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관료제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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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 관료제의 특수한 기능 방식


① 관청은 규칙(법률이나 행정 규정)에 의해 일반적으로 질서정연한 '권한'을 갖는다.

② 관직 위계제와 심급제의 원칙이 존재한다. 즉, 상급 관청이 하급 관청을 감독하는 형태로 관청 간의 상하위 관계가 명확하다.

③ 근대적인 직무 수행은 원본 또는 초안으로 보관되는 서류(문서)에 의거해서 이루어진다.

④ 직무 활동은 보통 철저한 전문 교육을 전제로 한다.

⑤ 직무가 완전히 발전하면, 직무 활동은 관료의 모든 노동력을 요구한다.

⑥ 관료의 직무 수행은 어느 정도 명확하고 또 어느 정도 완전하며 습득할 수 있는 일반적인 규정에 따라 행해진다.


2. 관료의 지위


① 관직은 '직업'이다. 관직에 취임하면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특별한 '직무 충실 의무'를 떠맡는다.

② 상급기관에 의해 '임명'된('선출'이 아니라) 근대의 관료는 피지배자에 비해 특별히 높은 "신분상"의 사회적 평가를 추구하며, 대개 그러한 평가를 누린다.

③ 적어도 공적인 조직체나 이와 가장 가까운 조직체에서는 '지위의 종신성'이 있다.

④ 관료는 보통 정기적으로 고정된 봉급 형태의 화폐 보수를 받으며, 연금을 통해 노후를 보장받는다.

⑤ 관료는 관청의 위계질서에 따라 낮은 지위에서 높은 지위로의 "승진"을 목표로 한다.


3. 관료제화의 전제와 수반 현상


① 관료들에게 지급되는 화폐 보수를 고려하면, '화폐 경제'의 발달이 전제된다. 특히 관료제가 변함없이 존속하는 데 필요하다.

② 정치 영역에서는 거대 국가와 대중 정당이 관료제화의 고전적 기반을 형성한다.

③ 행정 업무 범위의 외연적인 양적 확대보다는 집중적인 질적 확대와 내적 발전(치안, 사법, 교육 등 아주 다양한 생활 수요에 대한 조직적이고 공동 경제적인 배려의 요구)이 관료제화의 원인이다.

④ 관료제 조직이 확산된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형태보다 순전히 '기술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이다(비인간화된 계산가능성).

⑤ 관료제 구조는 지배자[국가, 자본주의 대기업, 군대, 대학 등]의 수중에 '물적 경영 수단이 집중'되는 것과 함께 나타난다.

⑥ 관료제 조직은 '경제적 및 사회적 차이'의 중요성이 적어도 상대적으로는 '평준화된 것'에 기초해서 행정 기능을 담당한다.


4. 관료제 기구의 지속적인 성격


관료제는 일단 완전히 실현되면 파괴하기가 가장 힘든 사회 조직이 된다. 관료제화는 [ 합의된 ] “공동체 행위”를 합리적으로 조정된 “이익사회 행위”로 바꾸는 특수한 수단이다. 따라서 지배 관계를 “이익사회 관계로 바꾸는” 수단으로서의 관료제화란 관료제 기구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에게는 일급의 권력 수단이었으며, 또 지금도 그렇다. 왜냐하면, 다른 기회가 동일한 경우 계획적으로 조정되고 관리된 “이익사회 행위”는 이에 저항하는 “대중 행위”나 “공동체 행위”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행정의 관료제화가 일단 완전히 관철된 곳에서는, 사실상 부숴버릴 수 없는 형태의 지배 관계가 만들어진다. 개개의 관료는 그가 편입되어 있는 기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이 기구 속에 편입된 모든 직원의 이해 관계 공동체에 확고하게 묶이게 되는데, 이때 그 모든 직원의 공통된 이해 관계란 그 기구가 계속해서 기능을 발휘하고 또 이익사회 관계에 맞춰 행사되는 지배가 존속하는 것을 말한다. 36)


5. 관료제화의 경제적 및 사회적 결과


사회 전체가 — 실제로든 어쩌면 단지 형식상으로만이든 간에 — 그 말의 근대적인 의미에서 민주화된다는 것은 관료제화 현상 일반을 위해서 특히 유리한 기반은 되지만 결코 유일하게 가능한 기반은 아니다. 관료제화 현상은 사실 그것이 개개의 경우에 차지하려는 영역에서 이 관료제화 현상에 방해되는 권력들을 평준화하려고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매우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마주쳤으며, 앞으로도 반복해서 논의하게 될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민주주의” 자체는 불가피하게 관료제화를 — 원하지는 않지만 — 촉진시킴에도 불구하고 또 촉진시키기 때문에 관료제 “지배”의 적이 되며, 아울러 “민주주의”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는 관료제 조직의 매우 뚜렷한 돌파구도 만들어 내고 방해물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개개의 역사적 경우를 고찰할 때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밀 기구인) 관료제화가 바로 그 개개의 역사적 경우에 어떤 특별한 방향으로 진행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39)


6. 관료제의 권력 위상


완전히 발전한 관료제의 권력 위상은 언제나 매우 크며, 정상적인 사정에서는 훨씬 더 크다. 관료제가 받들어 모시는 “지배자”가 “법률 발의안”, “국민 투표” 및 관리 파면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국민”이든, “불신임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나 사실상 불신임할 수 있는 구속력으로 무장한 의회이든(한층 더 귀족제적인 기초에서 선출되었든 아니면 한층 더 “민주적인” 기초에서 선출되었든 간에), 법에 따라 또는 사실상 자기들 내부에서 보충하는 귀족제적 합의체이든,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든, 세습적인 “절대” 군주나 “입헌” 군주이든 간에 상관없이, 언제나 지배자가 행정 운영을 담당한 훈련된 관료에 대해 처해 있는 상태는 “전문가”에 대한 “아마추어”의 처지이다. 다른 사정이 똑같은 경우, 경제적으로 독립한 관료들 즉 유산자 계층에 속한 관료들만이 관직 상실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산자 계층으로부터의 충원은 예로부터 또 오늘날에도 지배자의 권력을 증대시킨다. 40, 42)


모든 관료제는 직업상 잘 아는 자들의 지식이나 의도를 비밀로 한다는 방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우위를 더욱 높이려고 한다. 관료제 행정은 그 경향상 언제나 공개를 배척하는 행정이다. 관료제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 한 자신들의 지식이나 행동을 비판받지 않으려고 숨긴다. 관료 기구의 순수한 권력 이해 관계 자체는 순전히 객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비밀 유지라는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 “직무상의 비밀”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특수한 발명품인데, 특수한 성질을 지닌 영역 밖에서는 결코 객관적인 이유로 제시될 수 없는 바로 이 태도만큼 그들이 열광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없다. 관료 기구가 의회와 대립하는 경우, 그들은 확실한 권력 본능에서 의회의 시도 — 즉 고유한 수단(예를 들면, 소위 국정 조사권)을 통해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전문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 — 에 대해 저항한다.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무기력한 의회는 관료들에게 당연히 더 환영받는다. 41)


7. 합리적인 관료제 지배 구조의 발전 과정


일반적으로 국가와 법의 관료제화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객관적인” 법 질서와 이 법 질서에 의해 보장된 주관적 권리가 개념상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최종적인 가능성도 주어진다. 관청 상호간의 관계나 관청과 “신민”의 관계에 관한 “공법”과 피지배자인 개개인 상호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사법私法”의 구분도 사정은 똑같다. 이 구분은 지배권의 추상적인 담당자이자 “법 규범”의 창조자인 “국가”와 개개인의 모든 개인적인 “권한”의 개념적 구분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관념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은 도시 공동체의 기반 위에서였다. 도시 공동체가 관직 보유자들을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임명했으며, 이렇게 해서 그때그때의 지배권 — 최고의 지배권도 포함한 — 을 “행사하는” 개개의 권력 보유자가 “고유의 권리”로서 지배권을 소유한 자와 더 이상 동일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법과 사법의 구분을 원칙적으로 처음 관철한 것은 관료제에서 직무 수행의 완전한 비인격화와 법의 합리적인 체계화였다. 47)


8. 교양과 교육의 “합리화”


과거에는 귀족 가문 증명이 동등한 신분이나 종교 재단 간부 자격의 전제 조건이었으며, 또한 — 귀족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세력이 강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 국가 관직 자격의 전제 조건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교육 증서가 그것을 대신한다. 종합 대학, 공과 대학, 상과 대학의 졸업장 발부, 일반적으로 모든 분야에서의 교육 증서 발급 요구는 관청이나 사무실에서의 특권층 형성을 조장한다. 교육 증서의 소유는 명망가와의 통혼 요구를 뒷받침해 주며, “명예 규범”을 준수하는 계층에의 가입 요구, 일의 성과에 따른 보수가 아니라 “신분에 알맞은” 지불의 요구, 확실한 승진과 노후 보장의 요구, 그러나 무엇보다도 졸업장을 가진 후보자들에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독점하게 하려는 요구 등을 뒷받침해준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일정한 교육 과정과 전문 시험의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듣고 있다. 이 독점을 위한 보편적인 수단이 오늘날에는 "시험"이다. 49)


또 다른 한편에서 관료제는 언제나 잘 정비된 징계 절차를 만들어 관료에 대한 “상사”의 완전한 자의적인 조치를 배제함으로써 일종의 “관직 보유권”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며, 관료에게는 지위, 규정에 따른 승진, 노후 대책을 보장해 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관료제는 지배의 최소화를 요구하는 피지배자들의 “민주주의” 심리의 지지를 받는다. 피지배자들은 관료들에 대한 지배자의 자의적인 조치의 약화를 지배자 권력 자체의 약화로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에서 관료제는 상인의 사무실에서나 공무에서나 특수한 “신분제” 발전의 추진자이다. 민주주의는 임명된 관료를 선거에 의한 단기 관리로 대체하고, 또 정비된 징계 절차를 국민 투표에 의한 관리 파면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은 서열상 상위에 있는 “지배자”의 자의적인 조치를 피지배자나 — 이 피지배자를 지배하는 — 정당 우두머리들의 마찬가지로 자의적인 조치로 대체하려는 노력이다.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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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서사시 -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까지> 근대 문학 속의 세계체제 읽기
프랑코 모레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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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다윈주의야말로 형태적 불완전성을 진화적 경로의 증거로 본다. 다시 말해 다윈에게서 역사는 완전히 독립적인 두 경로, 즉 무작위적인 변이(random variation)와 필연적인 선택(necessary selection)의 뒤엉킴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수사적 혁신'과 '사회적 선택'의 뒤엉킴인데, 전자는 우연의 결과로 나타나는 반면 후자는 필연성의 산물이다. 이 책에서 등장하게 될 문학사는 둘로 나누어진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통상적인 문학사보다는 훨씬 덜 위압적이지만 아마 훨씬 더 흥미로울 것이다. 불확실하고 불연속적이며 기이함과 의문 부호로 가득 찰 것이다. 공평을 기하자면 켄타우로스적 비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반쯤은 '어떻게(how)'를 다룰 줄 아는 형식주의적 비평가이고 또 반쯤은 '왜(why)'를 다룰 줄 아는 사회학적 비평가 말이다. 주의하라(Nota bene). 꼭 반반이다. 합리적인 타협의 여지는 없다. 오히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같다. 그것을 성취하고자 나는 어떤 약이든지 들이켜왔던 셈이다."(24-5)


1부 <파우스트>와 19세기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최초의 비극적 핵심으로 고안되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그는 이 시가 서사시로 확장되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확장은 괴테가 처음에 구상했던 바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파우스트』 2부는 우연의 결과이다." "작품에 대한 온갖 구상과 질서 잡힌 시대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의 작가는 기술자(engineer)가 아니라 '브리콜라주 제작자'이다. 서사시를 구상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합리적으로 준비하기보다 우연히 강력한 서사시적 잠재력을 가진 인물을 손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십 년 동안 망설인 끝에 결국 그는 서사시를 내놓게 되었다. 지배적인 역사학적 모델과 관련해 볼 때 여기서 수단과 목적 간의 관계는 정확히 역전된다. 도구들, 즉 구체적인 기교적(technique) 가능성들이 전부이며 기획, 이데올로기, 시학(poetics)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약점이 아니다. 변화는 계획되는 것이 아니다."(42-4)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맺는 이유는 그에게 유혹당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의 첫 번째 희생물인) 마르가레타처럼, 마르가레타 이전에─그리고 실제로 마르가레타보다 훨씬 더 고약하게, 왜냐하면 메피스토펠레스를 부추겨 파우스트를 유혹하게 한 것은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무엇보다 먼저 마음속으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간의 동의가 아니라 '적대성'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따라서 과연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편인지 아니면 최악의 적수인지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작품의 구성상의 이중성으로서, 이것은 파우스트가 자기 행동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사악한 동반자에게 전가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덕분에 근대적 서사시에, 실로 서구 문화 전체에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 전략이 탄생하게 된다. 즉 부정과 거부의 전략이 그것으로 폭력을 자기 외부로 투사해버리는 것이다. 괴테의 탁월하지만 무시무시한 발견, 즉 결백의 수사학이다."(50-2)


"『파우스트』 2부의 중심인물인 (트로이 전쟁의) 헬레나는 한 명의 살아 있는 여인이 아니라 파우스트가 손쉽게 취할수 있는 하나의 사물이다. 이를 배경으로 파우스트의 도착(倒錯)은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갖게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정복 행위가 아니라 '야만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행위'가 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아주 효율적인 전도(顚倒)로서, 당연히 이것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식민지 시대의 상상을 담고 있는 모든 명작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로빈슨 크루소는 프라이데이를 다른 부족의 식인주의로부터 구하고, 로드 짐은 도라민 마을을 알리의 잔혹한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파스파르투와 필리어스포그는 아우다를 죽은 사람의 아내를 함께 순장시키는 '야만적인 관습'으로부터 구해준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를 제외한) 이 모든 작품들이 서구인과 원주민 여인의 결혼을 놓고 숙고한다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혼하면 정복은 '동의'가 되고, 그리하여 완벽하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54-5)


