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 어쩌다 자본주의가 여기까지 온 걸까?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윤혜 옮김 / 선순환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지구촌 곳곳이 불안하다


"이제 자본은 일상생활에 너무 깊숙하게 침투해 있어서 붕괴시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혁명주의자라면 자본주의가 붕괴되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그 잿더미 위에 새로운 체제가 서게 될 것이라고 한 번쯤 꿈꿔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혁명이 가능한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손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기를 갈망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체제 내에서는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체제에 의해 수많은 기존 재화의 생산 체인과 유통을 지속해 나아갈 수 있는 정치가 존재하며, 동시에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현 체제를 점진적으로 수정하고 사회화하는 것 역시 우리가 선택한 체제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현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서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보다 사회주의적인 시대로 평화롭게 전환할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나긴 여정입니다."(26-8)


2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


"대처는 경제체제를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경제문화 전반을 바꾸려 했습니다. 개인주의, 개인의 책임, 자기계발 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주입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기업가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에 허덕이게 되더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에 빠지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시스템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이죠. 집을 압류당해도 그것은 시스템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자립이라는 개념이 이렇게 생성된 것이죠." "자본의 본질에 대항하는 운동이 벌어지자, 자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대응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합니다. 특히 시장에서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시장구조를 체계화할 것입니다. 그 대신 사회정의라는 것은 잊어주셔야겠습니다.〉"(36)


3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파헤치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강한 정부를 등에 업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이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정부를 배제하자. 정부를 제거하라. 정부가 문제이므로 우리는 정부의 개입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죠. 로널드 레이건이 한 유명한 말도 있습니다. 〈정부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중략) 정부가 바로 문제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발을 빼지 않았습니다. 역할을 바꿨죠. 건강관리 및 교육을 비롯해 넓은 범위의 사회복지사업과 같은 복지 시스템을 창출해 국민을 지원하던 정부가 자본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정부는 자본을 옹호하고, 때로는 보조금을 주기까지 하면서 자본의 적극적인 대리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강한 신보수주의 정부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연합은 신자유주의가 대중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시기에도 계속 강화되었습니다."(47-9)


4 실체 없는 금융이 세상을 지배하다


"2007-08년 금융위기 이래 통화 측면에서는 회복 속도가 굉장히 빨랐지만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진전이 일어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최근의 통화팽창은 실제로는 부유한 자들의 손에 그 혜택이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특히 양적완화라는 정책에 있어서는 사실입니다.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중앙은행들(미국의 연방준비은행, 잉글랜드은행, 유럽중앙은행, 일본은행)은 상업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담보대출과 채권을 사들였습니다. 중앙은행들은 현금을 줬죠. 이렇게 하면 경제에 유동성이 증가하게 됩니다. 상업은행들이 담보대출과 채권을 보유하고 있으면 은행의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양적완화입니다. 2007-08년 금융위기에 반응해서 일어난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중앙은행들은 전 세계 통화공급량을 늘렸습니다. 그러나 늘린 돈은 생산적인 활동이 아니라 주로 자산가치를 매입하는 데 흘러 들어갔던 거죠."(64)


5 독재로 선회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권력이 정치에 개입하려면 그 진용을 잘 짜야 하지만, 지금은 극우 성향의 인종차별적인 국수주의, 더 나아가 신나치주의 정치를 다루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브라질의 신군부독재로 나아가는 추세는 꼭 대기업은 아닐지라도 재계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재계는 계속해서 우파 성향의 정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재계 인사들 중에는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찾고 있다는 징후가 보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신파시스트의 동맹을 막으려면 민중의 거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모든 사람이 이러한 문제들의 깊은 본질을 꿰뚫고 있어야 하며, 어떤 해결책들이 가능한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86-8)


6 사회주의는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다


"1960년대 당시 정의와 자유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요구가 광범위하게 퍼졌죠. 국가 및 기업자본에 의해 부여되는 강제와 시장의 강제 등에서 벗어날 자유는 물론이고, 사회정의에 부응하는 자유에 대한 요구까지 광범위하게 일었습니다." "이에 대한 1970년대 자본주의자들의 정치적 답변은 흥미로웠죠. 이들은 이러한 요구를 정면 돌파하면서 요컨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꺼이 자유를 내어드리죠. 몇 가지 조건이 붙긴 하겠지만요. 그 대신 정의라는 것은 잊어주셔야겠습니다.〉" "이러한 전환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폴라니는 말합니다. 〈그래서 계획과 통제는 자유를 부정하는 것으로 공격받고 있다. 사람들은 사유재산이 자유의 핵심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른 토대 위에 세워진 사회는 '자유'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규제가 만들어낸 자유는 비자유라고 비난받고 있다. 그것이 제공하는 정의, 자유, 복지는 노예제도를 교묘히 위장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94-6)


7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중요성


"2008년도에 우리는 중국과 그 경제체제가 저임금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생산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중국은 저임금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중국은 갑자기 첨단산업 부문에 엄청난 속도로 진입했으며, 8년 만에 첨단기술 산업에서 주요한 경쟁자가 됐습니다." "중국은 매우 빠릅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엄청난 규모의 경제 혜택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강력한 정부의 개입이 혼재되어 있지만, 고도로 분권화되어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 환경에서 부상하고 있는 '검투사 자본주의'가 기업가 문화의 중심에 절대적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인공지능을 미래라고 결정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을 배제하는 길을 찾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얼마나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지는 바로 '노동계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123-5)


8 자본주의의 지정학


"자본이란 성장하는 것이며, 성장하면 팽창합니다. 따라서 자본의 지리학이란 자본이 한 공간 내에서, 또 그 공간을 넘어 끊임없이 팽창하는 것에 관한 학문이죠. 특정한 영토 내에서의 자본의 팽창은 궁극적으로는 자원, 인구, 사회기반시설 등에 의해서 제한을 받습니다. 그 영토 내에서 특정 시점이 되면 자본의 팽창은 한계에 도달하죠. 따라서 지상의 특정 장소에 잉여자본이 계속 쌓이게 되는데, 이때 잉여노동력도 함께 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잉여자본은 이익을 낼 수 있는 배출구를 필요로 하죠. 이 자본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한 가지 해답은 식민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또 다른 답은 자본을 수출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아직 발달하지 않은 곳을 찾아 자본을 보내는 것이죠. 이것이 제가 말하는, 자본의 과잉 축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공간적 해결'입니다. 이러한 자본의 과잉 축적은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산물입니다."(145)


9 성장 증후군


"경제학자, 정책 입안자, 정치인 및 경제지 기자들 모두 경제의 건강과 건전성을 평가하는 주요한 측정치로 성장률을 자주 거론합니다. 경제정책의 주요 목표는 성장률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죠. 하지만 성장에는 아주 중요한 측면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요성을 대부분 무시하죠. 그것은 바로 성장의 총량입니다." "이 문제는 어떤 맥락에서는 치명적인 중요성을 띠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얘기할 때 탄소 배출량의 증가율을 조정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문제가 걸려 있죠. 그러나 이미 대기 중에 존재하는 온실가스의 총량도 분명 중요한 정치적 현안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가 즉각적으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바로 온실가스의 총량입니다. 증가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온실가스의 총량이 훨씬 더 중요한 상황이죠. 이처럼 비율보다 총량이 훨씬 중요해지는 상황들이 있는 것입니다."(169-71)


10 소비자 선택권이 박탈당하다


"자본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그 급증하는 총량에 대한 시장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상품의 총량을 증가시키면 늘어난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인구가 더 많아져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인구가 상품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이익률이 하락하는 경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증가하는 상품의 총량에 대한 이익을 보장해줘야 하는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증가하는 상품의 총량이 더욱더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생산 총량의 증가, 특히 대량소비주의는 자본이 인간 생활에 미친 영향을 논할 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일로 손꼽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자본의 축적과 궤를 같이하는, 현대 소비지상주의의 끝없이 계속되는 복리성장 증후군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기후 문제에서 보듯이, 일단 어떤 일이 한계점에 해당하는 총량에 도달하면 제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187-9)


11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자본축적


"마르크스가 자본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는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유산계급의 견해와 설명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축적의 출발을 검약한 자본가들과 기독교 신자들의 덕성 덕분이라는 미담으로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하고 싶었던 주된 이야기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자본축적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토지로 대표되는 생산수단에 민중들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사용한 폭력적인 수단, 그리고 막 탄생한 자본가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것 외에 다른 생존 수단을 박탈당한 민중들에게 가한 폭력적인 수단을 말하고자 했죠. 마르크스는 이렇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남의 재산을 도용하고 사회질서를 재편성한 것이 자본이 가진 원죄라고 보았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원시적인 자본축적은 결국, 노동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방법 외에는 존재할 수도,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는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194-8)


12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


"저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생산과정에서 산 노동을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방식과 달리, 강탈에 의한 축적에 점점 더 심하게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집중화 속도가 빨라지는 현상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죠. 이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시장에서 쫓겨난 소규모 제조업자들의 자산을 훔치고 그것을 통합합니다. 인수와 합병은 요즘 거대한 산업 형태를 띠고 있죠. 거대 자본은 소위 송사리들을 인수해 집어삼키고는, 단순히 그 자본을 인수해 자신의 권력과 덩치를 키웁니다." "이런 자본의 축적은 생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 과정을 아주 세심히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부富란 것이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탈취되어 교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의 축적이 자산가치를 계속 올리는 재평가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의 축적은 이제 생산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자산가치를 조작해서 교환하는 것에 기대고 있죠."(207-9)


# 기업담보차입매수 전략을 동원한 인수 합병, 젠트리피케이션, 기업 내 연금 및 건강보험 의무조항 삭제 등


13 생산과 실현


"1970년대 이후의 탈산업화 때문에 육체노동 일자리는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제가 제일 잘 아는 미국과 영국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나라의 경우 모두 기술 변화로 일자리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지난 30년 내지 40년에 걸쳐 없어진 일자리의 약 60%는 기술 변화 때문이었죠. 그 나머지는 주로 오프쇼링, 즉 임금이 싼 중국, 멕시코 등지로 저임금 일자리를 보내버린 것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사라졌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사라진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전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 않을 뿐이며, 전과 같은 일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고용 자료를 들여다보면 맥도날드, KFC, 버거킹 같은 업종에서 고용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노동자계급은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곳의 일자리는 임시직인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은 잠시 일하다 떠납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가 힘듭니다."(219-21)


14 탄소 배출과 기후변화


"우리는 화석연료를 태워서 탄소 배출량을 증가시키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경제를 개발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정치경제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자본축적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중국이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투자 같은 방식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2007-08년 이후의 자본주의가 주로 중국 및 경제가 부상하던 국가에 기대어 살아난 거라면, 자본주의의 생존 자체가 대기 중 탄소 급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들 국가의 경제 팽창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저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탄소의 농도라고요. 지구촌은 가능한 한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 끊임없이 복리 이자율로 축적되는 자본이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241)


15 잉여가치의 변화율 대 총량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은 자유무역과 이윤 균등화라는 조건에서는 부유한 지역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지역은 그대로 침체되거나 더욱 가난해지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윤율의 균등화가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은(기술혁신이 미비한) 19세기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20세기에도 (자본의 이동을 제한하던) 브레턴우즈 협정이 깨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이래 지금까지 줄곧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진정한 특징은 이윤율의 균등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는 노동집약적인 경제체제에서 자본집약적인 체제로 가치가 훨씬 더 많이 이동하는 현상을 목도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노동집약적인 경제체제와 자본집약적인 체제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이제는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따라서 특정 국가나 지역의 자본집약화를 막으려는 것이 국제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중국에게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249-54)


16 소외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고용됩니다. 그리고 상품을 생산합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에 대해서 어떠한 힘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력은 제품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가 창조한 가치가 자본에 소속되어 있으며, 그 상품도 자본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둔 기술적인 소외입니다." "그런데 노동자만 소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개인은 시장체제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시장체제 때문에 자본가들은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떤 일정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별 자본가들은 '경쟁의 강제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시장은 훈육을 통해 자본가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러한 이중 소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소외가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죠."(260-2)


1960, 70년대부터 자신의 소외를 인식하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노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소외가 덜한 방식으로 노동과정을 다시 구축하고, 공장 작업 현장 내에서 노동자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등 아주 다른 방법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노동자연합회를 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1968년의 봉기는 젊은이들이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자본가계급과 기업들은 젊은 세대의 욕구에 보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선택의 자유와 문화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선에서 소비지상주의를 재구성하여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상적 소비주의compensatory consumerism'라고 칭할 수 있는 이론이 탄생했고, 보상적 소비주의 행태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실상 자본은 소비자 틈새를 공략했고 어떤 경우에는 소비자 틈새를 창출했죠. 이것이 사회적 파편화를 초래했습니다."(268-70)


17 소외당하는 노동자: 공장 폐쇄의 정치


"자본의 관점에서 보는 노동은 사용가치에 불과하며, 생산에 필요한 한 가지 요소일 뿐입니다. 따라서 일회용이며, 일정한 환경과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취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노동은 가족의 생활이며, 사회관계이며,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인 동시에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일이며, 노조의 일원으로 수행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기업은 효율과 수익률만 강조합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역사회의 삶에 기업은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본은 지역사회의 모든 것을 내팽개쳤습니다. 사회관계, 사회적 서비스 구조 등을 포함한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지역사회 자원을 버린 것이죠. 더 나은 방법으로 이러한 전환을 이행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지만, 자본은 이런 방법을 포용하려 들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자본가들은 계속 같은 방법으로 움직일 뿐입니다."(289-92)


18 코로나19 시대의 반자본주의 정치


"코로나19 시대로 들어서면서 2007-08년 금융위기 이후에 폭발한 소비지상주의는 붕괴해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전의 소비지상주의는 회전 시간을 거의 제로에 수렴할 정도로 단축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죠. 회전 시간이 최대한 짧은 소비지상주의로 몰려든 투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자본을 최대한 흡수하는 것과 전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해외관광이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2010년에 8억 건이었던 해외관광은 2018년에는 14억 건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런 형태의 순간적 체험 소비지상주의를 유지하려면 공항, 항공사, 호텔, 식당, 테마파크, 문화 행사 등 막대한 기반 시설 투자가 필요했죠. 이러한 자본축적 분야는 이제 한물갔습니다." "지금 같은 조건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적 소비지상주의의 첨단 모델이 거의 작동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자본축적이 그리고 있는 나선형 궤도가 전 세계 곳곳의 내부에서 붕괴하고 있는 것이죠."(305-6)


19 집단적인 딜레마에 대한 집단적인 반응


"마르크스는 항상 집단 행동이 추구하는 종착점은 바로 개인의 자유로운 개발이라는 생각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회의 일상생활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필요노동의 전반적인 감소'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 자체가 '움직이는 모순 덩어리'라는 점입니다. 〈자본은 노동시간을 최소한도로 줄이려고 압박을 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로지 노동시간을 부의 척도와 원천으로 본다.〉 따라서 자본은 노동시간을 필요한 방식으로 실제 필요한 만큼 줄이고서는 잉여노동시간을 불필요하게 늘립니다. 불필요하게 늘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잉여가치입니다. 누가 이 잉여가치를 갖는지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되풀이해서 말하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해방의 진정한 뿌리는 하루에 6시간 노동을 통한 집단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고 나머지 시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324-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


1장 MEGA: 경제학을 다시 위대하게


"이 책에서 우리는 경제 사안을 다루지만,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더 큰 개념이 언제나 우리 작업의 지침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후생을 소득이나 물질적인 소비로만 협소하게 정의하곤 하지만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들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인정과 존중, 가족과 친구들 사이의 편안함, 압박 없는 가벼운 마음, 존엄과 자존감, 즐거움 등이 모두 중요하다. 소득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단순히 편리한 지름길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학자들을(때로는 매우 영민한 경제학자들마저) 잘못된 경로로 이끌고, 정책 결정자들을 잘못된 결정으로 이끌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강박으로 이끄는 왜곡된 렌즈다." "인간의 존엄을 다시 중심에 놓는다면 우리는 경제의 우선순위와 사회가 구성원들을 (특히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할 때) 돌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28-9)


2장 상어의 입


"최근에 수행된 실험 연구는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 선거에서 광장히 유리한 전략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미국에서 진행된 한 실험에서는 연구자들이 두 종류의 질문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이주에 대한 응답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찬성 또는 반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자의 규모와 속성에 대해 응답자들이 알고 있는 '사실정보'[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정보' 질문지를 '견해' 질문지보다 먼저 받은 사람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하지만 실제로는 왜곡된 사실정보를 먼저 상기한 사람들은 이주에 반대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더 높았다. 실제 숫자를 알려 주자 사실관계에 대한 생각은 달라졌지만 이주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대한 견해는 달라지지 않았다." "즉, 사실관계는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수정하지 못했다. '이주'라는 주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더 편협해지고 사실정보는 그 견해의 벽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35-6)


# 이주에 대한 '경제적' 논증

1. 경제 여건이 훨씬 좋은 나라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 자기 나라에 있을 때보다 고소득을 올릴 것이 분명한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2. 따라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나라를 떠나 우리나라에 들어올 것이다.

3. 그렇게 들어온 이주민들은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에서 임금을 내리누르는 압력으로 작용해 기존에 우리나라에 있던 사람 대부분은 경제상황이 전보다 악화될 것이다.


"이 논리는 단순하고 솔깃하다. 다만 틀린 논리라는 게 문제다. 우선, 국가 간 임금 격차(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역 간 임금 격차)는 사람들이 이주를 하느냐 마느냐와 크게 상관이 없다. 물론 자기 나라에서 절망적인 수준의 빈곤에 처해 그곳을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작 설명되어야 할 수수께끼는 자기 나라를 벗어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설령 실제로 저숙련 이주민이 노동시장에 많이 유입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도착국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는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이주민들과 숙련 수준이 가장 비슷한 사람들[즉, 직접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이주민과 경쟁 관계일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오히려 이주민이 들어오면 이주민뿐 아니라 도착국 사람들도 대개 경제적 상황이 전보다 나아진다. 사실 노동시장은 수요-공급 법칙의 표준적인 이야기와 부합하는 면이 별로 없다."(37-8)


"이라크, 시리아, 과테말라, 예멘 등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절실하게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나라들은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아니다." "이 나라들에서 탈출하고자 한 사람들은 라이베리아나 모잠비크의 평균적인 거주자가 겪고 있는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해도 더는 자기 나라에 머물 수 없겠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된 것은, 멕시코 북부에서 벌어진 '마약과의 전쟁'이나 과테말라의 끔찍한 군부 독재 혹은 중동의 내전 등이 불러온 끔찍한 폭력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일상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업 소출이 안 좋았던 해에도 고향을 지켰던) 사람들이 네팔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옛 마오주의 무장세력이 다시 발흥해 폭력이 격화된 다음이었다. 이때 그들은 '상어의 입'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들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그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39)


"하지만 왜 사람들이 이주를 하지 않는지는 애초에 수수께끼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가 이주의 이득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주의 이득을 가늠할 때의 일반적인 실수 하나는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의 임금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이주를 결심하게 만든 수많은 요인과 성공적으로 이주하게 만든 수많은 요인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주를 택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남달리 체력이 강하거나 해서 자기 나라에 머물렀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소득을 올렸을 사람들일 것이다. 이주자들이 특별한 기술을 요하지 않는 일에 많이 종사하긴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힘들고 고되기 때문에 체력과 인내심이 많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주자의 소득과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득을 단순 비교해서 이주가 막대한 이득을 준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주를 독려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논거이긴 하지만) 너무 순진한 접근이다."(41)


# 고전적 수요-공급 이론이 이주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

1. 새로운 노동자들이 유입되면 일반적으로 수요 곡선도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즉, 노동 공급뿐 아니라 수요도 증가한다.

2. 저임금 노동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경우, 노동 집약적인 기술을 도입할 유인이 줄어들어 기계화가 늦어진다.

