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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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제1장 제3제국의 탄생 


"1909년 11월, 히틀러는 〈운명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빈에 도착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지몬덴크 골목의 가구 딸린 방에서 나와야 했고, 이후 4년 간은 싸구려 여인숙에서 지내거나 도나우 강 근처 빈 제20구의 멜데만 슈트라세 27번지에 있는, 누추한 남성 노숙자 쉼터에서 지내며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 자주 찾아가 겨우 허기를 달래곤 했다." "그렇지만 이런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끝끝내 어엿한 직장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이, 그는 행여 프롤레타리아트 신분으로, 육체노동자 신분으로 미끄러져 내려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프티부르주아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훗날 그는 그때까지 지도자 없이 낮은 급료를 받으며 무시당하던 광범한 화이트칼라층을 토대로 삼아 국가사회주의당을 조직하면서 이 두려움을 활용했다. 이 두려움은 또한 수백만에 달하는 이 화이트칼라층 사이에서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자신들이 '노동자'보다 낫다는 환상을 조장했다."(44-5)


"《나의 투쟁》에 썼듯이, 어느 날 그는 빈 노동자들의 대중 시위를 목격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그곳에 서서 거대한 인간 용이 천천히 꿈틀대며 지나가는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나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사회민주당의 기관지를 펼쳐 있고, 당 지도부의 연설을 검토하고, 당 조직을 살펴보고, 당의 심리학과 정치적 수법을 곱씹고, 그 결과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성공을 설명하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그들은 어떻게 대중운동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대중운동 없이는 그 어떤 정당도 무력하다. 둘째, 그들은 대중 사이에서 구사하는 선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셋째, 그들은 그가 말하는 〈정신적·육체적 테러〉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 세 번째 교훈은 분명 부실한 관찰에 근거했고 거기에 터무니없는 편견이 섞여 있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교훈을 활용할 터였다."(51-2)


"히틀러가 살던 무렵의 빈에는 이러한 지지의 필요성과 대중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당을 구축할 필요성을 이해한 정치 지도자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빈의 시장이자 기독교사회당 지도자인 카를 뤼거 박사였다." "훗날의 히틀러와, 빈의 중간계급 하층의 우상인 덩치 크고 화통하고 상냥한 시장 사이에는 분명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뤼거가 불만 많은 프티부르주아지를 끌어들이고 나중의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극성스러운 반유대주의를 동원한 정당의 당수로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가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해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뤼거는 상당한 지적 성취를 거둔 사람이었으며, 유대인을 포함한 반대자들도 그가 본심으로는 점잖고 예의 바르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뜻 인정했다." "이 점이 청년 히틀러에게는 신경에 거슬렸다. 히틀러는 뤼거가 지나치게 관대하고 유대인의 인종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54-5)


"그러나 히틀러는 결국 뤼거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뤼거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법을 알았고, 현대사회의 온갖 문제와 대중을 사로잡는 선전 및 웅변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뤼거가 강력한 교회를 상대하는 방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뤼거는 〈유서 깊은 제도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기민하게 활용했고, 그리하여 오랜 권력의 원천들로부터 자신의 운동에 이로운 것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다.〉 요컨대 바로 여기에 훗날 히틀러가 독일에서 자신의 정당을 조직하고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활용한 이념과 수법이 담겨 있다. 그의 독창성은 1차대전 이후 우파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그런 이념과 수법을 독일 정세에 적용했다는 데 있다. 이로써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당들 중에서 나치 운동만이 대규모 추종 세력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 공화국 대통령, 대기업 협회─〈유서 깊은 제도권〉의 3대 세력─의 지지를 확보해 독일 총리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55)


