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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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편리하지만 궁극적으로 매우 잘못된 두 종류의 해답이 있다. 하나는 국민을 비난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고,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다양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다수에 의한 독재로 전락할 지속적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인식을 물려받아 고뇌하는 리버설 사이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소위 '우익 포퓰리즘의 전 지구적 부상'이라는 현상을 19세기 군중심리학의 클리셰를 재소환할 핑계로 삼곤 한다. 즉 대중이 그 모든 재앙을 자초하며,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잘 알더라도 비합리적일 뿐인 평범한 자들이 언제나 선동에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해결책은 명확하다. '게이트키퍼'라고도 불리는, 사실은 전통적인 의미의 엘리트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투표같은 무책임한 직접민주주의적 관행을 다 없애버리고 정치가 전문직의 영역임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다."(13-4)


"다른 하나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격변을 권력층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역사를 잠깐만 살펴보아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민주주의를 폐지하자고 결정한 경우는 거의, 어쩌면 아예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서구에서 우익 포퓰리즘 권위주의 정당이나 정치인이 기성 보수 엘리트의 협조 없이 정권을 잡은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도 독일의 나치당도 당시의 보수 기득권이라 불릴 만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확실하게 권력을 획득했다." "실제로 최고 특권계층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분리'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비판할 거리가 많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가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악하고, 부패하고, 비뚤어진 데서 비롯된다는 단순한 주장은 상황의 복잡성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러한 주장을 좌파가 하건, 우파가 하건 마찬가지다. 힘 있는 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건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인데, 그 힘은 결국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한 제도를 통해 주어진다."(15-6)


1장 가짜 민주주의: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권위주의적 포퓰리즘 통치의 확산─은 20세기의 경험과 유사점이 거의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으나 우리는 은연중에 선한 이들만이 역사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형태의 반민주주의적 과거가 반복되지 않는 이유는 오늘날의 반민주주의자들 역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대 권위주의 정치의 레퍼토리에 눈에 띄는 대규모 인권 침해 사태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20세기 독재 정권들을 연상시키면 곤란하다는 것쯤은 이들에게 상식이다. 2016년 이래 터키의 에르도안 정부가 저지르는 대규모 탄압도 강력함보다는 나약함의 징후로 보아야 한다. 트럼프가 극우 취미 워리어와 음모론자, 컨트리클럽 공화당원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군대'를 부추겨 의회로 보낸 것을 파시즘적 국가 장악을 위한 마스터 플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25-6)


"포퓰리스트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진짜 국민' 또는 '침묵하는 다수'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선출직을 두고 경쟁하는 다른 모든 이가 근본적으로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포퓰리스트는 자신의 라이벌이 부패하고, 악하고, 비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국민의 뜻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포퓰리스트는 자신의 국민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국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짜 국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진짜 국민이 아닌 사람'의 존재를 내포한다." "포퓰리스트는 언제나 자신이 국민을 통합했다거나 사회가 이미 통합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실제 정치 모델은 시민들을 최대한 분열시키는 것이다. 일부만이 진짜 국민에 속한다는 메시지는 특정 시민의 입지를 구조적으로 약화한다. 포퓰리스트가 권력을 잡게 되면 어떤 시민은 더 이상 법 앞에서 온전한 평등을, 심지어는 법의 보호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27-9)


"따라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은 끊임없이 사회를 분열시키려 들며 특히 '진짜 터키인', '진짜 인도인', '진짜 미국인' 같은 이상을 계속해서 앞세운다. 문화적 지배를 강화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훨씬 더 일상적인 작업과 함께 진행된다. 바로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적 경향이다. 오늘날의 권위주의 정권 중 다수가 해당되는 '도둑정치kleptocracy' 체제에서는 법적·정치적 규제의 부재로 공금의 사적 이용이 훨씬 더 용이해지고, 미래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법과 정치 체제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한편 정치적인 설명도 가능하다. 범죄 행위에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정권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 좋다. 대중 후견주의, 즉 지지에 대한 대가로 지지자의 뒤를 봐주는 것은 곧 대중의 충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일자리나 복지로 위협하면, 직접적 정치 탄압이라는 무기를 지나치게 휘두르지 않고도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다."(30-1)


