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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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종말의 시작


제27장 신질서 


"신질서Neuordnung는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독일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착취하고, 주민들을 독일인 지배인종의 노예로 삼고, 〈바람직하지 않은 부류〉─유대인이지만 동방의 숱한 슬라브인, 특히 지식인층까지 포함해─를 절멸시키려는 질서였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열등인간Untermenschen이었다. 히틀러가 보기에 그들은 생존할 권리가 없었고, 기껏해야 슬라브인 일부가 독일인 주인의 노예로서 논밭과 광산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데 필요할 뿐이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바르샤바 같은 동방의 대도시들을 영원히 지워버릴 뿐 아니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을 비롯한 슬라브인의 문화를 근절하고 그들에게 정식 교육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동방의 번창하는 공장들을 해체해 독일로 옮기고, 주민들은 독일인을 위해 식량을 생산하도록 농업에만 종사시키고 그들 몫으로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식량만 지급할 계획이었다. 유럽 자체는 나치 지도부가 말했듯이 〈유대인이 없는〉 곳이 되어야 했다."(1611-2)


"('유대인 절멸'을 의미하는) 〈최종 해결〉이라는 표현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나치 간부들의 어휘와 문서에서 점점 더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이 무해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의 실제 의미를 서로에게 일깨우는 고통을 피하려 했던 듯하고, 어쩌면 언젠가 죄증이 되는 문서가 드러나더라도 이 표현으로 자신들의 죄를 얼마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최종 해결〉을 위한 성과를 가장 많이 거둔 곳은 30개 남짓한 주요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였다.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절멸수용소는 네 개의 거대한 가스실과 인접한 소각장을 갖추어 살해 및 매장 능력에서 다른 절멸수용소들─모두 폴란드에 있었던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에 크게 앞선 아우슈비츠였다. 리가, 빌뉴스, 민스크, 커우너스, 리비우에도 별도의 작은 절멸수용소들이 있었지만, 독가스가 아닌 총격으로 살했다는 점에서 주요 절멸수용소들과 구별되었다."(1655-6, 1661-2)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자체와 인접한 소각장은 근거리에서 볼 때 전혀 불길한 장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곳의 용도가 무엇인지 밖에서 보고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 주변에는 잘 가꾼 잔디밭과 꽃밭이 있었고, 입구의 표지에는 그저 〈목욕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유대인들은 모든 수용소의 관례대로 단순히 이를 잡기 위해 목욕을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감미로운 음악까지 들려주었다! 경음악 악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생존자가 기억하듯이, 수감자들 중에서 〈모두 흰색 블라우스와 감청색 치마를 입은 어리고 예쁜 소녀들〉로 오케스트라를 꾸렸다. 잠시 후 치클론 B가 살포될 가스실로 들어갈 이들을 선별하는 동안, 이 독특한 합주단은 〈유쾌한 과부〉나 〈호프만 이야기〉의 즐거운 곡들을 연주했다. 베토벤의 장중하고 침울한 곡은 전혀 들려주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여정은 빈과 파리의 오페레타 못지않게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1665-6)


제28장 무솔리니의 실각 


"한때 북아프리카에서 막강했던 추축국 군대의 잔존 병력을 1943년 5월 초 튀니지에서 생포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영국-미국 군대는 뒤이어 이탈리아 본토를 겨냥할 것이 확실했다. 병든 몸의 무솔리니는 미몽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겁을 먹었다. 패배주의가 이탈리아 국민과 군대 사이에 만연했다." "디노 그란디, 주세페 보타이, 그리고 치아노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반두체 지도부는 1939년 12월 이래 열리지 않았던 파시즘 대평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대평회의는 1943년 7월 24일에서 25일에 걸친 밤에 소집되었고, 무솔리니는 독재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국가를 재앙으로 이끈 실책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대평의회는 19표 대 8표로 민주적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정의 복원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또한 군 통수권 전체를 국왕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두체는 7월 25일 저녁에 왕궁에 불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총리직 해임을 통보받고 불명예스럽게 실각했다."(1707, 1710)


"1943년 9월 초의 두 사건이 총통의 계획을 발동시켰다. 9월 3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단에 상륙했고, 9월 8일 이탈리아와 서방 열강의 휴전협정(9월 3일 비밀리에 체결)이 공표되었다. 하루이틀 동안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서 독일군의 상황은 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연합군 사령부는 이탈리아의 동서 해안 거의 어디서나 상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완전한 제해권을 활용하지도 않았고, 독일 측이 우려한 압도적인 제공권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이탈리아군 사단들을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고 포위하고 무장해제했을 때 독일군은 안도했다. 이것은 독일군이 로마를 쉽게 장악할 수 있고 당분간 나폴리까지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자국을 위해 무기를 생산할 공장들이 있는 북부 공업 지역을 포함해 이탈리아의 3분의 2를 손에 넣었다. 마치 기적처럼 히틀러의 수명은 다시 연장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자 히틀러는 속이 아렸다."(1716-9)


"1943년 7월 5일, 히틀러는 소련군을 상대로 이번 전쟁에서 마지막이 될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다. 독일 육군의 정예 병력─신형 티거 중전차로 무장한 무려 17개 기갑사단을 포함하는 약 50만 명─이 쿠르스크 서쪽의 넓은 소련군 돌출부로 달려들었다. 히틀러는 이 '성채 작전'으로 소련군의 정예인 100만 병력─저번 겨울에 스탈린그라드와 돈 강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던 바로 그 병력─을 에워싸는 데 더해 돈 강까지, 어쩌면 볼가 강까지 밀어붙인 뒤 남동쪽에서 북진해 모스크바를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소련군은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7월 22일경 기갑전력에서 전차의 절반을 잃은 독일군은 완전히 멈추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력 우위를 확신한 소련군은 7월 중순 쿠르스크 북쪽 오렐의 독일군 돌출부를 역으로 공격해 금세 전선을 돌파했다. 이것은 2차대전에서 소련군의 첫 번째 하계 공세였으며, 이 순간부터 붉은군대는 끝까지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1726)


"1943년에 히틀러의 운세를 꺾고 전세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바로 대서양 전투 패배와 독일 본토 상공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화되는 치열한 공중전이었다. 1942년에 독일 잠수함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지중해로 향하던 연합국 선박 625만 톤을 격침했는데, 이는 서방 조선소들의 손실 보충 능력을 한참 상회하는 톤수였다. 그러나 1943년부터 연합군은 기술 개선, 이를테면 장거리 항공기와 항공모함, 그리고 적 잠수함에 발각되기 전에 먼저 적함을 탐지하는 레이더를 장비한 수상함 등에 힘입어 U보트에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독일 국민이 현대전의 공포를 실감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각자의 집 문간에서 실감했다. 영국 항공기가 야간에, 미국 항공기가 주간에 투하하는 폭탄이 이제 독일인의 집을, 독일인이 일하는 사무실과 공장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괴벨스가 일기에서 밝혔듯이, 영국과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가장 크게 손상된 것은 독일의 주택과 국민의 사기였다."(1727-31)


제29장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과 히틀러 살해 시도 


"베를린에서 슈타우펜베르크와 그 동지들은 마침내 계획을 완성했다. 공동 작전의 암호명은 '발퀴레Walküre'였다. 이는 적절한 명칭이었는데, 스칸디나비아-독일 신화에서 발퀴레는 고대 전장의 상공을 맴돌다가 죽어야 할 자들을 고르는, 아름답지만 무서운 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죽어야 할 인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퍽 아이러니하게도 카나리스 제독은 실각하기 전에 발퀴레 아이디어를 하나의 보안 계획으로, 즉 베를린과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고되게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수백만 명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국내예비군─신체 건강한 군인들은 거의 모두가 전선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이 이들 대도시에 대한 치안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는 계획으로 꾸며서 히틀러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발퀴레는 군부 음모자들에게 완벽한 위장막, 즉 히틀러를 암살하자마자 국내예비군으로 베를린, 빈, 뮌헨, 쾰른 등지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대놓고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위장막이 되었다."(1770-1)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하자 베를린 음모단은 큰 혼란에 빠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군이 1944년에 상륙을 시도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믿었다. 그는 상륙 실패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토록 많은 출혈로 대가를 치른 후라면 미국과 영국 정부가 서부에서 새로운 반나치 정부와 강화를 교섭하는 데 더 열의를 보일 테고 그럴 경우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크는 이제 반나치 반란에 성공한다 해도 적군의 독일 점령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전쟁을 끝내 더 이상의 인명 손실과 조국의 파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강화를 성사시키면 소련군이 독일을 짓밟고 볼셰비키화하는 사태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거사를 통해 나치 독일 외에 〈또다른 독일〉이 있음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었다.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전선은 당장 행동에 나서도록 음모단을 재촉했다."(1784-5)


"7월 19일 오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라스텐부르크로 호출되었다. 와해 중인 동부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국내예비군 측에서 급히 훈련시키고 있는 새로운 국민척탄병Volksgrenadier 사단들의 상황에 관해 히틀러에게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이튿날 7월 20일 오후 1시에 총통 본부의 첫 일일 회의에서 보고할 예정이었다." "정확히 오후 12시 42분, 폭탄이 터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후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중에 말했듯이, 병영은 마치 155밀리 포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굉음과 함께 연기와 화염을 내뿜으며 박살이 났다. 시체들이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흥분한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에 있던 전원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의 확신과는 반대로, 히틀러는 피살되지 않았다. 브란트 대령이 견고한 참나무 받침대의 바깥쪽으로 서류가방을 옮겨놓은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히틀러의 목숨을 구했다."(1794, 1801-4)


"오후 9시 직후, 좌절한 음모단은 총통이 늦은 밤에 독일 국민에게 직접 방송할 것이라는 독일방송국의 발표를 듣고서 말문이 턱 막혔다. 몇 분 후 (반란 가담에서 반란 진압으로 돌아선) 레머 소령─이제 대령─에게 운명적인 용무를 맡겼던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 하제 장군이 체포되었고, 친위대의 지지를 받는 나치 장군 라이네케가 베를린 내 모든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았으며 이제는 벤틀러슈트라세 기습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스텐부르크─거사가 벌어진 히틀러의 '늑대굴'─의 정력적인 대응 조치, 레머를 설득하고 라디오를 활용하겠다는 괴벨스의 기민한 판단, 베를린 친위대의 집결, 벤틀레슈트라세 반란파의 믿기 어려운 혼란과 무대책 등으로 인해 음모단과 한배를 타려던 찰나의, 혹은 이미 한배를 탄 상당수 장교들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음모단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 결과로 체포된 프롬 장군은 이제 기운을 냈다."(1823-4)


"반란 반대파들은 베크, 회프너,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메르츠를 프롬의 빈 집무실로 몰아넣었고, 잠시 후 프롬이 권총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프롬은 음모단을 제거하고 그들의 흔적을 지울 뿐 아니라─비록 음모에 적극 관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음모를 알고서 암살자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반란을 진압한 주역으로서 히틀러의 환심을 사기로 금세 마음먹었다. 나치 폭력배들의 세계에서는 너무 늦은 결심이었지만 프롬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프롬은 〈총통의 이름으로〉 〈군사재판〉을 요청했고(그가 요청했다는 증거는 없다) 네 장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알렸다. 〈참모장 메르츠 대령, 올브리히트 장군, 이제 나로서는 이름을 모르는 이 대령[슈타우펜베르크], 그리고 이 중위[헤프텐].〉" "아래의 중정에서 군용차의 등화관제용 덮개가 씌워진 전조등이 희미하게 앞쪽을 비추는 가운데 네 장교는 총살대에 의해 금세 처리되었다."(1825-7)


"반란이 실패한 것은 그저 육군과 민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중 일부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서툴렀고, 프롬과 클루게의 성격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고비마다 음모단에 불운이 덮쳤기 때문이 아니다. 반란이 진압된 것은 장성이든 민간인이든 이 대국을 운영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리고 제복을 입었든 안 입었든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혁명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전쟁의 비탄과 패전 뒤 외국에 점령당할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초래한 독일과 유럽의 퇴화를 견뎌내지 못한 국가사회주의를 그들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지지했으며,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의 구원자로 보았다. 〈[훗날 구데리안이 씀] 당시 독일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믿었고, 만약에 그가 죽었다면 전쟁을 유리하게 종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암살자가 제거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이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1850-1)


제6부 제3제국의 몰락


제30장 독일 정복 


"전선 전역에서 미군─북부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소모전을 벌여 안 그래도 약해져가는 방어군을 갉아먹고 있었다. 히틀러는 계속 수세를 취해서는 심판의 시간만 늦출 뿐임을 깨달았다. 그의 열에 들뜬 마음속에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계획이 떠올랐다. 타격을 가해 미 제3군과 제1군을 갈라놓고, 안트베르펜까지 진출해 아이젠하워로부터 주요 보급항을 빼앗고,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을 따라 영국군과 캐나다군을 밀어붙인다는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그런 공세를 통해 영미군을 완파하여 독일 서부 국경의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소련군을 다시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군은 발칸에서는 여전히 진격하고 있었지만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는 10월부터 비스와 강에 멈춰 있었다. 서부 공세는 지난 1940년에 대규모 돌파를 개시했던 곳이자 독일 정보기관이 파악하기로 미군의 약한 4개 보병사단만이 방어하는 아르덴을 통해 신속하게 감행할 계획이었다."(1863)


"그러나 아르덴에서 약체 4개 사단이 괴멸된 뒤 미 제1군의 흩어진 부대들은 임시변통으로 완강히 저항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고, 돌파된 전선의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인 몬샤우와 바스토뉴를 단호히 사수하여 히틀러의 군대가 좁은 돌출부를 지나도록 만들었다. 미군의 바스토뉴 방어가 독일군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르덴에서 공세를 지속할 병력도, 알자스에서 공격에 나설 병력도 부족하다는 장군들의 항변에 히틀러는 귀를 닫았다. 〈나는 이 일을 11년간 해왔지만 ··· 모든 것이 완전하게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 여러분은 결코 완전하게 준비되지 않는다. 명백히 그렇다.〉 히틀러는 말하고 또 말했다.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이 회의 속기록의 길이로 판단하건대, 몇 시간 동안 말했다. 〈문제는 ··· 과연 독일에 존속할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다. ···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독일 국민은 파멸할 것이다.〉 그런 다음 로마의 역사와 프로이센 7년 전쟁의 역사를 한참 논했다."(1868-70)


"비록 발칸은 빼앗기고 있었지만, 폴란드의 비스와 강과 동프로이센에서 독일군이 10월부터 굳세게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히틀러가 동부전선에서 〈지금처럼 강력한 예비 병력을 보유했던 적이 없다〉라고 주장하자 구데리안은 〈동부전선은 카드로 만든 집과 같습니다. 전선의 한 지점이 뚫리면 나머지 전체가 붕괴될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1945년 1월 12일, 이반 코네프의 소련 집단군이 바르샤바 남쪽 비스와 강 상류 바라노프의 교두보에서 빠져나와 슐레지엔으로 향했다. 더 북쪽에서는 주코프 휘하 병력이 바르샤바 북쪽과 남쪽에서 비스와 강을 건너 1월 17일 이 도시를 함락했다. 더 북쪽에서는 소련 2개 군이 동프로이센의 절반을 짓밟고 단치히 만으로 돌격했다. 이것은 2차대전을 통틀어 소련군의 최대 공세였다. 스탈린은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만 기갑전력의 비중이 놀랍도록 높은 180개 사단을 투입했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1873-5)


"1월 27일 오후, 주코프의 병력이 베를린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오데르 강을 도하한 날, 이제 베를린 총리 관저로 이전했고 전쟁 종결 때까지 장소를 바꾸지 않은 총통 본부에서 흥미로운 대응 조치를 취했다. 25일, 절박한 구데리안은 리벤트로프를 찾아가 나머지 독일군이 동부의 소련군에 집중해서 대적할 수 있도록 당장 서부에서의 휴전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외무장관은 곧장 히틀러에게 일러바쳤고, 총통은 당일 저녁 구데리안을 질책하며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힐난했다. 동부의 재앙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 괴링, 요들은 서방 측에 휴전을 요청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서방 연합국이 볼셰비키 승리의 결과를 우려하여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방을 겨냥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독일 측 설계자들은 결국 영국군과 미군이 독일군에 합세해 소련 침공군을 물리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터였다."(1876-7)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 내 모든 상점뿐 아니라 모든 군사·산업·운송·통신 시설까지 온전한 상태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파괴하라는 일반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이에 반하는 모든 지령은 무효다〉라는 단언으로 끝맺었다. 독일을 광대한 황무지로 만들어야 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지면 민족도 사라질 것이다.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민이 가장 원초적으로 존속하기 위해 필요할 법한 기반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그런 것들을 파괴해버리는 편이 더 낫다. 이 국가는 약한 국가로 판명날 것이고, 미래는 오로지 강한 동부 국가[소련]의 것일 테니까. 게다가 뛰어난 자들이 살해되었으니 전후에는 열등한 자들만 남을 것이다.〉" "독일 국민이 최종 파국을 면한 것은, 그런 대규모 파괴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 외에도, 슈페어와 다수의 장교들이 히틀러의 명령을 (마침내!)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다."(1885-7)


제31장 신들의 황혼: 제3제국의 마지막 나날 


"히틀러는 몸이 엉망인 데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근접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 본토를 장악하여 이제 처참한 최후가 목전에 닥친 상황임에도, 총통은, 그리고 괴벨스를 비롯해 가장 광적인 소수의 추종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기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4월 초 날씨 좋은 저녁에 괴벨스는 자리에 앉아 히틀러에게 총통의 애독서 중 하나인 토머스 칼라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역사》를 읽어주었다. 괴벨스가 낭독한 장은 7년 전쟁 중 가장 암담했던 시절, 대왕이 진퇴유곡에 빠졌다고 생각해 각료들에게 만약 2월 15일까지 운수가 나아지지 않으면 포기하고 독약을 마시겠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역사의 이 시기를 고른 것은 확실히 적절했으며 괴벨스는 틀림없이 한껏 극적인 방식으로 낭독했을 것이다. 총통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라고 괴벨스는 크로지크에게 말했고, 후자는 이 감동적인 장면을 일기에 적어 우리에게 전해주었다."(1893-4)


"그렇게 영국인이 쓴 책에서 기운을 얻은 두 사람은 힘러의 잡다한 '연구' 부서들에서 서류철에 보관 중이던 두 가지 별자리점 결과를 가져오도록 했다. 하나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집권하던 날 작성한 총통의 별자리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1918년 11월 9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일에 어느 이름 모를 점성술사가 작성한 공화국의 별자리점이었다. 괴벨스는 두 통의 놀라운 문서를 재검토한 결과를 크로지크에게 알렸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으니, 두 별자리점 모두 1939년에 전쟁 발발, 1941년까지 승리, 뒤이어 일련의 전세 역전, 1945년 초기 몇 달 동안, 특히 4월 초순의 가장 심한 반격을 예상했습니다. 4월 하순에 우리는 일시적인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그 후로 8월까지 정체기일 테고 그달에 강화를 맺을 것입니다. 뒤이어 3년은 독일에 힘겨운 시절일 테지만, 1948년부터 독일은 부흥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4월 12일, 미군이 데사우와 베를린 사이 아우토반에 나타났다."(1894-5)


"4월 29일 새벽에 구술로 작성한 유언장에서 나치사령관은 맨 마지막까지 본인의 성격에 충실했다. 위대한 승리는 본인 덕분이었다. 패배와 최종 실패는 다른 사람들, 그들의 〈불충과 배반〉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고별사를 읊었다─이 미치광이 천재의 일생에서 기록된 마지막 말이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 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너무도 위대했기에 나는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 문장은 《나의 투쟁》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정계 생활을 시작했던 히틀러는 생의 끝자락에도 그 집념에 매달렸다. 독일인 수백만 명이 죽고, 독일 가옥 수백만 채가 폭격에 무너지고, 심지어 독일 국가마저 파괴되었음에도, 히틀러는 슬라브인에게서 동방 영토를 빼앗는다는 묵표가 (도덕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튜턴족의 헛된 꿈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1931-2)


"1차대전 패전 이후 1918년에 카이저는 달아났고 군주정은 허물어졌으나 국가를 지탱하던 기존의 다른 제도들은 남아 있었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부가 그 기능을 이어갔으며, 독일 육군과 참모본부의 중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45년 봄에 제3제국은 그야말로 소멸해버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바보짓─그리고 그를 너무도 맹목적으로, 너무도 열렬하게 추종한 독일인 자신의 바보짓─탓에 그 지경이 되었다. 다만 그해 가을 독일로 돌아간 나는 히틀러에게 분개하는 정서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그리고 땅이 있었다. 사람들은 멍한 상태로 피를 흘리고 배를 곯았으며, 겨울이 찾아오자 폭격으로 그들의 집이 된 오두막에서 누더기로 몸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었다. 히틀러는 다른 수많은 민족들을 말살하려 했고 전쟁에서 패하자 결국 자기네 민족까지 말살하려 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독일 민족은 말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3제국은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1946-7)


맺음말


"뉘르베르크의 피고석에 오른 21명 중 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헤스, 레더, 풍크는 종신형, 슈페어와 시라흐는 20년형, 노이라트는 15년형, 되니츠는 10년형이었다. 나머지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샤흐트와 파펜, 프리체는 석방되었다. 세 사람 모두 독일의 탈나치화 법정에서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긴 했지만, 결국 아주 짧게 복역하는 데 그쳤다. 1946년 10월 16일 오후 1시 11분, 리벤트로프가 뉘른베르크 감옥 처형실에서 교수대에 올라갔고, 짧은 간격으로 카이텔, 칼텐브루너, 로젠베르크, 프랑크, 프리크, 슈트라이허, 자이스-잉크바르크, 자우켈, 요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헤르만 괴링은 없었다. 그는 교수형 집행인을 속였다. 감방으로 몰래 들여온 독약 약병을 자기 차례가 오기 두 시간 전에 삼켰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후계를 놓고 경쟁한 하인리히 힘러와 마찬가지로, 괴링은 막판에 이승을 떠나는 방법을 선택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과 함께 결딴을 낸 그 세상을."(1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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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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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쟁: 초기 승리와 전환점


제18장 폴란드 함락 


"폴란드 공군은 48시간 사이에 궤멸되었다. 폴란드 육군은 1주일 만에 패배했다. 소련 국경에 남은 한줌의 병력을 제외하고 폴란드 군은 전부 포위되었다. 이제 소련군이 전리품에서 제 몫을 차지하기 위해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쳐들어올 시간이었다." "9월 5일, 몰로토프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공격해달라는 나치의 제안에 공식 서면 회답을 보내면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비밀조항으로 합의한 폴란드 내 〈경계선〉은 엄밀히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련은, 폴란드가 소멸했고 따라서 폴란드-소비에트 불가침 조약도 소멸했다는 등, 자국의 이익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소수집단의 이익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등 비열한 핑계를 대면서 기진맥진한 폴란드를 9월 17일부터 짓밟기 시작했다. 9월 18일, 소비에트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군과 만났다. 정확히 21년 전에 신생 볼셰비키 정부가 서방 연합국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독일 육군과 가혹한 단독 강화 조건을 수락한 그 장소였다."(1084-6, 1089)


"폴란드에서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쪽은 히틀러였지만, 더 큰 승자는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아도 된 스탈린이었다. 소련은 폴란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발트 국가들의 목을 조였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밀과 루마니아의 석유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지켜냈다. 독일로서는 향후 겪게 될 수도 있는 영국의 봉쇄를 견뎌내려면 두 가지 모두 절실히 필요한 물자였다. 심지어 스탈린은 히틀러가 원한 폴란드 유전 지역인 보리스와프-드로호비치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 지역의 연간 산출량만큼을 독일 측에 판매하는 데 선뜻 동의했다. 왜 히틀러는 소련 측에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을까?" "서부에서 버티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하려면 후방이 안전해야 했다. 히틀러의 이후 발언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것처럼, 이것이 스탈린에게 그토록  뼈저린 거래를 허용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서부전선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총통은 소비에트 독재자의 가혹한 거래를 결코 잊지 않았다."(1095-6)


제19장 서부의 앉은뱅이 전쟁 


"서부에서는 별 일이 없었다. 총성이 거의 울리지 않았다. 독일의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앉은뱅이 전쟁Sitzkrie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방에서는 곧 '가짜 전쟁phony war'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국 장군 J. F. C. 풀러의 말마따나 그곳에서는 〈세계 최강의 육군[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불과 26개 사단과 대치한 채 돈키호테처럼 용맹한 동맹국 군대가 몰살당하는 동안 강철과 콘크리트 뒤편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독일군은 그것을 뜻밖이라고 여겼을까? 천만에. 육군 참모총장 할더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할 경우 서부의 상황이 어떠할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그는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설 〈공산은 매우 작다〉라고 생각했다. 프랑스가 〈벨기에의 의사와 상반되게〉 벨기에를 통과하는 경로로 파병할 리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할더는 프랑스군이 수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폴란드군이 이미 파멸한 9월 7일, 할더는 벌써부터 독일군 사단들을 서부로 이송할 계획을 짜느라 바빴다."(1097)


"그렇다면 어째서 프랑스군은(영국군의 선발 2개 사단은 10월 첫째 주까지 배치되지 않았다) 서부에서 독일 병력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면서도, 가믈랭 장군과 프랑스 정부가 문서로 약속해놓은 대로 공격에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군 최고사령부, 정부, 국민의 패배주의, 1차대전에서 막대한 피를 흘린 기억과 피할 수만 있다면 그런 살육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결의, 폴란드군이 처참하게 패한 터라 독일군이 곧 우세한 병력을 서부로 투입할 수 있고 따라서 프랑스가 초기에 어떻게 진격하든 무찔러버릴 것이라는 9월 중순의 깨달음, 무장과 공군력에서 독일이 우위에 있다는 두려움 등이 그런 이유였다. 실제로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역을 전면적으로 폭격했다면 십중팔구 독일군에 재앙이었을 텐데도, 프랑스 정부는 자국 공장들이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 공군이 독일 내 표적을 폭격하는 방안에 처음부터 줄기차게 반대했다."(1100-1)


"11월 20일, 히틀러는 전쟁 수행을 위한 지령 제8호를 발령해 〈유리한 기상 조건을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비상대기 상태〉를 유지하라고 명령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분쇄하기 위한 계획을 결정했다. 그런 다음 심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대규모 전투의 전야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 위해 11월 23일 정오에 사령관들과 참모본부 장교들을 총리 관저로 소집했다." "여러 면에서 1939년 11월 23일은 하나의 이정표였다. 그날 히틀러는 육군을 상대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차대전 기간에 황제 빌헬름 2세를 밀어내고 독일 최고의 군사적 권한뿐 아니라 정치적 권한까지 차지했던 그런 육군을 상대로 말이다. 그날 이래로 오스트리아의 전 상병은 정치적 판단뿐 아니라 군사적 판단에서도 자신이 장군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그들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비판을 허용하지도 않았다─그 결과는 결국 모두에게 재앙이 될 터였다."(1136, 1141)


