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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ㅣ 우리 시대의 고전 26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임경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평점 :
서론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목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이며, 내용은 단지 수많은 이미지들에 지나지 않는다. 모더니즘에는 '자연'이나 '존재', 혹은 오래된 것이나 더 오래된 것, 심지어 태고의 것을 위한 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화는 여전히 그러한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그 자연이라는 '지시대상체referent'를 변형시킬 수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화 과정이 완성되고, 자연이 영원히 사라지는 시점에 나타난다. 이전 시대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적으로 인간의 세계이지만, 이곳에서는 '문화'가 진정한 '제2의 자연'이 된다. 실제로 문화가 지니는 위상의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추적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 중 하나다. 문화는 그 영역(즉 상품 영역)이 엄청나게 팽창했고, 실재the real를 끊임없이 그리고 역사적으로 독창적인 방식으로 길들여왔으며, 벤야민이 리얼리티에 대한 〈미학화〉라고 칭했던 과정 속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일구어냈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문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8-9)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 새로운 개념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과제는 새로운 형식의 관행과 사회적·정신적 습관 들을 최근 자본주의의 변화, 즉 새로운 전 지구적 노동분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형식의 경제적 생산 및 조직과 연관시키는 작업이어야만 한다." "문화와 경제의 상호 관계는 일방통행로가 아닌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피드백의 회로로 상정된다. (베버의 관점에서는) 새롭고 내면 지향적이며 보다 금욕적인 종교적 가치가 점차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냈으며 그 인간이 당시에 부상하던 '근대' 노동과정의 지연된 만족 구조 속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던'은 아주 독특한 사회경제적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포스트모던적 인간을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이 독특한 사회경제적 세계의 구조와 객관적 특징과 필요조건 들을 적당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현재 상황을 구성하는 틀이 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세계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18)
1장 문화: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빅토리아 시대와 그 이후의 부르주아지들에게 모더니즘의 형식과 도덕적 본질은 추잡하고 조화롭지 못하며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이고 사회 전복적인 것으로, 한마디로 표현하면 '반사회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피카소와 조이스가 더 이상 추잡하다고 여겨지지 않을뿐더러, 전반적으로 그들은 오히려 '리얼리즘적'이라고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것이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모더니즘 운동의 정전화 작업 및 학문적 제도화의 결과라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에 대한 가장 그럴싸한 설명일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적 성격에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제는 (그것이) 그 누구에게도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만족감을 통해 수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제도화되어 서구 사회의 공식적 문화 혹은 공공 문화와 한통속이 되어버렸다."(41)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는 소외, 아노미anomie, 고독, 사회적 파편화, 고립 같은 위대한 모더니즘의 주제를 표현하는 정전적인 작품으로, 사실상 불안의 시대라고 명명되었던 시대의 상징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이런 종류의 정동을 체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본격 모더니즘 시대를 지배했으나 이제는 실천적인 이유나 이론적인 이유로 인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표현 미학이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표현이라는 바로 그 개념은 사실 주체 내부의 분열과 더불어, 안과 밖의 형이상학 전체뿐만 아니라, 단자monad화된 개인의 내면에 서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그것의 '정서'가 카타르시스로서 외부로 투사되고 외화되는 순간의 형이상학을 전제하는데, 그 정서는 몸짓이나 절규로서, 즉 내적 감정에 대한 절망적 소통과 외적 극화를 통해 형상화된다."(54-5)
