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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서사시 -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까지> 근대 문학 속의 세계체제 읽기
프랑코 모레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서론
"다윈주의야말로 형태적 불완전성을 진화적 경로의 증거로 본다. 다시 말해 다윈에게서 역사는 완전히 독립적인 두 경로, 즉 무작위적인 변이(random variation)와 필연적인 선택(necessary selection)의 뒤엉킴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수사적 혁신'과 '사회적 선택'의 뒤엉킴인데, 전자는 우연의 결과로 나타나는 반면 후자는 필연성의 산물이다. 이 책에서 등장하게 될 문학사는 둘로 나누어진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통상적인 문학사보다는 훨씬 덜 위압적이지만 아마 훨씬 더 흥미로울 것이다. 불확실하고 불연속적이며 기이함과 의문 부호로 가득 찰 것이다. 공평을 기하자면 켄타우로스적 비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반쯤은 '어떻게(how)'를 다룰 줄 아는 형식주의적 비평가이고 또 반쯤은 '왜(why)'를 다룰 줄 아는 사회학적 비평가 말이다. 주의하라(Nota bene). 꼭 반반이다. 합리적인 타협의 여지는 없다. 오히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같다. 그것을 성취하고자 나는 어떤 약이든지 들이켜왔던 셈이다."(24-5)
1부 <파우스트>와 19세기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최초의 비극적 핵심으로 고안되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그는 이 시가 서사시로 확장되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확장은 괴테가 처음에 구상했던 바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파우스트』 2부는 우연의 결과이다." "작품에 대한 온갖 구상과 질서 잡힌 시대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의 작가는 기술자(engineer)가 아니라 '브리콜라주 제작자'이다. 서사시를 구상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합리적으로 준비하기보다 우연히 강력한 서사시적 잠재력을 가진 인물을 손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십 년 동안 망설인 끝에 결국 그는 서사시를 내놓게 되었다. 지배적인 역사학적 모델과 관련해 볼 때 여기서 수단과 목적 간의 관계는 정확히 역전된다. 도구들, 즉 구체적인 기교적(technique) 가능성들이 전부이며 기획, 이데올로기, 시학(poetics)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약점이 아니다. 변화는 계획되는 것이 아니다."(42-4)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맺는 이유는 그에게 유혹당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의 첫 번째 희생물인) 마르가레타처럼, 마르가레타 이전에─그리고 실제로 마르가레타보다 훨씬 더 고약하게, 왜냐하면 메피스토펠레스를 부추겨 파우스트를 유혹하게 한 것은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무엇보다 먼저 마음속으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간의 동의가 아니라 '적대성'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따라서 과연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편인지 아니면 최악의 적수인지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작품의 구성상의 이중성으로서, 이것은 파우스트가 자기 행동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사악한 동반자에게 전가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덕분에 근대적 서사시에, 실로 서구 문화 전체에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 전략이 탄생하게 된다. 즉 부정과 거부의 전략이 그것으로 폭력을 자기 외부로 투사해버리는 것이다. 괴테의 탁월하지만 무시무시한 발견, 즉 결백의 수사학이다."(50-2)
"『파우스트』 2부의 중심인물인 (트로이 전쟁의) 헬레나는 한 명의 살아 있는 여인이 아니라 파우스트가 손쉽게 취할수 있는 하나의 사물이다. 이를 배경으로 파우스트의 도착(倒錯)은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갖게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정복 행위가 아니라 '야만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행위'가 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아주 효율적인 전도(顚倒)로서, 당연히 이것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식민지 시대의 상상을 담고 있는 모든 명작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로빈슨 크루소는 프라이데이를 다른 부족의 식인주의로부터 구하고, 로드 짐은 도라민 마을을 알리의 잔혹한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파스파르투와 필리어스포그는 아우다를 죽은 사람의 아내를 함께 순장시키는 '야만적인 관습'으로부터 구해준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를 제외한) 이 모든 작품들이 서구인과 원주민 여인의 결혼을 놓고 숙고한다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혼하면 정복은 '동의'가 되고, 그리하여 완벽하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54-5)
