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학의 역사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7
윌리엄 H. 브록 지음, 김병민 옮김 / 교유서가 / 2023년 3월
평점 :
1 물질의 본성에 관하여
"서양에서 초기의 광산업과 야금 활동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났으며, 여기에서 만들어진 금속은 이집트에서 사용되기 위해 거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일반적인 금속들을 효과적으로 제련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 도자기 제작에 처음 적용된 기술의 결과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 증거는 바로 가마였다. 사실, 고대 기술의 공통점을 꼽자면 가마를 들 수 있는데, 가마는 오븐의 역할로 고기를 요리하고 빵을 굽는 두 가지 기능을 모두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 모양으로 성형한 점토를 굳히는 데에도 쓰일 수 있었다. 가마는 유리를 만들거나 광석에서 금속을 추출하기 위해 열의 흐름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개선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더 나은 개선 과정을 거치며 가마는 승화 및 증류기로 개조되었다." "가마(와 가마를 응용한 기구)는 야금술의 발달과 알코올 및 무기산 물질의 발견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화학적 실험 장치와 기구 중 가장 오래된 도구로 여겨질 수 있다."(20-1)
"향수와 유리, 화장품과 도자기를 만들고 청동 제품을 만들거나 금이나 금과 유사한 물건을 제작하는 경험적 기술을 지닌 장인들에게 이론은 그리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 사상가들은 (지금의 우리가 화학적 변화라고 말하는) 이러한 형태의 변화가 어떤 이유와 방법으로 가능한지 알기를 갈망했다. 왜 금속이나 유리는 색깔 있는 광물과 함께 녹았을 때 모습이 바뀌었을까? 갈레나(불순한 산화 납)를 가열할 때 은 구슬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처럼 장인들에 의해 명백히 사실적이고 완성도가 높았던 변형의 사례들을 지켜보면서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들이 물이 증발해 공기로 변화하거나 도토리가 참나무로 성장하는 현상과 유사한 진정한 변형으로 여겼다. 즉, 외형만이 아닌 사물의 본질적인 변화로 본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물질이 무엇인지 자문했다. '어떻게 그리고 왜 사물의 외형과 성질에 변화가 일어날까?'다. 대표적인 예로 탈레스는 질료 혹은 근원적 재료가 물이라고 제안했다."(26-7)
"고대 화학자(연금술사)는 분명 기구와 조작 기법의 대부분을 장인과 기술자, 금속 기술자, 약사 들이 개발하고 사용했던 열처리, 조리, 승화 및 증류 기술과 설비에서 가져왔고, 이 기술들은 후대의 화학자들에게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한편 연금술은 예술 분야에나 사용할 법한 기호화된 언어의 개념을 후대 화학에 제공했다. 하지만 기호화하며 동일한 대상에 여러 종류의 유사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충분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상징적 암시의 정도를 크게 증가시켰다. 이는 결국 후대의 독자들과 해독가들에게 심한 혼란을 야기했다. 가령 그리스시대의 한 연금술 어휘 사전을 보면, 수은은 '용의 씨앗'이나 '이슬', '검은 소의 젖', 혹은 '스키타니의 물', '은의 물', 달의 물', 강물', '신성한 물'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모호한 언어는 현대 실험실에서 연금술적 비법을 재현하며 물리화학적 변화를 정확하게 서술함으로써 하나씩 풀렸다."(33-5)
"'연금술' 용어가 비금속(卑金屬, base metal)의 변형이라는 효과 없는 일로 여겨지고 '화학'이라는 용어가 물질의 분석과 합성에 국한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1753년 완성된 프랑스 백과사전은 화학을 '사물을 구성하는 원리의 분리와 결합을 다루는' 과학으로 정의하고, 연금술을 '금속을 변화시키는 기술'로 정의했다. 이렇게 동의어였던 연금술과 화학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 용어가 되었다." "연금술, 좀더 일반적으로 표현한 고화학은 물질의 화학적 운용과 취급법, 기술, 그리고 화학 실험 기구들이라는 풍부하고 다양한 유산을 근대 화학에 남겼다." "연금술이 제 기능을 발휘한 부분은 예술 분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약 활동에 대한 공헌이었다. 이들 영역에서만큼은 비금속들을 금으로 바꾸려는 시도에서 두드러지게 결여되었던 상업적 이득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이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연금술사들의 원시적인 개념 역시 유용한 이론적 실마리였음이 입증되었다."(42, 46)
