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인 이야기 - 모험하고 싸우고 기도하고 조각하는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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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바이킹의 시대


"바이킹은 크게 덴마크계·노르웨이계·스웨덴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루스(어원은 '노 젓는 사람들') 혹은 바랑고이(어원은 '선서를 한 동료')라고도 불린 스웨덴계 바이킹들은 발트해를 건너 동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나가면서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 첫 번째 중요한 현상이 러시아 국가─키예프Kiev(키이우Kyiv)나 노브고로드Novgorod와 같은─의 형성이다." "아마도 슬라브족의 이교 신앙 중심지이자 교역 중심지였던 곳에 바이킹들이 합류해 들어오면서 그들의 충격 아래 정치·군사적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스타라야라도가, 프스코프, 키예프 등 여러 곳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권력 중심지들이 형성되었다가 후대에 키예프 공 이고리Igor의 주도 아래 통합되고, 비잔티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처럼 국왕 체제가 만들어지고, 교회가 통치 철학과 행정 인력을 제공하는 방식의 발전이 이루어진 데에는 동부와 북부 유럽 각지에 인력, 아이디어, 문화 등을 전파한 바이킹의 영향이 컸다."(27-8)


"바이킹의 여행은 비잔티움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부 모험심 강한 사람들은 볼가강을 타고 불가르(오늘날의 카잔)로 직행했다. 불가르에서 더 나아가면 하자르Khazar라는 유목민의 땅이 나오는데, 이곳의 수도에 해당하는 이틸Itil에서 배를 타고 카스피해를 건널 수 있다. 연구자들은 바이킹이 낙타를 이용하여 바그다드까지 가거나 혹은 비단길을 따라 인도와 중국 방향으로 갔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바이킹은 실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했다. 우리는 통상 바다를 통해 남쪽이나 서쪽으로 멀리 항해해 간 바이킹의 활동에 주목하지만, 남동쪽으로 이렇게 멀리까지 갔으리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바이킹에 대한 묘사를 보면 분명 '야만족' 냄새가 물씬 나지만, 사실 그 시대에는 대부분 지역의 문화 수준이 고만고만하게 야만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히려 바이킹의 활동 결과 많은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기독교를 수용하고 문화적 발전이 가능했으니, 말하자면 바이킹이 문명화의 선두에 섰던 셈이다."(30-1)


"서유럽에서 본격적인 바이킹의 시대가 열린 해를 대개는 793년으로 본다. 이 해에 잉글랜드 북동쪽의 '성스러운 섬' 린디스판에 바이킹 무리가 들이닥쳐 약탈을 자행했다." "885~887년에는 배 700척에 나눠 탄 바이킹 무리가 파리까지 들어와 2년 동안 포위 공격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프랑스 국왕으로서는 바다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역량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바이킹 집단에게 땅을 주어 신하로 만들고 이들이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막도록 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그렇게 911년,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의 결과로 탄생한) 노르망디는 더 이상 사나운 바이킹 전사의 땅이 아니라 세련된 프랑스 문화에 물든 귀족의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 변신한 노르망디 귀족들은 조만간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새 왕조(노르만왕조)를 개창하고, 멀리 지중해에 진출하여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지배하며 십자군운동을 주도하는 등 유럽 각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45-9)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국왕 해럴드를 살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노르만 왕조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왕권은 오히려 민중의 자유를 신장하고 의회 제도가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 사실 윌리엄과 신흥 지배층의 무력이 강하다 해도 소수의 충성스러운 신하만으로 전국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만 명의 기사로 어떻게 그 많은 국민을 적으로 돌려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지방의 전통적 자유를 인정해 주고 유력자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게 낫다. 초기의 잔혹한 정복과 지배 체제 구축 과정이 일단락되자 자신감을 찾은 국왕은 관대한 통치를 펼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왕은 귀족 중에서 관리를 선임했는데, 귀족들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민중들과 손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귀족과 민중이 결합하여 의회 제도를 통해 한편으로 국왕의 국정 운영에 협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왕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했다."(65)


#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이 되었으며,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재위 1066~1987)'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장 십자가와 왕관


"에스파냐의 중세사는 대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으로 정리하곤 한다. 8세기 초 무슬림이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해협을 넘어 에스파냐 땅에 들어와서는 단기간에 이베리아반도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북쪽 변두리 산악 지역에서만 작은 기독교 공국들이 간신히 존립을 유지했다. 이후 기독교 세력이 힘을 모아 오랜 기간에 걸쳐 이슬람 세력을 조금씩 밀어내면서 국토를 회복해 갔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과 싸우는 정치 단위들이 형성되었다. 동쪽의 카탈루냐공국, 피레네산맥 서쪽의 바스크공국(후일 나바라왕국으로 성장했다가 프랑스에 합병된다), 나바라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아라곤, 북서쪽의 아스투리아스가 점차 확장하여 레온과 합쳐지며 형성된 카스티야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들 사이의 이합집산 끝에 최종적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정리되고, 이 두 나라가 합쳐져 오늘날의 에스페나갸 만들어지는 한편, 남서쪽에서 독자적 단위를 이룬 포르투갈이 먼저 별개 국가로 발전했다."(92-3)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聖廟를 되찾자며 십자군운동을 제창하면서 유럽 전역에 성전聖戰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바깥에서만 싸울 게 아니라 유럽 안에 있는 신앙의 적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이념이 불타올라서 이베리아반도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전쟁터로 변모했다. 경건한 신앙이 기독교 에스파냐를 새로이 일깨웠다.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유럽 내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12세기부터 대대적으로 전 유럽의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재정복운동은 사실상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3세기 후반이면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에스파냐 최남단의 그라나다만 빼고 거의 전역이 기독교 영토가 되었다. 잔존한 이슬람 세력을 최종적으로 축출한 때는 1492년이다. 1492년은 재정복 운동이 완수되어 무슬림을 유럽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그 여파로 유대인도 축출했으며, 동시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해다."(94-7)


"1077년 1월, 독일 왕이자 장차 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에게 용서를 빌었고, 결국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장래 황제가 될 하인리히가 맨발로 눈밭에 서서 용서를 구할 때는 교황에게 패배한 듯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을 축출할 때는 황제가 최종 승리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교황과 황제 중 누가 더 우위인가 하는 문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장기간의 소모적인 투쟁 끝에 양측이 타협을 모색한 것이 1122년 보름스 협약이다. 협약은 추기경과 수도원장은 교회에 의해서만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천명했으니 이 점은 황제가 양보한 것이다. 황제는 선거에 출석할 수 있으며 만일 다툼이 있으면 황제가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니 이는 교황이 양보한 것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 누가 최고의 권한을 쥐는가 하는 문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큰 쟁점으로 남는다."(109, 114-5)


"십자군운동에는 고향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군사 모험을 통해 한밑천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 기존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최근 실증연구 결과는 정반대 사실을 말해준다. 십자군 전사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은 부자들이었다." "기사 집안 출신이면서 클뤼니 수도원을 거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누구보다도 수도원의 이상과 기사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기사들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갈망이 크지만, 현실적으로는 전사라는 지위 때문에 흔히 죄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 우르바누스 2세가 불안과 죄책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세상을 등지지 않아도 될뿐더러, 칼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칼을 휘둘러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성묘를 앗아간 무슬림들을 축출하는 신의 전사milites Dei, 그리스도의 전사milites Christi가 되면 가능하다. 십자군운동은 개념적으로 전투 이전에 순례 행위였다."(131-3)


3장 권력, 사랑, 믿음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왕국들은 1,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군주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을 유지해 왔다. 특히 대관식은 군주의 신성성을 확보해 주는 중요한 행사다." "국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존재라는 의식은 멀리 켈트족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족 왕은 용과 괴물이 상징하는 혼돈의 힘과 싸워 이기고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다. 켈트 신화에서 왕은 세상의 중심인 신성한 나무에 자리 잡고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며,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을 띠는 유럽의 군주를 '기적을 행하는 왕'이라 부른다. 기독교화가 진척되면서 이런 내용은 새로운 종교에 맞추어 변형되었다. 왕은 이제 신과 동격의 존재는 아니며 그보다는 신과 소통하는 일종의 사제와 같은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은 백성이 선출한 게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임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대관식에서 왕관을 쓰는 요소보다 신의 축복을 더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171-3)


"생드니 성당의 개축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쉬제르Suger 수도원장이다. 1136년 재건축이 시작되어 1144년 마침내 새로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알리에노르를 비롯하여 이 웅대한 성당을 둘러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교회를 그토록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시대 최고의 신학자로서 금욕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정색을 하고 비판을 가했다. 수도자와 신자는 이 세상 너머 영원한 구원의 길을 보아야지 현세의 아름다움에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베르나르와 쉬제르는 대척점에 서 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지 믿음의 자세나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기본 질서가 어떻게 짜여야 마땅한가 하는 정치적·신학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쉬제르가 수도원장이 된 1122년은 보름스 협약이 체결된 해이다. 보름스 협약은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타협에 그쳤다."(193-5)


"생드니 성당 재건축은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답변이다. 생드니 성당을 최대한 웅장하고 아름답게 짓는 것은 단순히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곳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지상의 모형이다. 벽면의 사파이어와 루비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드넓은 공간에 밝은 빛이 가득 넘치는 성당은 천국의 예시다. 이곳에 들어온 신자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천국을 부분적으로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이 중간 경유지에 왕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드니의 품 안에 역대 국왕들이 함께 누워 있다. 하늘나라와 지상세계의 중개자인 성인이 국왕과 함께 모든 백성을 인도한다. 세속 권력과 무관하게 오직 교회가 독자적으로 영적 인도를 해야 한다는 베르나르의 견해에 맞서 쉬제르는 '제2의 그리스도'인 국왕이 신성한 힘을 받아 백성을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쉬제르는 고딕 성당 속에서 왕권과 교회의 새로운 동맹을 추구한 것이다."(195-6)


"노트르담Notre-Dame(성모, 영어로는 Our Lady) 대성당은 단지 파리를 위한 성당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 성당이다. 프랑스 역사의 중요 사건들이 이 성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루이 13세(재위 1610~1643)는 결혼 후 2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만일 후계자 아들을 주신다면 프랑스를 마리아에게 바치겠다는 서원을 했다. 마침내 장래에 루이 14세가 될 아들을 얻자 '신이 주신 아이'라는 의미로 '디외도네'라 불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 제단의 성모상 오른쪽에는 왕관을 바치는 루이 13세의 상, 반대쪽에는 손을 심장에 얹어 신심을 표하는 루이 14세의 상을 세웠다. 1909년 잔 다르크를 시성諡聖했으며, 파리가 해방된 1944년 8월 26일에는 시민들이 모여 테데움Te deum(신을 찬미하는 성가)을 연주했고, 1970년에는 드골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동시에 예수의 가시관이 노트르담으로 옮겨온 19세기 이후부터는 중요한 순례 장소로 떠올랐다."(203)


4장 중세의 마음


"지난 시대에 사회 전체를 뒤흔든 위기는 대개 전쟁·기근·질병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실 그 세 가지는 내적으로 얽혀 있다. 전쟁은 농사의 기반을 파괴하여 기근을 낳고, 군대가 이동하여 전염병을 퍼뜨린다. 다른 한편 기근은 정치적 불안을 초래해 전쟁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사람들의 신체를 허약하게 만들어 병을 더 확산시키기 십상이다. 유럽 역사상 최대의 위기가 발생한 14세기 상황이 전형적이다. 이때는 백년전쟁(1337~1453), 대기근, 페스트가 함께 찾아왔다. 더욱이 선腺페스트가 병독성이 훨씬 더 강한 폐肺페스트로 변이를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런 현상들 이면에 구조적인 농업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과 달리 전통 시대 농업은 지속적인 생산성 증가가 불가능했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식량 생산이 지탱해주지 못하는 한계 상황에 이르면, 참혹한 대량 아사 사태를 피할 수 없다. 이 모든 일들이 한번에 터진 14세기에 유럽은 자칫 문명의 붕괴를 걱정할 정도로 큰 위기를 맞았다."(233-4)


"사회적 위기는 또한 정신적 위기를 동반한다. 이런 시대에 빈발하는 대표적 현상 중 하나가 종말론이다." "재앙의 시대에는 이런 교리를 기묘하고도 과격하게 해석하여 사회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개는 기성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망상에 가까운 교리에 집착하는 수도사 출신 인사들이기 십상이다. 기근에 빠진 농민이나 도시 빈민이 자신이 불행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분출시키는 격렬한 욕구가,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해 주리라는 환상적 메시지와 만나면 때로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예언자이자 하느님의 전사임을 자처하는 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은 순결하게 재생될 새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하찮은 질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이미 세속의 도덕을 초월했으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타락 이전의 순결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오히려 성관계를 통해 처녀성을 회복시켜 준다는 야릇한 '아담 숭배' 의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234-5)


"중세인들의 생각에 세계는 악마와 혼령으로 가득한 곳이며, 사람들은 흔히 이런 존재들과 만나곤 한다." "특기할 점은 죽은 혼령 이야기가 대체로 12세기 이후 급증한다는 것이다. 이는 '연옥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지옥에 갈 정도의 대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천국으로 직행할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산 것도 아닌 사람들(쉽게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후 영혼이 연옥으로 가서 불로써 단련 받아 죄를 지운 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연옥의 교리다. 프랑스 역사가 자크 르 고프는 연옥의 교리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서 12세기에 완전한 교리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대부분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연옥은 희망의 장소다." "그런데 이승에 남은 지인들이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려주면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혼령이 산 사람에게 나타나서 기도와 미사를 부탁하는 이유다."(241-4)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제도를 신명재판이라 한다. 영어로는 'ordeal'이라 하는데 독일어 'Urteil(판결)'과 어원이 같다. 신명재판이 많이 이루어진 곳은 라인강과 루아르강 사이 지역, 다시 말해서 카롤링거왕조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니, 이교 시대 게르만족의 제도가 기독교의 외피를 두르고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신명재판에는 여러 방식이 있으며, 나름대로 정해진 절차가 있다. 원래 달군 쇠를 잡는 방식은 그 상태로 몇 걸음을 걷든지 찬송가를 한 곡 부르게 한 뒤, 붕대로 손을 싸맸다가 사흘 후에 풀어서 상처의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상처가 심하면 유죄, 그렇지 않으면 무죄다. 펄펄 끓는 물이 가득 찬 솥에 손을 집어넣어 동전을 집어내도록 하는 재판도 비슷하다. 피고의 손발을 묶은 다음 강이나 못에 던져 넣는 방식도 있다. 이때 피고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무죄, 둥둥 뜨면 유죄다. 축성을 한 물은 성질이 순수해서 깨끗한 사람이 들어오면 품고 더러운 죄인이 들어오면 뱉으려 하기 때문이다."(252)


"그렇지만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신명재판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유·무죄의 기준이 너무 모호하다. 많은 경우 명확한 기준보다는 모여든 군중들의 함성에 따라 판결이 나곤 한다." "점차 신명재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게 기적을 강요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요구한다고 하느님이 꼭 기적을 보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만일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면 악마의 농간이 아니라고 누가 보장한다 말인가. 이런 이유로 12세기 파리의 신학자 피에르 르 샹트르는 신명재판이 '악마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법학자들 역시 이런 재판은 합리성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했다. 무고한 사람이 살인자로 몰릴 수도 있고, 죄지은 사람이 풀려날 수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1215년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사제들의 신명재판 참여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재판은 근대적 사법 체제가 자리 잡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255-6)


5장 근대를 향한 여정


"잉글랜드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랭커스터 가문 출신 국왕 헨리 6세(재위 1422~1461, 1470~1471)다.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헨리 6세의 정신병이 크게 악화해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국왕의 조카뻘 되는 요크 공작이 국왕을 보호하는 척하다가 자신이 왕위를 탐하면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와 요크 가문(흰 장미)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요크 공작 자신도 사망했기에 그의 아들이 에드워드 4세(재위 1461~1470, 1471~1483)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10년 후 제정신을 찾은 헨리 6세가 왕권을 되찾기 위해 도전해 왔으나 다시 패배하여 런던탑에 갇혔다가 사망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두 아들은 열두 살과 아홉 살 어린아이였다. 이 중 장남이 에드워드 5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두 달 후 런던탑에 갇혔다가 동생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왕위는 선왕의 동생 리처드가 차지했다."(283-5)


"그가 대관식을 치르고 리처드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곧 국왕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방에서 리처드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주도자 버킹엄 공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제안했다. 튜더 가문의 헨리는 혈통상으로 랭커스터 왕실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다. 일찍이 프랑스에 피신해 있던 그는 무명의 존재였고 전투 경험도 없었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프랑스 전사들을 앞세우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 헨리는 보스워스 벌판에서 리처드 3세의 군과 최후 결전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지를 잃은 리처드는 마지막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영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국왕이다)." "승리를 거둔 튜더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원수 가문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새 왕조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통상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튜더왕조의 시작이다."(285-7)


"차르 이반 4세(재위 1533~1584)의 별칭은 뇌제雷帝, Ivan the Terrible다. 벼락 치듯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위엄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지배자라는 뜻이다." "사실 그의 통치 전반기는 광기에 찬 폭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명하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서구 국가들의 신분의회에 해당하는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한 데다가 군대 조직도 훌륭하게 재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화된 행정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카잔과 아스트라한 등 몽골 세력의 마지막 보루들을 점령하여 볼가강의 접근로를 확보했다. 이는 유라시아대륙 전체 역사에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 아시아 내륙의 유목민족이 밀고 들어오는 도상의 핵심 지점들을 장악하여 그들을 통제하고, 더 나아가서 러시아가 오히려 유목민족 지역 심층부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제 이 나라는 모스크바공국이 아니라 러시아라고 불리면 주변 지역들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311-2)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 이반은 광기 어린 잔혹한 전제군주로 바뀌어 갔다.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위중한 병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신하들이 보인 불충의 자세 등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 같다. 많은 측근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다. 차르는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행테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강력한 기구가 '오프리치니키'라는 러시아 최초의 비밀경찰 조직이다." "이반의 희생자 중에는 친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임신한 며느리의 옷이 단정하지 않다고 꾸짖고 있는데 아들이 끼어들자 쇠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제일 든든한 후계자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다. 1584년 이반은 54세에 갑자기 사망했다. 그 역시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병약하거나 천치 상태인 아들들이 차르 지위를 물려받았으나 오래 못 가 류리크왕조는 단절되고, 1613년 로마노프왕조가 들어섰다. 로마노프시대는 20세기 러시아혁명 시기까지 300년 넘게 지속된다."(312-7)


"피렌체는 여러 장점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밀, 올리브, 포도주를 제공하는 풍요로운 주변 농촌을 들 수 있다." "상업과 공업, 은행업은 더 중요한 요소다. 직물업을 통해 점차 큰돈을 벌고, 전 유럽의 대상인과 군주 및 귀족 들을 대상으로 금융 거래를 하여 큰 부를 쌓아갔다." "스피니, 프레스코발디 같은 1세대 가문에 이어 바르디, 페루치 같은 2세대 가문들이 성장하고, 이들이 쇠락하면 다시 메디치, 스트로치 같은 3세대 가문들이 융성했다. 이 도시귀족 가문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예술적으로 피렌체를 빛낸 주역들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 브로델은 피렌체 시민의 새로운 정체성을 두고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식, 곧 절약이나 시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근대 부르주아 문화 요소가 생성되었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힘과 능력virtu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가 발전한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은 이런 복합적인 분위기에서 꽃피었다."(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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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 상징사
미셸 파스투로 지음, 주나미 옮김 / 오롯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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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중세의 상징


"상징에 관한 고유한 연구에도 몇몇 뛰어난 업적들은 존재하지만 대부분 신학이나 철학과 관련된 매우 사변적인 차원에 제한되어 있거나, 표장과 표장체계의 세계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렇지만 중세에 표장embleme과 상징symbole은 서로의 경계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달랐다. 표장은 명칭, 가문의 문장, 도상학적 징표처럼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호였으나, 상징은 육체적인 인격이 아니라, 추상적인 실체·이념·관념·개념 등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기호·형상·사물은 표장이자 상징으로서의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프랑스 국왕의 상징물regalia이던 [상아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인] 정의의 손main de justice 같은 것이다. (다른 군주들은 결코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프랑스 왕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그를 다른 군주들과 구별해주는 표장의 성격을 지닌 소지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프랑스 군주제에 관한 어떤 특정한 관념을 나타내던 상징적 사물이기도 했다."(13-4)


# 중세의 상징 체계

1. 어원론 : '기호의 자의성'은 중세 문화와는 관련이 없다. 가령, 호두나무의 라틴어 이름인 '눅스nux'는 '해를 끼치다'라는 뜻을 가진 '노케레nocere'와 관련 있다고 생각되었고, 사과나무의 라틴어 이름인 '말루스malus'는 '악malum'이라는 단어를 연상시켰다.