3. 고용주들이 새로운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생산 과정을 재조직(가령, 현지인의 직업적 계층 상승 같은)한다.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가령 도매시장에서 수박을 사는 것과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는 수박을 사는 경우에서보다 훨씬 더 오래 이어진다. 수박은 품질이 맘에 안 들면 다음 주에 바로 공급자를 바꿀 수 있지만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둘째, 노동자의 질은 수박보다 판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업은 자신이 채용하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모종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요컨대 이주 노동자가 이미 취직되어 있는 현지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일을 더 낮은 임금을 받고 할 의사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 이는 이주 노동자들이 현지인이 하지 않으려 하는 일 혹은 현지인이 가지 않으려 하는 지역에 몰리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 그런 직종이나 지역에서는 이주자가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이 일자리는 그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일할 사람을 찾을 수 없어 계속 비어 있을 것이다."(61-5)


"하지만 비숙련 이주자들이 노동시장에서 비숙련 현지인들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가 아니라고 했던 우리의 설명은 고숙련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첫째, 이들은 일반적으로 최저임금 수준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받는다." "둘째, 고숙련 노동자를 채용할 때 고용주는 그가 해당 업무에 적합한 기술과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를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인간성은 어떠한지 등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한다." "많은 이들이 고숙련 이주자의 유입을 지지하지만, 고숙련 이주자의 유입이 국내 인구에게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숙련 이주자가 들어오면 저숙련 현지인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령 고숙련 직군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기존보다 싸게 누릴 수 있다(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서 일하는 의사는 개도국 출신 이민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슷한 숙련 수준을 가진 현지인들(의사, 간호사, 엔지니어, 교수 등)의 고용 전망을 악화시키는 비용이 따른다."(65-7)


"이주민에 대한 정치적인 반응이 경제적 합리성을 잘못 이해한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강력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서도 기인한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경제의 괴리가 새로운 일은 아니다. 20세기 초에 유럽 이민자가 많이 들어왔던 미국 도시들은 이민자 유입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많이 얻었는데도 정치적으로는 매우 적대적인 반응이 촉발되었다. 도시 당국은 이민자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조세와 공공 지출을 줄였다. 특히 학교처럼 타 인종, 타 민족 간에 접촉과 소통을 촉진할 법한 분야와 하수 시설, 쓰레기 수거처럼 저소득층 이민자에게 도움이 될 법한 분야의 공공 지출이 크게 삭감되었다. 또한 이민자 유입이 많았던 도시 대부분에서 민주당(이민을 지지했다)의 득표가 줄었고 더 보수적인 정치인들, 특히 1924년의 이민 제한법National Origins Act(이 법으로 외국인이 미국에 아무 제약 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시기가 끝났다)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이 선출되었다."(98-9)


3장 무역의 고통


"노동이 풍부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인 경우가 많고 대체로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더 가난하므로, 무역 자유화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 나라의 불평등을 감소시킨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반대로 노동자가 손해를 보고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 득을 보기 때문에 불평등이 증가한다. 가령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 개방이 이루어지면 임금 면에서 미국 노동자는 손해를 보고 중국 노동자는 이득을 본다. 그렇다고 미국 노동자들이 꼭 전보다 못살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새뮤얼슨이 이후의 논문에서 보여 주었듯이, 자유 무역을 하면 국가 전체적으로 GNP가 올라가므로 만약 미국 사회가 자유 무역의 수혜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 미국 노동자들도 전보다 생활 수준이 나아질 수 있다. 문제는 그 '만약'이 너무나 큰 '만약'이라는 데 있다. 노동자의 후생이 정치 과정에 좌우되어 버리는 것이다."(108)


"스톨퍼-새뮤얼슨 정리는 세 가지의 명백한 함의를 가진다. 두 가지는 긍정적이다. 무역 개방은 모든 나라의 GNP를 올리고, 가난한 나라의 불평등을 줄인다. 한 가지는 다소 부정적인 함의로, 부유한 나라에서는 (재분배 정책이 있기 전까지는) 불평등이 증가한다. 연구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가정을 하는지에 따라 국가 간 비교를 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문제는 실증 근거들이 이러한 예측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지난 30년간 많은 저소득 및 중위소득 국가가 무역을 개방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 나라에서 벌어진 소득 분배상의 변화는 거의 언제나 스톨퍼-새뮤얼슨 정리가 암시하는 것과 반대였다. 스톨퍼-새뮤얼슨 정리에 따르면, 저숙련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에서는 무역이 개방되면 저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서 불평등이 줄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숙련 노동자들이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들보다 임금상의 이득을 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109-16)


"(한 나라 안의 여러 지역들에 무역 자유화가 끼친 영향을 다루고 있는) 토팔로바의 논문이 국제무역을 전공하는 경제학자들에게 왜 위협적으로 느껴졌을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통적인 무역 이론에서 무역의 이득은 자원이 더 효율적으로 재분배되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무역 자유화에 더 강하게 노출된 지역과 덜 노출된 지역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토팔로바의 발견은 자원(토팔로바의 논문에서는 노동력이지만 자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이 그리 쉽게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원(노동력)이 쉽게 이동할 수 있다면 모든 곳의 임금이 동일해지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토팔로바만이 아니다. 많은 연구가 무역으로 자원의 재배분이 이뤄진다는 가설에 대해 실증 근거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과 돈이 기회를 따라 움직인다는 개념을 포기하고 나면, 무역이 득이 된다는 우리의 신념을 어떻게 고수할 수 있겠는가?"(122-3)


"'이름값'을 갖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된다. 구찌 향수나 페라리 노트북을 사는 소비자는 '구찌'와 '페라리'라는 브랜드를 보고 이 제품들에서 딱히 '혁신적인'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브랜드 가치가 매우 높은 구찌와 페라리가 자신의 평판을 손상시킬지 모를 질 낮은 제품을 판매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리고 값비싼 명품을 쓸 때 으스댈 수 있다는 점이 주는 매력에서) 그 제품을 선택했을 것이다." "평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국제 무역이 단지 제품 가격, 좋은 아이디어, 낮은 관세 장벽, 값싼 운송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평판이 없는 상태로 시작해야 하는 신규 행위자가 시장에 진입하고 시장을 점유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에 노동의 경직성까지 고려하면, 스톨퍼-새뮤얼슨 정리가 기초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이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거기에서 자유 무역의 이득이 발생한다'는 가정은 현실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다."(136-9)


"신규 진입자에 대한 의구심 자체가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될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자동차를 사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그 회사는 곧 망할 것이고 그러면 고객 서비스가 중단될 것이다." "중국과 인도가 경제 체제의 전환을 시도했을 때 서구에 살았던 중국계, 인도계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서구에 살면서 자신이 쌓은 평판과 네크워크를 활용해 구매자들(종종 자신이 거래해 본 곳들)에게 중국과 인도의 제품이 믿을 만하다고 보장해 주는 역할을 했다. 성공 스토리가 있으면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다. 구매자들이 성공적으로 도약을 한 업체 주위로 모이면, 또 다른 구매자가 이 업체와 거래를 하는 구매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서 이 업체를 신뢰하게 된다. 따라서 거래가 성사되어 주문을 받은 신생 기업은 이것이 '낮은 기대의 저주'가 일으키는 악순환을 깰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납품을 맞추고자 한다."(140)


"흥미롭게도 이러한 구조의 생산 모델이 이제 또다시 변화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에 속할 두 기업 아마존과 알리바바가 온라인 플랫폼을 열어 중개상 역할을 대신하면서, 개별 생산자가 중개업체에 의존할 필요 없이 (물론 비용을 내고) 그 플랫폼에서 스스로의 평판을 구축하게 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좋은 리뷰를 받기 위해 판매자들은 제품을 불합리할 정도로 낮은 가격에 내놓는다. 리뷰 수가 늘어나고 또 '좋은 리뷰'의 수가 늘어나면, 나중에 가격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플랫폼에서 신규 업체가 소비자들에게 품질에 대한 신뢰를 줄 만큼 평판을 쌓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판 구축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제3세계에 고립된 생산자가 국제 시장에 진입해 경쟁을 시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가 만드는 제품이 얼마나 품질이 좋든지, 얼마나 값이 싸든지 간에 말이다."(144)


"경제학자들은 무역으로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을 시장이 알아서 돌볼 것이라고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무역으로 누군가는 '피해를 보리라는 것' 또한 늘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내놓는 설명은,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무역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사회가 [재분배 정책을 통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피해를 상쇄해 줄 수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터, 돈, 핸슨은 중국과의 무역으로 피해를 본 지역 사람들을 살펴본 경과, 무역으로 피해를 본 지역 사람들이 정부의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약간 더 많은 돈을 받긴 했지만 잃어버린 소득을 상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무역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지역과 가장 적게 영향을 받은 지역을 비교한 결과, 전자의 지역에서 성인 1인당 소득은 549달러나 줄었는데 정부의 이전 지출transfer payment을 통해 받은 돈은 겨우 58달러 증가했다."(153)


"하지만 시장이 크지 않으면 기업 규모가 커질 수 없다. 일찍이 1776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언급했듯이, 〈분업의 정도는 시장의 범위에 의해 제약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제 교역이 가치를 갖는다. 고립된 공동체에서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기업이 존재하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나라가 철도가 놓이면서 지역 간 장벽이 극복되어 국가 단위의 시장이 형성되었을 때 대대적인 경제 변화를 경험했다." "국내 시장이 잘 통합되어 있지 못하면 경제의 경직성은 더 심해진다. 그러면 국내 각지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국제 교역의 이득을 누릴 수 없게 되거나 오히려 손해를 입는다. 가령 도로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도시로 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최종 재화와 중간재 모두, 운송 수단이 열악하면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비용상의 장점이 상쇄된다. 이런 면에서, 국내 시장의 연결을 향상시키면 국제 시장에 통합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164-5)


4장 좋아요, 원해요, 필요해요


"1977년 노벨상 수상자이자 시카고 학파의 거목인 게리 베커와 조지 스티글러는 〈취향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경제학자는 사람들의 선호를 구성하는 기저 요인들을 파고들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만약 어느 두 사람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도 바닐라가 더 좋은지 초콜릿이 더 좋은지, 북극곰을 구해야 하는지 아닌지 등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각자의 자아를 구성하는 내재적인 무언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말에 따르면 선호는 변덕도, 실수도, 사회적 압력에 의한 반응도 아니며, 사람들 각자가 무엇을 가치 있게 보느냐가 반영된, 숙고에 의한 판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베커와 스티글러는 물론 늘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가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고자 할 때는 선호를 자아를 구성하는 본질이자 숙고에 의한 판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180-1)


"그런데 베커와 스티글러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선호가 '합리적'일 뿐 아니라 '안정적'이라고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  따르면 선호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간주해야 한다. 학교도, 부모의 잔소리도, 광고판과 화면에 나오는 메시지도 우리의 '진정한' 선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렇게 가정하면,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거나 동료 집단의 영향을 받아 의사결정을 하는 가능성(다들 하니까 나도 문신을 한다거나,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히잡을 쓴다거나)은 배제된다. 물론 뛰어난 사회과학자인 베커와 스티글러는 선호가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불합리해 보이는 선택을 설명해야 할 때 그것이 사실은 합리적일 수 있는 이유들을 고찰하는 것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는 논리에는 완전히 마음을 닫고서 단순히 그것을 '집합 히스테리'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유용한 접근 방식이라고 보았다."(183-4)


"물론 개개인의 의사결정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그 결과가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군중 행동herd behavior은 '정보 폭포informational cascade' 현상을 낳는다. 처음 몇 사람의 의사결정에 토대가 된 정보가 이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최근에 이뤄진 한 실험은 첫 번째 사람 '단 한 명'의 무작위적인 행동으로도 그러한 폭포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연구는 레스토랑 등 서비스업에 대한 정보를 올리는 웹사이트와의 협력으로 진행되었다. 이 웹사이트에 사용자가 평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그 평에 대해 '좋아요'나 '싫어요'를 누를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약 10만 개의 평 중에서 일부에는 평이 올라오자마자 '좋아요'를, 일부에는 올라오자마자 '싫어요'를 눌렀다. 어떤 평에 대해 최초의 반응이 '좋아요'이면 다음번 사용자도 '좋아요'를 누를 가능성이 32퍼센트나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185)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공동체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규범이 스스로 강제력을 갖는다고 해서 그 규범이 꼭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규범이 부과하는 규칙이 반동적, 폭력적, 파괴적인 대의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고전이 된 1992년의 한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실제로는 아무도 인종이나 카스트에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차별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아무도 카스트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성관계나 결혼에서 카스트의 경계를 넘으면 '잡혼'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배제된다고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미래의 결과를 숙고해 결정을 내리는 한, 그리고 결혼이 하고 싶은 한, 이 규칙만으로도 '잡혼'을 하지 않는다는 규범을 모든 사람이 지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모두가 그 규범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충분히 많은 사람이 규칙을 깨기 시작하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189)


"오늘날 미국의 흑인들이 1965년에 비해 훨씬 더 교육을 많이 받고 있긴 해도 교육 수준이 비슷한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 사이의 소득 격차는 증가하고 있고 현재는 거의 30퍼센트에 달한다. 이는 인도의 '지정 카스트'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임금 격차보다도 큰 것이다." "그러나 2016년 대선 이래 미국에서 지배적인 이슈로 부상한 것은 흑인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면에서의 분노를 훨씬 넘어선다. 이민자는 〈우리의 일자리〉만 〈가로채는〉 게 아니라 백인의 존재를 위협하는 〈범죄자이고 강간범〉이라고 이야기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민자가 적은 주일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민자가 거의 없는 주(와이오밍, 앨라배마,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 아칸소 등)에서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이민자들이 미국의 문화와 가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이 경제적인 불안보다는 '정체성'과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195-6)


"자기 차별, 즉 스스로가 자신의 집단을 차별하는 현상이 매우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미국 심리학자 클로드 스틸의 유명한 실험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스틸은 동일한 과제에 대해 '실험용 문제풀기 과제'라고 묘사하면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 사이에 성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 '지능 테스트'라고 묘사하면 흑인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현저히 낮은 성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경우에 자기 차별은 자기 강화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고, 다시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더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기실현적 예언의 사례들을 보면, 이것의 영향을 받는 집단이 누구인지가 너무나 예측 가능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자기 실현적 예언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은 언제나 전통적으로 불리한 사회집단이었던 사람들이다." "요컨대, 편견을 일으키는 고정관념은 사회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203-7)


"우리의 믿음, 심지어는 우리가 자아에 내재된 선호 체계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나면, 상당히 많은 것이 설명된다." "〈동기부여된 믿음motivated beliefs〉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티롤과 베나부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것을 너무 문자 그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감정적인 '필요'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믿음에 감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왜곡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내가 틀렸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우리를 덫에 걸리게 만든다. 자신이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하기는 싫기 때문에 타 집단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이 들 때면 그들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아내서 내 생각을 정당화하고 싶어진다."(212-3)


"이것은 '사실 확인'이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는 데(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왜 그렇게 영향력이 없는지도 설명해 준다.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네가 감히 내가 믿는 것들에 도전을 할 수 있는가〉라는 초기의 감정적인 반응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 시작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상대에 대해 도덕적인 가치 판단을 들이미는 것은 사실을 표현하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어 하기 마련이므로, 나의 가치판단을 상대에게 부여하기 전에 먼저 상대가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하게 하는 것이 상대의 편견을 줄이는 데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이다." "이 때문에 기술 진보나 무역과 같은 교란으로 일자리가 위협에 처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생존 보장을 넘어서 존엄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 정책은 그들이 자존감의 상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돕는 것이어야 한다."(215-7)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능력을 잃어 버렸다. 민주주의는 퇴색되었고 마치 여러 부족 간의 합의와 비슷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부족들은 우선순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신중하게 고려하기보다 부족적 충성심에 기반해 투표를 하고 가장 규모가 큰 부족들의 연합이 승리한다. 그들의 후보가 아동학대자인지, 그보다 더 심한 짓을 저지른 사람인지 등은 상관없다. 상대편이 집권할 가능성을 지지자들이 몹시 우려하는 한, 승리자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조차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줄 필요가 없다. 정치인들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서 공포심에 불을 지피는 데 매진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선거에서 승리해 권력을 잡고 나면 그 권력을 이용해 공포를 조장하고,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며, 대안적인 목소리를 닫아 버리려 한다. 더 이상 '경쟁'을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이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다른 사례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238)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나의 자존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개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둔 정책만이 평범한 사람들이 관용적인 생각에 더 많이 열려 있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인종주의, 반이민자 정서, 정당 간의 소통 부족은 상대방과 접해 본 경험이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일찍이 1954년에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 고든 올포트는 적절한 여건하에서 타 집단 사람들과의 접촉을 늘리면 편견을 줄이는 데 매우 효과가 있다는 '접촉 가설contract hypothesis'을 제시했다." "접촉 가설이 옳다면, 학교와 대학이 매우 중요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사고가 더 유연한 젊은 시기에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의 룸메이트를 무작위로 배정하는 실험을 한 결과, 백인 학생이 흑인 학생과 룸메이트가 되면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를 현저히 더 많이 지지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239-40)


"문제는, 적극적 우대 조치 자체가 오늘날 극단화된 싸움의 소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 간에 접촉을 늘려서 사람들의 선호에 영향을 미친다는 좁은 목적에서 보자면, 이는 우려스러운 일이다. 올포트가 제시했던 원래의 접촉 가설은 접촉이 편견을 줄인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몇몇 조건이 만족될 때만 그렇다는 것이기도 했다. 올포트는 특히 상이한 집단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접촉이 이뤄질 때, 또 공동의 목적과 집단 간 협동, 그리고 법과 관습과 권위자의 지원이 있는 상태에서 접촉이 이뤄질 때만 편견을 줄이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적대적인 상태로 접촉이 이뤄지면 이러한 조건이 형성되기 어렵다. 가령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학의 좁은 문을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고 느끼고, 더 나쁘게는 경쟁이 상대 집단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느낀다면 상대 집단에 대해 오히려 더 분노하게 될 것이다."(241-6)


# 편견의 네 가지 시사점

1. 편견을 가진 사람(가령, 인종주의자, 인종주의자에게 투표하는 사람 같은)을 경멸하는 것은 세상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데서 나오는 그들의 견해를 더 강화할 뿐이다.

2. 편견은 '절대적인' 선호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공화당 우세주州의 주민들이 오바마 케어 도입에 찬성한 경우처럼 정말로 도움이 되는 정책은 당파적 편견을 이겨내기도 한다.

3. 인종주의 같은 편견에 기반한 투표는 사실 '무관심'의 표현일 수 있다. 유권자들은 인종, 민족, 종교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발언이 정치적 제스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편견과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직접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안들을 논의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5장 성장의 종말?


"1973년(혹은 그즈음)에 모든 성장이 멈추었다. 그 이후 25년 동안 총요소생산성의 성장 속도는 1920~1970년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경기 침체는 시작 날짜도 특정할 수 있고 비난을 돌릴 만한 명백한 행위자(석유수출국 정부들)도 존재했던 특수한 경제 위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뉴 노멀new normal'(새로운 정상 상태)이 되었다." "성장의 둔화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게 명백해졌을 무렵, 사람들은 컴퓨터 기술이 추동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이 곧 도래하리라는 데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1995년부터 몇 년간 반짝하던 이 호황은 곧 사라졌다." "논쟁의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언젠가는 생산성의 고속 성장이 다시 돌아오고 지속될 것인가? 둘째, (결국 GDP도 상당 부분 추측이 개입되는 지표라는 것을 생각할 때) 새로운 경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행복과 효용을 GDP라는 지표가 다 포착하지 못해서 지표상으로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가?"(262-3)


#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 : 노동생산성 증가분 중 교육이나 기술 발전 같이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요인들을 다 동원하고 나서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


"총요소생산성의 성장은 1995년에 시동이 걸렸다가 2004년에 둔화되었다. 그런데 2004년은 페이스북이 우리 삶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기 시작한 해다. 그리고 2006년에는 트위터가, 2010년에는 인스타그램이 이 대열에 동참했다. 이러한 플랫폼들의 공통점은 명목 가격이 공짜이고,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며,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사용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것이 GDP에 잡히는 부분이다)은 그것이 일으키는 후생(혹은 마이너스 후생)과 별로 관련이 없다. '측정된' 생산성의 성장이 둔화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 소셜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한다는 것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여기에서 GDP에 '잡힌 것'과 '잡혀야 마땅한 것' 사이에 격차가 벌어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 봄직하기 때문이다. 혹시 진정한 후생의 증가라는 면을 GDP 통계가 통째로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268-9)


"(1956년에 이미 장기 성장률의 둔화를 예측했던) 솔로우는 국가들 사이의 균형 성장률이 왜 차이를 보이는지는 각국의 '운'이라고 보기로 했다. 즉, 솔로우는 어느 나라에서 총요소생산성이 향상되는 속도는 해당 국가가 가진 정책 체계의 속성이나 문화 제도적 요인 등과는 상관없고, 우리로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했다. 이것은 자본의 축적이 성장에서 수행하던 역할을 거의 다 해서 자본 투자의 수익률이 충분히 낮아진 다음에는 장기적으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솔로우의 모델이 알려 주는 바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경제학자들은 솔로우의 모델을 '외생적' 성장 모델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외생적'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주어진 요인에 의해 추동된다는 의미이고, 이는 장기 성장률과 관련해서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성장은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279-80)


"로머가 제시한 새로운 통찰은, 솔로우 효과[경제 전체적으로 자본량이 증가할 때 (이윤율이 저하되는) 수확 체감이 발생한다]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경제 전체적으로' 자본량이 증가할 때 전체 자본의 생산성이 더 높아진다는 가정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개별 기업들은 모두 수확 체감 법칙의 적용을 받더라도, 이 개념[경제 전체적인 수확 체증]이 여전히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솔로우의 세계의 기업들과 매우 비슷하지만 한 가지 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실리콘 밸리 기업들은 통상 우리가 '자본'이라고 생각하는 것(기계, 건물 등)보다는 경제학자들이 '인적자본'이라고 부르는 것(특화된 전문성 등)에 더 크게 의존한다. 실리콘 밸리의 많은 기업은 시장화시킬 수 있는 뛰어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똑똑한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때로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284-5)


"로머의 이론으로 설명해 보자면, 실리콘 밸리는 아이디어의 교차 수분이 가능한 환경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게 할 수 있었던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로머는 성공한 모든 산업 도시에서 이와 같은 동학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중반의 맨체스터, 금융 혁신기의 뉴욕과 런던, 오늘날의 중국 선전이나 캘리포니아 베이에어리어 등 모두에서 토지와 노동의 희소성(부분적으로 노동이 희소해지는 이유는 토지가 희소해서 집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이 유발하는 수확 체감이, 고숙련 인력들이 서로 지식과 영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막대한 활력으로 상쇄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다시 고숙련 인력들이 한층 더 이곳에 모여들게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높은 성장률이 영속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솔로우 모델이 상정한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신비로운 요인의 도움이 없더라도 말이다."(285-6)


"종합해 볼 때, 결국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우선 무엇을 피해야 할 것인지는 비교적 명확한 듯하다. 초인플레, 극도로 고평가된 고정 환율, 소비에트나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 또는 북한과 같은 종류의 사회주의, 1970년대에 배부터 신발까지 온갖 것을 국영화했던 인도 정부의 정책처럼 민간 기업을 질식시키는 정책 등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 알고 싶어 하는 질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답이 아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지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베트남이나 미얀마가 오늘날 답을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중국 모델을 따라야 하느냐이지, 북한 모델을 따라야 하느냐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중국이 매우 시장화된 경제이긴 하지만(베트남이나 미얀마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접근하는 방식은 고전적인 앵글로색슨 모델과 전혀 다르고 유럽식과도 다르다는 점이다."(317-8)


"우리는 중국의 경험 중에 정확히 무엇을 따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상대적으로 훌륭한 교육과 의료 시스템이 있었고 굉장히 평등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매우 가난한 경제였던 덩샤오핑의 중국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존 지배 계급의 문화적 특권을 모조리 쓸어 없애고 모든 사람을 평평한 운동장 위에 놓고자 했던 '문화 혁명'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일본의 침략을 받아 중국의 자존심이 막대하게 훼손되었던 1930년대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중국 5,000년 역사를 처음부터 밟아야 하는가? 일본과 한국을 본받고자 말할 때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접근 방식이 유용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방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핵심은, 부유한 국가들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하면 성장하게 할 수 있을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318-9)


"우리가 알아 본 모든 성장 이론이 토대를 두고 있는 핵심 신조는 가장 생산적인 사용처로 자원이 부드럽게 이동하리라는 것이다. 시장이 완벽하게 기능하는 한에서는 당연한 가정이다." "하지만 때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느 나라 경제를 보아도 생산적인 기업과 비생산적인 기업이 모두 존재한다." "개도국의 테크놀로지 문제는 수익성을 높여 줄 테크놀로지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접근이 가능한 테크놀로지조차 최선으로 이용되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테크놀로지뿐 아니라 토지, 자본, 숙련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노동자가 많고 어떤 기업은 노동자를 충분히 고용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기업은 굉장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자금이 없고, 어떤 기업은 딱히 경영을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퇴출되지 않고 계속 시장에 남아 있다. 거시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컬어 '자원 배분상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324-5)


# 자원 배분 문제가 생기는 이유

1. 미성숙한 자본 시장과 은행 제도 : 생산적인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제때 조달하지 못해, 비효율적인 기업들도 생존한다.

