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최대의 전투 : 모스크바 공방전
앤드루 나고르스키 지음, 차병직 옮김 / 까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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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모스크바 전투는 모르긴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고, 이론의 여지없이 두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투였다. 양측을 합쳐서 약 700만 명의 장병이 참전했고, 그중 250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러시아 군사 기록에 의하면 전사자, 실종자, 포로로 잡힌 병사를 포함한 95만 8,000명이 결국에는 모두 〈사라졌다.〉 그 외 93만 8,500명의 군인들이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소련군의 전사자 수는 모두 189만 6,500명에 달했다. 반면 독일군의 희생자 수는 61만 5,000명이었다." "모스크바 전투는 국제사회 전체가 주시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미국, 영국, 일본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이 전투의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느냐에 따라서 중요한 정책 결정을 달리 하고 있었다. 독일군을 모스크바 근교에서 저지하지 못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의 귀추를 포함한 전반적인 국제정세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10-1)


1장 히틀러는 1941년에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개전 전야 : 2인의 독재자


"스테판 미코얀은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경고를 담은 첩보를 계속 수집해서 보내던) 자국 정보원들을 불신했던 스탈린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제시한다. 〈정보원들의 보고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은 인간에 대한 그의 극도의 불신을 드러냅니다. 스탈린은 모든 인간이 그를 속이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어요.〉" "스탈린의 의심증을 놓고 보았을 때, 히틀러가 머지않아서 그를 배신할 것이라는 서구 국가들의 경고를 무시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1년 4월,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인 로렌스 스타인하트와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에게 히틀러의 계획을 알리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독일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리려는 다른 시도들, 특히 영국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이러한 경고를 독일과 소련을 이간질해서 결국에는 서로를 배신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자신들이 득을 보려고 한다〉면서, 스탈린은 불만을 터뜨렸다."(43)


"스탈린이 시간을 벌려고 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전기작가였던 아이작 도이처는 스탈린이 나폴레옹과 화해함으로써 전쟁을 준비할 4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던 알렉산드르 1세처럼 되고 싶어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스탈린이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는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군대를 준비시키는 데에 활용할 수 있었던 시간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준비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게다가 스탈린이 당시 폴란드 동부와 발트 해 연안국가들에서의 소련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는 소련과 나치 독일 사이에 영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믿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독일과 연합국이 오랜 갈등 속에서 서로를 지치게 하는 동안 소련은 숨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고, 어쩌면 후에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47-8)


2장 우리가 얼마나 똑똑한지 이 꼴을 보고 말해보라지─기습, 개전, 반격


"공격 개시 한 달 만에 독일군은 약 700킬로미터 이상을 진군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경이적인 속도였는데, 이는 그들이 공격한 대부분의 지역들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독일군의 사기는 그들이 소련 영토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면서 맞닥뜨린 소련군의 혼란에 비례해서 치솟았다." "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일리야 드루즈니코프는 아들 유리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대에는 10명당 1대의 총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는 곧 무기가 없는 병사들은 총을 든 병사의 뒤를 줄줄이 따라다녀야 한다는 뜻이었다. 총을 들고 있던 병사가 쓰러지면, 다음 병사가 얼른 그 총을 집어들어야 했다. 장교들은 적군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에 도망치려고 대열을 이탈하는 병사를 언제든지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병들은 전장으로 달려가서 적군의 시체에서 무기 탄약, 군복 등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거두어오라는 명령도 종종 받았다."(58-9)


"모두가 우왕좌왕 헤매는 상황에서 소련군 최고 사령부, 일명 스타브카(Stavka)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스탈린도 심리적 압박감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고 크렘린 궁에 복귀했고, 그 순간부터 다시 통제권을 손에 쥐었다. 7월 3일, 그는 마침내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시작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동지들! 형제들과 자매들이여! 우리의 육군과 해군 전우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말하고 있소, 친구들이여!〉 스탈린은 외쳤다. 독재자 스탈린이 국민들을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친구들〉이라고 부른 것은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국민들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이 국민들을 신하가 아니라 공동의 싸움을 함께 치러나갈 동료로 대하려고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매우 혁명적인 변화였고, 연설을 듣는 국민들 모두 그렇게 느꼈다."(67)


"히틀러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한 순간, 생사를 건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일군으로서는 소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모스크바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1941년 여름, 목표가 가시권 안에 들어오자 히틀러는 주저했다. 모스크바의 운명,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두 독재정부의 운명이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평소에는 대담하던 히틀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히틀러의 장군들도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공격 초반의 성공이 가져다준 낙관적 관측은 히틀러에게 동부전선의 다른 목표, 특히 우크라이나를 정복할 여유가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한편, 모스크바 점령에 대한 내심의 초조함이 히틀러로 하여금 모스크바 공격을 미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게 했다. 머지않아서 히틀러의 그 결정이 스탈린에게 한 가닥 희망을 안겨준 중대한 오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마치 두 독재자들이 상대방의 실수에 자신의 실수로 대응하기로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80)


3장 숙청의 대가─혼란의 방어


"스탈린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 자들과 탈주병들을 처형당해 마땅한 '변절자'라고 칭하면서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는 지휘관들도 실책을 범하는 경우에는 병사들과 똑같은 처지에 빠진다고 경고하고 싶었다. 게다가 전쟁 초반에 계속된 치욕스런 패배의 책임을 전가할 몇 명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서부전선의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의 부대는 민스크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는 독일군을 막지 못했고, 그의 수석 부관들은 그 희생양의 역할을 맡을 자들로 즉시 지목되었다. 그들은 체포되었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혐의는 〈반소련군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서 대략 15만 8,000명의 소련군 병사들이 처형되었다. 반면에 독일 군사법정은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모든 전선에 걸쳐서 총 2만 2,000명에게 도주를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자기 군대의 병사나 장교를 처벌하는 일에 관해서라면 스탈린은 히틀러를 가볍게 능가했다."(94-5)


