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법률가들 -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헤린더 파우어-스투더 지음, 박경선 옮김 / 진실의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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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나치의 법이론은 형식주의와 실증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의 통합', '명예', '인종적 동질성', '인종적 평등' 같은 실체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법의 실질적 개념을 선호했다. 개인의 권리는 군주와 신민의 적대적 관계에서 비롯된 잔재로 취급되며 저만치 밀려났다. 신뢰에 기초한 지도자Führer와 민족공동체의 단단한 결속관계와 무관하다는 이유였다. '독일적인 것'과 '독일법'이 나치 법이론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빌헬름 코블리츠는 나치당의 1920년도 강령 제19항이 이미 로마법을 독일 공동체법Gemeinrecht으로 대체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상기시킨다. 로마법은 〈유물론적 세계질서에 복무〉해 왔지만 독일의 공동체법은 일상을 규제받는 당사자들인 민족동지Volksgenossen의 도덕감정이나 정의감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코블리츠는 이런 방식으로 법과 도덕 간의 대립이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익은 사익보다 앞선다〉라는 원칙에 따라 법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신 공동체를 육성해야 했다."(20-1)


"히틀러의 생각들, 즉 『나의 투쟁』과 여러 연설에서 길게 늘어놓았던 장광설을 규범적 언어로 옮기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치 법이론가들은 필요한 규범적 틀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법률가들은 고전적인 정치철학을 근거 삼아, 총통의 포괄적 권위는 그가 집단적 의지를 개인 인격으로 체화한 것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루소의 『사회계약론』 속 주권(일반의지)의 토대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물론 이들은 루소의 의도가 민주정 형태는 아니라 해도 공화정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너무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규범적으로 좀 더 넓게 해석하려 했다. 헌법학자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총통은 (존재질서Seinsordnung에 실질적 토대를 둔) '인민Volk'의 객관적 의지를 지닌 자〉로서 〈자기 내면에 민족주의적völkisch 집단의지를 형성함으로써 제각각인 모든 소망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인민의 전체성을 구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5-6)


"민족사회주의가 모든 시민의 삶을 통제하려는 것은 계몽철학적 기본원리와 충돌했다. 이는 민족사회주의 법사상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 및 법철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설명해 준다. 결국, 칸트가 법과 윤리를 구분한 것은 법적 권위를 시민의 윤리적 태도로까지 확장하는 민족사회주의 국가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나치 법률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에 기댈 수는 없는데도 특정 개념들─선의지, 무조건적인 의무, 정언명령 등─만 맥락에서 벗어난 채로 끌어다 쓰면서 윤리에 관한 고찰을 도구로 이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윤리적 의무는 행복이나 효용성 극대화 같은 목적과 별개로 유효하다는 칸트의 주장도 당연히 잘못 해석되고 말았다. 민족사회주의 수사rhetoric는 윤리적 의무가 그 자체로um ihrer selbst willen 유효하다는 칸트의 사상을, 당사자의 동의나 정당한 이유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의무로 간단히 바꿔버렸다."(28-9)


2장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제3제국으로


"'독재조항Diktatur-Artikel'이라고도 불리는 바이마르헌법 제48조 제1항은 대통령이 필요 시 특정 주가 헌법적으로나 법적으로 제국에 부여된 임무를 이행하도록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제2항에서는 공공질서와 안전이 훼손되거나 위험에 처할 경우 제국 대통령이 이를 회복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규정했다. 대통령은 군사력 지원을 요청할 권리 외에도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보호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들을 폐지할 권한이 있다." "이토록 광범위한 집행권한을 부여하는 법조항이 어떻게 의회민주주의 헌법에 파고들었을까? 첫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때, 헌법 초안 작성자들의 당초 목적은 파괴적일 수 있는 극우파와 급진좌파의 영향력에 맞서 공화국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둘째, 헌법위원회의 구성원 중 일부는 제국 의회가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며 필요한 개혁을 방해할 것을 우려했다. 특히 막스 베버는 대통령을 의회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세우자고 역설했다."(47-8)


"당시 기본적인 논리는 이랬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은 '민의'에 의해 승인과 지지를 받았다. 반면, 정부 내각은 정당들을 대표하여 전략적으로 정치적 협상을 벌인 결과물이기 때문에 대통령만큼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정치적 타협에 의존했던 반면 제국의 대통령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은 입장이었다. 따라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통합과 안정의 상징이었으나, 정부는 갈등으로 점철된 의회의 힘겨루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반영하는 존재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두 주요 정치기관의 규범적 토대에 대한 이런 견해는 보수우파 진영에서 두드러졌다. 대통령에 대한 헌법의 광범위한 권력 보장에다 위계적 국가에 대한 독일 내의 폭넓은 지지까지 결합하여 권위주의가 부상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일부 주요 조치들이 정당한 헌법적 규범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49)


"1919년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 동안 에베르트 제국 대통령은 작센 및 독일 북부에서 공산주의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무려 일곱 차례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에베르트는 제48조를 대대적으로 활용한 데 이어 입법권을 의회에서 내각으로 이양하는 「수권법Enabling Acts」으로 정치와 경제를 안정시키려 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총 8개의 「수권법」이 통과되었다. 처음에 제48조 제2항은 정치적 불안과 격변을 억제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23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는 사이 '입법독재'나 다름없는 대통령의 입법활동이 의회입법을 대체하자 대통령과 의회 사이에서 권력의 추가 대통령 쪽으로 기울어버리는 상황이 됐다. 1925년은 바이마르공화국 제1기가 종말을 고한 해였다. 그해 2월 에베르트가 사망했고, 뒤이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성향이자 반反공화주의 입장으로 유명한 육군 원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민당 후보를 제쳤다."(49-50)


"1932년 7월 20일, 프란츠 폰 파펜 제국 총리는 오토 브라운 총리가 이끌던 프로이센 내각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을 연방 전권위원 치하로 복속시켰다. 파펜이 보인 과감한 행보의 법적 근거는 제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승인한 긴급명령이었다." "파펜의 조치에 대해 프로이센주 정부는 법치를 따르는 동시에, 통상적으로 제국과 개별 주 사이에 분쟁 조율을 담당하던 라이프치히 법원(국사재판소)에 해당 문제를 가져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1932년 10월 25일, 국사재판소는 '프로이센 대對 제국' 구도에서 프로이센 정부는 제국에 대한 의무를 위반한 바 없으나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고(즉 제48조 제1항이 아니라 제2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이 같은 판결은 프로이센 정부의 권한을 제국에 이양하는 것도, 프로이센 총리 및 각료들을 파펜이 해임한 것도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프로이센 경찰력을 장악하려는 조치는 제48조 제2항에 부합한다고 판결했다."(52-4)


"국사재판소의 결정은 당시 대표적인 법이론가인 카를 슈미트와 한스 켈젠의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슈미트는 국사재판소의 법적 절차에서 제국 측 변호를 맡아 프로이센주를 상대로 한 제국의 조치를 옹호했다." "슈미트가 추론한 핵심은 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명령을 실행할 권리를 부여하며, 이 경우 대통령은 그저 자신의 헌법적 권력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 안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정말로 대통령의 결정을 정당화할 만했느냐는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경우 힌덴부르크가 제48조를 동원한 것이 과연 헌법에서 제48조를 적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 상황에 해당했는가이다. 슈미트는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헌법적 권한을 지닐 뿐 아니라 헌법의 수호자 역할도 담당하므로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정치적 재량에 달린,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같은 의문을 무마하려 했다."(54-6)


"슈미트의 주장에 반대한 켈젠은 제국 대 프로이센의 문제를 민주주의적 「바이마르헌법」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켈젠이 보기에 대통령은 헌법의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하며, 여기에는 헌법의 기본적인 규범 원칙을 존중하는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그는 제국의 대통령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특수한 지위를 누린다는 슈미트의 가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힌덴부르크의 명령을 평가할 결정적 기준은 '제48조를 발동하기 위한 헌법적 요건이 충족되었는가'라고 생각했다. 켈젠이 비판한 지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제국 대통령의 명령은 위헌적이었고, 국사재판소인 라이프치히 법원의 판결에 일관성이 없었으며, 법원 판결의 결함은 상당 부분 제도적 실패─바이마르 내 헌법재판소의 부재─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켈젠은 헌법 사법권(관할권)의 열성적인 옹호자였다. 그는 삼권분립이 명확히 이루어진,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국가에는 헌법재판소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59-61)


3장 총통국가


"나치 법이론가들은 히틀러의 정치적 쿠데타를 '합법적 혁명'으로 규정하여 혁명적 동력과 법적 정합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 했다. 이들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긴급명령에 의한 통치와의 연속성을 지적하며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것은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나치 정권은 「바이마르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거나 제국의 대통령을 축출하지는 않았지만, 「수권법」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권력을 장악할 형식을 갖춘 것만은 분명했다. 카를 슈미트는 〈오늘날의 국가를 구속할 수 있는 어떤 토대도, 한계도, 그 어떤 중요한 해석도 폐위된 옛시대로부터 나올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 "('헌법적 의미의 혁명'을 언급했던) 울리히 쇼이너는 합법적 혁명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민운동Volksbewegung, 전통적 법질서와의 단절, 국가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건하는 새로운 정치원칙이었다. 쇼이너는 〈진정한 혁명〉인 나치의 장악이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했다."(73-5)


"민족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요소는 인민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였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민족 구성원들은 오직 공동체적 질서 안에서만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윤리적 삶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이너는 민족사회주의 법질서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국가의 필수재, 명예, 국민 건강, 관습, 전통〉을 수호하는 데 역점을 둔다고 봤다. 국가에 맞선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의무가 지상 최고의 가치였다. 소위 지도자 원칙Führerprinzip─나치 독일의 조직 원리로 〈지도자의 말씀이 모든 성문법에 우선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외에도, 민족공동체 원칙Volksgemeinschaftsprinzip이 법의 원천 즉 법원Rechtsquelle, 法原이 되었다." "민족공동체라는 개념이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한, 이는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그 위에 투사하기 좋은 배경이 되었다. 민족사회주의의 인종 독트린은 신화적 공동체의 가장 암울한 이데올로기를 나타낸 것이었다."(77, 81)


"카를 슈미트는 1932년 작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전체국가total state'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그는 전체국가는 19세기 자유주의 '중립국neutral state'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모든 사회 영역을 아우르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므로 전체국가는 전 국가적 통제로부터 특정 영역들(슈미트는 경제를 비롯하여 종교, 문화, 교육을 언급했다)은 제외해 주는 중립성이라는 자유주의 원칙을 폐기했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적절한 개념은 정치적인 것이 전제되었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즉, 모든 정치적 행동의 근원─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도덕의 바탕이 '선과 악'의 개념이고 경제의 토대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범주이듯, '친구'와 '적'은 정치 영역의 구성요소였다. 슈미트는 이런 기본 개념들은 〈구체적인 실존주의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전체적 통일성을 상대화하지 않고 정치 영역의 내적 역동을 표현한 개념이었다."(82-3)


"법 이론가 오토 쾰로이터는 전체국가total state와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어서, 전체국가의 권한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할 것이라고 보았다. 쾰로이터는 민족사회주의 정치체계를 권위주의 국가의 형태로 이해하고자 했다." "쾰로이터가 말한 권위주의 국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우선시할 수 없는 〈공동체 윤리〉에 뿌리를 두었다. 반면에, 권위주의 국가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을 위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쾰로이터가 보기에 민족사회주의 국가는 이러한 기준을 충족했다. 정치적 힘이 공동체의 이익에 봉사하므로 총통의 권력은 단순한 지배와 폭정 수준을 초월했다. 그는 전체국가와 대조적으로 〈권위주의 국가의 본질은 국민의 신뢰를 받은 국가권력의 존재에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진정한 리더십의 증표는 총통의 의지가 곧 국민의 의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된다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86-7)


"민족공동체 원칙은 지도자 원칙에 이은 두 번째 법의 원천이었다. 지도자 원칙이 공동체 원칙보다 우선하는지 아니면 동등한지라는 난제에 봉착하면, 나치 법률가들은 총통에게는 무엇이 인민에게 최선이고 어떻게 하면 독일의 연속성과 번영을 보장할지 정확히 알아내는 인식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문제를 회피했다. 즉 총통은 인민의 의지에 대한 직접적인 발현이며, 더 나아가 인민의 의지와 동일체라는 주장이었다." "총통의 절대적 권위를 이런 방식으로 옹호한 것은 나치 국가에 통제 메커니즘이 부재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였다. '민족'의 질서에 대한 온전한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정치적 리더십은 스스로 좋고 옳다고 판단한 것을 명령하게 됐다. 총통의 명령과 지시는 마음 깊은 곳의 충성심과 윤리적 헌신으로 복종해야 하는 법규나 마찬가지였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법적 의무와 윤리적 의무를 뒤섞어 버렸다. 이 왜곡된 규범 속에서 윤리, 법, 정치가 한데 맞물렸다."(102-3)


4장 민족사회주의 형법


"나치 체제에서 형법은 민족공동체의 순수성과 정권이 가진 불가침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범죄자들'을 겨냥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법사상가들(저명한 대학교수 및 법무부 소속의 고위공직자 등) 사이에서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자유주의적 형법을 민족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부합하는 체계로 어떻게 대체할 것인지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다. 다시 말해, 이들은 법률뿐 아니라 민족공동체에 대한 충성 의무를 위반한 경우까지도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을 수정할 방법을 찾았다. 1930년대 중반부터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도' 중심의will-based 형법이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에 가장 잘 부합하리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런 법에서는 범죄자의 범행이라는 실제 결과보다는 범죄 의도가 책임과 죄책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이다. 따라서 앞으로 형법은 행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신념과 태도에도 초점을 맞춰야 했다."(106)


"그럼에도 정권은 법률가들의 정치적 굴종에 보답하지 않았다. 1939년 12월 중순 히틀러는 법무부가 새롭게 마련한 형법 초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이로써 6년에 걸친 대대적인 형법 정비작업은 무산되었다. 히틀러가 법적 규제에 대해 미적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1939년 9월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신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어떤 규범적 규제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더 강해졌다. 명확히 구체화된 법적 규범과 법령을 인정한다면 나치 정권이 형사 사법권을 장악하는 데 제동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윤리적 규범과 법적 규범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나치 국가의 강압적 권력은 더 확대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개인의 양심에 규제를 맡겼던 윤리적 의무는 이제 법적 의무가 되었고, 민족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위반한 것은 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같은 윤리적 의무와 법적 의무의 통합은 윤리적 품위와 진실성, 범죄성 사이의 경계를 흐려놓았다."(108-9)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형법은 시민들이 특정 행위가 불러오는 부정적 결과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처벌은 법에서 잘못되었다고 명확히 정의한 행위에 대한 대응이다. 처벌은 나쁜 것이지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복수는 물론이고 보복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보복과 복수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 매여있으므로, 신뢰할 만한 형사 사법권의 안정적인 지침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나치 법이론가들에 따르면 보복은 형법의 핵심이었다. 나치 국가의 대표적인 형법학자인 에드문트 메츠거는 처벌의 본질과 목적을 구분했다. 처벌의 본질은 정당한 보복 대응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그 목적은 민족공동체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라고 했다. 메츠거는 보복 또한 예방적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복은 형을 선고받은 개인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교육적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치 국가의 형법 정책은 민족공동체 내에서 증오와 복수의 정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114-7)


"법의 도덕화는 충실, 충성, 명예 같은 특성이 형법 속에 스며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몇몇 나치 법이론가들은 명예처벌Ehrenstrafe을 재도입하는 데 찬성했다. 킬대학 형법학 교수인 게오르크 담은 이 같은 명예처벌은 형법을 〈범죄에 맞서 싸울 합리적 기법〉으로 보는 관점과 〈법의 영역에 개인 차원을 초월한 존엄까지 포함하여 민족의 삶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 통합하는〉 관점으로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에 따르면 〈법은 단지 시민의 외적 공존을 규제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는 법적 행동에만 관심을 둔다. 범죄자의 신념Gesinnungen은 상관하지 않는다. 국가는 권리를 박탈할 수 있지만 명예를 박탈할 수는 없으며 내적 신념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과 윤리, 형법과 민족에 대한 인식Volksanschauung이 함께 자라는〉 법 체계 속에서는 명예처벌을 없앨 수 없다. 실제 각 공동체는 구성원의 충성과 명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120-1)


"나치 법이론가들은 자유주의적 형법의 주요 원칙, 즉 어떤 행위를 처벌하려면 범행 발생 시점에 처벌 가능하다고 법적으로 공표된 경우에 한한다는 원칙을 거부했다. 사법권한의 자의적 행사에 맞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 없으면 범죄도 없고, 처벌도 없다nullum crimen, nulla poena sine lege'는 이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나치 법학자들은 〈범죄자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고 비난했다. 법률상의 허점이나 법안의 불안전함을 근거로 범죄자에게 처벌을 피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었다. 법학자 카를 셰퍼는 자유주의적 준칙이 판사의 자유 재량에 족쇄가 되어 판사를 한낱 〈분류 기계Subsumtionsmaschine〉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치 법학자들은 '법 없으면 범죄도 없고, 처벌도 없다'를 '처벌 없는 범죄는 없다nullum crimen sine poena'로 대체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각 범죄마다 법으로 규정된 범행이 성립하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처벌과 속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123)