"서사시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바흐친이 보기에 서사시에서 과거는 〈어떠한 상대성도 결여하고 있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괴테의 태도는 그렇지 않다. 『파우스트』는 고대를 '조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근대 세계의 정신적 안녕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을 무력화한다." "과거로부터 새로운 것의 창조······. 브라콜라주에서처럼 오래된 재료들은 새롭게 가공된다. 그 결과 뭔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동시에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박람회와 고고학의 중간, 풍자적 환원과 학술적 진지함의 중간치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역사적 위치로부터 해방된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들과 양식들이 『파우스트』에서 공존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에른스트 블로흐가 '비동시대성'이라고 부르는 역설적 사태, 즉 많은 개인들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문화적 또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사태의 탁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73-7)


"블로흐는 비동시대성이 세계 체제 안에서의 특수한 위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비교적 등질적인 중심 국가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것은 반주변부 국가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이루는데, 이 국가들에서는 중심부에서와 반대로 '복합 발전'이 디배적이다. 그리고 근대적 서사시 형식의 명작들 대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국가들에서이다. 여전히 분열되어 있던 괴테 시대(그리고 바그너가 초기에 활동하던 시대)의 독일, 멜빌의 아메리카(피쿼드 호, 즉 피에 굶주린 사냥, 산업 생산), 조이스의 아일랜드(식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령자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지역들." "이제부터 소설에게 요구되는 민족 정체성의 구성은 이리하여 서사시의 경우 이보다 훨씬 더 큰 지리적 야망, 즉 전 지구적 야망─『파우스트』가 이것에 대한 부동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으로 대체된다. 세계 체제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89-90)


"메피스토펠레스의 기원 자체는 우연적인 것으로, 결백의 수사학은 아무런 의식적 기획 없이 크건 작건 되는 대로 그의 모습을 조작함으로써 비로소 형성된다. 비동시대성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첫 번째 순간에 괴테는 그저 서사시 형식과 씨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형식의 관습이 요구하는 대로 그는 파우스트가 과거의 거대한 세계 속으로 전진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수사학적인)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는데, 괴테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를 갖고 놀이를 하며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기들이 만나고 뒤섞이는 기이한 장면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가 이어지는데, 여기서 이 '브리콜라주' 작품은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역사적 경험, 즉 서양이 새로운 세계 지배를 다룰 수 있다(위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형식이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낸 셈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순전히 형식의 동력에서 나온 결과였다."(96)


"『파우스트』가 막 시작되는 부분에서 짤막한 설전이 오가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는 날카로운 설전은 근대 세계에서의 백과사전적 야심의 어려움을 요약하고 있다.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을/내 내면의 자아로 음미해보고〉 싶은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는 냉소적으로 개인과 인류 사이에는 이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고 대답한다." "플로베르에게서는 총체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피상성을 택하는 것이 답이다─경박한 믿음과 어리석음 말이다. 백과사전적인 것은 천치 같은 것과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인 통계적 방법을 적용한) 가상의 존재(Un être fictif)는 오직 상투어로만 말한다. 평균적 인간. 그를 중심으로 각 개인들이 왔다갔다한다." "문화의 영역에서 이것은 통상적이지 않은 생각과 독창적인 개인들이 점점 희귀해지다가 결국 사라지는 반면 〈체계는 계속 평형 상태를 왔다갔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16-9)


이행: <니벨룽겐의 반지>


"바그너적 우주는 대여섯 개의 서로 다른 종족들이 진정 거대한 심연에 의해 갈라진 4원소들 사이에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거대한 세계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지』에서 중요한 장소들은 약 10군데 정도를 헤아리며 비참한 운명의 힘에 휩싸이는 (소수의) 주요 등장인물들에게만 매력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좁은 세계이기도 하다. 플롯은 커다란 소용돌이 같다. 그 안에 들어간 모든 것은 점점 더 조여들고, 깊게 들어가고, 가차없이 빙빙 도는 원들 속에 점점 더 휩쓸려들어가 결국 하나의 핵심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진정 여기서는 괴테 식의 일탈을 위한 여지는 전혀 없으며, 실로 운명의 손길은 멀리 보이는 만큼 더 확고하다." "네다섯 번 만의 전환 끝에 태초의 시간에서 최후의 시대까지 나가는 이야기. 이것보더 더 『파우스트』와 다른 구조를 상상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압축이라는 이념만큼 바그너의 시학에 핵심적인 것도 없는 듯하다."(167-9)


"역사가 분리해놓은 것들, 즉 지식, 윤리, 종교, 예술을, 내러티브, 드라마, 서정시를, 문학, 음악, 회화를 하나로 재통합하려는 욕망은 근대의 서사시 전체의 기획이자 문제이다. 여기에 바그너 본인이 추가한 것이라고는 니체가 그를 비난한 대로 '후안무치함' 뿐이다. 그는 불굴의 결의를 갖고 자기 작품이 전 지구적 과제를 갖고 있다고 곧이곧대로 믿는다. 괴테는 신화를 갖고 논다. 조이스는 어리석은 제자들이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도록 부추긴다. 엘리엇은 과연 타로(Tarot) 카드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바그너는 아니다. 바그너는 모든 것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진지하다." "바그너의 야심은 행동과 현실의 모든 현상을 '단 하나의 원리'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마침내 그가 발견해낸 비밀스러운 궁극 원인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압축할 것을 촉구하는 그의 입장은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더 이상 (오직)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마술, 심지어 종교적 원리가 된다."(173-4)


"『반지』의 사회학에 도달하려면 권력의 극단적인 집중과 이것의 총체적인 집행 불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고려해야만 할 것 같다. 여기 세계가 있다, 여기 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무기가 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반지는 결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플롯을 기준으로 본다면 바그너의 이 서사시적 대계는 붕괴 이야기, 즉 우주적 실패의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이 서사시적 대계의 결론은 없어서는 안 되는 동시에 자의적인 행위가 된다. 여기서는 더 이상 철학도, 종교도, 우주적 범위에 걸친 메시지도 찾을 수 없다. 브륀힐데는 더 이상 무대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에게 말하지 않으며 말(馬)에게 말한다. 물론 이 서사시적 대계는 끝나야 하지만─바그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피날레'에서 이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말라고. 네 마디의 진부한 말만 하고 마지막 말은 음악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177-8, 184-5)


"상대적으로 통일된 상태로 태어났지만 서서히 드라마적 구실(pretext)과 자율적인 음악적 우주로 나뉘는 구조. 이것은 형식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모든 차원에서 일관되고 동시적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조각씩, 서로 다른 비율로, 심지어 다른 방향으로 일어난다. 다시 말해 분화(differentiation)로서, 즉 드라마적 플롯이 전체(ensemble)의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해 '단순하게 남아 있는' 작품의 역사로 진화한다. 따라서 음악의 결은 '복잡성을 향해 진화하며', 획기적인 실험들에 나선다. 야누스 같은 구조이다. 절반은 '케케묵은' 것이며 절반은 '선구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비동시대성이 거의 『반지』를 두 개, 즉 '신화적' 내용과 '미래'의 음악으로 쪼갤 정도로 강력하게 작동한다. 불레즈의 말을 빌리자면 〈낭만주의와 구조─통상 함께 묶어서 사용되지는 않는 두 단어〉(괴벨스의 '강철처럼 냉혹한 낭만주의' 같은 표현)로 또는 반동과 혁명으로 표현할 수 있다."(186-7)


2부 <율리시즈>와 20세기


"절정기를 구가하는 유럽의 자본주의는 진정 서사시적 차원의 도시들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세계의 축도(縮圖)들 속으로 지구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극히 다양한 제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이것들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수많은 자극들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처럼 전례 없는 풍요는 '대도시적 유형'을 '신경에 대한 자극'에 종속시킴으로써 개인의 안녕과 심지어 정신 건강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과연 의식의 흐름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긴장된 상황에 맞서기 위한 한 방법(아마 가장 성공적인)이었다. 이것은 위기의 징후, 즉 폭격당하고, 분열되고, 어려움에 처한 '에고(ego)'의 징후로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의식의 흐름은 서서히 수많은 자극들에 대항해서 그것들을 포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즉 대도시에 형식을 부여하고 거주자들에게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흐름이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기교가 된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196-7)


"더블린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율리시즈』의 주인공은 광고와 의식의 흐름 사이에서 새로운 기법(art)을 배우고 있다. 보는 기법 그리고 이와 함께 보지 않은 기법도. 블룸은 모든 것을 알아채지만 어느 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힐끗 보고, 또 힐끗 보고 할 뿐이다. 대도시적인 방식이다. 즉 거대한 도시에 집중된 거대한 세계에 압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짐멜은 뇌라고 대답한다. 지성의 삶이라고. 하지만 조이스는 그 반대라는 것을 암시한다. '점증하는 의식'이 아니라 '점증하는 무심함'이라고. 그것은 실제로 점점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블룸은 아마 세계 문학에서 가장 무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원래의 기능까지 바꾼다. 그리하여 결여와 부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도구가 된다. 이것은 배전반처럼 복잡한 정신의 회로들을 동시에 가동시키며, 블룸이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자극적인 것을 골라낼 수 있게 해준다."(215-6)


"모든 것이 익숙하며, 지상에 속해 있으며 한낮의 빛에 잠겨 있다. 블룸의 마음속에서는, 심지어는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도─아니 '정확히' 정신이 산만해서, 따라서 그만큼 수용적이기 때문에─이미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 즉 '엄청나게 많은 사물들'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수동성은 단순히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불레즈가 구스타프 말러, 즉 어느 작곡가보다 조이스를 닮은 그의 교향곡은 길게 이어지는 산책과 같다고 말하곤 하던 말러를 두고 이야기하듯이─'풍요로워지는 수동성'이다." "순진한 수동성, 즉 서구적 대도시의 풍요로움을 주어진 것으로 바라보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수동성, 근대의 서사시는 마침내 그것의 주인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즉각 눈으로 볼 수 있는, 괴테의 시대부터 찾아온 총체성을 발견했다. '소비'의 세계─진정 '거대한' 세계, 그리하여 『파우스트』의 세기 다음에 『율리시즈』의 세기가 시작된다."(221-4)


"의미는 다름 아니라 배제의 결과이다. 실제로 의식의 흐름에서는 배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장이 주(主)문장이며, 모든 것이 전경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전경에 있는 곳에서는 어떤 것도, 어떤 '그래'도 결코 가까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포괄적인 지각이지만 초점을 갖지는 않는다. 오직 사물들 위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조다, 그러면 의미의 부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간단하다─이것은 블룸이 살아가는 것을 도와준다. '대도시'에서 사는 것을 도와준다. 분명 더 많은 명민함을─그리고 동시에 더 많은 우매함을 요구하는 대도시에서 말이다. 어빙 고프먼은 이를 '초점을 갖지 않는 상호 작용', 즉 '예의바른 무심함'이라고 부른다. 중립성, 불투명성, 그리고 감정적 평범함은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로를 제거하지 않고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 수 있게 해준다. 만약 6월의 그 날에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다면 블룸의 머리는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그 결과 독자들의 머리도."(243-4)


"『율리시즈』의 시작 부분이 의식의 흐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처음에는 스티븐에게, 그런 다음에는 블룸에게 적용되는 이 장치는 폭과 깊이를 더해가며, 6장까지는 누가 봐도 명백한 우위를 유지한다. 아마 7장까지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7장부터는 더 이상 의식의 흐름만 독주할 수 없다. 점점 강조점이 옮겨가면서 이것은 다양한 종류의 다성적 장치들에 의해 한편으로 밀려난다." "만약 조이스가 비평적 전설의 '위대한 계획자'였다면 아마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 『율리시즈』로부터 별다른 실수나 오류 없이 즉각 두 번째 『율리시즈』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기교의 전환은 계획될 수 없다. 즉 형태의 혁신은 우발적인 실험의 산물로서, 이러한 실험은 올바른 길을 찾을 때까지 오랫동안 암중모색의 방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정확한 길이 아니라 다른 것들보다 더 나은 길일 뿐이다."(284-7)


"자유롭게. 하지만 급작스럽지는 않게.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서 도약이란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기교들은 결코 사전에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단조(短調)로, 약간은 되는 대로, 흔히 주변부에서 시작된다. 『파우스트』의 다성성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마르가레타의 비극으로부터 이탈하는 순간(『발푸르기스의 밤』)부터 시작된다. 또는 괴테 시의 알레고리처럼, 이것은 궁중의 여흥을 위한 것일 뿐 괴테는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는 한 세기가 지난 뒤에 반복되었다. 먼저 의식의 흐름은 그저 어떤 내러티브적 상황에 대한 정서적 부속물이었다. 어떤 (우연적) 결과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가 굳어져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기교가 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이러한 기교 안에 존재하는 아직 채 소화되지 않은 언어가 굳어져─결과의 결과─모더니즘적인 다성성을 낳는다."(292-3)


"『율리시즈』를 제외하면 전체주의적 유혹─이것은 근대의 서사시가 시작된 맨 처음부터 존재했다(늙은 파우스트, 에이허브 선장의 독재, 배신자 쥘리앵, 전능한 힘을 가진 반지)─은 실제로 모더니즘의 세계 텍스트들에서 결코 부재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복잡성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고 때로는 잔혹한 축소를 가져왔다." "정말 그렇다. 전체주의적인 유혹은 계속 증가해온 복잡성에 대한 반발로서 모더니즘적 세계 텍스트에 거의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배적인 존재는 될 수 없는 그저 하나의 유혹일 뿐이다." "그리하여 결국 스스로 타협책을 만들어낸다. 『황무지』의 사례가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 모더니즘이 다성적인 복잡성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통제되고 질서를 부여받는다.'" "이것은 이질적이지만 강제적으로 통합된 현실의 알레고리이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추상적인─아마 가장 충실한─형태의 '총체성'인 셈이다."(350-3)


