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카메라의 눈 - 영화와 현대 소설에 나타난 영상의식
앨런 스피겔 지음, 박유희.김종수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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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는 "나는 단지 본다는 행위로부터 거의 모든 관능을 만족시키는 감각을 이끌어낸다."(p.36)고 말한다. 저자가 소설의 경계를 나누는 기준을 플로베르로 삼은 이유는 그로부터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와 '어떻게 그것이 드러나는가'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기 때문"(p.52)이다. 과거의 리얼리티가 정신이 발견하고 이해하는 바를 구성한 것이라면, 플로베르의 리얼리티는 냉정하고 정확하게 '시각화'하는 것이다.

플로베르가 물리학자의 방법론을 차용한 것은 그가 "냉정하고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 사회를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불안정한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p.58) 세계의 급격한 변화를 고정된 정신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되자, 흐르는 세계는 언어 안에서 개별화, 분절화된다. 졸라에 오면 "시각화의 강조점이 대상 자체의 고유한 자질에서 관찰자의 수용 기관에 의해 결정되는 자질-가령, 색깔은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다. 색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이다-로 옮겨간다."(p.105)

로렌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로렌스에게 인간의 심리는 "시간과 공간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가치"이며, 따라서 그의 시각화는 "거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대상 사이의 일체감에 의해 결정된다."(p.110-1) 버지니아 울프에 오면 "대상의 비물질화가 실질적으로 완성"된다. "로렌스가 대상의 내면에 도달하기 위해 외부 세계로 나아갔다면, 울프는 자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외부에서 물러났다."(p.114)

이것은 불확실한 세계를 가급적 많이 보고 파악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에서 점점 대상과 공간을 밀도있게 보려는 태도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조이스는 "보다 적은 대상을 새롭고 압축적인 공간 안에서 집중적으로 보고자 한다."(p.144) 조이스를 비롯한 콘래드, 포크너, 나보코프 같은 작가들은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지만, 대상에서 눈을 떼지 않음으로써 주체의 '눈'에 근접한다. "관찰자는 시각적 경험 앞에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지만, 이 경험은 바로 '그'의 시각적 경험인 것이다."(p.149)

카메라의 눈을 닮은 이 시야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 주체의 소유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삶에 영향을 줄 게 없다. 생각에도 감정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대상은 단지 보일 뿐이다. ... 따라서 완전하고 영속적인 인간관계의 불가능성, 그리고 '영혼'의 어쩔 수 없는 고독은 조이스의 핵심적 테마"가 된다. "관찰자가 보는 방식은 바로 자신의 소외를 재는 척도"가 된다.(p.150) 세계는 더 이상 필연성의 영역이 아니며, "우연성과 마주친 리얼리티의 여타 속성들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만다. ... '우발성'이 궁극적으로 리얼리티가 된다."(p.221)

필연성이 상실된 현실에 처한 작가들은 "덧없이 사라져버릴 시간성 속의 존재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소멸될 존재를 초월하는 문학을 실천"(p.257)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거듭한다. 이것은 기계화된 환경이 야기하는 상실감, 즉 "무생물의 세계와 융합하여 인간 영혼이 침식되는 다양한 상태"를 해부하고, "현대 도시의 발흥이 신성한 의미체로 간주되어 온 인간 존엄성을 점점 약화시키는"(p.295) 현상을 다각도로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이처럼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상태를 재구성하는 소설의 시각화 기법은 카메라나 영화로부터 내려받은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그러나 점차 그것이 객관적인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프레임의 구성, 편집, 해석이라는 사실을 체득하게 된 시대 상황의 반영이다. 이러한 기법은 형식의 혁신과 파괴가 내용을 끌고 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인과 관계에 따른 설명과 이해로 걸러낼 수 없다. 정신이 품은 모순과 비약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새로운 기법들이 함의하는 바는 '낯섦 그 자체'이다. 이제 해석은 무한대에 이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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