5장 인종주의적 입법


"민족사회주의에 동조한 법이론가들은 놀라울 정도로 나치의 인종 독트린을 수용했다. 수많은 법률 해설자료에서 '인종'을 〈전형적인 신체적 특색과 정신적 특징에 의해 여타 인간 집단과 구분되는 인간들의 집단〉으로 규정한 귄터의 정의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이런 차이가 동질성Artgleichleit과 이질성Artfremdheit 간의 경계를 결정했으며, 이는 결국 법적 권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됐다." "쾰로이터는 국가의 토대와 통치에 대한 자신의 구상이 가져올 극단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리더십은 동질적 인간 십단을 상호보완적으로 조직하고 적의 세력을 저지하며 때에 따라서는 말살할 수도 있는 힘이다. 즉, 모든 리더십은 내적 질서를 생성하고 자체적인 힘을 사용해 방해 세력을 퇴치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이 법률가들은 인종적-생물학적 요인을 범죄와 직접 연관 짓기도 했다. 범죄 예방은 독일 공동체에 대한 인종적 보호를 수반했다."(163-5)


"나치 법률가들은 사실is과 당위ought의 이분법을 단순한 법실증주의의 구성 개념에 불과하다고 맹비난하면서 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법실증주의는 민족적 법사상의 기본 전제들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논지는 분명했다. 주어진 민족의 생활질서, 즉 존재의 법칙에서 출발하는 민족중심적 법학에서 경험과 규범의 영역이 융합되어 사실/당위의 차이는 소멸되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인 것과 규범적인 것의 이 같은 통일은 법이론가들이 인종 개념을 활용할 때 재량권을 부여했다. 나치 사상가들은 '사실'과 '당위'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은 채 경험적 차원에서 규범적 차원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도움이 되면 두 차원을 쉽게 뒤섞어버렸다. 이들 사고방식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자연과학적' 전제로부터 규범적 결론과 의무적 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용되는 것이었다. 이런 전략은 이후 통과된 인종주의 법에 사이비과학적 근거를 부여했다."(167-8)


"론 L. 풀러는 『법의 도덕성』에서 법의 8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즉, 법체계는 (임시 방편의 결정이 아닌) 일반 규칙들로 구성되어야 하고, 이 규칙은 일반에 공개되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너무 자주 바뀌지 않아야) 하고, 모순되지 않아야 하며, 따를 수 있어야 하고, 소급 적용되어서는 안 되며, 공표된 규칙과 실제 집행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영향을 직접 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법적 규범의 공표와 투명성은, 풀러가 생각한 법질서로서의 자격을 갖춘 규칙 체계의 핵심 요건이었다. 제3제국의 인종 정책이 전개되고 급진화된 과정, 특히 공표된 법에서 비밀스런 산업 수준의 대량학살 계획으로 전환한 것은 풀러가 제시한 조건이 적절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불가능성이 가져온 결과는 주목할만하다. 모든 규정을 공개해야 한다는 그 간단한 요건이 나치 정권이 최악의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90-1)


6장 경찰법


"제3제국 초기에 경찰권력은 1933년 2월 28일 자 「제국의회 화재 법령」에서 비상시에 허용한 특별조치를 기반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차츰 경찰의 주요 기능을 총통국가를 건설하고 수호하는 일로 규정하면서 결국 행정집행 권한을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데─실정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나치 경찰법 전문가였던 발터 하멜은 경찰은 〈모두가 민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민족의 가치Volkswerte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역할을 준수하는지 확인〉할 임무를 띤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보았다." "경찰을 국가권력의 비이성적이고 정의하기 힘든 측면과 결부하는 이런 수사rhetoric는 힘러가 경찰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만드는 것을 뒷받침했다. 게다가 나치 법률가들은, 포괄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확히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준비가 되어있는 국가를 지지하면서도 경찰이 더 이상 그런 권리 침해를 막지 않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202-4)


"3차 「게슈타포법」의 초안 작성자이자 게슈타포의 법률 자문이었던 베르너 베스트는 〈인종주의적 총통국가에서 정치경찰의 사상과 정신〉을 정의하면서 경찰의 임무를 인종 위생과 연결하기도 했다. 〈[정치경찰은] 각 질병의 증상을 시의적절하게 인식하고 파기의 원인균이 내부의 부식에 의해 생겨났는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의도적으로 독이 주입된 것인지 확인하여 적절치 못한 것은 뭐든 제거함[으로써] [···] 독일 정치체의 위생을 신중하게 감독하는 기관이다.〉 베스트의 저술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현혹된 나치 친위대 법률가의 토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경찰법에 관한 당대의 공식적인 주요 해설이었다. 실제로, 1940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독일경찰』은 개인주의적-인도주의적 국가(개인들 간의 합의 의지 개념 고안)와 민족국가를 구분했고, 이는 경찰의 지침서가 됐다. 그가 보기에 경찰은 〈분열과 파괴에 맞서 민족적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질서 및 안보 서비스〉에 해당했다."(206-7)


"나치 국가에는 성문화된 경찰법이 없었다. 고정된 법체계 안에서 경찰권력의 범위를 규정했다면 독재정권의 정치적 야욕을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치 법률가가 초안을 작성한 유일한 법이었던 「게슈타포법」에는 행정 관료체계로부터 정치경찰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이들을 강화하려는 계산만이 담겨있었다. 나치의 법 관련 저술들은 전통적 규범의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에 대한 이론적인 자양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행정 관료체계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총통의 의지라는, 사실상 개인화된 이 형태가 국가 행정보다 우선했지만, 행정부는 나치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전통적인 법적 안정성이라는 중요한 연속성을 제공했다." "베스트는 경찰이 나치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통적인 형태의 합법성을 초월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당성 유지를 위해 관료국가Beamtenstaat와 최소한의 유대관계는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만큼 나치 국가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214, 217-8)


7장 나치 친위대의 사법관할권


"1939년 10월 17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나치 친위대와 경찰사법권은 무장친위대원, 친위대 특무대원, 참전 경찰부대원의 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군사법원은 나치 친위대원의 정치적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들을 재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힘러가 나치 친위대 내부에 특별 사법체계를 만든 것은 단지 무장친위대원들과 나치 친위대 특무대원들을 국방군의 군사법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법을 나치 친위대 사법체계의 수중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제3제국 권력구조 안에서 나치 친위대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역사학자 제임스 바인가르트너의 표현에 따르면 나치 친위대 판사는 〈전통적인 판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처신해야 했다. 법조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상적으로는 법조문보다도 (나치 친위대 정신에 부합하는) 원칙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투사이자 교육자여야 했다.〉"(224-6)


"나치 형법이론의 변화─의도 중심의 형법, 범죄자 유형론 승인, 유추 허용 등─는 모두 나치 친위대 사법체계에 뚜렷이 영향을 미쳤다. 나치 친위대 판사들은 법과 도덕의 통일과 함께 나치 친위대 정신에 따라 사건을 판결했다." "나치 친위대 판사 노르베르트 폴이 보기에 피고인이 판사에게 주는 인상은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데 중대한 요소였다. 그는 심지어 〈법령보다도 피고인의 인격이 정의 구현을 좌우한다〉라고 주장하며 법령보다 인격을 우선시할 정도였다." "거기서 한층 더 나아간 폴은 개별 범죄자 유형의 구체적인 특색((주취자, 상습절도범, 살인범 등)에 초점을 맞춘 범죄학적 접근과 달리, 규범적 접근은 소속 집단의 일반적 특징에 비추어 범죄자를 평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형을 선고할 때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편견이 작동하도록 문을 활짝 연 셈이 되었다. 폴이 범죄자 유형론을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바람에 일부 나치 법률가들조차 이를 법률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229-31)


"나치 친위대 사법권의 도덕률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이하게 변형된 도덕률의 문제는 그 개념들이 굉장히 익숙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도덕률을 구성하는 각종 원칙과 덕목─정직, 품위, 신뢰성, 청렴, 충성, 충실─은 사회적·법적 배경으로부터 추출된 것으로, 도덕에 대해 왜곡되지 않은 우리의 이해에 속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치 체제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기준을 재해석했다. 실제로 품위, 명예, 강직함, 충성, 출실 같이 수용 가능한 개념을 법치사회의 전통적 도덕에 의해 금지된 것으로 재정의하는 등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개념을 왜곡했다. 그렇게 도덕 질서를 변형시킨 나치 국가, 특히 나치 친위대는 윤리적 의무가 무제한적 전쟁,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살인과도 혼동되는 규범 세계를 창조했다. 이 같은 새로운 규범 세계는 완전한 무도덕주의나 무한한 범죄의 세계가 아니라, 범죄행위와 살인이 윤리적 의무와 요건에 부합하는 것과 같은 전복된 질서였다."(244-5)


8장 민족사회주의가 추진한 법의 도덕화


"제3제국은 시민들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였다. 정치적 권위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규제하려는 포괄적 가치체계다. 그러므로 전체주의 국가는 모든 사회영역에 스며들어 말 그대로 시민의 '좋은 삶'을 정의함으로써 개인의 자율을 제한한다. 나치의 규범적 포부는 존 롤스가 말한 완전히 포괄적인 도덕적·정치적 독트린, 즉 〈상세하게 설명된 하나의 체계 안에 모든 가치와 덕목을 포함하는〉 규범적 질서였다. 그러므로 〈완전히 포괄적인 독트린〉은 절대진리에 대한 근본주의적 주장, 즉 무엇이 참이고 선한지에 대한 국가의 관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다." "법규범과 윤리규범의 차이를 없애면서 나치 국가의 권한은 외적 자유의 영역뿐 아니라 내적 자유의 영역─즉, 개인의 윤리적 가치, 신념, 태도의 영역─에까지 미쳤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출입을 (마땅히) 금지하던 규범적 영토를 이제 국가가 침범한 것이다."(253-5)


"나치 법률가들의 법에 대한 관점은 얼핏 자연법 이론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자연법을 지지하는 쪽은 법과 도덕의 긴밀한 연결을 적극 옹호하면서, 정의와 도덕은 법에 필수적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연법 이론가들은 법을 한낱 전체주의 정권의 수단으로 전락시킬 개념을 전파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들이 법과 도덕의 긴밀한 연결을 강조한 것은 법의 이데올로기적 악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 같이 우리는 도덕과 법의 경계를 지우거나 그 거리를 좁히려는 모든 시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해도 회의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시도는 행위자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두 규범 영역의 분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과 법이 규제하는 영역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각기 다른 규범적 원칙을 따른다. 단순히 법과 도덕의 일치만을 추구하는 것은 나치의 법체계에서 발견된 종류의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275)


"그렇다면 나치 이론가들이 법과 도덕의 통합을 지지하고 민족사회주의가 법을 도덕화한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한가지 답변은 나치 이론가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도덕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 외에 딱히 심오한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나치 체제는 도덕적 원칙, 규칙, 덕목에 대해 자체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그런 왜곡된 도덕은 나치 친위대 등 이데올로기 중심의 나치 조직에 파고들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정직과 진실함, '용감, 충성, 용기'라는 덕목과, '재산의 신성함', '남자다운 규율이라는 규칙'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되고 실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선전했다." "나치 법체계가 도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한 것을 보면 도덕은 법치의 구성 조건을 규정하는 근원으로 기능할 때 법체계를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변수로서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법치의 요건을 준수하는지의 여부가 온전한 법질서인지를 규정한다."(2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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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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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종말의 시작


제27장 신질서 


"신질서Neuordnung는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독일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착취하고, 주민들을 독일인 지배인종의 노예로 삼고, 〈바람직하지 않은 부류〉─유대인이지만 동방의 숱한 슬라브인, 특히 지식인층까지 포함해─를 절멸시키려는 질서였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열등인간Untermenschen이었다. 히틀러가 보기에 그들은 생존할 권리가 없었고, 기껏해야 슬라브인 일부가 독일인 주인의 노예로서 논밭과 광산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데 필요할 뿐이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바르샤바 같은 동방의 대도시들을 영원히 지워버릴 뿐 아니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을 비롯한 슬라브인의 문화를 근절하고 그들에게 정식 교육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동방의 번창하는 공장들을 해체해 독일로 옮기고, 주민들은 독일인을 위해 식량을 생산하도록 농업에만 종사시키고 그들 몫으로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식량만 지급할 계획이었다. 유럽 자체는 나치 지도부가 말했듯이 〈유대인이 없는〉 곳이 되어야 했다."(1611-2)


"('유대인 절멸'을 의미하는) 〈최종 해결〉이라는 표현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나치 간부들의 어휘와 문서에서 점점 더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이 무해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의 실제 의미를 서로에게 일깨우는 고통을 피하려 했던 듯하고, 어쩌면 언젠가 죄증이 되는 문서가 드러나더라도 이 표현으로 자신들의 죄를 얼마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최종 해결〉을 위한 성과를 가장 많이 거둔 곳은 30개 남짓한 주요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였다.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절멸수용소는 네 개의 거대한 가스실과 인접한 소각장을 갖추어 살해 및 매장 능력에서 다른 절멸수용소들─모두 폴란드에 있었던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에 크게 앞선 아우슈비츠였다. 리가, 빌뉴스, 민스크, 커우너스, 리비우에도 별도의 작은 절멸수용소들이 있었지만, 독가스가 아닌 총격으로 살했다는 점에서 주요 절멸수용소들과 구별되었다."(1655-6, 1661-2)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자체와 인접한 소각장은 근거리에서 볼 때 전혀 불길한 장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곳의 용도가 무엇인지 밖에서 보고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 주변에는 잘 가꾼 잔디밭과 꽃밭이 있었고, 입구의 표지에는 그저 〈목욕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유대인들은 모든 수용소의 관례대로 단순히 이를 잡기 위해 목욕을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감미로운 음악까지 들려주었다! 경음악 악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생존자가 기억하듯이, 수감자들 중에서 〈모두 흰색 블라우스와 감청색 치마를 입은 어리고 예쁜 소녀들〉로 오케스트라를 꾸렸다. 잠시 후 치클론 B가 살포될 가스실로 들어갈 이들을 선별하는 동안, 이 독특한 합주단은 〈유쾌한 과부〉나 〈호프만 이야기〉의 즐거운 곡들을 연주했다. 베토벤의 장중하고 침울한 곡은 전혀 들려주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여정은 빈과 파리의 오페레타 못지않게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1665-6)


제28장 무솔리니의 실각 


"한때 북아프리카에서 막강했던 추축국 군대의 잔존 병력을 1943년 5월 초 튀니지에서 생포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영국-미국 군대는 뒤이어 이탈리아 본토를 겨냥할 것이 확실했다. 병든 몸의 무솔리니는 미몽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겁을 먹었다. 패배주의가 이탈리아 국민과 군대 사이에 만연했다." "디노 그란디, 주세페 보타이, 그리고 치아노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반두체 지도부는 1939년 12월 이래 열리지 않았던 파시즘 대평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대평회의는 1943년 7월 24일에서 25일에 걸친 밤에 소집되었고, 무솔리니는 독재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국가를 재앙으로 이끈 실책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대평의회는 19표 대 8표로 민주적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정의 복원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또한 군 통수권 전체를 국왕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두체는 7월 25일 저녁에 왕궁에 불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총리직 해임을 통보받고 불명예스럽게 실각했다."(1707, 1710)


"1943년 9월 초의 두 사건이 총통의 계획을 발동시켰다. 9월 3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단에 상륙했고, 9월 8일 이탈리아와 서방 열강의 휴전협정(9월 3일 비밀리에 체결)이 공표되었다. 하루이틀 동안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서 독일군의 상황은 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연합군 사령부는 이탈리아의 동서 해안 거의 어디서나 상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완전한 제해권을 활용하지도 않았고, 독일 측이 우려한 압도적인 제공권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이탈리아군 사단들을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고 포위하고 무장해제했을 때 독일군은 안도했다. 이것은 독일군이 로마를 쉽게 장악할 수 있고 당분간 나폴리까지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자국을 위해 무기를 생산할 공장들이 있는 북부 공업 지역을 포함해 이탈리아의 3분의 2를 손에 넣었다. 마치 기적처럼 히틀러의 수명은 다시 연장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자 히틀러는 속이 아렸다."(1716-9)


"1943년 7월 5일, 히틀러는 소련군을 상대로 이번 전쟁에서 마지막이 될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다. 독일 육군의 정예 병력─신형 티거 중전차로 무장한 무려 17개 기갑사단을 포함하는 약 50만 명─이 쿠르스크 서쪽의 넓은 소련군 돌출부로 달려들었다. 히틀러는 이 '성채 작전'으로 소련군의 정예인 100만 병력─저번 겨울에 스탈린그라드와 돈 강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던 바로 그 병력─을 에워싸는 데 더해 돈 강까지, 어쩌면 볼가 강까지 밀어붙인 뒤 남동쪽에서 북진해 모스크바를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소련군은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7월 22일경 기갑전력에서 전차의 절반을 잃은 독일군은 완전히 멈추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력 우위를 확신한 소련군은 7월 중순 쿠르스크 북쪽 오렐의 독일군 돌출부를 역으로 공격해 금세 전선을 돌파했다. 이것은 2차대전에서 소련군의 첫 번째 하계 공세였으며, 이 순간부터 붉은군대는 끝까지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1726)