2. 성장 이외의 기업 목표 : 현재의 생산 수준에 만족하거나, 자녀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일 등이 기업의 목표인 경우가 있다.

3. 부족한 좋은 일자리 :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구직자의 눈높이와 일자리의 현실이 어긋나는 경우, 취업을 연기하기도 한다.


"자원 배분상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살펴보았던 모든 사례가 예외 없이 말해 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추상적인 모델을 넘어서 자원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어느 나라가 자원 배분이 매우 왜곡된 상황에서 출발했다면(가령 공산주의 시절의 중국이나 정부가 극도로 경제를 통제하던 시절의 인도처럼), 개혁을 통해 처음에 발생하게 될 이득은 주로 자원이 더 잘 사용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가는 데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중국 같은 몇몇 나라가 한동안 매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가용한 자원과 인력이 너무나 잘못 사용되던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낭비된 자원이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성장이 빠르게 둔화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시점 이후부터는 추가적인 자원이 투입되어야 성장이 가능하다. 이 말은 이제는 향상될 여지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343)


"경제 성장의 근본 메커니즘은 여전히 모호하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그것을 알게 되는 게 언제이든 간에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에 초점을 둔 정책을 추진하면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모두 자국 경제 내에서 명백한 낭비 요인들을 없앨 수 있다. 이것으로 영속적인 고도성장에 불을 당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후생을 크게 향상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성장의 기관차가 다시 달리게 될지, 언제 그렇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고, 읽고 쓸 수 있게 되고, 당장의 절박한 처지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면 성장의 기차에 올라탈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세계화의 승자인 나라 중 많은 수가 공산주의 시기 동안 인적자본에 많은 투자를 한 나라(중국, 베트남 등)이거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직면해 인적자본에 많은 투자를 한 나라(타이완, 한국 등)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352-3)


6장 뜨거운 지구


"더 나은 기술이 온실가스 배출을 상당히 저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너무 낙관적이다. 결국, 사람들의 소비가 줄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은 경제학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물질적 소비를 후생의 척도로 삼는 버릇이 있다. 둘재, 경제학자들은 행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의심스럽게 본다. 선호를 바꾸는 것과 관련될 때는 더욱 그렇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선호를 '조작'하는 것에 대해 철학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선호는 내재적이고 '진정한' 것이며 그에 따른 사람들의 행위는 그들의 깊은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경제학자들의 오랜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행동을 바꾸도록(가령, 소비를 줄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소비를 하도록) 설득하고 확신시키는 것은 그들의 내재적인 선호 체계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하지만 본질적이고 일관성 있는 '선호 체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371-2)


"오늘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 미래에도 에너지를 많이 쓰게 한다는 점에서 에너지 소비가 중독과 비슷하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담배에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높은 세금이 도입되면 처음에 그 행동을 줄이도록 독려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고, 일단 적절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행동이 조정되고 나면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조세를 계속 높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을 덜하는 쪽으로 (따라서 세금을 덜 내는 쪽으로) 다들 습관이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습관'은 그것을 바꾸고자 할 때 단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미래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행동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에너지를 잡아먹는 재화들에 대해 '미래'에 새금이 급격히 인상될 것이라고 발표하면 그것을 예상해서 미리 익숙해지고자 사람들이 '현재' 습관을 조정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375-6)


"부유한 나라들이 펑펑 쓰면서 저질러 온 일에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불공정하다. 하지만 개도국을 기후 위기 대응에서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불행하게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개도국에 대한 일시적인 유예 조치는 앞으로 한참 동안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는 기술이 사용되도록 촉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유예라 해도 그 효과는 그렇게 일시적이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피해자는 개도국에 있을 것이므로 선진국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기후 위협을 차치하더라도 개도국이 현재 수준의 대기 오염을 지속할 (혹은 더 증가시킬) 여력이 있는지다. 개도국의 온실가스 배출은 '현재' 개도국 국민들에게 심각하게 피해를 입히고 있는 또 다른 문제, 즉 긴급한 공중 보건상의 유해 요인으로 자리잡은 대기오염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377-8)


"관건은, 이 문제를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싸우는 구도로 몰고 가지 않는 것이다. 부유한 나라가 조세와 규제로 자국의 탄소 배출을 줄이고 가난한 나라의 에너지 및 기술 전환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한다면 부유한 나라의 경제 성장이 둔화될지도 모른다(물론 둔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성장을 일으키거나 저해하는 요인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비용의 상당 부분이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그로 인해 지구에 득이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경제학자들은 자원이 재분배될 수 있으며 재분배되리라고 믿고서 전체적인 파이를 키우는 데만 온 관심을 집중하는 덫에 빠져 있다. 지금 우리가 근거를 가지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불평등이 극적으로 증가했고 이것이 세계 전역에서 폭발 직전으로 끓어오르고 있는 숱한 악영향을 야기했다는 사실이다."(384-5)


7장 자동 피아노


"인공지능이 추동하는 이번의 자동화 파도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과거에도 자동화의 파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오늘날의 인공지능처럼, 과거의 제니 방적기, 증기기관, 전기, 컴퓨터 칩, 컴퓨터 기반 학습 기계와 같은 기술 모두가 자동화를 불러왔고 인간 노동력을 필요 없게 만들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다들 예상하시는 바대로다. 몇몇 직무에서 인간 노동자의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자동화는 강력한 대체 효과를 일으켰다. 노동자가 불필요해졌다. 숙련된 장인이었던 직조공과 직물공 등이 산업혁명 시기에 정면으로 이 문제에 부닥쳤다. 그들은 기계에 밀려났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그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세기 초의 러다이트들은 숙련된 장인으로서의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기계를 부수며 직물 산업의 기계화에 저항했다." "그들이 속했던 직군에서는 정말로 기계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졌다. 장기적으로는 모든 것이 훨씬 좋아지지 않았냐고들 말하지만, '장기'는 정말로 긴 기간이다."(394-5)


"기업이 생산성이 매우 높은 테크놀로지를 도입하면 그 때문에 이 기업에서는 노동자가 대체된다 해도 생산성의 향상이 새로운 영역에서 수요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위험한 기술은 '그저 그런' 정도의 자동화 기술이다. 왜곡된 조세 혜택이 있을 경우에 도입되어 노동자를 몰아낼 수 있을 정도로는 생산적이지만 전체적인 생산성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산적이지는 않은 기술 말이다. 오늘날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자원의 상당 부분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업무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줄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 개발보다 '기존의'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한 머신러닝이나 빅데이터 기법 개발에 들어간다. 노동자를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이 주는 재정적 이득을 생각하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과학자, 공학자, 연구자들의 노력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혁신 쪽으로 쓰이지 못하고 다른 곳에 쏠리게 만든다."(399)


"성장이 여전히 굼벵이 걸음이던 1980년대에 불평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토마 피케티와 이메뉴얼 사에즈의 뛰어난, 그리고 각고의 노력이 들어간 연구 덕분에 이제 우리는 1980년 이래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 1980년은 레이건이 당선된 해이자 미국에서 국민소득 중 상위 1퍼센트에게 가는 몫이 50년 동안 하락세를 보이다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 해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가 끝날 무렵이던 1928년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퍼센트는 미국 전체 소득의 24퍼센트를 가져갔는데 1979년에는 이 숫자가 3분의 1로 줄었다. 그런데 2017년에는 다시 1929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소득 불평등의 증가는 부의 불평등 증가를 수반했다." "더구나 이 수치들은 〈세전〉 소득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즉, 소득이 얼마나 재분배되었는지가 감안되어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세율이 낮아졌으므로 1979년 이후 세후 소득 불평등은 세전 소득 불평등보다 심지어 더 크게 증가했으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406-7)


"하이테크 혁명의 가장 성공적인 발명 중 많은 것이 '승자 독식' 제품이다. 전 세계가 페이스북을 쓰는데 나 혼자 마이스페이스에 남아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누군가가 내 트윗을 리트윗해 주지 않는다면 트위터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술 혁신은 첨단 산업뿐 아니라 기존의 산업에도 변혁을 가져왔고, 요식숙박업이나 운수업처럼 전에는 하이테크 분야와 거의 관련이 없어 보였던 산업에도 도입되어 커다란 이득을 창출했다." "그 결과 승자가 독식하는 (전체는 아니더라도 거의 다 독식하는) 경제가 생겨났다." "그리고 기업의 집중도가 더 높은 업종에서는 매출 중에서 임금으로 가는 몫의 비중이 더 감소했다. 독점 혹은 준독점이 된 기업들이 더 높은 수익을 올리면서 그 수익을 [노동자보다는] 주주들에게 분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 집중화의 심화는 임금의 상승 속도가 GDP의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410-1)


"이같은 '슈퍼스타' 서사는 금융 분야에는 잘 맞지 않는다. 금융은 팀 스포츠가 아니다. 흔히 금융에서는 시장을 왜곡하고 있는 특정한 불합리를 예리하게 짚어 내거나, 다음번의 구글, 다음번의 페이스북이 될 싹수가 보이는 곳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는 개인적인 천재성과 안목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평범한' 펀드매니저가 매년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는 이유가 된다는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액티브 펀드'는 '패시브 펀드'보다 대체로 실적이 좋지 않다. 미국에서 뮤추얼 펀드는 평균적으로 주식시장보다 성과가 저조하다. '개인의 능력'이라는 언어만 빌려 왔을 뿐 능력 자체는 가져오지 않은 듯 보인다. 금융 분야 종사자들이 얻는 프리미엄의 대부분은 순전히 '지대'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규정인 것 같다. 능력이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특정한 직업에 안착할 수 있었던 행운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415-6)


"가난한 나라에서 정부 일자리가 갖는 지대처럼, 금융 종사자들의 지대도 노동시장의 전체적인 기능을 왜곡한다." "이것이 우려할 만한 일인 이유는 어떤 직업이 유용성과 상관없이 프리미엄을 받으면, 사회적으로 더 유용한 일을 하는 기업이 재능 있는 인재들을 활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 빠른 속도로 주식 거래를 하면 수익이 올라갈 수 있다. 거래인이 새로운 정보에 더 빨리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응 속도라는 것이 이미 초 단위보다 작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어떻게 경제에서 자원 배분을 유의미하게 향상시킨다는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뛰어난 인재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은 금융 기업이 홍보와 마케팅에서 단골로 드는 이야기지만 그 뛰어난 인재들을 데리고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 인재들의 역량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그들은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거나 췌장암을 치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416-7)


"한 회사가 CEO에게 보수를 더 많이 지급하면 금융 회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회사들 역시 자사의 뛰어난 CEO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만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 보수를 더 지급하지 않으면 우리 회사의 CEO가 자신이 함께 골프를 치는 다른 CEO들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금융 회사 CEO의 높은 보수는 다른 영역으로도 전염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 분포 스케일상에 있으면 CEO가 자신의 보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아래쪽의 임금도 함께 올려야 한다. 하지만 스톡옵션이 있으면 기업 내에서 아래 쪽의 임금을 올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인건비를 포함해 비용을 쥐어짜야 할 필요가 있다. 한때는 직원들에게 기업에 대한 충성도를 요구하는 대신 직원들을 챙겨 주었던 가부장적 온정주의가 거대 기업의 특징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온정주의는 소프트웨어 기업의 최상층 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되었다."(417-8)


"우리는 레이건-대처 혁명의 기저가 된 '인센티브' 서사가 부유하지 않은 사람 상당수에게 초고소득자의 천문학적인 보수가'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면이 있다고 본다. 아마도 세금 인하는 이러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반영하는 한 가지 징후였을 것이다.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은 세율의 변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다. 자신이 받는 돈이 '노력을 들여 획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부유한 사람들은 아무런 사회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은 채로 스스로에게 막대한 돈을 지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센티브' 개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이러한 서사를 퍼트리고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서사는 계속 확산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명백히 분노하면서도 자원이 꼭대기 쪽으로 점점 더 많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비난하기보다 이민자와 자유 무역을 비난한다."(421)


"이매뉴얼 사에즈와 동료들이 소득세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사람들이 노동에 기울이는 노력은 최고세율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고세율에 반응하는 것은 노동에 들이는 노력이 아니라 세금을 포탈하거나 회피하려는 노력이었다. 1986년 레이건 행정부가 세금을 감면했을 때 과세 대상인 개인 소득이 한 차례 대대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기보다(즉, 일하려는 의욕과 노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전에는 소득을 숨겼던 사람들이 세제가 유리하게 바뀌면서 이제는 소득을 신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기업은 가장 좋은 경영자를 원하므로 막대한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을 것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되는가? 세금이 높아도 그것이 가능할까? 답은 '그렇다'이다." "세율이 모든 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한, 가장 좋은 보수를 받는 자리는 여전히 가장 좋은 보수를 받는 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424-5)


"불평등에 맞서는 방안으로서 막대한 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의 장점은, 그 부를 소유하고 있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그 막대한 부에서 발생하는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뿐 아니라 (가족 소유의 트러스트 등에 재투자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 축적한 부에서 새로운 자산 소득이 발생하면 그 소득의 대부분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그러면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해진다. '매우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부유세를 납부하도록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부유세 개념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유세를 경제 매체나 정치인들이 종종 말하듯이 부유한 사람들이 사회에 부를 '환원'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해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 부유세는 그들이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그 소득을 가지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행정적으로 (비교적) 간단하고 편리하게 조세를 부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428-9)


"최고세율 인상의 어려움은 정치적인 어려움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면서 그들은 사회를 현 상태로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할 수 잇는 자원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최고위소득자들의 세율을 낮추도록 의원들에게 정치 자금을 대고 로비를 하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포퓰리즘이 부상한 것은 어느 면에서 여기에 대한 백래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역량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느낌이 깔려 있다. 이러한 느낌은, 언제나 결정은 저 먼 곳에 있는 엘리트 계층이 내리고 어쨌거나 그 결정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아무런 차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 생각 자체가 옳든 그르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는 (그의 엄청난 부와 엘리트 계층 인맥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이제까지의 방식을 뒤흔들겠다는 약속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432-3)


8장 국가의 일


"더 많은 공공 서비스를 누리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는 개념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보이는 한 가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개입이든 간에 정부의 개입 자체에 매우 회의적이라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레이건 시절 이래로 미국 사람들은 〈현재의 위기에서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줄기차게 들어 왔다." "정부의 행동에 대한 뿌리 깊은 의구심이야말로 정작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최대의 제약 요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 본인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이 '무엇에 비하여' 나쁘다는 것인가? 가령 태풍이 닥치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거나,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는 등의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시장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주체가 현실적으로 손댈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정부의 존재 근거 중 하나다."(452-5)


"정부에 대한 의구심은 정부의 부패에 대한 강박적인 우려와 관련 있다. 하지만 의지만 있으면 부패를 근절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부패의 근원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우리의 역량에 대해 핵심을 잘못 짚고 있다. 시장이 손대지 않는 일을 정부가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그 일이 부패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오염에 벌금을 부과하는 일을 생각해 보자. 물론 오염을 일으키는 사람이나 기업이 오염을 관리하는 정부 당국자에게 뇌물을 주고 벌금을 무마하려 하는 경우가 생길지 모른다. 하지만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영리 기업이 이 일을 맡으면 그 문제가 나아지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영리 기업 종사자라고 돈을 덜 좋아하리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조세 징수 업무를 민영화했던 '조세 징수 도급tax farming'의 실제 역사가 잘 보여 주듯이, 민간 조세 징수 업자가 엉뚱한 사람들에게까지 조세(혹은 벌금)를 과도하게 뜯어내려 할 인센티브가 생길 위험도 있다."(457-8)


"정부가 무능하거나 부패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보는 인식은 악순환을 일으킨다. 정부에서 일하는 것이 그리 매력적인 진로로 여겨지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만 정부에 들어오게 되면 능력이 부족한 정부가 되고, 이는 다시 유능한 사람들이 정부로 가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말을 자꾸 듣다 보면 정작 시민들이 정부의 부패에 무덤덤해지게 된다. 그래서 선출직 정치인들 사이에서 뻔뻔하고 노골적인 부패가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도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넘어가게 된다. 워싱턴 D.C.부터 예루살렘, 모스크바까지 모든 곳에서 이러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그와 다른 모습을 기대하도록 학습되어 있지 못해서, 더 이상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은' 부패에 대해 과도한 강박이 '거대한' 부패가 횡행할 여지를 만들어 주는 뒤틀린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461-3)


"남미에서도 빈곤층에게 소득을 이전해 주는 프로그램은 정치적인 반대에 부닥쳤고 명목상의 이유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공짜로 주면 도덕적,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복지 담론이 '복지 프로그램이 오남용과 게으름을 유발한다'는 우려로 점철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멕시코에서 저소득층 대상 소득 이전 프로그램인 '프로그레사'를 고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경제학 교수 산티아고 레비는 우파의 탄탄한 지지를 얻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마땅한 보상'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수혜자가 받는 혜택이 분명하게 조건부로 제공되게 했다. 수혜 가구는 자녀를 병원에 데리고 가고 학교에 보내야만 돈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해당 가구는 자녀의 건강과 교육 면에서 더 나은 지표를 보여줬다." "우리에게 자원은 부족하지 않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불화와 불신과 분열의 벽을 뛰어넘게 해 줄 아이디어다."(466-8)


9장 돈과 존엄


"현재의 담론을 보면, 한쪽 끝에는 시장 경제에서 잘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현금을 주고 그다음에는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손 터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스스로 알아서 할 능력이 없으므로 운명대로 살도록(즉 비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그들의 삶에 매우 세세하게 개입해서 그들의 선택지를 제약하고 그 제약을 벗어날 경우에는 응분의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쪽은 공공 정책 수혜자들의 자존감은 우리가 고려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은 그들의 자존감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그들이 공공 정책의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존감을 버리는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존중받고 싶다는 욕망이야말로 사람들이, 특히 그 프로그램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프로그램을 지지하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다."(474-5)


"오늘날 보편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은 사회 복지 프로그램계의 '잇 아이템'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밀턴 프리드먼 이래로 대개의 경제학자들 역시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는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는 가정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을 정부 관료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지 수급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고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는 그들이 알아서 결정하게 두는 것이 명백하게 옳은 일이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는 게 제일 좋을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안다. 먹을 것을 사는 게 합리적이라면 그들은 먹을 것을 살 것이다. 옷을 사는 게 더 유용하다면 그들은 옷을 사기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미국의 SNAP(Supplemental Nutrition Assistance Program, '푸드 스탬프'라고 불렸던 저소득층 영양 보조 프로그램) 같은 제도는 지급 받는 돈으로 식품만 살 수 있게 정해 놓았다는 점에서 정부가 수급자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이다."(475-6)


