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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상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창비 / 2000년 1월
평점 :
머리말
"계급이란 개념에는 역사적 관계란 개념이 뒤따른다. 관계라고 하면 으레 다 마찬가지지만, 역사적 관계란 것도 우리가 만일 그것을 어느 특정 순간에 죽은 것으로 고정시켜놓고서 그 구조를 해부하려 든다면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다. 제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 사회학적 이론의 틀을 가지고서도 계급의 순수한 표본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이어받은 것이건 또는 함께 나누어가진 것이건)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 계급적 경험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 계급의식이란 이러한 경험들이 문화적 맥락에서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이다."(7)
제1부 자유의 나무
1장 제한 없는 회원수
"'우리 회원의 수에는 제한이 없다.' 이것은 런던교신협회(London Corresponding Society, 1792년 창립)의 정관 제1조이다. 이 조항이야말로 역사가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환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배타성을 고수하려는 그 어떤 발상, 정치활동을 특정한 세습적 엘리뜨집단 혹은 재산소유집단의 전유물인 양 생각하는 그 어떤 발상에도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이 정관 조항에 동의한다는 것은 곧 런던교신협회가 정치적 권리와 재산권을 동일시하는 케케묵은 사고방식에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였으며, 또한 '폭도'들이 그 자체의 목적 추구를 위해 스스로 조직을 이룬 것이 아니라 자파 세력을 강화하고 당국의 간담을 서늘케 할 목적을 띤 파당의 단속적(斷續的)인 행동으로 치닫는 시절이었던 '윌크스와 자유' 시절의 급진주의에도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무제한의' 방식으로 선전과 선동에 문을 활짝 연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뜻하는 것이었다."(30)
# 단속적(斷續的) :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2장 크리스천과 아폴리언(Apollyon, 마왕)
"양심의 자유는 허용받았지만 '심사법 및 단체법'(Test and Corporations Acts) 때문에 공적 생활에서는 여전히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던 반국교도들은 18세기 내내 여러 시민적·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교육받은 젊은 세대 목사들 다수가 자기네의 관대한 합리적 신학을 자부하고 있었다. 박해받은 분파 특유의 깔뱅주의적 독선은 버리고 그들은 아리우스파 및 쏘치누스파 '이단'을 거쳐 유니테리언주의로 기울어졌다." "'솔직담백함'을 좋아하고 '열광'을 불신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던 유니테리언파의 합리적 기독교는 런던의 일부 직종인과 상점주들 그리고 대도시의 이 비슷한 집단들 사이에서 호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나 농촌의 빈민들에게 이야기가 먹히기에는 이 교리는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멀고 지나치게 세련되었으며 유복한 계급의 안락한 가치들과 지나치게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다. 이 교파의 어법 및 어조 자체가 장벽이 되고 있었다."(37-41)
# 쏘치누스파 :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인간의 원죄 등을 부정한 16세기 이딸리아의 신학자 쏘치니의 교의를 따르는 일파
"일부 사람들은 공화국시절 수평파의 패배에까지 소급해서 이 이유를 찾곤 한다. 성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오리라는 천년왕국적 희망이 박살나버리자 빈민들의 청교주의(Puritanism) 내에서도 현세적 열망과 영적 열망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그어지게 되었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 전인 1654년에 이미 총회파 침례교도(General Baptist) 총단은 (그들 중의 제5왕국설 신봉자들을 겨냥하여) 자기들이 보기에는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 전까지는 〈성자들 자신이 세상의 지배권과 통치권을 그들 수중에 두어야 한다고 기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천명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는 〈어느 곳에선가 세속 정부의 지배권을 얻기보다는 ··· 참을성있게 세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성자들의 몫이었다." "이같은 물러섬─청교주의의 적극적 활력과 반국교도의 자기보존적 후퇴의 공존─에 대한 이해는 18세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42-3)
"크리스천은 현실의 세상에서 아폴리언과 싸운다. 그러나 패배와 대중적 무관심의 시절에는 빈민들의 숙명론을 강화시키면서 은둔주의가 우세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빈민들'에게 가장 충실하고자 하던 바로 그 종파들이 1750년 경에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가장 냉담하였으며, 또 기질적으로도 복음전도에 가장 미온적이었다. 반국교주의는 두 가지 대립되는 경향 사이에서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이 양자는 다 어떠한 민중적 호소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 하나는 합리적 인도주의와 세련된 설교를 중시하는 경향으로서 빈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지나치게 지적이고 품위가 있었다. 또다른 편에 있는 것은 엄격한 선민들로서 그들은 교회 외부의 사람들과는 통혼을 해서도 안되었으며, 모든 교리위반자와 이단을 내쫓으면서 지옥에 떨어지기로 예정된 '타락한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전자의 깔뱅주의는 해체되고 있었고, 후자의 깔뱅주의는 돌처럼 경직되어가고 있었다〉고 알레비는 지적한 바 있다."(49)
"산업혁명이 진행된 전기간 동안 감리교는 권위주의적 경향과 민주주의적 경향 사이의 이같은 긴장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민주적 추진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 것은 분리해나온 종파들─신종파 및 (1806년 이후에는) 초기 감리교도들─사이에서였다. 더구나 홉스봄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감리교가 전파된 곳이면 어디서나 이 교파는 기성 국교회와 손을 끊음으로써 19세기 프랑스에서 반(反)성직주의(anti-clericalism)가 해냈던 기능과 유사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단 이 긴장이 폭발하면 때에 따라 세속 지도자들은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을 도덕적 정열로 휩싸이곤 하였다. 사탄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또한 어느 계급이 사탄의 편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한, 감리교는 일종의 도덕적 내전─즉 반국교파 예배당과 선술집 간의, 사악한 자와 속죄받은 자 간의, 멸망에 빠진 자와 구원받은 자 간의 내전─을 근로인민의 운명으로 못박아 설정하였다."(66)
3장 '사탄의 요새들'
"자칫하면 산업혁명기의 민중을 교회에 등록된, 즉 예배당에 다니는 선한 자와 방종한 악한 자로 그릇되게 구분하기 쉽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사실들은 흔히 쎈세이셔널한 형태로 제시되거나, 아니면 비난하기 위한 의도에서 정리되곤 하였다." "여러 수치들은 무산자들의 실제 범죄적 행동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근거가 없는 얘기도 아니겠지만, 지속적인 일자리가 없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산계급인들의 의식구조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유산계급 남녀들은 빈민들의 질서를 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치유책으로 제시된 것들은 제각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의 추진동기는 거의 다 똑같은 것이었다. 노동빈민들에게 줄 메시지는 단순한 것으로서, 기근의 해였던 1795년에 버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인내, 노동, 절제, 절약, 그리고 종교가 그들에게 권장되어야 한다. 그외의 모든 것은 순전히 사기일 뿐이다.〉"(79-82)
"유산계급들이 보인 그같은 성향은 술집들, 정기시(定期市)들, 일체의 대규모 집회 등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권력소유자들의 타고난 경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데 증거를 '날조'하는 이같은 전반적인 경향은 18세기 말에 세 가지 다른 방향에서 부추겨졌다. 첫째는, 신흥 제조업자(manufacturer) 계급의 공리주의적 태도를 들 수 있다. 공장도시들에 작업규율을 부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 계급은 수많은 전통적 오락 및 기분전환거리들에 대해 적대적이 되었다. 둘째는, 자책하는 죄인들의 끝없는 행렬을 만들어내면서 인쇄소에서 신앙고백식 전기(傳記)들을 쉴 새 없이 펴내고 있던 감리교도들의 압력 자체를 들 수 있다." "세번째 요인은 운동의 첫 세대 지도자들 및 그 역사의 기록자들 가운데 몇몇은 독학한 노동자들로서, 그들은 흥청망청식의 술집세계에 등을 돌리는 자기수련의 노력에 힘입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자신들의 계층 내에서 계몽과 질서, 절제를 뿌리내리기 위한 투쟁이었다."(83-4)
