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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
조이스 애플비 지음, 주경철.안민석 옮김 / 까치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자본은 대개 무엇인가를 생산하여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 사용될 때에 자본이 된다. 그런 사적투자의 원칙과 전략이 지배적인 때가 되어야 비로소 '자본(capital)'에 '주의(ism)'를 붙일 수 있다." 혁신이 관습을 이기기 위해서는 "행운을 동반한 많은 요소들이 필요했다. 결의에 차 있고 단련된 개척자들은 원래의 질서로 복귀하라는 명령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뿌리를 내릴 때까지 지속적으로 혁신을 추진해야 했다. 그 과정은 작은 변화가 계속 누적되어 결국 큰 변혁을 일으키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제방에 작은 구멍이 뚫려서 그 안에 갇혀 있던 엄청난 에너지가 일단 분출되기 시작하면 다시는 그 구멍을 메울 수 없는 현상과 유사했다."(15-6) 16세기 영국에서는 초기의 사업적 성공이 지속적인 다른 혁신들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발생은 민족적 우월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발적 사건과 우연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23)
스미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란 '거래하고 교환하려는' 사람들의 보편적 성향에서 자연스럽게 출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제발전이 그런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촉진시켰다." 19세기의 사회 혼란을 목도한 마르크스는 "그런 강제력을 새로운 계급관계의 형성에서 찾았다. 그것은 생산활동 과정에서 서로 공유하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람들이 연합하는 것이다. 베버는 진보적인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새로운 가치, 관습, 사고방식이 어떻게 전적으로 다른 생활 리듬과 도덕적 어휘를 가지고 있었던 전근대 유럽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베버의 결론은 자본주의가 "소위 '자본주의 정신'이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라는 것이었다.(24-6) 자본주의는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투자자들의 요청에 부응하는 경제관행들에 뿌리내린 체제"로서,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니라 문화체제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요인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36)
자본주의를 만든 변화를 추적할 때, "구례의 상업관행과 산업생산의 혁신을 구분"해야 한다. "교역 루트와 파트너의 확대가 가지는 중요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자본주의 역사에서 교역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핵심은, 그것이 자본주의 이전에도 수 세기 동안 존재했으며 또한 자본주의 없이도 꾸준히 번성했으리라는 점이다." 17세기 중반 새로운 교역로가 열렸을 때, "수천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생산방식을 변화시킬 놀라운 기계들이 연달아 발명되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관한 새로운 설명이 등장하여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온 전통적 지혜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이 예측했으리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43) 저자는 "신세계의 발견과 자본주의의 출현을 연결지어서 생각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통념을 깨고자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교역의 확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태도와 기술들을 필요로 했다."(65)
"활자의 발명으로 인쇄비용이 하락했고, 일종의 출판시장이 형성되어 탐험의 소식들을 전 유럽에 전파했으며, 그리스의 천문관측의와 나침반은 대양항해를 뒷받침했고, 이탈리아의 복식부기는 상인들의 이윤관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런 발전들이 모두 산업화에 기여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다만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한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었다. 자본주의는 식량을 재배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 다른 차원의 사회적 역동성과 혁신을 필요로 했다." 그런 점에서 영국은 주변국들과 다른 길을 개척했다. "영국 정부는 철저히 귀족들을 장악했지만, 그 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기업활동에 열광적으로 참여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귀족들이 농업개량을 후원했다는 사실이다. 농업의 발전은 얼마나 많은 노동자와 자본을 다른 경제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지를 결정했다."(66)
기근이 일상적이었던 전근대 시기까지 "곡물은 가장 높은 가격을 찾아서 자유롭게 유통되는 상품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차지농이건 자영농이건 지주이건 간에 농부가 곡물을 재배했다고 해서 그 수확물을 진짜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는 단지 곡물이 밭에서 시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보살피는 사람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밀가루를 빻는 제분업자와 빵을 굽는 제빵업자는 정해진 방식에 따라서 마무리 공정을 진행하여 빵이라는 최종적인 결과물을 지역의 순회재판소에서 정한 가격에 판매했다."(68) 17세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대략 80퍼센트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냉혹한 통계치를 바꾸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70) 식량가격이 떨어져야 "지주나 도시 부유층이 아닌 사람들도 공산품과 수입물품을 구매할 수 있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기근으로부터 영구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이 필수적인 변화들이 유달리 관습에 집착하는 농촌 공동체에서 시작되어야 했다는 사실이다."(82)