"1943년에 히틀러의 운세를 꺾고 전세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바로 대서양 전투 패배와 독일 본토 상공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화되는 치열한 공중전이었다. 1942년에 독일 잠수함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지중해로 향하던 연합국 선박 625만 톤을 격침했는데, 이는 서방 조선소들의 손실 보충 능력을 한참 상회하는 톤수였다. 그러나 1943년부터 연합군은 기술 개선, 이를테면 장거리 항공기와 항공모함, 그리고 적 잠수함에 발각되기 전에 먼저 적함을 탐지하는 레이더를 장비한 수상함 등에 힘입어 U보트에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독일 국민이 현대전의 공포를 실감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각자의 집 문간에서 실감했다. 영국 항공기가 야간에, 미국 항공기가 주간에 투하하는 폭탄이 이제 독일인의 집을, 독일인이 일하는 사무실과 공장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괴벨스가 일기에서 밝혔듯이, 영국과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가장 크게 손상된 것은 독일의 주택과 국민의 사기였다."(1727-31)


제29장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과 히틀러 살해 시도 


"베를린에서 슈타우펜베르크와 그 동지들은 마침내 계획을 완성했다. 공동 작전의 암호명은 '발퀴레Walküre'였다. 이는 적절한 명칭이었는데, 스칸디나비아-독일 신화에서 발퀴레는 고대 전장의 상공을 맴돌다가 죽어야 할 자들을 고르는, 아름답지만 무서운 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죽어야 할 인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퍽 아이러니하게도 카나리스 제독은 실각하기 전에 발퀴레 아이디어를 하나의 보안 계획으로, 즉 베를린과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고되게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수백만 명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국내예비군─신체 건강한 군인들은 거의 모두가 전선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이 이들 대도시에 대한 치안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는 계획으로 꾸며서 히틀러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발퀴레는 군부 음모자들에게 완벽한 위장막, 즉 히틀러를 암살하자마자 국내예비군으로 베를린, 빈, 뮌헨, 쾰른 등지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대놓고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위장막이 되었다."(1770-1)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하자 베를린 음모단은 큰 혼란에 빠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군이 1944년에 상륙을 시도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믿었다. 그는 상륙 실패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토록 많은 출혈로 대가를 치른 후라면 미국과 영국 정부가 서부에서 새로운 반나치 정부와 강화를 교섭하는 데 더 열의를 보일 테고 그럴 경우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크는 이제 반나치 반란에 성공한다 해도 적군의 독일 점령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전쟁을 끝내 더 이상의 인명 손실과 조국의 파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강화를 성사시키면 소련군이 독일을 짓밟고 볼셰비키화하는 사태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거사를 통해 나치 독일 외에 〈또다른 독일〉이 있음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었다.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전선은 당장 행동에 나서도록 음모단을 재촉했다."(1784-5)


"7월 19일 오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라스텐부르크로 호출되었다. 와해 중인 동부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국내예비군 측에서 급히 훈련시키고 있는 새로운 국민척탄병Volksgrenadier 사단들의 상황에 관해 히틀러에게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이튿날 7월 20일 오후 1시에 총통 본부의 첫 일일 회의에서 보고할 예정이었다." "정확히 오후 12시 42분, 폭탄이 터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후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중에 말했듯이, 병영은 마치 155밀리 포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굉음과 함께 연기와 화염을 내뿜으며 박살이 났다. 시체들이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흥분한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에 있던 전원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의 확신과는 반대로, 히틀러는 피살되지 않았다. 브란트 대령이 견고한 참나무 받침대의 바깥쪽으로 서류가방을 옮겨놓은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히틀러의 목숨을 구했다."(1794, 1801-4)


"오후 9시 직후, 좌절한 음모단은 총통이 늦은 밤에 독일 국민에게 직접 방송할 것이라는 독일방송국의 발표를 듣고서 말문이 턱 막혔다. 몇 분 후 (반란 가담에서 반란 진압으로 돌아선) 레머 소령─이제 대령─에게 운명적인 용무를 맡겼던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 하제 장군이 체포되었고, 친위대의 지지를 받는 나치 장군 라이네케가 베를린 내 모든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았으며 이제는 벤틀러슈트라세 기습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스텐부르크─거사가 벌어진 히틀러의 '늑대굴'─의 정력적인 대응 조치, 레머를 설득하고 라디오를 활용하겠다는 괴벨스의 기민한 판단, 베를린 친위대의 집결, 벤틀레슈트라세 반란파의 믿기 어려운 혼란과 무대책 등으로 인해 음모단과 한배를 타려던 찰나의, 혹은 이미 한배를 탄 상당수 장교들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음모단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 결과로 체포된 프롬 장군은 이제 기운을 냈다."(1823-4)


"반란 반대파들은 베크, 회프너,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메르츠를 프롬의 빈 집무실로 몰아넣었고, 잠시 후 프롬이 권총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프롬은 음모단을 제거하고 그들의 흔적을 지울 뿐 아니라─비록 음모에 적극 관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음모를 알고서 암살자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반란을 진압한 주역으로서 히틀러의 환심을 사기로 금세 마음먹었다. 나치 폭력배들의 세계에서는 너무 늦은 결심이었지만 프롬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프롬은 〈총통의 이름으로〉 〈군사재판〉을 요청했고(그가 요청했다는 증거는 없다) 네 장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알렸다. 〈참모장 메르츠 대령, 올브리히트 장군, 이제 나로서는 이름을 모르는 이 대령[슈타우펜베르크], 그리고 이 중위[헤프텐].〉" "아래의 중정에서 군용차의 등화관제용 덮개가 씌워진 전조등이 희미하게 앞쪽을 비추는 가운데 네 장교는 총살대에 의해 금세 처리되었다."(1825-7)


"반란이 실패한 것은 그저 육군과 민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중 일부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서툴렀고, 프롬과 클루게의 성격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고비마다 음모단에 불운이 덮쳤기 때문이 아니다. 반란이 진압된 것은 장성이든 민간인이든 이 대국을 운영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리고 제복을 입었든 안 입었든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혁명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전쟁의 비탄과 패전 뒤 외국에 점령당할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초래한 독일과 유럽의 퇴화를 견뎌내지 못한 국가사회주의를 그들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지지했으며,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의 구원자로 보았다. 〈[훗날 구데리안이 씀] 당시 독일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믿었고, 만약에 그가 죽었다면 전쟁을 유리하게 종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암살자가 제거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이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1850-1)


제6부 제3제국의 몰락


제30장 독일 정복 


"전선 전역에서 미군─북부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소모전을 벌여 안 그래도 약해져가는 방어군을 갉아먹고 있었다. 히틀러는 계속 수세를 취해서는 심판의 시간만 늦출 뿐임을 깨달았다. 그의 열에 들뜬 마음속에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계획이 떠올랐다. 타격을 가해 미 제3군과 제1군을 갈라놓고, 안트베르펜까지 진출해 아이젠하워로부터 주요 보급항을 빼앗고,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을 따라 영국군과 캐나다군을 밀어붙인다는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그런 공세를 통해 영미군을 완파하여 독일 서부 국경의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소련군을 다시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군은 발칸에서는 여전히 진격하고 있었지만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는 10월부터 비스와 강에 멈춰 있었다. 서부 공세는 지난 1940년에 대규모 돌파를 개시했던 곳이자 독일 정보기관이 파악하기로 미군의 약한 4개 보병사단만이 방어하는 아르덴을 통해 신속하게 감행할 계획이었다."(1863)


"그러나 아르덴에서 약체 4개 사단이 괴멸된 뒤 미 제1군의 흩어진 부대들은 임시변통으로 완강히 저항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고, 돌파된 전선의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인 몬샤우와 바스토뉴를 단호히 사수하여 히틀러의 군대가 좁은 돌출부를 지나도록 만들었다. 미군의 바스토뉴 방어가 독일군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르덴에서 공세를 지속할 병력도, 알자스에서 공격에 나설 병력도 부족하다는 장군들의 항변에 히틀러는 귀를 닫았다. 〈나는 이 일을 11년간 해왔지만 ··· 모든 것이 완전하게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 여러분은 결코 완전하게 준비되지 않는다. 명백히 그렇다.〉 히틀러는 말하고 또 말했다.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이 회의 속기록의 길이로 판단하건대, 몇 시간 동안 말했다. 〈문제는 ··· 과연 독일에 존속할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다. ···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독일 국민은 파멸할 것이다.〉 그런 다음 로마의 역사와 프로이센 7년 전쟁의 역사를 한참 논했다."(1868-70)


"비록 발칸은 빼앗기고 있었지만, 폴란드의 비스와 강과 동프로이센에서 독일군이 10월부터 굳세게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히틀러가 동부전선에서 〈지금처럼 강력한 예비 병력을 보유했던 적이 없다〉라고 주장하자 구데리안은 〈동부전선은 카드로 만든 집과 같습니다. 전선의 한 지점이 뚫리면 나머지 전체가 붕괴될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1945년 1월 12일, 이반 코네프의 소련 집단군이 바르샤바 남쪽 비스와 강 상류 바라노프의 교두보에서 빠져나와 슐레지엔으로 향했다. 더 북쪽에서는 주코프 휘하 병력이 바르샤바 북쪽과 남쪽에서 비스와 강을 건너 1월 17일 이 도시를 함락했다. 더 북쪽에서는 소련 2개 군이 동프로이센의 절반을 짓밟고 단치히 만으로 돌격했다. 이것은 2차대전을 통틀어 소련군의 최대 공세였다. 스탈린은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만 기갑전력의 비중이 놀랍도록 높은 180개 사단을 투입했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1873-5)


"1월 27일 오후, 주코프의 병력이 베를린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오데르 강을 도하한 날, 이제 베를린 총리 관저로 이전했고 전쟁 종결 때까지 장소를 바꾸지 않은 총통 본부에서 흥미로운 대응 조치를 취했다. 25일, 절박한 구데리안은 리벤트로프를 찾아가 나머지 독일군이 동부의 소련군에 집중해서 대적할 수 있도록 당장 서부에서의 휴전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외무장관은 곧장 히틀러에게 일러바쳤고, 총통은 당일 저녁 구데리안을 질책하며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힐난했다. 동부의 재앙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 괴링, 요들은 서방 측에 휴전을 요청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서방 연합국이 볼셰비키 승리의 결과를 우려하여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방을 겨냥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독일 측 설계자들은 결국 영국군과 미군이 독일군에 합세해 소련 침공군을 물리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터였다."(1876-7)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 내 모든 상점뿐 아니라 모든 군사·산업·운송·통신 시설까지 온전한 상태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파괴하라는 일반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이에 반하는 모든 지령은 무효다〉라는 단언으로 끝맺었다. 독일을 광대한 황무지로 만들어야 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지면 민족도 사라질 것이다.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민이 가장 원초적으로 존속하기 위해 필요할 법한 기반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그런 것들을 파괴해버리는 편이 더 낫다. 이 국가는 약한 국가로 판명날 것이고, 미래는 오로지 강한 동부 국가[소련]의 것일 테니까. 게다가 뛰어난 자들이 살해되었으니 전후에는 열등한 자들만 남을 것이다.〉" "독일 국민이 최종 파국을 면한 것은, 그런 대규모 파괴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 외에도, 슈페어와 다수의 장교들이 히틀러의 명령을 (마침내!)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다."(1885-7)


제31장 신들의 황혼: 제3제국의 마지막 나날 


"히틀러는 몸이 엉망인 데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근접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 본토를 장악하여 이제 처참한 최후가 목전에 닥친 상황임에도, 총통은, 그리고 괴벨스를 비롯해 가장 광적인 소수의 추종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기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4월 초 날씨 좋은 저녁에 괴벨스는 자리에 앉아 히틀러에게 총통의 애독서 중 하나인 토머스 칼라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역사》를 읽어주었다. 괴벨스가 낭독한 장은 7년 전쟁 중 가장 암담했던 시절, 대왕이 진퇴유곡에 빠졌다고 생각해 각료들에게 만약 2월 15일까지 운수가 나아지지 않으면 포기하고 독약을 마시겠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역사의 이 시기를 고른 것은 확실히 적절했으며 괴벨스는 틀림없이 한껏 극적인 방식으로 낭독했을 것이다. 총통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라고 괴벨스는 크로지크에게 말했고, 후자는 이 감동적인 장면을 일기에 적어 우리에게 전해주었다."(1893-4)


"그렇게 영국인이 쓴 책에서 기운을 얻은 두 사람은 힘러의 잡다한 '연구' 부서들에서 서류철에 보관 중이던 두 가지 별자리점 결과를 가져오도록 했다. 하나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집권하던 날 작성한 총통의 별자리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1918년 11월 9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일에 어느 이름 모를 점성술사가 작성한 공화국의 별자리점이었다. 괴벨스는 두 통의 놀라운 문서를 재검토한 결과를 크로지크에게 알렸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으니, 두 별자리점 모두 1939년에 전쟁 발발, 1941년까지 승리, 뒤이어 일련의 전세 역전, 1945년 초기 몇 달 동안, 특히 4월 초순의 가장 심한 반격을 예상했습니다. 4월 하순에 우리는 일시적인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그 후로 8월까지 정체기일 테고 그달에 강화를 맺을 것입니다. 뒤이어 3년은 독일에 힘겨운 시절일 테지만, 1948년부터 독일은 부흥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4월 12일, 미군이 데사우와 베를린 사이 아우토반에 나타났다."(1894-5)


"4월 29일 새벽에 구술로 작성한 유언장에서 나치사령관은 맨 마지막까지 본인의 성격에 충실했다. 위대한 승리는 본인 덕분이었다. 패배와 최종 실패는 다른 사람들, 그들의 〈불충과 배반〉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고별사를 읊었다─이 미치광이 천재의 일생에서 기록된 마지막 말이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 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너무도 위대했기에 나는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 문장은 《나의 투쟁》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정계 생활을 시작했던 히틀러는 생의 끝자락에도 그 집념에 매달렸다. 독일인 수백만 명이 죽고, 독일 가옥 수백만 채가 폭격에 무너지고, 심지어 독일 국가마저 파괴되었음에도, 히틀러는 슬라브인에게서 동방 영토를 빼앗는다는 묵표가 (도덕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튜턴족의 헛된 꿈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1931-2)


"1차대전 패전 이후 1918년에 카이저는 달아났고 군주정은 허물어졌으나 국가를 지탱하던 기존의 다른 제도들은 남아 있었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부가 그 기능을 이어갔으며, 독일 육군과 참모본부의 중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45년 봄에 제3제국은 그야말로 소멸해버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바보짓─그리고 그를 너무도 맹목적으로, 너무도 열렬하게 추종한 독일인 자신의 바보짓─탓에 그 지경이 되었다. 다만 그해 가을 독일로 돌아간 나는 히틀러에게 분개하는 정서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그리고 땅이 있었다. 사람들은 멍한 상태로 피를 흘리고 배를 곯았으며, 겨울이 찾아오자 폭격으로 그들의 집이 된 오두막에서 누더기로 몸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었다. 히틀러는 다른 수많은 민족들을 말살하려 했고 전쟁에서 패하자 결국 자기네 민족까지 말살하려 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독일 민족은 말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3제국은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1946-7)


맺음말


"뉘르베르크의 피고석에 오른 21명 중 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헤스, 레더, 풍크는 종신형, 슈페어와 시라흐는 20년형, 노이라트는 15년형, 되니츠는 10년형이었다. 나머지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샤흐트와 파펜, 프리체는 석방되었다. 세 사람 모두 독일의 탈나치화 법정에서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긴 했지만, 결국 아주 짧게 복역하는 데 그쳤다. 1946년 10월 16일 오후 1시 11분, 리벤트로프가 뉘른베르크 감옥 처형실에서 교수대에 올라갔고, 짧은 간격으로 카이텔, 칼텐브루너, 로젠베르크, 프랑크, 프리크, 슈트라이허, 자이스-잉크바르크, 자우켈, 요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헤르만 괴링은 없었다. 그는 교수형 집행인을 속였다. 감방으로 몰래 들여온 독약 약병을 자기 차례가 오기 두 시간 전에 삼켰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후계를 놓고 경쟁한 하인리히 힘러와 마찬가지로, 괴링은 막판에 이승을 떠나는 방법을 선택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과 함께 결딴을 낸 그 세상을."(1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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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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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쟁: 초기 승리와 전환점


제18장 폴란드 함락 


"폴란드 공군은 48시간 사이에 궤멸되었다. 폴란드 육군은 1주일 만에 패배했다. 소련 국경에 남은 한줌의 병력을 제외하고 폴란드 군은 전부 포위되었다. 이제 소련군이 전리품에서 제 몫을 차지하기 위해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쳐들어올 시간이었다." "9월 5일, 몰로토프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공격해달라는 나치의 제안에 공식 서면 회답을 보내면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비밀조항으로 합의한 폴란드 내 〈경계선〉은 엄밀히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련은, 폴란드가 소멸했고 따라서 폴란드-소비에트 불가침 조약도 소멸했다는 등, 자국의 이익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소수집단의 이익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등 비열한 핑계를 대면서 기진맥진한 폴란드를 9월 17일부터 짓밟기 시작했다. 9월 18일, 소비에트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군과 만났다. 정확히 21년 전에 신생 볼셰비키 정부가 서방 연합국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독일 육군과 가혹한 단독 강화 조건을 수락한 그 장소였다."(1084-6, 1089)