"그러나 메릴린 먼로나 에디 세즈윅 같은 위대한 워홀의 인물들이나, 저물어가는 1960년대의 악명 높았던 자기 파괴와 소진의 사례들, 그리고 마약과 정신분열이라는 당대의 지배적 경험은 프로이트 시대의 히스테리나 신경증과는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없으며, 또한 급진적 고립과 고독, 아노미와 사적인 반항, 그리고 반 고흐식 광기와도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한 것들은 본격 모더니즘 시대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문화 병리의 역학에서 이러한 급진적 변화는 주체의 소외가 주체의 파편화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용어들은 어쩔 수 없이 현대 이론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주제 하나를 상기시킨다. 바로 주체의 '죽음'이다. 이는 자율적인 부르주아 단자 내지는 자아나 개인의 종언에 대한 선언인 동시에, 이전의 중심화된 주체와 정신이 '탈중심화'되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탈중심화는 새로운 도덕적 이상일 수도 있고 경험적 설명일 수도 있다."(59-60)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르주아적 자아 혹은 단자가 끝장났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자아의 정신병리학도 함께 사라졌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정동의 퇴조라 칭했던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문체의 종언이며, (기계 복제의 부상으로) 개별 화가의 독특한 붓질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표현과 감정이나 정서의 차원에서 보자면, 현대 사회에서 중심화된 주체라는 오래된 아노미로부터의 해방은 그저 불안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감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자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산물들이 정서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리오타르를 따라 〈강렬함〉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해 보이는 이러한 감정들은 자유롭게 유영하는 몰개성적인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희열euphoria에 의해 지배된다."(61)
"개인 주체의 실종과 그것의 형식적 결과로 나타난 개인적 문체의 점진적 소멸은 오늘날 거의 보편적인 관행이 된 혼성모방pastiche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발생시켰다. 어쨌든 이 개념은 보다 일반적인 개념인 패러디parody와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한때 패러디라는 것이 살았다. 그런데 혼성모방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놈이 나타나 그의 자리를 야금야금 빼앗아버렸다. 패러디와 마찬가지로 혼성모방은 특이하고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문체에 대한 모방이다. 그것은 언어적인 가면을 쓰고 죽은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립적인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패러디처럼 이면에 숨겨진 동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풍자적 충동을 가진 것도 아니며, 웃음조차도 결여된 단순한 흉내 내기인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잠시 빌려온 비정상적인 말과 더불어, 건강한 언어적 규범성이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확신도 없다. 그런 까닭에 혼성모방은 공허한 패러디이며, 동태눈을 한 동상에 불과하다."(62-4)
"바로 이런 상황들에서 건축사가들에 의해 '역사주의'로 명명된 어떤 것이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역사주의란 과거의 모든 건축 양식들을 무작위로 조립하는 것, 과거 양식들에 대한 무작위적인 인유allusion의 유희로서, 일반적으로는 앙리 르페브르가 〈신neo〉이라는 말이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현상이라고 지칭했던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혼성모방의 이런 편재성이 특정한 종류의 유머와 양립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열정이 완전히 결여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중독성과 양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단순 이미지로 변형된 세계를 향한, 그리고 의사-사건과 (상황주의자들의 용어를 쓴다면) 〈스펙터클〉을 향한, 역사적으로 유례 없는 소비자의 욕망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것은 바로 플라톤의 용어인 〈시뮬라크럼simulacrum〉, 즉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동일한 복제본을 향한 욕망이다. 기 드보르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러한 사회에서는 〈이미지가 상품 사물화의 최종 형식이 된다〉."(65-6)
# 인유引喩 : 비유의 형식을 취한 인용
"'지시 대상체'로서의 과거는 끝내 모두 소멸하고 오로지 텍스트만 남게 된다. 그러하기에 문화 생산은 이제 정신적 공간으로 쫓겨나는데, 이때 정신적 공간이란 오래된 단자화된 주체가 아닌 어떤 퇴락한 집단의 '객관적 정신'의 공간이다. 그것은 추정적 실제 세계를, 한때는 그 자체로 현재였던 과거 역사의 재구성물을 더 이상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한다. 오히려 플라톤의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꽉 막힌 동굴 벽에 투사된 과거의 정신적 이미지만을 추적해야 한다. 여기에 혹여 약간의 리얼리즘이 남아 있다면, 이는 동굴 안에 갇혀 있음을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충격으로부터 파생되는 '리얼리즘'일 것이며, 또한 우리가 대문자 역사History를 우리 자신이 만든 대중적 이미지와 시뮬라크럼을 통해서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은 이 새롭고 유례없는 역사적 상황을 조금씩 인지함으로써 느끼는 충격으로부터 나오는 '리얼리즘'일 것이다. 역사는 이제 영원히 우리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위치하게 된다."(79)
2장 이데올로기: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