"1940년 2월 11일, 복잡한 무역협정이 모스크바에서 마침내 타결되었다. 첫해에 독일 측이 받은 것들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의 기록에 따르면 곡물 100만 톤, 밀 50만 톤, 석유 90만 톤, 면직물 10만 톤, 인산염 50만 톤, 상당한 양의 필수 원재료들, 그리고 소련이 만주에서부터 운송해준 대두 100만 톤이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자존심을 굽힌 채 독일에서는 영 인기 없는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지지하고, 소비에트 육군과 공군이 발트 삼국에 기지를 세우는 등의 위협(결국 독일이 아니면 어느 나라를 상대로 그런 기지를 사용하겠는가?)을 감수한 한 가지 이유였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영국의 봉쇄를 극복하도록 돕고 있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하나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를 기회, 군사력을 서부에 집중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결정타를 날리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짓밟을 기회까지 제공했다─그 후에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히틀러가 이미 장군들에게 말한 바 있었다."(1157-8)


제20장 덴마크와 노르웨이 정복 


"독일 해군은 오래전부터 북방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독일은 대양으로 곧장 나갈 수 있는 진출로가 없었으며, 1차대전 당시부터 독일 해군 장교들은 이 지리적 사실을 머리에 새겨두었다. 영국은 셰틀랜드 제도에서 노르웨이 해안까지 폭이 좁은 북해 전역에 대량의 기뢰와 초계정으로 촘촘히 그물을 쳐둠으로써 강력한 독일 해군을 봉쇄하고, 북대서양으로 빠져나가려는 U보트의 시도에 중대한 지장을 주고, 독일 상선의 운행을 막았다. 1차대전 기간에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로 숨통이 막혔다. 전간기에 수수한 규모의 독일 해군을 지휘한 소수의 장교들은 이 경험과 지리적 사실에 관해 숙고했고, 향후 영국과 어떤 전쟁을 치르든 간에 노르웨이에서 기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야만 북해를 가로막는 영국의 봉쇄선을 깨고, 독일의 수상함과 잠수함에 대양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고, 판을 뒤엎어 역으로 영국 제도를 효과적으로 봉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1167-8)


"전쟁의 기류가 바뀔 때까지 거의 4년 동안 일체의 저항을 포기했던 덴마크 국왕과 국민, 온화하고 교양 있고 태평한 사람들은 독일을 좀체 괴롭히지 않았다. 덴마크는 '모범 보호령'으로 알려졌다. 덴마크 군주, 정부, 왕실, 심지어 의회나 언론까지, 처음에는 정복자들로부터 놀라울 정도의 자유를 허가받았다. 덴마크에 거주하는 유대인 7000명마저 박해를 당하지 않았다─한동안은. 그러나 덴마크 국민은, 대다수 피정복 국민들보다 늦게 알아차리긴 했지만, 전황이 악화될수록 점점 더 잔혹해지는 튜턴족 폭군들에게 〈충직한 협력〉을 바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결국 깨달았다─자존심과 명예를 조금이라도 지키고자 한다면 그럴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독일이 끝내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작은 나라 덴마크가 입에 담기도 싫어한 히틀러의 신질서 안에서 속국으로 지내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항이 시작되었다."(1212-3)


"노르웨이는 처음부터 저항했다. 그렇지만 1940년 4월 9일 저녁 독일이 수도를 확실히 접수하자 마침내 기운을 끌어올린 크비슬링─1931년부터 1933년까지 국방장관으로 재임한 뒤, 1933년 5월에 국민연합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결성했다. 이는 독일에서 집권한 나치당의 이데올로기와 전술을 차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비옥한 민주적 토양에서 나치즘은 잘 자라지 못했다─은 라디오 방송국에 들이닥쳐 자신이 새로운 정부의 수반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노르웨이인 누구든 독일에 대한 저항을 즉시 멈추라고 명령했다. 브로이어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지만─베를린 역시 알지 못했고 심지어 나중에도 이해하지 못했지만─이 반역 행위로 인해 노르웨이의 항복을 유도하려던 독일의 노력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비록 노르웨이 국민에게는 조국이 치욕을 당한 순간이긴 했지만, 크비슬링의 반역 행위는 망연자실해 있던 노르웨이 국민을 결집해 굳세게 저항하도록 했다."(1219-20)


제21장 서부전선 승리 


"제3제국은 북해 연안 저지대에 위치한 작은 두 나라의 중립을 거의 무수히 보장한 바 있었다.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은 1839년에 유럽 5개 열강이 '영구히' 보장했으며, 이 협약은 1914년에 독일이 위반할 때까지 75년에 걸쳐 지켜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벨기에를 상대로 결코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히틀러는 집권한 뒤 이 정책을 계속 재확인하고 네덜란드에게도 비슷한 확약을 했다." "1940년 5월 10일, 베를린 주재 벨기에 대사와 네덜란드 공사는 빌헬름슈트라세로 불려가 리벤트로프에게서 영국-프랑스 군대의 임박한 공격으로부터 두 나라의 중립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군이 그들의 영토로 진입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바로 한 달 전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상대로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비열한 수법이었다. 독일은 공식 최후통첩을 전하며 저항하지 말라고 두 정부에 요구했다. 만약 저항한다면 유혈 사태의 책임은 〈오로지 벨기에 왕실 정부와 네덜란드 왕실 정부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1234-33)


"네덜란드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5일간의 전쟁이었다. 이 짧은 기간에 벨기에군, 프랑스군, 영국 원정군의 운명이 정해지고 말았다." "전투 첫날에 영국 총리직을 넘겨받은 윈스턴 처칠은 아연실색했다. 5월 15일 아침 7시 30분,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처칠에게 전화를 걸어 잠에서 깨우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大프랑스의 육군이 1주일 만에 패했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지난 전쟁 이후로 밀집한 고속 기갑부대의 급습이 불러온 혁명의 위력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처칠은 훗날 썼다. 그 혁명을 일으킨 것은 전차부대─서부 방어선에서 가장 약한 위치를 일거에 돌파하기 위해 한 지점에 집결한 전차 7개 사단─였다. 또한 슈투카 급강하폭격기, 그리고 연합군 방어선의 한참 뒤쪽이나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요새의 꼭대기에 강하하여 큰 혼란을 일으킨 낙하산부대와 공수부대도 있었다."(1245-6)


"약간 의문이 남긴 하지만, 히틀러가 됭케르크 앞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킨 것은 자신이 〈세계의 한 요인, 균형추〉라고 보았던 영국에 쓰라린 굴욕감을 주지 않음으로써 강화협정을 촉진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영국과의 강화는 히틀러의 말마따나 독일이 다시 한 번 동쪽으로, 즉 이제는 소련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가능케 하는 강화여야 했을 것이다. 런던은 제3제국의 유럽 대륙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다음 몇 달 동안 히틀러는 조만간 그런 강화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 시점에 히틀러는 영국의 국민성을, 그 지도부와 국민이 끝까지 싸워 지켜내겠다고 결심한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와 장군들은 바다에 무지한─이후에도 무지할 터였다─탓에 바다에 이골이 난 영국이 낡아 빠진 작은 항구에서, 독일군 코앞에 있는 노출된 해변에서 30만이 넘는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1270-1)


"7월 19일 저녁, 영국에 마지막으로 강화를 제안하기 위해 제국의회에 나섰을 때 히틀러는 여전히 〈만약에 필요하면 실행하기로〉의 '만약에'를 의식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날 히틀러는 긴 연설 중에 역사를 거침없이 왜곡하고 처칠 개인을 마구 모욕했다. 하지만 말투는 온건했고, 자국민뿐 아니라 중립국 사람들의 지지까지 얻고 영국 대중에게도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주려는 교묘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나는 다른 여느 나라처럼 영국을 상대로도 그 이성과 양식에 다시 한 번 호소하는 것이 나의 양심에 따른 의무라고 느낍니다. 나는 이렇게 호소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패자로서 호의를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로서 이성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연설은 독일 국민들에게는 통했으나 영국 국민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7월 22일, 헬리팩스 경은 방송에서 히틀러의 강화 제안을 정식으로 거절했다."(1301-3, 1306)


제22장 바다사자 작전: 영국 침공 좌절 


"괴링의 대규모 공습인 독수리 작전Adlerangriffe은 8월 15일, 영국 공군을 공중에서 몰아냄으로써 침공 개시의 조건 하나를 확보한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 독일군은 적 전투기 파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일 평균 1천 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출격하느라 이미 지친 영국 조종사들이 용맹하게 싸우긴 했지만, 독일군의 수적 우위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영국 남부의 전투기 전진기지라 할 비행장 5곳이 중대한 피해를 입고 설상가상으로 핵심 통신본부 7곳 중 6곳이 맹폭을 당해 통신체계 전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때 괴링이 갑자기 전술상 잘못을 저질렀다. 영국의 전투기 방어 전력이 공중과 지상에서 손실을 입어 오래 버티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독일 공군은 9월 7일 런던을 겨냥한 대대적인 야간 폭격으로 공세를 전환했다. 그 덕에 영국 공군의 전투기들은 위기에서 벗어났다."(1336, 1340-1)


"독일 공군은 런던 대공습의 성공에, 혹은 성공했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얻어맞아 불타는 영국 수도에 대규모 주간 공습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9월 15일 일요일, 2차대전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다. 정오 무렵 독일 폭격기 200대와 그보다 3배 많은 호위 전투기가 영불해협 상공에 나타나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 전투기 사령부는 레이더 스크린으로 공격기의 대규모 편대를 살피고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독일군은 수도에 접근하기 전에 요격당했다. 항공기 일부는 돌파했으나 대체로 흩어졌고 다른 일부는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격추되었다. 이 날의 전투는 독일 공군이 어쨌거나 당분간은 대규모 주간 공습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상륙으로 효과를 거둘 가망은 별로 없었다. 괴링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육해군 사령관들은 전황을 더 잘 알고 있었고, 결정적인 공중전 이틀 후인 9월 17일에 총통은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1347-8)


제23장 바르바로사: 소련의 차례 


"지난 몇 달간 베를린과 모스크바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제3자의 뒤통수를 치는 것과 서로의 뒤통수를 치기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히틀러는 소련이 발트 국가들과 루마니아의 두 지방인 베사라비아 및 북부 부코비나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고, 그의 좌절감은 분노를 더욱 키우기만 했다. 독일은 소련의 서진을 저지해야 했는데, 영국의 봉쇄 때문에 더 이상 해로를 통해서는 수입이 불가능한 독일로서는 루마니아의 석유자원에 사활이 걸려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헝가리나 불가리아도 루마니아 영토의 일부를 요구했다." "결국 리벤트로프가 나서서 헝가리 및 루마니아 양측을 을러댔다. 8월 30일, 빈의 벨베데레 궁에서 양측은 추축국의 중재안을 수용했다. 이에 대해 몰로토프는 독일 정부가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는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제3조를 위반했고, 〈공동 이익의 문제〉에 관한 독일의 확약과 상충되는 방식으로 소련 측에 〈기정사실〉을 통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1379-81)


"11월 12일 진행된 양측 회담에서 꼭 짚어야 할 점은, 소비에트 독재자가, 이후에 상반된 주장을 펴긴 했지만, 이때 파시스트 진영에 가담하라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다만 베를린이 제안한 것보다 더 비싼 가격을 불렀을 뿐이다." "스탈린이 제안하는 비싼 대가는 히틀러로서는 고려해볼 여지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유럽에서 배제하려 했지만, 이제 스탈린은 핀란드, 불가리아, 두 해협에 더해 사실상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유전들─평상시 유럽이 사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을 공급한다─에 대한 통제권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인도양을 소련이 '염원'하는 중심지로서 넘겨주고 입을 막으려 했지만, 소련 측은 인도양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요구한다. 그는 냉혹한 협박범이다. 독일의 승리는 러시아에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를 되도록 일찍 굴복시켜야 한다.〉 냉혹하고 뛰어난 나치 협박범은 호적수를 만난 셈이었고, 그 깨달음에 격분했다."(1395-6)


"총통이 엉망진창인 하위 파트너를 곤경에서 구해준 곳은 발칸만이 아니었다.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이 괴멸당한 뒤, 히틀러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1개 경기갑사단과 약간의 공군 부대를 북아프리카로 파견하는 데 결국 동의했다. 프랑스 전투에서 기갑사단 지휘관으로서 수훈을 세웠던 늠름하고 지략이 풍부한 전차부대 장교 로멜은 영국군이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유형의 장군이었고, 뒤이은 2년간 영국군에 엄청난 곤경을 안겨주었다." "히틀러는 1941년 봄의 승리. 특히 영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기고만장했지만, 그것이 영국에 얼마나 심대한 타격이었는지, 그리고 영 제국이 얼마나 절박한 곤경에 내몰렸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히틀러가 제국의회에서 연설하던 바로 그날, 처칠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이집트와 중동의 상실로 인한 심각한 결과를 알리고 미국의 참전을 호소하고 있었다. 영국 총리는 2차대전을 통틀어 몇 번 경험하지 않은 암담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1425-8)


"(히틀러에게는) 소련 파괴가 최우선이었다. 그 밖의 모든 일은 후순위였다. 이제는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경악스러운 실책이었다. 당시 1941년 5월 말에 히틀러는 휘하 전력의 일부만 투입해도 영 제국에 강력한 일격을, 어쩌면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처칠은 이런 현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5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처칠은 영국이 이집트와 중동을 잃는다면 설령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전쟁의 지속이 〈힘겹고 길고 암담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런 전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맹목성을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발칸 전투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가 몇 주 연기되었고, 그리하여 작전 실행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작전 개시가 연기된 만큼 애초 계획했던 기간보다 더 짧은 기간 내에 소련 정복을 완수해야 했다. 이 작전의 기한, 즉 칼 12세나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러시아의 겨울을 변경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1429-30)


제24장 전세 역전 


"개전 초에 제기된 쟁점은 간단하지만 중대했다. 독일의 세 주요 집단군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당시까지 가장 성공을 거둔 보크의 중부집단군이 7월 16일에 도달한 스몰렌스크에서 320킬로미터를 더 진격해 모스크바를 공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히틀러가 지난 12월의 지령 제18호에 명시한 원래 계획대로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에서 주공을 펴는 방안을 고수해야 하는가? 달리 말하면, 주요 표적을 모스크바로 정할 것인가,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로 정할 것인가였다. 브라우히치와 할더가 이끌고 보크와 구데리안이 뒷받침하는 육군 최고사령부는 소련의 수도를 향해 총력으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는 파탄이었다〉라고 할더는 전한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식량지대와 공업지대에, 그리고 캅카스 산맥 바로 너머에 있는 소련의 유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또한 레닌그라드를 손에 넣고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합류하기를 원했다. 모스크바는 내버려두어도 괜찮았다."(1474-5)


"히틀러는 브라우히치, 할더, 보크의 끈질긴 주장에 모스크바 진격을 재개한다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진창의 시기(라스푸티차Rasputitsa)에 들어선 것이다. 폭설과 영하의 기온도 일찍 찾아왔다." "러시아의 겨울은 끔찍했고 당연히 독일군보다 소련군이 겨울에 더 잘 대비하긴 했지만, 전세 역전을 이끌어낸 주된 요인은 붉은군대의 치열한 전투 자세와 포기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였다. 그 증거로 할더의 일기나 독일 야전사령관들의 보고서는 소련군이 얼마나 격렬하게 공격하고 반격하는지에 대한 놀라움, 독일군이 얼마나 차질을 빚고 손실을 입는지에 대한 좌절감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나치 장군들은 소련 체제의 압제적인 특성이나 독일군이 첫 타격으로 입힌 재앙적인 손실을 고려할 때, 소련군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군을 비롯해 다른 많은 군대들이 변명거리가 더 적은데도 맥없이 무너졌던 것과는 딴판이었다."(1479-80, 1485)


"모스크바 진공 작전의 실패의 대가는 엄청났다. 붉은군대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으나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모스크바를 공략하지 못했고,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캅카스 지역의 유전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이나 미국과 통하는 소련 북쪽과 남쪽의 생명선도 여전히 열려 있었다. 2년이 넘도록 연전연승하던 히틀러의 군대는 처음으로 우세한 적군에 밀려 퇴각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실패의 대가는 더 컸다. 할더는 적어도 훗날에 가서 그 대가를 깨달았다. 〈독일 육군의 불패 신화가 깨졌다〉라고 그는 썼다. 독일군은 다음 여름이 왔을 때 소련에서 다시금 승리를 거두었지만, 끝내 불패 신화를 복원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6일은 제3제국의 짧은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자, 가장 치명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다. 당시 히틀러의 권력은 최정점에 올라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가 침략하기로 선택했던 국가들이 반격에 나섬에 따라 그 정점에서 점차 내려올 터였다."(1489-90)


"그 혹독한 겨울에 히틀러는 난타당한 독일군이 모스크바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저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히틀러는 퇴각을 일체 금했다. 독일 장군들은 히틀러가 굽히지 않은 이 완강한 태도의 공과에 관해, 그 태도가 육군을 완전히 재앙으로부터 구했는지 아니면 불가피한 대규모 손실을 오히려 더 늘렸는지에 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대다수 사령관들은 각자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후퇴할 자유가 주어졌다면 많은 인력과 장비를 구하고, 더 나은 위치에서 재정비하고, 더 나아가 반격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적시에 퇴각했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법한 사단들 전체가 자주 압도적인 공격을 받거나 포위당하여 분쇄되고 말았다. 그런데 훗날 일부 장군들은 독일군의 현지 사수와 전투를 고집한 히틀러의 강철 같은 의지가 아마도 육군이 눈밭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결과를 막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전시 최대 업적이라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다."(1493-4)


제25장 미국의 차례 


"히틀러가 일본에 맡긴 역할은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당분간은 막아내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일본이 싱가포르를 차지하고 인도를 위협할 경우 영국에 심각한 타격이 될 뿐 아니라 미국의 주의를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돌리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독일에서는 히틀러도 다른 누구도 일본 측에 다른 우선순위가 있다는 생각을 아주 늦게까지 떠올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파괴하여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때까지 소련을 공격하는 방책은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대공세를 개시하는 방책까지 주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독일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히틀러는 일본 측에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자신의 승리를 가로막고 있는 영국과 소련에 집중하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다. 나치 통치자들은 일본이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가장 우선시할 수도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1522)


"리벤트로프는 11월 28일 히틀러가 주재하는 장시간의 군사회의에 참석한 뒤 저녁에 오시마를 불렀고, 일본 대사가 즉각 도쿄에 타전했듯이 미국을 대하는 독일의 태도가 〈상당히 경직되었다〉는 인상을 풍겼다. 미국을 상대할 준비가 될 때까지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한다는 히틀러의 방침이 곧 폐기될 것처럼 보였다. 리벤트로프는 갑자기 일본 측에 영국뿐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도 전쟁할 것을 촉구하고 제3제국의 지원을 약속하기 시작했다." "12월 1일, 긴급 호출을 받고 베를린 대사관으로 부리나케 돌아간 오시마는 조속히 독일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새로운 훈령을 받았다." "리벤트로프는 5일 오전 3시에 오시마 대사에게 일본이 요청한 조약, 즉 독일이 일본의 대미국 전쟁에 동참하고 단독강화를 맺지 않는다는 조약의 초안을 건넸다."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까지 떠맡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만약 히틀러가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전쟁의 추이가 달라졌을 것이다."(1528-9, 1531-3, 1536)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30분(현지 시각)에 일본군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강습했다는 천만뜻밖의 소식에 베를린은 워싱턴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히틀러가 마쓰오카에게 일본의 대미국 전쟁에 독일이 동참할 것이라고 구두로 약속했고 리벤트로프가 오시마 대사에게 또다른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직 확약에 서명하기 전이었고 일본 측으로부터 진주만에 대해 한 마디도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히틀러가 막강한 적국 명단에 미국을 추가하는 결정을 그렇게 서둘러 내린 이유를 훗날 슈미트 박사는 콕 집어 말했다. 〈나는 위신을 바라는 히틀러가 미국의 선전포고를 예상하고서 선수를 치기를 원한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나치 통수권자는 12월 11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슈미트의 인상이 옳았음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타격할 것입니다〉 하고 히틀러는 환호하는 의원들을 향해서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강타할 것입니다!〉"(1537, 1543)


제26장 대전환점: 1942년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2월 20일경 발트 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소련군의 공세가 시들해졌고, 3월 말에는 진흙탕 기간이 시작되면서 피투성이의 광대한 전선도 비교적 잠잠해졌다. 양측 모두 기진맥진했다. 부대들이 휴식하며 재정비하는 동안 이제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더해 육군 총사령관이기도 한 히틀러는 다가오는 여름의 공세를 계획하느라 바빴다. 전년도의 계획만큼 야심찬 계획은 아니었다. 이제 단일 작전에서 붉은군대 전체를 분쇄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여름에 그는 전력의 대부분을 남부에 집중 투입해 캅카스의 유전, 도네츠 분지의 공업지대, 쿠반의 밀 생산지를 정복하고 볼가 강변의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할 작정이었다." "스탈린 역시 전쟁을 이어가려면 캅카스의 석유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스탈린그라드가 중요했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를 손에 넣을 경우, 소련 측이 유전을 보유한다 해도 카스피 해와 볼가 강을 통해 중부 러시아까지 석유를 운송하는 마지막 주요 수로가 틀어막힐 터였다."(1565-6)


"석유 말고도 히틀러는 얇아진 전열을 보충할 인력이 필요했다. 동계 전투 막바지에 병자를 제외한 총 사상자는 116만 7835명이었는데, 이 정도 손실을 메울 만한 보충병을 구할 수는 없었다." "숱한 대화 덕분에,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하계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연합'사단을 52개─루마니아 27개, 헝가리 13개, 이탈리아 9개, 슬로바키아 2개, 에스파냐 1개─로 추산했을 정도로 히틀러와 카이텔은 위성국 전체와의 교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동부전선에서의 추축국 총 병력의 4분의 1에 달했다. 독일군이 주공을 펼칠 남부전선을 증강하는 새로운 41개 사단 중에서 절반은 헝가리군(10개), 이탈리아군(6개), 루마니아군(5개)이었다. 할더와 대다수 장군들은 부드럽게 말해도 전투력이 의문스러운 '외국' 사단을 그렇게 많이 투입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체 인력이 부족했으므로 마지못해 외국의 조력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은 머지않아 재앙이 닥치는 데 일조할 터였다."(1566, 1569)


"1942년 5월 27일, 로멜 장군은 사막에서 공세를 재개했다. 유명한 아프리카 군단(2개 기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과 8개 이탈리아군 사단(1개 기갑사단 포함)으로 신속하게 타격한 로멜은 곧 영국 사막군을 이집트 국경 쪽으로 밀어냈다." "6월 말에는 알렉산드리아와 나일 강 삼각주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엘 알라메인에 있었다. 화들짝 놀라 지도를 꼼꼼히 들여다본 연합국은 이제 로멜이 이집트를 정복해 영국군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로멜이 증원군을 얻는다면, 북동쪽으로 쾌속 진군해 중동의 대규모 유전지대를 차지한 뒤, 이미 북쪽에서 캅카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 독일군과 그 지역에서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가 2차대전에서 연합국 측에는 가장 암울한 순간 중 하나, 따라서 추축국 측에는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전 지구적 전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 히틀러는 아프리카에서 거둔 로멜의 놀라운 승리를 활용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1569-70)


"최고사령관은 영미군이 배후에서 상륙할 경우 크게 위태로워질 로멜의 곤경에도,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 배후에 있는 돈 강 유역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임박했다는 최신 정보에도 개의치 않은 채, 11월 7일 점심식사 후에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튿날 저녁 뮌헨에서 맥주홀 폭동 기념일을 축하하러 모이는 고참 당원들 앞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당시 광범한 전선에서 사단과 연대, 심지어 대대 수준까지 지휘할 것을 고집하던 최고사령관이 하필이면 집이 막 무너지려는 순간에 전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중요하지 않은 정치적 볼일을 보러 갔다는 사실은 무언가 기묘하고 제정신이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괴링의 전철을 따라 사람이 곪아가고 퇴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때 막강했던 공군이 꾸준히 쇠퇴하고 있음에도 괴링은 자신의 보석과 장난감 기차에 점점 더 집착했고, 길어지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전쟁의 추악한 현실에는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1587-8)


"엘 알라메인 전투 및 영미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대전의 대전환점이었다. 아시아와의 경계인 볼가 강까지 유럽의 대부분과, 거의 나일 강까지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던 나치 정복의 힘찬 물결은 이제 퇴조하기 시작했다. 나치군이 전차와 항공기 수천 대로 적군의 대열을 공포에 빠트리고 분쇄했던 대규모 전격전의 시기는 막을 내렸다. 분명 필사적인 국지적 공격이 있었지만─1943년 봄 하르키우와 1944년 크리스마스 시기 아르덴에서─그것은 독일군이 전쟁의 마지막 2년간 엄청난 끈기와 무용으로 수행해야 했던 방어전의 일부였다. 히틀러는 빼앗긴 주도권을 끝내 되찾지 못했다. 이미 1942년 5월 30일 야간에 영국은 비로소 천 대의 항공기로 쾰른을 폭격했고, 그 다사다난했던 여름 동안 다른 독일 도시들도 폭격했다.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의 독일 군인들처럼 독일 민간인들도 그때까지 자신들의 군대가 타국민에게 가했던 참화를 처음으로 겪게 되었다."(1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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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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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전쟁에 이르는 길


제9장 첫 단계: 1934~1937 


"1935년 3월 16일 토요일에─히틀러의 기습은 대부분 토요일에 이루어졌다─총리는 국민개병제를 천명하고 평시 육군을 12개 군단 36개 사단(대략 50만 명)으로 편제하는 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은 끝이 났다─프랑스와 영국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히틀러의 예상대로 두 나라는 항의하면서도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사실 영국 정부는 히틀러에게 아직 자기네 외무장관을 접견할 용의가 있는지 부랴부랴 물어보기까지 했다. 독재자는 정중하게 그럴 용의가 있다고 회답했다. 3월 17일 일요일은 독일에서 환호와 축하의 날이었다. 패전과 치욕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의 족쇄를 벗어던진 날이었다. 히틀러와 그의 깡패 같은 통치를 아무리 싫어하는 독일인일지라도 공화국 내내 정부가 감히 시도조차 못해본 일을 총통이 성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 독일인은 국가의 명예를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그 일요일은 전몰장병 추모일이기도 했다."(499-500)


