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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계사를 바꾼 50가지 전쟁 기술 - 고대 전차부터 무인기까지, 신무기와 전술로 들여다본 승패의 역사
로빈 크로스 지음, 이승훈 옮김 / 아날로그 / 2024년 4월
평점 :
Chapter 1. 고대 세계의 군사 제국들
01 전차 : 고대 세계의 탱크
기원전 2000년대 초의 몇 세기에는 전술 부문에서 주목할 만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나무를 구부리는 공법이 개발되어 살이 있는 바퀴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전차 무게가 더 가벼워졌다. 또 합성궁composite bow이 개발되어 빠르게 움직이는 전차에서 발사체를 더 빨리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전차 제작, 말의 사육과 관리, 전차 몰이꾼과 전사를 훈련하는 데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 대규모 병참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야전에서 다수의 전차대를 유지하려면 군대는 상당한 수의 바퀴 제조자, 전차 제작자, 활 제작자, 대장장이와 병기 제작자가 필요했다. 적 보병대 사이로 돌입해 대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전차의 임무였다. 전황이 뒤바뀌면 전차는 적의 추격을 맡았다. 전차대 운용은 한 나라의 군사력을 대변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강대국―이집트와 지금의 중부 튀르키예에 있는 히타이트Hittite, 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아시리아Assyria―은 모두 전차를 운용한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10-1)
기원전 첫 1000년대 중반, 페르시아인들은 낫이 달린 바퀴로 전차 운용 기법을 개선했다. 그리스의 군인이자 역사가인 크세노폰(기원전 425∼335년경)은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기원전 530년경 사망)이 낫이 달린 전차를 도입했다고 썼으나 4세기의 역사가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이보다 더 일찍 도입되었다고 한다. 인도 사료에 따르면 아자타샤트루Ajatashatru왕(기원전 494∼467) 치세의 마우리아 제국이 브리지 연맹에 대한 원정에서 낫이 달린 전차를 사용했다고 한다. 소小 키루스Cyrus the Younger(다리우스 2세Darius II의 아들로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기원전 401년경에 전사했다.―옮긴이)는 전차를 대량으로 운용했다. 그러나 전차가 전장에서 활약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기원전 331년의 가우가멜라Gaugamela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페르시아 전차가 제멋대로 달려 지나가도록 대열을 열어준 후 뒤쪽에서 공격했다. 12)
02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적 보병
마케도니아군의 중핵은 보병으로 구성된 팔랑크스였다.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의 힘은 상당 부분 팔랑크스의 끈질김과 신뢰성에 기인했다.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 혹은 ‘발의 동반자’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필리포스가 확실하다. 이들이 이렇게 불린 이유는 왕의 친위대인 귀족 위주의 ‘동반자hetairoi’ 기병대에 대응하는 전술적, 정치적 평형추로서 왕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1만 2,000명과 기병 1,500명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보병 9,000명은 출신지에 기반한 ‘발의 동반자’ 1,500명으로 구성된 병단taxeis으로 조직되었다. 나머지 3,000명은 ‘방패 병단hypaspists’이라는 엘리트 근위대를 이뤘다. 발의 동반자 병단과 방패 병단은 마케도니아군 전열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기병대는 양 측면에 배치되었다. 전자는 기병대와 제대梯隊를 이루어 기동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발의 동반자 병단은 적의 대열에 충격을 주어 분쇄하는 역할에 사용되었다. 분쇄된 적은 팔랑크스가 밀어붙였다. 14)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의 주무기는 사리사sarissa(길이 6.3미터, 무게는 8킬로그램)라는 긴 양손잡이용 창이었다. 전술 단위로 팔랑크스에서 가장 작은 전투부대는 256명으로 이루어진 스페이라speira로, 16명씩 오와 열을 지어 밀집대형을 펼쳤다. 팔랑크스대 첫 5열의 병사들은 단단한 밀집 공격대형을 짠 채 자기가 든 사리사를 앞줄의 병사 어깨 너머로 뻗도록 훈련받았다. 제일 앞줄의 병사들은 자신의 사리사를 적을 향해 수평으로 들었는데 창의 길이가 4미터에 달했다. 제일 앞줄 1미터 뒤에 선 두 번째 줄의 병사들은 사리사를 들어 앞줄 너머 3미터 앞까지 뻗었다. 세 번째 줄은 사리사를 더 높은 각도로 들었고 네 번째 줄은 그보다 더 높이 들었다. 다섯 번째 줄의 병사들은 날아오는 적 발사체의 위력을 분산하기 위해 사리사를 하늘을 향해 세우는 동시에 돌격하는 부대의 타격력에 무게를 더했다. 팔랑크스병들은 사리사를 다루기 위해 무거운 동체 갑옷을 벗고 가벼운 가죽제 흉갑과 투구, 각반을 착용했다. 14-5)
03 헬레폴리스 : 움직이는 거대한 공성탑
거대한 공성병기의 달인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세테스Demetrius Poliorcetes(‘포위자’, 기원전 337∼283)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툰 장수 중 한 명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사용한 혁신적 기술 중 다수를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세테스가 로도스섬 포위전에서 사용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철두철미하게 일하는 사람이었고 공성전은 고대 세계의 전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쟁 양식이 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306년에 벌어진 키프로스에 있는 살라미스Salamis 공성전에서 거대한 공성탑을 세웠다. 약 40미터 높이에 기단의 한 변 길이가 20미터에 이른 첫 헬레폴리스 공성탑은 거대한 통짜 바퀴 4개 위에 얹혀 이동했다. 탑 내부는 발사 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낮은 층에는 80킬로그램까지 나가는 발사체를 투척할 수 있는 중투석기가 있었고, 가운데 층에는 무거운 화살을 발사하는 쇠뇌가 있었다. 꼭대기에는 경량 투석기와 궁수들이 있었다. 내부에서는 200명이 공성탑을 운용했다. 17-8)
04 삼단노선 : 지중해를 누비던 주요 전투함
기원전 6세기 언젠가, 이단노선의 노잡이석에 세 번째 단이 추가되어 삼단노선이 탄생했다. 해양 군사 활동에 대한 아테네의 어떤 기록을 보면 노의 길이는 4∼4.5미터였던 것 같다. 삼단노선은 사실상 방어시설이 없었고 갑판 양현에는 난간이 없었다. 아마 도선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삼단노선은 순항을 위해 돛을 가지고 다녔고, 순풍이 부는 상황에서는 노를 젓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돛을 펴면 전투 중에는 지그재그로 항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면 취약한 배의 현측이나 선미를 적에게 노출하게 되므로 전투 전에 돛을 내리거나 아예 육지에 남겨두었다. 삼단노선의 승조원은 200명이었고 그중 170명은 노잡이였다. 노잡이는 하류층에서 모집했으나 노예는 아니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의 삼단노선에는 중무장한 전투원과 궁수 몇 명이 탑승했다. 피리 주자 한 명도 탑승해 노잡이들에게 피리를 불어 시간을 알려주었다. 20-1)
충각ramming 전술은 삼단노선이 사용한 기본 전술이다. 충각은 삼단노선의 강화된 선수 밑에 튀어나온 금속판을 덮은 ‘부리’다. 삼단노선의 지휘관인 트리에르아크trierarch는 자신의 기량을 총동원해 정면충돌하려는 듯 돌진하다가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적에게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노를 뻗어 적선의 옆을 긁으며 노를 부순다. 적의 갤리선은 뱅뱅 돌며 사용 불능 상태가 되고, 승자는 불구가 된 적선을 뒤에서 충각으로 들이받는다. 손상된 삼단노선의 승조원들이 배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을 운명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적이 충각을 빼내기 전에 적선으로 옮겨 타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함대 역시 삼단노선이었다. 결코 뛰어난 뱃사람이 아니었던 로마인들은 끝에 큰 스파이크가 달린 거대한 건널판(코부스Covus)의 도움을 받아 해전을 대규모 도선전투渡船戰鬪로 바꾸려 했다. 코부스는 배와 적선을 단단히 붙들어둘 수 있었으나 자칫하면 사용자의 배가 뒤집히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22)
05 로마군단 : 대적할 자 없던 무적의 군단
기원전 4세기 로마인들은 팔랑크스 대형보다 더 유연한 마니풀루스Manipulus(로마군단의 최소단위 부대로 60∼120명 규모―옮긴이) 위주의 대형에 의존하게 되었다. 군단은 30개의 마니풀루스로 나뉘었는데 모두 중장보병인 하스타티hastati, 프린키페스principes, 트리아리이triarii(젊은 신참병, 장년의 경험 있는 고참, 전투 경험이 많은 최고참―옮긴이)로 구성된 대대가 각 10개씩 있었다. 마니풀루스마다 경무장 척후병(벨리테스velites) 40명이 배속되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로 구성된 마니풀루스는 짧은 찌르기용 칼(글라디우스gladius), 장방형 방패(스쿠툼scutum), 무거운 투창(필라pila) 2개로 무장한 12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트리아리이 역시 비슷하게 무장했으나 찌르기용 창(하스타hasta)을 휴대했다. 기병대는 10개의 투르마turma(로마의 기병부대 단위, 복수는 투르마에Turmae―옮긴이)로 구성되었으며 창과 원형 방패로 무장했다. 이때 군단병들은 로마 시민이자 재산 소유자여야 했다. 23)
마니풀루스로 구성된 군단은 카르타고와 치른 두 번의 전쟁(기원전 264∼241, 218∼201)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갔다. 줄어드는 인구를 비롯해 가중된 압박으로 인해 군단은 6년간 복무하는 아마추어 민병대에서 직업인으로서 장기 복무하는 자원병으로 구성된 군대로 탈바꿈했다. 오랜 구상을 거쳐 실행된 이 과정은 기원전 107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Marius(기원전 157∼86)가 도입한 개혁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제 군단은 30개의 마니풀루스가 아니라 10개의 코호르스cohors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코호르스는 각각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이로 이루어진 마니풀루스 3개와 벨리테스로 구성되었고 총원은 400명이었다. 그 결과 부대는 독립적 전투가 가능해졌다. 최선임 백인대장인 프리무스 필루스Primus Pilus(첫 번째 창이라는 뜻―옮긴이)는 군단이 전투에 나서면 가장 경험 많은 병사로 구성된 제1대대 제1백인대百人隊, centuria를 지휘했다. 24)
06 야전에서의 로마군단 : 완고하고 결연하게 규율을 지키다
군대의 선두에서는 정찰부대인 경보병과 기병대가 매복 징후를 찾는다. 본대의 선봉은 군단에서 온 1개 부대, 기병대에서 온 1개 부대로 구성되었다. 그다음 각 백인대에서 10명씩 차출된 인원으로 구성된 숙영지 측량대가 왔다. 측량대 뒤에는 공병대가 따라왔다. 그다음에는 강력한 기병대의 호위를 받는 군단장과 참모진의 짐을 실은 대열이 따라왔다. 그 뒤에는 보조기병대와 보병대에서 뽑은 경호대를 거느린 군단장이었다. 행군의 다음 순서는 군단 소속 기병대 120명이었고 이들 뒤를 분해한 공성기, 공성탑, 파성퇴, 투석기를 운반하는 노새 대열이 따랐다. 정예병들의 호위를 받는 군단의 고위 장교들과 군단 본대가 다음이었다. 군단은 나팔수와 기수들의 뒤를 따라 행군했다. 각 군단의 뒤를 보급 마차 대열이 따랐다. 군단 뒤에는 자신들의 기수를 앞세운 보조병 부대가 왔다. 행군 대열의 마지막 부대는 경·중보병과 보조기병대로 구성된 후위대였다. 군단과 얼마 거리를 두지 않고 비전투 종군자들이 따라왔다. 27-8)
행군이 끝날 무렵, 트리부누스tribunus(현대의 대대장급 장교―옮긴이) 한 명과 측량부대가 선발대로 파견되어 숙영지를 설치할 곳을 골랐다. 적과 이미 접촉했을 때는 수원지와 가깝고 적대세력으로부터 4킬로미터 떨어진 장소를 고르는 것이 중요했다. 이상적인 후보지는 솟아오른 탁 트인 평원에 있고 적이 숨을 만한 데가 없는 곳이었다. 2개 군단이 이용하는 숙영지의 면적은 약 700제곱미터였고 측량부대가 세심하게 구획했다. 행군 숙영지 주변에는 대개 깊은 해자를 팠고, 파낸 흙은 보루를 쌓는 데 사용했다. 적과 가까운 곳에 숙영지를 구축할 때에는 기병대, 경보병대, 중보병대 절반은 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해자 앞쪽에 배치했다. 완공된 행군 숙영지 가운데를 비아 프린키팔리스via principalis라고 불린 대로가 관통했으며 이 도로는 집정관의 막사 앞까지 이어졌다. 영구적으로 지은 요새처럼 숙영지 구역은 격자로 나뉜 구조였고 군단의 각 부대는 자기 구역을 배당받았다. 28-9)
07 로마군의 공성전 기법 : 도시를 봉쇄해 구원군을 차단하다