"힘을 충분히 갖추게 되면 포퓰리스트는 국가 전체를 식민지화하려 든다. 오르반과 피데스Fidesz 당이 2010년 집권하자마자 바꾼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무원법이었다. 초당파적이고 중립적이라 여겨지는 관직에 정권 지지자를 앉히기 위한 조치였다. 리버럴 좌파가 나라를 장악해왔기 때문에 이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헝가리의 피데스당이나 폴란드의 집권당 '법과 정의'PiS당은 공통적으로 법원을 장악하고 국영 매체를 압박하는 작업에 주저함이 없었다. 언론인이 '국가의 이익', 즉 집권당의 이익에 반하는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곧 명확해졌다. 마치 나폴레옹 3세처럼, 이들도 법관과 언론인에게서 받는 모든 비판을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게 누구더라?〉라는 질문으로 받아쳤다. 인도의 재무장관은 〈민주주의가 비선출직의 독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고, 폴란드의 법무장관 역시 독립된 사법부를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폴란드는 민주주의 국가지 '법원지배'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34)


"시민사회 내부로부터의 저항은 포퓰리스트에게 특별한 골칫거리를 안긴다. 자신만이 국민을 대변한다는 주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블라디미르 푸틴이 완벽하게 다듬어둔 전략을 따르는 것이다. 푸틴은 여러 면에서 현대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롤모델이자, 도둑정치계의 진정한 혁신가라 부를 만한 인물이다. 푸틴은 시민사회가 사실은 전혀 시민사회가 아니며, 거리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진짜 국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증명'하면 그만이라는 점을 몸소 보여주었다." "답변은 늘 준비되어 있다. 우익 포퓰리즘 정권은 NGO와 평범한 시위대에 외부 세력의 도구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심지어는 이들을 외국의 스파이로 낙인찍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일례로 트럼프는 무슬림 입국 금지 법안에 반대한 수백만 시민을 〈돈 받고 일하는 활동가〉라 칭했고, 브렛 캐버노 대법관 지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때도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36-7)


"시민들이 정말로 그렇게 강력한 권위를 원하는 것일까? 정말로 대다수가 극우파로 개종해버린 걸까?" "트럼프의 당선은 어찌 보면 가장 시시한 정치학적 설명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당파 정치의 결과일 뿐이었다." "공화당원 중에도 공식 석상에서 트럼프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말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 뒤에도 그들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자아분열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동의 배경에는 어떤 명분에 대한 열렬한 지지보다 어떤 것 또는 어떤 이에 대한 열렬한 반대가 더 중요해진 오늘날의 선거가 있다. 정치적 편 가르기는 존 스튜어트 밀이 칭한 '공동의 지지'보다는 '공동의 반감'에, 또는 정치학자들이 '부정적 정체성'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해 이루어진다. 다수의 미국 우파, 그리고 일부 좌파에게 힐러리 클린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뽑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수의 브라질 유권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건 룰라의 노동당에 표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40-1)


"양극화의 책임이 포퓰리즘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퓰리스트의 주요 전략이 양극화임을 이해하는 건 중요하다. 포퓰리스트는 사회를 여러 집단으로 나눈 다음, 일부 집단이 근본적으로 정당성을 결여했고 심지어 존재론적인 위협이 된다는 점을 넌지시 시사한다. 포퓰리스트의 정치 세계에서 집단의 성격은 다양한 정치 집단을 가로지르는 정체성이나 이해관계로 규정되지 않으며, 존재론적 중요성을 갖는 하나의 선에 의해 단순화된다. 대략 '나쁜 편이 이기면 우리 모두 죽는다'는 식이다. 포퓰리스트의 세계관에서 상대편의 승리는 단순히 우리의 일시적인 패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을 향한 중대한 위협이며 나아가 정치 체제의 종말을 의미한다(2016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45퍼센트, 민주당의 41퍼센트가 상대당을 '국가의 안녕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많은 이가 '우리가 도대체 왜 여기 함께 있는가? 왜 내가 이 이질적인 사람들과 운명 공동체로 묶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44-6)