"보편기본소득에 저항하는 가장 간단한 한 가지 이유는 돈이다. 보편 프로그램은 수혜 대상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 매달 모든 미국인에게 1,000달러를 주려면 연간 3.9조 달러가 필요하다. 이것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다 합한 것보다 1.3조 달러나 많은 것이고, 연방 정부 예산 전체, 그리고 미국 경제 규모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국방, 공공 교육 등 전통적인 정부 기능을 줄이지 않으면서 이만한 자금을 조달하려면 기존의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없애고 '추가로' 미국의 세금을 덴마크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도 부유한 사람에게는 더 적은 액수를 지급하고 소득이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보편' 기본소득은 아니게 된다. 그러면서도 대상 집단을 설정하고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갖는 모든 단점들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483-4)


"가난한 나라의 정부도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을 지급하는 보편초超기본소득universal ultra basic income에 더해 매우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더 금액이 큰 소득 이전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후자의 프로그램을 예방적 의료 및 아동 교육과 연계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정책 조합으로 보인다. 후자의 선별 프로그램에서 조건 이행을 너무 엄격하게 강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로코에서 '용도 독려 현금 이전labeled cash transfer' 방식의 프로그램을 평가한 결과, 프로그램의 목표[자녀의 교육]를 명확히 밝혀서 지급받는 돈을 자녀의 교육비로 쓰도록 '독려'는 하되 이행을 엄격하게 강제하지는 않아도 전통적인 조건부 현금 이전 프로그램만큼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데 효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행정 비용을 낮추면서도 정작 가장 취약한 가구를 의도치 않게 배제하게 되는 위험도 피할 수 있다."(506-7)


"보편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그러나 본인이 가난하지는 않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기본소득을 새로운 경제 구조에서 비생산적인 인력이 되어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될 사람들의 문제를 직접 돈을 지급함으로써 완화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보편기본소득이 있다면 그들이 굳이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무언가 다른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실증 근거로 볼 때 이것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은 일로 보인다. 〈연간 1만 3,000달러의 보편기본소득이 조건없이 주어지면 당신은 일을, 혹은 구직을 그만두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87퍼센트가 아니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대개 일을 하고 싶어 하며, 그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만이 아니라 일이 목적의식, 소속감, 존엄성을 느끼게 해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 수준이 높고 고임금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직업을 자아 정체성의 일부로 여기는 경향이 더 크다."(509-10)


"개념적으로 보편기본소득은 실직한 노동자들이 기본소득을 받으면 힘겨운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것이라고 상정한다." "불행히도, 실증 근거들에 따르면 '노동 시스템' 외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보인다." "우리 대부분은 구조화된 노동 환경에서 제공되는 모종의 규율을 필요로 하고 거기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자동화에 대해 사람들이 매우 크게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64퍼센트가 사람들이 로봇과 경쟁하도록 내몰린다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실제로, 시간 여유가 더 많아진 사람들(은퇴자, 실직자,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등)은 전일제로 일하는 사람보다 자원봉사 활동을 할 가능성이 더 낮았다. 즉 자원봉사는 우리가 일상적인 활동에 더해 '추가로' 하는 일이지, 일상적인 활동 '대신에' 하는 일이 아니다."(512-3)


"전환의 시기는 정부가 그 전환으로 고통을 겪는 노동자에게 공감하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기회가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기존과 비슷한 정도의 자부심을 주는 일자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직업을 바꾸는 것과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것 모두 굉장히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경제에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또 개인에게도 자신의 재능과 일자리를 더 잘 연결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노동자 다섯 중 넷은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일자리를 전환할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득에 대해서만 보편 권리를 보장하는) 보편기본소득과 달리 일자리 전환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사회적인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모두 사회 안에서 생산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져야 한다."(532)


"인도에서 가뭄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과 시카고 남부 빈민가의 젊은이, 그리고 방금 해고된 50대 백인 남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로 정체성이 규정되지 않고 그들 자신으로 여겨질 권리가 있다. 개도국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우리는 희망이야말로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늘 목격한다. 그들을, 사람 자체를 그들이 가진 문제로 규정하는 것은 '상황'을 '본질'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며, 이는 희망이 들어설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보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스스로를 그 정체성으로 꽁꽁 감싸는 것이고,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모든 해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더 많이 알아 나가야 한다. 하지만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는 한,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545-6)


에필로그 좋은 경제학과 나쁜 경제학


"개발경제학자로서 우리는, 지난 40년이 보여 주는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변화의 '속도'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좋은 쪽으로도 그렇고 나쁜 쪽으로도 그렇다. 공산권이 붕괴했고,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했고, 전 세계 극빈층이 반으로, 그리고 또다시 반으로 감소했고, 불평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HIV가 맹렬히 확신되었다가 수그러들었고, 영아사망률이 대폭 감소했다. 또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널리 퍼졌고, 아마존과 알리바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등장했고, '아랍의 봄'의 희망이 중동을 휩쓸었고, 전체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확산되었고, 전 지구적인 환경 재앙의 위협이 닥쳤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지난 4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목격한 변화의 매우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내린 정책적 선택의 결과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정책은 강력하다. 정부는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엄청나게 해악을 끼칠 힘도 가지고 있다."(552-3)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말이다. 〈자신은 실용주의자라서 사상 따위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대개 어느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다. 하늘에서 계시를 듣는다는 미치광이 권력자들도 몇 년 전에 어느 학자가 끄적거려 놓은 글에서 자신의 망상을 뽑아낸다.〉 사상은 강력하다. 사상은 변화를 추동한다. 좋은 경제학만으로 우리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경제학이 없다면 우리는 어제의 치명적인 실수를 반드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나쁜 사상의 영향을 막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신중하게 살피고, '자명'해 보이는 것의 유혹에 저항하고, 기적의 약속을 의심하고, 실증 근거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복잡성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솔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중함이 없다면, 다층적이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담론은 단순한 슬로건과 이미지로 환원되어 버리고,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한 정책은 돌팔이의 해법에 밀려나 버릴 것이다."(55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땅과 집값의 경제학 - 우리 삶의 불평등, 그 시작은 땅과 집에서 비롯되었다
조시 라이언-콜린스.토비 로이드.로리 맥팔렌 지음, 김아영 옮김 / 사이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땅은 집값 상승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땅의 가치는 현재의 사용가치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땅은 영속적이기 때문에 땅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그 땅을 보유함으로써 미래에 제공받을 경제적 가치를 보장받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땅은 식량과 같은 소비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자산이고, 땅값에는 미래의 경제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반영된다는 것이다. 개발규정에 큰 변화가 없다면 땅은 영속적이고 본질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가치를 저장〉하기에 좋은 자산이다. 자본자산(capital asset, 자본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자산)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마모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반면 땅은 가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돈은 땅에 비해 훨씬 더 유동적이지만 인플레이션이나 소비자의 상황에 따라 순식간에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땅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이중적 기능 덕분에 언제든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경제학 이론에 깔끔하게 들어맞기가 어렵다."(20)


"특정한 용도로 사용될 땅의 공급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은 공급과 수요가 자유시장 안에서 가격을 결정한다는 주류 경제학 이론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아이폰의 수요가 늘어나면 애플 사는 균형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즉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져 시장이 청산될 때까지 스스로 비용을 지불해서 아이폰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하지만 땅은 수요가 늘어나면 공급량이 그에 대응하여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땅의 가격이 올라간다." "지대를 뽑아낼 수 있는 자격, 즉 토지소유권은 영향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경제체제 안에서 생성되는 산출량의 대부분을 토지 소유자가 효율적으로 독점할 수 있게 해주는데 그것은 그 땅의 주인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이득이다. 아주 간단히 생각해보면,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땅주인은 지대를 높임으로써 근로자, 상점 운영자, 기업가 등 임차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추가적 가치를 차지할 수 있다."(27-8)


2 땅은 어떻게 개인의 재산이 되었는가


"땅이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17세기, 18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계몽주의 사상의 핵심적인 발전이었다. 토머스 아퀴나스, 휴고 그로티우스, 사무엘 푸펜도르프 같은 사상가들은 재산권이 개인과 국가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가들에 따르면 신은 개인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땅을 주었다." "하지만 현대경제학 이론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존 로크의 저작들이었다. 로크는 사유재산이 국가보다 우선하므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했고, 노동을 투입하여 자연상태였던 토지를 개발하고 개선한 사람에게 그 재산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노동을 투입함으로써 그 사람은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로크는 이런 활동이 자연상태의 불안과 잠재적 위험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절대군주들에게도 속박받지 않는 문명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토지소유란 〈자유〉의 한 형태였다."(36-7)


"일단 땅에 대한 사유재산권이라는 개념이 16세기 영국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재산권은 기존의 형식과 오랫동안 공존했다. 토지소유권은 오늘날에도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 사유지에도 그 땅에 적용되는 공적 권리가 있다. 땅주인은 땅을 개발하거나 용도를 변경할 수 있는 자유를 제한받고, 자신의 땅에서 보물이나 유물이 발견되더라도 부분적으로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소유권과 사용권을 비롯한) 다양한 토지 보유형태를 살펴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눈에 띈다. 토지소유권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관습에 좌우되고 따라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금 같은 다른 자산을 소유하는 경우와 달리, 땅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그 지배력이 사회에서 널리 인정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중세시대 법의 상당 부분이 땅의 이용, 매매, 소유, 상속과 관련된 조항에 할애되었다는 사실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41-2)


"원하는 사람에게 땅을 팔 권리와 확실히 보장되는 소유권을 바탕으로 땅을 소유해야만 땅이 대출을 위한 담보로 쓰일 수 있다. 채권자가 담보로 잡은 땅을 팔아 빚 대신 받아야 하는데 팔 수 없는 땅이라면 담보로 받아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일단 토지소유자가 명확하고 양도 가능한 소유권을 갖게 되고 정밀한 조사, 표준화된 측량, 공인된 법적 제도가 뒷받침되자 은행거래를 비롯한 신용거래가 광범위하게 확대되는 길이 열렸다. 따라서 땅을 취급하는 방식의 사회적, 정치적, 법적 변화는 근대금융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서는 부동산 담보대출, 특히 주택소유자를 대상으로 하는 주택담보대출이 신용창조(credit creation, 은행이 자산(대출금)과 부채(예금)를 동시에 창출하는 대출행위)와 화폐창조의 최대 원천이다."(43-4)


"땅을 재산으로 보는 개인적 소유권의 역할은 근현대사 전반에 걸쳐 발견된다. 즉 이러한 소유권은 산업혁명 초기에 기업가들이 자본을 모아 새로운 기계에 자금을 투자할 수 있게 했고 세계대전 후 독일, 일본, 한국에서는 경제를 재건하는 데도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 나라들에서는 땅을 운용하던 사람들, 주로 농토를 경작하던 사람들에게 토지가 재분배되면서 그들의 소유권이 인정되어 신용거래와 생산수단 등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확대되었고 그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전보다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역동적인 자본주의 경제가 등장할 수 있었고 전후시대에 오랫동안 호황이 유지될 수 있었다. 20세기 중반 영국과 서구 여러 나라들에서 나타난 개인의 주택소유권 확산 또한 토지소유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그리고 이것은 최소한 1970년대까지 경제성장과 회복, 평등에 대체로 유익한 결과를 낳았다."(44-5)


"토지자산은 움직일 수 없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매일 수밖에 없고, 특히 강제수용이나 몰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땅주인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 이후 정치적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왕의 권력이 억제되었고 의회는 왕에게 받을 돈이 있는 사람들과 재산소유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었다." "비교적 소규모로 토지를 보유한 자들을 대변하는 정치권력의 이러한 초기 주장들은 중앙당국의 독단적 권력을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진보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사적 소유권의 힘이 처음에는 봉건 귀족사회 이후 등장한 새로운 집단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쓰였지만, 나중에는 그 새로운 지주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다른 사람들은 토지를 갖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데도 쓰였다."(46-7)


3 어느 날 눈 떠보니 갑부가 될 수도 있는 지대의 힘


"일반적인 용어로 지대 혹은 경제적 지대라는 말은 어느 한쪽이 아파트, 자동차, 기계 등 무언가를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대가로 그것을 보유한 상대에게 지불하는 비용을 가리킨다. 하지만 경제학에서의 지대는 희소하거나 독점적인 생산요소를 소유하는 데서 나오는 이득을 가리키는 말로, 이 이득은 생산요소를 생산현장에 투입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많다. 이런 지대를 얻는 사람들을 흔히 렌티어rentier, 즉 지대소득자나 불로소득 계층rentier class이라고 한다. 지대는 생산적인 인간행동과 관련된 생산자 잉여(생산자가 재화를 팔면서 설정한 최저가격과 실제로 받는 가격 차이만큼의 이익)나 일반적 이득과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지대는 땅주인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땅이 특정 지점 주변에서 개발됨에 따라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 다시 말하면 지대는 땅주인의 개인적 활동과 투자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결정된다."(71-3)


"사유재산제가 자유주의 사회를 형성하는 제도라고 굳게 믿었던 영국 고전경제학자들은 가장 적절한 지대문제의 해결책으로 〈세금〉을 꼽았다. 이들은 세금이 사유재산제와 사회정의 사이에 생길 수밖에 없는 긴장을 해소해준다고 보았다. 실제로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헨리 조지는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노동이나 자본에 세금을 매길 것이 아니라 지대가 국가 과세표준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헨리 조지에 따르면, 지대를 지불하기 위해 생산할 수 있는 부보다 땅값과 그 땅을 사용하는 대가로 부과되는 지대가 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자연적인 경향은 임금과 투자가 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낮추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지대에 세금을 부과하면 자본가와 토지소유자들이 비생산적인 땅보다 자본과 노동에 투자하고 거기서 이익을 창출하려는 동기가 강해질 것이므로 지대에 대한 과세가 실제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리라는 생각이었다."(79-81)


"그러나 19세기 말 신고전 경제학자들은 땅과 자본의 개념을 합쳐버렸다. 이들은 경제학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이거나 자연발생적인 원칙을 밝혀냄으로써 경제학의 지위를 객관적 과학으로 격상시키고자 했다. 이런 시도는 경제적 결과가 자연스러운 시장의 역할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학의 결과라고 주장하던 고전경제학자들이 사용한 규범체계와는 대조된다." "얼핏 보기에 신고전 경제학에서 〈땅과 자본의 통합〉은 일정한 논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둘 다 충분히 발달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으므로 분명 상품으로 간주될 수는 있다. 기업은 땅과 회사의 주식(자본금 소유에 해당)을 포함하는 자산을 가질 수 있고, 기존에 형성된 시장가격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땅과 자본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이 둘을 통합하는 것은 생산과 분배과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이 두 가지 개념을 훼손하는 셈이다."(84-5)


"우선 땅은 영구적이고, 생산되거나 재생되거나 다 써버릴 수 없으며,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경제적 의미에서 땅은 〈물리적 공간〉이다. 땅 위의 흙은 깍여나가거나 질이 나빠질 수도 있지만 그 아래의 땅은 남는다. 이 같은 특성들 중 자본에 적용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본재는 인간이 만드는 것으로, 기술혁신과 물리적 마모 때문에 가치가 낮아진다. 국민계정의 어떤 부문에서든 물적 자본physical capital의 가치하락을 나타내는 숫자들은 상당히 많이 발견되며, 한 국가의 생산량을 계산할 때 선호되는 변수 또한 총자본투자가 아닌 순자본투자다. 이와 달리 땅의 경우에는 순가치와 총가치가 같다." "장기적으로 땅은 대개 자본처럼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아진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인구가 늘어나면 경제가 발전하고 자본은 늘어나지만 땅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다. 그 결과 땅의 가치, 즉 땅의 지대는 반드시 높아진다."(85-7)


"땅의 두 번째 특징은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자본은 형태와 위치를 바꾸며 변한다." "또한 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규정된 구역 안에 고정되어 있다. 자본은 움직일 수 있으므로 이러한 경계를 쉽게 드나들 수 있다." "땅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땅의 사용자들에게 꾸준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것은 자본재처럼 저장하거나, 조절하거나, 예상되는 수요증가를 대비해 아껴둘 수는 없다. 사용되지 않는 땅은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한계생산성이론은 땅이든, 자본이든, 노동이든 모든 생산요소가 장기적으로는 같은 한계수입에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모든 생산요소가 같은 물리적 수량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땅은 그렇지 않다. 땅에는 각각 고유의 위치가 있고 도심 주변에 새로 추가되는 한 단위의 땅들은 생산이 중심에서 멀리 있기 때문에 균일한 땅 한 단위를 추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88-90)


"19세기에 걸쳐 영향력이 확장되었던 마르크스는 토지세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그것이 지주들과의 싸움에서 산업자본과 도시의 자본가를 뒷받침하는 정책인 동시에 이 집단들의 노동자 착취를 막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노동자들이 경제적 잉여 중에서 충분하고 공정한 몫을 가져갈 수 있으려면 자본가가 가진 땅과 생산수단을 철저히 국유화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리카도가 제시한 지대이론의 정치적 목적은 산업이 아니라 땅에 과세하려는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었고,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토지과세는 〈자본주의 체제를 구하려는 마지막 시도〉였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 및 노동에 대한 과세와 산업규제를 위한 사회주의운동은 토지세운동에 비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부 하에서 세금은 토지소유나 금리 때문에 발생하는 불로소득이 아닌 자본소득이나 노동에 매겨지게 되었다."(95-6)


4 주거 자본주의 시대, 땅과 집값의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등장하다


"케인즈 시대의 혼합경제(전후~1971년 브레튼우즈 협정 붕괴)에서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지방의회의 주택건설과 민간기업의 개발사업이 공존했고 그보다 훨씬 낮은 비율이었지만 비영리 주택금융조합도 합세했다. 국가의 주택건설 비율이 가장 높은 해에는 시장의 주택건설 비율도 가장 높았고, 따라서 국가의 공급이 민간투자를 몰아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비교적 소규모의 지방 건설업체들은 지방의회에서 주택건설 계약을 따낼 수 있었던 동시에 자체 자금으로 소량의 주택을 지어 매매했다. 신용거래가 힘들거나 판매가 부진하더라도 지방의회에서 의뢰한 일을 계속하면서 직원들을 유지하고 업계에 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국가의 주택공급은 민간투자를 뒷받침했을 뿐 아니라 민간주택 건설업체가 채택하는 투기적 사업모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최고점과 최저점을 완화하여 경기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130)


"1979년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전후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국가 중심의 대대적인 주택건설 정책은 막을 내렸다. 새 정부는 1950년대 보수당의 전략을 영향을 받아 주택소유자를 급격히 늘리려고 했고 영국을 재산소유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겠다는 오랜 보수당의 목표를 이루려고 애썼다. 그 첫걸음으로 정부는 1980년 10월 첫 번째 주택법을 통과시키고 주택구매권을 주력 정책으로 내세웠으며 지방의회를 압박하여 사회주택을 그 거주자들에게 팔게 했다. 남아 있던 지방의회 임대주택들은 공공부문 차입금을 줄이겠다는 정치적 바람에 힘입어 대개 주택금융조합 부문으로 옮겨졌다." "한편 금융규제가 더욱 완화되자 주택구매에 대한 신용할당이 늘어났고 다시 한번 집값 폭등 현상이 가열되었다. 이런 현상은 유럽 환율조정장치가 정한 범위 내에서 파운드화의 가치를 유지할 만큼 이자율이 높아진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나타났다."(138)


"20세기 말쯤에는 주택건설에 대한 영국 정부의 직접적 개입이 거의 사라졌고 사회주택이 쇠퇴하는 동시에 주택소유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주택시장의 상승세에 관심이 있는 유권자 수는 늘어났고 사회주택에 관심이 있는 유권자는 격감했다." "이제 대다수의 정치인과 일반대중에게 집은 일반적인 소비재라기보다 〈부를 추적하는 수단〉으로 인식된다." "이런 상황은 금융부문의 자유화와 규제완화, 급격한 소득증가, 부의 불평등을 토대로 하여 조성되었다. 이 요소들은 높은 자기거주자 비율, 주택금융 시스템에 대한 규제 완화, 심화되는 불평등이 한데 결합하여 주거 자본주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사이에 〈땅의 경제적 중요성〉이 결정적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주택소유자들은 총선거와 지방 개발계획 결정 과정에서 정치적 장악력을 발휘함으로써 자신들의 관심분야가 정부 정책의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왔다."(141-3)


"주택소유의 증가는 집값이 오르고 공급이 둔화되는 양상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에서는 주택소유자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재산이 주택시장에 묶여 있는 유권자의 비율도 늘어났다. 그러자 주택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면 집값이 끌어내려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주택공급과 주택구매력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과 주택소유자의 재산을 지키려는 입장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발생했다." "조세정책도 이와 같은 흐름에 따라 변한다. 선거에서 주택소유자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1960년대 이후 선출된 정부들은 재산세를 내렸고 집을 사고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치는 복지가 더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국가가 주택공급이나 토지시장에 대한 개입을 줄임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는 주택자본과 같은 개인의 자산축적을 복지와 노령인구의 노후대비를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 보아 점점 더 장려했다."(157)


