악의 등급을 분류하고 생물학적인 원인과 법적 제도의 개선을 병행하여 탐구하는 것은 범죄의 우발성과 계획성을 구분하고 초기에 악의 징후를 판별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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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의 입장에 서 있는 이의 공감 가능성을 배제한 채, 지루하고 일방적인 선전물들을 나열하면서 "그래도 우리가 옳지 않느냐"고 항변하던 과거의 노동 관련 다큐물이나 영화들이 떠오른다.

소소하게 슬프고 억울한 일들이 너무도 많아서, 오히려 무덤덤하게 지나치는 일상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들. 남의 일일 때는 쉽사리 외면하지만, 나의 일로 다가왔을 때는 무심할 수 없는 이야기.

'카트'는 인물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재미를 잃지 않아서, 상업 기획의 영리함을 무시하지 않아서, 남들의 일이 당신의 일이라고 '너무' 힘주지 않아서, 그래서 다행이고 고마운 영화다.

극 중 염정아의 아들로 출연한 엑소의 디오가 부른 OST <외침>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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