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특강
제프리 잉햄 지음, 홍기빈 옮김 / 삼천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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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이전에 한 나라의 부富란 "대개 자국의 군사력이라는 '눈에 보이는 손'이 가져오는 결과로 여겨졌다. 물론 나라마다 기후, 토지의 비옥도, 천연자원 같은 부존자원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이득은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경제적 권력이란 군사적 권력에서 비롯되는 결과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이 되면, 천연자원이 보잘 것 없는 네덜란드가 중상주의에 가장 충실한 에스파냐를 제치고 선두국가의 자리에 올라서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에 스미스는 국가의 부가 "상업에 기초한 경제 발전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이제 부는 "무수한 개인들이 스스로 자기 이익을 쫓아 움직이는 과정에서 그 결과물로 창출되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경제에서 부의 성장과 분배가 어떻게 벌어지는가 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두고 완전히 다른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17-8)


상업 사회의 세 가지 생산요소인 토지, 자본, 노동의 분화는 "지주, 자본가, 노동자라는 사회를 구성하는 '3대 신분'의 토대를 만들어 냈다. 3대 신분이 서로 맺고 있는 상호 의존관계의 근원은 지대, 이윤, 임금 사이에 나타나는 교환 관계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세 가지는 생산, 소득, 지출이라는 '순환적 흐름' 안에 엮여 있다. 자본으로 쓰이는 자금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지급되고, 노동자들은 받은 임금을 지출하여 생산물을 소비하며, 다시 이것이 자본가의 이윤을 낳음으로써 더 많은 자본이 생겨나게 된다."(19-20) 중상주의의 교리에 따르면 "국가의 권력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상업을 추구하기보다 귀금속 화폐를 축적해야 한다." 여기에 반대한 스미스는 "자신의 분석 체계 안에서 화폐를 2차적이고 수동적인 위치로 끌어내려 버렸다." 스미스가 보기에 "화폐란 시장 교환을 촉진하기 위한 매개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22)


스미스는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을 구별한다. "자연가격은 재화의 생산에 들어간 여러 비용의 합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시장가격은 특정 시점에서 나타나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나 희소성에 따라 결정된다. 이 두 가격은 단기적으로는 서로 불일치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경쟁을 벌이는 시장에서는 장기적으로 두 가격이 서로 수렴하게 되어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지대와 임금, 이윤은 부의 총량을 창출하는 데 저마다 기여한 가치와 동일한 크기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은 효율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이기도 하다."(25-6)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 목적은 인간의 참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사용가치'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란 오로지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을 생산하여 그것으로 화폐적 이윤을 실현하는 일에만 매달리게 하는 경제체제이다."(28)


마르크스는 이윤, 지대, 임금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자연적 현상이 아닌 사회적인 범주로서, 오로지 권력과 강압에 기초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스미스가 주장한 대로 "모든 가치의 궁극적인 원천이 노동에 있다면, 자본 또한 그것을 만들어 내는 데 투하된 노동으로 구성될 것이다. 자본은 겉으로는 물질적 생산수단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 실체는 남에게 양도되고 전유당한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이란 단지 물질적 생산요소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본은 사실상 잉여가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잉여가치란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생산관계가 갖는 불평등성이 낳은 결과에 다름 아니다."(35-6)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화폐-상품-화폐1(M-C-M1)의 순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함으로써 다른 생산양식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확인시켜 주었다."(42)


베버는 자본주의란 "순이윤을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관료적 기업이 이끄는 산업 생산에 인간의 필요와 욕구 충족을 맡기는 경제라고 정의했다." 공동체와 가정경제에서는 경제활동이 "정서적 유대, 가족적인 의무, 전통적 사회규범과 얽혀 있기에 이윤을 추구하고 계산하는 엄격한 합리성이 교란되기 쉽다. 따라서 영리기업의 형태가 일반화되어 노동과 생산 활동을 가정경제와 공동체 내부 경제로부터 분리시킨다면, 이러한 자의적이고 실질적인 고려 사항들을 합리적 계산에서 따로 끄집어내어 분리할 수 있게 된다."(44-5) 베버는 "전통적 엘리트의 쾌락주의와는 전혀 다른 청교도들의 금욕주의는 이윤의 재투자와 기업의 확장을 부추기면서, 이런 실천이야말로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선물을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은 심지어 '소명'(calling)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52)


베버가 보기에 "국가와 자본가계급 사이의 '역사적 동맹'은 아주 느슨한 것이기에 자본가계급은 국가의 내부와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작동될 수 있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는 애초부터 초국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어서 어느 한 국가나 국가 간 동맹의 통제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 자본가들은 자기들 행동의 결과가 어떻든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이윤을 추구하는 데서 자유를 제한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베버는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국가가 제공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국민국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세계 제국이 들어서면 자본주의도 존속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상당히 심오하면서도 놀라운 혜안을 덧붙이고 있다. 즉 자본주의는 국가와 자본 누구도 상대편을 복속시키지 않는 글로벌 경제체제로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56)


"마르크스는 이윤 저하에 따른 자본주의 자체의 붕괴라는 파국적인 전망을 제시했지만, 이와 달리 슘페터는 '파괴적' 국면에서 나타나는 이윤 저하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을 의미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혁신 기업가들이 끊임없이 채산성 높은 혁신을 창조적으로 모색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64-5) 슘페터는 이 과정에서 신용화폐를 발행하는 은행 시스템의 중요성을 맨 처음 강조한 학자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은행은 다시 돈을 갚겠다는 약속 말고는 사실상 아무런 기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허공으로부터 신용화폐를 생산한다."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은 화폐자본을 무한정 팽창시키는 능력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화폐의 팽창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역동성의 근원이 되며, 동시에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공황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 논점은 슘페터의 제자 하이먼 민스키가 '금융 불안정성 가설'로 더욱 발전시키게 된다."(66-7)


케인스가 보기에 "현대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활동이 최적화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만성화되면서 이를 회복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붕괴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화폐가 '불안감'을 달래 주는 방어벽으로 쓰이게 될지, 아니면 생산에 투자되거나 소비로 지출될지가 '야수적 본능'(animal spirits), 즉 낙관과 자신감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다."(74-5) 자본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야기하는 "유효수요의 부족이란 완전고용을 유지할 만큼 구매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케인스는 이러한 난관은 자본이든 노동이든 개인 행위자들이 쉽사리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가 "이따금씩 정부의 '보이는 손'으로부터 신중하게 계획된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78)


모든 형태의 재산과 재화, 서비스의 가격은 "시간에 따라 변동하는데, 이는 불확실성을 낳고 다시 가격 변동에서 차액을 기대하여 벌어지는 순수한 금융적 거래, 즉 M-M1을 내포하는 투기적 시장을 만들어 낸다. 이렇듯 이중적 성격을 지닌 자본은 생산의 원천이자 투기적 금융자산이기도 하다." 각종 자산을 유가증권 형태로 거래하는 "금융자산 시장은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이 남지 않는 활동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본주의에 탄력성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본질적 원천이 된다. 하지만 케인스가 경고한 것처럼, 자본이 생산이나 소비 또는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대대적으로 빠져나와 화폐의 형태로 축장될 경우엔 경제 전체가 급속히 힘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불확실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벌어지는 순수한 투기 행위는 자산 시장에 일상적으로 거품과 불안정성을 가져와 재화나 서비스 생산에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87-8)


# 자본주의의 기초 시장들

1. 화폐와 화폐자본 시장 : 금융 자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조정되고 가격(이자)이 결정된다.

2. 노동시장 : 임금 수준이 결정된다.

3. 생산 관련 시장 : 생산재(생산수단) 시장과 최종 소비재 시장

4. 금융자산 시장 : 모든 형태의 재산 소유권은 시장에서 판매 가능한 자산asset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의 역동성(과 불안정성)을 발생시키는 화폐의 주요 기능은 무엇일까? "화폐는 어떤 나라든 자본주의 경제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을 마련해 준다. 첫째, 대규모 몰인격적 시장에서 가격 매커니즘을 통해 수요와 공급이 조정될 수 있도록 안정된 가치 척도를 제공한다. 화폐가 없는 물물교환은 교환을 양자 간의 거래로만 제한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되면 거래되는 재화의 가치가 구체적인 거래마다 달라지게 마련이므로 교환 영역의 범위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확대될 수 없다. 둘째, 장기적인 대부 계약은 자본주의적 경제 관계의 기본 골간이거니와, 이는 가치가 안정된 화폐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대부 행위가 광범위하게 벌어져야 하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창출하기 위해서는 대부자들 사이에 자기들이 받을 이자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102)


베버는 자본주의의 발흥에서 "국가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기념비적 동맹'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니와, 자본주의 신용화폐야말로 그 동맹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109) 자본주의의 특징은 "개인들 사이에 계약으로 맺어지는 채권-채무자 관계(예컨대 은행 대출이나 신용카드 계약)를 화폐화시키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항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은행 시스템은 개인들의 채무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불 수단인 국가가 발행한 화폐로 바꾸어 놓는다. 국가가 발행한 화폐는 세금 납부의 의무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 쓸 수 있는 화폐이다. 이렇게 사적인 부채를 공적인 화폐로 바꾸어 놓는 것은 은행 시스템과 국가의 복잡한 연계, 국가와 채권자(국채 소유자), 채무자들(납세자) 사이의 복잡한 연계를 통해서 달성된다. 그리고 이 관계들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중앙은행이다."(115)


#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 시장의 특징

1. 민간 신용과 은행 시스템의 '화폐 승수' : 청산되지 않은 채무의 존재가 화폐 공급을 가능하게 한다.

2. 신용화폐의 궁극적 기초가 되는 국가 채무 : 현실적 권력을 가진 주권 국가가 채무 이행을 약속한다.

3. 중앙은행의 중추적 역할 : 불변의 가치 척도가 존재한다는 허구를 지탱한다. 즉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실질 이자율을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4. 국가, 화폐시장, 납세자의 삼각관계 : 화폐와 생산, 즉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여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위험을 회피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러 집단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투쟁을 벌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가격은 이러한 경제적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의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145) 시장의 역동성은 불평등한 행위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결과로서, 완전경쟁 모델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이 벌어진 이후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가상의 '완벽한' 상태"에 불과하다.(1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학파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자본주의의 우위를 주장한다.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논지에 따르면, 우리는 "생산과 소비를 조직하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질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경제생활이 복잡해지고 규모가 늘어나게 되면 이러한 인지적 문제가 더욱 날카롭게 대두되며, 여기에 조화를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시장에서 지속적인 흥정으로 얻게 되는 성찰과 적응의 조정뿐이라는 것이다."(149-50)


20세기에 들어서자 "대량 소비 시장은 수요를 좀 더 자극하려는 목적에서 질적으로나 상징적인 위신에 있어서나 더욱더 세밀하게 분화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 "베블런이 '티 내기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고 부른 지위 경쟁 과정이 오늘날에는 더욱 광범위한 '사치의 민주화'로 전환되었다. 이제 가계 지출 가운데 '필수적이지 않은' 재화들에 쓰이는 비율이 더욱더 늘어나기 시작했다."(158-9) 대중들이 사치재를 구매하는 돈이 은행 시스템에서 융통되면서, "총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지출과 부채뿐 아니라 이를 보조하는 중요한 부속물로써 개인의 '적자 금융'이 등장하게 되었다." 경쟁적인 적자 금융은 리스크가 높은 대출의 비중을 늘렸고, 이에 따라 개인 파산과 지급불능 사태도 해마다 급속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현대자본주의에서 경제 전체가 불안정성에 빠져들게 된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160-1)


기업은 자본 권력이 생산수단과 노동 통제를 직접 수행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거래 비용' 이론과는 달리 이 관료적 기업은 시장의 대안이 되기는커녕 경제적 합리성을 달성하기 위해 보조적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가 된다."(191) 코스의 정리에서 보듯이, 현대자본주의 기업의 구조적 다양성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는 기업 간부들과 경영진이 단순히 다양한 경제 조직의 비용을 계산하여 비교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조직 형태들을 실행에 옮길 권력이 있는가가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189) 경쟁 악화에 따른 이윤율 저하와 과잉생산 그리고 일련의 디플레이션이라는 악순환을 겪은 대공황(Great Depression, 1873-1896)의 장기 침체 이후로, 현대자본주의의 대규모 주식회사들은 "내부적으로는 소유자들한테서 어느 정도 분리된 위계적 관료제의 경영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외부적으로는 과점체 또는 독점체로서 조직된 모습이 되었다."(198) 