세부 내용이 정확히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공성전은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62년에 벌어진 카르타고령 시칠리아의 아그리겐툼Agrigentum(아그리젠토Agrigento) 포위다. 로마군은 아그리겐툼 주위로 두 개의 숙영지를 잇는 두 개의 벽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이중벽bicircumvallation으로 알려진 시스템이다. 두 벽 중 내벽은 포위된 도시를 봉쇄하고, 외벽은 적 구원군을 차단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성벽 사이에는 너비 수백 미터에 이르는 넓은 가도가 있어 이중성벽 어디로라도 병력을 재빨리 이동시킬 수 있었다. 요새와 전방초소는 외벽과 내벽을 따라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되었다. 적 구원군의 개입을 막는 것만큼 포위된 도시의 굶주림을 가속화하는 것도 중요했다. 카르타고 구원군이 도착했고, 전투를 시도한 아그리겐툼 방어군이 패하자 이중포위가 벌어졌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관련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2년에 중부 갈리아의 알레시아Alesia에서 벌인 포위전에 관한 기술이다. 30)
Chapter 2. 중세 전쟁
08 중기병과 사슬 갑옷 : 가볍고 유연하면서도 튼튼한 갑옷
중세 군대에서 기수가 확실하게 기여한 바는 바로 기동성이다. 군사작전에서 습격이 회전會戰보다 훨씬 중요했던 시대에 정찰과 토벌 임무를 위해 빠르게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던 기수의 역할은 매우 귀중했다. 프랑크의 왕이자 서쪽 황제 샤를마뉴Charlesmagne(747∼814)는 가공할 위력의 기병대를 전장에 전개했다. 그런데도 50년간의 군사행동에서 회전은 단 두 번, 모두 783년에 벌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카우치드 방식으로 기병창을 잡는 모습(겨드랑이에 끼우고 손으로 꼭 잡는 기병창)은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1080년경)에서 볼 수 있다. 이 태피스트리는 보병에게 돌격하는 기병을 보여주는 유일한 중세 회화자료다.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1066)에서 노르만 기병이 반복해서 돌격했으나 색슨군의 방패 벽을 돌파하지 못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전투 마지막 단계에서 색슨군 전열이 붕괴하고 나서야 노르만 기사들은 흩어진 색슨 보병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35)
사슬 갑옷은 날이 있는 무기로 하는 베기 공격과 뾰족한 무기로 하는 찌르기 공격 방어에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검으로 정확히 수직 각도로 표면을 타격하면 연결된 고리를 벨 수 있었다. 사슬을 리벳으로 접합하지 않은 경우에는 창으로 정확히 겨누거나 얇은 칼로 찌르면 갑옷이 뚫릴 수 있었다. 사슬 갑옷은 폴액스poleaxe(긴 자루에 달린 도끼―옮긴이)나 핼버드halbard(미늘창이라고도 함. 도끼와 창을 한데 합친 무기―옮긴이)같이 타박상이나 골절상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타격병기로부터도 착용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사슬 갑옷은 철퇴나 전투망치에 맞아 생기는 외상도 막지 못했다. 결국 착용자는 단단한 투구를 사슬로 만든 코이프coif(머리가리개―옮긴이) 위에 써야 했다. 14세기경에는 판갑이 쇠뇌 화살, 타격용 무기, 창으로 찌르기에 대해 사슬 갑옷보다 방어력이 좋았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 장궁longbow과 핼버드로 무장한 기율이 잘 잡힌 보병은 말탄 기사의 맞수가 되기에 충분함을 입증했다. 36-7)
09 바이킹 롱십 :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병력 수송선
전쟁에서 사용된 롱십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가장 작은 배인 스네키아snekkja(‘가늘고 튀어나온 것’)는 길이 17미터에 폭 2.5미터였다. 이 배의 승조원은 41명(노잡이 40명, 조타수 1명)이었다.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은 1066년의 잉글랜드 침공에서 롱십 600척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가장 큰 롱십 중 하나는 스케이skei(‘물을 가르고 나가는 것’)로, 길이는 30미터에 조금 못 미치고 승조원은 최대 80명이었다. 이보다 더 긴 롱십도 존재했다. 노르웨이의 이교도를 내리치는 기독교의 망치라 불렸던 올라프 트뤼그바손Olaf Tryggvason(재위 960∼1000) 왕이 만든 롱십은 길이가 거의 46미터에 이르렀다.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설계, 구조, 자재가 잘 결합된 완벽한 습격용 기계이자 태생적으로 항해 안정성이 뛰어나고 흘수선이 얕아 어느 해안에나 상륙할 수 있으며 유럽에 있는 강들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진 양날검과도 같은 함선이라는 점이다. 39)
돛이 도입되면서 롱십 건조에 새 시기가 열렸다. 양모로 만든 돛에 가죽 띠를 덧대 강화했는데, 이는 돛이 젖었을 때 형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용골이 더 깊어졌고 선폭이 더 넓어졌으며 건현이 더 높아졌다. 해안에 접근할 때나 강에서 항해할 때는 노를 이용했다. 항해에 유리한 조건에서 롱십은 11노트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물과 고물에 있는 무서운 동물의 머리는 롱십이 육지로 다가갈 때만 부착해서 거친 풍랑을 만났을 때 파손되는 사태를 피했다. 양현에 방패를 가득 달고 항해 중인 롱십의 묘사는 실제와 맞지 않는다. 방패는 바다에 빠뜨려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물건이었다. 조타는 우현에 부착된 노 하나가 맡았다. 12세기와 13세기에 건현이 더 높은 한자동맹식 코그Hanseatic Cog가 개발되면서 롱십의 시대는 끝나갔다. 코그선은 다음 세대에 등장할 범선의 시조다. 습격을 위해 설계된 롱십은 요새화된 항구도시와 진보한 해상전투의 시대를 맞아 경쟁력을 잃었다. 40-1)
10 방패벽 :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만드는 벽
1066년 1월에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색슨 왕 해럴드 고드윈슨은 그해 두 전선에서 전쟁을 치렀다. 9월 25일에 그는 동생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가 이끄는 침공군을 요크셔의 이스트라이딩에 있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쳤다. 고드윈슨은 승리를 거두자마자 발걸음을 돌려 남쪽으로 행군해 또 다른 왕위 주장자와 대결했다. 9월 27∼28일에 군대를 거느리고 페븐시에 상륙한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이었다. 윌리엄은 내륙으로 진격해 헤이스팅스Hastings에 도달해 10월 14일 아침에 해럴드 왕이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다. 색슨군은 대개 방패벽 뒤에서 보병으로 싸웠다. 방패벽은 역사가 오래된 전술로서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스군이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로마군도 사용했다. 로마 군단병들은 이 진형을 테스투도testudo(거북이)라고 불렀다. 이 진형에서 가장 앞줄은 방패를 수직으로 들고 그 뒤의 병사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적이 던지는 투사체가 뚫을 수 없는 방벽을 만들었다. 43)
초기 중세시대의 북유럽에서도 방패벽은 익숙한 방어 전술로 남아 있었다. 특히 반 직업군인인 병사들로 대열을 전개할 때 사용되었다. 이 전술의 약점은 대열이 한 번 뚫리거나 흩어지면 방어군이 기병의 공격에 취약해진다는 것이었다.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는 캘드벡 힐이라는 경사가 급한 능선에 최적의 방어 위치를 잡고 측면 방어에도 만전을 기했다. 윌리엄이 잉글랜드 정복을 원한다면 공격해야 했다. 노르만군 좌익이 후퇴하면서 패배할 위험에 처했다. 위기의 순간, 윌리엄은 부하들을 독려해 다시 재집결시켰고 결정적으로 전술을 바꿨다. 기병대 돌격을 막아낸 후 지친 색슨군은 노르만군이 후퇴를 가장하자 여기에 속아 방패벽을 포기하고 추격에 나섰다. 이제 취약한 상태가 된 색슨군은 노르만 기병을 상대로 그 대가를 치렀다. 날이 저물 무렵 3,000명 규모의 후스카를housecarls 친위대와 함께 전열 한가운데에 있던 해럴드 왕은 얼굴에 화살을 맞았고 일단의 노르만 기사의 칼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43-4)
11 성 : 성을 짓는 다양한 방법
앵글로색슨인의 잉글랜드에서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노르만인은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잉글랜드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노르만인은 목재와 흙으로 빠르게 축성할 수 있는 ‘모트 앤드 베일리’식 성을 선호했다. 앙주의 풀크 네라가 992년에 랑제Langeais에 지은 탑처럼 돌로 만든 성은 짓는 데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고, 잉글랜드에서는 12세기에 들어서야 모트 앤드 베일리식 성이 석성Stone Castle, 石城으로 대체되었다. 노르만 지배를 돌로 장중하게 웅변하는 듯한 런던의 화이트 타워White Tower(런던탑이라고도 불린다―옮긴이)는 1100년에 준공되었다. 노퍽Norfolk의 라이징성CastleRising은 1138년에 완성되었는데 층마다 기능이 다른 아성tower keep, 牙城(성 안에 지어진 요새화된 탑으로 성이 함락될 경우 최후의 거점으로 삼았다―옮긴이)의 훌륭한 예시다. 점점 더 복잡해진 축성술은 한 성안에 또 다른 성이 있는 동심원성concentric castle, 同心圓城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45)
흑색화약을 쓰는 포병이 등장하기 전, 성은 보급 기지와 패배할 경우의 피신처 혹은 습격이나 원정의 도약대로 기능했다. 적의 영토 안이나 국경 근처에 성을 구축하는 것은 적대적 의도를 표명하는 행동이었다. 더욱이 성의 수비대는 병참선을 위협할 수 있었다. 시리아의 홈스Homs시에서 약 4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크락 데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는 십자군의 의도를 빼어난 형태로 표현한 중세 최고의 동심원성 중 하나다. 남쪽면의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성 밖에서 들어오는 수로교aqueduct로 물을 대는 대형 개방식 저수조가 있었다. 동쪽 내벽을 통해 들어오는 성의 입구는 방어시설로 보호되었으며 입구에 도달하려면 유턴을 두 번 해야 했다. 이때 공격자들은 위쪽의 숨겨진 화살구멍arrowloop을 통해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각종 공격물에 노출되었다. 가장 취약한 남측면의 성 내벽 두께는 30미터였다. 이 측면의 아랫부분은 경사 사면으로 보강되었고 직경 9미터의 방어탑 7개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46-7)
12 중세의 공성전 : 성을 함락하는 다양한 방법
1216년 10월, 반기를 든 귀족들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로체스터성을 점령했다. 존 왕은 친히 공성전을 감독했다. 첫 전투에 투입된 공성기 5대는 외성에 이빨 자국도 내지 못했다. 성 외벽이 돌파되고 수비 병력이 아성으로 철수하자 존 왕은 갱도 굴착으로 공격 방법을 전환했다. 아성 한 모퉁이가 무너졌지만 수비대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기 전까지 성을 지켰다. 포위전에서는 도시 외벽에 총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대개 공성기를 이용해 투사체投射體를 발사했다. 망고넬mangonel(만가논manganon, 즉 ‘전쟁 기계’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알려진 이 캐터펄트식 공성기는 적의 진지에 투사체를 던져넣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망고넬을 사용해 바위나 인화성 물질 또는 생물전의 초기 형태로 썩은 시체나 동물의 사체를 적진으로 쏘아 던졌다. 12세기경에 아랍인들과 접촉하면서 십자군은 가공할 만한 무기 트레뷰셋trebuche을 개발했다. 13세기에 들어오자 트레뷰셋은 가장 중요한 공성병기가 되었다. 49-50)
나무 기단에 단단히 설치한 A 모양의 뼈대 두 개로 이루어진 트레뷰셋은 평형추를 들어 올렸을 때 생성되는 에너지를 사용해 투사체를 던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A 모양의 뼈대 위쪽 끝 사이에는 발사체를 던지는 지렛대arm가 회전축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렛대의 약 8분의 1은 회전축 앞에 있었고 나머지는 뒤에 있었다. 무거운 평형추(큰 돌을 채운 상자)는 지렛대의 짧은 쪽 끝에 매달려 있었다. 사용자는 다른 쪽 끝에 부착된 밧줄과 도르래 장치를 이용해 윈치로 지렛대를 아래로 당겨 평형추를 위로 올렸다. 지렛대 끝이 투사체를 실을 수 있게 수저 모양인 것도 있었으나 대개 슬링의 원리를 이용했다. 지렛대 끝을 빠르게 수직으로 끌어올리면 슬링 한쪽 끝이 열려 발사체가 투척되는 형태였다. 트레뷰셋으로 죽은 말과 시체를 비롯한 대형 투사체를 상당히 먼 거리에서 발사해 포위된 도시와 마을 벽 안으로 던져넣을 수 있었다. 트레뷰셋의 가장 큰 단점은 너무 크고 기동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50-1)
13 도검 : 전장의 필수 무기