2 물질의 분석
"화학에서 근본적인 고민은 물질의 변화이다.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종류의 단일 물질이 합쳐져서 반응물과 다른 특성을 가진 별개의 균질한 물질을 만들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반응물들의 형체가 '잠재적으로' 생성물에 존재한다고 가르침으로써 균질성의 논쟁거리를 해결했다. 이 문제는 단지 화학적 숙제만은 아니었다. 이 고민은 빵과 물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체화하는 성변화(聖變化)라는 가톨릭 교리가 가진 사안이었기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도 씨름했던 과제 중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어떠한 부정도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1473년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의 재발견과 출판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을 다시 유행시켰다. 원론적으로, 원자론은 이 균질성 문제에 더욱 만족스러운 설명을 가능케 했다. 원자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존재하며 원자가 취하는 다양한 구조 때문에 서로 다른 물질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50-1)
"16세기에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 중 하나는 테오파라투스 폰 호엔하임, 곧 파라켈수스였다."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을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어 보이는 물질로부터 실체를 꺼냄으로써 유용한 물질로 분리하는 방법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시 의약품은 약품이 지닌 고유한 '서명'으로 식별될 수 있었는데, 이런 서명은 구체적인 해부학적 인체 기관과 공통점이 있다고 여겨지거나 형태가 닮은 식물의 모양과 색깔로 만든 기호가 사용되었다. 가령, 노란색 꽃은 병든 간의 치료에 적합했음을 나타냈다. 종종 기존 약초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파라켈수스의 의견은 이런 약초꾼들의 주장과는 달랐다. 그는 약으로 꽃이나 약초 자체를 사용하는 대신 알코올 증류처럼 화학적인 방식으로 꽃으로부터 생성한 추출물을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치료화학 또는 의화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학문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화학은 이를 기점으로 두 세기 동안 의학적인 맥락에서 발전하게 된다."(54, 57-9)
"비텐베르크 의대 교수였던 다니엘 제너트(1572~1637)는 아리스토텔레스, 갈레노스, 파라켈수스의 우주론을 미립자 전통과 조화시키는 중도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이 개념은 오랫동안 수많은 중세 고화학자들의 저술이 바탕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과거의 자연미자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제너트는 물질의 다른 성질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파라켈수스가 주장하는 원소들이나 원리들이 아니라 이런 개별 입자의 잠재적 본질과 같은 소(素)들의 결합에 기인한다고 가르쳤다." "제너트는 이런 분리와 재구성 반응을 디아크리시스(diacrisis)와 신크리시스(syncrisis)라 불렀다. 우리는 이 말에서 분석(analysis)과 합성(synthesis)이라는 용어의 원래 개념을 엿볼 수 있다. 미니마(minima,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들)란 반드시 불가분의 원자는 아니지만, 밝혀진 어떤 화학 작용에 의해서도 더이상 분해할 수 없는, 식별 가능한 물질의 가장 작은 크기인 소체(小體)를 의미했다."(65-7)
"화학적 친화성에 대한 연구는 18세기 화학에서 아주 흥미로운 난제 중 하나가 되었다. 화학물질 사이의 연관성(rapports)에 대해 저술한 에티엔 제프로아는 1718년에 첫번째 친화력표를 만들었고, 이 표는 1750년대 이후로 점점 더 정교해지며 발전했다. 꽤 뒤늦게 등장하는 주기율표와 마찬가지로 친화력표는 화학물질의 치환반응에 관한 화학자들이 지식 전체를 효율적으로 요약했다. 이 표는 자연 세계를 그 구성 요소를 가지고 전체를 분석하는 화학자의 힘을 보여줬고 약을 제조하거나 화학 제조 공정을 개선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이 정보가 실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반면에 친화력표는 반응성이나 상대적인 비활성의 원인에 관한 이론적 통찰까지는 제공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요리책처럼, 누구나 광물의 성분을 결정할 수 있게 한 체계적인 분석표의 출현은 무기물에 관한 화학(결국은 여기에 무기화학이라는 칭호가 붙게 된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80-2)