"스탈린의 지지자들과 옹호자들은 그의 숙청 정치 전략이 독일의 침략 전후를 막론하고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1986년 사망하는 그날까지 스탈린에게 충성했던 몰로토프는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의 군부 숙청을 이렇게 옹호했다. 〈물론 과도한 면은 있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그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 즉 국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오직 진정한 스탈린주의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당신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그 자신조차 그것을 모를지라도, 누구나 인민의 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전쟁 전 스탈린의 논리였고,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던 전쟁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논리였다.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도망치는 아군의 등 뒤에 총을 쏘는 〈저지부대〉의 형태이든 힘들여서 피란시킬 필요를 없애기 위한 수감자들에 대한 광란의 처형의 형태이든, 오직 숙청 또 숙청만이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107-8)


4장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좌충우돌의 공격


"히틀러가 생각하는 동쪽 정복지의 미래상이란 숙청 정치에 따르는 죽음과 예속 외에는 없었다." "히틀러의 말은 결코 허황된 수사가 아니었다. 군인들 사이의 전우의 개념을 잊으라는 히틀러의 선언은 그 악명 높은 코미사르 지령(Commissar Decree)으로 이어졌다. 붉은 군대 소속의 정치 장교들은 설사 투항할 의사를 표시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처형하라는 지시였다.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하기 한 달도 더 전인 5월 12일에 작성된 코미사르 지령은 이러했다. 〈붉은 군대의 정치 군인은 생포되더라도 전쟁포로가 아니다. 전쟁포로들과 함께 일시적으로 임시수용소에 수용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 독일군의 코미사르 지령은 발령과 동시에, 붉은 군대의 정치 장교들로 하여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확고한 결의를 다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어차피 패배는 곧 처형으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114-5)


"독일군에게 좋은 소식도 있었는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스크바로 곧장 통하는 지형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이 독일 중앙집단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간신히 병력을 보강하여 버티는 가운데, 스몰렌스크까지 도착한 중앙집단군 지휘관 페도르 폰 보크에게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적은 동부전선 중 오직 한 곳에서 철저하게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다. 바로 중앙집단군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대단한 자기 확신에서 오는 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초기의 여러 목적을 달성했던 히틀러는 부하 장군들의 간청에 대답하기까지 약 3주일 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내 그가 내린 결론은 보크나 할더뿐만 아니라 브라우히치와 다른 최고 간부들의 제안과도 완전히 상반되는 명령이었다. 핵심은, 현재 북부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로 향한 진군을 최우선으로 하고, 남부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캅카스까지 밀어붙이는 데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돌발적인 결정이었다."(128)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명령은 됭케르크 바로 목전에서 구데리안 부대의 진군을 멈추게 했던 결정보다 더 중대한 실수로 느껴졌다."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도 그의 장교와 병사들이 적군의 군사적 행동에 의한 희생보다 다른 요인에 의해서 더 큰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었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병사들의 희생자 수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었다. 그 결과, 마침내 모스크바를 향하게 된 독일군은 여전히 승리를 구가하고 강력한 힘을 과시했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처럼 통제 불가능할 정도의 괴물은 아니었다. 독일군은 한 번 이상 호되게 당했고, 구데리안의 경우과 같은 경로와 목표의 갑작스런 변경을 포함하여 그렇게 빠르게 그리고 그렇게 멀리까지 이동하는 데에 따른 긴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어려운 시련에 직면하기 직전이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은 커져갔다."(134-8)


5장 모스크바가 위험하다─함락이 목첩에


"키예프 전투에서는 스탈린이 그의 장군들에게 우크라이나 수도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했으므로, 소련군은 독일군에 포위된 채 큰 손실을 입었다. 주코프 장군과 다른 지휘관들은 후퇴하는 것만이 큰 손실을 막고 전력을 재편성하여 이후의 다른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키예프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소리를 질렀다. 히틀러처럼, 스탈린도 그의 장군들의 충고를 조금도 주저함 없이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 "이와 달리 비야즈마 근교에서 일어난 비극은 통신수단과 사령부의 명령 전달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타이푼 작전을 시작하면서, 가능한 많은 붉은 군대 병력을 비야즈마 근교에 포위하여 가두려고 독일군이 신속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소련의 지도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따라서 그곳은 죽음과 파멸의 지옥인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141)


"9월 11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함락하는 데에 곧 성공할 것처럼 보이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보로실로프 원수의 임무를 대신 맡도록 했다." "새로 임지에 도착한 주코프는 신속하게 명령을 하달하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보이는 장교들을 해고하거나 재배치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후퇴를 금지하고 다시 공격을 시도할 것을 요구했으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총살형을 집행하는 부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달 말 독일군의 진군은 저지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해서 결국 주민들을 아사 상태에 빠뜨리는 900일 동안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전개되었다." "스탈린과 그의 장군들이 처음에 인식하지 못한 것은, 9월의 후반부 동안 히틀러가 많은 군대를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타이푼 작전에 대처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부대를 재배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레닌그라드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가 약화된 이유였다."(157-8)


"스탈린의 귀환 명령을 받고 서부전선의 사령부로 달려갔던 10월 6일 밤, 주코프는 그곳의 장교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상황이 정말 암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휘관들은 비야즈마 근처에서 포위된 부대들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주코프의 표현에 따르면 〈서부에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전선이 없었다. 보충할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공백과 결함을 메울 수가 없었다.〉" "주코프는 포돌스크 사관학교에서 4,000명의 사관후보생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방어선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취약한, 독일군이 진군해서 접근한 말로야로슬라베츠 부근을 맡도록 했다." "그들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시간을 벌었다. 그동안 다른 부대는 모스크바를 완전히 둘러싸며 참호를 파고, 사격 진지와 대전차 장애물을 구축하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면서 결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또한 장교들이 부대를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강화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부대를 끌어모을 시간을 만들어주었다."(163-5)


