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5
크리스토퍼 켈리 지음, 이지은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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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복


"카르타고나 동방 세계에 대한 전쟁에서는─기원전 31년 이집트 정복으로 마무리되는─공화정이라는 로마의 전통적 통치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했다. 사실 군사 정복이 계속 이어진 기원전 2세기를 흔히 로마 공화정의 절정기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여러 면에서 '공화정(Republic)'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용어다. 이 용어는 적어도 현대의 독자들에게는─일반 대중이 폭넓게 정치에 참여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로마 공화정은 금권정치 국가임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시민 집단은 엄격한 재산 자격 기준에 따라 철저히 등급별로 나뉘었다. 결과적으로 이 등급별 분류가 투표권을 규정했다. 모든 성인 남성 시민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거인단은 재산이 있는 자들이 (그들이 결집만 한다면) 가난한 자들보다 항상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거운동과 공직 활동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부유한 자산가들만이 국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18-9)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이같은 빠른 성장은 대략 한 세기 후에 제정이 확립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로 독재가 자유를, 또는 전제가 독립을 대체했다고 보는 것은 속단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래 황제들 치하에서도 로마의 정치는 줄곧 제국의 전리품을 놓고 경쟁하는 몇몇 특권적 가문들이 지배했다. 제정의 성립으로 인해 바뀐 것은 이러한 경쟁을 규제하는 방법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부유한 속주 출신자가 자신들의 부를 바탕으로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귀족 사회로의 진입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변모한 것, 다시 말해 일개 군사령관이 황제로 성공적으로 변모한 것은 로마 정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경쟁이 심한 과두정하에서 달성된, 치열한 싸움 끝에 권력이 재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군대 지휘권을 갖는 사태는 철저히 통제되었다."(23-4)


"잠시 멈춰 서서 로마 제국의 수립을 특징짓는 가공할 공포와 무자비한 파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갈리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는 100만 명의 전투원을 살해했고, 나아가 또다른 100만 명을 노예로 만들었다. 인적·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카이사르의 정복은─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글에서 군단의 파괴력을 과장되게 서술한 점을 감안하더라도─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때까지는 그 살육의 규모에서 필적할 만한 사례가 없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침략자였다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영토 보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적들을 평정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제국의 설립은 조국의 안전을 위한 온건하고 타당한 정책의 미리 계획되지 않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기원전 1세기의 가장 유명한 웅변가인 키케로가 이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전쟁을 벌이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로마인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다.〉"(31, 38)


2 황제의 권력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도시들의 신전에는 황제들과 올림포스의 신들이 각각 묘사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황제를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과 같은 존재로 여김으로써, 로마의 속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속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로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과거'를 로마 지배하의 '현재'라는 시간과 연결할 수 있었다. 아프로디시아스에서는 제국 지배의 가장 잔혹한 일면인 정복마저도 그리스 세계의 전통적인 종교 체계에 통합되었다. 무자비한 정복 활동은 그리스 신화와 로마의 역사, 아프로디시아스 시와 로마 시, 그리고 올림포스 신들과 벌거벗은 로마 황제들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그 잔인함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각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한층 더 발전하는 로마 지배를 찬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제국 찬미의 세계상에서는 아프로디시아스가 무기력하게 황제의 발에 짓밟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51-2)


"전통적인 신들과 지역의 오랜 신앙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되풀이된 황제 숭배라는 의례의 틀 안에서 통합되었다. 또한 이로써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이해하는 언어를 제공할 수 있었다. 에페소스의 살루타리스와 같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공동체 안의 최고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인간에게 순종의 표시로 머리를 숙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회적 굴욕을 무릅쓰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신으로서의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지방의 고위층에게 스스로의 체면을 잃지 않고도 열등한 지위를 수긍할 만한 방법을 제공했다. 실제로 공적·사적인 영예를 둘러싼 경쟁에서 신관직을 수행하고, 축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신전 건립을 후원하는 사람들은 초인간적인 황제와의 특별한 관계를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한층 더 강화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통해서 자신들이 제국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안팎으로 과시할 수 있었다."(58-9)


"황제들은 신과 같이 제국을 다스릴 권력을 손에 쥐고 있지만, 그 행동을 적절히 억제해야 하는 도덕률에 묶여 있기도 하다는 것은 엘리트 귀족층에 의한 황제 찬미에서 거듭 등장하는 주제였다. 100년 9월, 저명한 원로원 의원 소(小)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원로원 앞에서 집정관 직을 부여한 황제에게 바치는 감사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플리니우스는 관용, 검소, 경건, 공평무사, 가까이하기 쉬움 등 트라야누스의 중요한 덕목들을 열정적으로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의 시민다운 태도(ciuilitas)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한 태도는 사회적 지위를 서로 존중하고 공히 법률의 구속을 받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플리니우스가 신중하게 규정한 정치 질서에서 좋은 황제는 좋은 시민이기도 했다." "플리니우스의 생각에, 황제에게 최고의 미덕이란 제국 엘리트층 집단 속에서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62-4)


3 공모


"로마 총독은 속주 도시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청원이나 사법적인 문제가 제기되면, 많은 경우 지역의 담당 관리에게 넘기는 정도였지만, 가끔은 결정을 내려주기도 했다. 총독들은 간청을 받거나 불가피하게 나서야 할 경우에만 사태나 분쟁에 대응했다. 총독은 직접 앞장서 행동하는 조사관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호소할 수 있는 정부 당국이었다." "속주의 많은 도시들은 이런 최소한의 통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플리니우스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10년 전, 비티니아-폰투스의 중간급 도시인 프루사의 상층 시민 한 명은 동료 시민들에게 그처럼 장점이 많은 상태를 위협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디오 크리소스톰이 볼 때, 소도시 사회의 지속적인 활력의 근거는 바로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부유한 계층의 우월한 지위를 뒷받침하고, 그들의 도시 행정 지배를 정당화해주는 것도 바로 제국의 존재(그리고 도시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면 제국측에서 보복할 거라는 위협)였다."(80-4)


"로마 제국의 성공 열쇠는 지방 엘리트층에 있었다. 정복 초기의 정신적 충격을 견뎌내고, 조직적인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단념해버린 사람들은 지배 권력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분명 이득을 챙겼다. 실제로, 많은 속주민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지역에서 기존 과두지배자 그룹이 경쟁자 없이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강화한 것에서 로마의 지배를 실감했다." "로마의 통치를 지지한 부족의 지도자들은 자기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속주 총독 다음으로) 가장 유력한 지위가 제국 권력과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이들은 로마가 정복하기 이전에 소유했던 것보다 더 안정된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되었다." "지방 유력자들의 우월한 지위는 로마 시민권 부여로 더욱 강화되었다.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전망은 모자이크상으로 제국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지배 엘리트층이 지역에 대한 충성심을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승화시키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7-9)


"로마 제국의 통치는 지역과 제국의 이해를 하나로 융합시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이익을 얻도록 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렇긴 해도, 문명화와 노예화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타키투스의 비아냥에는 예리함이 있다. 만약 무력 지원이 없었더라면, 혹은 그러한 문화의 수용과 과시가 현실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법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비록 제국의 공통 문화가 가져다주는 혜택이 컸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빠르고 성공적으로 제국의 통치가 확립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지방 엘리트층이 현지에서 얼마나 교묘하게 영향력을 유지하든지 간에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는 바로 로마 통치의 매개자 역할을 하려는 지속적인 의지에 달려 있었다." "도시의 성공한 지도자들은 플루타르코스의 예리한 평가에 당연히 동의할 것이다. 당신의 지위에 대해 〈너무 큰 자신감이나 확신을 가지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일, 또는 도시를 위한 공무를 수행할 때도 〈로마 총독의 장화가 바로 당신 머리 위에 있음을〉 항상 기억하십시오."(106-8)


4 역사 전쟁


"하드리아누스는 오랫동안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전장의 지휘관이 아니라 여행자로서 로마 제국 전역을 순회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을 아테네에 완성했다. 아테네의 과거에 대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도전은 건축 분야를 넘어섰다. 올림피에이온 신전의 헌정은 그리스 도시들을 묶는 새로운 조직인 판헬레니온(Panhellenion, 문자 그대로 '범그리스'의 뜻) 동맹의 창설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동맹은 5개의 로마 속주들을 포괄했고, 그리스 본토는 물론이고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소아시아, 크레타 섬, 로도스 섬과 북아프리카의 도시들까지 망라했다." "하드리아누스의 판헬레니온은 그리스 세계를 재편했다. 전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고, 실제로는 심하게 적대했던 많은 도시들이 단일한 제도적 틀 안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아테네가 동맹의 본부로 지명되었다."(110-2, 115)


"한 도시에 4개의 신성한 축제를 집중시킨 것은 그리스 역사를 통틀어 유례없는 일로, 이렇게 재편되고 개선된 그리스의 과거 속에서 아테네가 핵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이 강조되었다." "결국 아테네 시의 상징적·종교적 중심은 페리클레스가 세운 파르테논 신전이 아니라, 다수의 황제상으로 둘러싸인 하드리아누스의 올림피에이온 신전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치하의 제국에서 그리스 세계는 지역 레벨과 제국 레벨의 열정이 하나로 모아져,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화합과 문화적 결속을 이루었다. 2세기에 '그리스' 도시들 사이에서 새로 일어난 전통 돌아보기 움직임은 오랜 분쟁의 기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분단의 과거는 잊혀져야 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베푼 은혜로 범그리스 세계가 마침내 소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까지 펼쳐지고, 아테네는 이 멋진 신세계의 진정한 수도가 되었다. 역사상 그리스가 그토록 애써온 통합 노력에서 로마 황제가 마침내 성공을 거둔 것이다."(116-8)


"하드리아누스가 후원한 건설 계획에서는 지난 역사에 대한 매우 독특한 해석이 기념물의 형태로 체계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한 과거는 황제 자신과 노골적으로 연계되어 이번에는 로마 제국이라는 현재의 세계와 일체화된다." "로마 황제들에게 과거는 '횡령'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정복의 상흔을 지우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밀월을 강조하기 위해 재구성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현실을 피하여 상아탑의 세계로 숨어들어버릴 위험이 있는 그리스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과거란 아직도 해방이라는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적어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 신전 근처에는 황제의 자선 행위를 기념하는 멋진 아치문이 있다. 그 서측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여기는 지난날 테세우스의 도시였던 아테네이다.〉 이해가 더딘 사람을 위해서 반대편 비문이 요점을 다시 말해준다. 〈이곳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니라,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다.〉"(133, 136)


5 사자에게 던져진 기독교도들


"177년 여름, 루그두눔(지금의 프랑스 남부 리옹). 마침 축제 기간이었고, 원형경기장에서는 눈요깃거리로 기독교도들이 끌려나와 있었다. 이때의 일에 관해서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다른 기독교도들이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2세기 루그두눔의 주민들에게 기독교도들은 기분 좋은 나들이의 이벤트, 즐길거리의 하나,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군중은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그리고 이같은 폭력과 잔인함에 대한 수많은 일화에서도)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관중은 결코 부랑자와 같은 하층민들이 아니었음을 강조해야 한다. 이들은 미쳐 날뛰는 폭도가 아니라, 오히려 눈요깃거리로 준비된 폭력을 흥미진진한 소일거리로 여기는 선량하고 믿음직한 시민들이었다. 사회적으로 버림받는 자들이 점잖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의 오락을 위해 잔인하게 죽은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마찬가지로, 전문 투사들이 싸움질을 하는 것도 당연시되었다."(140-1)


"80년 콜로세움의 개장식에서는 검투 경기와 9,000마리의 맹수 사냥을 비롯한 구경거리가 100일 동안 이어졌다." "검투 경기에 투여된 이런 놀랄 만한 시간과 자금, 그리고 로마인들의 강한 애착은 지배를 과시하는 행위로서 검투 경기가 갖는 중요성을 잘 드러낸다. 관중은 갈채를 보내고 리드미컬하게 성원함으로써 공동의 연대의식을 확인하며, 눈앞에서 무참하게 살해되는 검투사가 자신들과는 별개 집단임을 선언했다. 관중은 또 패배한 검투사의 운명을 좌우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행사했다. 죽음을 가지고 노는 이 구경거리는 사회가 스스로의 안녕을 다지기 위해서 제공하는 통제된 무질서의 막간극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형경기장, 그리고 철저히 통제된 관중과 잔인한 게임은 제국의 단합을 가져오는 폭력과 질서의 축도였다. 유혈이 낭자한 볼거리 속에서 폭력은 질서 잡힌 사회에 반드시 동반될 요소로 제시되었다. 마치 전쟁이 한때는 제국의 수립에 불가결한 것이었듯이 말이다."(145-6)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7년 리옹에서 한 무리의 기독교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중은 기독교도들이 고문대에서 찢기고, 철판 의자에서 그을려지고, 황소 뿔에 받히고, 굶주린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며 갈채를 보냈다. 원형경기장에 질서 있게 앉은 잘 차려입은 군중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행위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로마 다수파의 권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에게 순교는 결코 패배가 아니었다. 순교는 승리였다. 순교자의 처참한 육체는 기독교도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비쳤고 불에 탄 살내음은 달콤한 향기처럼 느껴졌다. 미화는 시복(諡福: 가톨릭에서 성인聖人으로 인정하기 전에 공식으로 공경할 수 있다고 교회가 인정하는 지위에 사후에 오르는 일)의 전단계로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순교 행위에서 기독교도들은 항상 승리했다는 사실이다."(150-3)


