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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평점 :
1. 비극은 죽었는가
모든 예술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지만, 비극은 실제로 정치적 제도로서 삶을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그 자체로 정치적 제도일 뿐 아니라,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와 소포클레스의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등 그 시대 비극 두 편은 공적 제도의 건립 또는 확보와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 축제의 한 부분으로 공연되는 비극적 드라마의 자금을 도시국가가 지명하는 한 개인이 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합창단’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도시국가의 공적 의무였다. 국가는 최고 행정관의 지휘를 받아 이 절차 전반을 감독했으며, 공연 대본을 서고에 보관했다. 배우는 폴리스polis에서 보수를 받았고, 국가는 또 가난해서 돈을 낼 수 없는 시민의 입장료를 내줄 자금을 확보했다. 대회의 심사위원은 시민단이 선출했고 이들은 틀림없이 법정 배심원으로서 또 정치 집회의 구성원으로서 익숙하게 발휘하던 비판적 감각으로 극적 공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12)
정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 비극에는 이중적인 역할이 있는데, 사회제도를 승인하는 동시에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예술은 내용을 통해 사회질서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관객에게 심리적 안전밸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무해한 환상을 육성하여 자신이 사는 체제의 더 불미스러운 측면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은 비극을 무해한 환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잘못하면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는 어떤 감정(연민과 공포)을 엄격하게 통제된 양만 먹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비극은 간단히 말해 정치적 동종요법의 한 형태다. 비극의 비판적 역할이라는 측면을 볼 때, 숭배받는 종교적 축제의 일부를 이루는 공식적인 정치적 사건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어두운 서브텍스트에―아무리 신중하게 신화적 과거 속에 집어넣었다고는 해도 광기, 존속살인, 근친상간, 영아살해 등에―그렇게 대담한 빛을 비출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13)
고전적 관점에서 실생활의 참사는 날것 그대로의 고난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극적이지 않다. 그런 고난이 예술에 의해 형태가 잡히고 거리가 두어져 어떤 더 깊은 의미가 풀려나올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본격적으로 비극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비극적 예술은 견딜 수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그 견딜 수 없는 것에 관해 사유하고 그것을 기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원인을 조사하고 피해자를 애도하고 그 경험을 일상생활로 흡수하고 그 공포에 의지하여 우리 자신의 약점이나 필멸성과 마주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핵심에서 어떤 잠정적인 긍정의 순간을 발견하도록 권유한다. 이 긍정이란 우리가 보았듯이 그저 예술 자체가 계속 가능하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서 문제는 그런 것들은 실생활의 재앙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재앙─가령, 2001년 미국 세계무역센터 공격 같은─이 오로지 고난일 뿐 다른 것은 아닌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17)
전통적 관점에서 비극적 예술은 신화, 섭리, 또 신들이라는 부담스러운 존재를 상실한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 유령이 되느냐 하는 것은 논란이 있는 문제다. 마크 트웨인과는 달리 비극은 하나가 아니라 일련의 한 무더기의 때 이른 사망 기사의 주인공이었다(마크 트웨인 생전에 사망 기사가 잘못 보도된 적이 있다). 헤겔은 근대에 이르면 예술 그 자체가 생명이 다하며, 비극적 드라마가 계속 무대에 올라가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고대인의 세계 역사적 차원이 사라진 열등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비극적 드라마는 그런 중대한 쟁점으로부터 윤리와 심리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런 쇠퇴는 이미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부터 나타났다. 니체에게 비극은 회의적인 에우리피데스와 지적인 소크라테스의 등장과 더불어 유아기에 요람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운명이라는 관념이 고대 비극의 핵심이라고 보는데, 근대에는 설득력 있는 등가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