경제와 관련한 국가의 역할을 다루는 논의에서 "신자유주의의 '공공재' 이론은 국가 활동의 수준과 범위가 경제적 비용-편익 분석으로 보면 최적의 수준으로 고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사실상 '한계효용성'에 따라 결정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가 경제에 뛰어드는 것은 그에 들어가는 비용과 거기서 얻게 되는 편익이 균형을 이루는 '한계 지점'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수많은 주장과 요구가 엇갈리며 경쟁하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비용과 편익이 균형을 이루는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아울러 국가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비용-편익 분석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교육, 보건, 사회복지는 단지 '인적 자본'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영향뿐 아니라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의 욕망이다."(270-1)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필연적인 함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경제적 자유주의, 정치적 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요소가 제각각 별개이며, 이 세 가지가 역사적으로 우연한 기회에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정에 대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유럽에서 개인의 자유는 자본주의적인 소유권과 계약 자유의 기초였지만, 이는 결코 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 정치적 대표는 유산자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으며 다수의 대중은 정치적 대표권도 사유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대중민주주의를 따랐다가는 노동자들이 국가를 포획해 버리고 마르크스가 믿었던 것처럼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20세기 중반에 실재했던 파시즘 체제는, "실로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라는 겉모습 말고도 다른 형태의 대중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양립할 수 있음을 암시해 준다."(280-1)


"국가와 경제라는 두 영역 사이에 자율성이 심각하게 침식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곧 자유민주주의 대신에 권위주의적 국가 또는 부정 선거가 판치는 '명목적' 민주주의가 들어설 수 있게 된다는 신호"이다.(303)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출입 금지의 '붉은 테이프'가 높은 비용을 낳는다고 끊임없이 불평하지만, 시장 교환을 규제하는 기초적인 규칙들이 없다면 자신들의 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든 형태의 평화적 시장 교환은 모종의 권위체(흔히 국가)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이 권위체가 폭력을 예방하고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전반적으로 모든 소유권이 명확하게 확립되고 수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장 교환에 갖가지 위험이 따르게 된다. 시장 교환이 존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여러 가격을 확립하고 계산하는 데 필수적인 안정된 통화 시스템이지만 이는 시장이 생산할 수 없는 것이다."(181-2) 


"갖가지 자본주의적 활동에서 이윤을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기회, 바꿔 말하면 예상이 가능한 이윤은 모두 투기적 금융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 순수한 투기 활동은 상품 생산에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더해 주지 못하지만, 자본 및 금융시장에 화폐를 공급해 줌으로써 모든 자산에 유동성과 대체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다. 또 유동성과 대체 가능성은 자본주의에 탄력성을 부여하여 자본주의에 역동성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자본은 화폐로 모습을 바꿀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무엇이든 어디서든 이윤의 전망이 더 커 보이는 쪽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261)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로서 '금융화'가 출현하고 있다는 논의가 있지만,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본주의적 활동의 길잡이가 되는 원리가 '유동성'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서 나온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는 "모든 자산들을 줄줄이 화폐로 바꾸었다가 다시 자산으로 되돌렸다가 하는 활동을 반복"하고 있다.(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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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 세계체제론과 리오리엔트를 재검토한다
에릭 밀란츠 지음, 김병순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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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기원을 중세 서유럽에서 찾는 관점들

1. 정통 마르크스주의

2. 브레너주의(네오-마르크스주의)

3. 근대화 이론

4. 세계-체제론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흔히 자본주의의 출현을 분석하는 이론적 관점으로 쓰였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여러 문제를 수반한다. 첫째, 이 관점은 역사의 발전 과정을 결정론적이고 '단계적'으로 본다. 이를테면 부르주아 혁명 뒤에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결국 변증법적 지양으로 끝난다. 둘째, 여기서는 사회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셋째, 유럽 중심의 용어, 예를 들어 아시아적 생산양식 같은 것을 써서 역사를 고정화한다. 넷째,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그리는 착취 구조는 특정한 분석 단위―대개의 경우 국민국가―안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라는 두 계급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엄혹한 계급투쟁으로서 그 틀을 짠다. 그리고 끝으로 중요한 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시장을 생산 영역 외부에 있는 부차적 지위로 격하시키는 대신 생산수단을 '먼저 분석할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11)


브레너주의 역시 "주어진 영토 단위(국민국가) 안에서 피착취계급(농민)과 착취계급(귀족) 사이의 계급투쟁 및 생산양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계급투쟁과 생산양식에 대한 이런 과도한 집착은 무역 유통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도시 중심의 생산보다는 특히 농업 생산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다룬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또 다른 문제는 귀족층을 이른바 “비생산적 소비”에 빠져 “경제 외적인 강제를 통한 잉여 착취”에 몰두하는 계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바라본다."(12-3) 브레너는 "봉건시대의 착취자를 모두 영주와 동일시함으로써 도시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브레너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설명'에서 카츠Katz 같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교역과 도시의 중요성을 검토하지 않음으로써 도시를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로 축소시킨다."(16)


근대화 이론은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하는 '근대적' (즉 정신적 또는 종교적) 가치관의 등장 또는 유럽이 이후 수세기 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지배할 수밖에 없게 만든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탄생했다."(17) 근대화 이론은 "동업조합(길드)의 하부구조를 간과할 뿐 아니라 이따금 중세 전반을 '산업혁명 이전의 음울하고 무기력한 망각의 구렁으로 밀어 넣으면서' 자유방임주의 경제가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시기로 단순하게 처리하고 끝맺는다."(20) 세계-체제론은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세계-경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 국제 분업과 국가 간 연결 체계를 만들어낸 정복 및 식민지 건설을 통해 지역들이 서로 합병된 것과 큰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세계-체제론은 "생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과 시장에서의 상품의 순환을 중요하게 여기는 애덤 스미스주의의 관점을 통합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등장을 설명하려고 한다."(22)


동아시아의 상황을 살펴보면, "송나라 시대에는 해운과 선박 임대 사업을 함께 하는 합작회사가 '매우 일반화된' 상황이었고 코멘다commenda(자본을 대는 상인과 해상 운송을 하는 상인이 따로 있으며 이익은 공유하는 제도)와 소키에타스 마리스societas maris(자본가와 해상 운송을 하는 상인이 공동으로 출자하는 제도)의 초기 형태도 운영되고 있었다." 송나라 시대에 "국가와 상인 단체들과의 관계는 중국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더 긴밀했다."(59) 북방의 위협에 밀려 남하한 송나라는 국가 재정을 늘리기 위해 교역을 활성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송 정부가 "교역을 중시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국가가 운하를 건설하고 그곳의 안전 운행을 보장함으로써) 상인들을 보호하고 상거래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역은 남송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요소였기 때문에 국가는 여러 경제 활동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61-2)


"몽골의 송나라 정복이 중국이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유일한 원인일 수는 없지만 중요한 변수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서양 상인들은 "몽골의 평화 시대 덕분에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봤다." 몽골의 평화 시대 동안 "중앙아시아는 보기 드문 정치 통합의 시대가 유지되었고 그 결과 유럽의 무역상들이 물밀듯이 그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유럽의 도시 국가들은 상인 보호와 상품 거래 비용 감소라는 이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항해술이나 화약 기술과 같은 많은 지식이 점차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전되었다." 무엇보다도 몽골이 "두 차례에 걸쳐 비잔틴 제국이 붕괴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한 번은 1240년대 셀주크 왕조의 침략을 막아낸 것이고 다른 한 번은 1402년 오스만 제국을 패퇴시킨 것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중국을 수탈하여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들과 교환할 수 있는 엄청난 잉여"를 창출했고, 이 교역에서 발생한 많은 부분이 중국 밖으로 빠져나갔다.(66-8)


15세기 초 감행된 정화 원정은 "중화 세계의 주변에 살고 있는 '야만족'들을 조공 무역 체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조공무역 체제는 국부의 "심각한 유출을 초래했다. 명나라는 값어치 없는 공물을 받는 대가로 엄청난 양의 화폐를 하사해야 했다. 중국 황실이 외국인들이 공물이라거나 중국의 속국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바치는, 가치도 없는 물품을 받고 느끼는 만족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값비싼 명예였다."(70-1) 명나라와 청나라(1644-1912)에 걸쳐 "중국 상인들은 교역을 위해 해외로 나갈 수 없었다. 해외에서는 국가가 상인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바라는 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76) 아부-루고드의 지적처럼 "중국 상인들은 유럽 상인들과 달리 국가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없"었고, 따라서 "고도로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시행할 수 없었다."(79)


"또한 중국이 다른 나라들을 사회경제적으로 종속시켜 식민지로 만들고 수탈하는 전략을 치밀하게 전개하고 추구하며 실행할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가 자원을 고갈시키고 중국을 지속적으로 거대한 파멸의 대상으로 만든 끊임없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군사 활동은 '정복보다는 방어 중심'이어야 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은―대개는 변경 지역이었지만 때로는 중국 안에서도 일어났다―유럽에서는 작동하지 않은 두 가지 중요한 변수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농민 반란과 변경 주변에 사는 유목민들이 일으킨 파괴와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 정부는 시장 경제를 확고히 지원했지만, '시장 조작을 통한 부의 축적'은 억제했다.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더욱 중요했던 중국 정부의 관료들이 "시장 거래의 원칙은 지원하면서 시장의 독점 세력으로부터 구매자를 보호하려고 애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84-6)


이와 달리 "유럽에서 귀족들의 정치권력을 제한한 것은 중국의 지주 귀족들과 비교할 때 그들의 상대적 빈곤이었다. 그들이 돈을 빌리거나 금융업자에게 기대는 것은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과 달리 군사력으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주로서 현금이 필요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일은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나 시민들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도시국가의 정치와 경제, 사법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도시 기반의 엘리트들에게 재정적(동시에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각종 면허와 특권들을 부여함으로써 군주의 정치권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88-9) 실제로 중세 말, 인도양 무역을 지배하여 유럽 상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축적했던 카리미(이란) 상인들도 '상인 자본가' 집단을 형성했지만,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했다."(93)


한편, 남아시아는 유럽 열강들이 침입하기 전에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상업자본주의 체제에 근접했을까? "1250년에서 1650년까지 유럽은 대부분의 아시아 시장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지배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은 유럽 상인이 동양의 시장들을 왕래할 수 있었지만 '본토의 강력한 아시아 국가들'을 만나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행동의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었다. 유럽 상인들이 이 기간에 남아시아 아대륙에서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을 남아시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이 더욱 직접적으로 남아시아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고 생산량을 할당할 수 있었던 18세기 말까지 서유럽에서 남아시아로 오는 화물 가운데 적어도 80퍼센트가 은과 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문제들을 우회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점차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100-1)


남아시아 상인들의 정치적 권력은 미약했고 "귀족층의 권력은 유럽보다 훨씬 더 강했다." 남아시아에서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귀족이 경제 외적 강제를 통해 나머지 사회 계층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부를 수탈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115) 유럽의 입장에서 볼 때 "남아시아의 내륙 지역은 본래부터 가용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 비자야나가르 왕조의 강력한 군사력 때문에 착취할 수 있는 주변부로 쉽게 재편하거나 통합할 수 없는 미개척지였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이익을 내려면 개별적으로 평화롭게 교역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집단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을 적절하게 조합해야 했다. 후자의 경우는 상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해상교역로에 대해서 폭력을 써서 실제로 독점 지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남아시아 상인들의 결정적인 약점은 "해외 국가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중앙 권력이 부재"했다는 것이다.(118-9)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모두 서유럽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금의 최종 종착지였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그러한 '유출'로 큰 이익을 보지는 못했다. 중국과 남아시아 국가들은 그들의 주변부 지역을 대상으로 자본주의적인 고도의 노동 착취 체제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0년-1500년 사이 남아시아 지역의 급격한 교역 증가와 분업의 심화를 자본주의 질서의 토착적 발전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비非시장적인 권력의 유무에 따른 "제약 사항들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과 발전을 뒷받침하는 법체계의 발전을 제약했다. 남아시아 지역은 전혀 정태적이거나 침체되어 있지 않았고 어느 모로 보나 경제적, 기술적으로 유럽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 통치 체제가 종교적 군사 엘리트층이 지배하는 전형적인 조공국가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토착 상인 계급이 생겨날 수 없었다."(137-8)


유럽의 정치경제를 남아시아와 중국과 비교했듯이 유럽의 '발흥' 또한 "13세기에 점점 유럽과 상호의존적 관계로 발전했던 북아프리카 지역(마그레브와 사하라 남부 제국들)과의 교역 관계를 살펴보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141) "지리적 근접성, 문화적 친근감, 경제적 연관성에 비춰볼 때, 후後우마이야 왕조, 파티마 왕조,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후예들(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이 아프리카의 금 덕분에 '건설되었다'는 주장을 인정한다면 아프리카의 금이 서유럽과 이집트로 유입된 것이 그들 경제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하라 사막과 모로코를 가로질러 수송된 아프리카의 금은 유럽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며 자행되던 노예무역도 중요하다. "지배층이 노예무역에서 발생하는 재정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늘 서로를 침략하는 전쟁 상태에 있었다."(144-5)


