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노동계급의 형성 -하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창비 / 200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3부 노동계급의 등장


13장 급진적인 웨스트민스터


"1802년 나뽈레옹은 종신통령이 되었고 1804년에는 세습 황제로서 제위를 수락하였다. 페인의 진정한 추종자라면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좀더 온건한 개혁파 사람들이 과거 로베스삐에르에 대해 당혹했던 것처럼 확고한 자꼬뱅은 이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아무리 그들이 비판적 초연함을 유지하려 했을지라도 잉글랜드 개혁파의 사기는 프랑스의 운명과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 나뽈레옹의 제1제국은 잉글랜드 공화주의에 다시는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했다. 페인의 『인간의 권리』는 그것이 왕과 야만스런 제도, 세습적 신분차별을 공격할 때 가장 열정적이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나뽈레옹이 바띠깐과 화해하고 제위에 오르고 새로운 세습귀족을 등용한 것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혁명적 매력까지 앗아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이제 단지 상업적·제국적 경쟁자이자 스페인과 이딸리아 국민들에 대한 억압자의 모습으로 비쳤다."(28)


"1802년과 1806년 사이에 대중적인 애국적 감정의 부활은 분명히 있었다. '보니'(보나빠뜨르)가 만약 찬양되었다면 그것은 인민의 권리의 화신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전사'로서 찬양을 받은 것이었다. 영국은 애국적 싸구려 책과 전단, 인쇄물로 넘쳐났다. 노리치의 여인네들은 저항했고, 노섬벌런드 주민들은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수천의 랭커스터 직조공들은 지원병에 가담했다. 넬슨은 드레이크 이래 최대의 전쟁영웅으로 인기를 차지했다. 트러팰거 해전(1805)의 역전승은 수많은 발라드의 주제였고, 선술집과 마을 어디서나 화젯거리였다." "그렇다고 이때 역시 급진주의의 불꽃이 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사용된 용어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왕년의 자꼬뱅들은 정통주의자들이 나뽈레옹을 부르봉왕가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비난하던 만큼이나 열렬히 공화주의 명분을 배신했다고 나뽈레옹을 비난할 정도로 애국자가 되어 있었다."(30)


"급진주의는 광범위하게 퍼진 민중적 불만으로 지탱되는 방어적 운동, 명확한 항의운동으로 남았다. 그것은 아직 공세적인 힘은 아니었다." "버뎃과 코크린 같은 사람들은 권력과 부의 쟁탈전, 그들 자신의 계급의 위선 그리고 신흥 부유층의 허세를 경멸했다. 그들은 자신의 좌절에서 아마도 때때로 '낡은 부패세력' 전체 구조를 뒤엎을 어떤 혁명적 돌발사태를 꿈꾼 것 같다. 우리가 코벳의 분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단지 그를 화나게 만든 것들, 즉 일확천금의 납품업, 왕실 공작들의 지저분한 추문, 급상승하는 지대와 세금, 농촌노동자의 궁핍화, 언론출판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 '악덕퇴치 종교부흥 협회' 제보자들에 의한 민중오락의 파괴 등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수많은 이유로 불만은 고조되었다. 강제징집에 대한 적대감, 상이군인들의 불만, 창궐하는 군납회사들에 밀려난 장인들의 불만 그리고 트러팰거 해전 이후로는 겉보기에도 끝도 없고 목적도 없는 전쟁에 대해 점차 커가는 반대의 저류 등."(47-8)


14장 불의를 바로잡는 군단


"1803년 2월 사형집행인은 에드워드 마커스 데스파드의 머리를 런던 군중 앞에 쳐들었다. 그와 6명의 동료 희생자에게는 (왕의 시해음모와 관련된) 반역죄가 선고되었고, 그들 모두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데스파드 사건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투쟁을 런던 노동자들, 잉글랜드 북부의 전모공들 및 직조공들의 분노와 결합시킨 사건이었다. 그것은 1790년대의 옛 자꼬뱅주의의 마지막 불꽃으로서 데스파드와 더불어 치명적 패배를 겪은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정부의 소요 '예방' 정책과 민중의 자유를 제약하는 정책은 정당화되었다. 그것은 또한 자꼬뱅 강경파의 소그룹들간에 쿠데타 전략(혹은 환상)을 택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쿠데타 전략은 케이토우 스트리트 음모 사건(1820) 때까지 런던 내 소그룹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계속 남아 있었으며, 다른 한편 우편마차들의 운행중단으로 전면적 봉기의 확산을 위한 도화선을 심는다는 관념은 차티스트 운동 시대 때 되풀이될 것이었다."(51, 66)