에필로그: <백 년의 고독>


"모더니즘의 발을 다시 땅 위에 딛게 하라. 그런 다음에는 모더니즘과 대중 문화 사이의 '거대한 분열'을 치유하라. 『백 년의 고독』이 나온 60년대라면 사람들은 이것을 '이야기의 복원'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것은 유럽과는 전혀 다른 문학적 진화의 산물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3세기 이전에 이단 심문관들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럽 소설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리얼리즘 이전 단계의 서사 형식들(신화, 전설, 기사도 로망스)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일종의 연대기(cronica) 같은 잡종 형식들도 남았는데, 이러한 형식에서는 꾸며낸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경계선이 아주 불분명해진다." "예외적인 것, 기이한 것, 경이로운 것, 한마디로 말해 모험이 여전히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이다. 이것은 그 의심 많은 수도사들이 의도했던 세계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세상에 임하시는 방식은 무한하며, 진화의 방식은 한층 더 그러하다."(361-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이 소설이 미래로부터 과거를 거쳐 다시 미래로 한 바퀴 원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원의 움직임은 외부의 지리적 현실 때문에 촉발된다. 이 소설이 이중적인 예변법으로 시작하는 것은 집시들이 거래와 먼 곳에서 온 군대 때문이다. 이처럼 마콘도의 역사는 끊임없이 다른 역사들, 즉 유럽, 아시아, '콜롬비아',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미국에서 시작된 과정에 의해 교차되고 굴절된다." "요사의 소설에 나오는 한 인물은 모든 문이 열렸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문을 닫기 시작하는데, 왜 닫을까? 『백 년의 고독』은 세계 체제의 압력이 당신의 나라에서 좀 더 완벽하고, 따라서 좀 더 확고하게 통합을 강요할 때라고 대답한다. 발전 가능성은 여러 가지지만 길은 정해져 있다. 흑마술(Black magic)의 시대. 더 이상 온갖 기이한 결합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저질러진 온갖 범죄의 엄청난 규모가 '믿기지 않는' 시대."(372-5)


# 예변법. 반대론을 짐작하고 미리 반박해두는 방법


"마콘도는 정말 이상한 곳이다. 광인들의 도시로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언어만큼은 누구나 똑같다. 화자의 비인칭적인 목소리가 텍스트 공간의 거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직접 화법은 한 페이지에 두세 문장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짧아서 별다른 목소리라고 할 수도 없다. 바로 여기서 실제로 모더니즘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율리시즈』, 즉 비(非)이야기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문체로 이야기하는 『율리시즈』를 생각해보라. 온갖 문제를 갖고 있지만 아무튼 다성성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이제 『백 년의 고독』을 생각해보자. 여기서는 비(非)문체로 끝도 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소설이 아무리 멋지더라도 결국 독백주의가 진정한 승리를 거두고 있다. 다성성에서 독백주의로. 19세기에, 즉 괴테에서 플로베르로 이행할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다시 20세기에, 조이스에서 마르케스로 이동하면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3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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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박태웅의 AI 강의 2025 - 인공지능의 출현부터 일상으로의 침투까지 우리와 미래를 함께할 새로운 지능의 모든 것
박태웅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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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물결: 인공지능, 우리의 일과 삶에 급격히 파고들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세계적인 미디어 학자 마셜 매클루언이 1964년에 한 말입니다. 미디어는 어떻게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요? 매클루언은 매스미디어Mass Media의 예를 듭니다. 매스미디어라고 하면 매스Mass, 즉 대중을 상대로 하는 매체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대중이 먼저 존재하고, 그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매체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매스가 있으니 그 매스를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매클루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대중을, ‘동시에 같은 뉴스를 보고, 같은 화제를 얘기하고, 같은 패션을 입고, 같은 유행을 타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얘기하는 것이라면, 그런 대중은 매스미디어가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스미디어가 없었다면 우리가 동시에 같은 뉴스를 볼 수도, 동시에 같은 패션을 즐길 수도, 동시에 같은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매스미디어가 매스의 탄생을 불렀다는 것이지요. 12)


# AI의 진화

1. 운영체제로서의 인공지능(AI as OS) : 장래에 세상의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들이 어떤 형태로는 AI와 연동되어 작동할 것이다.

2. 맥락 인터페이스(Contextual Interface) : 계층적으로 정리하거나, 정확한 키워드를 넣지 않아도, 내 말의 맥락을 이해하고 답변한다(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의 기능 대체).

3. 파트너로서의 인공지능(AI as a Partner) :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면서 최대의 효용을 얻는다.

4. 멀티모달(Multimodal) : 텍스트, 이미지, 음성, 동영상 등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정보를 함께 처리하거나 활용한다.

5. 더 저렴하게, 더 빠르게, 더 작게(Cheaper, Faster, Smaller) : 매개변수의 크기가 작아지면 한 대의 PC나 스마트폰에 AI를 올릴 수 있다(프라이버시가 보장되고 개인 비서처럼 활용할 수 있다).

6. 인간형 로봇, 휴머노이드(Humanoid) : AI를 써서 모방학습, 강화학습(보상을 통해 올바른 행동을 학습한다), 전이학습(기존 로봇의 학습 내용을 전달받는다)으로 스스로 배워나간다. '몸을 가진 AI'는 언어 이외의 외부세계와 스스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2강 모두를 놀라게 만든 거대언어모델, LLM의 등장: 챗GPT로 알아보는 인공지능의 정체


CPU는 순차적 계산Serial Computing에 특화돼 있습니다. ‘만약 ~라면 무엇을 해라(if~ then~)’와 같은 일을 말합니다. 순서대로 이어서 계산을 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이런 순차 계산을 합니다. 그런데 GPU는 동시에 병렬로 수많은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더하기, 빼기와 같은 실수 계산을 하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컴퓨터 모니터의 해상도를 흔히 픽셀(화소)의 개수로 표현합니다. 가령 동영상을 표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백만 픽셀의 이미지를 초당 60~120장씩 그려내야 합니다. 엄청난 수의 화소를 눈 깜짝할 사이에 계산해내야 하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화면의 이미지들은 동시에 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경의 풀이나 하늘은 주인공과 별개로 그릴 수 있지요. 그래서 병렬 대용량 계산에 특화된 GPU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GPU는 이렇게 애초에는 그래픽 계산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뜻밖에 인공지능 시대를 만나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렬계산 능력 덕분이지요. 37)


인공지능 알고리듬 중에 몬테카를로 알고리듬Monte Carlo algorithm이란 게 있습니다. 가령 〈한 변의 길이가 2미터인 정사각형에 내접한 원의 넓이를 구하시오.〉라는 문제가 있다고 해보지요. 우리는 이 원의 넓이를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반지름의 제곱×원주율(π)’로 구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인공지능은 이렇게 구하지 않습니다. 몬테카를로 알고리듬은 정사각형 속에 무작위로 발생시킨 점을 쏩니다. 수십만 개, 수백만 개를 쏜 다음, 전체 점의 숫자에서 원에 들어간 숫자의 비율을 구합니다. 우리는 정사각형 넓이가 2m×2m=4㎡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원에 들어간 점이 차지하는 비율을 곱하면 그게 원의 넓이가 됩니다. 대단히 단순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하는 게 반지름의 제곱×원주율(π)로 구한 것보다 빠릅니다. 이 녀석은 1초에 312조 번 실수 계산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하는 일 중에 많은 부분이 이렇게 단순하게 더하기, 빼기를 하는 일입니다. 38) 


기계가 사람처럼 학습하고 추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초반에 시도했던 건 ‘전문가 시스템’이었습니다. 가령 고양이 사진을 가려내라는 과제가 있다고 해봅시다. 전문가 시스템은 컴퓨터가 고양이 사진을 가려낼 수 있도록 고양이의 모든 특징을 일일이 사람이 입력합니다. 코는 어떻게 생겼고, 꼬리는 어떻게 생겼고, 털은 어떻게 생겼고, 색깔은 어떻고, 이런 방식으로 말이지요. 초기에는 점수가 점점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제법 컴퓨터가 고양이 사진을 골라내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데이터가 일정 규모 이상으로 들어가니 점수가 도리어 떨어졌습니다. 예외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죠. 결국 이런 방식으로는 인공지능을 구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는 논문이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10년씩 두 번의 ‘인공지능의 겨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그 긴 겨울을 버틴 인공지능의 선구자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이 딥러닝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면서 지금의 인공지능 부흥기가 도래합니다. 38-9)


새로운 접근법은 사진의 차이점들을 구분하는 것까지 모두 인공지능에 맡깁니다. 그러니까 고양이 사진을 15만 장 주고 ‘이 15만 장의 사진들 간 차이점을 네가 다 잡아내라’ 하는 셈이지요. 잡아낸 특징들이 1,000만 개일 수도 있고, 1억 개일 수도 있겠지요. 이 특징들 중에 어떤 것은 ‘고양이’라는 잠재된 패턴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고, 어떤 특징들은 그다지 관계가 없거나, 아무 관계가 없을 겁니다. 이 1,000만 개, 1억 개의 특징들 하나하나에 대해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가에 따라 가중치를 주는 거예요. 이렇게 매긴 가중치를 ‘매개변수’라고 부릅니다. 그러곤 ‘어떤 특징들에 몇 점을 줬을 때 고양이를 가장 잘 가려낼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돌려보는 거지요. 그러니까 가장 적절한 매개변수 값을 찾을 때까지 계속 바꿔가면서 돌려보는 겁니다. 사람은 평생 해도 마칠 수 없는 계산이지만, 컴퓨터는 합니다. 1초에 312조 번 실수 계산을 하는 녀석이니까요. 이런 GPU를 수십 대, 수백 대, 심지어 1만 대를 붙입니다. 39)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프로그래밍 언어와 구분해서 ‘자연어Natural Language’라고 하는데요, 자연어로 그냥 입력하면 되는 게 ‘챗’GPT입니다. GPT의 ‘G’는 generative, 즉 ‘생성하는, 만드는’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만드는 인공지능’이라는 말이지요. 생성형 인공지능은 그림을 학습하면 그림을 그리고, 동영상을 학습하면 동영상을 만들고, 글을 학습하면 글을 씁니다. 챗GPT는 글을 만드는 생성형 인공지능입니다. GPT의 ‘P’는 pre-trained, ‘사전 학습한’이란 뜻입니다. 챗GPT는 무려 3,000억 개의 토큰과 5조 개의 문서를 학습했습니다. 이런 인공지능을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라고 부릅니다. ‘사전 학습’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런 거대한 모델을 사전 학습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히 학습을 추가로 시키지 않은 전문 분야에 관해 질문해도 마치 원래부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럴듯한 답을 내놓는다는 뜻입니다. 43-4)


챗GPT의 ‘T’는 Transformer(트랜스포머)입니다. 트랜스포머는 주어진 문장을 보고 다음 단어가 뭐가 올지를 확률적으로 예측합니다. 5조 개의 문서로 학습한 다음, 그것을 근거로 주어진 문장의 다음에 어떤 단어가 배치될지 예측하지요.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구글의 ‘어텐션Attention’이라는 모델을 사용합니다. 어텐션 모델은 주어진 문장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무엇인지를 알아채지요. 앞의 문장에서 핵심 키워드가 뭔지 알 수 있으면 그다음에 올 단어를 무작위로 예측할 때보다 훨씬 높은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연산 시간과 비용도 훨씬 줄겠지요. 챗GPT는 단기 기억을 가지고, 앞의 문장들을 계속 기억하면서 추론하는데, 무려 1,750억 개의 매개변수를 갖고 있습니다. 챗GPT는 ‘인간의 피드백을 통한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 from Human Feedback: RLHF’도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전의 인공지능들과 달리 비윤리적인 발언이나, 해서는 안 될 말이 출현하는 빈도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44)


이 방식의 인공지능이 피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바로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인데요, 아주 멀쩡히 거짓말을 하는 걸 뜻합니다. 앞에서 챗GPT는 트랜스포머 모델을 쓴다고 했지요. 챗GPT는 5조 개의 문서로 학습해 잠재적 패턴을 찾아낸 다음, 그 패턴을 이용해 주어진 단어를 보고 그다음에 올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단어를 찾습니다. 말하자면 챗GPT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답하는 것을 배운 게 아닙니다. 트랜스포머 모델을 써서 ‘가장 그럴듯한 말’을 내놓도록 학습을 했지요. 모차르트의 첼로 협주곡에 대해 물으면 쾨헬 넘버(모차르트의 곡에다 연대기 순으로 번호를 붙인 것)까지 붙여서 다섯 곡을 내놓기도 합니다. 모차르트의 첼로 협주곡은 실제로 남아 있는 게 없지만 챗GPT는 쾨헬 넘버까지 붙여서 답을 합니다. 그래야 그럴듯하기 때문입니다. 얀 르쿤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지점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하는데, 거대언어모델로는 절대로 가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48-9)


3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해질 수 있을까?: 생성형 AI의 놀라운 능력과 최근의 기술 흐름


우리는 왜 챗GPT에 열광하게 되었을까요? 왜 공개하자마자 전 세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을 하고, 서점은 온통 GPT 책으로 도배가 되었을까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느닷없이 나타나는 능력Emergent ability’입니다. 거대 인공지능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규모의 법칙’입니다. 컴퓨팅 파워를 늘릴수록, 학습 데이터 양이 많을수록, 매개변수가 클수록 거대언어모델 인공지능의 성능이 좋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셋이 함께 커질 때 성능 향상이 더 잘된다고 합니다. 거대언어모델은 별도의 추가 학습Fine-tuning을 하지 않아도, 특정 분야에 대해 질문하면 대답을 잘합니다. 아무런 예제 없이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제로 샷 러닝Zero shot Learning, 몇 가지 예제와 함께 질문할 때 답하는 것을 퓨 샷 러닝Few shot Learning이라고 하고, 이 둘을 합해 질문 속에서 배운다는 뜻으로 인 콘텍스트 러닝In Context Learning: ICL이라고 부릅니다. 70-1)