"폴란드에서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쪽은 히틀러였지만, 더 큰 승자는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아도 된 스탈린이었다. 소련은 폴란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발트 국가들의 목을 조였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밀과 루마니아의 석유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지켜냈다. 독일로서는 향후 겪게 될 수도 있는 영국의 봉쇄를 견뎌내려면 두 가지 모두 절실히 필요한 물자였다. 심지어 스탈린은 히틀러가 원한 폴란드 유전 지역인 보리스와프-드로호비치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 지역의 연간 산출량만큼을 독일 측에 판매하는 데 선뜻 동의했다. 왜 히틀러는 소련 측에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을까?" "서부에서 버티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하려면 후방이 안전해야 했다. 히틀러의 이후 발언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것처럼, 이것이 스탈린에게 그토록  뼈저린 거래를 허용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서부전선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총통은 소비에트 독재자의 가혹한 거래를 결코 잊지 않았다."(1095-6)


제19장 서부의 앉은뱅이 전쟁 


"서부에서는 별 일이 없었다. 총성이 거의 울리지 않았다. 독일의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앉은뱅이 전쟁Sitzkrie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방에서는 곧 '가짜 전쟁phony war'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국 장군 J. F. C. 풀러의 말마따나 그곳에서는 〈세계 최강의 육군[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불과 26개 사단과 대치한 채 돈키호테처럼 용맹한 동맹국 군대가 몰살당하는 동안 강철과 콘크리트 뒤편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독일군은 그것을 뜻밖이라고 여겼을까? 천만에. 육군 참모총장 할더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할 경우 서부의 상황이 어떠할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그는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설 〈공산은 매우 작다〉라고 생각했다. 프랑스가 〈벨기에의 의사와 상반되게〉 벨기에를 통과하는 경로로 파병할 리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할더는 프랑스군이 수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폴란드군이 이미 파멸한 9월 7일, 할더는 벌써부터 독일군 사단들을 서부로 이송할 계획을 짜느라 바빴다."(1097)


"그렇다면 어째서 프랑스군은(영국군의 선발 2개 사단은 10월 첫째 주까지 배치되지 않았다) 서부에서 독일 병력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면서도, 가믈랭 장군과 프랑스 정부가 문서로 약속해놓은 대로 공격에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군 최고사령부, 정부, 국민의 패배주의, 1차대전에서 막대한 피를 흘린 기억과 피할 수만 있다면 그런 살육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결의, 폴란드군이 처참하게 패한 터라 독일군이 곧 우세한 병력을 서부로 투입할 수 있고 따라서 프랑스가 초기에 어떻게 진격하든 무찔러버릴 것이라는 9월 중순의 깨달음, 무장과 공군력에서 독일이 우위에 있다는 두려움 등이 그런 이유였다. 실제로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역을 전면적으로 폭격했다면 십중팔구 독일군에 재앙이었을 텐데도, 프랑스 정부는 자국 공장들이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 공군이 독일 내 표적을 폭격하는 방안에 처음부터 줄기차게 반대했다."(1100-1)


"11월 20일, 히틀러는 전쟁 수행을 위한 지령 제8호를 발령해 〈유리한 기상 조건을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비상대기 상태〉를 유지하라고 명령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분쇄하기 위한 계획을 결정했다. 그런 다음 심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대규모 전투의 전야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 위해 11월 23일 정오에 사령관들과 참모본부 장교들을 총리 관저로 소집했다." "여러 면에서 1939년 11월 23일은 하나의 이정표였다. 그날 히틀러는 육군을 상대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차대전 기간에 황제 빌헬름 2세를 밀어내고 독일 최고의 군사적 권한뿐 아니라 정치적 권한까지 차지했던 그런 육군을 상대로 말이다. 그날 이래로 오스트리아의 전 상병은 정치적 판단뿐 아니라 군사적 판단에서도 자신이 장군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그들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비판을 허용하지도 않았다─그 결과는 결국 모두에게 재앙이 될 터였다."(1136, 1141)


"1940년 2월 11일, 복잡한 무역협정이 모스크바에서 마침내 타결되었다. 첫해에 독일 측이 받은 것들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의 기록에 따르면 곡물 100만 톤, 밀 50만 톤, 석유 90만 톤, 면직물 10만 톤, 인산염 50만 톤, 상당한 양의 필수 원재료들, 그리고 소련이 만주에서부터 운송해준 대두 100만 톤이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자존심을 굽힌 채 독일에서는 영 인기 없는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지지하고, 소비에트 육군과 공군이 발트 삼국에 기지를 세우는 등의 위협(결국 독일이 아니면 어느 나라를 상대로 그런 기지를 사용하겠는가?)을 감수한 한 가지 이유였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영국의 봉쇄를 극복하도록 돕고 있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하나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를 기회, 군사력을 서부에 집중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결정타를 날리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짓밟을 기회까지 제공했다─그 후에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히틀러가 이미 장군들에게 말한 바 있었다."(1157-8)


제20장 덴마크와 노르웨이 정복 


"독일 해군은 오래전부터 북방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독일은 대양으로 곧장 나갈 수 있는 진출로가 없었으며, 1차대전 당시부터 독일 해군 장교들은 이 지리적 사실을 머리에 새겨두었다. 영국은 셰틀랜드 제도에서 노르웨이 해안까지 폭이 좁은 북해 전역에 대량의 기뢰와 초계정으로 촘촘히 그물을 쳐둠으로써 강력한 독일 해군을 봉쇄하고, 북대서양으로 빠져나가려는 U보트의 시도에 중대한 지장을 주고, 독일 상선의 운행을 막았다. 1차대전 기간에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로 숨통이 막혔다. 전간기에 수수한 규모의 독일 해군을 지휘한 소수의 장교들은 이 경험과 지리적 사실에 관해 숙고했고, 향후 영국과 어떤 전쟁을 치르든 간에 노르웨이에서 기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야만 북해를 가로막는 영국의 봉쇄선을 깨고, 독일의 수상함과 잠수함에 대양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고, 판을 뒤엎어 역으로 영국 제도를 효과적으로 봉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1167-8)


"전쟁의 기류가 바뀔 때까지 거의 4년 동안 일체의 저항을 포기했던 덴마크 국왕과 국민, 온화하고 교양 있고 태평한 사람들은 독일을 좀체 괴롭히지 않았다. 덴마크는 '모범 보호령'으로 알려졌다. 덴마크 군주, 정부, 왕실, 심지어 의회나 언론까지, 처음에는 정복자들로부터 놀라울 정도의 자유를 허가받았다. 덴마크에 거주하는 유대인 7000명마저 박해를 당하지 않았다─한동안은. 그러나 덴마크 국민은, 대다수 피정복 국민들보다 늦게 알아차리긴 했지만, 전황이 악화될수록 점점 더 잔혹해지는 튜턴족 폭군들에게 〈충직한 협력〉을 바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결국 깨달았다─자존심과 명예를 조금이라도 지키고자 한다면 그럴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독일이 끝내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작은 나라 덴마크가 입에 담기도 싫어한 히틀러의 신질서 안에서 속국으로 지내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항이 시작되었다."(1212-3)


"노르웨이는 처음부터 저항했다. 그렇지만 1940년 4월 9일 저녁 독일이 수도를 확실히 접수하자 마침내 기운을 끌어올린 크비슬링─1931년부터 1933년까지 국방장관으로 재임한 뒤, 1933년 5월에 국민연합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결성했다. 이는 독일에서 집권한 나치당의 이데올로기와 전술을 차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비옥한 민주적 토양에서 나치즘은 잘 자라지 못했다─은 라디오 방송국에 들이닥쳐 자신이 새로운 정부의 수반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노르웨이인 누구든 독일에 대한 저항을 즉시 멈추라고 명령했다. 브로이어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지만─베를린 역시 알지 못했고 심지어 나중에도 이해하지 못했지만─이 반역 행위로 인해 노르웨이의 항복을 유도하려던 독일의 노력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비록 노르웨이 국민에게는 조국이 치욕을 당한 순간이긴 했지만, 크비슬링의 반역 행위는 망연자실해 있던 노르웨이 국민을 결집해 굳세게 저항하도록 했다."(1219-20)


제21장 서부전선 승리 


"제3제국은 북해 연안 저지대에 위치한 작은 두 나라의 중립을 거의 무수히 보장한 바 있었다.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은 1839년에 유럽 5개 열강이 '영구히' 보장했으며, 이 협약은 1914년에 독일이 위반할 때까지 75년에 걸쳐 지켜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벨기에를 상대로 결코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히틀러는 집권한 뒤 이 정책을 계속 재확인하고 네덜란드에게도 비슷한 확약을 했다." "1940년 5월 10일, 베를린 주재 벨기에 대사와 네덜란드 공사는 빌헬름슈트라세로 불려가 리벤트로프에게서 영국-프랑스 군대의 임박한 공격으로부터 두 나라의 중립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군이 그들의 영토로 진입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바로 한 달 전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상대로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비열한 수법이었다. 독일은 공식 최후통첩을 전하며 저항하지 말라고 두 정부에 요구했다. 만약 저항한다면 유혈 사태의 책임은 〈오로지 벨기에 왕실 정부와 네덜란드 왕실 정부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1234-33)


"네덜란드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5일간의 전쟁이었다. 이 짧은 기간에 벨기에군, 프랑스군, 영국 원정군의 운명이 정해지고 말았다." "전투 첫날에 영국 총리직을 넘겨받은 윈스턴 처칠은 아연실색했다. 5월 15일 아침 7시 30분,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처칠에게 전화를 걸어 잠에서 깨우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大프랑스의 육군이 1주일 만에 패했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지난 전쟁 이후로 밀집한 고속 기갑부대의 급습이 불러온 혁명의 위력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처칠은 훗날 썼다. 그 혁명을 일으킨 것은 전차부대─서부 방어선에서 가장 약한 위치를 일거에 돌파하기 위해 한 지점에 집결한 전차 7개 사단─였다. 또한 슈투카 급강하폭격기, 그리고 연합군 방어선의 한참 뒤쪽이나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요새의 꼭대기에 강하하여 큰 혼란을 일으킨 낙하산부대와 공수부대도 있었다."(1245-6)


"약간 의문이 남긴 하지만, 히틀러가 됭케르크 앞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킨 것은 자신이 〈세계의 한 요인, 균형추〉라고 보았던 영국에 쓰라린 굴욕감을 주지 않음으로써 강화협정을 촉진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영국과의 강화는 히틀러의 말마따나 독일이 다시 한 번 동쪽으로, 즉 이제는 소련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가능케 하는 강화여야 했을 것이다. 런던은 제3제국의 유럽 대륙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다음 몇 달 동안 히틀러는 조만간 그런 강화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 시점에 히틀러는 영국의 국민성을, 그 지도부와 국민이 끝까지 싸워 지켜내겠다고 결심한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와 장군들은 바다에 무지한─이후에도 무지할 터였다─탓에 바다에 이골이 난 영국이 낡아 빠진 작은 항구에서, 독일군 코앞에 있는 노출된 해변에서 30만이 넘는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1270-1)


"7월 19일 저녁, 영국에 마지막으로 강화를 제안하기 위해 제국의회에 나섰을 때 히틀러는 여전히 〈만약에 필요하면 실행하기로〉의 '만약에'를 의식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날 히틀러는 긴 연설 중에 역사를 거침없이 왜곡하고 처칠 개인을 마구 모욕했다. 하지만 말투는 온건했고, 자국민뿐 아니라 중립국 사람들의 지지까지 얻고 영국 대중에게도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주려는 교묘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나는 다른 여느 나라처럼 영국을 상대로도 그 이성과 양식에 다시 한 번 호소하는 것이 나의 양심에 따른 의무라고 느낍니다. 나는 이렇게 호소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패자로서 호의를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로서 이성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연설은 독일 국민들에게는 통했으나 영국 국민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7월 22일, 헬리팩스 경은 방송에서 히틀러의 강화 제안을 정식으로 거절했다."(1301-3, 1306)


제22장 바다사자 작전: 영국 침공 좌절 


"괴링의 대규모 공습인 독수리 작전Adlerangriffe은 8월 15일, 영국 공군을 공중에서 몰아냄으로써 침공 개시의 조건 하나를 확보한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 독일군은 적 전투기 파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일 평균 1천 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출격하느라 이미 지친 영국 조종사들이 용맹하게 싸우긴 했지만, 독일군의 수적 우위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영국 남부의 전투기 전진기지라 할 비행장 5곳이 중대한 피해를 입고 설상가상으로 핵심 통신본부 7곳 중 6곳이 맹폭을 당해 통신체계 전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때 괴링이 갑자기 전술상 잘못을 저질렀다. 영국의 전투기 방어 전력이 공중과 지상에서 손실을 입어 오래 버티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독일 공군은 9월 7일 런던을 겨냥한 대대적인 야간 폭격으로 공세를 전환했다. 그 덕에 영국 공군의 전투기들은 위기에서 벗어났다."(1336, 1340-1)


"독일 공군은 런던 대공습의 성공에, 혹은 성공했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얻어맞아 불타는 영국 수도에 대규모 주간 공습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9월 15일 일요일, 2차대전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다. 정오 무렵 독일 폭격기 200대와 그보다 3배 많은 호위 전투기가 영불해협 상공에 나타나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 전투기 사령부는 레이더 스크린으로 공격기의 대규모 편대를 살피고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독일군은 수도에 접근하기 전에 요격당했다. 항공기 일부는 돌파했으나 대체로 흩어졌고 다른 일부는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격추되었다. 이 날의 전투는 독일 공군이 어쨌거나 당분간은 대규모 주간 공습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상륙으로 효과를 거둘 가망은 별로 없었다. 괴링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육해군 사령관들은 전황을 더 잘 알고 있었고, 결정적인 공중전 이틀 후인 9월 17일에 총통은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1347-8)


제23장 바르바로사: 소련의 차례 


"지난 몇 달간 베를린과 모스크바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제3자의 뒤통수를 치는 것과 서로의 뒤통수를 치기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히틀러는 소련이 발트 국가들과 루마니아의 두 지방인 베사라비아 및 북부 부코비나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고, 그의 좌절감은 분노를 더욱 키우기만 했다. 독일은 소련의 서진을 저지해야 했는데, 영국의 봉쇄 때문에 더 이상 해로를 통해서는 수입이 불가능한 독일로서는 루마니아의 석유자원에 사활이 걸려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헝가리나 불가리아도 루마니아 영토의 일부를 요구했다." "결국 리벤트로프가 나서서 헝가리 및 루마니아 양측을 을러댔다. 8월 30일, 빈의 벨베데레 궁에서 양측은 추축국의 중재안을 수용했다. 이에 대해 몰로토프는 독일 정부가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는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제3조를 위반했고, 〈공동 이익의 문제〉에 관한 독일의 확약과 상충되는 방식으로 소련 측에 〈기정사실〉을 통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1379-81)


"11월 12일 진행된 양측 회담에서 꼭 짚어야 할 점은, 소비에트 독재자가, 이후에 상반된 주장을 펴긴 했지만, 이때 파시스트 진영에 가담하라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다만 베를린이 제안한 것보다 더 비싼 가격을 불렀을 뿐이다." "스탈린이 제안하는 비싼 대가는 히틀러로서는 고려해볼 여지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유럽에서 배제하려 했지만, 이제 스탈린은 핀란드, 불가리아, 두 해협에 더해 사실상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유전들─평상시 유럽이 사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을 공급한다─에 대한 통제권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인도양을 소련이 '염원'하는 중심지로서 넘겨주고 입을 막으려 했지만, 소련 측은 인도양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요구한다. 그는 냉혹한 협박범이다. 독일의 승리는 러시아에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를 되도록 일찍 굴복시켜야 한다.〉 냉혹하고 뛰어난 나치 협박범은 호적수를 만난 셈이었고, 그 깨달음에 격분했다."(1395-6)


"총통이 엉망진창인 하위 파트너를 곤경에서 구해준 곳은 발칸만이 아니었다.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이 괴멸당한 뒤, 히틀러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1개 경기갑사단과 약간의 공군 부대를 북아프리카로 파견하는 데 결국 동의했다. 프랑스 전투에서 기갑사단 지휘관으로서 수훈을 세웠던 늠름하고 지략이 풍부한 전차부대 장교 로멜은 영국군이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유형의 장군이었고, 뒤이은 2년간 영국군에 엄청난 곤경을 안겨주었다." "히틀러는 1941년 봄의 승리. 특히 영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기고만장했지만, 그것이 영국에 얼마나 심대한 타격이었는지, 그리고 영 제국이 얼마나 절박한 곤경에 내몰렸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히틀러가 제국의회에서 연설하던 바로 그날, 처칠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이집트와 중동의 상실로 인한 심각한 결과를 알리고 미국의 참전을 호소하고 있었다. 영국 총리는 2차대전을 통틀어 몇 번 경험하지 않은 암담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1425-8)