2. 유추 : 두 개의 낱말이나 관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조응관계(통상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에 기초해 나타났다. 가령, 우리가 차가운 색이라고 여기는 파란색은 중세에는 공기의 색이고, 공기는 따뜻하고 건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따뜻한 색으로 여겨졌다.

3. 차이 : 어떤 목록이나 집합 안에서 한 대상이 다른 것들과 미세한 차이를 보일 때 거기에 가치와 의미가 부여된다. 가령, 뿔은 불안을 유발하는 악마적 표상이지만, 모세는 (오역에서 비롯한) 뿔 덕분에 칭송받는 존재이자, 뿔이 있는 것들 가운데 으뜸인 존재가 되었다.

4. 부분과 전체 : 소우주-대우주 관계처럼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의 모상이었고, 부분은 전체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가령, 성유물에서 뼛조각 하나, 이빨 하나는 성인의 전신에, 왕관과 인장은 군주를, 흙덩이 하나, 짚단 하나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봉토 전체를 나타냈다.


"중세의 모든 상징체계에서 여러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전체는 개개의 요소들의 고립된 의미의 총체보다 언제나 더 풍부한 의미를 품고 있다. 예컨대 사자의 상징체계는 글에서도, 도상에서도, 기념비 위에서도 고립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독수리·용·레오파르두스 등과의 관계에서 비교해 보아야 더 풍부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중세의 상징은 이런저런 낱낱의 의미보다 작용방식에 따라 특징이 정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색을 예로 들면, 빨간색은 열정이나 죄악을 의미하기보다는 (선이든 악이든) 격렬히 작용하는 색이다. 그리고 녹색은 단절과, 재생 이후의 혼란의 원인이 되는 색, 파란색은 고요함과 안정을 가져오는 색, 노란색은 흥분과 위반을 일으키는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용방식을 의미작용의 규칙보다 우선시하면 역사가는 상징의 양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모호함 그 자체인 양면성은 상징의 가장 깊은 본성의 일부를 이루며, 상징이 잘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26)


"중세 상징체계의 핵심은 기독교 세계가 시작된 뒤 5~6세기의 기간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무에서ex nihilo' 몇몇 신학자의 상상으로 생겨나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의 여러 가치체계와 감수성의 양식 등이 뒤섞여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 분야에서 중세 서양은 3개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나는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성서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로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야만' 세계, 곧 켈트·게르만·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해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서양 중세는 1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여기에 독자적인 층들을 덧쌓았다. 사실 중세 상징체계에서 완전한 배제는 결코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모든 것이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였고, 그것들이 몇 세기를 거치며 서로 뒤섞였다. 그래서 원형에 기초하고 보편적인 진실에 속하는 상징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 세계의 모든 것은 문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27)


1부 동물과 식물


1 동물재판


"동물재판은 13세기 이후 서양의 다양한 지역들에서 목격된다. 세속사회나 교회의 재판소로 끌려 나온 온갖 동물재판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남자나 여자, 아이를 죽이거나 심한 상처를 입힌 돼지, 소, 말, 당나귀, 개와 같은 개별 동물과 관련된 재판이다. 이것은 형사재판으로, 교회 권력이 개입하지 않았다. 둘째는 집단으로 다루어지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재판이다. 어떤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거나 주민을 위협한 (멧돼지·늑대 같은) 대형 포유류나 (설치류, 벌레, '해충'처럼) 더 빈번히 발생해 농작물을 해치는 작은 동물들과 같은 경우이다. 이것은 재해인데, 전자는 세속권력이 조직한 사냥몰이꾼이 몰아냈고, 후자는 교회가 개입했다. 교회는 악마를 쫓는 의식에 호소했고, 신의 저주를 내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나아가 교회로부터 추방하고, 파문을 선고했다." "마지막은 수간이라는 큰 죄악과 관련된 동물을 상대로 한 재판이 있는데, 대개 소송서류가 죄인과 함께 소멸되어 연구하기 어렵다."(44)


"동물은 언제나 어떤 점에서 본보기의 원천이 되었다. 사법의 영역에서 동물을 재판소로 보내고, 심판하고, 단죄하거나 무죄로 풀어주는 것은 재판이라는 의례가 지닌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보마누아르의 생각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정의'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기능커녕 오히려 '바람직한 정의'의 작용을 위해 꼭 필요한 행위였다. 어떤 것도 '바람직한 정의'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고, 동물도 예외는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법의 주체인 것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제기된 소송들은 실질적으로 의례화된 일종의 교훈예화였다. 거기에서는 바람직한 정의의 완벽한 실천이 심문 절차에 힘입어서, 나아가 모든 의례적 요소에 맞추어 매우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연출되었다. 더구나 다른 사례에서는 증인이 매수되거나 피고가 죄를 부인하거나 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지만, 이 재판에서는 정의가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오롯이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52-3)


2 사자의 대관식


"상징의 차원에서 사자는 애매모호한 동물이었다. 사자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었으나 나쁠 때가 더 많았다.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교활하고 무례한 사자는 악의 세력, 이스라엘의 적, 폭군과 사악한 왕들이 구현된 것이었다. 「시편」과 예언서들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신의 보호를 간절히 빌며 달아나야 하는 위험한 동물로 사자를 나타냈다. 「시편」의 작가(다윗)는 〈사자의 입에서 저를 구해주소서〉라고 간청했고, 중세 초의 수많은 작가들도 되풀이해서 그렇게 기도했다." "그렇지만 그만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성서에는 좋은 사자도 있었다. 공익을 위해 자신의 힘을 쓰는 사자의 으르렁거림은 신의 말을 나타냈고, 가장 용감한 동물인 사자는 유대 부족, 가장 강력한 이스라엘을 상징했다. 이런 점에서 사자는 다윗과 그 자손들, 심지어 그리스도와도 연관되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부족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62)


"사자가 이렇게 그리스도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나타내며 수많은 영역에서 지위가 높아지자, 신학자와 예술가들에게는 까다로운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이 동물이 지닌 부정적인 요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동물지 작가들, 표장·상징 제작자들의 해결책은 나쁜 사자를 완전히 다른 동물로 만들었다. 그들은 나쁜 사자에게 독립된 이름과 특성을 부여해 그리스도적인 사자와 혼동되지 않게 했고, 사자는 동물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배설구' 노릇을 한 동물은 레오파르두스Leopardus였다. 그 동물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표범이 아니라, 상상의 표범이다. 레오파르두스는 (갈기를 제외하고는) 사자의 겉모습과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타고난 본성이 사악하다고 여겨졌다. 12세기 이후 문학작품들과 초기 문장들에서 레오파르두스는 자주 타락한 사자, 반쪽짜리 사자, 사자의 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사자의 적이라는 역할로부터 레오파르두스는 때때로 용의 사촌이나 동맹자가 되기도 했다."(65-6)


3 멧돼지 사냥


"교회와 성직자가 동물의 무리 안에서 멧돼지에게 할당한 위치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멧돼지의 상징성은 일찍부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사냥꾼·켈트의 드루이드·게르만 전사들이 그토록 예찬하던 이 동물을 불순하고 끔찍한 것, 선의 적, 신에 맞서는 죄인의 이미지로 바꿔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의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든 멧돼지를 묘사한 「시편」의 구절에 관한 주해서를 남겼고, 이것이 멧돼지를 악마의 피조물로 본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13세기가 되면 멧돼지는 추악하고, 거품을 뿜어대고, 악취를 풍기고,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등의 털은 곤두서고, 억센 털은 줄무늬를 이루고, 〈입 안에는 뿔을〉 지니고 있다. 모든 점에서 그 동물은 악마의 화신이었다." "중세 말에 일곱 가지 덕목과 대립하는 7대 죄악의 체계가 작동하자, 멧돼지는 그 죄악들 가운데 6개나 속성으로 지니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오만·색욕·분노·탐식·질투·태만의 죄악이었다. 오직 인색만이 멧돼지와 연결되지 않았다."(84-6)


"앙리 드 페리에르는 이 악마 같은 동물을 그리스도적인 동물과 대립시켰다. 사슴이었다. 사슴이 지닌 열 가지 특성은 멧돼지의 그것과 마주서서 짝을 이루고, 10개로 갈라진 뿔은 십계에 대응했다. 〈이 뿔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세 가지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준 율법의 십계를 나타낸다. 세 가지 적은 육신과 악마, 세속이다.〉" "교부들과 라틴 동물지는 (해마다 새로 자라나는 사슴의 뿔에 기초해서?) 사슴을 다산과 부활의 상징이자 세례의 이미지, '악'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목마른 사슴이 샘물을 찾듯이 의로운 사람의 영혼이 주를 찾는다는 「시편」의 구절에 끊임없이 해석을 덧붙였다. 교부와 신학자는 사슴을 순수하고 덕이 있는 동물, 선량한 기독교인의 이미지, 새끼 양과 유니콘과 같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나 대체물로 삼았다. 또한 (라틴어에서 '종'을 뜻하는) '세르부스servus'와 ('사슴'을 뜻하는) '케르부스cervus'의 유사성에 기초한 언어유희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슴은 '구세주servator'였던 것이다."(87-8)


4 나무의 힘


"중세문화에서 나무와 돌의 대립은 나무와 금속의 대립만큼 격렬하지는 않았다. 나무와 돌의 관계는 가치 있는 물질과 가치 있었던 물질 사이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나무와 금속의 관계는 순수한 물질과 악마적인 물질 사이의 대립이었다. 나무는 성스러운 십자가의 이상적인 이미지로 거룩해진 순수한 물질이었지만, 금속은 불안을 가져오고, 도리에 어긋나며, 거의 악마적이기도 한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사람들의 감수성에서 금속은 (하찮은 것이든 귀한 것이든) 언제나 얼마간 지옥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지의 배에서 꺼내져 (나무의 커다란 적인) 불로 처리되었다. 곧 어둠과 지하세계의 산물이었고, 어느 정도는 마법과도 관련된 변질과 조작의 결과였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대장장이는 분명히 능력이 있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금속과 불을 다루는 일종의 마법사이기도 했다. 반대로 목수는 고귀하고 순수한 재료를 가공했기 때문에, 소박하지만 존경을 받는 장인이었다."(94)


"13세기가 지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될 변동의 징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기 1천년 이후 이루어진 개간과 기술의 진보, 상업의 확대로 유럽의 숲은 크게 파괴되었고, 상대적인 결핍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중세 말에는 이러한 경제발전의 둔화와 몇몇 기술적 측면에서의 가치하락이 상징적 측면에서도 상대적인 하락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나무는 더는 유일한 최고의 재료가 아니게 되었으며, 직물이 점차 그 지위를 뚜렷하게 위협해왔다. 실제로 직물 산업은 12세기와 15세기 사이의 시기에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서양 경제의 진짜 원동력이 되었다." "옷은 그것을 입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어떤 지위나 계급에 있는지, 어떤 친족집단·직능단체·법적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나타냈다. 이렇게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적인 상징체계와, 그와 짝을 이루는 상상에서 직물은 다른 재료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96-7)


5 왕의 꽃


"중세 초기에 백합꽃 문양은 줄곧 왕가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그와 함께 주로 그리스도와 연관된 강한 종교적 차원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성서 「아가」에 나오는 〈나는 들판의 꽃, 골짜기의 백합〉(2:1)이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13세기까지 백합이나 백합꽃 문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기 1천년 이후 성모 신앙이 확산되자,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 소재도 점차 마리아의 상징과 결합해갔다. 그 뒤 「아가」의 〈가시나무 사이의 백합처럼, 소녀들 사이에 있는 나의 연인〉(2:2)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었고, 성서와 교부들의 주해서 안의 수많은 구절들에서도 백합은 순수함과 순결함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봉건시대 이후에 성모 마리아는 원죄에서 벗어나 잉태를 했다고 여겨졌다. 아직 이것은 '무염시태'의 교리로까지 틀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 교리는 19세기가 되어서야 결정적으로 인정되었다."(114)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이후로 프랑스 국왕은 방패와 깃발, 의복에 백합꽃 문양을 붙일 때에 하나나 셋이 아니라 꽃을 흩뿌린 문양을 선택했는데, 꽃의 숫자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특이성은 표장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이룬다. 먼저 똑같이 백합꽃 문양으로 장식된 다른 문장들로부터 왕의 문장을 구별한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표장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치는 여기에 강력한 상징적 차원의 의미도 더한다. 곧 뭔가가 총총하게 박힌 그 구조는 별들이 빛나는 하늘이자 우주의 이미지이다. 다시금 이 문장의 기원과, 하늘의 왕과 지상의 대리인인 프랑스 국왕의 특권적인 유대 관계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300년대로 접어든 뒤에는 흩뿌려진 백합꽃 문양과, 대개의 경우 3개로 숫자가 줄어든 백합꽃 문양 사이에 꽤 뚜렷한 구별이 생겨났다. 흩뿌려진 백합꽃 문양은 국왕 자신이나 그의 가족에 소유되었으나, 3개의 백합꽃 문양은 위임된 왕권이나 정부, 나아가 행정권을 나타내기도 했다."(119-21)


2부 색과 표장


6 중세의 색


"중세의 색은 색 나름이었다. 대체로 거의 모든 것에 (왕실에서는 먹을거리나 개, 말, 독수리 같은 동물의 털이나 깃털 등에도) 색이 입혀졌지만, 모든 색이 똑같은 차원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뚜렷하고, 빛이 나며, 채도가 높고, 확실한 색들이 '완전한 색'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색들은 빛을 내뿜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색은 대상에 밀착해서 시간의 경과와 세계, 햇빛에도 바래지 않았는데,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만, 특정한 종류의 전례나 축제, 의식과 관련된 때에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장소를 대표하는 것은 교회였다." "여기에 교회 의례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나 의복, 전례서, 다양한 축제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대부분 직물로 된) 장식과 같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색이 더해졌다. 13세기 이후에는 미사 자체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행사처럼 되었고, 전례의식에서 색이 맡는 역할은 더욱 커졌다."(145-6)


"문장은 12세기에 출현했지만, 1200~1220년대부터 실질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일찍부터 장인과 농민의 문장이 존재했듯이) 모든 사회계층과 범주로 확산되었고, 문장에 관한 규칙들도 고정되어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규칙 체계의 한가운데서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이때 색은 (흰색·노란색·빨간색·파란색·검은색·녹색의) 여섯 가지로 제한되었다." "중세 말에 문장이 확산되면서 모든 공간과 모든 상황에서 이러한 색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문장은 마을에서도 일상적인 풍경의 일부를 이루었다. 모든 교구의 교회들이 13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실상 문장의 '박물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본적인' 여섯 가지 색은 다른 것들보다 자주 나타난 특정한 배색을 눈에 익숙하게 만들고, 거꾸로 (빨간색과 검은색, 녹색과 파란색, 파란색과 검은색을 나란히 놓는 것처럼) 문장체계에서 금지하고 있는 배색을 꺼리거나 드물게 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146-7)


7 흑백 세계의 탄생


"중세 신학에서 빛은 감각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면서도 비물질적인 유일한 영역이었다. 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가시화된 것으로, 말 그대로 신적인 것의 발현이었다. 그래서 이런 물음들이 던져졌다. 색은 물질적인 것인가? 비물질적인 것인가? 이 문제는 가톨릭 교회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색이 빛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신적인 성질을 지니게 된다. 신은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상에서 색이 차지하는 공간을 넓히는 일은 어둠이 차지한 공간을 줄이는 것, 곧 신의 영역인 빛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색은 빛에 대한 추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 하지만 반대로 색이 물질적인 실체로 단순한 포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신성의 발현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천지창조의 위업에 인간이 쓸데없이 덧붙인 인위적인 것일 뿐이다. 색은 죄를 지닌 인간이 신과 화해하는 길로 '옮겨가는 것'을 방해하는 해로운 것이 된다."(154)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성 베르나르에게 색은 빛이기 이전에 물질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색조가 아니라, 오히려 밀도·농도·깊이가 문제였다. 색은 지나치게 풍부하고 불순한 것이었다. 곧 고위성직자들의 말에 흔히 등장하며 사실상 전부라고도 할 수 있던, 헛된 사치와 '허영vanitas'이었다. 아울러 색은 농밀한 것·불투명한 것과 관계가 깊었다." "그에게 '색'이라는 말은 좀처럼 '빛'이나 '광채'라는 관념과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혼탁한', '빽빽한', '꽉 막힌' 등이 어휘들로 꾸며지는데, 그 어휘들은 모두 혼란·포화·어둠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색에서 빛이 아니라 빛이 빛이 없음을, 밝음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었다. 색은 밝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둡게 한다. 그것은 어둠의 영역을 넓혀 숨통을 조여온다. 색은 악마적인 것이다. 아름다운 것·빛나는 것·신적인 것은 모두 다 어둠을 벗어나 그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색으로부터, 특히 다색多色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한다."(157)


# 그렇지만 중세 가톨릭 세계에서 성 베르나르의 태도, 더 일반적으로 (예배당 내부의 빛을 제한했던) 시토파의 태도는 소수였다.


"16세기 초는 인쇄본과 판화의 이미지, 곧 '흑백'의 문화와 상상이 지배적으로 되어가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는 (예배·옷·예술·주거·'업무' 등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전면적으로 검은색·회색·흰색을 중심으로 구성된 색의 체계를 권장하고 확립했다." "츠빙글리에게 예배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진지한 분위기를 흩트리는 것이었다. 루터와 멜란히톤에게 교회는 인간의 모든 허영을 없애는 장소여야 했다. 카를슈타트에게 교회는 〈유대교 회당처럼 순수해야〉 했다. 칼뱅에게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은 신의 말씀이었다. 곧 이들 모두에게 교회는 신자를 거룩함으로 이끌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간소하고 조화로우며 어지럽지 않은 곳, 겉모습의 순수함이 영혼의 순수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 교회가 연출하던 전례의 색은 머물 곳을 잃었고, 교회 내부에서 색은 어떤 전례적 역할도 맡지 않게 되었다."(181, 186)


"성 베르나르와 칼뱅의 말은 비슷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예술에서 나타난 색 혐오는 전혀 혁신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동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양의 색에 관한 감수성의 변화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맡았다. 흑백의 세계와 본연의 색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데 기여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색 애호라는 로마의 반작용을 낳아 바로크와 예수회 예술의 탄생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실제로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은 교회를 지상에 실현된 천상의 이미지이자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보는 교리를 바탕으로 성전 내부의 온갖 화려함을 정당화했다. 신의 거처에 지나친 아름다움 따위는 없었다. 종교개혁은 대리석·금·값비싼 직물과 보석·스테인드글라스·조각상·프레스코화·종교화·반짝이는 도장과 채색과 같은 모든 것들을 교회와 예배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바로크 예술과 함께 교회는 다시 색의 전당이 되었다. 로마네스크 시대에 클뤼니파의 전례와 미학이 그랬듯이 말이다."(190-1)