"네덜란드의 일부 농민들은 매년 경작지의 3분의 1을 휴경하는 오래된 중세의 관행을 중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경작면적을 3분의 1 가량 늘렸다. 휴경지를 없애고 땅을 네 부분으로 나눈 다음 계절에 따라서 곡물, 순무, 건초, 클로버 순으로 돌려짓기를 했다. 클로버는 토양에 질소를 공급한 후 가축의 사료로 이용되었다. 성장의 선순환이 쇠퇴의 악순환을 대체했다. 몇몇 지주들과 농민들이 이런 생산성 향상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이제 역사상 최초로 기근의 경제로부터 영구적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일부 영국 농민들은 "네덜란드식 4포제(four-field rotation)를 모방한 반면, 다른 이들은 업앤드다운(up-and-down)식 경작을 받아들였다. 이 경작방법은 지력이 가장 좋은 땅에 3-4년 동안 곡물을 경작한 다음 5년간 방목지로 활용하는 식이었다. 이 기간 동안 가축의 분뇨와 질소고정 식물들이 다시 지력을 회복시켜주었다."(85-6)
농업개량과 시장 확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연이은 풍작은 지적인 측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변화를 덜 위협적으로 생각했고, 자연에 덜 굴종했으며, 권위에 순종하는 경향도 줄어들었다."(91) 도덕주의자들은 여전히 "공동체 경작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상호간의 도리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농업기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에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농부가 융통성 있게 목초나 곡물을 재배하고 방목지에 물을 대며 자신만의 윤작을 시행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이 제기하는 이상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형제애를 기르는 것은 지혜와 통찰, 기율과 지성을 사용하여 자연의 부를 늘리려는 개개인의 노력에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94)
"농업개량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사실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었다. 역사 인구학자들은 출생과 사망의 증감과 함께 곡물가격의 등락을 재구성하던 중 영국 경제사에서 결정적인 기준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1648년에서 1650년 사이에 지독한 흉년이 발생한 다음 곡물가격이 치솟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 곡물가격이 이따금 등귀騰貴하더라도 기근이 재난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농업생산성과 더불어 구매력도 증가하여 "식량이 부족한 시기에는 다른 곳에서 식량을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네 기사 가운데 하나는 이제 영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엄격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그후에도 잔존한 일련의 사회적 관행들 역시 서서히 쇠퇴해갔다. 기근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영국은 1819년에 마지막으로 대기근을 경험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다."(95-6)
"사회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는 주된 이유는 새로운 것은 반드시 문화적 형태로 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과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사람들이 혁신과 그 영향을 평가하고 그것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찾아내며, 또 그것이 공동체의 다른 측면들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101)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죄악에 물든 존재였다. 인간의 본성을 그런 식으로 본다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가지고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시장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진실은 스미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 새로운 관념들은 "이미 상당 기간 존재했으므로 스미스는 그것들을 당연시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새로운 관념들이 보편적 진실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것이다."(104)
17세기 초반, 경제활동의 중심 이데올로기는 제로섬 가정에 근거한 중상주의였다. 즉, 일국의 부는 수입보다 수출이 많을 때 생겨나며, "화폐는 그저 수동적으로 상품이동의 반대방향으로 이전될 뿐"이라는 주장이다.(110) 무역차액론을 반박하고 자유로운 기업 활동이 국내 수요를 진작시켜 국부를 창출한다는 새로운 견해는 "소비가 실제로 경제발전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정말로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엘리트들은 너무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해왔기 때문에 그들이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이런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보통 사람들은 고집 세고 게으르며 조잡하다는 낡은 생각이 하층민에 대한 상류층의 사회적 통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실제로 18세기에 이르면 노동자들로 구성된 "거대한 국내 소비자층이 영국의 상업 팽창을 가능하게 하고 또 시장에 의존하는 대단히 정교한 물질문화를 자극했다."(119-20)