제2장 나치당의 탄생 


"전후의 혼란기에 바이에른의 우파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규군, 즉 국가방위군Reichswehr이 있었다. 비텔스바흐 왕가의 복귀를 바라는 군주제 지지자들이 있었다. 베를린에 수립된 민주공화국을 경멸하는 다수의 보수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 대규모 제대 군인의 무리, 1918년의 패전으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 무리가 있었다." "1920년 3월 14일, 국가방위군은 뮌헨에서 호프만의 사회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구스타프 폰 카르를 수장으로 하는 우파 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이 바이에른의 주도는 공화국을 뒤엎고 권위주의 정권을 세워 베르사유 조약의 강제 조항을 거부하기로 결의한 독일 내 모든 세력을 끌어들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에어하르트 여단의 단원들을 비롯한 자유군단의 용병들은 피난처를 마련했고 또 환영을 받았다. 루덴도르프 장군과 불만 많은 다수의 퇴역 장교들도 뮌헨에 정착했다. 이 비옥한 땅에서 아돌프 히틀러도 첫걸음을 내디뎠다."(70-2)


"1920년에 입당한 루돌프 헤스는 학위논문으로 써서 상을 받은 「독일을 다시금 지난날의 영광으로 이끌 인물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글로 히틀러를 감동시켰다. 〈모든 권위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인민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권위를 세울 수 있다. ··· 독재자는 처음부터 광범한 대중에게 더 깊이 뿌리박고 있을수록 그들을 심리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것이고, 노동자들로부터 불신을 덜 받을 것이고, 인민 가운데 가장 정력적인 이 계층 사이에서 지지자를 더 많이 얻을 것이다. 그 자신은 대중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모든 위대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성 그 자체이다. ··· 불가피할 때면 그는 유혈 사태도 피하지 않는다. 중대한 문제들은 언제나 피와 철에 의해 결정된다. ···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마저 짓발고 넘어설 각오가 되어 있다. ··· 입법자는 지독히 무정하게 일을 처리한다. ··· 필요할 때면 척탄병의 군화로 그들[인민]을 짓밟을 수 있다.〉"(94-5)


"1921년 4월 연합국은 독일에 배상금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1320억 금마르크─당시 액수로 330억 달러─라는 경악스러운 금액에 독일인들은 도저히 지불할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통상 1달러에 4마르크였던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921년 여름에는 1달러에 75마르크로 떨어졌고, 1년 후에는 400마르크로 폭락했다. 1921년 8월 에르츠베르거가 살해되었다. 1922년 6월, 공화국을 선포했던 사회민주당의 필리프 샤이데만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같은 달 24일, 외무장관 라테나우가 길거리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 세 사건 공히 범인은 극우파의 일원이었다. 휘청거리던 베를린 중앙정부는 결국 정치적 테러를 엄벌하는 내용의 공화국 보호를 위한 특별법 발포로 이 도전에 응수했다. 바이에른 정부가 특별법을 시행하려 하자, 이제 인정받는 젊은 지도자 축에 드는 히틀러를 비롯한 이 지역 우파는 레르헨펠트를 끌어내리고 베를린으로 진격해 공화국을 쓰러뜨릴 음모를 꾸몄다."(101)


제3장 베르사유, 바이마르, 맥주홀 폭동 


"1918년 11월, 절대권력을 쥔 사회민주당은 영속적인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재빨리 닦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호엔촐레른 제국을 지탱하던 세력들, 민주정 독일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세력들을 영원히 탄압하거나 적어도 영원히 억제해야 했을 것이다. 그 세력들이란 봉건적인 융커 지주를 비롯한 상류층, 거대 카르텔을 주무르는 대자본가들, 자유군단의 떠돌이 용병들, 행정조직의 관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군부와 참모본부였다. 사회민주당은 낭비가 많고 비경제적인 광대한 사유지, 독점기업과 카르텔을 해체하고, 나아가 새로운 민주정에 충성스럽고도 성실하게 봉사하지 않을 모든 사람을 관료제, 사법부, 경찰, 대학, 군대에서 남김없이 내쫓아야 했을 것이다. 이 사회민주당원들 대다수는 독일의 다른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기성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습관이 몸에 밴 선량한 노동조합주의자였던 터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군부에 권위를 양도하기 시작했다."(105)