또 하나의 느닷없이 나타나는 능력 중 하나가 ‘생각의 연결고리Chain of Thoughts: COT’입니다. 단계적으로 추론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질문이 주어졌을 때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한 중간 추론 단계들을 생각의 연결고리라고 부릅니다. 생각의 연결고리는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갖습니다. 첫째, 연쇄적 사고는 원칙적으로 모델이 다단계 문제를 중간 단계로 나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더 많은 추론 단계가 필요한 문제에 추가 계산을 할당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사고 연쇄는 모델이 특정 답에 어떻게 도달했는지를 들여다보고 추론 경로가 잘못된 부분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셋째, 연쇄 추론은 수학 단어 문제, 상식적 추론, 기호 조작과 같은 작업에 사용할 수 있으며, 인간이 언어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모든 작업에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잠재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의 연쇄 추론은 질문에 단계적 추론의 예를 포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기성 언어모델에서) 쉽게 도출할 수 있습니다. 72-4)


MIT의 인지과학자 안나 이바노바Anna A. Ivanova와 카일 마호월드Kyle Mahowald 등은 말하기와 생각하기가 다르다는 점에서 거대언어모델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언어’와 ‘사고’는 분리돼 있어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과 사고 행위는 서로 다른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이렇습니다. 수십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뇌를 스캔한 결과, 언어의 종류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특정 뉴런 네트워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뉴런 네트워크는 수학, 음악, 코딩과 같은 사고 활동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뇌 손상으로 인해 언어를 이해하거나 산출하는 능력이 상실된 실어증 환자 중 상당수는 여전히 산술 및 기타 비언어적 정신 작업에는 능숙합니다. 이 두 가지 증거를 종합하면 언어만으로는 사고의 매개체가 아니며, 언어가 오히려 메신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거대언어모델은 언어에 대한 좋은 모델이지만, 인간 사고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83-4)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는 “신경망은 전혀 다른 지능”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인공지능이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중간 단계인 자체 하위 목표를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간 목표란, 주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중간 단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 해롭지 않은 목표를 주었다고 해도 인공지능이 스스로 중간 목표를 정할 수 있다면, 이 일은 아주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가령 ‘방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춰줘’라는 명령을 줬다고 해봅시다. 인공지능은 창문을 열어서 환기하는 대신, 방에서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내는 존재들을 없애면 그게 가능할 거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힌턴은 40년 동안 인공 신경망을 생물학적 신경망을 모방한 부실한 시도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힌턴은 이제 세상에는 동물의 뇌와 신경망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지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다른 형태의 지능, 새롭고 더 나은 형태의 지능입니다.” 84-5)


거대언어모델의 경우 어마어마한 양의 정제한 데이터를 가지고 일정 기간 학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학습이 시작된 이후의 최신 정보들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최신 뉴스에 대한 답변을 잘하지 못합니다. 숫자 계산에도 약하고요. 그런데 챗GPT가 계산기를 쓰고, 검색엔진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요? 즉, 도구를 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픈AI가 내놓은 플러그인Plug-ins이 바로 챗GPT가 도구를 쓸 수 있도록 해준 것이죠. 챗GPT가 이런 서비스들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API,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덕분입니다. API는 말하자면 프로그램 간의 인터페이스입니다. 프로그램끼리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든 규약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발급한 API를 사용하여 요청을 하면 정해진 포맷대로 데이터를 주거나, 정해진 행동을 하겠다”라는 것입니다. API를 쓰면 사람이 개입하지 않고도 컴퓨터 간에 자동으로 정해진 데이터를 받거나 정해진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86-7)


이런 일을 아주 제대로 해보자 하고 만든 게 랭체인LangChain입니다. 랭체인은 ‘Language’와 ‘Chain’의 조합입니다. 대규모 언어모델을 기반으로 애플리케이션을 쉽게 개발할 수 있게 해주는 오픈소스 프레임워크Framework입니다. 프레임워크는 ‘뼈대’, ‘골조’라는 뜻입니다. 조립식 주택은 골조를 세우고 나면 나머지 벽체와 지붕 등은 모듈을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되지요. 소프트웨어 프레임워크란 이처럼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때 공통적으로 필요한 기능들을 미리 만들어놓은 것을 말합니다. 랭체인은 API와 함께 라이브러리도 사용합니다. 라이브러리는 도서관이라는 뜻인데, 프로그래밍에서는 자주 쓰이는 코드를 모아놓은 것을 말합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듯이, 필요한 코드를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도록 만들어둔 곳입니다. IT 업계에서는 오픈소스가 거대한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덕분에 IT 업계는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집단지성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곳이 됐습니다. 88)


4강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 AI의 확산, 그리고 필연적으로 도래할 충격들


오픈AI는 본래 비영리재단으로 출발했습니다. ‘AGI가 어느 영리회사의 소유여서는 안 된다. 위험 여부를 알 수 있게 개발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오픈’AI로 지었습니다. 지금의 오픈AI는 그 비영리재단이 세운 자회사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49퍼센트, 기타 투자자가 49퍼센트, 오픈AI 재단이 2퍼센트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이사회를 이 재단이 결정하는 구조로 돼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픈AI는 설립 초기부터 컴퓨팅 자원의 20퍼센트를 슈퍼 얼라인먼트, 다시 말해 윤리적 개발에 할당하기로 했습니다. 애초의 취지가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슈퍼 얼라인먼트 팀은 사실상 해체에 가까웠고, 자원도 제품 개발에 우선 배분해온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오픈AI는 GPT-4부터는 스펙도, 모델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델의 크기, 투입한 하드웨어의 규모, 학습에 사용한 데이터 세트, 훈련 방법 어느 것도 밝히지 않습니다. 단지 API만 공개했습니다. 116-7)


MIT 물리학과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 교수가 2023년 4월 25일 〈타임〉에 “인공지능으로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올려다보지 마’ 사고방식”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지능이 인류를 멸종시킨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것이 사악해지거나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능해지고 목표가 우리와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서아프리카 검은코뿔소를 멸종시킨 것은 코뿔소를 혐오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코뿔소보다 더 똑똑하고 서식지와 뿔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목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개방형 목표를 가진 초지능은 자신을 보존하고 그 목표를 더 잘 달성하기 위해 자원을 축적하려고 할 것입니다. 금속 부식을 줄이기 위해 대기 중 산소를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코뿔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높은 일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하찮은 부작용으로 멸종하는 것입니다. 118-9)


필연적으로 오게 될 여러 가지 일들 중 첫 번째는 바로 ‘오리지널의 실종’입니다. 인공지능이 만든 데이터로 학습한 인공지능이 대를 거쳐 가면서 아주 쉽게 붕괴한다는 것을 확인한 논문도 있습니다. 옥스포드대학교의 컴퓨터 과학자 일리아 슈마일로프Ilia Shumailov 등이 쓴 〈재귀적 생성 데이터로 훈련한 인공지능 모델의 붕괴AI models collapse when trained on recursively generated data〉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생성한 학습 데이터로 훈련한 인공지능은 마치 종의 근친교배와도 같이 붕괴해버립니다. 생성모델은 자신이 생성한 데이터로 훈련을 거듭할수록 점차 원본 데이터의 분포를 잃어가게 되는데 특히 분포의 꼬리 부분, 즉 빈도가 낮은 부분을 쉽게 잃게 됩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드문 특징들(예를 들어 아주 키가 큰 사람, 아주 키가 작은 사람)을 잊기 시작하다가, 나중이 되면 인공지능이 만든 것들이 본래 데이터와는 비슷하지도 않게 됩니다. 대를 거듭할수록 오차가 점점 더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121)


이미지넷(image-net.org)은 세계 최대의 오픈소스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입니다. 1,000만 개가 넘는 이미지가 있는데, 하나하나 일일이 사람이 분류해서 레이블을 붙인 자료입니다. 그런데 2019년까지 이 데이터베이스의 사람 분류 항목에 다음과 같은 이름표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재소자, 낙오자, 실패자, 위선자, 루저(loser), 우울증 환자, 허영주머니, 정신분열증 환자, 이류 인간……〉 그러니까 이 데이터는 사람의 얼굴만 보면 그가 이류 인간인지 아닌지, 허영주머니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인공지능에게 가르쳐온 것입니다. 이미지넷은 결국 2019년 2,832개의 사람 범주 중에서 1,593개(약 56퍼센트)를 안전하지 않다고 간주하여 관련된 이미지 60만 40건과 함께 삭제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시경제학자’, ‘조교수’, ‘부교수’와 같은 이름표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이 미시경제학자인지 아닌지, 혹은 조교수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부교수까지는 올라갈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일까요? 126)


5강 신뢰할 수 있는 인공지능, 어떻게 구축할까?: 세계 각국의 윤리 원칙과 법제화 노력


유럽연합에는 녹서Green Paper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함께 답을 찾아야 할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일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가?’라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답해야 할 질문들을 모아서 묶은 보고서입니다. 이런 과정을 몇 년간 거치고 나서야 정부는 공론화를 통해 모인 답을 묶어 보고서를 내놓습니다. 이게 바로 백서White Paper입니다. 2020년까지 전 세계에서 발표한 AI 관련 원칙은 80여 개에 이릅니다. 그중 주요한 36개의 보고서에서 제시한 다양한 원칙을 47개로 분류해보았습니다. 그러자 가장 공통이 되는 여덟 개의 핵심 주제가 드러났습니다. 〈프라이버시 / 책임성 / 안전과 보안 / 투명성과 설명가능성 / 공정성과 차별 금지 / 인간의 기술 통제 / 직업적 책임 / 인간 가치 증진〉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의 윤리와 관련하여 이 여덟 가지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안전한 인공지능을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을 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132-4)


2017년에 제정된 '아실로마 AI 원칙Asilomar AI Principles'은 인공지능 개발의 방향이 분명히 ‘인간에게 유익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 컴퓨터 과학뿐 아니라 법, 윤리, 경제 등 범학제적 협력이 필요하고, 개발자 간에도 경쟁보다는 부실한 개발을 피하기 위해 적극 협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정리합니다. 윤리 및 가치에서는 안전성과 투명성 그리고 인간의 가치와 권리 존중,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번영, 개인정보 보호 및 자유 보장 그리고 인간의 통제력 유지와 치명적인 AI 무기 개발 회피를 요구합니다. 장기 이슈로는 초지능의 능력이 어디까지 가능할지에 대한 상한을 미리 두지 말 것, 인류의 실존적 위험, 즉 인류의 멸종을 부를 수도 있을 위험에 대한 계획과 완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인공지능 시스템이 스스로 자기 개선 또는 자기 복제를 하게 될 경우 엄격한 안전 및 통제 조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초지능은 몇몇 국가나 조직이 아닌 모든 인류의 이익, 공동선을 위해 개발돼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135)


유럽연합이 2019년 4월에 발표한 '인공지능 가이드라인'에는 인간의 기본권에 입각한 윤리 원칙 넷이 포함됩니다. 그것은 인간 자율성에 대한 존중, 피해 방지, 공정성, 설명가능성입니다. 이 법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위험을, 허용할 수 없는 위험, 높은 위험, 제한된 위험, 최소 또는 낮은 위험의 네 가지 수준으로 분류합니다. 허용할 수 없는 위험 애플리케이션은 기본적으로 금지되며 배포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됩니다. • 잠재의식 기법 또는 행동을 왜곡하기 위한 조작 또는 기만 기법을 사용하는 AI 시스템 • 개인 또는 특정 그룹의 취약점을 악용하는 AI 시스템 • 민감한 속성 또는 특성에 기반한 생체 인식 분류 시스템 • 사회적 점수 매기기 또는 신뢰도 평가에 사용되는 AI 시스템 • 범죄 또는 행정 위반을 예측하는 위험 평가에 사용되는 AI 시스템 • 비표적 스크래핑을 통해 얼굴 인식 데이터베이스를 생성하거나 확장하는 AI 시스템 • 법 집행, 국경 관리, 직장 및 교육 분야에서 감정을 추론하는 AI 시스템. 141-2)


6강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눈 떠보니 후진국'이 되지 않기 위한 제언들


우리나라 정부 자료들은 아직도 hwp가 아니면 pdf 포맷입니다. 이것들은 컴퓨터가 자동으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즉 기계가 읽을 수 없습니다. 정부는 정부 문서들의 포맷을 바꿀 예정이지만 그 기한은 2025년 이후로 미뤄져 있습니다. 한두 장이면 새로 넣어서 컴퓨터에 입력할 수도 있지만, 정부가 내놓는 공문서는 수십만, 수백만 장을 쉽게 넘어갑니다. 자동으로 하지 않으면 입력할 도리가 없으니 컴퓨터에게는 사실상 없는 문서와 같습니다. 거대언어모델 인공지능은 문서로 학습해야 하는데, 한국은 정부가 나서서 학습을 방해하고 있는 꼴입니다. 반면 미국은 어떨까요? 미국은 공공데이터의 조건을 명확히 정의하고 있습니다. ‘FAIR’ 해야만 공공데이터라는 것입니다. F: findable, 검색 가능해야 하고, A: accessible,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I: interoperable, 호환성이 있어야 하고, 즉 표준을 지켜야 하고, R: reusable, 재사용할 수 있어야 ‘공공데이터’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76-7)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당신이 몰라서 그런다, 행정부에서 여러 가지로 열심히 법안들을 준비 중’이라고 반론을 펴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빠트린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빠트렸을까요? ‘공론화!’입니다. 인공지능은 어느 한 분야의 일이 아닙니다. 인공지능같이 중요한 일을 한 줌도 안 되는 IT 분야 슈퍼 엘리트들에게만 맡겨둘 순 없습니다. 인지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법학, 철학 등 다양한 학제적 연구를 통해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두루 살펴야 합니다. 시민사회, 학계, 기업,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처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론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공지능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행정 공무원 몇이서 밀실에서 리포트를 만들어서 대처하겠다는 건, IT 분야의 슈퍼 엘리트들이 알아서 잘하도록 맡겨놓자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입니다. ‘공론화’를 통해 집단지성을 모으고, 각계각층의 이해관계를 두루 반영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178)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후발 추격국이었습니다. 미친 듯한 속도로 앞선 나라들을 따라잡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양산기술’을 가진 제조 강국이 됐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됐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선진국이 되긴 했으나, 그사이에 빠트린 것, 건너뛴 것이 많았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원천기술’과 ‘기초과학’입니다. 대한민국은 양산기술의 강국이긴 하나, 원천기술이 턱없이 빈약합니다. 후발 추격국으로서는 충분했지만, 선진국으로선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선진국들은 강력한 경쟁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에 더 이상 원천기술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자력으로 원천기술을 확보해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원천기술은 탄탄한 기초과학에서 나오는데, 기초과학은 아주 긴 호흡으로만 자라납니다. 정부가 과학과 기술 정책의 호흡을 바꾸지 않고, 후발 추격국의 태도와 전략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다시 ‘눈 떠보니 후진국’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188)