"미학 논쟁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었던 대부분의 정치적 입장들은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발전시키기 위한 도덕적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타락한 것이냐 아니면 문화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건전하고 긍정적인 혁신의 한 방식이냐 하는 문제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진정으로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으로 분석하려면,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가 존재하고 투쟁하고 있는 시간적 현재와 역사적 현재의 문제라면, 우리는 절대적인 도덕적 심판이라는 곤궁한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변증법은 손쉽게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준다는 의미에서의 〈선과 악을 넘어서〉며, 그것의 역사적 비전은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정신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에, 그것을 손쉽게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손쉽게 찬양하는 것 역시 자기만족적인 타락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143-4)
"새로운 형식의 부상에는 예전의 민속folk 문화나 진정한 의미의 '민중popular' 문화와는 구별되는 상업 문화의 특징들이 점차 보편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다른 예술의 영역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급문화와 소위 대중문화 사이의 고전적 구별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자신만의 특수성을 유지하고 더불어 중간계급과 하층계급의 상업 문화라는 주변 환경에 대항하여 진정한 경험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기능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그 구별 말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최근의 예술가들은 더 이상 예전 플로베르가 시작했던 방식으로 대중문화나 민중 문화의 질료와 단편 혹은 모티프를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문화의 내용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스며들게 만들어 이전의 많은 비판적 범주나 평가 범주 들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만든다."(145-6)
3장 비디오: 무의식 없는 초현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만개한 오늘의 상황에서 (예술 작품이나 걸작과 같은 말에서 사용되는) '작품work'이라는 고전적인 언어는 모든 곳에서 거의 대부분 '텍스트' 혹은 텍스트들과 텍스트성이라는 상당히 다른 언어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유기적이고 기념비적인 형식의 성취라는 의미가 전략적으로 배제된 언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일상생활, 몸, 정치적 재현 등)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될 수 있는 반면, 예전에 '작품'이라고 칭해졌던 대상은 다양한 종류의 텍스트들의 거대한 집결체나 체계로 재해석되며, 이 체계에서는 다양한 상호텍스트들과 파편의 연속 아니면 그저 (이후 텍스트 생산 혹은 텍스트화라 불리게 될) 순수 과정을 통하여 각각의 텍스트들이 서로 포개진다. 따라서 자율적 예술 작품은 예전의 자율적 주체나 자아와 더불어 사라졌거나 증발한 것처럼 보인다. '실험적 비디오텍스트'를 통해, 분석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모든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 새롭고 특이한 문제들과 마주하게 된다."(172-3)
"예전의 모더니즘적이고 기념비적인 형식들, 예컨대 세계의 책the Book of the World이나 건축 모더니즘의 '마의 산들magic mountains', 바이로이트에서 공연되는 신비한 오페라 연작, 모든 회화적 가능성의 중심지로서의 박물관 등과 같은 총체적 앙상블이 더 이상 분석과 해석을 위한 기본적 조직화의 틀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정전이나 '위대한' 책은 고사하고 걸작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심지어 양서良書라는 개념마저도 문제시된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고작 '텍스트'라고 한다면, 즉 역사적 시간의 조각난 파편 더미 속으로 곧장 사라져버릴 하루살이와도 같은 일회적 작품들이라고 한다면, 흩어져가는 파편들 중 하나를 잡아 이를 중심으로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순적인 일이 되고 만다." "따라서 단 한 편의 (실험적) '비디오 작품' 자체만을 따로 떼어내어 바라보는 것은 정말 무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 걸작이나 비디오 정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173-4)
"비디오텍스트 자체의 거의 모든 순간이 이런 요소들(각종 문화적 기호·로고들) 간의 끊임없고 명백히 무작위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이는 다양한 요소의 지속적인 흐름 혹은 '총체적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문제로, 이 다양한 요소는 각각 하나의 구분되는 서사 유형이나 특정 서사 과정에 대한 속기 부호 같은 것이다." "그 어떤 비디오의 기호들도 의미 작용의 주체로서 우선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를 위한 해석체로 기능하는 사태 자체가 단지 임시적인 것을 넘어서며, 아무런 사전 통고 없이 자리 교환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끊임없는 순환 운동의 힘 속에서, 두 개의 기호─주어와 술어라는 논리적 관계가 주제topic와 논평comment 혹은 주지tenor와 매체의 관계vehicle로 재편된─는 서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혼란을 야기하며 거의 항구적으로 자리를 교환한다. 이는 벤야민적인 의미에서의 〈정신분산〉 같은 것으로, 벤야민은 이를 새롭고 역사적으로 독창적인 힘으로 격상시켰다."(187-90)