"서사시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바흐친이 보기에 서사시에서 과거는 〈어떠한 상대성도 결여하고 있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괴테의 태도는 그렇지 않다. 『파우스트』는 고대를 '조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근대 세계의 정신적 안녕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을 무력화한다." "과거로부터 새로운 것의 창조······. 브라콜라주에서처럼 오래된 재료들은 새롭게 가공된다. 그 결과 뭔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동시에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박람회와 고고학의 중간, 풍자적 환원과 학술적 진지함의 중간치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역사적 위치로부터 해방된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들과 양식들이 『파우스트』에서 공존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에른스트 블로흐가 '비동시대성'이라고 부르는 역설적 사태, 즉 많은 개인들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문화적 또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사태의 탁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73-7)
"블로흐는 비동시대성이 세계 체제 안에서의 특수한 위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비교적 등질적인 중심 국가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것은 반주변부 국가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이루는데, 이 국가들에서는 중심부에서와 반대로 '복합 발전'이 디배적이다. 그리고 근대적 서사시 형식의 명작들 대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국가들에서이다. 여전히 분열되어 있던 괴테 시대(그리고 바그너가 초기에 활동하던 시대)의 독일, 멜빌의 아메리카(피쿼드 호, 즉 피에 굶주린 사냥, 산업 생산), 조이스의 아일랜드(식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령자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지역들." "이제부터 소설에게 요구되는 민족 정체성의 구성은 이리하여 서사시의 경우 이보다 훨씬 더 큰 지리적 야망, 즉 전 지구적 야망─『파우스트』가 이것에 대한 부동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으로 대체된다. 세계 체제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89-90)
"메피스토펠레스의 기원 자체는 우연적인 것으로, 결백의 수사학은 아무런 의식적 기획 없이 크건 작건 되는 대로 그의 모습을 조작함으로써 비로소 형성된다. 비동시대성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첫 번째 순간에 괴테는 그저 서사시 형식과 씨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형식의 관습이 요구하는 대로 그는 파우스트가 과거의 거대한 세계 속으로 전진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수사학적인)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는데, 괴테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를 갖고 놀이를 하며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기들이 만나고 뒤섞이는 기이한 장면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가 이어지는데, 여기서 이 '브리콜라주' 작품은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역사적 경험, 즉 서양이 새로운 세계 지배를 다룰 수 있다(위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형식이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낸 셈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순전히 형식의 동력에서 나온 결과였다."(96)
"『파우스트』가 막 시작되는 부분에서 짤막한 설전이 오가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는 날카로운 설전은 근대 세계에서의 백과사전적 야심의 어려움을 요약하고 있다.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을/내 내면의 자아로 음미해보고〉 싶은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는 냉소적으로 개인과 인류 사이에는 이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고 대답한다." "플로베르에게서는 총체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피상성을 택하는 것이 답이다─경박한 믿음과 어리석음 말이다. 백과사전적인 것은 천치 같은 것과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인 통계적 방법을 적용한) 가상의 존재(Un être fictif)는 오직 상투어로만 말한다. 평균적 인간. 그를 중심으로 각 개인들이 왔다갔다한다." "문화의 영역에서 이것은 통상적이지 않은 생각과 독창적인 개인들이 점점 희귀해지다가 결국 사라지는 반면 〈체계는 계속 평형 상태를 왔다갔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16-9)
이행: <니벨룽겐의 반지>