"5월 21일 저녁,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또 한 차례 '평화' 연설을 했다. 히틀러는 느긋한 태도로 자신감뿐 아니라 관용적이고 유화적인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를 위한 정의에 기반하는 평화와 이해뿐이라고 확언했다. 전쟁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고, 전쟁은 참사인 동시에 무의미하고 무익한 사태라고 말했다." "〈누구든 유럽에서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자는 혼란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 서양의 몰락이 아닌 르네상스가 실현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과업에 독일이 불멸의 기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희망이자 흔들리지 않는 신념입니다.〉 이것은 평화와 이성, 화해를 말하는 달콤한 연설이었으며, 어떤 이유에 근거해서든, 아니 이유야 어찌되었든 평화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서유럽 민주국가들의 국민과 정부는 이 달콤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502-5)


"1936년 5월 2일, 이탈리아군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했고, 7월 4일에 국제연맹은 정식으로 굴복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를 철회했다. 얼마 후 7월 16일에 에스파냐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세 번째의 비우호적 파시스트 국가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그 결과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서유럽에서 독일의 주요 경쟁국이 약해졌다. 무엇보다 아비시니아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와 화해하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그럴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총통의 대對에스파냐 정책은 처음부터 기민하고 계산적이고 먼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입수된 독일 문서들을 정독하면 히틀러의 목표 중 하나가 에스파냐 내전을 길게 끌어 서방 민주국가들과 이탈리아를 떼어놓고 무솔리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로마-베를린 추축Axis을 낳았다."(522-4)


제10장 이상하고 불길한 막간: 블롬베르크, 프리치, 노이라트, 샤흐트의 몰락 


"1938년 2월 4일, 독일 내각이 소집되었다. 마지막 내각 소집이었다. 어떤 어려움을 겪었든 간에, 이제 히틀러는 육군이든 외무부든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난관을 뚫고나갈 터였다. 그날 히틀러가 내각에서 서둘러 통과시킨 뒤 자정 직전에 라디오를 통해 독일 전역과 세계에 발표한 긴급명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내가 전군의 지휘권을 직접 넘겨받는다.〉 국가수반으로서 히틀러는 당연히 국방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했지만, 이제 블롬베르크의 총사령관직까지 넘겨받는 한편 전쟁부를 폐지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창설하는 조직이 장차 2차대전 동안 익숙해질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macht, OKW이며, 육해공 삼군이 여기에 소속된다. 히틀러가 그 최고사령관이고, 그 아래에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진 참모장이 있었다─이 직책은 아첨꾼 카이텔에게 돌아갔는데, 용케도 최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559)


"1938년 2월 4일은 제3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전쟁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였다. 이날을 기하여 나치 혁명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히틀러가 독일의 무장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내딛겠다고 오래전부터 별러온 길을 가로막고 있던 보수파의 마지막 세력이 이날 싹 치워졌다." "(경제장관) 샤흐트는 물러났다. (외무장관) 노이라트는 비켜섰다. (국방군 총사령관) 블롬베르크는 동료 장군들의 압력에 굴복해 사임했다. 프리치는 깡패 수법의 음모에 휘말렸음에도 반항하는 시늉도 없이 해임을 받아들였다. 고위 장군 16명도 자신들의 해임─그리고 프리치의 해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교단에서 군사 반란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야기로 그쳤다. 히틀러가 죽는 날까지 지녔던 프로이센 장교 계층에 대한 경멸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외교, 경제, 군사 정책을 한손에 틀어쥐고 국방군을 직접 지휘하게 된 히틀러는 이제 자신의 길을 걷게 되었다."(561-3)


제11장 병합: 오스트리아 강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국제연맹은 이 중대한 순간─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강제 병합을 시도하는─에 평화로운 인접국에 대한 독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는 또다시 정부가 부재했다. 3월 10일 목요일, 카미유 쇼탕 총리와 내각이 사임했다. 괴링이 전화로 빈에 최후통첩을 들이민 3월 11일 금요일 내내 파리에는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선포한 3월 13일에야 레옹 블룸이 이끄는 새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영국은? 2월 20일, (오스트리아 총리) 슈슈니크가 굴복하고 나서 일주일 후에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이 사임했다. 무솔리니를 계속 회유하려는 체임벌린 총리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 사임의 주된 이유였다. 후임은 헬리팩스 경이었다. 이 변화를 베를린에서는 환영했다. 히틀러에게는 즐거운 소식이었다. 그는 영국과 분규를 일으키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604-5)


"1938년 3월 11일 밤, 히틀라가 심각하게 걱정한 문제는 이 침공에 대한 무솔리니의 반응뿐이었지만, 베를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도 얼마간 걱정했다." "괴링은 베를린 주재 체코 공사 보이테흐 마스트니 박사에게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입은 〈집안일에 불과〉하며 히틀러는 프라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한다고 알렸다. 그 대신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체코 측의 확답을 바란다고 했다. 마스트니 박사는 프라하의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시 돌아와 괴링에게 동원은 하지 않을 것이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 사태에 개입할 의향이 없다고 말했다. 안도한 괴링은 자신의 방금 전 확약을 재확인한 뒤 히틀러의 승인도 얻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 두 정부의 〈속뜻〉이 그저 말뿐인 항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오스트리아의) 미클라스 대통령은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리에 임명하고 그의 각료 명단을 수락했다."(607-8)


"총 한 발 쏘지 않은 채,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갖춘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히틀러는 제국에 국민 700만 명을 더하고 미래의 계획상 막대한 가치를 지닌 전략적 요충지를 얻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삼면을 군대로 포위했을 뿐 아니라 남동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인 빈까지 차지했다.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빈은 오랫동안 중부 및 남동 유럽에서 교통과 통상체제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 신경중추가 이제 독일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아마도 히틀러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영국도 프랑스도 자신을 저지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의향조차 없음이 다시금 확인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3월 14일 체임벌린은 오스트리아에서의 히틀러의 '기정사실'에 관해 하원에서 연설했다. 〈확실한 사실은 그 무엇도 [오스트리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여타의 나라들이 무력을 행사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619-20)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 


"1938년 6월 1일, 영국 총리는 일부 비보도를 전제로 영국 기자들 앞에서 발언했고, 이틀 후 《타임스》는 체코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한 일련의 사설들 중 첫 번째 것을 게재했다. 그 사설은 체코 정부 측에 〈설령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의미할지라도〉 국내 소수집단들의 〈자결권〉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고, 주데텐 주민들과 그 밖의 집단들이 바라는 것을 결정하는 수단으로 국민투표를 처음 제안했다." "6월 8일, 디르크젠 대사는 주데텐 지역의 분리가 주민투표 이후에 이루어지고 〈독일 측이 강제적 조치로 방해하지 않을〉 경우 체임벌린 정부가 관망할 것이라고 빌헬름슈트라세에 알렸다. 이 모든 정보는 분명 히틀러에게 희소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들려온 소식도 나쁘지 않았다. 6월 말에 소련 주재 독일 대사 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 즉 체코슬로바키아를 〈방어하기 위해 출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베를린에 통지했다."(657-8)


"여름 내내 바르샤바 주재 독일 대사 한스-아돌프 폰 몰트케는 폴란드가 자국의 영토나 영공을 소련의 병력이나 항공기가 통과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는 방안을 거절할 심산일 뿐 아니라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츠크가 체코 영토의 한 조각인 테신[폴란드명 치에신]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베를린에 보고했다. 베츠크는 그 여름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치명적인 근시안을 벌써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근시안은 결국 베츠크의 상상 이상으로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터였다." "베를린의 부추김을 받은 폴란드 정부는 9월 21일, 폴란든계 사람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테신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시행할 것을 체코 정부에 요구하고 병력을 이 지역의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이튿날 헝가리 정부도 그 뒤를 따랐다. 또한 같은 날인 9월 22일 주데텐 자유군단은 독일 친위대 파견대의 지원을 받아 독일 영토 쪽으로 튀어나온 체코 국경도시 아시Aš와 에거를 점령했다."(660, 679)


"9월 27일 저녁 시점에 히틀러가 알고 있었던 것은 프라하가 저항하고, 파리가 신속히 동원하는 중이고, 런던이 강경하게 나오고, 자국민이 전쟁에 무관심하고, 독일의 주요 장군들이 개전에 단호히 반대하고, 고데스베르크 제안에 담은 최후통첩의 시한이 다음날 오후 2시라는 사실이었다. 히틀러의 서한은 체임벌린의 마음을 흔들어놓도록 절묘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온건한 어조로 자신의 제안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라거나 독일군이 분계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부인했다. 그리고 체코 측과 세부사항에 관해 협상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부분을 공식 보장할〉 의향이 있다면서 체코 측이 버티는 까닭은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유럽 전쟁을 일으키고 싶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평화를 향한 마지막 희망의 문을 열어두겠다고 했다. 결국 체임벌린은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문제의 책임을 히틀러가 아닌 (체코 대통령) 베니시에게 지웠다."(702-3)


"9월 30일 오전 1시 직후, 히틀러와 체임벌린, 무솔리니,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는 차례로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에 따라 독일 육군은 총통이 줄곧 입에 올려온 대로 10월 1일에 체코슬로바키아를 향해 진군을 개시하고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다." "체임벌린은 에스파냐 내전(독일과 이탈리아의 '의용군'이 프랑코 장군 편에 서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을 끝내기 위해 더욱 협력할 것과 군비 축소, 세계 경제의 발전, 유럽의 정치적 평화, 심지어 소련 문제의 해결까지 함께 추구할 것을 제안하는 등 시무룩한 독일 독재자에게 끝도 없는 장광성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뒤, 서류 한 장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더니 둘이서 공동으로 서명하여 즉시 공개하자고 말했다. 히틀러는 이 선언서를 읽고 얼른 서명했다. 체임벌린은 크게 만족했다." "런던으로 귀환한 득의만만한 총리는 히틀러와 함께 서명한 선언서를 휘휘 흔들면서 다우닝 가로 몰려든 대규모 군중을 맞았다."(729-32)


"히틀러는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고 다시금 주목할 만한 정복을 이루어냈다. 나를 포함해 뮌헨 협정 이후 독일에 머물고 있던 그 누구도 당시 독일 국민의 환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피했다는 데 안도했다. 또한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무혈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긍심에 들떠 있었다. 그 무혈 승리를 히틀러가 불과 6개월 만에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를 정복하여 주민 1000만 명과 남동유럽을 지배할 길을 여는 방대한 전략적 영토를 제3제국에 보탰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게다가 단 한 명의 독일인도 잃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 역사상 보기 드문 천재의 본능으로 중유럽 약소국들의 약점뿐 아니라 서방의 두 주요 민주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의 약점까지 간파하여 그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정치전政治戰'의 새로운 전략과 기법을 고안하고 구사하여 실제 전쟁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737-8)


제13장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멸 


"이제 체코슬로바키아 비극의 다음 막이 오르게 되었다. 프라하의 체코 정부가 그 막을 조금 일찍 올린 것은 이 역사 이야기를 가득 채우는 아이러니들 중 하나였다. 1939년 3월 초에 체코 정부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독일 정부가 조장한 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의 분리주의 운동(루테니아의 경우에는 이 작은 땅을 병합하고자 갈망하던 헝가리 정부도 조장했다)은 이제 진압하지 않으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시킬 지경이었다. 그럴 경우 히틀러가 프라하를 점령할 게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체코 중앙정부가 분리주의파를 진압할 경우 총통이 그에 따른 혼란을 틈타 역시 프라하로 진격하리라는 것 역시 확실한 일이었다. 체코 정부는 사뭇 주저하고 더는 도발을 견딜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둘째 대안을 선택했다." "베를린에 그토록 굽실거리던 체코 정부의 한 차례 용기 있는 행보─슬로바키아 자치정부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는 곧 국가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되었다."(769)


"1939년 3월 15일 오전 6시, 독일군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로 쇄도했다. 저항은 없었고, 저녁 무렵 히틀러는 지난 뮌헨 회담 때 체임벌린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생각한 프라하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베를린을 떠나기 전 그는 독일 국민에게 거창한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이 끝장낼 수밖에 없었던 체코 정부의 〈난폭한 만행〉과 〈테러〉에 관한 지겨운 거짓말을 반복한 다음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누구든 《나의 투쟁》을 읽은 사람이라면, 지도를 흘낏 보고 슬로바키아 내 독일군의 새로운 배치를 확인한 사람이라면, 뮌헨 협정 이래 독일의 모종의 외교적 행보를 눈치챈 사람이라면, 또는 지난 12개월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혈 정복한 히틀러의 동태에 관해 숙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총통의 '약소국' 목록에서 어떤 나라가 다음 차례가 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체임벌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폴란드의 차례였다."(783, 793)


제14장 폴란드의 차례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무혈 정복을 지켜본 1938년이 저물어갈 무렵, 히틀러는 또다른 정복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정복할 곳은 잔존 체코슬로바키아, 메멜, 그리고 단치히였다. 슈슈니크나 베네시의 콧대를 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제는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츠크의 차례였다." "독일과 국경을 접하는 가운데 길게 보아서 가장 우려스러운 나라는 폴란드였다. 그런데 폴란드만큼 독일의 위험에 둔감한 국가도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들 중에 회랑지대를 확정하여 폴란드에 바다로 나갈 통로를 열어준─그리고 독일 제국과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은─것만큼 독일인을 분개시킨 조항도 없었다. 옛 한자동맹의 항구 단치히를 독일로부터 분리하여 국제연맹이 감독하되 폴란드가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유도시로 바꿔놓은 조치도 똑같이 독일 여론의 분노를 자아냈다. 약하고 평화로운 바이마르 공화국마저 폴란드에 의한 독일 제국의 절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798-800)


"1939년 3월 15일 히틀러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점령하고 '독립' 슬로바키아를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을 때, 그 비늘은 완전히 벗겨졌다. 그날 아침 폴란드는 이미 북쪽의 포메른과 동프로이센의 국경이 독일 육군에 가로막힌 것처럼 이제 남쪽 슬로바키아 국경도 독일 병력에 가로막혔다. 폴란드의 군사 정세는 하룻밤 사이에 불안정해졌다." "각성한 폴란드 외무장관은 베네시보다 더 단호하게 베를린에 맞설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1년 전만 해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기를 쓰던 영국 정부가 이제 폴란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로 굴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30일 저녁, 케너드는 베츠크에게 독일의 침공에 대비할 상호원조협정에 관한 영국-프랑스 제안을 제시했다. 이튿날인 3월 31일,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폴란드가 공격받아 거기에 저항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정부를 즉시 힘닿는 데까지 지원할 것〉이라는 역사적인 선언을 했다."(803, 811-2)


"7월 23일, 프랑스와 영국은 소련의 제안에 마침내 동의했다. 군 참모 회담을 즉시 개최해 군사협약을 작성함으로써 삼국이 히틀러의 군대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구체적으로 정하자는 제안이었다." "7월의 마지막 주에 모스크바 정치회담은 주로 '간접침략'이라는 말의 정의를 놓고 합의를 보지 못하는 바람에 답보 상태에 빠졌다. 영국과 프랑스가 보기에는 소련이 '간접침략'을 너무 넓게 해석하는 터라 나치의 심각한 위협이 없는 경우에도 핀란드나 발트 국가들에 대한 소비에트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데 이 용어가 사용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런 해석에 적어도 런던은─프랑스는 더 협조할 용의가 있었다─동의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7일에 영국이 만약 정치협정과 군사협정을 동시에 체결하자는 주장을 소련이 양보하고 (기왕이면) '간접침략'에 대한 영국 측 정의까지 받아들이는 데 동의한다면 그 즉시 참모 회담을 시작하겠다고 제안하며 흥정을 시도했을 때, 몰로토프는 딱 잘라 거절했다."(874-5)


"영국 외무부 기밀문서들을 보면, 8월 초에 체임벌린과 헬리팩스가 소련과의 협정 타결을 거의 포기했으면서도 모스크바에서 참모장교 회담을 지연시키면 독일 독재자가 전쟁을 향해 치명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향후 4주 동안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히틀러가 선수를 쳤던 것이다." "빌헬름슈트라세에서는 소련의 기존 방침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지고 있었다. 소련이 중립국이 되고 나면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고, 설령 싸우더라도 독일 측으로서는 폴란드를 재빨리 해치우고 독일 육군이 서쪽을 향해 총력으로 진격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서부 방어시설에 묶어두기가 용이할 터였다.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대리 자크 타르베 드 생아르두앙은 파리에 이렇게 보고했다. 〈나치 지도부 사이에서 당혹, 주저, 임시변통, 심지어 타협의 경향을 보이던 시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877-8, 881-2)


제15장 나치–소비에트 조약 


"독일은 폴란드를 포함하는 동유럽을 소련과 나눠 가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로서는 도저히 겨뤄볼 수 없는─설령 할 수 있다 해도 분명 꺼내지 않을─승부수였다." "8월 15일 오후 8시, 슐렌부르크 대사는 몰로토프를 만나 이미 지시받은 대로 리벤트로프의 긴급 전보를 읽어주었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가 양국 간의 불가침 조약에 관심이 있느냐고 몰로토프는 물었다. 또 소비에트-일본 관계를 개선하고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여기서 분쟁은 그해 여름 내내 만주-몽골 국경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벌어진 전쟁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몰로토프는 발트 국가들을 공동으로 보장하는 방안을 독일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렇듯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을 먼저 제안한 쪽은 소련이었다. 몰로토프의 제안은 바로 히틀러가 원하던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가 내놓으려던 그 어떤 제안보다도 더 구체적이고 더 나아간 제안이었다."(896, 906-7)


"그러나 독일 측으로서는 일정 조정을 이루어내야만 했다. 폴란드 침공의 진행표 전체가 그 일정에 달려 있었다. 리벤트로프가 8월 26일이나 27일 이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지 못하고 독일 측의 우려대로 소련 측이 좀 더 미적거릴 경우, 9월 1일이라는 목표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이 중대한 국면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 스탈린과의 중재에 나섰다. 자존심을 굽힌 채 자신이 그토록 자주, 그토록 오랫동안 비방해온 소비에트 독재자에게 독일 외무장관을 모스크바에서 즉시 접견해달라고 몸소 간청했다." "스탈린의 회답은 8월 21일 오후 10시 30분에 베르크호프의 총통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잠시 후에 독일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이 갑자기 중단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국 정부와 소비에트 정부는 서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제국 외무장관이 교섭 타결을 위해 8월 23일 수요일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이다.〉"(916, 919)


"1939년 7월 말에 스탈린은 분명 프랑스와 영국이 구속력 있는 동맹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뿐 아니라 (특히 영국이) 히틀러를 부추겨 동유럽에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까지 확신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과연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의무를 준수했던 것 이상으로 영국이 폴란드에 대한 보장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몹시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 2년간 서방에서 일어난 모든 일도 그의 의심을 키웠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이후 또다른 침공을 막기 위해 회의를 열어 계획을 세우자는 소비에트의 제안을 체임벌린이 거절한 일, 소련을 배제시킨 뮌헨 협정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달랜 일, 1939년의 운명적인 여름이 째깍째깍 지나가는 때에 체임벌린이 독일에 맞설 방어동맹을 교섭하면서 자꾸 지체하고 망설인 일 등이 그러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히틀러가 조치를 취할 때마다 머뭇거리고 비틀거리던 영국-프랑스의 외교가 이제 완전히 파탄났다는 점이었다."(943-4)


제16장 평화의 마지막 나날 


"괴벨스의 노련한 지도 하에 나치당이 일간지들을 '조정'─이는 자유언론의 파괴를 의미했다─하기 시작한 6년 전부터 독일 시민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히틀러가 원래 폴란드 공격 날짜로 정해두었던 8월 26일 토요일에 괴벨스의 선전 공작은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일기에 몇몇 신문의 헤드라인을 적어두었다. 《B.Z.》: 〈폴란드, 극에 달한 혼란─독일인 가족, 피난하다─폴란드군, 독일 국경에 육박!〉 《12시 블라트》: 〈도를 넘는 불장난─독일 여객기 3대, 폴란드군에 격추─회랑지대 독일인 농가 다수, 불길에 휩싸이다!〉 나는 한밤중 방송국으로 가는 길에 《민족의 파수꾼》 일요일판(8월 27일자)을 집어들었다. 1면 상단 전체에 걸쳐 1인치 크기로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폴란드 전역 전쟁열! 150만 동원! 국경 방면으로 계속 병력 수송! 오버슐레지엔 혼란!〉 물론 독일의 동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은 2주 전부터 동원하고 있었다."(978-80)


"1939년 8월 마지막 날의 오후부터 밤까지의 막판에 기진맥진한 외교관들과 극도로 긴장한 채 그 외교관들에게 지시를 내린 상관들의 우왕좌왕하는 행보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고, 독일 측의 경우에는 순전히 고의적인 기만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8월 31일 오후 12시 30분에, 그러니까 헬리팩스 경이 폴란드 정부에 더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촉구하기 전에, 립스키가 리벤트로프를 방문하기 전에, 독일 정부가 폴란드에 대한 '관대한' 제안을 공표하기 전에, 그리고 무솔리니가 중재를 시도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최종 결정을 하고 전 세계를 전에 없이 처참한 전쟁으로 밀어넣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8월 31일 정오 직후, 히틀러는 이튿날 새벽 폴란드를 공격하라고 정식 문서로 명령했다. 아직까지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나라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두 나라가 적대적 조치를 취한다면 그에 대응할 작정이었다."(1022-5)


제17장 제2차 세계대전 개시 


"9월 3일 정오 무렵에 나는 빌헬름슈트라세의 총리 관저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확성기를 통해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250명쯤─그 이상은 아니었다─되는 사람들이 그곳에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모두가 주의 깊게 들었다. 발표가 끝났을 때는 중얼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망연자실한 채로, 히틀러가 자신들을 세계대전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안식일이었음에도 곧 신문팔이 소년들이 '호외요, 호외요'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실은 거저 나눠주고 있었다." "독일인처럼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입증'되었을지 몰라도, 그날만 해도 영국인에 대한 악감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내가 영국 대사관 앞을 지나갈 때 헨더슨을 위시한 대사관 직원들은 거리 모퉁이에 있는 아들론 호텔로 옮겨가는 중이었고, 경찰관 한 명만이 대사관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어슬렁거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1067-8)


"영국의 참전 소식이 알려진 일요일 오후, 독일의 주요 인사들 중에서 가장 침울해한 사람은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대제독이었다. 그는 전쟁이 너무 일찍, 4~5년이나 먼저 벌어졌다고 보았다. 독일 해군의 Z계획은 1944~45년에 완료되어 영국군에 대적할 만한 규모의 함대를 갖출 터였다. 그러나 당시는 1939년 9월 3일이었으며, 히틀러가 제독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할지라도 레더는 영국을 상대로 효과적인 전쟁을 치를 만한 수상 함정도, 심지어 잠수함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1939년 9월 3일 오후 9시, 히틀러가 베를린을 떠나던 순간에 독일 해군은 공격에 나섰다. 경고도 없이 U-30 잠수함이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320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리버풀을 출발해 몬트리올로 향하던 영국 여객선 애서니아Athenia 호를 어뢰로 격침했다. 승객 1400명 가운데 미국인 28명을 포함해 112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10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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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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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제1장 제3제국의 탄생 


"1909년 11월, 히틀러는 〈운명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빈에 도착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지몬덴크 골목의 가구 딸린 방에서 나와야 했고, 이후 4년 간은 싸구려 여인숙에서 지내거나 도나우 강 근처 빈 제20구의 멜데만 슈트라세 27번지에 있는, 누추한 남성 노숙자 쉼터에서 지내며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 자주 찾아가 겨우 허기를 달래곤 했다." "그렇지만 이런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끝끝내 어엿한 직장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이, 그는 행여 프롤레타리아트 신분으로, 육체노동자 신분으로 미끄러져 내려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프티부르주아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훗날 그는 그때까지 지도자 없이 낮은 급료를 받으며 무시당하던 광범한 화이트칼라층을 토대로 삼아 국가사회주의당을 조직하면서 이 두려움을 활용했다. 이 두려움은 또한 수백만에 달하는 이 화이트칼라층 사이에서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자신들이 '노동자'보다 낫다는 환상을 조장했다."(44-5)


"《나의 투쟁》에 썼듯이, 어느 날 그는 빈 노동자들의 대중 시위를 목격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그곳에 서서 거대한 인간 용이 천천히 꿈틀대며 지나가는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나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사회민주당의 기관지를 펼쳐 있고, 당 지도부의 연설을 검토하고, 당 조직을 살펴보고, 당의 심리학과 정치적 수법을 곱씹고, 그 결과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성공을 설명하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그들은 어떻게 대중운동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대중운동 없이는 그 어떤 정당도 무력하다. 둘째, 그들은 대중 사이에서 구사하는 선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셋째, 그들은 그가 말하는 〈정신적·육체적 테러〉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 세 번째 교훈은 분명 부실한 관찰에 근거했고 거기에 터무니없는 편견이 섞여 있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교훈을 활용할 터였다."(51-2)


"히틀러가 살던 무렵의 빈에는 이러한 지지의 필요성과 대중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당을 구축할 필요성을 이해한 정치 지도자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빈의 시장이자 기독교사회당 지도자인 카를 뤼거 박사였다." "훗날의 히틀러와, 빈의 중간계급 하층의 우상인 덩치 크고 화통하고 상냥한 시장 사이에는 분명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뤼거가 불만 많은 프티부르주아지를 끌어들이고 나중의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극성스러운 반유대주의를 동원한 정당의 당수로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가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해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뤼거는 상당한 지적 성취를 거둔 사람이었으며, 유대인을 포함한 반대자들도 그가 본심으로는 점잖고 예의 바르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뜻 인정했다." "이 점이 청년 히틀러에게는 신경에 거슬렸다. 히틀러는 뤼거가 지나치게 관대하고 유대인의 인종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54-5)