8 중세의 염색업자


"'혼합'에 대한 혐오의 영향은 일상생활이나 물질문화에서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상징의 영역에서도 매우 많이 나타났다. 덧붙이고, 헝클고, 융합하고, 뒤섞는 것은 흔히 악마와 같은 일로 여겨졌다. 창조주가 부여한 사물의 본성과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염색업자·대장장이·약제사·연금술사처럼) 그런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물질에 일종의 속임수를 쓰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들 자신도 어떤 작업을 하는 것에는 망설임을 품고 있었다. 예컨대 염색업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색을 섞어서 제3의 색을 만들려고 선뜻 달려들지 않았다. 가령, 녹색 색상은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얻지 않고, 자연물의 녹색 색소와 염료에서 얻거나, 파란색이나 회색 염료를 혼합하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서 얻었다." "파란색과 빨간색을 섞어서, 다시 말해 대청과 꼭두서니 염료를 혼합해서 보라색을 얻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201-2)


"염색의 가격이나 가치 체계는 적어도 색 만큼이나 농도·선명도에도 기초해 있었다. 곧 아름다운 색, 귀하고 값진 색은 진하고 선명하고 빛나는 색이었으며, 직물의 섬유에 깊게 배어들어 햇빛·세탁·세월에서 오는 탈색을 견디는 색이었다." "이는 우리의 지각이나 근대적인 관념과 충돌한다. 중세의 염색업자와 그들의 고객에게 진한 색은 똑같은 색상의 흐리고 덜 짙은 색보다 다른 색상의 진한 색과 더 가깝게 지각되었다. 예컨대 모직물의 진하고 밝은 파란색과 더 가까운 것은 흐리고 광택이 없는, '색바랜' 파란색이 아니라, 똑같이 진하고 밝은 빨간색이었다. 이러한 진한 색, 짙은 색, (또렷하고 내구성이 강한) 바래지 않는 색에 대한 추구는 염색업자를 위해 마련된 모든 처방집들에도 나타난다. 이 경우에도 핵심적인 조작은 매염이었다. 직물과 염료들마다 서로 다른 착색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작업장마다 고유한 관습과 처방이 있었는데, 기술은 펜과 양피지보다는 입과 귀를 거쳐 더 많이 전해졌다."(204)


9 붉은 털의 남자


"모든 배신자들처럼 유다도 붉은 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세 전통에서 붉은 머리카락이나 수염으로 관습적으로 구별되던 카인, 델릴라, 사울, 가늘롱, 모드레드와 같은 이들 말이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배신은 자신의 색들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 사이에 위치한 그 색은 두 색 모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두 색을 합쳐 부정적인 상징성을 단순히 두 배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이 악한 빨간색과 악한 노란색의 혼합은 우리에게 친숙한 오렌지색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오렌지색은 중세의 감수성에서는 그 색조와 빛깔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렌지색보다 어둡고 채도가 높은 이 색은 악마·여우·위선·거짓·배신의 색인 적갈색이었다. 중세의 적갈색은 언제나 빨간색이 노란색보다 짙었고, 이 빨간색은 진빨강처럼 빛나지 않았다. 그래서 윤기가 없는 침울한 색조를 띠어, 빛 없이 타오르는 지옥의 불꽃을 연상시켰다."(225-6)


# 사라센과 결탁해 롤랑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늘롱, 아서왕을 배신한 모드레드


"그러나 유다가 빨갛지만은 않았다. 그는 노랗기도 했다. 12세기 말 이후의 도상들에서는 노란색이 점차 유다의 옷에 자주 할당되는 색으로 등장했다. 그의 '붉은 털'에는 (악한 피와 악한 불을 뜻하는) 피와 지옥의 빨간색만이 아니라, 배신과 거짓말의 노란색도 동시에 담겨 있었다." "수많은 문학·백과전서 문헌들에서 그 색은 일찍부터 거짓과 거짓말의 색이었다. 나아가 점차 유대인의 색이자 유대교 회당의 색이 되었다. 1220~1250년대 이후 기독교 도상은 유대인을 나타내는 데 이 색을 거듭 사용했다. 이제 유대인은 노란색 옷을 입거나, 일부가 노란색으로 된 복장으로 표현되었다. 모자가 가장 많았고, 긴 겉옷·망토·허리띠·소매·장갑·신발이 노란색인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관습은 점차 도상과 상상에서 현실로 옮겨갔다. 랑그도크·카스티야·이탈리아 북부·라인강 유역 등의 지방에 있는 여러 도시들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복장 규제를 강제하면서 식별의 기호로 이 색을 즐겨 사용했다."(234-5)


10 문장의 탄생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중반 사이) 서양의 전사들은 (턱까지 치켜 입는) 사슬갑옷의 두건과 (얼굴을 덮어 가리는) 투구의 콧대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투가 한창일 때 적군과 아군을 식별할 수 있는 기호로 1080~1120년 무렵부터 (이 부사가 중요한데) '점차' 방패의 넓은 평면에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동물·꽃 등을 그려넣는 관습이 생겨났다." "원시적인 문장체계는 개인·가문·봉건적 관계라는, 기존의 3중의 표장체계를 (사회적·기술적으로) 단일한 체계로 결합시킨 산물로 등장했다. 새로 탄생된 체계는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에 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문장을 기술하는 데 쓰인 언어가 처음부터 (라틴어가 아니라) 속어였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그 체계는 군사적 차원을 뛰어넘어, 12세기를 거치면서 모든 개인과 사회집단들에 더 큰 파급력을 끼치면 제기된 문제, 곧 정체성의 탐구와 확립이라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243, 248-9)


"1180~1200년대 이후 하나의 혈족 안에서는 단지 한 인물, 곧 본가의 장자만이 '완전한' 문장, 요컨대 덧붙여진 요소가 없는 가문의 문장을 지녔다. 다른 자식들과 그 밖의 다른 모든 이들은 그와 같은 권리를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문장에 변형을 더해서 자신이 '문장의 우두머리'가 아님을, 곧 본가의 장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야 했다. 이러한 변형을 '분가 표지Brisure'라고 한다. 여성에게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았다. 미혼인 여성은 아버지와 같은 문장을 지녔고, 기혼인 여성은 대체로 남편의 문장과 아버지의 문장을 조합한 문장을 사용했다." "문장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친족관계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두 가문이 몹시 비슷한 형태의 문장 때문에 같은 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문장체계는 계보학을 도와서 인물을 식별하거나, 인명을 재발견하거나, 혈통을 확인하거나, 친족관계를 재구성하거나, 동명이인을 구별하는 데 기여했다."(259-60)


"방패는 문장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고, 그것이야말로 '엄격한 의미에서stricto sensu' 문장을 나타낸다." "방패 바깥의 장식들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중요한 것은 투구꼭대기장식cimier, 곧 투구와 헬멧 위에 표현된 문양이었다. 이것은 개인의 욕구만이 아니라, '씨족' 형태의 친족관계도 나타냈다." "투구꼭대기장식은 적어도 처음에는 (방패 문장과 달리) 인물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격을 변화시켜 그 인물에 새로운 힘을 부여했으며, 그를 좁은 가문의 틀에서 끌어내서 더 넓은 친족관계의 연결망 안에 자리하게 했다. 곧 그것은 일종의 가면이자 토템이었다." "이러한 '씨족적인' 투구꼭대기장식에 가장 집착한 것은 당연히 적장자의 가문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다시 말해 가장 낮은 지위의 분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귀족 가계에서 가문의 투구꼭대기장식에 가장 집착하고, 개인의 투구꼭대기장식을 가장 사용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지위가 낮은 자들이었다."(268-9, 275)


11 문장에서 깃발로


"(프랑스·영국의 경우처럼) 국가의 탄생이 국민의 탄생보다 앞선 곳도 있고, (스위스·독일·이탈리아의 경우처럼) 순서가 반대인 곳도 있다. 국가가 국민에 앞서 탄생한 경우에 (갈리아의 수탉·아일랜드의 클로버·바스크의 십자가 등과 같은) 오랜 민족적 상징은 결코 공식적인 국가의 형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 대신 옛 왕조의 표장이 군주제의 표장을 거쳐서 국민적 상징의 역할을 맡았다. 국민이 국가에 앞서 탄생한 나라들에서는 오래된 문장의 형식이나 색이 왕조와 결합했다. 아울러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연방 조직자의 역할을 맡으면서 곧 국민적 상징이 되었다." "바이에른의 사례를 보면, 1918년 이후 바이에른 왕국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비텔스바흐 왕조의 혈통도 뿔뿔이 흩어지고 갈라져서 더는 바이에른을 통치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에른 주와 주민은 그대로이다. 아울러 오래된 '은색과 청색의 빗금무늬 방추형 문양'은 그들에게 여전히 연방 결성의 표장이자 주권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285-7)


"모든 기호, 표장, 색과 마찬가지로 깃발도 결코 홀로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깃발들과의 관계와 비교를 통해서만 비로소 생명을 지니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스 국기는 1821~1823년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국민적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처음 등장했으며, 혁명기를 거쳐 독립을 달성한 1833년에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처음의 구성은 '청색 바탕에 은색 십자가'였으나, 뒷날 두 차례에 걸쳐 바뀌어 오늘날의 '파란색 바탕에 1개의 흰색 십자가와 4개의 가로띠무늬' 형태가 되었다." "그리스 깃발의 최초 구성은 (빨간색 바탕에 흰색 초승달과 별 모양인) 오스만튀르크 깃발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이슬람의 초승달에 대응하고, 오스만튀르크와 이슬람 세계에서는 낮게 평가되던 파란색은 빨간색에 대응한다. 이렇게 소수자의 깃발은 홀로는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다른 어떤 것에 맞서는 대립물로 기능하면서 저항을 공공연히 선언하는 역동적인 상징이 된다."(296-8)


3부 놀이와 영향


12 체스의 전래


"인도에서 오래전에 출현한 체스의 다른 형태에서는 대체로 (움직이는 말을 선택하는 것이나 판 위에서 나아가는 칸수와 같은) 체스말의 진행방법을 주사위로 결정했다. 이런 방법은 놀이가 이슬람 세계로 확산되었을 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서양에 전해졌을 때에는 부활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 교회에게 라틴어로 '알레아alea'라고 하는 '운에 맡기는 놀이'는 꺼려야 할 것이었고, 뜻밖의 행운에 의지하는 노름은 모두 악마적인 것이었다. 주사위는 특히 나쁜 것이었다. 다른 놀이보다 내기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오두막집·술집·수도원 등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든 돈·옷·말·집 등을 가지고 있는 온갖 것들을 걸고 내기를 했다. 주사위는 위험한 놀이이기도 했다. 주사위통이 사용되기는 했으나, 문학작품에도 가끔 언급되듯이 특수하게 조작한 주사위를 이용한 속임수가 자주 행해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체스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주사위였다."(314-5)


"그러나 중세에 교회와 수도원의 수장고에 체스말이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교회의 태도는 놀랍다. 한쪽에서는 체스를 즐기는 관습을 단죄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거의 성유물을 숭배하듯이 체스말을 대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체스라는 놀이는 악마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것에 사용되는 체스말은 중요하게 보관되거나 때로는 숭배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단죄가 그다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놀이를 즐기는 관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사회 전체로 퍼져갔다. 둘째로, 13세기에 이르러 놀이 자체가 일반적으로 재평가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 뒤 놀이들은 대대적으로 궁정풍 기사도 교육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체스에 대해 교회가 적의를 품은 중요한 이유이던 주사위의 사용, 곧 우연에 의지하는 성격이 점차 사라졌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주사위 사용을 포기하면서 체스는 점차 명예로운 지위를 확보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숙고가 우연을 대신했다."(313-5)


13 아서왕 놀이


"13세기 중반 아서왕 전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수많은 지역들에서, 그리고 귀족층뿐만 아니라 농민층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중세말(14~15세기)에 아서왕과 관련된 인명을 (일시적인 별명을 제외하고) 실제의 세례명으로 하는 관습은 가장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두 사회계층과 관련이 있었다. 하나는 얼마간 몰락해가던 소귀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지위가 높아지던 부유한 도시상인 계층이었다. 소귀족에게 그러한 관습은 백년전쟁에서 크게 훼손된 기사로서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울러 인명이라는 '겉모습'으로 경제적·정치적 쇠퇴를 메우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거꾸로 부르주아에게는, 아니면 적어도 도시 귀족에게는 (정략결혼, 자금 대부, 왕에게의 봉사 등 귀족사회로 참여하기 위해 행한 다른 거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가치체계에 기초해 귀족문화와 귀족계급으로 들어가기 위한 사회적 전략이었다."(343, 347-8)


14 라퐁텐의 동물지


"라퐁텐이 그려낸 동물들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시골의 한가한 무료함 속에서 만난 동물들이 결코 아니었다. 대다수가 이미 고대와 중세의 우화작가들이나 동방의 이야기 작가들, 『여우이야기』나 이솝우화, 동물을 소재로 한 시의 세계와 같은 온갖 전통들에 등장했던 동물들이었다." "동물의 왕인 사자는 오만하고 위엄이 있었고, 여우는 교활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늑대는 언제나 굶주려 있고 잔혹했으며, 당나귀는 어리석고 게을렀다. 토끼는 유쾌하고 느긋했으며, 까마귀는 시끄럽고 욕심이 많았다. 동물들은 모든 우화에서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지식인 계층의 문화와 민중문화에서 이러한 동물의 성질은 점차 틀에 박힌 형태로 굳어졌다. 그리고 뛰어난 동물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장학은 언제나 형태보다 구조를 우선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불변의 뼈대 주위에 일종의 유연성을 만들어냈다. 동물들이 그 뒤 어떻게 쓰이든 결코 자신의 성질을 잃지 않을 그런 유연성이었다."(355-6)


15 애수의 검은 태양


16 아이반호의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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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다 -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전쟁 연대기 동아시아와 그 너머 5
개릿 매팅리 지음, 콜린 박.지소철 옮김 / 너머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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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장 서막


"60년 전, 구교도 세력과 신교도 세력이 파벌을 형성한 이래로 항상 운명의 장난처럼 두 파벌 중 어느 한쪽, 혹은 두 파벌 모두를 여성이 이끌었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 메리 튜더와 엘리자베스 튜더, 로렌의 메리와 엘리자베스 튜더가 맞서왔고, 최근 30년 동안은 오늘(1587년 2월 18일) 처형장에 선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튜더가 대립해왔다." "가톨릭인 메리 스튜어트가 왕위 계승자로서 엘리자베스 사후에 별 마찰 없이 왕위를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동안에는 수많은 신봉자들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겠지만, 이교도인 엘리자베스가 정통파의 후계자인 그녀를 살해한다면 분노한 그들이 봉기해서 이 모든 죄악을 쓸어버릴 것이 확실했다.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여왕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 이상으로 그녀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할 왕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단순히 가톨릭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켜야 했다."(34-6)


2장 단순한 시민들


"만약 메리 스튜어트가 즉위하여 영국에서 로마가톨릭을 회복시키려 한다면, 그때 벌어질 내전이 어떤 것인지 런던 시민들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100년 동안이나 영국은 튜더 왕조가 끊긴다면 다시 왕권을 두고 경쟁 관계에 있는 파벌 간에 싸움이 일어나, 우리가 '장미전쟁'이라고 부르는, 무정부 상태의 시대가 또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왕좌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대결 중 최악이었던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의 기나긴 싸움은, 종교 문제로 촉발되는 내전의 참혹함에 비하다면 그저 무장 폭동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구의 목사들이 신도들에게 국민들이 적법한 통치자들의 권위를 부정하며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국가는 저주받은 국가라는 점을 상기시킬 때마다, 신도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그들이 자비로운 군주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안녕을 위해 고개 숙여 기도할 때 그들의 음성에는 필사적일 정도의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42-3)


3장 여왕의 당혹감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시동생인 프랑스 왕에게 메리의 처형에 대해 자신이 느낀 놀라움과 분노, 슬픔 등에 대해 장황한 편지를 썼으며, 파리에 있는 자국 외교관들을 통해 그 자신의 심정을 프랑스인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했다. 베네치아 주재 영국 대사는 엘리자베스가 단지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뜻으로 허가서에 서명을 하고 그것을 데이비슨에게 건네준 것인데, 그 신하가 분별없이 권한 밖의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교황에게 전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데이비슨을 구금하고 관직을 박탈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성심을 다해 애도를 표할 생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른 나라의 정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며, 런던에서도 여왕의 측근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에 대해 놀라워하며, 진심으로 그 일이 여왕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듯했다." "엘리자베스는 필요할 때마다 놀라운 연기력을 발휘했는데, 만일 그녀의 행동이 연기였다면 그것은 일생 최고의 연기였을 것이다."(61-2)


"그러나 양립할 수 없는 힘의 충돌은 아무리 묘한 마법을 쓰더라도 영원히 유보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에스파냐란 거인이 유럽 전역에서 육중한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충돌은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유럽에서 힘의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양자 대결만이 남은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침묵공 윌리엄(오라녜 공, 빌렘 1세)의 암살로 인해 자기 발밑에 던져진 유럽 신교도 세력의 지도자 명패를 마지못해 집어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왕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유야 어쨌든 엘리자베스는 전쟁을 몹시 싫어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에 말려든 것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튜더가 무엇을 염려했든, 그것이 자신의 목숨은 아니었다. 고조되고 있던 메리 처형에 대한 요구를 그녀가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은 분명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지만, 메리의 처형으로, 이제 남아 있던 문은 영원히 닫혀버렸다."(66, 70)


4장 기쁨의 날들은 가고


"프랑스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멘도사는 영국 침공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멘도사는 펠리페 왕에게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있는 가톨릭 세력이 충분한 힘을 갖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휘하의 장군들이 태만하며 부패했고, 전투 경험이 없는 영국의 민병대들은 경멸스러울 만큼 나약하다는 점을 확신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로부터 〈신중한 왕〉으로 불렸어도 억울할 게 없던 펠리페 왕의 답답할 정도의 느린 일 처리와 못 말리는 조심성이 그 거사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리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멘도사는 신앙심 수호와 명예 회복, 그리고 에스파냐의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도 영국이 저지른 이 마지막 잔학 행위에 대한 응징을 결심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펠리페에게 이렇게 썼다. 〈폐하께서 가능한 한 빨리 영국 침공을 서둘러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이 두 왕국의 왕위를 받아들이시는 것이야말로 명백한 하느님이 뜻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85-6)


5장 영국 침공 계획


"펠리페가 처음 영국 침공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네덜란드 총독 파르마는 성과가 불확실한 일에 손을 댔다가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에스파냐 군대가 영국에 투입된다면, 프랑스는 과거에도 수차례 시도했듯이 무방비 상태인 남부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한창 북해의 맞은편 땅에서 힘든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자신이 점령한 땅이 적의 손에 넘어가고 자신의 근거지마저 유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파르마처럼 뼛속까지 군인인 사람에게는 악몽이었다." "더구나 브릴이나 플러싱을 손에 넣지 않는 한 파르마에게는 규모가 큰 항해용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수심이 깊은 항구가 한 곳도 없었다." "파르마는 영국 침공이 성공하려면 먼저 네덜란드를 완전히 정복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곧 영국 정복이 시작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95-6, 101)


# 플러싱 : 네덜란드 연합군 본거지가 있던 항구도시


6장 쓰디쓴 빵


"교황 비오 5세는 1570년 2월 25일에 엘리자베스를 이단이자 참된 신앙의 박해자로 규정하고 그녀를 파문한다는 내용을 담은 〈천상의 통치〉 칙령을 포고했다. 뿐만 아니라 비오 5세는 지금껏 교황의 권리로 강조되기는 했지만 실행된 적은 드문 권리를 근거로, 엘리자베스에게 〈가짜 왕권〉을 박탈하고 영국인들은 그녀에게 충성할 의무가 없다고 선포했으며, 차후 그녀의 법과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 말 것을 명령하며 이를 어길 경우 파문의 고통이 따를 거라 경고했다. 그 칙령은 안 그래도 민감한 문제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다." "그 칙령을 따른다는 것은 신교도들이나 가톨릭교도들 모두 자기 나라의 법 대신 국제적 지배 권력에 복종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네덜란드 식민지의 펠리페 정부, 프랑스의 발루아 정부, 영국의 튜더 정부를 비롯해 각국의 정부들이 그런 교황의 권한을 부정했던 것이고,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을 반역자, 반란자로 규정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112)


