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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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편리하지만 궁극적으로 매우 잘못된 두 종류의 해답이 있다. 하나는 국민을 비난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고,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다양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다수에 의한 독재로 전락할 지속적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인식을 물려받아 고뇌하는 리버설 사이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소위 '우익 포퓰리즘의 전 지구적 부상'이라는 현상을 19세기 군중심리학의 클리셰를 재소환할 핑계로 삼곤 한다. 즉 대중이 그 모든 재앙을 자초하며,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잘 알더라도 비합리적일 뿐인 평범한 자들이 언제나 선동에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해결책은 명확하다. '게이트키퍼'라고도 불리는, 사실은 전통적인 의미의 엘리트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투표같은 무책임한 직접민주주의적 관행을 다 없애버리고 정치가 전문직의 영역임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다."(13-4)


"다른 하나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격변을 권력층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역사를 잠깐만 살펴보아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민주주의를 폐지하자고 결정한 경우는 거의, 어쩌면 아예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서구에서 우익 포퓰리즘 권위주의 정당이나 정치인이 기성 보수 엘리트의 협조 없이 정권을 잡은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도 독일의 나치당도 당시의 보수 기득권이라 불릴 만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확실하게 권력을 획득했다." "실제로 최고 특권계층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분리'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비판할 거리가 많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가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악하고, 부패하고, 비뚤어진 데서 비롯된다는 단순한 주장은 상황의 복잡성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러한 주장을 좌파가 하건, 우파가 하건 마찬가지다. 힘 있는 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건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인데, 그 힘은 결국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한 제도를 통해 주어진다."(15-6)


1장 가짜 민주주의: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권위주의적 포퓰리즘 통치의 확산─은 20세기의 경험과 유사점이 거의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으나 우리는 은연중에 선한 이들만이 역사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형태의 반민주주의적 과거가 반복되지 않는 이유는 오늘날의 반민주주의자들 역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대 권위주의 정치의 레퍼토리에 눈에 띄는 대규모 인권 침해 사태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20세기 독재 정권들을 연상시키면 곤란하다는 것쯤은 이들에게 상식이다. 2016년 이래 터키의 에르도안 정부가 저지르는 대규모 탄압도 강력함보다는 나약함의 징후로 보아야 한다. 트럼프가 극우 취미 워리어와 음모론자, 컨트리클럽 공화당원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군대'를 부추겨 의회로 보낸 것을 파시즘적 국가 장악을 위한 마스터 플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25-6)


"포퓰리스트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진짜 국민' 또는 '침묵하는 다수'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선출직을 두고 경쟁하는 다른 모든 이가 근본적으로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포퓰리스트는 자신의 라이벌이 부패하고, 악하고, 비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국민의 뜻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포퓰리스트는 자신의 국민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국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짜 국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진짜 국민이 아닌 사람'의 존재를 내포한다." "포퓰리스트는 언제나 자신이 국민을 통합했다거나 사회가 이미 통합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실제 정치 모델은 시민들을 최대한 분열시키는 것이다. 일부만이 진짜 국민에 속한다는 메시지는 특정 시민의 입지를 구조적으로 약화한다. 포퓰리스트가 권력을 잡게 되면 어떤 시민은 더 이상 법 앞에서 온전한 평등을, 심지어는 법의 보호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27-9)


"따라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은 끊임없이 사회를 분열시키려 들며 특히 '진짜 터키인', '진짜 인도인', '진짜 미국인' 같은 이상을 계속해서 앞세운다. 문화적 지배를 강화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훨씬 더 일상적인 작업과 함께 진행된다. 바로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적 경향이다. 오늘날의 권위주의 정권 중 다수가 해당되는 '도둑정치kleptocracy' 체제에서는 법적·정치적 규제의 부재로 공금의 사적 이용이 훨씬 더 용이해지고, 미래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법과 정치 체제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한편 정치적인 설명도 가능하다. 범죄 행위에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정권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 좋다. 대중 후견주의, 즉 지지에 대한 대가로 지지자의 뒤를 봐주는 것은 곧 대중의 충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일자리나 복지로 위협하면, 직접적 정치 탄압이라는 무기를 지나치게 휘두르지 않고도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다."(30-1)


"힘을 충분히 갖추게 되면 포퓰리스트는 국가 전체를 식민지화하려 든다. 오르반과 피데스Fidesz 당이 2010년 집권하자마자 바꾼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무원법이었다. 초당파적이고 중립적이라 여겨지는 관직에 정권 지지자를 앉히기 위한 조치였다. 리버럴 좌파가 나라를 장악해왔기 때문에 이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헝가리의 피데스당이나 폴란드의 집권당 '법과 정의'PiS당은 공통적으로 법원을 장악하고 국영 매체를 압박하는 작업에 주저함이 없었다. 언론인이 '국가의 이익', 즉 집권당의 이익에 반하는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곧 명확해졌다. 마치 나폴레옹 3세처럼, 이들도 법관과 언론인에게서 받는 모든 비판을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게 누구더라?〉라는 질문으로 받아쳤다. 인도의 재무장관은 〈민주주의가 비선출직의 독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고, 폴란드의 법무장관 역시 독립된 사법부를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폴란드는 민주주의 국가지 '법원지배'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34)


"시민사회 내부로부터의 저항은 포퓰리스트에게 특별한 골칫거리를 안긴다. 자신만이 국민을 대변한다는 주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블라디미르 푸틴이 완벽하게 다듬어둔 전략을 따르는 것이다. 푸틴은 여러 면에서 현대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롤모델이자, 도둑정치계의 진정한 혁신가라 부를 만한 인물이다. 푸틴은 시민사회가 사실은 전혀 시민사회가 아니며, 거리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진짜 국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증명'하면 그만이라는 점을 몸소 보여주었다." "답변은 늘 준비되어 있다. 우익 포퓰리즘 정권은 NGO와 평범한 시위대에 외부 세력의 도구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심지어는 이들을 외국의 스파이로 낙인찍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일례로 트럼프는 무슬림 입국 금지 법안에 반대한 수백만 시민을 〈돈 받고 일하는 활동가〉라 칭했고, 브렛 캐버노 대법관 지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때도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36-7)


"시민들이 정말로 그렇게 강력한 권위를 원하는 것일까? 정말로 대다수가 극우파로 개종해버린 걸까?" "트럼프의 당선은 어찌 보면 가장 시시한 정치학적 설명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당파 정치의 결과일 뿐이었다." "공화당원 중에도 공식 석상에서 트럼프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말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 뒤에도 그들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자아분열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동의 배경에는 어떤 명분에 대한 열렬한 지지보다 어떤 것 또는 어떤 이에 대한 열렬한 반대가 더 중요해진 오늘날의 선거가 있다. 정치적 편 가르기는 존 스튜어트 밀이 칭한 '공동의 지지'보다는 '공동의 반감'에, 또는 정치학자들이 '부정적 정체성'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해 이루어진다. 다수의 미국 우파, 그리고 일부 좌파에게 힐러리 클린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뽑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수의 브라질 유권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건 룰라의 노동당에 표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40-1)


"양극화의 책임이 포퓰리즘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퓰리스트의 주요 전략이 양극화임을 이해하는 건 중요하다. 포퓰리스트는 사회를 여러 집단으로 나눈 다음, 일부 집단이 근본적으로 정당성을 결여했고 심지어 존재론적인 위협이 된다는 점을 넌지시 시사한다. 포퓰리스트의 정치 세계에서 집단의 성격은 다양한 정치 집단을 가로지르는 정체성이나 이해관계로 규정되지 않으며, 존재론적 중요성을 갖는 하나의 선에 의해 단순화된다. 대략 '나쁜 편이 이기면 우리 모두 죽는다'는 식이다. 포퓰리스트의 세계관에서 상대편의 승리는 단순히 우리의 일시적인 패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을 향한 중대한 위협이며 나아가 정치 체제의 종말을 의미한다(2016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45퍼센트, 민주당의 41퍼센트가 상대당을 '국가의 안녕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많은 이가 '우리가 도대체 왜 여기 함께 있는가? 왜 내가 이 이질적인 사람들과 운명 공동체로 묶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44-6)


"부자는 단지 돈이 많을 뿐 아니라 돈을 지킬 힘이 있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중요한 건 이 같은 실질적인 분리가 어떤 음모를 통해서가 아니라 두 주류 정당 중 한쪽을 장악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점이다(물론 다른 한 정당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공화당과 그 후원 세력은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 방향이 유권자 전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는 문화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키면서 거기에 경제 정책을 엮어간다. 문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그저 비도시 지역 유권자가 (특히 상원에서) 과대대표되는 미국 선거 제도상의 구조적 이점을 누리기 때문이다. 또 항상 대비책으로 투표 억압 등의 전략을 구사하여 실질적인 소수 독재 체제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이는 공화당이 존경한다고 주장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면서 깊이 우려했던 시나리오다."(54)


# 양극화를 부추기는 이중 분리 현상

1. 특권층의 분리 : 자기분류와 동질화 경향이 강한 계층(주로 부유층)은 자신들과 나머지 사람들을 같은 공동체로 묶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2. 저소득층의 분리 : 저소득층은 투표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정치 참여에 소극적이며, 이는 자신들의 삶과 정치가 무관하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시민들이 자신과 아래 세대의 경제에 대해 점점 비관적으로 전망한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미국인의 60퍼센트, 유럽인의 64퍼센트가 자식 세대는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세대 간 진보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의 붕괴는 문명 규모의 현상〉이다. 중산층이 민주주의 원칙과 법치의 파괴를 때로는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적어도 오르반이나 트럼프 부류가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럼에도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실질적 이익이건, 공허한 기대건)을 위해 그 정도는 눈감아줄 의사가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 일부 시민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듯한 것, 또는 자기 자식의 미래에 도움을 줄 듯한 것과 민주주의 훼손을 일종의 트레이드오프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부유층의 지지는 언제나 조건부였다."(57-9)


2장 진짜 민주주의: 자유, 평등, 불확실성


"민주주의를 특정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인식을 공유하면 좋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번영과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면, 다른 어떤 정치 체제가 같은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달성 가능한 경우 민주주의는 버릴 수 있는 안이 된다. 이상화된 중국 권위주의 체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반면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 구성원 일부가 근본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카스트 사회라면, '인간의 얼굴을 한 권위주의'라는 대안이 있더라도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선호할 것이다. 그 경우에는 높은 성과를 내는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지저분하고 느리고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민주주의 체제를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평등에 대한 두 가지 이해가 있다. 하나는 평등한 권리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평등', 즉 상대가 나와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고 여기는 구성원들의 관계에 관한 이해다. (평등의 반대는 '다름'이 아니라 '불평등'이다.)"(67-8)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포퓰리스트가 종종, 자신의 이익에는 완전히 부합하지만 정치적 절차를 해치는 전략을 택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스트 정당이 정권을 잡지 못했을 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표를 많이 받지 못한 포퓰리스트 정당은 명백한 모순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면서 동시에 유일한 국민의 대변자인데, 어떻게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로 승리하지 못할 수 있는가?' 이 모순을 타개할 가장 쉬운 방법이 있지만 모든 포퓰리스트가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포퓰리스트가 좋아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인 '침묵하는 다수'를 끌고 나온다. 만약 침묵하는 다수가 침묵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미 정권을 잡았으리라는 것이다.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침묵하는 다수가 '침묵당하는 다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다수의 목소리를 억압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포퓰리스트는 부패한 엘리트층이 무대 뒤에서 수작을 부렸다는 점을 어필한다."(85-6)


"게임이 불공정해지더라도 반대파는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민주주의 사회는 〈호구suckers〉와 〈악당scoundrels〉이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분열될 위험에 처한다. 게임 이론에서는 '팃포탯tit-for-tat' 즉 맞받아치기 전략을 통해 제대로 된 규칙을 재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부정을 부정으로 받아치다가는 규범 위반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불을 불로 받아치는 전략을 구사하다가는 집을 몽땅 태워버릴 수도 있다. 정치 갈등에서는 모든 규범 위반이 다 똑같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투표 억압에 맞서기 위해 상대편 유권자들을 똑같이 투표소에서 내쫓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 심적으로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해결책을 도모해야 한다.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도,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94-5)


"현실의 대의민주주의에는 고도의 균형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우리 편이 졌지만 다음에 다시 이길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면 이 게임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동시에, 언제나 우리 편의 승리가 확실하다면 우리야 좋겠지만,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민주주의가 사라졌다는 의심을 살 수 있다. 애덤 셰보르스키가 민주주의를 〈제도화된 불확실성〉의 한 형태로 정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거 등 정치적인 결과는 불확실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당들이 선거에서 지는 정치 체제〉라는 그의 정의는 싱거운 소리처럼 들리지만 실은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다. 즉 민주주의는 여러 정당이 선거에서 지는 정치 체제이지, 똑같은 정당이 계속해서 지는 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생각,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규칙에 대한 생각이 바뀔 가능성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99-100)


"시민이 비이성적이고 식견이 부족함을, 시민 개인에게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지식이나 일관된 시각이 부족함을 입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 전체가 무작위로 돌아가거나, 정치적 보상이 늘 가장 뛰어난 선동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에 대해 충분한 감을 가지고 있으며 동료 시민이나 정당, 언론, 노조 등의 단체에서 선호를 얻어 판단한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름길을 택했다는 게 비합리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시민이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대부분 선동가의 말에 속거나 허위의식에 젖어서가 아니다. 도덕적·문화적 이슈, 심지어는 감정적인 이슈와 연관된 다른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E. E. 샤츠슈나이더가 말했듯이 사람들에게는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관념도 있다. 관념이나 가치관은 단순히 '합리성 대 비합리성'의 문제로 볼 수 없다."(104)


"어떤 철학자들은 고대 아테네식 '로또크라시lottocracy'의 부활을 주장하기도 한다. 로또크라시는 추첨에 의해 선발된 시민들이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정책 과제를 해결하는 체제다." "문제는 로또크라시가 기술관료적 사고방식, 즉 정치란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의 연속이며 올바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누가 결정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첫인상이 로또크라시와 정반대인 능력주의는 전문가가 직접 임무를 수행하는 체제이자 하나의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음을 전제하는 시스템이다. 민주적 대표성을 놓고 지저분하게 싸워야만 문제라는 것이 드러나고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해결책이 있을 수도 있다는 관점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제비를 잘 뽑은 운 좋은 승자이건, 시험에 통과한 능력 있는 인물이건 일단 지도자가 결정되고 나면 나머지 시민은 그냥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점에서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에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115-6)


"특정 맥락 속에서 여러 장점을 띤다고 해도,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에는 결국 정기적인 선거에 기반한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중요한 미덕, 즉 역동성과 창의성이 없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도,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는 선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시회 내 서로 다른 집단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패자에게 미래의 승리라는 여지를 남겨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의제와 참여를 반대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의의 반대는 배제이며, 참여의 반대는 정치적인 삶으로부터의 분리 또는 기권이다. 패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패자도 여전히 자기 주장을 펼칠 자유가 있고, 배제되거나 구조적인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 이 같은 인프라는 민주주의 사회를 와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116-8)


3장 필수 인프라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 즉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기본권의 가치는 권리 행사를 돕는 이른바 '매개 권력'이라는 행위자들의 존재로 인해 크게 높아진다." "조직, 정당, 그리고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라 불리는 전통 매체는 내 메시지에 말 그대로 날개를 달아준다. 정치적 평등이란 무엇보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다. 일정 수준의 접근성을 갖춘 매개 권력과, 새로운 매개 권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반면에 매개 권력은 오히려 불평등을 공고하게 하고 심지어는 악화시킨다는 어두운 시각도 있다. 실제로 매개 기구는 잘해봤자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대개는 노골적으로 귀족적이라는 유구한 시각도 있다." "가장 박한 평가는 매개 권력이 국민의 목소리를 아예 바꾸어 전달한다는 주장이다. 루소가 매개 권력에 적극 반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119-20)


"핵심은 매개 기구가 갈등을 드러내고 구조화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동기가 반드시 건전한 민주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정당은 선거에서 이기고 싶어 하고, 언론 소유주는 (대부분)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목표가 정치판의 싸움을 정치 체제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 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패자가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일과 양립 불가한 것은 아니다." "법이론가 한스 켈젠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상대주의와 철학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이들이 반드시 이기적이거나 멍청하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다."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진실 찾기가 관건이라면 '충실한 반대파'와 같은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는 패자는 그저 거짓말쟁이일 뿐이다."(128-9)


"매개 기구는 진실을 가려내거나 기계적으로 특정 현실을 복제해내는 주체가 아니다. 이상적으로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선택지란 모두가 자신의 현실을 선택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가 각기 다른 가치관에 따라 특정 현실에 대해 시각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매개 기구는 외적 다원주의와 내적 다원주의를 모두 가능케 해야 한다. 외적 다원주의란 다양한 종류의 정당과 전문 언론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문제에서 의견의 불일치는 팩트를 둘러싸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 여러 집단을 창의적으로 대표해내는 데서 생겨난다." "내적 다원주의는 외적 다원주의에 비해 겉으로 덜 드러난다. 개별 매개 기구 안에도 시각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다. 즉 정당은 내부적으로도 경선이나 집중 토론과 같은 적절한 민주 절차를 따라야 한다. 내부적으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정당은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131-2)


"매개 기구의 역할은 이게 다가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의 전장을 열고 다원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매개 기구는 정치의 시간표를 그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정당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경선을 실시하고, 신문과 방송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뉴스와 논평을 제공한다. 정당의 역할에 대한 제임스 브라이스의 설명대로 매개 기구는 〈수많은 유권자에게 혼란 속에서 질서〉를 가져다준다." "특히 시민들의 생각을 한 곳에 모으는 절차인 선거는 특정한 날짜에 모든 시민에게 공통의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주기적으로 일깨우는 의식으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선거의 단면을 이상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세기 미국에서 선거일은 엄숙한 시민의식을 실천하는 날이 아니라, 공짜 위스키가 흘러넘치고 주먹 다툼이 난무하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정기적인 행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정당 지지자들의 정치 활동에 기준점을 제시한다."(139-40)


"기술이 스스로의 적용 환경을 결정하는 일은 없다. 물론 인터넷이 새로운 인프라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프라의 구체적인 모양은 우리가 이미 가진 인프라, 즉 지난 2세기 동안 기본적인 규제(또는 규제 완화) 정책을 만들어온 정당 제도와 공론장이 좌우한다. 미국만 봐도 그렇다. 2016년 대통령 선거를 분석한 하버드대학교의 사회학자 세 사람은 뚜렷한 우익 미디어 생태계의 존재를 확인했다. 스스로 담을 쌓아 올린 공간 안에서 '뉴스'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자기인정의 형태로 기능한다. 목적 있는 허위 정보든 단순히 오류가 있는 정보든 수정되는 일은 거의 없다. '우익 정치 엔터테인먼트 집단'의 관객들은 《월스트리트 저널》 정도의 중도우파 뉴스 매체와도 거의 접촉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보나 왜곡된 정보는 어떠한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빠르게, 멀리 퍼져나간다. 〈비이성의 전염〉이라는 리프먼의 표현은 다소 비하적이기는 하나 이런 상황을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151-2)