6 로마인의 삶과 죽음


"로마 제국은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받았다. 평균 수명은 20~30세로, 오늘날 서양화된 사회의 평균에 비하면 약 3분의 1밖에 안 되었다. 이러한 숫자의 산출은 고대의 사료에 직접 의거하기가 어렵다. 고대의 사료는 불완전하고 내용도 빈약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전도상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추세를 로마 제국도 따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상정하고 산출이 이뤄지고 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의 인도와 중국의 경우가 잘 알려져 있다. 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적어도 그 상한과 하한은 볼 수 있다. 즉, 평균 수명이 20세 미만인 경우에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을 것이고, 반대로 평균 수명이 30세 이상인 경우에는 환경적·사회적·경제적 조건이 비슷한 전근대 사회보다 로마는 인구가 안정된 사회였을 것이다. 통계학적인 모델은 세대 구성, 출생률과 사망률을 추측한 명확한 틀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모델은 개연성을 반영하는 데 불과하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182-3)


"생활환경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부유한 사람들이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반드시 훨씬 더 오래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제정기에 로마 원로원은 정원이 600명 정도로, 결원 보충은 평균 25세 안팎의 재무관(quaestor) 경험자가 매년 20명씩 추가됨으로써 이루어졌다(재무관은 최하위 공직). 이러한 결원과 보충의 관계에서 보면, 재무관 경험자는 통상 50대 중반까지 사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해서, 좀더 넓게 말하면 출생시 그들의 평균 잔여 수명은 20대 후반이었던 셈이다. 로마 사회의 가장 특권적인 사람들인 원로원 의원은 분명 좀더 많은 자원을 우선적으로 향유할 수 있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군단의 군영이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심부처럼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환경에서 장기간 지내야 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들의 혜택도 상쇄되었을 공산이 크다. 1세기부터 7세기까지 자연사한 로마 황제 30명의 항년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모든 부와 권력을 과시한 그들의 평균 수명은 불과 26.3세였다."(186-7)


"가혹하게 높은 사망률은 로마 여성의 출산 능력에 상당한 부담을 안겼다. 안정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균해서 월경 개시기에 도달한 여성 1명이 딸 1명을 낳고, 그 딸도 월경 개시기까지 성장하는 것이 전제된다. 유아기 사망률이 높은 사회에서 이같은 냉정한 인구학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정상 출산 인구의 수는 급격히 증가한다. 안정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평균해서 여성 1명이 딸 2.5명, 즉 아들까지 쳐서 적어도 5명의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인구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여성은 조혼으로, 평균 20세 직전에 결혼했다. 제국의 서부 속주에서 출토된 묘비에 따르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가 평균적인 초혼 연령이었다. 다산의 부담을 가능한 한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혼인이 널리 행해질 필요도 있었다. 이집트에서 여성의 60퍼센트가 늦어도 20세까지, 나머지도 30세까지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로마 제국에는 미혼녀가 거의 없었다."(188-9)


7 다시 찾은 로마


"'번영'과 '문명'이라는 키워드를 공통분모로, 로마와 영국을 동일선상에서 견주는 것은 제국의 지배에 관한 매력적인 사고방식이었다. 1901년에 처음 출간된 『고대 로마 제국과 인도의 영제국』이라는 연구에서 옥스퍼드의 역사학자이자 법률가, 저명한 자유당 정치가인 제임스 브라이스는 두 제국의 성공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두 제국 모두 〈제국 내부의 평화와 질서를 매우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탁월했다. 둘 다 인상적인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통해서 자신들이 〈훌륭한 공학기술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두 제국 모두 전쟁과 통치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러한 성공들이 〈모든 저항을 억누를 기회를 맞이했을 때 보여준 유사한 추진력과 에너지, 준비성〉을 드러내 보였다. 두 제국을 이처럼 좀더 확실히 비교하는 시각의 장점은 인도에 있는 영국의 존재에 설득력 있는 역사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듯하다는 점이다."(211-2)


"로마 시의 현대적인 모습은 상당 부분 무솔리니가 조성했다. 고대 건축물들이 분명하게 부각되는데─관광객에게는 즐겁게도─그 이유는 바로 (무솔리니의 표현에 따르면) '추악한 그림 같은' 주변 환경이 조직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궁으로부터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임페로(제국)대로는─지금은 그보다 덜 논쟁적인 포리 임페리알리(황제 광장) 대로라고 불리는─전적으로 파시스트의 창조물이다. 무솔리니의 본부에서 콜로세움을 뚜렷이 보기 위해서 중세 도시를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무엇보다도 이 도로는 군사 행진에 필요한 엄청난 공간을 제공했다. 로마는 땅 위에서만 재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한층 더 확대된 로마 제국의 영광이 아우구스투스 탄생 2천 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에서도 경축의 대상이 되었다." "전시의 목적은 방문객들을 위해서 부활된 제국의 일관성 있는 모습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인상 깊은 폐허가─적어도 축소된 모형으로─다시 한 번 완전한 모습을 찾았다."(220-1)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지는 로마 제국의 현대적인 버전들은 넘치도록 풍부하게 재미있어야만 한다. 〈쿠오바디스〉, 〈로마 제국의 몰락〉, 〈글래디에이터〉 같은 영화들은 개선 행렬의 엄청난 장관, 아주 부유한 자들이 소유한 대저택의 호화로움, 유혈이 낭자한 검투 경기의 스릴, 전쟁의 공포, 독재정치의 무시무시한 변덕스러움, 로마의 대도시적인 장대함을 전달한다. 황제의 과제에 대한 로마의 생각을 포착한다거나, 제국의 권력 행사와 표현을 둘러싼 어려움과 모호함에 대한 인식을 제공한다거나, 속주 엘리트층의 민감한 위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정복과 저항은 판에 박은 듯 오로지 무력이라는 측면에서만 인식되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 로마의 중심에는 몹시 개인적인 투쟁, 즉 인간성을 파괴하는 전체주의적인 체제에 맞선 개인의 우월함에 대한 칭송, 사랑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 정당한 복수의 추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매력적인 결합이 로마 제국의 지속적인 인기 요인임이 분명하다."(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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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3
폴 카틀리지 지음, 이상덕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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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고대에 '그리스'라는 도시국가는 없었다. 다만 그리스 도시들과 여타 공동체들이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방식을 통해 표현된 공통 문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최초의 역사가라고 불릴 만한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 웅변가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다움'을 정의했다. 〈······아테나이인들이 그리스인들을 배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한 핏줄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과 함께 신전들을 세웠고 신들에게 희생제사도 지내는데다 같은 생활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도토스, 『역사』, 8.144)〉 헤로도토스가 창작해낸 이 연설은 정치적 행위에서 거의 실현된 적 없는 통일성을 암시하고 있다(문화적 행위는 또다르다). '범헬레네스'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정치적 통일성이 빠져 있다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리스 문명에 특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민족국가의 부재, 좀더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리스 폴리스들의 개별적인 면모다."(20-1)


2 크노소스


"청동기시대 크레테에 관한 한 '신화적 역사(myth-history)'를 통하는 것이 최선이다." "후기 청동기시대 크레테 궁전은 정치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최고 권위자, 지배자, '빅맨'(여왕이었을 확률은 낮다. 그리스 체제하에서는 이들을 아낙스anax 혹은 '우두머리'라고 불렀다)의 자리 혹은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궁전 주변에는 궁전만큼이나 아름답게 장식되고 훌륭한 석공 기술로 지은 '대저택'에서 특별한 지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근 3000년간 거의 변하지 않은 기후 덕분에 가능했던 근본적 농경국가의 중심에는 '지중해 3종' 작물이 있었다. 곡물(가뭄에 강한 보리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다양한 종의 밀과 수수 같은 부수작물 역시 재배되었다), 포도주, 올리브유(크레테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와 올리브 재베에 안성맞춤이다)가 그것이다." "또한 국내 생산은 복잡한 해외무역과 연결되어 남으로는 이집트로, 북으로는 키클라데스제도와 펠로폰네소스반도 남부로, 그리고 레반트로 수출되었다."(31-2)


"크레테가 원주민 지배에서 외세 지배로 전환되면서 기원전 1450년대에 집중적으로 폭력이 발생한 것은 (청동 무기가 매장된) '전몰자 무덤'으로 알 수 있는데, 이는 이곳의 평화주의적 배경(이란 단어를 만들 수 있다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궁전 크레테의 최후'라고 알려진 것은 정복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으며 (선형문자 B 서판의 언어와 문장으로 보았을 때) 침략자들은 그리스어를 하는 그리스 본토 사람들, 특히 펠로폰네소스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듯하다." "크노소스와 크레테의 정치적 전성기는 분명 선사 청동기시대였다. 그러나 암흑기와 상고기(각각 기원전 11~9세기와 기원전 7~6세기)의 크레테 역시 결코 완전한 문화적 공백 상태는 아니었다. 이 섬은 전통적으로 초기 폴리스 건설이 활발하였으며, 한편 이 섬의 또다른 전통은 입법자와 법의 땅이라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드레루스의 아고라와 기원전 7세기 말의 법이 새겨진 청동 판을 들 수 있다."(34-5)


3 미케나이


"'미노스' 문명이 평화로워 보였던 것, 최소한 내부적으로 조화로워 보였던 것과 달리 미케나이와 그리스 본토의 코린토스 지협(테바이, 이올코스, 필로스 등) 남쪽과 북쪽 미케나이 문명 중심지들의 성채에 기반을 둔 통치자들은 전쟁을 선호했고 큰 성벽(두께가 6미터에 달했다)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통치자들이 글을 읽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은 선형문자 B라고 알려진 원시적 관료제의 그리스 문자 아카이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어 문자를 썼다고는 하나 미케나이 문명은 기본적으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중심을 둔 중동 문화의 지방 거점이었다. 성채 입구의 인상적인 '사자문'은 히타이트의 하투샤를 연상시킨다. 또한 아트레우스(Atreus, 아가멤논의 아버지)의 보고(寶庫)나 아이기스투스(Aegisthus,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의 정인)의 내쌓기와 메쌓기로 만든 벌집형 무덤은 사후세계를 암시하여 이집트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40)


"청동기 이후 역사시대의 가난한 미케나이인들은 (호메로스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서사시 낭독을 지겹도록 들으면서 그들이 절실히 믿고 아가멤논 신전에 자주 찾아가기만 하면, 혹은 페르세우스에게 헌정물을 바치기만 하면 아가멤논의 기운이 그들에게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했다." "영광스러운 미래(혹은 다른 어떤 미래라도)를 향한 역사시대 미케나이인들의 희망은 '뱀 기둥'에 미케나이가 포함되면서 더욱 커졌다. 이 기둥은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480~479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함께 막아낸 것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비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독립적인 미케나이인들은 늘 스파르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웃한 아르고스(스파르테와 적대관계에 있었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에게는 위협적이었다. 기원전 468년에 아르고스는 미케나이를 전멸시켰고, 이 작은 폴리스는 한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46-7)


4 아르고스


"도시 아르고스는 미케나이로부터 거의 정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라리사(Larissa)와 아스피스(Aspis, '방패'라는 뜻)라는 두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그리스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이 살아온 곳이지만, 기원전 11세기 암흑기로부터 빠져나와 성장하기 시작한 도시는 새로운 아르고스였다. 단지 지형학적·건축학적으로 새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족적 의미에서도 새로웠다. 새롭게 진화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도리스인이라고 칭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중부에서 이주해왔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아르고스를 차지하여 펠로폰네소스의 세 거점 중 하나로 삼았다. 다른 두 곳은 스파르테와 메세네였다. 도리스인들은 남쪽으로 크레테까지 진출하였고(역사시대에 크노소스는 도리스계 도시가 되었는데 어쩌면 실제로 아르고스인들이 기초를 닦았을 수도 있다) 거기서 에게해를 건너 동쪽으로 현재의 터키 서남부와 로도스 같은 그리스 섬까지 진출하였다."(51-2)