이 지역의 지배층은 "농업에 대한 과세보다 교역과 수입품의 재판매(예컨대 소금)에 대한 세금 징수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챙겼다. 농업은 기후 조건 때문에 상대적으로 잉여생산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토지 소유는 그다지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와 서유럽 국가들에게 금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금을 공급하는 지역이 대부분 말리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는 지역이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노예를 사서 부리는 비용이 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보다 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인구밀도와 연계된 노예제 경제는 토착적인(내재적인)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없게 했다."(146-7) 교역로를 지배하여 창출한 잉여는 "이익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을 담당하는 산업에 재투자되지 않았다. 결국 잉여의 대부분은 "지배층들이 지중해와 중동 지역에서 들여오는 사치품들을 사는 데 쓰"이면서, 다시 외부로 유출되었다.(153)


지중해 지역의 이슬람 세력은 "목재 자원의 부족으로 해군력 약화라는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10세기에 다시 일어선 비잔틴 제국에게 크레타 섬과 키프로스 섬을 빼앗기고 11세기에 코르시카 섬과 사르디니아 섬, 시칠리아 섬마저 잃으면서 이슬람의 해군력은 더욱 무력해졌다."(154)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지역에서 힘을 잃는 것과 동시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와 유럽의 기독교 국가 사이의 무역수지도 후자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지중해 교역권 상실과 더불어 "상설 민병대나 무장한 동업조합의 부재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에 '도시국가'가 생겨날 수 없었던 한 요인이었다. 그 밖에도 유럽 상인들의 침략, 이베리아 반도 귀족들의 확장 야욕, 북아프리카 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고자 애쓴 이슬람 지배자들의 행정, 도시로부터 강제로 조공을 거둬들이는 데 혈안이 된 내륙의 유목민들이 모두 이슬람에 '도시국가'가 생겨나지 못하게 한 요인들이었다."(157-9)


1350년 이후 서유럽에서 '봉건제의 부활'이 실패한 것은 "귀족들이 봉건제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막는 강력한 도시국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65) 이와 달리 "북아프리카와 수단 지역 국가들의 정치-경제 현실은 일종의 부족화部族化, 즉 '조직화된 무정부 상태'라고도 부른다. 장기적으로 국가 형성이나 자본주의적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동양적 전제정치나 절대주의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부족주의는 상대적으로 제도화된 권력의 부재와 구조적으로 취약한 국가를 암시한다. 따라서 당시 마그레브의 다양한 정치 체제는 중상주의 정책의 실현은 꿈도 꾸기 어려웠으며 더 크고 지속적인 정치 체제로 발전하여 마침내 그러한 체제를 구축한 엘리트들에게 결정적인 권력 수단이 될 '국민국가'로의 성장을 가로막는 끊임없는 난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167)


다양한 유목 세력이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역량과 자원을 소진시키는 동안 "유럽의 상인 공동체와 동업조합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국가 안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권력의 획득은 상인 엘리트들의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였다. 그들은 국가의 하부구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중세 말 서유럽의 "상업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추려내야 할 또 다른 예외적인 변수는 공동체적 정체성의 결과로 나타난 (법제적, 정치적인 의미에서 모두) 시민권이라는 개념이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시민을 그가 속한 도시 밖에서 재판할 수 없었고 도시 성벽 밖에 있는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 또한 시민이 아닌 사람이 시민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도 없었다. 도시국가의 시민으로서 부르주아의 정체성은 상징적 의미에서 수세기 뒤 국민국가의 정체성으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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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리엔트 이산의 책 24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 이산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19세기 후반, 세계사는 유럽중심적 발명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탄생하게 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유럽의 '합리성'을 들면서, 그 기원이 유대교에 있다고 주장했다. 베버도 이런 입장을 수용했다." 베버는 세계의 주요 종교가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요소, 한마디로 반反합리주의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지만, 유럽인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의 수혜"를 받았기 때문에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76-7) 이런 유럽중심주의는 "19세기의 사회학으로부터 막강한 원군을 얻었다. '사회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오귀스트 콩트와 헨리 메인 경 같은 사회학자는 '과학'과 '계약'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사유와 사회조직, 낡은 '전통적' 사유와 사회조직을 구분하면서 전자가 후자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다.(78) 마르크스 진영도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분한다.


이 책의 핵심 논지는 "1500년 이후 지금까지 세계 규모의 분업과 다국간 무역이 이루어지는 단일의 글로벌한 세계경제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인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던 아시아에 어떻게 해서든 접근해 보려 했던 것도 이런 세계정치경제의 구조와 역학"에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가 '지리상의 발견'에 이르고 이후 서반구의 '신'세계가 구세계 경제와 통합된 것도, 1498년 바스코 다가마의 아프리카 순항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관계가 긴밀해진 것도 결국은 아시아의 흡인력 탓이었다."(129) 세계경제는 압도적으로 아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아시아의 풍부한 물산과 그에 대한 유럽의 강한 수요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도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시장과 금을 확보하려는 기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35-6)


유럽이 구조적으로 무역적자를 겪고 있었다는 것은 "전체 수출품 중에서 금은이 차지하는 비율이 3분의 2를 밑돈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가령 1615년의 경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수출물량 중에서 금액으로 환산하여 6%만이 일반 상품이었고, 나머지 94%는 지금(地金)이었다." 영국은 "자국 공산품의 '수출 진흥'을 위해 총수출액 가운데 영국 제품을 최소한 10% 포함시킨다는 조건 아래 영국 동인도회사에 특허장을 내주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얼마 되지 않는 자국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찾아내는 데 늘 애를 먹었다."(157) "결론적으로 말해 유럽은 아메리카의 화폐를 거저 먹듯이 가져다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에서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아마 그 돈마저 없었더라면 유럽은 세계경제에 명함도 못 내미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새롭게 발견한 수입원과 자금원은 유럽의 생산력을 키워 주었고, 이것은 다시 인구성장으로 연결되었다."(160)


"동남아시아는 권역 내에서 생산한 향신료와 주석을 유럽·서아시아·인도에 수출했다. 그런가 하면 인도에서 수입한 물품을 중국으로 재수출하기도 했다.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최대 고객이었다. 동남아시아의 대對유럽 수출은 대중국 수출의 8분의 1에 불과했다. 동남아시아는 또한 권역 내의 임산품·목화·금을 인도·중국·일본 등지로 수출했다. 또 인도에서 은을 받아 일부는 말라카를 거쳐 중국으로 재수출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는 인도·서아시아·유럽과의 무역에서는 흑자를 보고 중국한테서는 적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195-6) 18세기의 일본 인구는 "세계인구의 겨우 3%였지만, 10만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무려 8%나 되었다. 결국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볼 때 도쿠가와 시대 내지는 그 이전 시대가 '정체'되었다거나 '폐쇄적'이었다거나 '봉건적'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다."(201)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했던 의미를 분석할 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인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하나는 생산과 수출 양면에서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은의 최종적인 '배수구'와 다를 바 없었던 중국의 역할과 기능이다." 명은 송조와 원조에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던 지폐 발행을 중단하고 대신 동전과 은편(銀片)에 의존했다. 아울러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모든 세금을 은납화했다. "중국 경제의 규모, 중국 사회의 급증하는 은 수요, 중국의 어마어마한 무역흑자는 전세계적으로 은의 수요를 폭증시켰고, 이것은 은 가격의 급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중국 사회가 근세에 은에 기초를 둔 사회로 전환하지 않았다면, 유럽과 중국에서 '가격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한 [은을 팔아 연명하던] 스페인 제국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플린과 지랄데스의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206-7)


중국은 17세기 중엽을 제외하고는 "유입된 화폐가 생산과 거래를 자극하고 경제 전반의 상업화를 촉진시켜 화폐의 유통속도도 끌어올렸다."(269) 은 유입과 무역 활성화가 유발한 자극효과와 팽창효과가 극명하게 드러난 지역은 중국 남부였다. "상인들은 나중에 수확한 농산물을 받는 조건으로 농민 생산자에게 자본(은의 수출입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얻었을 것이다)을 전대(前貸)했다. 농민이 상업판도의 변화에 대응하여 [목화 같은] 환금작물을 재배할 경작지를 새로 개간하지 않고 기존의 논을 사탕수수나 양잠 경작지로 전환한 것은 경제학적으로 보았을 때 합리적이었고 시장제도의 측면에서도 그럴듯한 선택이었다. 결국 중국 남부에서 전개된 현상은 벵골과 흡사한 면이 있다. 상업화가 진전되면서 농경 및 취락의 경계가 확대되었다. 이를 자극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수요 증대였다. 이것은 국내 수요와 공급의 증가를 유발했으며, 해외에서 유입된 새로운 화폐가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274-5)


결국 유럽중심주의가 유포시킨 신화와는 정반대로 "대륙간 무역[이것은 대부분의 지역교역, 국지교역을 포함한다]에 관여하던 모든 기업가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보유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동인도회사와 리버풀의 노예상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말라바르의 후추 농장주도, 인도 상인도, 아프리카 노예 수출상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따라서 유럽중심주의자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던지는 혹평은 역사적으로 사실무근이다. "폴라니처럼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태도도 곤란하다. '아시아적 생산양식'(마르크스)도, '수력(水力)/관료제사회'(비트포겔)도, '합리성'의 결여 내지는 비합리주의라는 낙인(베버, 좀바르트)도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움츠러들게 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재분배적'(폴라니)이라든가 '전통적' 사회(러너와 로스토를 비롯하여 서양의 모든 근대화론자) 같은 범주도 과녁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다."(357)


아시아에서 "18세기 후반에 A국면이라는 팽창기가 막을 내리고 (순환적으로?) 수축기로 접어들면서,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던 서양이 세계경제와 세계체제에서 자신의 절대적·상대적 입지를 강화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제야 서양은 (일시적인?) 패권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다. 요즘 식으로 유비해서 말하자면, 세계경제의 주변에 머물러 있던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경제지역'이 현대 세계경제의 위기에 의해 발흥이 가능해진 것이다."(415)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불안을 낳은 주원인은 "유럽에서 들어온 은이었을 공산이 크다. 구매력과 소득이 커지면서 특히 아시아 지역의 국내시장과 수출 시장에서 수요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소득의 분배를 점점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서민들의 유효수요를 제한하면서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특히 마지막 30년 동안 아시아에 쇠락의 조짐이 나타나면서 "가장 먼저 기울기 시작한 것은 페르시아였고, 그 다음이 인도였다."(420-1)


그러면 서양은 어떻게 발흥했는가? "한마디로 말해 유럽인은 그것을 샀다. 처음에는 아시아라는 열차의 좌석 하나를 샀다가 나중에는 열차 전체를 사들였던 것이다." 유럽인은 은을 캐내,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하여금 캐내도록 강요하여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냈다. 유럽인은 또 아메리카 대륙을 무대로 수익성이 높은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브라질·카리브 해·북아메리카 남부 일원에 건설한 플랜테이션에서 노예를 부려 농산물을 생산했다. 물론 노예무역을 통해서도 화폐를 얻었다."(435) 유럽인은 "아시아 물건을 유럽에 수입하여 얻은 수익보다 아시아 역내의 이른바 '지방교역'에 참여해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또한 많은 유럽인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아시아 상품을 재수출하여 추가 수익을 올렸음을 물론이다." 이처럼 유럽이 월등히 앞선 생산력을 자랑하던 아시아 지방교역에 참여한 것은 결국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441)


"산업혁명의 주요 무대였던 직물시장에서 영국과 서유럽은 분명히 인도·중국·서아시아와 경쟁을 벌여야 했다. 따라서 상대적인 공급과 수요의 차이는 세계 전체 속의 상호관계에서 지역마다 부문마다 다른 비교비용과 비교우위를 낳았다." 결국 세계경제의 일부 지역에서 미시경제적 대응을 통해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산업현장에 적극적으로 투입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내부' 여건이 아니라) 이런 세계경제의 보다 거시적인 경쟁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유럽의 '내부' 여건(또는 공업도시 맨체스터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제작소)이 세계경제에 참여함으로써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경제/세계체제의 구조와 역학이라는 동일한 힘이 전세계 모든 지역에 걸쳐 비교비용, 비교우위, 합리적 대응을 낳는 것이다."(450)