"여기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과란 다름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이라는 난처한 문제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인 미학적 가치와도 관련된 것으로, 이는 우리 논의의 출발점에서부터 잠정적으로 논의 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만약 해석을 주체적인 측면에서 어떤 근본적인 주제나 의미를 풀어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분명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는 의미에 저항하는 구조 혹은 기호의 흐름으로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이 가지는 근본적인 내적 논리는 그런 의미에서의 주체의 발생을 배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전통적인 해석을 향한 유혹을 체계적으로 단락短絡시키려 시도한다. 이 주장으로부터 예기치 못하게 미학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 기준이 부상하게 된다. 즉 비디오텍스트가 제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만일 그 텍스트가 해석 가능하다면, 또 혹여 그 텍스트가 그런 주제화의 장소와 영역을 느슨하게라도 열어놓는다면, 그 텍스트는 나쁘거나 흠결 있는 것이 된다. "(96-7)
4장 건축: 세계체제의 공간적 등가물
"모더니즘에는 낙체 법칙이 작용하며, 따라서 (프로이트의 에로스처럼) 끌어당기는 힘을 통해 요소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결합시키고자 했다면, 이와는 근본적으로 기조를 달리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해결책으로서 일종의 반중력성을 통해 건축의 각 요소와 성분 들을 공중에 붕 뜨게 만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종류의 내적 차이화가 포스트모던 공간의 근본적 징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겉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와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원심력 운동보다는 긍정적인 관계의 원리를 암시하는 듯하며, 또한 유기체가 이물질에 반응하면서 일종의 격리 공간이나 완충지대로 끌어들여 그것을 둘러싸고 중화시키는 방식 같은 것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물질은 대개 그저 과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외래 물질 혹은 외계 물질로 취급받는다. 그러하기에 나는 건축가들의 용어를 빌려, 이 두 번째 절차를 '포장wrapping'이라 부르고자 한다."(214)
# 낙체 법칙 : 지표면 위의 같은 높이에서 자유 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질량과 무관하게 동시에 떨어진다는 법칙
"포장이란 헤겔이 〈토대ground〉라고 불렀던 보다 전통적인 개념의 와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토대는 '콘텍스트'의 형식으로 인문학적 사유에 들어오는데,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외부적인 것' 혹은 '외연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일단의 사유와 절차라는 이중 잣대를 암시하는 듯 보이며, 더욱이 그것은 언제나 좀더 거창하면서도 훨씬 더 용인될 수 없는 사회적 총체성 개념의 도입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포장은 조금 더 하찮은 (따라서 즉각적으로 처분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상호텍스트성과는 달리 (하나의 요소를 다른 하나에 기능적으로 종속시키는, 종종 '인과율'이라 칭해지는) '우선순위' 내지는 심지어 '위계질서'라는 본질적인 전제조건을 유지하면서도 이따금씩 그것을 전도시킬 수도 있다. 포장되는 것이 포장지로 사용될 수도 있고, 결국에는 포장지가 포장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214-5)
5장 문장: 글 읽기와 노동분업화
"누보로망은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언어 기능의 예상치 못했던 붕괴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즉 말과 사물 사이의 특권화된 관계가 말의 일반성과 대상의 감각적 특수성 사이에 벌어진 간극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가령, 언어의 1차적 기능에서 명사는 이름으로 기능하도록 요청된다. 고유한 이름은 분명히 특정 단어를 하나의 고유 대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보로망과 더불어, 거의 동시적으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로부터도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고유한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명칭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고유한 이름 역시도 (개, 경주마, 사람, 고양이 등과 같은) 종적 대상에 따라 변화해왔던 더 큰 언어 체계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당히 확고해 보였던 이런 언어적 가능성, 즉 말이 한낱 일반명사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특정 수준의 구체성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270-1)
"헤겔의 『정신현상학』 역시 언어 자체의 능력으로 보편과 특수, 일반과 구체 사이의 근본적인 철학적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심을 다루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 개념은 다소 전前 언어적(혹은 적어도 시대착오적이거나 전前 구조주의적)인 것이며, 특히 그의 변증법은 논리적 혹은 개념적 이율배반과 모순이 마치 언어에 선행하고 또한 언어적 속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인 양 동원하고 있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 그러한 판단은 의식(감각적 확신, 지각, 힘과 오성)을 다루고 있는 『정신현상학』의 서론의 의의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 서론의 의도는 처음부터 언어와의 거래를 청산하면서 보편과 특수를 설정함에 있어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변증법적 필연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에 구조주의가 언어에 대해 그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고 느낄지라도, 중요한 것은 이런 전통도 그 출발점이 그런 언어의 실패에 대한 숙고라는 점을 알아내는 것이다."(272)