"빌헬름 그뢰너는 루덴도르프에 이어 제1병참총감이 된 장군이었다. 1918년 11월 9일, 스파에서 힌덴부르크 원수가 머뭇거릴 때 카이저에게 이제 더는 군의 충성을 받으실 수 없으니 퇴위하셔야 한다고 직언했던─군부가 결코 용서하지 않은 용감한 행동─인물도 그뢰너였다." "조국이 극도로 곤경에 처한 순간에, 두 사람은 비밀 전화선을 통해 재회했다. 바로 그때 사회민주당 지도자와 독일군 2인자는 한동안 공개되지 않을 테지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협약을 맺었다. 에베르트는 무정부 상태와 볼셰비즘을 진압하고 군과 그 모든 전통을 유지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 대가로 그뢰너는 신정부가 자리를 잡고 목표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군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군은 구조되었지만, 공화국은 탄생한 바로 그날 침몰하고 말았다. 그뢰너 자신과 지조 있는 소수를 제외한 다른 장군들은 공화국에 충성할 마음이 결코 없었다. 결국 힌덴부르크의 주도로 그들은 공화국을 나치당에 팔아넘겼다."(106)


"정식으로 선출된 정부가 민주적 정신에 충실하고 나아가 내각과 의회에 복종할 새로운 군을 건설하지 못한 것은 시간의 경과가 알려준 대로 공화국으로서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사법부를 숙청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법 집행자들은 반혁명의 중심 중 하나가 되어 반동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법을 악용했다. 역사가 프란츠 L. 노이만은 〈정치적 사법이 독일공화국의 생애에서 가장 암울한 페이지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카프 폭동 이후 정부는 705명을 반역죄로 기소했지만, 그중 오로지 베를린 경찰청장만이 형벌─5년간의 '명예로운 금고'─을 받았다. 프로이센 정부가 그의 연금 지급을 중단하자 대법원은 다시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반역 관련 법은 공화국 지지자에게는 가차없이 적용되었지만, 조만간 아돌프 히틀러가 알아챌 것처럼 공화국을 전복하려 시도한 사람은 무죄로 풀려나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116-7)


"1923년 1월 11일, 프랑스의 루르 점령으로 독일 경제의 목이 졸리자 마르크화는 바닥을 모르고 급락했다(최종적으로 1달러당 조 단위까지 도달했다). 덕분에 독일 중공업은 무가치한 마르크화로 변제함으로써 부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화조약에 의해 불법화되었는데도 '병무국'이라는 명칭으로 가장해 잔존하던 참모본부는 마르크화 폭락 덕에 전채戰債가 청산되었고 따라서 독일의 다음 전쟁을 방해할 재정적 장애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인민 대중은 산업계 거물들, 군, 국가가 통화 폭락으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보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알았던 것이라곤 은행 잔고가 아무리 많더라도 대충 묶은 당근 한 다발이나 감자 반근, 설탕 수백 그램, 밀가루 1파운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그리고 날마다 굶주림의 고통을 몸으로 알았다. 궁핍과 절망 속에서 그들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공화국에 돌렸다. 이런 시절이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하늘의 선물이었다."(118-20)


"바이에른 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난 맥주홀 폭동 재판에서 루덴도르프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히틀러를 비롯한 피고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누구든 독일국 헌법 또는 주 헌법을 강제로 변경하려 시도하는 사람은 종신형에 처한다〉라고 언명하는 법률─독일 형법 제81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옛 란츠베르크 요새에서의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평판사들이 이 선고마저도 가혹하다고 항의했지만, 재판장은 히틀러가 6개월 복역한 후 가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그들을 달랬다. 히틀러를 외국인으로서 추방하려던 경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판결은 1924년 4월 1일에 내려졌다. 그로부터 채 아홉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0일, 히틀러는 석방되어 민주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싸움을 자유롭게 재개할 수 있었다. 반역죄를 범했다고 해도 그 결과는, 범행자가 극우파일 경우, 법조문에도 불구하고 그리 무겁지 않았으며, 공화국 반대파의 다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147-8)