"명심해야 할 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충동적인 인물들과 달리, 새로운 영국의 소비자들은 각자의 환상을 즐기기 전에 고된 노동규율에 적응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고 나서야 욕망에 대한 호소가 억제와 조심스러움에 대한 요구를 대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자본주의는 옛 사회윤리를 제압해갔다."(121) 영국인들은 시장을 "면대면 흥정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계약이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실체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8세기를 거치면서 가격, 수요, 무역정책 등에 관한 저술들이 상당히 정교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화폐, 식량, 토지는 특별한 지위를 상실하고 가격과 비율에 따라서 평준화되었다. 거래 당사자로서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믿음은 인간이 본래 불평등하다는 널리 퍼진 믿음을 교묘하게 약화시켰다. 머지않아 도덕과 고정된 신분제도의 수호자들도 교환 가능한 시장 참여자들이라는 가장 대중적인 관념을 수용해야만 했다."(129)
"17세기 후반의 정치는 유럽의 무역 패턴에 변화를 가하여 자본주의의 역사를 바꾸었다. 왕조 간의 격렬한 경쟁은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및 네덜란드,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및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내 영방국가(嶺邦國家 : 독일과 이탈리아가 민족국가로 성장하기 이전에 각 지역이 분할되어 독립 주권을 누리던 지방국가)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 국가들은 1689년부터 1815년까지, 총 63년 동안 8차례에 걸쳐서 다양한 조합을 이루어가며 서로 전쟁을 치렀다. 이런 적대행위들로 인한 한 가지 중요한 결과는 그 이전 두 세기 동안 상당히 증가했던 유럽 내 교역의 감소였다." 유럽 열강들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면서 "일종의 딜레마가 발생했다. 교전국가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와 신세계에서 부를 수취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수익성 있는 교역을 통제하려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보면 그것이 더 큰 호전성을 유발했던 것이다."(139-40)
자본주의의 새로운 점은 "전대미문의 규모로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야만성이었다."(140) 아메리카의 노예제 플랜테이션에 "자본을 투자한 사탕수수 경작자들은 그들의 노예와 토지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빠른 이윤 회수를 위해서 지력의 쇠퇴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설탕으로 버는 이윤은 엄청났고 플랜테이션 소유주들 또한 지독히 잔인해서 노예들은 문자 그대로 죽도록 일했다. 카리브 제도의 노동력은 10년에서 13년 주기로 교체되어야 했다."(147) 일단 노예제가 정착하면, "아프리카인을 비난할 만한 사항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들의 검은 피부는 검은 악마, 암시장, 암흑가 같은 경멸적인 심상과 표현들을 연상시킨다. 여기에는 또한 놀랄 만한 순환논리가 작동했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노예제에서 발견하는 매력적이지 않은 특징들─게으름, 무례, 아둔함, 무기력─은 다시 노예화를 정당화하는 데에 동원되었다."(152)
자본의 가혹한 착취는 유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세기 넘게 지속된 산업혁명기 동안, 영국에서 작업장 내 변화의 속도와 규모에 반대해서 발생한 직접행동은 400건이 넘었다. 재산의 파괴는 지주들과 제조업자들, 금융가들과 상인들의 무자비한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1846-1848년에 발생한 아일랜드 기근사태를 보면, "수십만 명의 남녀노소가 굶주리고 있었지만, 아일랜드의 곡물은 번영하는 잉글랜드로 수출되었다. 왜냐하면 부재지주가 소유한 토지에서 생산된 식량을 경작자가 소비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은 종종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완화시켜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업무의 균등화, 항시적인 소음, 사고발생에 대한 끊이지 않는 두려움 등으로 인해서 육체노동을 더 힘든 고역으로 만들었다. 기계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기계 소유주들이 자신들의 투자자본을 통해서 최대의 이윤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강도 높은 노동이 일반화되었다."(173)
1789년, 미국은 13개의 반半자치주들을 모아서 단일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헌법을 도입했다. "미국의 자유주의 사회의 기반을 놓은 것이 헌법이라면 자유주의 사회의 기틀을 짠 것은 기업 중심의 자유경제였다. 헌법의 비준 이후에 새로운 경제질서가 형성되었고 영국이 지배하던 경제질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토지와 신용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제거함으로써 수천 명의 행위자가 큰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났다. 정부권력을 탈중앙화하겠다는 제퍼슨의 의지는 농촌지역에도 기회를 부여했다."(198) 공화국의 건설과 함께 "예기치 않은 속도로 확산된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영국으로부터 해방되고 식민지를 지배했던 계급의 정치권력이 사라지자,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제퍼슨과 그 후임자들이 규제를 풀어버린 경제 안에서 그들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었다."(203)
"미국에서 민족주의가 경제발전을 장려했다면 독일에서는 서로 다른 경제체제들을 근대화하는 작업이 민족형성의 수단이었다." 독일 지역의 "민족 만들기는 경제발전을 위한 노력에 도덕적, 낭만적 그리고 미학적인 호소력을 부여했다."(189)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단일 무역 공동체를 결성하는 와중에,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여 독일 통일을 한걸음 더 진전시켰다. 예전에는 경제가 강하거나 약하다고 표현되었지만, 영국이 생산성에 대한 기존의 기준으로부터 점점 더 빠르게 멀어지면서 경제는 선진적이거나 후진적이라고 표현되었다." 이제는 경제가 "발전 혹은 퇴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대가 팽배했다. '퇴보'는 '전통'과는 다른 느낌을 전달했다. 경제적 후진성 개념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프랑스, 영국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켰다. 역사는 곧 진보를 향한 움직임이라고 보는 직선적인 관점에 매우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 관점이 야기한 최초의 충격을 이해하기 힘들다."(193)