경제 발전에 따른 아시아 주요 국가의 인구 증가와 소득 양극화는 국내의 유효수요를 늘리기 위해 "노동절약적·동력발생적 기술개발에 자본을 투자할 가격 인센티브를 증대시킨 것이 아니라 생산의 임금비용을 끌어내렸다.  엘빈도 유명한 '고차적인 균형의 함정론'을 개진하면서 애덤 스미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생산·무역·제도·기술 모든 면에서 너무나 유리한 상황과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던 중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원인을 설명한다. 엘빈의 테제에 담긴 본질은 중국은 그때까지 풍부한 인간노동과 부족한 토지 그리고 다른 자원의 토대 위에서 수세기에 걸쳐 발전시킨 농업, 운송, 제조업 기술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는 것이다. 엘빈은 (아시아가) 제도의 실패로 인해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제도 등에 입각한 생산, 자원이용, 인구의 급속한 성장으로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자원이 희소해졌던 것이라고 주장한다."(466-7)


골드스톤이 특히 강조하는 요인은 "여성이 마을에 속박되어 있음으로 해서 값싼 농업생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포메란츠도 비슷한 요인을 지적한다. 도시의 산업노동자는 여전히 그들의 고향마을에서 생존에 필요한 식량의 일부를 끌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존물자의 일부는 골드스톤의 지적처럼 여성에 의해 값싸게 생산되고 있었다. 고용자인 산업기업가와 시장의 관점에서 바꿔 말한다면 농업생산이 여성노동에 의해 효율적이면서 값싸게 이루어진 덕분에 임금재는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가격이 쌌다." 따라서 "노동은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노동의 공급가격은 낮았으며 소비재에 대한 노동자의 수요는 감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력을 절약하거나 생산과 수송 부문에서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데 투자를 해야 할 인센티브는 거의 없었다. 엘빈은 '균형의 함정'이라는 독특한 이론으로 이런 상황을 요약했다."(485)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발흥을 낳은 체제로서의 글로벌한 구조와 그 연속성은 서양에서 하나의 출발점을 표시한다. 이는 그 이전 서양의 주변적 지위로부터 연속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 경제가 보다 산업적인 방향으로 진행하여 하나의 전체로서 세계경제체제 안에서 서양의 위치가 이동한 그런 불연속성의 출발점이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세계경제와 세계체제 내부에서 진행된 "역사의 장기적 추세가 근세에 드러낸 두 번의 '굴절'이 있었다. 하나는 1500년 이후 신대륙을 구대륙으로 포섭한 콜럼버스식 교환이다. 또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인구성장률, 생산성 증가율, 나아가서는 자원을 둘러싼 압력의 교체이다. 이것이 1800년을 전후하여 산업혁명을 낳았다. 이것은 두 세계경제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굴절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나 유럽은 변화의 주도자로서보다는 변화의 도구로서 행동했던 것이다."(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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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굿모닝북스 투자의 고전 5
찰스 P. 킨들버거.로버트 Z. 알리버 지음, 김홍식 옮김 / 굿모닝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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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국면에서 자산가격이 상승을 멈추면, 곧바로 하락이 시작된다. 평평한 고지나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38)


"광기는 현재 및 가까운 미래 시점의 부동산가격, 주가, 상품가격 혹은 특정 국가의 통화가치가 먼 미래 시점에서의 동일한 부동산가격이나 주가, 상품가격, 통화가치와 일관되지 않을 정도로 상승하는 현상을 동반한다." 통상적으로 "경기 확장기에는 투자자들의 낙관적인 태도가 증폭되고, 이들은 먼 미래 시점에 얻게 될 수익 기회를 더욱 열광적으로 찾아다닌다. 반면 대여자들의 위험회피 성향은 줄어든다. 합리적 활력은 비이성적 과열로 변이를 일으키고, 경제적 풍요감이 확대되면서 투자지출과 소비지출이 늘어난다. 지금이야말로 '기차가 역을 출발하기 전에 열차에 올라타야 할 때'라는 인식이 도처에서 만연하는데, 이례적으로 높은 투자수익을 올려주는 기회들은 점차 사라진다. 그래도 자산가격은 더욱 상승한다. 전체 자산 거래 가운데 단기적인 자본이득을 노리고 자산을 매입하는 비율이 계속 늘어나고, 신용으로 조달한 자금으로 이렇게 자산을 매입 정도로 높아진다."(38-9)


시장의 비이성적 과열을 통제해야 하는 의무를 띄고 있는 궁극적 대여자의 딜레마는, "자산가격이 급락하더라도 정부가 관대한 구제책과 함께 조만간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투자자들이 미리 알고 있다면, 자산과 유가증권을 매입하는 투자자들의 조심성이 줄어들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붕괴가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42-3) 금융 질서는 "자산가격 붕괴에 따르는 패닉의 확산을 막기 위해 궁극적 대여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궁극적 대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채무 과다 상태에 빠지게 될 개별 차입자들이 '구제'될 것이라는 견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궁극적 대여자의 시장 개입은 교묘한 계략과도 같다. "불필요한 디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항상 구제에 나서지만, 투기자나 은행, 도시, 국가들에게 신중함을 주입시키기 위해, 구제가 제때에 실현될 것인지 혹은 과연 실현되기는 할 것인지를 항상 불확실한 상태로 유지하는 일이다."(56)


민스키는 "호경기 때 늘어나고 경제의 탄력이 약화될 때 줄어들면서 경기순환에 동조하는 신용 공급의 확대와 축소가 금융 질서의 취약성을 초래하고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증폭시킨다고 믿었다." 민스키는 피셔의 노선에 따라 "과도한 채무를 진 차입자들, 특히 경기 확장기에 단기적인 자본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부동산이나 주식, 상품의 매수 자금을 차입금으로 조달하는 사람들의 행태에 주목했다. 이들이 이런 거래를 하는 이유는 해당 자산가격의 상승률이 매수 자금으로 조달한 차입금의 금리를 능가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둔화하면 이들이 매수한 자산가격의 상승률이 차입금의 금리보다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 이들 차입자 가운데 일부는 실망하게 되고, 이들 중 다수는 투매자로 돌변한다."(59) 결국 투자자들의 "합리성이란 세계가 실제로 작동했던 방식에 대한 묘사라기보다 세계가 따라야 하는 작동 방식에 대한 선험적인 가정"에 불과하다.(80)


# 민스키의 금융위기 모델

1. 거시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격변 발생 (가령, 정보기술 혁명, 금융자유화 등)

2. 주요 경제 영역의 낙관적 전망과 예상 수익 상승

3. 경제성장률 증가로 "이번에는 다르다"는 낙관론 정당화 (경제적 풍요감 속에서 상호 feedback 효과)

4. 신용 팽창 (기업과 개인의 차입 증가)

5. 투기적 판단, 장래수익 과대 추정, 과도한 차입금 의존 증가 (자산 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 차입자들의 부채 비율이 하락하는 경우도 발생)

6. 선행자 따라하기(follow-the-leader) 만연

7. 광기(비합리성)와 거품(가치 급락)


# 투기적 광기의 유형

1. 군중심리에 휩싸여 시장 참여자들이 일종의 집단의식 아래 행동한다.

2. 시장의 각 단계에서 서로 다른 개인이 시장 전개에 대한 생각을 합리적 추정에서 비합리적 확신으로 바꾼다.

3. 합리성의 정도가 서로 다른 집단이 자산가격이 상승하면서 광기에 휩싸이는 집단으로 바뀌고 그 수가 늘어난다.

4. 시장 참여자들이 구성의 오류에 빠져서, 개인(의 합)과 집단의 행동이 달라진다.

5. 일정한 사태의 '질'을 합리적으로 판단한 시장이 거기에 적합한 '양'을 추정하는 데 실패한다.

6. 잘못된 모델을 선택하거나, 결정적인 정보를 누락하거나, 자신이 받아들인 모델과 어긋나는 정보를 외면한다.


신용 팽창은 많은 사례에서 "이전의 전통적 화폐를 대신하는 대체 수단의 개발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전반 미국과 중국, 영국 간의 삼각무역에서 은이 환어음으로 대체됨에 따라 신용 팽창이 나타났다."(119) 신용 팽창은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작용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체계적인 발전 과정으로서 금융시장의 참여자들이 거래비용과 유동성 및 현금잔고의 보유비용, 두 가지 모두를 줄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통화 팽창은 "임의적이고 외생적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내생적인 과정"이며, 화폐의 역사는 "주어진 통화 공급량의 보다 효율적인 활용을 목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혁신과 통화에 적용되는 형식적 규정을 우회하기 위해 전통적 통화에 가까운 대체수단 개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121-3) 신용 조절의 난점은 "어떤 통화량 지표 Mi를 고정시킨다 해도, 시장은 경기 호황기에 새로운 형태의 화폐와 유사화폐 대체 상품들을 창출해 그 한계를 넘어선다는 점에 있다."(127)


정부가 경기순환의 거친 굴곡을 완화하기 위해 개입하는 "시점 선택의 문제는 복합적이다. 정부당국의 경고가 효과적이려면, 호황 국면에서 발생하는 과잉을 어느 정도 예방하기 위해서는 경고성 성명을 충분히 일찍 내놓아야 하지만, 성명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늦은 시점에 내놓아야 한다. FRB 전 의장의 비유를 들자면 당국은 대중의 비우호적인 반응으로 인해 '잔치가 막 벌어지고 있는 도중에 잔칫상을 걷어내기'를 꺼려한다." 이 딜레마에 대한 불완전한 방편으로, "소비자물가 수준이나 어떤 다른 물가지수의 상승을 누그러뜨리는 통화정책을 개발하는 데서 편안함을 찾는 게 중앙은행들의 현대적 전통이 됐다. '인플레이션 목표관리(inflation targeting)'가 중앙은행들이 즐겨 찾는 새로운 기도문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정책상의 문제는 중앙은행 책임자들이 부동산가격이나 주가가 장기균형 가치에서 큰 폭으로 이탈했을 때, 이 가격의 상승을 무시해야 하는가의 문제다."(163)


"대부분의 금융위기는 탄환이 튀듯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파급"되면서 국제적 전염을 발생시킨다. 국가간의 위기를 확산시키는 "여러 유형의 연결 경로 가운데 하나는 각국 시장을 연결시키는 차익거래의 작용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의 시장에서 "매매 가능한 국제적 거래의 대상인 유가증권은 통상 환율에 따른 통화간 등가 환산 후의 가격이 거의 동일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의 유가증권 시장 역시 서로 연결된다."(210-1) 국제적 자본이동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변화 외에 전쟁과 혁명, 기술혁신, 새로운 시장 및 원자재 보급지의 등장, 각국 경제성장률 간의 관계 변화 등 실물적 요인에 반응할 수 있다. 여러 나라에서 추진되는 정부소유 기업의 민영화도 외국인 매수자의 유입을 종종 유발한다. 외환시장에서 한 나라 통화의 환율에 '가격 오차'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도 자본이동을 유발한다."(213)


1990년대 초 아시아 국가들에서 발생한 신용 거품은 대외적으로는 변동환율제가 유발한 통화유입국의 외환가치 상승과 통화 공급량의 증가, 대내적으로는 부동산 가격과 주가의 상승이 유발한 투자 및 소비지출의 빠른 증가에서 비롯했다. "일본, 태국,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미국의 자산가격 거품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유사성은 시장 참여자들이 최근의 가격 상승에서 나타난 추세를 미래 시점으로 비례 배분하는 방식에 의해 자산과 유가증권의 가격을 예측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 및 미래 임대소득이 부동산가격을 산정하는 기본적인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고, 기업의 기대 수익률은 주가 산정의 기준 역할을 상실했다. 대신 최근의 가격 상승 추이를 기준으로 한 미래 가격 추정치가 부동산가격과 주가 산정의 기초가 됐다. 마치 월요일에서 화요일까지의 가격 상승이 금요일의 가격 수준을 예측하기 위해 수요일에 활용되는 양상이다."(241-2)


어느 자산가격의 거품이든 거품이 붕괴할 때면 신용 축소를 막기 위해 반드시 부정과 사기가 발견된다. "패닉과 붕괴로 인해 '재주껏 도망쳐야 한다(sauve qui peut)'는 좌우명에 짓눌릴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파산이나 재정파탄을 피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 오늘의 조그만 부정으로 내일의 파국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황이 끝나고 손실이 명백해질 때, 거꾸로 성공하기만 하면 당장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서 더 큰 도박을 시도하는 경향이 생긴다."(275) 부정행위는 경제가 호황기일 때 증가한다. "재산은 호황기에 만들어지며, 개인들은 부의 증식 과정에 끼어들기 위한 탐욕에 빠지고, 사기범들이 이 탐욕을 이용하려고 등장한다. 호황기에는 스스로 제 털을 깎이려고 줄지어 서 있는 양의 숫자가 늘어나고, 자신들을 사기범의 희생물로 제공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한다."(305)