"도리스화란 같은 방언의 사용 외에도 같은 제도(세 지역은 똑같이 가상-친족 부족명을 사용하였다)와 종교 관습(아폴론을 위한 카르네이아Carneia 축제를 매년 열었다)을 말했다. 아르고스의 도리스인들은 같은 도리스계인 메세네(아르테미스)나 스파르테(아테나)와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인 헤라 여신을 수호신으로 모셨다." "기원전 8세기 아르고스인들의 확장에 따라 점차 아르고스 평원 대부분이 잠식되었고, 이들은 청동기시대의 주요 거점인 미케나이와 티린스가 포함된 이 아르골리스 지역의 실질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때때로 해안도시 아시네와 같은 이웃 도시의 정복이나 축출이 일어났으며, 이곳에는 모도시가 파견한 정착민들이 자리잡았다. 이는 그리스 내부 식민화의 한 형태로 아르고스의 해외 식민시 건설 필요성을 나타내었는데, 아르고스보다 훨씬 가난했던 내륙의 코린토스가 겪은 기원전 8세기 후반의 이주 필요성과는 대조된다."(54-5)


5 밀레토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로 불리던 지역(아나톨리아 서부, 즉 에게해 연안 중부)의 주요 도시였을 뿐 아니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그리스인들의 이주와 식민시 건설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 그 영향력이 넓게 퍼진 도시였다." "기원전 8세기 훨씬 전에도 밀레토스에는 사람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이미 크레테에서 온 미노스인들과 그리스 본토의 미케나이인들이 이곳에 출몰하였다." "기원전 1210년에서 1190년까지 이 지역에 대변동이 일어난 후, 본토의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2~11세기 동안 에게해를 건너 소아시아로 이주한다. 역사가들은 이를 흔히 '이오니아인의 이주'라고 부른다." "아나톨리아 해안의 정착민들과 그리스 본토의 에우보이아 사람들은 동방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레바논의 페니키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알파벳,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 살던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수학, 그리고 (기원전 6세기 전반 리디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화폐 등이 있다."(63-4)


"기원전 520년대 말 그리스인들은 제국에 복속되는 것을 어떻게 느꼈든 간에 조용히 다리우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20년 후에 이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리스인들은 에게해 연안에서 키프로스 섬까지 일제히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흔히 '이오니아 반란'이라고 한다." "다리우스가 그리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6년(기원전 499~494년)이 걸렸다. 마지막 싸움은 밀레토스 근해 라데섬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었다. 반란을 주도했던 도시에 대해서는 일벌백계만한 것이 없었다. 다리우스는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생존자들을 티그리스강 하구의 암페로 강제 이주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동료 이오니아인인 아테나이인들에게 밀레토스의 멸망은 여러 면에서 비극이었다." "밀레토스는 다른 도시(테바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파괴 이후에 꽤 일찍 재건되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재건된 도시는 아테나이 제국의 역사, 그리고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관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74-6)


6 마살리아


"이제는 '그리스 동부'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황금빛 서부'라고 경탄해 마지않았던 서쪽으로 이동하자, 이 지역은 시킬리아로부터 메시나해협을 지나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이키아, 라틴어로 '대그리스')에 이르는 지역과 프랑스 남부, 스페인 동해안을 포함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미디(Midi)로, 어떤 이들에게는 프로방스 해안으로 알려진 곳이다." "프로방스 해안의 몇몇 도시들은 이름만 봐서는 그리스 기원임을 알 수 없다. 앙티브(Antibes)는 원래 안티폴리스('반대도시')였고, 니스(Nice)는 그리스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이름을 딴 니카이아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르세유인데, 옛 이름 마살리아는 그리스어가 아닌 페니키아어로 '정착지'라는 뜻이다. 기원전 600년경 밀레토스에서 탈레스가 명성을 떨치고 있을 무렵, 밀레토스와 함께 이오니아에 속해 있던 포카이아(현재 터키 서부의 포싸)의 그리스인 한 무리가 이곳에 와서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마르세유의 역사는 이 결정과 함께 시작된다."(80-2)


"마살리아는 놀랍도록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고 스페인 동북부의 엠포리온(현재의 암푸리아스) 같은 자도시를 건설할 만큼 성장하였다." "다양한 그리스산 상품들이 에게 해안으로부터 마살리아를 통해 내륙 원주민들에게 전해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빅스 크라테르(Vix Krater)라고 불리는 커다란(높이 1.64미터, 무게 208킬로그램, 부피 1.1리터) 포도주 희석용 청동 항아리인데 기원전 530년경 스파르테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포도주는 어디서 생산되었을까? 빅스 크라테르에 담겼을 희석한(혹은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살리아의 그리스인들이 그보다 한두 세대 전 프로방스 지역에 처음으로 포도주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00년부터 1500여 년간의 포도 생산은 그리스 농업의 원천적 특징이 된다." "마살리아는 포도주 무역 도시로 자리잡게 되자 주요 기착지로서의 핵심 상품으로 자체 상표를 내건 포도주 항아리를 생산하고 수출하였다."(85-8)


7 스파르테


"스파르테를 특별한 그리스 도시국가로 변화시키는 개혁은 리쿠르고스(Lycurgus, '늑대-일하는 자')라는 전설적인 입법자가 단행했다고 전해진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경제, 정치-군사, 사회 세 분야에 대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분배가 이루어졌다. 이는 새로 획득한 메세니아 땅에 관한 것이었는데, 모든 스파르테인은 최소 얼마간의 토지를 받았다(클라로스klaros, '몫'을 의미). 공동 소유지와 거기서 일할 헤일로테스들도 있었다." "정치-군사적으로는 모든 스파르테인들이 전사 의회의 회원으로서 평등한 투표권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표가 아닌 함성으로 의결했고, 의회 위에는 30명의 연장자로 구성된 귀족주의 원로원(게루상Gerousia)이 존재했다. 두 명의 스파르테 왕(항상 동일한 두 귀족 가문에서 나왔다)은 은퇴하면 원로원 회원이 되었다." "스파르테의 사회구조는 군대와 완전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었다. 스파르테 소년은 7세부터 중앙 도시국가의 주도 아래 공동으로 '교육받았다'."(98-101)


"기원전 8~7세기에 부상한 사프라테는 강한 전사 공동체였다. 그들의 힘과 80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그들의 영토는 그리스에 가장 컸다. 두번째인 시라쿠사이의 영토는 4000제곱킬로미터였다)는 그리스인을 헤일로테스, 즉 '포로'라고 부르며 반노예로 착취하고 스파르테 남성들에게 아주 어린(그렇다고 절대 연약하진 않았지만) 나이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시기는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상고기 내내 스파르테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테인들은 도시국가를 군사 기지화했다. 그 보상은 물론 매우 컸다. 스파르테는 기원전 7세기 중엽부터 기원전 4세기 초까지 단일 도시국가로는 그리스 전체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보병을 가졌으며, 기원전 480~479년에는 전 그리스와 서구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은 결코 이기적이라고도 비열하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도시국가 자체는 '상고기적'이었으나, 이들로 인해 그리스 전체에 고전기가 꽃피게 되었다."(103, 107)


8 아테나이


"부유한 귀족이었던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아주 어려운 정치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다. 이 싸움은 구식 복고주의 귀족과 솔론 자신과 같은 진보적 귀족, 그리고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한 계층 사람들과 아테나이의 가난한 시민들(솔론은 그의 시에서 이들을 데모스demos라고 불렀다) 사이에서 벌어졌다." "솔론의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제한적 권한 이양과 기원전 508/7년 클레이스테네스의 더 급진적이고 실로 민주적인(데모크라티아는 '데모스의 권력'이라는 뜻이다) 권한 이양 사이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Pisistratus, 기원전 527년 사망)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 '참주 살해자'들에 의해 그의 동생이 죽은 지 4년 만인 기원전 510년에 타도당했다)의 참주제가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이 이룬 것은 솔론의 정치경제 개혁을 바탕으로 아테나이의 문화 통일과 증가하는 인구의 정치 참여 독려였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룩한 정치 지형 변화는 이들이 기반을 닦아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117-9)


"해안에서 8킬로미터 내륙으로 들어와 있던 고전기 아테나이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져 번성하기 이전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복잡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 도시는 세 도시가 하나로 통합된 형태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아테니아가 '단순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정치 독립체로서의 아테나이, 즉 폴리스 아테나이가 있다. 이는 도심과 약 2400제곱킬로미터의 교외(코라)인 아티케(Attike, '아테나이인들의 땅'이라는 뜻)를 뜻한다." "둘째로 아크로폴리스, 즉 '높은 도시'가 있다. 때로는 그냥 '폴리스'로 불린 이곳은 상징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셋째로 아테나이는 그리스 폴리스 중 유일하게 영토 안에 페이라이에우스라는 제2의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테나이는 민주정과 예술성, 철학적 고찰 등을 통해 '고전기' 그리스의 '황금기'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도시국가는 독립국가 '헬라스(Hellas)'의 영원한 수도가 되었다."(111-3, 134)


9 시라쿠사이


"시킬리아의 여러 도시에 정착한 그리스 이주민들 중 가장 성공한 부류는 시라쿠사이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시라쿠사이는 시킬리아의 그리스 도시 중 가장 크고 부유하며 강성한 도시로 성장했다. 영토는 모든 그리스 도시 중 두번째로 컸다. 스파르테계였던 도시민들은 대규모 원주민이었던 시켈(Sicel)족을 노예 신분으로 강등시켜 킬리리(Cilyrii, 혹은 칼리키리Callicyrii)라고 불렀다. 시킬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시켈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밖에 그리스 이주민과 여러모로 유사했던 시킬리아 서쪽 끝의 페니키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카르타고(현재의 튀니지)를 건설했고, 그리스인들이 오기도 전에 스페인 동부와 사르데냐에 정착한 그들의 동족처럼 이미 도시 건설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이들이 건설한 도시로는 파노르모스(현재의 팔레르모)와 모티아(혹은 모지아) 등이 있다.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 정착민 사이의 전투들은 시킬리아 고전기 역사의 주요 사건을 이루며 섬의 운명을 좌우했다."(137-8, 142-3)


"시킬리아 민주주의의 뿌리를 시킬리아섬에서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란 아테나이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시라쿠사이에서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아테나이로부터 들어온 외래문화였는데, 신기하게도 이 외래문물은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빠르게 정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시라쿠사이와 아테나이는 처음엔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길을 갔다. 시라쿠사이는 더욱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갔고, 아테나이는 두 차례의 과두정 반동을 겪고 마침내 기원전 404년에 스파르테에 패하고 말았다." "아테나이에서는 기원전 413년부터 근본적인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던 터였다. 과연 민주주의가 제국을 통치하고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가? 기원전 404년의 답은 분명히 '아니요'였다. 시라쿠사이 역시 군사적 실패 이전에 민주주의 세력이 치명적인 정치적 실패를 맛보았다. '민주주의 막간극'은 기원전 405년 카르타고의 위협이 높아지면서 끝나버렸다."(148, 151-2)


10 테바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의 신실한 동맹이 되면서 테바이는 권력을 한층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테바이는 과두정에 대한 스파르테의 지원이 자기들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기원전 427년에는 스파르테의 지원으로 테바이의 오랜 숙원이 달성되었다. 그들은 보이오티아 민족이던 플라타이아인들이 아테나이와의 동맹(이 동맹은 기원전 519년으로 거슬러올라갈 만큼 유서가 깊었으며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의 군사 협력을 기억하는 것이었다)을 파기하도록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 도시 자체를 정복해야 했다. 또한 이 목적이 달성된 지 몇 년 후 그들은 아테나이 쪽으로 기울어 있던 테스피아이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정복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기원전 413~404년)에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테바이였다. 그들은 아테나이와 보이오티아 경계에 차린 스파르테 진영의 보호 아래 아테니아 외곽을 유린하였고, 아테나이의 은광에서 도주한 노예 수천 명을 싼값에 사들였다."(160-1)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의 훌륭한 지도력 덕분에 테바이는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직접 메세네(기원전 369년)와 아르카디아의 메갈로폴리스를 독립시키면서(기원전 368년) 쇠약해진 스파르테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테바이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는 기원전 368년에서 365년까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자가 테바이에 인질로 가택 연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기원전 360년대에 일시적으로 테바이의 힘이 강해지자 민주주의 아테나이와 과두주의 스파르테는 테바이의 위협에 대응하고자 다시 한번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사 협력은 없었다. 기원전 362년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연합군은 만티네아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에파미논다스 자신은 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만다." "테바이는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이후 기원전 316년부터 훨씬 작은 규모로 재건되었다."(164-5, 168)


