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의 탄생 - 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
오카다 데쓰 지음, 정순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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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부는 1869년(메이지 2년)에 쓰키치 우마회사를 설립해 쇠고기를 판매하고 보급하는 데에 발벗고 나섰고, 궁중에서는 젖소를 몇 마리 기르고 천황이 우유를 마시면서 우유의 효용을 강조했다."(p.64) 전통적으로 육식을 금지하던 일본은, 정부 주도하에 육식 장려 사업을 철저히 계획하고 시행했다. 메이지 정부는 "육식을 방해하는 자는 그 마을의 관리로서 자격이 없다고 규정"하기까지 했다.(p.65)

일본에서도 "전통적인 쌀밥에 집착하는 쌀밥 우위론"이 육식 장려론에 맞서는 등 전통과 서구의 갈등이 존재했지만, 최종 귀결은 "화혼양재 사상에 근거한 절충주의"였다. 그리고 이때의 절충이 지향하는 방향은 명백히 '서구적인 것'이었다. 신체 조건을 서구화하기 위해 도입한 육식, 그리고 밥과 고기를 절충하여 양식의 스타로 등장한 '돈가스의 탄생'은 사회 개조를 불사한 그들의 전방위적인 혁신이 "근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p.86)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경과를 보고받은) 국왕(철종)은

대국(중국)이 저렇게 곤욕을 당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무사하겠는가?

라고 재차 좀더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방책을 강구하라고 절실히 호소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영의정) 조두순은 왕의 위기의식을 둔화시키기나 하려는 듯, '중국이 곤욕을 당하는 것은 천지의 운수이다'고 더더욱 느긋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국왕 스스로가 "먼저 수식(修餝)하면 백례(百隷)가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군주가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 등 도덕적 품성의 함양 노력으로 귀착시켜 버리고 있다.
- <시간과의 경쟁>, 민두기, 연세대학교 출판부, pp.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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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카메라의 눈 - 영화와 현대 소설에 나타난 영상의식
앨런 스피겔 지음, 박유희.김종수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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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는 "나는 단지 본다는 행위로부터 거의 모든 관능을 만족시키는 감각을 이끌어낸다."(p.36)고 말한다. 저자가 소설의 경계를 나누는 기준을 플로베르로 삼은 이유는 그로부터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와 '어떻게 그것이 드러나는가'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기 때문"(p.52)이다. 과거의 리얼리티가 정신이 발견하고 이해하는 바를 구성한 것이라면, 플로베르의 리얼리티는 냉정하고 정확하게 '시각화'하는 것이다.

플로베르가 물리학자의 방법론을 차용한 것은 그가 "냉정하고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 사회를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불안정한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p.58) 세계의 급격한 변화를 고정된 정신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되자, 흐르는 세계는 언어 안에서 개별화, 분절화된다. 졸라에 오면 "시각화의 강조점이 대상 자체의 고유한 자질에서 관찰자의 수용 기관에 의해 결정되는 자질-가령, 색깔은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다. 색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이다-로 옮겨간다."(p.105)

로렌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로렌스에게 인간의 심리는 "시간과 공간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가치"이며, 따라서 그의 시각화는 "거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대상 사이의 일체감에 의해 결정된다."(p.110-1) 버지니아 울프에 오면 "대상의 비물질화가 실질적으로 완성"된다. "로렌스가 대상의 내면에 도달하기 위해 외부 세계로 나아갔다면, 울프는 자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외부에서 물러났다."(p.114)

이것은 불확실한 세계를 가급적 많이 보고 파악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에서 점점 대상과 공간을 밀도있게 보려는 태도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조이스는 "보다 적은 대상을 새롭고 압축적인 공간 안에서 집중적으로 보고자 한다."(p.144) 조이스를 비롯한 콘래드, 포크너, 나보코프 같은 작가들은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지만, 대상에서 눈을 떼지 않음으로써 주체의 '눈'에 근접한다. "관찰자는 시각적 경험 앞에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지만, 이 경험은 바로 '그'의 시각적 경험인 것이다."(p.149)