패닉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놓아 두어야 한다는 견해에는 두 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하나는 투자자 혹은 투기자들이 그들의 과도함에 대한 대가로 치르게 되는 고통을 즐기는 것─또는 '파괴의 기쁨(schadenfreude)'─이다. 어느 정도 청교도적인 이 시각은 지옥의 불을 지나치게 탐욕적인 사람들에 대한 응분의 보답으로 환영한다. 다른 요소는 패닉을 '유해하고 유독한 열대 기후에서' 공기를 정화하는 폭풍우로 본다." 이들은 패닉이 "상업과 금융세계의 독소들을 정화해 활력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무역과 건전한 진보, 영구적인 번영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이와 대립되는 견해는 "시스템에서 광기가 벌여놓은 투자와 거품을 정화해 내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디플레이션을 일으키는 패닉의 확산으로 인해 투기자가 아닌 사람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신용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들의 건전한 투자마저도 일소해 버릴 위험이 있다는 양보적 입장이다."(332-3)


"패닉은 내버려두는 것 자체로 치료될 수 있다는 선험적 시각을 반박하는 가장 유력한 논거는 패닉이 그렇게 방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당국은 개입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린다."(338) 호황기에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여신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엄격한 은행 규제와 감독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논거는 현실화되기 어려운 완벽한 이상에서나 존재한다." 은행의 관리부실은 "위기가 드러나기 전에는 감지하기 어렵다. 경기가 확장되는 동안 규제와 감독 과정에서 불어나는 엔트로피가 시스템의 곳곳에 발생시키는 위험구역들은 경기가 수그러들 때 갑자기 표면화된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결국 문제는 청산, 시간 지연, 보증, 구제, 인수합병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혹은 그 밖의 궁극적 대여 수단을 동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362)


"시점 선택은 특수한 문제를 제기한다. 경기 확장이 점점 더 세게 그 강도를 높여 가면, 패닉이 촉발되지 않도록 하면서 확장의 강도를 늦추어야 한다. 붕괴가 발생한 후에는, 채무지불 능력이 없는 기업들이 파산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채무지불 능력은 있지만 단지 유동성이 부족한 기업들에게까지 위기가 확산될 정도로 오래 기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391) 궁극적 대여자의 개입 규모와 시점 선택의 딜레마는 "할인 방식보다 공개시장조작이 더욱 심각하다. 할인에 대해 월터 배젓이 규정한 합당한 규모는 채무지불 능력과 건전한 담보를 갖춘 회사들을 할인 경로로 하여, 시장이 벌칙적 금리 수준에서 흡수하는 최대한이다." 시스템에서 신용이 마비되었다면,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이 안전하다. 과잉은 나중에 걷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점 선택은 예술이다. 이 말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392)


"국제적 차원의 궁극적 대여자에는 일국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문제가 존재한다. 서로 다른 국가별 통화와 국가별 중앙은행이 존재하는 한, 환율의 변동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393)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변동환율제의 채택이 이자에 민감한 자본 이동을 없앨 것이고, 일단 통화가 변동환율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중앙은행들은 기대하지 않은 외부 효과를 발생시키지 않고도 독립적인 통화정책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투기적 자본 이동이 균형점을 찾아가는 안정적인 작용을 하는지, 경우에 따라 균형점에서 이탈시키는 심각한 교란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했다. 환차손에 대한 공포가 자본흐름을 억제할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이 견해는 잘못된 것임이 증명됐다. 다수의 은행들은 외환시장에서 가치가 변동하는 다수의 통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익 창출을 위해 매매할 수 있는 새로운 자산군이 생긴 것으로 취급했다."(431)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변동 가능한 평가(adjustable parity)에 따라 각국 통화를 준고정시키는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붕괴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일어난 외환위기는 이 시기와 물리적 시간이 맞먹는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 많았다. 1971년 8월 미국은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핵심인 금 1온스 당 35달러로 설정된 미 달러화의 평가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했다. 통화간 교환비율을 정해놓는 각 통화의 상대가치 체계가 1972년 1월의 스미소니언 합의에서 새로 확립됐지만, 약 1년간 유지되다가 1973년 2월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 이어서 대부분의 선진국 통화들이 시장의 변동환율에 맡겨졌다." 은행 파산과 장기균형 가치에서 이탈하는 "환율의 오버슈팅과 언더슈팅,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거품은 체계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간 자금흐름의 규모와 방향에 큰 변화를 야기하는 다양한 충격의 결과로 나타났다."(448-50)


# 오버슈팅과 언더슈팅

1. 오버슈팅 : 특정 국가 통화의 외환가치가 국내 물가상승률과 주요 교역상대국의 물가상승률의 차이에서 산출되는 가치에 비해 상승하는 현상

2. 언더슈팅 : 오버슈팅과 정반대로 실질 외환가치가 하락하는 현상


"변동환율제를 지지하는 주된 논거 중 하나는 통화가치가 더 이상 고정돼 있지 않으면, 국내적 경제목표의 달성을 위해 통화정책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중앙은행들의 독립성이 더 커진다는 점이다. 퉁화가 금 혹은 다른 통화에 고정돼 있지 않을 때, 중앙은행들은 금리와 통화 공급량의 성장 속도를 변경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어느 통화의 평가를 유지하는 것은 그 나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변화, 특히 보다 팽창적인 통화정책의 채택을 제약했다. 즉 통화의 평가를 유지한다는 것은 해당국의 물가상승률이 주요 교역 상대국들의 물가상승률과 크게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화의 평가를 유지하지 않을 경우, 중앙은행들이 채택하는 정책은 현행 및 기대 물가상승률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고, 이에 따라 국가간 자금흐름의 변화가 유발된다. 결과적으로 국가간 자금흐름의 진폭이 훨씬 더 확대된 이유는 통화정책과 기대 물가상승률의 변화가 커졌기 때문이다."(460)


"투자자들이 특정 통화로 표시된 유가증권의 보유를 늘리거나 줄이고자 할 때마다, 이 통화의 외환가치에 오버슈팅이나 언더슈팅이 유발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시장 환율이 국가별 물가상승률 격차에 부합하는 환율로부터 큰 폭으로 빠르게 괴리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이전의 속설─'악순환 및 선순환', 그리고 시장의 균형점 이탈을 유발하는 '교란적 투기'─은 국가간 자금흐름의 급격한 변화에 뒤따르는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기대 물가상승률의 변화─보다 정확히는 국가별 물가상승률 차이의 변화─는 현물 시장환율 기대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외환가치에 오버슈팅과 언더슈팅을 초래한다." 또한 변동환율제하에서 "어느 한 통화로 표시되는 유가증권 수요의 확대라는 형태로 발생하는 일정한 크기의 충격은 그 나라에서 거래되는 유가증권과 부동산의 가격 상승이 유발되는 효과를 통해 해당국의 GDP에 더욱 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4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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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 애덤 스미스부터 21세기 자본주의까지 비판적 관점으로 본
E. K. 헌트.마크 라우첸하이저 지음, 홍기빈 옮김 / 시대의창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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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란 "생산, 교역, 상업에 필요한 각종 재료와 물질을 일컬으며, 연장, 장비, 공장, 원자재, 가공 중인 재화, 재화의 운송 수단, 화폐 등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물질적인 생산수단은 모든 경제 시스템에 다 있지만 그것이 자본이 되는 것은 오로지 상품 생산과 사적 소유에 필수적인 사회적 관계가 존재하는 맥락 안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자본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물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복합적 집합도 지칭하는 말이다." 자본주의를 낳은 "최초의 자본축적이 가능했던 네 가지 중요한 원천은 (1) 급속히 늘어나고 있던 무역과 상업의 총량, (2) 공업의 선대제, (3) 인클로저 운동, (4) 대규모 인플레이션 등이었다. 그 밖에도 최초의 자본축적에 있어서 몇 가지 다른 원천이 있었고 그 중 몇 가지는 상당히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종종 망각 속에 묻어버리곤 하는데, 식민지의 약탈, 해적질, 노예 무역 등이 그것이다."(76-7)


초기 중상주의 시기에는 "대부분의 생산을 노동자가 수행했는데, 이 노동자는 아직 스스로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했다. 자본가는 주로 상인이었고, 그들의 자본이란 일반적으로 화폐와 팔아야 할 재화의 재고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중상주의 시기에 저작을 남긴 경제사상가들이 이윤의 원천을 교환, 즉 판매와 구매 과정에서 찾았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윤을 발생시키는 것은 교환이지 생산이 아니었다."(87) 중상주의 저작들의 공통점은 "첫째, 상품의 '가치' 또는 '자연적 가치'는 그 상품이 실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일 뿐이다. 둘째, 시장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힘이다. 셋째, 중상주의 저술가들은 종종 '내적 가치intrinsic value', 즉 사용가치야말로 수요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따라서 시장가치를 결정하는 데서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논하고 있다."(89)


17세기 중반부터 "거의 모든 중상주의 저술가들은 국가가 국내 경제에서 독점권을 부여한다든가 여타 형태의 보호와 정실주의를 행하는 것을 비난했다(국제적 상업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이러한 관행을 적극 옹호했다). 구매자와 구매자, 판매자와 판매자, 또 구매자와 판매자가 모두 서로를 적으로 삼는 경쟁 시장에서는 가격이 자유롭게 오르내리면서 제대로 된(즉 시장을 균형 상태에 이르게 하는) 수준을 찾아가도록 할 때 사회의 편익이 극대화된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생각이었다."(102) 대표적으로 1714년, 버나드 맨더빌은 <꿀벌의 우화>에서 "낡은 도덕률로 보자면 가장 경멸받아 마땅한 악덕들이 만약 모두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최대의 공공선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이상한 모습의 역설을 제시한다. 이기심, 탐욕, 소유욕이 강한 행동 등은 모두 근면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경제를 번성시키게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104)


후기 중산주의 시기로 오면 상업의 확산으로 경쟁이 증가하면서 가격 격차만으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생산과 판매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통제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늘어난다. "18세기의 경제사상가들은 (노동 분업으로) 늘어난 생산성을 놓고 중요한 두 가지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 첫째, 자연 자원은 오로지 노동을 투하하여 사용가치를 가진 생산물로 변형시킨 뒤에야 비로소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둘째, 전문화와 노동 분업이 증가하게 되자 상품의 교환이라는 것을 사실상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상이한 전문화된 노동의 교환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다."(106) 한편,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은 "비효율적인 소규모 농업 대신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농업을 장려"하면서, 길드 폐지와 규제 제거, 정부 수입을 "농업에 대한 단일의 전국적 조세로 충당해야 한다"는 정치적 개혁을 주창했다.(110)


18세기 중반 글래스고를 포함한 영국의 많은 상업 및 공업 도시들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매뉴팩토리manufactories'라고 부르는 장소에서 상당한 양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매뉴팩토리란 "자본가가 건물, 생산 장비, 원자재를 소유하고서 일을 할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장소로서, "공장에서는 기계화된 조립 라인의 기술이 사용되었지만, 매뉴팩토리에서는 (여전히) 구식의 수공업 생산 기술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매뉴팩토리에서 "자본가가 노동을 효과적인 분업 과정들로 나누고, 그 결과 노동생산성이 크게 향상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애덤 스미스는 "세 가지 소득 범주―이윤, 임금, 지대―가 그가 살던 시대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3대 계급―자본가, 지주,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얻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자유로운' 노동자―에 조응한다는 사실의 의미와 중요성을 최초로 깨달은 경제학자이기도 했다."(125-6)


스미스는 3대 계급 중에 "오로지 노동만이 가치 또는 부를 창조하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134) 그는 "계급 분화의 가장 주된 기초가 토지 및 자본의 소유권이라고 보았다. 또 그는 자본가의 권력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몇 개의 원천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자본가의 부,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의 능력, 정부에 대한 그들의 통제력 등이 그것이었다."(137) 노동가치론에서 어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양 그리고 생산에 사용된 간접노동(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생산수단을 생산한 노동)과 직접노동(그렇게 생산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그 상품을 생산한 노동)을 생산과정의 상이한 시점에서 어떻게 상대적으로 배분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하지만 스미스는 "생산수단의 통제권을 자본가가 장악하고 토지 및 천연자원을 지주가 독점하면 교환가치 또는 가격이 임금, 이윤, 지대라는 세 구성 요소의 총액이 된다고 여겼다."(138-9) 


스미스의 가격론에는 "두 가지 중요한 약점이 있었다. 첫째, 임금, 이윤, 지대라는 가격의 3대 구성 요소는 그 자체가 가격이거나 또는 상품의 가격에서 도출되는 것들이다. 상품의 가격을 설명하는 이론이 한 상품의 가격을 그저 다른 상품의 가격으로 설명하는 식이라면 이것을 일반적 가격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한 상품의 가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상품의 가격을 알아야 한다면, 이는 즉시 그 다른 상품의 가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낳는다."(143) 둘째, 스미스의 가격론이 내놓는 이런저런 결론은 "사실은 모든 가격의 전반적 수준에 대한 것일 뿐이며(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화폐의 구매력에 대한 것일 뿐이며), 다른 상품들 사이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145) 후대의 경제학자들은 스미스의 가격순환론을 벗어나기 위해, 시장이 변동해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뉘메레르numeraire(상품 간 교환비율을 결정하는 기준 상품, 예를 들면 은)를 찾고자 노력했다.