5 땅과 집은 어떻게 금융화가 되었는가


"집값이 소득보다 빨리 오르는데도 사람들이 집을 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주택의 공급이 아니라 〈수요〉에 있다. 땅에 대한 수요는 사람들의 소득이나 기업의 이득, 경제성장률을 훨씬 넘어설 수 있다. 달리 말해, 집과 땅에 대한 수요는 특정한 특정한 시점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소득이나 국내경제에서 순환하는 돈의 양에 따라 미리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신용거래, 즉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을 이용하여 집과 땅을 살 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보대출을 받을 때 그 돈은 경제를 순환하는 기존의 화폐 공급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대출을 받더라도 다른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경제활동이 즉시 줄어들지는 않는다. 결국 은행이 담보대출을 해줄 때는 대출금을 새로 만들어내는 셈이고 새로운 구매력이 경제에 더해지는 셈이다. 따라서 가계들은 부동산 가격이 자신들의 소득보다 빨리 오르더라도 은행대출(신용창조)을 통해 살 수 있다."(172-7)


"집값과 신용거래의 순환은 낮은 금리, 경제성장과 고용률 안정이라는 유리한 환경에서는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각 가정들과 기업들이 소득 대비 부채 총액의 비율이 높아지더라도 채무상환금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채무상환 비율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된다. 집값이 오르면 순자산도 늘어난다. 다시 말해서 집과 그 아래에 있는 땅의 서류상 가치에서 주택담보대출 부채를 뺀 나머지의 가치가 커진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가구들은 소득 대비 채무의 비율이 높아져도 소비를 지속해도 되는 상황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경제에 심각한 충격이 가해지거나 대출이자율이 오르면 가계들은 빚을 갚느라 허덕이게 된다. 그러면 소비가 줄어들거나, 집값보다 대출금이 더 많은 역자산negative equity 상태가 되거나, 대출금을 갚지 못할 수 있다." "집값은 경제의 나머지 부분의 성장에 비해 빨리 높아질 수 있듯 그만큼 빨리 낮아질 수도 있다."(188-9)


"표준 교과서에 나오는 은행이론에서는 은행은 만기일까지 대출을 해주고 거기서 받는 이자와 예금자들에게 지불하는 이자의 차액, 즉 이자율 스프레드interest-rate spread에서 이득을 얻는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이래 특히 영국 은행과 그보다 훨씬 많은 미국 은행들은 새로운 사업모델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은행이 대출을 해주되 그 대출들을 한데 묶어서 채권(부채증서/채무증서)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연금기금이나 보험회사 혹은 다른 종류의 자산관리기금 등 제3의 투자자에게 팔아서 이득을 남기는 것이다. 은행이 만든 특수목적기관SPV이 임시로 이런 대출을 받고 그 내역을 은행 대차대조표에 올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은행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산만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본의 양을 줄일 수 있고 결국 더 많은 대출을 해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더 많은 사람들이 소득에 비해 더 많은 대출을 받아 소득에 비해 더 비싼 집을 살 수 있게 되었다."(203-7)


"금융증권화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두 단계를 거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대출이나 수익을 창출하는 자산을 가진 기업(대개 은행), 이른바 최초 대출기관originator이 대차대조표에서 빼내고 싶은 대출들을 골라내서 준거 포트폴리오reference portfolio라는 곳에 모은다. 그 다음에는 이 자산묶음을 특수목적기관인 발행자issuer에게 판다. 이 특수목적기관은 대개 금융기관이 설립하는 독립체로서 외부에서 자산을 매입하는 한편 회계목적으로, 또 위법을 피하기 위해 대차대조표에 나타나지 않도록 처리한 자산을 현금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특수목적기관이 거래 가능한 채무증권을 발행하고 그것을 자본시장 투자자들에게 판다. 이 증권 발행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특수목적기관은 최초 대출기관에서 대출묶음을 사올 수 있다. 대개 최초 대출기관이 여전히 결제를 처리하고 대출자와 교류하기 때문에 대출을 받은 최종 채무자들은 보통 특수목적기관의 거래를 알지 못한다."(210)


"주택담보대출 신용이 거주용 부동산 투자나 주택건설, 소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경제성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국과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주택담보대출 신용의 대부분은 〈이미 지은 집들〉을 여러 가계들이 서로 사고팔게 하는 데 쓰인다. 결국 신용과 돈이 창조되어 기존의 집과 땅으로 흘러들어감에 따라 집값은 오르고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높아지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전형적인 〈집값 거품〉 혹은 〈부동산 거품〉이다. 경제적 충격이 발생하거나 이자율이 높아지면 정부를 제외한 모든 경제부문은 가계를 선두로 디레버리지deleverage를 추구하고 빚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이를테면 부실해진 대차대조표를 복구하는 셈이다." "일련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대차대조표 불황은 주식시장의 거품 같은 신용 거품credit bubble이 수반되지 않는 금융위기에 비해 더 오래 지속되고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225-6)


"하이먼 민스키는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적 특징이 기업의 투자와 이익을 받쳐주는 과정에서 금융과 부채의 역할,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성이라고 보았다. 민스키는 케인즈와 어빙 피셔의 주장을 발전시켜, 기업이 미래의 예상되는 이익실현을 근거로 돈을 빌려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균형 주변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안정성과 불안정성을 반복해서 넘나든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경제가 안정되면 기업과 은행의 신뢰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투기적 형태의 투자와 대출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면 부채가 계속 쌓여서 대출자가 앞으로 들어올 소득으로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결국 대출자는 이자를 지불할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 민스키는 이것을 폰지 금융이라고 불렀다.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경제가 매우 취약해지고 사소한 충격에도 기업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의 투자가 줄고, 은행들이 부실해지며, 부채 디플레이션이 일어날 것이다."(229-30)


# 부채 디플레이션debt-deflation : 디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가 높아져 오히려 부채가 증가하는 현상


6 땅과 집은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가


# 불평등을 설명하는 기존 입장들

1. 한계생산성 :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정도, 즉 생산성에 따라 결정되므로, 교육과 직업훈련을 더 많이 제공하면 불평등이 해소된다.

2. 세계화 : 교역과 금융의 점진적 세계화를 통해 세계경제가 통합되고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세계화가 승자독식 효과를 극대화했다.

3. 탈산업화 : 많은 선진국에서 탈산업화가 진행되고 서비스 부문이 발달하면서 고숙련을 요구하지 않는 저임금 임시직군이 증가했다.

4. 조세제도의 변화 : 한계세율(초과수익에 부과하는 세금 비율)이 크게 감소하면서, 상위집단은 세후는 물론 세전소득도 늘어났다.

5. 임금 비중 감소와 노동조합의 쇠퇴 : 총소득에서 임금 비중이 감소한 가운데 노동조합이 쇠퇴하면서 소득 불평등 양상이 달라졌다.


"피케티의 주장에 따르면, 최근 수십 년 동안에 나타나는 불평등 심화 현상은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보다 빠르게 높아지는(r〉g) 경향이 있어서 이미 부유한 사람이 더 많은 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케티가 자본과 부를 통합하고 땅은 배제했다는 점에서 그의 분석은 소득 대비 부의 비율이 증가하게 되는 핵심적 역학관계를 간과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영국에서 소득 대비 부의 비율이 증가한 원인은 대부분 주택 때문이다." "사실 피케티의 자료는 1970년 이후 소득 대비 부의 비율 증가가 저축과는 거의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히려 자산가격이 오른 결과(자본이득)이고 이는 주로 〈주거용지의 가치 상승〉과 관련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자본이득의 효과를 빼고 보면 1970년 이후 영국에서 실제 소득 대비 부의 비율은 매우 낮아진다. 이것은 지난 40년 동안 국민소득에 비해 영국의 생산자본이 감소했다는 의미다."(256-7)


"결국 불평등을 나타내는 기존의 방법들로는 주택자산의 불평등을 완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주택자산 분포를 변화하게 한 중요한 경향은 부동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격차가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부동산이 있는 사람들에게 집값이 오른다는 것은 세금이 붙지 않는 자본이득이 생긴다는 의미다. 이런 자본이득이 발생하면 순자산이 늘어나고 부수적인 효과로 소비도 늘어난다. 반면 부동산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값이 오른다는 것은 임대시장에서 더 높은 지대를 지불해야 하고 담보대출 보증금을 지불하기 위해 더 많이 저축해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최근의 집값 상승은 생산 기여도가 아니라 부동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과 희소한 천연자원인 땅을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에 따라 나눠진 두 계층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집값이 오르면 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도 계속 넓어진다."(264)


"이런 경향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순환고리 중 하나는 사회경제적으로 지역이 구분되는 현상, 일명 게토화 혹은 슬럼화라고 하는 현상과 지역별 집값의 양극화 현상이다. 더 좋은 동네에 있는 집들은 사람들이 기꺼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고급품으로 간주된다. 결국 점점 부유해지는 이런 지역에서는 땅값이 오름에 따라 불평등의 정도도 더욱 심해진다." "소득과 부의 격차를 벌리는 또 한 가지 핵심요소는 레버리지의 역할이다. 레버리지는 자산을 담보로 빌린 돈을 다시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득이 더 커질 수 있다. 자산에서 나오는 소득이나 자산가격 상승분이 돈을 빌리는 비용보다 크기만 하다면 레버리지는 더 큰 부를 축적하기에 신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레버리지는 결국 자산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자산을 더 불릴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다."(271-2)


"불평등의 심화는 수요가 부진해지고 금융부문이 불안정해지는 문제를 야기한다고도 알려졌다. 불평등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는 더 많은 돈을 저축하는 경향이 있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이 흘러들어간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한계소비성향, 즉 추가소득 중에서 소비하는 금액의 비율이 낮다. 이와 반대로 필수적인 물건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대부분의 소득을 지출하여 한계소비성향이 상대적으로 높은 저소득가구에는 더 적은 돈이 흘러들어간다. 불평등이 일정 기준 이상으로 심해지면 중하위 소득층은 절대적 혹은 상대적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신용거래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소비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 불가능할 정도로 신용거래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 되면 금융 안정성이 위험해질 수 있다. 자산시장에서 신용창조가 증가하면 그것만으로도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기 쉽다. 특히 땅의 공급이 비탄력적인데 그로 인해 부동산 가격이 오를 경우 더욱 그렇다."(274-5)


7 땅과 집이 야기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들


"땅이라는 재산을 취급한다면 완전히 자유방임적인 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 부동산 시장의 고유한 특성인 복잡한 요인들, 시간차, 정보의 불균형 등은 신고전파 경제이론이 예상했듯 토지소유나 토지가치에 자기수정적self-correcting 균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반복되는 호황과 불황의 역사적 기록 혹은 금융주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땅문제가 어떤 신통한 방법으로 한 방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정부들이 시행하는 거의 모든 정책수단은 긴 시간차를 두고 효과를 발휘하고, 정책수단들끼리 혹은 그 정책들이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부동산 시장과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또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는 정책이 공존하는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이제 곧 논의할 제안들은 종합적인 정책적 해법이 아니다. 그 대신 이것은 현재 상황에서 더 탐색해볼 만한 영역들을 밝혀내는 것에 가깝다."(286-7)


# 각종 불평등 해소 방안들

1. 토지의 공적 소유 : 땅을 돈벌이에 쓰려는 시장의 압력을 막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용도로 개발하여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대를 사회에 돌려준다.

2. 토지의 강제 수용 : 정부가 권한을 행사해서 지대를 직접적으로 획득하거나, 지대를 더 많이 얻어내려는 땅주인들의 욕구를 억제하는 방편으로 쓴다. 

3. 사유지 투자 : 개발 과정에서 처음부터 최대 판매가격을 추구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개발의 질을 고려하는 땅주인들의 토지를 모아 개발을 추진한다.

4. 조세제도 개혁 : 토지가치세는 땅을 소유하는 것에 비용을 청구하는 것이므로, 공동체를 위해 땅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로소득을 징수한다.

5. 신용규제 제도 : 땅과 부동산 매입에 동원되는 신용창조를 억제하는 방법은 투기를 차단하지는 못하지만, 투기에 공공의 혜택이 이용되는 것을 막는다.

6. 은행부문 구조개혁 : 단기적인 주주가치를 추구하면서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대출 기업과의 장기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금융기관을 늘린다.

7. 다양한 주택 보유형태 : 공유영역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주택,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판매가치를 제한하는 주택, 저비용 임대주택 등을 모색한다.

8. 개발계획 개혁 : 땅의 특별한 성질인 희소성, 영속성, 재생 불가능성, 부동성 등을 고려하여 개발이익의 일부를 지역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도록 한다.

9. 경제이론 재조정 : 땅을 자본과 분리하여 독자적 생산요소로서 땅의 역할을 강조하고, 분배와 과세이론에 지대를 포함한 경제학 교육 과정을 수립한다.

10. 국민계정 재조정 : 땅에 세워진 구조물의 가치에 포함되어 있는 땅의 내재가치를 분리하여 국민계정에서 별도의 자산항목으로 독자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변화에 대한 제안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야심차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망을 품을 만한 이유가 있다. 소득과 비교하여 집값이 계속 오르다 보면 결국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할 것이고 그때는 서양 민주주의 국가 인구의 대다수가 부동산 자산의 편중현상을 줄이는 정책에 찬성할 것이다. 예컨대 런던에서는 민간 임차인의 수가 주택소유자보다 많아졌고 지금 같은 경향이 지속되면 2025년에는 전체 가구의 60퍼센트가 임대주택에 살고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집을 기초자산으로 삼아 레버리지 대출을 하는 주거 자본주의 모델은 점점 경제적, 민주적으로 지속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땅은 본래 희소하지만 모든 경제활동을 좌우하는 필수적 자원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토지자산의 특성과 경제적 기능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정치적 압력과 경제적 영향력에 반응하여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32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홀로 선 자본주의 - 미국식 자유자본주의, 중국식 국가자본주의 누가 승리할까
브랑코 밀라노비치 지음, 정승욱 옮김, 김기정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 자본주의는 진화한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두 가지 급속한 기술 변화, 즉 정보통신기술ICT 혁명과 소득 수렴 현상을 목도한다." "ICT 혁명은 여러 측면에서 산업혁명기의 변화와 유사하다. 그 변화란 어떤 국가 집단은 도약하고, 다른 집단은 쇠퇴하면서, 전 지구적으로 소득 순위가 대폭 뒤집히는 대개편 현상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기술 혁명에 대해 서구와 아시아가 서로 반면교사로 여기는 편이 좀 더 유효하다. 즉, 서구의 풍요로움은 세계적 불평등을 증가시킨 반면, 아시아의 풍요로움은 세계적인 소득 수렴의 큰 흐름을 불러왔다." "전 세계적인 경제적 재균형은 지리적 요인만이 아니라 또한 정치적 요인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서구의 논리를 약화시킨다. 서구의 논리란(부유해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조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런 주장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적이고 금권 정치적 도전으로, 서구 자체에서도 서서히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다."(33-4)


"세계화에 대한 서구 사회의 팽배해진 불만감은 엘리트들 사이의 격차에서 비롯된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름대로 성공하고 잘살아왔지만, 세계화로는 별로 이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국제적 무역과 대규모의 인구 이동을 자신들 사회에 퍼지는 악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한다. 서구 사회의 이런 상황은 기이하게도 1970년대 제3세계 사회와 닮았다. 1970년대 제3세계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 특성을 나타냈다. 즉, 부르주아 계급은 세계적인 경제 체제와 연계해서 부를 쌓는 반면,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은 뒤처지고 소외됐다. 이 같은 이중적 특성은 일종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개도국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온 이 같은 '질병'은 이제 북쪽으로 이동하며, 부유한 나라들을 강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동시에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된다. 많은 개도국에서는 이런 이중적 특성이 점차 사라진다는 점이다. 개도국은 세계화된 공급망 체제에 완전히 편입됨으로써 세계화되는 것이다."(35-6)


2부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와 불평등


"'성과주의적meritocratic'과 자유주의적liberal'이라는 말은 롤스가 《정의론A Theory of Justice》(1971)에서 처음 제시한 다양한 형태의 평등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된다. '성과주의적 평등'은 '자연적 자유' 체제와도 같은데, '직업이 능력에 따라 열려 있다'는 의미다. 개개인이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는 데 방해되는 어떠한 법적 장애물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체제는 재산의 상속을 완전하게 인정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평등'은 더 평등하다. 왜냐하면 상속에 높은 세금을 부과해 부분적으로 재산 상속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평등이 자유롭게 교육받을 권리를 포함하기 때문인데, 이는 세대 간에 이권이나 기득권을 주고받는 행태를 줄이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말은 재화와 용역이 어떻게 생산되고 교환되는지(자본주의), 그리고 그것들이 개인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되는지(성과주의적), 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이동성이 있는지(자유주의적)를 포괄한다."(41-2)


"총소득에서 자본소득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은 자본과 자본가가 좀 더 중요해짐을 의미한다. 자본이 노동과 노동자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이 된다는 의미다. 이는 자본가가 더 많은 경제적, 정치적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향은 고전적 및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모두 발생했지만, 사회민주주의적 다양성 사회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자본과 노동에서 나오는 총소득 요소 가운데 자본 비율이 증가하면, 일반적으로 ①자본으로부터 생성되는 소득의 비중이 큰 사람은 부유하며, ②자본소득은 상대적으로 소수에게 집중된다. 이는 개인 사이의 소득분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그리고 이런 요인들 때문에 거의 자동적으로 개인 사이의 소득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①과 ② 두 요인으로 말미암아 증대된 자본 비율은 필연적이고 자동적으로 개인 사이의 더 큰 불평등을 불러온다." "이런 특별한 특징, 즉 자본이 풍부한 사람이 또한 부자라는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변의 특성이다."(47-8)


# 자본주의의 유형

1. 고전적 자본주의 : 1914년 이전 영국

2.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

3.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 : 21세기 초엽의 미국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에 통용되던 개념과 실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자본가(여기서는 돈 많은 개인이라고 칭한다)들은 모두 대단한 부자였지만, 일반적으로는 노동에서 그리 많은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극단적인 경우, 돈 많은 사람은 노동으로부터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유한계급론을 주창한 소스타인 베블런은 그런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를 가리켜 '유한계급Leisure Class'이라고 불렀다." "이런 시대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구분이 확실했다. 이들 두 부류는 생산의 서로 다른 요소, 즉 자본과 노동으로부터 각각 한 푼의 수입도 없었다." "오늘날 미국처럼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에서는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은 자본이 풍부한 사람들이 노동력도 풍부한 경향이 있다(좀 더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그런 사람들은 '인간 자본'을 많이 보유한 개인이다)." "소득 상위 1%의 사람들(또는 더 선택받은 집단으로 소득 상위 0.1%의 사람들)의 노동소득 증가는 현대 경제의 특징이다."(50-1)


"제럴드 데이비스는 2016년 자신의 저서 《미국 기업의 소멸》에서 미국의 기업 구조와 규모의 변화 양상을 강조한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과거 수익을 많이 올린 기업들은 또한 많은 사람을 고용했다. 그러면서 그 기업들은 노동자들과의 암묵적 합의를 지켰다. 그 합의란 시장에서 결정된 임금보다 다소 높은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에는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회사에 대한 충성심 촉진과 더 나은 업무 관계, 파업의 감소 혹은 더 줄어든 노사 대립을 위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이비스의 주장에 따르면, 기업들이 아웃소싱을 했을 대 노동자들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변했다. 외부의 아웃소싱 계약업체들은 회사 내 노동력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충성심을 보상할 필요나 쾌적하고 적절한 작업 환경을 보장할 필요성이 없어졌다. 따라서 기업들은 시장에서 결정된 최저임금만 지불해도 문제될 게 없었다. 이런 이유로 노동소득 비율은 줄어들었다."(66-7)


"국가가 더 부유해지면 (개인과 마찬가지로) 저축과 성공적인 투자로 더 많은 부를 얻게 된다. 더욱이 그런 국가의 자본은 소득을 추월해 증가하고, 점차 '자본 집약형' 또는 '자본이 풍부한' 국가가 된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더 부유해지면 총 순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도 반드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재산 수익률이 공통적으로 낮아지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재산이 고도로 집중될수록 불평등은 더욱 커질 것이다." "부자들이 대부분의 자본을 보유할 때, 자본 비율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이에 비례해서 그 부자들의 소득도 증가할 것이고(자본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한 단면이다_옮긴이), 불평등도 더 심화시킬 것이다. 국가 발전이 그 나라를 부유하게 이끄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나라에서는 소득 증가보다 더 큰 폭으로 국가 발전이 이뤄진다. 분배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부의 저주다. 왜 그럴까? 더 부유한 나라들은 '자연적으로' 더 불평등해지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73-5)


"고전적 자본주의 체제와 비교했을 때,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는 독특하고 뚜렷하게 다른 특징이 있다. 소득 상위 10% 또는 1%의 사람들 가운데 노동소득 또한 높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응 관계로 말미암아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경제 정책을 수립·시행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데 있다. 고전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대부분의 부자가 자신들의 지위를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반면에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 부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노동자들이며, 그들 수입의 대부분이 소유한 자본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들이 부자라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그들 총수입의 몇 퍼센트가 노동이 아닌 자본에서 나오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과거에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던 매우 높은 세율을 그들에게 적용하기가 더 어렵다. 그들의 높은 소득은 더 마땅히 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즉, 그들의 노동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79-82)