"누보로망에서 글 읽기는 상당한 전문화를 거쳤으며, 산업혁명 초기의 옛날 수공업 활동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노동분업화의 원칙에 따라 다양한 구별되는 과정들로 분해되었다. 이런 내적 분화diffentiation와 예전의 통합된 생산과정 분야들에 적합해진 자율성은 테일러화, 즉 계획과 분석을 통해 다양한 생산 관계를 독립적 단위로 분리하는 과정을 통해 두번째 질적 도약을 하게 된다. 글 읽기라는 오래됐지만 딱히 전통적이라 할 수 없는 활동은 유사한 역사적 발전에 영향받기 쉬운 일종의 수공업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니클라스 루만은 이러한 분화에 대해 가장 발전되고 전문화된 이론적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분화는 원래 체계가 가지는 정체성을 다수의 내적 체계들과 그와 연관된 환경들로 쪼갬으로써, 원래 체계의 특화된 판본들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체계 자체를 재생산한다. 이것은 단순히 조금 더 작은 덩어리들로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내적 분리를 통한 성장이다.〉"(274-5)
6장 공간: 유토피아의 종언 이후 유토피아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어떤 체계적인 설명도 그것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역사성의 소멸과 같은 이 새로운 문화적 지배종의 반反정치적 특성을 강조하고 구별해낼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스스로 궁지에 몰리게 되고 그러한 문화의 재정치화는 선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총체화된 설명은 언제나 다양한 형식의 대항문화를 위한 공간을 포함하게 마련이다. 여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잔여적인 혹은 새로이 부상하는 문화 언어를 위한 공간도 존재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문화적 지배종에 불과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문화적 '헤게모니'의 차원에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 장에서의 거대하고 단일한 문화적 동질성을 암시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제압하고 포섭해야 하는 다른 지향적이고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시사할 뿐이다."(309-10)
"그런데 유토피아라는 말은 어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어떤 시대 구분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구체적인 문제를 상정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니얼 벨이나 세이무어 마틴 립셋 같은) 1950년대 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이 (〈후기산업사회〉와 더불어) 발전시켜 공표했던 최종적인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그 궤를 같이 하는데, 이 주장은 1960년대에는 극적이게도 '오류로 판명'되었다가, 1970~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현실화'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를 의미했으며, 그것의 '종언'은 유토피아의 종언을 동반했다." "벤투리의 〈아이러니〉부터 아킬레 보니토-올리바의 〈탈이데올로기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 선언문은 그와 유사한 발전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신념'의 퇴색과 더불어, 본격 모더니즘과 '정치'(즉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절대자의 쇠퇴를 의미하게 되었다."(311)
"포스트모더니즘 회화가 최근의 신新구상화를 통해 회화의 예전 (모더니즘의) 유토피아적 소명을 포기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점은 처음부터 분명하다. 포스틈던 회화는 더 이상 (위대한 모더니즘의 초미학적 핵심을 포함하여) 자신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임무를 상실한 채, 그리고 일종의 목적telos으로서의 회화적 형식의 역사로부터 해방됨으로써, 회화는 이제 자유롭게 〈모든 과거 언어의 가역성을 옹호하는 노마드적 태도〉를 따를 수 있다." "이 주장 속에 내포되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의 다른 특징은 당연히 우리에게 친숙한 '주제의 죽음', 개성의 종말, 새로운 익명성 속에서의 주체성의 약화이다. 그런데 이는 청교도적 의미에서의 소멸이나 억압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정신분열적 흐름flux이나 노마드적 해방으로 찬양되어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정신분열증이 없는 정신분열적 예술이고, 선언문이나 전위성을 상실한 '초현실주의'이다."(334-6)
7장 이론: 포스트모던 이론적 담론에서 내재성과 유명론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내가 지닌 '특수한' 상황이라는 핵심적 요소는 언제나 타인들에게는 내가 처해 있는 '일반적' 범주로 여겨진다." "이것은 사실상 개인의 내재성이 특정한 초월성과 긴장 관계에 있다는 의미이며, 이 초월성은 외관상 외부적이며 집단적인 이름표와 정체성이라는 형식을 띤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론적 형식의 '부정'은, 무엇보다도 초월적 차원이 경험적 소여가 아니며 진정한 존재론적 혹은 개념적 지위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런 [초월적]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누구도 그러한 집단을 본 적도 직접 경험한 적도 없는 반면에, 그들에게 붙여진 ~주의란 고작해야 너무나 낡은 전형이나 아주 불분명한 일반화의 사고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즉 사회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문학사에서 '모더니즘' 같은 개념은 개별 텍스트에 대한 매우 상이하고 질적으로 차별적인 독서 경험을 표현하는 조악한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356-7)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사상과 문화는 심각하게 '유명론적nominalist'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이전의 어떤 것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그러하다. 