"몇년 동안은 『모닝 포스트』지가 표현한 우려가 지나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1811년에 이르러서야 지하조직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때는 폭력적인 공업투쟁의 형태 즉 러다이트 운동으로 나타났다. 러다이트의 공격은 특정한 공업적 목표에 국한되었다. 즉 역직기의 파괴(랭커셔), 전단기(shearing-frame)의 파괴(요크셔), 미들랜드 편직기 편물공업에서의 관행 붕괴에 대한 저항이 그것이다." "피트에서 씨드머스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한결같은 정책을 추구해나갔다. 불평분자들을 한데 몰아넣어 고립시키기 위해 친보나빠르뜨적인 음모라든가 (1815년 이후에는) 폭력이나 폭동의 의도를 갖고 있다는 혐의를 덮어씌우는 식이었다. 하원의 비밀위원회는 잇따라(1801, 1812, 1817) 폭동의 조직망에 대한 무시무시한, 그러나 증거가 없는 주장들을 내놓았다. 어떤 의미에서 정부는 음모자들이 필요했는데, 그 이유는 전국에 걸친 민중조직을 사전에 예방할 억압적 법률의 지속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68)


"자꼬뱅주의는 중간계급 대다수의 지지와 전국적인 중심을 잃었던 바로 그 시기에 노동계급 공동체에 고유한 것이 되었다." "데스파드가 처형된 후에 제조업 지역공동체들의 페인주의자 그룹들은 전국적인 연계를 상실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던 지역으로 되돌아갔고, 그들의 영향력은 그 지방의 문제들과 경험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커다란 소요가 있을 때만 그들은 극히 조심스럽게 우선 지역적인, 그리고는 전국적인 연락을 가졌다. 그들의 생각은 자기 공동체의 특수성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불만의 초점들은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것이 되어갔다. 보울턴이나 리즈에서는 정치적 토론이나 청원 혹은 반란보다 빵가격을 둘러싼 스트라이크나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 더 쉬웠던 것이다. 자꼬뱅들이나 페인주의자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요구는 그 이전보다 훨씬 널리 퍼져나갔다. 당국의 탄압도 평등한 잉글랜드 공화국이라는 꿈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85-6)


"공장들은 착취의 중심지였다. 무엇보다 공장들은 근면한 장인을 '종속적인 상태'로 전락시켰다. 공동체로서는 생활방식이 위협받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기계에 대한 전모공들의 저항을 특정한 숙련노동자 집단이 자신들의 생계를 지키려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기계들은 '공장체제의 침범'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기계파괴를 사형의 중죄로 규정하려는 법안에 대해서는 심지어 그 법이 자기들의 이익을 옹호해줄 터였던 양말업자들까지도 반대했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이 기간의 러다이트 운동을 기계에 대한 맹목적인 반대로 그리는 통상적인 상은 점점 더 지탱하기 어려워진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새로운 기계에 의해서든 공장체제에 의해서든 혹은 무제한의 경쟁, 임금삭감, 경쟁자들보다 낮은 가격 매기기, 수공업기술의 기준 무너뜨리기 등 어떤 수단에 의해서든 직종의 관습들을 파괴할 수 있는 자본가들의 '자유'였다."(150-1)


"우리가 생산물 가격이 싸졌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공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신분 하락을 초래했던 2,30년 간의 과정을 어떤 중요한 뜻으로서 '진보적'이라 규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러다이트 운동을 '과도기적'인 투쟁의 순간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결코 부활될 수 없는 옛 관습과 온정주의적 입법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선례를 확립하기 위해 옛 권리들을 부활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합법적인 최저임금, 여성 내지 어린이들의 '고한노동'(sweating)에 대한 통제, 중재, 기계로 일자리를 잃은 숙련노동자들에게 마스터가 일자리를 제공해줄 의무, 싸구려 모조품의 금지, 공개적으로 동직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모든 요구들은 과거지향적인 만큼이나 미래지향적이었다. 즉, 공업성장이 윤리적인 우선순위에 따라 규제되어야 하고 이윤추구는 인간적인 요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54-5)