도검은 단검에서 진화한 검으로 청동기시대에 개발되었다. 기원전 15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첫 청동제 도검은 칼자루와 칼날을 별도로 제작하고 리벳으로 결합했다. 이런 종류의 무기는 찌르기 용도로는 효과적이었지만 너무 세게 베면 부서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로부터 500년 뒤, 날과 자루를 하나로 주조한 전형적인 형태의 청동기시대 도검이 등장했다. 자루의 날을 연결하는 슴베 부분에서 폭이 넓어졌다가 완만하게 좁아지며, 날 전체 길이의 3분의 2 부분에서 급격히 좁아져 올라가 뾰족한 칼 끝부분을 완성한다. 이로 인해 자르기와 찌르기 모두에 유용한 무기가 탄생했다. 철검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동에서는 휜 날이 인기를 끈 반면 로마 군단병들은 짧고 폭이 넓은 글라디우스 검을 사용했다. 이 검은 오른쪽에 차고 오른손으로 뽑을 수 있었으며 근접전에서 유리했다. 그 뒤로 몇 세기가 흐르면서 도검은 신화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일급의 검을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든 점이 이유일 것이다. 53-4)
13세기부터 갑옷이 발전함에 따라 도검도 변화했다. 한 손으로 쓰는 베기용 검은 금속판에 튕겨 나갔기 때문에 검을 더 날씬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갑옷의 취약한 부분을 찾아 공격하고자 했다. 칼자루는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확장되고 더 길어졌다. 길고 무거운 검으로 공격하면 갑옷을 입은 적이 균형을 잃게 되어 다른 형태의 공격에도 취약해지므로 큰 피해를 줄 확률이 커졌다. 16세기에 들어 갑옷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어 검을 쓰는 사람의 손을 갑옷 장갑으로 가릴 수 없게 되자 손을 보호하기 위해 칼자루와 코등이quillons(칼자루와 칼날 사이에 있는 보호용 날개)가 더욱 복잡해졌다. 레이피어(민간용 무기)를 사용하는 펜싱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변화를 촉진했다. 보병 부문에서 검은 화기로 대체되었으나 기병대는 계속 도검을 사용했다. 19세기에도 기병창과 검은 기병대가 가장 선호하는 무기였다. 기병도는 똑바로 뻗은 날에서 헝가리 후사르Hussar 기병이 도입한 구부러진 세이버sabre로 바뀌었다. 54-5)
14 장궁 : 철판 갑옷도 꿰뚫은 백년전쟁 핵심 무기
에드워드 1세(재위 기간 1272∼1307)는 자신의 군대에 웨일스 궁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웨일스 궁수들이 휴대한 활은 길이가 약 1.8미터에 이르렀다. 나무를 말리고 구부려서 모양을 잡아 활을 만드는 데 최대 4년이 걸렸으며, 그 후 방수 왁스, 수지, 정제 지방을 바른 다음 삼이나 아마 또는 비단으로 만든 시위를 부착했다. 중세 유럽에서 사용한 갑옷의 질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장궁으로 쏜 화살로 갑옷을 뚫으려면 큰 힘이 필요했다. 전투 사격에서 유효성을 유지하기 위해 궁수는 장기간 훈련을 거쳤다. 에드워드 1세는 일요일에 활쏘기 연습 이외에 모든 스포츠를 금지했다. 중세 시대 활의 정확한 사거리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헨리 8세가 모든 사격장의 길이는 최소 220야드(200미터)여야 한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다. 정확한 사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약 200야드(183미터)까지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전투 개시 단계에 벌어진 수평 일제사격에서 화살이 250야드(228미터) 거리를 날아갔다. 56)
15 초기의 화포 : 의미 있지만 결정력은 없었던 중세 무기
초기의 대포는 거칠게 사각형으로 깎은 재목에 얹혀 적을 향해 놓인 다음 발사되었다. 이 단계에는 대포가 병사들의 사기에 미치는 효과가 물질적 피해보다 더 중요했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 포위전(1346)에서 대포를 사용했으나 도시는 대포가 아니라 기아 때문에 항복했다. 갓 태어난 포병대는 처음에 교회로부터 마법과 유사한 짓을 한다고 낙인찍혔다. 실제로 당시의 대포는 목표물에도 사용자에게도 위험한 물건이었다. 훈련받는 포수들은 포 주변에 흩어진 화약을 쿵쿵 밟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불안정한 화약이 점화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발사체로 화살을 사용했지만 15세기경에는 철포탄을 사용했고, 나중에 가벼운 돌포탄으로 대체했다. 돌포탄은 더 저렴했고 가벼운 구조물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명중했을 때의 충격으로 부서지면 더 효과적인 인명 살상 무기가 되었다. ‘사문석 화약serpentine powder’이라고 알려진 흑색 화약은 15세기 초에 상당히 개선되었다. 60-1)
프랑스에서 불안정한 화약의 해결 방안이 등장했다. 바로 ‘알갱이 화약Cornedpowder’이었다. 화약의 세 원료를 갈아 물에 적신 다음 섞으면 일종의 ‘케이크’가 만들어지는데, 이 케이크를 말린 다음 부숴서 체로 쳐 알갱이 크기를 반드시 균일하게 만들어야 했다. 알갱이 화약은 대포에 집어넣고 불을 붙이면 즉시 불이 붙었고 서펀틴 화약보다 위력이 세 배나 더 강했다. 발사 후에도 잔여물을 남기지 않고 습기나 흔들림에 강하며 다루기 쉬웠으나 단조로 제작한 대포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력이 강했다. 알갱이 화약이 널리 쓰이려면 주조 대포가 도입된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주조 대포와 알갱이 화약은 쇠로 된 발사체에 새 생명을 부여했다. 돌을 깎아 포탄을 만들려면 공이 많이 들었지만 쇠로 주조 포탄을 만들기는 상대적으로 간단했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알갱이 화약과 더 튼튼한 대포가 합쳐져 쇠로 된 포탄의 파괴력을 키웠다. 포탄 두 개를 사슬로 연결하면 유용한 대인 병기가 되었다. 61-2)
Chapter 3. 화약 혁명
16 해상전 : 해상전투를 위한 함선들
갤리선은 15세기 말엽까지 설계가 거의 바뀌지 않은 건현이 낮은 함선으로서 순항할 때는 라틴 돛lateen sail(큰 삼각돛―옮긴이)을, 전투할 때는 죄수나 포로가 젓는 여러 단으로 설치한 노를 사용해 추진했다. 16세기에 들어서 갤리선에는 앞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대포가 설치되었다. 즉 목표에 대포를 발사하려면 배 전체가 선회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갤리선의 전술은 배에 탑승한 다수의 병사들에게 달려 있었다. 갤리선들이 소이성燒夷性 투사체를 서로에게 발사한 다음 적선에 올라타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이 이끄는 기독교도 함대가 서부 그리스의 파트라스만Gulf of Patras 북쪽 해안에서 터키 갤리 함대를 대파한 1571년 레판토Lepanto 해전은 갤리선으로만 싸운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었다. 캐럭선carrack은 군용으로 채택된 건현이 높은 상선으로, 건현이 낮은 갤리선보다 포격용 플랫폼으로 적합했으며, 16세기 초에 경첩으로 개폐 가능한 포문이 도입된 다음부터는 더 그러했다. 65)
헨리 8세의 메리 로즈호처럼 높이 솟은 선수루를 갖춘 갤리언선galleon은 캐럭선에서 진화한 배다. 1509∼1510년에 건조된 메리 로즈호는 병사들이 적함으로 건너가기 전에 타격을 입힐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한 선수루를 갖췄다. 메리 로즈는 해상전투의 중간 단계를 대변하는 함선이다. 17세기 들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 함선은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다. 전열함이란 대포를 배치한 옆면을 적함 쪽으로 두고 함선들이 일렬로 늘어서는 진형으로 기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배다. 피니어스 페트Phineas Pett가 설계하고 아들 피터가 건조하여 1637년에 진수한 소버린 오브 더 시즈Sovereign of the Seas는 찰스 1세가 보유한 함대의 자랑이었다. 이 배는 건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과한 특별세인 ‘함선세Ship Money’에 쏟아진 엄청난 반대를 뚫고 찰스 1세가 주도해 만든 웅장한 위신의 상징이었다. 이 배는 앞으로 1860년까지 건조된 모든 전열함의 원형이 되었다. 65-7)
17 보방 혁명 : 군사공학의 아버지, 보방
세바스티앵 르 프르스트르 마르키스 드 보방SébastienLePrestreMarquisedeVauban(1633∼1707), 흔히 보방으로 알려진 이 인물은 프랑스군 원수이자 당대 최고의 공병 전문가로 공성 기술자이자 요새 설계자로 유명했다. 1670년대 말, 보방은 포위전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연달아 평행참호를 파서 적 요새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방식은 1673년 마스트리히트 포위전에서 보방이 도입한 것이다. 수비 병력이 충실했던 마스트리히트는 13일 만에 함락되었고 이 전투는 19세기 말까지 모든 포위전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남았다. 보방 최고의 작품은 프랑스 북부 국경을 지키는 이중 요새선인 프레 카레Pré Carré였다. 1692년 나무르Namur 포위전에서 보방은 도탄 사격법ricochet firing, 跳彈射擊法을 완성했다. 이 사격법으로 사격한 직사포탄, 곡사포탄, 간혹 공성포탄은 바깥쪽 흉벽을 지나쳐 방어벽 안쪽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방어 진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70-1)
18 포병의 시대 : 전장을 지배하게 된 아쿼버스와 머스킷
흔히 요새 벽에 설치되었던 경량 화기에서 발달한 아쿼버스arquebus는 보병이 오른팔 밑에 끼워 넣고 땅에 박은 거치대에 의지해 발사하는 무기였다. 곧 더 작은 변종이 생산되어 끝을 가슴에 대고 양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참호나 방책 뒤에 배치되어 창병과 미늘창병의 보호를 받는 아쿼버스병은 체리뇰라Cerignola 전투(1503)에서 유효성을 증명했다. 이 전투는 화약 기반 화기로 승리한 첫 전투였다. 1695년 잉글랜드 왕실 조병창은 잉글랜드 훈련대(민병대)의 무기를 장궁에서 화기로 대체한다고 포고했다. 아쿼버스의 정확도는 제한적이었으나 단거리에서는 갑옷을 관통할 수 있었고 큰 총알 한 발 대신 산탄을 발사하면 여러 군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아쿼버스병은 석궁으로 무장한 궁수보다 더 빨리 사격할 수 있었으며, 훈련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숙달된 장궁수를 길러내는 데 비하면 극히 짧았다. 아쿼버스병의 등장으로 훈련 정도가 낮은 경장갑 보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었고 궁수가 도태되기 시작했다. 72)
아쿼버스에서 발전한 머스킷musket은 처음에는 거치대가 필요했으나 점차 어깨에 견착해 사격할 수 있었다. 머스킷의 발사 속도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렸다. 재장전 훈련에 18단계가 필요했고 두 발을 발사하는 데 7분 정도 걸렸다. 첫 줄의 병사들이 총을 발사한 후 재장전을 하러 뒷줄로 이동했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한 줄씩 앞으로 나가 사격했다. 머스킷의 첫 격발장치는 매치락matchlock이었다. 매치락 머스킷은 서서히 타는 화승을 화약 접시priming pan에 넣어야 발사되었다. 1539년에 도입된 휠락wheellock은 처음으로 자체 점화가 가능한 장치였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화승 없이 공이를 당긴 상태로 휴대하며 언제든지 총을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말에 새로운 격발장치인 플린트락flintlock이 등장했다. 플린트락은 부싯돌을 문 스프링 작동식 공이를 사용했다. 이 장치는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화약 접시에 불똥을 일으켜 작동하는 구조였다. 영국군은 그 뒤로 150년간 플린트락식 소총을 사용했다. 73)
19 화력과 급습 : 제병통합 전투의 달인 말버러 공작
말버러 공작이 기틀을 잡은 유연한 군사적 환경으로 인해 지휘관들은 보병, 포병과 기병을 지형과 지휘관의 의도에 맞추어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150년간 지속될 패턴이 수립된 것이다. 1701년에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왕 윌리엄 3세는 처칠을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02년 왕위에 오른 앤 여왕은 그를 말버러 공작에 봉했다. 말버러 공작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의 달인이었다. 그는 기병의 돌격 속도를 속보good round trot에서 구보canter로 바꿨다. 이것은 아직 카라콜caracole 전술(선도 기병이 화기로 사격한 후 말을 달려 후방으로 이동해 재장전한 다음 교대로 사격하는 전술)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군에게 특히 효과적이었다. 그는 포병 배치에 엄청난 노력을 들였으며, 중요한 구역에 대포를 집중 배치하거나, 총진격 중에 대포를 전방으로 보내 근접 지원을 제공했다. 그의 지도하에 영국 육군은 아쟁쿠르 전투 이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상을 획득했다. 75)
Chapter 4. 근대전의 탄생
20 브라운 베스 소총 : 처음으로 대량 생산된 소총