"하버드대학교 연구팀 논문의 핵심은 이처럼 좌측에 대칭을 이루는 짝이 없는 우익 미디어 생태계의 등장이 인터넷의 탄생보다 훨씬 앞선다는 것이다. AM 라디오를 통해 확산된 보수 토크쇼와 1987년 공정성 원칙의 폐지 후 등장한 고도로 당파적인 케이블 뉴스는 우익 미디어 생태계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케이블 TV 등 여러 매체를 흥하게 한 규제 정책은 정치적인 선택의 결과였고, 그 과정에서 기술적 혁신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결정은 양극화를 불러왔는데, 알고 보니 그건 엄청나게 돈이 되는 시장이었다. 특히 우파 측에서 이른바 '오피니언 저널리스트'를 자처하던 이들에게 큰 사업의 기회가 생겼다." "재규제reregulation가 마술처럼 양극화와 허위 정보를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기술은 이미 존재하는 인프라에 얽혀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며, 민주주의에 해가 되는 걸림돌을 더 크게 만들 수는 있어도 없던 문제를 새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152-3)


"정당은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유도함으로써 특정한 자기인식을 강화하고자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공동의 지지〉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순간부터 반향실echo chamber 효과는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한층 정교해진 온라인 환경이 현재 비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과두 엘리트 계급의 특징 한 가지는 성격과 성격과 관련된(〈움켜쥐고 움켜쥐고 또 움켜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개 기구를 포함한 정치적인 구조를 자기 뜻대로 재편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것이다. 권력이 집중된다는 것은 곧 책임지지 않는 개인들이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정부가 플랫폼의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정치 성향도 바꿀 수 있는 개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트럼프와 저커버그 같은 인물은 각각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지만, 그런 인물들이 서로를 이용하게 되면 위협은 훨씬 더 커진다."(159-61)


4장 민주주의 다시 열기


"영국 철학자 오노라 오닐의 말대로, 민주주의 인프라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매개 기구가 접근성과 자율성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매개 기구가 시민의 판단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들도 시민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저 매개 기구의 재정적 기반은 무엇인가(언론사의 경우, 사주가 누구인가)? 어떤 의제를 갖고 있는가? (베를루스코니의 TV 정당처럼) 부도덕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의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나? 정당 후보의 진정한 배후 세력이 미국의 '그림자 정당'이나 '준정당parapaties' 같은 것은 아닌가? 선거 운동 비용 지출에 제한이 없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다크 머니'가 투입되고 있지는 않은가? 외부 세력이 재정적으로 개입하고 있지는 않은가?" "폭스TV 같은 방송국의 문제는 (전 앵커인 빌 오라일리의 표현대로) 〈보수적인 노동자 계층의 시각〉을 대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너그럽게 표현해도) 부정확한 보도를 한다는 것이다(편파적이면서 그렇지 않은 척 오도한다)."(189-90)


"선거는 확장된 기간에 걸친 정치적 동원이기도 하다. 정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기인식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2016년 초에는 트럼프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불과 몇 년 후 다수의 미국인이 자신을 영혼까지 트럼프주의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이들은 트럼프가 정계를 떠나더라도 오랫동안 트럼프주의자로 남을 것이다. 이들에게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습격은 트럼프의 대선 승리 주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엘리트의 배신이라는 신화의 밑거름으로 피해자성과 분노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자, 순교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일부 국가에서 〈전투적 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제를 수립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투적 민주주의란 정치 제도를 훼손하려는 정당이나 개인들에게서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권리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다."(196)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오면, 불관용을 관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나치당은 선거 제도에 찬성했지만, 권력을 잡은 후에는 민주주의 폐지를 추진했다. 나치당원들은 처음부터 딱히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1928년,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당이 〈민주주의의 무기고에서 가져온 무기로 무장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민주주의가 자신을 무너뜨린 철천지 원수에게 자기 무기를 직접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농담으로 남을 것〉이라며 기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역사의 교훈은 분명해 보였다. 민주주의는 반민주적 행위자들이 〈민주주의의 무기고〉를 악용하는 존재론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법적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특히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반드시 필요해 보였다." "이는 민주주의와 상대주의를 결합한 한스 켈젠의 개념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대신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가치, 특히 인간 존엄성을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면서 그 가치들을 수호하겠다는 입장이었다."(197-8)


"이런 문제가 과거, 즉 20세기의 전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전투적 민주주의를 고안해낸 이론가들은 이런 정당들이 시민의 기본권을 해치고자 하는 희망을 공개적으로 내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정당은 거의 없다. 바이마르 시대와는 다르다. 물론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일부 시민은 '진짜 국민'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지만, 이들조차 조심스럽게 말을 고른다.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마주한 위협은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선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오히려 법원이나 관료주의 내부의 감시 기구, 선거 위원회와 같은 독립적인 민주주의 수호자에 대한 장악이나 정치 절차의 체계적인 재편이며, 제도화된 불확실성은 크게 줄어들었다. 트럼프가 자기 행정부의 부패상을 노출시킬지 모르는 감찰관에게 실질적인 보복 조치를 감행한 일이나, 연방 선거 위원회라는 중요한 선거 감시 기구를 초당적으로 구성하는 전통을 깨고 공화당 다수로 만들어버렸던 일이 그렇다."(206-7)


"이론상 (반反다원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시민 불복종은 권위주의 포퓰리스트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시민 불복종의 고전적인 정의는 1970년대 초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가 정립했다. 시민 불복종은 공공연한 법 위반을 의미했다. 당연히 모든 법 위반이 시민 불복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에 따른 비폭력적인 행위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법이 기본권의 침해와 같은 심각한 불의를 낳고 있으므로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동료 시민들에게 설득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롤스는 또한 시민 불복종에 나서는 이들이 법 위반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와 제도가 〈거의 정의로운〉 상태여야 한다는 조건을 조심스럽게 덧붙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정해진 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모습을 능동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오늘날엔, 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 시위마저도 '시만답지 못한' 행위, 또 이미 양극화된 사회에서 분열을 부추기는 행위로 종종 비판 받는다."(210-1)


"오늘날의 대중은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킹이 한때 이야기한 하나의 〈국가적 의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불복종 운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분열된 공론장,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매우 오염된 공론장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때로는 장애물을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이 TV로 중계되지 않는다고 해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불복종 운동을 널리 알릴 수 있다. 2020년 미국에서 경찰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활약한 독립 미디어 그룹 '유니콘 라이엇'이나 2020년 벨라루스에서 일어난 반루카셴코 시위에서 사용된 텔레그램 체널 '넥스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둘러 가는 길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개 기구에 대해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개 기구가 접근성과 자율성을 잃고 사회 구성원의 평가를 받지 않게 되면, 분열과 방해 시도는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악순환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213-4)


결론


"정당과 전문 언론은 대의민주주의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적절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 반면 진입 장벽은 상대적으로 낮아야 한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특정 시각을 배제하거나 일부 구성원에게 힘을 더 실어주게 되더라도 정당의 핵심적인 신념이나 전문가로서의 윤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매기 기구는 접근성이 높아야 하고, 정확하며 자율적이며, 평가 가능해야 하고, 따라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당파성이 없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정당의 경우에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목표는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갈등에서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팩트가 언제나 깨지기 쉬운 것이라 해도 그 과정은 팩트에 의해 가능해지고 또 팩트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고 한탄하나, 이 새로운 매개체가 시민들에게 전례 없는 접근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222-3)


"클로드 르포르는 민주주의의 '끝이 열린' 절차에 대해 설명했다. 민주주의는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부당한가에 대한 토론의 정당성 위에 세워진 체제〉이며 〈토론에는 반드시 보증인(입회인)도, 끝도 없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민주주의에는 어떠한 보장도, 미리 정해진 목표도 없다(〈이제 민주주의는 완벽하게 실현되었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불확실성과 전반적인 자유의 행사는 두 가지의 타협할 수 없는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 정치 체제의 자유롭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동료 시민의 입지를 훼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누구도 자신만의 팩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기존 규칙이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핵심 요소에 위배될 때는 명백히 민주적인 형태의 불복종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다만, 불복종하는 이는 자신의 저항이 당파적 갈등에서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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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 : 시간의 물리학 - 지금이란 무엇이고 시간은 왜 흐르는가
리처드 뮬러 지음, 장종훈.강형구 옮김, 이해심 감수 / 바다출판사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말


1부 시간의 놀라움


# 물리주의physicalism : 물리적으로 알아낼 수 없는 어떤 것은 실재의 부분이 아니라는 주장


"지금 당신의 현재 속도는 얼마인가?" "가만히 앉아 있기 때문에 '영'이라고 답했는가? 어쩌면 1만 2,000미터 상공을 나는 비행기에 앉아 있더라도 영이라고 답할지 모른다. 좌석벨트 등에 불이 커져 있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방송이 나오니까.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까 속도는 영일 것이다. 아니면 혹시 비행기가 날아가는 속도와 같은 '시속 900킬로미터'라고 답했는가? 아니면 아마존 강 하구에 떠 있는 보트 위에서 이 책을 보면서 '시속 1,600킬로미터'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적도에서 지구의 회전 속도가 그쯤 되니까. 혹은 천문학에도 해박해서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 속도도 포함해서 '초속 30킬로미터'라고 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 은하를 도는 태양의 속도, 우주에 대한 우리은하의 속도(우주배경복사를 기준으로 정해진다)도 포함한다면 '시속 160만 킬로미터'라고 답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정답일까? 당연히 모두 맞다. 당신의 속도는 어떤 좌표계를 기준으로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32-3)


"상대성이론의 놀라운 성질은 바로 속도뿐 아니라 시간 자체도 기준 좌표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절대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표면, 비행기, 지구, 태양 등 어떤 기준 좌표계를 고르는가에 따라 시간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달라진다. 두 사건 사이의 시간, 시계의 똑딱임은 우주 어디서나 똑같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좌표계를 고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당신은 아마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들이 서로의 관찰 결과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상대성이론에서 나오는 관찰자들이 서로의 관찰 결과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은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의 속도에도 동의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속도가 상대적이고, 기준 좌표계에 따라 달라지며, (상대성이론을 배웠다면)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33-4)


"당신이 다른 책에서 시간 지연이란 〈움직이는 시계가 당신의 시계보다 느리게 째깍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봤다면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 아니라 당신의 고유 좌표계에서 측정하면 정말로 느리게 간다." "시간 지연은 어떻게 보면 미래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간단한 방법이다.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고유 시간은 당연히 느려질 것이고, 당신 시간으로 1분이면 100년쯤 후의 미래로 갈 수 있다. 냉동 수면을 하고 미래에 다시 해동시킬 방법을 찾을 거라는 기대 따위도 필요 없다. 그냥 속도를 올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세부 사항들이 있다. 우선 어디 부딪히지 않도록 경로 설정을 잘해야 한다. 그 정도 속도에서는 살짝 부딪히는 걸로도 끝장날 수 있다. 다음은 목표지점(아마도 지구)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 일단 미래로 가면 미래로 올 때 썼던 것처럼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비슷한 방법이 없다."(35, 41-2)


"아인슈타인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지금' 이 순간) 일어난 사건은 다른 기준 좌표계에서는 더 이상 동시가 아니라는 것을 보였다. 거기서는 한 사건이 다른 사건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가 될까? 그건 좌표계에 따라 다르며 어느 쪽이든 먼저 일어날 수 있다. 즉 시간의 순서가 뒤집힐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별로 우주여행을 떠난다고 해보자. 그럼 지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잠깐, 이 질문 속에는 다들 어련히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즉 '지금' 지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하지만 목적지인 그 별에 도착해 정지해서 당신의 고유 좌표계를 움직이는 좌표계에서 그 별의 정지해 있는 좌표계로 바꾸자마자, 그 좌표계에서 일반적인 '지금'의 의미는 바뀌게 된다. 정지한 후 당신의 고유 좌표계가 다른 기준 좌표계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고유 좌표계가 다른 기준 좌표계로 점프할 때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시각도 바뀐다."(44-5)


"아인슈타인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둘 다를 바꿔놓았다. 그는 논문에서 두 사건의 시간 간격과 물체의 길이 둘 다 기준 좌표계(지상, 비행기, 위성)에 따라 달라진다고 결론지었다. 버스의 길이를 잰다고 해보자. 버스의 길이를 정확히 재려면 앞과 뒤의 위치를 '동시에' 재야 한다. 동시에? 바로 그것이 문제다. 동시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한 기준 좌표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더라도 다른 기준 좌표계에서는 동시가 아닐 수 있다. 이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좌표계에서는 길이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물체와 함께 움직이는) 자신의 고유 좌표계에서는 길이가 L인 물체가 있다면, 상대속도가 v인 좌표계에서 길이는 아인슈타인의 계산에 따라 감마만큼 짧아진다." "흔히 움직이는 막대는 〈짧아진 것처럼 보인다〉라고 표현하는데, 사실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막대는 실제로 짧기 때문에 짧아 보이는 것이다."(46-8)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기하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10년을 연구했고, 곡률과 신축을 포함하는 임의의 기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는 시공간 개념을 들고 왔다. 이것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 지구 표면에 산과 계곡이 있듯, 4차원 시공간도 꼬이고 회전하고 압축·팽창할 수 있지만 여전히 연속적이고 부드러운(미분 가능한) 형태를 가진다. 기하학의 시각에서 보면 무거운 천체 주변을 공전하는 행성과 위성들은 그저 '측지선'이라 불리는 '똑바른 직선'으로 느끼는 길을 따라 직진하고 있다. 뉴턴이 사용한 오래된 중력장의 개념은 사라지고, 주변의 (질량 에너지를 포함하는) 에너지 밀도에 따라 변화하는 기하 구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질량이 있다는 것은 에너지가 있다는 뜻이고 에너지는 시공간을 왜곡시키며, 시공간의 왜곡은 물체가 중력장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사실 그들은 그저 복잡한 시공간 속에서 그들이 보기에 직선인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92-3)


"공간은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 공간은 팽창하거나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공간을 작은 구역에 우겨넣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바로 방정식이 시간 지연을 다루는 방법이다. 근처 구역에 블랙홀이 있다면, 한 곳에서 블랙홀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는 데 무한한 거리를 가야 한다. 마치 산을 가로지르는 것과 비슷한데, 지도에서 보는 직선거리는 단순히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는 오르고 내릴 산 대신, 어떤 구역에 다른 구역보다 더 많은 공간과 거리가 우겨져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공간은 단단히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어떤 구역region에 포함된 공간space의 크기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공간의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를 설명할 때 여분의 차원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상대성이론에서 설명하듯, 시간 간격과 거리는 유동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만 하면 충분하다."(93-6)


"당신이 태양 정도 질량을 가지는 아주 작은 블랙홀에서 1,000마일쯤 떨어진 꽤 큰 궤도를 돌고 있다면 딱히 특별하다고 느낄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추진 로켓을 분사해서 궤도 공전을 멈추게 되면 여느 무거운 물체 쪽으로 인력을 느끼는 것처럼 당신이 블랙홀 쪽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인공위성을 궤도에서 벗어나게 해서 재진입시키는 것도 바로 이 방식이다. 역추진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감속시켜 중력이 잡아당기게 한다.) 당신의 기준 좌표계로 10분이 지나기 전, 10분간의 나이를 먹기 전에 당신은 블랙홀의 표면이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시간에 대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낙하를 시작한 지 10분 후, 그 표면에 닿을 때 궤도 정거장에서 측정한 시간은 무한대가 된다. 그렇다. 외부 관찰자의 좌표계에서 측정하면 블랙홀에 떨어지는 데에는 무한대의 시간이 걸린다. 떨어지고 있는 당사자의 가속하는 좌표계에서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말이다."(102-3)


"여러분과 내가 공간상으로 몇 피트 정도 떨어져 있고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하자. 우리의 고유 좌표계는 동일하고, 둘 다 정지 상태에 있다고 하자. 이제 몇 킬로그램 정도밖에 안 나가는 작은 (완전히 형성된) 원시 블랙홀이 있다고 해보자. 이 블랙홀을 당신과 나 사이에 끼워넣자. 이 블랙홀의 인력은 같은 무게의 다른 물체들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딱히 별다른 힘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블랙홀을 끼우면 당신과 나의 직선거리는 무한대가 된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달라졌지만 우리의 위치는 그대로다. 그럼 우리는 '움직였나?' 그렇지 않다.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가 바뀌었나? 그렇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공간은 유동적이고 변형될 수 있다. 늘어날 수도 압축될 수도 있다. 무한한 밀도의 공간이라도 질량은 가볍기 때문에 쉽게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 있다. 그 말은 물체 사이의 거리는 임의의 빠른 비율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은데도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110-1)


2부 부러진 화살


"열역학 제2법칙은 물체의 집합에 대해 정의되는 '엔트로피'라는 양이 있으며, 이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지되거나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에너지와는 대비된다. 에너지는 이 물체에서 저 물체로 옮겨갈 수 있지만 모든 물체의 에너지의 총합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제1법칙과 달리 제2법칙은 절대적이지 않고 확률적이다. 이 법칙은 깨질 수 있지만 많은 수의 입자가 모인 상황에서 예외가 나타날 확률은 무시할 만큼 작다. 부서진 달걀도 분자 사이의 힘들이 우연히 딱 맞는 방식으로 주어지기만 한다면 원래대로 합쳐져서 탁자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 다만 그런 일은 거의 있을 법하지 않을 뿐이다. 엔트로피와 시간은 같이 증가한다. 둘은 연관되어 있다. 아서 에딩턴의 새로운 추측은 엔트로피가 '시간의 방향성', 시간이 뒤로 흐르지 않고 앞으로만 흐르는 것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열역학 제2법칙이 우리가 왜 미래가 아닌 과거를 기억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0-1)


"어떤 물체에서 모든 열을 제거했을 때 엔트로피는 0으로 정의된다. 물체가 따뜻할 때의 엔트로피를 알고 싶다면 절대온도 기준으로 0도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열을 가하면서 온도의 증가를 계속 지켜보면 된다. 미량의 엔트로피 증가는 더해진 열을 온도 증가로 나눈 값으로 정의된다. 이런 작은 엔트로피 변화들을 모두 더하면 따뜻한 물체의 엔트로피를 얻을 수 있다. 만약 물체의 온도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린다면 엔트로피는 감소한다. 일반적으로, 차가운 물체는 낮은 엔트로피를, 뜨거운 물체는 높은 엔트로피를 가진다. 그런 면에서는 엔트로피는 에너지와 비슷하지만, 에너지와 달리 엔트로피는 한계값이 없고 쉽게 생성될 수 있다. 고립된 물체의 집합에서 전체 에너지는 이 물체에서 저 물체로 옮겨지거나 포텐셜 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 변환되거나 질량이 열로 변할 수는 있지만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이다. 하지만 엔트로피는 보존되지 않으며 제한 없이 증가할 수 있다."(129-30)


"엔트로피는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에 따라 늘어날 수 있다. 엔트로피를 만드는 건 쉽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시원한 방에 놔둔다고 하자. 커피에서 열이 빠져나가면 커피의 엔트로피는 감소하지만(음의 열 흐름), 방의 엔트로피는 그것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증가한다. 그러므로 커피가 식도록 내버려두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되돌릴 수도 없는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를 의도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는 셈이다." "엔트로피가 만들어 진다는 것은 에너지가 '낭비'되었다는,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열이 이동할 때 피스톤을 미는 것처럼 유용한 형태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현실 속의 엔진은 카르노 효율─생성되는 초과 엔트로피를 0으로 줄인 최적화 장치─을 달성하지 못하므로, 에너지를 절약한다는 것은 가능한 한 적은 일에너지로 어떻게든 해보자는 것도 의미한다. 결국은 유용한 일에너지마저도 열로 변하게 되므로 이것도 우주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게 된다."(130-1)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척도, 곧 무질서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 구석에 모든 분자가 몰려 있는 경우처럼 기체의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는 고도로 정렬된 상태다. 분자들이 흩어져 있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는 무질서한 상태다. '엔트로피가 높다'라는 것은 그 상태가 임의의 과정들을 거쳐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다. 반면 '엔트로피가 낮다'라는 것은 그러한 조직된 상태가 있을 법하지 않다는 뜻이다. 고도로 조직된 상태는, 거의 정의 그대로 임의적인 자연 과정을 통해서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상적인 카르노 열기관을 돌려서 뜨거운 기체에서 기계적인 일을 하는 경우처럼 당신이 계에 뭔가를 할 때, 이론적으로는 전체 엔트로피가 변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기관은 만들어질 수 없으므로 현실에서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즉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국소적인 엔트로피 감소에 기반을 두고 있다."(143-4)