제4장 히틀러의 정신과 제3제국의 뿌리 


"《나의 투쟁》 제1권에서 히틀러는 생존공간Lebensraum(생활권) 문제,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를 길게 논한다." "히틀러는 새로운 영토 획득은 〈동방에서만 가능했다. ··· 유럽 내에서 땅을 원한다면 대체로 러시아를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새로운 제국이 옛 튜턴기사단의 길을 따라 다시 행군하여 독일의 칼로써 장차 독일 민족이 쟁기질하고 매일 빵을 얻을 땅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한다." "독일 국민은 얼마나 넓은 국토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히틀러가 말하는 '표본 연도'는 독일인이 슬라브인을 다시 동쪽으로 몰아내던 무려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터였다. 동쪽으로 밀어내기를 재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주데텐란트, 단치히를 포함하는 폴란드 서부를 차지한다. 그다음은 러시아 본국이다. 이렇게 써놓았는데도 불과 수년 후에 히틀러 총리가 바로 이 목표를 성취하겠다고 나섰을 때 세계는 왜 그토록 놀랐던 것일까?"(155-8)


"일부 역사가들, 특히 영국 역사가들은 히틀러의 세계관을 조야한 형태의 다윈주의로 여겨왔지만, 사실 그 세계관은 독일의 역사와 사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동시에 독일의 여러 철학자, 역사가, 국왕, 장군,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끝없는 투쟁으로 보았고, 세계를 적자가 살아남고 최강자가 지배하는 밀림─〈한 생물이 다른 생물을 잡아먹고 약자의 죽음이 강자의 삶을 의미하는 세계〉─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따라 〈지배자의 권리〉를 부여받은 자연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 가장 용감하고 근면한 자식〉은 누구인가? 아리아인이다. 아리아인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것을 성취하고 그토록 뛰어난 존재가 되었을까? 히틀러의 답변은 다른 인종들을 짓밟음으로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투쟁》의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나치의 인종 우월성 관념, 지배인종 관념, 즉 제3제국과 히틀러의 신질서의 기반을 이룬 관념의 핵심을 만난다."(161-2)


"1871년부터 1933년까지, 실은 히틀러가 몰락한 1945년까지 독일 역사의 행로는, 중간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제외하면, 직선으로 나아가는 완전히 논리적인 과정이었다. 남성 보통선거에 의해 의원들이 선출되는 제국의회를 창설함으로써 민주적인 외양을 꾸미긴 했지만, 사실 독일 제국은 황제이기도 한 프로이센 국왕이 통치하는 군국주의적 전제국가였다. 제국의회는 권한이 거의 없었거니와, 국민의 대표들이 울분을 토하거나 자신들이 대변하는 계급을 위해 보잘것없는 이익을 좇아 흥정하는 토론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권한─신성한 권리─은 군주에게 있었다." "빌헬름 2세는 의회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가 임명한 총리는 그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지, 의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의회는 총리를 끌어내릴 수도 없었고, 붙들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군주의 대권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에서는 민주주의, 국민주권, 의회의 우위 같은 관념이 결코 뿌리내리지 못했다."(177-8)


제2부 승리와 공고화


제5장 권력에 이르는 길: 1925~1931 


"1924년 말, 출옥한 지 2주 만에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 총리이자 가톨릭 계열의 바이에른인민당 당수인 하인리히 헬트 박사를 서둘러 만났다. 근신하겠다고 약속하자(히틀러는 아직 가석방 중이었다) 헬트는 나치당과 그 기관지에 대한 금지 처분을 풀어주었다. 헬트는 바이에른 법무장관 귀르트너에게 〈야수를 제압했으니 쇠사슬을 조금 풀어주어도 괜찮겠지요〉 하고 말했다. 바이에른 총리는 이런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가장 먼저 범한 독일 정치인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결코 마지막 정치인은 아니었다. 《민족의 파수꾼》은 1925년 2월 26일, 히틀러가 쓴 〈새로운 시작〉이라는 제목의 긴 사설과 함께 복간되었다. 이튿날 히틀러는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열린 부활한 나치당의 첫 대중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히틀러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하나는 모든 권력을 자기 손에 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나치당을 오직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 조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215-6)