11 알렉산드리아


"처음에는, 즉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동안과 사후 몇 년간은 알렉산드리아가 제국 속주의 새로운 수도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와의 연줄을 개인적 목적이나 프로파간다를 위해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멤피스의 파라오라고 선언했다." "기원전 305년경,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성공적인 마케도니아 장군이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프톨레마이오스(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 속주 총독으로 지명하였다)는 자신이 이 지역의 '왕'이라 선언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그는 심지어 왕조를 개창하기까지 했다. 그후로 약 300년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승계 왕국이 되었다. 여기서 '헬레니즘'이란 문화적·행정적으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에는 새로운 박물관과 도서관 덕분에 알렉산드리아가 전 그리스 세계의 문화적 수도가 되었다. 유클리드 학자들과 수학 천재들, 에라토스테네스, 아르키메데스, 칼리마코스, 테오크리토스 같은 지성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177-9)


"고대 알렉산드리아가 기원전 30년에 독립 정치체로서의 운은 다했다 할지라도 지적·문화적 운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로마 지배하의 알렉산드리아에도 헬레니즘 시대 못지않은 지성인들이 있었다. 또다른 프톨레마이오스인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로 146~17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첫 여성 수학자는 판드로시온으로, 아마도 처음으로 세제곱근을 만드는 기하학 구성을 발명한 인물일 것이다. 히파티아라는 이름의 여성은 수학자 테온의 딸이었다. 히파티아는 아스트롤라베(astrolabe[천문관측 장치])와 수중투시경(hydroscope)을 제대로 사용하였다. 그녀가 기억되는 이유는 똑똑한 두뇌나 수려한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안타깝게도 그녀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순교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는 415년 키릴 주교의 명을 받은 기독교 군중에게 이교도로서 살해당했다. '고전기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187, 190)


12 비잔티온


"비잔티온은 (기원전 688년 혹은 657년) 건설된 후 별다른 정치적 사건이 없다가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의 일부로 페르시아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비잔티온은 다행히도 반란의 주축이던 밀레토스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토스를 (또다른 배다리로) 건너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했을 때는 그들의 요구대로 병력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 편에서 싸우는 그리스인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와 미칼레에서 그리스인들이 거둔 승리는 비잔티온 해방의 전조가 되었다. 스파르테가 아시아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동안 비잔티온이 동맹 본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테가 파우사니아스 장군을 소환하면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 전쟁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비잔티온은 아테나이의 많은 동맹국 중 하나가 되어 1년에 은 15탈란톤이라는 비싼 공납금을 내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195-6)


"아테나이에 비잔티온이 중요했던 이유는 이 도시에 매년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크리미아 등의 흑토지대로부터 아테나이와 그 밖의 에게 해안 지역들로 밀과 주요 식료품을 실어 오는 배를 관리하고 세금을 부과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잔티온은 아테나이 제국 네트워크의 중요한 포인트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미에서 그 직후까지(이때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마침내 괜찮은 함대를 갖추게 되었다) 비잔티온이 가장 중요한 전쟁 목표였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테인들의 승리를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테나이 제국의 해체와 최대 300척에서 1200척까지 되던 엄청난 규모의 아테나이 함대가 감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테인들은 제국 자체엔 반감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새롭게 확장한 에게해 제국이 작동하도록 외부에 하르모스트(harmost, '관리자')라는 사무소를 세웠다. 가장 중요한 관리들은 자연스럽게도 비잔티온에 자리잡았다."(196-7)


13 에필로그


"영어의 정치(politics)는 고대 그리스어의 중성 복수 형용사 폴리티카(politika)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폴리스와 연관된 일'(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속 용례가 가장 유명하다)을 뜻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는 무대 중앙에서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앙으로(es meson)'라고 표현했다. 공적인 일은 그저 시민들의 걱정거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중앙으로' 모여 논의하고 논박했으며 옳든 그르든 그들이 공공선이라고 믿는 것, 도시와 시민의 공공 이해라고 믿는 것을 철저히 검토하였다. 물론 여성은 공동 정치 사업에서 의사 결정의 주체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또한 노예와 비슷한 신분의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 안팎에서 일하며 도시 내의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여가(스콜레skhole, 영어의 '학교school'의 유래)를 제공했다. 그리고 아테나이같이 급진적 민주정이 이루어지던 곳에서만 대부분의 가난한 남성 시민들이 의사 결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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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의 역사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7
윌리엄 H. 브록 지음, 김병민 옮김 / 교유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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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질의 본성에 관하여


"서양에서 초기의 광산업과 야금 활동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났으며, 여기에서 만들어진 금속은 이집트에서 사용되기 위해 거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일반적인 금속들을 효과적으로 제련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 도자기 제작에 처음 적용된 기술의 결과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 증거는 바로 가마였다. 사실, 고대 기술의 공통점을 꼽자면 가마를 들 수 있는데, 가마는 오븐의 역할로 고기를 요리하고 빵을 굽는 두 가지 기능을 모두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 모양으로 성형한 점토를 굳히는 데에도 쓰일 수 있었다. 가마는 유리를 만들거나 광석에서 금속을 추출하기 위해 열의 흐름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개선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더 나은 개선 과정을 거치며 가마는 승화 및 증류기로 개조되었다." "가마(와 가마를 응용한 기구)는 야금술의 발달과 알코올 및 무기산 물질의 발견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화학적 실험 장치와 기구 중 가장 오래된 도구로 여겨질 수 있다."(20-1)


"향수와 유리, 화장품과 도자기를 만들고 청동 제품을 만들거나 금이나 금과 유사한 물건을 제작하는 경험적 기술을 지닌 장인들에게 이론은 그리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 사상가들은 (지금의 우리가 화학적 변화라고 말하는) 이러한 형태의 변화가 어떤 이유와 방법으로 가능한지 알기를 갈망했다. 왜 금속이나 유리는 색깔 있는 광물과 함께 녹았을 때 모습이 바뀌었을까? 갈레나(불순한 산화 납)를 가열할 때 은 구슬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처럼 장인들에 의해 명백히 사실적이고 완성도가 높았던 변형의 사례들을 지켜보면서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들이 물이 증발해 공기로 변화하거나 도토리가 참나무로 성장하는 현상과 유사한 진정한 변형으로 여겼다. 즉, 외형만이 아닌 사물의 본질적인 변화로 본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물질이 무엇인지 자문했다. '어떻게 그리고 왜 사물의 외형과 성질에 변화가 일어날까?'다. 대표적인 예로 탈레스는 질료 혹은 근원적 재료가 물이라고 제안했다."(26-7)


"고대 화학자(연금술사)는 분명 기구와 조작 기법의 대부분을 장인과 기술자, 금속 기술자, 약사 들이 개발하고 사용했던 열처리, 조리, 승화 및 증류 기술과 설비에서 가져왔고, 이 기술들은 후대의 화학자들에게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한편 연금술은 예술 분야에나 사용할 법한 기호화된 언어의 개념을 후대 화학에 제공했다. 하지만 기호화하며 동일한 대상에 여러 종류의 유사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충분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상징적 암시의 정도를 크게 증가시켰다. 이는 결국 후대의 독자들과 해독가들에게 심한 혼란을 야기했다. 가령 그리스시대의 한 연금술 어휘 사전을 보면, 수은은 '용의 씨앗'이나 '이슬', '검은 소의 젖', 혹은 '스키타니의 물', '은의 물', 달의 물', 강물', '신성한 물'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모호한 언어는 현대 실험실에서 연금술적 비법을 재현하며 물리화학적 변화를 정확하게 서술함으로써 하나씩 풀렸다."(33-5)


"'연금술' 용어가 비금속(卑金屬, base metal)의 변형이라는 효과 없는 일로 여겨지고 '화학'이라는 용어가 물질의 분석과 합성에 국한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1753년 완성된 프랑스 백과사전은 화학을 '사물을 구성하는 원리의 분리와 결합을 다루는' 과학으로 정의하고, 연금술을 '금속을 변화시키는 기술'로 정의했다. 이렇게 동의어였던 연금술과 화학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 용어가 되었다." "연금술, 좀더 일반적으로 표현한 고화학은 물질의 화학적 운용과 취급법, 기술, 그리고 화학 실험 기구들이라는 풍부하고 다양한 유산을 근대 화학에 남겼다." "연금술이 제 기능을 발휘한 부분은 예술 분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약 활동에 대한 공헌이었다. 이들 영역에서만큼은 비금속들을 금으로 바꾸려는 시도에서 두드러지게 결여되었던 상업적 이득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이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연금술사들의 원시적인 개념 역시 유용한 이론적 실마리였음이 입증되었다."(42, 46)


2 물질의 분석


"화학에서 근본적인 고민은 물질의 변화이다.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종류의 단일 물질이 합쳐져서 반응물과 다른 특성을 가진 별개의 균질한 물질을 만들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반응물들의 형체가 '잠재적으로' 생성물에 존재한다고 가르침으로써 균질성의 논쟁거리를 해결했다. 이 문제는 단지 화학적 숙제만은 아니었다. 이 고민은 빵과 물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체화하는 성변화(聖變化)라는 가톨릭 교리가 가진 사안이었기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도 씨름했던 과제 중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어떠한 부정도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1473년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의 재발견과 출판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을 다시 유행시켰다. 원론적으로, 원자론은 이 균질성 문제에 더욱 만족스러운 설명을 가능케 했다. 원자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존재하며 원자가 취하는 다양한 구조 때문에 서로 다른 물질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50-1)


"16세기에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 중 하나는 테오파라투스 폰 호엔하임, 곧 파라켈수스였다."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을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어 보이는 물질로부터 실체를 꺼냄으로써 유용한 물질로 분리하는 방법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시 의약품은 약품이 지닌 고유한 '서명'으로 식별될 수 있었는데, 이런 서명은 구체적인 해부학적 인체 기관과 공통점이 있다고 여겨지거나 형태가 닮은 식물의 모양과 색깔로 만든 기호가 사용되었다. 가령, 노란색 꽃은 병든 간의 치료에 적합했음을 나타냈다. 종종 기존 약초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파라켈수스의 의견은 이런 약초꾼들의 주장과는 달랐다. 그는 약으로 꽃이나 약초 자체를 사용하는 대신 알코올 증류처럼 화학적인 방식으로 꽃으로부터 생성한 추출물을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치료화학 또는 의화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학문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화학은 이를 기점으로 두 세기 동안 의학적인 맥락에서 발전하게 된다."(54, 57-9)


"비텐베르크 의대 교수였던 다니엘 제너트(1572~1637)는 아리스토텔레스, 갈레노스, 파라켈수스의 우주론을 미립자 전통과 조화시키는 중도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이 개념은 오랫동안 수많은 중세 고화학자들의 저술이 바탕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과거의 자연미자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제너트는 물질의 다른 성질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파라켈수스가 주장하는 원소들이나 원리들이 아니라 이런 개별 입자의 잠재적 본질과 같은 소(素)들의 결합에 기인한다고 가르쳤다." "제너트는 이런 분리와 재구성 반응을 디아크리시스(diacrisis)와 신크리시스(syncrisis)라 불렀다. 우리는 이 말에서 분석(analysis)과 합성(synthesis)이라는 용어의 원래 개념을 엿볼 수 있다. 미니마(minima,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들)란 반드시 불가분의 원자는 아니지만, 밝혀진 어떤 화학 작용에 의해서도 더이상 분해할 수 없는, 식별 가능한 물질의 가장 작은 크기인 소체(小體)를 의미했다."(65-7)


"화학적 친화성에 대한 연구는 18세기 화학에서 아주 흥미로운 난제 중 하나가 되었다. 화학물질 사이의 연관성(rapports)에 대해 저술한 에티엔 제프로아는 1718년에 첫번째 친화력표를 만들었고, 이 표는 1750년대 이후로 점점 더 정교해지며 발전했다. 꽤 뒤늦게 등장하는 주기율표와 마찬가지로 친화력표는 화학물질의 치환반응에 관한 화학자들이 지식 전체를 효율적으로 요약했다. 이 표는 자연 세계를 그 구성 요소를 가지고 전체를 분석하는 화학자의 힘을 보여줬고 약을 제조하거나 화학 제조 공정을 개선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이 정보가 실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반면에 친화력표는 반응성이나 상대적인 비활성의 원인에 관한 이론적 통찰까지는 제공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요리책처럼, 누구나 광물의 성분을 결정할 수 있게 한 체계적인 분석표의 출현은 무기물에 관한 화학(결국은 여기에 무기화학이라는 칭호가 붙게 된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80-2)