7장 명백한 하느님의 뜻


"영국의 도발은 이미 펠리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드레이크는 무례하게도 에스파냐의 해안과 서인도제도를 공격했고, 네덜란드에는 레스터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영국 내 가톨릭들이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이복 언니인 메리 튜더와 결혼한 이래로 펠리페는 영국 가톨릭들에게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교황은 그에게 행동을 권유했고, 영국인 망명자들은 서둘러달라고 간청했으며, 그의 자문위원 중에서도 주전파가 우세했다 . 자신이 언젠가 글로 썼던 것처럼, 아마도 펠리페는 단지 이처럼 중요한 일에서는 신중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게 더 낫다는 이유로 일의 진행을 늦추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군대가 영국을 정복할 때까지 메리 스튜어트가 살아 있다면, 그녀가 영국의 여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메리의 정신은 프랑스인의 것이었고, 펠리페는 부왕에게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이 그의 왕조에 최대의 위협이 된다는 점을 배웠다. 이제 적어도 그런 위험은 사라졌다."(140-2)


8장 〈바람이 나에게 떠날 것을 명령한다〉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의 몇 차례 항해에 자신의 배들을 빌려주고 수익에서 왕실의 지분을 챙겨 갔지만, 그 얘기만 나오면 항상 자신은 드레이크의 계획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그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다. 엘리자베스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에스파냐 측은 드레이크를 해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자신이 에스파냐 왕과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펠리페 왕에게 도전장을 보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드레이크에게 두 사람 사이의 전쟁은 산 후안 데 울루아에서 공격을 받으면서 이미 시작된 것이었으며,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아니면 자신이 병들고 부상당한 부하들과 함께 거의 다 부서진 작은 배 주디스호를 타고서 플리머스 항으로 '기어서' 돌아왔을 때 느꼈던 만큼의 치욕을 에스파냐 왕에게 안겨줄 때까지 그 전쟁을 계속할 작정이었다(젊은 시절 드레이크는 멕시코의 산 후안 데 울루아의 항구에서, 뉴에스파냐 함대의 공격을 받고 무참히 패한 적이 있었다)."(148-9)


9장 턱수염이 그슬리다


"4월 12일, 펠리페는 드레이크가 약 30척의 함대를 이끌고 플리머스를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멘도사는 드레이크의 임무가 에스파냐 함대의 집결을 방해하는 것임이 거의 확실하며, 그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아마도 카디스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때 카디스 만에서 세계 해전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대서양이 지중해에 맞서 승리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2000년 동안 바다를 지배해온 갤리선의 영광이 막을 내린 것이다." "갤리선은 거대한 함포로 무장한 범선에 대항해 싸우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상대편 배에 올라탄다고 해도 제압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카디스에서 자신이 에스파냐 왕의 턱수염을 그슬려놓았다고 드레이크가 말했을 때 영국인들은 단지 허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드레이크도 수염이 다시 자랄 것임을 알고 있었다."(162-3, 168-9, 184)


10장 〈중요하지 않은 일〉


11장 통 널과 그물


"영국 함대는 사그레스 항에서 열흘간 머물면서 고기잡이 배들과 연안화물선을 사냥했다. 화물선이 운반하는 화물의 대부분은 〈쇠 테와 통 널, 또는 그와 비슷한〉 통을 만드는 물건들로, 카디스 항이나 타구스 강의 해협으로 향하는 것들이었다. 드레이크는 이 가치 없어 보이는 노획물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당시의 해군에게 이런 저장용 통은 물과 포도주뿐만 아니라 소금에 절인 고기, 생선, 비스킷과 각종 식량을 보관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품이었다. 견고한 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 말린 양질의 통 널이 필수적이었다. 이 물건들은 결코 여분이 많지 않았으며, 게다가 에스파냐 함대의 출항 준비로 인해 이미 공급이 달리는 실정이었다. 만일 에스파냐 함대가 마침내 출항하게 되었을 때 물통이 새거나 악취가 난다면, 또는 곰팡이 핀 통 널과 허술하게 만든 통 때문에 많은 음식이 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사그레스를 뒤덮은 연기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202-3)


"6월 18일, 드레이크는 동방 식민지에서 귀환 중이던 에스파냐 무장상선 산 펠리페호를 포착했다. 산 펠리페호의 선장은 명예를 손상하지 않을 만큼만 싸우고 나서 품위 있게 항복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어디든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배 한 척을 얻었고, 드레이크는 엄청난 전리품을 챙겨 플리머스로 향했다." "전체 값어치는 거의 114,0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것은 카디스 만에서 나포하거나 침몰시키고 불태운 모든 선박과 화물을 합한 가치의 세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에스파냐에 있는 모든 통 널과 어선을 전부 내다 팔아도 그만한 돈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드레이크의 몫은 17,000파운드 이상이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몫도 40,000파운드가 넘었다." "17,000파운드라는 액수는 평균적인 귀족의 재산과 맞먹는 것이었고, 40,000파운드면 군대를 전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산 펠리페호의 획득 덕분에 드레이크와 그의 여왕 모두 그 항해의 의미를 상업적인 모험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210)


12장 팔 하나가 잘리다


"플랑드르 서북쪽 구석에 있던 두 도시, 오스텐트와 슬루이스는 모두 전략적 요충지였다. 파르마는 신속하고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오스텐트를 점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슬루이스 역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었다. 슬루이스는 그가 원하는 수심 깊은 항구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브뤼헤와 동플랑드르를 잇는 수로 연결망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곳에 있어서 영국 침략을 위한 병참에 필수적인 요지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슬루이스를 함락한 파르마는 펠리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제가 네덜란드에 온 이래로 이번 슬루이스의 포위 공격만큼 난관과 걱정이 많았던 작전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영국 침략을 생각한다면, 그 목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파르마도 투르크의 술탄이 떠벌렸던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막 잘라낸 적의 한쪽 팔은 턱수염이 그슬린 것에 대한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220, 237)


13장 행복한 날


"슬루이스 함락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이 약화된 상태에서 나바르의 위그노 군대와 지휘관들이 괴멸된다면 그 저항은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었다. 산발적인 저항이야 여기저기서 계속되겠지만, 프랑스에 있던 프로테스탄트의 중추 세력은 무너질 것이고, 한동안 미래는 기즈-로렌 가문과 가톨릭동맹의 급진적 광신도들, 그리고 이 둘의 재정 후원자인 에스파냐 왕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네덜란드 반란군에게는 지옥 같은 날이 될 것이고, 아마도 등 떠밀리듯 역할을 맡게 된 프로테스탄트 연맹의 총사령관이자 재정 후원자인 영국의 엘리자베스에게는 훨씬 더 끔찍한 날이 될 것이다. 위그노의 저항 세력이 붕괴되고 부르봉 가의 혈통도 끊기게 된다면, 분명 앙리 3세는 완전히 기즈 공과 가톨릭 동맹의 손아귀에 놓이게 될 것이고, 더 이상 파르마의 측면에 대한 위협은 없을 것이며, 또한 프랑스 해협의 항구들은 영국 침공을 위한 안전한 발판으로 이용될 것이다."(240-1)


# 1580년 10월 20일, 쿠트라 전투에서 나바르(부르봉 가)의 위그노 군대는 주아외즈가 지휘하는 기즈(로렌 가)의 왕실 군대를 완전히 괴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4장 승리의 활용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그 승리를 활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엘리자베스가 많은 자금을 투입해 고용한) 도나 남작 휘하의 강력한 기사단인 8,000명의 독일 기병대와, 거의 같은 수의 독일 용병 보병부대 란츠크네히트, 거기에 부이용 공작이 모집하고 지휘하는 약 18,000명의 스위스 옹병들까지 합세한 이들 용병부대는,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로 들어온 외국 군대 중 가장 강력했으며, 게다가 이미 4,000 내지 6,000명의 위그노들이 합세해 전력이 더욱 보강된 상태였다. 만일 나바르가 즉시 그들과 합류해 자신의 군대까지 합쳐 더욱 강력해진 군대를 이끌고 파리 공략에 나선다면 프랑스 왕은 항복하든지 항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면 오랜 세월 이어진 지루한 내전을 첫눈이 내리기 전에 승리로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쉴리 공으로 불리게 되는 막시밀리앵 드 베튄과 같은 신앙심이 투철한 위그노들은 이토록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나바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256)


15장 불길한 해


"1588년이 다가오자 재앙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끔찍한 소문들이 서유럽 전체에 퍼져 나갔다. 기본적으로 그 운명의 예언은 〈요한계시록〉의 수비학(數秘學)에 기초한 것이며, 〈다니엘서〉 12장의 암시들로 의미가 명료해졌고, 〈이사야서〉에 있는 소름 끼치는 구절로 뒷받침되었다."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 퍼진 1588년에 대한 예언들은 나라마다 사뭇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다르게 해석되었다. 에스파냐에서는 펠리페 왕이 미래를 예언하려는 모든 시도를 나태하고 불경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종교재판소에서도 천년왕국설과 점성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 자신이 이러한 문제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길한 예언들의 논의를 최소화하고 싶어 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그해 겨울 그녀의 백성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278, 281, 291)


16장 이 장려한 배들과 함께


"영국은 적어도 육상에서만큼은 1587년 가을보다 1588년 4월에 침략 위험에 대해 방어 태세를 더 잘 갖춘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거의 다 알고 있던 영국인들조차도 전투가 육지에서 벌어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영국인들은 바다가 자신들을 방어해주고 있으며 자신들이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다. 백년전쟁을 치르면서,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그러한 인식은 더욱 고양되었다. 헨리 8세는 이미 확립된 전통을 기반으로 유럽의 그 어떤 왕들보다도 더 많은 돈을 전투용 선박에 썼다. 칼레를 프랑스에 빼앗긴 것과 점차 심해지는 에스파냐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바다에 의존하는 의식은 훨씬 더 강해졌다. 1588년 무렵, 엘리자베스는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군주로 부상했다. 영국 해군의 핵심 전력은 강력한 갤리언선 18석이었다. 이 배들 중 가장 작은 것조차도 300톤이나 나갔고, 모두 새로운 방식으로 건조되고 무장되어 있었다."(305-6)


"드레이크와 호킨스 등이 불평했던 것, 그리고 이후로도 여러 역사가들이 불만을 품었던 것은, 엘리자베스가 대담하게 그런 훌륭한 함대를 에스파냐 해안에 파견해 서인도제도와의 무역을 차단하고 펠리페의 전함들을 항구에서 꼼짝 못하도록 봉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거의 모든 배에 최소한의 인원만을 배치한 채 대기 상태로 계속 항구에 정박시켜두었고, 그럼으로써 영국 해군의 기본 전략 원칙 중 하나가 된 것[선제공격]을 깼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그런 결정을 함으로써 선원들은 육지에서 신선한 음식을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그 비용의 절반 이상은 자신들이 부담함으로써 춘계 군사작전을 위해 포장하고 비축해둔 식량뿐만 아니라 여왕의 돈도 아낄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함장들이 에스파냐의 무역선들을 약탈하고 에스파냐 왕에게 도전하는 데 쓰고 싶어 했던 힘을, 대신 영국 함대가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끝마칠 수 있도록 하는 데 쓸 수 있었다."(308-9)


17장 〈기적을 빌면서〉


"에스파냐 해군이 플로렌시아호로 이름을 바꾼 산 프란체스코호에다 인도양 수비대 소속 갤리언선들을 합쳐, 메디나 시도니아는 총 20척의 갤리언선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화력 면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용적 톤수로 따지면 엘리자베스가 보유한 가장 훌륭한 배 20척과 거의 맞먹었다." "그러나 아무리 메디나 시도니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최선의 노력을 해도, 개선은 고사하고 더 악화되는 것조차 막을 수 없는 함대의 상황들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력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제대로 훈련받은 포병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앞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될 테지만, 거포, 특히 컬버린 포가 부족하다는 문제에 가려져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비록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겠지만, 메디나 시도니아는 조급해하는 펠리페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것과, 시간이 조금 더 있다고 해도 남아 있는 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30-2)


18장 바리케이드의 날 1


19장 바리케이드의 날 2


"파르마는 파리에서 벌어진 반란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축하의 뜻으로 화톳불을 밝히라고 명령했지만, (가톨릭동맹을 이끄는) 기즈가 시민들로부터 스위스 연대와 프랑스 수비대를 구해준 데다가 루브르 습격까지 실패했으며, 설상가상 앙리가 탈출하게 내버려뒀다는 말을 듣자 고개를 저었다. 파르마는 이렇게 말했다. 〈기즈 공은 우리 이탈리아 속담을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군. 칼을 뽑아 군주에게 겨눈 자는 칼집을 멀리 던져버려야 하는 법인데.〉 (반란자들에게 물적, 심적 원조를 제공한) 멘도사도 앙리가 파리를 빠져나간 것에 대해 걱정은 했겠지만, 이제 앙리 3세가 기즈에게 항복을 하든 저항을 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에페르농은 노르망디를 장악할 수 없을 것이고, 파르마가 없는 사이에 프랑스군이 저지대를 농락할 위험도 전혀 없을 것이다. 파르마의 측면은 안전해졌고, 메디나 시도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프랑스의 위협에 관한 한 에스파냐 함대는 아무 걱정 없이 항해를 하게 된 것이다."(370-1)


20장 무적함대 출항하다


"리스본을 떠난 이후로 점점 메디나 시도니아는 자신이 지휘하는 함대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해안을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에도 날마나 새로운 결함들이 드러났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음식이었다. 매일 음식이 상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너무도 많은 통이, 음식과 물을 담고 있는 것 모두, 눈속임으로 건조가 안 된 생나무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또한 폭풍으로 함대가 흩어져 버려서 모을 수 있는 힘은 더욱 적어졌으며, 실종된 배들 중 최소한 일부는 폭풍우에 희생되었거나, 프랑스와 영국 해적선의 재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과 평화협정을 맺거나 최소한 1년 정도 출정을 미루는 게 낫지 않을지 숙고해달라고 펠리페에게 간청했다. 펠리페의 답은 신속하고도 단호했다. 총사령관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언급한 결점들을 개선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항해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펠리페의 명령에는 변함이 없었다."(383-4)


21장 〈시간과 공간의 이점〉


"승리의 절반이 보장된다는 시간과 공간의 이점이 우선은 에스파냐 함대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오고 있었고, 그들의 적은 그 바람 때문에 항구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습의 완전함에 대해 과대평가하기 쉽다. 전위함대의 위치, 함장의 항해 기술, 선박의 속력과 바람을 이용하는 능력 등에 힘입어 플레밍이 제때에 보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습이 완전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 함대는 여전히 일부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무장상선들에 보급품을 싣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출정할 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를 에스파냐 해안에서 돌아오게 한 남쪽의 바람이 그들도 데리고 나왔군. 우리가 돌아오게 된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었어.〉 하워드의 말을 보면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그와 전쟁위원회가 이런 상황의 전개를 예견하지 못했다면, 해전에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400)


22장 경기장에 입장하다


"1588년 7월 31일 아침, 마침내 조우한 아르마다는 낯선 초승달 모양으로, 영국 함대는 한 줄로, 혹은 앞쪽은 두 줄로, 각기 선택한 대형으로 늘어선 다음 서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 아침, 아르마다와 영국 함대가 대치하고 있을 때, 양쪽의 총사령관들은 멍한 상태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갈팡질팡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세상에 이런 함대들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이런 함대 둘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무기들이 어떤 성능을 발휘할지, 어떤 전술을 구사해야 그 무기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지 아무도 몰랐다. 해전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형을 이루고, 나무로 선체를 만들고, 돛으로 움직이며, 활강포로 무장하는 것이 해전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날이 시작된 것이다. 선체에 철갑을 두르고 시조포로 무장한 채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전함은 단지 이 새로운 날의 저녁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414-5)


# 활강포는 포신 안에 강선이 없는 포이고, 시조포는 강선이 있는 포를 말한다.


23장 첫 번째 유혈


"첫 날의 전투는 양쪽 모두에게 다소 맥빠지는 경험이었다. 에스파냐 측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에스파냐 함대에서 레칼데의 배만큼 타격을 입은 배는 없었고, 레칼데 배의 피해도 앞돛대에 포탄 두 발을 맞고 돛줄 몇 개가 끊어지고 삭구가 날아가고 서너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국 함대의 장거리 포격이 권투로 치면 성가신 잽 정도였지만, 분명 영국 측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잽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며, 에스파냐 함대가 효과적으로 보복할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영국 함대도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강한 적이었던 것이다. 그날 내내 에스파냐 함대가 보여준 조종술과 군기는 나무랄 데 없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작할 때와 같은 투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석양 속으로 멀어져 가는 아르마다의 모습은 난공불락의 목책 성벽처럼, 무서운 요새처럼 보였다."(421-2)


24장 〈가공할 만한 거포의 위력〉


"영국군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아르마다 앞에서는 어떤 작전을 써도 먹히지 않는다는 쓰디쓴 교훈을 얻었다. 그들이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교전에서도 에스파냐 함선을 많이 침몰시킬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에스파냐 갤리언선을 하나씩 망가뜨리다 보면 대형이 흐트러져 그들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이 잡은 에스파냐 함선은 로사리오호와 가라앉고 있던 거함 산 살바도르호, 두 척뿐이었다. 물론 영국군은 자기들이 포를 잘 쏜 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둘 다 사고로 손상된 것이었다. 한편 이틀 동안의 교전, 특히 포틀랜드 빌 앞바다의 격전을 치르며 영국 함대는 하워드가 표현한 〈가공할 만한 거포의 위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배에 화약과 포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워드는 화약과 포탄이 없어서 더는 싸울 수가 없다는 아주 절실한 편지를 뭍으로 써 보냈다. 하워드의 말과는 달리 영국 함대가 아르마다에 손상을 입혔다고 볼 수는 없었다."(446)


25장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초승달 대형


"16세기형 배의 대포는 조준도 어렵고 제대로 발사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50미터 거리에서는 별 차이 없는 실수가 500미터 거리에서는 목표물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다." "그래도 두 함대가 영국해협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더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에스파냐 함대였다. 메디나 시도니아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함대가 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파르마와 약속하지 않은 채 북해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인 듯했다. 토요일 오후 늦게 칼레 해역에 다다른 아르마다는 번개같이 돛과 닻을 내렸다. 이것은 치밀하게 실행한 작전이어서, 깜짝 놀란 영국 함대는 바람과 조류 때문에 정박할 곳을 지나쳐 유리한 위치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영국 함대는 메디나 시도니아의 신호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아르마다의 닻줄이 다 풀리기도 전에 영국 함대도 닻을 내렸고, 이제 두 함대는 칼레 해안 절벽 옆에 정박한 채 멀찍이서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459-60)


26장 불벼락 화공선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 함대가 있는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강한 조류가 도버 해협 쪽으로 흐르고 있어서 함선들이 빼곡하게 정박하고 있는 현재의 위치는 화공선 공격을 당하기에 더없이 적합했다는 점을 걱정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에스파냐군 정박지의 감시병들은 돛을 모두 펼친 채 삭구에 불이 타오르는 여덟 척의 커다란 배들이 바람과 조류를 타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종범선 두 척이 그 배들을 해변으로 끌고가기 위해 갈고리 닻을 던지려는 순간, 불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이중 장탄된 대포들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바다 위 여기저기에 마구잡이로 포탄이 떨어졌고 그 반동으로 불꽃들이 분수처럼 솟았다가 배 안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두 종범선이 혼란에 빠져 자리를 피하고 있을  때 나머지 화공선 여섯 척이 한꺼번에 정박해 있는 아르마다를 향해 돌진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 위로 대포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불꽃이 분수처럼 하늘로 치솟았다."(472-5)


27장 대형이 무너지다


"방어막이 화공선들을 놓치는 광경을 본 메디나 시도니아는 포를 발사하며 닻줄을 풀고 돛을 활짝 편 채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이유가 무엇이든 함장들 대부분은 줄을 끊고 바람을 타면서 마치 화공선을 두려워하는 만큼 서로를 두려워하는 듯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물살과 돌풍이 워낙 강하다 보니 어지럽게 모여 있던 배들은 해협을 지나 플레미시 해변의 모래톱까지 휩쓸려 올라갔다. 그 가공할 초승달 대형이 마침내 무너졌던 것이다." "양쪽 모두가 대단한 용기와 과감한 지도력을 갖고 있으면 승리는 최고의 배와 최고의 대포를 가진 쪽에 돌아간다. 영국 배의 우월성은 이미 실전에서 여러 번 증명된 바 있었다. 영국 함선들은 적의 측면을 포위해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었고, 바람을 이용해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사정거리를 선택하고 원하는 때 언제든지 전투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영국군이 가장 큰 이점은 그때까지도 탄약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476, 484)


28장 때늦은 기적


"메디나 시도니아가 알아낼 수 있는 한, 남은 것은 약간의 화약뿐이었고 포탄은 전혀 혹은 거의 없었다. 아르마다가 처음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일급 선박들은 대부분 물이 샜다. 대부분의 배가 가로횡대와 삭구를 잃었고 갑판에는 파편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정말 소름 끼치는 것은 바닷물의 흐름과 해저의 경사였는데, 배 앞쪽에서 좌현 뱃머리의 바다 쪽으로 멀리까지 물의 색깔이 달랐다. 현재의 진로대로라면 반시간도 못 되어서 아르마다 전체가 제일란트의 모래톱에 처박힐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배가 좌초할 때 받을 충격에 대비하고 있을 때 마침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다. 흥분에 겨운 한 목격자는 바람이 완전히 반대로 방향을 바꿔 남동쪽으로 불었다고 증언했다." "아르마다 전체가 먼 곳으로 나와 깊은 바다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갑작스럽게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메디나 시도니아와 그의 사제 모두 아르마다가 신의 기적 덕분에 살아났다고 확신했다."(489-92)


29장 〈내 그대들의 장군이 되어〉


30장 드레이크 사로잡히다!