"(히틀러에게는) 소련 파괴가 최우선이었다. 그 밖의 모든 일은 후순위였다. 이제는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경악스러운 실책이었다. 당시 1941년 5월 말에 히틀러는 휘하 전력의 일부만 투입해도 영 제국에 강력한 일격을, 어쩌면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처칠은 이런 현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5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처칠은 영국이 이집트와 중동을 잃는다면 설령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전쟁의 지속이 〈힘겹고 길고 암담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런 전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맹목성을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발칸 전투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가 몇 주 연기되었고, 그리하여 작전 실행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작전 개시가 연기된 만큼 애초 계획했던 기간보다 더 짧은 기간 내에 소련 정복을 완수해야 했다. 이 작전의 기한, 즉 칼 12세나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러시아의 겨울을 변경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1429-30)


제24장 전세 역전 


"개전 초에 제기된 쟁점은 간단하지만 중대했다. 독일의 세 주요 집단군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당시까지 가장 성공을 거둔 보크의 중부집단군이 7월 16일에 도달한 스몰렌스크에서 320킬로미터를 더 진격해 모스크바를 공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히틀러가 지난 12월의 지령 제18호에 명시한 원래 계획대로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에서 주공을 펴는 방안을 고수해야 하는가? 달리 말하면, 주요 표적을 모스크바로 정할 것인가,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로 정할 것인가였다. 브라우히치와 할더가 이끌고 보크와 구데리안이 뒷받침하는 육군 최고사령부는 소련의 수도를 향해 총력으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는 파탄이었다〉라고 할더는 전한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식량지대와 공업지대에, 그리고 캅카스 산맥 바로 너머에 있는 소련의 유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또한 레닌그라드를 손에 넣고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합류하기를 원했다. 모스크바는 내버려두어도 괜찮았다."(1474-5)


"히틀러는 브라우히치, 할더, 보크의 끈질긴 주장에 모스크바 진격을 재개한다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진창의 시기(라스푸티차Rasputitsa)에 들어선 것이다. 폭설과 영하의 기온도 일찍 찾아왔다." "러시아의 겨울은 끔찍했고 당연히 독일군보다 소련군이 겨울에 더 잘 대비하긴 했지만, 전세 역전을 이끌어낸 주된 요인은 붉은군대의 치열한 전투 자세와 포기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였다. 그 증거로 할더의 일기나 독일 야전사령관들의 보고서는 소련군이 얼마나 격렬하게 공격하고 반격하는지에 대한 놀라움, 독일군이 얼마나 차질을 빚고 손실을 입는지에 대한 좌절감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나치 장군들은 소련 체제의 압제적인 특성이나 독일군이 첫 타격으로 입힌 재앙적인 손실을 고려할 때, 소련군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군을 비롯해 다른 많은 군대들이 변명거리가 더 적은데도 맥없이 무너졌던 것과는 딴판이었다."(1479-80, 1485)


"모스크바 진공 작전의 실패의 대가는 엄청났다. 붉은군대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으나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모스크바를 공략하지 못했고,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캅카스 지역의 유전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이나 미국과 통하는 소련 북쪽과 남쪽의 생명선도 여전히 열려 있었다. 2년이 넘도록 연전연승하던 히틀러의 군대는 처음으로 우세한 적군에 밀려 퇴각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실패의 대가는 더 컸다. 할더는 적어도 훗날에 가서 그 대가를 깨달았다. 〈독일 육군의 불패 신화가 깨졌다〉라고 그는 썼다. 독일군은 다음 여름이 왔을 때 소련에서 다시금 승리를 거두었지만, 끝내 불패 신화를 복원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6일은 제3제국의 짧은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자, 가장 치명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다. 당시 히틀러의 권력은 최정점에 올라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가 침략하기로 선택했던 국가들이 반격에 나섬에 따라 그 정점에서 점차 내려올 터였다."(1489-90)


"그 혹독한 겨울에 히틀러는 난타당한 독일군이 모스크바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저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히틀러는 퇴각을 일체 금했다. 독일 장군들은 히틀러가 굽히지 않은 이 완강한 태도의 공과에 관해, 그 태도가 육군을 완전히 재앙으로부터 구했는지 아니면 불가피한 대규모 손실을 오히려 더 늘렸는지에 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대다수 사령관들은 각자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후퇴할 자유가 주어졌다면 많은 인력과 장비를 구하고, 더 나은 위치에서 재정비하고, 더 나아가 반격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적시에 퇴각했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법한 사단들 전체가 자주 압도적인 공격을 받거나 포위당하여 분쇄되고 말았다. 그런데 훗날 일부 장군들은 독일군의 현지 사수와 전투를 고집한 히틀러의 강철 같은 의지가 아마도 육군이 눈밭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결과를 막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전시 최대 업적이라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다."(1493-4)


제25장 미국의 차례 


"히틀러가 일본에 맡긴 역할은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당분간은 막아내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일본이 싱가포르를 차지하고 인도를 위협할 경우 영국에 심각한 타격이 될 뿐 아니라 미국의 주의를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돌리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독일에서는 히틀러도 다른 누구도 일본 측에 다른 우선순위가 있다는 생각을 아주 늦게까지 떠올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파괴하여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때까지 소련을 공격하는 방책은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대공세를 개시하는 방책까지 주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독일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히틀러는 일본 측에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자신의 승리를 가로막고 있는 영국과 소련에 집중하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다. 나치 통치자들은 일본이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가장 우선시할 수도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1522)


"리벤트로프는 11월 28일 히틀러가 주재하는 장시간의 군사회의에 참석한 뒤 저녁에 오시마를 불렀고, 일본 대사가 즉각 도쿄에 타전했듯이 미국을 대하는 독일의 태도가 〈상당히 경직되었다〉는 인상을 풍겼다. 미국을 상대할 준비가 될 때까지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한다는 히틀러의 방침이 곧 폐기될 것처럼 보였다. 리벤트로프는 갑자기 일본 측에 영국뿐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도 전쟁할 것을 촉구하고 제3제국의 지원을 약속하기 시작했다." "12월 1일, 긴급 호출을 받고 베를린 대사관으로 부리나케 돌아간 오시마는 조속히 독일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새로운 훈령을 받았다." "리벤트로프는 5일 오전 3시에 오시마 대사에게 일본이 요청한 조약, 즉 독일이 일본의 대미국 전쟁에 동참하고 단독강화를 맺지 않는다는 조약의 초안을 건넸다."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까지 떠맡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만약 히틀러가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전쟁의 추이가 달라졌을 것이다."(1528-9, 1531-3, 1536)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30분(현지 시각)에 일본군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강습했다는 천만뜻밖의 소식에 베를린은 워싱턴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히틀러가 마쓰오카에게 일본의 대미국 전쟁에 독일이 동참할 것이라고 구두로 약속했고 리벤트로프가 오시마 대사에게 또다른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직 확약에 서명하기 전이었고 일본 측으로부터 진주만에 대해 한 마디도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히틀러가 막강한 적국 명단에 미국을 추가하는 결정을 그렇게 서둘러 내린 이유를 훗날 슈미트 박사는 콕 집어 말했다. 〈나는 위신을 바라는 히틀러가 미국의 선전포고를 예상하고서 선수를 치기를 원한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나치 통수권자는 12월 11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슈미트의 인상이 옳았음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타격할 것입니다〉 하고 히틀러는 환호하는 의원들을 향해서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강타할 것입니다!〉"(1537, 1543)


제26장 대전환점: 1942년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2월 20일경 발트 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소련군의 공세가 시들해졌고, 3월 말에는 진흙탕 기간이 시작되면서 피투성이의 광대한 전선도 비교적 잠잠해졌다. 양측 모두 기진맥진했다. 부대들이 휴식하며 재정비하는 동안 이제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더해 육군 총사령관이기도 한 히틀러는 다가오는 여름의 공세를 계획하느라 바빴다. 전년도의 계획만큼 야심찬 계획은 아니었다. 이제 단일 작전에서 붉은군대 전체를 분쇄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여름에 그는 전력의 대부분을 남부에 집중 투입해 캅카스의 유전, 도네츠 분지의 공업지대, 쿠반의 밀 생산지를 정복하고 볼가 강변의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할 작정이었다." "스탈린 역시 전쟁을 이어가려면 캅카스의 석유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스탈린그라드가 중요했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를 손에 넣을 경우, 소련 측이 유전을 보유한다 해도 카스피 해와 볼가 강을 통해 중부 러시아까지 석유를 운송하는 마지막 주요 수로가 틀어막힐 터였다."(1565-6)


"석유 말고도 히틀러는 얇아진 전열을 보충할 인력이 필요했다. 동계 전투 막바지에 병자를 제외한 총 사상자는 116만 7835명이었는데, 이 정도 손실을 메울 만한 보충병을 구할 수는 없었다." "숱한 대화 덕분에,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하계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연합'사단을 52개─루마니아 27개, 헝가리 13개, 이탈리아 9개, 슬로바키아 2개, 에스파냐 1개─로 추산했을 정도로 히틀러와 카이텔은 위성국 전체와의 교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동부전선에서의 추축국 총 병력의 4분의 1에 달했다. 독일군이 주공을 펼칠 남부전선을 증강하는 새로운 41개 사단 중에서 절반은 헝가리군(10개), 이탈리아군(6개), 루마니아군(5개)이었다. 할더와 대다수 장군들은 부드럽게 말해도 전투력이 의문스러운 '외국' 사단을 그렇게 많이 투입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체 인력이 부족했으므로 마지못해 외국의 조력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은 머지않아 재앙이 닥치는 데 일조할 터였다."(1566, 1569)


"1942년 5월 27일, 로멜 장군은 사막에서 공세를 재개했다. 유명한 아프리카 군단(2개 기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과 8개 이탈리아군 사단(1개 기갑사단 포함)으로 신속하게 타격한 로멜은 곧 영국 사막군을 이집트 국경 쪽으로 밀어냈다." "6월 말에는 알렉산드리아와 나일 강 삼각주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엘 알라메인에 있었다. 화들짝 놀라 지도를 꼼꼼히 들여다본 연합국은 이제 로멜이 이집트를 정복해 영국군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로멜이 증원군을 얻는다면, 북동쪽으로 쾌속 진군해 중동의 대규모 유전지대를 차지한 뒤, 이미 북쪽에서 캅카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 독일군과 그 지역에서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가 2차대전에서 연합국 측에는 가장 암울한 순간 중 하나, 따라서 추축국 측에는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전 지구적 전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 히틀러는 아프리카에서 거둔 로멜의 놀라운 승리를 활용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1569-70)


"최고사령관은 영미군이 배후에서 상륙할 경우 크게 위태로워질 로멜의 곤경에도,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 배후에 있는 돈 강 유역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임박했다는 최신 정보에도 개의치 않은 채, 11월 7일 점심식사 후에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튿날 저녁 뮌헨에서 맥주홀 폭동 기념일을 축하하러 모이는 고참 당원들 앞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당시 광범한 전선에서 사단과 연대, 심지어 대대 수준까지 지휘할 것을 고집하던 최고사령관이 하필이면 집이 막 무너지려는 순간에 전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중요하지 않은 정치적 볼일을 보러 갔다는 사실은 무언가 기묘하고 제정신이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괴링의 전철을 따라 사람이 곪아가고 퇴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때 막강했던 공군이 꾸준히 쇠퇴하고 있음에도 괴링은 자신의 보석과 장난감 기차에 점점 더 집착했고, 길어지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전쟁의 추악한 현실에는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1587-8)


"엘 알라메인 전투 및 영미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대전의 대전환점이었다. 아시아와의 경계인 볼가 강까지 유럽의 대부분과, 거의 나일 강까지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던 나치 정복의 힘찬 물결은 이제 퇴조하기 시작했다. 나치군이 전차와 항공기 수천 대로 적군의 대열을 공포에 빠트리고 분쇄했던 대규모 전격전의 시기는 막을 내렸다. 분명 필사적인 국지적 공격이 있었지만─1943년 봄 하르키우와 1944년 크리스마스 시기 아르덴에서─그것은 독일군이 전쟁의 마지막 2년간 엄청난 끈기와 무용으로 수행해야 했던 방어전의 일부였다. 히틀러는 빼앗긴 주도권을 끝내 되찾지 못했다. 이미 1942년 5월 30일 야간에 영국은 비로소 천 대의 항공기로 쾰른을 폭격했고, 그 다사다난했던 여름 동안 다른 독일 도시들도 폭격했다.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의 독일 군인들처럼 독일 민간인들도 그때까지 자신들의 군대가 타국민에게 가했던 참화를 처음으로 겪게 되었다."(1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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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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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전쟁에 이르는 길


제9장 첫 단계: 1934~1937 


"1935년 3월 16일 토요일에─히틀러의 기습은 대부분 토요일에 이루어졌다─총리는 국민개병제를 천명하고 평시 육군을 12개 군단 36개 사단(대략 50만 명)으로 편제하는 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은 끝이 났다─프랑스와 영국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히틀러의 예상대로 두 나라는 항의하면서도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사실 영국 정부는 히틀러에게 아직 자기네 외무장관을 접견할 용의가 있는지 부랴부랴 물어보기까지 했다. 독재자는 정중하게 그럴 용의가 있다고 회답했다. 3월 17일 일요일은 독일에서 환호와 축하의 날이었다. 패전과 치욕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의 족쇄를 벗어던진 날이었다. 히틀러와 그의 깡패 같은 통치를 아무리 싫어하는 독일인일지라도 공화국 내내 정부가 감히 시도조차 못해본 일을 총통이 성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 독일인은 국가의 명예를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그 일요일은 전몰장병 추모일이기도 했다."(499-500)


"5월 21일 저녁,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또 한 차례 '평화' 연설을 했다. 히틀러는 느긋한 태도로 자신감뿐 아니라 관용적이고 유화적인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를 위한 정의에 기반하는 평화와 이해뿐이라고 확언했다. 전쟁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고, 전쟁은 참사인 동시에 무의미하고 무익한 사태라고 말했다." "〈누구든 유럽에서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자는 혼란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 서양의 몰락이 아닌 르네상스가 실현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과업에 독일이 불멸의 기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희망이자 흔들리지 않는 신념입니다.〉 이것은 평화와 이성, 화해를 말하는 달콤한 연설이었으며, 어떤 이유에 근거해서든, 아니 이유야 어찌되었든 평화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서유럽 민주국가들의 국민과 정부는 이 달콤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502-5)


"1936년 5월 2일, 이탈리아군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했고, 7월 4일에 국제연맹은 정식으로 굴복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를 철회했다. 얼마 후 7월 16일에 에스파냐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세 번째의 비우호적 파시스트 국가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그 결과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서유럽에서 독일의 주요 경쟁국이 약해졌다. 무엇보다 아비시니아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와 화해하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그럴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총통의 대對에스파냐 정책은 처음부터 기민하고 계산적이고 먼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입수된 독일 문서들을 정독하면 히틀러의 목표 중 하나가 에스파냐 내전을 길게 끌어 서방 민주국가들과 이탈리아를 떼어놓고 무솔리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로마-베를린 추축Axis을 낳았다."(522-4)


제10장 이상하고 불길한 막간: 블롬베르크, 프리치, 노이라트, 샤흐트의 몰락 


"1938년 2월 4일, 독일 내각이 소집되었다. 마지막 내각 소집이었다. 어떤 어려움을 겪었든 간에, 이제 히틀러는 육군이든 외무부든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난관을 뚫고나갈 터였다. 그날 히틀러가 내각에서 서둘러 통과시킨 뒤 자정 직전에 라디오를 통해 독일 전역과 세계에 발표한 긴급명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내가 전군의 지휘권을 직접 넘겨받는다.〉 국가수반으로서 히틀러는 당연히 국방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했지만, 이제 블롬베르크의 총사령관직까지 넘겨받는 한편 전쟁부를 폐지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창설하는 조직이 장차 2차대전 동안 익숙해질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macht, OKW이며, 육해공 삼군이 여기에 소속된다. 히틀러가 그 최고사령관이고, 그 아래에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진 참모장이 있었다─이 직책은 아첨꾼 카이텔에게 돌아갔는데, 용케도 최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559)


"1938년 2월 4일은 제3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전쟁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였다. 이날을 기하여 나치 혁명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히틀러가 독일의 무장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내딛겠다고 오래전부터 별러온 길을 가로막고 있던 보수파의 마지막 세력이 이날 싹 치워졌다." "(경제장관) 샤흐트는 물러났다. (외무장관) 노이라트는 비켜섰다. (국방군 총사령관) 블롬베르크는 동료 장군들의 압력에 굴복해 사임했다. 프리치는 깡패 수법의 음모에 휘말렸음에도 반항하는 시늉도 없이 해임을 받아들였다. 고위 장군 16명도 자신들의 해임─그리고 프리치의 해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교단에서 군사 반란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야기로 그쳤다. 히틀러가 죽는 날까지 지녔던 프로이센 장교 계층에 대한 경멸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외교, 경제, 군사 정책을 한손에 틀어쥐고 국방군을 직접 지휘하게 된 히틀러는 이제 자신의 길을 걷게 되었다."(561-3)