3 기체와 원자


"화학 혁명은 단지 개념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데, 정확한 저울과 유리 기구, 그리고 유디오미터(공기 순도 측정기) 등을 사용해 기체를 만들거나 중량을 재고 가늠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포괄했다. 원소들과 물질 구성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고 화학자들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을 재정비한 화학자는 프랑스 공무원 앙투안 라부아지에였다." "1772년, 라부아지에는 공기 중에서 금속이 연소되었을 때 금속의 무게가 감소하는 대신 오히려 증가한 경우가 있었기에 무엇(플로지스톤)인가 손실된다고 제안한 플로지스톤 이론이 미심쩍다고 지적했다. 이 현상은 처음 관찰된 것이 아니었으나 이러한 예외적 현상은 프랑스 디종의 한 변호사의 연구로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의견은 연소 과정 동안 기체가 금속에 '고정'되고 금속에 갇힌 공기로 인해 무게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추론에 이어 금속의 재(금속산화물)가 분해될 때 '고정된 공기'가 방출된다고 주장했다."(91-3)


"그보다 10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조지프 블랙(1728-99)은 우리가 탄산염(예를 들어 탄산마그네슘)이라고 부르는 물질이 일반 대기와는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고정 공기(fixed air, 이산화탄소의 오래된 명칭)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수년 후, 헨리 캐번디시는 철을 희석한 황산 용액에 반응해 만든 가벼운 인화성 공기(수소)의 특성을 연구했다. 이러한 실험들은 유일신론자인 성직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이룬 눈부신 화학 산업의 촉진제가 되었다. 프리스틀리는 1770년과 1800년 사이에 20여 개의 새로운 기체를 만들고 구별했는데, 여기에는 황 및 질소 산화물, 일산화탄소, 염화수소, 산소 등이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비록 1772년 당시에는 라부아지에가 이런 기체의 발견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기는 하나, 대기 중 공기는 복잡한 혼합물이며 공기만으로 연소가 발생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증거가 이미 상당 부분 존재하고 있었다."(93-4)


"라부아지에는 여전히 신중했고 플로지스톤 이론을 바로 단념하지 않았다. 그가 신중했던 것은 무엇보다 금속이 산에 용해되면 가연성 공기(수소)가 방출되는 반면에 칼크스(금속산화물)를 동일한 산으로 처리하면 어떤 기체도 생성되지 않는 이유를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은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문제는 수분(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이었다." "우리에게는 물이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해서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었는지 실감하기 어렵다. 어떻게 두 종류의 기체가 액체로 변환될 수 있다는 말인가?" "라플라스의 수학적 도움을 다시 한번 받은 그는 밀폐된 용기에 인화성 공기와 산소를 함께 태우면 물이 합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가연성 공기의 이름을 '물을 형성하는 물질'을 뜻하는 수소(hydrogen)로 바꾸었다." "라부아지에는 이제 어휘 사전에서 '플로지스톤'이라는 용어를 제거함으로써 화학의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지위에 섰다."(98-100)


"1804년 무렵 존 돌턴은 원자 크기를 결정하기 위한 장기간의 연구를 통해, 자신이 상대적 원자량을 계산하면서 화학의 새로운 정량적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턴이 관찰했던 것처럼 일정 비율과 당량(등가) 무게는 물질이 연속적인 것이 아니며 물질의 궁극적 입자들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결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돌턴은 이 사실을 알고 실험실에서 수행한 관찰과 측정 결과를 토대로 궁극적인 화학적 입자의 상대적 질량을 계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가령 물의 경우, 1815년 이전 과산화수소가 알려지지 않았을 시기에 라부아지에가 분석한 물은 산소 중량 비율 87.4가 12.6 비율의 수소와 결합했음을 보여줬다." "수소가 가장 가벼운 물질이었기 때문에, 돌턴은 수소를 원자량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만약 수소의 원자량을 하나의 기본 단위로 보면, 산소의 상대 원자량은 대략 7이 된다. 물의 분석 연구는 개선되었고 바로 산소의 원자량을 8로 올렸다."(106-9)


4 유형과 육각형


"1830년에 베르셀리우스는 동일한 원소들이 동일한 비율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알려지지 않은 서로 다른 물리적 배열로 구성된 유기 화합물이 존재하고, 이들의 화학 및 물리적 특성이 매우 다른 이 놀라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성질 현상(isomer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뵐러는 1828년에 시안산은과 염화암모늄을 반응해 만든 생성물이 (그가 기대했던 시안산암모늄이 아닌) '유기' 화합물 요소(urea)임을 보여줌으로써 또다른 놀라운 사례를 제시했다." "이성질 현상은 이후 여러 세대의 화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수백만 개의 황홀하고 다양한 유기 화합물을 이해하고 (단순화시키는) 기본 개념이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칼리구(공 모양의 탄산칼륨 수집 기구)를 사용한 빠르고 정확한 유기물 중량 분석 방법의 발전은 (무기화학과 대조적으로) 유기화학의 폭발에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이론화학과 정밀 성분 분석이라는 두 과학기술은 탄소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다."(122-3)


"무기화학 분석의 완성과 그 확산에 있어서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공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광물학적 구성을 알기 위한 시험들로 이어진 긴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그는 기센대학교에서 체계적인 무기불 분석 방법을 가르쳤으며 이는 카를 프레세니우스와 하인리히 빌과 같은 제자와 조교 들이 논문으로 출판했다. 리비히가 명성을 얻은 것은 그가 놀랍도록 새로운 화학적 발견을 많이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프리드리히 뵐러와 함께 반응물과 생성물의 화합물을 조사하고 처리하여 분석 결과를 이해하는 데 베르셀리우스식 화학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덕이 크다. 이러한 체계적인 원자단 구별 방법(습식 정성 및 정량 분석법)은 1950년대에 실용화학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교육되었다. 리비히가 젊은 나이에 얻은 명성과 지위는 이러한 무기 및 유기화학 분석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생겨난 것이다."(119-21, 123-4)


"로랑은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적 관점을 반대했다. 그리고 결정학에 대한 그의 선행연구, 그러니까 서로 다른 염이지만 동일한 모양을 가진 결정들의 집단을 나타내는 유질동상(類質同像, isomorphism)의 원리에 영향을 받았다. 결국 로랑은 유기분자들이 이원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통합되었거나 '단일 조직'으로 구성된 화합물이라는 관점을 선택했다." "공동 연구자인 게르하르트와 로랑은 단일 화합물과 동족 계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상호 보완적이며 새로운 유기 화합물 분류법을 제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르하르트는 [(CH2)+H2O], [(CH2)2+H2O] 형태와 보다 일반식인 [(CH2)n+H2O] 같은 형태로 유기 화합물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과 관련해 동족계열의 유용함을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은 이론이 아닌 실험에 의한 정렬과 분류라는 점을 강조했고, CH2의 반복 단위가 갖는 진정한 의미는 1858년 케쿨레가 탄소 사슬에 대한 아이디어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비로소 분명해졌다."(128-30)


"프랭클랜드는 무기 또는 유기 화합물 내의 원소들이 다른 원자들과 결합할 때 분명하게 일정한 친화력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달리 말하면, '원소들마다 일정한 원자의 개수와 결합하는 유일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소는 단지 한 개의 다른 원자와 결합하고, 산소는 2개, 질소는 무려 5개와 결합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랭클랜드는 이 규칙성을 '원자성(atomicity)'이라고 불렀지만, 결합이 수소와 '등가'인 단위로 한 개, 두 개 또는 그 이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원자성은 바로 '원자가(valence)' 혹은 '결합가(valency)'로 불리게 되었다." "유기 화합물, 원자가, 구조 화학의 분류에 대한 케쿨레의 이론적 통찰려과 벤젠의 육각형 화학실 설명은 유기화학을 변화켰다. 그는 메탄의 탄소가 4 원자가를 가졌다는 개념을 탄소 화합물 전체로 확장했다." "이제 모든 유기 화합물은 탄소 사슬(연쇄)과 탄소의 4 원자가 개념에 수용되었다."(139-41)


5 반응성


"화학과 물리학의 교육 사이에는 항상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실제로, 18세기부터 두 학문은 각각 별개의 실험 학문 분야로 여겨져왔지만, 그전에는 통합된 방식으로 교육되었다." "빛, 열, 소리, 전기 및 자기의 요소를 가르치면서 화학자들은 종종 물질의 물리적 특성과 이것들이 화학적 변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물리화학(종종 이론화학 또는 일반화학으로 불리는)으로 알려진 제3의 전문적 화학 분야가 출현했다. 물리화학은 무기나 유기화학만이 아닌 화학 전반을 배우는 기반이 될 운명이었다. 이러한 발전들은 필연적으로 수업과 실험 연구를 위한 화학자들의 연구 공간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 초 베르톨레의 화학반응에 대한 연구는 화학적 변화가 물리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친화력은 수십 가지 다른 방식으로도 성립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화합물들이 일정한 비율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등장했다."(156-8)


"화학에서 물리학의 영향을 받은 가장 중요한 분야는 열역학이었다. 열역학 법칙은 운동하는 분자의 열과 힘을 생성하는 능력의 척도인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것이다." "화학자들이 열역학 제 2법칙을 도입하는 것은 무척 더뎠다. 무엇보다도 엔트로피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어떻게 이 법칙을 그들의 실험 실습에 응용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열역학 표기법과 방정식을 따르는 데에 필수적인 수학적 지식을 가진 화학자들조차도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일찍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1870년대에 기체 입자의 움직임을 통계적 평균치로 설명한 이후(통계역학) '무질서도'라는 면에서 엔트로피를 이해하는 것이 다소 용이해졌다. 즉 엔트로피가 높을수록 물질 분자 체계 안에서 무질서도가 커졌다. 이윽고 엔트로피는 화학반응의 동력이 되었다. 고체에서 액체를 거쳐 기체로 이동하는 물리적인 변화에서, 분자들이 점점 더 무질서해짐에 따라 엔트로피는 증가했다."(160-4)


"1800년대 후반, 독일에서 공부한 러시아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무기화학 분야에 질서를 부여했다. 이 질서들은 모두 전적으로 1860년 이탈리아 카를스루에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 화학 회의에서 발표한 칸니차로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수립되었다. 즉, 동일한 온도와 압력에서 동일한 양의 기체는 동일한 분자 수를 포함한다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모든 화학자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규칙을 수용함으로써 유기화학자들이 고유한 실험식을 사용할 수 있게 합의한 원자량 목록을 제공할 수 있었고, 이는 분자 구조식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당시 합의된 원자량은 이후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했다." "다만 1875년과 1879년에 각각 그 실체가 드러난 갈륨과 스칸듐처럼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원소들에 대한 멘델레예프의 예측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화학자들이 주기율표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166-7)


"키르히호프는 빛을 특유의 스펙트럼으로 쪼갤 수 있는 프리즘을 이용한 불꽃 관찰을 통해 불꽃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분젠에게 제안했다. 그들이 '분광기(spectroscope)'라고 이름 붙인 이 새로운 기구는 이전에 없던 강력한 분석 기구의 하나로 입증되었다. 분젠과 키르히호프가 1859년 이 기구의 완성을 발표했을 당시, 그들은 이 기구를 가지고 두 종류의 새로운 원소를 확인하고 분리했다는 것을 동시에 밝힐 수 있었는데, 두 원소는 바로 세슘과 루비듐이었다. 그리고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두 종류의 원소인 탈륨과 인듐이 분광법으로 발견되었다. 한편 분광기는 천문학에도 혁명을 일으키고 '우주화학'이라는 새로운 세부 학문 분야를 만들어냈다." "닐스 보어는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회전하는 단순한 행성 원자 모델을 구축했다. 보어 덕분에 스펙트럼은 원자와 분자의 전자 구조들을 표현한 것으로 밝혀졌다. 1920년대 중반까지 분광학은 물리학과 무기화학을 상당 부분 통합시켰다."(168-71)


6 합성


"19세기 초, 뵐러는 요소(urea)를 인공합성하며 분자의 이성질 현상을 확인했고 유기 화합물도 동일하게 돌턴의 법칙을 따르며 인간이 유기 화합물을 만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화학적 구조를 결정할 때, 화학자들은 곧 규칙적인 양상을 따르는 화학반응을 사용하면서 분자를 다루는 데에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가령 두 개의 탄소 원자로 탄소 사슬을 늘이기 위해, 두 개의 다른 알데하이드(CHO 그룹)를 지방산의 소듐염이 있는 상태에서 함께 가열하는 식이다. 그러면 두 알데하이드 물질은 탈수반응을 일으키며 동시에 사슬로 결합한다. 이 방법은 퍼킨이 계피산을 만들려고 고안한 이후로 퍼킨의 반응 또는 축합반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호프만은 질소를 포함한 탄소 고리 화합물에서 분리가 일어나며 열린 사슬을 형성할 수 있는 반응을 고안했고, 이는 '호프만 분해'로 알려졌다. 이러한 수백 가지의 '유명한 반응들'은 모두 합성을 설계하는 데 이용할 수 있었다."(190, 194-5)