카메라의 눈을 닮은 이 시야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 주체의 소유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삶에 영향을 줄 게 없다. 생각에도 감정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대상은 단지 보일 뿐이다. ... 따라서 완전하고 영속적인 인간관계의 불가능성, 그리고 '영혼'의 어쩔 수 없는 고독은 조이스의 핵심적 테마"가 된다. "관찰자가 보는 방식은 바로 자신의 소외를 재는 척도"가 된다.(p.150) 세계는 더 이상 필연성의 영역이 아니며, "우연성과 마주친 리얼리티의 여타 속성들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만다. ... '우발성'이 궁극적으로 리얼리티가 된다."(p.221)

필연성이 상실된 현실에 처한 작가들은 "덧없이 사라져버릴 시간성 속의 존재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소멸될 존재를 초월하는 문학을 실천"(p.257)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거듭한다. 이것은 기계화된 환경이 야기하는 상실감, 즉 "무생물의 세계와 융합하여 인간 영혼이 침식되는 다양한 상태"를 해부하고, "현대 도시의 발흥이 신성한 의미체로 간주되어 온 인간 존엄성을 점점 약화시키는"(p.295) 현상을 다각도로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이처럼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상태를 재구성하는 소설의 시각화 기법은 카메라나 영화로부터 내려받은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그러나 점차 그것이 객관적인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프레임의 구성, 편집, 해석이라는 사실을 체득하게 된 시대 상황의 반영이다. 이러한 기법은 형식의 혁신과 파괴가 내용을 끌고 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인과 관계에 따른 설명과 이해로 걸러낼 수 없다. 정신이 품은 모순과 비약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새로운 기법들이 함의하는 바는 '낯섦 그 자체'이다. 이제 해석은 무한대에 이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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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스인가? - 호메로스에서 플라톤까지 그리스고전읽기
자클린 드 로미이 지음, 이명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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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의 그리스 사랑은 H.D.F. 키토 못지않다. 저자에게 그리스는 역사의 시작점이며, 통찰과 은유의 황금시대였다. 그리스는 다른 민족을 힘으로 징벌하지 않았고 종교와 사상, 민족 등 모든 '다름'에 대한 관용이 넘치는 무대였으며, 시민들 사이의 평등을 통해 자유를 구현한 시대였다. 구체적 사실로부터 추상화를 끌어낸 이상적인 전형(Idea)의 집결지였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다. 저자의 감탄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원형질에 대한 찬미이다. 저자의 심미안은 그리스 문화 전반을 능란하게 직조하여 마침내 구축한 조각상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헌사가 아니다. 타당한 분석과 근거는 제시되지만 그것들은 '사후적'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발견된다. 조감도의 이데아는 가상 현실이 아니며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이것은 광활한 공간에 부분들이 하나 둘씩 솟아올라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인과(因果)의 그물망으로 맺어진 전체로서의 관계가 법칙성을 내재한 자유에서 비롯했다는 사고이다. 그곳은 페리클레스가 장례식 추도사에서 "헬라스의 학교"라고 지칭한 타인의 모범이 되는 세계이지, 내전의 야수성을 몸에 붙인 제국, 곧 현실정치(realpolitik) 속의 아테나이가 아니었다.

다프네의 아름다움에 열정적으로 도취되어 일방적인 구애를 펼친 나머지, 자신의 애정을 상대방의 공포로 변질시켰던 아폴론의 사랑은 월계수의 비극으로 끝났다. 저자의 그리스 찬미는 정반대로 다프네가 깨달은 아폴론의 신적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갇힌 열정이 제 발로 합일의 대상을 찾아나설 수 없는 반쪽의 펜던트와 같다.