"부자는 단지 돈이 많을 뿐 아니라 돈을 지킬 힘이 있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중요한 건 이 같은 실질적인 분리가 어떤 음모를 통해서가 아니라 두 주류 정당 중 한쪽을 장악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점이다(물론 다른 한 정당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공화당과 그 후원 세력은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 방향이 유권자 전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는 문화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키면서 거기에 경제 정책을 엮어간다. 문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그저 비도시 지역 유권자가 (특히 상원에서) 과대대표되는 미국 선거 제도상의 구조적 이점을 누리기 때문이다. 또 항상 대비책으로 투표 억압 등의 전략을 구사하여 실질적인 소수 독재 체제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이는 공화당이 존경한다고 주장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면서 깊이 우려했던 시나리오다."(54)


# 양극화를 부추기는 이중 분리 현상

1. 특권층의 분리 : 자기분류와 동질화 경향이 강한 계층(주로 부유층)은 자신들과 나머지 사람들을 같은 공동체로 묶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2. 저소득층의 분리 : 저소득층은 투표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정치 참여에 소극적이며, 이는 자신들의 삶과 정치가 무관하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시민들이 자신과 아래 세대의 경제에 대해 점점 비관적으로 전망한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미국인의 60퍼센트, 유럽인의 64퍼센트가 자식 세대는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세대 간 진보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의 붕괴는 문명 규모의 현상〉이다. 중산층이 민주주의 원칙과 법치의 파괴를 때로는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적어도 오르반이나 트럼프 부류가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럼에도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실질적 이익이건, 공허한 기대건)을 위해 그 정도는 눈감아줄 의사가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 일부 시민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듯한 것, 또는 자기 자식의 미래에 도움을 줄 듯한 것과 민주주의 훼손을 일종의 트레이드오프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부유층의 지지는 언제나 조건부였다."(57-9)


2장 진짜 민주주의: 자유, 평등, 불확실성


"민주주의를 특정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인식을 공유하면 좋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번영과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면, 다른 어떤 정치 체제가 같은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달성 가능한 경우 민주주의는 버릴 수 있는 안이 된다. 이상화된 중국 권위주의 체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반면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 구성원 일부가 근본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카스트 사회라면, '인간의 얼굴을 한 권위주의'라는 대안이 있더라도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선호할 것이다. 그 경우에는 높은 성과를 내는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지저분하고 느리고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민주주의 체제를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평등에 대한 두 가지 이해가 있다. 하나는 평등한 권리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평등', 즉 상대가 나와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고 여기는 구성원들의 관계에 관한 이해다. (평등의 반대는 '다름'이 아니라 '불평등'이다.)"(67-8)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포퓰리스트가 종종, 자신의 이익에는 완전히 부합하지만 정치적 절차를 해치는 전략을 택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스트 정당이 정권을 잡지 못했을 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표를 많이 받지 못한 포퓰리스트 정당은 명백한 모순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면서 동시에 유일한 국민의 대변자인데, 어떻게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로 승리하지 못할 수 있는가?' 이 모순을 타개할 가장 쉬운 방법이 있지만 모든 포퓰리스트가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포퓰리스트가 좋아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인 '침묵하는 다수'를 끌고 나온다. 만약 침묵하는 다수가 침묵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미 정권을 잡았으리라는 것이다.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침묵하는 다수가 '침묵당하는 다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다수의 목소리를 억압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포퓰리스트는 부패한 엘리트층이 무대 뒤에서 수작을 부렸다는 점을 어필한다."(85-6)