3 기체와 원자
"화학 혁명은 단지 개념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데, 정확한 저울과 유리 기구, 그리고 유디오미터(공기 순도 측정기) 등을 사용해 기체를 만들거나 중량을 재고 가늠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포괄했다. 원소들과 물질 구성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고 화학자들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을 재정비한 화학자는 프랑스 공무원 앙투안 라부아지에였다." "1772년, 라부아지에는 공기 중에서 금속이 연소되었을 때 금속의 무게가 감소하는 대신 오히려 증가한 경우가 있었기에 무엇(플로지스톤)인가 손실된다고 제안한 플로지스톤 이론이 미심쩍다고 지적했다. 이 현상은 처음 관찰된 것이 아니었으나 이러한 예외적 현상은 프랑스 디종의 한 변호사의 연구로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의견은 연소 과정 동안 기체가 금속에 '고정'되고 금속에 갇힌 공기로 인해 무게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추론에 이어 금속의 재(금속산화물)가 분해될 때 '고정된 공기'가 방출된다고 주장했다."(91-3)
"그보다 10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조지프 블랙(1728-99)은 우리가 탄산염(예를 들어 탄산마그네슘)이라고 부르는 물질이 일반 대기와는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고정 공기(fixed air, 이산화탄소의 오래된 명칭)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수년 후, 헨리 캐번디시는 철을 희석한 황산 용액에 반응해 만든 가벼운 인화성 공기(수소)의 특성을 연구했다. 이러한 실험들은 유일신론자인 성직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이룬 눈부신 화학 산업의 촉진제가 되었다. 프리스틀리는 1770년과 1800년 사이에 20여 개의 새로운 기체를 만들고 구별했는데, 여기에는 황 및 질소 산화물, 일산화탄소, 염화수소, 산소 등이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비록 1772년 당시에는 라부아지에가 이런 기체의 발견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기는 하나, 대기 중 공기는 복잡한 혼합물이며 공기만으로 연소가 발생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증거가 이미 상당 부분 존재하고 있었다."(93-4)
"라부아지에는 여전히 신중했고 플로지스톤 이론을 바로 단념하지 않았다. 그가 신중했던 것은 무엇보다 금속이 산에 용해되면 가연성 공기(수소)가 방출되는 반면에 칼크스(금속산화물)를 동일한 산으로 처리하면 어떤 기체도 생성되지 않는 이유를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은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문제는 수분(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이었다." "우리에게는 물이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해서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었는지 실감하기 어렵다. 어떻게 두 종류의 기체가 액체로 변환될 수 있다는 말인가?" "라플라스의 수학적 도움을 다시 한번 받은 그는 밀폐된 용기에 인화성 공기와 산소를 함께 태우면 물이 합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가연성 공기의 이름을 '물을 형성하는 물질'을 뜻하는 수소(hydrogen)로 바꾸었다." "라부아지에는 이제 어휘 사전에서 '플로지스톤'이라는 용어를 제거함으로써 화학의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지위에 섰다."(98-100)
"1804년 무렵 존 돌턴은 원자 크기를 결정하기 위한 장기간의 연구를 통해, 자신이 상대적 원자량을 계산하면서 화학의 새로운 정량적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턴이 관찰했던 것처럼 일정 비율과 당량(등가) 무게는 물질이 연속적인 것이 아니며 물질의 궁극적 입자들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결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돌턴은 이 사실을 알고 실험실에서 수행한 관찰과 측정 결과를 토대로 궁극적인 화학적 입자의 상대적 질량을 계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가령 물의 경우, 1815년 이전 과산화수소가 알려지지 않았을 시기에 라부아지에가 분석한 물은 산소 중량 비율 87.4가 12.6 비율의 수소와 결합했음을 보여줬다." "수소가 가장 가벼운 물질이었기 때문에, 돌턴은 수소를 원자량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만약 수소의 원자량을 하나의 기본 단위로 보면, 산소의 상대 원자량은 대략 7이 된다. 물의 분석 연구는 개선되었고 바로 산소의 원자량을 8로 올렸다."(106-9)