맺음말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학제 간 연구와 국제적 연대가 요구됩니다. 인류의 공동 대처라니? 너무 무망한 일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는 비록 미흡하지만 몇 차례 공동 대처에 성공한 적이 있습니다. 1975년의 아실로마 회의가 그것입니다. 유전과학자들이 실제로 모든 실험을 멈춘 덕분에 생명공학은 인류 공동의 기준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으로 맞붙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인류는 전략핵무기 통제를 위한 협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솔트 1SALT: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전략무기 제한협상)은 1969년부터, 솔트 2는 1972년부터, 그리고 스타트 1START I: 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전략무기 감축조약)이 1982년부터 협의가 시작됐고, 1991년부터는 실제로 전략핵무기의 감축이 실현됐습니다. 인공지능에도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나라 간의, 기업 간의 군비경쟁이 아니라는 데 합의할 수 있다면 인류는 또 한 번 새로운 공동규칙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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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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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극은 죽었는가


모든 예술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지만, 비극은 실제로 정치적 제도로서 삶을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그 자체로 정치적 제도일 뿐 아니라,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와 소포클레스의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등 그 시대 비극 두 편은 공적 제도의 건립 또는 확보와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 축제의 한 부분으로 공연되는 비극적 드라마의 자금을 도시국가가 지명하는 한 개인이 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합창단’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도시국가의 공적 의무였다. 국가는 최고 행정관의 지휘를 받아 이 절차 전반을 감독했으며, 공연 대본을 서고에 보관했다. 배우는 폴리스polis에서 보수를 받았고, 국가는 또 가난해서 돈을 낼 수 없는 시민의 입장료를 내줄 자금을 확보했다. 대회의 심사위원은 시민단이 선출했고 이들은 틀림없이 법정 배심원으로서 또 정치 집회의 구성원으로서 익숙하게 발휘하던 비판적 감각으로 극적 공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12)


정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 비극에는 이중적인 역할이 있는데, 사회제도를 승인하는 동시에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예술은 내용을 통해 사회질서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관객에게 심리적 안전밸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무해한 환상을 육성하여 자신이 사는 체제의 더 불미스러운 측면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은 비극을 무해한 환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잘못하면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는 어떤 감정(연민과 공포)을 엄격하게 통제된 양만 먹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비극은 간단히 말해 정치적 동종요법의 한 형태다. 비극의 비판적 역할이라는 측면을 볼 때, 숭배받는 종교적 축제의 일부를 이루는 공식적인 정치적 사건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어두운 서브텍스트에―아무리 신중하게 신화적 과거 속에 집어넣었다고는 해도 광기, 존속살인, 근친상간, 영아살해 등에―그렇게 대담한 빛을 비출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13)


고전적 관점에서 실생활의 참사는 날것 그대로의 고난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극적이지 않다. 그런 고난이 예술에 의해 형태가 잡히고 거리가 두어져 어떤 더 깊은 의미가 풀려나올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본격적으로 비극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비극적 예술은 견딜 수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그 견딜 수 없는 것에 관해 사유하고 그것을 기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원인을 조사하고 피해자를 애도하고 그 경험을 일상생활로 흡수하고 그 공포에 의지하여 우리 자신의 약점이나 필멸성과 마주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핵심에서 어떤 잠정적인 긍정의 순간을 발견하도록 권유한다. 이 긍정이란 우리가 보았듯이 그저 예술 자체가 계속 가능하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서 문제는 그런 것들은 실생활의 재앙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재앙─가령, 2001년 미국 세계무역센터 공격 같은─이 오로지 고난일 뿐 다른 것은 아닌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17)


전통적 관점에서 비극적 예술은 신화, 섭리, 또 신들이라는 부담스러운 존재를 상실한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 유령이 되느냐 하는 것은 논란이 있는 문제다. 마크 트웨인과는 달리 비극은 하나가 아니라 일련의 한 무더기의 때 이른 사망 기사의 주인공이었다(마크 트웨인 생전에 사망 기사가 잘못 보도된 적이 있다). 헤겔은 근대에 이르면 예술 그 자체가 생명이 다하며, 비극적 드라마가 계속 무대에 올라가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고대인의 세계 역사적 차원이 사라진 열등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비극적 드라마는 그런 중대한 쟁점으로부터 윤리와 심리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런 쇠퇴는 이미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부터 나타났다. 니체에게 비극은 회의적인 에우리피데스와 지적인 소크라테스의 등장과 더불어 유아기에 요람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운명이라는 관념이 고대 비극의 핵심이라고 보는데, 근대에는 설득력 있는 등가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


프리드리히 셸링에게 비극적 행동은 내면화되고 심리화되고 개인화된 것이며, 이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자신이 충실하게 따른다고 믿는 고대 그리스 연극과 모순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동의 문제인 것이 셸링에게는 의식의 문제다. 비극적 과정 전체가 역사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내적 상태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갈등과 반역은 대체로 내적 문제이며, 주인공의 외롭고 우월한 영혼은 갈가리 찢기지만 결국 온전한 전체로 찬란하게 복원된다. 운명이라는 관념이 근대의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에 패하여 사라지고 나서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예술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헤겔이 그의 철학적 적수 프리드리히 니체와 공유하는 편견인데, 니체가 보기에 현대 비극론은 이제 공적 영역의 예술에서 물러나 개인화되고 내면으로 치달았다. 니체가 비극적 문화의 소생에 건 희망은 그 영역의 갱신에 달려 있는데, 여기에서는 공유되는 신화의 등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25)


근대성은 비극을 망치기는커녕 생명을 새로 연장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잠재적인 비극적 주인공의 대오를 한없이 부풀려 놓았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누구라도 거리에서 뽑아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팍팍한 장소에 갖다 놓기만 하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 리타 펠스키Rita Felski가 말하듯이 “고난에 대한 이런 민주화된 비전에서는 은행 직원이나 상점 여직원의 영혼도 중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힘들이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전장이 된다.” 호라티우스는 시인들에게 신이 평민의 악센트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조언하는데, 비극적 영웅도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근대 영웅들로 오면서 이런 속물주의를 치워 버렸다. 계몽주의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지위, 성격, 성별 또는 민족적 기원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간 종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귀중하다는 마음을 흔드는 명제(기독교가 오래전부터 예고하던 명제)와 마주하게 된다. 26)


근대성이 비극을 좌절시키기보다는 촉진할 수 있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이성의 한계, 한때는 자주적이었던 인간 주체의 연약함과 자기 불투명성, 통제 불가능한 수수께끼 같은 힘들에 노출된 상황, 힘과 자율성에 가해지는 제약, 인간의 행복에 완전히 무관심해 보이는 익명의 ‘타자’ 안에서 찾아야 하는 기원, 다원적 문화 안에서 선善들의 불가피한 갈등, 인간이 주는 피해가 장티푸스처럼 퍼질 수 있는 사회질서의 복잡한 밀도를 새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된 행성에 함께 묶여 있기 때문에 원죄의 감각―우리가 무고하지만 죄를 지은 자들로서 이 빽빽한 연결망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복귀하고 있다. 어떤 역사적 시기도 근대처럼 인간의 힘을 풍부하게 풀어놓은 적이 없으며, 따라서 어떤 시기도 자신이 풀어놓은 힘에 정복당할 위험이 이렇게 컸던 적이 없다. 27)


2. 근친상간과 산술


오래전부터 『오이디푸스 왕Oedipus Tyrannus』에는 산술算術과 관련된 서브텍스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마르게 하나는 하나 이상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오이디푸스는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이자 형제, 범죄자이자 입법자, 왕이자 거지, 원주민이자 이방인, 독이자 해독제, 인간이자 괴물, 유죄이자 무죄인 자로서, 또 맹목적이면서 명민하고, 거룩하면서 저주를 받고, 마음은 빠르면서 발은 느리고,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판독 불가능한 수수께끼로서 그 자신이 바로 하나 이상인 하나다. 모든 남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상의 후손이며, 너무 많은 섬세한 가닥으로 짜여 있어 사실상 읽어 낼 수 없는 텍스트다. 어쨌든 소포클레스의 드라마를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다수성이 자비로운 것은 아니며, 모든 혼종성이 천사 같은 것도 아니고, 모든 정체성 주장이 계몽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는 늘 어느 정도 연기가 따른다. 32)


오이디푸스는 또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인식과 ‘타자’의 관리하에 있는 자기 정체성의 다른 형태 사이에서 나뉘어 있다. 그 관점에서 보는 자신(근친상간을 저지른 친부 살해자)은 자신이 보는 자신이 아니며, 그가 자기도 모르게 하는 모호한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느 인간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그의 의식적인 의도가 아니라 ‘타자’(언어, 친족관계, 사회관계로 이루어지는 장場 전체) 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에고ego의 진실은 주체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만하게 자기 결정을 하는 이 인물 내부에서 뭔가 이질적인 것이 행동하고 말을 하며, 이것이 그의 말 속에서, 사실 그의 이름 속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서브텍스트로 집요하게 남아, 그의 상상의 정체성을 탈중심화하고 마침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결코 단순하게 하나일 수 없다.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만날 때, 그 자아는 낯선 존재로서 그와 대면한다. 33)


근친상간 금기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섹슈얼리티는 그런 제약에 순응하려 하지 않는다. 쌍둥이의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성적 재생산에서는 1+1=1이지만, 여성 파트너가 남편에게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손자에게는 어머니이자 할머니라는 네 가지 역할을 합하고, 남성 파트너 또한 여자의 아들이자 남편이고 자식의 아버지이자 형제로서 비슷하게 여러 역할을 융합하고 있는 성적 재생산 행동에 맞는 공식은 무엇일까? 따라서 어떤 것이 그 자체인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근친상간은 특별히 매혹적인 아이러니의 사례이며, 이런저런 종류의 아이러니는 소포클레스 걸작의 모든 조직에 스며들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탈은 규범적 상태의 조건이다―이것은 문명화된 사회가 폭력적 기원으로부터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오이디푸스도 다친 발에서 출발했다. 애초에 상징적 질서를 만들어 내는 욕망은 늘 그 질서를 제자리에 붙잡아 두는 수칙을 무시할 수 있다. 33-4)


결국 가장 중요한 산술적 계산은 하나가 하나 이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영이 영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오직 무無가 될 때만 뭔가가 될 수 있다―그리고 ‘창조’의 교리가 암시하듯이 뭔가와 무 사이의 차이는 모든 것에서 가장 근본적 차이다. “나는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중단한 시간에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그는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묻는다. 리어가 코딜리아에게 경고하듯이 무에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 희곡 또한 산술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으며 더, 덜, 뭔가, 과잉, 전부, 무를 미묘한 차이로 표현해 낸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그저 하찮은 사람, 스스로 추방한 거지 같은 존재로 끝난다. 그러나 그는 눈이 멀 때에만 진실을 파악할 것이며, 인간성이 벗겨져 나갈 때에만 진정으로 인간이 될 것이며, 궁핍해질 때에만 들어 올려질 것이다. 그는 이전의 자신보다 못한 존재가 되면서 더 큰 존재가 되는 데 성공한다. 39)


3. 비극적 이행


찰스 시걸은 『오이디푸스 왕』을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사고로부터 더 추상적이고 담론적 사고로 이동하던 5세기 아테네 계몽주의의 문건으로 본다. 블레어 혹스비는 그리스 비극이 그렇게 단명한 문화적 형성물이라면 그것은 “이 비극이 종교적인 사고 습관이 이울면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힘을 소유하고 있고 책임이라는 법적 개념이 흐름을 타고는 있지만 아직은 견고하지 않은 문화적 이행의 순간에만 번창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장 피에르 베르낭과 피에르 비달 나케는 비극적 영웅은 일반적으로 이전의 신화적 시대 출신이며, 이제는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비극은 신화를 폴리스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시작된다―물론 쌍방향 운동에 따라 그런 신화가 또 자신을 검토하려 드는 합리성의 한계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영웅적·종교적 가치는 도시국가의 법적·윤리적·정치적 판단에 종속되는데, 도시국가는 권위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신화적 과거와 단절할 필요가 있다. 42)


그렇다 해도 사람들은 이제 비판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아직 자율적인 칸트적 주체로 진화하지는 못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서 인간은 자신의 두 발로 서지만, 그것은 기고 절뚝거리는 사이의 짧은 막간 동안만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 주인 노릇을 하지만 오직 의존이라는 더 깊은 맥락 안에서일 뿐이다. 바로 이런 이중 결정―자기 행동의 원천인 자아와 그 자아를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무녀 같은 ‘타자’ 사이의 긴장―에서 상당한 비극적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타자’에게는 타자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관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는 통일된 영토가 아니다. 올림포스산에서 다투는 신들이 단일한 통치권을 구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타자’로부터 자신을 돌려받는데, 이때 자신은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행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정신의 영토 밖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애초에 우리를 인지 주체로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3)


유구한 비극적 리듬에서 주체 자아는 객체 자아―눈멀고 약하고 초라하고 상처받기 쉬운―의 기초 위에서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영의 진정한 고귀함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스핑크스에게는 인간의 머리가 있지만, 동물의 몸에 통합된 머리다. 정신은 오직 연약한 육신에 매달림으로써만 자신을 뛰어넘어 무가 되어 버리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의식이 유아기에 신체적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는 것, 모든 인간에게 진실인 이것은 사실에서 가치로 바뀐다. 우리가 몸이라는 기초에서 올라와 자아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서사의 산물이다. 『안티고네』 합창단이 노래하듯이 인간은 훌륭한 동시에 죄가 많다―어떤 자유주의적 지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섞여 있고 다면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순의 화신이며 모든 논리에 저항하고 그 자신의 합리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수께끼다. 따라서 비극은 모든 이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한 형식이다. 인간에 대한 변증법적 지식의 모델이다. 45)