"도시의 공동체에서도, 농촌의 공동체에서도 소비자의식이 다른 형태의 정치적 혹은 산업적 적대관계의 형태들보다 우선하였다. 임금이 아니라 빵가격이 민중 불만의 가장 민감한 지표였다. 장인들, 자영 수공업기술자(craftsman)들, 혹은 콘월 지방의 주석광산 노동자들(이곳에서는 '자유로운' 광부의 전통이 19세기까지 그들의 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같은 집단들은 자기네 임금이 관습에 의해 혹은 그들 자신의 교섭에 의해 조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식료품을 응당 자유로운 시장에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물자부족의 시기에도 여전히 물가가 관습에 의해 조절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같은 '폭동들'은 민중의 입장에서는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지도자들은 영웅으로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폭동은 관습가격 혹은 프랑스식 '민중 지정가격'(taxation populaire)과 유사한 민중가격으로 식료품을 팔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곤 했다."(91-4)
"1780년대에 들어서면, 우리는 배후조종을 받고 있던 폭도와 혁명적 군중의 혼합체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1780년대의 민중은 그들의 무절제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야말로 왕권에 대항하는 평형추라고 여기고 있던 자유지향적 휘그파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버크는 폭동진압을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것을 비난했으며, 그런가 하면 폭스는 자기는 〈상비군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폭도의 지배를 받는 게 훨씬 낫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그 어떤 휘그파 정객도 그처럼 위험한 사회세력과 결탁할 엄두를 내지 않았으며, 또한 그 어떤 씨티 원로도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또 개혁운동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직화된 여론을 형성해내고자 노력하였으며, 폭도를 풀어놓는 수법을 경멸하였다. '기동성'(mobility)이라는 말은 19세기 급진주의자들과 차티스트들이 자기네의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시위들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며 붙인 표현이었다."(104)
4장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
"1780년의 고든 폭동 가담자들과 1791년 버밍엄의 (군중에 맞선) '교회와 국왕'파 폭동 가담자들은 '독립', 애국심, 잉글랜드인의 '생득권' 등에 대한 견해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그들의 '생득권'을 위협하는 낯선 분자들에 맞서서 '헌법'을 수호하고 있다고 느꼈다." "폭동 가담자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free-born Englishman)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을 터이다. 애국심, 민족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맹신이나 박해까지도 모두 자유라는 수사(修辭)의 옷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는 '낡은 부패세력'조차도 영국식 자유를 찬미하고 있었다. 민족적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자유가 귀족문벌파, 선동정치가 그리고 급진주의자들 모두의 표어였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규탄한 것도, 페인이 프랑스혁명을 옹호한 것도 모두 자유의 이름으로였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개시되면서부터(1793)는 애국심과 자유가 모든 엉터리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112)
"보통의 잉글랜드인의 입장은 첫째, 적극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다기보다 반反절대주의적인 것이었다. 둘째, 스스로 확고한 권리는 거의 가지지 못했지만 법률에 의해 자의적 권력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개인주의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셋째,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명예혁명이 억압에 맞서는 저항으로서의 폭동권에 대한 입헌적 선례를 제공해주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로크가 보기에 통치의 주요 목적은 국내평화의 유지와 인신 및 재산의 안전보장에 있었다. 사리사욕이나 편견에 의해 희석될 때 그같은 이론은 곧 유산계급에게 재산권의 침범자들을 처벌하는 가장 피비린내나는 법전을 인가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인신적 혹은 재산적 권리들을 침범하고 법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그런 자의적(arbitrary) 권력을 인가해주지는 않았다. 피비린내나는 형법이 관대하고(liberal) 때로는 꼼꼼하기까지 한 행정 및 법률해석과 공존한다는 역설적 상황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14-5)
"1818년 의회 위원회는 경찰부 설치를 주장하는 벤담의 제안을 〈모든 집의 모든 하인으로 하여금 주인의 행동을 살피는 스파이가 되게 하고,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 하여금 각기 다른 계급들을 정탐하게끔 만들게 될 안〉이라고 판단하였다. 토리파는 지방교구의 특권적 권리 그리고 지방 치안판사의 권한 등이 억압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고, 회그파는 국왕 혹은 정부의 권한이 증대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버뎃이나 카트라이트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 혹은 가옥보유주들의 윤번제 경비근무라는 이념을 더 좋게 평가하였다. 그런가 하면 급진적 민중은 차티스트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경찰도 억압의 기구로 여겼다." "중앙권력의 그 어떤 권한 증가도 증오하는 이같은 태도 속에서 우리는 지방자치를 고수하려는 방어적 입장, 휘그적 이론, 그리고 민중적 저항의 기묘한 혼합을 보고 있다. 젠트리층과 일반민중 모두 지방적 권리와 관습들을 소중히 여겼다."(117-8)
"그러나 우리는 우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20년 동안 종래의 헌법상의 절차들에 새로운 차원이 '실제로' 부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이미 국왕과 상하 양원으로부터 독립된, 불특정한 권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은 또한 강령단체(platform)─다소 제한된 목표를 위해 선전활동을 벌이며 출판물, 대규모 집회, 청원 등을 이용하여 '장외에서' 여론을 불러일으키던 '재야' 압력집단─가 대두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윌버포스나 위빌로서는 자기들의 선동을 젠트리 혹은 자유토지보호자(freeholder)들에게 국한시키고자 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를 통해 선례들이 확립되었으며, 이 실제 사례들은 광범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헌법의 복잡한 장치에 새로운 톱니바퀴가 추가되었다. 어스킨과 위빌은 견제와 균형이라고 하는 잘 알려진 공학적 비유법을 사용하면서, 〈인민의 운동에서 시계의 작동과 같은 규칙성〉을 요구하였다."(121)
"프랑스혁명은 좀더 원대한 성격의 선례를 마련해주었다. 이성의 빛에 의해, 그리고 '빈약하고 진부하고 소름끼치는 관습, 법률법규의 방식들'을 그늘 속으로 던져넣은 근본 원칙들에 입각하여 작성된 새로운 헌법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입헌주의적 논거의 지반을 처음으로 대폭 제거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페인이 아니라 버크였다." "버크는 전통에 대한 숭상으로 헌법에 대한 숭상을 보완하였다." "버크에게 크나큰 우려를 안겨준 것은 부패한 귀족층의 도덕적 본성이라기보다 오히려 민중의, 곧 '돼지 같은 떼거리'의 본성이었다. 버크는 역사를 하나의 '자연의 과정', 곧 너무나 복잡하고 꾸물거림이 심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혁신도 늘 예기치 못한 위험들로 가득 찰 수 밖에 없게 되는 그러한 과정으로 파악했다. 페인은 버크의 경고를 무시한 점에서는 잘못이었을지 몰라도 버크의 특수한 논지에 가로놓여 있는 계급적 이해관계의 관성을 폭로한 점에서는 옳았다."(127-8)