1790년대에 노동자 조직이 급속히 확산되고, 사회경제적 불만이 증대되자 상류계급은 대단히 불편해 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프랑스혁명의 기억이 생생했고 그래서 단결된 노동자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 결과는 1799년의 단결금지법Combination Act으로 나타났는데, 이 법은 노동자가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그 밖에 고용주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약하는 규제를 도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단결하는 것을 모조리 불법화했다."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 강렬하게 벌였던 또 하나의 운동은 "1795년에 생겨난 스핀햄랜드Speenhamland 빈민 구호 시스템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이 시스템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직인법의 전통을 이어) 기독교적인 가부장적 윤리의 산물이었다. 빈곤에 처한 이들이 일자리가 있건 없건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의 취지였다." 이들은 어떤 형태의 구호에도 반대했는데, "이들의 논리는 맬서스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177-8)


맬서스의 <인구론 1판>에는 "책 전체를 관통하여 반복되는 두 개의 지배적인 주제가 있었다. 첫째는 제아무리 개혁가들이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부유한 소유자와 가난한 노동자라는 현재의 계급 구조는 필연적으로 다시 출현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한 계급 분열은 자연법에서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맬서스는 생각했다." 그의 인구론에 속속들이 파고든 두 번째 주제는 "끔찍한 빈곤과 고통은 모든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피할 길 없이 당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빈곤과 고통을 경감시키려는 시도는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결국 상황을 개선시키는 게 아니라 더 악화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맬서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추동하는 동기는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며, 이 욕망은 결코 포만 상태가 되도록 충족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욕망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다."(185-7)


맬서스가 교환을 사회적 조화라는 관점에서 지지하는 이유는, "소유권이라는 기성의 법률과 현존하는 소유권의 배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는 "노동력의 구매자를 찾아내어 아무리 적은 임금이라도 받는 것이 굶주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따라서 모든 교환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혜택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특히 소유자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분리가 불가피한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더욱 그러하다."(196) 맬서스는 "지주의 지대 또한 그들이 생산에 기여한 바에 대한 보상이라고 옹호했으며, 그 과정에서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생각, 즉 지대는 독점에서 얻는 수익 또는 일종의 불로소득이라는 생각을 논박하는 데 힘을 쏟았다."(200) 맬서스가 경제학 이론에 기여한 점은 공급과잉glut 또는 불황의 이론으로서, 그는 "공급과잉의 궁극적 원인은 과도한 이윤이 결국 (유효수요를 감소시켜) 자본축적률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상에 있다고 보았다.(209)


리카도의 "지대 결정 이론은 두 개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첫째, 모든 토지는 비옥도가 차이가 나며 따라서 모든 토지를 가장 비옥한 것에서 가장 덜 비옥한 것까지 한 줄로 정렬할 수 있다. 둘째, 지주에게서 땅을 세내어 경작하는 자본주의적 영리 농업가들의 이윤율은 그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항상 균등화된다."(222) 리카도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받아들였고, 그 가장 중요한 귀결, 즉 인구 증가는 결국 노동자의 임금을 생계 수준으로 내리누르는 경향이 있다는 명제도 받아들였다. 따라서 지대를 발생시키지 않는 최열등지에서의 이윤은 그 토지에서의 총 산출에서 그 토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먹여살릴 만큼의 곡물을 뺀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윤은 임금을 지불하고 난 뒤 남은 몫이다." 여기서 "비옥도가 더 떨어지는 토지가 경작지로 들어올 때마다 순 생산물이 감소하는 한, 또 곡물로 표현된 임금률이 동일하게 유지되는 한, 이윤율은 감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227)


리카도는 국제 무역에서 "교역되는 모든 상품을 한쪽 나라가 다른 쪽 나라보다 더 효율적으로 생산한다고 해도 자유 무역을 행하면 결국 두 나라 모두 혜택을 본다는 주장을 일관된 논리로 전개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 그는 또한 나라 사이에는 자본의 이동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별개의 국제무역 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267) 공급과잉을 부정하는 리카도의 주장은 단순하다. "자본가가 스스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생산하는 이유는 오직 이를 시장에 가져가 자신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과 바꾸기 위해서이다. 이 교환은 화폐에 의해 매개되지만 화폐 그 자체를 원하는 이는 없다." 화폐란 "다른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어떤 유용한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화폐를 그 자체로 축장하고 하는 이는 없다. 그러므로 생산은 그 자신의 수요를 창출한다. 어느 자본가든,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가격에 해당하는 양만큼 다른 상품에 대한 수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262)


"원자적 개인주의, 이기주의적 공리주의, 시장에 대한 의존, 이윤을 통한 산업화 자금의 융통, 계산적인 합리주의라는 다섯 가지의 측면이 19세기 말과 20세기에 효용과 사회적 조화를 말하는 신고전파 이론의 지적인 기초가 되었다. 훗날 경제학자들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저작에서 불편하게 동거하고 있던 노동가치론의 관점을 제거하고 사회적 조화와 시장의 사회적 혜택 등의 개념을 따로 떼어내고자 진력하며 내놓았던 생각들은 대부분 벤담, 세, 시니어의 생각을 가져온 것이었다."(288) 밴담의 효용의 원리는 "모든 인간 행동은 쾌락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다."는 말로 집약된다.(290) 벤담은 저축이 반드시 신규 투자로 이어지지 않으며, 이 경우 생산은 줄어들고 실업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부와 소득의 큰 불평등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완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부자에게서 빈자로 화폐를 재분배하는 정부 조치는 사회의 효용 총량을 늘려준다."(296)


"세는 노동이 가치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면서 오로지 효용만이 가치를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세는 생산과정을 "자연의 원자재를 인간의 노력을 사용하여 쓸모 있는 재화로 전환시키는 일련의 과정으로 보는 대신, 생산과정 안에는 상이한 '생산적 인자productive agencies'가 존재하며 이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생산 과정의 본질이라고 단언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 노동의 지출을 한편으로 자본, 토지, 재산의 소유권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비교할 때, 양쪽은 효용의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299-300) 세의 저작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자유 시장은 항상 모든 자원―노동을 포함―이 완전히 사용되는 균형점, 즉 노동과 산업 생산 시설이 모두 완전고용 상태에 달하는 균형점에 이르도록 자동적으로 조정되게 되어 있다는 믿음이었다."(303)


"시니어는 정치경제학의 이론들 사이에 그토록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경제학자가 단순히 부를 분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후생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적 후생을 고찰하게 되면 즉시 규범적 또는 윤리적 명제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런 명제는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는 다양한 집단의 태도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비과학적인 윤리적 전제를 제거하면 "정치경제학은 가치가 배제된 중립적인 ‘순수 과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보았다.(312-3) 시니어는 이론화 과정의 기초 자체에 이미 가치의 문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이론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그가 어떤 사회적 쟁점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문제들에 대해 어떤 유형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결정한다."(314) 가치 중립적 명제라는 말 자체가 이미 가치 지향적인 '사회적' 발언이다.


윌리엄 톰프슨과 토머스 호지스킨은 오언의 협동조합 운동과 노동가치론의 계급 갈등적 시각을 결합한 이론가들이다. "톰프슨은 부의 분배야말로 사회의 다양한 성원들이 얼마나 많은 쾌락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341) 자유 교환 논리를 받아들인 톰프슨이 "보수적인 자본주의 옹호론의 공리주의를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노동자가 자본주의 하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판매한다는 주장을 부인했기 때문이다."(345) 그가 보기에 굶주림의 위협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협과 마찬가지로 강제적인 것이다. 톰프슨은 경쟁적 개인주의보다 협동적 사회주의가 낫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모든 동기를 자기 이익의 합리적 추구로 환원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는 톰프슨 자신의 공리주의적 심리학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었고 그 결과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져들고 말았다.(358)


"호지스킨은 자본이란 본질적으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생산물을 수탈하는 강제적 권력을 내포하는 사회적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자연이 정한 법령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호지스킨은 노동의 산물인 "자본을 생산하지 않은 이가 소유하는 것은 비자연적이며, 또 대부분의 사회악의 근저에 도사린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호지스킨에게 이상적인 사회란 "일도 하지 않으면서 소유권으로 소득을 얻는 게 가능하지 않은 사회였다. 자본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노동하는 이들뿐이며, 이들도 자신들의 생산활동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자본만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이런 사회에서만 상품의 가격에 이윤과 지대를 계산에 넣어야 하는 필요가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만 자연가격과 사회적 가격이 일치한다." 즉, 호지스킨의 시스템은 "자본가가 없는 경쟁적 자본주의였다."(367-9)


효용가치론적 접근을 일관되게 전개한 최초의 경제학자는 바스티아다. 그는 "교환은 정치경제학이다. 교환은 사회 자체이다. 교환이 없는 사회 또는 사회가 없는 교환이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384) 바스티아의 접근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노동은 그저 서비스의 한 유형에 불과하며 지주와 자본가가 수행하는 다른 종류의 생산적 서비스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었다."(387) 밀은 바스티아와 달리 사적 소유가 자연이나 하나님이 만든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밀은 정치경제학의 핵심을 교환에 두는 것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환은 생산물 분배의 근본적 법칙이 아니다. 이는 도로와 교통수단이 운동의 본질적 법칙이 아니라 단지 그 법칙을 현실에 발현시키는 기계적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점을 혼동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실수를 저지르는 것으로 보인다."(401)


밀은 노동자가 단결하면 '파업의 경험'이 가능해지며, 이는 "임금과 노동의 수요·공급의 관계라는 주제를 노동자계급에게 교육시키는 최고의 교사"라고 말했다.(409) 밀은 극심한 빈부의 차이 때문에 당대의 자본주의적 계급 구조를 도덕적으로 거부했으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폐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인류가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는 두 개의 세습적 계급으로 나뉜 상태가 영구적으로 유지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밀이 관심을 두었던 으뜸가는 질문은 자본주의가 모종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사회로 진화하는 사회적 변화의 방향과 속도였다.(415) 그러나 밀의 직접적인 목적은 자본주의의 개혁을 증진하는 것이었다. 바스티아처럼 현존하는 소유권이 신성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에 반대하여 밀은, "사회는 충분히 숙고하여 공공선에 합치한다고 판단을 내린다면 어떤 특정한 소유권도 바꿀 수 있고 아예 폐지할 수도 있는 완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418)


마르크스는 "모든 상품에 공통적인 요소로서 직접 양적으로 비교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의 일부를 이루는 유일의 요소는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보았다.(443) 인간 노동의 생산물은 "오직 시장에서 화폐와의 교환이라는 목적으로 생산"되었을 때만 상품이 된다. 따라서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는, 즉 직접적으로 교환을 위해 생산되는 생산양식이야말로 부르주아적 생산의 가장 일반적이고도 가장 맹아적인 형태"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448) 마르크스에게 중심적인 질문은, "잉여가치, 즉 M’이 M을 넘는 초과분을 발생시킨다고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을 과연 유통영역 안에서 해명할 수 있는가이다."(453) 그가 생각하기에, "잉여가치의 원천은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즉 잠재적 노동)과 노동력으로 생산되어 실현된 노동을 체현하고 있는 상품(즉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를 소비한 것)의 가치 사이의 차이일 수밖에 없다."(458)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 사회에서 하나의 소수 계급의 사람들―자본가―이 생산수단을 독점한 탓에 대다수의 직접 생산자들―노동자―이 생산수단이 없어서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 없을 때 존재한다. 노동자는 다음의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굶든가 아니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든가. 자본주의는 이렇게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 진화해온 독특한 생산양식으로서, 지배계급이 상품 생산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능력을 통해 피지배계급을 통치하는 생산양식이다."(459)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을 가장 신랄하게 비난한 것은 "인간의 인격적 발전을 좌절시키고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제반 활동을 시장의 소외된 상품으로 만드는, 이러한 노동계급의 비하와 철저한 비인간화였다."(501)


# 경쟁과 축적의 네 가지 결과

1. 경제적 집중 : 강자가 약자를 분쇄, 흡수, 합병한다.