# 호모플루티아homoploutia : 동일한 가구(또는 개인) 안에 높은 자본소득과 높은 노동소득이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


"피에르-앙드레 치아포리, 버나드 살라니에, 요람 바이스의 주장에 따르면, 고학력 여성들이 더 좋은 결혼 상대를 만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고학력 여성들이 교육이 제공해주는 일반적인 기술 프리미엄(우위성)만큼이나 중요한 '결혼에 대한 교육 프리미엄'을 가진다는 의미다." "한편으로는 선택적 결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에 대한 투자 효과 증가 사이에는 더 많은 연관성이 있다. 자녀에 대한 투자는 교육을 더 많이 받은 부부들만이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무관해 보이는 새롭게 진전된 사실들, 즉 여성의 교육과 더 많은 노동 참여, 선택적 결혼 양식, 유아기 학습의 중요성 증가가 갖는 관련성은 중요하다." "만약 좋은 교육을 받고, 고도로 숙련되고, 부유한 사람들끼리만 서로 결혼한다면, 그 자체가 불평등을 확산시키는 요인이 된다." "여기에 덧붙여, 자녀들에 대한 조기 교육과 학습 효과가 급격히 증가한다면, 그런 이점들과 불평등은 세대에 걸쳐 강하고 폭넓게 대물림될 것이다."(86-9)


#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감소 요인(제2차 세계대전 말기~1980년대 초)

1. 강력한 노동조합

2. 대중 교육

3. 높은 세금

4. (소득의) 대규모 정부 이전 : 공적 연금, 복지 혜택


#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감소에 필요한 정책(21세기)

1. 자본 소유권의 분산

 - 중소 주주에게 더 호의적이고, 대주주에게 덜 호의적인 지분 소유를 만들기 위한 조세 정책 시행

 - 종업원 지분 제도(ESOPs)나 종업원의 주식 보유를 권장하는 우대책을 통해 노동의 자본 소유권 확대

 - 상속세나 부유세를 자본에 균등하게 접근하도록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예, 청년층 보조금 지급)

2. 동등한 교육, 공평한 기회

 -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의 질적 수준을 균등화하여 교육 접근권은 물론 교육 이후에 받는 대가의 평등 실현


"오랫동안 지속하는 상류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상류층이 행사하는 정치적 지배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류층이 정상에 군림하도록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류층 형성을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는 정치뿐이다. 이런 형태는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불가능해야 한다. 투표권이 모든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 일반 사람들이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그들 지위를 영구히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부자들은 정치에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영향력은 어디에서 오는것일까? 답은 꽤 분명한데, 정당 활동과 선거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자금 모금을 통해서다. 미국에서는 민간 기업이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개인 기부는 사실상 제한이 없다. 이는 소득 또는 부의 분배에서 최상위에 있는 사람들이 기부하는 정치 후원금이 극도로 집중되는 결과를 낳는다."(118-21)


3부 국가자본주의의 부상


"지금까지의 자유주의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가진 주목할 만한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 이론들의 유일한 관심이 서구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제3세계'의 경제나 사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제3세계는 마르크스주의의 높은 제국주의 개념에서 깜짝 등장한다. 거기에서 제3세계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맞서 싸우는 대상이다." "후진국의 지위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은 후진국의 특성을 무시하는 표준적 마르크스주의 관점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두 관점이 비슷하기 때문에, 실제로 마르크스가 자유롭게 다음과 같이 논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마르크스는 좀 더 발달한 선진국이 자국의 미래 경로를 후진국에 보여준다고 논평했다. 영국의 수많은 선언은 이런 직선적인 휘그식 역사관을 표출했다. 그 선언에 나타난 주장에 따르면, 대영 제국은 식민지 주민들이 다니는 일종의 학교였고,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 미래의 민족 자결권과 자본주의 경제 창출을 준비했다."(153-5)


"세계사 안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공산주의의 위치는 바로 도외시된 제3세계의 역사에 있다. 여기서는 공산주의를 다음과 같은 사회 체제라고 주장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후진적이고 식민화된 사회가 봉건주의를 타파하고, 경제적·정치적 독립을 되찾으며, 토착 자본주의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 체제다. 또는 달리 말하면, 공산주의는 덜 발달하고 식민화된 사회에서 사용되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체제다." "공산주의를 서구의 영향을 받은 역사의 표준 개념 안에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됐거나 무의미하다. 그 이유는 그런 개념으로는 공산주의의 부상(자유주의 안에서)뿐 아니라 몰락(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서구 사회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발전하도록 촉진시킨 조건이 제3세계에서 우세했던 조건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구 사회가 스스로 봉건제 또는 '소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156-7)


# 소상품 생산 : 생산자가 소유권을 가지거나 사실상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생산 형태를 가리키는 마르크스주의 개념


"자본주의는 대부분의 제3세계 경제를 개조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성장 실적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제3세계 경제는 실제로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 계속 더 뒤처졌고, 나아가 경제를 집중시키기 위한 방안도 조작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제3세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은 서구의 국내 부르주아들이 했던 기능적 역할을 똑같이 수행했다. 다음과 같은 빌 워런의 주장은 옳다. 빌 워런의 주장에 따르면, 1920년대 이루어진 코민테른의 '동방으로의 방향 전환(선진국에서의 혁명보다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강조점을 전환)'은 마르크스주의의 역할 변화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이런 방향 전환은 〈마르크스주의의 역할을 민주적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 운동(부유한 나라에서의)에서 후진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운동으로 변화시켰다.〉 빌 워런은 그 변화를 실수로 여겼지만, 실제 그 변화는 결국 저개발 국가를 자생적 자본주의 경제로 탈바꿈시킬 큰 진전이었다."(158-61)


"1920년대 제3세계 국가들은 ①서구와 비교해 저개발 상태였고, ②봉건제적 또는 그와 유사한 생산 관계, ③외세의 지배라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①과 ③을 저개발 국가들만의 특징으로 한정할 수 있다면, 제3세계가 직면한 과업은 두 가지였음이 명백해진다. 지배적 생산 관계를 변화시켜 국내 경제를 완전히 바꿔놓는 것, 다시 말해 지주와 여타 부호들의 숨 막히게 하는 힘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외세의 지배를 타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두 혁명, 즉 사회 혁명과 정치 혁명은 하나로 합쳐졌다. 사회 혁명과 정치 혁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각각 발전과 민족 자결권이었다. 그리고 이 두 혁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조직화된 세력은 공산당과 여타 좌파 및 민족주의자로 이루어진 정당들이었다. 공산당의 여타 장점은 제쳐두더라도, 오로지 공산당과 그 계열 조직들만이 사회 혁명과 국가 혁명을 결합시키는 데 이념적으로 헌신했다."(162-3)


"베버는 《경제와 사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자본주의는 ··· 조세 징수 도급tax farming, 정치적 필요에 따른 국가의 수익성 공급, 전쟁, 해적 행위, 대규모 고리대업, 식민지 개척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했다.〉 오늘날 국가자본주의를 실행하는 나라, 특히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는 매우 효율적이고 기술적으로 정통한 관료들에게 이 제도를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이 모델을 수정했다. 이는 국가자본주의의 첫 번째 중요한 특징이다. 이런 관료 체제(이 제도의 명확한 주요 수혜자)의 주된 임무는 높은 경제 성장을 실현하고,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다. 경제 성장은 국가 통치의 합법화를 위해 필요하다. 특히 법치가 부재하기 때문에 만약 그 관료 체제가 성공하려면,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구성원을 선택할 때는 성과에 바탕을 둘 필요가 있다. 구속력 있는 법치가 없다는 점이 국가자본주의의 두 번째 중요한 특성이다."(184-5)


"밍샤의 적절한 요약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국가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부드러운 이행, 즉 연착륙을 설계한 핵심 건축가'였다. 그러나 또한 덩샤오핑은 〈그 어떤 사상이라도 위험하다고 여겨지면 파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중국뿐만 아니라 더 넓게 국가자본주의 모델을 규정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중의 유산이다. 덩샤오핑의 접근 방식은 조반니 아리기가 2007년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21세기의 계보》에서 스미스식 경제Smithian를 '자연적' 시장의 발전이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 그곳에서는 자본가의 이익이 최고로 군림하는 것을 결단코 허용하지 않으며, 국가는 국익 정책을 따라가기 위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민간 부문을 통제하기 위해 중요한 자치권을 유지한다. 국익(매우 중상주의적 특징)에 따라 유도되고 민간 부문을 통제하는 국가의 이런 이중적 능력은 현대 국가자본주의의 세 번째 중요한 특성이다. 이는 국가가 결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법적 제약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다."(186-7)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국가에도 법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 법은 대부분의 사례에 적용된다. 그러나 법의 지배가 보편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즉, 그 법은 정치적 연관성이나 정치적 협력 관계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법의 지배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설정을 파괴하고, 주요 수혜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엘리트들은 독단적으로 이익을 얻는다. 법이 불편할 때, 필요한 경우에는 간단히 그 법을 엘리트 자신이나 그 지지자에게 적용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현대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존재하는 첫 번째 모순을 볼 수 있다. 기술적으로 고도로 숙련된 엘리트의 필요성과 엘리트는 반드시 법치주의를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환경 아래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다. 이 두 가지는 상반된다. 기술 관료 엘리트는 국가의 규칙을 따르고, 합리적 체제 안에서 움직이도록 교육받는다. 그러나 규칙을 적용할 때의 임의성은 직접적으로 이런 원칙을 훼손한다."(187-9)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두 번째 모순은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부패와 불평등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 존재한다. ①부패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만연했다. 이는 다양한 관료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재량권을 금전적 이득을 얻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인데, 지위가 높을수록 그 이득은 더 커진다. ②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평등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부패는 국가자본주의의 고질적 병폐다. 자유재량적 의사 결정이 필요한 모든 체제에는 반드시 고질적 부패가 자리 잡는다. 엘리트의 관점에서 보면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지만, 부패 문제는 관료주의의 청렴성과 높은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경제 정책의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국가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사회적 합의의 핵심 부분은 부패로 관료주의나 정책 수행 능력이 약화될 때 깨진다." "부패가 극심한 환경에서는 높은 성장도, 행정의 공정성도 더 이상 용인될 수 없으며, 과시적 소비도 억제할 수 없다."(189-90)


"부패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구조적으로 만연해 있다. 부패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법치주의가 의도적으로 유연하게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부패가 만연한 환경은 통치자들이 체제를 좀 더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여타 사람들(엘리트 포함)도 횡령에 가담할 수 있도록 만든다. 중국에서 부패를 심각하게 만들고 더욱 악화시키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오늘날의 부패는 공산 혁명 이전의 군벌 시대와 장제스 통치 시대를 특징짓는 부패와 인플레이션의 혼란에 대한 기억(세대에 걸쳐 전달되는)을 되살린다. 이런 기억은 공산당 엘리트에게 유쾌한 일도, 위안거리도 될 수 없다." "둘째, 세계화는 도둑질한 자산을 쉽게 숨길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부패를 조장했다. 이는 결국 중국에서의 부패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중국의 사회학자 허칭롄은 덩샤오핑의 개혁이 '불평등과 일반화된 부패, 그리고 사회의 도덕적 토대의 침식'을 불러왔다고 썼다."(210-1)


"현재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부와 이미 형성된 자본가 계층 사이의 정치권력 분배는 과거의 전통적 유형을 연상시킨다. 정부는 부르주아 이익에 도움을 주지만, 부르주아가 국가의 목표(즉,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 엘리트의 목표)에 반하지 않을 경우에만 그렇게 한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다양한 재산을 배열할 때 그 사이의 구별이 상당히 모호하다. 그 재산이 국가 소유든, 순수 민간 소유든, 그 사이의 무수한 소유권 협약(예컨대, 주식거래소에서 민간 자본을 조달하는 국영기업, 사유 재산이 혼합된 공동 자산, 외국의 민간인이 참여하는 국영기업)에 따른 것이든 그렇다." "이렇게 구별이 모호한 것은 일종의 '실수나 오류'가 아니며, 일시적인 것이거나 '교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국가자본주의의 존재를 위한 아주 기본적인 필수 조건이다. 이를테면, 이런 모호한 소유권을 통해 공산당 조직(즉 기초 조직)은 완전히 개인 소유의 기업 안에 스며들어 포진한다. 이런 조직은 일정 정도까지는 자본가에게 유용할 수 있다."(225-6)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권을 차지하는 투명성(인지된 부패에 관한 전문가 조사에 근거한)이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적용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혹은 여타 세계 각국의 국민이 그런 수준의 정부의 '청렴함'을 열망한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국가자본주의가 가진 고유한 장점들 속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통치자들의 자율성, 형식적인 절차를 줄이고 더 빠른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능력, 그리고 일부 또는 심지어 많은 사람의 선호에 맞는 널리 퍼진 온건한 부패가 그것이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의 매력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성공이다. 그리고 중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나라였다는 사실을 통해, 이미 성공한 선진국들과 동렬 선상에 중국을 놓을 수 있다. 중국의 경제적·정치적 제도들은 다른 나라가 모방할 수도 있고, 중국은 합법적으로 그 제도를 '수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지는 의문이다."(233-5)


"마틴 자크는 2012년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은 스스로를 하나의 국민국가가 아니라 문명체 또는 아시아의 버팀목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고립된 채 존재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반면, 문화적으로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나 '타자'를 깨닫지 못하는 무능함을 종종 드러낸다. 마르크스주의를 채용함으로써 중국이 이념적으로 서구의 일부가 됐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마오쩌둥 시대에도 계속해서 일정 부분 고립을 고수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한때 중국은 소련의 보호에서 벗어났지만, 국제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덩치에 걸맞지 않게 행동했다. 중국은 비동맹운동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비동맹운동은 다방면에서 마오주의를 선전했음에도, 그 어떤 운동과도 강력한 연대를 구축하거나 도움을 제공하지 못했다." "지금 중국에는 북한 이외의 동맹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늘날도 과거와 마찬가지다. 이는 장래 세계적 패권국이 될 가능성이 있는 행보가 아니다."(236-7)


4부 세계화, 얻는 자와 잃는 자


"시민권은 한 조각의 토지에 대한 사유 재산과 같은 의미의 공식적인 재산권이 아니다. 심지어 시민권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 곁에 있는 세계 표면의 한 부분에 대한 공동 재산권도 아니다. 시민권은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하는(그런 의미에서 '관념적'이다), 합법적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특정한 시민권을 가지면 기존의 시민권 국가에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시민권 프리미엄을 얻기 위한 비용을 그 시민권 국가에서 벌 필요도 없다. 시민권에 따라붙는 혜택을 받기 위해 들어가는 돈은 시민권에 공식적으로 따라붙은 특정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을 통해서만 얻을 필요도 없다. 혹은 그 돈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받는 것에서만 얻을 필요도 없다(국가는 그 자체로 외국인을 포함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 그 외국인은 다른 나라에서 시민권 지대를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경제적 자산으로서의 시민권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적용되는 땅에서 이탈하거나, 비물질화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259)


"시민권을 경제적 범주로 인식하고 다루다 보면, 여기에 좀 더 미묘한 다른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하급 시민권subcitizenship'인데, 시민권이 부여하는 경제적 이득과 대부분 관련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미국 영주권자(그린카드 소지자)의 경우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존재한다. 영구 거주자, 즉 영주권자는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혜택에 접근할 수 있다. 다만 일부 연금 같은 사회적 이전소득이나 투표권에서는 제외된다. 그러나 영주권 같은 하급 시민권의 존재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민권과 비시민권이라는 이중적 구별이라는 엄격한 체제가 어떻게 더 유연하게 운용되는지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 영주권이란 발상은 대부분 노동 수요 대응 차원에서 도입됐다. 하급 시민권은 시민권의 혜택을 받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계층(가령, 타국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에게도 가능하다. "(263)


"이민이란 무엇인가? 이민은 세계화라는 조건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민은 국가 사이의 평균 소득이 불균등한 세계화가 일어났을 때, 생산의 한 요소(노동)가 이동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정의는 복잡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정의의 각 부분은 필수 요소다. 첫째, 노동 또는 노동력은 (엄밀한 경제적인 관점에서) 생산의 한 요소일 뿐, 자본과 다르지 않다. 원칙적으로 생산의 한 요소를 다른 요소와 달리 취급해서는 안 된다." "둘째, 세계화는 사람들의 이동(또다시 자본의 이동과 같은)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전 세계가 세계화되지 않고, 경제가 자급자족 형태로 이뤄지고, 자본과 노동의 유출과 유입에 강력한 통제가 가해진다면, 자본이나 노동 어느 한 요소도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움직임이 불가능할 것이다. 셋째, 세계화가 나타나더라도 세계 각 지역 사이의 소득 격차가 크지 않은 조건이라면, 노동의 이동을 유인할 체계적인 동기는 없을 것이다."(266-7)


"이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이유는 이민 반대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추가 카드, 즉 일종의 방어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카드는 지금까지 무시되어왔다. 이 카드는 노동과 자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믿음이다. 노동과 자본은 생산요소라는 점에서, 그리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똑같지만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본은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반면, 노동은 그럴 수 없다(다른 사회에 노동력이 들아간다면 사회적인 변화를 촉발한다_옮긴이)."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논쟁의 여지는 있다. 새로운 기술은 종종 사회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떤 기술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변화조차도 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이동보다 노동의 이동이 사회에 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여전히 사실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실제로 이민 반대자들이 마련해놓은 최종적이고 핵심적인 방어 수단이다."(270-2)


# 이민 수용의 전제조건

1. 이민자들이 영구적으로 머물 가능성이 적을수록

2. 시민권 혜택을 사용할 가능성이 적을수록

※ 이민자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가치 사슬은 서로 다른 생산 단계가 서로 다른 나라에 위치하도록 생산을 조직하는 방법이다. 이 글로벌 가치 사슬은 아마도 세계화 시대에 가장 중요한 조직 혁신일 것이다. 이 사슬은 먼 곳에서 생산 공정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술력을 통해 가능해졌다. 그리고 세계적인 재산권 존중을 통해서도 가능해졌다. 과거에는 이런 두 요소가 부족했기 때문에 해외로의 자본 확장에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부유한 세계와의 연결을 끊으려고 하는 것보다 서구의 공급망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핵심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외국인 투자자는 글로벌 가치 사슬을 자신이 소유한 생산 공정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는 가장 앞선 기술이나 최적의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더 이상 '구걸'할 필요가 없다. 이제 외국인 투자자는 가난한 나라에서 직면하는 임금률과 자본-노동 비율의 수준에서 기술 발전을 시작할 동기를 얻는다."(286-9)


"개발이 사전에 정해진 단계대로 질서 정연하게 진행된다는 구식 관점은 영국에 이어 미국, 그리고 일본의 방식을 따라 발전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이 국가들은 주목할 만한 관세 보호를 통해 수입 대체 단계를 거친 다음, 단순한 제조업 상품 수출로 성장했으며, 이어 부가가치가 더 높은 정교한 제품으로 점차 이동했다." "그런데 상황은 1990년대의 두 번째 세계화와 함께 바뀌었다. 개도국의 성공을 위해 결정적으로 대두된 문제는 더 이상 개도국 자체의 경제 정책을 이용해 미리 정해진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중심부(북반구)가 조직한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단순히 부유한 국가들을 모방해 부가가치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 중국이 수행하는 것처럼, 스스로 기술 선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세계화는 이전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단계를 건너뛸 수 있게 만들었다."(295)


# 첫 번째 세계화/분산(산업혁명 이후)의 특징

1. 상품 거래

2. 해외 직접 투자(식민주의)

3. 근대 국가


# 두 번째 세계화/분산(1990년대 이후)의 특징

1. (상품 대신) 정보와 통제

2. (식민주의 대신) 강압적인 국제기구

3. (국가 대신) 기업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 번째 세계화의) 궁극적인 분산은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는 노동력과 함께 올 것이다. 이 궁극적 분산은 노동력 이동이나 재택근무 비용이 낮아질 때 일어날 것이다. 예컨대 의사의 수술처럼 물리적인 존재로서 사람이 필요한 경우, 이 사람을 일시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비용은 여전히 높다. 그러나 물리적인 존재로서 노동자가 필요한 경우, 원격 제어로 해결된다면 노동의 세계화도 가능할 것이다. 원격 제어는 마치 의사가 로봇을 사용해 원격으로 수술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 분산, 즉 물리적 장소에서 노동(생산 공정에 투입되는 것으로서)의 분산은 이민과 노동 시장을 매우 다르게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다. 만약 지금 어떤 업무가 물리적인 존재로서의 노동자가 필요하고, 그 업무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원격으로 수행될 수 있다면, 노동력의 이동은 훨씬 덜 중요해질 수 있다. 이런 세 번째 분산의 결과로, 우리는 세계 노동 시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296-7)


"복지국가와 시민권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불러올 정치적 결과 가운데 하나는 특정 좌파 정당의 반세계화 태도다." "이들 정당은 자본 유출과 이민을 모두 반대한다. 따라서 복지국가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 좌파 정당은 겉보기에 역설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이들 정당은 국제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오랜 전통을 깨고, 민족주의와 반국제주의적 행보를 보인다. 이런 태도는 국가에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획일적인 경제 조건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부유한 국가들의 복잡하고 포괄적인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변화에서 비롯된다." "이들 정당은 국제주의적 전통을 폐기해버림으로써, 우파 정당들과 더 유사해지고, 정치적으로도 더 가까워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즉, 간신히 입국한 이민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동시에, 더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는 것에 반대하고,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에 반대한다."(303-4)