4 유형과 육각형
"1830년에 베르셀리우스는 동일한 원소들이 동일한 비율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알려지지 않은 서로 다른 물리적 배열로 구성된 유기 화합물이 존재하고, 이들의 화학 및 물리적 특성이 매우 다른 이 놀라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성질 현상(isomer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뵐러는 1828년에 시안산은과 염화암모늄을 반응해 만든 생성물이 (그가 기대했던 시안산암모늄이 아닌) '유기' 화합물 요소(urea)임을 보여줌으로써 또다른 놀라운 사례를 제시했다." "이성질 현상은 이후 여러 세대의 화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수백만 개의 황홀하고 다양한 유기 화합물을 이해하고 (단순화시키는) 기본 개념이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칼리구(공 모양의 탄산칼륨 수집 기구)를 사용한 빠르고 정확한 유기물 중량 분석 방법의 발전은 (무기화학과 대조적으로) 유기화학의 폭발에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이론화학과 정밀 성분 분석이라는 두 과학기술은 탄소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다."(122-3)
"무기화학 분석의 완성과 그 확산에 있어서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공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광물학적 구성을 알기 위한 시험들로 이어진 긴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그는 기센대학교에서 체계적인 무기불 분석 방법을 가르쳤으며 이는 카를 프레세니우스와 하인리히 빌과 같은 제자와 조교 들이 논문으로 출판했다. 리비히가 명성을 얻은 것은 그가 놀랍도록 새로운 화학적 발견을 많이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프리드리히 뵐러와 함께 반응물과 생성물의 화합물을 조사하고 처리하여 분석 결과를 이해하는 데 베르셀리우스식 화학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덕이 크다. 이러한 체계적인 원자단 구별 방법(습식 정성 및 정량 분석법)은 1950년대에 실용화학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교육되었다. 리비히가 젊은 나이에 얻은 명성과 지위는 이러한 무기 및 유기화학 분석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생겨난 것이다."(119-21, 123-4)
"로랑은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적 관점을 반대했다. 그리고 결정학에 대한 그의 선행연구, 그러니까 서로 다른 염이지만 동일한 모양을 가진 결정들의 집단을 나타내는 유질동상(類質同像, isomorphism)의 원리에 영향을 받았다. 결국 로랑은 유기분자들이 이원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통합되었거나 '단일 조직'으로 구성된 화합물이라는 관점을 선택했다." "공동 연구자인 게르하르트와 로랑은 단일 화합물과 동족 계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상호 보완적이며 새로운 유기 화합물 분류법을 제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르하르트는 [(CH2)+H2O], [(CH2)2+H2O] 형태와 보다 일반식인 [(CH2)n+H2O] 같은 형태로 유기 화합물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과 관련해 동족계열의 유용함을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은 이론이 아닌 실험에 의한 정렬과 분류라는 점을 강조했고, CH2의 반복 단위가 갖는 진정한 의미는 1858년 케쿨레가 탄소 사슬에 대한 아이디어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비로소 분명해졌다."(128-30)
"프랭클랜드는 무기 또는 유기 화합물 내의 원소들이 다른 원자들과 결합할 때 분명하게 일정한 친화력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달리 말하면, '원소들마다 일정한 원자의 개수와 결합하는 유일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소는 단지 한 개의 다른 원자와 결합하고, 산소는 2개, 질소는 무려 5개와 결합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랭클랜드는 이 규칙성을 '원자성(atomicity)'이라고 불렀지만, 결합이 수소와 '등가'인 단위로 한 개, 두 개 또는 그 이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원자성은 바로 '원자가(valence)' 혹은 '결합가(valency)'로 불리게 되었다." "유기 화합물, 원자가, 구조 화학의 분류에 대한 케쿨레의 이론적 통찰려과 벤젠의 육각형 화학실 설명은 유기화학을 변화켰다. 그는 메탄의 탄소가 4 원자가를 가졌다는 개념을 탄소 화합물 전체로 확장했다." "이제 모든 유기 화합물은 탄소 사슬(연쇄)과 탄소의 4 원자가 개념에 수용되었다."(139-41)