"헤르만 뮐러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마지막 총리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 민주 정당들의 연정에 기반을 둔 마지막 정부의 수반으로 1930년 3월 사임했다. 후임 총리는 가톨릭 중앙당의 원내대표 하인리히 브뤼닝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재정 계획 조치들을 승인하도록 제국의회 의원 다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자 브뤼닝은 힌덴부르크에게 헌법 제48조를 발동하여 비상대권에 의거한 대통령령으로 자신의 재정 법안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응해 의회는 대통령령의 철회를 의결했다. 의회제 정부는 경제 위기로 강력한 정부가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와해되고 있었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자 브뤼닝은 1930년 7월 대통령에게 제국의회 해산을 요청했다. 선거일은 9월 14일로 정해졌다. 브뤼닝이 무슨 근거로 이 선거에서 의석의 과반을 무난히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는지는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예상보다 일찍 기회가 왔음을 알아챘다."(248-9)


"큰 기대를 걸었음에도 1930년 9월 14일 밤에 나온 당일의 선거 결과에 히틀러는 퍽 놀랐다. 2년 전, 나치당은 81만 표를 얻어 제국의회 의원 12명을 당선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 이날 나치당은 640만 9600표를 얻어 107석을 차지함으로써 기존의 가장 약소한 아홉 번째 정당에서 단숨에 제2당으로 약진했다." "군대, 그리고 대기업 및 금융계로 이루어진 재계, 양측의 지도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독일 역사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불운한 한때로밖에 보지 않았다. 성공적인 선거 결과에 달아오른 히틀러는 이제 이 양대 세력을 설득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나치당의 선동과 저속함을 좋아하지 않았을 테지만, 공화국의 첫 10년간 너무나 억제되어온 독일의 오랜 애국심과 민족주의 감정을 나치당이 되살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치당은 독일 국민을 공산주의, 사회주의, 노동조합주의, 그리고 쓸데없는 민주주의로부터 빼내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독일 전역을 불타오르게 했다."(250, 256)


제6장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나날: 1931~1933 


"슐라이허의 눈에는 바이마르 체제를 약화시키는 원인들이 명확하게 보였다─누군들 몰랐겠는가? 우선 정당들이 너무 많은 데다(1930년에는 그중 10개 정당이 각각 1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각 당의 목적이 너무 엇갈리고 저마다 자기 당이 대변하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돌보는 데 너무 몰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국의회에서 각각의 차이를 메우고 지속적인 다수파를 형성하여 1930년대 초에 독일이 직면한 중대 위기에 대처할 만한 안정적 정부를 뒷받침할 수가 없었다. 1930년 3월 28일에 총리직을 맡은 브뤼닝이 어떠한 정책을 내놓든 제국의회에서 과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그저 정부의 소관 업무를 수행하는 데 그쳤으며, 경제가 마비된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하려면 헌법 제48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조항에 따르면 비상사태에서는 총리가 대통령의 승인만 받으면 긴급명령에 의해 통치할 수 있었다. 슐라이허는 총리가 바로 이 방법으로 통치하기를 원했다."(273)


"당시 뜻밖의 터무니없는 인물이 무대 중앙에 잠시 얼쩡거렸다. 슐라이허 장군이 1932년 6월 1일 독일 총리에 앉힌 53세의 프란츠 폰 파펜이라는 자였다." "파펜에게는 이렇다 할 정치적 뒷배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제국의회 의원도 아니었다. 정계에서 경험한 최고의 지위가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이었다. 파펜이 총리에 임명되자 소속 정당인 중앙당은 그가 당수 브뤼닝을 배신했다는 데 분개하여 만장일치로 당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파펜에게 초당파 내각을 구성하라고 지시했으며, 파펜은 슐라이허가 이미 각료 명단을 준비해둔 덕에 즉시 정부를 꾸릴 수 있었다." "파펜의 첫 직무는 슐라이허와 히틀러 사이에 맺어진 협정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6월 4일, 파펜은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7월 31일에 새로 치르기로 했으며, 의심 많은 나치 인사들로부터 어지간히 재촉을 받고는 6월 15일에 돌격대 금지령을 해제했다. 그러자 독일 역사에서 일찍이 본 적 없는 정치적 폭력과 살인이 잇따랐다."(295-7)