"그러나 히틀러는 결국 뤼거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뤼거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법을 알았고, 현대사회의 온갖 문제와 대중을 사로잡는 선전 및 웅변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뤼거가 강력한 교회를 상대하는 방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뤼거는 〈유서 깊은 제도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기민하게 활용했고, 그리하여 오랜 권력의 원천들로부터 자신의 운동에 이로운 것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다.〉 요컨대 바로 여기에 훗날 히틀러가 독일에서 자신의 정당을 조직하고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활용한 이념과 수법이 담겨 있다. 그의 독창성은 1차대전 이후 우파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그런 이념과 수법을 독일 정세에 적용했다는 데 있다. 이로써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당들 중에서 나치 운동만이 대규모 추종 세력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 공화국 대통령, 대기업 협회─〈유서 깊은 제도권〉의 3대 세력─의 지지를 확보해 독일 총리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55)


제2장 나치당의 탄생 


"전후의 혼란기에 바이에른의 우파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규군, 즉 국가방위군Reichswehr이 있었다. 비텔스바흐 왕가의 복귀를 바라는 군주제 지지자들이 있었다. 베를린에 수립된 민주공화국을 경멸하는 다수의 보수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 대규모 제대 군인의 무리, 1918년의 패전으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 무리가 있었다." "1920년 3월 14일, 국가방위군은 뮌헨에서 호프만의 사회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구스타프 폰 카르를 수장으로 하는 우파 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이 바이에른의 주도는 공화국을 뒤엎고 권위주의 정권을 세워 베르사유 조약의 강제 조항을 거부하기로 결의한 독일 내 모든 세력을 끌어들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에어하르트 여단의 단원들을 비롯한 자유군단의 용병들은 피난처를 마련했고 또 환영을 받았다. 루덴도르프 장군과 불만 많은 다수의 퇴역 장교들도 뮌헨에 정착했다. 이 비옥한 땅에서 아돌프 히틀러도 첫걸음을 내디뎠다."(70-2)


"1920년에 입당한 루돌프 헤스는 학위논문으로 써서 상을 받은 「독일을 다시금 지난날의 영광으로 이끌 인물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글로 히틀러를 감동시켰다. 〈모든 권위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인민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권위를 세울 수 있다. ··· 독재자는 처음부터 광범한 대중에게 더 깊이 뿌리박고 있을수록 그들을 심리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것이고, 노동자들로부터 불신을 덜 받을 것이고, 인민 가운데 가장 정력적인 이 계층 사이에서 지지자를 더 많이 얻을 것이다. 그 자신은 대중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모든 위대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성 그 자체이다. ··· 불가피할 때면 그는 유혈 사태도 피하지 않는다. 중대한 문제들은 언제나 피와 철에 의해 결정된다. ···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마저 짓발고 넘어설 각오가 되어 있다. ··· 입법자는 지독히 무정하게 일을 처리한다. ··· 필요할 때면 척탄병의 군화로 그들[인민]을 짓밟을 수 있다.〉"(94-5)


"1921년 4월 연합국은 독일에 배상금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1320억 금마르크─당시 액수로 330억 달러─라는 경악스러운 금액에 독일인들은 도저히 지불할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통상 1달러에 4마르크였던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921년 여름에는 1달러에 75마르크로 떨어졌고, 1년 후에는 400마르크로 폭락했다. 1921년 8월 에르츠베르거가 살해되었다. 1922년 6월, 공화국을 선포했던 사회민주당의 필리프 샤이데만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같은 달 24일, 외무장관 라테나우가 길거리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 세 사건 공히 범인은 극우파의 일원이었다. 휘청거리던 베를린 중앙정부는 결국 정치적 테러를 엄벌하는 내용의 공화국 보호를 위한 특별법 발포로 이 도전에 응수했다. 바이에른 정부가 특별법을 시행하려 하자, 이제 인정받는 젊은 지도자 축에 드는 히틀러를 비롯한 이 지역 우파는 레르헨펠트를 끌어내리고 베를린으로 진격해 공화국을 쓰러뜨릴 음모를 꾸몄다."(101)


제3장 베르사유, 바이마르, 맥주홀 폭동 


"1918년 11월, 절대권력을 쥔 사회민주당은 영속적인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재빨리 닦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호엔촐레른 제국을 지탱하던 세력들, 민주정 독일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세력들을 영원히 탄압하거나 적어도 영원히 억제해야 했을 것이다. 그 세력들이란 봉건적인 융커 지주를 비롯한 상류층, 거대 카르텔을 주무르는 대자본가들, 자유군단의 떠돌이 용병들, 행정조직의 관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군부와 참모본부였다. 사회민주당은 낭비가 많고 비경제적인 광대한 사유지, 독점기업과 카르텔을 해체하고, 나아가 새로운 민주정에 충성스럽고도 성실하게 봉사하지 않을 모든 사람을 관료제, 사법부, 경찰, 대학, 군대에서 남김없이 내쫓아야 했을 것이다. 이 사회민주당원들 대다수는 독일의 다른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기성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습관이 몸에 밴 선량한 노동조합주의자였던 터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군부에 권위를 양도하기 시작했다."(105)


"빌헬름 그뢰너는 루덴도르프에 이어 제1병참총감이 된 장군이었다. 1918년 11월 9일, 스파에서 힌덴부르크 원수가 머뭇거릴 때 카이저에게 이제 더는 군의 충성을 받으실 수 없으니 퇴위하셔야 한다고 직언했던─군부가 결코 용서하지 않은 용감한 행동─인물도 그뢰너였다." "조국이 극도로 곤경에 처한 순간에, 두 사람은 비밀 전화선을 통해 재회했다. 바로 그때 사회민주당 지도자와 독일군 2인자는 한동안 공개되지 않을 테지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협약을 맺었다. 에베르트는 무정부 상태와 볼셰비즘을 진압하고 군과 그 모든 전통을 유지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 대가로 그뢰너는 신정부가 자리를 잡고 목표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군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군은 구조되었지만, 공화국은 탄생한 바로 그날 침몰하고 말았다. 그뢰너 자신과 지조 있는 소수를 제외한 다른 장군들은 공화국에 충성할 마음이 결코 없었다. 결국 힌덴부르크의 주도로 그들은 공화국을 나치당에 팔아넘겼다."(106)


"정식으로 선출된 정부가 민주적 정신에 충실하고 나아가 내각과 의회에 복종할 새로운 군을 건설하지 못한 것은 시간의 경과가 알려준 대로 공화국으로서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사법부를 숙청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법 집행자들은 반혁명의 중심 중 하나가 되어 반동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법을 악용했다. 역사가 프란츠 L. 노이만은 〈정치적 사법이 독일공화국의 생애에서 가장 암울한 페이지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카프 폭동 이후 정부는 705명을 반역죄로 기소했지만, 그중 오로지 베를린 경찰청장만이 형벌─5년간의 '명예로운 금고'─을 받았다. 프로이센 정부가 그의 연금 지급을 중단하자 대법원은 다시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반역 관련 법은 공화국 지지자에게는 가차없이 적용되었지만, 조만간 아돌프 히틀러가 알아챌 것처럼 공화국을 전복하려 시도한 사람은 무죄로 풀려나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116-7)


"1923년 1월 11일, 프랑스의 루르 점령으로 독일 경제의 목이 졸리자 마르크화는 바닥을 모르고 급락했다(최종적으로 1달러당 조 단위까지 도달했다). 덕분에 독일 중공업은 무가치한 마르크화로 변제함으로써 부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화조약에 의해 불법화되었는데도 '병무국'이라는 명칭으로 가장해 잔존하던 참모본부는 마르크화 폭락 덕에 전채戰債가 청산되었고 따라서 독일의 다음 전쟁을 방해할 재정적 장애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인민 대중은 산업계 거물들, 군, 국가가 통화 폭락으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보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알았던 것이라곤 은행 잔고가 아무리 많더라도 대충 묶은 당근 한 다발이나 감자 반근, 설탕 수백 그램, 밀가루 1파운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그리고 날마다 굶주림의 고통을 몸으로 알았다. 궁핍과 절망 속에서 그들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공화국에 돌렸다. 이런 시절이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하늘의 선물이었다."(118-20)


"바이에른 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난 맥주홀 폭동 재판에서 루덴도르프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히틀러를 비롯한 피고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누구든 독일국 헌법 또는 주 헌법을 강제로 변경하려 시도하는 사람은 종신형에 처한다〉라고 언명하는 법률─독일 형법 제81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옛 란츠베르크 요새에서의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평판사들이 이 선고마저도 가혹하다고 항의했지만, 재판장은 히틀러가 6개월 복역한 후 가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그들을 달랬다. 히틀러를 외국인으로서 추방하려던 경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판결은 1924년 4월 1일에 내려졌다. 그로부터 채 아홉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0일, 히틀러는 석방되어 민주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싸움을 자유롭게 재개할 수 있었다. 반역죄를 범했다고 해도 그 결과는, 범행자가 극우파일 경우, 법조문에도 불구하고 그리 무겁지 않았으며, 공화국 반대파의 다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147-8)


제4장 히틀러의 정신과 제3제국의 뿌리 


"《나의 투쟁》 제1권에서 히틀러는 생존공간Lebensraum(생활권) 문제,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를 길게 논한다." "히틀러는 새로운 영토 획득은 〈동방에서만 가능했다. ··· 유럽 내에서 땅을 원한다면 대체로 러시아를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새로운 제국이 옛 튜턴기사단의 길을 따라 다시 행군하여 독일의 칼로써 장차 독일 민족이 쟁기질하고 매일 빵을 얻을 땅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한다." "독일 국민은 얼마나 넓은 국토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히틀러가 말하는 '표본 연도'는 독일인이 슬라브인을 다시 동쪽으로 몰아내던 무려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터였다. 동쪽으로 밀어내기를 재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주데텐란트, 단치히를 포함하는 폴란드 서부를 차지한다. 그다음은 러시아 본국이다. 이렇게 써놓았는데도 불과 수년 후에 히틀러 총리가 바로 이 목표를 성취하겠다고 나섰을 때 세계는 왜 그토록 놀랐던 것일까?"(155-8)


"일부 역사가들, 특히 영국 역사가들은 히틀러의 세계관을 조야한 형태의 다윈주의로 여겨왔지만, 사실 그 세계관은 독일의 역사와 사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동시에 독일의 여러 철학자, 역사가, 국왕, 장군,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끝없는 투쟁으로 보았고, 세계를 적자가 살아남고 최강자가 지배하는 밀림─〈한 생물이 다른 생물을 잡아먹고 약자의 죽음이 강자의 삶을 의미하는 세계〉─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따라 〈지배자의 권리〉를 부여받은 자연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 가장 용감하고 근면한 자식〉은 누구인가? 아리아인이다. 아리아인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것을 성취하고 그토록 뛰어난 존재가 되었을까? 히틀러의 답변은 다른 인종들을 짓밟음으로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투쟁》의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나치의 인종 우월성 관념, 지배인종 관념, 즉 제3제국과 히틀러의 신질서의 기반을 이룬 관념의 핵심을 만난다."(161-2)


"1871년부터 1933년까지, 실은 히틀러가 몰락한 1945년까지 독일 역사의 행로는, 중간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제외하면, 직선으로 나아가는 완전히 논리적인 과정이었다. 남성 보통선거에 의해 의원들이 선출되는 제국의회를 창설함으로써 민주적인 외양을 꾸미긴 했지만, 사실 독일 제국은 황제이기도 한 프로이센 국왕이 통치하는 군국주의적 전제국가였다. 제국의회는 권한이 거의 없었거니와, 국민의 대표들이 울분을 토하거나 자신들이 대변하는 계급을 위해 보잘것없는 이익을 좇아 흥정하는 토론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권한─신성한 권리─은 군주에게 있었다." "빌헬름 2세는 의회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가 임명한 총리는 그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지, 의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의회는 총리를 끌어내릴 수도 없었고, 붙들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군주의 대권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에서는 민주주의, 국민주권, 의회의 우위 같은 관념이 결코 뿌리내리지 못했다."(177-8)


제2부 승리와 공고화


제5장 권력에 이르는 길: 1925~1931 


"1924년 말, 출옥한 지 2주 만에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 총리이자 가톨릭 계열의 바이에른인민당 당수인 하인리히 헬트 박사를 서둘러 만났다. 근신하겠다고 약속하자(히틀러는 아직 가석방 중이었다) 헬트는 나치당과 그 기관지에 대한 금지 처분을 풀어주었다. 헬트는 바이에른 법무장관 귀르트너에게 〈야수를 제압했으니 쇠사슬을 조금 풀어주어도 괜찮겠지요〉 하고 말했다. 바이에른 총리는 이런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가장 먼저 범한 독일 정치인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결코 마지막 정치인은 아니었다. 《민족의 파수꾼》은 1925년 2월 26일, 히틀러가 쓴 〈새로운 시작〉이라는 제목의 긴 사설과 함께 복간되었다. 이튿날 히틀러는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열린 부활한 나치당의 첫 대중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히틀러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하나는 모든 권력을 자기 손에 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나치당을 오직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 조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215-6)


"헤르만 뮐러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마지막 총리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 민주 정당들의 연정에 기반을 둔 마지막 정부의 수반으로 1930년 3월 사임했다. 후임 총리는 가톨릭 중앙당의 원내대표 하인리히 브뤼닝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재정 계획 조치들을 승인하도록 제국의회 의원 다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자 브뤼닝은 힌덴부르크에게 헌법 제48조를 발동하여 비상대권에 의거한 대통령령으로 자신의 재정 법안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응해 의회는 대통령령의 철회를 의결했다. 의회제 정부는 경제 위기로 강력한 정부가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와해되고 있었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자 브뤼닝은 1930년 7월 대통령에게 제국의회 해산을 요청했다. 선거일은 9월 14일로 정해졌다. 브뤼닝이 무슨 근거로 이 선거에서 의석의 과반을 무난히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는지는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예상보다 일찍 기회가 왔음을 알아챘다."(248-9)


"큰 기대를 걸었음에도 1930년 9월 14일 밤에 나온 당일의 선거 결과에 히틀러는 퍽 놀랐다. 2년 전, 나치당은 81만 표를 얻어 제국의회 의원 12명을 당선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 이날 나치당은 640만 9600표를 얻어 107석을 차지함으로써 기존의 가장 약소한 아홉 번째 정당에서 단숨에 제2당으로 약진했다." "군대, 그리고 대기업 및 금융계로 이루어진 재계, 양측의 지도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독일 역사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불운한 한때로밖에 보지 않았다. 성공적인 선거 결과에 달아오른 히틀러는 이제 이 양대 세력을 설득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나치당의 선동과 저속함을 좋아하지 않았을 테지만, 공화국의 첫 10년간 너무나 억제되어온 독일의 오랜 애국심과 민족주의 감정을 나치당이 되살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치당은 독일 국민을 공산주의, 사회주의, 노동조합주의, 그리고 쓸데없는 민주주의로부터 빼내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독일 전역을 불타오르게 했다."(250, 256)


제6장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나날: 1931~1933 


"슐라이허의 눈에는 바이마르 체제를 약화시키는 원인들이 명확하게 보였다─누군들 몰랐겠는가? 우선 정당들이 너무 많은 데다(1930년에는 그중 10개 정당이 각각 1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각 당의 목적이 너무 엇갈리고 저마다 자기 당이 대변하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돌보는 데 너무 몰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국의회에서 각각의 차이를 메우고 지속적인 다수파를 형성하여 1930년대 초에 독일이 직면한 중대 위기에 대처할 만한 안정적 정부를 뒷받침할 수가 없었다. 1930년 3월 28일에 총리직을 맡은 브뤼닝이 어떠한 정책을 내놓든 제국의회에서 과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그저 정부의 소관 업무를 수행하는 데 그쳤으며, 경제가 마비된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하려면 헌법 제48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조항에 따르면 비상사태에서는 총리가 대통령의 승인만 받으면 긴급명령에 의해 통치할 수 있었다. 슐라이허는 총리가 바로 이 방법으로 통치하기를 원했다."(273)


"당시 뜻밖의 터무니없는 인물이 무대 중앙에 잠시 얼쩡거렸다. 슐라이허 장군이 1932년 6월 1일 독일 총리에 앉힌 53세의 프란츠 폰 파펜이라는 자였다." "파펜에게는 이렇다 할 정치적 뒷배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제국의회 의원도 아니었다. 정계에서 경험한 최고의 지위가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이었다. 파펜이 총리에 임명되자 소속 정당인 중앙당은 그가 당수 브뤼닝을 배신했다는 데 분개하여 만장일치로 당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파펜에게 초당파 내각을 구성하라고 지시했으며, 파펜은 슐라이허가 이미 각료 명단을 준비해둔 덕에 즉시 정부를 꾸릴 수 있었다." "파펜의 첫 직무는 슐라이허와 히틀러 사이에 맺어진 협정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6월 4일, 파펜은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7월 31일에 새로 치르기로 했으며, 의심 많은 나치 인사들로부터 어지간히 재촉을 받고는 6월 15일에 돌격대 금지령을 해제했다. 그러자 독일 역사에서 일찍이 본 적 없는 정치적 폭력과 살인이 잇따랐다."(295-7)


"7월 20일, 파펜은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하고 스스로 프로이센 제국판무관에 취임했다. 이는 독일 전역에 가닿을 일종의 권위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대담한 행보였다." "파펜은 또 슐라이허가 급조한 '증거'를 들이밀며 프로이센 당국이 공산당과 한통속이었다고 비난했다.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측 각료들이 완력에 밀려 쫓겨나지 않는 한 스스로 물러나지는 않겠다고 하자 파펜은 기꺼이 완력을 행사했다." "좌파 세력이나 민주적인 중도 세력이 민주정 전복 시도에 진지하게 저항할지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더 이상 없었다. 지난 1920년에는 민주정 전복 시도에 맞서 총파업으로 민주정을 구한 바 있었다. 이번에도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 그런 대응을 검토했으나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다. 요컨대 파펜은 합법적인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의 관에 또 하나의 못을 박은 셈이었다. 그가 큰소리친 대로 그 일에 필요했던 것은 병력 1개 분대뿐이었다."(297-8)


"1933년 1월 23일, 총리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를 방문해 제국의회에서 과반 지지를 얻지 못했음을 자인하면서 의회 해산과 더불어 헌법 제48조에 의거해 대통령의 명령으로 통치하는 국가긴급권을 발동하도록 요구했다. 마이스너에 따르면 장군은 제국의회의 〈한시적 배제〉도 요구했고, 정부를 〈군사독재정〉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온갖 간사한 음모를 꾸몄음에도 슐라이허는 지난 12월 초의 파펜과 같은 신세였다. 다만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지난번에는 파펜이 국가긴급권을 요구했지만 슐라이허가 이에 반대하면서 자신이 나치당의 지지를 받아 다수파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슐라이허가 독재를 고집하고 파펜이 힌덴부르크에게 자신이 히틀러를 정부에 끌어들여 제국의회에서 다수파가 되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얽히고 설킨 음모들이 베를린을 가득 채운 가운데 슐라이허는 마지막 순간에 후임 총리로 히틀러를 지지하고 있었다."(326-8)


"이렇게 뒷문을 통해, 내심 혐오하는 보수적 반동주의자들과의 비루한 정치적 거래를 통해 지난날 빈의 부랑자이자 1차대전의 낙오자, 난폭한 혁명가가 대국의 총리가 되었다. 분명히 국가사회주의당은 정부에서 소수파였다. 내각의 열한 자리 중에서 세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총리직을 별도로 치면 그마저 핵심 직책이 아니었다." "중요한 부처들은 보수파에 돌아갔다. 그들은 나치당에 올가미를 걸었으니 이제 자기네 목적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파펜 본인은 독일 부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힌덴부르크로부터 부총리를 대동하지 않을 경우 총리를 접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독특한 직책에 힘입어 급진적인 나치 지도자에게 제동을 걸 수 있다고 파펜은 확신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경박하고 음험한 정치인은 히틀러라는 인물을 알지도 못했고─아무도 히틀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그를 여기까지 밀어올린 세력의 힘을 이해하지도 못했다."(331-2)


"독일의 계급과 집단과 정당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주공화국의 폐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대두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나치즘을 겪었던 독일인들의 중대한 잘못은 서로 단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가사회주의당은 대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1932년 7월에도 총 투표수의 37퍼센트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히틀러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독일인 63퍼센트는 설령 일시적으로라도 단결하여 나치즘을 근절하지 않으면 이 공통의 위험이 자신들을 압도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너무 분열되고 근시안적이어서 서로 힘을 합치지 못했다. 모스크바의 지령을 따르는 공산당은 마지막까지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먼저 사회민주당, 사회민주당계 노조, 중간계급 민주 세력을 쓰러뜨리면 일시적으로는 나치 정권이 들어설 테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며, 그러면 공산당이 정권을 넘겨받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한다는 생각이었다."(332-3)


"보수층은 한때 부랑자였던 오스트리아인이 수중에 있는 한 자신들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화국 파괴는 첫 단계일 뿐이었다. 그들이 원한 다음 단계는 권위주의 국가, 즉 국내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난센스'와 노동조합의 권력에 종지부를 찍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1918년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대군을 재건하여 그 군사력으로 독일을 다시 양지바른 곳으로 이끌 수 있는 국가였다." "호엔촐레른 제국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승리에 의해, 독일 공화국은 1차대전에서 패한 뒤 연합국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3제국은 전쟁의 부침이나 외세의 영향에 빚진 것이 전혀 없었다. 제3제국은 평시에 독일인들 자신의 약점과 강점에 힘입어 평화롭게 출범했다.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완벽하게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히틀러에게 총리직을 맡겼을 때, 독일인 상당수, 아마도 과반수는 나치의 폭정을 자초한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될 터였다."(335-6)


제7장 독일의 나치화: 1933~1934 


"의사당 화재 다음날인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긴급명령에 서명하도록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했다. 헌법에서 개인과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7개 항을 유예하는 내용이었다. 〈개인의 자유 제한, 보도의 자유를 포함해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권리 제한, 집회와 결사의 권리 제한, 우편과 전신 및 전화에 의한 통신의 비밀 침해, 가택 수색 영장, 재산의 몰수 또는 제한 명령 등도 별도로 규정하지 않는 한 법적 제약을 넘어 허용된다.〉 또한 긴급명령은 필요할 경우 연방 주들의 전권을 넘겨받을 권한을 중앙정부에 부여했고, 〈심각한 치안 교란〉을 포함하는 다수의 범죄에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게 했다." "3월 5일, 히틀러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민주적 선거를 치른 날에 독일 국민은 투표를 통해 발언했다. 온갖 테러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의 과반은 히틀러를 거부했다. 나치당은 가장 많은 1727만 7180표를 얻었지만, 이는 총 투표수의 4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347, 350)


"3월 23일, 의회에는 이른바 수권법─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 상정되어 있었다. 간략하게 5개 조로 구성된 이 법은 향후 4년간 국가 예산 통제, 외국과의 조약 승인, 개헌 발의 등을 포함하는 입법권을 의회로부터 빼앗아 내각에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내각이 제정하는 법률은 총리에 의해 입안되고 〈헌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 어떠한 법률도 〈제국의회 및 제국참의원 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했고─분명 가장 잔인한 농담이었다─대통령의 권한은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표결 결과는 찬성 411, 반대 84(모두 사회민주당)였다. 이렇게 해서 독일 의회민주주의가 결국 매장되었다. 공산당 의원들과 일부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체포된 것을 제쳐두면, 비록 테러를 수반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아주 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 의회는 헌법상 권한을 히틀러에게 넘겨줌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54-7)


"1933년 5월 17일,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평화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기만적 선전술의 걸작이었다. 전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계 44개국의 수반들에게 군축과 평화를 지지하는 미국의 계획과 희망을 개괄하고 모든 공격 무기─폭격기, 전차, 이동식 중포─의 폐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히틀러는 루스벨트의 제의를 곧장 받아들여 최대한 활용했다. 독일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은 〈제어되지 않은 광기〉라고 했다. 전쟁은 〈현존하는 사회 질서와 정치 질서의 붕괴를 야기〉한다고 했다. 나치 독일은 다른 국민들의 〈독일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가지 경고가 들어 있기는 했다. 독일은 특히 무장이라는 점에서 다른 모든 국가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독일은 제네바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에서 모두 탈퇴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했다. 이 경고는 예상치 못한 히틀러의 합리적인 발언에 서구 세계가 환호하면서 그만 잊히고 말았다."(373-5)


"1934년 4월 11일, 총리는 블롬베르크 장군,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을 대동한 채 킬 항구에서 순양함 도이칠란트 호에 올랐다. 두 총사령관은 힌덴부르크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고분고분한 블롬베르크의 지지를 받는 히틀러가 자신이 국가방위군의 축복을 받아 대통령의 후임이 되면 어떻겠냐고 직설적으로 제안했다. 군부의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히틀러는 룀의 야망을 억눌러 돌격대를 대폭 축소하고, 제3제국에서 육해군만이 계속 무기를 소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육군 장군들의 상의는 5월 11일 바트나우하임에서 이루어졌고, '도이칠란트 호 협정'에 관한 설명을 들은 육군의 최고위 장교들은 히틀러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후임으로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히틀러가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 위해 치른 대가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돌격대의 희생뿐이었다. 모든 권한을 틀어쥔 히틀러에게 돌격대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382-3)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히틀러는 과거를 모든 좌절이나 실망과 함께 청산하고 있었다. 한 단계씩, 그리고 신속하게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고, 승전한 연합국을 당혹하게 만들고, 독일을 다시 군사 강국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이것은 대다수 독일인이 원하던 바였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지도자가 요구하는 희생, 즉 개인의 자유의 상실, 스파르타식 식사(〈버터보다 총을!〉, 고된 노동을 감수하려 했다. 1936년 가을까지 실업 문제가 대체로 해결되어 거의 모든 사람이 다시 일자리를 얻었고, 노조 결성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이 충실한 도시락 통을 앞에 두고서 적어도 히틀러 치하에서는 더 이상 굶주릴 자유가 없다고 농담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 무렵 〈사익보다 공익!〉이 나치의 인기 있는 구호였으며, 괴링을 비롯해 다수의 당 간부들이 몰래 자기 배를 불리고 있었음에도 일반 대중은 겉보기에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국가사회주의'에 속아 넘어갔다."(412)


"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검열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신문과 라디오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나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고 정보원이 나치인 경우에는 처음부터 의구심을 품었음에도, 몇 년 동안 조작되고 왜곡된 정보를 꾸준히 접하다 보니 특정한 인상을 받게 되고 종종 그런 정보에 호도되는 경험을 하면서 깜짝 놀라고 때로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교양 있고 총명해 보이는 사람들도 라디오에서 듣거나 신문에서 읽은 허튼소리의 어떤 부분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이따금 그런 지적을 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말하고 나면 마치 내가 전능한 신을 모독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서 불신의 눈빛으로 노려보고 충격에 입을 다물곤 했다. 그래서 정신이 뒤틀린 사람이나, 히틀러와 괴벨스의 발언이나 진실을 무시하는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인생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마저도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나는 깨닫게 되었다."(439-40)