"페인의 『인간의 권리』는 잉글랜드 노동계급 운동의 원천을 이루는 저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의 논거와 어조를 좀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 책을 쓸 때 페인은 이미 15년 가까이나 되는 세월을 실험과 입헌주의적 우상파괴의 팔팔한 풍토 속에서 살아온, 국제적 명성을 지닌 미국인이었다. 그는 제2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잉글랜드의 관례와는 다른 사고방식 및 표현방식으로 씌어진 한 저작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입헌주의적 논거의 틀을 초두부터 거부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문서에 씌어진 죽은 자의 권위에 의해 이 권리들이 상속되지 못하고 통제되고 흥정거리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싸운다.〉 버크는 〈후손의 권리를 곰팡내나는 양피지 문서의 권위에 영원히 의탁할 것〉을 바랐던 반면, 페인은 각각의 세대마다 자신의 뭇 권리와 정부형태를 새로이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0)
"대의제 기관들에 대한, 이성의 힘에 대한, (페인의 말을 빌리자면) 일반민중 사이에 〈잠자는 상태로 누워 있는 지각(知覺)의 덩이〉에 대한, 그리고 〈인간은 정부에 의해 타락하지 않는 한 천성적으로 인간의 벗이며, 인간본성은 그 자체로서 사악한 것이 아니다〉라는 믿음에 대한 무한한 신뢰야말로 페인의 낙관주의를 지탱하는 전제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전통 및 교육기관들에 대한 독학한 사람 특유의 불신(〈그는 자기 자신의 서술은 송두리째 외우고 있었으며 그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것이 페인을 잘 아는 한 사람의 평이었다)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경험주의를 단도직입적으로 밀고 나아가고 '상식'에 호소함으로써 복잡한 이론문제들을 회피해버리려고 하는 경향을 드러내면서, 비타협적이고 당돌하고 심지어 독단적이기까지 한 어조로 표현되고 있었다. 19세기 노동계급의 급진주의에서는 이같은 낙관주의의 강점과 약점이 모두 몇번씩이고 되풀이하여 나타났다."(136-7)
"페인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는 모든 세습적 영예와 특권들의 철폐를 바라고 있었으나, 경제적 평등 실현을 지지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사회 내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시민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반면 경제적으로는 사회 내에서 모든 사람은 당연히 고용주 혹은 피고용자로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국가는 한쪽 편의 자본문제나 다른 쪽 편의 임금문제에 간여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권리』와 『국부론』은 서로를 보완하고 장려해주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또한 19세기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주된 전통은 페인으로부터 그 특징을 취하고 있었다. 오웬파의 영향 및 차티스트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다른 전통들이 우세한 적도 몇번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한번씩 퇴조를 겪고 나서 보면 언제나, 저류에 흐르는 페인주의적 주장들은 손상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곤 하였다. 1880년대까지 노동계급의 급진주의는 대체로 이 테두리 내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137-8)
5장 자유의 나무를 심기
"1792년 초에만 하더라도 영국 수상 피트는 확신을 가지고 '15년간'의 평화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6개월이 더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영국이 중립을 유지하면서 프랑스에서의 소란한 사태로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1792년 5월의 포고령은 페인주의 선전의 확산에 대해 정부측이 최초의 심각한 우려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도 순전히 국내적인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세 가지 요인이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그 첫째는 9월학살 이후 프랑스혁명이 급속도로 과격해진 것이다. 두번째는 신생공화국의 팽창주의적 열기로 인해 영국의 이익과 유럽의 외교적 균형이 직접 위협을 받게 된 일이다. 세번째로는 프랑스의 혁명적 열기와 국내의 성장하는 자꼬뱅운동이 합류할 위험스러운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개혁운동가 위빌은 〈인민 가운데 최하층계급들에게 폭력과 불의의 행위를 선동하는〉 경향이 있는 페인의 〈유해한 영향〉을 개탄하였다."(151-2, 156)
# 9월학살 : 1792년 9월 2~6일 파리에서 급진파가 왕당파를 비롯한 수감자들을 학살한 사건
"국내의 탄압은 물론이요, 나라 밖 사태들도 잉글랜드 자꼬뱅들의 활동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였다. 처음에는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던 대(對)프랑스전쟁이 민중들 사이에서 전통 깊은 반프랑스적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음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아주 상세하게 보도가 되곤 하였던 새로운 처형사건들(9월학살, 국왕과 마리 앙뚜아네뜨의 처형)도 하나하나가 다 이같은 감정을 부채질하였다. 1793년 9월에는 페인의 친구들인 지롱드파가 국민공회로부터 밀려나고 그 지도자들이 단두대로 보내졌으며, 이 해 마지막 주에는 페인 자신도 뤽쌍부르 궁에 유폐되었다. 이같은 경험들은 지나치게 열렬하고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으로 자기네 신념을 프랑스의 대의명분과 동일시하였던 지식인세대에 저 깊디깊은 환멸의 첫 단계를 초래하였다. 1792년에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지식인 개혁운동가들과 평민 개혁운동가들 사이의 통합은 결코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162-3)
"민중단체들은 그들에게 닥친 이 첫번째 폭풍우를 이겨냈다. 그러나 시련을 거치는 가운데 이들 단체는 강조점과 어조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페인의 이름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그의 공공연한 공화주의적 어조도 헌법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새로운 강조점에 밀려났다. (런던교신협회는 이를 1688년 협정의 맥락에서 규정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같은 수정은 이 테두리를 벗어나는 그 어떤 수사적 용어도 고발대상으로 삼겠다는 당국의 명백한 의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을 뿐이며 다른 면에서는 박해로 인해 협회들은 오히려 급진화되었다." "1793년에 단체들에 가입해 있던 개혁운동가들의 대다수는 이제 장인, 임금노동자, 소마스터 및 소직종인(small tradesman) 등이었다. 그리고 이제 두 개의 새로운 테마가 아주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경제적 불만 및 사회적 치유책이 그 한가지이고, 조직 몇 연설 형태에서 프랑스의 선례를 모방하는 것이 다른 한가지이다."(174)
"당국의 곤경은 입헌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생겨났다. 지방의 치안관이 즉결심판을 내리는 데 필요한 법은 충분히 있었지만, 중앙의 사법관리들은 중요한 사안의 기소에 관해서는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치안교란에 관한 법률은 내용이 모호했으며, 그래서 검찰총장은 대역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기소해야 할지 치안교란적인 중상모략 행위라는 비교적 가벼운 죄목으로 고발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에서 정부는 모호한 법률, 배심제도(대니얼 이튼을 두 번, 토머스 워커를 한 번 무죄방면하여 당국에 굴욕을 안겨주었다), 토머스 어스킨(그는 여러 차례의 재판에서 변론을 폈다) 같은 뛰어난 변호인들을 포함하는 비록 소수이지만 쟁쟁한 폭스파 야당세력, 입헌주의적 어법이 그야말로 체질적으로 배어 있어 개인적 자유가 침해받는다 하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튀어일어나 방어할 태세가 되어 있는 공공여론 등 일련의 장애에 부딪혔다."(175-6)
"잉글랜드 자꼬뱅들은 지금까지 인정되어온 것보다 수적으로 더 많고, 프랑스혁명을 만들어낸 '평민대중'과 더 비슷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프랑스) 자꼬뱅을 닮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열광적인 평등주의로 1793~94년 로베스삐에르의 혁명적 독재를 떠받쳐주었던 저 빠리'구'(區, section)의 쌍-뀔로뜨들과 더 비슷하다." "공화력 2년 빠리에서도 그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제화공들은 항상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이 장인들은 페인의 교리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곧 그것은 절대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군주정, 귀족정, 국가 및 세금에 대한 철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열광의 시대에 이들 제화공들은 한편으로는 수천명의 소상점주, 인쇄공 및 서적판매상, 의료인, 교사, 판화공, 소마스터 및 반국교파 성직자들의 지지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짐꾼, 석탄운반부, (막)노동자, 육군병사와 수병들의 지지를 모아들인 저 운동의 단단한 핵심세력이었다."(221-2)