영국군의 주력 보병 화기인 활강식 랜드 패턴Land Pattern 머스킷 플린트락 또는 ‘브라운 베스’ 소총은 1722년에 설계되어 그 뒤로 100년 이상 생산되었다. 이 전장식 소총은 납탄과 화약을 넣은 카트리지를 썼으며 플린트락 기구로 점화했다.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튀긴 불똥이 총신의 터치홀touchhole을 통해 장약으로 갔다.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전장에서는 정확한 조준 실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밀집대형으로 이동하는 병사들은 적의 머스킷 일제사격에 대형 과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한 병사가 쏜 총에서 쏟아져 나온 불똥이 장전 중인 다른 병사의 화약에 옮겨붙지 않게 하려면 일제사격이 필요했다. 플린트락 장치는 1807년에 알렉산드로스 존 포사이스 목사가 퍼커션 캡Percussioncap을 발명한 후 퇴출되었다. 때리면 불꽃이 일어나고 방수가 되는 구리제 뇌관인 퍼커션 캡은, 특히 축축한 날씨에 불발되는 경향이 있고 오발이 자주 일어나던 플린트락에 비해 믿을 만했다. 79-81)
21 기동 포병 : 전쟁의 달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산
15세기 말쯤 화포는 바퀴 달린 포차가 더해져 어느 정도 기동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포병의 기동 속도는 옆에서 행군하는 포수들의 행군 속도에 제한을 받았으므로 이 혁신은 속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즉 포병은 걷는 속력보다 더 빠를 수 없었다. 17세기 초에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보병이 견인하는 경량 화포인 연대포를 도입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벼운 무게 때문에 전장에서의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18세기 전쟁의 달인인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이전의 기병대는 적을 만나면 멈춰 서서 소지한 화기로 교전하도록 훈련받았다. 프리드리히는 기병도와 창을 주 무기로 복원하고 기마 포병horse artillery이라는 형태로 추가 화력을 지원했다. 프리드리히의 기마 포병대 소속 사수들은 말을 탔으므로 이 병과에는 새로운 통일성과 속력이 생겨났다. 기마 포병대의 대포는 당연히 가벼울 수밖에 없었으나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82)
‘사선 대형Obliqueorder’은 기마 포병과 더불어 프리드리히의 중요한 발명품이다. 프리드리히는 오랜 기간 원정하면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자주 마주친 경험이 있었다. 사선대형은 잘 훈련되고 기율이 엄정한 프로이센 보병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적의 수적 우세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한 방책이었다. 전 전열에서 적과 교전하는 대신, 프로이센 부대들은 사선 대형으로 기동하며 적의 측면을 향해 이동했고 선봉 부대는 적의 중앙과 정면에서 교전했다. 프리드리히는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기술적으로 기동을 숨겼고 후속부대를 계속 투입해 적의 측면을 압박했다. 적의 측면이 무너지면, 이때까지 측면공격을 엄호하던 기병대가 전면적으로 투입되어 적 전열에서 무너진 부분을 이용하기 위해 칼을 빼 들고 일제 돌격으로 급습했다. 로이텐Leuthen 전투(1757)에서 프리드리히는 아군보다 규모가 두 배 이상인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달성한 슐레지엔 지배를 확립했다. 83)
22 나폴레옹의 군단 : 포병은 가장 효율적인 무기
프랑스 포병의 근대화는 1765년 이전 몇 년에 걸쳐 장바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Baptiste de Gribeauval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추진한 개혁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대대 수준의 화력 지원을 하던 경량 야포를 폐지하고 이를 대규모로 집결한 포대로 대체했다. 이 포대가 집중 화력을 퍼부어 적의 전열에 구멍을 내면 기병이나 보병이 그 구멍을 이용해 전과를 확대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기병대를 가공할 위력을 지닌 무기로 만들었으나 기병대가 사용한 전술은 나폴레옹 전에 이미 확립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전쟁 수단에서 눈에 띄는 특징이 속력과 유연성이다. 나폴레옹은 진지전보다 기동전을 옹호한 기베르 백작Comte de Guibert(1743∼1790)의 영향을 받았다. 기베르는 독자적으로 작전이 가능한 사단 단위로 군을 조직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나폴레옹이 좋아한 『전술일반론』의 저자이기도 한 기베르는 징집병으로 국민군을 편성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것 역시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85)
1800년에 나폴레옹은 모든 병과가 포함된 군단corps d’armée으로 군을 재조직했다. 군단은 다른 군단과 합류할 때까지 최대 36시간을 단독으로 작전할 수 있었다. 사실상 군단은 독자적 참모진과 보병, 기병, 포병대와 사령부를 갖춘 군대 자체의 축소판이었다. 군단장의 대략적 진공선은 나폴레옹이 결정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행군 중에 어느 정도 융통성을 허락받았다. 적과의 교전은 군단장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고 근처의 다른 군단장들은 대포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행군했다. 군단 개념은 바타용 카레bataillon carré(대대 방진) 진형으로 완전히 구현되었다. 이 대형에서 개별 군단은 이틀 행군 거리 안에서 평행 경로로 행군하며, 선견부대, 차장遮障 임무를 맡은 기병대와 예비대,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보호를 맡는다. 이렇게 행군하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사방을 두루 방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속 부대 중 하나가 적과 접촉하면 어느 방향으로든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86)
23 해상 화력 : 목조 함선의 마지막 대해전 ‘트라팔가르’
17세기 중엽의 함선은 갑판마다 같은 구경의 대포를 배치해 건조했다. 이러한 함선으로 인해 생겨난 현측 일제사격broadside은 이후 200년 동안 해상전의 특징이 되었다. 해전에 대한 이 간단한 접근법은 새로운 방법으로 대체되었다. 존 클러크John Clerk는 『해군 전술에 대한 에세이』에서 전열 돌파를 옹호했다. 함수나 함미에서 공격을 받은 배는 포를 돌려 적을 겨냥할 수 없다. 클러크는 영국 해군이 적의 전열을 뚫고 들어가서 뒤에 남겨진 적함을 압도한 다음, 나머지 적함이 침로를 바꿔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탈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1805년 10월 21일)에서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합대의 전열을 두 군데에서 적절한 각도로 돌파했다. 이 대담한 계획에 압도된 빌뇌브Villeneuve 중장이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대열 중앙과 후미는 영국 함대와 난전에 휘말렸고 뛰어난 영국군의 포술과 조함 능력이 여기에서 빛을 발했다. 88-9)
Chapter 5. 산업과 전쟁
24 무기 대량 생산 : 사정거리와 치명도를 끌어올린 산업혁명
18세기에 소화기 생산 분야는 중세 이후로 바뀐 것이 거의 없었다. 19세기쯤에는 정밀한 도구와 이제 막 시작된 산업 자동화에 힘입어 국영 조병창들과 민간 생산자들은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구성된 표준화된 무기로 재빨리 생산 품목을 바꿨다. 19세기의 첫 30년 동안 플린트락이 퍼커션락으로 대체되면서 머스킷 총의 성능은 크게 향상되었다. 총열에 강선(총탄에 회전력을 주어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총열 내부에 판 홈)이 파인 총은 미국 독립전쟁(1775∼1781)과 반도전쟁(1808∼1814)에 도입되었다. 강선이 파인 총열에 사용할 총탄은 총열 안쪽에 꽉 맞아야 하면서도 장전하기 쉬워야 했다. 이 문제는 프랑스에서 발명자의 이름을 딴 미니에 총탄Minié bullet이 개발되면서 해결되었다. 미니에 총탄은 아래쪽이 비어 있고 테두리가 있는 원뿔형 총탄이다. 심하게 오염된 총열에서도 쉽게 빠져나오고 테두리가 강선에 꼭 물린 미니에 총탄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93)
다음 단계는 전장식 소총을 후장식 소총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전장식 소총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사수가 누운 상태로 재장전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후장식 소총은 1848년에야 군용 총기로 등장했다. 프로이센의 총기 제작자인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Johann Nicolaus von Dreyse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이 소총은 바늘식 소총Needle gun이라고 알려졌다. 프로이센군이 1848년에 채택한 드라이제 바늘식 소총은 나중에 모든 볼트 액션식 소총의 조상이 된 폐쇄식 볼트 시스템을 장비한 첫 소총이다. 바늘식 소총 덕에 프로이센군 보병은 1분에 8발의 속도로 사격할 수 있었다. 총미에 상자형 탄창 혹은 총열 아래에 원통형 탄창을 장비한 볼트 액션식 소총은 전 세계 군대의 표준 보병 화기가 되었다. 1885년에 무연화약smokeless powder이 도입되자 전환 과정이 완료되었고, 1900년경에 보병용 소총의 형태가 고정된 후 제1차 세계대전을 지나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를 때까지 유지되었다. 93-4)
25 기관총 : 한 번에 다수의 목표물을 파괴하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인해 자동화기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1861년 시카고의 치과의사 리처드 조던 개틀링RichardJordanGatling이 개발한 개틀링건Gatlinggun은 회전식 프레임에 설치된 총신 6개로 구성되었다. 회전하는 총신이 차례로 탄창과 나란히 배열되면 장전 접시로 떨어진 카트리지가 장전기를 통해 약실로 삽입된다. 총알이 발사되면 다 쓴 탄피는 총신이 회전하면서 추출된다. 중력에 의한 장전과 흑색화약 카트리지에 의존하던 기존의 기관총은 무기로서 신뢰받지 못했으나, 금속 카트리지와 무연화약이 발명되자 기관총의 잠재력에 날개가 달렸다.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만능 발명가인 미국인 하이럼 맥심HiramMaxim은 총알의 반동을 다음 총알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이용하여, 천 벨트에 끼운 카트리지가 자동으로 장전되어 발사되는 구조를 개발했다. 드디어 사수를 작동기구에서 해방시킨 진정한 기관총이 탄생한 것이다. 사수가 해야 할 일은 방아쇠를 계속 당기는 것뿐이었다. 95-6)
맥심이 확립한 기본적인 기관총 설계는 30년간 유지되었는데, 점차 다른 개량형들도 등장했다. 미국의 존 M.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은 발사 가스 일부를 이용해 장전 과정을 보조하는 총을 만들었다. 브라우닝이 추가한 부분은 영국군이 1912년에 채택한 수랭식 비커스 기관총에 차용되었다. 1914년 영국군 대대는 일반적으로 비커스 기관총 2정을 보유했다. 다만 고위층에서 이 기관총이 곧 차지하게 될 중요성을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독일군은 7.92밀리미터(0.3인치) 파라벨럼Parabellum탄을 사용하는 벨트 급탄 수랭식 기관총 6∼12정으로 기관총 중대를 편성하고 이를 3개 대대로 편성된 연대에 배치함으로써 지휘관의 손에 가공할 집중 화력을 쥐어주었다. 1914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이 시작되자 양군이 배치한 기관총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914년 영국군 사단은 기관총 24정을 배치했으나 1916년경에는 열 배로 늘어난 204정이 배치되었다. 97)
26 드레드노트형 전함 : 거함거포의 시대를 열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 기간인 1862년에 중대한 의미가 있는 해상 대결이 벌어졌다. 8인치 두께의 철제 장갑을 둘러친 회전포탑에 탑재된 11인치 활강포 2문을 장비한 북군 소속 포함gunboat인 모니터Monitor함이 햄프턴 로즈Hampton Roads에서 남군의 버니지아Virginia함과 근거리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결투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조잡하기는 했어도 모니터함의 선회포탑은 미래의 함선이 나아갈 길을 가리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사점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해전 기술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1904년에 제1 해군경으로 임명된 피셔 제독은 이런 상황에 자극을 받아 ‘모든 포를 대구경포로all-big-gun’ 장착한 전함 설계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던 중 1905년 5월에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자 피셔 제독의 숙고에 절박함이 더해졌다. 이 해전은 현대적 해군 포술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시연이었다. 99-100)