"7월 20일, 파펜은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하고 스스로 프로이센 제국판무관에 취임했다. 이는 독일 전역에 가닿을 일종의 권위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대담한 행보였다." "파펜은 또 슐라이허가 급조한 '증거'를 들이밀며 프로이센 당국이 공산당과 한통속이었다고 비난했다.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측 각료들이 완력에 밀려 쫓겨나지 않는 한 스스로 물러나지는 않겠다고 하자 파펜은 기꺼이 완력을 행사했다." "좌파 세력이나 민주적인 중도 세력이 민주정 전복 시도에 진지하게 저항할지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더 이상 없었다. 지난 1920년에는 민주정 전복 시도에 맞서 총파업으로 민주정을 구한 바 있었다. 이번에도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 그런 대응을 검토했으나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다. 요컨대 파펜은 합법적인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의 관에 또 하나의 못을 박은 셈이었다. 그가 큰소리친 대로 그 일에 필요했던 것은 병력 1개 분대뿐이었다."(297-8)


"1933년 1월 23일, 총리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를 방문해 제국의회에서 과반 지지를 얻지 못했음을 자인하면서 의회 해산과 더불어 헌법 제48조에 의거해 대통령의 명령으로 통치하는 국가긴급권을 발동하도록 요구했다. 마이스너에 따르면 장군은 제국의회의 〈한시적 배제〉도 요구했고, 정부를 〈군사독재정〉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온갖 간사한 음모를 꾸몄음에도 슐라이허는 지난 12월 초의 파펜과 같은 신세였다. 다만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지난번에는 파펜이 국가긴급권을 요구했지만 슐라이허가 이에 반대하면서 자신이 나치당의 지지를 받아 다수파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슐라이허가 독재를 고집하고 파펜이 힌덴부르크에게 자신이 히틀러를 정부에 끌어들여 제국의회에서 다수파가 되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얽히고 설킨 음모들이 베를린을 가득 채운 가운데 슐라이허는 마지막 순간에 후임 총리로 히틀러를 지지하고 있었다."(326-8)


"이렇게 뒷문을 통해, 내심 혐오하는 보수적 반동주의자들과의 비루한 정치적 거래를 통해 지난날 빈의 부랑자이자 1차대전의 낙오자, 난폭한 혁명가가 대국의 총리가 되었다. 분명히 국가사회주의당은 정부에서 소수파였다. 내각의 열한 자리 중에서 세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총리직을 별도로 치면 그마저 핵심 직책이 아니었다." "중요한 부처들은 보수파에 돌아갔다. 그들은 나치당에 올가미를 걸었으니 이제 자기네 목적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파펜 본인은 독일 부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힌덴부르크로부터 부총리를 대동하지 않을 경우 총리를 접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독특한 직책에 힘입어 급진적인 나치 지도자에게 제동을 걸 수 있다고 파펜은 확신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경박하고 음험한 정치인은 히틀러라는 인물을 알지도 못했고─아무도 히틀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그를 여기까지 밀어올린 세력의 힘을 이해하지도 못했다."(331-2)


"독일의 계급과 집단과 정당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주공화국의 폐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대두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나치즘을 겪었던 독일인들의 중대한 잘못은 서로 단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가사회주의당은 대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1932년 7월에도 총 투표수의 37퍼센트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히틀러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독일인 63퍼센트는 설령 일시적으로라도 단결하여 나치즘을 근절하지 않으면 이 공통의 위험이 자신들을 압도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너무 분열되고 근시안적이어서 서로 힘을 합치지 못했다. 모스크바의 지령을 따르는 공산당은 마지막까지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먼저 사회민주당, 사회민주당계 노조, 중간계급 민주 세력을 쓰러뜨리면 일시적으로는 나치 정권이 들어설 테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며, 그러면 공산당이 정권을 넘겨받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한다는 생각이었다."(332-3)