"자본주의하에서 저축을 새로운 사업에 대한 투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투자자들을 손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했다. 유럽에는 제대로 동원하기만 하면 산업화에 이용할 만한 돈이 충분히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은행이 필요했다. 은행은 저축하는 사람들을 투자자로 바꾸어서 자본이 산업계로 흘러들어가도록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09) 법인이라는 법적 형식만큼 산업 금융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없다. "법인은 기업의 소유자에게 유한책임을 부과한다. 법인(法人)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상의 인간을 만들어서 세금을 내고, 회사 이름으로 고소해서 빚을 받아내고, 반대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는 주체로 내세운다. 법인은 돈을 빌릴 수 있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주식을 팔 수 있다." 법인은 인공적이기 때문에 "파트너십이 내포하고 있는 해체 위험성을 없애줌으로써 기업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다."(214)
"자본주의는 경제활동에 전대미문의 자유를 부여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역사는 개인의 도전 이야기로 가득하다. 과학과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은 19세기 기업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했으며, 그들은 새로운 과학기술을 다듬어서 자신의 상업적 가능성의 실현에 이용했다. 기업가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서 몇몇 사람들이 자신만의 거대한 경제적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철도계의 밴더빌트, 철강업계의 카네기, 석유업계의 록펠러 같은 "산업계의 리바이어던은 전제군주와도 같은 권력을 가졌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초강력 경쟁자들이 경쟁을 감소시켰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시장 점유율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이 운영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거대해진 탓에 이제 이 기업들은 거대한 법인회사로 발전했고, 이런 형태의 기업이 20세기의 자본주의를 특징짓게 된다."(224-5)
"미국인들은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이상을 열렬히 숭배했지만 일반적으로 부의 불균형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보통 사람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제퍼슨은 "연방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부를 소유한 엘리트 집단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241) 미국에서 백인 집단의 균질성은 "소비재의 대량시장화라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현상을 가능하게 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차별화를 시도하기보다 이웃이 가진 것을 구입하기를 좋아했다. '존슨 네와 같아지기'는 차별화의 노력이 아니라 동질성의 추구였다. 사람들은 친구가 가진 것을 자신도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동질적인 중간집단에 속한다는 것은 매우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대량생산에 매우 적합했다."(247) 소비재의 유혹은 필요가 아니라 욕구에 따르는 새로운 소비 패턴을 창출했고, "회사들은 소비자의 취향, 곧 어지러운 속도로 질주하는 대중의 변덕과 씨름해야 했다."(249)
"20세기 초에 미국이 눈부신 속도로 다른 모든 국가들을 앞지를 때, 미국식 대량생산과 경영조직으로 인해 거침없는 발전은 자본주의적 기업의 논리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이런 전통적인 해석은 사실을 오도한다. 미국 기업들의 합병과 재조직은 필연적이지도 않았고, 또한 더 큰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게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환경과 사회적 가치의 산물이었다. 세 가지만 들어보도록 하자. 약한 정부, 싸고 풍부한 노동력, 표준화된 상품을 수용하는 일반 대중. 미국인들은 모양도 비슷하고 맛도 비슷한 값싼 물건들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역할에 기꺼이 만족했다. 표준화된 제품들에 대한 이런 수용성은 회사들이 대량생산 과정에서 가격절감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든 요인이었다. 이는 구매자들이 여전히 정교한 수제품들을 선호했던 유럽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반응이었다."(290-1)
"대공황 이전까지 진보는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미국 경제는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더 큰 정도로 소비자들에 의존했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다." 계절적 성격이었던 실업은 이제 영구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고 구매를 중단했다. 저축과 은퇴의 계획은 폐점, 퇴거, 도산으로 변모해갔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실업상태에 놓였다. 각 민족집단별 상호부조협회의 자선 네트워크와 교회 복지사업은 한계점까지 내몰렸다.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경제가 불황에 접어들었을 때 개인적인 구제책에 의존해왔는데, 대공황은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303) 어디에서나 가혹하고 장기적인 고통을 안겨준 대공황은 "경제가 스스로를 교정하는 내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대공황은 "통화, 신용, 상품의 흐름을 안정시킬 (새로운) 메커니즘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306)