1905년에 피셔 제독은 지금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전함을 구식으로 만들 전함 건조 프로그램을 발족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당시 사용 가능한 추진 기관, 방어력, 무장 부문의 진보를 단 하나의 선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로터리 터빈 기관, 장갑 방어, 거리측정용 광학장비, 사격 통제 시스템과 폭발 지연신관을 이 전함에 적용할 계획이었다. 1905년 10월부터 1906년 2월까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건조되고 진수된 배수량 1만 8,000톤의 전함 드레드노트Dreadnaught는 1만 3,000마력 파슨스Parsons 증기터빈으로 속력 21노트를 냈다. 당시로서는 전함이라기보다 순양함의 속력이었다. 연장포탑 5개에 탑재된 30.5센티미터(12인치)포 10문이라는 드레드노트의 무장은 당대 어떤 현역 전함보다 강력했다. 어뢰정 공격에 대한 방어책인 7.6센티미터(3인치) 속사포 26문 덕에 적 어뢰정은 사정거리가 3,000야드(2,743미터)였던 당시의 어뢰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100)
Chapter 6. 제1차 세계대전
27 참호전 : 진흙탕 속 가장 참혹했던 전투
1914년에 프랑스군 포병의 근간은 1897년에 도입된 75밀리미터(3인치) 속사 야포였다. 이 포는 5.4킬로그램(12파운드) 고폭탄 혹은 7.2킬로그램(16파운드) 유산탄을 9킬로미터까지 쏘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야포는 참호전에 적당하지 않았고, 포탄은 엄중하게 방어된 진지를 위협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개전 무렵의 영국 대륙원정군(BEF)은 중포 없이 18파운드(8.2킬로그램) 속사 야포만 야전에 배치했다. 이 포 역시 잘 구축된 참호에 효과를 발휘하기에 충분한 무게의 포탄이나 부앙각이 없었다. 19세기 후반 독일은 강화 진지를 격파할 무기를 개발했다. 따라서 독일군 야전포병 전력에서 곡사포howitzer(포신이 짧고 고각으로 더 무거운 포탄을 발사하는 포)가 차지하는 비율이 적보다 더 높았으며, 이는 결정적 우위로 작용했다. 가장 인상적인 대포는 무시무시한 75톤 무게의 크룹Krupp 42센티미터(16.5인치) 곡사포였는데 이 포는 918킬로그램(2, 052파운드) 포탄을 14.2킬로미터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104)
1914년 전에 완성된 포병 기술인 간접 포격을 사용해 포수들은 보이지 않는 목표물에 사격할 수 있었다. 위장한 탄착관측수가 전화로 포수들에게 지시를 보낸 다음 첫 탄의 명중 결과를 관측하고 사격제원 수정을 지시한다. 참호전 환경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1914년 여름에 병사들은 기동전을 예상했기 때문에 간접 포격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1915년 봄 무렵, 이 허황한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서부전선 사상자의 70퍼센트는 포병 때문에 발생했다. 1916년 6월에 솜 전투 전의 준비 포격에서는 독일군 철조망을 뚫고 포대를 침묵시키며 방어군을 대피호에 묻어버릴 의도로 150만 발을 발사했다. 타는 듯이 뜨거운 7월 1일 아침 07시 30분, 포격은 독일군 제2선으로 이동해 갔다. 독일군 기관총수들은 충격을 받았으나 다치지 않은 채 대피호에서 나와 무인 지대를 걷는 속도로 전진하던 영국군 13개 사단에 압도적 위력의 기관총탄을 우박처럼 쏟아부었다. 105)
28 화학전 : 참호를 지옥으로 만든 화학 무기
1915년 4월 22일 오후 5시, 불길한 느낌을 주는 녹황색 구름이 이프르Ypres의 연합군 진지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이 구름은 공세를 앞둔 독일군이 참호에 있는 500개의 가스 실린더에서 사전공격의 일환으로 방출한 압축 염소가스chlorine gas였다. 독일군 포로와 탈주병들이 이 새로운 무기에 대해 경고했지만 대응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프르 북쪽 측면에 있던 프랑스군 식민지병 2개 사단이 이 구름에 휩싸여 겁에 질린 채 도주했다. 전선에 생긴 너비 6.5킬로미터의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질식해 죽어갔다. 1915년 9월 25일, 영국군은 루스Loos의 독일군 진영에 염소가스를 살포했으나 가스는 적의 참호에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가스 포탄의 사용이 점점 늘어나 1918년경에는 최소 63종의 가스가 사용되고 있었다. 머스터드가스의 희생자 중에 아돌프 히틀러AdolfHitler가 있었다. 히틀러는 제16 바이에른 동원연대에서 복무하다가 1918년 10월에 이프르에서 영국군의 가스 공격을 받았다. 109)
29 공중전 : 전쟁에 하늘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더하다
1915년 2월, 프랑스인 롤랑 가로와 레이몽 솔니에가 전방 사격 기관총을 실험했다. 이들은 발사한 총탄 중 적은 수만 프로펠러에 부딪힐 것이라 계산하고 총탄을 튕겨내기 위해 프로펠러에 강철판을 붙였다. 4월, 가로는 독일군 전선 후방에 불시착했고 노획된 모랑-솔니에Morane-Saulnier N형 덕에 네덜란드 태생 공학자 안토니 포커는 프로펠러가 앞을 가리지 않을 때만 총이 발사되는 기계적 동조 기어mechanicalinterruptergear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아인데커Eindecker라 불린 포커 E.I 단엽기에 탑재되었고, 이렇게 해서 진정한 의미의 첫 전투기가 탄생했다. 막스 이멜만과 오스발트 뵐케 같은 뛰어난 조종사들이 조종한 아인데커 E.III형은 서부전선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915년 8월부터 1916년 1월까지 영국과 프랑스 항공대가 입은 손실은 ‘포커의 징벌Fokker Scourage’이라고 알려질 정도였고, 속절없이 당한 연합군 조종사들은 ‘포커의 밥Fokker Fodder’이라고 불렸다. 111-2)
오스발트 뵐케는 1916년 2∼6월에 베르됭 상공에서 겪은 격렬한 공중전 경험에 기반해 전투 목적으로 특화된 비행대, 야크트슈타펠Jagdstaffel(전투 비행대, 흔히 ‘야스타Jasta’라고 불림)을 편성했다. 뵐케가 지휘하는 야스타 2의 초창기 부대원으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ManfredFreiherrvonRichthofen이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80기 격추를 기록해 최고의 에이스가 된다. 양측에서 신형기를 도입함에 따라 연합군에서도 에이스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프로펠러가 뒤쪽에 달린 ‘푸셔pusher’형 전투기인 DH2(전방을 바라보는 조종사 좌석에 루이스Lewis 기관총을 장착)를 몰고 비행한 영국군 제6 비행대의 라노 호커Lanoe Hawker 소령은 공중전에서 첫 빅토리아 십자장Victorian Cross(VC)를 받은 영국 항공군단 조종사가 되었다. 1916년 11월 23일, 솜 전투가 끝날 무렵 호커는 알바트로스Albatros D.II 복엽기를 조종하던 리히트호펜과 격렬한 선회전을 벌인 끝에 그의 열한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12)
30 폭격기의 도래 : 지평선을 따라 비치는 전략 폭격의 여명
1917년 5월 독일 육군은 영국 본토의 목표물을 습격할 수 있는 공기보다 비중이 큰 폭격기를 개발했다. 고타Gotha G.IV 폭격기다. 탑승원 3명 중에 항법사와 폭격수를 겸한 관측수가 지휘를 맡았다. 최대 폭탄 탑재량은 500킬로그램(1,100파운드)이었고 폭탄은 기체 내부 혹은 외부에 탑재했다. 고타 폭격기는 1917년 5월 25일의 포크스턴Folkestone항 공격을 시작으로 6월 13일과 7월 7일에 극적인 런던 주간폭격을 벌였다. 독일의 런던 공습으로 자극받은 영국도 전략폭격부대를 창설했다. 1918년 봄에 선보인 이 부대는 프랑스에 있던 초창기의 영국 공군(RAF)과는 별개 부대로 독일 산업시설 폭격 임무를 맡았다. 이 부대의 주력기는 핸들리 페이지 O/400 폭격기로 최대 폭탄 탑재량 907킬로그램(2,000파운드), 최고속력 시속 95마일(시속 152킬로미터), 작전상승고도 2,590미터(8,500피트)였다. 악천후 그리고 이들에 전술 역할을 부여하자는 요구 탓에 O/400 폭격기의 독일 군수공장 폭격은 몇 번에 그쳤다. 116)
31 현대적 전차 : 참호를 건너 험지를 주파하는 전투 차량
1914년 10월 어니스트 스윈턴ErnestSwinton 소령(나중에 대령)은 영국군 최고사령부(GHQ)와 접촉해 전쟁 전에 개발된 강철 궤도식 홀트Holt 농업 트랙터를 장갑차량으로 개조하자는 제안을 제출했다. 최고사령부는 이 제안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스윈턴의 계획은 제1 해군경 윈스턴 처칠이라는 지원군을 얻었다. 1916년 초에 시제품 전차인 ‘빅 윌리’는 하트필드 파크Hartfield Park에서 성공적으로 시험을 마쳤다. 신무기에는 ‘탱크Tank’라는 암호명이 붙었는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으면 물을 나르는 용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916년 9월 15일 솜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전차가 투입되었을 때, 출발점에 도착한 마크 Ⅰ 전차 32대는 전술적 배치 문제뿐 아니라 기계적 취약성과 짧은 항속거리의 희생양이 되었다. 전차는 1917년 11월의 캉브레 전투 때부터 비로소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캉브레는 수량, 조건, 전술 면에서 전차에 유리한 전투였고, 훗날 전차가 만날 기회를 아주 살짝 보여주었다. 118-9)
마크 Ⅳ 전차Mark IV Tank는 마크 Ⅰ과 마찬가지로 마름모 비슷한 형태에 차체 전체를 감아 돌아가는 궤도를 터비했으나 개선된 라디에이터와 소음기를 장착했고, 궤도를 압연 강철로 만들어서 접지력이 더 좋았다. 다만 이 궤도는 약 32킬로미터까지만 제대로 굴러갔다. 12밀리미터(0.5인치) 두께의 장갑 방어력은 전 모델보다 개선되어 철갑총탄armor-piercing bullet, 徹甲銃彈(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도록 합금 등으로 강화한 탄자를 가진 총탄―옮긴이)에 유효했다. 실전에서 마크 Ⅳ 전차의 내부는 소음과 열로 가득한 불지옥이었다. 현가장치suspension가 없었으므로 살짝 무엇에 찧거나 부딪히면 충격이 몇 배로 증폭되었고 탑승원들이 뜨거운 엔진으로 내동댕이쳐질 위험이 상존했다. 전차가 피탄되면 뜨거운 철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다녔고 장갑판이 총탄을 맞으면 탑승원들은 제철소 직원들처럼 흩날리는 뜨거운 금속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탑승원들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 마스크를 썼다. 119-20)
Chapter 7. 제2차 세계대전
32 전격전 : 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돌파구를 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군사 이론가들은 기계화전 교리 개발에 매달렸다.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피하고 전장에서 기동과 이동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다. 전격전 교리의 아버지는 많으나 고대부터 내려온 통찰에 현대 기술을 응용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대령(나중에 장군)이다. 통신과 차량 수송 전문가였던 구데리안의 목표는 적과 정면에서 교전해 압도적인 화력으로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히 적의 지휘 통제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고속으로 기동하며 무전기로 서로 협력하는 독립적인 기계화 제대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중점schwerpunkt’을 공격해 돌파구를 연다. 이 부대들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후방 깊숙이 침투하며, 뒤에 따라오는 보병은 살아남은 적을 여러 개의 포위망에 나눠 가둔다. 첫 돌파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중 포병으로서 루프트바페Luftwaffe(독일 공군)의 수평 및 급강하 폭격기를 이용한다. 122-3)
1941년 여름,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이라고 알려진 독일의 소련 침공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소련군은 ‘가마솥’ 전투라는 별명으로 불린 몇 개의 대규모 포위전을 거치며 전멸 직전까지 갔다. 3개의 ‘가마솥’에서 10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전격전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데 동부전선의 여러 조건이 훼방을 놓았다. 소련 땅의 광대한 크기, 영하의 겨울 날씨와 봄, 가을의 진창 같은 극단적인 기후, 끝이 없어 보이는 인적자원 공급은 동부전선에 전개한 독일군의 힘을 빼버렸다. 1941년 12월에 참전한 미국은 소련 군대와 민간인을 무장시키고 먹여 살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다시 기력을 회복한 붉은 군대는 히틀러를 점점 소모전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이중 가장 특기할 만한 전투로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년 8월∼1943년 2월)와 쿠르스크 전투(1943년 7∼8월)가 있다. 이 전투에서 전격전의 기본 원칙, 즉 기습, 충격, 기동은 소련 여름의 흙먼지처럼 날아가버렸다. 124)
33 레이더 : 전투기 조종사들의 믿을 만한 눈