프리드리히 셸링에게 비극적 행동은 내면화되고 심리화되고 개인화된 것이며, 이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자신이 충실하게 따른다고 믿는 고대 그리스 연극과 모순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동의 문제인 것이 셸링에게는 의식의 문제다. 비극적 과정 전체가 역사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내적 상태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갈등과 반역은 대체로 내적 문제이며, 주인공의 외롭고 우월한 영혼은 갈가리 찢기지만 결국 온전한 전체로 찬란하게 복원된다. 운명이라는 관념이 근대의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에 패하여 사라지고 나서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예술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헤겔이 그의 철학적 적수 프리드리히 니체와 공유하는 편견인데, 니체가 보기에 현대 비극론은 이제 공적 영역의 예술에서 물러나 개인화되고 내면으로 치달았다. 니체가 비극적 문화의 소생에 건 희망은 그 영역의 갱신에 달려 있는데, 여기에서는 공유되는 신화의 등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25)
근대성은 비극을 망치기는커녕 생명을 새로 연장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잠재적인 비극적 주인공의 대오를 한없이 부풀려 놓았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누구라도 거리에서 뽑아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팍팍한 장소에 갖다 놓기만 하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 리타 펠스키Rita Felski가 말하듯이 “고난에 대한 이런 민주화된 비전에서는 은행 직원이나 상점 여직원의 영혼도 중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힘들이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전장이 된다.” 호라티우스는 시인들에게 신이 평민의 악센트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조언하는데, 비극적 영웅도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근대 영웅들로 오면서 이런 속물주의를 치워 버렸다. 계몽주의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지위, 성격, 성별 또는 민족적 기원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간 종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귀중하다는 마음을 흔드는 명제(기독교가 오래전부터 예고하던 명제)와 마주하게 된다. 26)
근대성이 비극을 좌절시키기보다는 촉진할 수 있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이성의 한계, 한때는 자주적이었던 인간 주체의 연약함과 자기 불투명성, 통제 불가능한 수수께끼 같은 힘들에 노출된 상황, 힘과 자율성에 가해지는 제약, 인간의 행복에 완전히 무관심해 보이는 익명의 ‘타자’ 안에서 찾아야 하는 기원, 다원적 문화 안에서 선善들의 불가피한 갈등, 인간이 주는 피해가 장티푸스처럼 퍼질 수 있는 사회질서의 복잡한 밀도를 새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된 행성에 함께 묶여 있기 때문에 원죄의 감각―우리가 무고하지만 죄를 지은 자들로서 이 빽빽한 연결망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복귀하고 있다. 어떤 역사적 시기도 근대처럼 인간의 힘을 풍부하게 풀어놓은 적이 없으며, 따라서 어떤 시기도 자신이 풀어놓은 힘에 정복당할 위험이 이렇게 컸던 적이 없다. 27)
2. 근친상간과 산술
오래전부터 『오이디푸스 왕Oedipus Tyrannus』에는 산술算術과 관련된 서브텍스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마르게 하나는 하나 이상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오이디푸스는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이자 형제, 범죄자이자 입법자, 왕이자 거지, 원주민이자 이방인, 독이자 해독제, 인간이자 괴물, 유죄이자 무죄인 자로서, 또 맹목적이면서 명민하고, 거룩하면서 저주를 받고, 마음은 빠르면서 발은 느리고,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판독 불가능한 수수께끼로서 그 자신이 바로 하나 이상인 하나다. 모든 남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상의 후손이며, 너무 많은 섬세한 가닥으로 짜여 있어 사실상 읽어 낼 수 없는 텍스트다. 어쨌든 소포클레스의 드라마를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다수성이 자비로운 것은 아니며, 모든 혼종성이 천사 같은 것도 아니고, 모든 정체성 주장이 계몽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는 늘 어느 정도 연기가 따른다. 32)
오이디푸스는 또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인식과 ‘타자’의 관리하에 있는 자기 정체성의 다른 형태 사이에서 나뉘어 있다. 그 관점에서 보는 자신(근친상간을 저지른 친부 살해자)은 자신이 보는 자신이 아니며, 그가 자기도 모르게 하는 모호한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느 인간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그의 의식적인 의도가 아니라 ‘타자’(언어, 친족관계, 사회관계로 이루어지는 장場 전체) 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에고ego의 진실은 주체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만하게 자기 결정을 하는 이 인물 내부에서 뭔가 이질적인 것이 행동하고 말을 하며, 이것이 그의 말 속에서, 사실 그의 이름 속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서브텍스트로 집요하게 남아, 그의 상상의 정체성을 탈중심화하고 마침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결코 단순하게 하나일 수 없다.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만날 때, 그 자아는 낯선 존재로서 그와 대면한다. 33)