"전후 각국의 지도자들 앞에는 세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그 길은 각각 '지시의(indicative)' 길, '명령의(imperative)' 길, '정보제공의(informative)'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에서 지도자는 국가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방향을 제시한다. 두 번째 방법에서 지도자는 명령을 한다. 세 번째 방법에서는 시장의 체계화된 언어가 구성원들의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정부 역시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대신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경제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급진적인 계획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뉴딜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정치적 통제에 보다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을 거치며 그들은 이내 기업가들로 대체되었다. 소위 '연봉 1달러의 사나이(dollar-a-year man)'라고 불렸던 이 기업가들은 전시의 생산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런 성공을 통해서 그들은 대공황기에 잃어버렸던 대중들의 신뢰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318-9)
# 지시의 길 : 프랑스, 영국, 스웨덴 / 명령의 길 : 소련 / 정보제공의 길 : 미국
"서유럽 중에서도 유럽 대륙에 위치한 국가들은 코포라티즘(corporatism, 국가의 정책결정에 유력 기업이나 단체의 참가를 요하는 정치제도) 경제를 받아들였다. 정부는 재정 및 통화정책을 통해서 성장을 이끌고 나갔고, 중앙은행은 실질적으로 벤처자금을 독점했으며, 노조는 법인 이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대표권을 지켰다. 안정적인 성장은 공동의 목표였다. 이런 특징은 특히 독일에서 가장 뚜렷했다. 나치에 대한 경험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대산업가를 포함한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강력한 국가를 두려워했다."(325) '초국가 연합'이라는 구상은 1951년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 창설, 1957년 유럽 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 탄생,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한 유럽 연합(European Union, EU) 출범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최초 12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럽 시민권이 탄생했다."(326)
"전후 경제의 또다른 새로운 특징은 급격한 기술변화였다. 기업가들은 다음에 치고 나갈 경주마가 누가 될 것인지 끊임없이 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엉뚱한 경주마를 찍을 위험이나 예상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실현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새로운 탄생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것을 파괴한다. 기존의 것은 대개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했고 생산 및 판매 직원들 모두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이런 파괴의 과정은 기업가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352) 노동의 미래 역시 밝지만은 않았다. "노동자들을 탈인격화하는 경제분석 용어들로 인해서 노동의 승인을 위한 투쟁은 더욱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분석에서 노동은 단지 사업의 주요 구성요소 중 하나, 즉 자본 및 토지와 한묶음일 뿐이었다. 이런 용어는 미묘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탈인격화시켰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물질요소 사이의 엄청난 차이점을 모호하게 만든 것이다."(358)
"자본주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아마도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는 점일 것이다." 급격한 변동 그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 요소가 되었으며, 자본주의는 "누가 이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자기지속적인 체제로 굳어졌다."(368) 번영의 시대를 이끈, "전후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시너지 효과는 1973년을 기점으로 붕괴했고, 그후 가변성과 유동성의 시대가 열렸다."(412) "자본주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자본주의자들의 행동은 반복된다. 위기가 임박했음에도 그것을 막으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누구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떤 성질을 강화시키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자신감으로 가득찬 세일즈맨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은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방법─가능하면 쉬운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에만 몰두하면 위기와 공황, 대폭락은 불가피해진다."(452)
"(자본주의) '체제(system)'라는 단어에 함축된 의미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하나의 통합되고 조직된 체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시장에서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행과 제도의 집합이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혁신에 의존하는데, 혁신은 현재의 상황(status quo)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유시장 체제는 흔히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를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시민들'은 '나, 개인'과 상충하는 개념이 된다. 자본주의는 성장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술적 경이를 필요로 하지만, 새로운 기술의 응용은 노동력, 원자재, 소비자, 법적 보호 그리고 평화를 확보해주는 전제조건인 사회적 안정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멋지게 양립할 수도 있지만, 종종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다투는 연인들처럼 행동한다."(4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