"아서 에딩턴은 물리학에서 오직 하나의 법칙만이 시간의 화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바로 열역한 제2법칙이다. 고전역학, 전자기학, 심지어는 현재 계속 진화하고 있는 양자물리학 같은 모든 다른 물리학 이론들은 과거를 미래와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행성들은 정확하게 동일한 규칙들을 따르며 궤도를 역행해서 움직일 수 있다. 전파를 송출하는 안테나는 전파를 수신하는 안테나로도 사용될 수 있다. 원자는 빛을 방출하지만 빛을 흡수하기도 한다. 동일한 방정식들이 빛의 방출과 흡수를 모두 기술한다. 영화를 거꾸로 돌려도 열역학 제2법칙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물리법칙도 위배되지 않는다." "당신이 두 개의 순간에 대해 우주의 신과 같은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두 순간 중에서 어떤 순간이 먼저인지를 판가름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대답은 단순하다. 두 순간의 엔트로피를 계산하라. 더 낮은 엔트로피를 가진 순간이 먼저 일어난 순간이다."(149-51)


"만약 상자의 구석에 기체를 가두어놓았다가 기체가 상자 안으로 퍼지게 한다면 상자 안의 엔트로피는 급격하게 증가할 것이다. 구석에 갇혀 있는 기체처럼 우주에 있는 물질은 거의 밀집되어 있다. 가시적인 질량의 대부분은 항성들에서 발견되고 일부는 행성들에서 발견되는데, 이 질량들은 거의 텅 빈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나는 당시 에딩턴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암흑물질을 무시하고 있다). 우주에는 채워 넣음으로써 엔트로피를 증가시킬 수 있는 빈 공간이 무척 많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조직화는 아주 있을 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주가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화되어 있다는 사실 덕택에, 그리고 우주가 좀 더 무질서한 상태로 이행할 가능성이 큰 까닭에,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우주가 가질 수도 있었던 상태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조직화와 낮은 엔트로피를 가지는 우주의 현재 상태가 신의 존재를 함축한다고 생각한다."(152-3)


"공간과 시간은 상대성이론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 살고 있다. 이제 이 사실의 철학적 함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만약 공간이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면, 만약 공간이 생성된 것이라면, 이는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간과 시간 모두 빅뱅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이전'이라는 단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묻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전이라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두 사물 사이의 거리가 0보다 작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묻는 것과도 같다. 만약 당신이 고전적 물체를 절대영도보다 낮은 온도로 만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 경우 아무런 운동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보다도 운동이 더 느려질까? 이러한 질문들은 대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의미한 질문들이기 때문이다."(166)


"초기의 우주는, 당신이 이를 무한한 공간에서 떠다니는 밀집된 암석 덩어리로 생각하든 르메트르 모형처럼 우주 전체를 채우고 있는 질량으로 생각하든, 밀집된 상태였다. 공간이 물질 주변에서 생성되면서 점점 공간이 넓어졌고, 이는 물질과 에너지가 분포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간의 팽창은 물질이 가질 수 있는 상태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했다. 공간의 생성은 추가적으로 접근가능한 상태들의 추가적인 엔트로피를 위한 빈 공간이 많음을 의미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빅뱅에서 일어난 일이다. 더 넓은 공간이 제공되면서 이전의 좁은 공간에서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있었던 물질은 더 넓어진 새로운 공간에서는 더 이상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있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설명은 지금의 낮은 엔트로피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며, 이는 에딩턴에 따르면 시간의 화살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167-9)


"그러나 이 책이 출판된 2016년 현재, 즉 시간의 화살을 설명하기 위한 에딩턴 이론이 제시된 지 88년이 지났지만 이에 대한 단 하나의 실험도 없었다. 어떤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고, 심지어 단 하나의 실험도 제안되지 않았다. 혹시 그런 실험이 있었을까? 만약 특정한 효과들이 에딩턴의 엔트로피 화살 이론과 일치한다고 드러났다면, 이 효과들은 엔트로피 화살 이론을 증명했다고 널리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들이 보이지 않으면 그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는 이론에 반하는 증거라고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에딩턴의 이론은 예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오직 현상을 '설명해줄' 뿐이다. 예측을 하지 않는 이론은 반증될 수 없다." "국소 중력은 시계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국소 엔트로피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밤에 지구 표면의 엔트로피가 떨어질 때, 우리는 시간 흐름의 변동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국소적으로 느려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206-7)


"에딩턴이 알고 있었던 엔트로피는 지구, 태양, 태양계, 다른 별들, 성운, 별빛 등과 같이 우리가 보고 탐지할 수 있는 것들의 엔트로피였다." "그러나 펜지어스와 윌슨이 우주 마이크로파 복사를 발견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막대한 양의 엔트로피가 최초로 드러났다. 마이크로파 복사는 1세제곱미터당 많은 양의 엔트로피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다른 평범한 물질과 달리 이는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이 마이크로파의 엔트로피가 모든 별들과 행성들의 엔트로피보다 대략 1,000만 배 정도 더 클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와 같은 우주 마이크로파의 막대한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서 어떻게 바뀔까? 놀랍게도 이 엔트로피는 변하지 않는다.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서 마이크로파가 더 많은 공간을 채우지만 마이크로파는 에너지를 잃는다. 마이크로파가 가진 엔트로피의 총합은 일정하다. 별들의 엔트로피보다 훨씬 큰 이와 같은 엔트로피의 거대한 저장소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앞으로 흘러간다."(207-8)


"1970년대 이래로 질량 없는 입자들의 집합이 가지는 엔트로피는 우주가 팽창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핵심은 초기 우주에서 모든 물질의 엔트로피는 질량이 없고 열평형을 이룬 입자들 뭉치 속에 있었고 증가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시간의 화살이 진정 엔트로피 증가 덕분에 나아가고 있었다면, 초기 우주에는 시간의 화살이 없고 시간이 멈추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 시기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정지함에 따라서 우주 팽창 역시 정지했을 것이다(또는 결코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우주는 팽창했고 질량 없는 입자들로 구성된 아일럼─빅뱅 이론에서 초기 우주를 채우고 있는 물질로 상정한 아주 조밀하고 뜨거운 플라즈마─은 식었으며 힉스 장은 자발적 대칭성 붕괴 덕분에 작동하여 입자들은 마치 질량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다."(215)


"빅뱅의 발견과 함께 우리는 시간의 화살이라는 주제를 진정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 엔트로피 기제는 실제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과연 엔트로피가 필요한가? 만약 우리가 우주를 시공간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왜 우주는 공간의 측면에서만 팽창해야 하는가? 시간에서도 팽창할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사태는 분명히 그렇다. 매초마다 우리는 시간에 새로운 초를 더하는 셈이다. 아마도 시간의 흐름이란 이렇게 새로운 시간의 생성으로 생각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도전적인 질문을 한 바 있다. 당신이 두 순간의 우주에 대한 완벽하고 신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떤 순간이 먼저인지를 묻는다고 하자. 당신은 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내가 제시했던 답은 두 순간 각각의 엔트로피를 계산하라는 것이었다. 두 순간 중 낮은 엔트로피를 가지고 있는 쪽이 먼저 등장한 순간이다. 그 대신 당신은 우주의 크기를 살펴볼 수도 있다. 더 작은 우주가 더 먼저인 우주다."(240-1)


3부 유령과도 같은 물리학


"슈뢰딩거의 고양이에게 삶/죽음 진폭은 그것을 제곱했을 때 특정 시간대의 끝에서 어떤 확률이 얻어지는지를 알려주는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진폭이 위치와 시간에 의존한다면 그 진폭은 파동함수라 불린다. 고양이 이야기를 만든 슈뢰딩거는 파동함수가 외부 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떻게 파동함수가 시간과 공간에서 이동하고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방정식인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들었다. 파동함수는 공간을 통과하거나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를 기술할 수 있다. 화학에서 파동함수는 '오비탈orbital'이라 불린다. 파동함수는 점과 같은 것이 아니라 퍼져 있으므로, 입자의 (탐지될) 위치가 불확실하다. 파동함수의 패턴에 의해서 정의되는 입자의 속도 역시 불확실하다. 모든 파동함수는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며, 입자의 에너지는 진동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데, 이때 아인슈타인이 광자에 대해 발견한 것과 동일한 공식인 E=hf를 따른다."(253-4)


"당신이 측정을 하면 파동함수는 '붕괴하여' 당신의 측정 결과와 일치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붕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변화가 파동함수를 전형적으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보기 위해 상자를 열면 파동함수는,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고양이를 나타내기 위해 붕괴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측정의 단순한 결과이며, 이 결과에는 죽어있으면서도 살아 있는 이상한 조합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저 죽어 있거나 살아 있을 뿐이다. 이러한 파동함수는 진정 유령과도 같다. 파동함수 자체는 측정되지 않는다. 함수의 모든 점들은 대개 두 개의 수로 구성되어 있으며(실수부와 허수부), 만약 중첩이 있으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측정을 하면 새로운 파동함수는 훨씬 단순해진다. 이것이 보른-하이젠베르크의 코펜하겐 해석 중 일부이며, 여전히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를 양자컴퓨터에 이용함으로써 파동함수의 숨은 유령과 같은 측면들을 이용하고자 시도하고 있다."(254-5)


"파동함수의 붕괴는 빛의 속도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한 좌표계에서는 파동함수의 붕괴가 시간에 역행할 수 있다. 파동함수가 실재와 유일하게 연관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파동함수를 조사할 때, 우리가 파동함수가 나타내는 입자의 위치 또는 에너지를 측정하고자 시도할 때뿐이다. 양자물리학을 따르면 우리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할 때 파동함수는 우리의 직관을 위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자물리학의 방정식들은 가령 전자의 파동함수에 당신이 힘을 가했을 때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파동함수가 실제로 전자는 아니다. 파동함수의 진폭은 전자의 정신, 유령, 영혼이다. 우리는 결코 파동함수를 탐지하거나 측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그것을 계산하거나, 한 점에서 그 값을 조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측정을 함으로써 그러한 조사를 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영원히 파동함수를 변화시킨다."(258-9)


"('나비 효과'로 대변되는) 혼돈은 행성들의 움직임, 날씨의 패턴, 개체군 동태론 등에서 관측된다. 혼돈에 관한 수학 이론은 최소한 초기에는 작은 변화의 결과가 시간에 따라서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무한소의 정밀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혼돈의 효과는 많은 경우 한정되어 있다. 때때로 결과는 단순히 두 개의 아주 제한된 행태 사이를 왔다갔다 반복한다. 지수함수적 증가는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나비들이 날개를 펄럭이더라도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온다. 기후 변화는 나비보다는 더 큰 원인을 필요로 하는데, 예를 들자면 지구의 궤도 변화나 수십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내로 주입하는 것이다." "혼돈 이론은 인과성 또는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이론은 단지 먼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외적인 정확성을 갖춘 측정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점에서 혼돈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270)


"아인슈타인 이후 디랙의 시기 전까지 진공은 텅 빈 공간으로 생각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절대공간에 대한 운동이 탐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에테르는 죽어서 물리학의 어휘 목록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진공이란 무엇인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디랙은 진공이 음-에너지 전자들로 차 있다고 주장했다. 진공은 무엇인가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대의 음전하 및 무한대의 음-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공에 부여된 이 모든 구조에도 불구하고 진공을 통과하는 운동은 여전히 측정될 수 없었다. 디랙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수학 범위 내에서 구성되었으며, 음-에너지 전자들로 넘실대는 바다에 대한 운동은 탐지될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래된 에테르가 다시 태어난 셈이었다. 에테르는 물리학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진공'이라고 부른다."(306-7)


"오늘날 우리는 진공이 끊임없이 물질과 반물질을 생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물질과 반물질은 블랙홀 근처를 제외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면모는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복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호킹의 이론은 슈바르츠실트 표면 근처의 강력한 중력장이, 배경이 되는 물질과 반물질 쌍을 서로가 소멸되기 전에 분리시켜, 하나는 블랙홀 쪽으로 끌어들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히 먼 곳으로 방출시킬 때 일어나는 복사를 발견법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진공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진공을 하나의 사물처럼 다룬다. 진공은 (최소한 탐지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움직이지 않으며, 팽창할 수 있다. 이는 빅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이다. 진공은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불변하는 힉스 장을 포함하며, 힉스 장은 입자에게 질량을 부여한다. 진공은 우주의 팽창 가속의 원인이 되는 암흑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 진공은 맥스웰이 상상했던 기어와 바퀴들의 더미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다."(308)


"디랙의 방정식에서는 곱 Et와도 같이 에너지의 항이 항상 시간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디랙의 양전자는 음의 부호를 가진 항인 -Et를 포함하고 있었다. 디랙은 음의 부호가 음의 에너지를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파인만은 방정식이 음의 시간과 결합한 양의 에너지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역행하는 시간 개념이 어리석게 들릴 수 있으나, 이 개념이 음-에너지 전자들로 찬 무한대의 바다 개념보다도 더 황당한가? 파인만은 시간 역행을 처음으로 고려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를 자세한 이론으로 구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양전자가 실제로는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전자라고 제안했다. 이러한 관점은 왜 양전자가 전자와 같은 질량을 가지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사실 전자였으며 양의 에너지를 가진다. 사실상 전자는 음의 전하를 유지하며, 전자의 시간 역행 이동이 양의 전하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할 뿐이다. 무한대의 음-에너지 바다는 사라졌다. 음의 부호는 에너지에서 시간으로 이전됐다."(309)


4부 물리학과 실재


"괴델의 정리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진술될 수 있다. 즉 '모든 수학적 이론들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당신이 고안하는 모든 수학적 체계 안에는 증명될 수 없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진리는 진리라고 식별되지조차 않을 것이다. 괴델이 수학이 불완전함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정의, 공리, 정리로 구성된 어떤 집합도 필연적으로 불완전함을 증명했을 뿐이다." "가령 모든 짝수가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독일 수학자 크리스티안 골드바흐의 추측을 보자. 이 아이디어 역시 증명되지 않았으며 이것의 참을 결정할 수 있는 경험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정리를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하다고 식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당신이 이러한 정리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다면, 이 정리의 참됨에 대한 증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정리들은 단 하나의 반례만 있어도 반증될 수 있다. 이는 괴델의 정리들에 대해서는 가능하지 않다."(330-1)


"모든 수학은 물리적 실재 바깥에 있는 지식이다. 경험상으로 우리는 수학의 규칙들이 근사적으로 참임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정확할까? 아니면 3-4-5 삼각형의 최대 내각이 90도가 아니라 단지 89.999999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당신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가? 물리학에 의해서, 측정에 의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굽은 공간에서 이 각은 90도가 아님이 드러난다.) 수학은 실험적 시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기 일관성에 의해서 진리를 탐구한다. 당신은 한 점을 지나는 서로 다른 직선이 결코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고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상정할 수도 있다. 첫 번째 가정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기초이고, 두 번째 가정은 일반상대성이론의 닫혀 있고 휘어진 시공간에 대해서 참이다." "√2가 무리수임을 발견한 피타고라스학파의 히파소스는 물리적 검증이 허용되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비물리적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341-2)


"물리학자들은 대개 수학을 과학의 일종으로 포함시킨다. 모든 것이 경험적으로 시험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의 '귀결'을 시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2가 무리수라는 것을 안다. 즉 √2는 두 개의 정수 간의 비율로 기술될 수 없다. 이 주장은 만약 우리가 √2를 제공하는 두 개의 정수를 찾아낼 경우 반증될 수 있다. 오직 추상적이고 자기 일관적인 수학의 영역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리학자들은 양자 진폭과 파동함수라는 측정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사용하지만, 이들에 대해서 당혹해하며 이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다. 물리학자들은 언젠가 양자 진폭과 파동함수를 제거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와 더불어 물리학자들은 이들에 대한 해석에 관해 말하기를 피한다. 물리학은 물리학이 실패하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이 생산해내는 기적들에 의해서 그 타당성을 얻는다. 라디오, 레이저, MRI, 텔리비전, 컴퓨터, 원자폭탄 등등이 그렇다."(345-6)


"특정한 아이디어를 지지하기 위해 쓰인 〈과학에 따르면······〉이라는 구절을 마주쳤을 때, 아주 많은 경우에 이 아이디어가 과학에서 실제로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많은 경우 이 아이디어는 가면을 쓴 물리주의다." "우리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예측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언젠간 인간의 행동이 완전히 결정론적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는 평균적으로 방사성 탄소가 수천 년 안에 붕괴할 것임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이 평균적으로는 자신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인간들을 생산해낼 수 있게 하는 의사결정을 내릴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설사 당신이 이와 같은 최소한의 과학적 결론을 받아들이다고 해도, 이는 윤리적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가치들에 기초한 의사결정을 위한 많은 여지를 남겨놓는다. 과학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포함하지 않고서도 인간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346-7)


"상대성이론까지도 포함하는 고전 물리학은 결정론적이었다. 우주는 인과적이었다. 과거는 미래를 완전히 결정했다. 이는 원리상으로는 이전 사건들에 의해서 행동조차도 결정됨을 암시했다. 이후 이루어진 혼돈 이론의 발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는 우리가 과거를 결코 잘 알지 못할 것임을 암시했지만, 이는 결정론의 논변을 바꾸지는 못했다. 인간의 행동을 포함하는 모든 행동은 예정되어 있다. 칼뱅주의자들이 옳았다. 철학자들로서는 물리학자들의 발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어려웠다. 물리학의 급속한 발전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물리주의의 철학(또는 종교?)에 신뢰를 부여했다." "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결론이 기초하고 있는 바로 그 전제가 거짓임이 밝혀졌다. 이 논증─물리학은 자유의지가 환상임을 보여주었다는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리학이 인과적이지 않으며, 입자들의 미래의 행태는 과거의 경험들보다 더 많은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358-9)


"베바트론을 이용한 실험에서 나는 동일한 두 개의 '파이온pion'(파이 중간자pi meson)을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시각에 붕괴했다. 두 파이온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들의 파동함수는 서로 동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간섭은 이들의 파동함수가 동일함을 보여주었다." "파이온이 정말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파이온이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인간중심적인 처사일 것이다. 오히려 이 예는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는 물리주의자의 주장이 물리적 관측에 의해 반증되었음을 보여준다. 동일한 입자들은 동일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혼돈을 없앨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정확성으로 과거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특정한 중요 측면들은 예측될 수 없다. 자유의지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역사적 논증이자 고전 물리학의 성공을 형성했던 그 논증, 물리학이 결정론적이라는 논증은 그 자체로 하나의 환상이었던 것이다."(360-1)