근친상간 금기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섹슈얼리티는 그런 제약에 순응하려 하지 않는다. 쌍둥이의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성적 재생산에서는 1+1=1이지만, 여성 파트너가 남편에게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손자에게는 어머니이자 할머니라는 네 가지 역할을 합하고, 남성 파트너 또한 여자의 아들이자 남편이고 자식의 아버지이자 형제로서 비슷하게 여러 역할을 융합하고 있는 성적 재생산 행동에 맞는 공식은 무엇일까? 따라서 어떤 것이 그 자체인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근친상간은 특별히 매혹적인 아이러니의 사례이며, 이런저런 종류의 아이러니는 소포클레스 걸작의 모든 조직에 스며들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탈은 규범적 상태의 조건이다―이것은 문명화된 사회가 폭력적 기원으로부터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오이디푸스도 다친 발에서 출발했다. 애초에 상징적 질서를 만들어 내는 욕망은 늘 그 질서를 제자리에 붙잡아 두는 수칙을 무시할 수 있다. 33-4)
결국 가장 중요한 산술적 계산은 하나가 하나 이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영이 영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오직 무無가 될 때만 뭔가가 될 수 있다―그리고 ‘창조’의 교리가 암시하듯이 뭔가와 무 사이의 차이는 모든 것에서 가장 근본적 차이다. “나는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중단한 시간에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그는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묻는다. 리어가 코딜리아에게 경고하듯이 무에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 희곡 또한 산술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으며 더, 덜, 뭔가, 과잉, 전부, 무를 미묘한 차이로 표현해 낸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그저 하찮은 사람, 스스로 추방한 거지 같은 존재로 끝난다. 그러나 그는 눈이 멀 때에만 진실을 파악할 것이며, 인간성이 벗겨져 나갈 때에만 진정으로 인간이 될 것이며, 궁핍해질 때에만 들어 올려질 것이다. 그는 이전의 자신보다 못한 존재가 되면서 더 큰 존재가 되는 데 성공한다. 39)
3. 비극적 이행
찰스 시걸은 『오이디푸스 왕』을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사고로부터 더 추상적이고 담론적 사고로 이동하던 5세기 아테네 계몽주의의 문건으로 본다. 블레어 혹스비는 그리스 비극이 그렇게 단명한 문화적 형성물이라면 그것은 “이 비극이 종교적인 사고 습관이 이울면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힘을 소유하고 있고 책임이라는 법적 개념이 흐름을 타고는 있지만 아직은 견고하지 않은 문화적 이행의 순간에만 번창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장 피에르 베르낭과 피에르 비달 나케는 비극적 영웅은 일반적으로 이전의 신화적 시대 출신이며, 이제는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비극은 신화를 폴리스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시작된다―물론 쌍방향 운동에 따라 그런 신화가 또 자신을 검토하려 드는 합리성의 한계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영웅적·종교적 가치는 도시국가의 법적·윤리적·정치적 판단에 종속되는데, 도시국가는 권위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신화적 과거와 단절할 필요가 있다. 42)
그렇다 해도 사람들은 이제 비판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아직 자율적인 칸트적 주체로 진화하지는 못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서 인간은 자신의 두 발로 서지만, 그것은 기고 절뚝거리는 사이의 짧은 막간 동안만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 주인 노릇을 하지만 오직 의존이라는 더 깊은 맥락 안에서일 뿐이다. 바로 이런 이중 결정―자기 행동의 원천인 자아와 그 자아를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무녀 같은 ‘타자’ 사이의 긴장―에서 상당한 비극적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타자’에게는 타자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관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는 통일된 영토가 아니다. 올림포스산에서 다투는 신들이 단일한 통치권을 구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타자’로부터 자신을 돌려받는데, 이때 자신은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행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정신의 영토 밖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애초에 우리를 인지 주체로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3)
유구한 비극적 리듬에서 주체 자아는 객체 자아―눈멀고 약하고 초라하고 상처받기 쉬운―의 기초 위에서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영의 진정한 고귀함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스핑크스에게는 인간의 머리가 있지만, 동물의 몸에 통합된 머리다. 정신은 오직 연약한 육신에 매달림으로써만 자신을 뛰어넘어 무가 되어 버리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의식이 유아기에 신체적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는 것, 모든 인간에게 진실인 이것은 사실에서 가치로 바뀐다. 우리가 몸이라는 기초에서 올라와 자아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서사의 산물이다. 『안티고네』 합창단이 노래하듯이 인간은 훌륭한 동시에 죄가 많다―어떤 자유주의적 지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섞여 있고 다면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순의 화신이며 모든 논리에 저항하고 그 자신의 합리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수께끼다. 따라서 비극은 모든 이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한 형식이다. 인간에 대한 변증법적 지식의 모델이다. 45)