"독일 경제 회복의 진정한 기반은 나치 정권이 1934년부터 재계와 노동계─아울러 장군들─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재무장에 있었다. 독일 경제 전체는 나치 용어로 전쟁경제Wehrwirtschaft라고 알려졌는데, 이는 전시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전쟁으로 귀결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계획적으로 설계된 경제였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1935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저서 《총력전Der Totale Krieg》에서 총력전을 적절히 준비하기 위해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국가경제 역시 전체주의적 기준에 의거해 동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독일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프로이센에서는 정부 세입 가운데 무려 7분의 5가 육군을 위해 지출되었고, 언제나 국가경제 전체가 주로 국민 복지의 수단이 아닌 군사 정책의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이 그런 규모의 전쟁을 〈부득이하게〉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그것은 히틀러의 계획적인 결정이었다."(458-9)


"처음에 게슈타포는 괴링이 정권의 적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데 동원한 개인적 테러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1934년 4월, 괴링이 힘러에게 프로이센 비밀경찰의 수장 자리를 넘긴 뒤에야 게슈타포는 친위대의 한 부문으로서 팽창하기 시작했고, 한때 양계업자였던 온화하면서도 가학적인 새로운 지도자와, 친위대 보안국Sicherheitsdienst, SD의 수장으로서 악마 같은 기질을 지닌 청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천재적인 지도 아래 모든 독일인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징벌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1935년 프로이센 최고행정법원은 게슈타포의 명령과 행동은 사법심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1936년 2월 10일에 공포된 게슈타포 기본법은 이 비밀경찰 조직을 법 위에 두었다. 법원은 게슈타포의 활동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게슈타포 내에서 힘러의 오른팔 중 한 명이었던 베르너 베스트 박사는 〈게슈타포가 지도부의 의지를 이행하는 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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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계사를 바꾼 50가지 전쟁 기술 - 고대 전차부터 무인기까지, 신무기와 전술로 들여다본 승패의 역사
로빈 크로스 지음, 이승훈 옮김 / 아날로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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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고대 세계의 군사 제국들

01 전차 : 고대 세계의 탱크


기원전 2000년대 초의 몇 세기에는 전술 부문에서 주목할 만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나무를 구부리는 공법이 개발되어 살이 있는 바퀴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전차 무게가 더 가벼워졌다. 또 합성궁composite bow이 개발되어 빠르게 움직이는 전차에서 발사체를 더 빨리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전차 제작, 말의 사육과 관리, 전차 몰이꾼과 전사를 훈련하는 데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 대규모 병참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야전에서 다수의 전차대를 유지하려면 군대는 상당한 수의 바퀴 제조자, 전차 제작자, 활 제작자, 대장장이와 병기 제작자가 필요했다. 적 보병대 사이로 돌입해 대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전차의 임무였다. 전황이 뒤바뀌면 전차는 적의 추격을 맡았다. 전차대 운용은 한 나라의 군사력을 대변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강대국―이집트와 지금의 중부 튀르키예에 있는 히타이트Hittite, 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아시리아Assyria―은 모두 전차를 운용한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10-1)


기원전 첫 1000년대 중반, 페르시아인들은 낫이 달린 바퀴로 전차 운용 기법을 개선했다. 그리스의 군인이자 역사가인 크세노폰(기원전 425∼335년경)은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기원전 530년경 사망)이 낫이 달린 전차를 도입했다고 썼으나 4세기의 역사가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이보다 더 일찍 도입되었다고 한다. 인도 사료에 따르면 아자타샤트루Ajatashatru왕(기원전 494∼467) 치세의 마우리아 제국이 브리지 연맹에 대한 원정에서 낫이 달린 전차를 사용했다고 한다. 소小 키루스Cyrus the Younger(다리우스 2세Darius II의 아들로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기원전 401년경에 전사했다.―옮긴이)는 전차를 대량으로 운용했다. 그러나 전차가 전장에서 활약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기원전 331년의 가우가멜라Gaugamela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페르시아 전차가 제멋대로 달려 지나가도록 대열을 열어준 후 뒤쪽에서 공격했다. 12)


02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적 보병


마케도니아군의 중핵은 보병으로 구성된 팔랑크스였다.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의 힘은 상당 부분 팔랑크스의 끈질김과 신뢰성에 기인했다.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 혹은 ‘발의 동반자’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필리포스가 확실하다. 이들이 이렇게 불린 이유는 왕의 친위대인 귀족 위주의 ‘동반자hetairoi’ 기병대에 대응하는 전술적, 정치적 평형추로서 왕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1만 2,000명과 기병 1,500명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보병 9,000명은 출신지에 기반한 ‘발의 동반자’ 1,500명으로 구성된 병단taxeis으로 조직되었다. 나머지 3,000명은 ‘방패 병단hypaspists’이라는 엘리트 근위대를 이뤘다. 발의 동반자 병단과 방패 병단은 마케도니아군 전열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기병대는 양 측면에 배치되었다. 전자는 기병대와 제대梯隊를 이루어 기동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발의 동반자 병단은 적의 대열에 충격을 주어 분쇄하는 역할에 사용되었다. 분쇄된 적은 팔랑크스가 밀어붙였다. 14)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의 주무기는 사리사sarissa(길이 6.3미터, 무게는 8킬로그램)라는 긴 양손잡이용 창이었다. 전술 단위로 팔랑크스에서 가장 작은 전투부대는 256명으로 이루어진 스페이라speira로, 16명씩 오와 열을 지어 밀집대형을 펼쳤다. 팔랑크스대 첫 5열의 병사들은 단단한 밀집 공격대형을 짠 채 자기가 든 사리사를 앞줄의 병사 어깨 너머로 뻗도록 훈련받았다. 제일 앞줄의 병사들은 자신의 사리사를 적을 향해 수평으로 들었는데 창의 길이가 4미터에 달했다. 제일 앞줄 1미터 뒤에 선 두 번째 줄의 병사들은 사리사를 들어 앞줄 너머 3미터 앞까지 뻗었다. 세 번째 줄은 사리사를 더 높은 각도로 들었고 네 번째 줄은 그보다 더 높이 들었다. 다섯 번째 줄의 병사들은 날아오는 적 발사체의 위력을 분산하기 위해 사리사를 하늘을 향해 세우는 동시에 돌격하는 부대의 타격력에 무게를 더했다. 팔랑크스병들은 사리사를 다루기 위해 무거운 동체 갑옷을 벗고 가벼운 가죽제 흉갑과 투구, 각반을 착용했다. 14-5)


03 헬레폴리스 : 움직이는 거대한 공성탑


거대한 공성병기의 달인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세테스Demetrius Poliorcetes(‘포위자’, 기원전 337∼283)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툰 장수 중 한 명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사용한 혁신적 기술 중 다수를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세테스가 로도스섬 포위전에서 사용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철두철미하게 일하는 사람이었고 공성전은 고대 세계의 전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쟁 양식이 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306년에 벌어진 키프로스에 있는 살라미스Salamis 공성전에서 거대한 공성탑을 세웠다. 약 40미터 높이에 기단의 한 변 길이가 20미터에 이른 첫 헬레폴리스 공성탑은 거대한 통짜 바퀴 4개 위에 얹혀 이동했다. 탑 내부는 발사 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낮은 층에는 80킬로그램까지 나가는 발사체를 투척할 수 있는 중투석기가 있었고, 가운데 층에는 무거운 화살을 발사하는 쇠뇌가 있었다. 꼭대기에는 경량 투석기와 궁수들이 있었다. 내부에서는 200명이 공성탑을 운용했다. 17-8)


04 삼단노선 : 지중해를 누비던 주요 전투함


기원전 6세기 언젠가, 이단노선의 노잡이석에 세 번째 단이 추가되어 삼단노선이 탄생했다. 해양 군사 활동에 대한 아테네의 어떤 기록을 보면 노의 길이는 4∼4.5미터였던 것 같다. 삼단노선은 사실상 방어시설이 없었고 갑판 양현에는 난간이 없었다. 아마 도선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삼단노선은 순항을 위해 돛을 가지고 다녔고, 순풍이 부는 상황에서는 노를 젓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돛을 펴면 전투 중에는 지그재그로 항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면 취약한 배의 현측이나 선미를 적에게 노출하게 되므로 전투 전에 돛을 내리거나 아예 육지에 남겨두었다. 삼단노선의 승조원은 200명이었고 그중 170명은 노잡이였다. 노잡이는 하류층에서 모집했으나 노예는 아니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의 삼단노선에는 중무장한 전투원과 궁수 몇 명이 탑승했다. 피리 주자 한 명도 탑승해 노잡이들에게 피리를 불어 시간을 알려주었다. 20-1)


충각ramming 전술은 삼단노선이 사용한 기본 전술이다. 충각은 삼단노선의 강화된 선수 밑에 튀어나온 금속판을 덮은 ‘부리’다. 삼단노선의 지휘관인 트리에르아크trierarch는 자신의 기량을 총동원해 정면충돌하려는 듯 돌진하다가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적에게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노를 뻗어 적선의 옆을 긁으며 노를 부순다. 적의 갤리선은 뱅뱅 돌며 사용 불능 상태가 되고, 승자는 불구가 된 적선을 뒤에서 충각으로 들이받는다. 손상된 삼단노선의 승조원들이 배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을 운명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적이 충각을 빼내기 전에 적선으로 옮겨 타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함대 역시 삼단노선이었다. 결코 뛰어난 뱃사람이 아니었던 로마인들은 끝에 큰 스파이크가 달린 거대한 건널판(코부스Covus)의 도움을 받아 해전을 대규모 도선전투渡船戰鬪로 바꾸려 했다. 코부스는 배와 적선을 단단히 붙들어둘 수 있었으나 자칫하면 사용자의 배가 뒤집히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22)


05 로마군단 : 대적할 자 없던 무적의 군단


기원전 4세기 로마인들은 팔랑크스 대형보다 더 유연한 마니풀루스Manipulus(로마군단의 최소단위 부대로 60∼120명 규모―옮긴이) 위주의 대형에 의존하게 되었다. 군단은 30개의 마니풀루스로 나뉘었는데 모두 중장보병인 하스타티hastati, 프린키페스principes, 트리아리이triarii(젊은 신참병, 장년의 경험 있는 고참, 전투 경험이 많은 최고참―옮긴이)로 구성된 대대가 각 10개씩 있었다. 마니풀루스마다 경무장 척후병(벨리테스velites) 40명이 배속되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로 구성된 마니풀루스는 짧은 찌르기용 칼(글라디우스gladius), 장방형 방패(스쿠툼scutum), 무거운 투창(필라pila) 2개로 무장한 12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트리아리이 역시 비슷하게 무장했으나 찌르기용 창(하스타hasta)을 휴대했다. 기병대는 10개의 투르마turma(로마의 기병부대 단위, 복수는 투르마에Turmae―옮긴이)로 구성되었으며 창과 원형 방패로 무장했다. 이때 군단병들은 로마 시민이자 재산 소유자여야 했다. 23)


마니풀루스로 구성된 군단은 카르타고와 치른 두 번의 전쟁(기원전 264∼241, 218∼201)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갔다. 줄어드는 인구를 비롯해 가중된 압박으로 인해 군단은 6년간 복무하는 아마추어 민병대에서 직업인으로서 장기 복무하는 자원병으로 구성된 군대로 탈바꿈했다. 오랜 구상을 거쳐 실행된 이 과정은 기원전 107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Marius(기원전 157∼86)가 도입한 개혁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제 군단은 30개의 마니풀루스가 아니라 10개의 코호르스cohors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코호르스는 각각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이로 이루어진 마니풀루스 3개와 벨리테스로 구성되었고 총원은 400명이었다. 그 결과 부대는 독립적 전투가 가능해졌다. 최선임 백인대장인 프리무스 필루스Primus Pilus(첫 번째 창이라는 뜻―옮긴이)는 군단이 전투에 나서면 가장 경험 많은 병사로 구성된 제1대대 제1백인대百人隊, centuria를 지휘했다. 24)


06 야전에서의 로마군단 : 완고하고 결연하게 규율을 지키다


군대의 선두에서는 정찰부대인 경보병과 기병대가 매복 징후를 찾는다. 본대의 선봉은 군단에서 온 1개 부대, 기병대에서 온 1개 부대로 구성되었다. 그다음 각 백인대에서 10명씩 차출된 인원으로 구성된 숙영지 측량대가 왔다. 측량대 뒤에는 공병대가 따라왔다. 그다음에는 강력한 기병대의 호위를 받는 군단장과 참모진의 짐을 실은 대열이 따라왔다. 그 뒤에는 보조기병대와 보병대에서 뽑은 경호대를 거느린 군단장이었다. 행군의 다음 순서는 군단 소속 기병대 120명이었고 이들 뒤를 분해한 공성기, 공성탑, 파성퇴, 투석기를 운반하는 노새 대열이 따랐다. 정예병들의 호위를 받는 군단의 고위 장교들과 군단 본대가 다음이었다. 군단은 나팔수와 기수들의 뒤를 따라 행군했다. 각 군단의 뒤를 보급 마차 대열이 따랐다. 군단 뒤에는 자신들의 기수를 앞세운 보조병 부대가 왔다. 행군 대열의 마지막 부대는 경·중보병과 보조기병대로 구성된 후위대였다. 군단과 얼마 거리를 두지 않고 비전투 종군자들이 따라왔다. 27-8)


행군이 끝날 무렵, 트리부누스tribunus(현대의 대대장급 장교―옮긴이) 한 명과 측량부대가 선발대로 파견되어 숙영지를 설치할 곳을 골랐다. 적과 이미 접촉했을 때는 수원지와 가깝고 적대세력으로부터 4킬로미터 떨어진 장소를 고르는 것이 중요했다. 이상적인 후보지는 솟아오른 탁 트인 평원에 있고 적이 숨을 만한 데가 없는 곳이었다. 2개 군단이 이용하는 숙영지의 면적은 약 700제곱미터였고 측량부대가 세심하게 구획했다. 행군 숙영지 주변에는 대개 깊은 해자를 팠고, 파낸 흙은 보루를 쌓는 데 사용했다. 적과 가까운 곳에 숙영지를 구축할 때에는 기병대, 경보병대, 중보병대 절반은 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해자 앞쪽에 배치했다. 완공된 행군 숙영지 가운데를 비아 프린키팔리스via principalis라고 불린 대로가 관통했으며 이 도로는 집정관의 막사 앞까지 이어졌다. 영구적으로 지은 요새처럼 숙영지 구역은 격자로 나뉜 구조였고 군단의 각 부대는 자기 구역을 배당받았다. 28-9)


07 로마군의 공성전 기법 : 도시를 봉쇄해 구원군을 차단하다


세부 내용이 정확히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공성전은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62년에 벌어진 카르타고령 시칠리아의 아그리겐툼Agrigentum(아그리젠토Agrigento) 포위다. 로마군은 아그리겐툼 주위로 두 개의 숙영지를 잇는 두 개의 벽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이중벽bicircumvallation으로 알려진 시스템이다. 두 벽 중 내벽은 포위된 도시를 봉쇄하고, 외벽은 적 구원군을 차단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성벽 사이에는 너비 수백 미터에 이르는 넓은 가도가 있어 이중성벽 어디로라도 병력을 재빨리 이동시킬 수 있었다. 요새와 전방초소는 외벽과 내벽을 따라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되었다. 적 구원군의 개입을 막는 것만큼 포위된 도시의 굶주림을 가속화하는 것도 중요했다. 카르타고 구원군이 도착했고, 전투를 시도한 아그리겐툼 방어군이 패하자 이중포위가 벌어졌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관련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2년에 중부 갈리아의 알레시아Alesia에서 벌인 포위전에 관한 기술이다. 30)


Chapter 2. 중세 전쟁

08 중기병과 사슬 갑옷 : 가볍고 유연하면서도 튼튼한 갑옷


중세 군대에서 기수가 확실하게 기여한 바는 바로 기동성이다. 군사작전에서 습격이 회전會戰보다 훨씬 중요했던 시대에 정찰과 토벌 임무를 위해 빠르게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던 기수의 역할은 매우 귀중했다. 프랑크의 왕이자 서쪽 황제 샤를마뉴Charlesmagne(747∼814)는 가공할 위력의 기병대를 전장에 전개했다. 그런데도 50년간의 군사행동에서 회전은 단 두 번, 모두 783년에 벌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카우치드 방식으로 기병창을 잡는 모습(겨드랑이에 끼우고 손으로 꼭 잡는 기병창)은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1080년경)에서 볼 수 있다. 이 태피스트리는 보병에게 돌격하는 기병을 보여주는 유일한 중세 회화자료다.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1066)에서 노르만 기병이 반복해서 돌격했으나 색슨군의 방패 벽을 돌파하지 못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전투 마지막 단계에서 색슨군 전열이 붕괴하고 나서야 노르만 기사들은 흩어진 색슨 보병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35)


사슬 갑옷은 날이 있는 무기로 하는 베기 공격과 뾰족한 무기로 하는 찌르기 공격 방어에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검으로 정확히 수직 각도로 표면을 타격하면 연결된 고리를 벨 수 있었다. 사슬을 리벳으로 접합하지 않은 경우에는 창으로 정확히 겨누거나 얇은 칼로 찌르면 갑옷이 뚫릴 수 있었다. 사슬 갑옷은 폴액스poleaxe(긴 자루에 달린 도끼―옮긴이)나 핼버드halbard(미늘창이라고도 함. 도끼와 창을 한데 합친 무기―옮긴이)같이 타박상이나 골절상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타격병기로부터도 착용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사슬 갑옷은 철퇴나 전투망치에 맞아 생기는 외상도 막지 못했다. 결국 착용자는 단단한 투구를 사슬로 만든 코이프coif(머리가리개―옮긴이) 위에 써야 했다. 14세기경에는 판갑이 쇠뇌 화살, 타격용 무기, 창으로 찌르기에 대해 사슬 갑옷보다 방어력이 좋았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 장궁longbow과 핼버드로 무장한 기율이 잘 잡힌 보병은 말탄 기사의 맞수가 되기에 충분함을 입증했다. 36-7)


09 바이킹 롱십 :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병력 수송선


전쟁에서 사용된 롱십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가장 작은 배인 스네키아snekkja(‘가늘고 튀어나온 것’)는 길이 17미터에 폭 2.5미터였다. 이 배의 승조원은 41명(노잡이 40명, 조타수 1명)이었다.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은 1066년의 잉글랜드 침공에서 롱십 600척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가장 큰 롱십 중 하나는 스케이skei(‘물을 가르고 나가는 것’)로, 길이는 30미터에 조금 못 미치고 승조원은 최대 80명이었다. 이보다 더 긴 롱십도 존재했다. 노르웨이의 이교도를 내리치는 기독교의 망치라 불렸던 올라프 트뤼그바손Olaf Tryggvason(재위 960∼1000) 왕이 만든 롱십은 길이가 거의 46미터에 이르렀다.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설계, 구조, 자재가 잘 결합된 완벽한 습격용 기계이자 태생적으로 항해 안정성이 뛰어나고 흘수선이 얕아 어느 해안에나 상륙할 수 있으며 유럽에 있는 강들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진 양날검과도 같은 함선이라는 점이다. 39)


돛이 도입되면서 롱십 건조에 새 시기가 열렸다. 양모로 만든 돛에 가죽 띠를 덧대 강화했는데, 이는 돛이 젖었을 때 형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용골이 더 깊어졌고 선폭이 더 넓어졌으며 건현이 더 높아졌다. 해안에 접근할 때나 강에서 항해할 때는 노를 이용했다. 항해에 유리한 조건에서 롱십은 11노트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물과 고물에 있는 무서운 동물의 머리는 롱십이 육지로 다가갈 때만 부착해서 거친 풍랑을 만났을 때 파손되는 사태를 피했다. 양현에 방패를 가득 달고 항해 중인 롱십의 묘사는 실제와 맞지 않는다. 방패는 바다에 빠뜨려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물건이었다. 조타는 우현에 부착된 노 하나가 맡았다. 12세기와 13세기에 건현이 더 높은 한자동맹식 코그Hanseatic Cog가 개발되면서 롱십의 시대는 끝나갔다. 코그선은 다음 세대에 등장할 범선의 시조다. 습격을 위해 설계된 롱십은 요새화된 항구도시와 진보한 해상전투의 시대를 맞아 경쟁력을 잃었다. 40-1)


10 방패벽 :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만드는 벽


1066년 1월에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색슨 왕 해럴드 고드윈슨은 그해 두 전선에서 전쟁을 치렀다. 9월 25일에 그는 동생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가 이끄는 침공군을 요크셔의 이스트라이딩에 있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쳤다. 고드윈슨은 승리를 거두자마자 발걸음을 돌려 남쪽으로 행군해 또 다른 왕위 주장자와 대결했다. 9월 27∼28일에 군대를 거느리고 페븐시에 상륙한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이었다. 윌리엄은 내륙으로 진격해 헤이스팅스Hastings에 도달해 10월 14일 아침에 해럴드 왕이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다. 색슨군은 대개 방패벽 뒤에서 보병으로 싸웠다. 방패벽은 역사가 오래된 전술로서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스군이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로마군도 사용했다. 로마 군단병들은 이 진형을 테스투도testudo(거북이)라고 불렀다. 이 진형에서 가장 앞줄은 방패를 수직으로 들고 그 뒤의 병사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적이 던지는 투사체가 뚫을 수 없는 방벽을 만들었다. 43)


초기 중세시대의 북유럽에서도 방패벽은 익숙한 방어 전술로 남아 있었다. 특히 반 직업군인인 병사들로 대열을 전개할 때 사용되었다. 이 전술의 약점은 대열이 한 번 뚫리거나 흩어지면 방어군이 기병의 공격에 취약해진다는 것이었다.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는 캘드벡 힐이라는 경사가 급한 능선에 최적의 방어 위치를 잡고 측면 방어에도 만전을 기했다. 윌리엄이 잉글랜드 정복을 원한다면 공격해야 했다. 노르만군 좌익이 후퇴하면서 패배할 위험에 처했다. 위기의 순간, 윌리엄은 부하들을 독려해 다시 재집결시켰고 결정적으로 전술을 바꿨다. 기병대 돌격을 막아낸 후 지친 색슨군은 노르만군이 후퇴를 가장하자 여기에 속아 방패벽을 포기하고 추격에 나섰다. 이제 취약한 상태가 된 색슨군은 노르만 기병을 상대로 그 대가를 치렀다. 날이 저물 무렵 3,000명 규모의 후스카를housecarls 친위대와 함께 전열 한가운데에 있던 해럴드 왕은 얼굴에 화살을 맞았고 일단의 노르만 기사의 칼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43-4)


11 성 : 성을 짓는 다양한 방법


앵글로색슨인의 잉글랜드에서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노르만인은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잉글랜드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노르만인은 목재와 흙으로 빠르게 축성할 수 있는 ‘모트 앤드 베일리’식 성을 선호했다. 앙주의 풀크 네라가 992년에 랑제Langeais에 지은 탑처럼 돌로 만든 성은 짓는 데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고, 잉글랜드에서는 12세기에 들어서야 모트 앤드 베일리식 성이 석성Stone Castle, 石城으로 대체되었다. 노르만 지배를 돌로 장중하게 웅변하는 듯한 런던의 화이트 타워White Tower(런던탑이라고도 불린다―옮긴이)는 1100년에 준공되었다. 노퍽Norfolk의 라이징성CastleRising은 1138년에 완성되었는데 층마다 기능이 다른 아성tower keep, 牙城(성 안에 지어진 요새화된 탑으로 성이 함락될 경우 최후의 거점으로 삼았다―옮긴이)의 훌륭한 예시다. 점점 더 복잡해진 축성술은 한 성안에 또 다른 성이 있는 동심원성concentric castle, 同心圓城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45)


흑색화약을 쓰는 포병이 등장하기 전, 성은 보급 기지와 패배할 경우의 피신처 혹은 습격이나 원정의 도약대로 기능했다. 적의 영토 안이나 국경 근처에 성을 구축하는 것은 적대적 의도를 표명하는 행동이었다. 더욱이 성의 수비대는 병참선을 위협할 수 있었다. 시리아의 홈스Homs시에서 약 4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크락 데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는 십자군의 의도를 빼어난 형태로 표현한 중세 최고의 동심원성 중 하나다. 남쪽면의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성 밖에서 들어오는 수로교aqueduct로 물을 대는 대형 개방식 저수조가 있었다. 동쪽 내벽을 통해 들어오는 성의 입구는 방어시설로 보호되었으며 입구에 도달하려면 유턴을 두 번 해야 했다. 이때 공격자들은 위쪽의 숨겨진 화살구멍arrowloop을 통해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각종 공격물에 노출되었다. 가장 취약한 남측면의 성 내벽 두께는 30미터였다. 이 측면의 아랫부분은 경사 사면으로 보강되었고 직경 9미터의 방어탑 7개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46-7)


12 중세의 공성전 : 성을 함락하는 다양한 방법


1216년 10월, 반기를 든 귀족들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로체스터성을 점령했다. 존 왕은 친히 공성전을 감독했다. 첫 전투에 투입된 공성기 5대는 외성에 이빨 자국도 내지 못했다. 성 외벽이 돌파되고 수비 병력이 아성으로 철수하자 존 왕은 갱도 굴착으로 공격 방법을 전환했다. 아성 한 모퉁이가 무너졌지만 수비대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기 전까지 성을 지켰다. 포위전에서는 도시 외벽에 총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대개 공성기를 이용해 투사체投射體를 발사했다. 망고넬mangonel(만가논manganon, 즉 ‘전쟁 기계’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알려진 이 캐터펄트식 공성기는 적의 진지에 투사체를 던져넣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망고넬을 사용해 바위나 인화성 물질 또는 생물전의 초기 형태로 썩은 시체나 동물의 사체를 적진으로 쏘아 던졌다. 12세기경에 아랍인들과 접촉하면서 십자군은 가공할 만한 무기 트레뷰셋trebuche을 개발했다. 13세기에 들어오자 트레뷰셋은 가장 중요한 공성병기가 되었다. 49-50)