"아르마다가 영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앙리는 점점 더 고분고분해졌다. 마침내 앙리는 협박에 못 이겨 알랑송 칙령에 서명했다. 그 칙령에서 이단자나 이단을 부추기는 자는 절대 프랑스 왕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을 제정하는 등 가톨릭동맹의 극단적인 요구에 굴복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앙리의 양보 조치는 대부분 서류상에만 머물러 있었다." "멘도사는 프랑스 왕을 가톨릭동맹과 기즈의 손아귀에 넣고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에스파냐의 속국으로 만들려면 영국을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펠리페는 몇 주 동안 메디나 시도니아의 암울한 〈항해일지〉를 읽고 있었다. 그것을 가져온 돈 발타사르 데 수니가가 패배한 아르마다의 상태를 암담하게 보고하기도 했다." "결국 펠리페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멘도사게 보낸 편지의 여백에 이렇게 갈겨썼다. 〈이건[멘도사가 보내오는 낙관적인 급보들]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512-4, 524)


31장 멀고 먼 귀향길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해협에 들어선 이래로 갈레아스선 한 척을 비롯해 적어도 일곱 척의 가장 중요한 배들을 잃었다. 나머지 일급 선박들도 대포에 맞아 거의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다. 병사 중 5분의 1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군수품은 거의 바닥이 났다." "비축했던 보급품이 심각한 문제였다. 신선한 음식은 더 이상 없었다. 비스킷은 대부분 곰팡이가 슬거나 썩어가고 있었으며, 소금에 절인 생선과 고기는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심각한 것이 물 부족이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인 음식들은 그다지 인기가 있지도 않았다."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두 주 동안 폭풍이 몰아쳤는데 최악의 방향인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걷잡을 수 없는 맞바람이었다." "19일 후, 산 마르틴호는 에스파냐 북부의 항구도시 산탄데르에 닻을 내리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며칠 뒤, 7월에 영국으로 떠났던 배들 가운데 66척이 에스파냐 항구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추가로 들어온 배는 단 한 척뿐이었다."(525-30)


32장 거인의 최후


"만일 앙리가 원한 것이 오직 안락과 외형적인 존경과 왕권의 껍데기였다면, 기즈의 통치에 굴복하고 왕관을 기즈의 로렌 가문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다음 그 대가로 그것들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늙은 부르봉 추기경이 기꺼이 성사시키려고 한 거래였다. 그러나 앙리는 그렇게 많은 친구와 원칙을 배신했어도 왕권이라는 이념은 배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기즈의 근본적인 왕위 찬탈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공개 처형과 같은 방법으로 그를 쳐서 쓰러뜨렸다. 그래서 앙리는 일곱 달 뒤 성 클라우드에서 자크 클레망이라는 자의 단검에 생을 마감했을 때 나바르에게 자신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었다." "멘도사는 기즈의 유용성을 높이 평가했으나 둘 사이가 수월한 동반 관계는 아니었다. 교황 식스토 역시 기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에스파냐 국왕이 선장을 한 명 더 잃은 게로군.〉"(552-4)


33장 신의 바람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승리를 바람 탓으로 돌린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하워드에게 수여한 훈장에는 〈하느님께서 숨을 내쉬자 그들은 흩어졌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네덜란드 훈장에도 비슷한 말이 적혀 있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보전하는 데 성공했음을 라틴어 시로 축하한 시인들은 신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폭풍우로 에스파냐군 수천 명을 익사시켜주셨음을 찬양하느라 바빠서 영국 함대의 공훈에 대해서는 언급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물론 영국 함대는 아르마다가 날씨 문제로 고전하기에 앞서 더 좋은 배와 더 좋은 포(砲)로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적의 멸망을 신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여길수록 신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사실이 명확해질 터였고, 아르마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프로테스탄트 신이 의도한 바가 된다. 결국 다른 전설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마다를 궤멸한 엄청난 폭풍도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559)


34장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에필로그


"아르마다의 패배는 한 가지 면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에스파냐라는 거인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진격하는 것을 보아왔다. 점점 명백해지는 신의 계획과 미래의 물결인 섭리가 에스파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에스파냐가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가톨릭들은 에스파냐가 신의 교회를 지키는 수호자로 확실히 선택받은 것을 가톨릭으로서 축하했다. 그동안 각지의 프로테스탄트들도 그만큼 겁을 먹고 당황스러워했다. 아르마다가 영국해협의 오랜 지배자들에게 그들의 집 앞에서 도전했을 때, 임박한 분쟁은 누가 천벌을 받을지를 가르는 결투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런 결투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신께서 옳은 자를 지켜주신다는 믿음이었다. 이 분쟁의 해에 관한 불길한 예언, 너무나 오래되고 외경스러워 가장 깨어 있고 회의적인 이들조차 무시해버릴 수 없던 예언 때문에 이 결투의 엄숙함은 더욱 커졌다."(572-3)


"(이상한 폭풍의 힘이 가져온 전투 결과에)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칸디나비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언제나 믿어온 것처럼 신이 실제로 자신들의 편임을 안도하며 확인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가톨릭들도 에스파냐가 결국 신이 선택한 수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의 똑같은 안도감을 가지고 확인했다. 에스파냐의 우세가 한 세대 이상 더 지속되긴 했지만 그때부터 에스파냐의 전성기는 지나가 버렸다. 특히 프랑스는 블루아에서 앙리가 기즈를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오스트리아 가계(합스부르크)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로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유럽의 자치권이 합스부르크 가에게 위협받는 동안 그 자치권을 지키는 최고 보증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길고도 어정쩡한 에스파냐와 영국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마다의 패배는 정말로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종교적 일체성을 중세 기독교 세계의 계승자들에게 강제로 다시 부과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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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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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백년전쟁'이란 표현은 19세기 후반이 돼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 표현은 10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당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던 에드워드 3세한테서 잉글랜드가 보유하고 있던 기옌 공국을 '몰수'하면서 시작된 이 일련의 전쟁들은 1453년 잉글랜드가 결국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끝났다. 대부분의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장궁의 화력 덕분에 엄청난 군사적 우위를 누렸다(그러나 한때 무적이었던 잉글랜드 궁수들이 프랑스 대포에 의해 궤멸된 전쟁 말기의 패전들도 있다)." "물론 우수한 무기로 그토록 자주 승리를 따낸 뛰어난 잉글랜드 궁수는 칭송해야 하고, 만약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면 그들도 똑같이 나쁘게 행동했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그때의 기억, 즉 프랑스의 국가적 신화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기억은 이후로 두 나라 사람들의 관계를 줄곧 해쳐왔다."(11-3)


1장 전쟁의 서막 1328~1340년


"10세기 이래 새로운 농업이 발전하면서 북서유럽 농민들은 점점 더 많은 임야를 쟁기로 갈아 비옥한 토양을 개척할 수 있었다. 14세기 초까지 경작지는 매년 확대되었고, 출생률도 함께 상승했다. 프랑스만큼 이런 발전이 뚜렷하게 이루어진 곳도 없어서,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2,10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잉글랜드 인구의 다섯 배에 해당한다. 프랑스 상인과 장인들도 증가하여 알프스 이북에 가장 아름다운 도시와 대성당을 지었다. 고딕 양식의 파리는 북유럽의 중심지가 되었고, 인구는 15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 중세 잉글랜드는 오늘날 노르웨이 수준의 인구 과소 지역으로, 경작지보다는 숲과 황야가 더 많았다. 이 작고 가난한 나라의 재산은 양모였다. 런던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프랑스의 필리프와 달리 잉글랜드 국왕은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에드워드 3세는 항상 그의 〈의회 귀족들〉, 즉 100여 명의 봉건영주와 주교, 소두원장의 의향을 신중히 고려해야 했다."(25-6)


"그러나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결국 전쟁이 터지리라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었다. 두 나라의 중앙집권화와 제도화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와 기옌 간의 오래된 봉건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에드워드 3세는 1259년 이래로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국왕의 가신 자격으로 보유한 아키텐 공국(즉 기옌)을 유지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공국은 에드워드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때로 기옌의 세수는 잉글랜드의 세수보다도 컸다. 공국의 수도로 인구가 3만 명이었던 보르도는 잉글랜드와의 왕래로 번영을 구가했다. 백년전쟁에 관한 뛰어난 권위자인 케네스 파울러 박사가 쓴 대로,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불완전하게 아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 권력을 지주 권력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22, 29)


"1339년 전역이 특별히 흥미로운 이유는 프랑스의 비전투원들이 당한 참화 때문이다. 적국 정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시골과 도시 모두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 중세 전쟁의 관습이었다. 잉글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와 치른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이 고약한 관습을 얻었고, 에드워드는 1339년 원정 때 젊은 왕세자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모조리 불태우고 약탈하여 〈시골의 곡물과 가축, 여타 물품이 남김없이 파괴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병사들은 집집마다 들어가 약탈한 뒤 불을 놓았고, 작은 촌락들은 하나같이 불길에 휩싸였다. 수도원이나 교회, 구호원도 이런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민간인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고, 굶어 죽어가던 수천 명은 요새화된 도시로 도망쳤다. 잉글랜드 국왕은 그러한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방에서 펼치는 '총력전'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이 전쟁에 지치기를 바라며 슈보시, 즉 체계적으로 적의 영역을 초토화하는 습격 전술을 최대한 활용했다."(44)


2장 크레시 전투 1340~1350년


"궁수들의 무기, 즉 유명한 잉글랜드 장궁English long-bow은 군사 전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사실 이 장궁은 잉글랜드보다는 웨일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잉글랜드인들은 12세기 궨트 전역 동안 두꺼운 교회 문을 관통해 화살을 날려 보내는 웨일스인들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 장궁에 주목했다. 에드워드 1세 이래로 모든 시골 장정들은 법에 따라 일요일마다 나무 둥치에 활쏘기 연습을 해야 했으므로 잉글랜드의 모든 마을들이 국가적인 궁수 자원 풀에 기여해온 셈이다. 1346년이 되자 장궁은 규격화되었고, 궁수들은 화살을 스물네 발씩 소지했다. 추가 보급품은 수레에 실려왔다. 장궁 궁수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어둡게 뒤덮으며 분당 열 발이나 심지어 열두 발도 쏠 수 있었다. 사정거리는 135미터가 넘었고, 판금 갑옷을 꿰뚫을 수 있는 거리는 55미터 정도였다. 런던탑에는 활과 화살을 저장해둔 거대한 무기고가 있었다. 활대 다수가 기옌에서 수입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68-9)


"1346년 8월 26일에 펼쳐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병사들은 〈해질녘부터 축시[새벽 1~3시]까지〉 열다섯 차례 돌진했고, 돌진은 매번 빗발치는 화살 세례 속에서 아수라장으로 시작해 아수라장으로 끝났다. 프루아사르는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은 그 혼란상을, 특히 프랑스 병사들의 와해와 무질서를 묘사하기는커녕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살육은 웨일스와 콘월의 단검병들이 〈땅에 쓰러진 백작과 남작, 기사와 종자들을 가리지 않고 베고 죽이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군의 마지막 공격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개되었다. 어둠이 깔리자 죽은 자들을 제외한 많은 기사들이 조용히 전장을 빠져나갔다. 전장에서 타던 말 한두 마리를 잃었고, 자신도 목에 화살을 맞은 필리프 국왕이 어둠 속에서 최후의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하고자 했을 때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고작 60명의 중기병뿐이었다. 라브루아 궁성으로 피신한 국왕은 다시 밤새도록 말을 달려 더 안전한 피난처가 있는 아미앵으로 갔다."(86-7)


"교황의 중재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347년 9월 휴전에 합의했다. 필리프 국왕은 절박한 처지였다. 그의 군대가 궤멸했을 뿐 아니라 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침공에 대비하여 지체없이 세력을 재건해야 했다. 이 오만하고 도도한 남자는 그해 11월 파리에서 열린 삼부회 앞에서 몸을 낮췄다. 삼부회의 대변인은 국왕에게 〈전하께서는 나쁜 조언에 귀를 기울여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고, 국왕이 〈크레시와 칼레에서 한심하게 쫓겨났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좌절과 굴욕을 겪고 나서도 그는 잉글랜드를 침공할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백성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의회 두루마리 문서는 양원이 모두 국왕의 승리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과 그들이 찬성하여 왕에게 준 돈이 잘 쓰였다는 데 동의하는 안을 가결했다고 기록한다. 〈잉글랜드 왕국이 다른 어느 국왕의 치세 때도 보지 못한 정도로 바뀌고, 영예로워지고 부유해졌다.〉"(93)


3장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350~1360년


"이제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를 일종의 엘도라도로 여겼다. 잉글랜드 전체가 프랑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넘쳐났다. 심지어 병사들의 급료도 상당했다. 기마 궁수는 하루에 6실링을 받았는데 이 금액은 고국에서 숙련 장인이 받는 임금과 맞먹었고, 훌륭한 쟁기꾼이 2실링을 벌면 운이 좋을 때 보병 궁수는 하루 3실링을 받았다. 더욱이 자원한 궁수와 중기병의 고용 계약 시스템은 그들이 전리품을 한몫 차지할 수 있게 보장했다. 그러나 파울러 박사의 표현대로 〈사람들을 전쟁터로 유혹한 것은 이익의 확실성이 아니라 대박을 터뜨릴 가능성, 흔히 100분의 1도 안 되는 그 가능성이었다〉. 전쟁은 무거운 세금이 다시 부과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국왕이 적대 행위를 재개하길 희망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이러한 열성적인 반응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이용 가능한 원시적인 매스미디어를 철저히 활용함으로써 자신이 놀랍도록 세련된 홍보 전문가라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107-8)


"1350년부터 1364년까지에 해당하는 백년전쟁의 다음 단계에서는 필리프의 아들인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결국에는 기옌에 영구적으로 자리를 잡는 흑태자가 전면에 부상한다." "1356년 9월 18일에 펼쳐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패한 장 국왕과 그의 열 네 살 된 아들 필리프가 잉글랜드에 포로로 붙잡혔다. 영국해협 너머에서는 〈프랑스군이 패주하고 그 국왕이 포로로 잡혔다는 푸아티에 전투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모든 교회에서 장엄한 의식을 거행했고, 잉글랜드 전역에서 밤새 커다란 불을 지피며 축제를 벌였다〉." "한편 중앙정부가 붕괴한 프랑스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열 여덟 살의 병약한 젊은 도팽 샤를한테는 너무 벅찬 상황이었다. 나바르 국왕의 추종자들이 노르망디에서 들고일어났을 뿐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자유부대[계약이 만료된 용병단], 즉 루티에routier들이 성을 점령하고 노상강도 귀족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101, 125-6)


# 도팽 :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자에게 붙이던 칭호로 보통 왕세자로 번역된다


"1360년 5월 1일 샤르트르 근처의 브레티니라는 작은 마을에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일주일 만에 흑태자와 도팽은 합의에 도달했다. 장 국왕의 몸값은 금화 300만 크라운(50만 파운드)으로 삭감되었고, 영토에 대해서도 1차 런던조약 때 제시된 축소된 조건으로 결정되었다. 즉 기옌의 완전한 주권과 더불어 리무쟁, 푸아투, 앙구무아, 생통주, 루에르그, 퐁티외 외에 다른 많은 지구들 역시 완전한 주권과 함께 잉글랜드의 소유가 된 것이다. 10월 24일 브레티니조약이 칼레에서 비준되었다. 약속된 지역들이 잉글랜드 쪽에 완전히 양도되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장은 할양 지역들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에드워드는 더는 자신을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양측 모두 공식적인 포기 선언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새 국가의 통치자는 잉글랜드 국왕이 아니라 보르도의 흑태자였고, 에드워드는 그에게 아키텐 공작 작위를 내렸다."(132-3)


4장 현명왕 샤를 1360~1380년


"샤를 5세는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왔다. 그는 아버지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과했던 가혹한 소비세─에드세aides[포도주세], 타유세taille[토지세], 가벨세[소금세]─를 계속 유지, 확대해왔고 여전히 몸값의 절반가량을 빚지고 있었지만 그의 군자금 담당 대신들은 국왕의 병사들에게 이전보다 더 정기적으로 급여를 지급할 수 있게 신경 썼다. 프랑스 국왕은 잉글랜드에 더 이상 몸값을 보내지 않았고, 그가 특별세에서 얻는 수입은 잉글랜드 의회가 에드워드 3세에게 허용한 비정기적인 전시 세입보다 열 배나 많았다. 프랑스 국왕은 군사 문제를 다루는 창의적인 칙령들을 여러 해에 걸쳐 내렸고, 마침내 상시 병력─상비군까지는 아닌─을 얻었다." "샤를의 전략은 초토전술과 게릴라 습격전을 결합한 것으로, 그는 프랑스군에 잉글랜드군과 전면전을 치르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그는 새로운 지휘관들에 변경의 수비대장이나 루티에로서 능력을 입증한 무명의 인물들을 중용했다."(147-8)