고대 그리스인의 감각만큼이나 매혹적인 질서 감각을 그것이 무너지면서 나올 수 있는 재앙과 함께 담아내지만, 안정성을 향한 이런 뜨거운 마음을 개인의 풍부하고 창의적이고 잠재적으로 파멸적인 힘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감각, 고대 아테네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날카로운 감각과 결합하는 일군의 극적인 작품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셰익스피어 비극의 성취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질서와 혼란 사이의 이런 충돌은 희곡에 담긴 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시는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문법과 논리의 규칙성에 의존하면서도 아주 풍부하고 다가多價적이어서 자신의 기초를 허물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질서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믿음은 그것을 표현하는 바로 그 언어에 의해 위태로워진다. “말 없이는 [어떤 이유reason도] 내놓을 수 없군요.” 『십이야』에서 광대는 재담을 던진다. “하지만 말이란 너무 거짓되기 때문에 그걸로 이치reason를 이야기하는 것은 싫네요.” 48)
라신의 비극에서, 뤼시앵 골드만Lucien Goldmann은 『숨은 신Le Dieu Caché』에서 주장한다, ‘신’은 세상에 현존하는 동시에 부재하는데 이것은 비극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전능한 존재’는 자신의 ‘창조물’에서 물러나 자신이 창조한 연옥 세계에 등을 돌리고 그 결과 절대적 가치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여전히 불모의 실재에 드리워져 주인공은 초월을 찾는 과정에서 세계를 거부하게 된다. 절대적 가치는 실현될 수 없지만 그 유령을 완전히 쫓아낼 수도 없다. ‘전능한 존재’는 그를 찾는 성과 없는 탐색의 형태에서만, 또는 죄의 경험에서만 계속 살아 있다. 딜레마는 ‘신’이 세계에서 물러나면서 가치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납골당 같은 ‘창조물’의 세계가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끌어안을 수도, 아니면 어떤 더 높은 영역을 위해 그것을 내칠 수도 없다. 세계에서 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하늘의 침묵이다. 49-50)
따라서 비극적 주인공은 골드만의 관점에서 보면 부재하는 ‘신’이 현존하는 곳에 살면서 세속적 맥락에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절대적 요구의 짐 때문에 비틀거리는 사람이다. 점점 합리주의적으로 바뀌는 사회질서는 그런 칙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고, 우리가 그 권위에 고개를 숙일 조건을 제공할 수도 있다. ‘신’은 불가해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손에 잡히지 않는 ‘타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히스테리 환자의 고전적인 의문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당신이 나에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는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질서와 마주한 인간 주체 전체를 대표하는 한 예가 된다. 이런 소박한 프로테스탄트의 비전에서 육은 영의 화신이 될 수 없다. 가치는 인간 주체 안에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다. 주인공은 사라진, 내재적 의미의 세계와 권력이나 욕망의 탐욕스러운 체제 사이에서 갈등하며 파괴된다. 50)
발터 베냐민은 비극의 이행적 본질에 관해서 『독일 비극적 드라마의 기원』에서 그만의 독특한 관점을 주장한다. 비극적 영웅은 자기도 모르게 신화와 신들의 구체제와 새로운 공동체 탄생 사이에 끼게 되는데, 새로운 공동체가 도입되는 데는 그의 희생적 죽음이 도움이 된다. 그는 어느 쪽 질서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결국 둘 사이에서 짓눌려 죽으며, 옛날 법과 미신의 언어와 아직 표현 불가능한 윤리―정치적 미래 담론 사이에 끼어 있다. 비극적 영웅은 희생 제물로서, 구체제의 잔재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쓰러뜨릴 수 있는 원칙을 대표하며, 그러한 존재로서 해방된 미래의 전조가 된다. 한 제도와 다른 제도 사이의 폭력적 이행 지점에 자리 잡은 영웅은 신들의 눈앞에 자신을 정당화하기를 거부하면서 운명과 결별한다. 베냐민은 비극적 주인공이 세속적 시기가 아니라 오직 메시아적 시기에만 가능한 완성을 이루지만, 실제로는 이런 양식의 시간성 속에는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영웅은 죽어야 한다고 본다. 55)
