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신 - 역사적 개관 신의 역사
에티엔 질송 지음, 김진혁 옮김 / 도서출판100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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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신과 그리스 철학


"'신'이라는 단어의 그리스적 의미에서 첫 번째로 놀랄 만한 사실은 그 단어의 기원이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변하기 시작했을 때, 신들은 이미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자 시인Theologian Poets이라 불렸던 사람들에게서 신들을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한정하자면, '신'이라는 단어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대상에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신은 제우스, 헤라, 아폴론, 팔라스 아테나 등의 올림포스의 신처럼 우리가 사람이라고 부를 법한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또한 위대한 바다, 땅, 하늘 신과 같이 어떤 물리적 실재일 수도 있습니다." "『일리아스』에서는 유한한 생명 모두를 관할하는 위대한 자연적 운명들도 수많은 신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공포와 궤멸, 갈등 등이 있습니다. 죽음과 잠도 있는데, 잠은 죽음의 형제로서 신들과 인간들의 주인입니다."(34-6)


"이러한 것들이 지시하는 바의 참 본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러한 신들의 이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의지를 지닌 살아 있는 능력 혹은 힘을 가리킵니다. 이 신적인 능력이나 힘은 인간의 삶 속에서 작동하며, 위에서 인간의 운명을 쥐고 흔듭니다." "이러한 신적 힘들의 첫 번째 특징은 생명입니다. 어떤 식으로 나타나든 간에 그리스의 신은 결코 생명이 없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마치 인간이 살아있는 것처럼, 신은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삶은 어느 날 끝난다면, 그리스의 신은 절대 죽지 않는 것이 유일한 차이입니다. 그래서 신들의 다른 이름은 '불멸자'입니다. 이러한 죽지 않는 존재들의 두 번째 특징은 그들 모두가 세계보다는 인간과 관계를 더 맺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에다 세 번째를 더해 봅시다. 신적인 힘은 자신이 질서 내에서는 최고 권위로 다스립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신들은 각자의 질서에서는 최고 권위입니다. 그래서 특정 지점에서는 어떤 신이 다른 신에게 복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36-8)


"따라서 그리스 신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자신의 삶을 다스리는 존재로 인식하는 또 다른 살아 있는 존재가 바로 신입니다. 생명이 부여된 어떤 존재에게 일어난 일은 생명이 있는 또 다른 존재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논의할 필요도 없이 분명했습니다. 종교적 심성을 가진 그리스인은 신들의 힘이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자주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인 자신은 신들이 서로 싸우는 수동적인 전쟁터라고 느꼈습니다. 핀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필멸자의 업적을 이루는 모든 수단이 신에게서 나옵니다. 신들 덕분에 인간은 현명하고 용감하며 유창합니다.〉" "모든 것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덕목과 악덕, 감정과 열정과는 무관하게 찾아오는 세계, 이러한 것이 바로 그리스의 종교적 세계입니다. 인간이 당면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호불호를 따라 일어나게 하는 불멸의 존재, 이것이 바로 그리스의 신들입니다."(40-2)