제11장 병합: 오스트리아 강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국제연맹은 이 중대한 순간─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강제 병합을 시도하는─에 평화로운 인접국에 대한 독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는 또다시 정부가 부재했다. 3월 10일 목요일, 카미유 쇼탕 총리와 내각이 사임했다. 괴링이 전화로 빈에 최후통첩을 들이민 3월 11일 금요일 내내 파리에는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선포한 3월 13일에야 레옹 블룸이 이끄는 새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영국은? 2월 20일, (오스트리아 총리) 슈슈니크가 굴복하고 나서 일주일 후에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이 사임했다. 무솔리니를 계속 회유하려는 체임벌린 총리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 사임의 주된 이유였다. 후임은 헬리팩스 경이었다. 이 변화를 베를린에서는 환영했다. 히틀러에게는 즐거운 소식이었다. 그는 영국과 분규를 일으키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604-5)


"1938년 3월 11일 밤, 히틀라가 심각하게 걱정한 문제는 이 침공에 대한 무솔리니의 반응뿐이었지만, 베를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도 얼마간 걱정했다." "괴링은 베를린 주재 체코 공사 보이테흐 마스트니 박사에게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입은 〈집안일에 불과〉하며 히틀러는 프라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한다고 알렸다. 그 대신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체코 측의 확답을 바란다고 했다. 마스트니 박사는 프라하의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시 돌아와 괴링에게 동원은 하지 않을 것이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 사태에 개입할 의향이 없다고 말했다. 안도한 괴링은 자신의 방금 전 확약을 재확인한 뒤 히틀러의 승인도 얻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 두 정부의 〈속뜻〉이 그저 말뿐인 항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오스트리아의) 미클라스 대통령은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리에 임명하고 그의 각료 명단을 수락했다."(607-8)


"총 한 발 쏘지 않은 채,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갖춘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히틀러는 제국에 국민 700만 명을 더하고 미래의 계획상 막대한 가치를 지닌 전략적 요충지를 얻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삼면을 군대로 포위했을 뿐 아니라 남동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인 빈까지 차지했다.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빈은 오랫동안 중부 및 남동 유럽에서 교통과 통상체제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 신경중추가 이제 독일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아마도 히틀러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영국도 프랑스도 자신을 저지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의향조차 없음이 다시금 확인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3월 14일 체임벌린은 오스트리아에서의 히틀러의 '기정사실'에 관해 하원에서 연설했다. 〈확실한 사실은 그 무엇도 [오스트리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여타의 나라들이 무력을 행사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619-20)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 


"1938년 6월 1일, 영국 총리는 일부 비보도를 전제로 영국 기자들 앞에서 발언했고, 이틀 후 《타임스》는 체코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한 일련의 사설들 중 첫 번째 것을 게재했다. 그 사설은 체코 정부 측에 〈설령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의미할지라도〉 국내 소수집단들의 〈자결권〉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고, 주데텐 주민들과 그 밖의 집단들이 바라는 것을 결정하는 수단으로 국민투표를 처음 제안했다." "6월 8일, 디르크젠 대사는 주데텐 지역의 분리가 주민투표 이후에 이루어지고 〈독일 측이 강제적 조치로 방해하지 않을〉 경우 체임벌린 정부가 관망할 것이라고 빌헬름슈트라세에 알렸다. 이 모든 정보는 분명 히틀러에게 희소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들려온 소식도 나쁘지 않았다. 6월 말에 소련 주재 독일 대사 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 즉 체코슬로바키아를 〈방어하기 위해 출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베를린에 통지했다."(657-8)


"여름 내내 바르샤바 주재 독일 대사 한스-아돌프 폰 몰트케는 폴란드가 자국의 영토나 영공을 소련의 병력이나 항공기가 통과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는 방안을 거절할 심산일 뿐 아니라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츠크가 체코 영토의 한 조각인 테신[폴란드명 치에신]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베를린에 보고했다. 베츠크는 그 여름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치명적인 근시안을 벌써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근시안은 결국 베츠크의 상상 이상으로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터였다." "베를린의 부추김을 받은 폴란드 정부는 9월 21일, 폴란든계 사람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테신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시행할 것을 체코 정부에 요구하고 병력을 이 지역의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이튿날 헝가리 정부도 그 뒤를 따랐다. 또한 같은 날인 9월 22일 주데텐 자유군단은 독일 친위대 파견대의 지원을 받아 독일 영토 쪽으로 튀어나온 체코 국경도시 아시Aš와 에거를 점령했다."(660, 679)


"9월 27일 저녁 시점에 히틀러가 알고 있었던 것은 프라하가 저항하고, 파리가 신속히 동원하는 중이고, 런던이 강경하게 나오고, 자국민이 전쟁에 무관심하고, 독일의 주요 장군들이 개전에 단호히 반대하고, 고데스베르크 제안에 담은 최후통첩의 시한이 다음날 오후 2시라는 사실이었다. 히틀러의 서한은 체임벌린의 마음을 흔들어놓도록 절묘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온건한 어조로 자신의 제안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라거나 독일군이 분계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부인했다. 그리고 체코 측과 세부사항에 관해 협상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부분을 공식 보장할〉 의향이 있다면서 체코 측이 버티는 까닭은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유럽 전쟁을 일으키고 싶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평화를 향한 마지막 희망의 문을 열어두겠다고 했다. 결국 체임벌린은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문제의 책임을 히틀러가 아닌 (체코 대통령) 베니시에게 지웠다."(702-3)


"9월 30일 오전 1시 직후, 히틀러와 체임벌린, 무솔리니,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는 차례로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에 따라 독일 육군은 총통이 줄곧 입에 올려온 대로 10월 1일에 체코슬로바키아를 향해 진군을 개시하고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다." "체임벌린은 에스파냐 내전(독일과 이탈리아의 '의용군'이 프랑코 장군 편에 서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을 끝내기 위해 더욱 협력할 것과 군비 축소, 세계 경제의 발전, 유럽의 정치적 평화, 심지어 소련 문제의 해결까지 함께 추구할 것을 제안하는 등 시무룩한 독일 독재자에게 끝도 없는 장광성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뒤, 서류 한 장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더니 둘이서 공동으로 서명하여 즉시 공개하자고 말했다. 히틀러는 이 선언서를 읽고 얼른 서명했다. 체임벌린은 크게 만족했다." "런던으로 귀환한 득의만만한 총리는 히틀러와 함께 서명한 선언서를 휘휘 흔들면서 다우닝 가로 몰려든 대규모 군중을 맞았다."(729-32)


"히틀러는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고 다시금 주목할 만한 정복을 이루어냈다. 나를 포함해 뮌헨 협정 이후 독일에 머물고 있던 그 누구도 당시 독일 국민의 환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피했다는 데 안도했다. 또한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무혈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긍심에 들떠 있었다. 그 무혈 승리를 히틀러가 불과 6개월 만에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를 정복하여 주민 1000만 명과 남동유럽을 지배할 길을 여는 방대한 전략적 영토를 제3제국에 보탰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게다가 단 한 명의 독일인도 잃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 역사상 보기 드문 천재의 본능으로 중유럽 약소국들의 약점뿐 아니라 서방의 두 주요 민주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의 약점까지 간파하여 그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정치전政治戰'의 새로운 전략과 기법을 고안하고 구사하여 실제 전쟁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737-8)


제13장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멸 


"이제 체코슬로바키아 비극의 다음 막이 오르게 되었다. 프라하의 체코 정부가 그 막을 조금 일찍 올린 것은 이 역사 이야기를 가득 채우는 아이러니들 중 하나였다. 1939년 3월 초에 체코 정부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독일 정부가 조장한 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의 분리주의 운동(루테니아의 경우에는 이 작은 땅을 병합하고자 갈망하던 헝가리 정부도 조장했다)은 이제 진압하지 않으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시킬 지경이었다. 그럴 경우 히틀러가 프라하를 점령할 게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체코 중앙정부가 분리주의파를 진압할 경우 총통이 그에 따른 혼란을 틈타 역시 프라하로 진격하리라는 것 역시 확실한 일이었다. 체코 정부는 사뭇 주저하고 더는 도발을 견딜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둘째 대안을 선택했다." "베를린에 그토록 굽실거리던 체코 정부의 한 차례 용기 있는 행보─슬로바키아 자치정부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는 곧 국가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되었다."(769)


"1939년 3월 15일 오전 6시, 독일군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로 쇄도했다. 저항은 없었고, 저녁 무렵 히틀러는 지난 뮌헨 회담 때 체임벌린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생각한 프라하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베를린을 떠나기 전 그는 독일 국민에게 거창한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이 끝장낼 수밖에 없었던 체코 정부의 〈난폭한 만행〉과 〈테러〉에 관한 지겨운 거짓말을 반복한 다음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누구든 《나의 투쟁》을 읽은 사람이라면, 지도를 흘낏 보고 슬로바키아 내 독일군의 새로운 배치를 확인한 사람이라면, 뮌헨 협정 이래 독일의 모종의 외교적 행보를 눈치챈 사람이라면, 또는 지난 12개월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혈 정복한 히틀러의 동태에 관해 숙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총통의 '약소국' 목록에서 어떤 나라가 다음 차례가 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체임벌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폴란드의 차례였다."(783, 793)


제14장 폴란드의 차례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무혈 정복을 지켜본 1938년이 저물어갈 무렵, 히틀러는 또다른 정복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정복할 곳은 잔존 체코슬로바키아, 메멜, 그리고 단치히였다. 슈슈니크나 베네시의 콧대를 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제는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츠크의 차례였다." "독일과 국경을 접하는 가운데 길게 보아서 가장 우려스러운 나라는 폴란드였다. 그런데 폴란드만큼 독일의 위험에 둔감한 국가도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들 중에 회랑지대를 확정하여 폴란드에 바다로 나갈 통로를 열어준─그리고 독일 제국과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은─것만큼 독일인을 분개시킨 조항도 없었다. 옛 한자동맹의 항구 단치히를 독일로부터 분리하여 국제연맹이 감독하되 폴란드가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유도시로 바꿔놓은 조치도 똑같이 독일 여론의 분노를 자아냈다. 약하고 평화로운 바이마르 공화국마저 폴란드에 의한 독일 제국의 절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798-800)


"1939년 3월 15일 히틀러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점령하고 '독립' 슬로바키아를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을 때, 그 비늘은 완전히 벗겨졌다. 그날 아침 폴란드는 이미 북쪽의 포메른과 동프로이센의 국경이 독일 육군에 가로막힌 것처럼 이제 남쪽 슬로바키아 국경도 독일 병력에 가로막혔다. 폴란드의 군사 정세는 하룻밤 사이에 불안정해졌다." "각성한 폴란드 외무장관은 베네시보다 더 단호하게 베를린에 맞설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1년 전만 해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기를 쓰던 영국 정부가 이제 폴란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로 굴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30일 저녁, 케너드는 베츠크에게 독일의 침공에 대비할 상호원조협정에 관한 영국-프랑스 제안을 제시했다. 이튿날인 3월 31일,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폴란드가 공격받아 거기에 저항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정부를 즉시 힘닿는 데까지 지원할 것〉이라는 역사적인 선언을 했다."(803, 811-2)


"7월 23일, 프랑스와 영국은 소련의 제안에 마침내 동의했다. 군 참모 회담을 즉시 개최해 군사협약을 작성함으로써 삼국이 히틀러의 군대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구체적으로 정하자는 제안이었다." "7월의 마지막 주에 모스크바 정치회담은 주로 '간접침략'이라는 말의 정의를 놓고 합의를 보지 못하는 바람에 답보 상태에 빠졌다. 영국과 프랑스가 보기에는 소련이 '간접침략'을 너무 넓게 해석하는 터라 나치의 심각한 위협이 없는 경우에도 핀란드나 발트 국가들에 대한 소비에트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데 이 용어가 사용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런 해석에 적어도 런던은─프랑스는 더 협조할 용의가 있었다─동의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7일에 영국이 만약 정치협정과 군사협정을 동시에 체결하자는 주장을 소련이 양보하고 (기왕이면) '간접침략'에 대한 영국 측 정의까지 받아들이는 데 동의한다면 그 즉시 참모 회담을 시작하겠다고 제안하며 흥정을 시도했을 때, 몰로토프는 딱 잘라 거절했다."(874-5)


"영국 외무부 기밀문서들을 보면, 8월 초에 체임벌린과 헬리팩스가 소련과의 협정 타결을 거의 포기했으면서도 모스크바에서 참모장교 회담을 지연시키면 독일 독재자가 전쟁을 향해 치명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향후 4주 동안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히틀러가 선수를 쳤던 것이다." "빌헬름슈트라세에서는 소련의 기존 방침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지고 있었다. 소련이 중립국이 되고 나면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고, 설령 싸우더라도 독일 측으로서는 폴란드를 재빨리 해치우고 독일 육군이 서쪽을 향해 총력으로 진격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서부 방어시설에 묶어두기가 용이할 터였다.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대리 자크 타르베 드 생아르두앙은 파리에 이렇게 보고했다. 〈나치 지도부 사이에서 당혹, 주저, 임시변통, 심지어 타협의 경향을 보이던 시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877-8, 881-2)


제15장 나치–소비에트 조약 


"독일은 폴란드를 포함하는 동유럽을 소련과 나눠 가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로서는 도저히 겨뤄볼 수 없는─설령 할 수 있다 해도 분명 꺼내지 않을─승부수였다." "8월 15일 오후 8시, 슐렌부르크 대사는 몰로토프를 만나 이미 지시받은 대로 리벤트로프의 긴급 전보를 읽어주었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가 양국 간의 불가침 조약에 관심이 있느냐고 몰로토프는 물었다. 또 소비에트-일본 관계를 개선하고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여기서 분쟁은 그해 여름 내내 만주-몽골 국경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벌어진 전쟁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몰로토프는 발트 국가들을 공동으로 보장하는 방안을 독일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렇듯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을 먼저 제안한 쪽은 소련이었다. 몰로토프의 제안은 바로 히틀러가 원하던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가 내놓으려던 그 어떤 제안보다도 더 구체적이고 더 나아간 제안이었다."(896, 906-7)


"그러나 독일 측으로서는 일정 조정을 이루어내야만 했다. 폴란드 침공의 진행표 전체가 그 일정에 달려 있었다. 리벤트로프가 8월 26일이나 27일 이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지 못하고 독일 측의 우려대로 소련 측이 좀 더 미적거릴 경우, 9월 1일이라는 목표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이 중대한 국면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 스탈린과의 중재에 나섰다. 자존심을 굽힌 채 자신이 그토록 자주, 그토록 오랫동안 비방해온 소비에트 독재자에게 독일 외무장관을 모스크바에서 즉시 접견해달라고 몸소 간청했다." "스탈린의 회답은 8월 21일 오후 10시 30분에 베르크호프의 총통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잠시 후에 독일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이 갑자기 중단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국 정부와 소비에트 정부는 서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제국 외무장관이 교섭 타결을 위해 8월 23일 수요일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이다.〉"(916, 919)


"1939년 7월 말에 스탈린은 분명 프랑스와 영국이 구속력 있는 동맹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뿐 아니라 (특히 영국이) 히틀러를 부추겨 동유럽에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까지 확신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과연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의무를 준수했던 것 이상으로 영국이 폴란드에 대한 보장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몹시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 2년간 서방에서 일어난 모든 일도 그의 의심을 키웠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이후 또다른 침공을 막기 위해 회의를 열어 계획을 세우자는 소비에트의 제안을 체임벌린이 거절한 일, 소련을 배제시킨 뮌헨 협정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달랜 일, 1939년의 운명적인 여름이 째깍째깍 지나가는 때에 체임벌린이 독일에 맞설 방어동맹을 교섭하면서 자꾸 지체하고 망설인 일 등이 그러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히틀러가 조치를 취할 때마다 머뭇거리고 비틀거리던 영국-프랑스의 외교가 이제 완전히 파탄났다는 점이었다."(943-4)


제16장 평화의 마지막 나날 


"괴벨스의 노련한 지도 하에 나치당이 일간지들을 '조정'─이는 자유언론의 파괴를 의미했다─하기 시작한 6년 전부터 독일 시민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히틀러가 원래 폴란드 공격 날짜로 정해두었던 8월 26일 토요일에 괴벨스의 선전 공작은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일기에 몇몇 신문의 헤드라인을 적어두었다. 《B.Z.》: 〈폴란드, 극에 달한 혼란─독일인 가족, 피난하다─폴란드군, 독일 국경에 육박!〉 《12시 블라트》: 〈도를 넘는 불장난─독일 여객기 3대, 폴란드군에 격추─회랑지대 독일인 농가 다수, 불길에 휩싸이다!〉 나는 한밤중 방송국으로 가는 길에 《민족의 파수꾼》 일요일판(8월 27일자)을 집어들었다. 1면 상단 전체에 걸쳐 1인치 크기로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폴란드 전역 전쟁열! 150만 동원! 국경 방면으로 계속 병력 수송! 오버슐레지엔 혼란!〉 물론 독일의 동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은 2주 전부터 동원하고 있었다."(978-80)