5 반응성
"화학과 물리학의 교육 사이에는 항상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실제로, 18세기부터 두 학문은 각각 별개의 실험 학문 분야로 여겨져왔지만, 그전에는 통합된 방식으로 교육되었다." "빛, 열, 소리, 전기 및 자기의 요소를 가르치면서 화학자들은 종종 물질의 물리적 특성과 이것들이 화학적 변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물리화학(종종 이론화학 또는 일반화학으로 불리는)으로 알려진 제3의 전문적 화학 분야가 출현했다. 물리화학은 무기나 유기화학만이 아닌 화학 전반을 배우는 기반이 될 운명이었다. 이러한 발전들은 필연적으로 수업과 실험 연구를 위한 화학자들의 연구 공간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 초 베르톨레의 화학반응에 대한 연구는 화학적 변화가 물리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친화력은 수십 가지 다른 방식으로도 성립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화합물들이 일정한 비율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등장했다."(156-8)
"화학에서 물리학의 영향을 받은 가장 중요한 분야는 열역학이었다. 열역학 법칙은 운동하는 분자의 열과 힘을 생성하는 능력의 척도인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것이다." "화학자들이 열역학 제 2법칙을 도입하는 것은 무척 더뎠다. 무엇보다도 엔트로피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어떻게 이 법칙을 그들의 실험 실습에 응용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열역학 표기법과 방정식을 따르는 데에 필수적인 수학적 지식을 가진 화학자들조차도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일찍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1870년대에 기체 입자의 움직임을 통계적 평균치로 설명한 이후(통계역학) '무질서도'라는 면에서 엔트로피를 이해하는 것이 다소 용이해졌다. 즉 엔트로피가 높을수록 물질 분자 체계 안에서 무질서도가 커졌다. 이윽고 엔트로피는 화학반응의 동력이 되었다. 고체에서 액체를 거쳐 기체로 이동하는 물리적인 변화에서, 분자들이 점점 더 무질서해짐에 따라 엔트로피는 증가했다."(160-4)
"1800년대 후반, 독일에서 공부한 러시아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무기화학 분야에 질서를 부여했다. 이 질서들은 모두 전적으로 1860년 이탈리아 카를스루에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 화학 회의에서 발표한 칸니차로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수립되었다. 즉, 동일한 온도와 압력에서 동일한 양의 기체는 동일한 분자 수를 포함한다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모든 화학자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규칙을 수용함으로써 유기화학자들이 고유한 실험식을 사용할 수 있게 합의한 원자량 목록을 제공할 수 있었고, 이는 분자 구조식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당시 합의된 원자량은 이후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했다." "다만 1875년과 1879년에 각각 그 실체가 드러난 갈륨과 스칸듐처럼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원소들에 대한 멘델레예프의 예측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화학자들이 주기율표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166-7)
"키르히호프는 빛을 특유의 스펙트럼으로 쪼갤 수 있는 프리즘을 이용한 불꽃 관찰을 통해 불꽃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분젠에게 제안했다. 그들이 '분광기(spectroscope)'라고 이름 붙인 이 새로운 기구는 이전에 없던 강력한 분석 기구의 하나로 입증되었다. 분젠과 키르히호프가 1859년 이 기구의 완성을 발표했을 당시, 그들은 이 기구를 가지고 두 종류의 새로운 원소를 확인하고 분리했다는 것을 동시에 밝힐 수 있었는데, 두 원소는 바로 세슘과 루비듐이었다. 그리고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두 종류의 원소인 탈륨과 인듐이 분광법으로 발견되었다. 한편 분광기는 천문학에도 혁명을 일으키고 '우주화학'이라는 새로운 세부 학문 분야를 만들어냈다." "닐스 보어는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회전하는 단순한 행성 원자 모델을 구축했다. 보어 덕분에 스펙트럼은 원자와 분자의 전자 구조들을 표현한 것으로 밝혀졌다. 1920년대 중반까지 분광학은 물리학과 무기화학을 상당 부분 통합시켰다."(168-71)