"인간은 단지 무언가만이 아니라 누군가이기에,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은 단지 무언가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 신들은 이러한 절대적 확신을 표현해 주는 원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흙투성이 둑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인 스카만드로스는 강, 즉 사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발 빠른 아킬레우스의 의지에 과감히 맞서는 트로이의 강으로서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물일 수 없습니다. 신화는 진정한 철학으로 가는 도정의 첫 발자국이 아닙니다. 사실 신화는 전혀 철학이 아닙니다. 신화는 참 종교로 가는 도정의 첫 발자국입니다. 신화 그 자체는 종교적입니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신화에서 어떤 점진적 이성화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철학이 세계를 사물들의 세계로 이해하려는 이성적인 시도라면, 그리스 신화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물들의 세계 속의 유일한 인격인 인간이 홀로 남겨지지 않겠다는 굳센 결의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51-2)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신의 원리들을 자신의 신들과, 또는 자신의 신들을 자신의 원리들과 어떻게 동일시할지 몰라 헤매는 것을 보더라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둘 다 필요했습니다. 플라톤이 무언가가 참으로 존재 내지 실존한다고 했을 때, 그는 늘 그 본성이 필연적이며 또한 지성으로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신에 관한 플라톤 고유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감각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한 살아 있는 개별적 존재를 상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며, 사라져 없어질 것으로 상상하지 말고, 지성으로 알 수 있고, 불변하며, 필연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머릿속에 그려야 합니다. 이것이 플라톤에게 신입니다. 요약하자면, 플라톤의 신은 이데아의 모든 근본적 속성이 부여된 살아 있는 개별자입니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는 신god이라기보다는 신적divine이지만, 여전히 신god이 아닌 이유입니다."(52, 57)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자연신학의 역사에 새 시대를 여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철학의 제1원인과 신 개념의 결합이 그의 형이상학 속에서 마침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서 원도자the prime mover는 또한 우주의 최고 신the supreme god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서 정점에 있는 것은 이데아가 아니라 자립적이고 영원한 (신적인) 사유 활동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유하는 순수 활동pure Act은 영원히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최고 신은 우리의 세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신은 자신과 다른 세계를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그 신은 세계 안에 있는 어떤 존재나 사물들을 보살피지도 못합니다." "신은 자신의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을 돌보는 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명백히 이성적인 신학을 얻었지만, 그들의 종교는 잃었습니다."(62-4)


2 신과 그리스도교 철학


"그리스 철학자들은 철학적 가지可知 세계 내에서 신에게 어떤 자리를 줄지 궁리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이미 철학 고유의 물음에 답을 제공한 신을 발견했습니다." "유대인의 신의 첫 특성은 유일성unicity이었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신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이보다 더 적은 단어나 더 단순한 방식으로 이보다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혁명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진술은 원래 본질상 종교적이었지만 중대한 철학적 혁명의 씨를 품고 있었습니다." "(제1원리에 대해 숙고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실재가 하나라고 생각했기에, 다수의 신들을 하나의 실재에 맞추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반면 유대인의 신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실재 자체의 본성이 무엇이든 간에, 실재의 종교적 원리가 실재의 철학적 원리와 필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즉각 알았을 겁니다. 철학적 원리와 종교적 원리는 하나이기에, 둘은 같아야만 하고 세계에 관한 하나의 동일한 설명을 제공해야 합니다."(69-70)


"엄밀히 말하자면, 일자the One는 기술될 수 없기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일자를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필연적으로 어떠한 판단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판단은 여러 단어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자의 단일성Unity을 다수성 같은 것으로 바꾸지 않고는, 즉 일자의 단일성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일자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일자는 다른 수들로 구성된 것에 포함될 수 있는 하나의 수도 아니고, 다른 수들의 종합도 아닙니다. 일자는 모든 다수성이 거기로부터 나오는 자립적 단일성입니다. 다수성은 이 단일성에서 나오지만, 일자의 절대적 단순성simplicity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일자의 생산성으로부터 제1원리보다는 열등한 제2원리가 태어납니다. 하지만 일자와 같이 제2원리도 영원히 존속하며, 일자와 마찬가지로 뒤따라 나올 모든 것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의 이름은 지성Intellect입니다."(77)


"지성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영원히 지속하는 인지라는 점에서, 정의상 플로티노스에게 지성은 모든 이데아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데아들은 다수의 알 수 있는 것들의 단일성인 지성 안에 있습니다. 이데아들은 일자의 생산성에서 나온 지성의 생산성에 참여합니다. 요악하자면, 지성은 영원히 자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개별적이고 구분된 모든 존재의 다수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거대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성은 신이자 모든 다른 신의 아버지입니다." "다음 속성은 포착하기 더 어렵습니다. 뭔가가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요? 이해 행위로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구분된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입니다. 달리 말하면, 실제로 아무것도 이해된 게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존재가 플로티노스 철학에서 제2원리인 지성 안에서, 지성에 의해서, 지성과 함께 처음 나타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들이 플로티노스식 우주에서 두 가지 최고 원인입니다."(78)