전파 방향 거리 탐지(장치)radio direction and ranging의 미국식 약어인 레이더는 영국에서는 RDF(radio direction finding, 전파방향탐지)라고 알려졌다. 레이더는 송출된 전파에너지 펄스가 목표물에 맞아 반사될 때의 에너지를 탐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펄스의 속도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송출과 수신 사이의 시간을 측정하면 레이더 조작원이 목표물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레이더 보고는 해안과 내륙의 관측초소에서 오는 정보와 교차 검증되었고, ‘걸러진’ 결과는 전투기 사령부 소속 전투비행단과 구역 기지Sector Station(주 기지)로 전송되었다. 요격 관제사들은 적 편대의 항로를 지도에 그리는 데 소요되는 6분의 시간을 감안해 요격 비행대를 배정했고 비행대는 다가오는 적기를 향해 긴급 출격했다. 개전 후 10개월 동안 루프트바페는 영국 제도로 정기적으로 정찰기를 보내 연안 운송 선박을 공격했다. 영국 공군은 여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레이더 요격시스템을 발전시켜 상당한 효율성을 발휘했다. 125-6)
34 전략폭격 :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괴해 굴복시키다
폭격작전은 영국이 나치 독일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보다 고도화된 항법 보조장비를 갖춘 4발 폭격기(쇼트 스털링,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 아브로 랭카스터)가 대량으로 일선에 도입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이들의 도입은 폭격기사령부의 정책 변화와 때를 같이했다. 폭격기사령부는 간간이, 극적인 방법으로 특정 목표에 대한 정밀폭격을 유지했으나 이제 폭탄 대부분은 ‘지역’을 목표로 삼아 떨어지게 되었다. 폭격기사령부가 독일의 군수공장을 파괴할 수는 없어도 노동자들이 사는 곳은 파괴할 수 있었다. 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아서 해리스ArthurHarris 대장은 독일 도시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지역 폭격의 첫 단계는 1943년 7∼8월에 절정에 달했다. 이 기간에 수행된 고모라 작전Operation Gomorrah에서 폭격기사령부는 함부르크에 잇달아 파괴적인 폭격을 단행했다. 1944년 연말에는 독일 도시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다. 130)
1942년 미 육군항공대 제8공군의 지휘관들은 자위 능력을 갖춘 폭격기로 편성한 대형으로 주간에 고공 정밀폭격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전쟁 초기에 루프트바페와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가 이 전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 육군항공대는 독일 상공에서 자신의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가 전멸 일보 직전까지 갔다. 대규모 편대비행을 하던 B-17 플라잉 포트리스Flying Fortress와 B-24 리버레이터Liberator 폭격기가 루프트바페 주간 전투기를 상대로 입은 손실이 점점 늘어갔다. 1943년 늦여름경에는 평균 손실 비율이 1회 출격당 10퍼센트에 달했고 이런 손실을 유지하며 전투를 계속하기란 불가능했다. 1943년 12월에 뛰어난 성능의 P-51 머스탱Mustang이 호위전투기로 도입되면서 위기가 끝났다. 이 전투기는 독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폭격기를 호위할 능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상공에서 적 전투기를 소탕하기 위한 전투 초계활동fighting patrols도 할 수 있었다. 130-1)
35 기갑전 : 현대 전차 설계의 본보기 T-34
소련 전차군의 주축은 T-34/76 중형 전차로 1940년 여름에 처음으로 일선에 배치되었다. 이 전차는 기본 성능이 뛰어나 크게 개조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사용되었다. 기동성, 방어력, 화력의 균형을 잡은 T-34 전차는 현대적 전차 설계의 기초를 놓았다고 여겨진다. T-34 경사 장갑의 특징은 포탄의 관통 저항력을 높였다는 것인데, 독일군이 5호 전차 판터를 만들 때 이 점을 베꼈다. T-34의 균형 잡힌 설계를 완성한 것은 포신이 길고 포구 초속이 빠른 혁신적인 전차포였다. T-34 전차는 접지압을 최소화한 폭이 넓은 궤도를 장비했으며, 러시아의 봄과 가을철의 특징인 진창(라스푸티차rasputitsa)과 겨울철에 깊게 쌓인 눈 같은 거친 지형에서도 빠르고 기동성이 좋았다. 튼튼한 전천후용 디젤 엔진 덕분에 T-34의 출력 대 중량비는 매우 훌륭했으며 항속거리는 299킬로미터로 독일군 5호 전차(판터Panther)와 6호 중전차(티거Tiger Ⅰ, Ⅱ)의 거의 두 배였다. 이러한 특징은 광활한 소련의 전장에서 아주 중요했다. 134)
36 유보트 전쟁 : 낮에는 잠항하고, 밤에는 공격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보트(독일어 운터제보트Unterseeboot에서 나온 말)로 알려진 독일 잠수함이 대서양 보급선을 끊어버려 하마터면 영국이 항복할 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유보트들도 제1차 세계대전 때만큼 위협적이었으나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연합군의 기술력에 패배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얻은 승리였다. 1940년 여름부터 노르웨이와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노르웨이와 프랑스의 기지를 획득하면서 유보트, 독일 수상함대, 장거리 정찰기들은 작전 범위를 확장하고 분쟁 수역으로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로 인해 ‘젖소’라 알려진 보급 유보트로부터 연료를 재보급받기가 더 쉬워졌다. 기회를 잡은 유보트들은 ‘늑대 떼wolf pack’ 전술로 작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낮에는 호송선단을 미행하고 밤에 부상해 공격했다. 유보트 승조원들은 1940년 7월부터 10월까지의 기간을 ‘행복한 시간Happy time’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연합군 선박 217척이 격침당한 데 반해 유보트는 단 2척만 잃었다. 136)
유보트를 이기기 위해 연합군은 광대한 바다에서 이들을 탐지하고 격파할 장비가 필요했다. 공동 마그네트론 밸브cavitymagnetronvalve가 영국에서 발명되고 여기에 기반한 강력한 센티미터파 레이더가 등장해 가장 중요한 기술적 돌파구가 열렸다. 이 레이더는 1941년 4월에 부상한 잠수함을 10마일(16킬로미터) 거리에서, 잠망경을 1, 200미터(3,937피트) 거리에서 탐지해냈다. 공대지Air to Surface(ASV) 레이더는 1943년 봄에 도입되었다. ASV 레이더를 장비한 비행기와 탐조등, 폭뢰는 밤에 부상한 유보트를 탐지하고 파괴할 수 있었다. 1943년 5월에 연합군이 격침한 유보트 36척 중 22척을 비행기가 격침했다. 고주파 방향탐지장치(허프 더프huff duff)를 장비한 호위함들은 기지로 무전을 발신하는 유보트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해 미행할 수 있었다. 청음 어뢰로 무장한 미국제 초장거리Very Long Range(VLR) 리버레이터 폭격기는 유보트가 항공 공격을 받을 걱정 없이 누비던 대서양 가운데의 틈새를 좁혔다. 137)
37 디데이 : 역사상 가장 중요한 상륙작전
이렇게 많은 과학적 준비 과정과 창의성을 들여 시행한 군사작전은 일찍이 없었다. 요행에 맡긴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소드Sword라는 암호명으로 부른 상륙 예정 해안은 특수 코만도 부대원들이 노르망디에서 가져온 모래 표본을 광범위하게 분석한 다음 연합군 계획 입안자들이 선정했다. 연합군 정찰기는 각 상륙 지역의 사진을 인치 단위로 촬영했고, 상륙 예정 부대의 수석 과학고문 솔리 주커먼Solly Zuckerman은 모자이크식으로 모은 촬영 결과물을 분석해 오버로드 작전에 선행한 수송 계획을 짰다. 상륙 뒤 연합군은 독일군이 노르망디의 거점을 증원하기 위해 사용할 서부 독일과 프랑스의 철도 시스템을 연합군 중폭격기와 전술폭격기로 파괴하기로 계획했다. 복잡한 연합군 기만 계획의 일환으로 영불해협이 제일 좁은 파드칼레Pas-de-Calais에 다수의 폭탄을 투하했다. 노르망디가 아닌 이곳에 연합군이 상륙할 것이라는 독일군의 심증을 굳히기 위해서였다. 140)
정확한 일기예보는 오버로드 작전 성공에 필수적이었다. 1944년 6월 6일에 잠시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 예측되었고, 이 예보에 기반해 작전의 개시일이 결정되었다. 5,000척에 이르는 연합군 대함대가 영불해협을 건너는 동안 연합군은 독일군을 상대로 전자적 기만작전을 발동했다. 해군 소속 론치launch(대형 동력선―옮긴이)들이 칼레와 불로뉴Boulogne로 향했다. 모두 병력 수송선과 비슷한 반사파를 내도록 특별히 제작한 반사판을 단 풍선을 끌고 있었다. 상공에서는 폭격기들이 살포한, 규격에 맞춰 재단한 금속 띠(영국군은 ‘윈도window’라는 암호명을, 미군은 ‘채프chaff’라는 암호명을 붙였다)가 큰 강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졌다. 이 금속 띠는 허위 레이더 신호를 만들어냈다. 영국이 통제한 이중스파이 후안 푸홀 가르시아Juan Pujol Garcia(‘가르보Garbo’)는 독일 정보기관의 담당관들에게 노르망디 상륙은 기만책일 뿐이며, 공격의 중점은 파드칼레가 될 것이라고 알렸다. 140-1)
38 나치의 비밀병기 : V-1과 V-2
루프트바페에서 개발한 FGZ-76 비행폭탄 V-1은 베르너 폰 브라운이 개발한 로켓 V-2에 비해 장점이 상당했다. V-1은 제작비용이 저렴하고 생산이 간단했으며 V-2에 필요한 귀중한 액화 산소와 고순도 알코올 대신 저질 연료를 태웠다. 곧 ‘두들버그doodlebug(개미귀신―옮긴이)’라는 별명을 얻은 V-1은 전쟁 초의 폭격 이후 다시 런던을 최전방 도시로 돌려놓았다. 이들의 정확도는 특별히 높지 않았으나 런던은 매우 큰 목표물이었고 독일의 의도는 V-1의 공격 효과가 무차별적으로 발휘되는 것이었다. 1944년 8월 말에는 런던 지역에서 2만 1, 000명이 V-1에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25만 명의 젊은 어머니와 어린이들이 대피했고 100만 명이 자발적으로 도시를 떠났다. 밤에는 수천 명이 런던의 지하철역에 몸을 피했다. 1944년 9월 초가 되자 최악의 V-1 공세가 끝났다. 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발사기지들을 점령했고 독일군은 더 먼 네덜란드에서 발사하거나 개조된 폭격기로 공중발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143-5)
런던 시민들이 한숨 돌릴 틈은 없었다. 9월 8일, 네덜란드에 있는 한 발사장에서 불과 5분 전에 발사된 V-2가 시 전체에 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음을 일으키며 런던 교외 치즈윅Chiswick에 떨어졌다. V-2 한 발은 V-1보다 20배 더 비쌌다. 하지만 두들벅 V-1과 달리 V-2는 접근을 알리는 경보도 없었고 발사된 뒤에는 요격할 방법이 없었다. 고폭탄 1톤을 실은 V-2는 80∼100킬로미터까지 상승했다가 음속 4배(시속 4,0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지상에 재돌입했다. 발사기를 겸한 차량으로 수송되는 V-2는 평평한 땅이라면 어디서든 발사될 수 있었으며 공중에서 탐지되지 않도록 발사장 위치를 주기적으로 옮겼다. V-2 공세는 남부 잉글랜드에 232발이 떨어진 1945년 2월에 절정에 달했다. 3월 8일에 런던의 스미스필드Smithfield 시장에 떨어진 V-2로 233명이 죽었다. 모두 합쳐 1,115발의 V-2가 잉글랜드에 떨어졌다. 그중 517발이 런던에 떨어져 2,754명이 사망하고 6,523명이 다쳤다. 145-6)
39 호위전투기 : 발군의 성능을 지닌 장거리 전투기
1943년 1월부터 독일 영공을 얕게 돌파하기 시작한 미 육군항공대의 손실은 2월부터 꾸준히 늘어났다. 제8공군이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항공기 조립공장과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의 베어링 공장을 공습한 8월 17일에 손실은 최고조에 이르러다. 미군은 두 도시를 겨냥한 폭격에 파견된 376대 가운데 60대를 잃었고 이보다 많은 수를 전손 처리했다. 노스아메리칸NorthAmerican사의 P-51B 머스탱이 1943년 12월에 도착하자 위기가 해소되었다.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동력원으로 하고 340리터 보조 연료탱크를 장비한 머스탱의 항속거리는 1,600킬로미터에 달해 엠덴Emden, 킬Kiel, 브레멘Bremen까지 폭격기를 호위할 수 있었다, 1944년 5월에 도착한 물방울 모양 캐노피를 장비한 P-51D형은 날개가 강화된 성능 개선 모델이었다. 이례적으로 많은 연료를 탑재할 수 있었고 보조 연료탱크까지 갖춘 D형의 항속거리는 2,400킬로미터여서 독일 내 어떤 목표물까지든 호위 비행이 가능했다. 148)
1944년 1월에 미군은 개선된 폭격기 지원 릴레이 시스템을 도입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표준으로 유지했다. 이 시스템에서는 전투기가 사전에 지정된 폭격기와 합류하는 지점까지 비행한 다음 다른 부대와 교대할 때까지 비행하는 대신 1개 전투비행단이 폭격기 이동 경로에 있는 한 지역 전체를 맡아 폭격기 편대가 통과하는 동안 해당 지역을 초계했다. 머스탱이 도착하자 폭격기 편대 구성의 또 다른 전술적 변화가 촉진되었다. 폭격기 대형은 12기로 구성된 3개 비행대로 줄었다. 선도 비행대는 중앙에, 2개 후속 비행대는 그 위와 아래에서 대형을 형성했다. 전반적 전력은 3분의 1이 줄었으나 새 대형이 차지한 공간은 이전 대형보다 17퍼센트 더 늘었다. 이로 인해 조종사들의 긴장이 줄고 상공의 머스탱들이 엄호를 제공하기가 더 쉬워졌다. 머스탱은 영국 본토 방공전에서 Me 109가 그랬듯이 폭격기 편대의 근접 엄호뿐만 아니라 적을 수색해 격멸하는 역할을 맡은 전투 초계 활동도 했다. 149)