"따라서 우리는 1811~13년을 하나의 분수령, 그 물줄기 하나는 튜더시대로 거슬러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0년간의 공장법 제정을 향해 흘러가는 그런 분수령으로 보아야 한다. 러다이트 운동가들은 최후의 길드조합원들의 면모를 가짐과 동시에 10시간 운동에 이르는 운동을 시작한 최초의 사람들의 면모도 갖고 있었다. 이 두 방향 모두에는 자유방임의 정치경제와 도덕에 대항하는 대안적 정치경제와 도덕이 있었다. 산업혁명의 결정적인 수십년간 노동자들은 역사상 인간적으로 가장 비열한 도그마의 하나인 '무책임하고 무제한적인 경쟁'의 공격을 받아 죽어갔다. 10시간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1847) 〈최초로 ··· 대낮에 중간계급의 정치경제가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에 패배한〉 증거를 본 사람이 바로 맑스였다. 로포울즈 소재의 윌리엄 카트라이트의 공장을 습격했던 사람들은 혼란스런 한밤중의 대결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런 대안적인 정치경제를 천명하고 있었다."(155)


"1812년의 한 해 동안에 전통적인 계급간의 대립이 러다이트 운동의 도가니 속으로 투입되었으며, 공장주와 스콰이어가 상호간에 격렬히 적대하게 되었다. 러다이트 운동가들이 제조업자를 차례차례로 협박하는 데 성공하게 되자, 로버슨 일가에 대한 경멸이 커져갔다. 그러자 윌리엄 카트라이트가 로포울즈에서 러다이트 운동가들에게 굴하지 않음으로써 군대 장교들과 토리파 스콰이어층의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북부에서 그는 몇주 동안 웰링턴 공과 나란히 거론되는 영웅이었다. 로포울즈에서의 총격적은 대공장주들과 당국 간의 깊은 정서적 화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중간계급 신화에서 카트라이트와 로버슨은 당대의 영웅일 뿐 아니라, '못된 짓을 꾸미는 자들', 먼데에서 와서 소요를 부추기는 알 수 없는 첩자 내지 선동자들에 대한 냉혹한 추적자였다." "그러나 민중의 전승에서는, 카트라이트와 로버슨은 단지 '블러드하운드'(bloodhound, 경찰견)일 뿐이었다."(168-70)


# 스콰이어squire : 원래 봉건시대에는 기사의 종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차 시골의 중·대지주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메이틀런드 장군은 러다이트 운동에는 〈현실적 토대가 없었다〉고 선언했다. 메이틀런드보다 속내를 잘 모르는 관찰자들은 '사악하고 교활한 사람들'로 구성된 어떤 숨어 있는 핵심집단, 다시 말해 전체를 몰래 꼬드기는 어떤 귀족이나 중간계급 지도자들이 없는 '혁명운동'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음모자들을 찾을 수 없었을 때 의견은 정반대의 극단으로 전환했다. 지도자들이 없었더라면 혁명운동은 전혀 일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전모공들, 양말제조공들, 직조공들이 자기 자신들의 힘으로 당국을 전복시키려 시도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부추김을 증명할 증거도, 음모를 증명할 증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코벳은 1812년 하원 비밀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리고 이는 내각을 아주 곤혹스럽게 할 상황이다. 그들은 결코 '선동가들'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민중들 스스로의' 운동이다.〉"(216-7)


15장 민중선동가와 순교자들


"1812년과 1813년, 그리고 1815년에 있었던 카트라이트 소령의 복음전도 여행은 대단히 중요하다. 15년 동안 전국적으로 의회개혁가들의 수중에는 버뎃이나 웨스트민스터 위원회, 또는 코벳의 『평론』지가 제공하는 것 외에는 전국적인 지도력이나 전략이 없었다. 카트라이트나 코벳은 러다이트 운동의 폭동적 국면을 혐오스럽고 무익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 모두 소요가 커지고 있는 북부와 미들랜즈를 새로워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노동계급'의 급진주의 운동을 이루어내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의도는 아니었다. 실로 그는 〈빈자들을 선동해 부자들의 재산을 침해하도록 하는 온갖 시도〉에 반대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했다. 개혁에 대한 압력은 '대체로 중간계급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이라고 카트라이트 소령은 생각하였다. 그는 폭동으로 나타나는 불만이 입헌적 형태로 전환되기를 원했으며, 끊임없이 의회에 청원하는 일을 전국적인 운동의 기반으로 삼기를 원하였다."(229)