"1939년 8월 마지막 날의 오후부터 밤까지의 막판에 기진맥진한 외교관들과 극도로 긴장한 채 그 외교관들에게 지시를 내린 상관들의 우왕좌왕하는 행보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고, 독일 측의 경우에는 순전히 고의적인 기만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8월 31일 오후 12시 30분에, 그러니까 헬리팩스 경이 폴란드 정부에 더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촉구하기 전에, 립스키가 리벤트로프를 방문하기 전에, 독일 정부가 폴란드에 대한 '관대한' 제안을 공표하기 전에, 그리고 무솔리니가 중재를 시도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최종 결정을 하고 전 세계를 전에 없이 처참한 전쟁으로 밀어넣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8월 31일 정오 직후, 히틀러는 이튿날 새벽 폴란드를 공격하라고 정식 문서로 명령했다. 아직까지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나라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두 나라가 적대적 조치를 취한다면 그에 대응할 작정이었다."(1022-5)


제17장 제2차 세계대전 개시 


"9월 3일 정오 무렵에 나는 빌헬름슈트라세의 총리 관저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확성기를 통해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250명쯤─그 이상은 아니었다─되는 사람들이 그곳에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모두가 주의 깊게 들었다. 발표가 끝났을 때는 중얼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망연자실한 채로, 히틀러가 자신들을 세계대전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안식일이었음에도 곧 신문팔이 소년들이 '호외요, 호외요'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실은 거저 나눠주고 있었다." "독일인처럼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입증'되었을지 몰라도, 그날만 해도 영국인에 대한 악감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내가 영국 대사관 앞을 지나갈 때 헨더슨을 위시한 대사관 직원들은 거리 모퉁이에 있는 아들론 호텔로 옮겨가는 중이었고, 경찰관 한 명만이 대사관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어슬렁거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1067-8)


"영국의 참전 소식이 알려진 일요일 오후, 독일의 주요 인사들 중에서 가장 침울해한 사람은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대제독이었다. 그는 전쟁이 너무 일찍, 4~5년이나 먼저 벌어졌다고 보았다. 독일 해군의 Z계획은 1944~45년에 완료되어 영국군에 대적할 만한 규모의 함대를 갖출 터였다. 그러나 당시는 1939년 9월 3일이었으며, 히틀러가 제독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할지라도 레더는 영국을 상대로 효과적인 전쟁을 치를 만한 수상 함정도, 심지어 잠수함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1939년 9월 3일 오후 9시, 히틀러가 베를린을 떠나던 순간에 독일 해군은 공격에 나섰다. 경고도 없이 U-30 잠수함이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320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리버풀을 출발해 몬트리올로 향하던 영국 여객선 애서니아Athenia 호를 어뢰로 격침했다. 승객 1400명 가운데 미국인 28명을 포함해 112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10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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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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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제1장 제3제국의 탄생 


"1909년 11월, 히틀러는 〈운명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빈에 도착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지몬덴크 골목의 가구 딸린 방에서 나와야 했고, 이후 4년 간은 싸구려 여인숙에서 지내거나 도나우 강 근처 빈 제20구의 멜데만 슈트라세 27번지에 있는, 누추한 남성 노숙자 쉼터에서 지내며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 자주 찾아가 겨우 허기를 달래곤 했다." "그렇지만 이런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끝끝내 어엿한 직장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이, 그는 행여 프롤레타리아트 신분으로, 육체노동자 신분으로 미끄러져 내려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프티부르주아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훗날 그는 그때까지 지도자 없이 낮은 급료를 받으며 무시당하던 광범한 화이트칼라층을 토대로 삼아 국가사회주의당을 조직하면서 이 두려움을 활용했다. 이 두려움은 또한 수백만에 달하는 이 화이트칼라층 사이에서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자신들이 '노동자'보다 낫다는 환상을 조장했다."(44-5)


"《나의 투쟁》에 썼듯이, 어느 날 그는 빈 노동자들의 대중 시위를 목격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그곳에 서서 거대한 인간 용이 천천히 꿈틀대며 지나가는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나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사회민주당의 기관지를 펼쳐 있고, 당 지도부의 연설을 검토하고, 당 조직을 살펴보고, 당의 심리학과 정치적 수법을 곱씹고, 그 결과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성공을 설명하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그들은 어떻게 대중운동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대중운동 없이는 그 어떤 정당도 무력하다. 둘째, 그들은 대중 사이에서 구사하는 선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셋째, 그들은 그가 말하는 〈정신적·육체적 테러〉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 세 번째 교훈은 분명 부실한 관찰에 근거했고 거기에 터무니없는 편견이 섞여 있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교훈을 활용할 터였다."(51-2)


"히틀러가 살던 무렵의 빈에는 이러한 지지의 필요성과 대중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당을 구축할 필요성을 이해한 정치 지도자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빈의 시장이자 기독교사회당 지도자인 카를 뤼거 박사였다." "훗날의 히틀러와, 빈의 중간계급 하층의 우상인 덩치 크고 화통하고 상냥한 시장 사이에는 분명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뤼거가 불만 많은 프티부르주아지를 끌어들이고 나중의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극성스러운 반유대주의를 동원한 정당의 당수로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가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해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뤼거는 상당한 지적 성취를 거둔 사람이었으며, 유대인을 포함한 반대자들도 그가 본심으로는 점잖고 예의 바르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뜻 인정했다." "이 점이 청년 히틀러에게는 신경에 거슬렸다. 히틀러는 뤼거가 지나치게 관대하고 유대인의 인종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54-5)


"그러나 히틀러는 결국 뤼거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뤼거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법을 알았고, 현대사회의 온갖 문제와 대중을 사로잡는 선전 및 웅변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뤼거가 강력한 교회를 상대하는 방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뤼거는 〈유서 깊은 제도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기민하게 활용했고, 그리하여 오랜 권력의 원천들로부터 자신의 운동에 이로운 것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다.〉 요컨대 바로 여기에 훗날 히틀러가 독일에서 자신의 정당을 조직하고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활용한 이념과 수법이 담겨 있다. 그의 독창성은 1차대전 이후 우파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그런 이념과 수법을 독일 정세에 적용했다는 데 있다. 이로써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당들 중에서 나치 운동만이 대규모 추종 세력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 공화국 대통령, 대기업 협회─〈유서 깊은 제도권〉의 3대 세력─의 지지를 확보해 독일 총리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55)


제2장 나치당의 탄생 


"전후의 혼란기에 바이에른의 우파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규군, 즉 국가방위군Reichswehr이 있었다. 비텔스바흐 왕가의 복귀를 바라는 군주제 지지자들이 있었다. 베를린에 수립된 민주공화국을 경멸하는 다수의 보수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 대규모 제대 군인의 무리, 1918년의 패전으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 무리가 있었다." "1920년 3월 14일, 국가방위군은 뮌헨에서 호프만의 사회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구스타프 폰 카르를 수장으로 하는 우파 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이 바이에른의 주도는 공화국을 뒤엎고 권위주의 정권을 세워 베르사유 조약의 강제 조항을 거부하기로 결의한 독일 내 모든 세력을 끌어들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에어하르트 여단의 단원들을 비롯한 자유군단의 용병들은 피난처를 마련했고 또 환영을 받았다. 루덴도르프 장군과 불만 많은 다수의 퇴역 장교들도 뮌헨에 정착했다. 이 비옥한 땅에서 아돌프 히틀러도 첫걸음을 내디뎠다."(70-2)


"1920년에 입당한 루돌프 헤스는 학위논문으로 써서 상을 받은 「독일을 다시금 지난날의 영광으로 이끌 인물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글로 히틀러를 감동시켰다. 〈모든 권위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인민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권위를 세울 수 있다. ··· 독재자는 처음부터 광범한 대중에게 더 깊이 뿌리박고 있을수록 그들을 심리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것이고, 노동자들로부터 불신을 덜 받을 것이고, 인민 가운데 가장 정력적인 이 계층 사이에서 지지자를 더 많이 얻을 것이다. 그 자신은 대중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모든 위대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성 그 자체이다. ··· 불가피할 때면 그는 유혈 사태도 피하지 않는다. 중대한 문제들은 언제나 피와 철에 의해 결정된다. ···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마저 짓발고 넘어설 각오가 되어 있다. ··· 입법자는 지독히 무정하게 일을 처리한다. ··· 필요할 때면 척탄병의 군화로 그들[인민]을 짓밟을 수 있다.〉"(94-5)


"1921년 4월 연합국은 독일에 배상금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1320억 금마르크─당시 액수로 330억 달러─라는 경악스러운 금액에 독일인들은 도저히 지불할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통상 1달러에 4마르크였던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921년 여름에는 1달러에 75마르크로 떨어졌고, 1년 후에는 400마르크로 폭락했다. 1921년 8월 에르츠베르거가 살해되었다. 1922년 6월, 공화국을 선포했던 사회민주당의 필리프 샤이데만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같은 달 24일, 외무장관 라테나우가 길거리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 세 사건 공히 범인은 극우파의 일원이었다. 휘청거리던 베를린 중앙정부는 결국 정치적 테러를 엄벌하는 내용의 공화국 보호를 위한 특별법 발포로 이 도전에 응수했다. 바이에른 정부가 특별법을 시행하려 하자, 이제 인정받는 젊은 지도자 축에 드는 히틀러를 비롯한 이 지역 우파는 레르헨펠트를 끌어내리고 베를린으로 진격해 공화국을 쓰러뜨릴 음모를 꾸몄다."(101)


제3장 베르사유, 바이마르, 맥주홀 폭동 


"1918년 11월, 절대권력을 쥔 사회민주당은 영속적인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재빨리 닦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호엔촐레른 제국을 지탱하던 세력들, 민주정 독일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세력들을 영원히 탄압하거나 적어도 영원히 억제해야 했을 것이다. 그 세력들이란 봉건적인 융커 지주를 비롯한 상류층, 거대 카르텔을 주무르는 대자본가들, 자유군단의 떠돌이 용병들, 행정조직의 관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군부와 참모본부였다. 사회민주당은 낭비가 많고 비경제적인 광대한 사유지, 독점기업과 카르텔을 해체하고, 나아가 새로운 민주정에 충성스럽고도 성실하게 봉사하지 않을 모든 사람을 관료제, 사법부, 경찰, 대학, 군대에서 남김없이 내쫓아야 했을 것이다. 이 사회민주당원들 대다수는 독일의 다른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기성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습관이 몸에 밴 선량한 노동조합주의자였던 터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군부에 권위를 양도하기 시작했다."(105)


"빌헬름 그뢰너는 루덴도르프에 이어 제1병참총감이 된 장군이었다. 1918년 11월 9일, 스파에서 힌덴부르크 원수가 머뭇거릴 때 카이저에게 이제 더는 군의 충성을 받으실 수 없으니 퇴위하셔야 한다고 직언했던─군부가 결코 용서하지 않은 용감한 행동─인물도 그뢰너였다." "조국이 극도로 곤경에 처한 순간에, 두 사람은 비밀 전화선을 통해 재회했다. 바로 그때 사회민주당 지도자와 독일군 2인자는 한동안 공개되지 않을 테지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협약을 맺었다. 에베르트는 무정부 상태와 볼셰비즘을 진압하고 군과 그 모든 전통을 유지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 대가로 그뢰너는 신정부가 자리를 잡고 목표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군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군은 구조되었지만, 공화국은 탄생한 바로 그날 침몰하고 말았다. 그뢰너 자신과 지조 있는 소수를 제외한 다른 장군들은 공화국에 충성할 마음이 결코 없었다. 결국 힌덴부르크의 주도로 그들은 공화국을 나치당에 팔아넘겼다."(106)


"정식으로 선출된 정부가 민주적 정신에 충실하고 나아가 내각과 의회에 복종할 새로운 군을 건설하지 못한 것은 시간의 경과가 알려준 대로 공화국으로서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사법부를 숙청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법 집행자들은 반혁명의 중심 중 하나가 되어 반동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법을 악용했다. 역사가 프란츠 L. 노이만은 〈정치적 사법이 독일공화국의 생애에서 가장 암울한 페이지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카프 폭동 이후 정부는 705명을 반역죄로 기소했지만, 그중 오로지 베를린 경찰청장만이 형벌─5년간의 '명예로운 금고'─을 받았다. 프로이센 정부가 그의 연금 지급을 중단하자 대법원은 다시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반역 관련 법은 공화국 지지자에게는 가차없이 적용되었지만, 조만간 아돌프 히틀러가 알아챌 것처럼 공화국을 전복하려 시도한 사람은 무죄로 풀려나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116-7)


"1923년 1월 11일, 프랑스의 루르 점령으로 독일 경제의 목이 졸리자 마르크화는 바닥을 모르고 급락했다(최종적으로 1달러당 조 단위까지 도달했다). 덕분에 독일 중공업은 무가치한 마르크화로 변제함으로써 부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화조약에 의해 불법화되었는데도 '병무국'이라는 명칭으로 가장해 잔존하던 참모본부는 마르크화 폭락 덕에 전채戰債가 청산되었고 따라서 독일의 다음 전쟁을 방해할 재정적 장애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인민 대중은 산업계 거물들, 군, 국가가 통화 폭락으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보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알았던 것이라곤 은행 잔고가 아무리 많더라도 대충 묶은 당근 한 다발이나 감자 반근, 설탕 수백 그램, 밀가루 1파운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그리고 날마다 굶주림의 고통을 몸으로 알았다. 궁핍과 절망 속에서 그들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공화국에 돌렸다. 이런 시절이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하늘의 선물이었다."(118-20)


"바이에른 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난 맥주홀 폭동 재판에서 루덴도르프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히틀러를 비롯한 피고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누구든 독일국 헌법 또는 주 헌법을 강제로 변경하려 시도하는 사람은 종신형에 처한다〉라고 언명하는 법률─독일 형법 제81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옛 란츠베르크 요새에서의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평판사들이 이 선고마저도 가혹하다고 항의했지만, 재판장은 히틀러가 6개월 복역한 후 가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그들을 달랬다. 히틀러를 외국인으로서 추방하려던 경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판결은 1924년 4월 1일에 내려졌다. 그로부터 채 아홉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0일, 히틀러는 석방되어 민주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싸움을 자유롭게 재개할 수 있었다. 반역죄를 범했다고 해도 그 결과는, 범행자가 극우파일 경우, 법조문에도 불구하고 그리 무겁지 않았으며, 공화국 반대파의 다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147-8)


제4장 히틀러의 정신과 제3제국의 뿌리 


"《나의 투쟁》 제1권에서 히틀러는 생존공간Lebensraum(생활권) 문제,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를 길게 논한다." "히틀러는 새로운 영토 획득은 〈동방에서만 가능했다. ··· 유럽 내에서 땅을 원한다면 대체로 러시아를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새로운 제국이 옛 튜턴기사단의 길을 따라 다시 행군하여 독일의 칼로써 장차 독일 민족이 쟁기질하고 매일 빵을 얻을 땅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한다." "독일 국민은 얼마나 넓은 국토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히틀러가 말하는 '표본 연도'는 독일인이 슬라브인을 다시 동쪽으로 몰아내던 무려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터였다. 동쪽으로 밀어내기를 재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주데텐란트, 단치히를 포함하는 폴란드 서부를 차지한다. 그다음은 러시아 본국이다. 이렇게 써놓았는데도 불과 수년 후에 히틀러 총리가 바로 이 목표를 성취하겠다고 나섰을 때 세계는 왜 그토록 놀랐던 것일까?"(155-8)


"일부 역사가들, 특히 영국 역사가들은 히틀러의 세계관을 조야한 형태의 다윈주의로 여겨왔지만, 사실 그 세계관은 독일의 역사와 사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동시에 독일의 여러 철학자, 역사가, 국왕, 장군,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끝없는 투쟁으로 보았고, 세계를 적자가 살아남고 최강자가 지배하는 밀림─〈한 생물이 다른 생물을 잡아먹고 약자의 죽음이 강자의 삶을 의미하는 세계〉─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따라 〈지배자의 권리〉를 부여받은 자연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 가장 용감하고 근면한 자식〉은 누구인가? 아리아인이다. 아리아인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것을 성취하고 그토록 뛰어난 존재가 되었을까? 히틀러의 답변은 다른 인종들을 짓밟음으로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투쟁》의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나치의 인종 우월성 관념, 지배인종 관념, 즉 제3제국과 히틀러의 신질서의 기반을 이룬 관념의 핵심을 만난다."(161-2)


"1871년부터 1933년까지, 실은 히틀러가 몰락한 1945년까지 독일 역사의 행로는, 중간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제외하면, 직선으로 나아가는 완전히 논리적인 과정이었다. 남성 보통선거에 의해 의원들이 선출되는 제국의회를 창설함으로써 민주적인 외양을 꾸미긴 했지만, 사실 독일 제국은 황제이기도 한 프로이센 국왕이 통치하는 군국주의적 전제국가였다. 제국의회는 권한이 거의 없었거니와, 국민의 대표들이 울분을 토하거나 자신들이 대변하는 계급을 위해 보잘것없는 이익을 좇아 흥정하는 토론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권한─신성한 권리─은 군주에게 있었다." "빌헬름 2세는 의회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가 임명한 총리는 그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지, 의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의회는 총리를 끌어내릴 수도 없었고, 붙들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군주의 대권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에서는 민주주의, 국민주권, 의회의 우위 같은 관념이 결코 뿌리내리지 못했다."(177-8)