5부 지금


"조각그림 퍼즐을 맞출 때 진정한 장애물은 빠진 조각이 아니라 잘못된 곳에 맞춰져 있는 조각이다. 시간의 방향에 대한 엔트로피 설명은 그처럼 잘못 맞춰진 조각이다. 문명은 엔트로피의 증가가 아니라 국소적인 엔트로피 감소를 근거로 성립되었다." "지구의 엔트로피는 지구 핵이 식어감에 따라 줄어들고 있다. 국소적 엔트로피 감소는 생명 전파와 문명의 특성이다. 시간을 엔트로피의 '감소'와 연관시키는 것은, 멀리 떨어진 블랙홀의 변화가 아니라 국소적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에서 두드러진 장점을 가진다. 사실 궁극적으로는 엔트로피 감소가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땅과 공기에서 조직화되지 않은 영양소들을 가지고 와서, 이들을 가장 먼저 음식으로 만들고(식물 생산을 통해), 살로 만들고(음식 섭취와 소화를 통해), 이로써 성장하고 학습한다. 결국 우리 몸의 엔트로피가 극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오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을 죽음이라고 부른다."(377-8)


"빅뱅은 3차원 공간의 폭발인가? 그렇다. 그러나 시공간을 통일하고자 하는 정신에 더 가까운 좀 더 합리적인 가정은 빅뱅이 4차원 '시공간'의 폭발이라는 것이다. 허블 팽창에 의해 공간이 생성되고 있는 것처럼 시간 역시 생성되고 있다. 새로운 시간이 연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것은 시간의 방향과 진행 속도를 결정한다. 매 순간 우주는 조금씩 커지고 시간은 좀 더 많아지며, 이처럼 확장되는 시간의 앞 모서리를 우리는 '지금'이라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공간의 연속적 생성을 반직관적인 것처럼 여기지만, 시간의 연속적 생성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매 순간 새로운 시간이 나타난다. 새로운 시간이 바로 '지금' 생성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우주의 엔트로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빅뱅 그 자체에 의해서 설정된다. 미래는 아직까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계속 생성되고 있다. '지금'은 경계선이자 충돌의 전방이며, 무로부터 생성되는 새로운 시간이자 시간의 앞 모서리다."(379-80)


"시간 축은 (대부분의 경우) 또 다른 하나의 공간 축처럼 취급된다. 시간의 진행이라는 특별한 측면은 완전히 빠져 있다. '지금'은 이 축 위에 있는 또 하나의 점일 뿐이고, 미래는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경험되지 않았을 뿐인 것처럼 여겨진다. 시간여행은 그러한 '지금'을 변경시키는 것, 이 축을 따라 앞쪽 혹은 뒤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4차원 빅뱅의 앞 모서리다. '지금'은 방금 막 생성된 순간이다. 진정한 시공간 다이어그램의 시간 축은 무한대까지 확장되지 않는다. 시간은 '지금'에서 멈춘다." "나는 현재와 과거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먼 미래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미 그렇게 된 것은 그렇게 된 것이다. 아직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물리학 법칙들로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우리는 물리학 그 자체만으로 결정론을 성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382-3)


"'지금'은 우리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며, 우리가 스스로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을 틀어서 국소적 엔트로피가 감소할 수 있도록 지휘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와 같은 국소적 감소는 확장된 생명과 문명의 원천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엔트로피를 방향 잡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자유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 능력을 물리주의자들은 환상이라고 부르지만, 오늘날의 양자물리학 이론은 이와 유사한 행동을 그 본질상 내장하고 있다." "자유의지란 결정을 내릴 때 비물리적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유의지는 접근 가능한 미래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멈추지 않지만, 접근 가능한 상태들에 대한 통제를 발휘하며 이를 통해 엔트로피에게 방향을 부여한다. 자유의지는 찻잔을 부수는 일에도, 새로운 찻잔을 만드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 자유의지는 전쟁을 벌이는 일에도, 평화를 찾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3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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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기묘한 양자 - 과학이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장 기묘한 6가지 이야기
존 그리빈 지음, 강형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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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양자 해석의 필요성


미스터리 1. 파동인가, 입자인가


"1974년에 세 명의 이탈리아 물리학자인 피에르 조르조 메를리, 지안 프랑코 미시롤리, 줄리오 포치는 전자들에 대해서 두 개의 구멍 실험─파인만의 이중 슬릿 실험으로 빛의 파동 성질을 증명함─과 동일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기법을 발전시켰다." "이 '단일 전자 이중슬릿 회절' 실험에서 전자들은 상당히 여유 있는 간격으로 발사되었다. 전자 발사 장치와 탐지 스크린 사이의 거리는 10미터였고, 각각의 전자는 앞서 출발한 전자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야 비로소 출발했다. 실험을 통해 순차적으로 수천 개의 전자들이 발사되었을때 이들은 탐지 스크린 위에 간섭무늬를 만들었다. 개별 입자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시간과 공간 모두에 걸쳐 일어난 것이다." "빛의 이중 슬릿 실험과 동일한 실험에서 전자들은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하면 각각의 전자는 탐지 스크린 위에 하나의 빛 방울을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방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치 자신들이 파동인 것처럼 간섭무늬를 형성한 것이다."(22-5)


미스터리 2. 유령과 같은 원격 작용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방정식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두 전자에 대해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예측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보존 법칙이 적용되는데, 이 법칙에 따르면 전자들은 반대의 스핀, 즉 하나는 위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 방향인 스핀을 가져서 결과적으로는 두 스핀이 서로 상쇄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방정식에 따르면 방출원에서 방출되었을 때 전자들은 명확한 스핀을 갖지 않는다. 전자 각각은 위 방향과 아래 방향 상태가 섞여 있는 중첩superposition이라고 불리는 상태로 존재하며,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확률의 규칙에 따라서 어떤 스핀을 가질지 '결정'할 뿐이다. 만약 전자들이 서로 다른 스핀을 가져야 한다면, 전자 A가 위 방향 스핀을 갖도록 '결정'하는 순간 전자 B의 스핀은 아래 방향이 돼야 한다. 이는 두 전자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지상관이 없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유령과 같은 원격 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 불렀다."(37-8)


해석 1. 코펜하겐 해석─우리가 바라보지 않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전자를 하나의 작은 당구공이라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실험은 전자의 운동량을 측정하고 전자가 입자라는 우리의 개념을 입증한다. 또한 우리가 전자를 파동이라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실험은 파장의 값을 측정하며 전자가 파동이라는 개념을 입증한다. 그게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고 닐스 보어는 말한다. 그저 당신이 입자를 찾을 때 전자가 마치 입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당신이 파동을 찾을 때 전자가 마치 파동인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전자가 입자 또는 파동이거나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이 보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볼지에 대해 내린 선택에 의존한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전자와 원자 같은 양자적 개체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는 이 개체들이 그 누구도 이들을 측정하지 않을 때─혹은 누구도 이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58-9)


"상자 안에 갇힌 하나의 전자를 생각해보자. 확률 파동은 상자 안을 고르게 채우도록 퍼져 있고, 이는 상자 안의 임의의 위치에서 전자를 찾을 확률이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제 상자 중간에 칸막이를 세워보자.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전자는 상자의 두 부분 중 한 부분에 갇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은 여전히 확률 파동이 각각의 절반 모두를 채우고 있으므로 분할된 부분 중 하나에서 발견될 확률이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제 상자를 아예 두 부분으로 분리시켜보자. 반쪽 상자는 당신의 실험실에 그대로 두고, 나머지 반쪽 상자는 화성으로 가는 로켓에 실어 보내자. 보어에 따르면 전자가 연구실에 있는 상자나 화성에 있는 상자에서 발견될 확률은 50 대 50 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실험실에서 상자 안의 내용물을 검토하는 경우에만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EPR '역설'과 슈뢰딩거의 유명한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에 관한 퍼즐의 근저에 있는 핵심 개념이다."(60-3)


"내가 학생 시절 배웠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한 대표적' 방법으로 여겨지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실험의 한쪽에서 전자는 하나의 입자로서 전자총이라는 원천으로부터 방출된다. 그 직후 전자는 실험 전체에 퍼져 있는 '확률 파동'으로 변해서 실험의 다른 한쪽에 있는 탐지 스크린을 향해 나아간다. 이 파동은 얼마나 많은 구멍들이 열려 있든 관계없이 구멍들을 통과해 나가면서 적절한 방식으로 그 자신과 간섭하거나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탐지 스크린에는 확률의 패턴으로서 도달한다. 어떤 곳은 다른 곳보다 확률이 높고 다른 곳은 더 낮게 스크린 전체에 퍼진다. 탐지 스크린에 도달하는 순간 파동은 '붕괴하여' 입자로 다시 돌아오며, 탐지 스크린 위에서 입자의 위치는 무작위적이기는 하지만 확률의 규칙을 따른다. 이것은 '파동함수의 붕괴'라고 불린다. 전자는 파동과 같이 움직이지만 입자와 같이 도착한다."(63-5)


해석 2. 파일럿 파동 해석─세계는 우리가 바라보기 전까지 숨어 있다


"드 브로이의 '파일럿 파동pilot wave' 해석은 파동-입자 이중성을 설명하는 가장 자연스럽고 명백한 방식이다. 그는 (전자와 같은 개체가 파동이자 입자라고 말하는 대신) 파동과 입자 모두가 실재하며, 파동이(이후 '파일럿 파동'으로 알려진다) 입자를 그 목적지까지 안내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바다에서 서퍼가 파도를 타는 것과도 같다. 두 개의 구멍 실험에서 파일럿 파동은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하여 퍼진 후 그 자신과 간섭하여 간섭 파동의 무늬를 만든다. 실험에서 발사되는 입자들은 처음에 출발할 때 속력과 방향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약간씩 다른 방향으로 서핑을 타며, 탐지 스크린에 간섭무늬를 만드는 파동들을 따라간다. 우리는 입자들의 속성은 측정하지만 결코 파동의 속성은 측정할 수 없다. 입자들의 행동으로부터 파동의 존재를 추론할 뿐이며, 입자들은 탐지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접근법은 '숨은 변수 이론'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75-6)


"잘 섞인 카드 한 벌이 유용한 비유를 제공한다. 그와 같은 카드 한 벌이 양자물리학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작다고 상상하자. 당신은 초현미경과 같은 장치를 가지고 카드를 한 번에 한 장씩 들춰볼 수 있다. 숨은 변수 이론에 따르면, 당신이 가장 위에 있는 카드를 뒤집을 때 당신이 보는 값은 그 카드 한 벌에 허용되는 52개의 가능성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된다. 붉은색의 카드를 볼 확률은 50 대 50이고, 클로버 5 카드를 볼 확률은 1 대 52 등등이다. 카드의 값은 당신이 보기 전까지는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 카드는 당신이 보지 않을 때도 항상 그 값을 갖고 있었다(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실제로는 변수가 아니다!). 첫 번째 카드를 본 다음에는─그 카드가 정말 클로버 5였다고 하자─클로버 5를 발견할 확률은 이제 0이며, 붉은색 카드를 찾을 확률은 49 대 51 등등이 된다. 이를 당신이 보기 전까지는 카드가 어떤 값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코펜하겐 해석과 대조해보라."(76-7)


"데이비드 린들리는 그린에서 퍼팅을 연습하는 골프 선수의 비유를 제시한다. 골프 선수는 매번 동일한 홀을 향해 골프공을 치지만, 각각의 공은 골프 선수의 퍼팅 기술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사소한 변수들로 인해 약간씩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린의 표면 역시 완벽하게 매끄럽지는 않다. 따라서 각각의 공은 약간씩 다른 방향을 따라 약간씩 다른 거리를 간다. 이때 공이 그려낸 패턴은 골프공들이 지나간 표면의 불규칙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표면의 정확한 형태를 알고 공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속력과 방향을 정확하게 안다면, 원리상 각각의 공이 도달하는 최종적인 위치는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파일럿 파동 해석은 결정론적이며, 파동함수의 붕괴와 결부되는 우연의 요소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파동함수의 붕괴 그 자체를 없앤다. 모든 입자는 항상 명확한 속성을 갖고 있다. 잘 섞인 카드 한 벌 속의 카드들처럼, 우리가 보기 전까지 그 속성이 무엇인지 모를 뿐이다."(77-8)


해석 3. 다세계 해석─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평행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다


"슈뢰딩거의 지적처럼, 방정식들에는 (그의 유명한 파동방정식을 포함해서) 붕괴에 관한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 붕괴는 바로 보어가 왜 우리는 실험 결과로서 오직 하나의 결과만을─죽어 있는 고양이 또는 살아 있는 고양이만을─보고 혼합물 즉 상태들의 중첩은 보지 못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론에 덧붙여놓은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의 결과─파동함수에 대한 하나의 해─만을 탐지한다고 해서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대안적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슈뢰딩거의 용어들을 정리해보면, 두 개의 평행한 우주 또는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의 우주에서는 고양이가 살아 있고 다른 우주에서는 고양이가 죽어 있다. 하나의 우주에서 상자를 열 때 죽은 고양이가 발견된다. 다른 우주에서는 살아 있는 고양이가 발견된다. 그러나 두 세계는 항상 존재했고, 그 끔찍한 장치가 고양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 전까지 서로 완전히 동일했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파동함수의 붕괴는 없다."(90-1)


"휴 에버렛은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과정이던 1955년에 자신의 학위논문 초고에서 이 생각을 전개했는데, 여기서 그는 이 상황을 아메바가 두 개의 딸세포로 분열하는 것에 비교했다. 만약 아메바에게 뇌가 있다면 각각의 딸세포는 분열되기 이전까지의 동일한 역사를 기억할 것이고 그다음부터는 자신의 고유한 개별적 기억을 가질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양이의 예를 들자면, 우리는 그 끔찍한 장치가 격발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우주와 한 마리의 고양이만을 갖지만, 장치가 격발되고 나면 두 개의 우주와 그 각각에 존재하는 고양이 등등을 갖는다." "에버렛은 그 어떤 관측자도 다른 세계의 존재를 결코 알 수 없긴 하지만 우리가 다른 세계들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세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우리가 지구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타당하지 않다."(93-4)


"우주적인 파동함수는 시간 속 특정한 순간에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의 위치를 기술한다. 그러나 이 함수는 또한 그 순간에 그 입자들의 모든 가능한 위치를 기술한다. 그리고 이 함수는 시간 속 임의의 순간에서 모든 입자의 모든 가능한 위치 또한 기술한다. 비록 가능성의 수는 시간과 공간의 '양자적 입상성'에 의해 제약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단일한 파동함수는 모든 가능한 시간에서의 모든 가능한 우주들을 기술한다. 그러나 이 함수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간 상태들은 이들이 기술하는 사건들에 의해서 질서지어질 수 있고 이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지만, 이 상태들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지는 않는다. 모든 상태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친숙하게 생각해온 시간은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에서는 '흐르지 않는다.'"(105-7)


해석 4. 결여긋남 해석─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우리는 그 일부를 알 뿐이다


"결어긋남 해석의 옹호자들이 옳다면 양자성과 일상적 세계 사이의 경계는 크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결맞음에 의존한다. 앤서니 레깃은 당신의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크거나 이보다 더 큰, 이른바 '거시적' 대상들의 행동을 기술하는 데 여전히 양자역학의 규칙들을 이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한 실험을 고안하고자 결심했다." "그는 SQUID(초전도 양자 간섭 장치)를 순환하는 전류에 전자기장을 이용해 수정을 가했다. 이 실험은 반지를 따라 맴도는 전자 파동이 마치 단일한 양자적 개체와 같이 행동함을 보여주며, 이는 원자보다 1억 배 더 큰 크기다." "21세기 초에 수행된 실험들은 파동이 반지의 두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일 때 일어나는 효과들을 보여주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파동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파동들이 한 번에 두 방향으로 가는 것, 즉 중첩인 것이다. 대상의 양자성을 결정하는 것은 대상의 크기가 아니라 파동의 결이 맞는다는 사실이다."(111-4)


# 파동의 결이 맞을 때 특징적인 양자 상태를 보여주며, 파동들의 결이 어긋나면 양자성을 보여주는 것을 멈춘다.


"그렇다면 '순수한' 양자적 개체가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여 '결이 어긋날 때'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때는 얽힘이 '덜'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해진다." "(양자적 상태가 중첩된) 얽힘은 속담 속의 산불보다도 더 빨리 퍼지므로 실질적으로 외부 세계와 분리된 '순수한' 양자적 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원래의 입자와 상호작용했던 모든 것과, 그 모든 것이 지금까지 상호작용했거나 접촉했던 모든 것들이 중첩된, 두 개의 얽힌 계가 존재할 따름이다. '결어긋남'은 실제로 전체 세계─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단일한 양자계로 연결하는 것을 포함한다." "필립 볼이 지적했던 것처럼, 결어긋남은 관측 가능한 우주 속의 기본 입자들보다 많은 양자적 상태들의 중첩과 동등한 비결맞음incoherent 상태를 아주 빠르게 생성한다." "결어긋남은 더 큰 대상들에게서 더 빨리 일어난다. 왜냐하면 이 대상들 안에는 다른 사물들과 그리고 서로 간에 상호작용할 수 있는 비트들이 더 많이 있기 때문이다."(116-8)


"몇몇 연구자들은 결어긋남 해석의 사고방식을 우주의 전체 역사─혹은 역사들─에 적용했다." "만약 모든 '측정', 모든 양자적 상호작용이 가능한 역사들의 배열 속에서 선택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을 역행하여 결어긋남을 통해 일관된 역사들의 판본들을 걸러내며 빅뱅에까지(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으나 나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겠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최초 시작점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임의의 양자적 상호작용이 일어나자마자 몇몇 가능성들은 배제되고 서로 다른 우주들의 다양성은 줄어든다. 즉 일관된 과거의 우주들의 범위는 줄어든다. 이러한 과정은 현재까지로 이어져, 가능성의 세계들로부터 우리 우주의 역사를 선택하게 된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직 우리 우주만이 선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어긋남 역사 접근법은 유일한 우주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경로를 통해 다세계라는 주제의 한 변형으로 돌아오게 된 셈이다."(119-22)


해석 5. 앙상블 해석─존재 가능한 모든 것은 공간을 뛰어넘어 상호작용한다


"일상 언어에서 앙상블은 몇몇 공통된 속성을 갖거나 함께 작동하는 것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통계학자에게는 600개의 동일한 주사위들의 집합체가 앙상블을 이루는데, 만약 이러한 주사위들을 한꺼번에 굴릴 경우에 우리는 확률의 법칙에 따라 대략 6의 눈 100개, 5의 눈 100개, 4의 눈 100개, 3의 눈 100개, 2의 눈 100개, 1의 눈 100개를 볼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또한 하나의 완벽한 주사위를 600번 굴리는 방법으로도 동일한 통계적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양자물리학자들이 언급하는 종류의 앙상블이다. 기체 분자들로 가득 차 있는 상자는 이러한 의미의 앙상블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방식으로 실험할 수 있는 다수의 동일한 기체 상자들은 앙상블을 구성한다. 이상적 상황에서, 당신은 정확히 동일한 입자에 정확히 동일한 실험을 여러 번 하고 이러한 각각의 '시행' 결과를 확인할 것이다. 그것이 앙상블이다. 시행 결과는 막스 보른이 발전시킨 규칙들에 따라서 확률 분포를 따를 것이다."(129)


"리 스몰린은 '실재적 앙상블 해석'이라는 새로운 판본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앙상블 해석에서 앙상블의 구성원들은 실제로 동시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반면, 스몰린의 앙상블 해석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동시적으로 실재한다. 이러한 논점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 약간의 전문 용어가 필요하다. 앙상블의 가능한 양자 구성 성분들(예를 들어 수소 원자)은 '존재 가능한 것beable'이라 불리는데, 이들은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00개의 주사위를 한 번에 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사위를 600번 굴리는 경우, 이들은 함께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스몰린이 제시한 실재적 앙상블 해석은 앙상블을 이루는 존재 가능한 것들이 하나의 주사위를 600번 굴리는 경우와는 달리 실제로 600개의 주사위들을 함께 굴린 경우와 같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임의의 주어진 시간에 임의의 양자계에서는 존재 가능한 것들의 값들에 의해 결정되는 실재적인 사태들의 상태가 존재한다."(135-6)