"런던에서는 급진주의가 분열되자, 웨스트민스터 위원회가 장인과 중간계급 개혁가들 간의 동맹 쪽으로 진로를 택했다. 웨스트민스터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프랜시스 플레이스와 그의 동료 장인들 그리고 소마스터들(그들 중에는 알렉산더 갤러웨이처럼 대고용주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은 자꼬뱅적 신념, 즉 성인남자 투표권과 제한 없는 민중의 운동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 그들은 런던의 하층민을 경멸하였고 그들의 폭동적 요소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의 대중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술집세계와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 "플레이스 자신은 벤담과 제임즈 밀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귀족 정부의 비효율성과 불합리성을 경멸하고, 곡물법이나 여타 억압적 입법에 분개하는 점에서는 급진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던 반면, 민중의 정치 운동과 조직이라는 대범한 전략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몹시 적대적이었다."(234-5)


"민중적 급진주의와 차티스트 운동은 반세기 동안 셀월과 게일 조운즈 그리고 1790년대의 자꼬뱅 '호민관'들을 괴롭혔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도덕주의'파('moral' force) 개혁가와 '실력행사'파('physical' force) 개혁가들 간의 갈등은 때로는 너무도 원론적으로 표출되는 바람에 한편으로 왓슨 박사와 시슬우드 같은 단호한 음모가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플레이스와 뱀퍼드 같은 순수한 입헌주의자들 사이에 뚜렷한 선을 그을 수 있을 정도다. 사실상 급진주의와 차티스트 운동은 모두 이 양극단 사이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1839년 이전의 개혁가들 중 진지하게 반란을 준비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폭정에 직면해 반란에 호소할 수 있는 인민의 최후의 권리를 전적으로 거부하려 한 사람들은 더더욱 없었다. '할 수 있다면 평화롭게, 불가피할 때는 실력으로'라는 차티스트의 슬로건은 1816~20년과 1830~32년의 급진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보여준다."(249-50)


"'운명의 날'이니 '심판의 날'이니 하는 말들은 군중에게서 매우 커다란 환호를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스타일에 따르는 폐단들을 아울러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그것은 또한 실질적인 허구가 더 많은 선술집 대중선동가의 급진주의를 배양했으며, 심지어는 〈연설을 업으로 삼은〉 그리고 〈거칠기 짝이 없고, 도를 넘은 그러한 허풍을 떠는 것으로써〉 서로 군중의 갈채를 얻으려 경쟁하는 직업적인 떠돌이 연설가들을 키웠다. 전국적인 지도자들─펜을 가진 코벳과 울러, 목소리를 가진 헌트─은 반역죄에 걸려들지 않게끔 말하는 데 능숙하였다." "결국 대중선동가는 나쁜 지도자이거나 무능한 지도자였다. 헌트는 원칙들도, 잘 짜여진 급진주의적 전략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단지 운동의 정서만을 목소리에 담았다.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환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만을 얘기하려고 애쓴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군중의 가장 불안정한 층의 포로였다."(252, 258)


"실질적인 면에서, 호주투표권과 성인남자 투표권 사이의 경계선은 여러 해 동안 중간계급 개혁운동과 노동계급 개혁운동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그리고 코벳이 후자에 가담한 것은 대단한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 "코벳이 공식적으로 지지한, 급진주의 운동의 대안적 진로는 연로한 카트라이트 소령이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트라이트의 사상은 여러가지 면에서 여전히 위빌, 그리고 소젠틀먼 개혁가들로 구성된 주 협회들의 시대에 속해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낡은 활동방식, 즉 청원과 주 회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의회의 비밀위원회가 등장했다가는 사라지고, 인신보호법의 정지가 되풀이될지 모르지만 카트라이트 소령은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당국이 자신을 투옥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연설문을 출간하고, 옛날의 헌정상의 전례와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모범적인 앵글로-쌕슨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법에 조금이라도 저촉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9267)