"과장된 세계화 또는 부풀려진 세계화에는 지적 상부 구조로서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어떤 유형의 돈벌이건 상관없이, 돈벌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그 바탕 위에 금전적 성공은 여타 모든 목표를 지배하고, 그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사회를 창출한다. 부도덕한 사회란 사회와 개인이 재물을 획득하는 방식에는 무관심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합법적이든(비윤리적이든), 적발되는 않는 선에서 비합법적이든, 같은 관할의 행정구역에서는 불법이지만 다른 구역에서는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돈벌이를 의미한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라면, 부패 행위에 관여할 강력한 동기 부여가 직접적으로 생성될 수 있다. 이뤄야 할 목표를 위해 '최적의' 혹은 '똑똑한' 부패에 관여하는 것이다. 윤리적으로야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감지하기 어렵거나 분간하기 힘든 부패 행위에 발 담그는 행위 말이다. 말하자면, 도덕적으로 무감각 상태일 수 있다. 세계화의 확산은 이런 부패를 촉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314-5)


"세계화 시대에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멀리 사는 사람들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똑같은 업무에 대한 차별적인 임금과 그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는 부패가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이는 가난한 나라에서 일하는 국제기구 직원들에게서 흔한 현상이다." "가난한 나라 출신 개개인이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는 이 같은 감정은 그들에게 내적으로 일정한 정당성을 제공한다. 뇌물 수수에 대한 정당성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뇌물이란 단순히 부당하게 낮은 급여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측면을 무시한다면, 부패를 지역 문화로 치부하기는 매우 쉽다.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어떤 의미에서 부패는 일종의 시민권 패널티로 볼 수 있다. 즉, 부패란 가난한 나라의 시민권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라는 의미다. 이민은 이런 시민권 패널티를 특권으로 전환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부패는 또 다른 차원이다."(329-31)


5부 글로벌 자본주의의 미래


"순수 상업 사회의 계층 구조는 오로지 금전적인 성공에 바탕을 둔다. 그런 성공의 기회는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열려 있다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돈은 위대한 평등 장치equalizer다. 상업 사회는 그런 돈이 만들어내는 힘의 가장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게다가 돈은 성별, 성적 취향, 장애 정도, 인종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점진적인 기회의 평등화를 가져다준다. 이를 통해 이전에 불리한 조건에 놓인 집단의 구성원들은 상위 지위에 오를 수 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구성원 개인들이 이전의 불리한 지위에서 받았던 어떠한 오명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단 부자가 되면, 그들은 다른 누구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 생각건대, 이런 현상은 미국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미국에서 부(재산)는 때때로 죄를 씻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돈은 이전의 모든 '죄'를 '세탁'한다."(341)


"사실상 맨더빌은 매우 일찍부터 향후 펼쳐질 새로운 상업 사회의 특징이 무엇인지 제대로 간파했다. 그에 따르면, 성공은 개인의 가장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행동을 자극하는 것에 좌우된다. 그 행동은 타인에게 호감을 얻을 필요성 때문에 '절제'되고 감춰졌지만, 거짓과 위선을 낳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탐욕과 위선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마르크스에게 탐욕은 '특정한 사회 발전'의 결과물이다. 탐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역사적인 것이다." "즉, 탐욕은 점점 증가하는 삶의 상품화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부수물이다. 상업화된 사회의 번영에 필수적인 소유욕을 유지하면서도, 그 소유욕을 억제할 수 있는 대안이 종교다. 종교를 통해 수용 가능한 특정한 행동을 내면화, 즉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 내면화는 엘리트의 소비를 제한하고, 부를 과시하는 정도에 일정한 한계를 만들었다. 그것은 과거의 윤리 규제 법령, 즉 사치 금지법을 내면화하는 것이었다."(343-5)


"세계화된 환경에서 종교적 제약과 사회적 계약이 어떻게 작동할지 이론적으로도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종교가 다양한 데다가, 많은 사람이 초상업화된 자본주의 목표를 내면화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사회적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동은 더 이상 함께 사는 타인들의 감시를 받지 않는다. 만일 스미스의 빵집 주인이 부도덕한 상거래 행위를 했다면, 이웃들은 이를 감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곳에서 일하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부도덕한 행동은 식별할 수가 없다." "세계화된 환경에서 제약의 내부 메커니즘이 위축되거나, 꺼졌거나 작동하지 않았을 때, 외부에서의 제약이 이를 대체했다. 바로 규칙과 법률이라는 형태가 그것이다." "법률과 자율적 규제 가운데 법만 남으면서, 내부적으로 완전히 파괴된 도덕성은 이제 온전히 표면화됐다. 도덕성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아웃소싱, 즉 외주화됐다."(347-8)


"법을 어기는 행위는 오늘날의 상업화된 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도덕성이 외주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가장 윤리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이행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겨우 최소한도로 법을 지키면서, 또는 불법에 빠져들었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곤 한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의 사업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법을 어겼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도덕적이지 않은지에 대해, 자신의 신념에서 비롯된 내부 점검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법률이나 규칙 집행자에 의존해 도덕성을 아웃소싱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체제를 이용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형태의 비윤리적 또는 비도덕적 행동을 처벌하기 위해 도입되는 그 어떤 법도, 그 법을 피하는 길을 찾는 사람들보다 항상 한 걸음 뒤처지게 마련이다. 이에 관한 훌륭한 사례는 금융 규제 완화와 탈세에서 볼 수 있다."(349-51)


"그렇지만 근원적으로 사회경제적 체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에는 그 어떠한 대안도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자본주의에 본래 내재된, 경쟁적이고 소유 본능적 의식구조를 폐기하면, 자본주의의 많은 장점을 잃어버릴 것이다. 예컨대 소득 감소, 빈곤의 증가, 기술 진보의 감속 또는 퇴보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초상업화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기타 이점(예컨대 상품 및 서비스 등 인간 삶의 필수 분야)의 손실도 불러올 수 있다. 소유욕을 파괴하거나, 성공의 유일한 표식으로 인정받는 재산을 내려놓으면서 이런 이점들이 유지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이런 이점들은 모두 함께 이행된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이란 존재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인간 본성의 가장 불쾌한 특징 가운데 일부가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해야만, 물질적인 삶의 방식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버나드 맨더빌이 이미 300여 년 전에 깨달은 진리가 바로 이것이었다."(355)


"민간과 공공(경제) 영역은 세 가지 역사적 상호작용의 유형으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가정 안에서 생산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이전의 영역이다." "두 번째 유형은 가정 밖에서 임금 노동의 사용을 의미한다. 이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생산 방식으로, 생산과 가족 영역 사이에 차이가 뚜렷하다. 이런 차이는 베버가 자본주의의 절대적 기본으로 정의했던 내용이다. 세 번째로, 새로운 초상업화된 자본주의에서 생산과 가정이 다시 통합하는 단계다. 다만, 가정이 자본주의 생산 방식 안으로 접혀 들어가는 유형이다. 자본주의 발전 도상에서 볼 때, 이는 논리적으로 맞는 결과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새로운 재화와 서비스를 상품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세 번째 단계는 또한 노동의 생산성에서 괄목할 만한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전통적으로 무시됐던 가족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화할 여력이 부유해진 사회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364)


"과거에는 비상업적이었던, 즉 상품화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상품화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분야에서 직업을 가지게 됐다. 심지어 아파트 임대에서처럼 사람들을 일상적인 자본가로 탈바꿈시키는 경향도 나타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많은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견고한 개별적인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는 노동 시장이 완전히 '자유로우며', 사람들이 매우 높은 비율로 일자리를 이리저리 옮겨다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용자, 즉 고용주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는 완전히 서로 교환 가능한 '대리인'에 불과할 것이다. 노동자 각자는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직장에 머무를 뿐이다." "이렇게 개인이 서로 교환 가능해지면서 다음의 세 가지 발전이 관련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①가족 형성의 변화(핵가족화), ②새로운 활동에 따른 상품화의 확대, ③일시적인 직업으로 전전하는 유연한 새로운 노동 시장의 출현이 그런 발전이다."(368-9)


"프레이저는 개인적 영역에까지 치고 들어온 현재의 상업화, 상품화의 거침없는 진전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예고하는 불길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는다. 내 생각에 이런 견해는 틀렸다. 오히려 진실은 그 반대에 있다. 개인 영역으로 치고 들어온 상품화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일종의 상품화 과정이며, 게다가 개인들은 이를 자유롭고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긴다(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차를 운전해 이익을 얻거나, 어느 때고 피자를 배달하는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어쨌거나 상품화는 초상업화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치 체계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상품화는 돈 벌기가 기본 토대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개인적 공간과 시간은 이익을 도모하는 능력의 한 유형이다. 동시에 부의 획득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단계다. 따라서 상품화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375)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해질수록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예의와 행동을 더 좋게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런 외부적인 예의는 값비싼 비용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사람들은 점점 더 사리사욕에만 이끌렸고, 수많은 평범한 일과 개인적인 일에서도 이기적으로 바뀌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성공으로 일반화된 자본주의 정신은 현대인들의 삶 내면에 깊이 침투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이런 정신을 가족과 개인적인 내밀한 삶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희생, 환대, 우정, 가족 간 유대 등 여러 세기 동안 이뤄진 전통적 가치관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그에 따라 이런 오랜 규범들이 이기심으로 대체됐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불안감 또는 우려는 위선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물질적 성공은 현대인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반쪽짜리 진실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반쪽 진실이란 특히 남을 속이기 위해 진실의 일부만 말하는 행위다."(378)


#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의 과제

1. 보편적 기본소득을 (대규모로) 실행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2. 비용 마련 과정이 기존 복지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친다.

3. 기존 복지가 우발적인 위험에 대비하는 사회보험 성격이라면 보편적 기본소득은 위험성 여부를 완전히 무시한다.

4. 보편적 기본소득이 직업이나 구직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령, 미노동 인구의 증가 같은) 분명하지 않다.


# 자본주의의 진화를 위한 선결 과제

1. 중산층에 대한 세제 혜택(특히, 금융 및 주택 접근성)과 부자들에 대한 세금 증액(높은 상속세 과세)으로 부의 집중 감소

2. 공립학교에 대한 자금 조달의 대폭적인 증가와 질적 향상으로 세습의 이점을 줄이고 기회 평등을 좀 더 현실화하는 노력

3. 시민과 비시민 사이의 엄격한 이분법적 분리를 종식시키고, 민족주의적인 대중의 반발을 촉발하지 않는 이주 정책 제안

4. 정치 운동에 들어가는 자금을 엄격히 제한하고 철저히 공공 기금화함으로써 견고한 상류층 형성에 기여하는 관행 타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의 미래 - 새로운 불안에 맞서다
폴 콜리어 지음, 김홍식 옮김 / 까치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부 위기


1장 새로운 불안


"지리적인 위치, 곧 대도시와 지방 간의 불평등 확대가 불만이 일어나는 새로운 차원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활발한 대도시 안에서도 이처럼 대단한 경제적 성취는 심하게 치우쳐 있다. 새롭게 성공을 구가하는 사람들은 자본가도 평범한 노동자도 아니다. 그들은 잘 교육받은 고학력자들로, 새로운 숙련 기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학이 주관하는 회합에서 서로 만나고 능력으로 존중받는 새로운 정체성을 육성하여 그들끼리 공유하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다. 그들은 심지어 소수 민족이나 성적(性的) 지향과 같은 특징들을 피해자라는 집단 정체성으로 치켜세우는 독특한 윤리 규범도 만들어냈다. 피해자 집단들을 배려하는 그들의 남다른 관심사를 바탕으로 그들은 교육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지배 계급의 하나로 자리를 굳힌 이 고학력자들은 정부는 물론 그들 서로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신뢰한다."(12-3)


"공리주의, 롤스주의, 자유 지상주의는 모두 개인을 강조했지, 공동체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리주의 경제학자들과 롤스주의 법률가들은 모두 집단 간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전자는 소득을 기준으로, 후자는 불리한 처지를 기준으로 차이점을 부각했다. 두 이데올로기는 모두 사회민주주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두 이데올로기 모두 정상적인 윤리적 본능인 호혜와 응분(이를테면, 공정한 상벌)을 무시한 채, (서로 다르기는 해도) 가장 현명한 전위대가 강요하는 단 하나의 이성적 원리를 치켜세운다." "좌파와 우파의 새 이데올로기들은 서로 정면 대치하는 양상으로 등장했지만, 개인에 강조점을 두고 능력주의를 애호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둘의 대결은 윤리성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엘리트와 생산성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우파 엘리트의 경쟁이었다. 좌파 쪽 슈퍼스타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 되었고, 우파 쪽 슈퍼스타들은 아주 부자가 되었다."(29-31)


"우파가 새로 동원한 자유 지상주의는 생각 외로 큰 피해를 유발한 데다가 효율까지 떨어뜨렸음이 입증되었다. 그 덕분에 좌파가 다시 권좌로 복귀했지만, 그들은 공동체주의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번창하는 대도시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국가를 경영했으며, 그들이 가장 절박한 처지의 집단이라고 판단한 이른바 〈피해자들〉을 지원할 표적으로 정했다. 새로운 불안은 그러한 〈피해자〉의 자격 요건에 미달하는─그럼에도 더 인기를 누리는 피해자 집단보다 실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처지가 더 악화되고 있던─사람들을 타격하고 있었다. 〈피해자〉라는 지위에 따라다니는 부수적인 특권은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개 피해자의 지위는 백인 노동 계급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명백히 모두 평등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한 사람들이 존재한다."(33-4)


제2부 윤리의 회복


2장 윤리의 토대: 이기적 유전자에서 윤리적 집단으로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경제적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육업자와 제빵업자들 단지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윤리적 동기를 가진 사람들로 생각했다. 컴퓨터는 경제적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 합리적 이기심의 공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는 정육업자와 제빵업자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 우리 자신이 그들의 처지에 놓이는 상황을 상상한다. 이것은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라고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우리가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배려하고 동시에 그의 윤리적 인격을 가늠하게 된다고 인식했다. 스미스는 이렇게 공감하고 판단하는 감정이야말로 윤리성의 토대이며,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의무' 사이에 쐐기를 박는 경계가 생긴다고 보았다. 윤리성은 우리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성에서 나오지 않는다."(50)


"가장 강력한 의무는 친밀함에서 나온다. 이러한 의무는 우리의 아이들이나 가까운 친척에게 느끼는 가장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인데, 우리가 아는 사람들로도 확장된다. 가장 약한 의무는 어려운 처지에 처한 먼 관계의 사람들에 대해서 느끼는 '구조의 도리'이다." "친밀함과 구조의 도리 사이에 스미스가 같은 책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감정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수치나 존중과 같은 감정인데, 이러한 감정들이 유발하는 온화한 압력 덕분에 우리는 의무를 교환한다. 즉, 〈당신이 도와주면 나도 도우리다〉라고 말하듯이 우리는 서로 의무를 주고받는다. 그에 필요한 신뢰를 뒷받침하는 것은 위반할 의욕을 억제하는 감정들이다. 사람들은 왜 그러한 감정을 느낄까? 그 답은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말이 '사회적 인간(social man)'이라는 데에 있다." "사회적 인간은 합리적이다. 그 역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효용을 소비에서뿐만 아니라 존중에서도 얻는다."(50-1)


"이야기가 수행하는 세 가지 기능─즉 소속과 규범 그리고 인과(관계를 형성하는)─은 상호 보완적으로 조합되고, 그 결과 서로 얽히고설키는 호혜적 의무들의 관계망을 만든다. 규범에 관한 이야기는 공정과 의리의 가치를 불어넣어서 우리가 왜 호혜적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를 일러준다. 소속감의 공유에 관한 이야기는 호혜적 의무에 누가 참여하는가를 일러준다. 서로 주고받기로 약속하는 호혜성은 당연히 그 의무를 수용하는 사람들로 정의되는 집단 내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인과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행동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가를 일러준다. 이 이야기들이 합쳐져서 '신념 체계'를 형성하여 우리의 행동을 바꾼다. 신념 체계는 무질서의 지옥을 공동체로 바꾸어놓고, 〈역겹고, 잔인하고, 단명한〉 삶을 〈만개하는〉 삶으로 바꾸어놓는다. 이야기는 현생 인류를 구분하는 독특한 특징이다. 우리는 그저 유인원이 아니다."(62-3)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기를 좋아하기 마련인데다가 개인의 선택으로 형성되는 인터넷상의 네트워크 집단은 순식간에 온라인 〈반향실(echo chamber)〉로 진화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네트워크 안에서 누가 말하면 다른 누가 맞장구치는 메아리만을 듣는다. 이야기들은 우리의 신념을 형성하는데, 이 반향실들이 바로 그 프로세스를 작동시킨다. 이것이 갈수록 더 생활하는 장소의 공유와 단절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 단위(즉, 정치체)들은 여전히 우리가 생활하는 장소로 정의된다. 선거에서 우리가 행사하는 투표는 장소별로 집계되고, 우리의 정치 과정에서 생겨나는 공공 서비스와 정책도 장소별로 시행되고 전달된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규범이 크게 달라지는 사태가 서로 장소가 다른 정치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의 디지털 연결성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규범이 크게 달라지는 사태가 정치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70)


"조직의 지휘부가 자신의 네트워크에 이야기를 활용한 아주 최근의 모범적인 사례가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이다." "소속감을 창출하는 ISIS의 이야기들은 정체성이 서로 다른 청년들을 〈믿는 자들(The Faithful)〉이라는 단 하나의 새로운 공동 정체성으로 바꿔놓았다. 호혜적 의무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는 동료 존중의 압력으로 그들을 얽어매서 무자비한 행동으로 몰고 갔다. 새로운 진술들의 이야기로 퍼져나가며 그들의 험악한 행동을 〈칼리프 국가〉라는 중요한 목적과 연결했다. ISIS는 이 인과적 의미를 구축하여 구성원들의 준수에 목적을 부여했다." "하나의 신념체계로서 ISIS는 내적인 정합이 탄탄하고, 따라서 안정적이다. 그 신념 체계의 각 항목을 따로따로 보면 그 하나하나가 대단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들의 집단과 그밖의 모든 사람을 갈라놓지만, 그로 말미암은 그들 집단의 정체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ISIS는 사회를 12세기로 돌려놓기 위해서 이야기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76-7)


3장 윤리적 국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한 대공황 탈출은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소속과 상호 의무의 이야기들을 매개로 이루어진 막대한 공동의 노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각 나라를 커다란 공동체, 즉 정체성을 공유하고 의무와 호혜성을 수용하는 의식이 탄탄한 사회로 바꿔놓는 커다란 유산이 생겼다." "(이 덕분에 국가의 역할을 크게 확장했던) 사회민주주의의 붕괴는 이중의 악재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호혜적 의무가 야금야금 무너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구조의 변화로 타격을 받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니 호혜적 의무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 절실해진 것이다. 이 기간의 극적인 경제 성장에 동반된 대가는 복잡성이 대단히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복잡성의 증대는 더 전문적인 숙련 기능을 요구했고, 그로 인해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 필요해졌다. 이것이 전례가 없을 만큼 고등 교육의 팽창을 촉진했다. 이 육중한 구조 변화의 물결이 사람들과 사회의 정체성에 충격을 초래했다."(88-9)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상황을 보면, 임금 불평등은 소소하고 나라의 위세와 품위도 높다. 그래서 최상위 고임금 노동자들조차 존중에서 얻는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일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으뜸 정체성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성이 증폭됨에 따라서 특출난 교육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특출날 일자리를 얻으며, 높은 생산성에 상응하는 특출난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고숙련 집단의 최상층은 그들의 으뜸 정체성을 나라에서 그들의 숙련 기능으로 바꾼다." "이제 고숙련 집단이 국민 정체성에서 이탈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출발점에서보다 존중을 더 많이 획득한다. 반면에 국민 정체성을 으뜸 정체성으로 고수한 저숙련 집단은 존중을 상실한다. 가장 많이 존중받는 사람들이 국민 정체성을 으뜸으로 선택하는 집단에서 이탈한 탓에 이 집단에 소속함으로써 얻는 존중이 줄어들기 때문이다."(92-3)


"국민정체성이 인기를 잃으면서 가치를 중시하는 정체성의 세가 강해졌는데, 그 결과는 추악하다. 이른바 〈반향실〉 현상에 동반하여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교류하기가 대단히 쉬워졌고, 그 덕분에 가치 중심 정체성의 세가 더욱 강해졌다. 이 가치 기반의 반향실들은 사회의 결속을 회복하는 길이 되기는커녕 구미권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고 있다." "결국 가치가 민족이나 종교와 다를 바 없이 공유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다면, 그밖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장소에 대한 소속감이다." "2장에서 보았듯이,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소속된 장소를 단지 현 상태의 순간적인 이미지만이 아니라, 진화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지금이 모습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겪어온 겹겹의 변화를 이해할수록 장소에 대한 애착은 깊어진다. 이 기억은 그곳에서 성장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지식이고, 그곳 사람들의 공통 정체성을 보강해준다."(114-7)