"1797년에 이르면 초강경파 자꼬뱅들 가운데 일부는 입헌주의 운동에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걸지 못하게 되었음이 명백하다. 이때부터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런던의 민주주의자들 중에는 쿠데타─아마도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을─외에는 아무것에도 희망을 걸지 않는 (스펜스주의자 내지 공화파) 소수집단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진지했지만, 그들식의 음모결사는 당대의 일반적인 추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생경함을 띠고 있었으며, 추상적인 공화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오코일리의 처형, 아일랜드 반란의 진압, 그리고 런던과 맨체스터에서의 지도적 인물들의 체포 등과 아울러 비밀결사 음모는 더이상 '전국적' 존재기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이같은 지하조직이 존재했던 경우라 하더라도 이들 조직은 고립되어 시들어버리거나 아니면 그 자체의 공업적 상황에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45-6)
"혁명적 충동은 아주 초기에 질식당해버렸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최초의 결과는 쓰라림과 절망이었다. 지배계급의 반혁명적 공포는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곧 동직조합, 민중의 교육, 민중의 스포츠와 풍속, 민중의 출판물과 단체들, 그리고 민중의 정치적 권리 등에 대한 태도에서 표현되고 있다." "잉글랜드는 반혁명적 감정 및 규율의 밀물이 산업혁명의 밀물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였다는 점에서 유럽이 다른 나라들과 구분된다. 새로운 기술과 공업조직의 형태들이 발전할수록 정치적·사회적 권리들은 후퇴하였다. 조급하고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산업부르주아지와 막 형성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자연스러운' 동맹은 성립하자마자 깨져버렸다." "이 두 세력이 행동의 일치를 보인 것은 1792년의 몇달 동안 뿐이었다." "1790년대 잉글랜드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감리교 때문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졌던 유일한 동맹이 와해되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251-2)
제2부 아담에 대한 저주
6장 착취
"1790년대의 모든 급진적인 현상들은 1815년 이후에는 거의 열 배로 재생산되었다. 몇개 안되던 자꼬뱅 신문들은 20여 개의 초급진적이고 오웬주의적인 정기간행물들을 낳았다. 대니얼 이튼이 페인의 책을 출판한 죄로 구금당했다면, 리처드 칼라일과 그를 따르는 노동자들은 동일한 죄로 도합 200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교신협회가 20여 개의 도시에서 불안정하게 유지되었던 데 반해, 전쟁 이후 햄프든 클럽과 정치동맹들은 작은 공업 촌락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운동이 면직공업에서 큼직한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발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양자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면방직공장은 더욱 많은 상품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그 자체를 생산해낸, 산업혁명만이 아닌 사회혁명의 주역으로도 간주된다. 요컨대 어떤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던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무엇을 설명해주는 말이 된 것이다."(268-9)
"확실히 면직공업은 산업혁명의 선도공업이었고 면방직공장은 공장제도의 탁월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성장의 역학과 사회적·문화적 삶의 역학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아주 직접적으로 일치된다고 상정해서는 안된다. (1780년경의) 면방직공장의 '비약적인 발전' 이후의 반세기 동안에도 공장노동자는 면직공업에 종사하는 성인노동자 중에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830년대 초에 면수직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면직, 모직, 견직 방적공장과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남녀 노동자보다도 여전히 그 수가 더 많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1830년대에도, 성인남자 면방적공은 그 실체가 도무지 잡히지 않는 이른바 전형적인 '평균 노동자'(average working man)가 아니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면방직공장의 새로움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노동계급 공동체(working-class community)들을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정치적·문화적 전통의 연속성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270-1)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두드러진 사실은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이것은 첫째, 계급의식의 성장에서, 즉 이 다양한 모든 노동대중 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동일하고 타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의식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둘째,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산업적 조직형태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1832년에 이르면 토대가 굳건하고 자기의식적인 노동계급의 제도들─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 및 종교 운동, 정치조직, 정기간행물들─노동계급의 지적 전통, 노동계급의 지역공동체 패턴, 노동계급의 감정구조가 있었다." "노동계급의 형성은 공장제도의 자동생산물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변화하는 생산관계와 노동조건들은 원료에 작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 그러니까 페인이 버리고 떠났으며 또 감리교도들이 그 틀을 만들어낸 바로 그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에게 작용하였다."(272-3)
"결국, 노동계급의 의식과 제도를 형성하는 데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것은 증기기관 못지않게 정치적 맥락이었다." "프랑스를 보고 놀라 전쟁의 애국적인 열정에 휩싸인 귀족과 제조업자들은 제휴하였다. 잉글랜드의 구체제는 국정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나날이 번성해가는 공업도시들을 잘못 통치해온 낡은 단체들을 온존시킴으로 해서 새롭게 수명을 연장하게 된 것이다. 그 협력의 대가로 제조업자들은 중요한 양보를 얻어냈다. 그것들은 도제제도, 임금규제, 공업에서의 노동조건들을 다루어온 '온정주의'적인 법률들의 취소 내지 철폐였다. 귀족들은 민중의 자꼬뱅적 '음모'를 탄압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제조업자들은 임금상승을 위한 '음모'를 무산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새로운 것은 이러한 사태가 프랑스혁명과 함께, 점증하는 의식화와 더욱 광범위해진 욕구와 함께, (런던과 공업지구의) 인구증가와 함께, 그리고 더욱 지독하고 더욱 노골적인 형태의 경제적 착취 등과 함께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276-7)
7장 농업노동자들
"인클로우저를 지지하던 자들은 흔히 에이커당 생산성과 지대가치가 높아졌다는 말로 그들의 주장을 대신한다. 그러나 모든 마을에서 인클로우저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해서 겨우 먹고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를 파괴하였다. 자기의 권리에 대한 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영세농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인클로우저는 (그것에 대한 온갖 궤변적인 수식어들을 그대로 용인하는 경우) 재산 소유자들과 법률가들의 의회가 제정한 재산에 관한 공정한 규칙과 법에 따라 행해진 계급적 강탈행위에 다름아닌 것이었다." "인클로우저는 자본주의적 재산관계 면에서는 '지극히 적절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촌락의 관습과 권리라는 전통적인 외피를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인클로우저의 사회적 폭력은 바로 자본주의적 재산 개념을 촌락에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부과한 데 있었다." "실로, 인클로우저는 농업적 생산수단에 대한 인간의 관습적인 관례들을 파괴한 수백년에 걸친 긴 과정의 정점이었다."(301-3)