"올리버는 급진주의자 유다의 원형이었으며, 그의 전설적인 역할은 19세기 역사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정보원들을 고용하는 일은 러다이트 운동 시대에 비교적 큰 공업중심지들의 치안관들에게는 사실상 하나의 관행이 되어 있었으며, 1790년대 이후로는 정부 재원 일부가 그러한 비밀업무의 목적을 위해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여론에 의하면 그러한 일은 잉글랜드의 법정신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형사사건에서조차도 '사전 예방적인' 경찰 행동의 개념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국내의' 정치적 신념의 문제로 확대되었을 때 그것은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사고방식 전체에 대한 모독이었다. 『리즈 머큐리』가 프락치로서의 올리버의 역할을 폭로하자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여론을 경악케 하였다. 1871년의 잉글랜드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상점주와 농촌 스콰이어, 반국교파 목사 및 전문직업인들이 있었던 것이다."(299-300)


"올리버 사건의 장기적인 영향은 혁명적인 개혁운동파에 반대하는 입헌주의적 개혁운동파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올리버의 '개입 없이' 일어난 봉기는 중간계급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정부 편으로 만들었으며, 올리버의 '개입으로' 일어난 봉기는 휘그파와 중간계급 개혁가들로 하여금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게끔 하였다. 3년 동안 주요 정치적 대결은 시민의 자유에 대한 옹호와 언론의 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중간계급 자체가 아주 민감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온건한 개혁가들과 휘그당은 지체없이 올리버가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였다. 실제로 『리즈 머큐리』는 노동계급이 위험에 노출되었던 사실들로부터 교훈을 끌어냈는데, 그것은 요컨대 노동계급이 휘그당과 중간계급 개혁가들의 지도와 보호 아래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직 피털루(1819년 8월)의 충격만이 운동의 일부를 혁명적 행로로 되돌아가게 했다."(310)


"피털루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모든 신념과 사고방식─자유언론의 권리, '페어 플레이'에 대한 희망, 무방비상태의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금기─을 짓밟았다. 한동안 과격파 급진주의자들과 온건파들은 그들의 불화를 묻어두고, 많은 휘그당원들까지도 기꺼이 항의운동에 동참하였다." "이후 몇달 동안 정치적 적대감이 심화되었다. 아무도 중립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바로 맨체스터에서는 '왕당파들'이 극도의 고립상태하에 놓이게 되었고, 감리교도들만이 (역겨운 선언을 하면서) 왕당파 편에 선, 추종하는 대중을 거느린 유일한 단체였다. 그러나 피털루에 충격을 받은 젠트리와 전문직업인들이 많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동시에 '그 이상의' 거대한 민중의 시위를 조장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피털루 사건 이후의 실질적인 운동은 '복수'의 외침에서 입헌주의적 형태의 항의로 되돌아갔으며, 대체로 노동계급이 주도하고 노동계급적 성격을 띤 운동이 되었다."(336)


16장 계급의식


"1820년대는 개인 및 집단이 산업혁명의 경험과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버린 민중적 급진주의의 경험을 이론화하고자 한 시대였다. 그리하여 낡은 부패세력과 개혁세력 간에 결정적인 싸움이 벌어졌던 1820년대 말이 되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곤경에 대한 노동대중의 의식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경험과 어렵게 얻은 산만한 교육의 도움을 받아 사회조직의 어떤 상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느슨하게 정의된 '근로계급들'과 개혁되지 않은 하원 간의 전반적 투쟁의 역사의 일부로 보는 법을 배웠다. 1830년 이후로는 통상적인 맑스주의적 의미에서 좀더 뚜렷하게 규정되는 계급의식이 성숙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계급의식에 의해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오래된 싸움과 새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365-6)


"문맹이라고 해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메이휴시대의 잉글랜드에서는 발라드 가수와 '재담꾼들'이 길바닥 위나 길모퉁이에서 벌이는 익살극과 풍자적 개작시 낭독이 여전히 성업중이었는데, 그들은 그같은 풍자적 독백이나 노래를 관중의 분위기에 맞추고, 그리고 시장의 상황에 맞게 급진주의적이거나 반(反)교황적으로 각색하였다. 문맹 노동자는 설교를 들어보려고 수마일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이 급진주의 연설가의 말을 듣기 위해서도 그렇게 걸어갈 수 있었다. 정치적 열기가 끓어오른 시기에는 문맹자들은 동료들에게 정기간행물의 기사를 큰소리로 읽어달라 하곤 했다. 한편 회간에서도 뉴스가 읽혔으며 정치적 회합에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연설문들을 읽고 장황한 일련의 결의문들을 통과시켰다. 열성적인 급진주의자들은 좋아하는 책들을, 자신들의 힘으로는 읽지도 못하면서, 마치 부적처럼 갖고 있으려 했다."(367)