"보수층은 한때 부랑자였던 오스트리아인이 수중에 있는 한 자신들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화국 파괴는 첫 단계일 뿐이었다. 그들이 원한 다음 단계는 권위주의 국가, 즉 국내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난센스'와 노동조합의 권력에 종지부를 찍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1918년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대군을 재건하여 그 군사력으로 독일을 다시 양지바른 곳으로 이끌 수 있는 국가였다." "호엔촐레른 제국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승리에 의해, 독일 공화국은 1차대전에서 패한 뒤 연합국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3제국은 전쟁의 부침이나 외세의 영향에 빚진 것이 전혀 없었다. 제3제국은 평시에 독일인들 자신의 약점과 강점에 힘입어 평화롭게 출범했다.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완벽하게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히틀러에게 총리직을 맡겼을 때, 독일인 상당수, 아마도 과반수는 나치의 폭정을 자초한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될 터였다."(335-6)


제7장 독일의 나치화: 1933~1934 


"의사당 화재 다음날인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긴급명령에 서명하도록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했다. 헌법에서 개인과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7개 항을 유예하는 내용이었다. 〈개인의 자유 제한, 보도의 자유를 포함해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권리 제한, 집회와 결사의 권리 제한, 우편과 전신 및 전화에 의한 통신의 비밀 침해, 가택 수색 영장, 재산의 몰수 또는 제한 명령 등도 별도로 규정하지 않는 한 법적 제약을 넘어 허용된다.〉 또한 긴급명령은 필요할 경우 연방 주들의 전권을 넘겨받을 권한을 중앙정부에 부여했고, 〈심각한 치안 교란〉을 포함하는 다수의 범죄에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게 했다." "3월 5일, 히틀러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민주적 선거를 치른 날에 독일 국민은 투표를 통해 발언했다. 온갖 테러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의 과반은 히틀러를 거부했다. 나치당은 가장 많은 1727만 7180표를 얻었지만, 이는 총 투표수의 4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347, 350)


"3월 23일, 의회에는 이른바 수권법─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 상정되어 있었다. 간략하게 5개 조로 구성된 이 법은 향후 4년간 국가 예산 통제, 외국과의 조약 승인, 개헌 발의 등을 포함하는 입법권을 의회로부터 빼앗아 내각에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내각이 제정하는 법률은 총리에 의해 입안되고 〈헌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 어떠한 법률도 〈제국의회 및 제국참의원 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했고─분명 가장 잔인한 농담이었다─대통령의 권한은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표결 결과는 찬성 411, 반대 84(모두 사회민주당)였다. 이렇게 해서 독일 의회민주주의가 결국 매장되었다. 공산당 의원들과 일부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체포된 것을 제쳐두면, 비록 테러를 수반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아주 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 의회는 헌법상 권한을 히틀러에게 넘겨줌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54-7)


"1933년 5월 17일,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평화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기만적 선전술의 걸작이었다. 전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계 44개국의 수반들에게 군축과 평화를 지지하는 미국의 계획과 희망을 개괄하고 모든 공격 무기─폭격기, 전차, 이동식 중포─의 폐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히틀러는 루스벨트의 제의를 곧장 받아들여 최대한 활용했다. 독일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은 〈제어되지 않은 광기〉라고 했다. 전쟁은 〈현존하는 사회 질서와 정치 질서의 붕괴를 야기〉한다고 했다. 나치 독일은 다른 국민들의 〈독일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가지 경고가 들어 있기는 했다. 독일은 특히 무장이라는 점에서 다른 모든 국가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독일은 제네바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에서 모두 탈퇴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했다. 이 경고는 예상치 못한 히틀러의 합리적인 발언에 서구 세계가 환호하면서 그만 잊히고 말았다."(373-5)