"스몰린은 그의 단순한 수학적 규칙들로부터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고전 역학의 법칙들─뉴턴의 법칙들 등─또한 양자역학의 근사로서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양자역학 그 자체가 우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기술에 대한 하나의 근사적 판본이 아닌가 의심하며(사실상 이것이 바로 스몰린이 이 난해한 논의에 참여한 진정한 동기였다), 더 나아가 그는 만약 이러한 의심이 맞다면 진정으로 빛보다 빠른 신호가 발생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당신이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아직 궁극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강력한 힌트는, 존재 가능한 것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유일한 우주적 시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상호작용은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상대성이론의 확장을 요구할 것이다. 스몰린에 따르면 〈양자물리학은 다른 용어들로 공식화되는 우주론적 이론에 대한 하나의 근사임이 분명할 것이다.〉"(140-1)


해석 6. 거래 해석─미래는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


"빛과 모든 전자기 복사의 행동을 기술하는 방정식들은 빛의 속력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고 말하며 오늘날 이는 상수 c로 쓰인다." "빛의 속력이 모든 관측자에게 같음을 말하는 방정식은, 그 방정식을 발견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이름을 따서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맥스웰 방정식'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속성을 갖고 있다. 이 방정식은 시간 대칭적이다. 움직이는 전자와 연관되는 복사에서처럼 전자기 복사를 포함하는 그 어떤 문제에도 항상 이 방정식에는 두 개의 해가 있다. 하나의 해는 이른바 '지연된retarded' 파동을 기술하는데, 파동은 원천으로부터 나와서 시간 속에서 앞의 방향으로 진행하며, 세계 속 어떤 곳에서 흡수된다. 또 다른 해는 이른바 '앞선advanced' 파동을 기술하는데, 미래로부터 출발하는 이 파동은 세계 속 흡수체로부터 나와서 우리가 파동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경우에는 움직이는 전자)으로 수렴한다.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단순하게 이러한 '앞선 파동 해'를 무시한다."(143-5)


"대다수의 물리학자들과 달리 존 크레이머는 이 개념을 양자역학과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플로리다 해변에서 대서양으로 던진 병의 비유를 제시한다. 이 병이 양자적 병이라서 파동 속으로 사라지고 이 파동은 대양 너머로 퍼져 유럽에까지 나아간다고 상상하자. 영국의 어느 해변에 그 병은 다시 나타난다. 그 순간에 전체 대양에 퍼져 있던 파동은 사라진다. 크레이머는 공간 전체를 걸쳐 양자적인 '악수'를 하는 앞선 파동들과 지연된 파동들이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것 그리고 오직 앞선 파동을 '메아리'로 삼은 지연된 파동들만이 입자들의 위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A와 B 사이의 공간을 통과하지 않고서 A에서 B로(또는 하나의 에너지 준위에서 다른 에너지 준위로) 이동하는 신비로운 양자역학적 전이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국에 있는 병으로부터 나온 파동들이 시간을 거슬러 대양을 가로질러 플로리다로 이동했고, 이 파동들이 유일한 연결을 수립하여 다른 파동들을 소거해버린 것이다."(148)


"거래 해석에 따르면 지연된 '제안 파동'은 실험에서 두 개의 구멍을 통해서 퍼져나가고, 탐지 스크린으로부터 앞선 '승인 파동'을 촉발시키는데, 승인 파동은 두 개의 구멍을 거꾸로 이동하여 방출 원천으로 되돌아간다. 각각의 입자는 어떤 제안을 수용할 것인지를 무작위적으로 선택하며, 이러한 선택이 간섭무늬를 만든다. 그러나 만약 이 실험의 또 다른 판본인 정교한 지연된 선택 실험에서처럼, 입자가 그 여행을 떠나고 난 뒤에 두 개의 구멍 중 하나가 닫힌다면 입자는 이미 이에 대해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승인 파동이 악수를 하기 위해 되돌아갈 때 오직 하나의 구멍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의 퍼즐들을 해결하는 데 거둔 이와 같은 성공은 (원인은 항상 현상에 선행해야 한다는 우리의 직관 같은) 상식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단 하나의 개념을 수용하는 것을 그 대가로 삼아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양자 파동의 일부분이 실제로 시간을 거슬러서 이동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156-7)


나오며, 제정신인 말이 하나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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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이해하기 2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7
욘 엘스터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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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역사 이론


제5장 생산양식


5.1. 생산양식에 관한 일반 이론


"마르크스는 '생산력'이라는 용어 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다른 용어들도 사용한다. 노동자의 생산성이나 총산출의 크기를 증진시키는 인과적 효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생산력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요강》에서 〈과학, 발명, 분업, 노동의 결합, 향상된 교통수단, 세계시장의 창출, 기계 등에서 비롯되는〉 생산력의 증가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좁은 의미에서) 생산력의 증가를 '구성'하는 것─예컨대 발명─이 그러한 증가의 '원인'이 되는 것─예컨대 세계시장의 발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나열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후자 그 자체가 생산력의 증가라고 말한 것으로,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생산력의 (최적의?) 발전을 촉진하는 한, 그것도 생산력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사회적 관계는, 만일 그 자체가 생산력이라면, 생산력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각각의 개념이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17-8)


"우리는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이며, 생산관계의 변화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생산관계의 변화가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설명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강압에 의한 생산관계의 변화 같은 경우가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병행한다. 잠재적 잉여가 크면 동시에 현실적 잉여도 크고, 기술적 세련성도 높아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구조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으로 관련 있는 특징이 무엇인지는 밝혀야 한다. 노예제의 붕괴를 그 체제 내의 숙련노동의 사용에 대한 내재적 한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자본주의가 창출한 잉여의 비효율적 사용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흡족한 설명이 아니다. 이것이 노예제의 붕괴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솔깃해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이기 때문이다."(29-30)


# 소유관계와 생산양식

1. 독립 생산자 : 생산자가 생산수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함께 소유한 경우

2. 과도기적 자본주의 :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부분적으로' 소유하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 경우

3. 농노제 : 생산자가 생산수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모두 '부분적으로' 소유한 경우

4. 노예제 : 생산자가 생산수단도 자신의 노동력도 소유하지 못한 경우

5. 자본주의 :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 경우


"1859년의 〈서문〉의 진술을 해석해보면, 각 생산양식의 초기단계에는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이 일어난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형태'로서 그 둘은 서로 '상응한다'. 나중에 생산력의 정체가 일어난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된다. 그러므로 상응과 모순은 각각 기술적 진보와 기술적 정체로 해석된다." "이 독법에 따르면, 상응에서 충돌로의 변화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하위최적 상황일 때 일어난다. 생산력의 발전이 정체되었을 때가 아니다. 생산관계가 하위최적 상황이 되는 것은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올 다른 생산관계가 있을 때이다. 여기에서 비교대상은 현재의 생산관계가 아니라, 반사실적 생산관계이다. 이 경우 하위최적성은 기술적 정체와 우연히 일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정체가 시작되면, 기술적 진보의 여지가 있다고 전제할 경우, 이를 하위최적의 징조로 여기게 된다. 다른 한편 하위최적 상황이 정체 없이 올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바로 이런 경우다."(38-9)


"생산양식의 모순을 생산력의 하위최적 '사용'으로 정의하면, 모순이 왜 정치적 행동을 가져오는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산관계의 수립을 가져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왜 모순이 급속한 기술진보와 함께 등장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생산력을 잘 활용하는 체제에서는 기술변혁의 속도가 오히려 '둔화된다'는 유명한 주장이 있다. 슘페터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낭비와 경기순환이 없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보다 낫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더 못하다. 이 예시는 다음과 같은 일반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어떤 체제든─경제체제든 다른 체제든─모든 주어진 시점에서 그 가능성을 최대로 활용하는 체제는, 장기적으로는 그 어떤 시점에서도 그렇지 못한 체제보다 열등하다. 그렇지 못한 체제의 실패 그 자체가 장기적 성취를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더 나은 사용이 소유권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기라면, 이것이 생산력의 변화율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다."(48)


5.2. 역사적 생산양식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렇다. 세계시장의 창출과 전통적인 농업의 변형이 자본주의적 산업생산 체제와 내수시장을 창출했고, 이 내수시장이 그러한 체제의 확장을 위한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Ⅰ》에서 그는 소규모 소유 생산의, 〈경제적인 이유〉와 관계없는 〈폭력적 수단〉, 즉 (정치적인 이유로 발생한) 엔클로저 운동을 다룬다." "영국에서의 자본주의의 전개는 (엔클로저 운동 같은) 정치적 수단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고, 그럴 때에야 영국에서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에서 엔클로저 운동은 토지를 잃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시장으로 내몰았고, 이로써 도시 자본주의의 필수적 전제조건이 창출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엔클로저 운동은 이로 인해 토지를 잃은 노동자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흡수했다. 따라서 도시 노동자들의 공급은 일반적인 인구증가의 결과였다."(65-7)


"공산주의는 그 체제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최적일 때 (혹은 최적이 되었을 때) 바람직하다. 이것을 공산주의의 객관적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폐기하고자 하는 동기유인이 생겼을 때 가능하다. 이것을 공산주의의 주관적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이 두 조건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서, 경제적·문화적 조건이 사회주의에 딱 맞는 그 순간에 정확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요인이 체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좀 완화하면,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은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 될 것이다. 즉 두 조건 모두 생산력이 일정한 수준으로 발전하면 조성된다는 것이다."(84-5)


"공산주의 혁명의 주관적 조건이 존재하는 가장 빠른 시점을 현실화하기 위해 경제적 발전을 가속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똑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첫째, 노동자들이 봉건·절대·식민 정권에 대해 투쟁에 성공하고 나면, 이들의 투쟁은 이전의 동맹이었던 부르주아 계급을 향하게 되는데, 이 (때 이른) 투쟁을 막기가 어려워진다. 둘째, 부르주아 계급은 이러한 위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미래의 적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용의주도하게 경계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도와 권력을 장악하게 하고, 부르주아 계급과의 싸움에서는 실패하는 것이다. 이 패배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고, 미래의 투쟁을 위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강화시킨다. 노동자들은 굳건해야 하지만,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들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약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93-4)


5.3.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


"통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가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이라고 믿었다. 국지적인 혹은 일시적인 정체가 있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발전단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우연적인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발전의 진보적 성격을 주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준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잉여의 규모이다.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반드시 잉여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잉여는 노동시간의 강제적인 연장을 통해, 혹은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해, 혹은 임금 삭감을 통해 얻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생산성에 변화가 없어도 잉여의 규모는 중단 없이 증대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직접 생산자로부터 잉여를 추출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제도들의 연속이 된다. 이론적 일관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 견해가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를 주장하는 견해보다는 더 그럴듯하다. 계급투쟁과 직접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99-100)


"마르크스는 역사를 단순한 선형 진보의 형태로 보지는 않았다. 역사는 나선형을 보였다. 계급 사회는 일반적으로 퇴보단계를 나타내는데, 자본주의는 특히 그러하고, 인류는 이를 거쳐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진보의 기준은 생산성이나 잉여의 구묘가 아니라 사회적 통합의 정도이다. 전계급 사회의 원시적 통일성은 탈계급 사회의 더 높은 통일성 획득을 위해 붕괴되어야만 한다. 개개인은 전면적으로 일할 수 있는 원초적 능력을 상실하고 전문화된 다음에야 다시 전면적 능력을 회복하고 확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 인간적 발전과 사회적 통합의 중단 있는 진보." "이러한 일반적인 목적론적 전제로부터, 공산주의는 일어나게 되어 있고, 따라서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도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발전도식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작동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100, 107)


제6장 계급


6.1. 계급 정의하기


"계급은 생산요소들,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 또는 비소유의 관계가 동일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소유와 비소유로 정의할 경우 지주와 자본가가 구별되지 않고, 소자본가와 약간의 생산수단을 가진 임금노동자(선대제도의 경우)가 구별되지 않는다." "두 번째 방법은 계급을 착취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모든 착취자를 한 계급에 넣고, 모든 피착취자를 또 한 계급에 넣는 것은 너무 거칠다. 이렇게 하면 서로 다른 착취 계급, 즉 지주와 자본가가 구별되지 않고, 서로 다른 피착취 계급, 즉 동시대에 존재했던 노예와 가난한 자유인이 구별되지 않는다." "세 번째 방법은 시장행위의 관점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것이다. 노동력을 사는 자, 노동력을 파는 자, 사지도 팔지도 않는 소부르주아가 그것이다." "이 방법의 난점은 비시장경제를 연구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25-8)


"시장경제에서는 〈기본재산 구조에서 비롯되는 활동이 계급의 특징〉이다. 이것은 노동 혹은 비노동,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자본의 대부와 차용, 토지의 임대와 임차이다. 첫 번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개념 쌍들은 경제행위자 간의 '관계'를 포함한다. 게다가 노동 혹은 비노동의 속성은 그 자체만으로 계급의 특징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노동 및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 혹은 '비노동 및 토지 임대'와 같은 형태가 된다. 그러므로 계급의 특징은 반드시 관계적이다." "이 기준은 생산요소들의 사적소유에 기초한 비시장경제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한 경제에서는 생산 행위자가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통제의 결여는 소유재산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 인해 통제권을 가진 자가 생산자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물론 소유구조와 그에 따른 행위자의 강제된 활동 사이의 관계는 두 경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130)


# 시장경제에서는 행위자가 시장의 거래에 참여한다는 전제가 있고, 비시장경제(가령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는 거래에 앞서 존재하는 제도가 결정한다는 전제가 있다.


"마르크스는 계급의 기준으로서 재산을 과대평가하고, 권력을 과소평가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일정한 계급 개념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내적 일관성과 이론적 직관에 있어서 그러했다는 뜻이다." "계급 분류를 착취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관계에 따라 결정하더라도, 지배와 복종의 관점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행위만 보고 구조에 대한 고찰은 불충분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가진 것에 의거하여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따라 계급을 나누었지만, 상급 관리자와 하급 관리자는 오로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나누어야만 한다. 록펠러가 하위 관리직에 취직했다고 해서 그의 계급적 지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동력의 고용과 판매를 소유재산에 결부시킨 것처럼, 지배와 복종에 대해서도 그 구조적 기초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 기초는 〈문화자본〉, 〈타고난 기술〉, 〈교육 기회〉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우연이라는 요소도 중요하다.)"(135-6)


"현대 사회학에서는 계급보다는 지위집단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 개념을 창안한 막스 베버는 지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순전히 경제적으로 결정된 '계급상황'과는 달리, 인간 생활의 전형적인 구성요소를 '지위상황'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이것은 '명예'에 대한 특정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사회적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계급은 생산에 대한 관계와 재화의 획득에 따라 계층화된다. 반면에 지위집단은 재화의 '소비'원칙에 따라 계층화된다. 이 소비원칙은 특정한 생활스타일로 나타난다.〉 지위집단은 〈실제로 그러하건 전통적으로 그러하건 그들이 함께 속한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며, 〈당사자의 주관적인 감정에 기초한〉 닫힌 공동체이다. 따라서 동전의 양면처럼 국외자를 배제한다. 이를 기초로 그는 계급에 기초한 사회와 주로 지위에 기초한 사회를 구별한다. 마르크스와는 달리, 계급을 시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대조는 자연스럽다."(137-8)


"내가 이해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 간의 중심적인 관계는 아래로부터의 잉여의 이전과 위로부터의 권력의 행사이다.〉 이 둘은 종종 함께 간다. 노예, 농노, 계약상 지시에 복종해야 하는 임금노동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권력의 행사 없이 잉여가 이전될 수도 있다. 지주에게 지대를 지불하는 자본가, 은행에 의해 착취되는 소생산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반대로 잉여의 이전이 없는 권력 행사도 있을 수 있다. 상급 관리자와 하급 관리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이러한 관계들은 매우 특수한 경우들로서, '더 적게 버는' 그런 관계와는 다르다." "'더 적게 버는' 혹은 '더 착취당하는' 관계들이 분노와 적대를 유발할 수는 있지만, 잉여 이전 및 명령 발령 관계와는 달리, 항구적인 사회적 갈등을 산출하는 힘은 없다. 특수한 초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계층이 갈등, 혹은 '밥그릇 싸움'을 산출할 수 없다고 마르크스가 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갈등은 계급투쟁과 같은 안정성은 없다는 것이다."(151-2)


# '더 적게 버는' 관계의 계층도는 자신보다 많이 버는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상위에 놓는다.


6.2. 계급의식


계급의식은 '공동체', '결합', '조직'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헤겔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요소들이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 자기의식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생긴 후에 그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나에 대한 인식은 당신이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인식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다. 계급의식도 그러한지는 경험적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즉자적 계급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한 계급의 성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한 계급의 성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자신들을 한 계급의 성원으로 인식하게 된다. … 나는 (긍정적) 계급의식을 〈계급이익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무임승차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 노동 계급은 (집합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무임승차자의 배반행위도 극복해야 하고,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해치면서까지 당장의 정치적 가능성을 끝까지 이용하려는 '행동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즉 성숙한 노동 계급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157-61)


집합행위의 효용은 세 가지 변수로 계산된다. 첫째는 '협동의 이익'이며, 모두가 집합행위에 가담했을 때 개인이 얻을 이익과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을 때 개인이 얻을 이익 간의 차이를 말한다. 둘째는 '무임승차자 이익'이며,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집합행위에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과 모두가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 간의 차이를 말한다. 마지막은 '단독행위의 손실'로, 집합행위에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을 때 그가 얻을 이익과 자기 혼자 또는 소수만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헛수고에 든 비용이나 처벌 같은 것─간의 차이를 말한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집합행위의 가능성은 첫째 변수에서 증가하고, 둘째 및 셋째 변수에서 감소한다. … 일반적으로 집합행위는 '개인적으로 불안정'하거나(무임승차의 이익이 커서), '개인적으로 접근 불가능'하다(단독행위의 손실이 커서), 혹은 둘 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행위는 발생하기 때문에 이 장애들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5-6)


# 집합행위의 메커니즘

1. 합리성·이기심 : 노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상호작용 하면, 이들이 어떤 순간에 선택한 행위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 합리성단일 : 한 행위자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관찰되며, 각 행위자는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행동하리라고 예상되는 경우에 협력을 선호한다.