"게임이 불공정해지더라도 반대파는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민주주의 사회는 〈호구suckers〉와 〈악당scoundrels〉이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분열될 위험에 처한다. 게임 이론에서는 '팃포탯tit-for-tat' 즉 맞받아치기 전략을 통해 제대로 된 규칙을 재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부정을 부정으로 받아치다가는 규범 위반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불을 불로 받아치는 전략을 구사하다가는 집을 몽땅 태워버릴 수도 있다. 정치 갈등에서는 모든 규범 위반이 다 똑같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투표 억압에 맞서기 위해 상대편 유권자들을 똑같이 투표소에서 내쫓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 심적으로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해결책을 도모해야 한다.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도,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94-5)


"현실의 대의민주주의에는 고도의 균형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우리 편이 졌지만 다음에 다시 이길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면 이 게임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동시에, 언제나 우리 편의 승리가 확실하다면 우리야 좋겠지만,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민주주의가 사라졌다는 의심을 살 수 있다. 애덤 셰보르스키가 민주주의를 〈제도화된 불확실성〉의 한 형태로 정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거 등 정치적인 결과는 불확실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당들이 선거에서 지는 정치 체제〉라는 그의 정의는 싱거운 소리처럼 들리지만 실은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다. 즉 민주주의는 여러 정당이 선거에서 지는 정치 체제이지, 똑같은 정당이 계속해서 지는 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생각,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규칙에 대한 생각이 바뀔 가능성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99-100)


"시민이 비이성적이고 식견이 부족함을, 시민 개인에게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지식이나 일관된 시각이 부족함을 입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 전체가 무작위로 돌아가거나, 정치적 보상이 늘 가장 뛰어난 선동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에 대해 충분한 감을 가지고 있으며 동료 시민이나 정당, 언론, 노조 등의 단체에서 선호를 얻어 판단한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름길을 택했다는 게 비합리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시민이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대부분 선동가의 말에 속거나 허위의식에 젖어서가 아니다. 도덕적·문화적 이슈, 심지어는 감정적인 이슈와 연관된 다른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E. E. 샤츠슈나이더가 말했듯이 사람들에게는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관념도 있다. 관념이나 가치관은 단순히 '합리성 대 비합리성'의 문제로 볼 수 없다."(104)


"어떤 철학자들은 고대 아테네식 '로또크라시lottocracy'의 부활을 주장하기도 한다. 로또크라시는 추첨에 의해 선발된 시민들이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정책 과제를 해결하는 체제다." "문제는 로또크라시가 기술관료적 사고방식, 즉 정치란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의 연속이며 올바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누가 결정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첫인상이 로또크라시와 정반대인 능력주의는 전문가가 직접 임무를 수행하는 체제이자 하나의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음을 전제하는 시스템이다. 민주적 대표성을 놓고 지저분하게 싸워야만 문제라는 것이 드러나고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해결책이 있을 수도 있다는 관점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제비를 잘 뽑은 운 좋은 승자이건, 시험에 통과한 능력 있는 인물이건 일단 지도자가 결정되고 나면 나머지 시민은 그냥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점에서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에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115-6)


"특정 맥락 속에서 여러 장점을 띤다고 해도,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에는 결국 정기적인 선거에 기반한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중요한 미덕, 즉 역동성과 창의성이 없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도,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는 선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시회 내 서로 다른 집단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패자에게 미래의 승리라는 여지를 남겨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의제와 참여를 반대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의의 반대는 배제이며, 참여의 반대는 정치적인 삶으로부터의 분리 또는 기권이다. 패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패자도 여전히 자기 주장을 펼칠 자유가 있고, 배제되거나 구조적인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 이 같은 인프라는 민주주의 사회를 와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116-8)


3장 필수 인프라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 즉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기본권의 가치는 권리 행사를 돕는 이른바 '매개 권력'이라는 행위자들의 존재로 인해 크게 높아진다." "조직, 정당, 그리고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라 불리는 전통 매체는 내 메시지에 말 그대로 날개를 달아준다. 정치적 평등이란 무엇보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다. 일정 수준의 접근성을 갖춘 매개 권력과, 새로운 매개 권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반면에 매개 권력은 오히려 불평등을 공고하게 하고 심지어는 악화시킨다는 어두운 시각도 있다. 실제로 매개 기구는 잘해봤자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대개는 노골적으로 귀족적이라는 유구한 시각도 있다." "가장 박한 평가는 매개 권력이 국민의 목소리를 아예 바꾸어 전달한다는 주장이다. 루소가 매개 권력에 적극 반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119-20)