"그런 와중에도 독일군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10월 14일, 독일군은 르제프를 점령했다. 르제프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2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독일군이 북쪽에서 모스크바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따라서 르제프의 함락은 독일군이 이제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절호의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르제프에서도 곧 비야즈마에 비교할 수 있을만큼의 대량 학살이 일어나서, 그곳 또한 또 하나의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집어삼킬 지옥의 도가니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비야즈마와 르제프 두 곳에서의 패배는 모스크바에 대한 최종 전투가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은 전투가 장기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모스크바는 대혼란에 휩싸이기 일보직전이었다."(167-8)


6장 인간의 형제애─기만의 동맹


"소련의 수도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맹공격을 주시했던 것은 당사자였던 모스크바 시민들이나 히틀러 또는 스탈린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 윈스턴 처칠은 영국에 대한 압박의 부담을 완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소련이 히틀러의 군대를 묶어두기를 바라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공격만 했다 하면 승리를 거둔 독일의 기계 군단에 홀로 저항하여 오랫동안 버텨온 터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틀림없이 주시하고 있었는데, 국민들에게는 털어놓지 않았지만 조만간 미국도 불가피하게 그 국제적 분쟁에 휘말려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도 분명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군의 공격 진행 과정을 신중하게 관찰하면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붕괴될 소련이라면 독일의 편에 가담하여 동쪽에서 공격을 시도해야 할 것인지를 저울질했다."(169)


"전투지역이 모스크바에 점점 더 가까워짐에 따라서, 모스크바에 주재하던 영국,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각국의 외교관들은 소련이 독일의 진격을 막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점점 더 부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런 진단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국가의 재외공관에서는 내부 동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가 표면화되기도 했다. 모스크바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매우 위태로운 근무지였는데,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에 기인한 격한 내부 갈등이 재외공관들 안에서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이 그 도시를 점령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은 그런 갈등을 격화시켰다. 모스크바가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각국의 외교관들은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의 원조 요청에 서구 국가들이 어떻게 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토론했다."(171-2)


"독일의 침략 전날 밤, 처칠의 개인 비서 존 콜빌은 처칠에게 확고한 반공산주의자로서, 소련 정부를 돕는다는 사실에 고민이 되지 않는지 물었다. 처칠은 대답했다. 〈전혀. 나의 목적은 오직 하나, 히틀러의 파멸이네. 그것으로 내 인생은 아주 단순명쾌해지지. 만일 히틀러가 지옥을 침략한다면, 국회에서 나는 악마에게 최소한 호의적인 언급은 해줄 것이라네.〉" "루스벨트와 그의 최측근들은 곧 처칠을 비롯한 영국 관료들 이상으로, 러시아의 전쟁 수행 노력을 칭찬하고 지원의 대가로 스탈린으로부터 무엇인가 양보를 얻어내려는 그 어떤 현실적 고려도 하지 않는 성선설적 입장의 정책을 펼쳤다.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루스벨트가 러시아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가치가 있는 동맹국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루스벨트는 일시적으로 상호주의 외교관계를 제안한 스타인하트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정책에 의해서 명백히 폐기되었다."(185-8)


7장 대혼란의 모스크바─1941년 10월


"소련의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식적 견해에 일관된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독일의 침략자들에 대한 항전에서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고 또 엄청난 희생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41년 10월 16일은 다른 어떤 날보다도 결정적으로 그러한 신화를 산산히 부수어놓았다." "아무리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도 모스크바 사태에 대한 다음 두 가지의 극단적 현상을 조화시킬 수는 없다. 하나는 매우 정화된 해석들이다. 다른 하나는 강탈, 파업 그리고─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체제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여러 행위들을 포함한 법과 질서의 갑작스런 붕괴라는 현실이다. 그러한 일은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그들의 도시가 독일군에 의해서 점령되기 직전이라고 확신했던 순간에 발생했다. 도시의 시민들은 단결되어 있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분열되었고,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한 상황이었다."(205-6)


"독일군은 거의 매일 공중폭격을 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스탈린은 자주 키롭스카야 지하철역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그는 합판으로 만든 벽에 의해서 역의 다른 공간이나 다른 열차들로부터는 가려진 특별히 준비된 열차칸에서 일하고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한 번은 스탈린은 지상에서 폭격을 직접 목격했다." "스탈린이 그 순간 느낀 것이 용기였든 공포였든 간에, 모스크바가 마치 안팎으로 무너질 듯이 보였던 10월 16일 그날, 그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무것도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시민 다수가 스탈린은 이미 도망갔다고 믿고 있던 상황에서,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들 훨씬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의 결정은 자포자기 또는 결단의 신호로 비추어질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 며칠 동안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스탈린의 고민의 이유였을 것이다."(222-3)


"여전히 결정을 서두르지 않고 있던 스탈린은 마침내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갑자기 다시 모든 업무를 장악했다. 그가 생애를 통틀어서 의지해온 전략인 폭력의 사용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10월 19일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내무인민위원부의 군대를 거리에 출동시켰다. 그들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자는 누구든지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상 재판소는 약탈자들은 물론 법과 질서를 위반한 자들을 규율할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즉각적인 처형을 의미했다." "그 뒤로 계속 이어진 강압적 단속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다. 다만 스탈린이 다시 지휘한다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는 없었다. 약탈은 순식간에 중단되었고, 모스크바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독일의 점령을 저지하고야 말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다지기 시작했다."(224-5)


"독일군을 피해 퇴각하는 군인들을 총살하는 사격이 보여주듯이, 소련 지휘부의 상투적 수법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누구든지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소련 정부로서는 현재의 전투와 관련이 있든 없든, 공포 정치를 철회할 어떠한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반대로 억압체제는 계속 유지되었고, 종종 강도가 배가되기도 했다. 주코프가 인민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한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스탈린의 총살 집행관들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1930년대의 군부 숙청 재판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을 없애버렸다. 희생자들 중에는 1938년에 재판에 회부되어서 총살된 투하쳅스키 원수와 다른 몇몇 고위 장교들의 부인들, 스페인 내전에서 활약한 유명한 전투기 조종사들인 파벨 리차고프와 야콥 스무시케비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모스크바를 살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조차, 내부의 유혈 사태를 중지시킬 수 없었다."(233-4)