"소속감을 공유하는 심리적 토대는 장소이지만, 이를 목적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완할 수 있다. 나라는 공공정책의 거반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단위인 만큼, 나라 차원의 공공정책을 통해서 추구하는 공통의 목적에서도 우리의 공유 정체성이 생긴다. 그러한 목적이 호혜적인 행복 증진의 행동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적인 행동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면 어떻게 우리 모두의 후생이 점차 향상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서로에 대한 의무의 이행이 전제하는 바는 당연히 그러한 호혜성의 영역을 정의하는 공유 정체성의 수용이다." "그동안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적대적인 정체성을 가지도록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그러한 정체성들은 사회에 독소로 작용한다. 서로 적대적인 이해관계의 이야기들은 따로따로 보면 모두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이 자꾸 누적되면 사회를 좀먹는 폐해가 너무 커져서 집단적인 행복을 퇴보시킨다."(119-20)


4장 윤리적 기업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본을 내놓은 사람들에게 기업의 소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의 원리는 위험을 떠안은 사람들이 기업을 통제할 필요를 가장 절실히 느낄 뿐만 아니라 경영자들을 꼼꼼이 따져볼 동기도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점차 현실과 멀어지고, 갈수록 더 심하게 괴리되었다." "현대의 공급망에서는 기업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의존하기 때문에 한 회사가 파산하면 바이러스처럼 그 충격이 세계 경제 곳곳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기업은 자신의 장기적인 성과를 중시할 동기가 있는 사람에게 설명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경영의 오류를 포착할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식 소유가 고도로 분산된 상황에서는 무임승차의 문제가 생긴다. 이는 산산이 흩어진 주주들 가운데 아무도 경영진의 장기 전략이 과연 훌륭한지 들여다보려는 동기가 별로 없다는 문제이다."(131-2)


"그동안 최고 경영자의 보수가 갈수록 단기 성과 지표에 더 긴밀하게 연동되는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기업의 보상 위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집단이다. 그러한 집단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이 점차 신념 체계를 형성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사회는 국민 정체성이 갈라지면서 숙련 기능 중심의 정체성들로 분열되었다. 이 커다란 과정의 축소판 중 하나가 최고 경영자의 동료 집단이 자사의 노동자들로부터 다른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로 바뀐 것이다." "〈그는 500만 달러를 버는데, 나는 고작 400만 달러밖에 벌지 못한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 이러한 인식의 핵심에는 탐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최고 경영자들의 다수는 쾌락주의자가 아니라 의욕이 넘치는 일 중독자들이다. 그 핵심은 정체성이 새롭게 정의됨에 따라서 그것에서 비롯되는 동료 존중의 근원도 달라졌다는 것이다."(134-5)


"(통상적으로 주주가 아닌) 장기근속 피고용자들과 고객들은 회사 이사회에 대표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집단 중 어느 쪽이든 그들을 이사회에 대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가끔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한 회사를 〈상호 회사(mutuals)〉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이러한 구조를 갖춘 회사들이 많았지만, 이 구조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단 하나의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소유와 통제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회사의 존재 형태를 바꿀 법적인 권한을 누린다는 점이다. 즉, 그 권한으로 그들의 회사를 상호 회사로부터 소유주들이 금융 시장에서 회사 주식을 매매할 수 있는 상장 회사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회사의 형태를 그렇게 바꾸면, 현 세대의 〈소유주들〉은 미래의 수익을 모두 포괄하는 회사의 자본 가치를 통째로 획득한다. 따라서 앞으로 등장할 모든 후속 세대의 참여자들은 그로 인해서 소유와 통제권을 물려받을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한다."(143-4)


"호혜적 의무를 이행하는 기업 행동의 재구축은 정부가 이룩해야 할 막대한 공공재요, 공익이다. 우리는 최소 임계 규모에 도달하는 '윤리적 시민들'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윤리적 시민들은 기업의 목적을 이행하고 기업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러한 목적이 함축하는 규범을 인정하면서 존중과 불신의 두 가지 압력을 통해서 기업이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고무한다." "돌이켜보면, 1945-1970년 시기에 서구 대다수 정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새로운 호혜적 의무를 많이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기억할 것으로, 그 시절의 최고 경영자들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던 급여의 20배 만을 자기 급여로 챙겼다. 지금의 최고 경영자들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급여의 231배를 자기 급여로 챙긴다. 윤리적 기업은 사라지고 흡혈 오징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시대는 계속 변해왔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대로 바뀌어야 한다."(162-5)


5장 윤리적 가족


"1945년의 윤리적 가족에서 중간 세대를 이루는 부부는 그들의 위아래로 부모와 아이들 두 세대를 돌보는 일을 호헤적인 의무로 수용했다. 이는 보통 상당히 큰 부담을 뜻했지만, 누구나 세 세대를 다 거치게 되므로 그것을 당면한 시기에 책임으로 수용해야 할 의무로 생각했다. 그러한 구조는 대단히 안정적인 신념 체계였다." "이제 대다수 고학력 가정에서는 예전의 이 규범이 부부가 개인적 성취를 통한 자아실현을 서로 격려해주는 새로운 규범으로 바뀌었다. 동거와 동류 교배(또는 동질혼) 덕분에 고학력자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 부부로 자리를 잡아갔고, 그 덕분에 그들의 이혼율은 낮아졌다. 성취도가 높은 부모들은 자신의 성공을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예전의 양성 간 교육 불균등을 반영했던 성별 위계질서는 사라지고, 고학력층 부모 양쪽이 합세하여 자식의 조기 영재 교육에 달려드는 조류가 나타났다."(168-71)


"한편 경제적인 이유로 주로 하류층을 타격한 가족 해체 문제에 대처하고자 나선 가부장적 국가는 윤리적 가족이 뒷받침하던 아이들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어린이의 권리〉라는 명분으로 개입했다." "〈어린이의 권리〉를 위한 국가의 의무는 아이가 학대받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으면 오히려 아이를 친부모로부터 격리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결과는 격리는 되었지만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한 상태(limbo)〉의 아이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상태〉의 아이들을 돌보는 위탁 양육은 육아에 필요한 중요한 기준에서 모두 실패한다. 그처럼 아이와 맺어지는 관계는 상거래와 유사한 반면, 아이들에게는 분명한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한 관계는 임시적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데에 반해, 아이들에게는 영구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더욱이 그러한 관계는 아이들에게 소속감을 주지 못한다."(176-8)


"학력 수준이 낮은 인구층에서는 많은 가정이 빈 껍데기로 해체되고 있는 반면, 학력 수준이 높은 인구층에서는 왕조 가족이 번창하고 있다. 새로운 영재 교육 모형을 도입한 고학력자 가정에서는 부모가 양육에 들이는 공이 극적으로 늘어났다. 예전과는 판이하게 고학력자의 아이들은 부모가 분명한 목적의식하에 조성하는 집약적인 상호 작용의 혜택을 누린다." "로버트 퍼트넘은 인지 능력별로 아이들의 집단을 분류해서 대학교에 입학할 승산을 분석했다. 당연히 부모의 높은 인지 능력을 물려받을 공산이 큰 고학력 계급의 아이들이 대학교에 입학할 승산이 더 클 것이라고 예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퍼트넘은 인지 능력이 미국에서 '최하위 집단에 속하는' 고학력 계급 아이들의 대학 입학 승산이 인지 능력이 미국에서 '최상위 집단에 속하는' 저학력 계급 아이들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새로 자리잡은 조기 영재 교육은 전리품 아이뿐 아니라 〈위장된 바보〉도 길러낸다."(179-81)


6장 윤리적 세계


# 윤리적 세계의 핵심 원리

1. 호혜성과는 무관하게 다른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인정한다. 이것은 구조의 도리에 해당하고, 난민, 대규모의 절망, 기초적인 사법질서를 결여한 사회에 대한 의무를 포함한다. (국제난민기구UNHCR, 세계식량계획WFP, 세계보건기구WHO 등)

2. 더 많이 공헌하고자 하는 나라들은 그들끼리 더 광범위한 호혜적 의무를 건설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3. 이렇게 건설되는 호혜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한 집단에 공동으로 소속한다는 인식을 형성하고, 목적을 의식하는 공동 행동을 통해서 각 참여자의 승화된 이기심을 고무한다.


제3장 포용적 사회의 회복


7장 지리적 분단: 번영하는 대도시, 망가진 도시


"전문화가 극도로 심화되면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가까이 있어야만 생산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전문화가 심화될수록 서로 보완적인 전문가들이 밀집하는 더 커다란 군집체가 필요해지고, 그만큼 잠재적인 고객들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갖가지 전문 인력이 군집을 이루려면 뛰어난 연결성을 제공하는 대도시가 필요하다." "국제무역의 장벽이 제거됨에 따라서 잠재적 시장이 국내 시장에서 세계 시장에서 확대되었고, 그로 인해서 고도로 전문화된 인력의 군집 형성으로 얻는 이득이 한층 더 커졌다. 런던에 군집한 서비스들의 주된 시장은 예전에는 영국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이다." "따라서 대단한 고소득자들이 많이 상주하면서 이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서비스 시장이 생긴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서비스들이 생겨서 군집을 형성하므로 세계의 갑부들이 몰려드는 새로운 유입이 일어난다. 이것이 번영하는 대도시이다!"(215-6)


한편 1960년대의 셰필드처럼, 기업 군집체를 중심으로 한 (지역) 도시들은 세계화가 확산됨에 따라 노동 생산성과 임금 경쟁력이 우월한 타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도시 기반이 급속도로 무너져내렸다. "이런 도시들에 남은 경제 활동은 국지적 권역의 창고라든가, 부동산 비용이 아주 저렴한 조건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저생산성 제조업, 아니면 저렴한 부동산과 저임금, 비정규 노동에 의존하는 콜센터이다. 도시가 그러한 활동들로 채워짐에 따라서 부동산 가격과 임금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내 더 발전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길에 가로막힌다. 이러한 활동들은 숙련도가 낮고, 따라서 그 노동력은 복잡한 전문화에 의한 지속적인 생산성의 상승에 더는 참여하지 못한다. 대도시에 있는 슈퍼스타급 기업들은 계속 테크놀로지의 최전방을 달리고, 따라서 대도시 인구는 소득이 계속 상승하는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대도시의 테크놀로지와 소득은 망가진 도시로는 흘러내리지 않는다."(218-9)


"집적 이득에 대한 과세는 윤리성과 효율성, 두 가지 근거 모두에서 영리한 정책이다." "윤리성 측면에서 보면 소득(집적의 이득)과 응분(공과 분별) 사이의 괴리를 개선하는 방안이며,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근로 소득으로 포장된) 경제적 지대 추구를 억제하는 방안이다." "집적 이득은 토지주와 고숙련 도시 노동자들에게 나뉘어 돌아간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합당한 출발점은 토지와 건물(토지에 부착된 지상의 모든 정착물 재산)의 가치 상승을 과세 대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토지의 가치와 건물의 가치에 대하여 일정 백분율의 세금을 해마다 부과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도시의 고숙련 집단이 획득하는 집적의 지대를 과세 표적으로 잡는 대도시 가산세가 따라붙는다. 고숙련자 중에서도 최상위 집단에게 돌아가는 집적의 이득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가산세는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누진적으로 높아져야 한다."(238-42)


"대도시에 과세하는 목적은 망가진 도시의 주민들을 위한 복지 급여 재원을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들을 생산적인 노동의 군집체로 복원하는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다. 어느 군집체가 해체되면 시장은 그것을 새로운 군집체로 바꿔놓지 않는다. 그 대신, 도시는 점차 생산성이 낮은 활동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시장의 작용은 왜 새 군집체를 창출하지 못할까?" "우선 다른 기업이 따라붙지 않으면 개척 기업은 파산할 공산이 크다. 게다가 다른 기업들이 따라붙더라도 개척자는 나중에 진입하는 기업들보다 불리한 여건에 놓인다. 개척 기업은 필요한 숙련 노동자를 구하려고 해도 마땅한 인력을 찾을 개연성이 낮다." "따라서 개척 기업은 다른 곳에서 숙련 노동자들을 데려와서 그들을 통해서 그 지역의 피고용자들을 점차 훈련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후발 기업은 필요한 숙련 노동자를 채용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달리 말해서, 군집의 개척자는 이른바 선발주자의 불리에 직면한다."(243-9)


# '선발주자의 불리'를 보완하는 공공 대책

1. 군집체 구축에 투자하는 개발은행 제도 활용

2. 사회간접자본을 마련해주는 기업 단지 조성

3. 투자 유치에 적합한 산업들을 연구하는 투자진흥청 설립

4. 지식 군집을 마련할 지역 대학교와 전문 대학 지원


8장 계급 분단: 모든 것을 누리는 가정과 해체되는 가정


"앨리슨 올프 남작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간 사회들 가운데 아무런 질서도 없는 난장판 성생활을 운영한 사회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와 반대로 모든 형태의 인간 사회는 두루 존중받는 결혼제도를 두었다······세월이 흐르며 사회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계속 유지된 규칙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 아이의 어머니와 결혼하게끔 강제하려고 설계된 것들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규칙을 두어야 할 근거는 충분하다." "텔로미어는 DNA 맨 끝에서 보호 역할을 하는 뚜껑인데, 그것의 길이가 짧을수록 세포가 손상을 더 많이 입고 건강도 나빠진다. 어머니가 불안정한 부부관계에 있으면, 그 어머니의 아이는 9세이 이를 시점에 텔로미어의 길이가 40퍼센트 짧아졌다. 이 파괴 작용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기 위해서 가족 소득의 두 배 향상이 아이의 텔로미어 길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자. 고작 5퍼센트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생활 참여가 결핍됨에 따른 피해는 다른 보상 요인으로 상쇄될 수 없을 만큼 크다."(260-1)


# 사회적 모성주의 접근법

1. 취학전 아동 돌봄 서비스 : 육아에 필요한 직접 자금 지원, 실업 충격을 완화해줄 취업 보조, 10대 부모의 정신건강 관리, 은퇴자를 활용한 돌봄 서비스 등

2. 학교 생활 지원책 : 학생간의 사회적 혼합을 높여 계층화 현상 완화, 신뢰할 만한 조언자 그룹이 열악한 사회 관계망을 보완, 학위보다 숙련 기능 육성 등

3. 장기적 안정성 : 노동자들이 미래 소득을 감안하여 사회적 책무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용 안정성 확대, 애착과 소속감을 안겨주는 사회적 자본 확대 등

4. 사회적 불평등 억제 : 주거 수요보다 자본 소득에 민감한 주택 가격, 고소득 창출에만 초점을 맞춘 일자리(혁신적 재능의 낭비), 제로섬경쟁 제도 제한 등


"노동은 삶의 중추를 이루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목적을 부여해야 한다. 지금, 형편이 좋은 사람들 중에는 노동에서 목적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얻을 기회가 너무 적은 직무에서 일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일에서 자부심을 얻을 만한 숙련 기능이 불충분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는 일에 사회에 공헌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단지 급여 봉투의 격차가 아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실패이다." "사회적 가부장주의에서는 고집스럽게 엇나가는 가정들을 국가가 감시하고 규율하지만, 사회적 모성주의에서는 국가가 실용적인 지원을 통해서 그러한 가정이 겪는 충격을 덜어준다."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 살든 자존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자본주의를 건설하려면, 그러한 접근이 상류층과 하류층 둘 다에 대해서 필요할 것이다."(319-20)


9장 세계적 분단: 승자와 뒤처진 자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무역은 상호 이득을 가져오기 때문에 각 사회 내부의 '재분배를 통해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면' 모든 사람의 형편이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전문가 집단으로서 우리 경제학자들은 이 올바른 진술을 명백히 잘못된 진술, 즉 사회 내의 모든 사람의 형편이 '나아진다'고 스리슬쩍 바꿔버렸다. 게다가 무역을 다루는 국제 경제학은 지금껏 사회 내부의 보상 메커니즘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은 단순한 모형들이 무시하는 두 가지 특징적인 사실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하나는 무역에 따르는 손실이 대개 노동 시장을 통해서 파급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손실이 지리적으로 집중된다는 것이다. 셰필드가 흥성했던 철강 산업을 상실했을 때, 셰필드 실업자들의 소비 위축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영국의 다른 곳에서 소비가 증가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별 위안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322-3)


"무역과 노동자의 국제적 이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한 가지 있다. 무역은 '비교우위'를 동력으로 작동하지만, 노동의 이동은 '절대우위'를 동력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물론 표준 교과서에 등장하는 가정들을 전제할 때에는 이민이 '세계적 차원'에서 효율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절대우위로 작동하는 이민이 이민자 유입국이나 유출국 모두에 이롭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이민에서 분명한 이득을 누리는 유일한 주체는 이민자들이다." "이민으로 집적의 지대가 늘어나면 대도시의 고숙련 일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내국인 시민들은 이득을 보지만, 대도시의 고숙련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시민들은 이민자들이 유입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취득했을 지대를 상실할 것이다." "또다른 양상으로 이민이 초래하는 비용이 있다. 그것은 사회에 계속 축적되어온 호혜적 의무를 이민이 보통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이민자들은 그 사회의 공유 정체성과 호혜적 의무, 승화된 이기심의 이야기들을 알지 못한다."(327-31)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하면, 시장과 이기심이 주도하는 사적인 결정으로 유발되는 이민의 유입량이 사회적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물론 이민자 본인뿐 아니라 이민 유입국과 유출국 모두에 이롭게 작용할 이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민 문제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 좌파는 시장이 주도하는 프로세스에 본능적으로 회의적인데도 예외적으로 이민에는 찬성한다. 반면에 시장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열광하는 우파가 예외적으로 이민에는 반대한다. 실용주의와 실용적 추론은 이데올로기보다 더 많은 뉘앙스를 고려한다. 즉, 어느 정도 규모의 이민이 사회에 이로울 것인가를 물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이민을 받아들일 것인가도 묻는다." "이민으로 손해를 보는 집단에게는 그 손실에 상응하는 보상을 공공정책이 마련해야 한다. 또한 쉽게 보상할 방법이 없는 재분배를 유발하는 요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는 공공정책이 억제해야 한다."(332-3)


제4부 포용적 정책의 부활


10장 극단을 파괴하기


"실용주의의 적(敵)은 (사회민주주의가 무너진 정치적 공백을 메운) 이데올로기와 대중 영합주의 두 가지인데, 그 각각이 자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좌우파의 이데올로기 모두 어떤 목적에라도 이용할 수 있는 만능의 분석을 활용함으로써 상황의 맥락, 신중한 접근, 실용적 추론을 전부 건너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만능의 분석으로부터 상황과 시대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타당한 진실이 술술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대중 영합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건너뛰는 우회로를 제시한다. 그것은 금세 손에 잡힐 만큼 명백한 해결책을 훤히 알고 있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이다. 이데올로기와 대중 영합주의가 합쳐질 때도 많은데, 그렇게 되면 효과는 더욱 강력해진다. 한때 신뢰를 잃은 이데올로기들이 새로운 매혹적인 해결책을 팔러 다니는 열정적인 지도자들을 만나서 새롭게 단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에게 환호하는 함성이 인다."(338-9)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소비로부터 효용을 창출하고, 총효용 합산의 거창한 윤리적 산술에 동등하게 포함되는 독자적인 개인이라고 이해하지만, 이와 달리 현실의 사회를 형성하는 원자는 사람들끼리 맺는 인간관계이다. 사회적 가부장주의는 사이코패스와 다름없는 경제적 인간의 이기심을 플라톤적 수호자들이 통제해야 한다고 간주하지만, 이와 달리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인간관계가 의무를 낳는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삶의 목적의식에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플라톤적 수호자와 경제적 인간을 짝짓는 결합이 그동안 공공정책을 장악했고, 그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의 독소 작용이 사람들에게서 윤리적 책임을 걷어내버렸다. 덩달아, 의무는 가부장적 국가로 넘어갔다. 이를 중세 종교에 빗댄 괴상한 풍자극으로 나타내면, 평범한 사람들은 죄인 역을 맡아서 특출난 사람들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351)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가가 획득한 책임은 국가의 능력을 넘어선다. 그것은 기업과 가족만이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책임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한 의무감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부장적 국가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마련해주는 온갖 장치보다 월등하다. 그리고 훌륭한 기업은 피고용자들에 대한 의무감이 노사관계의 장기적인 호혜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부장적 국가가 마련해주는 온갖 훈련 프로그램들보다 월등하다. 국가가 수행할 역할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가정과 기업의 의무가 본연의 그 자리에서 이행되도록 복원해주는 정책의 정책(meta-policy)을 고안하는 것이다." "소속감의 공유로 실현되는 호혜적 의무를 촘촘하게 일구어가면 더 신뢰받고 따라서 더 효과적인 국가를 만들어갈 수 있다." "자발적으로 실현되는 호혜성은 공리주의적 가부장주의가 성취한 것보다 더 행복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351-3)


"앞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사람들이 정체성을 공유하면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는 호혜성의 토대가 갖춰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념 체계를 잘 구축하는 사회는 개인주의나 복고판 이데올로기들을 중시하는 사회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개인주의적 사회는 공공재라는 광대한 잠재력을 포기한다. 복고판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사회의 다른 일부에 대한 증오를 저변에 깔고 있어서 갈등으로 치닫는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는 사람들이 호혜적 의무의 관계망을 수용하도록 길러진다. 삶이 잘 풀리는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준다. 성공적인 사람들이 이러한 의무에 부응하는 이유는 의무의 이행에서 생기는 자존감과 동료 존중으로 보상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소수에 대해서는 좀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합당하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가 길잡이로 삼아야 할 윤리적 실용주의이다."(35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