3. 비합리성 : 자신을 어떤 집단의 대표자 또는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정한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는 집합행위의 미시적 기초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임금》 원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이 단결할 필요성이 있고, 이미 단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미래의 계급투쟁을 준비하는 일이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은 그 투쟁이 요구하는 물질적 희생을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경제적 투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투쟁이 발전했을 때 생기는 성숙한 계급의식 자체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부산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어떤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바람직한 상태를 그 행위의 동기목표로 삼은 것이다. 노동자들이 경제적 투쟁에 참여한다면 사용자와 충돌하면서 계급의식이 발전하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경제적 투쟁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투쟁의 지양이 경제적 투쟁에 가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187-8)


6.3. 계급투쟁


"두 계급의 경우, 두 가지 형태의 계급투쟁이 있다. 하나는 두 착취 계급이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분배 몫을 놓고 싸우는 것이다. 전자는 순수 갈등게임, 즉 일정합 게임으로 보인다. 분배할 총량이 투쟁에 앞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계급들은 '순'소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익다툼이 있는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이 그러하듯이 그 게임은 실제로는 변동합 게임이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과,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총산출 자체가 그 투쟁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 비용을 생각해보자. 조직을 건설하고 노조간부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비용만 드는 것이 아니다. 파업이 일어나면 경제활동이 마비되고, 따라서 몫을 요구할 생산물의 크기 자체가 줄어든다. 이 경우 투쟁은 생산에 있어서나 분배에 있어서나 변동합 게임이다. 반면에 착취 계급 간의 투쟁은 분배 측면에서만 변동합 게임이다."(195)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1848년 이전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의 주역은 셋이다. 노동자, 금융자본가, 산업자본가. 전선의 형태는 단순하고 고전적이다. 산업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금융귀족'에 대항하여 동맹을 형성한다. 그런 다음 산업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항하여 금융자본가와 동맹을 맺는 반전이 일어난다." "영국의 계급투쟁에서 영국 공장주들은 토지소유자들과 싸우는 척하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인 노동자들의 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다. 프랑스 공업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부르주아 계급의 다른 분파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노동자들을 억압하려 했다. 영국에서 부르주아 계급 내의 계급협력의 절정은 반곡물법동맹의 해체였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 6월 파리 노동자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절정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에서는 지배 계급이 노동 계급의 계급의식 형성을 막기 위해 협력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협력하였다. 최소한 마르크스는 그렇게 보았다."(211-3)


"계급투쟁이 사회적 갈등의 전부는 아니다. 비계급적 집합행위자들의 투쟁도 계급투쟁 못지않게 폭력적으로 전개되고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페인의 지역갈등, 아일랜드나 중동의 종교갈등, 미국이나 남미의 인종갈등, 벨기에의 언어적 갈등, 폴란드의 민족주의 등도 계급갈등만큼이나 강력하고 파장이 큰 사회적 갈등이다." "마르크스는 객관적으로 정의된 계급은 계급의식을 획득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사라지며, 비계급적 집합행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화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러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틀렸다. 다른 계급이 무대에 등장했다. 법인재산 혹은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농민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적인 통신수단 덕분에 다른 계급에 버금가는 계급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근대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조직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옳았다."(219-20)


제7장 정치와 국가


7.1. 국가의 본질과 국가에 대한 설명


"국가는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정의될 수도 있고,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 정의될 수도 있다. 베버의 정의, 즉 폭력의 합법적 사용의 독점이라는 정의는 둘째 유형에 속한다. 마르크스는 기능의 관점에서 국가를 정의한다. 이점에서 그는 정치 이론의 전통, 혹은 전통 중 하나를 따른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공공재 공급자로 간주되어왔다. 공공재에는 법과 질서는 물론, 개인들에 의해서는 효과적으로 공급될 수 없는 경제재도 포함된다. 크게 보면, 국가는 죄수의 딜레마에 놓인 개인들의 협동적 해결책이다. 이러한 개인들의 사회 속에 국가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의 과제는 이러한 딜레마의 관점에서 등장한다. 다만 행위자가 다를 뿐이다. 국가의 과제는 경제적 지배 계급이 직면한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협동적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 과제의 일부로서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그들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이제 국가의 모든 과제는 자본을 위하여 수행되거나, 자본에 위임된다."(231)


"나는 마르크스가 권력에 대해 좁은, 전략 부재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단순히 자본가 계급의 봉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두 행위자 A(자본)와 B(정부)가 있고, 각각 일정한 수의 대안을 가지고 있다. B는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공식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 A는 특정 대안을 고려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B는 A의 봉토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상황을 B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B는 자신의 권력이 A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면서 보유 또는 행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B가 A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B의 권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A의 권력도 제한되어 있다. 이 제한은 권력을 직접 맡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행위자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다."(239-41)


# 이때 A가 직접적인 권력을 원치 않는 것은 제3의 행위자인 C(노동계급)의 관심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 마르크스는 이전과 달리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의지의 연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프랑스에서처럼) 양보하거나, (영국, 독일에서처럼) 자제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양위국가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848년 이전에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이 대리인으로서의 정부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50년대의 사건은 이러한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유럽 주요국들의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정치체제하에서도 번성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변을 역사적 유물론에 맞게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수정해야 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제1의 계급이지만 통치하지는 않는 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경제가 정치를 설명한다는 견해는 그대로 유지했다."(246-8)


"말년에 이르러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의 가능한 전략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양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3년에 쓴 〈정치적 무관심〉에 관한 논설에서 그는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결정적인 '사회 청산'을 기다린다는 구실 아래 묵종주의를 조장하는 극좌 편향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와 싸우는 것은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제도에 참여하는 것은 비록 적대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진정한 원칙을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은 설혹 지배 계급이 정치권력에 대한 독점을 포기하겠다고 하더라도 보통선거권의 수용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 견해에 반대한다. 첫째, 권력은 점진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 둘째, 현재 노동자들의 고통을 무시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체제 내의 정치적 행동으로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257-8)


7.2. 혁명론


"마르크스는 고전적 부르주아 혁명을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았다. 그 사이에 간간이 공화정이 들어설 때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일시적 승리는 〈'부르주아 혁명' 그 자체에 봉사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한 싸움은, 1793년과 1794년 프랑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싸움의 '방식'이 부르주아 계급과 달랐을 뿐이다. '프랑스의 모든 테러'는 '부르주아 계급의 적'을 상대하는 '평민의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싸웠을 때 그들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였고, 이성의 간지가 구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분석한 것처럼, 부르주아적 질서가 수립되기 전에 과거가 깨끗이 청산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크르크에 따르면 이 과업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272-5)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필연적인 도래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공산주의를 수립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어떻게 공산주의의 효율성을 '보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의 결함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저작에 나타난 혁명의 전술 및 전략에 관한 언급들은 주로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즉 혁명의 와중에 혹은 혁명을 기대하며 쓴 것이므로, 그러한 언급들은 혁명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두 가지 편향이 나타나는데, 각각 '타협편향'과 '권고편향'으로 부르겠다. 이 두 편향은 마르크스의 저작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희망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다. 희망적 사고는 그의 사고 자체가 왜곡된 것인 반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편향은 표현이 왜곡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독자들을 격려할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인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285-6)


# 편향의 두 종류

1. 타협편향 : 어떤 조직의 대변자로서 그 조직성원들과 타협한 주장을 나타내는 글을 쓰는 경우에 나타난다.

2. 권고편향 : 이론가의 '정세분석'(권고)는 혁명의 실현에 기여하는 수단이나 그 과정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무어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에는 세 가지 전략이 있다. 소수 혁명론, 다수 혁명론, '경쟁체제' 전략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전략은 권력 장악, 다수의 획득, 사회의 변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서가 각각 다르다. 소수 혁명론에 따르면,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그런 다음 사회를 변혁하고, 마지막으로 다수를 획득한다. 이것은 레닌의 전략과 유사하다. 권력을 사용하여 농민을 산업노동자로 바꾸고 이들이 공산주의적 목표를 갖게 하는 것이 바로 레닌의 전략이었다. 다수 혁명론에 따르면, 우선 노동자들이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 (노동자들이 혁명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가정 아래)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다. 경쟁체제 전략은 자본주의 사회를 안으로부터 변혁하고, 이로써 다수를 확보하고, 그런 다음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경쟁체제 전략에서 자본주의 내에 수립된 공산주의적 성채는 적대적인 환경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288)


"우리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소렐 류의 급진적 행동주의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지배 계급을 타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모든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그도 수단이 목적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러한 주장의 함의는 정반대였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수단이 혁명을 수행하는 계급으로 하여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고 생각한 반면, 훗날의 수정주의자들은 그러한 수단이 오히려 혁명을 수행하는 계급을 타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초기의 입장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그런 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내 추측으로는 평생에 걸쳐 혁명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마르크스로서는 전혀 새로운 도구주의적 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296-7)


7.3.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의 어법으로는 독재라는 말이 꼭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초법적 형태, 기존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최초의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코뮌은 〈국가가 위계제도를 폐지하고, 인민에게 군림했던 관리들을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는 공복으로 바꾸고, 항상 대중의 감시 아래 일하도록 하여 형식적인 책임이 아니라 진정한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에 들어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징은 다수 지배, 법외성, 국가기구의 해체 및 대의원의 소환가능성이다." "다만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독재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독재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독재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위헌적이어서가 아니라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였기 때문일 것이다."(298-301)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 혹은 과도적 상태는 국가자본주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두고자 한다. 시장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협동체들이 상호 간에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두 체제 모두 교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이 아니라 노동이 교환되고, 시장사회주의에서는 생산물과 화폐가 교환된다. 자본주의적 속성은 어떤 것은 그대로 남아 있고, 어떤 것은 없어진다. 시장사회주의에서 계급은 없어지지만, 착취는 남아 있을 것 같고, 소외는 확실히 그대로이다. 협동체에 따라 자연적·인적 자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노동시장이 없다 하더라도 시장교환을 통해 착취가 발생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계급과 착취가 다 없어지지만, 소외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완성을 위해 과도적 단계로서 국가자본주의를 선호했다."(301)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와 마지막 단계를 구분하여 제시한다. 첫 단계는 복지국가와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이다. 소비는 기여에 따라 이루어진다. 기여가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사회보장을 제공한다. 〈생산수단이 공동소유이므로, 생산자들이 생산물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기는 하지만, 자본가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팔기 때문에 계급은 형성되지 않는다. 착취도 없다. 기여에 상응하지 않는 소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어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는 제외) 이것은 어떤 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기술이라고 할 수 없다. 노동의 이질성 때문에 '노동으로 기여한 만큼 분배한다'는 원칙 자체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체의 재산 혹은 공유재산의 관리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 즉 권력관계가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형성의 기초라면, 이러한 현상은 공산주의의 첫 단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303)


"마지막 단계의 공산주의에는 어떤 '구조'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사고에 공상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상이 단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날고 싶다고 해도 창밖으로 몸을 던지면 중력의 법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은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다." "생산과 소비의 조직에 관하여는 폴라니가 제시하고 콤이 발전시킨 유용한 분석틀이 있다. 폴라니는 자급자족하는 사회가 아닌 한 재화의 유통은 필수적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밝혔다. 시장교환, 재분배(즉 주변에서 중심으로 간 다음, 일부를 뗀 나머지를 다시 주변으로 보내는 것), 상부상조(즉 가격을 정하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는, 제도화된 재화의 교환)가 그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로는 재분배를 계획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결국 시장, 계획, 상부상조로 약칭할 수 있겠다. 콤에 따르면, 어느 사회든지 이 세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데 조합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306-7)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대형공장도, 예술가 천국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사회주의는 불가피해 보인다. 회사(개인들의 집단)들은 상호 간에 물품을 교환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상품형태'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계획'에 가까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시장에서 먼 곳에, 다른 한편, 자율적인 노동자 협동체들은 일을 통해 최소한의 자아실현이 보장될 것이며, 대규모 생산단위와 충돌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핵심적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은 시장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그 가치들을 동시에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모든 좋은 것은 함께 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그는 최대한의 자아실현과 최대한의 생산성과 최대한의 협동을 동시에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후기산업사회'가 이 목표들을 어느 정도 근접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격차는 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309)


제8장 이데올로기


8.1. 문제 제기


"나는 이데올로기를 기능적 관점이 아니라 구조적 관점에서 정의하고자 한다. 즉 어떤 존재물이 다른 존재물에 대해 가지는 일정한 효과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물로 정의하고자 한다. (정신적 실재로서의 이데올로기) 크게 보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이다. 이데올로기는 ① 존재하고, ②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③ 의식적으로 존재한다. 또 다른 정의는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즉 현재의 상태 또는 특정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내가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존재물'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존재물들이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 용어도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기능적으로 정의한다) 중 강제적 성격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정의하면, 예컨대 대의정치제도가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는 식의 진술이 가능하다."(319)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설명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신념소유자(혹은 여타 행위자)의 '이익'에 입각한 설명과 경제적·사회적 '위치'에 입각한 설명으로 나눈 것이다. 이것을 각각 이익 설명과 위치 설명으로 부르기로 하자. 또 하나는 인과적 설명과 기능적 설명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 구별된 것들은 부분적으로 중첩된다. 모든 위치 설명은 인과적이지만, 이익 설명은 기능적 성격과 인과적 성격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즉 신념은 그것이 어떤 이익에 '봉사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고, 이익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속류 경제학자들의 '조화 이론'은 내생적인 경제적 환상이자,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한 변론이라고 말한다." "노동자 계급이 민족주의적 감정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내생적인 정신적 메커니즘이고, 또 하나는 분할통치를 통해 자본가 계급이 얻는 이익이다."(324-8)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정신적 창조물이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연속적인 생산양식 A, B, C ··· 가 있고, 각각에 상응하는 관념 a, b, c ··· 가 있다고 하자.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생산양식 A가 주어지면 관념 a가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다. 또한 새로운 생산양식 B의 등장은 이전의 생산양식 A에 의해 완전히 설명된다. 이전의 이데올로기 a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지막으로 a-b-c의 연속성은 A-B-C에 존재하는 연속성에서 파생된 '겉보기' 연속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으면, 이것은 새로운 생산양식에서 성립하게 될 가능한 이데올로기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새로운 이데올로기 b는 당대의 생산양식 B는 물론, a에도 상응해야 한다. 즉 이 두 요인의 제약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견해는 생산양식에만 연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역사에도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328-31)


8.2. 메커니즘


"사변적인 명제들(신 또는 정신)을 뒤집는 것은 이전에 뒤집혀 있던 것(경험적 인간), 즉 진짜 주어를 술어로 만들어놓은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전도(顚倒)는 이데올로기 형성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가 그다지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전도는 추상화(abstraction)와 투사(projection)의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추상화의 전형적인 예는 헤겔 철학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헤겔 철학은 존재와 의식이 전도되어 있다. 사유를 사고행위로부터 분리시키고, 의식(Bewusstsein)을 의식하는 존재(das bewusste Sein)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는 헤겔의 추상물들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그들이 내세운 인류, 인간, 유일자 역시 추상물이었다. '정신'의 술어였던 '인간'을 주어로 만들었지만, '인간' 역시 추상적인 인간이고 진정한 인간의 술어일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구체적인 개개인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고, 추상물들은 완전히 폐기된다."(341-3)


"투사의 관념은 포이어바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특히 종교적 사유가 인간의 본질을 초월적 존재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보았다. 종교에서 인간 〈자신의 본질은 타자의 본질로 나타난다.〉 이러한 투사는 소원성취의 한 형태이다. 〈인간의 비참함 그 자체가 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참함을 사상 속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소원성취를 위해 신이라는 '대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전유한다. 이 대상은 사실상 자신을 객체화한 것이며 그렇게 전유된다.〉 정신분석 이론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투사자와 투사물의 관계는 전도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종교이론뿐만 아니라, 정치 이론과 자본론의 골격이 바로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분석으로부터 나왔다. 세 영역의 공통된 주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만든 산물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자본론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에서 인간이 자신의 두뇌의 산물에 의해 지배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인간은 자신의 손의 산물에 의해 지배된다.〉"(344-5)


"마르크스는 신념을 이익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특수한 계급이익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의 일반이익으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념이 반드시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역사상 어떤 시기에는 한 계급의 특수한 이익이 사회 전반의 이익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즉 특수이익의 실현이 지배적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그 계급은 압도적인 힘을 얻는다. 특수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한다는 신념이 그릇된 것일 경우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인과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된 신념도 예외적이긴 하지만 진실일 수 있다. 모든 계급이 자신의 특수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이 신념이 진실일 때에는 권력을 얻게 된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한 사회계급과 그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다른 계급들에게 '계속판매'를 신청하는 셈이다."(350)


"《무월 18일》에서 마르크스는 〈크롬웰과 영국 백성들은 그들의 부르주아 혁명을 위하여 구약성서로부터 어법과 열정과 환상을 빌려왔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과거가 넘겨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관념이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역사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알려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위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포함한다. 확실히 이것은 이념에는 역사적 연속성이 없다는 견해와는 다른 것이다. 즉 인간의 사상은 현재의 경제적·사회적 구조에 의한 제약만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부구조의 '관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현상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요점은 과거의 사상이 오랫동안 잠복해 있다가 미래와 직면했을 때 분석과 행동에 쓸모가 있으면 부활한다는 것이다."(364-5)


8.3. 적용


# (마르크스가 파악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 이론

1. 중상주의자 : 중상주의자는 돈이 아무런 매개 없이 돈을 낳는다거나(이자부자본), 상품의 유통에서 이윤이 발생한다(누구나 그 물건을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여)고 주장한다. 이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성의 오류이다.

2. 중농주의자 : 중농주의자는 산업 이윤이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국부의 순증가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잉여가치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자연의 선물'인 것이다. 따라서 공업부문은 비과세, 농업부문은 과세를 해야 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산업자본가에게 유리하다.

3. 맬서스 : 마르크스가 보기에 맬서스 학설의 특징은 유효수요가 유지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는 구매자 계급이 창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로써 맬서스는 (혁명적 단계의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토지귀족과 국가 관리의 더할 나위 없는 대변자가 되었다.

4. 속류 경제학자들 : 속류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자들과 달리 기존 체제를 변호한다. 이들의 핵심적인 오류는 토지·노동·자본을 각각 독립적인 생산요소로 동등하게 놓고, 각각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낸다고 본 점이다. 이러한 환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성을 믿고, 이를 정당화한다. 