"20세기 전반부에는 분자 구조의 결정과 자연에서 발견되는 화합물들의 합성이 주를 이뤘으며 1901년에 제정된 노벨상은 주로 이 부문에 수여되었다. 두 가지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화학자 아돌프 폰 베이어와 에밀 피셔였다. 베이어는 1880년 천연염료인 인디고를 합성한 공로로 190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후 화학회사인 바스프에 의해 상업적으로 규모가 확대된 인디고의 합성은 당시까지 이 염료를 천연으로 생산했던 농업 경제를 망가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유기화학자들이 천연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어의 제자인 피셔는 복잡한 유기 화합물의 합성을 통해 베이어의 연구를 확장함으로써 당, 효소, 퓨린, 단백질의 정확한 구조를 입증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피셔는 생화학 및 거대분자(고분자) 연구를 위한 화학적 기틀을 마련하였고, 천연물 화학 분야에서 분해 및 합성에 관한 방법론을 정립했으며 이 방법론은 1950년대까지 사용되었다."(195-8)


"플라스틱과 레진, 레이온과 나일론 같은 중합체로 출발해 새로운 인공물질을 만들어내는 20세기 화학자들의 합성 능력은 천연물질을 대상으로 한 구조 분석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분자를 합성하는 능력이 반드시 유용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심하게 감염된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 전시의 압박 속에서 영국의 화학자들은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합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생산 규모를 늘리기는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대신에 페니실린은 스트렙토마이신과 테트라사이클린처럼 구조가 이미 알려진 다른 항생제들과 마찬가지로 곰팡이를 직접 배양하여 제조되었다. 이 개조된 배양 기술은 곧 생명공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변화와 치환의 과학으로서의 화학은 자연계를 완전히 뒤집었다. 자연의 모방은 자연과 결별하고 이를 뛰어넘어 인공 세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가져왔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시작된 원자의 심오한 구조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분석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201-2)


"20세기 전쟁은 모두 화학자들의 전쟁이었다. 해상 봉쇄와 육상 공급로 차단으로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거나 대체제를 만들 새로운 방법을 찾는 데 힘을 써야 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질소 고정' 공정인 하버법(Haber process)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다." "탄약 제조라는 또다른 전선에서 화학자들은 TNT와 아마톨 폭약, 그리고 고성능 폭탄용 리다이트뿐만 아니라 미사일 추진체에 사용되는 무연 코르다이트 등을 제조하기 위해 다양한 방향성 유기 화합물의 생산을 늘려야 했다." "화학전의 실행을 포함한 이런 모든 사례들은 존 아가가 언급한 것처럼 '조직화된 과학과 정비된 혁신'의 표출이었다. 화학전에 사용된 약품에 대한 독일의 연구가 전시가 아닌 평시에, 그것도 살충제 생산공정에서 추진되었다는 것은 거듭 아이러니하다. 프리츠 하버에 의해 만들어진 치클론B라고 명명된 화학물질은, 1940년대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에 독가스로 사용된 약품이었다."(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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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7
미셸 배들리 지음, 노승영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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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학과 행동


"행동경제학은 우리의 결정이 비용·편익의 합리적 계산과 더불어 사회적·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사람이 (선택의 금전적 비용과 편익을 쉽고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일종의 계산기이며 주위 사람들이 뭘하는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경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개개인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과 이를 떠받치는 제도의 실패 때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전통 경제학자들은 제약에서 합리성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으나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이 초합리적 존재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 의사 결정의 한계에 주목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은 대체로는 합리성이 변화 가능하며 우리가 처한 상황에 좌우된다고 인정한다. 좋은 정보를 접할 수 없을 때, 서둘러야 할 때, 인지 제약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경험할 때─이럴 때 우리는 시간과 정보가 충분한 완벽한 세상에서라면 내리지 않았을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12-6)


2 동기와 유인


"외적 동기는 우리 개개인의 바깥에 있는 유인과 동기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우리로 하여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도록 세상과 주위 사람들이 부추기는 경우다. 그러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흔하고 강력한 외적 유인은 돈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임금을 받기 때문이다. 더 강력한 외적 유인으로는 신체적 위협이 있다. 하지만 외적 동기는 비금전적 유인─이를테면 인정과 성공 같은 사회적 보상─에서 올 수도 있다. 임금 인상, 좋은 시험 성적, 상장과 부상, 남들의 인정 등은 모두 외적 보상이다. 내적 동기는 우리의 내적 목표와 태도가 미치는 영향을 일컫는다. 내적 반응은 이따금 우리가 노력하도록 독려한다. 우리는 외적 보상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 직업적 자부심이든 의무감이든 대의에 대한 충성심이든 수수께끼를 푸는 즐거움이든 신체 활동의 쾌감이든, 우리 내부의 무언가에 의해 내적으로 동기가 부여되면 외적 유인은 없어도 된다."(26-7)


"유인과 동기는 내적(intrinsic)인지 외적(extrinsic)인지를 불문하고 우리의 직장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대다수 직장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내적 영향과 외적 영향의 상호 작용이다. 외적 유인과 동기의 사례로는 우리가 받는 임금과 고용되었을 때 얻는 사회적 인정─특히, (의료계나 교육계처럼) 가치를 인정받는 직업일 경우─이 있다. 일에는 내적 동기도 작용하는데, 이를테면 우리는 도전을 즐기거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만족을 느끼거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임금 인상이 노동자에게 노동자에게 더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금전적 혜택 때문만이 아니다. 좋은 대우가 직원의 신뢰와 충성에 미치는 영향을 비롯한 사회적·심리적 보상과 유인 때문이기도 하다."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는 금전 교환이 전부가 아니다. 충성, 신뢰, 보답 등을 비롯한 사회적·심리적 유인과 동인도 작용한다. 조지 애컬로프 연구진은 이를 일종의 '선물 교환(gift exchange)'이라 일컫는다."(35-7)


3 사회적 삶


"행동경제학에서 신뢰와 보답을 분석하는 출발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불공평한 결과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접을 받고 싶어하지 않으며 남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면, 신뢰하고 보답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사회적 상호 작용의 이 핵심 요소는 공정에 대한 선호를 남들과의 비교와 짝짓는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보다 훨씬 잘나거나 못난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불공평한 결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 선호를 '불평등 회피(inequity aversion)'라고 부른다." "공정함의 선호는 자원봉사나 기부 같은 이타주의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베풀면 즐겁고 이따금 마음이 따스해지기 때문이다. 몇몇 실험에 따르면 이것이 언제나 순수한 이타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임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일 때도 있다."(44-5)


"사회적 본성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군중을 모방하고 따르려는 경향이다. 딴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들을 모방하는 것은 말이 된다. 군중을 따르는 것은 합리적인 사회적 학습 장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충동적으로 군중을 따를 때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무심코─아마도 우리에게서 진화한 군집 본능을 따라─그렇게 한다." "군집 행동을 설명하는 한 가지 해석은 모든 결정을 백지 상태에서 내려야 할 때의 시간과 인지적 노력을 절약하게 해주는 빠른 의사 결정 도구─행동경제학자들이 어림짐작(heuristic, 휴리스틱)이라고 부르는 것─라는 것이다." "어림짐작의 문제는, 빠르고 편리하고 종종 충분히 훌륭하게 작동하기는 하지만 체계적인 행동 편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과 친구를 모방하는 것은 귀중한 사회적 정보를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군집 행동은 여러 어림짐작 중 하나에 불과하다."(54-6, 63)


4 빠른 판단


"정보에 짓눌리면 빨리 결정하기가 힘들다. 이때 우리는 정보 과부하(information overload)가 걸렸다고 말한다. 선택에 짓눌렸을 때에도 빠르고 정확하게 결정하기가 힘든데, 이것을 선택 과부하(choice overload)라 한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선택이 좋은 것이며 선택지가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들어맞는 제품과 서비스를 더 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우리의 복리가 커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해서 결과가 나아지지는 않는 듯하다." "현대에는 선택 과부하의 문제가 유난히 심각하며 정보 과부하도 이를 부채질한다. 선택 과부하를 맞닥뜨리면 소비자는 빨리 결정을 내린다. 이를테면 제시된 모든 선택지를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첫째 항목을 선택한다. 선택이 너무 복잡하면, 특히 눈에 보이고 즉각적인 이익이 없는 '지루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69-70)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특히, 서두를 때─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접근하고 끄집어내고 회상하기 쉬운 정보를 이용한다. 이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종종 현재 상태을 기준점으로 삼아 기존 상황에서 멀어지는 변화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과 친숙함 편향(familiarity bias)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변화에 저항하기도 하고, 사건을 현재 상황과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판단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의 많은 판단은 결정이 우리를 현재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지게 할 것인가를 바탕으로 삼는다. 새 일자리를 찾거나 집을 팔 때 적정 임금이나 적정 주택 가격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지금 벌고 있는 금액, 이 집을 샀을 때 지불한 가격, 이웃이 자기집을 팔면서 받은 가격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문제는 이 판단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힘과 거의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73, 84)


5 위험이 따르는 선택


"기대 효용 이론가들은 사람들이 결정에 관련되고 가용한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활용한다고 가정한다. 또한 우리가 비교적 복잡한 수학 도구를 이용하여 효용을 극대화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의 경제학자 모리스 알레는 사람들이 위험이 따르는 상황에서 선택할 때 종종 변덕을 부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명한 행동 역설 중 하나가 바로 알레 역설(Allais Paradox)이다. 알레 역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위험이 따르는 결과들에 대해 안정적이고 꾸준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결과가 확실한 선택지를 위험이 따르는 일련의 선택지와 함께 제시하면 사람들은 확실한 결과를 선호한다(어떤 전망들을 제시하느냐에 따라서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도 하지만).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이 효과를 확실성 효과(certainty effect)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운을 시험하고 내기를 거는 것을 좋아하지만, 확실한 결과를 제시받으면 더 높은 보상을 위해 추가적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94-5, 99)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이 손실을 피하려 할 때는 위험을 더 감수하고 이익을 얻으려고 도박할 때는 위험을 덜 감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손실에 직면했을 때 위험 감수를 선호하는 현상이 이익의 맥락에서 위험 회피를 선호하는 현상의 거울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영 효과(reflection effect)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고립 효과(isolation effect)라는 셋째 효과도 발견했다. 이것은 제시된 대안 중에서 중요한 요소를 무시하는 경향이다. 우리는 모든 관련 정보를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보 조각들을 떼어내 판단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통찰을 종합한 '전망 이론 가치 함수'로 우리의 주관적 가치 인식을 표현한다." "일정한 양의 손실이 우리가 인식하는 가치를 손상시키는 정도는 같은 양의 이득이 우리가 인식하는 가치를 증가시키는 정도보다 훨씬 크다. 100파운드를 얻는 기쁨보다는 100파운드를 읽는 속상함이 훨씬 큰 법이다."(104, 107, 114-6)


6 시간


"표준 경제학에서는 어떤 사람이 오늘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미래의 같은 기간에 대해서도 같은 조바심을 나타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시간 일관성(time consistency)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에서 얻은 증거를 토대로 표준 경제학적 접근법에서 가정하는 시간 선호의 일관성이 사람(또는 그밖의 동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기적으로는 인내심이 '불비례적으로(disproportionately)' 약하지만, 미래를 계획할 때는 더 인내심을 발휘한다. 이것이 시간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이다. 즉, 지연된 결과에 대한 선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시간 선호는 일정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 편향(present bias)을 겪는데─나중의 큰 보상보다 당장의 작은 보상을 불비례적으로 선호한다─이것은 내재된 시간 비일관성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인내심을 발휘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한다."(123-5)


"우리가 먼 미래를 계획할 때 더 인내심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콧 릭과 조지 로웬스타인은 이것을 편익 대 비용의 상대적 실질성(tangibility)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오늘의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다. 유혹을 거부하는 데는 실질적인 단기적 비용이 들며, 이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다이어트, 운동, 금연 등 예는 수없이 많다. 초콜릿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즉각적인 실질적 쾌락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할 때처럼 당장 번거로움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 미래의 목표는 멀고 덜 실질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오늘 자제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누구나 한 가지씩 미루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헬스장에 가는 일을 미룬다. 진득한 자아는 미래에 운동 부족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한다. 하지만 성급한 자아는 지금 편안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소파에 앉아 초콜릿칩을 먹는 것을 선호한다. 이로 인한 순(純)효과는 어느 자아가 지배적인지에 달렸다."(127-9)