8장 파괴 공작원, 곡예사, 스파이─끊임없는 계략


"1941년 10월 초, 내무인민위원회는 독일군이 곧 모스크바를 점령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최후의 저항수단은 지하조직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서 이전이 불가능한 공장과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예이틴곤의 메모에 적힌 다른 특수 공작원들의 조직 이름은 '어부들', '노인들', '충신들', '무법자들' 그리고 '소가족' 등이었다. 개별 첩보원들의 신상은 모두 코드명으로 기재되었고 각자가 맡은 구체적인 특수 임무도 표시되었다. 예를 들면, '무법자들' 조직의 지휘관 '마르코프'는 전에 강도였다. '무법자들'의 임무는 〈독일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행하는 것〉이었다. '소가족'의 조직원 '그립 바이스'는 〈엔지니어, 스포츠맨 그리고 귀한 집안 출신〉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 직원과의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8년 동안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용당하는 선고를 받았지만, '그립 바이스' 자신은 〈아주 충직한 첩보원〉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었다."(237-43)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정확한 보고서 때문에 스탈린을 격노하게 만든 이래로, 소련군 첩보부에 있는 그의 상관들은 조르게가 독일의 스파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바로 그 때, 조르게는 소련 정부가 원하는 내용을 보고했다. 9월 중순, 주일 독일 대사 오트와 다른 독일 외교관들은 일본이 독일의 참전 요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소련을 공격하는 대신에 일본 정부는 동남 아시아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야망을 달성하는 데에 미국을 최대의 장애물로 보고 있었다." "그 결과, 스탈린은 소련 극동 지역의 대부분의 병력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서 이동시키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다. 10월로 들어서자, 그들 스스로 시베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극동 지역의 병사들이 소련의 심장부로 이동했다." "거의 대부분이 방한용품을 제대로 갖춘 시베리아 부대의 지원병이 도착하자, 모스크바 방위군의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263-4)


9장 하느님, 오 하느님─혁명 기념일 : 전쟁의 전환점


"1941년 8월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한 독일 병사는 붉은 군대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사용되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인해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 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자 〈기관총 사수의 환상적 표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회상했다. 〈적이 600미터 전방까지 다가오면 우리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면 파도처럼 밀려오던 맨 앞쪽의 적군들은 거의 쓰러지고, 살아남은 몇 명만이 마치 아무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계속 앞으로 걸었다. 그런 모습은 기분 나쁠 정도로 기이했으며, 믿을 수 없었고, 비인간적이었다. 우리 독일 병사들 같았으면 결코 그렇게 혼자 걸어서 계속 전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된 사격으로 독일군의 기관총은 과열되었고, 소련군 측에서는 끊임없이 병사들을 내보냈다. 소련 병사들은 3일 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동안 소련 진영에서는 사상자를 위한 들것 운반병을 단 한명도 보내지 않았다."(275)


"구데리안은 한때 모스크바 돌파라는 독일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지만, 어느새 그의 탱크부대가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10월 3일, 구데리안 탱크부대가 오렐을 제압하고 난 직후, 그들은 소련의 T-34 전차와 맞붙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바로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탱크의 우수한 성능을 즐길 수 있었다. T-34를 만난 직후부터 상황은 역전되었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다른 중요한 변수는 날씨였다. 10월의 진흙탕은 그 자체가 막강한 적이었다. 독일군 중앙집단군 사령관 육군 원수 페도르 폰 보크는 10월 21일자 야전 일기에 〈러시아놈들보다 습기와 진흙탕이 우리를 더 괴롭히다니!〉라고 썼다." "11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서리가 진흙탕 길을 얼어붙게 만들어서 구데리안 부대가 진군하기에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얻은 안도감은 하강하는 기온이 부대에 미칠 영향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상쇄되었다."(279-80)


"추위에 언 것은 독일군만이 아니었다. 탱크를 비롯한 모든 차량에 들어있던 윤활유까지 얼어붙었다. 모스크바 진입로에 주둔하던 독일군 부대에는 부동액은 물론, 꼼짝하지 않고 멈춘 차량을 끌 수 있는 체인조차도 보급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독일군 전투기가 로프를 던져주어서 그것으로 차량을 견인했다.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독일 전쟁 계획 수립자들로 하여금 겨울 장비를 공급할 생각조차 못하게 한 조기 승리론의 지나친 낙관주의적 기대는 점점 심각해지는 보급 수송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시베리아 부대는 모스크바 북서쪽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재탈환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났다." "그 전투에 참전한 예델만은  전쟁의 기록을 정확히 하고자 애썼다. 〈사람들이 '조국을 위하여!', '스탈린을 위하여!'라고 소리쳤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 누구도 그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전쟁 뒤에는 수많은 신화만 남았습니다. 진실은 조각조각 발견될 뿐이지요.〉"(290-3)


10장 감상에 빠지지 말라─1941년 11월, 생사의 결전


"스탈린이 주코프에게 12월 6일 최초의 반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하는 동안, 히틀러는 독일군이 한계에 이르렀고 지칠 대로 지쳤다는 장군들의 간청에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히틀러는 겨울 동안 모스크바 점령과 다른 주요 목표를 위한 군사작전을 잠시 멈추라고 지시했다. 12월 8일에 내린 지령 제39호의 내용은 이러했다. 〈동쪽에서 놀랄 만큼 빨리 찾아온 혹독한 겨울 날씨와 이에 따른 군수물자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모든 주요 공격작전을 중단하고 방어태세로 돌입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실책, 특히 겨울 전투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결과로 일어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표면상으로는 히틀러가 독일군이 방어태세로 전환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전투 현장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열악했다. 그는 여전히 장군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모스크바 전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상황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군사적 판단을 맹신함으로써 스탈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298-9)