"플로티노스의 철학적 사유는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이질적이었습니다. 그 세계는 본질에 따라 엄밀하게 운행이 결정된 자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가 '그'a He라고 지칭하기가 어려운 플로티노스의 일자만 하더라도 그것a It의 방식에 따라 존재하고 작동합니다. 일자 내지 선은 전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은 그에게 의존함으로써 존재하지만, 제1원리인 자신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기 안에 충만히 머무는 일자는 자기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 엄격히 결정됩니다. 일자는 자기가 존재해야 하는 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자기가 존재해야 할 바에 따라 활동합니다. 따라서 플로티노스의 우주는 일자에 의해 모든 것이 자연적이고 영원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고, 이는 전형적으로 그리스적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히 일자에게서 일자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파장처럼 흘러나옵니다. 일자는 사유 위에, 존재 위에, 존재와 사고의 이중성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80-1)


"그러나 그리스도교 형이상학에서 신은 그 자체로 있습니다. 아무것도 그에게 더해질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에게서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가 아닌 이상 그의 존재에 관여할 수 없기에, '있는 나'는 영원히 자기의 완전성과 자기의 복을 충만하게 향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아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그러한 절대적 실존이라는 영원한 활동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이 존재 내지 실존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 내지 실존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이들은 어떤 열등한 종류의 신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혀 신이 아닌 것으로 있습니다. 이러한 유한하고 우연적인 존재들이 있음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있는 나He who is'로부터 실존을 자유롭게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유한하고 우연한 존재자들은 '있는 나'에 대한 유한하고 부분적인 모방으로서 존재를 부여받습니다. 이 활동을 그리스도교 철학에서는 '창조'라고 부릅니다."(84-5)


"플로티노스의 경계는 일자와 일자로부터 난 것 사이를 나눕니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신 및 신이 낳은 말씀과 신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을 나누는 경계를 그립니다. '있는 나'와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형이상학적 골이 놓여 있습니다. 본유적으로 필연성이 결핍된 우리의 실존과 달리 신의 실존은 완전한 자기 충족이기에, 그 골은 신과 우리의 실존을 떼어 놓습니다. 신적 의지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이러한 골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오늘날까지 인간의 이성이 초월적인 신에 도달하려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업에 당면한 이유입니다. 신의 순수 실존 활동과 신에게서 얻는 우리의 실존을 철저히 다릅니다. 인간도 자기로부터는 있을 수 없고, 그가 사는 세계도 자기로부터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인간이 어떻게 오직 이성으로만 '있는 나'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신학의 근본 문제입니다."(85-6)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Qui est'있는자 (혹은 '있는 나')가 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이름 중 가장 적절한 이름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름이 '존재함'to be, 즉 ipsum esse존재함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라 답했습니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질문 중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에 답하면서, 서로 다르지만 긴밀하게 연결된 두 단어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만 합니다. 첫 단어는 ens 혹은 존재자being이고, 다른 단어는 esse 혹은 '존재함'to be입니다. '존재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은 '존재자란 존재 내지 실존하는 것이다'입니다. 예를 들어, 신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올바른 답변은 '신이라는 존재자는 영원하고 경계가 없는 실체의 망망대해다'일 겁니다. 그러나 esse 혹은 '존재함'은 이와는 다른 것으로, 실재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더 깊숙이 숨어 있기에 파악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95)


"명사로서 '존재자'는 어떤 실체를 지칭합니다. '존재함' 혹은 esse는 활동을 지칭하기에 동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본질essence의 단계를 넘어 실존existence이라는 더 깊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체substance로 있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본질과 실존 모두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어떤 존재자를 생각하고, 그다음 그 존재자의 본질을 정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판단을 통해 그 존재자의 실존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실재의 형이상학적 순서는 인간의 지식의 순서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여기서는 개별 실존 활동이 먼저입니다. 이는 개별 실존 활동이므로 특정한 본질로 한정하는 활동이며, 동시에 특정한 실체가 있게 하는 활동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 볼 때, '존재함'은 어떤 특정한 존재자가 실제로 존재 내지 실존하게 하는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활동입니다. 성 토마스 본인의 표현을 쓰자면, dictur esse ipse actus essentiae, 즉 '존재함'이란 바로 본질이 있게 하는 활동입니다."(95-6)