고대 그리스인의 감각만큼이나 매혹적인 질서 감각을 그것이 무너지면서 나올 수 있는 재앙과 함께 담아내지만, 안정성을 향한 이런 뜨거운 마음을 개인의 풍부하고 창의적이고 잠재적으로 파멸적인 힘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감각, 고대 아테네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날카로운 감각과 결합하는 일군의 극적인 작품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셰익스피어 비극의 성취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질서와 혼란 사이의 이런 충돌은 희곡에 담긴 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시는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문법과 논리의 규칙성에 의존하면서도 아주 풍부하고 다가多價적이어서 자신의 기초를 허물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질서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믿음은 그것을 표현하는 바로 그 언어에 의해 위태로워진다. “말 없이는 [어떤 이유reason도] 내놓을 수 없군요.” 『십이야』에서 광대는 재담을 던진다. “하지만 말이란 너무 거짓되기 때문에 그걸로 이치reason를 이야기하는 것은 싫네요.” 48)


라신의 비극에서, 뤼시앵 골드만Lucien Goldmann은 『숨은 신Le Dieu Caché』에서 주장한다, ‘신’은 세상에 현존하는 동시에 부재하는데 이것은 비극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전능한 존재’는 자신의 ‘창조물’에서 물러나 자신이 창조한 연옥 세계에 등을 돌리고 그 결과 절대적 가치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여전히 불모의 실재에 드리워져 주인공은 초월을 찾는 과정에서 세계를 거부하게 된다. 절대적 가치는 실현될 수 없지만 그 유령을 완전히 쫓아낼 수도 없다. ‘전능한 존재’는 그를 찾는 성과 없는 탐색의 형태에서만, 또는 죄의 경험에서만 계속 살아 있다. 딜레마는 ‘신’이 세계에서 물러나면서 가치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납골당 같은 ‘창조물’의 세계가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끌어안을 수도, 아니면 어떤 더 높은 영역을 위해 그것을 내칠 수도 없다. 세계에서 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하늘의 침묵이다. 49-50)


따라서 비극적 주인공은 골드만의 관점에서 보면 부재하는 ‘신’이 현존하는 곳에 살면서 세속적 맥락에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절대적 요구의 짐 때문에 비틀거리는 사람이다. 점점 합리주의적으로 바뀌는 사회질서는 그런 칙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고, 우리가 그 권위에 고개를 숙일 조건을 제공할 수도 있다. ‘신’은 불가해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손에 잡히지 않는 ‘타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히스테리 환자의 고전적인 의문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당신이 나에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는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질서와 마주한 인간 주체 전체를 대표하는 한 예가 된다. 이런 소박한 프로테스탄트의 비전에서 육은 영의 화신이 될 수 없다. 가치는 인간 주체 안에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다. 주인공은 사라진, 내재적 의미의 세계와 권력이나 욕망의 탐욕스러운 체제 사이에서 갈등하며 파괴된다. 50)


발터 베냐민은 비극의 이행적 본질에 관해서 『독일 비극적 드라마의 기원』에서 그만의 독특한 관점을 주장한다. 비극적 영웅은 자기도 모르게 신화와 신들의 구체제와 새로운 공동체 탄생 사이에 끼게 되는데, 새로운 공동체가 도입되는 데는 그의 희생적 죽음이 도움이 된다. 그는 어느 쪽 질서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결국 둘 사이에서 짓눌려 죽으며, 옛날 법과 미신의 언어와 아직 표현 불가능한 윤리―정치적 미래 담론 사이에 끼어 있다. 비극적 영웅은 희생 제물로서, 구체제의 잔재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쓰러뜨릴 수 있는 원칙을 대표하며, 그러한 존재로서 해방된 미래의 전조가 된다. 한 제도와 다른 제도 사이의 폭력적 이행 지점에 자리 잡은 영웅은 신들의 눈앞에 자신을 정당화하기를 거부하면서 운명과 결별한다. 베냐민은 비극적 주인공이 세속적 시기가 아니라 오직 메시아적 시기에만 가능한 완성을 이루지만, 실제로는 이런 양식의 시간성 속에는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영웅은 죽어야 한다고 본다. 55)


프레드릭 제임슨은 예술적 모더니즘이 아직 끝까지 가지 않은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본다. 페리 앤더슨도 모더니즘 예술의 파괴력 가운데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전근대로 남아 있는 사회에 근대성이 가하는 충격이라고 주장한다. 근대적으로 바뀌는 일이 일단 완료되면 예술 운동으로서의 모더니즘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모더니즘은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점점 “마법에서 풀려나고 있지만” 여전히 신화, 우화, 민담, 초자연적인 것이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는 문명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이런 자원을 근대성의 혐오스러운 특징으로부터 피난할 곳으로서 또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틀로서 활용할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은 아직 신성한 것의 모든 자취를 지워 버릴 만큼 견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는데, 그 신성한 것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런 역사적 과도기에 그리스 비극 작가의 지혜는 불가결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57)


4. 유익한 허위


플라톤의 이상적인 사회질서에서 통치자는 거짓말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는다. 그들은 공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플라톤 이후 많은 사상가에게 통치자가 무엇보다도 비밀로 지켜야 할 것은 개별 시민의 유래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불미스러운 기원이다. 국가는 대부분 전쟁·침략·혁명·멸절의 결과이며 이런 원초적 잘못은 영토 방어를 위해 징집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감추어야 한다. 주권의 원죄는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역사를 오염시킬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감추어야 한다. 버크의 관점에서 권력은 감각을 속여 고상한 기만과 계도적 허구를 낳아야 한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행복감과 위로다. 매슈 아널드는 소유와 국가의 기원을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유재산 몰수 시기의 폭력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정리되면 그런 폭력에 대한 속죄로 몰수 반대를 제안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고 과거는 잊히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64)


대중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다른 추문은 도덕적 가치와 사회질서의 기초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또는 존재한다 해도 그의 힘이 완전히 과대평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의 회의주의가 민중의 경건성에 다가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중은 늘 몽매해진다고 생각한 볼테르는 자기 집 하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이단성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마음 졸였다. 아일랜드 철학자 존 톨런드(놀랍게도 급진파)는 신학적 소책자 『팬시이스티콘Pantheisticon』에서 ‘이성’의 진실을 군중의 미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흄도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 학식이 있는 자와 무지한 자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만 종교의 온건한 형태, 그 자신은 믿지 않는 형태가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토머스 제퍼슨도 비록 자신은 공유하지 않지만 신에 대한 믿음은 사회의 단결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신을 믿지 않는 에드워드 기번도 대체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65)


스피노자가 보기에 우리에게 깊이 자리 잡은 환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지금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순혈 결정론자로서 그에게 자유란 상황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오는 마음의 고요apatheia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우리 주위에서 보이는 것의 필연성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우리의 힘을 늘리는 것이다. 대중이 자기 행동의 원천이 자유의지라고 잘못 아는 것은 진정한 원인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자연의 일반적 질서에 관한 한 정신은 자신, 몸, 다른 물질적 대상에 관해 “혼란스럽고 훼손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플라톤과 다른 부분은 이런 무지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대중은 미망 속에서 뒹굴 필요가 없다. 그들의 욕망은 유연하여 다시 빚을 수 있으며, 계몽된 철학자에게 맡겨지는 과제는 바로 이것이지, 정치적으로 시의적절한 허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66-7)


유럽의 지배계급이 스피노자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매도한 것은 그의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콩도르세는 자신이 이 네덜란드인 동료와 의견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체제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민중의 도덕성은 가짜 의견 위에 세워져야 하고, 계몽된 사람들은 쓸모있는 오류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을 속여도 괜찮고, 그들 자신은 부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슬로 민중을 계속 묶어두는 것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 체제에서 진실로 어떤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렇게 묻는데 이것은 이 신뢰할 수 없는 기획 전체에 대한 간결한 요약이다. 이런 점에서 콩도르세의 상속자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인데, 그는 『환각의 미래』에서 종교적 관념이 유아에게 들려주는 동화라고 일축하며, 자신의 후기 계몽주의 양식대로 그런 아편이 없어도 되는 미래를 바라본다. 에고에 미망이 어느 정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해서 거기에 마귀나 눈물을 흘리는 동정녀상에 대한 믿음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다. 67)


플라톤, 마키아벨리, 볼테르를 비롯한 편리한 허구의 조달자 대부분은 거짓말 자체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다. 기만은 안타까운 일이고 정치적으로 불가결할 때만 대중 사이에 퍼뜨려야 한다. 기만은 진리의 일반적 체제 내에서 기능하며, 그 기초를 사보타주하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다. 사실 거짓은 진리를 가장함으로써 진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니체에게 거짓은 결코 안타까운 필수품이 아닌데, 그는 진실과 거짓에 일반적으로 할당되는 가치를 역전시키려 하며,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 대한 찬가를 부를 만큼 뻔뻔스럽다. 그는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며, 그들에게 “진짜 거짓말, 진정하고 단호하고 ‘정직한’ 거짓말(그 가치에 관해서는 플라톤을 참조해야 한다)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강력할 것”이라며 비웃는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환각 없이는 살 수 없다. 거짓 판단을 포기하는 것은 삶 자체를 버린다는 뜻일 것이다. 70-1)


외양의 세계에서 현실성이 놀랄 만큼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두드러지는 한 가지가 바로 예술이다. 니체는 놀랄 만큼 대담한 태도로 예술과 진리 사이의 유서 깊은 관련을 끊어 버린다. 예술이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의 분출로서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는 보기에 무섭기 때문에 예술은 아폴론적인 위장으로 그것을 가리는 기능을 한다. 아편이라는 예술의 본질 또는 거짓 위안이라는 문화의 본질에 관해 이렇게 잔인할 만큼 솔직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진실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꿈과 환상(아폴론적인 것) 속이지만, 오직 전치되고 신중하게 완화된 형태로만 드러난다. 예술이 승화시키는 야만성이 없다면 예술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문명의 가장 훌륭한 꽃은 야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신정론의 한 종이다. 역사가 괴테 같은 인물이나 톨스토이 같은 인물을 내놓으려면 잔혹과 착취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73)


# 신정론神正論.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로 본다.


예술은 이중의 기만을 포함한다. (비)진리를 감추는 동시에 거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런 의미에서 환각이다. 거짓말의 성화聖化다. 그러나 단순히 환각만은 아니다. 이것은 또 변화를 일으키고 삶을 고양하는 힘, 우리가 성장하고 번성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비옥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비극에서 진실이다. 니체에게 비극적인 것은 공포가 부정되지 않고 연금술에 의해 승리로 바뀔 수 있는 과정이다. 그렇다 해도 예술은 그 자체로 목표라기보다는 인간 번성의 수단이다. 이 점에서 다시 니체는 미학자 가운데는 드문 존재가 되는데, 이번에는 예술 작품을 솔직하게 도구로 보는 태도 때문이다. 세계는 자신을 낳는 예술 작품이며, 이런 자유로운 자기 생산 과정을 이용하여 우주의 소우주가 됨으로써 초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이룰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혼돈이 형식이 되도록 강요한다. 그는 웅장하게 살아난 예술 작품이며, 예술가·예술품·재료가 하나의 몸 안에 있는 존재다. 74-5)


진실이 양가적인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너무 많은 불쾌한 비밀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허위의식의 조종석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 문제될 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정의 노爐는 진실이 일상적으로 억눌리는 곳이다. 비극적 예술의 전통적인 현장―전장, 귀족의 집, 왕궁―에 대응하여 그와 똑같이 갈등·배신·폭정·반역이 넘쳐나는 근대의 등가물이 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 가족이라고 알려진 현장이다. 중간계급 사회의 근본 단위인 가족은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죄책감이 곪아 가는 자리이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가정의 조화와 결혼의 행복에 대한 찬가가 계속 울려 퍼진다. 영웅 이후 시대에 비극이 번창하는 데는 악마나 반신半神이 필요 없다. 반대로 매우 숭배받는 제도 가운데 하나의 핵심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이 신화의 종말, 또는 공적 영역의 붕괴에도 비극이 죽지 않는 한 가지 이유다. 82-3)


5. 위로할 수 없는 자


중간계급 문명은 세계를 자신의 목적대로 형성하고자 하는 가운데 과학과 테크놀로지라는 대단히 막강한 도구를 진화시켰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에게 모든 물질적 현상이 어떤 엄격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을 해 줄 수밖에 없는데, 인간 자신이 이런 결정론에서 어떻게 면제될 수 있는지는 알기 힘들다. 자유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면 예측과 계산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자유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기획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역사의 결말이 열려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동시에 어느 정도의 결정된 지식을 요구하며, 이런 종류의 지식은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는 얻기 힘들다. 만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나뉘어 있는 두 영역이라면 인류는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았고,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고향 없는 상태를 대가로 자유를 사는 듯하다. 따라서 중간계급 사회의 기초―자유로운 주체―는 암반이라기보다는 심연인 듯하다. 94-5)


예술 작품은 하나의 전체로서 구체적 특수성 안에서 또 그 특수성을 통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감각적 합리성의 모범―감각되는 것과 이해되는 것,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필연과 자유, ‘자연’과 정신을 통일하겠다고 약속하는 이성의 한 형태의 모범―이다. 예술은 감각을 끌어들이며, 그래서 어떤 추상적 교의보다도 사람을 깊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감각된 것들이 모여 제멋대로인 군중, 바스티유를 급습한 폭도canaille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감각적 내용은 일관된 기획에 의해 안으로부터 모양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성 자체가 감각화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피도 눈물도 없는 합리주의로 방향을 틀기보다는 인간적 욕구나 감정과 접촉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는 객관화되어 손에 잡히는 형태를 띠게 된다. 거의 모든 미학적 담론이 그렇듯이 예술 작품의 이런 모범 밑에는 신학적 개념이 잠복해 있다. ‘육화Incarnation’, 즉 육肉이 된 ‘말Word’이라는 개념이다. 97)