그러나 시대정신이 어떤 식으로건 통제한다고 하더라도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모순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오히려 너무나 편재해 있어서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후기자본주의의 엄청난 체계화와 획일화의 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 텍스트성은 다른 학문 분과의 연구 대상을 재구성하고, 골칫거리인 '객관성' 개념을 유예시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 연구 대상을 취급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정치권력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다. 일상생활도 산책이나 쇼핑을 통해 활성화되고 해독되어야 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소비 상품도 상상 가능한 여러 다른 '체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텍스트 체계로서 탈신비화되었다. 결국에는 몸 자체가 심층의 충동과 감각기관 들과 더불어 여타의 텍스트처럼 완전히 읽힐 수 있게 되었다."(357-8)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사상을 예견하고 있었던 레비-스트로스는 대문자 사회Society와 같은 허구적인 총체적 실체를 설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한 총체적 실체하에서는 가족, 계급, 일상생활, 시각적인 것, 내러티브 등 각종 유형의 보다 지엽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이고 위계적인 방식으로 정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른 종류의 허구적인 (혹은 초월적인) 실체를 창안해냈기 때문인데, 이를 통해 그는 친족 관계, 마을 구성, 시각 형식 등 여러 독립적인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동일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 허구적인 실체가 바로 '상동성homology'의 방법이다. 다양한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텍스트들'이 서로 뚜렷이 구별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모든 텍스트에 작동하고 있는 추상적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만 있다면, 각각의 구체적인 내적 역동성에 따라 각각의 텍스트들을 상동적인 것으로 읽어낼 수 있게 된다."(359-60)
"원리적으로 보면 구조 '이론'은 상동성을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는 개념의 설정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다면 친족 구조는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마을의 공간적 구성보다 더 근본적이거나 인과적으로 우선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러나 다양한 하위 체계들 간의 무관계성이나 비위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외부 범주가 요구되는데, 이는 바로 '구조' 그 자체이다. 내 생각에 '구조주의'의 영향력(그리고 그것이 열어놓은 새로운 분석 방법의 엄청난 풍요로움)은 구조 개념이라는 기능적 핑계거리를 만든 것보다는, 상동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는 데에 있다. 사실 구조는 구조주의의 철학적 전제였으며 또한 기능적 허구(혹은 이데올로기)였다. … 즉 상동성은 지나치게 애매한 종류의 일반적 공식을 위한 핑계였으며, 전적으로 다른 규모와 속성들을 지닌 실체들 사이에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떤 깨달음도 주지 못했다."(360)
"푸코처럼 '총체적 체제'를 만들어내는 이론가들에게는 언제나 저항이 체제 내에 포섭되기 마련이다. 즉 푸코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체제가 총체화하려는 경향을 갖는다면, 그 체제 내에는 〈혁명적인〉 충동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국지적인 저항들이 포섭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 체제의 내재적 역동성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여전히 체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국지적인 게릴라전을 실천하고 지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는 푸코가 '욕망'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시장의 '유혹'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딜레마에 대해 가장 극적이고 '편집증적인 비판'을 표한 사람은 보드리야르인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반역과 혁명 그리고 심지어 부정적 비판이라는 의식적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체제에 의해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체제의 내적 전략에 필수적인 기능적 일부가 된다. 이 중 1980년대 미국에서 살아남은 것은 소비와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이다."(386-7)
8장 경제: 포스트모더니즘과 시장
"담론 분석의 개념적 틀은 오늘 비록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데올로기 분석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고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해주지만, 그것은 프루동주의자들의 공상만큼이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개념/의 차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선 그것을 '담론'이라고 부르면, 이 차원은 잠재적으로 리얼리티와 무관한 상태에서 그 자체로 부유하면서 자신만의 하위 학문 분과를 만들고 그에 대한 전문가를 양성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시장/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소ideologeme라 부르고, 우리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전제해야만 하는 것을 그에 대해서도 전제하고 싶다. 즉 불운하게도 우리는 개념뿐만 아니라 리얼리티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해야만 한다. 시장 담론은 단지 레토릭에 불과한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제대로 하려면 우리는 형이상학, 심리학, 광고, 문화, 재현과 리비도적 장치만큼이나 실제 시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490)