결론


제9장 자본주의, 공산주의, 혁명


자본주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탁월하게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주체들이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들이 그 체제와 이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그러한 신념은 체제의 산물이자 동시에 체제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종종 그릇된 틀 속에 들어 있기 대문에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곳곳에 헤겔식 방법의 잔재가 남아 있다. '자본'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신비한 행위주체로 등장한다. 공장법은 마법에 의해 자본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사회적 이동성도 자본의 법칙을 강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중농주의자의 학설도 봉건체제 내에서 자본을 대변하기 위해 나타난다. 이러한 설명들은 방법론적 전체론과 기능적 설명과 변증법적 연역이 뒤범벅된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목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되는 목적론의 한 축이요, 궁극적으로 자본을 파괴하는 과정의 필연성이 또 한 축이다."(395)


"대체로 마르크스는, 소비수준이 낮아진다는 의미에서 빈곤이 증대된다는 이유로,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생활수준이 낮아진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 관해 이글거리는 분노를 나타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의 비교기준은 현실의 상황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한 상황이었다." "대체로 소외는 생산력의 더 나은 '사용'이 가능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모순은 생산력의 더 빠른 '발전'이 가능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 두 현상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소외를 진압하고 나면, 사회의 구성원들은 창조적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전대미문의 생산성 향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본주의가 창출한 기술적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토끼를 잡은 다음 버리게 될 올무 같은 것이다."(400-1)


공산주의


"확실히 마르크스의 일부 주장에는 과장이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일면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식물처럼 맥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전율했다. 직장에서 그들은 기계에 붙어 있는 부속품이었고, 집으로 돌아와도 너무 지친 나머지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곤 소비의 수동적 쾌락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그 반대편 극단에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조차도 그에게는 창조적인 힘이 넘쳐났다. 그는 창조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긴장이 해소되었을 때 어떤 기쁨이 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의 좋은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좋은 삶이 더 이상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를 갈망했다. 창조적인 일을 통한 자아실현,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의 본질이다. 여기에 모리스의 손으로 하는 창조활동을 추가하면 더욱 균형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404-5)


"공산주의에서도 자기중심적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 ① 공산주의 사회도 완전히 풍요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재화는 희소할 것이며, 어느 한 사람이 차지하고 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가질 수 없게 된다. ②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들어 있는 분배적 정의의 원칙은 자아실현의 평등이다. ③ 자아실현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할 경우, 고비용 활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전제를(따라서 두 번째 전제도) 부정할 경우, 그런 사회는 이상향이고,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세 번째 전제를 부정하려면, 각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즉 타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자아실현을 일부 희생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동기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이타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완전한' 자아실현이 '완전한' 공동체와 함께 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409)


혁명


"두 개의 유령이 공산주의 혁명을 괴롭히고 있다. 하나는 때 이른 혁명의 위험이다. 혁명사상은 앞서 가는데, 그 나라의 상황은 빈곤하여 공산주의를 할 정도로 성숙되지는 않은 경우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선제(先制) 혁명의 위험이다. 이것은 혁명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위로부터 개혁이 추진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세기에 우리는 때 이른 혁명의 사례를 많이 보았다. 이런 판단 자체가 때 이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개혁들이 없었더라면 미성숙 여부를 떠나 더 많은 혁명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옹호한 혁명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혁명의 호기가 언제인지, 어느 하나로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언젠가 자본주의를 앞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나중에 가서 자신들의 혁명을 소급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418)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 일생의 과업은 실패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도덕적인 측면에서 혹은 지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가치설, 이윤율 하락 이론 등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긴 이론들 전부 혹은 대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말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와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는 있다. 나는 내가 중요한 진리라고 믿는 것 대부분을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다. 방법론에서도 구체적인 이론에서도, 특히 가치문제에서도 그렇다. 착취와 소외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창조하고, 발명하고,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일 테니까."(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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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이해하기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6
욘 엘스터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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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장 설명과 변증법


1.1. 방법론적 개체론


"방법론적 개체론이란 모든 사회현상의 구조와 변화를 원칙적으로 오직 개인만 포함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학설을 말한다." "첫째, 이 학설은 개개인의 행동 수준에서 이기심을 전제하지 않으며, 합리성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개개인의 행위에 이러한 특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경우에도, 오로지 방법론적 고려에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지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 방법론적 개체론은 오직 외연적 맥락에서만 사용된다.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개별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감정에 관한 진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 계급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말은 개별 노동자들이 취한 행동의 결과에 관한 복합적인 진술로 환원될 수 있다. 셋째,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많은 속성들, 예를 들면 '강력하다'와 같은 속성들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한 개인에 관한 정확한 기술이 다른 사람에 대한 언급을 포함할 수 있다."(21-3)


"반면 방법론적 전체론에서는 설명 순서상 개인에 우선하여 존재하는 초개인적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고(이러한 가정 자체가 방법론적 전체론이 설명을 시도하는 목적이다), 그러한 더 큰 실체들의 자기규제의 법칙, 혹은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설명을 진행한다. 여기에서 개인의 행동은 집합유형으로부터 도출된다. 이것은 종종 (둘 사이에 논리적 연관이 없는) 기능적 설명의 형태를 띠게 된다. 어떤 행동들이 집합적으로 이익을 낳는다면, 바로 그 객관적 이익이 그 행동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주장할 경우에 그렇게 된다." "방법론적 개체론은 사회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학설이지, 사회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관한 학설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 개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공산주의 단계까지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그리고 일관되게 개인을 설명의 중심에 놓지는 않았다."(24-6)


1.2. 의도적 설명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소비자 선택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요강》의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동자는] 특별한 대상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요, 특정한 욕구충족 방식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소비영역은 질적으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오직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소비자로서의 노동자가 가진 선택의 자유는 그를 자율적인 존재, 책임 있는 존재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자본론》에서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고정된 소비계수' 가정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고정된 소비계수'는 본질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그대로 답습해왔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화가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쳐야지,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32-3)


"마르크스는 경제학에서 의도적 설명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자본가는 자본주의적 과정의 〈의식적 조연〉일 뿐이며,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들을 제정할 뿐이다. 자본가의 소비조차도 〈자본의 재생산비용〉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노동자가 능동적 인간, 예컨대 더 큰 소비집합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의 소비집합의 수동적 구현자일 뿐이라는 견해와 잘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종종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자본가는 그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시장에서 생존의 필요에 의해 '강제'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기업들은 어떤 의미로 보나 도저히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길을 따라간다. 현재 가는 길이 임계 수준 이하로 이윤의 하락을 가져올 때, 오직 그때에 이르러서야 능동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그 대안을 현상(status quo)과 비교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이것은 생산자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선택 모형으로부터의 근본적인 결별이다."(34-5)


"마르크스는 국제정치 연구에서 행위자가 공식적으로 공언한 동기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을 확대했다. 첫째, 그는 종종 그 행위가 기여하게 된 역사적 목표의 관점에서 정치적 행위를 설명했다. 예를 들면 터키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를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무의식중에 현대의 '숙명'인 혁명의 마지못한 노예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인도 지배도 아시아에서 근본적인 혁명을 야기할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였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그 의도와 목적을 가진 구체적인 행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기능적 설명이다. '역사'라는 허공에 떠 있는 행위자가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그의 저작에는 음모론적 설명을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겉으로 드러난 의도 외에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방식은 경우에 따라 과장된 견해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파머스턴 경은 영국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러시아의 가신〉이었다는 식이다."(41)


1.3. 인과분석의 두 종류


# 인과분석의 두 종류

1. 준의도적(sub-intentional) 인과설명 : 선호를 비롯하여 신념, 정서 등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인과설명

2. 초의도적(supra-intentional) 인과설명 : 다수의 개인적 행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집합적 사회현상에 대한 인과설명


"신념 형성 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는 내 생각으로는 이런 것이다. 즉 경제 행위의 주체들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견해를 전체적으로도 타당한 것처럼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일 조건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인과관계가 무한정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면, 노동자는 '누구든' 최저 생계수준의 노동자로 간주될 수 있지만, '모든' 노동자가 최저 생계수준에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인식적 실패를 가져오는 국지·전역 오류이다. 이것은 행동의 실패를 초래하는 국지·전역 혼동과 관계는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가장 강력한 부분일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분권화된 경제에서는 자동적으로 합성의 오류─어떤 집합에 속하는 원소들의 성질과 그 집합 전체의 성질이 동일하다고 판단하는 오류─가 발생하며, 그 결과 이론과 실천에서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44)


"근대 사회과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일군의 개념들이 있다.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공공의 이익〉,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헤겔의 〈이성의 간지(奸智)〉, 머턴의 〈잠재기능〉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개념의 공통적인 생각은, 개인들은 자기 자신의 목표를 위해 행동하지만, 이는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결과들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일군의 행동과 그 행동들의 집합적 결과 사이에 성립할 수 있는 관계는 다음 중 하나이다. ① 행위자들이 알고 있는 결과가 산출된다. 각자는 다른 사람의 행위 및 관련된 목표와 수단 간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가정 아래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② 행위자는 의도한 결과를 산출하지만, 그 일은 의도한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다." "③ 행위자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가 일어난다. 이것은 다른 행위자의 행동에 대한 그릇된 가정(이 상호 간에 존재하는 경우)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관련된 기술적 문제들을 오판하여 생길 수도 있다."(49-50)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연발생적인 위기를 체계적으로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위기에 대한 기업가들의 대응행동이 개인적으로는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집단적으로는 재난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조안 로빈슨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역설〉이다. 그 역설이란 이런 것이다. 각 자본가는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을 주고 싶어 한다. 그래야 고이윤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자본가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는 고임금이 지급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그가 생산한 상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역설의 밑바탕에는 케인즈가 연구한 유효수요의 위기가 깔려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종류의 위기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경제체제에서 노동자의 두 가지 역할로 인해 발생하는 모순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각 자본가에게,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를 제외한 전체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라는 것〉이다."(54-5)


1.4. 마르크스의 기능적 설명


"의도적 설명은 행위의 '의도된' 결과들을 설명으로 제시한다. 기능적 설명은 '사실상의' 결과들을 설명으로 제시한다. 특히 행위를 기능적으로 설명하는 일에는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혹은 어떤 것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논증이 포함된다.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이 설명 형식에 들어 있는 명백한 역설 하나를 제거해야 한다. 그 역설은,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고 난 후에 일어난 일로써 어떻게 그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피설명항이 개별적인 사건이어서는 안 된다. 오직 지속적인 행위유형이어야 한다." "이 설명들은, '단순히' 그 사건이 어떤 행위주체(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행위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르크스는 이런 종류의 설명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런 설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57-8)


"마르크스는 역사가 공산주의의 도래라는 목표를 향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행위의 유형들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사건들까지도 그 목적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가져오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해야 했고', 이리하여 노동자는 공산주의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신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의 역사철학은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도래에 유리한 결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사회제도와 행위양식들은 계급지배에 미치는 안정화 효과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마르크는 두 개의 음역(音域)에서 연주한다. 즉 때로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촉진하기 때문에, 또 때로는 자본주의의 존속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일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결과론'적 요소도 가미되는데, 여러 형태의 기능주의적 마르크스주의들이 여기에 감염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유형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현저하게 나타난다."(60)


1.5. 변증법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되는 헤겔적 추론은 세 가닥으로 되어 있는데, 셋 중 어느 하나도 변증법적 방법(the dialectical method)이라는 이름을 '독점적으로' 가질 수는 없지만, 각각 '일종의' 변증법적 방법(a dialectical method)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가닥은 준연역적 절차로서 《요강》의 주요 부분과 《자본론Ⅰ》의 앞부분에서 이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헤겔의 《논리학》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둘째 가닥은 엥겔스가 정식화한 변증법으로서 부정의 부정 '법칙'과 양질 전화의 '법칙'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가닥은 사회적 모순들에 관한 이론으로서 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끌어온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지적인 가치가 거의 없고, 두 번째 것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지적 가치가 있고, 세 번째 것은 사회변동 이론에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좀더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식에서는 변증법적 방법이 일상적인 '분석적' 언어로 진술될 수 있다."(71-2)


# 마르크스 변증법의 세 갈래

1. 변증법적 연역 : 헤겔의 존재론적 논의의 잔해들에서 경제적 범주를 이끌어낸 것인데, 경제적 범주들(생산-상품-교환가치-화폐-자본-노동)의 역사적 등장 순서를 논리적 연쇄로 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2. 변증법의 법칙

  2-1. 부정의 부정 법칙 : 연속되는 과정 p-q-r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셋 중 어느 두 가지도 양립할 수 없다. (2) p에서 직접 r로 갈 수 없다. (3) q에서 p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예)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2-2. 양질 전화의 법칙 :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간에 불연속적 함수관계가 존재하는 경우(물이 얼음이 되는 경우)와 비선형 함수관계가 존재하는 경우(두 명의 마멜루크 인[중세 이집트의 노예 기병]은 세 명의 프랑스 인을 물리치지만, 1천 명의 프랑스 병사는 1,500 명의 마멜루크 인을 물리친다)가 있다.

3. 모순론 : 여러 사람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믿음은 그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각각 진실일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모두의 믿음이 다 진실일 수는 없다. 예) 개별 자본가가 이윤을 높일 목적으로 하는 행동이 집합적으로는 이윤율의 하락을 가져오는 경향


제1부 철학과 경제학


제2장 철학적 인류학


2.1. 인간과 자연


"외부 세계는 인간의 존재와는 관계없이, 인간의 존재에 앞서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였다." "그렇지만 《신성가족》에 나와 있는 유물론의 언급에서도, 혹은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그가 실재론, 자연주의, 인간주의라고 부른 것들에 대해 정력적인 반론을 제기한 논의에서도 일관성 있는 이론은 찾을 수가 없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물질'에 설명적 우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이 어느 의미로 보더라도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한다고 보는 견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나 언어도 기술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생산력이며, 사회변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코헨의 말처럼, '물질어'의 대응어는 '사회적'이지 '정신적'이 아니다. 생산력을 '전체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회적 생산관계와 대립하는 것이지 정신의 산물 및 활동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98-9)


2.2. 인간의 본성


"인간의 '욕구'(needs)는 마르크스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욕구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이 대상은 일반적인 대상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특정한 책이 아니라 (일반적 대상으로서의) 책을 욕구할 수 있다. 특정한 책에 대한 심리적 태도 같은 것은 욕망(a desire)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어법에 따른 것이다. 마르크스는 각각의 욕망이 〈욕구의 기초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모든 욕구는 욕망의 충족을 통해 충족된다. 그러나 그 반대는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다. 일반적 욕구에서 비롯되지 않은 욕망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대체물이 없는, 특별한 대상을 향한 욕망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특정한 옷에 대한 욕망이 옷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른 욕구, 예를 들면 위신에 대한 욕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시계가 있어도 동일한 위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시계가 바로 대체물이 될 수 있다."(119-20)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소외는 마르크스 저작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마르크스는 (정신적 소외의 측면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면, 노동의 소외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들에게 '외적인' 것이라는 사실, 즉 노동이 노동자 자신의 내적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 그러므로 노동자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자기를 느끼고, 일을 할 때는 자기가 없다고 느낀다. 일을 하지 않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일을 할 때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자기가 없다고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인가? 부정적인 느낌의 존재인가, 아니면 긍정적인 느낌의 부재인가?" "두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적 부정과 내적 부정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현재 문맥에서 이러한 혼동은 치명적이다. 소외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취해야 할 집단적 행동 간의 관계는 어느 문장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129-30)


"소외 문제는 두 가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소외가 증가하면 소외된 사람들이 점점 불행해지고 불만을 느끼고 반항하기 쉬워진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소외가 증가한다 해도 불만은 증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현실적 욕구가 일정할 경우, 욕구충족의 객관적 가능성이 커진다고 해도 빈곤이 증대되지는 않는다. 욕구충족의 가능성이 증대해도 욕구가 감소한다면, 소외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빈곤은 오히려 감소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외는 현실적 욕구의 미충족 상태에서도 발견될 수 있고, 혹은 충족 가능한 욕구의 비충족 상태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소외는 집합행위를 야기하지만, 후자의 경우 오히려 집합행위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노동자들의) 욕구 역시 팽창하는데 욕구충족의 수단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좌절을 느끼고 불행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정신적 의미에서의 소외이다."(132-3)


"나는 물화(reification)라는 말을 욕구와 능력이 자신의 인격 전체에 통합되지 못하고, 고정되고, 고립되고, 독립되어 있는 현상을 가리키는 특수한 용어로 사용하겠다." "욕구(혹은 그에 상응하는 욕망)가 물화된다는 것은 〈그것이 추상적, 고립적 성격을 지닐 경우, 낯선 힘으로 나와 대립할 경우, 따라서 하나의 정념이 편향적으로 충족되는 형태로 만족이 올 경우〉를 말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의 (진정한) 욕구는 하나같이 소비의 욕구이며 수동적 향락의 욕구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하는 일은 질식되고 만다. 이러한 진단은 일종의 고발이다. 이 고발의 전제는 좋은 사회에서는 일 그 자체가 하나의 욕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좋은 삶은 (근무시간이든, 근무 이외의 시간이든) 능동적인 창조의 삶이지 수동적인 소비생활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그리고 그 실현 가능성을 믿었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편향적인 '소비자 경제'라고 비판한다."(134-6)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옹호한 이유는 공산주의 사회야말로 중요한 면에서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훌륭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율성과 정의의 문제는 마르크스에게 부차적인 문제다. 물론 그러한 고려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체제 전복에 나서도록 하는, 그렇게 해야 할 아주 좋은 이유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난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주로 인간적 발전과 자아실현을 좌절시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즉 전인적(全人的) 창조자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은 부산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적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되면 생산성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분배 정의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혹은 해소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42-3)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은 창조와 생산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즉 창조적 과정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이 즐겨 쓸 것들을 생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대립은 없으며, 양자가 완전한 보완관계에 있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 들어 있다. 창조를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가 '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비에 기대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창조에는 소비에 부여된 더 낮은 가치가 함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심하게 말하자면, 전적으로 활동적·창조적 개인들로만 구성된 사회에서는 아무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생산한 것을 즐기거나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타주의와 타인을 위한 행동을 강조하는 모든 사회운동에 이러한 문제가 들어 있다. 이타적 행위는 적어도 한순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149-50)


"마르크스는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간 개개인의 무조건적 자율성을 굳게 믿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이 가진 주요한 약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그는 보편개념으로서의 인간과 인간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인간이 가진 재능의 완전한 발전을 보장하는 체제에서는 그 부산물로 반드시 성공하지 못한 개인들의 좌절이 나타난다. ②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의 객관적 자아실현과 주관적 행복감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③ 그는 또한 개인의 전면적 발전과, 하나의 활동에 대한 편향적인 몰두─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특징인─가 서로 충돌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④ 마지막으로 그는 과도한 충동의 문제를 간과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만든 장치들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완고한 성격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공산주의에서 개인은 이드(id)도 없고 슈퍼에고(superego)도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155-6)


2.3. 사회적 관계


"마르크스가 말하는 상품물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대상들의 (자연적) 속성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자본론Ⅰ》에 나오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상품형태는 인간의 노동 속에 들어 있는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에 들어 있는 대상적 성격으로 보이게 만들고, 총 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관계도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노동생산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물신숭배는 인간 간의 관계가 사물 간의 관계로 형태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지, 사물들의 속성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텍스트에서는 사물들의 속성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상품물신은 사물들에 각인된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생산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 사물들의 물질적 성격에서 유래하는 자연적 속성으로 형태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언급도 있고, 〈자본주의적 생산에 참여하는 자들은 마법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들 자신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로 보인다〉는 언급도 있다."(161-2)


"자본물신은, 코헨에 따르면, 〈생산에서 발휘하는 자본의 힘이 노동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본 그 자체에 들어 있는 능력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용가치의 생산에 대해서도, 잉여가치 혹은 이윤의 생산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자본에 들어 있는 관계들의 외면적 성격과 물신적 성격은 대부자본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화폐가 생산과정과 무관하게 증식되고 과실을 낳는다면, 그것이 신비하게도 생산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진다. 사실은 그것이 생산과정에 투자되어 생산적으로 사용될 때에만 생산적이지만, 금융자본가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금융자본가는 〈모든 자본가가 자신의 돈을 빌려주기만 하고, 아무도 그것을 생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화폐자본이 이자를 낳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처럼 화폐에 대한 환상은 상품에 대한 환상보다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166-7)


"《경제학·철학 원고》에서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하에서 인간의 생산물이 독립적인 존재를 얻고서 생산자와 대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대표적인 사례가 세 가지 있는데, 종교, 국가, 자본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적 영역에 한정하여) 노동자가 소외되는 대상을 두 종류(소비재와 생산수단)로 나누어보면 뜻이 좀더 명확해진다. 마르크스도 초기의 원고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한 적이 있다. 〈노동자는 생활에 필요한 대상도 빼앗기고, 일에 필요한 대상도 빼앗긴다.〉 이 문장에서 소비수단이 먼저 강조되고, 그 다음 생산수단이 언급된다. 15년쯤 후에 쓴 글에서는 강조 순서가 바뀐다. 〈노동의 실현을 위해 요구되는 대상적 요소들은 그에게 낯선 것으로 나타난다. 생계수단도 생산수단도 모두 자본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기 경제학 저작들에서는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가 훨씬 더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168, 172-3)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소비재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은 정신적 소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비재의 생산은 동시에 욕구의 창출을 가져오지만, 이 욕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하에서 종종 좌절된다. 이것은 확실히 투명한 연관관계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이 왜 노동자를 좌절하게 하는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노동자에게 소비재가 필요한 것과 동일한 의미로 생산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과거 노동의 산물인)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는 외견상 명백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곧 소비수단으로부터의 소외를 낳는 구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는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생산물 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고, 노동과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도 가질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창조적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게 된다."(173)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지배는 착취 현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다. 사유재산만 보호하면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그의 소유가 합법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그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 즉 노동자들이 현재 사용된 생산수단이 과거 노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아무 생각 없이 현 세대 자본가들의 재산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좀더 그럴듯하게 말하면, 생산수단이 과거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현재 자본가의 소유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이전 세대의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생산했고, 그 생산수단은 이전 세대 자본가들의 합법적인 재산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외와 착취는 서로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176)