프레드릭 제임슨은 예술적 모더니즘이 아직 끝까지 가지 않은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본다. 페리 앤더슨도 모더니즘 예술의 파괴력 가운데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전근대로 남아 있는 사회에 근대성이 가하는 충격이라고 주장한다. 근대적으로 바뀌는 일이 일단 완료되면 예술 운동으로서의 모더니즘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모더니즘은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점점 “마법에서 풀려나고 있지만” 여전히 신화, 우화, 민담, 초자연적인 것이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는 문명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이런 자원을 근대성의 혐오스러운 특징으로부터 피난할 곳으로서 또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틀로서 활용할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은 아직 신성한 것의 모든 자취를 지워 버릴 만큼 견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는데, 그 신성한 것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런 역사적 과도기에 그리스 비극 작가의 지혜는 불가결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57)
4. 유익한 허위
플라톤의 이상적인 사회질서에서 통치자는 거짓말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는다. 그들은 공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플라톤 이후 많은 사상가에게 통치자가 무엇보다도 비밀로 지켜야 할 것은 개별 시민의 유래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불미스러운 기원이다. 국가는 대부분 전쟁·침략·혁명·멸절의 결과이며 이런 원초적 잘못은 영토 방어를 위해 징집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감추어야 한다. 주권의 원죄는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역사를 오염시킬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감추어야 한다. 버크의 관점에서 권력은 감각을 속여 고상한 기만과 계도적 허구를 낳아야 한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행복감과 위로다. 매슈 아널드는 소유와 국가의 기원을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유재산 몰수 시기의 폭력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정리되면 그런 폭력에 대한 속죄로 몰수 반대를 제안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고 과거는 잊히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64)
대중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다른 추문은 도덕적 가치와 사회질서의 기초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또는 존재한다 해도 그의 힘이 완전히 과대평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의 회의주의가 민중의 경건성에 다가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중은 늘 몽매해진다고 생각한 볼테르는 자기 집 하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이단성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마음 졸였다. 아일랜드 철학자 존 톨런드(놀랍게도 급진파)는 신학적 소책자 『팬시이스티콘Pantheisticon』에서 ‘이성’의 진실을 군중의 미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흄도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 학식이 있는 자와 무지한 자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만 종교의 온건한 형태, 그 자신은 믿지 않는 형태가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토머스 제퍼슨도 비록 자신은 공유하지 않지만 신에 대한 믿음은 사회의 단결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신을 믿지 않는 에드워드 기번도 대체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65)
스피노자가 보기에 우리에게 깊이 자리 잡은 환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지금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순혈 결정론자로서 그에게 자유란 상황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오는 마음의 고요apatheia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우리 주위에서 보이는 것의 필연성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우리의 힘을 늘리는 것이다. 대중이 자기 행동의 원천이 자유의지라고 잘못 아는 것은 진정한 원인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자연의 일반적 질서에 관한 한 정신은 자신, 몸, 다른 물질적 대상에 관해 “혼란스럽고 훼손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플라톤과 다른 부분은 이런 무지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대중은 미망 속에서 뒹굴 필요가 없다. 그들의 욕망은 유연하여 다시 빚을 수 있으며, 계몽된 철학자에게 맡겨지는 과제는 바로 이것이지, 정치적으로 시의적절한 허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66-7)
유럽의 지배계급이 스피노자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매도한 것은 그의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콩도르세는 자신이 이 네덜란드인 동료와 의견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체제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민중의 도덕성은 가짜 의견 위에 세워져야 하고, 계몽된 사람들은 쓸모있는 오류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을 속여도 괜찮고, 그들 자신은 부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슬로 민중을 계속 묶어두는 것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 체제에서 진실로 어떤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렇게 묻는데 이것은 이 신뢰할 수 없는 기획 전체에 대한 간결한 요약이다. 이런 점에서 콩도르세의 상속자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인데, 그는 『환각의 미래』에서 종교적 관념이 유아에게 들려주는 동화라고 일축하며, 자신의 후기 계몽주의 양식대로 그런 아편이 없어도 되는 미래를 바라본다. 에고에 미망이 어느 정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해서 거기에 마귀나 눈물을 흘리는 동정녀상에 대한 믿음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다. 67)