"'존재함'이 가장 탁월한 활동, 즉 모든 활동 중의 활동인 세계에서, 실존은 존재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근원적 에너지입니다. 그러한 실존 세계는 최고로 실존하는 신 외에 다른 어떤 원인으로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빛 아래서 이뤄진 형이상학의 결정적인 진보는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인 제1존재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 중의 위대한 이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를 최고 존재로 상정했을 때, 그는 분명히 그것을 순수 '활동'이자 무한한 힘이 충만한 에너지로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신은 순수 사유 활동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섭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세계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사유에 관한 사유였기에 자신이 만들 수 없었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또한 그의 지식에는 '있는 나'라는 자기 인식도 없었습니다."(97-8)


"그리스의 정신은 자연 개념, 혹은 본질 개념을 궁극적 설명으로 간주하고 왜 거기서 자연스럽게 멈췄을까요? 우리 인간의 경험에서 실존은 언제나 개별 본질의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개별적이고 감각 가능하게 실존하는 사물들만 직접적으로 압니다." "이러한 사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토록 명확히 그어 놓았던 '존재'being와 '본질'what is의 근원적 구분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이 다르듯이 본질과 실존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실존은 어떤 사물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 있게 하고 그 사물이게끔 하는 활동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단지 우리 인간의 경험에서 한 사물의 본질이 '있음'인 경우는 없으며 그 본질이 '어떤 특정 사물임'이 아닌 경우도 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경험에 주어진 사물은 어떤 것도 그 정의가 실존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실존이 아니고, 실존은 반드시 본질과 구분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102-3)


"주변 어디에나 '있음'이 있고 모든 본성이 다른 본성들을 설명할 수 있지만 거기에 공통적인 실존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세계 그 너머에는, '있음'을 자기 본질로 하는 어떤 원인자가 반드시 있습니다. 본질이 순수 실존 '활동'인 존재자, 즉 본질이 이러저러하지 않고 오로지 '있음'인 존재자를 내세우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우주의 최고 원인으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신인 '있는 나'는 가장 분명히 드러난 신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은 자기 안에 자기 실존을 설명할 길이 없음을 형이상학자에게 계시함으로써,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는 궁극의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마침내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궁극적으로 만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실존의 형이상학이 실재의 외피에 불과한 본질이라는 껍질을 뚫고 나가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음을 보듯이 순수 실존 '활동'을 볼 수 있었습니다."(104)


3 신과 근대철학


"중세에는 모든 철학자가 사실상 수사나 사제, 혹은 최소한 일반 성직자였습니다. 근대철학은 성직자가 아니라 일반인에 의해, 신의 초자연적 도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도시들을 목표로 창조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지혜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한 개인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로서 그는 전혀 다른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즉, 자연적 이성만으로 얻을 수 있으며 실제적인 현세적 모적을 지향하는, 제1원인들에 의거한 진리 인식입니다. 데카르트는 신학을 억누르면서도 사실 매우 조심스럽게 신학을 보존했습니다. 데카르트가 철학과 신학을 공식적으로 구분하였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 세기 전에 이미 그러한 구분을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새로운 점은 철학적 지혜와 신학적 지혜를 실제로, 실질적으로 나눴다는 데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둘을 통합하고자 구분했다면, 데카르트는 둘을 떼어놓고자 나눴습니다."(107-10)