"바그너적 우주는 대여섯 개의 서로 다른 종족들이 진정 거대한 심연에 의해 갈라진 4원소들 사이에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거대한 세계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지』에서 중요한 장소들은 약 10군데 정도를 헤아리며 비참한 운명의 힘에 휩싸이는 (소수의) 주요 등장인물들에게만 매력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좁은 세계이기도 하다. 플롯은 커다란 소용돌이 같다. 그 안에 들어간 모든 것은 점점 더 조여들고, 깊게 들어가고, 가차없이 빙빙 도는 원들 속에 점점 더 휩쓸려들어가 결국 하나의 핵심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진정 여기서는 괴테 식의 일탈을 위한 여지는 전혀 없으며, 실로 운명의 손길은 멀리 보이는 만큼 더 확고하다." "네다섯 번 만의 전환 끝에 태초의 시간에서 최후의 시대까지 나가는 이야기. 이것보더 더 『파우스트』와 다른 구조를 상상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압축이라는 이념만큼 바그너의 시학에 핵심적인 것도 없는 듯하다."(167-9)
"역사가 분리해놓은 것들, 즉 지식, 윤리, 종교, 예술을, 내러티브, 드라마, 서정시를, 문학, 음악, 회화를 하나로 재통합하려는 욕망은 근대의 서사시 전체의 기획이자 문제이다. 여기에 바그너 본인이 추가한 것이라고는 니체가 그를 비난한 대로 '후안무치함' 뿐이다. 그는 불굴의 결의를 갖고 자기 작품이 전 지구적 과제를 갖고 있다고 곧이곧대로 믿는다. 괴테는 신화를 갖고 논다. 조이스는 어리석은 제자들이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도록 부추긴다. 엘리엇은 과연 타로(Tarot) 카드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바그너는 아니다. 바그너는 모든 것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진지하다." "바그너의 야심은 행동과 현실의 모든 현상을 '단 하나의 원리'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마침내 그가 발견해낸 비밀스러운 궁극 원인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압축할 것을 촉구하는 그의 입장은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더 이상 (오직)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마술, 심지어 종교적 원리가 된다."(173-4)
"『반지』의 사회학에 도달하려면 권력의 극단적인 집중과 이것의 총체적인 집행 불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고려해야만 할 것 같다. 여기 세계가 있다, 여기 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무기가 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반지는 결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플롯을 기준으로 본다면 바그너의 이 서사시적 대계는 붕괴 이야기, 즉 우주적 실패의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이 서사시적 대계의 결론은 없어서는 안 되는 동시에 자의적인 행위가 된다. 여기서는 더 이상 철학도, 종교도, 우주적 범위에 걸친 메시지도 찾을 수 없다. 브륀힐데는 더 이상 무대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에게 말하지 않으며 말(馬)에게 말한다. 물론 이 서사시적 대계는 끝나야 하지만─바그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피날레'에서 이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말라고. 네 마디의 진부한 말만 하고 마지막 말은 음악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177-8, 184-5)
"상대적으로 통일된 상태로 태어났지만 서서히 드라마적 구실(pretext)과 자율적인 음악적 우주로 나뉘는 구조. 이것은 형식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모든 차원에서 일관되고 동시적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조각씩, 서로 다른 비율로, 심지어 다른 방향으로 일어난다. 다시 말해 분화(differentiation)로서, 즉 드라마적 플롯이 전체(ensemble)의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해 '단순하게 남아 있는' 작품의 역사로 진화한다. 따라서 음악의 결은 '복잡성을 향해 진화하며', 획기적인 실험들에 나선다. 야누스 같은 구조이다. 절반은 '케케묵은' 것이며 절반은 '선구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비동시대성이 거의 『반지』를 두 개, 즉 '신화적' 내용과 '미래'의 음악으로 쪼갤 정도로 강력하게 작동한다. 불레즈의 말을 빌리자면 〈낭만주의와 구조─통상 함께 묶어서 사용되지는 않는 두 단어〉(괴벨스의 '강철처럼 냉혹한 낭만주의' 같은 표현)로 또는 반동과 혁명으로 표현할 수 있다."(186-7)
2부 <율리시즈>와 20세기
"절정기를 구가하는 유럽의 자본주의는 진정 서사시적 차원의 도시들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세계의 축도(縮圖)들 속으로 지구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극히 다양한 제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이것들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수많은 자극들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처럼 전례 없는 풍요는 '대도시적 유형'을 '신경에 대한 자극'에 종속시킴으로써 개인의 안녕과 심지어 정신 건강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과연 의식의 흐름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긴장된 상황에 맞서기 위한 한 방법(아마 가장 성공적인)이었다. 이것은 위기의 징후, 즉 폭격당하고, 분열되고, 어려움에 처한 '에고(ego)'의 징후로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의식의 흐름은 서서히 수많은 자극들에 대항해서 그것들을 포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즉 대도시에 형식을 부여하고 거주자들에게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흐름이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기교가 된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196-7)