"이렇게 지주와 농장주들의 부가 증가하고 있을 때, 노동자가 지독한 생계수준에서 허덕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대답을 이 시대 전체에 걸친 전반적인 반혁명적 분위기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임금을 낮추기 위해 전쟁을 희망한다'는 것은 1790년대 북부지방 일부 젠트리의 구호였다. 전쟁은 도시의 개혁가들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위빌이 대표하는 인도주의적인 젠트리의 쇠퇴도 가져왔다. 전반적인 인클로우저의 원인이 탐욕이라는 주장에 덧붙여 하나의 새로운 주장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사회적 규율이라는 주장이다. '지나간 시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긴 유산'인 공유지는 이제 무질서의 위험한 온상으로 간주되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이데올로기가 덧붙여진 것이다. 젠틀먼이 영세농들을 공유지에서 제거하고, 그들의 노동자들을 예속상태로 떨어뜨리고, 부수적 소득을 깎아내리고, 소토지보유농을 쫓아내는 것이 공적인 성격을 지닌 정책사항이 되었다."(306-7)
"인클로우저─특히 전쟁기간 중의 남부와 동부 경작지에서의─는 전반적인 농촌인구의 감소를 초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은─물결치듯 마을에서 도시로, 그리고 주에서 주로─이주하였지만 전반적인 인구증가는 감소된 인구를 메우고도 남았다. 전쟁이 끝나 곡가가 하락하고 그래서 농장주들이 더이상 〈우리의 젊은이들을 육군이나 해군에 내보낼 수 없게 되자〉(이는 지방의 치안관 수중에 있던 편리한 징계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잉여인구' 문제를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1834년 신빈민법이 시행된 이후에, 여러 촌락에서 떠들어댄 이러한 '잉여'는 허위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촌락에서 노동의 대가는 대부분 구빈세로 충당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며칠 혹은 반나절만 고용되었다가 교구로 되돌려졌다. 우천시에는 노동자들이 '남아돌고' 추수 때는 '모자랐다'." "이 시스템은 자신의 임금이나 노동생활에 대해 노동자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통제력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313-4)
8장 장인과 그밖의 노동자들
"19세기 초, 숙련된 수공업기술자의 임금은 흔히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관습'이라는 관념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관습적인 임금규정은 농촌 수공업기술자들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된 신분으로부터 대도시에서 시행되던 복잡한 제도적 규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고려대상에 넣고 있었다." "농촌의 수공업기술자들은 대개 교육수준이 높고 다재다능하였으며, 그들이 (자신의 관습을 가지고) 도시에 가서 도시노동자들과 접촉했을 때 도시노동자들─직조공, 양말제조공 혹은 광부─보다는 자기들이 '훨씬 높다'고 느끼고 있었다." "수공업기술직이라는 관습적인 전통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공정'가격과 '정당한' 임금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유지되고 있었다.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범주들 즉 생계, 자존심, 일정한 수준의 솜씨에 대한 자부심, 기술의 등급에 따른 관습적인 보수 등은 초기의 동직조합 분규에 있어서 순전히 '경제적'인 요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구들이었다."(329-31)
"그런데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시기에 숙련기술을 지닌 장인을 가리킬 때 '귀족'(aristocracy)이라는 용어를 일찍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노동귀족'(labour aristocracy)이라는 현상은 흔히 1850년대와 1860년대에 활발했던 숙련공들의 노동조합주의에 수반되거나─심지어는 제국주의의 결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1800~1850년 시기에 노동귀족이라고 할 만한 신·구 엘리뜨 노동자가 있었다. 구엘리뜨는 자기 스스로를 마스터, 상점주, 전문직업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분이 높다'고 생각하던 장인 마스터(master-artisan)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부 공업에서 수공업기술자의 특권적 지위는 관습의 힘을 통해서, 혹은 결사와 도제직의 규제를 통해서, 혹은 수공업이 고도로 숙련되고 전문화된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사치품 제조 부문 같은─작업장과 공장생산에서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새로운 엘리뜨는 철강업, 금속기계작업, 제조공업에서의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더불어 등장했다."(332-3)
"장인과 (막)노동자 간의 구별─신분, 조직 그리고 금전적인 보수에 있어서─은 나볼레옹전쟁 기간보다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헨리 메이휴가 묘사한 1840년대와 1850년대의 런던에서도 엄청나게 심했다. 〈런던 서쪽 끝의 숙련된 직공들로부터 동부지구의 미숙련노동자들에게로 옮겨가보면, 도덕적 그리고 지적 변화가 너무도 커서 우리는 마치 새로운 땅에 들어온 것과 같은, 그리고 다른 종족 속에 끼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고 메이휴는 말했다. 남부지방에서 공제조합 회원 규모가 가장 크고, 동직조합 조직이 아주 지속적이고 안정되어 있으며, 교육 및 종교 운동이 번창하고, 오웬주의가 굳게 뿌리를 내린 것은 바로 장인들 사이에서였다." "그런데 자신의 수공업과 동직조합의 보호가 박탈될 경우, 장인은 메이휴시대의 런던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가난에 찌든 숙련직인들은 (부랑자들과는 전혀 다른 계급이었기에) 마지막 절망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구빈원으로 향했다."(337-8)
"우리가 낡은 기술이 쇠퇴하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과정을 고찰할 때, 낡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이 거의 언제나 각기 다른 사람들의 차지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19세기 전반의 제조업자들은 매번 기술혁신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러한 기술혁신은 성인남자 수공업기술자를 여자나 미성년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낡은 기술이 과거와 마찬가지 수준이거나 그보다 더 높은 기술을 요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되었을 경우에도, 우리는 동일한 노동자들이 이전 기술에서 다음 기술로 혹은 가내생산에서 공장생산으로 이전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기계와 기술혁신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불안정성과 적대감은, 단지 편견과 (그당시 당국이 주장하는 대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장인들은 새로운 기계가 그들의 자식이나 다른 사람의 자식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에게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346-7)
"선대제 노동자와 장인 모두에 관련된 몇가지 일반적인 사항이 있다. 첫째, 직조공이나 〈싸구려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기계화 과정에 의해 대체된 재래식 직종 몰락의 본보기〉로서 설명해치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임금이 최저수준이었던 것은 공장노동자가 아니라, 그 전통과 방법이 18세기에 속했던 가내노동자들이었다〉라는 경멸조의 진술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와 같은 진술들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산업혁명의 진정한 추진력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즉, 그들은 '낡은' 전(前)공업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고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의 진정한 면모는 증기기관, 공장노동자, 그리고 고기를 먹는 엔지니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780년~1830년 사이에 선대제 노동을 이용하는 공업에 고용된 사람의 수는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종종 '증기기관과 공장이 선대제 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킨 주범이었다.'"(362-3)
"농업노동자들이 토지를 갈망했다면, 장인들은 '독립'을 염원했다. 이러한 염원은 초기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역사 도처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런던에서 소마스터가 되는 꿈(1790년대에 여전히 강했고, 버밍엄에서는 1830년대에도 여전히 강했던 꿈이다)은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자택' 혹은 '다락방' 마스터들이 겪은 경험─즉, 일주일 내내 기성품 도매상이나 기성품 제조업체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독립'─에 직면했을 때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것은 1820년대 말에 오웬주의에 대한 지지의 물결이 왜 갑자기 높아졌는가를 설명해준다. 동직조합의 전통들과 독립에 대한 갈망은 자신들의 생계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 즉 '집단적' 독립이라는 사상 속에서 하나로 엮여졌다. 오웬주의적 실험이 대부분 실패했을 때에도 런던의 장인은 자신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런던에서 태어난 장인들은 공장의 작업속도를 맞출 수 없었다. 일개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364-5)