"핵심은 매개 기구가 갈등을 드러내고 구조화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동기가 반드시 건전한 민주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정당은 선거에서 이기고 싶어 하고, 언론 소유주는 (대부분)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목표가 정치판의 싸움을 정치 체제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 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패자가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일과 양립 불가한 것은 아니다." "법이론가 한스 켈젠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상대주의와 철학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이들이 반드시 이기적이거나 멍청하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다."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진실 찾기가 관건이라면 '충실한 반대파'와 같은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는 패자는 그저 거짓말쟁이일 뿐이다."(128-9)


"매개 기구는 진실을 가려내거나 기계적으로 특정 현실을 복제해내는 주체가 아니다. 이상적으로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선택지란 모두가 자신의 현실을 선택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가 각기 다른 가치관에 따라 특정 현실에 대해 시각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매개 기구는 외적 다원주의와 내적 다원주의를 모두 가능케 해야 한다. 외적 다원주의란 다양한 종류의 정당과 전문 언론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문제에서 의견의 불일치는 팩트를 둘러싸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 여러 집단을 창의적으로 대표해내는 데서 생겨난다." "내적 다원주의는 외적 다원주의에 비해 겉으로 덜 드러난다. 개별 매개 기구 안에도 시각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다. 즉 정당은 내부적으로도 경선이나 집중 토론과 같은 적절한 민주 절차를 따라야 한다. 내부적으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정당은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131-2)


"매개 기구의 역할은 이게 다가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의 전장을 열고 다원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매개 기구는 정치의 시간표를 그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정당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경선을 실시하고, 신문과 방송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뉴스와 논평을 제공한다. 정당의 역할에 대한 제임스 브라이스의 설명대로 매개 기구는 〈수많은 유권자에게 혼란 속에서 질서〉를 가져다준다." "특히 시민들의 생각을 한 곳에 모으는 절차인 선거는 특정한 날짜에 모든 시민에게 공통의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주기적으로 일깨우는 의식으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선거의 단면을 이상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세기 미국에서 선거일은 엄숙한 시민의식을 실천하는 날이 아니라, 공짜 위스키가 흘러넘치고 주먹 다툼이 난무하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정기적인 행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정당 지지자들의 정치 활동에 기준점을 제시한다."(139-40)


"기술이 스스로의 적용 환경을 결정하는 일은 없다. 물론 인터넷이 새로운 인프라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프라의 구체적인 모양은 우리가 이미 가진 인프라, 즉 지난 2세기 동안 기본적인 규제(또는 규제 완화) 정책을 만들어온 정당 제도와 공론장이 좌우한다. 미국만 봐도 그렇다. 2016년 대통령 선거를 분석한 하버드대학교의 사회학자 세 사람은 뚜렷한 우익 미디어 생태계의 존재를 확인했다. 스스로 담을 쌓아 올린 공간 안에서 '뉴스'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자기인정의 형태로 기능한다. 목적 있는 허위 정보든 단순히 오류가 있는 정보든 수정되는 일은 거의 없다. '우익 정치 엔터테인먼트 집단'의 관객들은 《월스트리트 저널》 정도의 중도우파 뉴스 매체와도 거의 접촉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보나 왜곡된 정보는 어떠한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빠르게, 멀리 퍼져나간다. 〈비이성의 전염〉이라는 리프먼의 표현은 다소 비하적이기는 하나 이런 상황을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151-2)