플라톤, 마키아벨리, 볼테르를 비롯한 편리한 허구의 조달자 대부분은 거짓말 자체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다. 기만은 안타까운 일이고 정치적으로 불가결할 때만 대중 사이에 퍼뜨려야 한다. 기만은 진리의 일반적 체제 내에서 기능하며, 그 기초를 사보타주하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다. 사실 거짓은 진리를 가장함으로써 진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니체에게 거짓은 결코 안타까운 필수품이 아닌데, 그는 진실과 거짓에 일반적으로 할당되는 가치를 역전시키려 하며,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 대한 찬가를 부를 만큼 뻔뻔스럽다. 그는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며, 그들에게 “진짜 거짓말, 진정하고 단호하고 ‘정직한’ 거짓말(그 가치에 관해서는 플라톤을 참조해야 한다)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강력할 것”이라며 비웃는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환각 없이는 살 수 없다. 거짓 판단을 포기하는 것은 삶 자체를 버린다는 뜻일 것이다. 70-1)
외양의 세계에서 현실성이 놀랄 만큼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두드러지는 한 가지가 바로 예술이다. 니체는 놀랄 만큼 대담한 태도로 예술과 진리 사이의 유서 깊은 관련을 끊어 버린다. 예술이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의 분출로서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는 보기에 무섭기 때문에 예술은 아폴론적인 위장으로 그것을 가리는 기능을 한다. 아편이라는 예술의 본질 또는 거짓 위안이라는 문화의 본질에 관해 이렇게 잔인할 만큼 솔직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진실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꿈과 환상(아폴론적인 것) 속이지만, 오직 전치되고 신중하게 완화된 형태로만 드러난다. 예술이 승화시키는 야만성이 없다면 예술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문명의 가장 훌륭한 꽃은 야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신정론의 한 종이다. 역사가 괴테 같은 인물이나 톨스토이 같은 인물을 내놓으려면 잔혹과 착취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73)
# 신정론神正論.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로 본다.
예술은 이중의 기만을 포함한다. (비)진리를 감추는 동시에 거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런 의미에서 환각이다. 거짓말의 성화聖化다. 그러나 단순히 환각만은 아니다. 이것은 또 변화를 일으키고 삶을 고양하는 힘, 우리가 성장하고 번성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비옥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비극에서 진실이다. 니체에게 비극적인 것은 공포가 부정되지 않고 연금술에 의해 승리로 바뀔 수 있는 과정이다. 그렇다 해도 예술은 그 자체로 목표라기보다는 인간 번성의 수단이다. 이 점에서 다시 니체는 미학자 가운데는 드문 존재가 되는데, 이번에는 예술 작품을 솔직하게 도구로 보는 태도 때문이다. 세계는 자신을 낳는 예술 작품이며, 이런 자유로운 자기 생산 과정을 이용하여 우주의 소우주가 됨으로써 초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이룰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혼돈이 형식이 되도록 강요한다. 그는 웅장하게 살아난 예술 작품이며, 예술가·예술품·재료가 하나의 몸 안에 있는 존재다. 74-5)
진실이 양가적인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너무 많은 불쾌한 비밀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허위의식의 조종석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 문제될 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정의 노爐는 진실이 일상적으로 억눌리는 곳이다. 비극적 예술의 전통적인 현장―전장, 귀족의 집, 왕궁―에 대응하여 그와 똑같이 갈등·배신·폭정·반역이 넘쳐나는 근대의 등가물이 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 가족이라고 알려진 현장이다. 중간계급 사회의 근본 단위인 가족은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죄책감이 곪아 가는 자리이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가정의 조화와 결혼의 행복에 대한 찬가가 계속 울려 퍼진다. 영웅 이후 시대에 비극이 번창하는 데는 악마나 반신半神이 필요 없다. 반대로 매우 숭배받는 제도 가운데 하나의 핵심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이 신화의 종말, 또는 공적 영역의 붕괴에도 비극이 죽지 않는 한 가지 이유다. 82-3)
5. 위로할 수 없는 자