"히틀러는 12월 8일 마지못해서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 동안 방어선을 구축하고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모스크바 근방에 포진한 부대 지휘관들의 조언을 계속 묵살했다. 독일군이 이듬해 봄에 다시 모스크바 장악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전력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처럼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인명을 걱정하는 것은 나약함을 드러낸다고 보는 사람이었다. 스탈린이 희생시킬 수 있는 병사들이 히틀러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육군 총사령관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구데리안에게 제한적인 후퇴를 허락했고, 구데리안을 재빨리 이행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러한 퇴각이 예외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12월 16일 밤에 구데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은 다소 불안정했지만 히틀러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구데리안은 현재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며 더 이상의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306-8)


"1942년 3월 6일의 일기에서 괴벨스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이래 모스크바 근교 전투를 포함한 동부전선 전체에서 발생한 병력 손실을 계산해보았다. 전사자들은 약 20만 명에 달했고, 사상자들과 실종자들까지 포함한 숫자는 거의 1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는 겨울 날씨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특별히 지적했다. 〈2월 20일까지 11만 2,627명의 동사자와 동상 환자가 보고되었다. 그중 1만 4,357명이 3도 동상이었고, 6만 2,000명이 2도 동상이었다. ······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혹한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 그는 그러한 사태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을 다시 한번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래도 최종 집계한 피해자 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늘 그렇듯이 괴벨스의 결론이 의미하는 것은, 나치 지도부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만큼의 위엄과 금욕적 인내를 발휘하지 못한 병사들 때문에 그런 희생자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315-6)


11장 최악의 시나리오─전후의 세계 질서 구상


"1941년 7월, 처칠 정부의 재촉에 따라서 주영 소련 대사 마이스키는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의 지도자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장군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비록 영국이 폴란드의 동맹국으로 참전하긴 했지만, 이제는 소련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 일이 처칠의 주요 관심사였다." "7월 30일에 체결된 소련과 폴란드의 조약은 소련 영토 내에서의 폴란드 군부대 결성과 소련에 감금된 폴란드인들의 사면 조항을 포함했고, 소련과 폴란드 사이의 외교관계를 복원시켰다. 그러나 1939년의 독소 조약을 무효로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영토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영국 하원에서 외무장관 이든은 1939년의 영토 변경은 승인하지 않는다는 영국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영제국이 국경 문제와 관련해서 어떠한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치에하노프스키가 표현한 대로, 그로써 폴란드인들은 〈영국의 새로운 회유정책의 개막과 함께 첫 먹잇감〉이 되었다."(330-2)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즉시 이든에게 두 가지 조약 초안을 내놓았다. 하나는 영국과 소련 사이의 전시 군사 동맹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래 유럽의 국경선 획정(劃定) 같은 영토 문제를 포함한 전후 체제 구상에 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곧장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달복달 화를 냈다. 그는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얻어낼 수 있는 데까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언제 물러나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자신의 공격적인 전략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느끼면 바로 한 발짝 양보했다." "이든은 가까스로 스탈린이 요구한 약속을 모두 회피할 수 있었지만, 그 첫 번째 방문이 앞으로 계속될 사건들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든은 알고 있었다. 이든은 처칠에게 보낸 전부에 스탈린은 영토 야욕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우리는 이 문제에 계속 시달릴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라고 썼다."(333-9)


"처칠의 냉정한 계산에 따른 접근이 전쟁 후반 스탈린의 야욕을 꺾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면, 루스벨트의 해결 방식은 순진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진심으로, 비밀 협약을 맺거나 나중에 처리하고 싶어했던 영토 문제에 대해서 서면으로 약속하는 것을 피하기를 원했다. 특히 그는 영토 문제에 대한 입장 덕분에 전후의 폴란드 고위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폴란드계 미국인 유권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다른 신호를 보냈으며, 스탈린의 의도를 호의적으로 해석했다. 그 모든 것들이 소련 문제와 관련한 영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을 조성했다." "결국 1945년 얄타 회담에서 동유럽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었고, 스탈린이 바랐던 대로 국경선이 재획정되었다." "비록 서로 다른 전략을 구사했지만, 처칠과 루스벨트 모두 결국 스탈린에게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만 심어준 셈이 되고 말았다."(342-5)


12장 참혹한 승리─상처뿐인 영광


"1942년 1월 11일, 스탈린은 칼리닌 전선의 지휘관에게 부근의 르제프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을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하달했다. 르제프는 인구 5만 4,000명의 도시로, 1941년 10월 14일 이래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북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르제프는 소련과 독일 군대 모두에게 모스크바로 향하는 핵심 발판기지로 간주되었다." "모스크바 전투의 연장전이나 다름없었던 르제프 전투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독일군을 몰아내라는 스탈린의 반복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일련의 작전은 거듭 실패했다. 당시 통계가 과장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소련 측의 사상자 수는 충격적일 정도로 많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소련군 참전용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르제프 전투를 〈르제프 고기 분쇄기〉라고 표현한다. 독일군이 결전을 벌이지 않고 후퇴하기로 결정해서 마침내 1943년 3월에 소련군이 르제프에 입성하기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359)


"훗날 주코프와 그의 옹호론자들은 소련군의 그 희생 덕분에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육군 원수의 제6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묶어두었다고 주장했다. 우라누스 작전을 수행하던 붉은 군대는 11월에 파울루스 부대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해서 독일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주코프가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르제프에서의 실패를 우라누스 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의 하나로 정당화하는 것은 〈잘 봐줘야 솔직하지 못한 변명 아니면 뻔한 거짓말〉이라고 군역사학자 데이비드 M. 글랜츠는 지적했다. 글랜츠는 그의 저서 『주코프의 대패』에서, 마르스 작전이라는 이름의 북부 공격은 스탈린의 최고 군사사령관으로서 그가 초래한 최악의 패배라고 주장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1943년 1월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그토록 집착했던 르제프는 그해 3월까지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었던 것이다."(363-4)