"하버드대학교 연구팀 논문의 핵심은 이처럼 좌측에 대칭을 이루는 짝이 없는 우익 미디어 생태계의 등장이 인터넷의 탄생보다 훨씬 앞선다는 것이다. AM 라디오를 통해 확산된 보수 토크쇼와 1987년 공정성 원칙의 폐지 후 등장한 고도로 당파적인 케이블 뉴스는 우익 미디어 생태계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케이블 TV 등 여러 매체를 흥하게 한 규제 정책은 정치적인 선택의 결과였고, 그 과정에서 기술적 혁신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결정은 양극화를 불러왔는데, 알고 보니 그건 엄청나게 돈이 되는 시장이었다. 특히 우파 측에서 이른바 '오피니언 저널리스트'를 자처하던 이들에게 큰 사업의 기회가 생겼다." "재규제reregulation가 마술처럼 양극화와 허위 정보를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기술은 이미 존재하는 인프라에 얽혀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며, 민주주의에 해가 되는 걸림돌을 더 크게 만들 수는 있어도 없던 문제를 새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152-3)


"정당은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유도함으로써 특정한 자기인식을 강화하고자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공동의 지지〉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순간부터 반향실echo chamber 효과는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한층 정교해진 온라인 환경이 현재 비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과두 엘리트 계급의 특징 한 가지는 성격과 성격과 관련된(〈움켜쥐고 움켜쥐고 또 움켜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개 기구를 포함한 정치적인 구조를 자기 뜻대로 재편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것이다. 권력이 집중된다는 것은 곧 책임지지 않는 개인들이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정부가 플랫폼의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정치 성향도 바꿀 수 있는 개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트럼프와 저커버그 같은 인물은 각각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지만, 그런 인물들이 서로를 이용하게 되면 위협은 훨씬 더 커진다."(159-61)


4장 민주주의 다시 열기


"영국 철학자 오노라 오닐의 말대로, 민주주의 인프라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매개 기구가 접근성과 자율성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매개 기구가 시민의 판단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들도 시민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저 매개 기구의 재정적 기반은 무엇인가(언론사의 경우, 사주가 누구인가)? 어떤 의제를 갖고 있는가? (베를루스코니의 TV 정당처럼) 부도덕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의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나? 정당 후보의 진정한 배후 세력이 미국의 '그림자 정당'이나 '준정당parapaties' 같은 것은 아닌가? 선거 운동 비용 지출에 제한이 없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다크 머니'가 투입되고 있지는 않은가? 외부 세력이 재정적으로 개입하고 있지는 않은가?" "폭스TV 같은 방송국의 문제는 (전 앵커인 빌 오라일리의 표현대로) 〈보수적인 노동자 계층의 시각〉을 대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너그럽게 표현해도) 부정확한 보도를 한다는 것이다(편파적이면서 그렇지 않은 척 오도한다)."(189-90)


"선거는 확장된 기간에 걸친 정치적 동원이기도 하다. 정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기인식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2016년 초에는 트럼프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불과 몇 년 후 다수의 미국인이 자신을 영혼까지 트럼프주의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이들은 트럼프가 정계를 떠나더라도 오랫동안 트럼프주의자로 남을 것이다. 이들에게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습격은 트럼프의 대선 승리 주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엘리트의 배신이라는 신화의 밑거름으로 피해자성과 분노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자, 순교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일부 국가에서 〈전투적 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제를 수립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투적 민주주의란 정치 제도를 훼손하려는 정당이나 개인들에게서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권리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다."(196)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오면, 불관용을 관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나치당은 선거 제도에 찬성했지만, 권력을 잡은 후에는 민주주의 폐지를 추진했다. 나치당원들은 처음부터 딱히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1928년,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당이 〈민주주의의 무기고에서 가져온 무기로 무장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민주주의가 자신을 무너뜨린 철천지 원수에게 자기 무기를 직접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농담으로 남을 것〉이라며 기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역사의 교훈은 분명해 보였다. 민주주의는 반민주적 행위자들이 〈민주주의의 무기고〉를 악용하는 존재론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법적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특히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반드시 필요해 보였다." "이는 민주주의와 상대주의를 결합한 한스 켈젠의 개념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대신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가치, 특히 인간 존엄성을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면서 그 가치들을 수호하겠다는 입장이었다."(197-8)