"데카르트의 철학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신학에 통제되지 않았기에, 그가 둘의 결론이 궁극적으로 일치하리라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데카르트가 그런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 철학자의 경우 순수하게 이성적인 방식으로 자연신학의 문제에 접근해야 했을 때 오직 그리스 신화의 종교적 신들만 마주하고서 문제에 접근했습니다. 그리스 종교의 신들은 자신의 이름, 지위, 역할이 무엇인건, 그 누구도 자신이 하나의 유일한 최고 '존재' 혹은 세계의 창조자, 제1원리, 모든 사물의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데카르트는 그리스도교의 신과 마주하지 않은 채 똑같은 철학적 문제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근대의 자연신학의 모든 문제는 한 마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역설적 본성을 깨닫는 것이 근대 자연신학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첫 조건입니다."(111-2)


"모두가 데카르트식 과학의 세계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기계론적 우주입니다." "데카르트의 신의 궁극적인 철학적 기능은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식 신은 데카르트식 세계의 창조자가 되는 데 요구되는 속성을 모두 소유해야만 합니다. 공간에서 무제한 확장되는 세계인 만큼 창조자는 무한해야 합니다. 그 세계는 순전히 기계적이고, 목적인final causes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 속에 참되고 선한 것이 참되고 선한 까닭은 신이 자기 의지의 자유로운 작정으로 세계를 그렇게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데카르트식 신의 본질은 자신의 철학적 기능에 의해 대부분 결정됩니다. 그 기능이란 데카르트가 그런 기계론적 과학의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일입니다. '창조자'가 현저히 그리스도교의 신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본질 자체가 창조자인 신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전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신의 본질은 창조가 아니라 존재입니다."(119-21)


"데카르트식 자연철학은 철학적 이해 가능성의 제1원리인 신으로부터 종교적 예배의 대상인 신을 다시 분리한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한 신은 철학적 원리의 조건으로 환원된 그리스도교의 신이기에 생존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적 신앙과 합리적 사고의 불행한 혼종입니다. 그러한 신의 가장 놀라운 특성은 그의 창조 기능이 자신의 본질을 완전하게 흡수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후로 붙게 된 이름이 그의 진정한 이름이 됩니다. 이제 신의 이름은 '있는 나'가 아닙니다. 그는 〈자연을 만든 이〉The Author of Nature입니다. 틀림없이 그리스도교의 신은 언제나 '자연을 만든 이'이기도 했지만, 또한 언제나 그보다 무한히 더 큰 신이었습니다. 반면 데카르트 이후 점진적으로 신은 '자연을 만든 이' 외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것이 되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데카르트가 도달한 원리들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형이상학적 결론들은 곧이어 18세기 그의 추종자들의 최종적인 결론들이 되었습니다."(122-3)


"데카르트의 후계자 중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는 스피노자입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고 말했던 바로 그 신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철학자로서 말한 첫 사람이 스피노자이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혹은 실체입니다. 그 신은 〈본질이 실존을 포함〉하기에 자기 원인입니다. 여기서 본질의 우선성이 강렬히 강조되어 있어서, 아무도 그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놓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 혹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는 〈실존의 무한한 힘이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존재 내지 실존합니다. 하지만 〈단지 자기 본성nature의 필연성에 의해 실존하고 행동하는〉 신은 자연nature과 다를 바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은 자연 자체입니다. Deus sive Natura신은 곧 자연. 신은 절대적 본질이며 그 본유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만듭니다. … 종교적 무신론자로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신에 진정으로 취해 있었습니다."(132-5)


"이신론자들Deists 소위 계시된 신의 우화적인 특징을 놓고서는 스피노자와 완전히 일치하였습니다. 반면, 그들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이신론자들에게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 신이 자연적으로 알려지는 신이라는 사실에 방점이 있지만, 그들이 철학자들처럼 신을 생각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서, 이신론자의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살아 있는 신의 유령이었을 뿐입니다. 순수한 철학적 사변의 대상으로서, 그 신은 스피노자가 최종적으로 내렸던 사형 선고를 받은 신화에 불과했습니다. 퐁트넬과 볼테르, 루소,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많은 이가 '있는 나'와 더불어 실존의 문제가 가진 참 의미를 망각했습니다. 이로써 목적인의 문제에 관한 가장 얄팍한 해석에 자연스럽게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신은 퐁트넬과 볼테르의 '시계 제작공', 혹은 이 세계라는 거대 기계를 다루는 최고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처럼, 이신론자들의 신은 철학적 신화입니다."(137, 140)