2.4. 역사철학


"라이프니츠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역사에는 목적도 있고, 창조자도 있다. 물론 이 둘은 함께 간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 불행하게도 역사에 목적은 있지만, 이 목적에 따라 행위를 일으키는 의도적인 행위 주체가 없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세속적 신정론인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그의 《역사철학 강의》와 《정신현상학》(정도는 약하지만)은 실체 없는 의도, 행위자가 결여된 행위, 주어 없는 동사에 의존한다. 그의 '이성의 간지'는 맨더빌의 '개인의 악덕, 공공의 이익'이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관계가 있지만, 같지는 않다. 헤겔은 행위자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의미나 목적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신유학 철학자들에 대한 논평에서, 그들이 질서 있는 우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창조자로서의 신을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현자(sage)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현명(sagacity)을 논하는 공허한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헤겔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182)


"마르크스의 목적론적 사고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진술은 종의 이익이 항상 실현된다는 전제이다. 마르크스의 '인류'는 헤겔의 '정신' 또는 '이성'이다. 둘 다 초개인적인 실체로서 이들의 완전한 발전이 역사의 목적이다. 이들은 의도를 가진 행위주체가 아니면서도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한다." "모든 사건을 두 번씩, 한 번은 목적론적으로, 또 한 번은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목적론적 전통의 특징이다. 〈작용인의 왕국과 목적인의 왕국 중 어느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신이 창조했을 때 그의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도록 인과의 사슬을 만들어놓았고, 따라서 어떤 사건이든지 인과사슬에서의 선행사건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그 사슬 자체를 최적으로 만드는 사건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역사관이 어떻게 세속적인 형태로 살아남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확실히 헤겔의 역사관이 그러했고, 마르크스에게서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192)


"일반적으로 미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여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그러한 신념의 불확실성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신념이 총체적인 확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면 거리낌 없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 바탕에 역사철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연관성'을 정당화하는 기능적 설명까지 있으면, 그러한 신념은 더욱 강화된다. 스탈린으로부터 홍위병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세계관은, '방법론적으로'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것을 훨씬 넘어 개인을 경시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므로 '전진을 위한 후퇴'에 바탕을 둔 사변적인 역사철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실천적인 것이지 결코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지적 결함은 그 이론이 가져올 정치적 재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서 개인은 핵심적인 위치에 있고, 이 개인에 대한 존중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오기 전까지의 개인을 희생양으로 여기는 역사철학은 버려야 한다."(194-5)


제3장 경제학


3.1. 방법론


"마르크스는 경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경제 모형으로 만들어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경제 모형을 만들려면 신중하게 단순화하면서 또한 수량적인 가정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현실성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정확성을 얻기 위한 것이다." "물론 부분균형 이론에서 이끌어낸 결론, 혹은 다른 조건들이 같다고 가정한 이론에서 이끌어낸 결론을 모두 모으면 일반균형 이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를 하려면 어느 지점에서든 시작을 해야 하고, 그러한 국지적인 연구가 지니는 한계를 아는 한, 모형은 지식의 진보에서 매우 가치 있는 도구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풍의 학습 때문에 가끔 빗나가기도 했지만,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기본 주장들을 대수적으로 또는 기하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이 분야에서의 수학의 힘을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서툴러 보이지만 말이다."(199-200)


"마르크스는 경제적 생활에 대해 논의하면서 '본질'(Wesen)과 '현상'(Erscheinung)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 두 용어는 헤겔에게서 가져온 것인데, 마르크스는 헤겔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현상의 반대말은 두 가지이다. 첫째, 감추어진 것, 명상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반대말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와 가격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대체로 이와 같다. 노동가치는 가격과는 다른, 가격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질서이지만, 경제주체에게 나타나는 것은 가격뿐이다." "둘째, 현상의 '국지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타나는 것은 항상 특정한 지점에서, 그리고 특정한 관점에서 관찰하는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주어진 현상의 반대말은 특정한 지점에 얽매여 있지 않은, 현상들의 '전체적인 연결망'이 될 수 있다. 헤겔이 말하는 본질은 '상호 관련된 현상들의 전체성'이지, 그 현상들의 '이면'에 있는, 그 현상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인 질서가 아니다."(205-6)


3.2. 노동가치설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시간의 증가 혹은 감소는 생산가격을 상승 혹은 하락시킴으로써 가격의 움직임은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가치 변화가 가격 변화의 충분조건이라고 말하는데, 동시에 필요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리카도를 따라 단기가격과 장기가격(또는 균형가격)을 구분했다. 수요가 증가하여 소비자들이 현행 가격에서 생산된 것보다 더 많은 재화를 원하면 가격은 올라가고 그것을 생산하는 부문의 이윤율도 올라간다. 이윤율이 높아지면 다른 상품을 생산하던 자본가들도 그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하고, 이 부문의 이윤율이 다른 부문의 이윤율과 같아질 때까지 자본이 유입되고, 시장이 다시 균형에 이르면서 재화의 가격은 수요가 이동하기 이전과 같아진다. 이것이 바로 리카도의 해석에 따른 노동가치설이다." "이때 수요의 이동이라는 견해는 노동자가 화폐임금을 받는다는 가정을 할 때에만 유효하다."(222-3)


"그런데 마르크스는 일반적으로 화폐소득보다는 노동자의 소비집합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성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다.) 이러한 전제에서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으로 서로 다른 소비집합을 선택할 수 있는 경우, 그 개념은 쓸모가 없어진다. 서로 다른 소비집합이란 가격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가치는 서로 다른 경우를 말한다. 가격은 일반적으로 가치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절차로 인해 그는 리카도식 노동가치설의 확고한 기초를 확보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견해와 달리) 가격과 이윤율을 유도하는 데 가치는 필요하지 않다. 가치는 부속물(appendix)일 뿐이고, 막창자꼬리처럼 거의 쓸모가 없다. 노동가치의 개념이 비록 잘 정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도 않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225)


3.3. 축적과 기술변혁


"자본가는 두 가지 기술이 주어지면 더 높은 이윤을 기대할 수 있는 기술을 선택할 것이다. 그 기술들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선택기준이 사회적으로 하위최적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생산물을 얻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화하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기준이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이유는 '필요의 영역'을 줄이고, '자유의 영역'을 넓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개별 자본가의 동기는 더 높은 이윤이다. 마르크스는 《요강》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주어진 물건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은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이것은 최대한의 수량에서 최대한의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측면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자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노동, 즉 에너지의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이 해방되었을 때 도움이 될 것이며, 노동 해방의 조건이다.〉"(239)


# 하위최적 : 대량 생산 시대의 분업화로, 하위 조직인 개별 시스템의 성과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향. 시스템 전체 성과를 극대화하는 전체 최적화와 반대되는 개념


"1861~1863년의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이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하의 기술진보는 문명의 발전을 위한 자유시간을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이윤극대화에 따른 우연한 부산물이며, 이로 인해 가능한 것보다는 작은 규모로 기술변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부르주아 생산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이 생산력의 발전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그 둘은 어느 지점에서는 분명히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충돌의 한 측면은 계속되는 위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위기는 노동 계급의 한 부문에서 전통적인 직업이 쓸모없어진 것을 알아차릴 때 터진다. 그 바깥 한계는 노동자들의 잉여시간이다. 사회가 얻는 절대적인 잉여시간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발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물질적 생산 일반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시간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240)


3.4. 자본주의적 위기 이론


# 자본주의적 위기의 성질

1. 체제 내 위기 : 위기는 외부 충격이나 독점, 기타 피할 수 있는 과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적인 것이어야 한다.

2. 미시적인 기초 : 개별 행위주체들의 국지적 합리성이 총체적으로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3. 불가역성 : 자본주의 체제 내의 정치적 규제로 해결할 수 없다.

4. 정치적 행동의 동기 제공 : 자본주의 체제를 폐기하려는 움직임을 촉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세 가지 주요한 결점, 곧 착취와 소외 및 이윤율의 하락에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모순'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여기서 이윤율의 하락과 연결되는 역사적 유물론은 모든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때문에 종말을 고한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로 인해 그 이상의 진보를 가로막을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자본주의의 한계이지 자본주의의 무능이 아니다. 이 한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항구적인 속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한계를 갖지 않는 다른 생산양식의 등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는 스스로 파멸의 조건을 창출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힘을 위축시키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한 다른 체제의 수립을 촉진함으로써 이루어진다."(252-3)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잉여노동의 원천, 따라서 이윤의 원천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산 노동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계속 살리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집합적 이익이다. 그러나 또한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즉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개별 자본가의 이익이다. 좀더 생산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개별 자본가는 초과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도입한 혁신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이 혁신이 일반화되어) 평균이윤율이 하락한다 하더라도, 이 하락분은 너무 미미하여 이 때문에 기계도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모든 산업분야에서 모든 사업가들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경우, 이윤율이 꾸준히 침식되는 심각한 결과가 나타난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본방정식이 보여주듯이, 착취율이 일정하다고 가정할 때, 기계가 도입되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고, 이로 인해 이윤율은 하락한다. 이 주장의 근본적인 약점은 산 노동이 이윤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가정이다."(254)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이론에 대한 세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마르크스는 혁신이 사전적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노동절약형이라는 가정을 당연시하면서, 이에 대해 별도의 논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폭약이나 무선 같이 자본을 극적으로 줄여주는 혁신도 있다." "둘째, 사전적 의미에서 노동절약형 진보가 많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들이 모두 일정할 때 주어진 혁신이 노동절약형이라는 사실로부터, 모든 혁신이 집합적으로 노동절약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이것은 합성의 오류에 해당한다." "셋째, 기술변혁이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에 영향을 줄 경우, 잉여가치율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실질임금이 상승해야 한다. (그러나) 발명이 노동절약적일수록 노동에 대한 총수요가 줄어들어 실질임금의 상승폭은 작아질 것이고, 잉여가치율의 상승폭은 커질 것이 분명하다. 즉 노동절약형 진보와 고정 잉여가치율 가정은 함께 할 수 없다."(255-6)


제4장 착취, 자유, 정의


4.1. 착취의 본질과 원인


"모든 계급 사회의 공통점은 잉여노동의 추출이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잉여노동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넘어선 노동을 말한다." "잉여노동은 소수의 비생산자 계급이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문명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능하게'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다. 차일드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계급의 등장과 착취를 잉여를 가능하게 한 기술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산자는 동일한 소비수준에서 일을 덜 할 수도 있고, 일을 더 해서 잉여를 창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선택이 사회적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잉여가 있는 한 계급 사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계급 사회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잉여의 가능성이다. 경제가 잉여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268-9)


"로머의 노동시장 착취 모형에서 우리는 행위자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① 가진 재산의 금전적 가치는 얼마인가? ② 자영인가, 노동력의 판매자인가, 노동력의 구매자인가? ③ 자신의 수입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노동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경제행위자의 '부'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계급'에 관한 것이고, 세 번째는 '착취' 지위에 관한 것이다. 로머는 이들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최적화를 위해 노동력을 고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착취자이며,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사람들은 착취당한다. 자영이 최적인 사람들에는 착취자도 있고 착취당하는 사람도 있고, '회색지대'에 속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수입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묶음 중, 그 묶음에 구현되어 있는 노동시간이 구매자의 노동시간보다 많은 경우도 있고, 적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회색지대가 존재하는 이유는 가격과 가치의 불비례 때문이다."(275)


# 로머 모형(자본주의적 축적모형)의 특징

1. 착취와 계급은 양상(樣相)으로 정의된다. 자본가는 단순히 노동을 고용한 사람이 아니라, 최적을 위해 '반드시' 노동을 고용해야 하는 사람이다.

2. 착취는 개인들의 속성이 아니라 전체 경제체제의 속성이다. 관계 또한 아니다. 착취하거나 착취당하거나 둘 중 하나의 속성을 가진다.

3. 착취가 완전히 정태적인 개념이다. 개인재산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그 수익의 미래가치를 무시한다. 축적과 기술변혁에 대해서도 설명력이 떨어진다.

4. 완전한 경쟁 구도에 한정된다. 착취가 완전 경쟁의 '부재'에서만 일어난다면서 마르크스를 공략한 신고전파 착취 이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 착취율의 결정 요소

1. 개별 자본가와 그에게 고용된 노동자들 간의 적대(특히, 노동강도)

2. 경쟁적 노동시장에서의 공급과 수요(산업예비군의 존재)

3. 조직된 노동자와 조직된 자본가 간의 단체협상

4. 기술진보의 간접적 일반균형 효과(노동자의 소비집합을 구성하는 상품의 가치가 하락하면 착취율은 증가한다)

5. 국가의 개입

6. 정치적 동맹의 형성(자본가는 지주들과의 싸움에서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정 부분 양보하기도 한다)


4.2. 자유, 물리적 강제, 경제적 강제


"두 개념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는 소극적 자유를 〈형식적 자유〉라 하였다. 예를 들면 노동자는 고용주를 떠날 형식적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적극적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아실현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율로서의 자유의 개념인데,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능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시장에 있어서 형식적 자유의 부정적 효과를 강조했다. 완전한 자아실현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낯선 사람들과의 거래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또한 형식적 자유는 노동자가 진정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형식적 자유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어느 정도 노동자를 자율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점도 인정한다. 이것은 소비자로서의 자유, 생산자로서의 자유, 그리고 노동시장에서의 자유에 모두 해당된다."(321-4)


"공장문을 나서면 어느 누구도 노동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그는 원하는 물품을 자신의 임금 범위 내에서 마음대로 구매할 수 있다. 일자리가 있으면 고용주를 바꿀 수도 있다. 심지어 자영업자가 될 수도 있고, 고용주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자유는,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에 위험한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유용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한다. 특별한 자본가로부터는 물론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고용주를 바꿀 수 있는 자유는 그 이전의 생산양식에서는 없었던 자유라는 생각은 마르크스 시대의 상식이었다. 그 스스로 랭게와 에드몽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토크빌도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 사실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단다. ① 노동자는 개별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② 개별 자본가로부터의 독립성이 자본에의 실질적 종속을 가린다는 것이 그것이다."(326)


"고용주를 바꿀 자유와 스스로 고용주가 될 자유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낳는다. 그것이 환상인 이유는 구성의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한 노동자가 '특정' 고용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사실에서 그가 '모든' 고용주로부터, 즉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후자의 경우 '특정' 노동자가 자본 그 자체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노동자가 그런 독립성을 얻을 수 있다고 추론한다." "여기서 '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노동자가 고용주를 바꿀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원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자본가 계급으로 진입할 자유는 그가 '남달리 영리하거나 기민한 사람'일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형식적 자유를 가리킬 뿐 실제로는 소수에 불과하다."(330-1)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제되고 있는가? 나는 강압(force)과 강제(coercion)를 구별하고자 한다. 강제는 강제하는 행위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강압은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제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마르크스가 비시장 착취의 '직접적 강제'와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져오는 '상황의 압력'을 구별한 이상, 그가 후자는 강제로 보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그는 '경제적 관계의 둔탁한 강요'와 '경제적 조건 외부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강압'을 구별했는데, 이러한 구별은 경제적 관계 내부의 직접적 강압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마르크스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익명으로 이루어지고, 비인격적·경쟁적 시장을 통해 매개된다는 사실이었다. 독점의 존재를 가정하기보다는 자본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이 방법론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31-4)


# 임금노동과 관련한 착취, 강제, 강압의 개념

1. 노동자가 자기 몫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더 나아진다면, 그는 '착취당하고' 있다.

2.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더 나아진다면, 그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제된(coerced)' 것이다.

3.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퇴장했을 때 형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으로 열악해진다면, 그는 '노동력을 팔도록 강압된(forced)' 것이다.


4.3. 착취는 부당한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이상(理想) 담화를 배격한다. 〈공산주의는 확립되어야 할 상태, 현실이 그를 향해 나아가야 할 이상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현재 상태를 폐기하는 '현실의' 운동이다.〉 이것은 단순한 '당위'(Sollen)에 대한 헤겔 식의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공상가들이 비판을 받은 이유는 이상의 설교가 곧 실현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이상 그 자체를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이상은 그대로 가져왔고, 〈오직 수단이 다를 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인식, 즉 노동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믿음'과 같은 주관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식'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불의가 자본주의에 관한 '사실'이라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의 지각이 최소한 자본주의의 폐기에 동반되는 것이며, 자본주의를 폐기하고자 하는 주요한 동기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340-3)


"마르크스는 〈어떤 제도든 일반적 규칙에 따라 적용되면 불공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반적 규칙은 개인차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두 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다." "다른 한편 개인 간의 차이를 완전하게 반영할 수 있는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는 일정한 재화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진술하는 모든 원칙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 간에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논증은 명백한 내적 일관성의 결여 때문에 실패했다. 그는 기여 원칙의 '폐단'을 언급하면서 더 높은 정의의 원칙을 암묵적으로 상정한다. 그것은 바로 필요에 따른 분배이다. 이 원칙을 제시하면서 그는 추상적인 정의 이론을 훌륭하게 논박했다고 믿었겠지만, 이로써 그가 폐기하려고 했던 그런 종류의 이론을 자신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산문으로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주장을 산문으로 하고 있다."(346-7)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분배의 원칙이 공산주의의 첫 단계와 마지막 단계에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첫 단계의 원칙은 노동기여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것이다. 이때 투자분과 공공재 및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기금 등은 분배대상에서 제외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기여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즉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의 차이를 잴 수 있는 공통의 척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보다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우월하여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오랫동안 노동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내포된 문제점을 여기에서 따지지는 않겠다. 그러한 환원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 그와 유사한 작업이 자본주의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즉 기여 원칙은 (분배의 두 번째 원칙인) 필요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차선책으로 적용하는 기준인 것이다."(358-9)


"필요 원칙은 평등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기여 원칙에 따르면, 자녀가 많은 노동자와 적은 노동자가 같은 임금을 받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했으므로, 일 인당 소득 혹은 복지의 측면에서 가족 간 불평등이 발생하는 결함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결함은 불평등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체제가 창출되면 제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 그런 체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상적인 해석이다. 혹은 평등한 분배 원칙에 의해 제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의 평등인가? 마르크스의 좋은 삶 이론에 비추어보면,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필요 원칙이 자아실현의 평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가치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Man)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men)의 자아실현이라면, 개개인 모두에게 최고 수준의, 동시에 다른 사람과 동등한 수준의 자아실현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361-2)


"드워킨은 '값비싼 욕구'의 문제 때문에 그 이상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아실현의 방법 중 어떤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보다 비싸다. 시를 짓는 일은 물질적 자원이 거의 들지 않지만 대작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이 든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유로이 갖되, 비용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한을 둔다면, 값비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 일부만 충족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자아실현에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자원의 희소성은 실제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자아실현의 방법을 모르면 좌절할 수도 있다. 자원의 결핍으로 인한 좌절은 이보다 훨씬 심각한 재능의 결핍으로 인한 좌절을 방지해주는 순기능이 있다고 쉽게 말할 일만은 아니다. 전자의 제약에 직면하는 사람과 후자의 제약에 직면하는 사람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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