"이런 문제가 과거, 즉 20세기의 전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전투적 민주주의를 고안해낸 이론가들은 이런 정당들이 시민의 기본권을 해치고자 하는 희망을 공개적으로 내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정당은 거의 없다. 바이마르 시대와는 다르다. 물론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일부 시민은 '진짜 국민'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지만, 이들조차 조심스럽게 말을 고른다.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마주한 위협은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선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오히려 법원이나 관료주의 내부의 감시 기구, 선거 위원회와 같은 독립적인 민주주의 수호자에 대한 장악이나 정치 절차의 체계적인 재편이며, 제도화된 불확실성은 크게 줄어들었다. 트럼프가 자기 행정부의 부패상을 노출시킬지 모르는 감찰관에게 실질적인 보복 조치를 감행한 일이나, 연방 선거 위원회라는 중요한 선거 감시 기구를 초당적으로 구성하는 전통을 깨고 공화당 다수로 만들어버렸던 일이 그렇다."(206-7)


"이론상 (반反다원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시민 불복종은 권위주의 포퓰리스트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시민 불복종의 고전적인 정의는 1970년대 초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가 정립했다. 시민 불복종은 공공연한 법 위반을 의미했다. 당연히 모든 법 위반이 시민 불복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에 따른 비폭력적인 행위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법이 기본권의 침해와 같은 심각한 불의를 낳고 있으므로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동료 시민들에게 설득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롤스는 또한 시민 불복종에 나서는 이들이 법 위반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와 제도가 〈거의 정의로운〉 상태여야 한다는 조건을 조심스럽게 덧붙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정해진 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모습을 능동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오늘날엔, 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 시위마저도 '시만답지 못한' 행위, 또 이미 양극화된 사회에서 분열을 부추기는 행위로 종종 비판 받는다."(210-1)


"오늘날의 대중은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킹이 한때 이야기한 하나의 〈국가적 의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불복종 운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분열된 공론장,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매우 오염된 공론장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때로는 장애물을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이 TV로 중계되지 않는다고 해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불복종 운동을 널리 알릴 수 있다. 2020년 미국에서 경찰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활약한 독립 미디어 그룹 '유니콘 라이엇'이나 2020년 벨라루스에서 일어난 반루카셴코 시위에서 사용된 텔레그램 체널 '넥스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둘러 가는 길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개 기구에 대해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개 기구가 접근성과 자율성을 잃고 사회 구성원의 평가를 받지 않게 되면, 분열과 방해 시도는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악순환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213-4)


결론


"정당과 전문 언론은 대의민주주의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적절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 반면 진입 장벽은 상대적으로 낮아야 한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특정 시각을 배제하거나 일부 구성원에게 힘을 더 실어주게 되더라도 정당의 핵심적인 신념이나 전문가로서의 윤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매기 기구는 접근성이 높아야 하고, 정확하며 자율적이며, 평가 가능해야 하고, 따라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당파성이 없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정당의 경우에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목표는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갈등에서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팩트가 언제나 깨지기 쉬운 것이라 해도 그 과정은 팩트에 의해 가능해지고 또 팩트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고 한탄하나, 이 새로운 매개체가 시민들에게 전례 없는 접근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222-3)


"클로드 르포르는 민주주의의 '끝이 열린' 절차에 대해 설명했다. 민주주의는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부당한가에 대한 토론의 정당성 위에 세워진 체제〉이며 〈토론에는 반드시 보증인(입회인)도, 끝도 없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민주주의에는 어떠한 보장도, 미리 정해진 목표도 없다(〈이제 민주주의는 완벽하게 실현되었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불확실성과 전반적인 자유의 행사는 두 가지의 타협할 수 없는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 정치 체제의 자유롭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동료 시민의 입지를 훼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누구도 자신만의 팩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기존 규칙이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핵심 요소에 위배될 때는 명백히 민주적인 형태의 불복종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다만, 불복종하는 이는 자신의 저항이 당파적 갈등에서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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