중간계급 문명은 세계를 자신의 목적대로 형성하고자 하는 가운데 과학과 테크놀로지라는 대단히 막강한 도구를 진화시켰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에게 모든 물질적 현상이 어떤 엄격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을 해 줄 수밖에 없는데, 인간 자신이 이런 결정론에서 어떻게 면제될 수 있는지는 알기 힘들다. 자유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면 예측과 계산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자유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기획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역사의 결말이 열려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동시에 어느 정도의 결정된 지식을 요구하며, 이런 종류의 지식은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는 얻기 힘들다. 만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나뉘어 있는 두 영역이라면 인류는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았고,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고향 없는 상태를 대가로 자유를 사는 듯하다. 따라서 중간계급 사회의 기초―자유로운 주체―는 암반이라기보다는 심연인 듯하다. 94-5)
예술 작품은 하나의 전체로서 구체적 특수성 안에서 또 그 특수성을 통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감각적 합리성의 모범―감각되는 것과 이해되는 것,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필연과 자유, ‘자연’과 정신을 통일하겠다고 약속하는 이성의 한 형태의 모범―이다. 예술은 감각을 끌어들이며, 그래서 어떤 추상적 교의보다도 사람을 깊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감각된 것들이 모여 제멋대로인 군중, 바스티유를 급습한 폭도canaille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감각적 내용은 일관된 기획에 의해 안으로부터 모양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성 자체가 감각화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피도 눈물도 없는 합리주의로 방향을 틀기보다는 인간적 욕구나 감정과 접촉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는 객관화되어 손에 잡히는 형태를 띠게 된다. 거의 모든 미학적 담론이 그렇듯이 예술 작품의 이런 모범 밑에는 신학적 개념이 잠복해 있다. ‘육화Incarnation’, 즉 육肉이 된 ‘말Word’이라는 개념이다. 97)
우리는 허구적 형식으로 죽음 충동을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쫓아오는 힘들에게 마음껏 어떤 가상의 복수를 해도 우리가 실제로는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진정한 행복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나는 안전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데 있다. 오직 바다 같은 고난에 맞서 무기를 들 때에만 비극적인 것이나 숭고한 것은 우리가 그런 괴로움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 또 아무리 무익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해도 정신은 자연 세계에 맞서 싸울 때에만 번창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고난과 영웅적 저항을 통해서만 어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힘들의 물러서지 않는 현존을 느끼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것과 정신적으로 동등하거나 심지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서도 그렇듯이, 속박이나 필연은 자유의 근거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98)
셸링의 관점에서 오이디푸스가 실제로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법적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 것은 필연에 허리를 굽히는 동시에 필연에 숭고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 헛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낮추려는 힘들의 훌륭한 맞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니체의 표현으로 하자면 이것은 승리를 거두는 패배의 문제다. 죽음에 순응하는 것은 적어도 자신을 파괴하려 하는 힘의 의지만큼 확고한 의지를 요구한다. 영웅은 몰락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내부의 무한함을 드러내는데, 이런 면에서는 자신이 투쟁하는 힘들과 하나다. 이 힘들은 근엄한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이성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영웅의 힘의 근원에도 놓여 있다. 오직 주인공의 생물적 실존 너머에서 나오는 힘만이 그가 그런 실존을 포기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은 자유를 포기하고 필연성의 굴레를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는 바로 그 행동으로 자유를 증언한다. 101-2)
니체의 경우 비극에 비할 바 없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대 위 인물들의 번뇌가 아니라 구경꾼의 흔들리지 않는 눈길이다. 우리는 비극적 행동의 목격자로서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죽음 충동에 우리 자신을 내주는 순간 그 충동을 속이고 영생에 대한 유아적 환상을 맛본다. 동시에 쇼펜하우어의 구경꾼처럼 시간을 벗어난, 의지도 없고 장소도 없는 순수한 명상의 중심으로 이동하여 추하고 볼품없는 것이 그보다 자비로운 특징들과 함께 긍정해야 할, 강력한 우주적 게임의 불가결한 측면임을 인정하게 된다. 다시 한번 비극은 신정神政의 한 형태다. 고통 없이는 지복이 있을 수 없고, 시듦 없이는 개화가 있을 수 없고, 자해 없이는 주권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진정한 예술의 뿌리에는 괴로움이 있다. 비극적 예술가는 적극적으로 고난을 찾아 나서며, 인간 실존에서 의심스럽고 무시무시한 모든 것을 긍정한다. 고통과 자기 억압은 니체에게 초인 도래의 필수적 서곡이며, 이것이 그것들을 내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다. 116)