<일리아스>에서 각 개인의 세세한 차이가 제거되고 인간 일반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이나 반응이 드러나는 것은 단지 인물들의 성격을 단순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사실 인물들 모두가 공통으로 가진 조건, 즉 `죽기 마련인` 존재라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함으로써 영웅은 위대한 존재인 동시에 유한한 존재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43)

헤로도토스는 참주 정치가 끝난 뒤의 아테네 체제를 규정하기 위해 `발언의 평등`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했다. "누가 발언을 원하는가?"라는 저 유명한 물음에 아테네의 모든 자유가 집약되어 있다고 이야기한 후 에우리피데스는 표현을 달리해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보다 더 나은 평등을 상상할 수 있을까?" 133)

소크라테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는 종교에 관한 일반적인 관용을 불허한 징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와 도덕의 차원에서 이례적이었던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에 패하고 난 직후였다.
아테네에서 관용은 종교적 영역에서 추구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관용은 다른 영역에서 추구되어 나타났는데, 바로 인간관계의 영역이다. 144-5)

헤로도토스는 지난 사건들을 서로 잇는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건들을 망각에서 구하려 했다.
첫 번째 목적은 기억이고, 그 다음은 과거에 속한 사실들을 연결하는 데 있다. 거기서 투키디데스로 옮겨 가면 엄청난 비약을 발견한다. 기억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과거를 이해할뿐만 아니라 되풀이되어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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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 유희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3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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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방편으로서의 헤겔의 도입





일단 소명을 받아들이면 그로써 그 사람은 선물이나 명령만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 같은 것까지도 떠맡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동료들 가운데서 뽑혀 장교로 승진한 병사가 자기 동료들에 대해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것이 클수록 그만큼 더 승진할 자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76)

자네가 정열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이 아니라 영혼과 외부 세계의 마찰일 뿐이야. 격정이 우세해지면 욕구하고 추구하는 힘에 플러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뿔뿔이 흩어진 잘못된 목표를 향해 있기 때문에 긴장과 숨막히는 분위기가 형성될 뿐이지. 욕망의 추진력을 극도로 집중시켜 중심으로, 참된 존재로, 완전으로 향하도록 해놓은 사람은 격정적인 사람보다 평온해 보이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에게서 좀처럼 열정의 불꽃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네. 106)

"내 생각에 역사를 고찰하는 사람은 질서를 가져오는 정신과 방법의 힘을 철썩같이 믿어야 하지만, 그것을 넘어 역사적 사건의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나 현실, 일회성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해요.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장난도 무책임한 유희도 아니오. 그러므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어떤 불가능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얻고자 애쓰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전제가 되지. 역사 연구는 이를테면 혼돈에 몸을 내맡기면서도 질서와 의미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일이라오. 참으로 진지하면서도 어쩌면 비극적이기도 한 과제지." 221)

`각성`에서는 진리와 인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실과 그 현실의 체험, 그것을 살아내는 일이 문제였다. 각성했을 때 사람들은 사안의 핵심이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상태에 대한 자기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실현하거나 감수할 뿐이다. 사람들은 그때 어떤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을 하게 되며,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권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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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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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短想)


누군가는 들려주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보여주고 싶어한다. 들려주는 사람은 "이야기가 이러저러하다"고 하고, 보여주는 사람은 "여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는'는 갖가지 생각의 가지를 뻗어내고, '여기 있는 이야기'는 제각기의 나무가 되어 자란다. 들려주는 이는 더 들려줌으로써 듣는 이가 더 깊이 듣길 원하고, 보여주는 이는 덜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가 더 많이 보길 원한다.


소설은 입 안에서 태어날때부터 이미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랄 수 없는 양철북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혀끝과 펜촉의 감촉, 손끝과 자판의 접점은 결코 열리지 않는 방문 하나를 두고 마주 선 그리움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이야기 꾸러미를 찾아 헤매고, 수집해도, 단 한 명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대설(大說)이 아니라 소설(小說)로 그치고 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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