"소련은 전쟁 기간 중 계속된 스탈린의 숙청정책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반역, 대열 이탈, 그외의 다른 범죄에 대한 혐의를 받은 소련 병사들은 임의로 처형되었다." "그 결과 전대미문의 수많은 탈주자와 망명자가 생겼다. 훗날 러시아 해방운동을 조직한 블라소프 장군만이 독일군 편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었다. 전쟁 시작과 함께 〈히비스들〉이 있었다. 히비스(Hiwis)란 독일어 힐프스빌리게(Hilfswillige)의 약칭으로, 자발적으로 독일군에 협력한 러시아인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대부분의 히비스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절박하게 구하던 소련군 전쟁포로들이었고, 그들은 독일군에 협력함으로써 생존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를 기대했다. 많은 변절자들은 자신이 정말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스스로 초래한 정책의 실패를 히틀러의 공포 정치에 의해서 만회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점령정책으로 현지 주민들에게 불러일으킨 공포심이 스탈린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된 셈이었다."(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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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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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918~1941


"적백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립된 군사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가 발전시킨 연속적인 작전에 관한 전략적 이론일 것이다. 이 이론의 토대는 1920년 폴란드를 상대했던 소련의 군사적 실패와 1918년 프랑스를 상대했던 독일군의 공격 실패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은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의 회복도 빠르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6년까지 기술적 진보가 가속화되자, 보다 큰 규모인 종심 작전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종심 작전의 핵심은 최신식 무기를 사용하고, 적의 방어선을 최대한 종심에서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적이 적시에 새로운 방어선을 재구축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28-9)


"1930년 중반의 소련은 기계화 부대의 장비 생산, 계획, 야전 배치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붉은 군대가 독일에 비해 기계화 전쟁의 이론적 개념과 실질적 경험 모두에서 상당히 앞섰다는 사실일 것이다." "1939년에 이르자, 그동안 소련군이 누려 왔던 장점들은 사라졌고, 붉은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변화를 유발한 여러 가지 원인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스탈린이 소련군 지도부에 가한 대숙청이었다." "군 숙청에서 특이했던 것은 과거 스탈린의 공포 정치 시대에 언제나 행해졌던 공개 인민재판도 없이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37년 6월 12일, 보로실로프는 국방인민위원이자 2개 군관구 지휘관인 투하쳅스키와 그의 동료 장교들에 대해 거두절미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4년간, 독일의 침공이 임박할 때까지 소련 장교들은 걸핏하면 사라져 버렸다. 대략 75,000~80,000명에 이르는 장교들 가운데 적어도 30,000명이 투옥되거나 체포되었다."(32-4)


"제1차 핀란드 전쟁(1939~1940)으로 인해 소련은 국제 연맹에서 축출되었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더욱 고립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관계에 핀란드 전쟁이 끼친 영향은 양측 모두에서 심대했다. 실수투성이의 과감하지 못한 소련군의 모습을 보고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침공을 통해서 핀란드를 도와주려던 영국과 프랑스의 때늦은 행동은 히틀러가 1940년 4월에 노르웨이를 침공하는 데 일조한 셈이 되었다. 이것은 소련의 입장에서 불편할 정도로 지척인 곳에 독일군이 배치되었음을 의미했다." "1940년 7월 하순에 소련이 루마니아로부터 오늘날 몰도바인 베사라비아와 북(北)부코비나 지방을 강점하면서 (독일 정부의 불편한 감정 역시) 더욱 심해졌다. 소련이 취한 이 마지막 행동은 루마니아의 독일에 대한 석유 공급에 위협적으로 비치게 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불안한 평화는 급속히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49-50)


"1941년 4월까지 소련과 독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고, 소련 정보 부서에서는 독일의 공격 준비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몇 달 사이에 독일의 공격 징후를 보여주는 증거가 증가하였음에도, 스탈린과 소련 외교관들은 최고의 평화 시기를 구가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평화적인 정치 행보에도 불구하고, 1941년 4월에 스탈린은 〈특별한 전쟁 위협에 대한〉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이 특별한 대비 태세는 전쟁이 임박해서야 발동할 계획이었다. 1941년 봄이 분위기에서 이 대비 태세는 외교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면서도, 부분적인 동원령이 내려졌음을 의미한다. 스탈린의 심중에 동시에 존재했던, 즉 1941년까지 유지되었던 평화에 대한 갈망과 전쟁 발발 시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신중한 방어 조치를 취하고 싶은 욕구 사이의 괴리가 혼란을 초래했고, 1941년 붉은 군대가 겪을 파멸적인 패배의 길을 마련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53-4)


"1941년에 스탈린이 걱정하던 상황 중 하나는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격보다 독일 측 영토로 밀려 들어간 돌출부에 대한 점령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적백 내전 당시 매우 효과를 보았던 유동적인 방어를 포기하고, 국경 전면을 따라 경직되고 연속적인 방어를 계획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1939년에 점령한 지역에 20개의 요새 구역을 설치하기 위해 구(舊) 폴란드-소련 국경의 전쟁 전 방어 계획 중 일부를 포기했고, 일부 지역에서 지뢰, 가시철조망 및 야포를 제거했다. 이곳들은 특별 군관구로 명명되었다. 1941년 봄의 때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새로운 방어선은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도 완성되지 못했다. 전방의 소총병 전력은 전선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했다. 독일 측을 자극하는 어떠한 행위도 피하기 위해 일선 국경은 내무 인민 위원회 보안 병력이 매우 낮은 밀도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 일선 방어선은 6월 22일에 병력을 증강하기도 전에 휩쓸려 버렸다."(62)


"어떻게 1941년 독일군의 공격이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복잡한 의문이 남는다. 돌이켜 보면,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충분히 많았다.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일견 파멸적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보편적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했던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어쨌든 스탈린이 히틀러를 오판한 최초의 유럽 지도자는 아니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서부에서 영국을 패배시키기 전에는 동부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국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자신만의 논리는 어쩌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한 것이었다."(72-3)