"전후 급진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이러한 지적 수준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정치적 자각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일찍이 1816년 1월에 반즐리에서는 직조공들이 급진주의적 신문이나 정기간행물들을 사기 위한 '월 1페니 클럽'(a penny-a month club)을 조직하였다. 햄프든 클럽과 정치동맹들은 '독서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비교적 큰 중심 도시들에서는 포터리즈의 핸리에 있는 것 같은 상설 신문열람실이나 독서실을 개설하였다. 이곳에서는 욕설을 하거나 상스러운 말을 쓰거나 술에 취하면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 런던의 신문들이 '공개적으로 읽혔다'." "1819년 이후의 억압조처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급진파 서적판매인의 서점에 부설되어 있는) 그러한 신문열람실을 설치하는 전통은 1820년대 전 시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런던에서는 전후에 커피하우스 붐이 일었는데, 그것들 중 대다수가 이런 이중기능을 수행하였다."(374-5)


"1792년과 1836년 사이의 투쟁에서 장인들과 노동자들은 자유로운 언론과 사상에 대한 요구에다, 가능한 한 가장 값싼 형태로 이러한 사상의 산물들을 자유롭게 보급하려는 그들 자신의 요구를 덧붙였다." "이 당시에 계몽사상가와 개량주의자들은 이성과 지식의 보급에 대한 유일한 제약은 오직 방법의 부적합에서 오는 제약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 관해서 생각되는 유추들은 흔히 기계적인 것이었다. 아동 반장을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학습효과를 증폭시키려고 한 랭커스터와 벨의 교육방법은 (벨에 의하면) '도덕세계의 증기기관'이라고 불렸다. 피콕이 브룸의 '실용지식 보급협회'를 '증기지식협회'라고 부른 것은 아주 정확한 비유였다. 리처트 칼라일은 〈팸플릿 구독은 인류에게 필요한 커다란 도덕적·정치적 변화를 반드시 일으킬 것이라〉고 철석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오웬은 메시아적 혹은 기계론적 낙관주의에 입각해 선전활동에 의한 '새로운 도덕세계'의 설립을 궁리하였다."(395)


"잉글랜드에서는 적어도 1820년대 후반에 이르면 페인-칼라일의 전통─세습적인 원칙과 미개한 미신 및 유습(遺習)에 대한 타협을 모르는 적의, 개개 시민의 권리에 대한 단호한 신념─은 어딘지 귀에 거슬리고 현실적이지 못한 감이 들게 되어 있었다. '귀족을 타도하라'는 외침은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른 잉글랜드에서의 실질적인 권력구조를 감안할 때, 그리고 귀족적 특권과 상업적·공업적 부 사이의 복잡한 상호침투를 감안할 때 호소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성직자'를 고용된 특권의 옹호자로, 또한 민중을 노예로 붙잡아두기 위해 마련된 무지의 사절(使節)로 묘사하는 합리주의적 풍자는 어딘지 핵심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한 풍자문들은 여우사냥을 즐기는 시골의 교구목사나 성직자 치안관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이미 브리튼적이며 전국적인 학교들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복음운동가와 비국교파 성직자들의 귀에는 그저 스쳐지나가버릴 뿐이었다."(437)


"이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때로 칼라일은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현실을 조작하려고 하였다. 그는 새로운 도발적 언사로 자신의 박해자들을 자극하였다." "그는 스승의 견해들을 하나의 교리로 만들었다. 그는 페인의 생각들 가운데 일부(개인의 권리에 대한 이론)을 취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했다. 그리고 그가 채택한 부분을 그는 그 극단, 즉 '최극단적인' 개인주의로까지 밀고 나갔다. 개개의 시민들은 권위에 복종할 필요가 없으며 마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라일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으며, 그리고 그는 그 결과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시민은 오직 그 자신의 이성을 따를 의무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의논할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그가 속한 당파(party)와 의논하거나 그들의 판단에 따를 필요조차도 없었다. 이성의 힘만이 그가 인정한 유일한 조직자였고, 신문만이 유일한 보급매체였다."(437-8)