7 성격, 기분, 감정


"성격은 많은 경제적·재무적 의사 결정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의사 결정을 하려면 곰곰이 따져봐야 할 때가 많은데, 성격 특질은 인지 능력을 결정하며 인지를 통해 선택을 좌우한다. 이로 인해 학업 성취, 직무 성과, 사회적 기술이 결정되기에 그 결과는 종종 일생에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경제적·사회적 삶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성격 특질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믿음직한 동료를 대체로 선호한다. 파티에서는 유머 감각이 있는지 여부가 관심사일 것이다. 성격 특질에 맞는 직업도 다르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찾아가고 싶은 의사는 공감 능력이 있고 인지 능력이 뛰어나서 증상과 진단을 쉽고 정확하게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레스토랑에 갈 때 우리가 원하는 주방장은 기발하고 엉뚱한 사람이다. 심지어 주방장이 성마르고 창의적이고 변덕스러울수록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거라 맏기도 한다. 성마르고 창의적이고 변덕스러운 의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151-2)


"섬(insula)은 통증, 굶주림, 목마름, 분노, 혐오 같은 부정적 정서 상태를 처리한다. 변연계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뇌 속 깊숙한 곳에 들어 있어서 그림으로 나타내기가 쉽지 않다. 섬은 충동적이고 자동적인 의사 결정 유형에 관여한다." "최후통첩 게임에서 섬은 컴퓨터의 부당한 제안보다는 사람의 부당한 제안에 대해 더 심하게 활성화되었으며, 제안이 부당할수록 섬 반응이 커졌다. 참가자들의 섬 활성화에는 예측력도 있었다. 섬이 많이 활성화되는 참가자들은 부당한 제안을 거절하는 비율이 훨씬 컸다. 산피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부당한 제안에 반응하는 기전이 악취에 반응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부당한 대우는 분노와 더불어 '도덕적' 유형의 혐오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의 전전두피질은 나중에 수용된 부당한 제안에 대해 더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이것은 부당한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며 이를 거부하려는 정서적 충동을 극복하려면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168)


8 거시경제에서의 행동


"기존 거시경제학은 모든 노동자와 모든 기업이 같고 결정도 똑같은 방식으로 내린다고 가정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완벽히 합리적이기에, 어떤 사람들이 거시경제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묘사하는 일도 비교적 수월하다. 표준 거시경제학 이론에서 묘사하는 것은 한 개인─대표적 행위자(representative agent)─으로, 그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많은 표준 경제학 이론에서 대표적 행위자는 모든 기업이나 모든 노동자의 행동을 대표한다. 대표적 행위자의 행동을 곱하면 거시경제 모형이 된다." "하지만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합리적인 대표적 행위자라는 수단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 있게 종합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성격과 감정의 차이, 행위자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이야말로 행동경제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에는 대표적 행위자가 단 한 명도 없다.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그 대신 총체적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184-5)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금융과 금융 불안정에 미치는 영향에도 주목한다. 역사에 기록된 투기적 거품들은 냉철한 합리적 행위자가 자산 매입의 상대적 비용과 편익을 평가할 때 신중한 수학적 계산을 한다는 표준 경제학의 시각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먼 민스키는 이러한 금융 불안정을 설명하기 위해 신용 순환 이론을 발전시켰다. 케인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취약한 금융 체계와 이 취약성이 거시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민스키의 분석에서는 정서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스키는 공포와 공황의 순환이 경기순환을 추동하고 금융 체계의 취약함이 극단적 변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기순환은 처음에 투기적 도취와 기업가의 지나친 낙관주의라는 물결에 휩쓸린다. 은행은 대출을 지나치게 늘리고 기업은 차입을 지나치게 늘린다. 결국 이 호황에 탄탄한 토대가 없음을 누군가 깨닫고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고, 야단스럽게 불황 국면이 찾아온다."(186-8)


9 경제적 행동과 공공 정책


"전통적으로 조세와 보조금은 정부와 정책 입안자가 시장의 기능을 개선하려고 이용하는 주된 정책 수단이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례로 흡연이 있다. 흡연이 공중 보건 체계를 압박하여 납세자에게 비용을 발생시키면 담배에 과세하는 것이 유익하다. 흡연의 유인을 줄일 뿐 아니라 정부가 보건 체계에 투여할 세입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특정 지역에서 산업이 쇠퇴하고 있다면 보조금을 이용하여 그 지역의 경제 활동을 증진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인위적 시장 시스템은 '시장 부재(missing market)'를 대체한다. 오염은 단순한 사례다. 기업이 기업이 공기나 물을 오염시킬 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기업은 공짜 오염 허가를 얻은 셈이 된다. 오염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에 대해 누구에게도 보상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에 오염에 대한 시장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로널드 코스의 통찰에 근거한 해결책은 인위적 시장(배출권 거래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99-200)


"행동공공정책은 시장 실패에 주목하기보다는 행동 변화(behaviour change)에 초점을 맞춰 사람들을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의사 결정으로 유도하여 사람들이 일상적인 결정과 선택을 내리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넛지』의 저자들인 세일러와 선스타인은 정책 입안자들이 효과적인 정책 수단을 설계하려면 사람들의 의사 결정을 좌우하는 어림짐작과 편향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사람들의 의사 결정 구조를 재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통찰을 바탕으로 두 사람은 이른바 우리의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를 규명하면서, 넛지를 일종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라고 표현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에게 단순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 점화와 넛지를 설계하여 사람들의 결정을 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 '좋은' 결정이 강화되고 '나쁜' 결정이 억제되도록 자주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이 모든 전략은 행동공공정책 입안자의 도구로 쓰인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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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주공아파트 - 단지 신화의 시작 케이 모던 1
박철수 지음 / 마티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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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조국 근대화를 지향한 국가 재건'과 '현대적인 집단 공동생활 양식을 위한 생활혁명'은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단지화 전략을 통해 생산되는 〈아파트 단지는 일반 시가지 주택지보다 공급하는 주택 수도 많고 환경 수준도 높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개발 방식〉이었다. 정부와 주택공사 관리자들은 이 효율성에 대단히 만족했을 것이다. 단지 내 도로, 공원, 놀이터 등은 단지 입주자들에게 맡겨버리고 정부는 단지 바깥의 간선도로 등 최소한의 기반시설만 준비하면 끝이었다. 마포주공아파트는 '단지화 전략을 통해 입주자들의 관리, 안전, 생활편의 등 도시의 공공기능을 사적 비용과 수단을 통해 조달하도록 함으로써 개발 비용을 사회에 부담하는 행위'의 출발점이다. 한국 아파트단지의 전범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주택 공급은 정확히 이 방식으로 반복된다. 1인당 국민소득과 국가예산이 수십 배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는 단지 내 모든 것을 입주자에게 부담시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16-7)


1 전사(前史): 프롤로그


"5·16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밀어붙인 대표적 국가 프로젝트가 마포주공아파트다. 〈군부는 자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스스로 혁명이라 부른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또 2년 뒤 약속한 정권 이양을 번복하고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할 필요가 절실했다. (···)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2월 17일까지 2년 6개월가량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군부가 완성한 프로젝트는 국립원호원, 새나라자동차 공장, 워커힐 호텔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일반 시민의 눈 바깥에 있는 것들이었다.〉 군인들은 빵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민감하게 포착했고 『사상계』의 근대화론과 경합시켜 그것을 정치적 수사로 전유했다. 이런 맥락에서 공장이나 호텔과 달리 시민들의 일상과 직접 관계하는 주거 프로젝트였던 마포주공아파트 1단계 준공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27-9)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인 1962~1966년 사이 주택투자는 국민총생산의 1.7퍼센트에 불과했고(선진국의 경우 6~8퍼센트), 전체 투자 중 공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8.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토건국가로 불릴 만큼 건설산업 비중이 커진 것은 나중의 일이다. 1962년의 산업별 투자계획만 보더라도, 계획 기간 중 2차 산업으로 분류된 건설업은 정부(공공)와 민간의 투자 비중이 각각 36.6퍼센트와 63.4퍼센트였고, 3차 산업으로 분류된 주택 부문에서는 정부와 민간이 각각 16.9퍼센트와 83.1퍼센트를 차지했다. 경제개발 정책 초기부터 주택 공급은 정부의 1차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간 중심으로 건설산업을 육성해 주택을 공급한다는 것이 정책의 기본 방향이었다. 공공주택 보급은 처음부터 고려 사항이 아니었고, 융자를 지원해 민간 주도로 주택을 공급하고자 했다. 이는 국민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집을 마련하라는 신호였기에 이후 투기 자본이 쉽게 유입되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37-9)


2 근대 산업시설의 태동지: 도화동 연와공장


"'도화동 연와공장'으로 불린 벽돌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것은 1907년이었다. 다음 해인 1908년 서대문에 '경성감옥'이 조성됐는데, 일제의 조선 강탈 이후 그 시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포화상태에 이르자 조선총독부는 1912년에 마포구 공덕리 105번지에 새로운 '경성감옥'을 만들고 가까운 곳에 있던 도화동 벽돌공장을 공덕리 경성감옥의 노역장으로 삼았다." "각종 교정시설은 법무부 관할이다. 일제강점기 형무소 노역장은 해방 이후 미군정청 사법부를 거쳐 대한민국 법무부로 이양됐다. 마포주공아파트가 들어서게 될 넓은 부지와 시설 일체는 해방 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법무부 관할 자산이 됐다. 1957년까지 벽돌 공장이 운영되었으나 생산을 중단한 뒤에는 거의 버려진 채소밭이 되어 있었다. 마포교도소가 안양교도소로 통합, 이전되면서 별다른 용도 없이 법무부 관할 국유자산으로 남아 있던 것을 주택영단이 마포아파트 건설 부지로 매입하기에 이른다."(51-3)


# 대한주택영단 : 대한주택공사의 전신


"'도화정 6-1'의 소유자는 남산정 3정목에 거처를 둔 송종헌으로, 정미칠적(丁未七敵), 경술국적(庚戌國敵) 등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 친일 인사 송병준의 아들이다. 일진회를 이끌며 일제의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송병준은 일제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5등작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자작을 받았고 중추원 고문을 맡았는데, 1920년 백작으로 승작했다. 그의 사후 송종헌은 아버지의 백작 작위를 승계했다. 대정 9년인 1921년 8월 21일에 송종헌 소유의 '도화정 6-1'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산정 3정목 31번지에 주소를 둔 그의 아버지 송병준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다. 송병준 소유가 된 도화정 6-1은 다시 몇 차례 사인 간의 소유권 이전이 있었고, 1933년 11월 25일에 국유지가 되었다. 이후 특별한 변동이 없다가 1971년 11월 19일 대한주택공사로 소유권이 변경되었다. 1972년 5월 26일에는 면적이 1만 4,121평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마포주공아파트 단지의 면적 1만 4,141평과 거의 같은 크기이다."(58)


3 국가 프로젝트의 이데올로기


"발전국가와 건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난다. 1960년대 한국에서 미래를 현재로 호출하는 건축의 이데올로기와 발전국가의 계획은 유례없이 공명했다. 장동운의 시범아파트는 국가 주도 발전 전략을 추진하던 신생 독립국이자 후발 국가의 이데올로기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단지의 규모와 이를 채울 주거동의 높이'가 '시범'의 가늠자였다. 10층짜리 주거동 11개가 울타리를 두른 듯한 부지에 빽빽하게 들어찬 아파트단지의 모습이 실제 공급할 물량보다 더 중요했다. 아파트의 점유율이 0.77퍼센트에 불과했던 1970년에서 10년쯤 더 거슬러 올라간 1961년에 중앙집중식 난방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를 입주자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고 내리는 장면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미래 풍경이었다. 어떤 면에서도 당대에 불가능해 보였던 예외, '각종 첨단 설비와 장치'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매체였다. 이는 〈근대문명의 혜택〉이었고, 체제 홍보와 대북선전의 장치였다."(69-71)


"대한주택영단 주택문제연구소 단지연구실장을 역임한 박병주는 1967년 발표한 글에서 마포의 임대아파트가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임대아파트가 사라져도 괜찮은지 탄식에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마포아파트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장점으로 '공영임대아파트'라는 사실을 꼽았다. '공영주택 건설 비용에 정부의 정책 자금이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대단위 주택지에서 (공공이) 먼저 몇 곳을 골라 집을 지은 뒤 이를 모범적 선례로 삼도록 민간을 지도하는 의미'가 '시범'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마포아파트 건립을 추진한 이들에게 임대냐 분양이냐는 부차적 문제였고, 이 결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규모, 이 규모가 선사하는 새로운 도시 경관, 즉 발전과 등치되길 원한 혁명의 이미지였다."(83)