마르틴 하이데거는 신들의 귀환, 신화의 재연, 비극적인 것의 재탄생이 합리주의와 테크놀로지로 엉망이 된 시대에 유일한 구원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믿은 또 한 사람이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비극은 가장 심오한 철학적 사유로 우리에게 위험하고 폭력적이고 운명적이고 고향 없고 불가사의한 ‘인간’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미래에 어떤 쓸쓸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는 해도 하이데거는 전통의 끝에서 쓰고 있다. 죄르지 루카치의 초기 에세이 「비극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Tragödie」에서 비극은 역사 자체보다 강력한 현상으로 거대하게 떠오른다. 비극적 비전만이 궁극적 진리의 현현으로서 인간 실존에 의미를 주입한다. 비극적 위기의 순간에만 우리에게 모든 경험적 또는 심리적 우연을 쳐낸 순수한 자아 경험이라는 특권이 주어진다. 비극 예술은 다름 아닌 ‘존재’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인간의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현실이 되는 것”으로, 인간 노력의 정점이며 신비한 황홀경의 계기다. 119)
고전주의 고대로부터 미국의 신비평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 속에 부분이 용해되는 통일된 예술 작품이라는 신조는 놀랄 만큼 끈질기다는 것이 드러났다. 20세기 초에 유럽 아방가르드가 등장하고 난 뒤에야 이 교조는 어느 정도 규모로 논박이 이루어진다. 이제 불협화라는 관념이 기조를 이루며, 가장 훌륭한 이론가는 하이데거의 큰 적 테오도어 아도르노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의 그늘에서 글을 쓰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비극이 인간 고난에 모양이 잡힌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을 배신할 위험이 있다. 비극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억지로 떠안겨 그 잔혹성을 줄이는 데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아도르노가 그렇게 큰 빚을 지고 있는 프로이트에게도 여러 힘 사이의 최종적 화해는 있을 수 없다. 인간 주체는 자기 동일적이기보다는 분열되어 있다. 유아기의 격동에 대한 결정적 승리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감당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문명은 비극의 해독제라기보다는 그 예에 가깝다. 120)
고전주의적 고대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칭은 높게 평가된 반면 불협화와 분열은 안정에 위협이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관념론자, 낭만주의자, 19세기 목적론자에게는 투쟁과 낭비도 인간 역사의 행복한 진화에서 자기 나름의 역할이 있다. 통일은 기조로 남아 있는데, 이는 마침내 분열을 통합할 수 있는 통일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근대 후기에 화해에 대한 이런 믿음은 환상 또는 거짓 유토피아로 점점 불신임을 받았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로, 여기에서 갈등과 모순은 이제 다급한 문제가 아니다. 대신 차이와 다양성이 강조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질은 선배인 근대성의 기질과는 달리 대부분 비극적이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깊은” 주관성에 대한 혐오는 영적 고통이나 존재론적 불안과 편하게 공존하지 못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구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눈에 구원받을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24)
칸트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비극 철학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윤리 정치적 목적에 적합하도록 그 예술의 범위와 다양성을 축소해 버렸다. 그 결과로 비극적인 것의 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비극이라는 말을 대체로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 예술에서 희극은 삶의 희극과 그리 거리가 멀지 않지만 비극은 미학적 의미와 일상적 의미 사이에 간극이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 말의 일상적 사용법이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많은 이론보다 비극적 드라마 대부분을 오히려 더 충실하게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복구 불가능한 것이 해소 가능한 것보다 비극적이라는 일반적 의견은 당연히 옳다―그렇다고 해서 후자가 설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이 이데올로기는 결국은 복구가 불가능한 곤경을 맞이한 사람, 결국은 대립물의 통일로 환원될 수 없는 갈등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다. 그것은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 1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