"1934년 4월 11일, 총리는 블롬베르크 장군,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을 대동한 채 킬 항구에서 순양함 도이칠란트 호에 올랐다. 두 총사령관은 힌덴부르크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고분고분한 블롬베르크의 지지를 받는 히틀러가 자신이 국가방위군의 축복을 받아 대통령의 후임이 되면 어떻겠냐고 직설적으로 제안했다. 군부의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히틀러는 룀의 야망을 억눌러 돌격대를 대폭 축소하고, 제3제국에서 육해군만이 계속 무기를 소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육군 장군들의 상의는 5월 11일 바트나우하임에서 이루어졌고, '도이칠란트 호 협정'에 관한 설명을 들은 육군의 최고위 장교들은 히틀러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후임으로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히틀러가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 위해 치른 대가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돌격대의 희생뿐이었다. 모든 권한을 틀어쥔 히틀러에게 돌격대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382-3)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히틀러는 과거를 모든 좌절이나 실망과 함께 청산하고 있었다. 한 단계씩, 그리고 신속하게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고, 승전한 연합국을 당혹하게 만들고, 독일을 다시 군사 강국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이것은 대다수 독일인이 원하던 바였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지도자가 요구하는 희생, 즉 개인의 자유의 상실, 스파르타식 식사(〈버터보다 총을!〉, 고된 노동을 감수하려 했다. 1936년 가을까지 실업 문제가 대체로 해결되어 거의 모든 사람이 다시 일자리를 얻었고, 노조 결성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이 충실한 도시락 통을 앞에 두고서 적어도 히틀러 치하에서는 더 이상 굶주릴 자유가 없다고 농담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 무렵 〈사익보다 공익!〉이 나치의 인기 있는 구호였으며, 괴링을 비롯해 다수의 당 간부들이 몰래 자기 배를 불리고 있었음에도 일반 대중은 겉보기에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국가사회주의'에 속아 넘어갔다."(412)


"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검열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신문과 라디오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나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고 정보원이 나치인 경우에는 처음부터 의구심을 품었음에도, 몇 년 동안 조작되고 왜곡된 정보를 꾸준히 접하다 보니 특정한 인상을 받게 되고 종종 그런 정보에 호도되는 경험을 하면서 깜짝 놀라고 때로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교양 있고 총명해 보이는 사람들도 라디오에서 듣거나 신문에서 읽은 허튼소리의 어떤 부분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이따금 그런 지적을 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말하고 나면 마치 내가 전능한 신을 모독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서 불신의 눈빛으로 노려보고 충격에 입을 다물곤 했다. 그래서 정신이 뒤틀린 사람이나, 히틀러와 괴벨스의 발언이나 진실을 무시하는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인생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마저도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나는 깨닫게 되었다."(439-40)


"독일 경제 회복의 진정한 기반은 나치 정권이 1934년부터 재계와 노동계─아울러 장군들─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재무장에 있었다. 독일 경제 전체는 나치 용어로 전쟁경제Wehrwirtschaft라고 알려졌는데, 이는 전시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전쟁으로 귀결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계획적으로 설계된 경제였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1935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저서 《총력전Der Totale Krieg》에서 총력전을 적절히 준비하기 위해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국가경제 역시 전체주의적 기준에 의거해 동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독일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프로이센에서는 정부 세입 가운데 무려 7분의 5가 육군을 위해 지출되었고, 언제나 국가경제 전체가 주로 국민 복지의 수단이 아닌 군사 정책의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이 그런 규모의 전쟁을 〈부득이하게〉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그것은 히틀러의 계획적인 결정이었다."(458-9)


"처음에 게슈타포는 괴링이 정권의 적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데 동원한 개인적 테러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1934년 4월, 괴링이 힘러에게 프로이센 비밀경찰의 수장 자리를 넘긴 뒤에야 게슈타포는 친위대의 한 부문으로서 팽창하기 시작했고, 한때 양계업자였던 온화하면서도 가학적인 새로운 지도자와, 친위대 보안국Sicherheitsdienst, SD의 수장으로서 악마 같은 기질을 지닌 청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천재적인 지도 아래 모든 독일인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징벌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1935년 프로이센 최고행정법원은 게슈타포의 명령과 행동은 사법심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1936년 2월 10일에 공포된 게슈타포 기본법은 이 비밀경찰 조직을 법 위에 두었다. 법원은 게슈타포의 활동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게슈타포 내에서 힘러의 오른팔 중 한 명이었던 베르너 베스트 박사는 〈게슈타포가 지도부의 의지를 이행하는 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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