"언론 및 출판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결과는 코벳의 민주주의적 어조가 그랬던 것만큼이나 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 이론의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자세는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로크적 이데올로기의 강점은 부르주아가 대재산가'였다'는 사실에 있었으며, 국가의 통제나 간섭을 끝내라는 요구는 (그들에게는) 해방의 요구였다. 그러나 모자제조인은 별로 재산이 없었으며 그 밑의 장인들은 더욱이나 그러하였다. 국가의 규제를 없애라는 요구는 그들보다 강대한 경쟁자에게 (혹은 '시장의 힘'에) 더 폭넓은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코벳 못지않게 칼라일도 한직보유자, 벼슬아치, 세금토탈자들에 관한 악마론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마스터들을 괴롭히는 커다란 폐단은 과세라고 생각되었음에 틀림없다. 정부는 가능한 한 작아야 하고 그리고 작은 정부란 값싼 정부어야 했다. 이것은 무정부주의에 가까웠다."(440-1)


"많은 젠트리들이 실업과 비참의 정도에 경악했지만, 그들은 또한 실업자들의 폭동적 기질을 우려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농업이 전시의 번영을 상실한 시기에 구빈세는 오히려 600만 파운드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빈자는 보기 흉하며, 죄의 원천이며, 나라의 무거운 짐이며, 위험물이었다. 정치평론의 칼럼들마다 빈민법 수정에 대한 논의로 가득 찼는데, 그것들은 모두 더욱 대폭적인 경비절감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뉴 래너크에 있는 그의 광대한 사유지가 상류사회의 관광일정에 유행처럼 추가되었던) 오웬씨는 더이상 훌륭할 수는 없어 보이는 하나의 계획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빈자들을 '협동촌'(Village of Cooperation)에 넣기를 제안하였는데, 이 협동촌에서는─세금에서 최초의 자금이 주어진 후에는─그들 '자신의 힘으로 꾸려나갈' 것이며, 또한 '쓸모있고' '근면하며' '합리적이고' 자율적이며 절제하게 될 것이었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들어했다."(462-3)


"이 계획에서는 맬서스의 냄새가 났고, 또한 채드윅류의 경제적인 구빈원 구제계획을 세우고 있던 (기이하게도 '노팅엄 개혁가들'이라고 불린) 치안관들의 냉혹한 실험의 냄새가 났다. 설령 오웬 자신은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기꺼이 인정하였듯이) 매우 진지했고 또 민중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크게 마음 아파했을지라도, 그의 계획은 만일 정부가 그것을 채택하였다면 분명 그런 식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코벳에게 협동촌들은 그가 혐오한 후원과 자선으로 이루어진 '위안제도'의 냄새를 풍겼을 뿐 아니라, 이것이 1817년 당국에 의해 채택'되었더라면' 오웬의 구상은 필시 구빈원제도 내에서의 '생산적 고용'의 확대를 가져왔을 것이라는─그의 직관은 아마도 옳았던 것 같다. … 한편, 급진주의자들의 취약점은 어떠한 건설적인 사회이론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었는데, 그 대신 그들은 모든 폐단은 과세와 한직에 기인하며, 이 모든 것은 선거법 개정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었다."(463-4)


"〈··· 노동계급은 그들이 '과감하게' 노력하기만 한다면 '다른' 계급의 도움을 전혀 구할 필요가 없으며, 자체적으로 ··· 풍부한 자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오웬의 논조가 아니다. 그러나 확실이 이것은 우리가 장인들의 '정치적' 급진주의를 추적하면서 거듭 마주쳤던 논조이다. 개인주의는 그들이 지닌 세계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은 또한 상호협동의 오랜 전통─공제조합, 동직클럽, 예배당, 독서클럽 혹은 사교클럽, 교신협회 혹은 정치동맹─을 계승하고 있었다. 오웬은 이윤동기는 잘못이며 불필요하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은 관습과 공정가격에 익숙한 수공업기술자들의 감각에 잘 들어맞았다. 오웬은 또한 코벳, 칼라일, 호지스킨이 주장한 자본가의 기능은 대체로 기생적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였다. 〈적절하게 수행된 육체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다〉라는 견해는 장인이나 수공업기술자 소마스터들이 납품업자나 중간업자에 대해 품고 있는 불만과 잘 맞아떨어졌다."(473)