제2부 승리와 공고화


제5장 권력에 이르는 길: 1925~1931 


"1924년 말, 출옥한 지 2주 만에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 총리이자 가톨릭 계열의 바이에른인민당 당수인 하인리히 헬트 박사를 서둘러 만났다. 근신하겠다고 약속하자(히틀러는 아직 가석방 중이었다) 헬트는 나치당과 그 기관지에 대한 금지 처분을 풀어주었다. 헬트는 바이에른 법무장관 귀르트너에게 〈야수를 제압했으니 쇠사슬을 조금 풀어주어도 괜찮겠지요〉 하고 말했다. 바이에른 총리는 이런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가장 먼저 범한 독일 정치인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결코 마지막 정치인은 아니었다. 《민족의 파수꾼》은 1925년 2월 26일, 히틀러가 쓴 〈새로운 시작〉이라는 제목의 긴 사설과 함께 복간되었다. 이튿날 히틀러는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열린 부활한 나치당의 첫 대중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히틀러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하나는 모든 권력을 자기 손에 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나치당을 오직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 조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215-6)


"헤르만 뮐러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마지막 총리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 민주 정당들의 연정에 기반을 둔 마지막 정부의 수반으로 1930년 3월 사임했다. 후임 총리는 가톨릭 중앙당의 원내대표 하인리히 브뤼닝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재정 계획 조치들을 승인하도록 제국의회 의원 다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자 브뤼닝은 힌덴부르크에게 헌법 제48조를 발동하여 비상대권에 의거한 대통령령으로 자신의 재정 법안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응해 의회는 대통령령의 철회를 의결했다. 의회제 정부는 경제 위기로 강력한 정부가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와해되고 있었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자 브뤼닝은 1930년 7월 대통령에게 제국의회 해산을 요청했다. 선거일은 9월 14일로 정해졌다. 브뤼닝이 무슨 근거로 이 선거에서 의석의 과반을 무난히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는지는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예상보다 일찍 기회가 왔음을 알아챘다."(248-9)


"큰 기대를 걸었음에도 1930년 9월 14일 밤에 나온 당일의 선거 결과에 히틀러는 퍽 놀랐다. 2년 전, 나치당은 81만 표를 얻어 제국의회 의원 12명을 당선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 이날 나치당은 640만 9600표를 얻어 107석을 차지함으로써 기존의 가장 약소한 아홉 번째 정당에서 단숨에 제2당으로 약진했다." "군대, 그리고 대기업 및 금융계로 이루어진 재계, 양측의 지도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독일 역사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불운한 한때로밖에 보지 않았다. 성공적인 선거 결과에 달아오른 히틀러는 이제 이 양대 세력을 설득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나치당의 선동과 저속함을 좋아하지 않았을 테지만, 공화국의 첫 10년간 너무나 억제되어온 독일의 오랜 애국심과 민족주의 감정을 나치당이 되살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치당은 독일 국민을 공산주의, 사회주의, 노동조합주의, 그리고 쓸데없는 민주주의로부터 빼내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독일 전역을 불타오르게 했다."(250, 256)


제6장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나날: 1931~1933 


"슐라이허의 눈에는 바이마르 체제를 약화시키는 원인들이 명확하게 보였다─누군들 몰랐겠는가? 우선 정당들이 너무 많은 데다(1930년에는 그중 10개 정당이 각각 1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각 당의 목적이 너무 엇갈리고 저마다 자기 당이 대변하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돌보는 데 너무 몰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국의회에서 각각의 차이를 메우고 지속적인 다수파를 형성하여 1930년대 초에 독일이 직면한 중대 위기에 대처할 만한 안정적 정부를 뒷받침할 수가 없었다. 1930년 3월 28일에 총리직을 맡은 브뤼닝이 어떠한 정책을 내놓든 제국의회에서 과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그저 정부의 소관 업무를 수행하는 데 그쳤으며, 경제가 마비된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하려면 헌법 제48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조항에 따르면 비상사태에서는 총리가 대통령의 승인만 받으면 긴급명령에 의해 통치할 수 있었다. 슐라이허는 총리가 바로 이 방법으로 통치하기를 원했다."(273)


"당시 뜻밖의 터무니없는 인물이 무대 중앙에 잠시 얼쩡거렸다. 슐라이허 장군이 1932년 6월 1일 독일 총리에 앉힌 53세의 프란츠 폰 파펜이라는 자였다." "파펜에게는 이렇다 할 정치적 뒷배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제국의회 의원도 아니었다. 정계에서 경험한 최고의 지위가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이었다. 파펜이 총리에 임명되자 소속 정당인 중앙당은 그가 당수 브뤼닝을 배신했다는 데 분개하여 만장일치로 당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파펜에게 초당파 내각을 구성하라고 지시했으며, 파펜은 슐라이허가 이미 각료 명단을 준비해둔 덕에 즉시 정부를 꾸릴 수 있었다." "파펜의 첫 직무는 슐라이허와 히틀러 사이에 맺어진 협정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6월 4일, 파펜은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7월 31일에 새로 치르기로 했으며, 의심 많은 나치 인사들로부터 어지간히 재촉을 받고는 6월 15일에 돌격대 금지령을 해제했다. 그러자 독일 역사에서 일찍이 본 적 없는 정치적 폭력과 살인이 잇따랐다."(295-7)


"7월 20일, 파펜은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하고 스스로 프로이센 제국판무관에 취임했다. 이는 독일 전역에 가닿을 일종의 권위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대담한 행보였다." "파펜은 또 슐라이허가 급조한 '증거'를 들이밀며 프로이센 당국이 공산당과 한통속이었다고 비난했다.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측 각료들이 완력에 밀려 쫓겨나지 않는 한 스스로 물러나지는 않겠다고 하자 파펜은 기꺼이 완력을 행사했다." "좌파 세력이나 민주적인 중도 세력이 민주정 전복 시도에 진지하게 저항할지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더 이상 없었다. 지난 1920년에는 민주정 전복 시도에 맞서 총파업으로 민주정을 구한 바 있었다. 이번에도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 그런 대응을 검토했으나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다. 요컨대 파펜은 합법적인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의 관에 또 하나의 못을 박은 셈이었다. 그가 큰소리친 대로 그 일에 필요했던 것은 병력 1개 분대뿐이었다."(297-8)


"1933년 1월 23일, 총리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를 방문해 제국의회에서 과반 지지를 얻지 못했음을 자인하면서 의회 해산과 더불어 헌법 제48조에 의거해 대통령의 명령으로 통치하는 국가긴급권을 발동하도록 요구했다. 마이스너에 따르면 장군은 제국의회의 〈한시적 배제〉도 요구했고, 정부를 〈군사독재정〉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온갖 간사한 음모를 꾸몄음에도 슐라이허는 지난 12월 초의 파펜과 같은 신세였다. 다만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지난번에는 파펜이 국가긴급권을 요구했지만 슐라이허가 이에 반대하면서 자신이 나치당의 지지를 받아 다수파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슐라이허가 독재를 고집하고 파펜이 힌덴부르크에게 자신이 히틀러를 정부에 끌어들여 제국의회에서 다수파가 되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얽히고 설킨 음모들이 베를린을 가득 채운 가운데 슐라이허는 마지막 순간에 후임 총리로 히틀러를 지지하고 있었다."(326-8)


"이렇게 뒷문을 통해, 내심 혐오하는 보수적 반동주의자들과의 비루한 정치적 거래를 통해 지난날 빈의 부랑자이자 1차대전의 낙오자, 난폭한 혁명가가 대국의 총리가 되었다. 분명히 국가사회주의당은 정부에서 소수파였다. 내각의 열한 자리 중에서 세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총리직을 별도로 치면 그마저 핵심 직책이 아니었다." "중요한 부처들은 보수파에 돌아갔다. 그들은 나치당에 올가미를 걸었으니 이제 자기네 목적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파펜 본인은 독일 부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힌덴부르크로부터 부총리를 대동하지 않을 경우 총리를 접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독특한 직책에 힘입어 급진적인 나치 지도자에게 제동을 걸 수 있다고 파펜은 확신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경박하고 음험한 정치인은 히틀러라는 인물을 알지도 못했고─아무도 히틀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그를 여기까지 밀어올린 세력의 힘을 이해하지도 못했다."(331-2)


"독일의 계급과 집단과 정당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주공화국의 폐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대두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나치즘을 겪었던 독일인들의 중대한 잘못은 서로 단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가사회주의당은 대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1932년 7월에도 총 투표수의 37퍼센트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히틀러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독일인 63퍼센트는 설령 일시적으로라도 단결하여 나치즘을 근절하지 않으면 이 공통의 위험이 자신들을 압도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너무 분열되고 근시안적이어서 서로 힘을 합치지 못했다. 모스크바의 지령을 따르는 공산당은 마지막까지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먼저 사회민주당, 사회민주당계 노조, 중간계급 민주 세력을 쓰러뜨리면 일시적으로는 나치 정권이 들어설 테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며, 그러면 공산당이 정권을 넘겨받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한다는 생각이었다."(332-3)


"보수층은 한때 부랑자였던 오스트리아인이 수중에 있는 한 자신들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화국 파괴는 첫 단계일 뿐이었다. 그들이 원한 다음 단계는 권위주의 국가, 즉 국내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난센스'와 노동조합의 권력에 종지부를 찍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1918년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대군을 재건하여 그 군사력으로 독일을 다시 양지바른 곳으로 이끌 수 있는 국가였다." "호엔촐레른 제국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승리에 의해, 독일 공화국은 1차대전에서 패한 뒤 연합국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3제국은 전쟁의 부침이나 외세의 영향에 빚진 것이 전혀 없었다. 제3제국은 평시에 독일인들 자신의 약점과 강점에 힘입어 평화롭게 출범했다.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완벽하게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히틀러에게 총리직을 맡겼을 때, 독일인 상당수, 아마도 과반수는 나치의 폭정을 자초한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될 터였다."(335-6)


제7장 독일의 나치화: 1933~1934 


"의사당 화재 다음날인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긴급명령에 서명하도록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했다. 헌법에서 개인과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7개 항을 유예하는 내용이었다. 〈개인의 자유 제한, 보도의 자유를 포함해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권리 제한, 집회와 결사의 권리 제한, 우편과 전신 및 전화에 의한 통신의 비밀 침해, 가택 수색 영장, 재산의 몰수 또는 제한 명령 등도 별도로 규정하지 않는 한 법적 제약을 넘어 허용된다.〉 또한 긴급명령은 필요할 경우 연방 주들의 전권을 넘겨받을 권한을 중앙정부에 부여했고, 〈심각한 치안 교란〉을 포함하는 다수의 범죄에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게 했다." "3월 5일, 히틀러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민주적 선거를 치른 날에 독일 국민은 투표를 통해 발언했다. 온갖 테러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의 과반은 히틀러를 거부했다. 나치당은 가장 많은 1727만 7180표를 얻었지만, 이는 총 투표수의 4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347, 350)


"3월 23일, 의회에는 이른바 수권법─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 상정되어 있었다. 간략하게 5개 조로 구성된 이 법은 향후 4년간 국가 예산 통제, 외국과의 조약 승인, 개헌 발의 등을 포함하는 입법권을 의회로부터 빼앗아 내각에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내각이 제정하는 법률은 총리에 의해 입안되고 〈헌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 어떠한 법률도 〈제국의회 및 제국참의원 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했고─분명 가장 잔인한 농담이었다─대통령의 권한은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표결 결과는 찬성 411, 반대 84(모두 사회민주당)였다. 이렇게 해서 독일 의회민주주의가 결국 매장되었다. 공산당 의원들과 일부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체포된 것을 제쳐두면, 비록 테러를 수반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아주 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 의회는 헌법상 권한을 히틀러에게 넘겨줌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54-7)


"1933년 5월 17일,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평화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기만적 선전술의 걸작이었다. 전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계 44개국의 수반들에게 군축과 평화를 지지하는 미국의 계획과 희망을 개괄하고 모든 공격 무기─폭격기, 전차, 이동식 중포─의 폐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히틀러는 루스벨트의 제의를 곧장 받아들여 최대한 활용했다. 독일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은 〈제어되지 않은 광기〉라고 했다. 전쟁은 〈현존하는 사회 질서와 정치 질서의 붕괴를 야기〉한다고 했다. 나치 독일은 다른 국민들의 〈독일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가지 경고가 들어 있기는 했다. 독일은 특히 무장이라는 점에서 다른 모든 국가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독일은 제네바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에서 모두 탈퇴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했다. 이 경고는 예상치 못한 히틀러의 합리적인 발언에 서구 세계가 환호하면서 그만 잊히고 말았다."(373-5)


"1934년 4월 11일, 총리는 블롬베르크 장군,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을 대동한 채 킬 항구에서 순양함 도이칠란트 호에 올랐다. 두 총사령관은 힌덴부르크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고분고분한 블롬베르크의 지지를 받는 히틀러가 자신이 국가방위군의 축복을 받아 대통령의 후임이 되면 어떻겠냐고 직설적으로 제안했다. 군부의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히틀러는 룀의 야망을 억눌러 돌격대를 대폭 축소하고, 제3제국에서 육해군만이 계속 무기를 소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육군 장군들의 상의는 5월 11일 바트나우하임에서 이루어졌고, '도이칠란트 호 협정'에 관한 설명을 들은 육군의 최고위 장교들은 히틀러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후임으로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히틀러가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 위해 치른 대가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돌격대의 희생뿐이었다. 모든 권한을 틀어쥔 히틀러에게 돌격대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382-3)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히틀러는 과거를 모든 좌절이나 실망과 함께 청산하고 있었다. 한 단계씩, 그리고 신속하게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고, 승전한 연합국을 당혹하게 만들고, 독일을 다시 군사 강국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이것은 대다수 독일인이 원하던 바였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지도자가 요구하는 희생, 즉 개인의 자유의 상실, 스파르타식 식사(〈버터보다 총을!〉, 고된 노동을 감수하려 했다. 1936년 가을까지 실업 문제가 대체로 해결되어 거의 모든 사람이 다시 일자리를 얻었고, 노조 결성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이 충실한 도시락 통을 앞에 두고서 적어도 히틀러 치하에서는 더 이상 굶주릴 자유가 없다고 농담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 무렵 〈사익보다 공익!〉이 나치의 인기 있는 구호였으며, 괴링을 비롯해 다수의 당 간부들이 몰래 자기 배를 불리고 있었음에도 일반 대중은 겉보기에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국가사회주의'에 속아 넘어갔다."(412)


"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검열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신문과 라디오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나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고 정보원이 나치인 경우에는 처음부터 의구심을 품었음에도, 몇 년 동안 조작되고 왜곡된 정보를 꾸준히 접하다 보니 특정한 인상을 받게 되고 종종 그런 정보에 호도되는 경험을 하면서 깜짝 놀라고 때로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교양 있고 총명해 보이는 사람들도 라디오에서 듣거나 신문에서 읽은 허튼소리의 어떤 부분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이따금 그런 지적을 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말하고 나면 마치 내가 전능한 신을 모독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서 불신의 눈빛으로 노려보고 충격에 입을 다물곤 했다. 그래서 정신이 뒤틀린 사람이나, 히틀러와 괴벨스의 발언이나 진실을 무시하는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인생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마저도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나는 깨닫게 되었다."(439-40)


"독일 경제 회복의 진정한 기반은 나치 정권이 1934년부터 재계와 노동계─아울러 장군들─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재무장에 있었다. 독일 경제 전체는 나치 용어로 전쟁경제Wehrwirtschaft라고 알려졌는데, 이는 전시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전쟁으로 귀결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계획적으로 설계된 경제였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1935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저서 《총력전Der Totale Krieg》에서 총력전을 적절히 준비하기 위해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국가경제 역시 전체주의적 기준에 의거해 동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독일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프로이센에서는 정부 세입 가운데 무려 7분의 5가 육군을 위해 지출되었고, 언제나 국가경제 전체가 주로 국민 복지의 수단이 아닌 군사 정책의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이 그런 규모의 전쟁을 〈부득이하게〉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그것은 히틀러의 계획적인 결정이었다."(458-9)


"처음에 게슈타포는 괴링이 정권의 적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데 동원한 개인적 테러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1934년 4월, 괴링이 힘러에게 프로이센 비밀경찰의 수장 자리를 넘긴 뒤에야 게슈타포는 친위대의 한 부문으로서 팽창하기 시작했고, 한때 양계업자였던 온화하면서도 가학적인 새로운 지도자와, 친위대 보안국Sicherheitsdienst, SD의 수장으로서 악마 같은 기질을 지닌 청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천재적인 지도 아래 모든 독일인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징벌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1935년 프로이센 최고행정법원은 게슈타포의 명령과 행동은 사법심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1936년 2월 10일에 공포된 게슈타포 기본법은 이 비밀경찰 조직을 법 위에 두었다. 법원은 게슈타포의 활동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게슈타포 내에서 힘러의 오른팔 중 한 명이었던 베르너 베스트 박사는 〈게슈타포가 지도부의 의지를 이행하는 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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