나무 기단에 단단히 설치한 A 모양의 뼈대 두 개로 이루어진 트레뷰셋은 평형추를 들어 올렸을 때 생성되는 에너지를 사용해 투사체를 던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A 모양의 뼈대 위쪽 끝 사이에는 발사체를 던지는 지렛대arm가 회전축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렛대의 약 8분의 1은 회전축 앞에 있었고 나머지는 뒤에 있었다. 무거운 평형추(큰 돌을 채운 상자)는 지렛대의 짧은 쪽 끝에 매달려 있었다. 사용자는 다른 쪽 끝에 부착된 밧줄과 도르래 장치를 이용해 윈치로 지렛대를 아래로 당겨 평형추를 위로 올렸다. 지렛대 끝이 투사체를 실을 수 있게 수저 모양인 것도 있었으나 대개 슬링의 원리를 이용했다. 지렛대 끝을 빠르게 수직으로 끌어올리면 슬링 한쪽 끝이 열려 발사체가 투척되는 형태였다. 트레뷰셋으로 죽은 말과 시체를 비롯한 대형 투사체를 상당히 먼 거리에서 발사해 포위된 도시와 마을 벽 안으로 던져넣을 수 있었다. 트레뷰셋의 가장 큰 단점은 너무 크고 기동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50-1)


13 도검 : 전장의 필수 무기


도검은 단검에서 진화한 검으로 청동기시대에 개발되었다. 기원전 15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첫 청동제 도검은 칼자루와 칼날을 별도로 제작하고 리벳으로 결합했다. 이런 종류의 무기는 찌르기 용도로는 효과적이었지만 너무 세게 베면 부서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로부터 500년 뒤, 날과 자루를 하나로 주조한 전형적인 형태의 청동기시대 도검이 등장했다. 자루의 날을 연결하는 슴베 부분에서 폭이 넓어졌다가 완만하게 좁아지며, 날 전체 길이의 3분의 2 부분에서 급격히 좁아져 올라가 뾰족한 칼 끝부분을 완성한다. 이로 인해 자르기와 찌르기 모두에 유용한 무기가 탄생했다. 철검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동에서는 휜 날이 인기를 끈 반면 로마 군단병들은 짧고 폭이 넓은 글라디우스 검을 사용했다. 이 검은 오른쪽에 차고 오른손으로 뽑을 수 있었으며 근접전에서 유리했다. 그 뒤로 몇 세기가 흐르면서 도검은 신화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일급의 검을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든 점이 이유일 것이다. 53-4)


13세기부터 갑옷이 발전함에 따라 도검도 변화했다. 한 손으로 쓰는 베기용 검은 금속판에 튕겨 나갔기 때문에 검을 더 날씬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갑옷의 취약한 부분을 찾아 공격하고자 했다. 칼자루는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확장되고 더 길어졌다. 길고 무거운 검으로 공격하면 갑옷을 입은 적이 균형을 잃게 되어 다른 형태의 공격에도 취약해지므로 큰 피해를 줄 확률이 커졌다. 16세기에 들어 갑옷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어 검을 쓰는 사람의 손을 갑옷 장갑으로 가릴 수 없게 되자 손을 보호하기 위해 칼자루와 코등이quillons(칼자루와 칼날 사이에 있는 보호용 날개)가 더욱 복잡해졌다. 레이피어(민간용 무기)를 사용하는 펜싱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변화를 촉진했다. 보병 부문에서 검은 화기로 대체되었으나 기병대는 계속 도검을 사용했다. 19세기에도 기병창과 검은 기병대가 가장 선호하는 무기였다. 기병도는 똑바로 뻗은 날에서 헝가리 후사르Hussar 기병이 도입한 구부러진 세이버sabre로 바뀌었다. 54-5)


14 장궁 : 철판 갑옷도 꿰뚫은 백년전쟁 핵심 무기


에드워드 1세(재위 기간 1272∼1307)는 자신의 군대에 웨일스 궁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웨일스 궁수들이 휴대한 활은 길이가 약 1.8미터에 이르렀다. 나무를 말리고 구부려서 모양을 잡아 활을 만드는 데 최대 4년이 걸렸으며, 그 후 방수 왁스, 수지, 정제 지방을 바른 다음 삼이나 아마 또는 비단으로 만든 시위를 부착했다. 중세 유럽에서 사용한 갑옷의 질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장궁으로 쏜 화살로 갑옷을 뚫으려면 큰 힘이 필요했다. 전투 사격에서 유효성을 유지하기 위해 궁수는 장기간 훈련을 거쳤다. 에드워드 1세는 일요일에 활쏘기 연습 이외에 모든 스포츠를 금지했다. 중세 시대 활의 정확한 사거리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헨리 8세가 모든 사격장의 길이는 최소 220야드(200미터)여야 한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다. 정확한 사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약 200야드(183미터)까지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전투 개시 단계에 벌어진 수평 일제사격에서 화살이 250야드(228미터) 거리를 날아갔다. 56)


15 초기의 화포 : 의미 있지만 결정력은 없었던 중세 무기


초기의 대포는 거칠게 사각형으로 깎은 재목에 얹혀 적을 향해 놓인 다음 발사되었다. 이 단계에는 대포가 병사들의 사기에 미치는 효과가 물질적 피해보다 더 중요했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 포위전(1346)에서 대포를 사용했으나 도시는 대포가 아니라 기아 때문에 항복했다. 갓 태어난 포병대는 처음에 교회로부터 마법과 유사한 짓을 한다고 낙인찍혔다. 실제로 당시의 대포는 목표물에도 사용자에게도 위험한 물건이었다. 훈련받는 포수들은 포 주변에 흩어진 화약을 쿵쿵 밟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불안정한 화약이 점화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발사체로 화살을 사용했지만 15세기경에는 철포탄을 사용했고, 나중에 가벼운 돌포탄으로 대체했다. 돌포탄은 더 저렴했고 가벼운 구조물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명중했을 때의 충격으로 부서지면 더 효과적인 인명 살상 무기가 되었다. ‘사문석 화약serpentine powder’이라고 알려진 흑색 화약은 15세기 초에 상당히 개선되었다. 60-1)


프랑스에서 불안정한 화약의 해결 방안이 등장했다. 바로 ‘알갱이 화약Cornedpowder’이었다. 화약의 세 원료를 갈아 물에 적신 다음 섞으면 일종의 ‘케이크’가 만들어지는데, 이 케이크를 말린 다음 부숴서 체로 쳐 알갱이 크기를 반드시 균일하게 만들어야 했다. 알갱이 화약은 대포에 집어넣고 불을 붙이면 즉시 불이 붙었고 서펀틴 화약보다 위력이 세 배나 더 강했다. 발사 후에도 잔여물을 남기지 않고 습기나 흔들림에 강하며 다루기 쉬웠으나 단조로 제작한 대포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력이 강했다. 알갱이 화약이 널리 쓰이려면 주조 대포가 도입된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주조 대포와 알갱이 화약은 쇠로 된 발사체에 새 생명을 부여했다. 돌을 깎아 포탄을 만들려면 공이 많이 들었지만 쇠로 주조 포탄을 만들기는 상대적으로 간단했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알갱이 화약과 더 튼튼한 대포가 합쳐져 쇠로 된 포탄의 파괴력을 키웠다. 포탄 두 개를 사슬로 연결하면 유용한 대인 병기가 되었다. 61-2)


Chapter 3. 화약 혁명

16 해상전 : 해상전투를 위한 함선들


갤리선은 15세기 말엽까지 설계가 거의 바뀌지 않은 건현이 낮은 함선으로서 순항할 때는 라틴 돛lateen sail(큰 삼각돛―옮긴이)을, 전투할 때는 죄수나 포로가 젓는 여러 단으로 설치한 노를 사용해 추진했다. 16세기에 들어서 갤리선에는 앞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대포가 설치되었다. 즉 목표에 대포를 발사하려면 배 전체가 선회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갤리선의 전술은 배에 탑승한 다수의 병사들에게 달려 있었다. 갤리선들이 소이성燒夷性 투사체를 서로에게 발사한 다음 적선에 올라타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이 이끄는 기독교도 함대가 서부 그리스의 파트라스만Gulf of Patras 북쪽 해안에서 터키 갤리 함대를 대파한 1571년 레판토Lepanto 해전은 갤리선으로만 싸운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었다. 캐럭선carrack은 군용으로 채택된 건현이 높은 상선으로, 건현이 낮은 갤리선보다 포격용 플랫폼으로 적합했으며, 16세기 초에 경첩으로 개폐 가능한 포문이 도입된 다음부터는 더 그러했다. 65)


헨리 8세의 메리 로즈호처럼 높이 솟은 선수루를 갖춘 갤리언선galleon은 캐럭선에서 진화한 배다. 1509∼1510년에 건조된 메리 로즈호는 병사들이 적함으로 건너가기 전에 타격을 입힐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한 선수루를 갖췄다. 메리 로즈는 해상전투의 중간 단계를 대변하는 함선이다. 17세기 들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 함선은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다. 전열함이란 대포를 배치한 옆면을 적함 쪽으로 두고 함선들이 일렬로 늘어서는 진형으로 기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배다. 피니어스 페트Phineas Pett가 설계하고 아들 피터가 건조하여 1637년에 진수한 소버린 오브 더 시즈Sovereign of the Seas는 찰스 1세가 보유한 함대의 자랑이었다. 이 배는 건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과한 특별세인 ‘함선세Ship Money’에 쏟아진 엄청난 반대를 뚫고 찰스 1세가 주도해 만든 웅장한 위신의 상징이었다. 이 배는 앞으로 1860년까지 건조된 모든 전열함의 원형이 되었다. 65-7)


17 보방 혁명 : 군사공학의 아버지, 보방


세바스티앵 르 프르스트르 마르키스 드 보방SébastienLePrestreMarquisedeVauban(1633∼1707), 흔히 보방으로 알려진 이 인물은 프랑스군 원수이자 당대 최고의 공병 전문가로 공성 기술자이자 요새 설계자로 유명했다. 1670년대 말, 보방은 포위전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연달아 평행참호를 파서 적 요새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방식은 1673년 마스트리히트 포위전에서 보방이 도입한 것이다. 수비 병력이 충실했던 마스트리히트는 13일 만에 함락되었고 이 전투는 19세기 말까지 모든 포위전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남았다. 보방 최고의 작품은 프랑스 북부 국경을 지키는 이중 요새선인 프레 카레Pré Carré였다. 1692년 나무르Namur 포위전에서 보방은 도탄 사격법ricochet firing, 跳彈射擊法을 완성했다. 이 사격법으로 사격한 직사포탄, 곡사포탄, 간혹 공성포탄은 바깥쪽 흉벽을 지나쳐 방어벽 안쪽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방어 진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70-1)


18 포병의 시대 : 전장을 지배하게 된 아쿼버스와 머스킷


흔히 요새 벽에 설치되었던 경량 화기에서 발달한 아쿼버스arquebus는 보병이 오른팔 밑에 끼워 넣고 땅에 박은 거치대에 의지해 발사하는 무기였다. 곧 더 작은 변종이 생산되어 끝을 가슴에 대고 양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참호나 방책 뒤에 배치되어 창병과 미늘창병의 보호를 받는 아쿼버스병은 체리뇰라Cerignola 전투(1503)에서 유효성을 증명했다. 이 전투는 화약 기반 화기로 승리한 첫 전투였다. 1695년 잉글랜드 왕실 조병창은 잉글랜드 훈련대(민병대)의 무기를 장궁에서 화기로 대체한다고 포고했다. 아쿼버스의 정확도는 제한적이었으나 단거리에서는 갑옷을 관통할 수 있었고 큰 총알 한 발 대신 산탄을 발사하면 여러 군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아쿼버스병은 석궁으로 무장한 궁수보다 더 빨리 사격할 수 있었으며, 훈련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숙달된 장궁수를 길러내는 데 비하면 극히 짧았다. 아쿼버스병의 등장으로 훈련 정도가 낮은 경장갑 보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었고 궁수가 도태되기 시작했다. 72)


아쿼버스에서 발전한 머스킷musket은 처음에는 거치대가 필요했으나 점차 어깨에 견착해 사격할 수 있었다. 머스킷의 발사 속도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렸다. 재장전 훈련에 18단계가 필요했고 두 발을 발사하는 데 7분 정도 걸렸다. 첫 줄의 병사들이 총을 발사한 후 재장전을 하러 뒷줄로 이동했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한 줄씩 앞으로 나가 사격했다. 머스킷의 첫 격발장치는 매치락matchlock이었다. 매치락 머스킷은 서서히 타는 화승을 화약 접시priming pan에 넣어야 발사되었다. 1539년에 도입된 휠락wheellock은 처음으로 자체 점화가 가능한 장치였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화승 없이 공이를 당긴 상태로 휴대하며 언제든지 총을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말에 새로운 격발장치인 플린트락flintlock이 등장했다. 플린트락은 부싯돌을 문 스프링 작동식 공이를 사용했다. 이 장치는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화약 접시에 불똥을 일으켜 작동하는 구조였다. 영국군은 그 뒤로 150년간 플린트락식 소총을 사용했다. 73)


19 화력과 급습 : 제병통합 전투의 달인 말버러 공작


말버러 공작이 기틀을 잡은 유연한 군사적 환경으로 인해 지휘관들은 보병, 포병과 기병을 지형과 지휘관의 의도에 맞추어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150년간 지속될 패턴이 수립된 것이다. 1701년에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왕 윌리엄 3세는 처칠을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02년 왕위에 오른 앤 여왕은 그를 말버러 공작에 봉했다. 말버러 공작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의 달인이었다. 그는 기병의 돌격 속도를 속보good round trot에서 구보canter로 바꿨다. 이것은 아직 카라콜caracole 전술(선도 기병이 화기로 사격한 후 말을 달려 후방으로 이동해 재장전한 다음 교대로 사격하는 전술)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군에게 특히 효과적이었다. 그는 포병 배치에 엄청난 노력을 들였으며, 중요한 구역에 대포를 집중 배치하거나, 총진격 중에 대포를 전방으로 보내 근접 지원을 제공했다. 그의 지도하에 영국 육군은 아쟁쿠르 전투 이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상을 획득했다. 75)


Chapter 4. 근대전의 탄생

20 브라운 베스 소총 : 처음으로 대량 생산된 소총


영국군의 주력 보병 화기인 활강식 랜드 패턴Land Pattern 머스킷 플린트락 또는 ‘브라운 베스’ 소총은 1722년에 설계되어 그 뒤로 100년 이상 생산되었다. 이 전장식 소총은 납탄과 화약을 넣은 카트리지를 썼으며 플린트락 기구로 점화했다.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튀긴 불똥이 총신의 터치홀touchhole을 통해 장약으로 갔다.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전장에서는 정확한 조준 실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밀집대형으로 이동하는 병사들은 적의 머스킷 일제사격에 대형 과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한 병사가 쏜 총에서 쏟아져 나온 불똥이 장전 중인 다른 병사의 화약에 옮겨붙지 않게 하려면 일제사격이 필요했다. 플린트락 장치는 1807년에 알렉산드로스 존 포사이스 목사가 퍼커션 캡Percussioncap을 발명한 후 퇴출되었다. 때리면 불꽃이 일어나고 방수가 되는 구리제 뇌관인 퍼커션 캡은, 특히 축축한 날씨에 불발되는 경향이 있고 오발이 자주 일어나던 플린트락에 비해 믿을 만했다. 79-81)


21 기동 포병 : 전쟁의 달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산


15세기 말쯤 화포는 바퀴 달린 포차가 더해져 어느 정도 기동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포병의 기동 속도는 옆에서 행군하는 포수들의 행군 속도에 제한을 받았으므로 이 혁신은 속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즉 포병은 걷는 속력보다 더 빠를 수 없었다. 17세기 초에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보병이 견인하는 경량 화포인 연대포를 도입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벼운 무게 때문에 전장에서의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18세기 전쟁의 달인인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이전의 기병대는 적을 만나면 멈춰 서서 소지한 화기로 교전하도록 훈련받았다. 프리드리히는 기병도와 창을 주 무기로 복원하고 기마 포병horse artillery이라는 형태로 추가 화력을 지원했다. 프리드리히의 기마 포병대 소속 사수들은 말을 탔으므로 이 병과에는 새로운 통일성과 속력이 생겨났다. 기마 포병대의 대포는 당연히 가벼울 수밖에 없었으나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82)


‘사선 대형Obliqueorder’은 기마 포병과 더불어 프리드리히의 중요한 발명품이다. 프리드리히는 오랜 기간 원정하면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자주 마주친 경험이 있었다. 사선대형은 잘 훈련되고 기율이 엄정한 프로이센 보병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적의 수적 우세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한 방책이었다. 전 전열에서 적과 교전하는 대신, 프로이센 부대들은 사선 대형으로 기동하며 적의 측면을 향해 이동했고 선봉 부대는 적의 중앙과 정면에서 교전했다. 프리드리히는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기술적으로 기동을 숨겼고 후속부대를 계속 투입해 적의 측면을 압박했다. 적의 측면이 무너지면, 이때까지 측면공격을 엄호하던 기병대가 전면적으로 투입되어 적 전열에서 무너진 부분을 이용하기 위해 칼을 빼 들고 일제 돌격으로 급습했다. 로이텐Leuthen 전투(1757)에서 프리드리히는 아군보다 규모가 두 배 이상인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달성한 슐레지엔 지배를 확립했다. 83)


22 나폴레옹의 군단 : 포병은 가장 효율적인 무기


프랑스 포병의 근대화는 1765년 이전 몇 년에 걸쳐 장바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Baptiste de Gribeauval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추진한 개혁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대대 수준의 화력 지원을 하던 경량 야포를 폐지하고 이를 대규모로 집결한 포대로 대체했다. 이 포대가 집중 화력을 퍼부어 적의 전열에 구멍을 내면 기병이나 보병이 그 구멍을 이용해 전과를 확대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기병대를 가공할 위력을 지닌 무기로 만들었으나 기병대가 사용한 전술은 나폴레옹 전에 이미 확립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전쟁 수단에서 눈에 띄는 특징이 속력과 유연성이다. 나폴레옹은 진지전보다 기동전을 옹호한 기베르 백작Comte de Guibert(1743∼1790)의 영향을 받았다. 기베르는 독자적으로 작전이 가능한 사단 단위로 군을 조직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나폴레옹이 좋아한 『전술일반론』의 저자이기도 한 기베르는 징집병으로 국민군을 편성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것 역시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85)


1800년에 나폴레옹은 모든 병과가 포함된 군단corps d’armée으로 군을 재조직했다. 군단은 다른 군단과 합류할 때까지 최대 36시간을 단독으로 작전할 수 있었다. 사실상 군단은 독자적 참모진과 보병, 기병, 포병대와 사령부를 갖춘 군대 자체의 축소판이었다. 군단장의 대략적 진공선은 나폴레옹이 결정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행군 중에 어느 정도 융통성을 허락받았다. 적과의 교전은 군단장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고 근처의 다른 군단장들은 대포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행군했다. 군단 개념은 바타용 카레bataillon carré(대대 방진) 진형으로 완전히 구현되었다. 이 대형에서 개별 군단은 이틀 행군 거리 안에서 평행 경로로 행군하며, 선견부대, 차장遮障 임무를 맡은 기병대와 예비대,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보호를 맡는다. 이렇게 행군하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사방을 두루 방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속 부대 중 하나가 적과 접촉하면 어느 방향으로든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86)


23 해상 화력 : 목조 함선의 마지막 대해전 ‘트라팔가르’


17세기 중엽의 함선은 갑판마다 같은 구경의 대포를 배치해 건조했다. 이러한 함선으로 인해 생겨난 현측 일제사격broadside은 이후 200년 동안 해상전의 특징이 되었다. 해전에 대한 이 간단한 접근법은 새로운 방법으로 대체되었다. 존 클러크John Clerk는 『해군 전술에 대한 에세이』에서 전열 돌파를 옹호했다. 함수나 함미에서 공격을 받은 배는 포를 돌려 적을 겨냥할 수 없다. 클러크는 영국 해군이 적의 전열을 뚫고 들어가서 뒤에 남겨진 적함을 압도한 다음, 나머지 적함이 침로를 바꿔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탈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1805년 10월 21일)에서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합대의 전열을 두 군데에서 적절한 각도로 돌파했다. 이 대담한 계획에 압도된 빌뇌브Villeneuve 중장이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대열 중앙과 후미는 영국 함대와 난전에 휘말렸고 뛰어난 영국군의 포술과 조함 능력이 여기에서 빛을 발했다. 88-9)


Chapter 5. 산업과 전쟁

24 무기 대량 생산 : 사정거리와 치명도를 끌어올린 산업혁명


18세기에 소화기 생산 분야는 중세 이후로 바뀐 것이 거의 없었다. 19세기쯤에는 정밀한 도구와 이제 막 시작된 산업 자동화에 힘입어 국영 조병창들과 민간 생산자들은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구성된 표준화된 무기로 재빨리 생산 품목을 바꿨다. 19세기의 첫 30년 동안 플린트락이 퍼커션락으로 대체되면서 머스킷 총의 성능은 크게 향상되었다. 총열에 강선(총탄에 회전력을 주어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총열 내부에 판 홈)이 파인 총은 미국 독립전쟁(1775∼1781)과 반도전쟁(1808∼1814)에 도입되었다. 강선이 파인 총열에 사용할 총탄은 총열 안쪽에 꽉 맞아야 하면서도 장전하기 쉬워야 했다. 이 문제는 프랑스에서 발명자의 이름을 딴 미니에 총탄Minié bullet이 개발되면서 해결되었다. 미니에 총탄은 아래쪽이 비어 있고 테두리가 있는 원뿔형 총탄이다. 심하게 오염된 총열에서도 쉽게 빠져나오고 테두리가 강선에 꼭 물린 미니에 총탄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93)


다음 단계는 전장식 소총을 후장식 소총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전장식 소총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사수가 누운 상태로 재장전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후장식 소총은 1848년에야 군용 총기로 등장했다. 프로이센의 총기 제작자인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Johann Nicolaus von Dreyse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이 소총은 바늘식 소총Needle gun이라고 알려졌다. 프로이센군이 1848년에 채택한 드라이제 바늘식 소총은 나중에 모든 볼트 액션식 소총의 조상이 된 폐쇄식 볼트 시스템을 장비한 첫 소총이다. 바늘식 소총 덕에 프로이센군 보병은 1분에 8발의 속도로 사격할 수 있었다. 총미에 상자형 탄창 혹은 총열 아래에 원통형 탄창을 장비한 볼트 액션식 소총은 전 세계 군대의 표준 보병 화기가 되었다. 1885년에 무연화약smokeless powder이 도입되자 전환 과정이 완료되었고, 1900년경에 보병용 소총의 형태가 고정된 후 제1차 세계대전을 지나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를 때까지 유지되었다. 93-4)


25 기관총 : 한 번에 다수의 목표물을 파괴하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인해 자동화기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1861년 시카고의 치과의사 리처드 조던 개틀링RichardJordanGatling이 개발한 개틀링건Gatlinggun은 회전식 프레임에 설치된 총신 6개로 구성되었다. 회전하는 총신이 차례로 탄창과 나란히 배열되면 장전 접시로 떨어진 카트리지가 장전기를 통해 약실로 삽입된다. 총알이 발사되면 다 쓴 탄피는 총신이 회전하면서 추출된다. 중력에 의한 장전과 흑색화약 카트리지에 의존하던 기존의 기관총은 무기로서 신뢰받지 못했으나, 금속 카트리지와 무연화약이 발명되자 기관총의 잠재력에 날개가 달렸다.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만능 발명가인 미국인 하이럼 맥심HiramMaxim은 총알의 반동을 다음 총알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이용하여, 천 벨트에 끼운 카트리지가 자동으로 장전되어 발사되는 구조를 개발했다. 드디어 사수를 작동기구에서 해방시킨 진정한 기관총이 탄생한 것이다. 사수가 해야 할 일은 방아쇠를 계속 당기는 것뿐이었다. 95-6)


맥심이 확립한 기본적인 기관총 설계는 30년간 유지되었는데, 점차 다른 개량형들도 등장했다. 미국의 존 M.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은 발사 가스 일부를 이용해 장전 과정을 보조하는 총을 만들었다. 브라우닝이 추가한 부분은 영국군이 1912년에 채택한 수랭식 비커스 기관총에 차용되었다. 1914년 영국군 대대는 일반적으로 비커스 기관총 2정을 보유했다. 다만 고위층에서 이 기관총이 곧 차지하게 될 중요성을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독일군은 7.92밀리미터(0.3인치) 파라벨럼Parabellum탄을 사용하는 벨트 급탄 수랭식 기관총 6∼12정으로 기관총 중대를 편성하고 이를 3개 대대로 편성된 연대에 배치함으로써 지휘관의 손에 가공할 집중 화력을 쥐어주었다. 1914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이 시작되자 양군이 배치한 기관총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914년 영국군 사단은 기관총 24정을 배치했으나 1916년경에는 열 배로 늘어난 204정이 배치되었다. 97)


26 드레드노트형 전함 : 거함거포의 시대를 열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 기간인 1862년에 중대한 의미가 있는 해상 대결이 벌어졌다. 8인치 두께의 철제 장갑을 둘러친 회전포탑에 탑재된 11인치 활강포 2문을 장비한 북군 소속 포함gunboat인 모니터Monitor함이 햄프턴 로즈Hampton Roads에서 남군의 버니지아Virginia함과 근거리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결투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조잡하기는 했어도 모니터함의 선회포탑은 미래의 함선이 나아갈 길을 가리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사점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해전 기술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1904년에 제1 해군경으로 임명된 피셔 제독은 이런 상황에 자극을 받아 ‘모든 포를 대구경포로all-big-gun’ 장착한 전함 설계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던 중 1905년 5월에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자 피셔 제독의 숙고에 절박함이 더해졌다. 이 해전은 현대적 해군 포술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시연이었다. 99-100)


1905년에 피셔 제독은 지금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전함을 구식으로 만들 전함 건조 프로그램을 발족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당시 사용 가능한 추진 기관, 방어력, 무장 부문의 진보를 단 하나의 선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로터리 터빈 기관, 장갑 방어, 거리측정용 광학장비, 사격 통제 시스템과 폭발 지연신관을 이 전함에 적용할 계획이었다. 1905년 10월부터 1906년 2월까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건조되고 진수된 배수량 1만 8,000톤의 전함 드레드노트Dreadnaught는 1만 3,000마력 파슨스Parsons 증기터빈으로 속력 21노트를 냈다. 당시로서는 전함이라기보다 순양함의 속력이었다. 연장포탑 5개에 탑재된 30.5센티미터(12인치)포 10문이라는 드레드노트의 무장은 당대 어떤 현역 전함보다 강력했다. 어뢰정 공격에 대한 방어책인 7.6센티미터(3인치) 속사포 26문 덕에 적 어뢰정은 사정거리가 3,000야드(2,743미터)였던 당시의 어뢰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100)