"1830년대의 많은 잉글랜드인들은 산업자본주의의 구조물이 부분적으로만 구축되었을 뿐, 아직 지붕이 얹히지 않은 상태라고 느꼈던 것 같다. 오웬주의는 민중이 단결하고 굳게 결심만 한다면 수년 혹은 수개월 이내에 구축할 수 있는 전혀 색다른 구조물에 대한 상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열정을 사로잡은 거대하지만 덧없는 자극의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의 눈으로는 이러한 정신을 순진한 것 혹은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학문적 우월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빈자들은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그래서 지적인 교양에 그리스와 로마의 체육을 곁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먹고 살 수도 있는 그런 공동체에 대한 전망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오웬주의와 천년왕국적인 충동을 결집한 이전의 교리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오웬주의자들에게 천년왕국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었다."(490-1)


"오웬이 정치적 급진주의에 전적으로 무관심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빈번하게 환상적인 길로 운동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두 문제─소유권과 계급 권력에 대한─중 어느 것도 정면으로 직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협동조합 운동은 박애주의자들과 노동계급 급진주의자들의 이같은 공존상태 안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1832년에 이르면 헤더링턴, 오브라이언, 제임즈 왓슨 같은 사람들은 강조점을 아주 달리했고, 오웬이 모든 정치적 수단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오웬주의는 그들에게는 언제나 커다란 건설적인 영향력이었다. 그들은 오웬주의를 통해서 자본주의를 개별적 사건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체제'(system)로 보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예전의 세계에 대한 코벳의 향수를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계획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의 그 어느 것도 주어진 것이며 불가피한 '자연'법칙의 산물로 보이지 않았다."(495)


"노동대중의 새로운 계급의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직업과 지식수준이 매우 다양한 노동자들간에 이해관계의 일치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많은 제도적 형태로 구체화되었고 1830~34년의 전국조합운동에서 전례없는 규모로 표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계급들의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것으로서의 노동계급들 혹은 '생산계급들'의 이해관계의 일치에 대한 의식이 존재했으며, 그리고 이 의식 안에서 하나의 대안적 '체제'에 대한 요구가 성숙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의식을 최종적으로 규정지은 것은, 대체로 노동계급 세력에 대한 중간계급의 반응의 결과였다. 점증하는 중간계급 개혁운동의 꽁무니를 노동계급이 뒤따르다가, 나중에 가서야 독자적인 노동계급의 운동이 뒤를 잇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우리의 예상에 반해, 실제로는 이 과정이 그 반대였다는 것이 잉글랜드 발전과정의 독특한 특징이다."(496)


"프랑스혁명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현상이 동시적인 진행을 하나의 본보기로 선보인 바 있는데 그것은 토지귀족과 상업귀족 측의 공포에 사로잡힌 반혁명적 반응, 산업부르주아지측의 후퇴와 (좋게 말해서) 현상태와의 타협, 그리고 전쟁을 치르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인했던 자꼬뱅 핵심부가 주로 소마스터·장인·양말제조공 그리고 전모공과 그밖의 다른 노동자들로 구성될 정도로까지 민중의 개혁운동이 급속하게 급진화한 것이었다. 1795년 이후 25년간은 긴 반혁명의 시기로 볼 수 있으며, 그 결과 급진주의 운동은 대체로 노동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진보적인 민주적 인민주의를 그 이론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승리는 공장주, 철물업 마스터, 제조업자 들의 환영을 여간해서는 받지 못하였다. 산업부르주아지들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하여 특히 억압적이고 반평등주의적인 잉글랜드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496-8)


"1831년 가을과 '5월의 날들'에 영국은 급속하게 과격화하여 빠리 꼬뮌 같은 혁명을 겪을 뻔하였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빵의 반쪽이라도 받기를 촉구한) 코벳이 대변자였던 일부 급진주의 전통의 뿌리깊은 입헌주의에 기인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노동계급의 위협에 맞서 국가와 재산권 모두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킬 수 있는 타협점을 정확히 제공한 중간계급 급진주의자들의 수완에 기인했다." "플레이스는 〈민중 대다수는 선거법 개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거부될 경우에는 ··· 그들 스스로의 실력행사로 개정안이 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1832년에 토리당과 휘그당 양쪽 모두를 압박한 것은 이러한' 훨씬 더 많은 것'의 위협이었으며 그것이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사회에서 변치 않는 구조가 되어온바, 토지로 된 부와 산업적 부, 특권과 돈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509-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