4 신과 현대사상


"오늘날의 신 문제는 칸트의 비판철학과 콩트의 실증주의로 사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신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의 선험적 형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신은 인과 관계라는 범주에 따라 어떤 것과 연관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칸트는 결론짓기를, 신은 이성의 순수 이념, 즉 우리 인식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일반 원리일 수 있으나 인지 대상은 아닙니다. 혹은 우리는 실천 이성의 필요에 따라 요청된 신의 실존을 상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신의 실존은 상정되는 것이기에 여전히 인식된 것은 아닙니다. 콩트는 자신만의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을 취했습니다. 즉, 과학에는 원인 개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사태가 '왜' 일어나는가를 묻지 않고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묻습니다. 형이상학의 원인 개념을 실증주의의 관계 개념으로 대체하면, 곧바로 여러분은 사물들이 왜 있으며 사물들이 왜 이런 모습으로 있는가에 대해 경이로워할 모든 권리를 상실하게 됩니다."(145-6)


"파스칼에게 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고,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저 신이 실존한다는 데 내기를 걸 겁니다." "인간 마음은 본성상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데, 반대로 〈지성적 개념을 인격화하려는 마음 깊숙이에 자리 잡은 본능을 피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자연스러운 이성의 판단 결과라고 하든지, 데카르트처럼 본유관념이라 하든지, 말브랑슈처럼 지성적 직관이라 하든지, 칸트처럼 인간 이성의 통합 능력에서 나온 이념이라 하든지, 토마스 헨리 헉슬리처럼 인간의 상상력이 빚은 환영이라 하든지 간에, 신이라는 공통의 관념은 거의 보편적인 사실로 있습니다. 이 관념의 사변적 가치speulative value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실존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문제는 이 관념의 진리치truth value를 결정하는 것뿐입니다."(151-2)


"그리스도교의 신을 잃어버린 세계는 아직 그리스도교의 신을 찾지 못한 세계를 닮았을 뿐입니다. 탈레스와 플라톤의 세계처럼 우리의 현대 세계도 〈신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맹목적인 '진화', 명석한 '계통 발생설', 인자한 '진보', 그리고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다른 신들입니다. 이 유사 과학적 혹은 사회학적 이념의 신들이 서로 싸울 때 죽는 것은 인간입니다." "우리의 동시대인 중 많은 사람에게 발견되는 곤란함은 그들이 불가지론자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도된 신학자라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불가지론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불가지론자들에게 신이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것에는 신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불가지론자보다 유사 불가지론자가 훨씬 흔합니다. 이들은 완전히 모자란 철학적 소양에 과학적 지식과 사회적 관대함을 결합하였기에,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연신학을 위험한 신화들로 대체했습니다."(170-1)


"참 형이상학의 마지막 단어는 ens가 아니라 esse입니다. 즉 존재자being가 아니라 존재함is입니다. 참 형이상학의 궁극적 노력은 어떤 활동an act을 통해 활동an Act을 상정하는 것, 즉 본질 자체가 존재함이기에 인간의 이해를 넘는 최고의 실존 '활동'을 판단하는 활동입니다. 어떤 사람의 형이상학이 막바지에 이르는 곳에서 그의 종교가 시작됩니다." "과학의 이해 가능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많은 사람이 형이상학과 종교에 대한 미각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최고 원인에 대한 관조에 몰두한 다른 소수의 사람은 형이상학과 종교가 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지만, 그 방법과 장소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에서 종교를 분리하거나, 철학을 위해 종교를 버립니다. 또는 파스칼처럼 종교를 위해 철학을 버립니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고 오롯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자의 신인 그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인 '있는 나'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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