Chapter 6. 제1차 세계대전

27 참호전 : 진흙탕 속 가장 참혹했던 전투


1914년에 프랑스군 포병의 근간은 1897년에 도입된 75밀리미터(3인치) 속사 야포였다. 이 포는 5.4킬로그램(12파운드) 고폭탄 혹은 7.2킬로그램(16파운드) 유산탄을 9킬로미터까지 쏘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야포는 참호전에 적당하지 않았고, 포탄은 엄중하게 방어된 진지를 위협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개전 무렵의 영국 대륙원정군(BEF)은 중포 없이 18파운드(8.2킬로그램) 속사 야포만 야전에 배치했다. 이 포 역시 잘 구축된 참호에 효과를 발휘하기에 충분한 무게의 포탄이나 부앙각이 없었다. 19세기 후반 독일은 강화 진지를 격파할 무기를 개발했다. 따라서 독일군 야전포병 전력에서 곡사포howitzer(포신이 짧고 고각으로 더 무거운 포탄을 발사하는 포)가 차지하는 비율이 적보다 더 높았으며, 이는 결정적 우위로 작용했다. 가장 인상적인 대포는 무시무시한 75톤 무게의 크룹Krupp 42센티미터(16.5인치) 곡사포였는데 이 포는 918킬로그램(2, 052파운드) 포탄을 14.2킬로미터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104)


1914년 전에 완성된 포병 기술인 간접 포격을 사용해 포수들은 보이지 않는 목표물에 사격할 수 있었다. 위장한 탄착관측수가 전화로 포수들에게 지시를 보낸 다음 첫 탄의 명중 결과를 관측하고 사격제원 수정을 지시한다. 참호전 환경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1914년 여름에 병사들은 기동전을 예상했기 때문에 간접 포격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1915년 봄 무렵, 이 허황한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서부전선 사상자의 70퍼센트는 포병 때문에 발생했다. 1916년 6월에 솜 전투 전의 준비 포격에서는 독일군 철조망을 뚫고 포대를 침묵시키며 방어군을 대피호에 묻어버릴 의도로 150만 발을 발사했다. 타는 듯이 뜨거운 7월 1일 아침 07시 30분, 포격은 독일군 제2선으로 이동해 갔다. 독일군 기관총수들은 충격을 받았으나 다치지 않은 채 대피호에서 나와 무인 지대를 걷는 속도로 전진하던 영국군 13개 사단에 압도적 위력의 기관총탄을 우박처럼 쏟아부었다. 105)


28 화학전 : 참호를 지옥으로 만든 화학 무기


1915년 4월 22일 오후 5시, 불길한 느낌을 주는 녹황색 구름이 이프르Ypres의 연합군 진지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이 구름은 공세를 앞둔 독일군이 참호에 있는 500개의 가스 실린더에서 사전공격의 일환으로 방출한 압축 염소가스chlorine gas였다. 독일군 포로와 탈주병들이 이 새로운 무기에 대해 경고했지만 대응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프르 북쪽 측면에 있던 프랑스군 식민지병 2개 사단이 이 구름에 휩싸여 겁에 질린 채 도주했다. 전선에 생긴 너비 6.5킬로미터의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질식해 죽어갔다. 1915년 9월 25일, 영국군은 루스Loos의 독일군 진영에 염소가스를 살포했으나 가스는 적의 참호에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가스 포탄의 사용이 점점 늘어나 1918년경에는 최소 63종의 가스가 사용되고 있었다. 머스터드가스의 희생자 중에 아돌프 히틀러AdolfHitler가 있었다. 히틀러는 제16 바이에른 동원연대에서 복무하다가 1918년 10월에 이프르에서 영국군의 가스 공격을 받았다. 109)


29 공중전 : 전쟁에 하늘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더하다


1915년 2월, 프랑스인 롤랑 가로와 레이몽 솔니에가 전방 사격 기관총을 실험했다. 이들은 발사한 총탄 중 적은 수만 프로펠러에 부딪힐 것이라 계산하고 총탄을 튕겨내기 위해 프로펠러에 강철판을 붙였다. 4월, 가로는 독일군 전선 후방에 불시착했고 노획된 모랑-솔니에Morane-Saulnier N형 덕에 네덜란드 태생 공학자 안토니 포커는 프로펠러가 앞을 가리지 않을 때만 총이 발사되는 기계적 동조 기어mechanicalinterruptergear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아인데커Eindecker라 불린 포커 E.I 단엽기에 탑재되었고, 이렇게 해서 진정한 의미의 첫 전투기가 탄생했다. 막스 이멜만과 오스발트 뵐케 같은 뛰어난 조종사들이 조종한 아인데커 E.III형은 서부전선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915년 8월부터 1916년 1월까지 영국과 프랑스 항공대가 입은 손실은 ‘포커의 징벌Fokker Scourage’이라고 알려질 정도였고, 속절없이 당한 연합군 조종사들은 ‘포커의 밥Fokker Fodder’이라고 불렸다. 111-2)


오스발트 뵐케는 1916년 2∼6월에 베르됭 상공에서 겪은 격렬한 공중전 경험에 기반해 전투 목적으로 특화된 비행대, 야크트슈타펠Jagdstaffel(전투 비행대, 흔히 ‘야스타Jasta’라고 불림)을 편성했다. 뵐케가 지휘하는 야스타 2의 초창기 부대원으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ManfredFreiherrvonRichthofen이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80기 격추를 기록해 최고의 에이스가 된다. 양측에서 신형기를 도입함에 따라 연합군에서도 에이스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프로펠러가 뒤쪽에 달린 ‘푸셔pusher’형 전투기인 DH2(전방을 바라보는 조종사 좌석에 루이스Lewis 기관총을 장착)를 몰고 비행한 영국군 제6 비행대의 라노 호커Lanoe Hawker 소령은 공중전에서 첫 빅토리아 십자장Victorian Cross(VC)를 받은 영국 항공군단 조종사가 되었다. 1916년 11월 23일, 솜 전투가 끝날 무렵 호커는 알바트로스Albatros D.II 복엽기를 조종하던 리히트호펜과 격렬한 선회전을 벌인 끝에 그의 열한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12)


30 폭격기의 도래 : 지평선을 따라 비치는 전략 폭격의 여명


1917년 5월 독일 육군은 영국 본토의 목표물을 습격할 수 있는 공기보다 비중이 큰 폭격기를 개발했다. 고타Gotha G.IV 폭격기다. 탑승원 3명 중에 항법사와 폭격수를 겸한 관측수가 지휘를 맡았다. 최대 폭탄 탑재량은 500킬로그램(1,100파운드)이었고 폭탄은 기체 내부 혹은 외부에 탑재했다. 고타 폭격기는 1917년 5월 25일의 포크스턴Folkestone항 공격을 시작으로 6월 13일과 7월 7일에 극적인 런던 주간폭격을 벌였다. 독일의 런던 공습으로 자극받은 영국도 전략폭격부대를 창설했다. 1918년 봄에 선보인 이 부대는 프랑스에 있던 초창기의 영국 공군(RAF)과는 별개 부대로 독일 산업시설 폭격 임무를 맡았다. 이 부대의 주력기는 핸들리 페이지 O/400 폭격기로 최대 폭탄 탑재량 907킬로그램(2,000파운드), 최고속력 시속 95마일(시속 152킬로미터), 작전상승고도 2,590미터(8,500피트)였다. 악천후 그리고 이들에 전술 역할을 부여하자는 요구 탓에 O/400 폭격기의 독일 군수공장 폭격은 몇 번에 그쳤다. 116)


31 현대적 전차 : 참호를 건너 험지를 주파하는 전투 차량


1914년 10월 어니스트 스윈턴ErnestSwinton 소령(나중에 대령)은 영국군 최고사령부(GHQ)와 접촉해 전쟁 전에 개발된 강철 궤도식 홀트Holt 농업 트랙터를 장갑차량으로 개조하자는 제안을 제출했다. 최고사령부는 이 제안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스윈턴의 계획은 제1 해군경 윈스턴 처칠이라는 지원군을 얻었다. 1916년 초에 시제품 전차인 ‘빅 윌리’는 하트필드 파크Hartfield Park에서 성공적으로 시험을 마쳤다. 신무기에는 ‘탱크Tank’라는 암호명이 붙었는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으면 물을 나르는 용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916년 9월 15일 솜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전차가 투입되었을 때, 출발점에 도착한 마크 Ⅰ 전차 32대는 전술적 배치 문제뿐 아니라 기계적 취약성과 짧은 항속거리의 희생양이 되었다. 전차는 1917년 11월의 캉브레 전투 때부터 비로소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캉브레는 수량, 조건, 전술 면에서 전차에 유리한 전투였고, 훗날 전차가 만날 기회를 아주 살짝 보여주었다. 118-9)


마크 Ⅳ 전차Mark IV Tank는 마크 Ⅰ과 마찬가지로 마름모 비슷한 형태에 차체 전체를 감아 돌아가는 궤도를 터비했으나 개선된 라디에이터와 소음기를 장착했고, 궤도를 압연 강철로 만들어서 접지력이 더 좋았다. 다만 이 궤도는 약 32킬로미터까지만 제대로 굴러갔다. 12밀리미터(0.5인치) 두께의 장갑 방어력은 전 모델보다 개선되어 철갑총탄armor-piercing bullet, 徹甲銃彈(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도록 합금 등으로 강화한 탄자를 가진 총탄―옮긴이)에 유효했다. 실전에서 마크 Ⅳ 전차의 내부는 소음과 열로 가득한 불지옥이었다. 현가장치suspension가 없었으므로 살짝 무엇에 찧거나 부딪히면 충격이 몇 배로 증폭되었고 탑승원들이 뜨거운 엔진으로 내동댕이쳐질 위험이 상존했다. 전차가 피탄되면 뜨거운 철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다녔고 장갑판이 총탄을 맞으면 탑승원들은 제철소 직원들처럼 흩날리는 뜨거운 금속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탑승원들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 마스크를 썼다. 119-20)


Chapter 7. 제2차 세계대전

32 전격전 : 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돌파구를 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군사 이론가들은 기계화전 교리 개발에 매달렸다.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피하고 전장에서 기동과 이동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다. 전격전 교리의 아버지는 많으나 고대부터 내려온 통찰에 현대 기술을 응용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대령(나중에 장군)이다. 통신과 차량 수송 전문가였던 구데리안의 목표는 적과 정면에서 교전해 압도적인 화력으로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히 적의 지휘 통제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고속으로 기동하며 무전기로 서로 협력하는 독립적인 기계화 제대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중점schwerpunkt’을 공격해 돌파구를 연다. 이 부대들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후방 깊숙이 침투하며, 뒤에 따라오는 보병은 살아남은 적을 여러 개의 포위망에 나눠 가둔다. 첫 돌파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중 포병으로서 루프트바페Luftwaffe(독일 공군)의 수평 및 급강하 폭격기를 이용한다. 122-3)


1941년 여름,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이라고 알려진 독일의 소련 침공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소련군은 ‘가마솥’ 전투라는 별명으로 불린 몇 개의 대규모 포위전을 거치며 전멸 직전까지 갔다. 3개의 ‘가마솥’에서 10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전격전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데 동부전선의 여러 조건이 훼방을 놓았다. 소련 땅의 광대한 크기, 영하의 겨울 날씨와 봄, 가을의 진창 같은 극단적인 기후, 끝이 없어 보이는 인적자원 공급은 동부전선에 전개한 독일군의 힘을 빼버렸다. 1941년 12월에 참전한 미국은 소련 군대와 민간인을 무장시키고 먹여 살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다시 기력을 회복한 붉은 군대는 히틀러를 점점 소모전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이중 가장 특기할 만한 전투로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년 8월∼1943년 2월)와 쿠르스크 전투(1943년 7∼8월)가 있다. 이 전투에서 전격전의 기본 원칙, 즉 기습, 충격, 기동은 소련 여름의 흙먼지처럼 날아가버렸다. 124)


33 레이더 : 전투기 조종사들의 믿을 만한 눈


전파 방향 거리 탐지(장치)radio direction and ranging의 미국식 약어인 레이더는 영국에서는 RDF(radio direction finding, 전파방향탐지)라고 알려졌다. 레이더는 송출된 전파에너지 펄스가 목표물에 맞아 반사될 때의 에너지를 탐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펄스의 속도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송출과 수신 사이의 시간을 측정하면 레이더 조작원이 목표물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레이더 보고는 해안과 내륙의 관측초소에서 오는 정보와 교차 검증되었고, ‘걸러진’ 결과는 전투기 사령부 소속 전투비행단과 구역 기지Sector Station(주 기지)로 전송되었다. 요격 관제사들은 적 편대의 항로를 지도에 그리는 데 소요되는 6분의 시간을 감안해 요격 비행대를 배정했고 비행대는 다가오는 적기를 향해 긴급 출격했다. 개전 후 10개월 동안 루프트바페는 영국 제도로 정기적으로 정찰기를 보내 연안 운송 선박을 공격했다. 영국 공군은 여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레이더 요격시스템을 발전시켜 상당한 효율성을 발휘했다. 125-6)


34 전략폭격 :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괴해 굴복시키다


폭격작전은 영국이 나치 독일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보다 고도화된 항법 보조장비를 갖춘 4발 폭격기(쇼트 스털링,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 아브로 랭카스터)가 대량으로 일선에 도입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이들의 도입은 폭격기사령부의 정책 변화와 때를 같이했다. 폭격기사령부는 간간이, 극적인 방법으로 특정 목표에 대한 정밀폭격을 유지했으나 이제 폭탄 대부분은 ‘지역’을 목표로 삼아 떨어지게 되었다. 폭격기사령부가 독일의 군수공장을 파괴할 수는 없어도 노동자들이 사는 곳은 파괴할 수 있었다. 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아서 해리스ArthurHarris 대장은 독일 도시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지역 폭격의 첫 단계는 1943년 7∼8월에 절정에 달했다. 이 기간에 수행된 고모라 작전Operation Gomorrah에서 폭격기사령부는 함부르크에 잇달아 파괴적인 폭격을 단행했다. 1944년 연말에는 독일 도시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다. 130)


1942년 미 육군항공대 제8공군의 지휘관들은 자위 능력을 갖춘 폭격기로 편성한 대형으로 주간에 고공 정밀폭격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전쟁 초기에 루프트바페와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가 이 전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 육군항공대는 독일 상공에서 자신의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가 전멸 일보 직전까지 갔다. 대규모 편대비행을 하던 B-17 플라잉 포트리스Flying Fortress와 B-24 리버레이터Liberator 폭격기가 루프트바페 주간 전투기를 상대로 입은 손실이 점점 늘어갔다. 1943년 늦여름경에는 평균 손실 비율이 1회 출격당 10퍼센트에 달했고 이런 손실을 유지하며 전투를 계속하기란 불가능했다. 1943년 12월에 뛰어난 성능의 P-51 머스탱Mustang이 호위전투기로 도입되면서 위기가 끝났다. 이 전투기는 독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폭격기를 호위할 능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상공에서 적 전투기를 소탕하기 위한 전투 초계활동fighting patrols도 할 수 있었다. 130-1)


35 기갑전 : 현대 전차 설계의 본보기 T-34


소련 전차군의 주축은 T-34/76 중형 전차로 1940년 여름에 처음으로 일선에 배치되었다. 이 전차는 기본 성능이 뛰어나 크게 개조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사용되었다. 기동성, 방어력, 화력의 균형을 잡은 T-34 전차는 현대적 전차 설계의 기초를 놓았다고 여겨진다. T-34 경사 장갑의 특징은 포탄의 관통 저항력을 높였다는 것인데, 독일군이 5호 전차 판터를 만들 때 이 점을 베꼈다. T-34의 균형 잡힌 설계를 완성한 것은 포신이 길고 포구 초속이 빠른 혁신적인 전차포였다. T-34 전차는 접지압을 최소화한 폭이 넓은 궤도를 장비했으며, 러시아의 봄과 가을철의 특징인 진창(라스푸티차rasputitsa)과 겨울철에 깊게 쌓인 눈 같은 거친 지형에서도 빠르고 기동성이 좋았다. 튼튼한 전천후용 디젤 엔진 덕분에 T-34의 출력 대 중량비는 매우 훌륭했으며 항속거리는 299킬로미터로 독일군 5호 전차(판터Panther)와 6호 중전차(티거Tiger Ⅰ, Ⅱ)의 거의 두 배였다. 이러한 특징은 광활한 소련의 전장에서 아주 중요했다. 134)


36 유보트 전쟁 : 낮에는 잠항하고, 밤에는 공격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보트(독일어 운터제보트Unterseeboot에서 나온 말)로 알려진 독일 잠수함이 대서양 보급선을 끊어버려 하마터면 영국이 항복할 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유보트들도 제1차 세계대전 때만큼 위협적이었으나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연합군의 기술력에 패배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얻은 승리였다. 1940년 여름부터 노르웨이와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노르웨이와 프랑스의 기지를 획득하면서 유보트, 독일 수상함대, 장거리 정찰기들은 작전 범위를 확장하고 분쟁 수역으로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로 인해 ‘젖소’라 알려진 보급 유보트로부터 연료를 재보급받기가 더 쉬워졌다. 기회를 잡은 유보트들은 ‘늑대 떼wolf pack’ 전술로 작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낮에는 호송선단을 미행하고 밤에 부상해 공격했다. 유보트 승조원들은 1940년 7월부터 10월까지의 기간을 ‘행복한 시간Happy time’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연합군 선박 217척이 격침당한 데 반해 유보트는 단 2척만 잃었다. 136)


유보트를 이기기 위해 연합군은 광대한 바다에서 이들을 탐지하고 격파할 장비가 필요했다. 공동 마그네트론 밸브cavitymagnetronvalve가 영국에서 발명되고 여기에 기반한 강력한 센티미터파 레이더가 등장해 가장 중요한 기술적 돌파구가 열렸다. 이 레이더는 1941년 4월에 부상한 잠수함을 10마일(16킬로미터) 거리에서, 잠망경을 1, 200미터(3,937피트) 거리에서 탐지해냈다. 공대지Air to Surface(ASV) 레이더는 1943년 봄에 도입되었다. ASV 레이더를 장비한 비행기와 탐조등, 폭뢰는 밤에 부상한 유보트를 탐지하고 파괴할 수 있었다. 1943년 5월에 연합군이 격침한 유보트 36척 중 22척을 비행기가 격침했다. 고주파 방향탐지장치(허프 더프huff duff)를 장비한 호위함들은 기지로 무전을 발신하는 유보트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해 미행할 수 있었다. 청음 어뢰로 무장한 미국제 초장거리Very Long Range(VLR) 리버레이터 폭격기는 유보트가 항공 공격을 받을 걱정 없이 누비던 대서양 가운데의 틈새를 좁혔다. 137)


37 디데이 : 역사상 가장 중요한 상륙작전


이렇게 많은 과학적 준비 과정과 창의성을 들여 시행한 군사작전은 일찍이 없었다. 요행에 맡긴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소드Sword라는 암호명으로 부른 상륙 예정 해안은 특수 코만도 부대원들이 노르망디에서 가져온 모래 표본을 광범위하게 분석한 다음 연합군 계획 입안자들이 선정했다. 연합군 정찰기는 각 상륙 지역의 사진을 인치 단위로 촬영했고, 상륙 예정 부대의 수석 과학고문 솔리 주커먼Solly Zuckerman은 모자이크식으로 모은 촬영 결과물을 분석해 오버로드 작전에 선행한 수송 계획을 짰다. 상륙 뒤 연합군은 독일군이 노르망디의 거점을 증원하기 위해 사용할 서부 독일과 프랑스의 철도 시스템을 연합군 중폭격기와 전술폭격기로 파괴하기로 계획했다. 복잡한 연합군 기만 계획의 일환으로 영불해협이 제일 좁은 파드칼레Pas-de-Calais에 다수의 폭탄을 투하했다. 노르망디가 아닌 이곳에 연합군이 상륙할 것이라는 독일군의 심증을 굳히기 위해서였다. 140)


정확한 일기예보는 오버로드 작전 성공에 필수적이었다. 1944년 6월 6일에 잠시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 예측되었고, 이 예보에 기반해 작전의 개시일이 결정되었다. 5,000척에 이르는 연합군 대함대가 영불해협을 건너는 동안 연합군은 독일군을 상대로 전자적 기만작전을 발동했다. 해군 소속 론치launch(대형 동력선―옮긴이)들이 칼레와 불로뉴Boulogne로 향했다. 모두 병력 수송선과 비슷한 반사파를 내도록 특별히 제작한 반사판을 단 풍선을 끌고 있었다. 상공에서는 폭격기들이 살포한, 규격에 맞춰 재단한 금속 띠(영국군은 ‘윈도window’라는 암호명을, 미군은 ‘채프chaff’라는 암호명을 붙였다)가 큰 강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졌다. 이 금속 띠는 허위 레이더 신호를 만들어냈다. 영국이 통제한 이중스파이 후안 푸홀 가르시아Juan Pujol Garcia(‘가르보Garbo’)는 독일 정보기관의 담당관들에게 노르망디 상륙은 기만책일 뿐이며, 공격의 중점은 파드칼레가 될 것이라고 알렸다. 140-1)


38 나치의 비밀병기 : V-1과 V-2


루프트바페에서 개발한 FGZ-76 비행폭탄 V-1은  베르너 폰 브라운이 개발한 로켓 V-2에 비해 장점이 상당했다. V-1은 제작비용이 저렴하고 생산이 간단했으며 V-2에 필요한 귀중한 액화 산소와 고순도 알코올 대신 저질 연료를 태웠다. 곧 ‘두들버그doodlebug(개미귀신―옮긴이)’라는 별명을 얻은 V-1은 전쟁 초의 폭격 이후 다시 런던을 최전방 도시로 돌려놓았다. 이들의 정확도는 특별히 높지 않았으나 런던은 매우 큰 목표물이었고 독일의 의도는 V-1의 공격 효과가 무차별적으로 발휘되는 것이었다. 1944년 8월 말에는 런던 지역에서 2만 1, 000명이 V-1에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25만 명의 젊은 어머니와 어린이들이 대피했고 100만 명이 자발적으로 도시를 떠났다. 밤에는 수천 명이 런던의 지하철역에 몸을 피했다. 1944년 9월 초가 되자 최악의 V-1 공세가 끝났다. 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발사기지들을 점령했고 독일군은 더 먼 네덜란드에서 발사하거나 개조된 폭격기로 공중발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143-5)


런던 시민들이 한숨 돌릴 틈은 없었다. 9월 8일, 네덜란드에 있는 한 발사장에서 불과 5분 전에 발사된 V-2가 시 전체에 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음을 일으키며 런던 교외 치즈윅Chiswick에 떨어졌다. V-2 한 발은 V-1보다 20배 더 비쌌다. 하지만 두들벅 V-1과 달리 V-2는 접근을 알리는 경보도 없었고 발사된 뒤에는 요격할 방법이 없었다. 고폭탄 1톤을 실은 V-2는 80∼100킬로미터까지 상승했다가 음속 4배(시속 4,0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지상에 재돌입했다. 발사기를 겸한 차량으로 수송되는 V-2는 평평한 땅이라면 어디서든 발사될 수 있었으며 공중에서 탐지되지 않도록 발사장 위치를 주기적으로 옮겼다. V-2 공세는 남부 잉글랜드에 232발이 떨어진 1945년 2월에 절정에 달했다. 3월 8일에 런던의 스미스필드Smithfield 시장에 떨어진 V-2로 233명이 죽었다. 모두 합쳐 1,115발의 V-2가 잉글랜드에 떨어졌다. 그중 517발이 런던에 떨어져 2,754명이 사망하고 6,523명이 다쳤다. 145-6)


39 호위전투기 : 발군의 성능을 지닌 장거리 전투기


1943년 1월부터 독일 영공을 얕게 돌파하기 시작한 미 육군항공대의 손실은 2월부터 꾸준히 늘어났다. 제8공군이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항공기 조립공장과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의 베어링 공장을 공습한 8월 17일에 손실은 최고조에 이르러다. 미군은 두 도시를 겨냥한 폭격에 파견된 376대 가운데 60대를 잃었고 이보다 많은 수를 전손 처리했다. 노스아메리칸NorthAmerican사의 P-51B 머스탱이 1943년 12월에 도착하자 위기가 해소되었다.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동력원으로 하고 340리터 보조 연료탱크를 장비한 머스탱의 항속거리는 1,600킬로미터에 달해 엠덴Emden, 킬Kiel, 브레멘Bremen까지 폭격기를 호위할 수 있었다, 1944년 5월에 도착한 물방울 모양 캐노피를 장비한 P-51D형은 날개가 강화된 성능 개선 모델이었다. 이례적으로 많은 연료를 탑재할 수 있었고 보조 연료탱크까지 갖춘 D형의 항속거리는 2,400킬로미터여서 독일 내 어떤 목표물까지든 호위 비행이 가능했다. 148)


1944년 1월에 미군은 개선된 폭격기 지원 릴레이 시스템을 도입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표준으로 유지했다. 이 시스템에서는 전투기가 사전에 지정된 폭격기와 합류하는 지점까지 비행한 다음 다른 부대와 교대할 때까지 비행하는 대신 1개 전투비행단이 폭격기 이동 경로에 있는 한 지역 전체를 맡아 폭격기 편대가 통과하는 동안 해당 지역을 초계했다. 머스탱이 도착하자 폭격기 편대 구성의 또 다른 전술적 변화가 촉진되었다. 폭격기 대형은 12기로 구성된 3개 비행대로 줄었다. 선도 비행대는 중앙에, 2개 후속 비행대는 그 위와 아래에서 대형을 형성했다. 전반적 전력은 3분의 1이 줄었으나 새 대형이 차지한 공간은 이전 대형보다 17퍼센트 더 늘었다. 이로 인해 조종사들의 긴장이 줄고 상공의 머스탱들이 엄호를 제공하기가 더 쉬워졌다. 머스탱은 영국 본토 방공전에서 Me 109가 그랬듯이 폭격기 편대의 근접 엄호뿐만 아니라 적을 수색해 격멸하는 역할을 맡은 전투 초계 활동도 했다. 149)