"전반적으로 프랑스군은 승산이 있을 때도 전면전을 피했다. 총사령관 뒤게슬랭의 전술은 급습과 야간 공격, 매복, 전체적으로 적을 성가시게 하는 전술이었다. 그는 수비대 숫자가 적은 고립된 도시와 요새에 집중하여 식량 징발 부대와 짐마차 행렬을 공격하고, 연락선을 차단하고, 지속적인 기습 공격으로 적의 사기를 서서히 떨어뜨렸다. 포위전에서는 재빠른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좋은 조건과 심지어 돈을 제시했고, 약속을 지켰다. 그의 전체적인 전략은 아키텐의 프랑스인들이 들고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것으로, 이를 위해 말로 설득하고 뇌물로 매수하고 위협을 하는 등 여러 수법을 구사했다." "1376년 4월에는 〈잉글랜드 기사도의 꽃〉이었던 흑태자가 세상을 떠났다. 수비대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잉글랜드 병력은 충분하지 않았고, 적은 어디에나 있는 듯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거점들도 함락되어 있었고, 심지어 건지섬마저 웨일스의 에번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침공당했다."(152-5)


"1373년 말 아키텐 공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옌마저 축소되었다. 그해에 앙주 공작은 잉글랜드 쪽 가론강 변에 있는 바자와 보르도로 통하는 요충지인 라레올마저 장악했다. 플랜태저넷가의 오랜 봉신인 알브레마저 발루아 쪽으로 넘어가,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처음 전쟁을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작아진 기옌 공국 안쪽으로 돌출부가 생겨났다. 더욱이 잉글랜드의 요새를 모두 포함해 브르타뉴 대부분도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어서 브르타뉴 공작은 잉글랜드로 피신해야 했다. 북부에서는 오직 칼레와 노르망디의 한 수비대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1374년부터 샤를 5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다른 질환들에 통풍까지 추가되었다. 총사령관 뒤게슬랭은 기옌의 심장부를 점령할 가망성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1374년 1월 그와 곤트는 페리괴에서 만나 아키텐 전역에서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1375년 6월 추가적인 휴전 협상이 이루어져 프랑스 전역에서 2년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156-7)


5장 잃어버린 평화 1380~1399년


"1380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은 둘 다 미성년자였다. 1367년 보르도에서 태어난 리처드 2세는 과대망상증의 기미가 있었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적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깐깐하고 고압적인 사람으로 자라났다. 리처드보다 한 살 어린 샤를 6세는 과도하게 향락에 빠져 살고 정신착란과 호전적인 기질이 결합되었다는 측면에서 할아버지 장 2세를 빼닮았다." "이 시기의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은 국제분쟁이었다. 리처드 2세 재위 초반에 잉글랜드 의회는 〈프랑스, 에스파냐, 아일랜드, 아키텐, 브르타뉴와 여타 지역〉에서의 온갖 전쟁들을 걱정스럽게 언급했다─이 전쟁들은 곧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심지어 포르투갈로까지 확대된다. 갈등은 로마와 아비뇽 간의 분열로 더욱 악화되었다. 갈등을 중재할 불편부당한 교황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기옌과 바다에서 공격하는 쪽은 잉글랜드인들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인들이었고, 잉글랜드는 침공의 두려움에 떨었다."(173-4)


"1388년 11월 샤를 6세는 숙부들을 국왕 자문회의에서 쫓아내고, 아버지의 대신들(민간에 '마르무제'로 알려져 있었다)을 재등용했다. 마르무제 가운데 대단히 유능하고 냉철한 자들이 화평을 맺기로 결정했다." "1389년 5월 리처드 2세 역시 권력을 잡아 스스로 통치할 수 있었고, 그 역시 화평을 원했다." "1389년 6월 18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절단은 칼레 근처의 투링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리처드는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393년 셰르부르는 새로 즉위한 나바르 국왕에게 되팔렸고(나바르는 그곳을 재빨리 프랑스한테 재매각했다), 브레스트는 1396년 브르타뉴에 팔렸다. 양측 모두 항구적인 합의를 보고자 했다. 샤를 국왕과 그의 귀족들은 투르크를 상대로 한 십자군 원정을 떠날 수 있게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해결하고 싶어했다. 심지어 부르고뉴의 필리프도 자기 백성들이 잉글랜드와의 우호적인 통상 관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화평에 열성적으로 호응했다."(187-8)


"리처드 2세는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인물, 즉 자신의 왕국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더 완벽하게 소유하길 원해서 결국 잃어버린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도를 넘고 말았다. 곤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볼링브루크의 헨리를 국외로 추방하고, 1398년에 곤트가 죽자 볼링브루크를 평생토록 유배시키고 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한 것이다. 이 일과, 그가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든 사면을 받기 위해 엄청난 돈을 내도록 만든 조치와 같은 공공연한 여타 부당한 처사에 잉글랜드의 대귀족들은 격분했다. 1399년 리처드가 아일랜드로 떠나 있는 동안 볼링브루크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많은 지지를 받아 국왕을 폐위시킬 수 있었다." "볼링브루크는 헨리 4세로 즉위해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 리처드는 몇 달 뒤 사망했는데, 스스로 곡기를 끊은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 2세의 결점이 무엇이었든 그는 진심으로 프랑스와 화평을 맺으려고 시도했고, 그의 실패는 전쟁의 재개를 의미했다."(192-3)


6장 잉글랜드의 기회 1399~1413년


"1400년의 프랑스 왕국의 표면적인 강력함은 실재라기보다는 프랑스 궁정과 프랑스 왕족들의 화려한 위용에 기인한 것으로, 실속 없는 허울에 불과했다. 왕국이 거대한 아파나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와 달리 프랑스의 공작령과 백작령들은 영토적 실체로, 때로는 여러 도道 전부가 작위와 함께 상속되면서 반半독립적인 제후령을 이루었다(잉글랜드에서 그나마 이와 비견될 만한 사례는 랭커스터 공작령이다). 아파나주를 보유한 발루아 왕가의 탐욕스러운 왕족들은 인근의 시골이 여전히 루티에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을지라도 대개 자신들의 아름다운 성에서 반쯤 국왕처럼 화려하게 사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예외적인 두 명이 있었으니,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었다." "샤를 6세가 정신이 말짱한 시기와 갈수록 길어지는 광증의 발작 시기가 번갈아 나타나면서 정신이상에 시달리자, 두 공작은 모두 프랑스를 지배하려고 단단히 작심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중요 정책마다 대립했다."(202-3)


# 아파나주apanages :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왕자나 형제들에게 하사되는 작위와 영토


"프랑스, 특히 파리는 무장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였다. 아르마냐크파는 지도자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의 이름을 땄는데, 루이의 아들인 오를레앙의 샤를과 아르마냐크 백작의 딸이 결혼한 사이였다.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마냐크파는 왕가의 대신료들과 소수의 부유한 부르주아, 장의 영토 바깥의 대다수 귀족들과 다른 왕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에 반해 부르고뉴파는 파리의 부르주아와 학계의 지지를 받았다. 1408년 장은 사촌(오를레앙의 루이)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그가 폭군이었다는 것을 근거로─소르본 대학의 신학자를 기용했고, 파리로 돌아와 국왕의 사면을 받아냈다." "1413년 8월, 부르고뉴의 용맹공 장은 샤를 6세를 납치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파리를 아르마냐크파와 베르나르 백작의 잔혹한 가스코뉴인들에게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몇 년 동안 자신의 반半왕국에서 지냈다. 이미 프랑스가 그와 아르마냐크파에 의해 망가진 뒤였다."(204-5, 208)


7장 헨리 5세와 아쟁쿠르 전투 1413~1422년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가 펼쳐졌다. 전장의 진흙탕은 궁수들에게 유리했고, 그들은 육중한 프랑스 병사들 옆에서 가뿐하게 움직이며 갑옷의 접합 부위를 찌르거나 그들을 쓰러 넘어뜨렸다. 프랑스 중기병들 대부분은 진흙탕에 익사하거나 자기 몸 위로 쓰러진 동료들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해 죽었다." "141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화평을 주선해 교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그의 진짜 임무는 교회 분열을 치유하는 것으로, 이 일은 1417년 마르티누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는 화평 주선은 뒤로하고 헨리와 상호 원조,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부르고뉴의 장 공장은 잉글랜드 편에 서기로 결심했고, 그해 10월 헨리를 만나러 갔다. 공작은 헨리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샤를 6세를 폐위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은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이 될 것을 약속했다."(230-1, 234-5)


"1417년이 되자, 헨리 5세는 느리고 철저한 포위전을 통해 차근차근 지역을 손에 넣어 프랑스를 정복하고 복속할 계획이었고, 이 계획은 노르망디부터 시작될 터였다." "그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내전이 변함없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새로운 총사령관 아르마냐크 백작은 파리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는 부르고뉴 군대 때문에 파리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418년 7월 29일, 헨리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을 포위했다." "포위된 도시는 부르고뉴 또는 아르마냐크로부터 도움을 기대했고, 11월에는 군대가 오고 있다는 풍문이 루앙에 전해졌지만, 곧 뜬소문으로 드러났다. 파리에 민중 반란이 일어나 아르마냐크파는 축출되었고, 폭도가 총사령관을 때려죽인 뒤에 파리를 재점령한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확실히 장악하는 데 여념이 없어 노르망디에서 벌어지는 일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그해 말이 되었을 때 잉글랜드인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주인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236-7, 242, 245)


"헨리는 1420년 5월 20일 트루아에 도착했고, 다음 날 이미 기안되어 있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병증에 사로잡힌〉 불쌍한 샤를 6세는 헨리를 만났을 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지만 순순히 조인식을 마쳤다. 조약 내용에 따라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이자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트루아조약은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굴욕 가운데 하나로 1940년의 굴욕에 비견될 만하지만, 루아르강 이북에서는 조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헨리가 프랑스 왕관을 쓸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한 것은 섬뜩한 아이러니다." "그는 이질 증상을 보였던 것 같다. 헨리는 동생 베드퍼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부르고뉴와 동맹을 계속 유지해야 하며, 부르고뉴의 필리프 공작이 사양할 때만 프랑스 섭정의 지위를 유지하라고 말했다. 또 상황이 나빠지면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구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헨리 5세는 1422년 8월 31일, 불과 서른 다설 살에 숨을 거두었다."(251-2, 260)


8장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1422~1429년


"앵글로-프랑스 왕국은 잉글랜드와 완전히 분리되어 유지되었고, 소수의 고위 잉글랜드 관리들의 감독을 받는 프랑스인들이 오래된 제도에 근거해 왕국을 다스렸다. 노르망디는 트루아에서 맺은 약속과 달리 루앙에 있는 자문회의를 통해 별개의 국가로 운영되었다. 섭정이 노르망디 공국을 랭커스터가의 보루로 탈바꿈시키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바이이는 언제나 잉글랜드인이었지만 다른 관리들은 거의 현지인들이었다. 베드퍼드는 교역을 장려하고, 캉에 대학을 설립하고, 조카의 이름으로 고품질 주화를 발행하여, 잉글랜드의 지배가 현지 노르망디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베드퍼드는 플랜태저넷가의 통치를 인기 있게 만들려고 애쓰면서도 신민들이 전쟁 수행 노력에 기여하도록 강요했다." "공식적, 비공식적인 요구 사항들이 앙주와 멘, 일드프랑스에도 강요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잉글랜드인들은 점점 자금 압박에 시달렸고, 과세와 약탈은 갈수록 가혹해졌다."(270-2)


# 바이이baillis : 프랑스 북부에 파견된 국왕의 지방 행정관


"1423년 4월 베드퍼드와 부르고뉴 그리고 브르타뉴 공작은 아미앵에서 만나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서로 간에 형제애와 단합〉을 유지할 것을 맹세하고, 비록 군사적 의무 사항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도팽의 최종 타도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암묵적으로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부르고뉴와 브르타뉴는 다소 주저하며 조약에 서명했고, 나중에 어느 한쪽이 도팽과 동맹을 맺더라도 계속 같은 편으로 남기로 약속하는 비밀조약을 맺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사이에 제대로 된 전략적 협력은 없었다 해도 종종 전장에서는 군사적 관계가 훌륭하게 작동했다." "1424년 8월 17일 펼쳐진 베르뇌유 전투에서 잉글랜드는 도팽파를 대파했다. 베르뇌유는 제2의 아쟁쿠르로 여겨졌고, 섭정의 위신은 하늘을 찔렀다. 도팽파의 전투력은 완전히 붕괴했지만, 베드퍼드는 형의 본보기를 충실하게 따라, 앙주와 멘의 정복 완수라는 보기에는 덜 화려하지만 실속 있는 이득을 선호했고, 적의 거점을 체계적으로 축소시켜 나갔다."(274-5, 282)


"1427년 7월, 솔즈베리와 섭정은 다가오는 전역의 목표에 관해 의견이 달랐다. 솔즈베리는 루아르강으로 가는 요충지인 오를레앙의 정복을 원했다. 반면 베드퍼드는 잉글랜드가 앙주 지역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고, 기옌과 북부 영토를 연결할 수 있는 앙제르를 원했다. 솔즈베리의 의견이 관철되었지만 베드퍼드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1429년 봄이 되었지만 오를레앙의 성벽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도팽파는 도시의 주인인 오를레앙 공작이 잉글랜드에 포로로 있다는 구실로 오를레앙을 부르고뉴 공작에게 양도하는 영리한 외교 수단을 구사했다. 베드퍼드는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위험에 빠뜨릴까봐 걱정하면서도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화가 난 필리프가 부르고뉴 병사들에게 포위전을 중지하고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30일, 소규모 호위대를 동반한 구원군의 지도자가 검은 군마를 타고 작은 전부를 든 채 오를레앙으로 입성했다. 잔 다르크였다."(292, 296-7)


9장 오를레앙의 마녀 1429~1435년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인들이 자신들의 특권이라 간주하던 신의 지지를 주장했다. 며칠 만에 그녀의 병사들은 잉글랜드의 주요 토루를 점령하고 글러스데일을 비롯한 수비대를 죽인 뒤 투렐을 재탈환했다. 1429년 5월 8일, 90일간 지속되었던 공성전 끝에 서퍽 백작은 결국 포위를 풀었다." "몽스트렐레는 도팽파가 파테 전투 이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인들이 그녀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모두 믿게 되었다고 알려준다. 이제 잔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파리로 진군하는 대신 자신과 함께 랭스로 가서 대관식을 치르자며 도팽을 설득했다. 1만 2,000명의 군사가 어찌어찌 모였고,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영토를 통과하여 랭스로 간 샤를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잔은 대관식 내내 하얀 깃발을 들고 그의 근처에 서 있었고, 의식이 끝난 뒤 처음으로 그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반드시 샤를 7세라고 불러야 하는 국왕의 대관식은 도팽파의 사기를 경이로울 정도로 진작시켰다."(306-8)


"1430년 5월 24일, 콩피에뉴 바깥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 한 부르고뉴 병사가 잔 다르크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몽스트렐레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병사들이 〈마치 병사 500명을 사로잡았을 때보다 훨씬 더 흥분했으니, 이는 그들이 전쟁에서 어느 대장이나 지휘관보다 그 처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11월, 잔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넘겨졌다." "한참을 괴롭히고 속임수를 쓰고 진술을 곡해한 끝에 법학자들은 마침내 그녀를 덫에 빠뜨렸고, 1431년 5월 30일 잔은 개전의 여지가 없는 이단자라며 루앙 장터에서 워릭의 병사들 손에 화형당했다. 그녀는 바로 죽었고, 처형인은 화염 속에서 불에 탄 시신을 끄집어내서 사람들이 여자의 시신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샤를 국왕은 그녀를 전혀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잔의 처형은 별다른 파장을 낳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동레미 출신의 마법사 처녀는 짧은 생애 동안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310-1)


"전쟁은 에드워드 3세 시대보다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들었다. 갑옷과 무기는 갈수록 정교해졌고, 신형 대포들의 상당수는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 되었든 포위전에 절대적 필수품이 되었다. 더욱이 수비대 유지에는 지속적인 출혈이 따랐다. 농업 불황과 해외 무역의 쇠퇴로 과세 수익이 감소했고, 줄어든 세입은 어떤 잔 다르크보다도 랭커스터 이중 왕국에 훨씬 더 큰 위협이었다." "이제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1435년 8월에 아라스에서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루앙에서 중병을 앓고 있던 베드퍼드는 영토에 대해서는 양보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왕위에 대한 조카의 권리에 관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다. 잉글랜드 사절단은 이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신성한 사안이라는 주장을 하라고 지시받았다." "잉글랜드 대표단들은 〈샤를 국왕과 부르고뉴 공작이 갈수록 서로에게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근거 있는 의심을 했다."(320, 324-6)


10장 비보 1435~1450년


"1435년 9월 20일, 베드퍼드가 죽은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샤를 7세와 부르고뉴의 필리프는 아라스조약을 체결했다. 필리프는 샤를을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마콩과 오세르, 퐁티외와 더불어 솜강 유역의 도시들과 솜강 유역 북쪽의 왕령지를 받았다(모두 그가 이미 점령하고 있던 영토였다). 샤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동맹을 끝내고, 자신은 필리프의 부친 암살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함과 동시에 살아남은 암살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1435년부터 1450년까지는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세력이 승산 없는 전쟁을 질질 끌었던 시기로, 그들이 부르고뉴파한테서 버림을 받고도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잉글랜드인들은 30년 동안 지배해온 노르망디와 칼레를 자신들의 나라에 통합된 일부로 간주했다. 마침내 마주한 몰락은 온 잉글랜드를 충격에 빠뜨렸고 정부를 무너뜨렸다. 왕조 간 반목은 국내 분쟁으로 탈바꿈했다."(331-4)


"1444년, 매우 연로해진 보퍼트 주교는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그의 당파가 여전히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서퍽 백작이 이끄는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워릭이 경멸한 서퍽 백작과 그의 탐욕스러운 동료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가차없이 돈과 토지, 상업적 특권을 갈취하고, 심지어 측근들을 동원해 법정을 겁박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퍽한테 더 나은 면도 있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싸운 뒤─별다른 공훈이 없다는 게 눈에 띄는 점이다─그는 이제 잉글랜드가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랑스와 화평을 맺어야 하며, 노르망디와 기옌을 보유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이라는 데 자문회의 다수와 의견을 같이했다." "투르 휴전협정 소식은 잉글랜드 전역에서 국수주의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인들한테는 매우 다르게─바쟁에 따르면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으로─받아들여졌다. 1419년 이후로 적대 행위가 중단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347-8)


"1449년 7월 31일 샤를 7세는 3만 명의 군사를 노르망디로 보냈다. 그들은 삼면에서 공국을 공격했다." "불시에 이루어진 노르망디 침공은 전 잉글랜드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루앙 사령관 서머싯에게 1만 파운드를 보냈을 뿐 즉각적인 증원은 없었다." "최후의 저항은 셰르부르에서 1,000명의 수비대원들을 지휘하던 토머스 가워의 몫이었다. 뷔로는 기름을 먹인 가죽으로 방수 처리한 포대를 바다 쪽 모래톱에 설치하고, 밀물이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면 돌아와 포격을 이어갔다. 〈도시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포와 포의 집중 공격이 이어졌다〉고 몽스트렐레의 연대기를 이어간 무명 작가는 말한다. 가워는 결연하게 싸웠고, 프레장 드 코에티비 제독을 비롯해 많은 포위군이 전사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존 파스톨프 경이 새로운 군대를 모으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1450년 8월 12일 셰르부르는 항복했다. 프랑스는 채널제도를 제외하고 노르망디 전역을 재정복했다."(352, 355, 358-9)


11장 암울한 싸움 1450~1453년


"근래에 보기 드물게 평화로웠던 기옌은 1445~1449년 잉글랜드에 포도주를 어느 때보다 많이 수출했다. 우선 프랑스의 침공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기옌은 30년이 아니라 무려 300년 동안 플랜태저넷가에 속해 있었고, 기옌 사람들은 대체로 잉글랜드인 공작과 멀리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통치에 충성했다. 하지만 샤를은 노르망디를 정복하자마자 투르에서 전략 회의를 열었고, 그해가 저물어가는 상황이었는데도 곧장 기옌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1451년 7월 말이 되자 바욘만이 플랜태저넷가를 위해 버티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8월 20일 함락되었다." "처음에 일부 가스코뉴 귀족들이 프랑스인들을 반겼지만 곧 기옌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싫어하게 되었다. 북부 프랑스 행정관들과 징세인들은 능률적이고 가혹하며, 옛날 방식을 멸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452년 비밀 사절단이 런던에 도착해 서머싯 공작이 군대를 파견해준다면 보르도가 잉글랜드를 위해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했다."(366-8)


"1452년 10월 17일 톨벗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메도크에 상륙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원정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원정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결과 기옌에는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10월 21일 잉글랜드군이 입성했다. 그러나 프랑스에게는 당대의 테크노크라트 장 뷔로가 있었다." "1453년 7월 17일 펼쳐진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포화가 잉글랜드 병사들에게 정면으로 쏟아졌다. 활로 시작된 잉글랜드의 군사적 우위가 소형 화기에 의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9월 말이 되었을 때는 보르도만이 프랑스에 맞서고 있었다. 보르도 시민들은 허약한 서머싯 정부한테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1453년 10월 19일, 기옌의 수도는 다소 낙관적으로 샤를 국왕의 자비를 믿으면서 무조건 항복했다. 샤를의 첫 행동은 장 뷔로 명장을 보르도의 종신 시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백년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68-70, 372-5)


에필로그


"비록 잉글랜드 자체는 1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얻어낸 전리품들〉로 부유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정부를 파산시켰고, 랭커스터 왕조의 위신에도 치명타를 가했다. 1453년 8월 헨리 6세는 미쳐버렸고, 6개월 뒤 요크 공작이 호국경이 되었다. 1455년 헨리가 회복되어 보퍼트 가문을 권력에 복귀시키자, 과거의 참전 군인들이 프랑스에서 터득한 전투 기술을 서로에게 구사하면서 장미전쟁으로 알려진 길고도 살인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삶의 방식으로서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들의 측근인 중기병과 궁수들은 일자리가 절실했다." "필리프 드 코민은 15세기 말에 잉글랜드 왕가를 논하면서 〈그들의 아버지와 추종자들은 프랑스 왕국을 약탈하고 파괴하고, 오랫동안 그곳의 상당 지역을 점령했다〉고 썼다." "영국해협 너머의 다른 관찰자들은 장미전쟁이 잉글랜드 국왕과 그 백성이 프랑스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신의 심판이었다는 코민의 생각에 동의했을 것이다."(3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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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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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영제국을 보는 시각과 방법


# 영제국에 대한 (보수적) 역사서술 방법

1. 경제·군사 팽창론(전통적 견해) : 19세기 영제국의 팽창은 독점자본의 이윤극대화 운동에서 비롯했다는 홉스-레닌 식의 견해

2. 신사 자본주의론 : 대토지 소유 귀족과 젠트리들─시장경제를 이용해 임대소득을 추구하면서도, 일상적인 노동을 멀리하고 여가와 아마추어 정신을 중시하는─이 근대 영국의 부의 축적을 주도했다는 견해. 이들과 기존의 상업 자본이 결합된 금융-상업자본이 제국 팽창과 맞물려 해외 시장으로 그 힘을 집중시켰다고 본다.