독소 전쟁 제1기 1941.6~1942.11


"1941년 6월 22일, 독일 공군은 해뜨기 전에 폭격기 500대, 급강하 폭격기 270대, 전투기 480대를 동원해 전방 지역의 소련 비행장 66곳을 공격했다. 붉은 군대 공군은 개전 첫날 오전에만 1,20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그 후 수일간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으며, 소련군의 병력 및 철도 이동은 끊임없이 독일 공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붉은 군대의 조직과 지휘 체계 모두 순식간에 붕괴돼 버렸다. 전쟁 첫날, 서부 전선군 부사령관인 볼딘 중장이 수많은 독일 전투기들을 뚫고 바아위스토크 외곽에 위치한 제10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사령관 골루베프 중장은 두절된 유선 전화와 전파 방해로 마비된 무전망으로 반격 명령을 내리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6월 23일, 골루베프 중장이 전쟁 이전에 수립된 작전 계획을 따라 얼마 남지 않은 예하 부대들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제10군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헛된 시도 끝에 완전히 전멸했다."(79-81)


"공황 상태에 빠진 서부 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은 6월 26일에 모스크바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독일 제3기갑집단의) 1,000대 가량의 전차가 민스크를 북서쪽에서부터 포위하고 있다······. 적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제20기계화군단과 제4공수군단이 슬루츠크에서 시도한 최후의 반격도 실패로 돌아갔다. 6월 30일, 제2기갑집단과 제3기갑집단은 민스크 서부에서 소련 제10군, 제3군, 제13군 주력을 가두는 포위망을 완성했다. 이로써 서부 전선군은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으며, 이어 이루어진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의 처형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민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417,000명의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독일군은 대부분의 경우 포위망을 빈틈없이 구축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소련군이 중장비를 포기하고 독일군 포위망의 허술한 부분을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83-4)


"전쟁 초기에 소련에는 강력한 중앙 통제 조직이 없었다. 스탈린은 충격에 빠져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일 전황 보고 자리에도 불참했다. 침공 당일인 6월 22일 오후 늦게야 수상 겸 외무 인민 위원 몰로토프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독일의 침공을 발표했으나, 그 또한 전면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7월 3일이 돼서야 스탈린은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고, 국민들에게 게릴라 저항과 침략자들에게 유용한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철수시키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그의 연설에서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닌 러시아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이것은 전쟁 기간 내내 계속됐다." "게다가 전쟁 초반의 패배로 사단, 군단, 야전군의 평균 전력이 크게 감소해 더 이상 복잡한 지휘 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지휘·통제 능력의 부족과 전차와 대전차포 같은 특수한 장비의 부족은 붉은 군대의 조직 체계를 극히 단순화하도록 만들었다."(95-7)


"전쟁이 시작되자 전쟁 인민 위원회는 수개월 만에 집단, 혹은 〈제파(梯波)〉 단위로 새로운 군을 편성하는 데 돌입했다." "1941년 12월 1일에 소련의 동원 체제는 동부에서 서부로 배치한 97개 사단들 외에도 194개 사단과 84개 독립 여단을 신규 편성할 수 있었다. 신규 편성된 사단 중 10개 사단은 〈인민 지원 사단〉 또는 도시 노동자로 편성한 사단으로, 대개의 경우 군인으로서 필요한 체력과 군사 훈련이 부족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독일은 전쟁 발발 전 소련군의 전력을 약 300개 사단으로 추산했으나, 12월에 이르러 소련군의 현역 사단은 그 두 배에 달했다. 초기 전투에서 소련은 100개 이상의 사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41년 가을과 겨울까지도 소련군이 형편없는 전투 능력을 보인 것은 그들이 너무 황급히 편성됐고, 지휘관과 부대 모두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원 사단들이 이렇게 싸운 결과 독일측은 적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101-4)


"1941년 7월 말, 독일군은 그들이 감행한 작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거둔 눈부신 승리 덕분에 빈약한 보급 지원 능력을 초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7월 30일에 독일 육군 총사령부는 중부 집단군에게 휴식과 보충을 위해 사실상 진격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옐냐에 있는 데스나 강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고전하고 있던 제2기갑집단은 가장 가까운 철도역으로부터 72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빈약한 도로망은 차량의 기동에 장애를 초래했으며, 결국 도보로 행군해 온 후속 보병들만으로 병력이 크게 줄어든 전차 부대의 진격을 지원하는 실정이었다. 보병들은 군화가 부족했고, 참모장교들은 겨울 피복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8월 2일, 독일 3개 집단군은 6주 간의 전투에서 179,500명의 인명 손실을 냈으나, 보충된 인원은 47,000명에 불과했다. 독일 국방군에게 남아돌았던 것은 다음 작전의 목표뿐이었다."(108-9)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은 북쪽으로는 칼리닌, 남쪽으로는 칼루가를 탈환하고, 일부는 이미 포위된 일련의 독일군 방어 거점들을 공격했다." "이때 히틀러는 그 유명한 현 위치 사수 명령을 내렸다. 1942년 겨울에 이것이 성공하자, 히틀러는 전쟁 기간 내내 무조건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남발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몰랐던 것은 스탈린이 지나치게 무리한 목표를 세우지 않고 1941~1942년 중부 집단군에만 전력을 집중했다면 중부 집단군을 격파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1942년 1월, 스탈린은 지나치게 야심적이었으며 낙관적이었다. 11월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12월의 공세로 분위기가 반전되자 스탈린은 크게 고무되어, 반격 목표를 중부 집단군과 북부 집단군의 상당수를 포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소련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주코프의 생각이 옳았다. 소련군은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야심찬 포위 작전을 감당할 병력과 능력이 없었다."(129-31)


"800킬로미터에 걸친 전선 전체에서 전투가 격화되면서, 전투는 개별 부대의 영웅적 활약과 혼란스러운 기동 전투, 그리고 양측에 단순한 소모전을 강요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소련군은 보통 농촌 지역을 장악했고, 독일군은 주요 거점 도시들과 마을, 교통선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1942년 4월 모스크바 반격 작전이 끝날 때까지도 전쟁 결과를 낙관하면서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잘못된 결론을 얻었으며,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련군이 능력 밖의 목표를 노렸기 때문에 붕괴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홀름, 데먄스크, 뱌지마 남쪽에 포위된 독일군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중 보급 능력은 히틀러가 공군의 보급 능력을 과신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잘못된 생각은 1년 뒤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133-6)