2. 이윤율 저하 경향 : 이윤율 계산의 기초는 자본(생산수단+노동력)이지만,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노동력뿐이다. 자본축적이 커질수록 생산수단의 가치가 노동력의 가치보다 빠르게 증가해서 이윤율이 하락한다. (이윤 총량은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다)

3. 소비재와 자본재 부문 간의 불균형과 공황 : 호황기에 노동 수요가 급증하면, 자본가는 생산성을 높여 고임금을 억제하려고 한다. 이에 따라 생산기술이 발전하면 잉여 노동 인구가 늘어나는데, 늘어난 생산량과 실업으로 인해 줄어든 총수요가 불균형을 이루어 공황을 초래한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외와 비참의 증대 : 인간은 노동을 통해 감각과 지성을 개발하고, 생산물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실현을 달성한다. 그러나 노동력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의 소외를 맛보게 되고, 자본축적이 증가할수록 이러한 비참함은 증가한다.


제번스, 멩거, 발라가 경제 이론에 도입한 '한계주의marginalism'는 "인간 본성을 오로지 효용의 합리적 계산을 통한 극대화에만 있다고 보는 공리주의적인 비전을 미적분학으로 풀어서 정식화했다. 일반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도록 경제 이론을 수학으로 정식화하는 경향이 바로 여기에서 진짜로 시작되었다."(517) 제번스는 자연적 조화가 존재한다는 공리주의적 신념에 따라 "시장 자본주의의 자연적 상태가 계급 갈등이 아니라 사회적 조화라고 확신했다." 그는 경제학에서 모든 인간들은 다 형제라고 말했는데, "이 사회적 조화의 '형제애'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을 오로지 교환 당사자로만 본다면 누구나 다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똑같게 보이기 때문이다."(524) 이처럼 이들의 공리주의는 자신을 기만하면서 주관성(쾌락, 가치부여, 심미안 등)을 객관성(계량화)으로 치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미스, 리카도, 마르크스에서 "지대, 임금, 이윤은 전체 사회에서 계급에 따른 소득분배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지만 개별 기업의 생산물을 구성하는 비용 요소이기도 하다. 이것을 비용의 구성 요소로 보아 합산한 것이 스미스의 '자연가격' 또는 마르크스의 '생산가격'이다." 그러나 "효용가치론의 관점은 가격 결정 과정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며, 수요와 공급은 효용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소비재 가격의 궁극적인 결정 요소는 효용이다.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요소'의 가격 또한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된다. 이 세 생산요소의 공급은 그것들의 소유자의 효용 계산에 따라 결정되며, 그 수요는 그 세 가지 요소가 소비재 생산에서 얼마나 큰 생산성을 갖는가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소비재에서 소비자들이 얼마나 큰 효용을 얻는가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효용가치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임금, 지대, 이윤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소비재의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533-4)


발라는 경제가 균형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하지만 거기에는 "완전경쟁의 가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신고전파가 보는 완전경쟁의 그림에서는 모든 기업이 가격 수용자이다. 가격이 먼저 시장에서 확립되며, 기업은 그 뒤에 이 가격에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 새로운 가격은 어떻게 확립되는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오늘날까지 이 문제로 대단히 골치를 앓아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라는 경매인 또는 '호가자呼價者'가 존재하여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품의 가격을 알린다고 가정해야만 했다."(555) 발라는 "사회주의를 혐오했지만 '시장의 무정부 상태'(비록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사용하는 표현이지만)의 문제를 피하는 수단으로 결국 호가자와 중앙 계획 기구 모델을 선택했다." 발라 이론의 문제는, "어느 한 가격이라도 변한다면 그때마다 이 변화가 한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른 시장에도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557-8)


산업혁명 초기의 산업자본가는 "실제의 생산과정을 직접 감독하고 조정하며 지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의 노력에서 중심적인 초점 또는 목적은 산업자본의 신속한 축적이었고, 이들의 주된 지적인 관심은 자본축적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노동가치론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에 초점을 두면서 이러한 자본축적 과정에 대해 가장 유용한 지혜를 제공했다." 그러나 "산업화의 으뜸가는 형태로서 주식회사가 성장하고 또 이에 따라 산업의 집중이 증가하면, 산업자본의 축적의 성격과 산업자본가의 역할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가 생겨난다. 자본축적은 이제 체계화되었고, 제도화되었고, 정규화되었다." 산업자본가가 지주계급을 닮아가면서 "소유권을 신성한 것으로 인정하고 교환경제의 미덕을 높이 내거는 이론"이 필요해졌다. 바로 그 시점에 "효용 이론 또는 시장의 관점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의 모든 요소의 공통된 이익에 복무하기 시작한 것이다."(566-8)


"사고파는 상품의 수량을 조금씩 한계적으로 조정함으로써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 신고전파 이론에서 가능한 이유는, 한 상품 대신 다른 상품을 쓸 수 있다는 대체 가능성substitutability 개념 덕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의 유일한 고려 사항은 "상품에서 얻는 한계효용이 얼마인가 그리고 그 상품을 얻는 비용은 얼마인가이다. 따라서 어떤 상품의 비용이 증가하면 소비자는 그 비싸진 상품의 소비 일부를 줄이는 대신 다른 상품의 일정량으로 그것을 대체한다."(591-2) 마셜은 소비재의 대체 가능성 개념을 생산요소에도 적용시킨 경제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기업에서 생산요소의 대체 가능성은 가계에서 소비재의 대체 가능성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생산요소의 사용 증가에서 수확체감이 나타난다는 법칙 또한 한 상품의 소비량 증가에서 한계효용 체감이 나타난다는 법칙과 유사하다. 마셜 이후로 기업의 극대화 이론은 가계의 극대화 이론과 분석적으로 거의 동일한 것이 되었다."(594)


각각의 생산요소가 그 한계생산물의 가치와 동일한 소득을 얻는 완전경쟁 시장에서 "모든 요소가 얻는 소득을 모두 합한 것은 총생산물의 가치와 정확하게 동일하다. 착취의 가능성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생산요소가 생산한 것과 같은 가치를 수취하며, 누군가가 수탈할 잉여는 존재하지 않는다."(618) 이 교환 체계에는 두 기계신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기업가entrepreneur로서, 극대의 이윤을 쫓는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충동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돌아가게 만들고 그 결과로서 생산요소를 소비재로 변형하여 효용 극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두 번째 기계신은 발라가 말하는 호가자이다. "일반균형 상태에서 수요와 공급의 힘이 자유롭게 작동할 때 그러한 균형적 정상가격 조합이 확립되며, 그러한 가격 조합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생산요소가 창출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만큼을 얻게 되고, 공황이나 비자발적 실업 따위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621-2)


"신고전파 분배 이론에서 자본의 가치는 자본의 생산성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의 생산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본의 가치를 가정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자본의 가치가 자본의 생산성을 결정하는 꼴이 되지만, 신고전파 이론에서는 이러한 인과관계의 방향을 거꾸로 뒤집어야만 한다. 즉 자본의 생산성이 자본의 가치를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신고전파 한계생산성 분배 이론이 논리적으로 성립하려면(즉, 이론적으로 순환논증이 아니냐는 공격에서 벗어나려면), 생산에 사용된 자본의 수량을 자본의 가격과는 전혀 무관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해야만 한다."(625) 클라크 이후 "신고전파의 이론에서는 자본의 수량이 자본의 한계생산성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것이 다시 자본의 가치를 결정하도록 인과관계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이들은 "실제로는 그런 척도를 전혀 찾아낸 적이 없"으면서도 그런 척도를 찾아낸 것 마냥 계속 이런저런 이론을 구축해왔다.(628)


19세기 후반 '테일러주의'로 대표되는 과학적 경영은 개인적 차원의 자본축적 양식을 대규모 주식회사 형태로 합리화, 정규화, 제도화했다. "이러한 제도적 변형으로 나타난 결과 중 각별히 중요한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자본의 국제화였다. 두 번째는 자본가계급 구조의 변화이다. 자본가계급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배력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축적 과정의 제도화로 인하여 자본가들의 대다수는 가만히 앉아서 부재 소유권absentee ownership만 보유하고도 지위를 영구화시킬 수 있었다. 자본가들의 대다수는 이제 순수한 금리 수취 계급이 되었으며, 그들 중 오직 소수만이 관리(경제와 정치 모두에서)의 기능에 종사하면서 전체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일종의 집행위원회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집행위원회는 이 새로운 기업 구조의 '관리자들을 관리함'으로써 그 기능을 수행했다."(644)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베블런의 근본적 비판은, 그것이 인간 본성과 사회제도에 대해 철저하게 몰역사적이고 단순화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652) 베블런은 "생산이란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며, 여기서 인간들은 지식과 기술을 공유하고 또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하며, 자연을 인간의 필요와 쓸모에 맞도록 변형시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사회적으로 협동한다. 이러한 과정을 분리하는 것, 게다가 그 과정에 들어가는 상이한 요소를 오로지 토지, 노동, 자본으로 범주화하는 것은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시대에만 고유하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656) 따라서 소유권의 근거가 그 소유자의 생산적 노동에 있다는 "사적 소유의 관점은 보수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옹호할 때도 사용되며 또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공격할 때도 사용"되지만, 어느 경우든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소유의 기초인 생산과정을 개인이 수행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661)


"부자들의 과시적 소비 행태를 기술하면서 베블런은 단지 재미난 일화를 늘어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금전적 문화는 무엇보다도 남의 질투를 유발하는 차별의 문화이다. 어떤 개인의 인간적 가치가 무엇보다도 금전이라는 질투 유발의 차별 시스템에서 측정된다면, 사회 안에 작동하는 가장 강력한 힘의 하나는 경쟁적 모방emulation이며, 이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보수주의를 확고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된다."(687-8) 사람들이 "모방적 소비 또는 소비주의라는 쳇바퀴에 갇히면 이들은 이제 얼마의 소득을 얻든 '만성적 불만족'의 삶을 산다." 이제 빈곤의 나락에 빠지지 않은 노동자들마저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 베블런은 이 비참함이 "정신적 사실이라는 것 때문에 현실성과 절실함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말로 이는 정신적 사실이기 때문에 더욱더 실질적이고도 치유가 불가능한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691)


신고전파 미시경제학 이론에서 "소비자의 효용 극대화를 분석하는 한계효용 이론에서 무차별곡선indifference curve을 도입하게 되면 효용의 양을 객관적으로 측정하여 기수적基數的으로 수량화할 수 있다는 가정을 버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저 소비자가 상이한 상품에 대해 무엇을 무엇보다 더 좋아하는지처럼 각각의 재화에 대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호에 서열을 매길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는 효용을 그저 서수적序數的으로만 수량화하는 것(즉 서열 매기기)을 말하는 것으로서, 개인들 사이의 효용 비교는 요구하지 않는다."(762) 효용 가능 곡선 위에서 "아무리 생산을 변화시키고 상품 교환 수량을 변화시킨다 해도 누구든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게 되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이익을 해치게 된다."(769) 따라서 최초의 부의 분배 상태가 주어지면, 생산과 교환을 통하여 거기서 도달할 수 있는 극대의 수준까지 효용이 늘어나게 되는데, 이 점이 바로 '파레토 최적Pareto optimum'이다.


# 효용 가능 곡선 : 생산량의 수준과 생산물의 구성이 균형 상태에 도달하여 그 결과 나타나는 교환이 위치하는 선


"후생경제학의 가장 기초적인 규범적 원리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언명할 수 있다. 쾌락은 더 많은 편이 더 적은 편보다 윤리적으로 선하다(벤담이 말한 방식). 더 많은 효용이 더 적은 효용보다 윤리적으로 선하다(19세기 말 신고전파의 방식). 한 사람의 선호 순서에서 더 선호되는 위치가 덜 선호되는 위치보다 윤리적으로 선하다(오늘날의 신고전파 방식). 이 각각의 경우마다 어떤 사물의 쾌락, 효용, 선호도를 제대로 평가할 자격을 갖춘 유일한 판단자는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후생의 크기는 오로지 그 개인과 소비 대상 사이의 관계로만 결정된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개인이 가진 욕망에다 시장의 구매력을 가중치로 계산한 것이 사회적 가치의 궁극적인 기준이다." 후생경제학은 "개인의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특정한 사회적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에서 생겨나는 산물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다."(776-7)


파레토 최적을 정부 정책의 규범으로 삼는 관점은 정부를 그림자 같은 존재로 다룬다. "파레토 최적이 존재하는 한 정부는 전혀 언급되는 법이 없다. 그러다가 불완전성(이는 보통 완벽한 이 세상에 어쩌다가 일어나는 고립된 사건이라고 간주된다)이 생겨나면, 정부가 갑자기 무슨 기계신처럼 시장 위에 내려와서 그 시스템에 일종의 지복 상태를 회복해준다. 정부는 시장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불편부당한 존재로서, 이따금씩 무대 위로 내려와 파레토 최적을 회복하기 위하여 소비세를 부과하거나 보조금을 주는 존재다."(786) 신고전파 후생경제학에 따르면, "시장경제에서 어떤 개인이나 기업의 행동이 다른 개인이나 기업에 쾌락이나 고통을 일으킨다고 해도, 이 행동에 대한 가격이 시장에 의해 매겨지지 않는 경우는 모두 외부성의 개념에 해당한다." 이들이 환경오염 같은 외부성을 처리하는 방법은 "새로운 재산권을 창출하고, 그러한 권리를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다."(790-1)