우리는 허구적 형식으로 죽음 충동을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쫓아오는 힘들에게 마음껏 어떤 가상의 복수를 해도 우리가 실제로는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진정한 행복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나는 안전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데 있다. 오직 바다 같은 고난에 맞서 무기를 들 때에만 비극적인 것이나 숭고한 것은 우리가 그런 괴로움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 또 아무리 무익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해도 정신은 자연 세계에 맞서 싸울 때에만 번창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고난과 영웅적 저항을 통해서만 어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힘들의 물러서지 않는 현존을 느끼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것과 정신적으로 동등하거나 심지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서도 그렇듯이, 속박이나 필연은 자유의 근거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98)


셸링의 관점에서 오이디푸스가 실제로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법적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 것은 필연에 허리를 굽히는 동시에 필연에 숭고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 헛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낮추려는 힘들의 훌륭한 맞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니체의 표현으로 하자면 이것은 승리를 거두는 패배의 문제다. 죽음에 순응하는 것은 적어도 자신을 파괴하려 하는 힘의 의지만큼 확고한 의지를 요구한다. 영웅은 몰락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내부의 무한함을 드러내는데, 이런 면에서는 자신이 투쟁하는 힘들과 하나다. 이 힘들은 근엄한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이성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영웅의 힘의 근원에도 놓여 있다. 오직 주인공의 생물적 실존 너머에서 나오는 힘만이 그가 그런 실존을 포기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은 자유를 포기하고 필연성의 굴레를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는 바로 그 행동으로 자유를 증언한다. 101-2)


니체의 경우 비극에 비할 바 없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대 위 인물들의 번뇌가 아니라 구경꾼의 흔들리지 않는 눈길이다. 우리는 비극적 행동의 목격자로서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죽음 충동에 우리 자신을 내주는 순간 그 충동을 속이고 영생에 대한 유아적 환상을 맛본다. 동시에 쇼펜하우어의 구경꾼처럼 시간을 벗어난, 의지도 없고 장소도 없는 순수한 명상의 중심으로 이동하여 추하고 볼품없는 것이 그보다 자비로운 특징들과 함께 긍정해야 할, 강력한 우주적 게임의 불가결한 측면임을 인정하게 된다. 다시 한번 비극은 신정神政의 한 형태다. 고통 없이는 지복이 있을 수 없고, 시듦 없이는 개화가 있을 수 없고, 자해 없이는 주권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진정한 예술의 뿌리에는 괴로움이 있다. 비극적 예술가는 적극적으로 고난을 찾아 나서며, 인간 실존에서 의심스럽고 무시무시한 모든 것을 긍정한다. 고통과 자기 억압은 니체에게 초인 도래의 필수적 서곡이며, 이것이 그것들을 내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다. 116)


마르틴 하이데거는 신들의 귀환, 신화의 재연, 비극적인 것의 재탄생이 합리주의와 테크놀로지로 엉망이 된 시대에 유일한 구원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믿은 또 한 사람이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비극은 가장 심오한 철학적 사유로 우리에게 위험하고 폭력적이고 운명적이고 고향 없고 불가사의한 ‘인간’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미래에 어떤 쓸쓸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는 해도 하이데거는 전통의 끝에서 쓰고 있다. 죄르지 루카치의 초기 에세이 「비극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Tragödie」에서 비극은 역사 자체보다 강력한 현상으로 거대하게 떠오른다. 비극적 비전만이 궁극적 진리의 현현으로서 인간 실존에 의미를 주입한다. 비극적 위기의 순간에만 우리에게 모든 경험적 또는 심리적 우연을 쳐낸 순수한 자아 경험이라는 특권이 주어진다. 비극 예술은 다름 아닌 ‘존재’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인간의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현실이 되는 것”으로, 인간 노력의 정점이며 신비한 황홀경의 계기다. 119)


고전주의 고대로부터 미국의 신비평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 속에 부분이 용해되는 통일된 예술 작품이라는 신조는 놀랄 만큼 끈질기다는 것이 드러났다. 20세기 초에 유럽 아방가르드가 등장하고 난 뒤에야 이 교조는 어느 정도 규모로 논박이 이루어진다. 이제 불협화라는 관념이 기조를 이루며, 가장 훌륭한 이론가는 하이데거의 큰 적 테오도어 아도르노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의 그늘에서 글을 쓰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비극이 인간 고난에 모양이 잡힌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을 배신할 위험이 있다. 비극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억지로 떠안겨 그 잔혹성을 줄이는 데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아도르노가 그렇게 큰 빚을 지고 있는 프로이트에게도 여러 힘 사이의 최종적 화해는 있을 수 없다. 인간 주체는 자기 동일적이기보다는 분열되어 있다. 유아기의 격동에 대한 결정적 승리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감당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문명은 비극의 해독제라기보다는 그 예에 가깝다. 120)


고전주의적 고대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칭은 높게 평가된 반면 불협화와 분열은 안정에 위협이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관념론자, 낭만주의자, 19세기 목적론자에게는 투쟁과 낭비도 인간 역사의 행복한 진화에서 자기 나름의 역할이 있다. 통일은 기조로 남아 있는데, 이는 마침내 분열을 통합할 수 있는 통일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근대 후기에 화해에 대한 이런 믿음은 환상 또는 거짓 유토피아로 점점 불신임을 받았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로, 여기에서 갈등과 모순은 이제 다급한 문제가 아니다. 대신 차이와 다양성이 강조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질은 선배인 근대성의 기질과는 달리 대부분 비극적이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깊은” 주관성에 대한 혐오는 영적 고통이나 존재론적 불안과 편하게 공존하지 못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구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눈에 구원받을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24)


칸트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비극 철학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윤리 정치적 목적에 적합하도록 그 예술의 범위와 다양성을 축소해 버렸다. 그 결과로 비극적인 것의 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비극이라는 말을 대체로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 예술에서 희극은 삶의 희극과 그리 거리가 멀지 않지만 비극은 미학적 의미와 일상적 의미 사이에 간극이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 말의 일상적 사용법이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많은 이론보다 비극적 드라마 대부분을 오히려 더 충실하게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복구 불가능한 것이 해소 가능한 것보다 비극적이라는 일반적 의견은 당연히 옳다―그렇다고 해서 후자가 설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이 이데올로기는 결국은 복구가 불가능한 곤경을 맞이한 사람, 결국은 대립물의 통일로 환원될 수 없는 갈등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다. 그것은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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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얼 씽 - 문학 형식에 대한 성찰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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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사실 직시하기


1. 사실주의, 공감과 합리성 


"문학적 사실주의가 인간의 공감을 키울 수 있는 주된 방법은 두 가지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그려 냄으로써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행동과 태도를 이해하도록 만든다. 아니면 초점을 확대해 등장인물의 행동만을 다루기를 거부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조명함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맥락을 포함한다. 두 경우 모두, 독자가 개인의 상황에 대해 순전히 외부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한다. 사실주의 소설은 이 두 가지 관점을 결합하는 데 있어 서사적 허구와 서정적 허구, 둘 모두보다 뛰어나다. 서사적 허구는 우리에게 행동의 맥락을 제시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마음에 접근하도록 해 주지는 않는다. 반면 서정적 허구는 사회 환경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를 경험하는지 재창조할 수 있다면, 동시에 보다 넓은 관점으로 그들의 행동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들의 약함이나 혹은 범죄마저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16)


"그렇지만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관용도 깊어진다는 선의의 교리는 다소 의심스럽다. 이 교리는 맥락을 고려하면 행동이나 개인이 처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혐오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맥락을 고려한다고 해서 항상 그 일을 더 많이 수용할 수 있게 되거나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더라도 오히려 그들에 대한 혐오가 깊어질 수 있다. 연쇄 살인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면, 상상했던 것보다 그가 더 혐오스럽게 보일 수 있다. 공감은 윤리를 구축할 기초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처지에 공감한다고 해서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만약 당신의 자아가 그들의 자아 속으로 사라졌다면, 당신에게는 공감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 게다가, 상상력을 통한 공감 행위로 '누군가'가 되면 그들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거리가 사라지는 반면, 많은 사실주의 소설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18-9)


2. 사실과 해석 


"사실주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자 추구하는 것으로,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예시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듣기보다 더 고된 일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포스트모던의 후계자들에게 사물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아는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의 입장과 그것을 해석하는 이해의 틀에 따라 우리에게 수많은 다른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실제로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니체가 단순히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 행위 그 자체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이는 실존주의와 청소년기의 공통된 관점이다." "그러나 삶의 중심을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 핵전쟁의 발생 여부, 부모가 우리를 대하는 방법, 유전적 구성, 사랑에 빠지는 대상, 피부색 등등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27-30)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진실이란 세상을 어떻게 조직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이익을 증진하느냐의 문제다. 세상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제조된 것이다. 우리가 방금 언급한 것처럼 이 관점에서는 그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물이 그 자체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다." "더욱 화려한 포스트모던 사상의 전파 활동에서는 진실이 개인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사례가 우리와 같이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사회적 감각이 점차 위축된 사회에서 번성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둘 중 하나를 '옳음'으로 표시하고 다른 하나를 '틀림'으로 표시하는 것은 독단적이고 계급적이므로 두 주장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거짓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 대해 불쾌할 정도로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사이먼 블랙번(캠브리지 대학 교수)이 말했듯이, 〈상대주의는 (···)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반대할 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다.〉"(36-8)


3. 인지적 사실주의와 도덕적 사실주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무관하지만 그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인지적 사실주의로 알려져 있다." "이 이론의 진실은 세상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라는 데 있다. 이 말은 마음이 발견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은 마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만들고 식별하고 설명하고 구성하는 방법,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어떤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지,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필요, 관심 및 가치와 관련이 있다." "도덕적 사실주의는 도덕적 자질이 세계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단순히 사실을 진술하거나 단순히 가치 판단을 내릴 때에도, 두 행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스티븐 멀홀은 〈사실의 진술이 가치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 진술과 가치 판단은 둘 다 인간 본성이 지닌 동일한 능력을 말한다─오직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생물만이 사실을 진술할 수 있다〉고 말한다."(45-8)


"모든 덕행의 근거에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과 인식론은 하나가 된다. 고전적인 도덕적 질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상황을 고려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나 도덕적 사실주의자가 적절하게 행동하려면 사물이 우리에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 통찰력을 얻는 것 자체가 다양한 도덕적 미덕을 요구할 수 있다: 정직과 집념, 자기비판 능력, 사욕이나 자기 망상 없이 세상을 보려는 노력, 세상에 우리 자신의 사적인 환상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거부 등이 그것이다. 진리 그 자체는 원래 (믿음 또는 충성을 의미하는) 도덕적 개념이었다." "추악하고 불편한 것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지적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고, 사물의 반항과 현실에 대한 개방성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객관성이 의미하는 바이다. 객관성이란 자기 중심성의 반대이다. 이런 종류의 사실주의는 자발적 충동이 아니라 도덕적 충동이다."(50-1)


II. 사실주의란 무엇인가? (1)


1. 사실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중간계급 


"대개의 경우, 사실주의는 냉정하고 넌센스가 아니며, 더 오래되고 귀족적인 사회 질서의 양식화된 예술에 적대적이다. 사실주의는 대부분 중간계급이 선호하는 형태로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고 자신이 제작하는 예술의 거울에 비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낭만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것, 예의 바르고 정교한 것, 공상적이고 멋진 것을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조지 엘리엇이 쓴 것처럼, 사실주의는 〈감정의 안개 속에서 상상력으로 자란 모호한 형태〉를 〈확실하고 실질적인 현실〉로 대체하는 연구이다. 19세기의 많은 독자들은 자연에 대한 이 겸손한 연구에 너무 많은 것이 있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여겼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성적으로 추악하고 도덕적으로 외설적인 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사실주의 소설에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위협으로서의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합류하게 되었다. 사실주의가 경박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프랑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명성을 더욱 악화시켰다."(58)


"사실주의는 사회적 존재의 안정성을 신뢰하는 동시에 그 불안정성을 인식한다. 따라서 이는 중간계급 사회의 두 가지 상반된 측면과 일치한다. 사실주의의 도덕적 가치는 신중함, 예의 바름, 절제이지만, 그의 사회 및 경제적 삶은 위험, 투쟁 및 끊임없는 기업의 문제다. 만약 중간계급이 집에서는 차분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라면, 공공 영역에서는 모험적인 산업가의 모습을 띤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는 이중으로 매력을 발휘한다. 익숙한 이미지로 자신을 위로하는 소심하고 가정 중심의 영혼들뿐만 아니라, 위험, 모험, 지속적인 노력에 영감받는 모험적인 유형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매혹적이다. 그러나 중간계급은 질서와 마무리에 문제가 있다. 시장 경제에는 우아하게 대칭적인 형태가 없고, 재산 취득에도 자연스러운 끝이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축적해야 한다." "돈보다 더 불안정한 것은 없으며, 돈은 인간 존재 전체를 끊임없는 모험으로 만든다. 가장 풍부하고 믿기 어려운 현상인 돈과 환상은 논리적으로 함께 간다."(66-8)


2. 사실주의, 현실, 묘사 


"소설의 세계는 묘사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묘사와 제안을 종합한 것일 뿐이다. 소설은 자신에게 명백한 '외부'를 투사하지만, 이는 내부 작동 모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맨스필드 파크나 보물섬은 소설 제목으로 이 소설들이 알려 주는 것과 구분되는, 실제로 존재하는 맨스필드 파크나 보물섬은 없다. 이 소설들은 순전히 그것을 구성하는 언어로 존재한다. 사실주의의 비결은 그들의 존재가 언어와 무관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표현된 것과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 사이에는 실제적인 균열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적 사실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철학자들이 반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가깝다. 반사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설명으로 귀결된다. 이는 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사실을 생산하는 사실주의 소설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사실주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일종의 인지 부조화를 수반한다. 우리는 그것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에 동의한다."(80-1)