# 언어학에서는 빗금(/)과 괄호(《》)를 사용하여 주어진 말을 '단어'나 '관념'으로 표시한다.
9장 영화: 현재에 대한 향수
"사실 역사성은 과거에 대한 재현도, 미래에 대한 재현도 아니다(비록 역사성의 다양한 형식이 그런 재현을 '사용'하지만 말이다). 역사성은 우선적으로 역사로서의 현재에 대한 인식으로 정의된다. 즉 그것은 현재와의 관계로서, 이는 어떤 식으로든 현재를 낯설게 하고 우리에게 직접성으로부터의 거리를 허락하는데, 그 거리가 결국 역사적 관점이라 규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특정 사회와 생산양식 내에서 우리가 역사성을 상상하는 방식, 바로 이런 작업의 역사성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물화 과정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몰되어 있는 (아직 '현재'로 구별되지 않는) 지금 여기로부터 뒤로 물러나 그것을 일종의 사물처럼, 즉 단지 '현재'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내지는 1950년대라고 시대를 명시하고 부를 수 있는 현재로서 파악한다는 것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사물화는 이를테면 실천praxis의 한 형식으로 완화되고 재생된다."(524-5)
10장 결론: 이차 가공
"모더니즘의 '고전들'은 '텍스트성의 선구자가 될 수 없을지 몰라도 (다시 쓰기를 통해) 분명 포스트모던화되거나 '텍스트'로 변형될 수는 있다." "레몽 루셀, 거트루드 스타인, 마르셀 뒤샹 같은 선구자들은 어색할지언정 항상 모더니즘의 정전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동일성을 드러내는 범례이자 목격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약간의 수정을 가함으로써, 즉 의자를 여기저기 움직이면서 약간의 도착적인 숨결을 덧붙임으로써, 가장 고전적인 본격 모더니즘의 미학적 가치를 불편하고 거리감 있는 (하지만 우리와는 좀더 가까운!) 어떤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대립 내에 또 다른 대립, 즉 미학적인 부정의 부정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더니즘 예술은 이미 반反헤게모니적이고 소수자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모더니즘에 대항하여 자신들만의 보다 심화된 소수자적 태도로 사적인 반항을 무대화한다."(558)
"다양한 모더니즘은 새로움, 혁신, 오래된 형식의 변형, 치료법적인 성상 파괴, 그리고 새롭고 (미학적이며) 경이로운 기술 공정에 대한 그것들 특유의 형식적 고집을 통해 근대화의 가치와 경향 들을 복제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종 근대화에 대한 격렬한 반작용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만약 근대화가 산업의 진보, 합리화, 보다 효율적인 작업 공정에 따른 생산과 경영의 재조직화, 전기, 조립라인, 의회 민주주의, 그리고 값싼 신문과 관련이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예술적 모더니즘의 한 갈래는 반反근대적이며, 오늘날 가장 넓은 의미에서 기술의 발전이라고 파악될 수 있는 근대화에 대항하여 때로는 요란하고 때로는 숨죽인 항의의 한 형태로 등장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다양한 모더니즘 이상으로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몹시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공유한다. 바로 시장 자체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대해 공명하며 긍정하는 것이다."(562)
"덧붙이자면 포스트모던으로부터 상실된 것은 또한 '모더니티' 자체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더니티라는 단어는 모더니즘이나 근대화와는 구별되는 특수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사실 여기에서 우리의 오랜 친구인 토대와 상부구조가 운명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듯하다. 만일 근대화가 토대에 발생한 무언가라면, 그리고 모더니즘이 그러한 양가적 발전에 대한 반작용으로 상부구조가 취한 형식이라면, 아마도 모더니티는 그들의 관계로부터 일관성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의 특징을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에 모더니티는 '근대'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꼈던 방식을 설명해줄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감정은 이제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새롭다는 확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확신, 그리고 모든 것이 가능하며 그 어떤 것도 다시는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확신 속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어떤 것도 예전과 같지 않길 바라며, '새롭게 하길make it new' 바란다."(571-2)
"일단은 모더니즘 시대의 대문자 새로움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은 오직 그 시대의 뒤엉켜 있고 불균등하며 전환기적인 성격, 다시 말해서 옛것이 이제 막 태어난 새것과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결론을 내려보자. 아폴리네르의 파리에는 중세의 더러워진 기념비와 르네상스 시대의 비좁은 공동주택과 더불어, 자동차와 비행기와 전화와 전기뿐만 아니라 의류와 문화에서의 최신 유행이 공존하고 있었다. 후자를 새롭고 근대적인 것으로 알고 경험하는 이유는 오직 오래되고 전통적인 것 또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근대화가 결국 어떻게 승리했고 옛것을 완벽하게 지워버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은 전통적인 시골과 전통적인 농업과 함께 폐기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새로움이라는 범주는 이제 자신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 자체로 모더니즘의 유물이 되었다."(573-4)