9장 직조공들
"직조공들의 처지를 악화시킨 원인을 역직기에만 돌린다면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직조공의 직위는 1813년에 이르면 이미 산산이 무너져내려가 있었는데, 이때 영국의 역직기는 총 2,400대로 추산되었고 손과 동력 간의 경쟁은 대체로 심리적인 것이었다." "기계의 발명과 직조업에 대한 자본 투자를 '지연시킨' 것은 오히려 수직기 노동이 남아 돌아가고 값쌌기 때문이다. 직조공들의 신분하락은 지체가 낮은 장인 직종 노동자들의 경우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의 처지는 그들의 임금이 낮아질 때마다 점점 더 무방비상태로 되어갔다. 직조공들은 이제 더 적은 돈을 벌기 위해 밤늦게까지 더 오래 일해야 했고, 더 오래 일을 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이 실직되는 기회를 증가시켰다.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신봉자들조차도 아연실색하였다. 〈애덤 스미스 박사가 그와 같은 사태를 생각해보기나 했을까?〉라고 한 인도주의적인 고용주는 외쳤는데, 그의 고결한 사업방식은 그 자신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389)
"직조공들은 도시의 장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황금기'에 대한 기억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만큼 신분적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장인보다도 더 뿌리깊은 사회적 평등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호시절에 그들의 생활방식은 지역공동체에 의해 공유되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도 지역공동체 전체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위가 매우 낮아졌기 때문에 그들이 경제적·사회적 보호장벽을 쳐야 할 그들보다 낮은 미숙련공이나 일용노동자들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들의 저항─그 저항이 오웬의 언어로 표현되든 성경적인 언어로 표현되든 상관없이─은 각별한 도덕적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파당적인 이익에 호소하기보다는 기본권과 인간의 우애와 행동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들에 호소했다." "그들의 꿈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즉 그들이 생산한 것을 마스터와 중간업자들에 의한 왜곡 없이 교환하는 독립적 소생산자의 공동체였다."(410-1)
"직조공들의 공장제 반대에는 그들의 지역공동체의 '가치체계'가 담겨 있다. 우리는 1830년대의 잉글랜드에서 서로 다른 전통과 규범과 기대를 가지고 서로 충돌하는 공장, 직조, 농촌의 공동체들로 구성된 하나의 '다원사회'(plural society)를 볼 수 있다. 1815년에서 1840년까지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앞의 둘(즉, 공장과 직조 공동체들)이 공통의 정치운동(급진주의, 1832년의 개혁, 오웬주의, 10시간 운동, 차티스트 운동)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이야기이다. 반면, 차티스트 운동의 마지막 단계는 부분적으로 이 양자가 불편한 공존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침내는 결렬되는 이야기이다. 수직공들이 장인들과 여러 전통을 공유하고 그들과 통혼하고, 자녀들을 일찍부터 공장에 보냈던 맨체스터나 리즈 같은 대도시에서는 양자간의 차이가 가장 적게 나타났다. 고지대에 있는 직조업 촌락의 지역공동체들은 훨씬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도회지 사람들'─온통 '쓰레기조각과 부글대는 것들'로 이루어진─을 경멸하였다."(428-9)
"입법부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경제적 힘들이 사회의 일부 사람들을 해쳐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낡은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아직도 온존되고 있는 자유의 신화이다. 역직기는 국가와 고용주 모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입증해주는 확고한 알리바이를 마련해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직조공들의 이야기를 또한 산업혁명기에 벌어진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직조공의 역사에서 우리는 노동조합이라는 자체 방어수단을 가지지 못한 일부 노동자들에게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가 행한 행동의 하나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정부는 그들의 정치조직과 노동조합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일랜드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행했던 것과 같은 뻔뻔스러운 방법으로 자본의 자유라는 부정적 도그마를 직조공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러한 도그마의 유령은 오늘날까지도 떠돌아다닌다."(434)
"일부 경제사가들은 (아마도 인간의 진보를 경제성장과 동일시하는 숨겨진 '진보주의' 때문에) 산업혁명기의 기술혁신이 철도시대 이전까지는 (금속공업을 제외하고는) 성인 숙련노동을 일자리에서 쫓아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쫓겨난 노동은 이 시대 내내 넘쳐흐른, 순전히 인간의 근육만을 사용하는 고된 작업에 값싼 노동력을 무한정 공급하였다. 광산, 부두, 벽돌 쌓는 작업, 가스작업, 건축, 운하 및 철도 건설, 짐마차 운반과 인력 운반 등에서는 기계화가 거의 혹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외적인 것은 숙련을 요하는 직종들이고, 그래서 미숙련 육체노동이나 선대제 노동 공업들의 상태는 '특별히 불행했던 것'이기는커녕, 온갖 방법으로 임금을 깎아내리기 위해 고용주들과 입법자들과 이데올로그들이 고안해낸 한 체제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노동조건들이 급속이 악화되어가고 있을 때 직물업이 과잉공급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으로 확인시켜준다."(435)
10장 생활수준과 실제의 경험들
"산업혁명기 민중의 식생활에 관한 논의는 곡물, 육류, 감자, 맥주, 설탕 및 차 소비를 주로 문제삼는다. 이 모든 것들은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기록이다. 50년에 걸친 산업혁명기에, 국민생산 가운데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몫이 재산소유계급과 전문직업인 계급이 차지하는 몫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국부(national wealth)가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를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고, 또 그 자신의 노동산물임이 분명한 국부의 대부분이 역시 분명한 방식으로 고용주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 '평균' 노동자는 최저생계 수준에 아주 가까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그것은 생활수준의 저하와 다름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경제적 진보의 혜택' 가운데서 그가 차지한 몫은 고작 더 많은 감자, 그의 가족을 위한 몇 벌의 면직의류, 비누와 초, 약간의 차와 설탕, 그리고 『경제사평론』에 실린 그 엄청난 수의 논문들뿐이었다."(442)
"슬럼가, 악취가 풍기는 강물, 자연파괴, 형편없는 건축물 등은 모두가 높은 인구 압력 아래서 계획도 사전경험도 없는 가운데 급속히 그리고 무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모두 용서될 수 있다는 견해가 지겹게 반복되고 있다. 〈흔히 빈곤의 원인은 탐욕이라기보다는 무지였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명백히 양자 모두가 원인이었다. 그런 주장은 어느 시점까지만 타당한데, 즉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의사들과 위생개혁가들, 벤담주의자들과 차티스트들이 재산소유자들의 타성과 '값싼 정부'를 외치는 납세자들의 선동에 대항하여 개량을 위한 끈질긴 싸움을 계속하던 1830년대 혹은 1840년대의 어느 시점까지만 타당하다. 이 시기에 이르면 노동자들은 사실상 악취가 나는 '별개의 지역들'(enclave, 다른 나라 땅으로 둘러싸인 영토)에 격리되어 있었고, 중간계급들은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편리할 만큼 그 지역과 멀리 떨어짐으로써 공업도시에 대한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냈다."(446)