"더블린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율리시즈』의 주인공은 광고와 의식의 흐름 사이에서 새로운 기법(art)을 배우고 있다. 보는 기법 그리고 이와 함께 보지 않은 기법도. 블룸은 모든 것을 알아채지만 어느 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힐끗 보고, 또 힐끗 보고 할 뿐이다. 대도시적인 방식이다. 즉 거대한 도시에 집중된 거대한 세계에 압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짐멜은 뇌라고 대답한다. 지성의 삶이라고. 하지만 조이스는 그 반대라는 것을 암시한다. '점증하는 의식'이 아니라 '점증하는 무심함'이라고. 그것은 실제로 점점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블룸은 아마 세계 문학에서 가장 무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원래의 기능까지 바꾼다. 그리하여 결여와 부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도구가 된다. 이것은 배전반처럼 복잡한 정신의 회로들을 동시에 가동시키며, 블룸이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자극적인 것을 골라낼 수 있게 해준다."(215-6)
"모든 것이 익숙하며, 지상에 속해 있으며 한낮의 빛에 잠겨 있다. 블룸의 마음속에서는, 심지어는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도─아니 '정확히' 정신이 산만해서, 따라서 그만큼 수용적이기 때문에─이미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 즉 '엄청나게 많은 사물들'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수동성은 단순히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불레즈가 구스타프 말러, 즉 어느 작곡가보다 조이스를 닮은 그의 교향곡은 길게 이어지는 산책과 같다고 말하곤 하던 말러를 두고 이야기하듯이─'풍요로워지는 수동성'이다." "순진한 수동성, 즉 서구적 대도시의 풍요로움을 주어진 것으로 바라보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수동성, 근대의 서사시는 마침내 그것의 주인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즉각 눈으로 볼 수 있는, 괴테의 시대부터 찾아온 총체성을 발견했다. '소비'의 세계─진정 '거대한' 세계, 그리하여 『파우스트』의 세기 다음에 『율리시즈』의 세기가 시작된다."(221-4)
"의미는 다름 아니라 배제의 결과이다. 실제로 의식의 흐름에서는 배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장이 주(主)문장이며, 모든 것이 전경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전경에 있는 곳에서는 어떤 것도, 어떤 '그래'도 결코 가까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포괄적인 지각이지만 초점을 갖지는 않는다. 오직 사물들 위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조다, 그러면 의미의 부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간단하다─이것은 블룸이 살아가는 것을 도와준다. '대도시'에서 사는 것을 도와준다. 분명 더 많은 명민함을─그리고 동시에 더 많은 우매함을 요구하는 대도시에서 말이다. 어빙 고프먼은 이를 '초점을 갖지 않는 상호 작용', 즉 '예의바른 무심함'이라고 부른다. 중립성, 불투명성, 그리고 감정적 평범함은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로를 제거하지 않고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 수 있게 해준다. 만약 6월의 그 날에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다면 블룸의 머리는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그 결과 독자들의 머리도."(243-4)
"『율리시즈』의 시작 부분이 의식의 흐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처음에는 스티븐에게, 그런 다음에는 블룸에게 적용되는 이 장치는 폭과 깊이를 더해가며, 6장까지는 누가 봐도 명백한 우위를 유지한다. 아마 7장까지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7장부터는 더 이상 의식의 흐름만 독주할 수 없다. 점점 강조점이 옮겨가면서 이것은 다양한 종류의 다성적 장치들에 의해 한편으로 밀려난다." "만약 조이스가 비평적 전설의 '위대한 계획자'였다면 아마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 『율리시즈』로부터 별다른 실수나 오류 없이 즉각 두 번째 『율리시즈』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기교의 전환은 계획될 수 없다. 즉 형태의 혁신은 우발적인 실험의 산물로서, 이러한 실험은 올바른 길을 찾을 때까지 오랫동안 암중모색의 방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정확한 길이 아니라 다른 것들보다 더 나은 길일 뿐이다."(284-7)