40 항공모함 : 태평양전쟁 승리의 열쇠


항공모함은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수상기모함의 후예다. 앞뒤가 훤히 뚫린 비행 갑판을 이용해 항해 중에 비행기를 발진시킬 수 있었던 진정한 의미의 첫 항공모함은 영국 해군이 수상기모함을 개조해 만든 HMS 아거스Argus함으로 1918년 10월에 취역했다. 전후 몇 년 동안 가장 강력한 태평양의 해상세력인 미국과 일본이 영국을 따라 항공모함 건함 경쟁에 뛰어들었다. 1941년 봄에는 미국과 일본 해군이 보유한 항공모함 수에 격차가 생겼다. 일본군은 미 해군의 4척에 비해 10척이라는 결정적 우위를 누렸다. 하지만 전함을 10척씩 보유한 미국과 일본 해군은 아직 전함이 해양 패권을 결정지을 무기라고 보았고 전함에 결정적 역할을 맡길 계획이었다. 진주만 기습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12월 7일 오전 07시 55분, 일본군은 완벽한 기습을 달성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비행기들은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군 전함 8척을 격침하거나 행동 불능으로 만들었고 지상에서 비행기 300대를 격파했다. 150)


항공모함의 유명한 ‘선데이 펀치Sunday Punch’(강력한 타격력―옮긴이)는 탑재한 전투기 36기, 급강하폭격기 36기, 뇌격기 18기의 몫이었다. 표준 전투기는 커다란 덩치의 맷집이 좋은 F6F 헬캣Hellcat으로 일본 전투기보다 성능이 한 수 위였다. 급강하폭격기는 중무장한 복좌식의 커티스SB2C 헬다이버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가장 많이 운용한 급강하폭격기였다. 뇌격기는 뛰어난 설계의 튼튼한 TBF 어벤저Avenger였다. 이 3종은 함께 운용되며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항공모함은 첨단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공, 대수상 수색 레이더와 사격통제 레이더가 있었고, 평면위치표시기plan position indicator(PPI)로 함선들의 항적을 확인하고 다수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부대가 밤이나 악천후에도 고속으로 항진하며 대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피아식별장치IFF로는 적 함선이나 비행기를 식별했다.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차지한 에식스Essex급 항공모함 중 전쟁에서 손실된 배는 한 척도 없었다. 152-3)


41 암호 해독 : 제2차 세계대전 최고의 기술 승리


영국 암호 해독자들이 원래 이용한 무기는 봄베Bombe라고 알려진 전기 기계식 컴퓨터로 앨런 튜링이 상당 부분을 설계했다. 이 기계는 에니그마의 전기회로와 짝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독일군이 저지른 부주의가 끼어들었다. 송신국은 수신국에 자신의 에니그마가 어떤 방식으로 설정되어 송신하는지를 알려줘야 했기 때문에 송신국 운용 요원은 보내는 전문마다 같은 글자가 반복된 문자열을 앞에 첨부했다. 훈련받은 수학자가 이렇게 정해진 패턴을 접한다면 전문을 해독할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1941년에 독일은 모스부호가 아닌 텔레프린터teleprinter(전기신호를 자동으로 문자로 변환해 인쇄하거나 천공 테이프에 기록하는 기계―옮긴이) 전문 송신 방법을 도입했다. 로터가 12개 달린 극도로 복잡한 로렌츠Lorenz 암호기는 전문을 암ㆍ복호화해 천공 테이프의 도움을 받아 1초에 25개의 문자를 송신했다. 에니그마보다 보안이 강화된 로렌츠를 빠르게 해독하는 것은 봄베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155-6)


1943년 5월, 북아프리카에서 로렌츠 암호기 2개를 노획하면서 100개에 가까운 밸브가 달린 반전자식 기계를 제작했다. 얼마 후 영국 우정청British General Post Office(GPO) 연구부의 맥스 뉴먼과 T. H. 플라워스가 만든 더 강력한 콜로서스 기계가 개발되었다. 전자식 릴레이 대신 밸브 1,500개가 달린 이 기계는 1944년 초부터 피시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우정청 팀은 콜로서스의 더 강력한 버전인 콜로서스 Ⅱ를 3개월 안에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블레츨리 파크에 있는 한 건물에서 이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밸브 2,400개를 갖춘 콜로서스 Ⅱ는 마찰 기어로 움직이는 천공 테이프를 장착했는데 광전식 판독기로 읽히는 이 테이프는 제한적으로 메모리 역할을 했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 디지털 컴퓨터인 콜로서스 Ⅱ는 1944년 6월 1일이라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실전에 투입되었다. 1945년 5월 무렵에 블레츨리 파크에는 10대의 콜로서스가 있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모두 파기되었다. 156-7)


42 원자폭탄 : 세계 멸망을 향한 한 걸음


원자폭탄은 19세기 후반의 앙리 베크렐의 방사능 발견, 피에르 퀴리, 마리 퀴리의 라듐 발견, 빌헬름 뢴트겐의 X선 발견과 1900년에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개요를 서술한 베타선의 발견에서 기원한다. 헝가리 태생 유대인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Szilard는 1934년에 특정 원자핵에 중성자neutron로 알려진 입자를 쏘면 이 원자를 쪼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쪼개진 원자는 더 많은 중성자를 방출하며 더 많은 원자핵을 쪼개게 되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사하는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과학자들은 이 에너지를 이용해 가공할 위력을 가진 폭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국에서는 오토 프리슈Otto Frisch와 루돌프 파이어럴스Rudolf Peierls가 폭탄 제조에 필요한 즉시 폭발성 연쇄반응을 생성하려면 우라늄의 드문 변종(우라늄 235)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인공원소인 플루토늄으로도 폭탄을 만들 수 있음을 발견했다. 158)


Chapter 8. 냉전과 그 후

43 탄도미사일 : 핵 억지력의 주축


미 해군의 첫 잠수함 발사 미사일 계획은 레귤러스Regulus와 주피터Jupiter 프로젝트라는 실패작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항 미사일을 전략 미사일로 사용하려고 했으나 순전히 주피터와 레귤러스 미사일의 무게만으로도, 무엇보다 잠수함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 부상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비실용적인 시스템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잠수함은 부상했을 때 제일 취약한데, 연료를 채운 미사일이 갑판에 있으면 더더욱 취약해졌다. 폴라리스와 그 후계자는 순항 미사일보다 매력적이었다. 미 해군은 1956년에 폴라리스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1960년 7월에 첫 SSBN(탄도미사일 원자력 잠수함)인 USS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잠항 상태에서 처음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조지 워싱턴이 탑재한 폴라리스 미사일 16발은 개별 발사 튜브에 수납된 채 정비와 조정을 거쳤고, 관성항법장치로 정확하게 지정된 위치의 수면 아래에서 발사되었다. 목표물은 잠수함과 미사일에 있는 소형 컴퓨터로 설정되었다. 163)


폴라리스의 첫 모델인 A-1은 사정거리가 1,850킬로미터였고 600킬로그램짜리 W47 단일 핵탄두를 탑재했다. 1962년 5월, 도미닉 작전OperationDominic에서 기폭 가능한 (폭발력을 줄인)W47 탄두를 탑재한 폴라리스 미사일이 태평양에서 시험 발사되었다. 미국이 실제 탄두를 실은 잠수함 탑재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경우는 이번이 유일했다. A-1은 유럽 주둔 미군이 전개한 지상 발사 중거리탄도탄 시스템을 보충할 전략자산으로 기획되었다. 중거리탄도탄 시스템은 소련 내륙의 목표물을 공격하기에는 사정거리가 부족했으므로 미국은 기존 핵억지력의 부족한 측면을 보강하기 위해 폴라리스 미사일을 개발했다. 폴라리스 미사일의 다음 버전은 사정거리가 더 길었다. A-3형은 단일 목표물에 넓게 분산할 수 있는 다탄두 독립목표 재돌입 탄도탄(MIRV)이었다. 포세이돈 미사일로 진화한 B-3형은 소련의 대탄도미사일 방어망(ABM)을 압도하기 위한 고속 강화 재돌입 탄두를 14개까지 탑재했다. 163-4)


44 헬리콥터 : 현대 전장에 가장 잘 적응한 병기


1941년에 세계 최초로 헬리콥터를 군사작전에 사용한 나라는 독일이다. 전쟁 전에 수송과 여객용 비행기로 설계된 포케-아흐겔리스Focke-Achgelis Fa 223 드라헤Drache(용)와 이보다 작은 플레트너Flettner Fl.282 헬리콥터가 독일이 운용한 사상 첫 군사용 헬리콥터다. 1950년대 초중반에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식민전쟁을 벌인 프랑스군이 헬리콥터 활용의 선구자가 되었다. 알제리 전쟁에서는 기수 장착 고정식 기관총, 로켓 포드와 유선유도 미사일로 무장한 시코르스키 S-55와 쉬드 알루엣SudAluette이 험지 상공을 비행하며 민족주의자 게릴라들과 싸웠다. 베트남 전쟁은 자연환경상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투 헬리콥터 전술의 시험대가 되었다. 1966년경 대 게릴라 전투counter-insurgency warfare용으로 사용될 헬리콥터에 대한 특별한 소요가 제기되었고 그 결과 벨Bell 휴이Huey UH-1 다목적 수송 헬리콥터 약 1,500대가 베트남 전역에 등장했다. 이 중 상당수는 무장 탑재가 가능하도록 신속히 개조되었다. 166)


처음부터 공격용으로 설계된 헬리콥터인 벨 AH-1 휴이 코브라HueyCobra는 1967년 9월에 베트남에 도착했다. 휴이 코브라는 베트남전의 사역마 보잉-버톨Boeing-VertolCH-47A 치눅Chinook 중형 수송 헬리콥터를 호위할 수 있는 빠르고 무장이 충실한 헬리콥터에 대한 미 육군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진행된 긴급 개발 프로그램의 결과물이었다. 공격력이 강하고 매우 튼튼한 코브라 헬리콥터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작전시간 100만 시간을 기록하며 적 진지와 장갑차량을 공격하고 비무장 수송 헬리콥터를 호위했다. 코브라 헬리콥터의 탑승원들은 나무, 언덕이나 건물 같은 자연적 위장망을 이용해 숨어 있다가 정찰하거나 공격할 때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전술지형비행nap of the earth’ 기법을 다듬어나갔다. 헬리콥터는 속도와 공간 측면에서 고정익기와 아주 다른 환경에서 작전했다. 이로 인해 공대공 요격에서는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었으나 지상에서 발사하는 대공포화와 로켓 공격에는 취약했다. 167)


아파치 헬리콥터는 고강도 전투 조건을 견디고 악천후에서 비행하며 주야를 막론하고 작전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아파치의 핵심 특징 중 하나는 헬멧 탑재 통합 디스플레이 조준 시스템(IHADSS)이다. 조종사 혹은 사수의 헬멧과 30밀리미터(1.2인치)M230 체인건이 연동되어 있어 머리의 움직임에 따라 체인건이 목표물의 위치를 수정ㆍ추적한다. 아파치의 주 착륙장치 사이에 M230 체인건이 있었고 작전에 맞게 무장을 변환할 수 있었는데 주로 AGM-114 헬파이어Hellfire 대전차 미사일과 하이드라Hydra 70 다목적 무유도 70밀리미터(2.75인치) 로켓탄을 함께 탑재했다. 기수 조준기에 탑재한 적외선 전방주시장치(FLIR) 시스템 덕에 아파치는 수백 마일 깊숙이 적진으로 들어가 적을 타격할 수 있었다. 이 능력은 미 공군과 공유한 극초단파UHF 무전 시스템으로 더욱 향상되었는데 이로 인해 A-10, 해리어와 같은 표적 지정기target designator로 자주 활동한 고정익기와 협동 공격을 하기가 수월해졌다. 168)


45 돌격소총 : 전후 세계의 소화기 중 가장 중요한 품목


돌격소총은 단발과 연발을 선택해 사격할 수 있는 소총 혹은 카빈소총carbine으로, 발사 탄약의 총구 에너지와 크기가 권총탄과 전통적으로 위력이 더 강한 소총탄의 중간이다. 이런 종류의 소총은 지원 역할을 맡아 지속 사격에 특화된 경기관총과 소총탄이 아닌 권총탄을 발사하는 기관단총의 중간에 속한다. 널리 실전에 투입된 첫 돌격소총은 독일제 StG44(Sturmgewehr 44, 독일어로 ‘급습’ 혹은 ‘돌격소총’이란 뜻. 1944년부터 배치)이다. 이 소총은 극한의 추위에도 분당 500∼600발의 발사속도를 유지하며 잘 작동했으며 동부전선에서 특히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훨씬 더 대량으로 생산된 드럼 탄창을 단 붉은 군대의 PPS나 PPSh-41 기관단총에 대항하는 것이 StG44의 주된 역할이었다. 가장 유명한 돌격소총인 AK-47(아브토마트 칼라시니코바Avtomat Kalashnikova 모델 1947)은 단발ㆍ연발 선택이 가능한 가스 작동식 돌격소총으로서 발명자인 소련의 무기 설계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70-1)


1959년에는 프레스 공법으로 제작한 금속제 총몸과 반동으로 총구가 솟는 현상을 상쇄하기 위한 경사형 소염기를 갖춘 경량 개량형 모델이 도입되었다. 이 모델AKM(Avtomat Kalashnikova Modernizirovanni)은 다른 모델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량이 생산되었다. 칼라슈니코프에는 1930년대 이래 소련 무기 설계의 가장 좋은 점들이 압축되어 있다. 그가 설계한 총은 단순하고 간편하며 유지 보수가 쉽고 부주의한 취급과 오염을 견디면서도 계속 작동했다. 여기에는 내부를 크롬 도금한 총열과 약실, 가스 피스톤과 가스 실린더가 도움이 되었다. 20세기에 생산된 대부분의 군용 탄약(그리고 사실상 구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군의 탄약 전부)에는 염소산칼륨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사격할 때 화약에 든 염소산칼륨이 부식성 있고 습기를 잘 흡수하는 염화칼슘으로 바뀌어서 영구적 피해를 막으려면 계속 청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군용장비 부품 다수는 크롬으로 도금되어 있다. 172)


46 제트전투기 : 새로운 전술 혁명을 촉발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몇 달 전, 루프트바페는 유럽 상공에 처음으로 제트전투기를 실전에 도입했다.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Me 262다. 하지만 제트전투기 대 제트전투기의 공중전은 한국전쟁(1950∼1953)에 와서야 벌어졌다. 더 빨라진 속력과 더 복잡해진 계기류로 인해 세심한 비행기술이 요구된 새로운 전투 조건은 새로운 종류의 조종사를 낳았다. 더욱이 제트전투기가 달성한 속력과 고도는 전면적인 전술 혁명을 촉발했다. 이로써 적기의 꼬리를 잡으려는 도그파이트dogfight는 종언을 고하는 듯했다. 막상 한국전쟁에서 전투를 치러보니 도그파이트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은 시기상조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중간 시기에 또 한 번 혁명적인 변화가 생겼다. .50구경 브라우닝 기관총은 20밀리미터(0.79인치) 기관포와 공대공미사일로 대체되었다. 미사일 유도 시스템, 전투기 탑재 레이더, 공중 재급유는 베트남 상공을 비행하던 조종사들이 공중전 생존기법과 아울러 숙지해야 할 필수사항이었다. 174)


한국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을 보인 전투기는 F-86 세이버F-86 Sabre 전투기였다. 베트남전쟁 최고의 전투기인 F-4 팬텀F-4 Phantom Ⅱ에는 조종사 1명, 레이더 관제사Radar Intercept Officer(RIO)1명이 탑승했다. 팬텀은 아군 공역에 침입한 적기와 교전하는 것이 아닌 적지 상공에서 먹잇감을 찾는 공중우세를 위해 설계된 전투기이다. 팬텀은 강력한 펄스 도플러Pulse Doppler(짧고 강한 펄스 전파를 발신해 반사신호를 도플러 효과를 이용해 분석, 목표물의 속력을 알아내는 레이더―옮긴이) 레이더를 장착하고 스패로Sparrow 미사일과 사이드와인더Sidewinder 미사일 4발로 무장했다. 초기 모델에는 기관포가 없었으나 F-4E형은 20밀리미터(0.79인치) M61 벌컨Vulcan 회전 다총신 기관포를 장비했다.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은 표적이 된 비행기가 방사하는 적외선을 따라 유도된다. 사이드와인더가 가장 효과적인 상황은 적의 꼬리를 물고 추격할 때였는데, 목표물의 배연기로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5)


47 스텔스 : 역사상 가장 비싼 군용기 B-2


독일은 1944년부터 작전에 투입된 7C형 잠수함에 구멍이 난 내층과 매끈한 외층으로 이루어진 합성고무 피복을 씌웠고 그 덕에 U-480은 연합군 소나의 탐지를 피할 수 있었다. 루프트바페 역시 원시적인 스텔스 기술을 시험했다. ‘전익기flying wing, 全翼機’ 형태를 띤 제트기인 호르텐Horten Ho. 229는 1945년 1월에 처음으로 비행했으나 실전에 투입되지는 못했다. 이 비행기의 혁신적인 설계는 전후 미국의 노스럽Northrop사가 만든 8발기인 YB-49에 반영되었고, 그 직계 후손인 B-2 스텔스 폭격기가 1989년 여름에 처음으로 비행했다. 1950년대에 철의 장막 양편의 군용기 설계자들은 레이더 반사 면적Radar Cross-Section(RCS), 즉 레이더에 나타나는 표적의 크기 단위를 줄이는 방법을 개발했다. 1964년, 록히드Lockheed사는 고공에서 작전하며 레이더 탐지를 피할 정도로 속도가 빠른 SR-71 블랙버드Blackbird 정찰기를 만들었다. 1980년대 록웰Rockwell B-1 폭격기에도 스텔스 기술의 여러 양상이 반영되었다. 178-9)


첫 스텔스 비행기는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단좌전투기로 1983년 10월에 처음으로 일선에 배치되었다. 다면으로 된 기체는 레이더 신호 반사를 목적으로 설계되었으며 애프터버너afterburner(제트 엔진의 배연을 재가열해 추력을 증대하는 장치―옮긴이) 없는 터보팬 엔진 2개가 동력원이다. 스텔스 설계로 생긴 제약 때문에 나이트호크Night Hawk는 아음속subsonic(마하 0.5∼0.8 정도의 속력―옮긴이)만 낼 수 있었다. 전투기로 분류되었으나 나이트호크는 실제로는 전투폭격기였다. 나이트호크에는 레이더가 탑재되지 않아서 단면적에서 전파 배출이 낮아졌다. 일반적 폭장량은 2,270킬로그램이었고 페이브웨이Paveway 레이저유도폭탄과 관통 폭탄 혹은 통합정밀직격병기Joint Direct Attack Munition(JDAM) 2발과 원거리 투하 유도폭탄 1발로 구성되었다. 제1차 걸프전쟁 동안 나이트호크는 걸프 전역에 있는 미군기 수의 2.5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미 공군의 전략목표 40퍼센트 이상을 타격했다. 179-80)


노스럽 그러먼 B-2 스피릿B-2 Spirit은 적 방공망을 깊숙이 뚫고 들어가 통상무기와 핵무기를 투하 발사하기 위해 설계된 스텔스 중폭격기다. B-2는 음향, 적외선, 시각, 레이더 피탐지 특성이 줄어들어 스텔스성을 얻었다. 애프터버너 없는 터보팬 엔진 4개는 배연 피탐지 특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날개에 푹 파묻혀 있다. 레이더파를 흡수하는 복합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전익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리딩 에지leading edge(날개 앞부분 끝단―옮긴이)가 줄어든 B-2의 윤곽선을 레이더로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B-2는 1997년 1월에 작전 능력을 획득해 2년 뒤에 코소보 전쟁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나와 분쟁 첫 두 달 동안 선정된 세르비아군 목표물의 3분의 1을 폭격했다. B-2는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주리주 화이트먼Whiteman 기지까지 왕복 비행했다. B-2는 항구적 자유 작전에서 공중급유 지원을 받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목표물 폭격 임무를 달성하면서 가장 긴 비행거리를 기록한 작전 하나를 수행했다. 180)


48 크루즈 미사일 : 자체의 힘으로 날아가는 미사일


1947년 5월, 미 공군은 B-29, B-36 피스메이커Peacemaker와 B-52 스트래토포트리스Stratofortress에서 발사할 수 있는 초음속 지대공 미사일 제작 계약을 벨 항공기 회사Bell Aircraft Company와 체결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GAM-63 래스컬Rascal 미사일이었다. 래스컬은 이 미사일의 유도 시스템인 레이더RAdar 스캐닝SCAnning 링크Link의 약어이다. 래스컬은 1957년에야 미 공군이 도입해 일선에 배치했다. 이 미사일은 액체연료 로켓 시스템으로 추진되었고 표적의 위치가 미리 프로그램된 관성 유도 시스템을 사용했다. 래스컬은 1961년에 하운드 독HoundDog 미사일로 대체되었다. 이 미사일에는 최신 TERCOM(지형대조항법terrain–contour matching) 유도 시스템이 실렸다. 이 시스템은 미사일에 비행경로의 상세한 지도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운드 독 미사일은 지나가는 지상의 모습을 이 지도와 계속 대조해 가며 필요하다면 진로를 수정하며 사전 지정된 경로를 유지했다. 182-3)


토마호크는 1970년대에 개발된 장거리, 전천후 아음속 미사일로 현재 미국과 영국 해군 수상 함정 및 잠수함에 탑재되어 있다. 토마호크는 로켓 보조를 받아 발사된 다음 터보팬 엔진으로 동력을 전환한다. 토마호크의 엔진은 거의 열을 발산하지 않아서 적외선 탐지기로 발견하기가 어렵다. 토마호크는 목표물까지 최대 항속거리 1,126킬로미터를 초저공에서 고아음속으로 ‘순항’하며 임무에 따라 맞춰진 여러 개의 유도 시스템으로 회피 경로를 따라 조종된다. 토마호크 지상 공격 미사일(TLAM)은 TV 카메라를 장착하고 목표 주변을 배회할 수 있으며, 지휘관들은 목표물에 입힌 피해 정도를 평가하고 필요한 경우 다른 목표로 미사일을 보낼 수 있다. 비행하는 동안 토마호크는 메모리에 있는 GPS(전 지구 위치파악 위성global positioning satelite) 좌표나 다른 어떤 GPS 좌표로 사전에 지정한 목표 15개 중 어느 것으로든 다시 프로그램해서 목표물을 바꿀 수 있다. 183-4)


49 무인 공중전 : 미래의 군용기 UCAV


1980년대에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방부는 처음에 ‘냇Gnat’이라고 부른 정찰용 드론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1994년 7월, 제너럴 어토믹스 에어로노티컬 시스템사가 프레데터Predator UAV(unmanned aerial vehicles)의 제작 계약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 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발칸 반도에 처음으로 프레데터 UAV를 배치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이 개시된 2001년경에 미 공군은 프레데터 60기를 획득했다. 그중 20기를 작전 중에 상실했는데 대부분 악천후가 원인이었다. 그 후 제빙 시스템과 항공 전자 장비를 개량했다. 발칸 작전 이후 프레데터는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하는 공격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프레데터가 정숙성이 뛰어나고 헬파이어가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미사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강력한 결합이었다. 처음에는 프레데터를 운용기지 근처에 세워둔 밴에서 조종했으나 2000년경 통신 시스템 개선으로 아주 먼 거리에서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185)


MQ-9 리퍼는 고공에서 장시간 체공하며 정찰 임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된 첫 헌터 킬러hunter-killer UCAV다. 탑재한 950마력 터보프롭 엔진은 프레데터의 엔진보다 출력이 강하며 이로 인해 열다섯 배 더 무거운 중량을 탑재할 수 있고 순항속력은 세 배 빨라졌다. 완전 전비중량으로 비행할 때 리퍼는 14시간까지 체공할 수 있으며 탑재 무장을 줄이고 증가 연료탱크를 장착하면 42시간까지 체공시간을 늘릴 수 있다. 리퍼에는 헬파이어 미사일, 225킬로그램 레이저 유도 폭탄과 통합정밀직격병기JDAM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무장을 탑재할 수 있다. 리퍼에 탑재된 유도장비는 ‘멍텅구리’ 무유도 폭탄을 전천후 ‘스마트’ 폭탄으로 바꿀 수 있다. 리퍼 운용원은 열 카메라를 비롯한 여러 센서를 이용해 목표물을 수색하며 지형을 관측할 수 있다. 리퍼에 탑재된 카메라는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자동차 번호판을 읽을 수 있다. 운용원이 내린 명령은 위성 링크를 거쳐 몇 분의 1초 만에 리퍼에 전달된다. 186)


50 사이버 전쟁 : 전쟁의 다섯 번째 영역


최초의 사이버 전쟁으로 자주 인용되는 사건은 2001년 4월에 미군 EP-3 아리에스 ⅡAries II 스파이 비행기가 남중국해에서 중국 전투기와 충돌한 다음 벌어졌다. 사건 후 몇 주 동안 중국과 미국에 있는 수천 개의 웹사이트가 변조되거나 해커의 공격을 받았다. 사이버 전쟁은 2006년에 이스라엘이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를 처치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 국방군IDF 정보부는 허위 정보 전술을 이용해 헤즈볼라의 지원을 받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을 무력화하고 헤즈볼라 웹사이트에 서비스 거부 공격을 벌였다. 2007년에는 논란거리가 된 전쟁기념물인 탈린의 청동병사Bronze Soldier of Tallinn를 이전한 후 에스토니아가 러시아로부터 사이버 공격을 받았다. 에스토니아 정부 부처, 은행과 언론매체가 주요 공격목표였다. 2008년 8월, 단기간 지속된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공습 및 병력 이동과 동시에 구 소련 국가인 조지아에 사이버 공격을 개시했다. 189)


안전하지 않은 인터넷 연결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으로 인해 e-공격이 들어올 경로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Malicious software(악의적 소프트웨어)’의 약어인 멀웨어Malware는 목표 컴퓨터 시스템을 파괴 또는 방해하거나 정보 수집을 위해 침투하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스턱스넷Stuxnet 웜은 특정 산업 시스템을 감시하고 전복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복잡한 멀웨어로, 산탄총이라기보다 저격소총처럼 작동한다. 2009∼2010년에 스턱스넷의 주된 목표는 이란의 나탄즈Natanz에 있는 우라늄 농축 공장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민간 에너지용 프로그램이었지만 결국 핵무기 개발의 전주곡이 아니냐고 의심받았다. 감염된 메모리 스틱을 통해 침투한 것으로 추정되는 스턱스넷은 나탄즈 공장의 원심분리기 속도를 바꿨고, 결국 원심분리기 약 1, 000대가 철거 후 제거되었다. 스턱스넷은 이란 핵 개발을 2, 3년 후퇴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이 공격의 배후에는 미국의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 정보부가 있었다.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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