"인구학자들은 인구폭발의 주요 원인으로 사망률 감소보다는 출생률 증가를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이 가외수입을 얻거나 구호금을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많은 자식들을 가지기로 작정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출생률의 증가는 지역공동체와 전통적인 가족생활 패턴의 파괴(스피넘랜드 제도와 공장은 조혼과 '무분별한' 결혼을 금지해온 터부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주인집에서 먹고 자는 농장의 하인과 도제 수의 감소, 전쟁의 영향, 신도시로의 인구집중, 심지어는 다산형질의 유전학적인 선택 등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출생률의 증가를 생활수준 향상의 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무분별한' 자들이 가족수가 가장 많았다는 것은 19세기 초반의 관찰자들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테마였고, 한편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농민의 결혼패턴 전체가 바뀐 것은 대기근의 뼈저린 경험을 겪고나서부터였다."(449)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인도주의적인 대의명분을 어느정도 지지했던 수십명의 젠틀먼과 전문직업인들은, 1820년대에는 인구가 밀집된 제조업지역의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들이 사는 집의 대문에서 불과 100~200야드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폐들을 알지 못했다. 어린이노동을 하는 소녀들이 반벌거숭이 상태로 갱도에서 나왔을 때, 허더스필드 지역의 유지들은 참으로 놀랐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악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나 '알려지지 않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가난이 스스로 들고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난을 지켜보면서도 어느 정도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를 잊어버린다.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부자들의 눈에 공장의 어린이들은 '바쁘고' '부지런하고' '유용했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정원과 과수원 밖에 머물러 있었고 또 값이 쌌다.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가책은 대개 종교적인 반성이 잠재울 수 있었다."(472-3)
11장 개조하는 힘을 지닌 십자가
"나뽈레옹전쟁 기간에 감리교 신도의 수는 괄목할 만큼 증가했다. 전쟁 기간은 또한 모든 비국교 교파 사이에서 (알레비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적 정신이 걷잡을 수 없이 퇴조하는〉 시기였다. 전쟁 기간 중의 감리교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특히 놀랍다. 첫째, 새로운 공업 노동계급 사이에서 그 수가 가장 많이 늘었다. 둘째, 웨즐리 사망 후 몇년 사이에 목사들의 새로운 관료화가 강화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들의 복종심을 조작하는 것과 교회의 권위를 모욕할 수 있는 모든 일탈현상의 출현을 제재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여겼다. 이 점에서 그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수세기 동안 복종의 의무를 빈민들에게 설교해온 것은 국교회였다. 그러나 국교회는 빈민들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도들, 적어도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분명히' 빈민이었다. 감리교 지방설교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누가 말했듯이) 〈나의 제니 방적기 뒤에서〉 연설문안을 궁리하던 미천한 사람들이었다."(484-5)
"감리교가 일요학교를 통해 최소한 어린이와 성인에게 기초교육을 실시했던 점을 상기하면 우리는 흔히 감리교의 죄악을 어느 정도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다 큰 채탄부 녀석들과 그들의 누이들이' 또 위틀, 보울러, 점보 및 화이트 모스에서 온 직조공과 노동자의 아이들이 다니는 1790년대 말 미들턴 학교의 행복한 정경을 그린 뱀퍼드의 그림을 때때로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정통 웨즐리파를 주도한) 제비즈 번팅이 용서할 수 없었던 초기 감리교도들의 느슨함을 보여주는 바로 '이러한' 정경이다. 그는 1808년 셰필드의 목사로 재직시 일요학교의 아동들이 '글쓰기'를 배우고 있는 것을 목도했을 때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안식일의 끔찍스런 악용'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부당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어린아이들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은 '영적인 선행'이지만, 글쓰기는 그로부터 '세속적 이익'이 생길 수도 있는 '세속적인 기교'였기 때문이다."(488-9)
"우리는 번팅과 그의 동료들에게서 그들이 어린이노동을 용인한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기형적 신체와 짝을 이루는 그들 자신의 기형적 감각을 보게 된다. 공업중심지(1804~15년의 맨체스터, 리버풀, 셰필드, 핼리팩스, 리즈)에서 그가 초기 목사직을 수행할 때의 수많은 통신문을 살펴보면 끊임없는 교파간의 사소한 분쟁과 도덕적인 속임수와 또 젊은 여성의 개인적 품행에 관한 시시콜콜한 신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중에도 번팅이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 하나 산업주의의 결과에 대해서는 단 한번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젊은 감리교 지도자들은 태만으로 어린이노동이라는 범행에 공모하는 죄만 지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빈민들에게 복종이란 활성분(活性分)을 주입시킴으로써 빈민들을 내부에서부터 약화시켰다. 그리고서 그들은 기업가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업규율이라는 심리적 성분의 조성에 가장 적합한 요소들을 감리교 안에서 길러냈던 것이다."(489-90)
"감리교는 어떻게 해서 이렇듯 놀라운 활력을 가지고 이 이중의 직분─부르주아의 종교이자 프롤레타리아의 종교라는─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앤드류 유어 박사의 『매뉴팩처들의 철학』에서 하나의 완벽한 선례를 볼 수 있다." "공장제는 인간성의 개조를 요구한다. 장인이나 선대제 노동자의 '발작적인 노동행태'(working paroxysms)는 인간이 기계의 규율에 적응할 때까지 규격화(methodized)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규율을 지키는 미덕이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감독관이 되지 않는 한) 전혀 세속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을 때, 어떻게 그 미덕을 그들에게 주입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인간은 마땅히 그의 으뜸가는 행복을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의 상태에 기약해야 한다는 ···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중요한 교훈〉이 주입됨으로써만 가능하다. 노동은 반드시 〈초월적 존재의 사랑에 의해 ··· 우리의 의지와 애정 위에 고취된 ··· 하나의 순수한 '덕행'〉으로서 수행되어야만 한다."(498-9)
"〈그렇다면 인류는 이 개조하는 힘(transforming power)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이다. 죄를 범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그(십자가)의 희생이며, 죄에 끌리는 마음을 없애는 것은 그 동기이다. 십자가는 그와 같은 끔찍한 속죄가 아니고서는 비열한 죄가 씻기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죄를 극복한다. 십자가는 불복종의 죄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순종을 고무하며, 순종하는 힘을 얻게 해주며, 순종을 실행 가능케 하며, 순종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든다. 십자가는 순종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순종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십자가는 순종을 부추기는 동기일 뿐만 아니라 순종의 기본틀(pattern)이다.〉" "웨즐리파는 은총의 보편성 교의를 설파했다. 적어도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죄와 은총의 기회는 평등하다. 그리고 지식의 종교이기보다 '마음'의 종교로서, 아무리 소박하고 아무리 교육받지 못한 자라도 은총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499-501)
"그러나 이 교리에는 좀더 복잡한 점들이 있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구원은 신의 전권(prerogative)이었으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극도로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속죄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은총을 확신하고, 일단 감리교의 형제애 안에 철저하게 들어오면 노동하는 남자나 여자나 '교리를 어기는 것'(backsliding)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친 산업세계에서 그들이 아는 유일한 공동체 집단으로부터 축출당함을 의미했을 것이다." "부자는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특히 예배당을 지음으로써) 은총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육신의 욕망, 눈의 욕망, 그리고 자만심'의 유혹을 덜 받는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은총을 입고 있을 가능성이 한결 많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소명'(직업) 때문이 아니라 '다시 죄를 지을'(backslide) 유혹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502-3)