"자유롭게. 하지만 급작스럽지는 않게.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서 도약이란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기교들은 결코 사전에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단조(短調)로, 약간은 되는 대로, 흔히 주변부에서 시작된다. 『파우스트』의 다성성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마르가레타의 비극으로부터 이탈하는 순간(『발푸르기스의 밤』)부터 시작된다. 또는 괴테 시의 알레고리처럼, 이것은 궁중의 여흥을 위한 것일 뿐 괴테는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는 한 세기가 지난 뒤에 반복되었다. 먼저 의식의 흐름은 그저 어떤 내러티브적 상황에 대한 정서적 부속물이었다. 어떤 (우연적) 결과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가 굳어져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기교가 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이러한 기교 안에 존재하는 아직 채 소화되지 않은 언어가 굳어져─결과의 결과─모더니즘적인 다성성을 낳는다."(292-3)
"『율리시즈』를 제외하면 전체주의적 유혹─이것은 근대의 서사시가 시작된 맨 처음부터 존재했다(늙은 파우스트, 에이허브 선장의 독재, 배신자 쥘리앵, 전능한 힘을 가진 반지)─은 실제로 모더니즘의 세계 텍스트들에서 결코 부재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복잡성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고 때로는 잔혹한 축소를 가져왔다." "정말 그렇다. 전체주의적인 유혹은 계속 증가해온 복잡성에 대한 반발로서 모더니즘적 세계 텍스트에 거의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배적인 존재는 될 수 없는 그저 하나의 유혹일 뿐이다." "그리하여 결국 스스로 타협책을 만들어낸다. 『황무지』의 사례가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 모더니즘이 다성적인 복잡성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통제되고 질서를 부여받는다.'" "이것은 이질적이지만 강제적으로 통합된 현실의 알레고리이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추상적인─아마 가장 충실한─형태의 '총체성'인 셈이다."(350-3)
에필로그: <백 년의 고독>
"모더니즘의 발을 다시 땅 위에 딛게 하라. 그런 다음에는 모더니즘과 대중 문화 사이의 '거대한 분열'을 치유하라. 『백 년의 고독』이 나온 60년대라면 사람들은 이것을 '이야기의 복원'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것은 유럽과는 전혀 다른 문학적 진화의 산물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3세기 이전에 이단 심문관들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럽 소설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리얼리즘 이전 단계의 서사 형식들(신화, 전설, 기사도 로망스)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일종의 연대기(cronica) 같은 잡종 형식들도 남았는데, 이러한 형식에서는 꾸며낸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경계선이 아주 불분명해진다." "예외적인 것, 기이한 것, 경이로운 것, 한마디로 말해 모험이 여전히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이다. 이것은 그 의심 많은 수도사들이 의도했던 세계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세상에 임하시는 방식은 무한하며, 진화의 방식은 한층 더 그러하다."(361-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이 소설이 미래로부터 과거를 거쳐 다시 미래로 한 바퀴 원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원의 움직임은 외부의 지리적 현실 때문에 촉발된다. 이 소설이 이중적인 예변법으로 시작하는 것은 집시들이 거래와 먼 곳에서 온 군대 때문이다. 이처럼 마콘도의 역사는 끊임없이 다른 역사들, 즉 유럽, 아시아, '콜롬비아',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미국에서 시작된 과정에 의해 교차되고 굴절된다." "요사의 소설에 나오는 한 인물은 모든 문이 열렸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문을 닫기 시작하는데, 왜 닫을까? 『백 년의 고독』은 세계 체제의 압력이 당신의 나라에서 좀 더 완벽하고, 따라서 좀 더 확고하게 통합을 강요할 때라고 대답한다. 발전 가능성은 여러 가지지만 길은 정해져 있다. 흑마술(Black magic)의 시대. 더 이상 온갖 기이한 결합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저질러진 온갖 범죄의 엄청난 규모가 '믿기지 않는' 시대."(372-5)
# 예변법. 반대론을 짐작하고 미리 반박해두는 방법
"마콘도는 정말 이상한 곳이다. 광인들의 도시로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언어만큼은 누구나 똑같다. 화자의 비인칭적인 목소리가 텍스트 공간의 거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직접 화법은 한 페이지에 두세 문장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짧아서 별다른 목소리라고 할 수도 없다. 바로 여기서 실제로 모더니즘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율리시즈』, 즉 비(非)이야기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문체로 이야기하는 『율리시즈』를 생각해보라. 온갖 문제를 갖고 있지만 아무튼 다성성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이제 『백 년의 고독』을 생각해보자. 여기서는 비(非)문체로 끝도 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소설이 아무리 멋지더라도 결국 독백주의가 진정한 승리를 거두고 있다. 다성성에서 독백주의로. 19세기에, 즉 괴테에서 플로베르로 이행할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다시 20세기에, 조이스에서 마르케스로 이동하면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3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