4 마포아파트의 이데올로기


"도시를 수평으로 끊임없이 확장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단독주택 보급 정책은 교통난과 공원 침탈 등의 문제를 일으키기에, 대안은 '도시의 입체화'라는 생각이 1960년대 서구와 일본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단순히 고층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도시로의 전환을 꾀했다." "대한주택공사 기술이사 홍사천은 고층화에도 난점은 있다면서 〈무작정으로 고층화된다면 미국의 도시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소규모 단지계획을 지양하고 대단지로 구성하듯이 도심부의 한 큰 구역을 서로 연관 있는 한 단위로 고층화시키는 '슈퍼블록 시스템'인데, 명동이면 명동 한 구역을 종합적으로 계획해 나가는 것인데, 앞날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슈퍼블록에 의한 입체도시 구현, 그리고 대규모 단지화 전략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이 슈퍼블록 중심의 입체적인 개발 계획은 이후 본격화되는 도심 재개발의 기본 방침으로 자리 잡는다."(101-6)


"또 홍사천은 다른 글에서 주거지의 이상은 지구 전체를 계획하는 것이라면서, 〈지구마다 중앙에 초등학교가 있고, 점포가 있고, 통행인과 자동차도로가 분리되어 어린이나 어른이나 모두 즐거운 '커뮤니티' 생활을 함으로써 주택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대지의 활용이나 수용 인구 면에서 마포아파트가 월등히 효율적인 계획이라는 주장이자 결론인 동시에 향후 대단지 개발 및 재개발로 아파트를 공급하는 정책을 예견하는 주장이었다." "건축가 강명구는 자신이 마포아파트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정부의 강력한 정책 반영으로 주택공사의 영단을 얻어 꿈에만 그리던 고층주택의 실현에 이르게 된 것'이며, 앞으로도 '한층 강력한 주택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층 강력한 주택 정책'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마포아파트 설계와 건설에 참여한 경험은 기술 관료와 건축가 들의 욕망을 더 크게 부풀렸다."(106-7)


5 총력 설계 체제가 만든 3가지 주거동


"최종 채택된 Y자형 주거동은 1962년 8월 31일부터 11월 28일까지 공사가 진행됐으며, 一자형 주거동은 1964년 11월 7일 착공해 1965년 5월 12일 준공했다." "각종 준공보고서를 통해 1964년 11월 7일 착공해 1965년 5월 12일 모두 준공한 것으로 확인한 一자형 주거동은 최초 설계 과정에서 채택한 편복도형 진입 방식과는 달리 모두 계단실형으로 변경됐다. 1차 준공한 Y자형 주거동 6동을 전제조건으로 둔 상태에서 주출입구 좌우에 1동씩을 배치하고 부출입구 왼편에 1동, 그리고 Y자형 주거동 뒤쪽 여유공간을 이용해 다시 1동을 추가로 배치함으로써 10개 주거동으로 이루어진 마포아파트의 전체가 완성됐다. 처음부터 분양을 염두에 두었던 一자형 주거동은 1964년 3월 공고를 시작으로 분양에 나섰으며, 임대아파트로 구상했던 Y자형 주거동은 애초엔 임대를 했다가 1967년 8월부터 분양 전환 절차에 돌입하며 입주자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198-9)


6 USOM의 반대와 설계변경


"10층 주거동 11개로 구성한 마포주공아파트 최초 설계는 1961년 9월 마무리됐다. 최초 구상한 10층 높이의 아파트 주거동이 6층으로 변경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를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대한주택공사는 미국의 반대와 함께 당시의 전력 사정과 기름 부족, 열악한 상수도 현황 등을 꼽았다. 당시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USOM(미국경제협조처)은 아파트보다 난민구호주택을 더 많이 지을 것을 강력하게 원했고, 언론에서도 전기와 유류 사정을 들어 중앙난방과 엘리베이터 설치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했다. 서울시도 마실 물이 귀한 판에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며 반대에 가세했다. 여기에 덧붙여 상습 침수지였던 부지의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10층이나 되는 육중한 건물이 들어서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었다. 6층으로 변경되면서 중앙난방도 개별 연탄보일러로 바뀌었다. 이 반대 의견 가운데 군사 정부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미국이다."(216-9)


"1961년 11월 15일 USOM은 대한주택영단과 Y자형 주거동 6개로 이루어진 1단계 임대아파트에 대해 설계협의를 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협의 결과를 11월 22일에 문서로 만들어 회람했다." "USOM의 검토 의견은 점잖은 외교적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설계 자체가 모든 면에서 미흡하다고 평가하며 통합적 대안 마련이 우선이라면서 대한주택영단의 마포아파트 프로젝트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런 사업에 미국이 구체적인 지원을 하거나 힘을 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이상을 무리해서 실현시켜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반면, 민정이양 약속 기한을 얼마 앞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인들에게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해야 하는 사업이 마포아파트였다. 다가올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와 제6대 국회의원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혁명의 가시화를 위해 도화동 연와공장은 마포아파트단지로 변모해야만 했다."(219, 229-31)


7 임대에서 분양으로, 한국 주택 공급의 운명


"마포주공아파트가 다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국고 손실 논란까지 일며 대한주택공사가 시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은 것은 임대아파트 450세대를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1967년 4월이다. 대한주택공사의 계획은 1967년 8월부터 11월 30일까지 Y자형 주거동 450호 모두를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주된 이유는 대한주택공사의 자금난이었다." "임대로 입주했으나 갑자기 분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입주자들에게 대단히 큰 경제적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마포아파트분양대책투쟁위원회'가 제출한 진정서에 담긴 '진정 취지' 3가지는 곧 임차인들의 현실적 요구였다. '임대아파트의 분양 전환에 있어 ①분양가 산정은 「공영주택법」을 따라야 하며, ②현재의 융자금은 당연하게도 증액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③분양가에서 융자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도 한꺼번에 낼 형편이 못 되니 이를 여러 차례 나눠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246-7)


"결국 대한주택공사는 관할 부처인 건설부와 협의를 거쳐 공사의 책임 아래 융자금 증액과 입주금 분납 등을 조정하라는 방침을 받아냈다." "이렇게 마련한 대책을 의결한 것은 1967년 11월 18일 개최한 제63차 이사회였다. 이사회 안건은 「마포아파트 분양 방안」 단 한 건이었다. 이사회가 해당 안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함으로써 마포아파트 Y자형 임대용 아파트 450호에 대한 분양 전환 논란은 일단락됐다. 마포아파트분양대책투쟁위원회 입장에서는 「공영주택법」과 「공영주택법시행령」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되면서 불거진 갈등은 결국 정부가 공급하는 주택의 법적 규정과 성격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지난 세기 한국에서 공공이 저소득층을 위한 공동주택을 공급하고 관리한 시기는 무척 짧았다. 주택은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은 굳어졌고, 이후 임대아파트는 분양 아파트단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소득층의 남루한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254, 258)


8 마포주공아파트의 전방위 파급 효과


"경제개발5개년계획 제1차와 제2차의 주택 부문 정책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자본을 충당하는 방법이었다. 경제개발을 위한 공감대는 형성돼 있었지만 여전히 빈곤했고 미국의 원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조와 차관에 의존하던 자본 동원 방식은 변화가 불가피했다. 민간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 여러 제도와 정책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다." "1967년 3월 30일에는 「한국주택금고법」이 제정, 시행된다. 한국주택은행이 출현하는 배경이 된 이 법률의 취지는 민간 자본과 주택기금 회전 자금 등으로 주택 정책 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증대시켜 서민주택 금융으로 운용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주택 공급과 주택지 개발을 위한 자금 융자와 관리, 주택채권과 주택복권의 발행, 주택예금과 주택부금 관리 등이 「한국주택금고법」에 의해 이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률의 전면 개정을 통해 한국주택금고는 한국주택은행으로 재탄생했다. 1969년의 일이었다."(265-7)


"1966년 8월 3일 법률 제1922호로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 「도시계획법」에서 분리되며 새롭게 제정됐다. 「토지구획정리사업법」 제정은 민간의 택지 수요를 충족시키고, 대도시의 경우에는 도심 재정비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곡 30만 지구, 개봉 60만 지구(1~2지구 포함), 대구 수성 주거단지와 서울 한남동 주택단지 등은 1967년 5월 「토지구획정리사업법시행령」 제정 이후 대한주택공사가 시행 주체가 되어 개발된 대표적인 대규모 주택지구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진행된 영동1지구와 그 뒤를 이은 영동2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오늘날 강남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된다. 1973년부터 영동-잠실지구를 대상으로 대규모 주택 건설이 추진된 것도 모두 토지구획정리사업 덕에 가능했으며, 서울 동쪽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조성사업인 잠실대단위아파트지구는 대한주택공사가 꼽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의 대표적 사례였다."(290-2)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토지 소유자들의 소유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획정리를 추진하고, 사업이 완료된 뒤에 원래의 토지 소유 비율에 따라 구획 정리된 토지를 돌려주는(換地) 방식이다. 따라서 원래의 토지 소유자가 여럿이면 사업이 마무리된 뒤에도 대지가 여러 개의 소규모 필지로 나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잠실지구 개발에서는 아예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을 일부 개정해 체비지만으로도 대규모 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잠실지구에 대단위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980년 12월 31일 제정된 「택지개발촉진법」 시행 전까지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택지를 정형으로 개발하거나 대단위 주택지를 조성해 대규모 단지식 아파트를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법적 수단이었다. 공장터였던 곳에서 처음 시도된 단지식 아파트의 모델이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마련된 대형 택지와 결합하면서 한국의 보편적 대단위 아파트단지 만들기의 템플릿이 되었다."(292-4)


# 체비지(替費地) : 부정형의 농지나 대지를 반듯하게 만드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드는 직간접의 비용을 땅으로 부담하는 것. 부정형의 농지 100평을 반듯하게 한 뒤 75평의 농지를 되돌려받았다면 체비지는 25평이다.


9 마포에서 잠실까지: K-Housing Model 완성


"한강아파트지구와 반포를 거쳐 자족적인 단지라는 이상과 근린주구론은 잠실에서 거의 온전한 형태로 구현된다. 잠실아파트지구는 단지화 전략의 최종 목적지였다. 각 아파트단지는 도시계획도로로 둘러싸여 완벽한 공간적 완결을 추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주택건설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자 '주택 건설의 새로운 장을 이룩한 대역사'라 자평한 잠실주공아파트단지는 심각한 쟁점을 던진 문제적 사례가 되기도 한다. 단지화 전략의 사회적 결과인 '단지의 폐쇄성' 때문이다. 잠실지구 아파트단지 이후 가구(街區, 블록 혹은 단지)를 계획 단위로 하는 생활권계획은 강고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 이미 이런 생각이 사업시행자들의 마음속에 각인됐던 탓인지 1975년 2월 6일 기공식 현장 무대에 크게 써 붙인 글귀는 흥미롭게도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단지아파트였다. 각 블록은 공공 공간과의 접점을 잃은 채 폐쇄적 공간이 되어 인접 가로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았고 공공 공간은 황폐화 경향을 보였다."(320, 325)


# 근린주구론(近隣住區論)

1. 규모 : (인구밀도를 고려하여) 초등학교 1개가 들어갈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2. 경계 : 단지 외곽은 자동차 통행이 자유로운 간선도로와 면해야 한다.

3. 오픈 스페이스 : 이웃주민들과 친분을 나눌 수 있는 휴게공간을 가진다.

4. 부대시설 : 주민공동시설은 가급적 한 곳에 집중되어야 하며, 도보거리에 위치해야 한다.

5. 상가 : 근린주구와 이어지는 외부에 충분한 규모로 조성해야 한다.

6. 내부가로망 : 내부 도로는 외곽의 자동자 전용도로와 연결되어야 하며, 내부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통과 교통은 금지한다.


"또 다른 문제는 15층의 탑상형과 판상형 주거동만으로 조성한 잠실5단지가 이후 고층아파트단지의 전범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재개발이 완성된 지 오래인 1~4단지의 현재 모습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모든 주민공동시설이나 편의시설을 단지의 울타리 안에 충분히 갖춤으로써 단지화 전략은 완벽에 가깝게 실현되었다. 마포주공아파트 초기안의 10층 Y자형과 一자형은 각각 15층 탑상형과 판상형 아파트로 잠실에서 재현된다. 시범아파트로 시작한 여정은 15년여 만에 한국형 아파트단지의 전형으로 완성된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20세기 한국이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산물이자 매개체이자 상징이며, 한국 현대성의 한 척도이자 전형이라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다. 〈K-하우징 모델〉로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초 국가 프로젝트로서 '아파트 주택의 성패를 가릴 모형'으로 등장한 마포주공아파트는 이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325, 3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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