3. 장식주의론(ornamentalism) : 19세기의 영제국 역시 인종주의가 만연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회적 위계를 중시한 사회였기 때문에, 토착지역의 부왕이나 제후들에게 각종 칭호를 부여하여 제국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는 방식으로 제국을 경영했다는 견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의식한 조어이다.

4. 네트워크론 : 영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는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인쇄언어 연결망, 전신망, 해저 케이블 등 19세기의 기술발전을 바탕으로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영국적인 것'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했다는 견해. 말하자면 현대의 세계화는 대부분 영제국이 시행한 제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한 것이다.


"오랫동안 영국 정치인과 국민은 제국에서 영연방으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강조했다." "그러나 제국 해체 이후 한 세대 이상 영국의 역사가들은 제국 팽창과 해체의 전 과정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과 해체의 충격이 오히려 시대 변화에 순조롭게 적응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요구했던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제국사 연구는 역사가들이 이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국을 '역사화'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문제는 이 '제국의 역사화'가 이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히려 제국 지배를 시대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자국 중심주의적 연구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영미문화의 세계적 확산과 기여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세계화 과정에서 영미문화의 확산을 중시하고, 그러한 확산이 영제국에서 영연방에 이르는 문화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27-8)


"존 매켄지는 『선전과 제국』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이 영국의 공공여론을 조성하는 데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문화적 현상으로서 제국주의가 20세기까지 계속 영국인들의 내면세계에 뿌리내려 왔음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인들은 도덕적 부담감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제국적 가치가 시대의 추세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영향을 받아 영국사 연구자들은 제국과 제국적 가치가 영국사의 지배적인 동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메켄지는 이러한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고 본다. 제국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밀려났지만, 일상생활에서 소비되는 제국적 상품(차·담배·코코아·비누·설탕 등)과 대중문화 속에 깃들어 있었다. 매켄지가 보기에, 〈제국의 유산은 영국인들의 정신세계의 보호무역시장〉 안에서 계속 번창하고 증식해 온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일반 대중의 열렬한 지지야말로 〈제국적 세계관의 가치와 그에 대한 신념이 영국인의 의식 속에 침전되어 남아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32-3)


1부 19세기의 유산


1장 재정-군사국가와 신사 자본주의


"18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 체제의 맥락에서 보면,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그 체제 중심부 국가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해당한다. 명예혁명 이후 나폴레옹 몰락기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영토와 인구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영국이 마침내 우위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존 브루어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은 간헐적으로 발발하는 전쟁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사실 전쟁은 원래부터 의도되었던 것이라기보다는 해외시장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벌어졌기 때문에 주된 전장은 아메리카나 인도와 같은 해외 식민지였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지출을 점차로 늘렸고, 이를 부담하기 위해 물품세 부과와 일련의 국채 발행이라는 수단에 의존했다. 이 시기의 국가는 일종의 효율적인 전쟁기구였다. 따라서 그 성격은 한마디로 '재정-군사국가(fiscal-military state)'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43-4)


"제국사 연구에서 주변부 이론은 경제적 해석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이전의 경제적 해석에서 19세기 전반은 제국주의 시대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제국 팽창의 휴지기였다. 그러나 주변부 이론은 이것이 공식적인 식민지 확장만을 제국주의로 간주하는 오해에서 비롯했음을 강조한다. 이 시기에 영국이 식민지를 확대하지 않은 것은 '자유무역'을 통해 제국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부 이론을 제시한 연구자들은 19세기 후반에 새롭게 신제국주의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 시기에 걸쳐 제국정책이 이어졌으며, 다만 이전에는 그 정책이 비공식적 제국(inform empire)의 형태로 표출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토착세력의 협력에 힘입어 적은 비용으로 제국을 꾸려나가는 방안이며, 이 협력관계야말로 〈제국주의를 규정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주변부 이론은 제국의 확대가 의도되고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부의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결과라고 본다."(55-6)


"케인과 홉킨스는 주변부 이론과 경제적 해석을 비판하면서도 두 이론이 다 같이 산업혁명의 혁명성을 전제로 삼고 있음에 주목한다. 경제적 해석이 제국주의를 산업자본의 진화단계에 연결지었다면, 주변부 이론은 산업화가 해외 지역의 확대를 촉진했다고 본다. 자유무역의 대두와 제국의 성장을 산업화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과 홉킨스에 따르면, 영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대 자본주의'이다. 근대 초기 이래 이 나라에서 부의 축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토지를 소유한 소수 지배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그들이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지대(rent)를 소득원으로 하는 경제 범주로 성장해 왔음을 뜻한다. 물론 영국의 귀족과 신사층은 아직도 봉건적 전통의 계승자였다. 그들은 질서·권위·신분과 같은 전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17세기 말에 그들은 봉건귀족의 삶에서 벗어나 '시장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57-9)


"지주 세력은 부재지주로서 농업 이윤이나 지대뿐 아니라 도시화와 경제 활성화에 따른 열매까지도 거두어들였다. 광산 개발의 이득과 도시 지역의 각종 임대소득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소득의 특징은 일상생활에서 부의 축적에 하루 내내 매진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수입이 보장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부를 중시하면서도 일상적인 부의 추구를 경멸했으며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각종 기예와 그 철학으로서 아마추어 정신을 귀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태도와 분위기는 귀족과 지주층을 넘어서 다른 사회세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사 자본주의란 '신사적 규범'을 유지하면서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경제활동을 의미한다. 이 활동이야말로 영국 경제발전의 주된 동력이었다. 귀족과 지주 외부로부터 다양한 자산가들이 이 활동 무대에 스스로 등장했다. 18세기에 화폐자산을 소유한 부유층이 대거 이 대열에 끼어들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금융 및 서비스 분야의 부유층이 여기에 합류했다."(59-60)


"18세기 이래 영국 사회는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라는 틀을 유지해 왔다. 지주와 화폐자산가층의 동맹은 18세기에는 '낡은 부패 관행'으로, 19세기에는 값싼 정부와 자유무역주의로 변모했지만, 그 동맹은 언제나 영국의 경제발전과 해외 팽창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9세기 후반 신사적 자본가층이 외연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내부의 역학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동맹의 균형추가 경제개혁의 주된 수혜자였던 금융세력에 기울어진 것이다. 이러한 재편성 과정에서 신사적 자본가들은 적극적인 제국주의로 나아가면서도 영국 사회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로는 '보수적 진보(conservative progress)'를 내세웠다. 케인과 홉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 구호는 〈전통과 특권을 보호하면서도 또한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의 권리를 지지하고 물질적 향상의 전망을 제시한다.〉 요컨대 19세기 후반 영제국의 새로운 팽창은 구 런던시 서비스 부문의 급속한 성장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63-4)


2장 네트워크로서의 제국


"겉으로 보면 영제국은 두 차례에 걸쳐 급속하게 팽창했다. 우선 7년전쟁 이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해외 지역을 흡수한다. 다음으로, 188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 독일, 프랑스와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분할에 가담한다. 그사이의 시기, 즉 미국 독립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팽창의 열기가 약해졌는가. 공식적인 제국 지배 지역만 살피면 그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영제국의 실질적인 지배력과 영향력은 더 강력해졌으며 오히려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갤러거와 로빈슨이 주목한 '비공식적 제국'은 이를 가리킨다. 이 시기 비공식적 제국은 물론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세계시장 확대와 직접 연결된 것이었다." "사실 상황에 따라 비공식적 제국은 공식적 제국으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제국주의가 그 결과이다. 19세기 중엽에 주로 비공식적 제국을 추구했다고 해서 군사력을 동원한 팽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적 제국과 비공식적 제국의 경계는 고정되지 않았다."(67-8)


"19세기 영제국 또는 영국 세계 체제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다윈에 따르면, 그것은 브리튼, 인도, 시티(the City)의 금융자본, 백인 자치령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분석에서 각지에 산재한 다른 식민지들은 위의 구성요소와 비교하면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에서 브리튼은 특히 제조업과 재정 및 석탄자원을 의미하고, 인도는 그 경계를 넘어 아덴에서 미얀마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과 해양, 즉 페르시아만, 이란,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말레이반도, 그리고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 등 인도양 인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략 지역이었다." "자치령의 존재야말로 영국과 유럽 다른 나라의 제국 경영을 구분짓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영국인 이민을 근간으로 형성된 백인 정착지는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백인 정착지로 이주한 영국인 이민들은 대체로 개인의 자유, 독립, 평등에 기초를 둔 사회를 형성함과 동시에 영국 문화의 정체성을 이어나갔다."(69-73)


"1851년 이후 영국의 국제적 지위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좀 더 유리해졌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협조한 네덜란드에 인도네시아의 이해관계를 양보했지만, 그 대신에 지중해의 몰타, 실론, 케이프타운을 완전히 장악했고, 중남미의 해안 지역도 속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이러한 팽창은 에스파냐·포르투갈·프랑스·네덜란드·영국 등 유럽 국가들 사이에 아메리카와 아시아 해상무역을 분할해 온 중상주의 질서의 종국을 나타내는 신호였다. 기존의 영국 지배 영역과 새로운 식민지들은 전략적으로 아메리카·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남아시아·중국·태평양 등 전 세계에 걸친 연결망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었다. 19세기 전 시기에 걸쳐 영제국에 편입된 케이프타운·몰타·지브롤터·수에즈 운하·아덴·실론·싱가포르·홍콩·밴쿠버 아일랜드·포클랜드·노바 스코샤 등은 영국 해군의 세계 항로 지배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했다. 오직 영국만이 해상을 통한 전 지구적 연결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77-8)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치령과 식민지, 그리고 복잡한 정부기구를 하나로 묶는 연결망은 어떻게 강화·유지되었는가. '영국 세계 체제'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다윈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를 설명한다. 우선 신문·전신·증기선·철도·상품·정보인력 이동 등 기술진보와 변화가 제국 연결망을 강화했고, 다음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이윤·상품·서비스·문화로 구성된 '영국적 세계'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계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자의식 또한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확립된 영제국은 기본적으로 취약한 네트워크 연결망에 지나지 않았다. 상당수 식민지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국이 무임승차한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중엽 이래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동시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영국의 우월한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외부 자극에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해 준 것이 토착 엘리트의 협조와 19세기 이래 지정학적 요인이었다."(78, 95)


"19세기 영제국의 팽창과 제국 네트워크의 출현은 영국 정부의 분명한 기획의 결과가 아니라, 당시 국제 정세와 특히 지정학적 조건과 요인에 힘입은 것이었다. 다윈은 〈수동적인 동아시아,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그리고 강력하면서도 비호전적인 미국〉이라는 국제 상황이 영제국 세계 체제의 성립에 도움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시티 금융자분의 자기 이익 추구 경향과 상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제국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수에즈 운하 자체가 이 지정학적 요인을 더 강화한 지렛대였다. 이 운하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지정학적 조건이 변하면서, 그 요인은 오히려 제국 해체를 가속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20세기 미국과 러시아의 대두는 영국이 자체의 힘으로 대처할 수 있는 도전이 아니라 제국의 출현과 해체에 항상 영향을 미치는 상수였던 셈이다. 그렇더라도 제국 네트워크는 오늘날 지구화 현상의 초석이 되었다."(96-7)


3장 제국과 '대영국'에 관한 담론


"'대영국(Greater Britain)' 개념은 영국인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19세기 후반 대륙을 기반으로 팽창한 강대국들의 등장에 자극받아 나타난 것이었다. 제국(empire)이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그 말이 함축한 전제적이고 군국적인 의미가 영국인의 자유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인 정착지가 영국의 일부라고 주장한 존 실리 이전에 제임스 프로드가 이미 새로운 강력한 국가들에 맞서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연결하는 〈군살이 없고 좀 더 효율적이며 응집력이 강한〉 '대영국'의 이상을 설파했다. 〈다른 나라의 인구증가, 제국적 에너지, 막강한 정치 발전을 고려할 때, 그리고 러시아, 미국 또는 독일에 속하는 광대한 영토와 우리 브리튼섬의 보잘것없는 면적을 비교할 때, 우리가 식민지를 우리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해서 영국인을 그곳까지 확산시키고 영토를 배가히자 않는다면 경쟁국 속에서 한 국가로서 우리 위치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110)


"실리는 브리튼섬과 백인 자치령을 결속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다가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지금까지 영국의 자치령과 속령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비효율적인 영토였다. 19세기 철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해운활동에 근거한 영국의 이점은 위축되는 대신 준대륙 국가인 미국과 러시아가 등장했다. 그러나 증기선·전신·전기 등 새로운 기술혁신과 더불어 이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네트워크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말이다." "실리는 '대영국'의 구체적인 구현체로서 '제국연방(Imperial Federation)'을 언급한다. 제국연방운동을 전개한 '제국연방연맹'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미합중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 또는 국가연합으로 통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여기에서 제국연방의 핵심 개념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이 평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식민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고 그만큼 일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112-5)


"19세기 중엽 영국 정부 각 부처의 행정개혁, 이른바 '글래드스턴주의'로 불리는 일련의 개혁조치가 이루어진 직후, 영국과 백인 자치령 사이에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교류와 무역이 급속하게 증가했으며, 제국의 경계 안에 있는 여러 지역은 왕실을 매개로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었다. 왕실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 모두에게 국가(또는 지역)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원래 백인 정착지는 국왕의 하사장(charter)을 받은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였다. 이민집단은 국왕에게서 위임받은 왕령지에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의식은 백인 정착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 캐나다를 비롯한 '백인 자치령(white dominion)'은 더 이상 속령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런 구별은 백인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졌다. 결국, 백인 자치령의 출현은 비백인으로 구성된 속령 및 식민지의 팽창과 관련되어 자리 잡은 것이다."(119-20)


"'대영국'론이 (그 인기에 비해) 단순히 구호에 그쳤던 데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영향을 미쳤다. 실리가 입론의 근거로 삼았던 기술발전이 그 자신의 예상과 달랐다. 그가 내세운 '거리의 소멸'은 한 세기 후에나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적어도 반세기 이상 해상 네트워크와 통신을 통한 연결은 대륙 국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근대 기술문명의 추세를 감지했지만, 오히려 기술적 난점이 '대영국'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못했다. 영국 정체성의 문제 또한 너무 단순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는 영국인, 영국식 이름 및 지명의 세계적 확산과 영국성의 확장 가능성을 연결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에게 태어난 나라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친숙성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형성해 나간 정체성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실리는 앵글로색슨인의 확산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영국성의 확대를 통해 다양하고도 새로운 정체성을 포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129)


2부 전쟁과 불황


4장 전쟁과 동원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아공 등 자치령 국가는 광활한 국토와 비교하면 인구가 적었다. 그런데도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못지않게 성인 남성 가운데 상당수를 군 자원으로 소집해 유럽 전선에 투입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터키의 갈리폴리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 31일 현재 캐나다군 병력 규모는 62만 8,964명이었다. 이 가운데 영국에 파견된 군 병력은 42만 2,405명에 이르렀다. 영국에서 유럽 대륙 전선에 투입된 캐나다군 규모는 40만 1,191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또한 인구 규모에 비해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전선에 투입했다. 성인 남성 대비 참전군인의 비율은 캐나다 13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아 13퍼센트, 뉴질랜드 19~20퍼센트에 이르렀다(영국은 27퍼센트)."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백인 자치령 국가의 경우 막대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입었다. 특히 참전군인 대비 사상자 비율은 캐나다 50퍼센트, 뉴질랜드 59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아 65퍼센트에 이른다."(150-2)


"일부 사회적 갈등이 있었음에도 자치령 국가들은 전쟁 동원에 적극 협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치령 국가의 적극적인 협조를 친영국적 정서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영국과 인종적·문화적 전통을 공유한다는 인식에는 군주제, 대의제 헌정, 시민적 자유 등 그들이 공통의 선진적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긍지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당대의 정치평론가 아치볼드 허드에 따르면, 당시 독일 측 정세분석가들은 자치령 국가들이 유럽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자치령 국가와 식민지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자치령 국가들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그 제도의 요체는 시민적 자유를 토대로 하는 군주제와 대의제 헌정(representative constitution)이었다. 대의제 헌정이란 구체적으로 의회(parliament)와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로 구현된다. 그들은 전쟁을 자신의 제도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참전한 것이다."(153-4)


"전쟁 이전에 '대영국'론은 영국과 해외 자치령 지식인 및 정치인들 사이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정치적 이상이었다. 강대국들의 국제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대영국론은 영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호소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참전과 그에 따른 막대한 희생이 제국의 원심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자치령 국가들은 이전 제국 질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자치령은 전후에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도 독자적인 주권국가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영국 정부로서는 국제기구나 회의에 자치령 국가들이 참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자치령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특정한 '제국의 원리'를 고안했다. 영국왕이 〈영연방 개별 국가들을 결속하는 초석〉이라는 원리였다. 단일한 군주를 중심으로 상징적으로 맺어진 네트워크야말로 개별 국가들의 협조와 발전의 기초가 되는 셈이었다."(160)