40 항공모함 : 태평양전쟁 승리의 열쇠
항공모함은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수상기모함의 후예다. 앞뒤가 훤히 뚫린 비행 갑판을 이용해 항해 중에 비행기를 발진시킬 수 있었던 진정한 의미의 첫 항공모함은 영국 해군이 수상기모함을 개조해 만든 HMS 아거스Argus함으로 1918년 10월에 취역했다. 전후 몇 년 동안 가장 강력한 태평양의 해상세력인 미국과 일본이 영국을 따라 항공모함 건함 경쟁에 뛰어들었다. 1941년 봄에는 미국과 일본 해군이 보유한 항공모함 수에 격차가 생겼다. 일본군은 미 해군의 4척에 비해 10척이라는 결정적 우위를 누렸다. 하지만 전함을 10척씩 보유한 미국과 일본 해군은 아직 전함이 해양 패권을 결정지을 무기라고 보았고 전함에 결정적 역할을 맡길 계획이었다. 진주만 기습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12월 7일 오전 07시 55분, 일본군은 완벽한 기습을 달성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비행기들은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군 전함 8척을 격침하거나 행동 불능으로 만들었고 지상에서 비행기 300대를 격파했다. 150)
항공모함의 유명한 ‘선데이 펀치Sunday Punch’(강력한 타격력―옮긴이)는 탑재한 전투기 36기, 급강하폭격기 36기, 뇌격기 18기의 몫이었다. 표준 전투기는 커다란 덩치의 맷집이 좋은 F6F 헬캣Hellcat으로 일본 전투기보다 성능이 한 수 위였다. 급강하폭격기는 중무장한 복좌식의 커티스SB2C 헬다이버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가장 많이 운용한 급강하폭격기였다. 뇌격기는 뛰어난 설계의 튼튼한 TBF 어벤저Avenger였다. 이 3종은 함께 운용되며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항공모함은 첨단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공, 대수상 수색 레이더와 사격통제 레이더가 있었고, 평면위치표시기plan position indicator(PPI)로 함선들의 항적을 확인하고 다수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부대가 밤이나 악천후에도 고속으로 항진하며 대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피아식별장치IFF로는 적 함선이나 비행기를 식별했다.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차지한 에식스Essex급 항공모함 중 전쟁에서 손실된 배는 한 척도 없었다. 152-3)
41 암호 해독 : 제2차 세계대전 최고의 기술 승리
영국 암호 해독자들이 원래 이용한 무기는 봄베Bombe라고 알려진 전기 기계식 컴퓨터로 앨런 튜링이 상당 부분을 설계했다. 이 기계는 에니그마의 전기회로와 짝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독일군이 저지른 부주의가 끼어들었다. 송신국은 수신국에 자신의 에니그마가 어떤 방식으로 설정되어 송신하는지를 알려줘야 했기 때문에 송신국 운용 요원은 보내는 전문마다 같은 글자가 반복된 문자열을 앞에 첨부했다. 훈련받은 수학자가 이렇게 정해진 패턴을 접한다면 전문을 해독할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1941년에 독일은 모스부호가 아닌 텔레프린터teleprinter(전기신호를 자동으로 문자로 변환해 인쇄하거나 천공 테이프에 기록하는 기계―옮긴이) 전문 송신 방법을 도입했다. 로터가 12개 달린 극도로 복잡한 로렌츠Lorenz 암호기는 전문을 암ㆍ복호화해 천공 테이프의 도움을 받아 1초에 25개의 문자를 송신했다. 에니그마보다 보안이 강화된 로렌츠를 빠르게 해독하는 것은 봄베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155-6)
1943년 5월, 북아프리카에서 로렌츠 암호기 2개를 노획하면서 100개에 가까운 밸브가 달린 반전자식 기계를 제작했다. 얼마 후 영국 우정청British General Post Office(GPO) 연구부의 맥스 뉴먼과 T. H. 플라워스가 만든 더 강력한 콜로서스 기계가 개발되었다. 전자식 릴레이 대신 밸브 1,500개가 달린 이 기계는 1944년 초부터 피시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우정청 팀은 콜로서스의 더 강력한 버전인 콜로서스 Ⅱ를 3개월 안에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블레츨리 파크에 있는 한 건물에서 이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밸브 2,400개를 갖춘 콜로서스 Ⅱ는 마찰 기어로 움직이는 천공 테이프를 장착했는데 광전식 판독기로 읽히는 이 테이프는 제한적으로 메모리 역할을 했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 디지털 컴퓨터인 콜로서스 Ⅱ는 1944년 6월 1일이라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실전에 투입되었다. 1945년 5월 무렵에 블레츨리 파크에는 10대의 콜로서스가 있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모두 파기되었다. 156-7)
42 원자폭탄 : 세계 멸망을 향한 한 걸음
원자폭탄은 19세기 후반의 앙리 베크렐의 방사능 발견, 피에르 퀴리, 마리 퀴리의 라듐 발견, 빌헬름 뢴트겐의 X선 발견과 1900년에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개요를 서술한 베타선의 발견에서 기원한다. 헝가리 태생 유대인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Szilard는 1934년에 특정 원자핵에 중성자neutron로 알려진 입자를 쏘면 이 원자를 쪼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쪼개진 원자는 더 많은 중성자를 방출하며 더 많은 원자핵을 쪼개게 되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사하는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과학자들은 이 에너지를 이용해 가공할 위력을 가진 폭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국에서는 오토 프리슈Otto Frisch와 루돌프 파이어럴스Rudolf Peierls가 폭탄 제조에 필요한 즉시 폭발성 연쇄반응을 생성하려면 우라늄의 드문 변종(우라늄 235)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인공원소인 플루토늄으로도 폭탄을 만들 수 있음을 발견했다. 158)
Chapter 8. 냉전과 그 후
43 탄도미사일 : 핵 억지력의 주축
미 해군의 첫 잠수함 발사 미사일 계획은 레귤러스Regulus와 주피터Jupiter 프로젝트라는 실패작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항 미사일을 전략 미사일로 사용하려고 했으나 순전히 주피터와 레귤러스 미사일의 무게만으로도, 무엇보다 잠수함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 부상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비실용적인 시스템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잠수함은 부상했을 때 제일 취약한데, 연료를 채운 미사일이 갑판에 있으면 더더욱 취약해졌다. 폴라리스와 그 후계자는 순항 미사일보다 매력적이었다. 미 해군은 1956년에 폴라리스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1960년 7월에 첫 SSBN(탄도미사일 원자력 잠수함)인 USS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잠항 상태에서 처음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조지 워싱턴이 탑재한 폴라리스 미사일 16발은 개별 발사 튜브에 수납된 채 정비와 조정을 거쳤고, 관성항법장치로 정확하게 지정된 위치의 수면 아래에서 발사되었다. 목표물은 잠수함과 미사일에 있는 소형 컴퓨터로 설정되었다. 163)
폴라리스의 첫 모델인 A-1은 사정거리가 1,850킬로미터였고 600킬로그램짜리 W47 단일 핵탄두를 탑재했다. 1962년 5월, 도미닉 작전OperationDominic에서 기폭 가능한 (폭발력을 줄인)W47 탄두를 탑재한 폴라리스 미사일이 태평양에서 시험 발사되었다. 미국이 실제 탄두를 실은 잠수함 탑재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경우는 이번이 유일했다. A-1은 유럽 주둔 미군이 전개한 지상 발사 중거리탄도탄 시스템을 보충할 전략자산으로 기획되었다. 중거리탄도탄 시스템은 소련 내륙의 목표물을 공격하기에는 사정거리가 부족했으므로 미국은 기존 핵억지력의 부족한 측면을 보강하기 위해 폴라리스 미사일을 개발했다. 폴라리스 미사일의 다음 버전은 사정거리가 더 길었다. A-3형은 단일 목표물에 넓게 분산할 수 있는 다탄두 독립목표 재돌입 탄도탄(MIRV)이었다. 포세이돈 미사일로 진화한 B-3형은 소련의 대탄도미사일 방어망(ABM)을 압도하기 위한 고속 강화 재돌입 탄두를 14개까지 탑재했다. 163-4)
44 헬리콥터 : 현대 전장에 가장 잘 적응한 병기
1941년에 세계 최초로 헬리콥터를 군사작전에 사용한 나라는 독일이다. 전쟁 전에 수송과 여객용 비행기로 설계된 포케-아흐겔리스Focke-Achgelis Fa 223 드라헤Drache(용)와 이보다 작은 플레트너Flettner Fl.282 헬리콥터가 독일이 운용한 사상 첫 군사용 헬리콥터다. 1950년대 초중반에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식민전쟁을 벌인 프랑스군이 헬리콥터 활용의 선구자가 되었다. 알제리 전쟁에서는 기수 장착 고정식 기관총, 로켓 포드와 유선유도 미사일로 무장한 시코르스키 S-55와 쉬드 알루엣SudAluette이 험지 상공을 비행하며 민족주의자 게릴라들과 싸웠다. 베트남 전쟁은 자연환경상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투 헬리콥터 전술의 시험대가 되었다. 1966년경 대 게릴라 전투counter-insurgency warfare용으로 사용될 헬리콥터에 대한 특별한 소요가 제기되었고 그 결과 벨Bell 휴이Huey UH-1 다목적 수송 헬리콥터 약 1,500대가 베트남 전역에 등장했다. 이 중 상당수는 무장 탑재가 가능하도록 신속히 개조되었다. 166)
처음부터 공격용으로 설계된 헬리콥터인 벨 AH-1 휴이 코브라HueyCobra는 1967년 9월에 베트남에 도착했다. 휴이 코브라는 베트남전의 사역마 보잉-버톨Boeing-VertolCH-47A 치눅Chinook 중형 수송 헬리콥터를 호위할 수 있는 빠르고 무장이 충실한 헬리콥터에 대한 미 육군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진행된 긴급 개발 프로그램의 결과물이었다. 공격력이 강하고 매우 튼튼한 코브라 헬리콥터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작전시간 100만 시간을 기록하며 적 진지와 장갑차량을 공격하고 비무장 수송 헬리콥터를 호위했다. 코브라 헬리콥터의 탑승원들은 나무, 언덕이나 건물 같은 자연적 위장망을 이용해 숨어 있다가 정찰하거나 공격할 때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전술지형비행nap of the earth’ 기법을 다듬어나갔다. 헬리콥터는 속도와 공간 측면에서 고정익기와 아주 다른 환경에서 작전했다. 이로 인해 공대공 요격에서는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었으나 지상에서 발사하는 대공포화와 로켓 공격에는 취약했다. 167)
아파치 헬리콥터는 고강도 전투 조건을 견디고 악천후에서 비행하며 주야를 막론하고 작전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아파치의 핵심 특징 중 하나는 헬멧 탑재 통합 디스플레이 조준 시스템(IHADSS)이다. 조종사 혹은 사수의 헬멧과 30밀리미터(1.2인치)M230 체인건이 연동되어 있어 머리의 움직임에 따라 체인건이 목표물의 위치를 수정ㆍ추적한다. 아파치의 주 착륙장치 사이에 M230 체인건이 있었고 작전에 맞게 무장을 변환할 수 있었는데 주로 AGM-114 헬파이어Hellfire 대전차 미사일과 하이드라Hydra 70 다목적 무유도 70밀리미터(2.75인치) 로켓탄을 함께 탑재했다. 기수 조준기에 탑재한 적외선 전방주시장치(FLIR) 시스템 덕에 아파치는 수백 마일 깊숙이 적진으로 들어가 적을 타격할 수 있었다. 이 능력은 미 공군과 공유한 극초단파UHF 무전 시스템으로 더욱 향상되었는데 이로 인해 A-10, 해리어와 같은 표적 지정기target designator로 자주 활동한 고정익기와 협동 공격을 하기가 수월해졌다. 168)
45 돌격소총 : 전후 세계의 소화기 중 가장 중요한 품목
돌격소총은 단발과 연발을 선택해 사격할 수 있는 소총 혹은 카빈소총carbine으로, 발사 탄약의 총구 에너지와 크기가 권총탄과 전통적으로 위력이 더 강한 소총탄의 중간이다. 이런 종류의 소총은 지원 역할을 맡아 지속 사격에 특화된 경기관총과 소총탄이 아닌 권총탄을 발사하는 기관단총의 중간에 속한다. 널리 실전에 투입된 첫 돌격소총은 독일제 StG44(Sturmgewehr 44, 독일어로 ‘급습’ 혹은 ‘돌격소총’이란 뜻. 1944년부터 배치)이다. 이 소총은 극한의 추위에도 분당 500∼600발의 발사속도를 유지하며 잘 작동했으며 동부전선에서 특히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훨씬 더 대량으로 생산된 드럼 탄창을 단 붉은 군대의 PPS나 PPSh-41 기관단총에 대항하는 것이 StG44의 주된 역할이었다. 가장 유명한 돌격소총인 AK-47(아브토마트 칼라시니코바Avtomat Kalashnikova 모델 1947)은 단발ㆍ연발 선택이 가능한 가스 작동식 돌격소총으로서 발명자인 소련의 무기 설계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70-1)
1959년에는 프레스 공법으로 제작한 금속제 총몸과 반동으로 총구가 솟는 현상을 상쇄하기 위한 경사형 소염기를 갖춘 경량 개량형 모델이 도입되었다. 이 모델AKM(Avtomat Kalashnikova Modernizirovanni)은 다른 모델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량이 생산되었다. 칼라슈니코프에는 1930년대 이래 소련 무기 설계의 가장 좋은 점들이 압축되어 있다. 그가 설계한 총은 단순하고 간편하며 유지 보수가 쉽고 부주의한 취급과 오염을 견디면서도 계속 작동했다. 여기에는 내부를 크롬 도금한 총열과 약실, 가스 피스톤과 가스 실린더가 도움이 되었다. 20세기에 생산된 대부분의 군용 탄약(그리고 사실상 구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군의 탄약 전부)에는 염소산칼륨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사격할 때 화약에 든 염소산칼륨이 부식성 있고 습기를 잘 흡수하는 염화칼슘으로 바뀌어서 영구적 피해를 막으려면 계속 청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군용장비 부품 다수는 크롬으로 도금되어 있다. 172)