6 합성
"19세기 초, 뵐러는 요소(urea)를 인공합성하며 분자의 이성질 현상을 확인했고 유기 화합물도 동일하게 돌턴의 법칙을 따르며 인간이 유기 화합물을 만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화학적 구조를 결정할 때, 화학자들은 곧 규칙적인 양상을 따르는 화학반응을 사용하면서 분자를 다루는 데에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가령 두 개의 탄소 원자로 탄소 사슬을 늘이기 위해, 두 개의 다른 알데하이드(CHO 그룹)를 지방산의 소듐염이 있는 상태에서 함께 가열하는 식이다. 그러면 두 알데하이드 물질은 탈수반응을 일으키며 동시에 사슬로 결합한다. 이 방법은 퍼킨이 계피산을 만들려고 고안한 이후로 퍼킨의 반응 또는 축합반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호프만은 질소를 포함한 탄소 고리 화합물에서 분리가 일어나며 열린 사슬을 형성할 수 있는 반응을 고안했고, 이는 '호프만 분해'로 알려졌다. 이러한 수백 가지의 '유명한 반응들'은 모두 합성을 설계하는 데 이용할 수 있었다."(190, 194-5)
"20세기 전반부에는 분자 구조의 결정과 자연에서 발견되는 화합물들의 합성이 주를 이뤘으며 1901년에 제정된 노벨상은 주로 이 부문에 수여되었다. 두 가지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화학자 아돌프 폰 베이어와 에밀 피셔였다. 베이어는 1880년 천연염료인 인디고를 합성한 공로로 190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후 화학회사인 바스프에 의해 상업적으로 규모가 확대된 인디고의 합성은 당시까지 이 염료를 천연으로 생산했던 농업 경제를 망가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유기화학자들이 천연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어의 제자인 피셔는 복잡한 유기 화합물의 합성을 통해 베이어의 연구를 확장함으로써 당, 효소, 퓨린, 단백질의 정확한 구조를 입증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피셔는 생화학 및 거대분자(고분자) 연구를 위한 화학적 기틀을 마련하였고, 천연물 화학 분야에서 분해 및 합성에 관한 방법론을 정립했으며 이 방법론은 1950년대까지 사용되었다."(195-8)
"플라스틱과 레진, 레이온과 나일론 같은 중합체로 출발해 새로운 인공물질을 만들어내는 20세기 화학자들의 합성 능력은 천연물질을 대상으로 한 구조 분석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분자를 합성하는 능력이 반드시 유용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심하게 감염된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 전시의 압박 속에서 영국의 화학자들은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합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생산 규모를 늘리기는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대신에 페니실린은 스트렙토마이신과 테트라사이클린처럼 구조가 이미 알려진 다른 항생제들과 마찬가지로 곰팡이를 직접 배양하여 제조되었다. 이 개조된 배양 기술은 곧 생명공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변화와 치환의 과학으로서의 화학은 자연계를 완전히 뒤집었다. 자연의 모방은 자연과 결별하고 이를 뛰어넘어 인공 세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가져왔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시작된 원자의 심오한 구조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분석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201-2)
"20세기 전쟁은 모두 화학자들의 전쟁이었다. 해상 봉쇄와 육상 공급로 차단으로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거나 대체제를 만들 새로운 방법을 찾는 데 힘을 써야 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질소 고정' 공정인 하버법(Haber process)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다." "탄약 제조라는 또다른 전선에서 화학자들은 TNT와 아마톨 폭약, 그리고 고성능 폭탄용 리다이트뿐만 아니라 미사일 추진체에 사용되는 무연 코르다이트 등을 제조하기 위해 다양한 방향성 유기 화합물의 생산을 늘려야 했다." "화학전의 실행을 포함한 이런 모든 사례들은 존 아가가 언급한 것처럼 '조직화된 과학과 정비된 혁신'의 표출이었다. 화학전에 사용된 약품에 대한 독일의 연구가 전시가 아닌 평시에, 그것도 살충제 생산공정에서 추진되었다는 것은 거듭 아이러니하다. 프리츠 하버에 의해 만들어진 치클론B라고 명명된 화학물질은, 1940년대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에 독가스로 사용된 약품이었다."(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