5장 경제불황과 제국


"영국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변화된 제국의 연결망을 새롭게 강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두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1920년대 말 영국의 실무 관리와 지식인들은 미국의 대두에 따른 영국의 대응전략에 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유럽 대륙과의 공조 또는 유럽 경제권에 대한 관심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맥락에서 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들 논의는 모두 자유무역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두 경제권 모두 미국에 대한 대응전략이면서도 각지 서로 다른 약점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었다. 유럽 경제권의 공조를 강조하는 데에는 영국·프랑스·독일이 상호보완적인 경제 특징보다는 경쟁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낼 것이고, 영제국은 국제분업의 효율성을 보여 주면서도 제국 네트워크의 취약성과 미국 영향력 증대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166, 170-1)


"이 시기 국제경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현안은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금본위제도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금본위제 채택에서 중요한 문제는 그동안 하락 추세에 있던 파운드화의 환율을 정하는 일이었다. 1파운드당 4.86달러라는 이전 수준의 환율로 되돌아갈 경우 외국 투자자들이 파운드화에 실망하고 뉴욕으로 금융 거래를 옮길 위험이 있었다. 반면, 파운드화로 이루어진 해외투자 자본의 가치를 높일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전시 부채 상환도 더 유리해질 것이었다. 처칠은 뒤의 가능성을 더 중시했다. 달러에 대한 스털링화의 가치는 전전 수준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금본위제 복귀로 영국은 수출산업의 타격과 노동계급 생활수준 하락이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 "1차 세계대전 및 그 이후의 시기에 전통적인 수출산업은 구조적 변화의 기회를 상실했다. 그에 따라 해외시장에서 이들 산업의 경쟁력은 전반적으로 약해졌다. 여기에 스털링화의 과대평가가 어느 정도 나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173, 178-9)


6장 제국 경영의 한계


"전후 영국 사회는 한동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전시경제체제에 비교적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던 노동계급이 실업과 경제침체에 따른 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리기 시작했다." "제국 문제와 관련지어 이 시기 격렬한 노동자 항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노동자들은 제국 네트워크를 다시 강화하려는 시도, 특히 상업제국의 활성화를 위한 노동자의 양보와 희생을 거부한 셈이었다. 물론 전후에 일반 여론은 앞으로 영국의 번영이 전쟁 이전 상업제국의 복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런던은 세계 최고의 투자처이자 교역 및 금융 중심지로서 지위를 되찾아야 했다. 금본위제 도입을 통한 파운드화 가치 안정, 수출경쟁력 회복, 수출시장 확대는 제국 운영에 긴요한 조건들이었다. 수출경쟁력 제고는 무엇보다 노동자의 임금 삭감 이외에 대안이 없었다. 전쟁기의 산업 평화에 순응했던 노동자들은 정부의 이 같은 견해에 협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사관계의 불안은 제국 경여의 미래에도 불안을 안겨주었다."(193, 198)


"전 세계에 걸친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과 영국 국내 정치 및 사회의 혼란이 겹치면서, 영국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 제국을 둘러싼 찬반 담론이 가열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정치인과 지식인의 각성을 가져왔다. 전쟁의 참혹함과 야만성을 목격한 사람들은 산업화된 서구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류 번영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간디와 타고르 같은 지식인들의 비판은 식민지 해방운동의 징후를 나타냈다. 영국 정치가들도 그 시대의 추세를 느끼고 있었다." "전후 영국의 정치·경제·사회적 혼란 속에서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식민지 지배가 일종의 약탈 면허이며 그나마 문명화라는 식민지 지배의 인도적 전통도 1890년대 이후 사실상 붕괴되었다는 비관론이 대두했다. 문화적·인종적 전통을 공유하는 백인 자치령 국가들조차 전후의 경제침체에 따라 영국의 이익과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견도 있었다."(199-200)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서아시아 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조지 커즌이다. 그는 인도 총독을 지냈고 전시내각에 참여했으며 1919~24년간 외무장관을 지냈다. 전후에는 서아시아 진출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그 까닭은 인도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인도 지배를 위해서는 서아시아에 다른 경쟁국이 들어서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영제국의 확장을 의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커즌이 선호한 것은 인도 지방의 토후국 모델을 적용해 서아시아 지역에 아랍인 자치국들을 세우는 방식이었다. 영국의 서아시아 진출은 전쟁기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제정러시아 붕괴 후 독일이 서부전선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자 독일 동맹국인 오스만제국을 구축하기 위해 영국군이 이 지역에 진출했다. 이는 전후에 곧바로 제국의 방어비 증가를 가져왔다. 영국은 전후에 팔레스타인·이라크·이란 등에 대한 신탁통치 주도국이 되었다."(235-6)


"동아시아에서 영국은 중국의 홍콩과 상하이를 이 지역 상업 무역 금융 중심지로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큰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전간기에 특히 발전한 도시는 상하이다. 19세기 후반에 조차지를 개발한 영국은 인접한 미국 조차지와 행정단위를 묶어 상하이 공공조계로 개발했다. 1920년대 상하이가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자 공업생산지가 된 것은 상하이 공공조계의 번영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반영감정의 고조, 일본의 팽창정책에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은 별로 없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미국 정부는 영국 해군력 증강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서양을 둘러싼 경쟁〉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의 대두와 함께 중지되었다." "일본은 이미 쿠릴열도에서 타이완까지,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남태평양까지 진출을 노리는 해상제국이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중국에서 영국의 이익,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어까지 책임져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239-42)


3부 이행, 제국에서 국가연합으로


7장 제국의 해체, 2차 세계대전에서 수에즈 위기까지


"존 다윈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의 완패는 제국의 토대로 삼았던 모든 전제가 무너진 탓이다. 그 전제는 프랑스와 연합해 유럽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영국의 선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적인 지배권을 유지하며,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 지구적인 경제력을 행사함을 뜻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배, 제국 네트워크의 확장에 따른 해군력의 취약점 노출, 그리고 1930년대 영국 경제의 불황 심화로 이 모든 전제가 붕괴된 것이다." "전후에 영제국은 한동안 느슨한 형태로나마 유지되었다. 에이레가 영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국가가 된 인도·파키스탄·실론이 공화국 체제를 선택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1949년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인도아대륙의 신생 3개국이 잔류를 선어하고, 기존 식민지를 대부분 지배함으로써 기존의 제국적 결속력은 없다고 하더라도 영연방 체제는 형식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제국의 해체가 급속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수에즈 위기 이후의 일이다."(252, 259-60)


"1956년 11월 6일 영국이 수에즈에서 군대 철수를 결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균열, 이든에 대한 여론의 비판, 유엔의 철수 요구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바로 그날부터 파운드화가 폭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경제에서 파운드 스털링화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축통화였다. 파운드 스털링 통화권은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이후 여러 나라가 금 대신에 파운드화에 대한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면서 성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국은 제국에 속한 국가들을 적용대상으로, 스털링 통화권 국가를 단일한 환율시행 지역으로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는 파운드화의 외환 가치를 보전하고 제국 내 무역을 활성화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상당 기간 자치령 국가와 영제국 식민지들의 협조 체제가 유지되었고, 이것이 후일 새로운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288-9)


"1930년대 이래 스털링 통화권은 제국 내 무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영국이 완만한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는 영국 수출품의 주된 소비시장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영국 금융자본의 주요 채무국이자 영국 금융서비스 및 해운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파운드화를 축적하지 못할 때 채무상환 이행과 지불준비금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국가의 지불유예 선언이 계속될수록 파운드화 폭락 위험이 가중될 것이다." "1949년 경제불황기에 파운드화가 다시 폭락하자 영국 정부는 결국 파운드의 가치를 30.5퍼센트 인하한다. 이 당시는 달러결핍시대였기 때문에 스털링 통화권 국가들도 대부분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폭락 우려가 높아졌을 때 이전과 달리 통화권 내 국가들의 동요가 커졌다. 당시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 폭락을 방치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289-90)


"수에즈 위기는 세계경제에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스털링 통화권은 런던 시티의 금융자본과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경제 영역이었다. 이 통화권은 영국 경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건전성이나 수지균형에 별반 영향을 받지 않고 관성적으로 지속되었다. 기업가와 상인과 투자자들은 이전부터 익숙한 국제무역과 환거래의 관행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영국은 미국의 여러 지원과 도움을 통해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위기는 제국 지배의 오랜 유산인 스털링 통화권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군사개입의 좌절은 그 취약성을 재확인한 사건이었다. 위기 이후 스털링 통화권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국제무역과 환거래에서 기존의 오랜 관행과 익숙함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293)


8장 탈식민화의 정치와 영연방


"영연방의 성격이 크게 바뀌고 그와 함께 회원국들의 결속력이 약화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영연방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해럴드 윌슨은 총리직에 오르기 전부터 코먼웰스에 대해 개인적으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영제국에 대한 복고적 유토피아나 대국주의적 편견보다는 그의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비국교도 전통을 지녔으며 세계의 빈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는 영국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영연방을 이용하려는 정략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영연방을 통해 개발도상국과 관련된 대외정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그의 국제주의적·사회주의적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윌슨의 제안은 영국이 회원국의 농산물과 원료를 고가로 구매하고, 그 대가로 회원국은 자국의 투자계획에서 영국의 우선권을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식민부의 경제 관리들은 이러한 정책이 실제로는 영국 경제의 쇠퇴를 가속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305-7)


"그렇다면 당시 경제 실무를 맡은 관리들이 영연방 회원국 사이의 무역 증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파운드화는 태환화폐였다. 달러부족시대에 회원국 무역의 영국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독일 및 일본의 대두와 더불어 파운드화는 약세로 돌아섰으며 영국과 회원국 간의 무역 비중도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실무 관리들은 회원국과의 무역 증대가 영국에 실익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회원국의 1차 상품을 시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면서도 영국 수출 증대를 통해 수지균형을 꾀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수에즈 사태 이후 영국이 재정위기에 직면했을 때 미국과 캐나다의 보증 및 지원을 통해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은 영연방 회원국과 무역을 강화할 경우 반대급부로 역외무역, 특히 대유럽무역이 쇠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더욱이 영연방 회원국 모두는 자국의 경제발전에만 관심이 있었다."(309)


"오늘날 영연방은 주권국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일부 국가들이 가입 또는 탈퇴를 거듭하기도 하고, 이전에 영제국 지배와 관련이 없는 나라들도 새롭게 회원국으로 가입 신청을 하기도 한다." "1970년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시도와 영연방 사무국 체제의 등장 이후 영연방에 대한 영국 정치가들의 관심은 약화되었다. 영연방은 더 이상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국이 주도할 수 없고 또 영국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오늘날 영국은 코먼웰스에 관례적인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영연방 사무국의 소재지가 런던이라는 사실은 이전 영제국의 유산을 상징하지만, 1980년대 이후 특히 정상회의는 주로 자치령 국가 또는 아시아,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주도한다. 1971년 싱가포르 회의 이후 대부분 격년으로 지금까지 25차례 열렸다. 그 가운데 영국이 개최한 것은 4차례에 불과하다. 이는 영연방의 탈중심화와 다변화를 보여 준다."(314-5)


9장 유럽으로의 복귀


"오늘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중요한 이슈로 제기한 정당은 보수당이다. 영연방에서 유럽공동체로 방향 전환을 처음 시도한 정당도 보수당이었고 1970년대 보수당 집권기(히스 총리)에 유럽공동체 가입이 이루어졌다. 일종의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당시 가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의회 토론 과정에서 국가주권 침해 문제가 논의되었음에도 이런 점들은 의회보고서나 유럽공동체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 영국 정부가 의회주권 문제에 대해서 실제로 관심이 없었는지, 또는 그 심각성이 장래에 문제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유럽공동체 가입 당시에 영국 정부와 일반 여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이 없었다는 점이다. EEC가 유럽통합운동의 산물이고, 통합운동이 초국가적 정치체를 지향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표명해 온 점을 고려하면 의회주권의 전통을 중시해 온 영국에서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329)


4부 제국 이후


10장 제국의 기억과 영연방, 그리고 '상상의 잉글랜드'


"전후 노동력 부족에 직면한 영국은 아일랜드와 유럽 대륙 국가로부터 노동자를 모집했다. 특히 1948년 '국적법'은 아일랜드인에게 자유로운 출입국 권리 및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 시기까지 영국의 이민정책은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유럽인에게만 한정된 셈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영제국 해체가 가속되면서 새로운 영연방국 출신들이 대거 영국으로 몰려왔다. 이는 영국이 제국 지배의 경험으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경제부흥기에 값싼 해외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당시 노동시장의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인도아대륙, 카리브해 연안국 출신 소수 인종이 다양한 연결망을 통해 영국으로 입국했다. 자유방임적인 이민정책은 이런 경제상황뿐 아니라 백인 자치령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영연방 결속을 통해 미국과 소련에 대응하려는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1968년 8월 20일, 유색인 혐오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존 파월의 연설은 결국 유색인 이민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이 빚어낸 사건이었다."(347-8)


"유력 정치인과 의원은 물론 언론의 논조는 대부분 파월에 비판적이었지만, 일반 시민의 여론은 파월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소위 '유혈의 강' 연설을 둘러싼 논란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파월 지지자들의 편지 쓰기이다. 몇 주에 걸쳐 파월의 자택, 의원 사무실, 언론사에 엄청난 양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사람들은 개인 상황이나 가정 조건을 넘어 일종의 정치적 힘을 나타냈다. 말하자면 편지 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공동체를 나타내고자 했다. 빌 슈워츠에 따르면, 파월에게 지지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다수는 백인 여성이었다. 이들 편지에 나타나는 정서는 〈친숙한 세계의 붕괴를 느끼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기억에 자리 잡은 이전의 친숙했던 세계란 본토, 백인 남녀, 변경, 식민지, 백인 정착지, 백인 자치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상상된 백인의 세계라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무질서를 인식하고 분노한 것이었다."(350-2)


"영제국 역사에서 식민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인종을 기억하는 것이다. 영국인들이 문명을 다른 세계에 전파했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기도 한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은 이를 통해 그들의 '백인성'을 확인했다. 1950~60년대 영국인들의 일부는 분명 해외 백인 자치령 국가에서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았으며, 이들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정신세계에서 이러한 의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백인 자치령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에서 긍정적인 변화는 백인 자치령이 '백인성'을 중시하고 다른 인종에 대한 배제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한 점과 관련된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치령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강력한 영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대영국' 이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었음에 비해, 1950~60년대 본토에서 해외로 이주한 영국인들의 집착은 오히려 쇠락하고 변질된 영국 사회를 대신해 해외에서 순수한 잉글랜드 또는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으려는 퇴행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365-6)


11장 다문화 사회의 명암


"에드워드 사이드 이래 문예비평 분야에서 축적된 탈식민이론은 기본적으로 언어 및 문화 중심주의와 관련된다. 이 경향은 인간의 삶 자체를 문화로 본다. 따라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는 단순히 정신활동의 결과물만을 뜻하는 것뿐 아니라, 그 활동 과정과 일련의 실천을 포함한다. 문예비평가들이 보기에, 문화는 주로 의미, 즉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생산과 교환에 관련된다. 의미는 언어에 의해 구성되고 언어는 재현을 통해 작동한다. 언어는 그 기호와 기의를 다른 사람들이 해독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관념과 감정을 재현하고 드러낸다." "로버트 영은 문화는 처음부터 타자, 달리 말해 인종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문화란 닮은 것과 다른 것(차이)에 어떤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즉, 인종·종족·젠더 등 사회적으로 구성된 차이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의 사회관계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370-2)


"탈식민담론은 외부 세계에 대한 근대 유럽인들의 인식과 지식체계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 유럽인들은 외부 세계 사람들을 항상 자기와 다르고 열등한 '타자'로 인식했으며, 이 '타자'에 대한 담론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계몽운동기 이래 유럽 문화는 〈정치적·사회적·군사적·이념적·과학적으로, 또 상상력으로써 오리엔트를 관리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생산해 왔다.〉 사이드의 문제 제기는 미셸 푸코의 지식/권력모델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타자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체계가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중요한 기능을 행사했다는 사이드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식민지 담론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사이드가 오리엔트 담론 형성 과정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속지학, 역사학, 여행기의 형태로 처음 형성된 식민지 담론의 원자료는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369-70, 388)


"예컨대 리처드 프라이스는 남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코사 주민들에 대한 영국인의 지식체계가 어떻게 변모해 왔는가를 추적한다. 19세기 전반 이들에 대한 선교사 기록은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 준다. 남자는 긍지가 있고 여성은 온순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남성은 선교사들이 만난 종족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체격을 지녔고 여성은 생기발랄하면서도 뻔뻔하지 않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생활에 대해 인간 문화의 보편성이라는 맥락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34~35년 무렵 변경지방에서 영국인 이주민과 잦은 전쟁이 일어났다. 정착민 담론이 식민성에 대한 인도주의적 담론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코사인들의 호전성, 신뢰할 수 없는 문화를 자주 언급한다. 이후 이 지역에 관한 새로운 지식체계는 식민지의 열등성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영제국의 아프리카 정책 수립에 기초가 되었다."(388-9)


12장 브렉시트, 그 이후


"1970년대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직후 영국의 헌정(憲政) 위기를 강조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이자 좌파 지식인 톰 네언은 브리튼이라는 모호한 영국 헌정이 잉글랜드 민족주의의 대두─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파월주의─와 함께 위기에 직면하리라고 예상했다." "네언이 보기에, 유럽통합은 브리튼섬에서 앵글로-색슨 헤게모니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 헤게모니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섬나라 근성'과 협소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그 토대가 잠식될 것이었다. 그는 새롭게 '잉글랜드적인 것'에 대한 열광이 퇴행적 쇼비니즘 및 EU 회의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보았다." "요컨대 브렉시트 선거 결과는 단기적인 요인 못지않게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이후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른 잉글랜드 중심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장기 요인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네언이 예건했듯이, '잉글랜드적인 것(Englishness)'에 대한 새로운 열광과 퇴행적 민족주의의 대두가 장기적으로 영국 헌정의 해체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405-6)


종장 거대한 경험과 유산


"영제국 네트워크가 20세기 중엽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근대 세계에서 영국은 일종의 강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강소국이면서도 선점 효과에 따른 이점을 극대화했다. 해군과 상선대에 바탕을 둔 영국의 해양 지배력에 강력하게 도전할 만한 세력은 근대 산업문명의 초기에는 나타나기 어려웠다. 그 세력이 가시화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나, 그마저도 새롭게 등장한 여러 국민국가 사이의 역학관계와 국제정치 질서의 제약을 받았다. 유럽 대륙의 국민국가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균형에 집착하였고 대서양 반대쪽의 미국은 국내 개발과 발전에 치중했으며, 동아시아의 전통 국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거나 국제정치에 수동적으로만 영향받는 위치에 있었다. 유럽 대륙의 균형이 깨어지고 미국이 외부로 팽창하기 시작하며 동아시아 국민국가들이 새롭게 깨어나기 시작할 경우, 영제국과 그 네트워크는 충격을 받고 붕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416)


"영국의 정치인, 지식인, 그리고 일반 대중까지도 한동안 제국 경영이나 제국 네트워크를 외면해 왔다. 영국의 역사가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부정적 측면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덜 사악한 제국이나 선한 제국이라는 수사가 이를 나타낸다. 제국에 거리를 두려는 사회 심리적 경향은 제국의 상실에 따른 충격에서 일찍 빠져나오려는 자기방어적 기제에 해당한다. 영국이 과거 제국 경험을 상당히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18세기 이래 영국은 제국 네트워크를 경영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이 이룩한 선진적인 수단과 방법, 그리고 이상을 다른 세계에 확산시켰다. 근대성의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주의, 시장주의, 대의제 정치, 책임정부제도, 재산권 보장, 시민적 자유 등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전 세계에 퍼졌다. 영제국은 어떤 점에서는 근대 세계와 표리관계를 이룬다."(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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