46 제트전투기 : 새로운 전술 혁명을 촉발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몇 달 전, 루프트바페는 유럽 상공에 처음으로 제트전투기를 실전에 도입했다.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Me 262다. 하지만 제트전투기 대 제트전투기의 공중전은 한국전쟁(1950∼1953)에 와서야 벌어졌다. 더 빨라진 속력과 더 복잡해진 계기류로 인해 세심한 비행기술이 요구된 새로운 전투 조건은 새로운 종류의 조종사를 낳았다. 더욱이 제트전투기가 달성한 속력과 고도는 전면적인 전술 혁명을 촉발했다. 이로써 적기의 꼬리를 잡으려는 도그파이트dogfight는 종언을 고하는 듯했다. 막상 한국전쟁에서 전투를 치러보니 도그파이트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은 시기상조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중간 시기에 또 한 번 혁명적인 변화가 생겼다. .50구경 브라우닝 기관총은 20밀리미터(0.79인치) 기관포와 공대공미사일로 대체되었다. 미사일 유도 시스템, 전투기 탑재 레이더, 공중 재급유는 베트남 상공을 비행하던 조종사들이 공중전 생존기법과 아울러 숙지해야 할 필수사항이었다. 174)
한국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을 보인 전투기는 F-86 세이버F-86 Sabre 전투기였다. 베트남전쟁 최고의 전투기인 F-4 팬텀F-4 Phantom Ⅱ에는 조종사 1명, 레이더 관제사Radar Intercept Officer(RIO)1명이 탑승했다. 팬텀은 아군 공역에 침입한 적기와 교전하는 것이 아닌 적지 상공에서 먹잇감을 찾는 공중우세를 위해 설계된 전투기이다. 팬텀은 강력한 펄스 도플러Pulse Doppler(짧고 강한 펄스 전파를 발신해 반사신호를 도플러 효과를 이용해 분석, 목표물의 속력을 알아내는 레이더―옮긴이) 레이더를 장착하고 스패로Sparrow 미사일과 사이드와인더Sidewinder 미사일 4발로 무장했다. 초기 모델에는 기관포가 없었으나 F-4E형은 20밀리미터(0.79인치) M61 벌컨Vulcan 회전 다총신 기관포를 장비했다.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은 표적이 된 비행기가 방사하는 적외선을 따라 유도된다. 사이드와인더가 가장 효과적인 상황은 적의 꼬리를 물고 추격할 때였는데, 목표물의 배연기로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5)
47 스텔스 : 역사상 가장 비싼 군용기 B-2
독일은 1944년부터 작전에 투입된 7C형 잠수함에 구멍이 난 내층과 매끈한 외층으로 이루어진 합성고무 피복을 씌웠고 그 덕에 U-480은 연합군 소나의 탐지를 피할 수 있었다. 루프트바페 역시 원시적인 스텔스 기술을 시험했다. ‘전익기flying wing, 全翼機’ 형태를 띤 제트기인 호르텐Horten Ho. 229는 1945년 1월에 처음으로 비행했으나 실전에 투입되지는 못했다. 이 비행기의 혁신적인 설계는 전후 미국의 노스럽Northrop사가 만든 8발기인 YB-49에 반영되었고, 그 직계 후손인 B-2 스텔스 폭격기가 1989년 여름에 처음으로 비행했다. 1950년대에 철의 장막 양편의 군용기 설계자들은 레이더 반사 면적Radar Cross-Section(RCS), 즉 레이더에 나타나는 표적의 크기 단위를 줄이는 방법을 개발했다. 1964년, 록히드Lockheed사는 고공에서 작전하며 레이더 탐지를 피할 정도로 속도가 빠른 SR-71 블랙버드Blackbird 정찰기를 만들었다. 1980년대 록웰Rockwell B-1 폭격기에도 스텔스 기술의 여러 양상이 반영되었다. 178-9)
첫 스텔스 비행기는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단좌전투기로 1983년 10월에 처음으로 일선에 배치되었다. 다면으로 된 기체는 레이더 신호 반사를 목적으로 설계되었으며 애프터버너afterburner(제트 엔진의 배연을 재가열해 추력을 증대하는 장치―옮긴이) 없는 터보팬 엔진 2개가 동력원이다. 스텔스 설계로 생긴 제약 때문에 나이트호크Night Hawk는 아음속subsonic(마하 0.5∼0.8 정도의 속력―옮긴이)만 낼 수 있었다. 전투기로 분류되었으나 나이트호크는 실제로는 전투폭격기였다. 나이트호크에는 레이더가 탑재되지 않아서 단면적에서 전파 배출이 낮아졌다. 일반적 폭장량은 2,270킬로그램이었고 페이브웨이Paveway 레이저유도폭탄과 관통 폭탄 혹은 통합정밀직격병기Joint Direct Attack Munition(JDAM) 2발과 원거리 투하 유도폭탄 1발로 구성되었다. 제1차 걸프전쟁 동안 나이트호크는 걸프 전역에 있는 미군기 수의 2.5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미 공군의 전략목표 40퍼센트 이상을 타격했다. 179-80)
노스럽 그러먼 B-2 스피릿B-2 Spirit은 적 방공망을 깊숙이 뚫고 들어가 통상무기와 핵무기를 투하 발사하기 위해 설계된 스텔스 중폭격기다. B-2는 음향, 적외선, 시각, 레이더 피탐지 특성이 줄어들어 스텔스성을 얻었다. 애프터버너 없는 터보팬 엔진 4개는 배연 피탐지 특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날개에 푹 파묻혀 있다. 레이더파를 흡수하는 복합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전익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리딩 에지leading edge(날개 앞부분 끝단―옮긴이)가 줄어든 B-2의 윤곽선을 레이더로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B-2는 1997년 1월에 작전 능력을 획득해 2년 뒤에 코소보 전쟁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나와 분쟁 첫 두 달 동안 선정된 세르비아군 목표물의 3분의 1을 폭격했다. B-2는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주리주 화이트먼Whiteman 기지까지 왕복 비행했다. B-2는 항구적 자유 작전에서 공중급유 지원을 받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목표물 폭격 임무를 달성하면서 가장 긴 비행거리를 기록한 작전 하나를 수행했다. 180)
48 크루즈 미사일 : 자체의 힘으로 날아가는 미사일
1947년 5월, 미 공군은 B-29, B-36 피스메이커Peacemaker와 B-52 스트래토포트리스Stratofortress에서 발사할 수 있는 초음속 지대공 미사일 제작 계약을 벨 항공기 회사Bell Aircraft Company와 체결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GAM-63 래스컬Rascal 미사일이었다. 래스컬은 이 미사일의 유도 시스템인 레이더RAdar 스캐닝SCAnning 링크Link의 약어이다. 래스컬은 1957년에야 미 공군이 도입해 일선에 배치했다. 이 미사일은 액체연료 로켓 시스템으로 추진되었고 표적의 위치가 미리 프로그램된 관성 유도 시스템을 사용했다. 래스컬은 1961년에 하운드 독HoundDog 미사일로 대체되었다. 이 미사일에는 최신 TERCOM(지형대조항법terrain–contour matching) 유도 시스템이 실렸다. 이 시스템은 미사일에 비행경로의 상세한 지도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운드 독 미사일은 지나가는 지상의 모습을 이 지도와 계속 대조해 가며 필요하다면 진로를 수정하며 사전 지정된 경로를 유지했다. 182-3)
토마호크는 1970년대에 개발된 장거리, 전천후 아음속 미사일로 현재 미국과 영국 해군 수상 함정 및 잠수함에 탑재되어 있다. 토마호크는 로켓 보조를 받아 발사된 다음 터보팬 엔진으로 동력을 전환한다. 토마호크의 엔진은 거의 열을 발산하지 않아서 적외선 탐지기로 발견하기가 어렵다. 토마호크는 목표물까지 최대 항속거리 1,126킬로미터를 초저공에서 고아음속으로 ‘순항’하며 임무에 따라 맞춰진 여러 개의 유도 시스템으로 회피 경로를 따라 조종된다. 토마호크 지상 공격 미사일(TLAM)은 TV 카메라를 장착하고 목표 주변을 배회할 수 있으며, 지휘관들은 목표물에 입힌 피해 정도를 평가하고 필요한 경우 다른 목표로 미사일을 보낼 수 있다. 비행하는 동안 토마호크는 메모리에 있는 GPS(전 지구 위치파악 위성global positioning satelite) 좌표나 다른 어떤 GPS 좌표로 사전에 지정한 목표 15개 중 어느 것으로든 다시 프로그램해서 목표물을 바꿀 수 있다. 183-4)
49 무인 공중전 : 미래의 군용기 UCAV
1980년대에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방부는 처음에 ‘냇Gnat’이라고 부른 정찰용 드론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1994년 7월, 제너럴 어토믹스 에어로노티컬 시스템사가 프레데터Predator UAV(unmanned aerial vehicles)의 제작 계약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 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발칸 반도에 처음으로 프레데터 UAV를 배치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이 개시된 2001년경에 미 공군은 프레데터 60기를 획득했다. 그중 20기를 작전 중에 상실했는데 대부분 악천후가 원인이었다. 그 후 제빙 시스템과 항공 전자 장비를 개량했다. 발칸 작전 이후 프레데터는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하는 공격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프레데터가 정숙성이 뛰어나고 헬파이어가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미사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강력한 결합이었다. 처음에는 프레데터를 운용기지 근처에 세워둔 밴에서 조종했으나 2000년경 통신 시스템 개선으로 아주 먼 거리에서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185)
MQ-9 리퍼는 고공에서 장시간 체공하며 정찰 임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된 첫 헌터 킬러hunter-killer UCAV다. 탑재한 950마력 터보프롭 엔진은 프레데터의 엔진보다 출력이 강하며 이로 인해 열다섯 배 더 무거운 중량을 탑재할 수 있고 순항속력은 세 배 빨라졌다. 완전 전비중량으로 비행할 때 리퍼는 14시간까지 체공할 수 있으며 탑재 무장을 줄이고 증가 연료탱크를 장착하면 42시간까지 체공시간을 늘릴 수 있다. 리퍼에는 헬파이어 미사일, 225킬로그램 레이저 유도 폭탄과 통합정밀직격병기JDAM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무장을 탑재할 수 있다. 리퍼에 탑재된 유도장비는 ‘멍텅구리’ 무유도 폭탄을 전천후 ‘스마트’ 폭탄으로 바꿀 수 있다. 리퍼 운용원은 열 카메라를 비롯한 여러 센서를 이용해 목표물을 수색하며 지형을 관측할 수 있다. 리퍼에 탑재된 카메라는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자동차 번호판을 읽을 수 있다. 운용원이 내린 명령은 위성 링크를 거쳐 몇 분의 1초 만에 리퍼에 전달된다. 186)
50 사이버 전쟁 : 전쟁의 다섯 번째 영역
최초의 사이버 전쟁으로 자주 인용되는 사건은 2001년 4월에 미군 EP-3 아리에스 ⅡAries II 스파이 비행기가 남중국해에서 중국 전투기와 충돌한 다음 벌어졌다. 사건 후 몇 주 동안 중국과 미국에 있는 수천 개의 웹사이트가 변조되거나 해커의 공격을 받았다. 사이버 전쟁은 2006년에 이스라엘이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를 처치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 국방군IDF 정보부는 허위 정보 전술을 이용해 헤즈볼라의 지원을 받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을 무력화하고 헤즈볼라 웹사이트에 서비스 거부 공격을 벌였다. 2007년에는 논란거리가 된 전쟁기념물인 탈린의 청동병사Bronze Soldier of Tallinn를 이전한 후 에스토니아가 러시아로부터 사이버 공격을 받았다. 에스토니아 정부 부처, 은행과 언론매체가 주요 공격목표였다. 2008년 8월, 단기간 지속된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공습 및 병력 이동과 동시에 구 소련 국가인 조지아에 사이버 공격을 개시했다. 189)
안전하지 않은 인터넷 연결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으로 인해 e-공격이 들어올 경로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Malicious software(악의적 소프트웨어)’의 약어인 멀웨어Malware는 목표 컴퓨터 시스템을 파괴 또는 방해하거나 정보 수집을 위해 침투하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스턱스넷Stuxnet 웜은 특정 산업 시스템을 감시하고 전복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복잡한 멀웨어로, 산탄총이라기보다 저격소총처럼 작동한다. 2009∼2010년에 스턱스넷의 주된 목표는 이란의 나탄즈Natanz에 있는 우라늄 농축 공장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민간 에너지용 프로그램이었지만 결국 핵무기 개발의 전주곡이 아니냐고 의심받았다. 감염된 메모리 스틱을 통해 침투한 것으로 추정되는 스턱스넷은 나탄즈 공장의 원심분리기 속도를 바꿨고, 결국 원심분리기 약 1, 000대가 철거 후 제거되었다. 스턱스넷은 이란 핵 개발을 2, 3년 후퇴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이 공격의 배후에는 미국의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 정보부가 있었다.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