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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트 라인 - 보이지 않는 균열이 어떻게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가
라구람 G. 라잔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금융 산업 종사자의 기여도를 측정하는 가장 직접적인 척도는 그 직원이 회사에 벌어준 돈이다. 여기서 돈은 일과 가치 모두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p251
폴트 라인(fault line)은 '지진 유발 단층선'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2008년 금융 위기를 둘러싼 많은 분석들과 그보다 더 많은 요인들 중에서 저자는 불건전한 정치적 개입과 국가 간의 무역 불균형 그리고 각국의 금융 제도의 간섭 현상을 핵심 단층으로 꼽는다. 아울러 특정 개인에게 최대한의 이익과 제한적인 손실이라는 매력적인 유혹을 발산하는 금융계의 인센티브 제도가 도처에 흩어져 있던 폴트 라인을 한곳으로 모아 지진을 촉발시키는 방아쇠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의도한 결과'보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비 효과를 불러오는 복잡계로 진화해왔다. 폴트 라인으로 다가가는 지각판의 전진은 충돌과 균열이라는 '의도'를 조금도 내포하고 있지 않지만, 대지의 경계(nomos)를 지키지 않은 그들에게 모이라(moira)는 파국을 선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더구나 그 의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양심과 맞닿아 있지 않고 오히려 샤일록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결과는 '의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시하지 않은 것'으로 전회(轉回)한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정부는 저소득층의 주택 마련의 꿈을 현실화하고자 신용 확대 정책을 도입하면서, 대출 장벽을 한껏 낮추어 낮은 신용등급으로도 기존보다 더 많은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채무의 상당 부분을 공기업이 되사는 방식으로 국가가 보증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시장에 보내면서 신용 창출의 수레바퀴를 가속화했다. 날마다 오르는 집값에 사로잡힌 저소득층이나 대출 건수에 목맨 금융 브로커나 유권자들의 표에 도취된 정치인 모두 행복한 나날이었다.
모든 주체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확신하는 '꼬리 리스크(tail risk)'에 올라타서 높은 수익을 누리던 이 시절은 나무 막대를 꼽아놓은 모래성을 허무는 게임에 하나씩 손을 추가하는 작업이었다. 모래를 쌓는 과정이 끝나자 이제는 조금씩 모래를 허물어내야 할 때가 왔다. 마침내 균형점을 지탱하던 모래 한 알이 제거되는 순간,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는 이미 열차가 롤러코스터의 최상단에 멈춘 후였다.
누구도 파국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질주하는 열차에 브레이크가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지스함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누른 군인이 지하 벙커에 대피한 수백명의 민간인의 살상을 현실로 체감하지 못하듯이, 수수료가 높은 채권을 판매하는 금융 브로커는 해당 상품의 구체적인 실현물을 눈 앞에서 확인하지 못한다. 그의 일의 가치는 무형의 보람이 아니라 수익률로 환산되는 돈의 무게를 다는 저울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기대' 가설은 정념의 위력을 은폐한다. 욕망과 결합한 정념은 경계선을 설정하지 않고 확장해 나아가는데, 이때 이성은 정념을 제한하기보다는 그 방향을 정당화하는 일에 주력한다. 인간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판단이 수시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이다. 사회적 이성은 최선의 선택이 모여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비합리성의 파도를 미리 발견하고 경고하는 최후의 망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