"그러나 감리교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종교'라는 것이 웨즐리의 주장이었다. 감리교가 예전의 청교도 분파들과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은 그 '열광'과 감정적인 황홀경에 있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전(前)산업기의 저항적인 노동자나 장인의 성격구조가 공업노동자의 순종적인 성격구조로 난폭하게 재주조되는 영적 시련을 볼 수 있다. 실로 여기에 유어가 말한 '개조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개성의 바로 원천에 침투하여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억압하려는 악마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억압'이란 잘못된 낱말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표출은 금지되었다기보다는,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표출되지 않고 오직 교회를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징발되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궤짝 같은 예배당이 마치 인간의 영혼을 채가려는 커다란 덫처럼 공업지대에 서 있었다. 바로 그 교회 안에는 신앙을 버린 자, 고해, 사탄에 대한 공격, 길 잃은 양들로 이루어진 감동적인 드라마가 끊임없이 존재하였다."(503-7)
"감리교는 늘 교회 문을 열어둠으로써 산업혁명기에 뿌리뽑히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라져가고 있던 예전의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대신할 만한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제공했다." "사실 이 시기의 많은 사람에게 감리교회의 교우라는 '티켓'은 주술적인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철 따라 이동하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길 때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될 수 있었다. 이 종교공동체 내에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자체의 드라마, 자체의 지위와 비중의 등급, 자체의 화젯거리가 있었으며 많은 상부상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목사는 별로 없었지만 약간의 사회적 신분이동도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렇지 않으면 적대적이기만 한 이 세상에서도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필경 그들이 지닌 소박함, 정결함 또는 경건함 때문에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521-2)
12장 공동체
"18세기 잉글랜드의 도시문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한층 더 (이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농촌적'이었던 반면, 농촌문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풍요로웠다. 〈사람들이 늘 한곳에 그대로 있으면 어리석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코벳은 주장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신흥 공업도시들은 농촌을 밀어냈다기보다 농촌 '위에서' 성장하였다. 19세기 초에 가장 일반적인 공업배치 상황을 보면, 흩어져 있는 공업 촌락들이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상업과 제조업 중심지가 그 원의 중심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촌락들이 교외지대가 되어가고 농토들이 벽돌로 뒤덮여감에 따라 19세기 후기의 대규모 도시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랜 전통의 해체를 가져올 만큼 난폭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부 랭커셔, 포터리즈, 웨스트 라이딩과 블랙 컨트리의 고유한 관습과 미신과 방언들은 단절되지도 않았고 딴 곳으로 옮겨지지도 않았다."(558)
"지방색을 띤 이러한 전통들은 예전의 생활방식이 사라지는 데 대한 의식적인 저항이었고 또 그것은 빈번하게 정치적 급진주의와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예전 생활방식의 사라짐에서 중요했던 것은 비단 눈에 보이는 공유지와 '놀이터'의 사라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즐겼던 여가의 상실이었으며 놀고 싶어하는 충동의 억압이었다. 번연이나 벡스터의 청교도적 가르침이 웨즐리에 의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옥의 불을 피하듯이 모든 경박한 짓을 피하라. 그리고 욕하고 거짓 맹세 하는 것을 피하듯이 어리석은 짓을 피하라. 여자에 손대지 말라.〉 카드놀이, 색깔 있는 옷, 장신구, 연극─이 모든 것이 감리교의 금기사항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속한' 노래와 춤을 반대하는 소책자들이 씌어졌으며 경건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문학과 예술은 아주 수상쩍게 생각되었다. 끔찍스러운 '빅토리아 시대의' 안식일이 빅토리아 여왕이 출생하기도 전에 강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561-2)
"19세기 초의 노동계급의 공동체는 온정주의나 감리교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고도로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맨체스터나 뉴카슬에서는 자체 규율과 공동체적 목적을 강조하는 노동조합과 공제조합의 전통이 멀리 18세기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공제조합들은 중간계급 회원을 거의 두지 않았다. 공제조합 회원은 사무원이나 소직종인 이상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대부분이 장인들이었다. 모든 동료가 조합기금의 출자자였기 때문에 회원수가 안정되어 있었고 또 주의 깊고 열성적인 자치 참여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공제조합의 비밀주의 안에서, 그리고 상층계급의 탐색적인 눈초리 아래서도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불투명성 안에서 독자적인 노동계급 문화와 제도의 성장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를 본다. 이같은 기층문화로부터 아직은 그리 튼튼하지 못한 노동조합들이 성장한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이 양성된 것이다."(571-6)
"1830년께면 대부분의 노동계급 구역에서 국교회의 부활뿐 아니라 감리교의 부활이 자유주의 사상가, 오웬주의자, 비종파 그리스도 교인들로부터 날카로운 반대를 받았다. 런던, 버밍엄, 남동부 랭커셔, 뉴카슬, 리즈 및 기타 도시들에서 칼라일이나 오웬의 이신론자들은 대단히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도들은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으나 점점 더 직종인들과 특권적인 노동자집단을 대변하는 경향을 띠었고 윤리적으로 노동계급의 공동생활에서 떨어져나갔다. 부흥운동의 일부 옛 중심지는 '이교(異敎)'로 빠져들었다. 한때는 〈술 마시기 못지않게 기도 드리기로, 욕하기 못지않게 찬송가 부르기로 눈길을 끌었던〉 뉴카슬의 쌘드게이트에서 감리교도들은 1840년대에 이르자 가난한 이들 사이에 있던 추종자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랭커셔의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 직공들과 마찬가지로 직조업 지역공동체들도 예배당에서 대거 이탈하여 오웬주의와 자유사상의 물결에 휩쓸렸다."(584)
"아일랜드 이민이 (노동시장에) 미친 영향은 양면적이며 또 흥미롭다. 역설적이게도 공업적 노동규율로 인해 어떤 틀에 박힌 것이 아닌 보충 노동력을 필요하게 만든 것은, 여러 압력들이 작용하여 잉글랜드 노동자의 성격구조를 바꾸어놓는 데 성공했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한마디로 숙련 또는 반숙련 고용에서는 (근면, 금주, 사려 깊음, 계약 준수 같은) 에너지 지출의 조절이 필요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산업사회 밑바닥에 있는 무거운 육체노동직은 순전한 육체적 에너지를 마구 써댈 것을 요구했고, 전(前)산업노동 리듬에 속하는 강도 높은 노동과 질탕한 휴식의 교대가 필요했는데 잉글랜드의 장인이나 직조공은 그의 약화된 육체적 힘과 청교도적 기질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해서 이같은 노동에는 적합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일랜드의 노동력이 산업혁명에 불가결했던 거은 오직 그것이 '값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일랜드 농민층이 백스터와 웨즐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