3. 허구, 반영, 가상 


"문학 작품을 재현으로 보는 것은 작품들을 비물질화할 위험이 있다. 작품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것의 복사본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작품의 힘은 순전히 그것이 묘사하는 것에서 나온다. 작품의 진실은 작품 밖에 있다. 플라톤은 예술을 사물의 창백한 반영으로 여겼고, 결국 예술을 이념의 창백한 반영으로 느꼈으므로 예술을 의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자신의 추상 캔버스가 프레임 외부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물질적 현상이기 때문에 사실주의라고 생각했다. 구성주의의 흔들의자는 흔들의자를 재현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사물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것보다 더 쓸모없는 제안은 없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가장 사실주의적인 예술은 전혀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는다. 작품이 물질세계나 감정의 '내면' 영역을 적게 반영하면 할수록 작품은 더욱 더 사실적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자기 영역을 넘어서서 예속되지 않을 때만 자유롭다."(94-5)


4. 사실주의와 이데올로기 


"사실주의의 언어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투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그 자체 앞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런 추정에 따르면, 사실주의는 자신이 제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들며, 우리에게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취급하도록 설득한다. 예를 들어 주식 시장이나 심한 불평등과 같은 것들이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이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으므로, 이런 예술을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는 '당연한 일' 혹은 '물론'이라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방식은 대규모 실직을 햇볕처럼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 사례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은 롤랑 바르트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신화나 이데올로기가 사물을 실제보다 더 순진하게 보이게 만드는 간주한다. 그는 신화가 〈(사물)에게 자연스럽고 영원한 정당화를 제공하며 설명이 아닌 사실 진술의 명확성을 제공한다〉고 쓴다."(106-7)


"발자크, 스콧, 엘리엇, 톨스토이와 같은 작가들은 정치적 영역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사회적 세력을 탐구하기 위해 정치적 영역을 쪼개고 추진하는 것보다 더 깊이 탐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적 사실주의 소설은 다양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풍경, 한 활동 영역에서 다른 활동 영역으로 이동하고 숨겨진 소속을 드러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즉, 사실주의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라면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럴 수도 있다. 사실주의는 정치 엘리트에게만 관심을 국한하는 것을 거부하고 민주적 정신을 바탕으로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사회생활을 계획하고자 한다." "모든 혁명은 변화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정치적 불안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빵이 필요하고 심지어 베이비 시터도 필요하다.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적 봉기가 아니라 그 뒤를 잇는 장기간의 사회적·문화적 혁명이다. 혁명적 단절에 적대적인 것은 사실주의라기보다는 그것을 생산하는 중간계급의 문명이다."(117-9)


III. 사실주의란 무엇인가? (2)


1. 사실주의, 예술과 환상 


"자신의 서사를 편집하는 것은 문학적 사실주의에는 필수불가결하지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사실주의 소설은 독자에게 사실을 일대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소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사실은 예술적으로 형성되고 선택되었다. 독자가 이것을 너무 의식하면 사실주의적 환상이 드러날 위험이 있다. 예술은 디자인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사실의 무질서한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가? 노스럽 프라이는 〈사실주의 작가는 문학적 형식과 그럴듯한 내용에 대한 요구 사항이 항상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고 썼다." "이 일은 어느 정도의 조작 없이는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야기는 그것이 피하고자 하는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실제와 시적 정의 사이의 간극이 당황스러울 만큼 커 보인다.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와 결혼할 수 있지만, 그것은 소설이 개입하여 그의 첫 번째 아내를 죽였기 때문이다. 행복을 향한 우리의 유토피아적 갈망에 진실성이 희생되는 것이다."(126-7)


"프레드릭 제임슨은 소설 형식이 어떻게 사회적 사실을 '탈신성화'하는지에 대해 쓴다. 소설 형식은 우화와 로망스의 환상에 구멍을 뚫고 세상에서 거룩함의 후광을 벗겨 낸다. 제임슨은 전근대 사회에서 사물은 상징적·신화적·초자연적 의미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대조적으로 중간계급 문명에서는 사물은 단순히 극명하게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사실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탈신성화되고 탈마술적이며 상식적이고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현실〉을 말하고 있다. 사실주의 소설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환멸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에 적합하다. 그러나 신화, 우화, 마술, 초자연적인 현상이 단순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주의가 그 자체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할  때, 예상치 못한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마법과 동화의 자원을 활용할 수도 있다." "사실주의 소설은 낡아 빠진 비사실주의 예술에 계속 빚을 지고 있다. 소설이 종결의 필요성을 포기할 때만 이러한 작위적인 장치를 버릴 수 있을 것이다."(135-6)


2. 사실주의와 토머스 하디 


"작가로서의 모호한 위치 때문에, 대도시 독자층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자란 영국 시골을 묘사하는 하디는 어떤 종류의 소설을 써야 할지 고민한다. 그가 설명하는 농업 세계에 속해 있다면 그는 교육과 작가로서의 지위 때문에 이 공동체에서 반외지인이기도 하다. 하디의 소설을 그토록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갈등이다." "하디의 사실주의는 좀 더 전통적인 문학 형식을 되돌아보기 때문에 '불순'하지만,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노력하기 때문에 '불순'하다." "일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소설의 역할 중 하나가 교화하고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울함은 이념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불만은 반대를 낳는다. 노동계급을 감염시키면 봉기의 형태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무신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졌는데, 레프러콘처럼 신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중간계급 평론가들조차 마찬가지였다. 하디와 조지 엘리엇은 영문학 최초의 자칭 무신론자 주요 소설가들이었다."(143-4)


3. 필연성과 우연성 


"사실주의는 우연성과 필연성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실제 생활은 무작위적인 사건으로 가득 차 있지만, 사실주의 소설에서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 경우, 그것이 줄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순한 전화벨 소리로 밝혀지면 우리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사실주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임의로 선택되었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는 특별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적 글쓰기에서는 우연이 계속해서 필연성으로 바뀌고 있다. 우연하게 시작된 일이 결국에는 선택 불가능한 일로 끝날 수도 있다. 사실주의 작품은 상황을 마음대로 설정하지만 그 제약에 얽매이게 된다. 사실주의 서사에서 영웅이 어느 시점에서 혼수상태에 빠진다면 모더니즘 작품에서와는 달리, 모더니즘에서는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만, 이 영웅은 10초 후에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할 수 없다. 사실주의적 글쓰기에는 조건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 작용이 있다."(148-51)


IV. 사실주의의 정치학


1. 사실주의와 명목론 


"대부분의 근대 문학 유형은 타고난 명목론들이다.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 《그물을 헤치고》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은 〈이론과 일반성에서 멀어지는 움직임이 진실을 향한 움직임〉이라고 선언한다. 〈모든 이론화는 도피다. 우리는 상황 자체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그 자체가 말할 수 없이 특별하다.〉 확실히 그럴 수 없다. 처음에 상황을 식별하는 일 자체가 개념 사용을 포함하며, 모든 개념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이다. 상황은 구체적일 수 있지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지는 않다. 어떤 경우에는 우연의 일치라고 알려진 것들도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눈에 띌 수 있다. 마이클 폴라니는 〈개별 사항이 더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 지식이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제공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라고 썼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관심을 처음으로 사로잡는 것은 세부 사항이 아니라 패턴이나 통합된 전체다. 사실, 더 큰 맥락으로부터 끌어낸다는 의미에서 구체적인 것은 추상적이다."(159-60)


2. 죄르지 루카치의 경우 


"진정한 사실주의 예술은 루카치가 셰익스피어와 발자크의 특징으로 본 개성과 전형성을 결합한다. 이러한 예술 양식은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융합함으로써 통일성이 분열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사실주의는 단순히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사실주의는 세계 자체가 표현되기를 원하는 방식이며, 세계의 가장 깊은 구조를 표현하는 예술이다. 루카치가 비판적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스탕달에서 토마스 만에 이르는 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의미하는데, 그는 그것을 중간계급 인문주의의 소중한 유산의 일부이며, 야만적인 파시즘에 맞서 재확인되어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모더니즘과 파시즘은 비합리주의의 쌍둥이 형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예술가와 사상가를 가장 존경하는 조상으로 올려놓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결국 마르크스 자신도 헤겔과 수많은 저명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웠던 것이다."(165-6)


"그러나 루카치는 여전히 역사적 조건을 우선시한다. 중간계급 사회가 퇴화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 사실주의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루카치가 보기에 1848년의 패배는 부르주아지의 '진보' 단계의 종말을 예고한다. 루카치는 이 침체의 마지막 단계를 모더니즘의 재앙으로 본다. 모더니스트 운동의 정점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알려진 중간계급 문명의 붕괴와 일치한다. 이 시대에는 군사적 학살뿐 아니라 사회적 혼란, 경제 위기, 정치적 반란이 목격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휩싸인 중간계급은 남아 있는 비전의 힘을 모두 상실했고, 더 이상 역사적 발전을 이룰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 한때 혁명적 세력이었던 것이 반동적 세력으로 변하고 있다. 그 쇠퇴는 역사적 경쟁자인 노동계급 운동이 이제 현장에 등장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가속화된다. 사회의 전반적인 논리를 파악할 수 있는 사회계급만이 혁명적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는 중간계급이 전성기에 달성했던 폭넓은 사회적 비전을 노동계급이 계승해야 함을 의미한다."(167-8)


3.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19세기 후반의 자연주의는 모든 현상이 영적, 초자연적 또는 심리학적 설명에 의존할 필요 없이 자연적이거나 과학적 용어로 설명된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한마디로 물질주의의 한 형태이다. 사실, 근대 유럽 역사에서 때로 두 용어는 동의어였다. 사실주의가 예술적 스타일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자연주의는 자의식적인 운동에 가깝다." "작가는 주변 환경을 관찰하는 준과학적 관찰자로서 냉정하고 극도로 객관주의적인 스타일로 인물과 사건을 조사한다. 작가를 매료시키는 것은 인간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물질적·심리적·생리학적 법칙이다. 사실주의 작가들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과 감정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의 영웅이나 여주인공과 은밀하게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자연주의는 이것을 낭만적인 방종의 한 형태로 일축했다. 자연주의는 엄격한 비인격성이 핵심이다. 예술이 과학을 이길 수 없다면 적어도 과학에 합류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178-9)


"(에밀 졸라와 그의 동료들의 작품에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와 가난한 농민이 중앙 무대로 이동함에 따라 소설의 전체 계급 기반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행위자라기보다는 연구의 대상으로 더 많이 제시된다. 사회 다윈주의와 유전 이론의 영향을 받은 일부 박물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문명화된 우월한 사람들보다 동물의 왕국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 자연주의의 천박함이 중간계급의 독자들에게 혐오스럽다면, 일반 사람들에 대한 그 비하적인 태도는 오히려 더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임상적인 것과 선정적인 것을 혼합한 이 소설 브랜드는 포르노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소설은 냉철함과 추악함을 동시에 지닌 예술이다." "소설은 더 이상 예의 바르고 도덕적으로 교화적인 일이 아니다. 사실이란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기형적이거나 병적인 것이다. 가치는 문학적 자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것을 표현하는 꼼꼼한 수단에 있다. 그렇다면 자연주의는 형식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186-7)


V. 사실주의와 평범한 삶


1. 평범함의 가치 


"기독교의 〈평범한 삶에 대한 확언〉을 말하는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군사적 용맹과 귀족적 명예가 있었던 중세 시대에서 근대 중간계급의 개신교나 청교도 윤리로의 전환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테일러는 개신교 윤리가 〈좋은 삶의 중심을 특별한 범위의 상위 활동에서 벗어나 '삶' 그 자체로 옮겨 놓는다. 이제 자기 충족적인 인간 생활은 한편으로는 노동과 생산의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결혼과 가정 생활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혈통과 귀족에 대한 개념은 시민과 직업에 자리를 내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일의 영역, 가정생활, 물질적 획득이다. 노동은 이전에 거부되었던 존엄성을 부여받고, 결혼한 사랑은 성적인 탈선과 낭만적인 불화보다 더 높이 평가된다. 근대 사실주의 소설이 탄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창조주의 눈에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기 때문에 공격적인 개인주의에는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와 평등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주의적 글쓰기에 반영된다."(201-3)


2. 아우어바흐의 사실주의적 비전 


"아우어바흐의 관점에서 사실주의는 구체적인 문학 양식이다. 구체적이고, 유동적이며, 정확하게 특정되고, 다양하고, 개방적이며, 사회적으로 포용적이며, 역사적 사고를 갖고, 포퓰리즘적 정신을 갖고 있으며, 개인을 존중하고 추상적인 생각과 경직된 프로그램을 불신한다. 하지만 특정 시대나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창세기부터 에밀 졸라까지 쭉 등장한다." "아우어바흐가 자신의 책 《미메시스》를 썼을 때, 대중 민주주의의 해체는 나치 정권의 두드러진 특징이었고, 따라서 유대계 독일인인 아우어바흐는 튀르키예로 피신했다. 그가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영웅적·계급적·신화적 문학은 나치즘의 예술과 이데올로기에 반영되어 있다. 이와 대조적인 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반파시스트적인 형태로 보일 것이었다. 아우어바흐가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망명 중에 쓴 《미메시스》는 비판적 사실주의에 대한 루카치의 찬미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은밀한 비판인 것처럼 파시즘에 대한 암호화된 대응이다."(212-3)


3. 사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과거는 현재가 약탈할 스타일과 모드의 레퍼토리로 전환되고, 변화된 미래에 대한 희망은 헛된 비전이 된다. 미래는 현재와 매우 비슷할 것이다. 단지 더 매력적인 옵션들이 배열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고려할 때, 사실주의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끈질긴 예술 형식일 것이다. 아방가르드주의자들이 끊임없이 훈계하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보려는, 보기 흉한 열망은 쉽게 나르시시즘의 병리로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얼굴만이 아니다. 대량 학살, 전쟁, 질병, 빈곤, 대규모 이주, 점진적인 자연의 죽음으로 뒤덮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요구 중 하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다. 픽션·다큐멘터리·보도 등 사실주의의 임무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인지 지도'를 제공하고 대부분의 다른 형태의 글로벌 지식보다 더 즐겁게 이를 수행하는 것이다."(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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