"우리가 형이상학적으로 일종의 국지적 정치라 부를 수 있는 시의적절한 개혁이나 일상의 투쟁으로 눈을 낮출 경우, 이는 핵심 쟁점을 포스트모던 정치학에 위치시키는 일이다. 예전의 정치는 국지적인 투쟁과 전 지구적인 투쟁의 조화를 추구했다. 즉 국지적인 투쟁이 전체적인 투쟁 자체를 대표하고, 그에 따라 변형된 전체적인 투쟁이 지금-여기에 현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는 이러한 두 층위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작동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편으로는 각 층위가 구체성을 벗어나 손쉽게 국가를 위한 혹은 국가를 둘러싼 관료화되고 추상화된 투쟁으로 분리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접한 쟁점들의 무한한 연속체 속으로 밀려 들어가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런 '나쁜 무한성bad infinity'이 나타나며, 여기에서는 이것이 유일한 정치 형식으로 남아 니체적인 사회진화론 같은 무언가와 더불어 형이상학적 영구혁명이라는 의도된 행복감을 부여받는다."(604)
"내가 보기에 그러한 행복감은 보상의 구성체이며, 이런 상황에서는 당분간 진정한 (혹은 '총체적인') 정치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아울러 정치의 부재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 지구적 차원인데, 이는 정확하게는 경제 자체의 차원 혹은 체제의 차원이다. 즉 국지적인 수준에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사기업과 이윤 추구의 차원이다. 또한 나는 전 지구적 차원의 가시성visibility의 약화 같은 징후와, 총체성 개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저항, 그리고 포스트모던적 유명론의 인식론적 칼날에 대해 바짝 경계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정치적으로 생산적이면서도 그 자체로 진정한 정치의 소박한 형식이 될 것이라 믿는다. 특히 유명론의 인식론적 칼날은 경제적 체제와 사회적 총체성 같은 명백한 추상들을 잘라버리고, 결국에는 '구체자concrete'에 대한 예기를 '단순 특수자mere particular'로 대체하여, (생산양식 자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일반자general'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604-5)
"소집단과 차이의 이데올로기는 철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독재를 향해 제대로 된 한 방을 날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진짜 공격 목표가 다소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토크빌이라면 여전히 '독재'라고 규정지었을 법한) 그것은 바로 합의consensus다." "계급은 몇 되지 않는다. 이들은 생산양식의 점진적 변화 속에서 등장한다. 심지어 계급이 부상할 때조차도, 그것은 언제나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고 확신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면에 소집단은 심리적 정체성이라는 만족감을 제공해주는 듯하다. 이제는 이미지가 되어버린 소집단은 자신들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와 박해와 불가촉천민의 기억을 상실하고, 현재에는 소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미디어와 맺는 관계를 특징짓는다. 말하자면 정치적 의미에서건 기호학적인 의미에서건, 미디어는 완전히 그들의 의회이자 그들을 '재현/대표'하는 공간이다."(621, 632)
"합의에 대한 정치적 공포는 한때 '총체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해받았으나, 이제는 단순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일정한 자부심을 갖게 된 소집단들이 타 집단에 불과한 사람들에게 명령받는 것을 정당하게 거부하는 정도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의 사회 현실 속의 모든 것이 특정 집단 구성원을 표시하는 이름표이며, 특정 무리의 사람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는데, 미디어와 시장이 그것이다. 여러 제도 중에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시장만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독특하게 특권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그 소집단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인물과 재현은 정의상 더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부르주아나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에 대한 비전이나 (리오타르가 설명했던) 〈주인서사〉를 문제시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인서사는 '역사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6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