신고전파의 임금률과 총생산량 분석에서 "실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노동자가 자신들의 한계생산물의 가치보다 더 많이 받을 때에만 일하려 하기 때문이다."(819) 케인즈는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낮추는 것이 실업의 유일한 대책이라는 신고전파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실질임금은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통해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임금재의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하거나 천천히 떨어지게 만들면서 화폐 임금률을 더 빠르게 줄이면 된다는 것이었다(이는 대부분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추천하는 방식이다). 둘째, 화폐 임금률이 동일하거나 천천히 증가한다면 임금재의 가격을 더 빠르게 증가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첫 번째 방법으로 임금을 줄이는 것은 노동자들이 절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지만, 두 번째 방법은 그럭저럭 평화적인 가운데 용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824)


케인스가 거부했던 신고전파의 믿음은, "만약 자본주의 경제가 완전고용 상황에서 출발한다면 이자율이 자동적으로 이자와 저축을 동일하게 만들어주고 이에 따라 총수요는 총공급과 일치하게 되어 있다는 명제였다. 그가 신고전파의 시장의 자동조정 이론과 단절한 주요한 지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비록 그는 저축이 이자율의 영향을 받는다는 신고전파의 생각을 받아들였지만, 저축량을 결정하는 데 이자율보다 훨씬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총소득의 수준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둘째, 그는 이자율을 결정하는 것은 저축과 투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자율이란 화폐의 수요와 공급을 동일하게 만들어주는 가격이며, 투자 및 저축과는 상당히 다른 문제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이 생각은 "시장에 자유와 경쟁이 주어지면 파레토 최적의 자원 배분이 생겨나게 된다는 주장 그리고 각 생산요소의 한계생산성이 분배를 결정한다는 주장을 함께 무너뜨렸다."(826)


# 하락의 나선형 악순환

화폐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는 이자율 r1에서 저축이 투자를 초과 → 총수요가 총공급보다 낮아짐 → 기업 생산물이 모두 팔리지 않아 재고 증가 → 개별기업의 생산량 축소 → 고용 및 소득 감소 → 총수요 더욱 감소 → 생산량 축소 ...


# 하락의 나선형 악순환에 대한 케인즈의 해결책

1. 화폐 공급을 늘려 이자율을 저축과 투자가 일치하는 수준으로 조정한다.

2. 이자율이 이미 너무 낮아 통화정책이 별 효과가 없는 경우라면, 과잉 저축분을 정부가 차입하여 공공 사업을 시행한다. 공공사업이 중간 및 하층 소득자에게 더 큰 혜택이 된다는 이유로 정치적, 현실적 난관에 부딪히는 경우, 무익한 활동이라도 벌이는 것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낫다.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두 가지의 기술이 있다고 하자. 기술 A에는 많은 양의 노동이 들어가지만 노동시간은 생산과정의 후기 단계에 집중된다. 기술 B에는 적은 양의 노동이 들어가지만 노동시간은 생산과정의 초기 단계에 집중된다."(889) 신고전파 이론은 기술 A와 B 중 어느 쪽이 더 자본집약적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로지 이자율이 떨어지고 임금률이 오르면 이윤 극대화 기업은 항상 자본 집약도가 낮은 기술에서 높은 기술로 전환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러나 "똑같은 종류의 물리적 자본재를 똑같이 조합하여 똑같은 시간적 구조로 똑같은 조건에서 사용했는데도, 거기서 창출된 자본의 가치는 현행 이자율과 임금률이 얼마인가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생산의 물질적 조건이 동일하다고 해도 상이한 상품 사이의 생산비용의 비율 또한 변할 수 있다."(892-3)


# 기술 재전환

1. 기술 A가 더 자본집약적인 경우 : 이자율이 아주 높고 이에 상응하는 임금률이 아주 낮을 때

2. 기술 B가 더 자본집약적인 경우 : 이자율이 점차 낮아지고 이에 상응하는 임금률이 올라갈 때

3. 다시 기술 A가 더 자본집약적인 경우 : 이자율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임금률이 올라가는 상황의 특정한 지점. 즉, 이자율 하락폭이 임금률 상승폭을 상회할 때 도달하는 특정한 지점.


기술 재전환을 발견한 스라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이한 노동량을 내포한 여러 '기간들'을 합산하여 이것으로 자본의 양을 표시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단일한 수량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산 방법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품 사이의 상대 가격 변동 방향이 거꾸로 뒤집히는 현상은, 자본을 분배 및 상품 가격과 무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수량으로 보는 그 어떤 생각과도 화해가 불가능하다."(893) 여기서 "기술 재전환이라는 것이 과연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가 아니면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일어나는 일인가의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신고전파 이론의 기대와는 달리 기술 재전환이 불가능한 경우는, "두 기술 모두 자본재 생산 부문과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자본-노동 비율이 동일할 때만 나타난다. 그 이외의 모든 경우에서는 기술 재전환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에 신고전파 경제 이론은 논리적 모순에 휘말려든다."(898)


여기에는 최고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거의 항상 노동가치론을 가격이 노동가치에 비례한다는 명제와 동일시해왔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상품 가격과 노동가치의 엄밀한 비례 관계를 조정한 "수정 원리가 논리적, 이론적으로 성립 가능하다는 사실을 한사코 거부해왔다. 이들은 노동가치론은 모든 산업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동일할 것을 요구하는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이론을 비웃고 거부했다. 이런 비현실적인 가정이 도대체 어떻게 실제의 경제 현실에 대한 기술이 될 수 있겠느냐며 한심한 것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스라파의 비판을 통하여 "형세는 완전히 반전되었다. 노동가치론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모두 동일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이를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신고전파 이론 쪽이 되어버렸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기술 재전환의 딜레마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모든 산업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동일할 때뿐이다."(898-9)


폴 새뮤얼슨은 "자신의 논문 <자본 이론에서의 우화와 현실주의: 대리생산함수>에서 신고전파 이론(그리고 이데올로기)을 구출하기 위한 멋진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스라파의 비판을 인정했지만, 단순하면서도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화'―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가진―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 우화의 유비를 통해 J. B. 클라크의 '진리'를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901) 신고전파 이론의 열정적인 추종자들이 "그저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에서 (신고전파 이론을) 내팽개치기에는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너무나 크다." C. E. 퍼거슨의 저서 서문을 보면, 신고전파 이론에 몸 바친 열정적 추종자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솔직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고전파 경제 이론에 의지할지 말지는 신앙의 문제이다. 나 개인은 이 이론을 믿는다. 하지만 현재로서 내가 다른 이들도 이 이론에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새뮤얼슨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뿐이다."(904-5)


# 새뮤얼슨의 자유방임주의 비판 수용과 반론

1. 자유 시장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러나 정부의 확장을 통해 혼합경제가 창조되어, 불안정성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2. (독)과점은 경쟁에 의한 효율성을 저해한다. 그러나 정부의 규제와 반독점 법률은 가격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다.

3. 사회가 반드시 소비해야 하지만 개인들이 효율적으로 생산하지 못하는 공공재가 존재한다. 이 공공재는 정부 선출 과정과 정부가 마련한 법령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4. 외부성은 도처에 존재한다. 외부성을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자본가는 없다. 따라서 정부의 공적 개입이 필요하다.

※ 새뮤얼슨은 정부 개입이 신고전파의 3대 이데올로기를 이상에 가깝게 실현되도록 뒷받침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의 정부는 기득권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새뮤얼슨은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대공황과 1,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방임 자본주의라는 신념을 일정부분 포기한 케인즈 경제학과 '발전' 경제학이 도입되었지만, 신고전파는 군수경제와 이데올로기적 중요성에 힘입어 여전히 경제학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1912-2006)은 대공황의 책임 추궁을 오롯이 정부 정책의 어깨 위에 쏟아부음으로써 대공황을 설명하고 대공황 때문에 신고전파의 자유방임 정책이 겪어야 했던 신뢰의 위기를 해소했다."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1915-2009)은 신고전파 이론을 고도로 훈련된 신고전파 경제학자 이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더욱 중요한 업적은 전통적인 신고전파 이데올로기와 새롭게 나타난 케인스 경제학 및 발전경제학이라는 서로 상극으로 양분화된 상태를 극복하여 화해시킨 것으로서, 이것이 나중에 표준적인 정통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935-6)


한편, 제3세계의 저발전 국가들은 "자유 시장에만 의존하는 것으로는 자신들의 상황을 절대로 개선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여기서 소비에트 경제가 보여준 급속한 공업화의 예는 강력한 매력을 던지고 있었다." 아서 루이스W. Arthur Lewis(1915-1991)는 발전경제학 분야를 창조하여 저발전 국가에 "강제적 공업화의 매뉴얼과 같은 것을 제시"하고, 선진국의 다국적 기업들에게 "안전하고도 이윤 좋은 투자기회를 보장할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법률적, 경제적, 국가적 제도와 장치를 갖추도록" 하는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937) 루이스에 따르면 제3세계 나라들에 필요한 것은 바로 '더 많은 저축'이다. 그렇게 되면 "전통 부문에서 '무시할 만큼 적어서 제로 또는 심지어 마이너스'의 한계생산성으로 일하던 비생산적 노동자를 자본주의적 부문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이들의 한계생산성이 훨씬 더 높아져서 경제 전체의 생산을 증가시키고 종국에 가면 모든 이들의 경제적 후생을 증대시키기 때문이다."(940)


오스트리아 및 시카고학파는 "리버럴 신고전파 학자들이 자유방임 이론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네 가지 주요 영역에 크게 괘념치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리버럴 신고전파와는 달리 정부 활동의 고유한 영역을 현존하는 시장 시스템을 보호하는 것(즉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계약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 이상으로 확장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958-9) 기술 재전환 문제의 증명과 관련해서 이들은 "자본주의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인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애초부터 자본이라고 부를 만한 보편적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자본의 생산성을 계산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미 오래전에 세, 시니어, 바스티아가 시작한, 노동과 자본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드는 작업 과정을 이들이 완성한 셈이다. 이들의 이론에서는 노동자도 자본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교환을 행하는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961)


신고전파 경제 이론의 두 주요 분과(소비 이론과 생산 이론)를 보면 "소비란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교환만을 포함하는 반면, 생산은 '자연과의 교환'이다. 따라서 모든 경제활동은 교환일 뿐이다." 자본과 이자에 대한 오스트리아 및 시카고학파의 접근법에서는 "모든 상품에 현재의 가격과 미래의 가격이 존재한다. (지금 당장 사용되는 노동이나 미래에 사용되는 노동에 대한) 임금률도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이다. 투자란 자연 또는 다른 교환자와 현재의 재화를 미래의 재화로 교환하는 것일 뿐이다. 자본은 모든 미래 소비재의 현재 가치(그 개인이 그 소비재를 소비할 수 있는 미래 시점까지의 이자율로 할인한 가치)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미래에 무언가 향유할 재화가 있다면 정의상 모든 개인은 다 자신의 자본을 가지고 있는 셈이며, 결국 모든 개인은 미래와 현재 사이에 걸쳐서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교환을 하고 있으므로 모두 다 자본가이다."(963-4)


# 자유방임주의 비판에 대한 이들의 대응

1. 시장의 불안정성은 정부의 지나친 개입 탓이다.

2. 거대 기업은 중대하고 유의미한 독점력을 갖고 있지 않다. 현존하는 독점력은 정부의 도움을 얻어낼 수 있는 경우뿐이다.

3. 정부가 공급해야 하는 유일한 공공재는 국방이다.

4. (환경 오염 같은) 부정적 외부성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창출하여 시장에 내놓는다.


제도주의 경제학자인 "에이레스는 베블런을 따라서, 대부분의 인간 활동과 가치는 두 개의 이분법적이며 적대적인 범주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쪽 극단은 미신적이며 의식儀式과 결부된 의전적ceremonical 가치 및 활동이다. 이러한 가치 및 활동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위계적 구별을 창출하고 보존하는 것을 사회적 기능으로 삼는다. 이 이분법의 다른 쪽에는 기술적 가치 및 활동이 있다. 이러한 가치 및 활동은 에이레스가 '사회 전반의 생활 과정general life process'이라고 부른 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996) 제도주의 경제학자들은 "정치·경제·사회적 권력이 어떠한 제도들에 기반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권력이 시장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으며 어떻게 시장에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는가를 연구"한다. 이들은 경제를 "사회적 가치 평가 과정의 일부로 보며, 이 과정은 상품의 가격 결정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중요한 과정이라고 본다."(1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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