"독일군은 (소련의 겨울과 모스크바의 반격에 희생양이 되기 전에) 병력과 장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었다. 바로 군대의 사기였다. 전쟁 첫해에 살아남은 고참병들은 자신들이 낯선 환경에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처절한 사투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인간적인 적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탈영이나 항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동기가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라는 확신을 얻으려 했다.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전쟁을 강조하는 나치의 선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초급 장교와 사병들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익숙해지면서 더욱더 슬라브계 〈열등 인종Untermenschen〉들에게 잔학 행위를 일삼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독소 전쟁을 통해 소련이 이데올로기보다 애국심을 강조하게 된 반면, 독일군은 소련식의 정치 및 사상 교육을 강화하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145)


"1942년 4월 5일자 총통 지령 41호에서 히틀러는 육군의 작전 계획, 즉 〈청색 작전Operation Blau〉에 자신의 계획을 일부 첨가했다. 1942년 공세의 주목표는 캅카스 지역이고, 두 번째 목표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독일군의 목표를 나누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스탈린을 돕는 꼴이 되었다." "독일 야전 지휘관들은 철도망이 복구될 때까지 연료와 수송 수단의 부족에 시달렸다. 8월에 A집단군이 마이코프의 소규모 유전 지대를 점령했을 때, 이미 이곳은 소련군이 체계적으로 모든 유정과 정유 시설을 파괴하고 철수한 뒤였다. 독일군이 철도 종점으로부터 더 멀리 진격할수록 독일군의 전력은 점점 더 소모되어 갔고, 동시에 광대한 영역에 넓게 퍼지게 되었다. 1941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은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고, 진격을 거듭할수록 목표는 불확실해졌다. 돈 강 동쪽에는 특정한 전략적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자연히 스탈린그라드에 주목하게 되었다."(151, 162-3)


"스탈린그라드의 소련 방어군은 놀라운 인내력을 보이며, 막대한 사상자와 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싸웠다. 전투 초기에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공군과 화력의 우세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추이코프는 최대한 독일군에 근접해서, 독일 지휘관들이 아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해 항공 지원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몇 주에 걸쳐 붉은 군대의 소규모 보병과 전투 공병들이 독일군에 근접해 싸웠는데, 보통 도로 하나, 심지어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대치했다. 수색과 매복을 거듭하는 동안 전투는 미터 단위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런 전술에도 불구하고 방어군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히틀러는 11월 2일 완강히 저항하는 방어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시가전에 투입되지 않은 사단의 전투 공병 대대들을 스탈린그라드로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양측은 몇 블록 안 되는 폐허 더미를 둘러싸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었으나, 이때 소련군은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165-6)


"수많은 재앙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가 붕괴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소련은 국민과 그 군대의 희생에 힘입어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도 희생이 뒤를 이었다. 1942년 말이 되자 인명손실은 무려 11,000,000명에 달했다. 의도된 것이건 우연이건 간에 이런 희생은 성과가 있었다. 1942년 말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싸우는 법을 체득했고 종종 훌륭하게 싸웠다. 이들의 희생은 스탈린이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자들이 사용할 무기를 풍부하게 생산할 수 있도록 산업 동원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독일 육군의 예리한 검인 〈전격전〉은 이미 1941년 모스크바의 문턱에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942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그 명성에 상처를 입었고, 1943년 쿠르스크에서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살아남은 각급 제대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종종 그들의 〈독일 스승들〉만큼 뛰어난 살인 기술을 터득했다. 이렇게 독일은 점차 소련이 결정하는 조건에서 싸워야 했다."(167-8)


독소 전쟁 제2기 1942.11~1943.12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 내내 바실렙스키는 N. I. 보코프가 이끄는 소규모의 참모장교단을 유지하면서, 동부 전선 중앙부와 상단에서 동시에 시행되는 야심찬 동계 반격을 구상했다. 9월 13일에 보코프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최돌출부 양 측면에 있는 약체 루마니아군 전선을 공격해 궁극적으로 독일군을 차단한다는 요지의 브리핑을 스탈린에게 올렸다." "주요 공세 2개의 첫 번째는 작전명 〈우란Uran(천왕성)〉으로, 스탈린그라드 일대의 추축군 격멸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후 토성 작전으로 연결하여, 소련 남부 전선 전체의 독일 A 집단군과 B 집단군을 포함한 추축군 모두를 사정권에 두었다. 동시에 서부 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이 주코프의 지도하에 공세에 나서, 르제프 돌출부에 있는 독일 중부 집단군을 섬멸하고 남부 집단군으로부터 병력을 끌어와 독일군의 중부 전선과 남부 전선에 공히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는 계획이었다."(172)


"북쪽에서도 스타브카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위협적인 르제프 돌출부 일대의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또 다른 대규모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주코프가 입안·감독하고 작전명 〈마르스Mars(화성)〉라고 명명된 이 공세는 M. A. 푸르카예프 대장의 칼리닌 전선군과 코네프 상장의 서부 전선군이 르제프 돌출부의 양 측면을 강타하기로 되어 있었다. 목표는 독일 제9군을 돌출부에서 섬멸하고 뒤이어 스몰렌스크로 쇄도하는 것이었다." "훗날 이 공세는 남부 전선의 작전에 도움을 줄 목적의 양동 공격이었다는 왜곡된 설명이 붙여졌지만, 규모나 작전 범위, 전투의 치열함으로 볼 때 이 공세는 독일 중부 집단군을 패퇴시키기 위한 중요한 시도였고, 작전 초기에는 천왕성 작전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화성 공세에 나선 소련군을 완벽하게 물리쳤으며, 중부 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야심찬 대규모 공세를 꺾어 놓았고, 주코프의 계획을 무산시켰다."(180-2)


# 스타브카Stavka : 소련 국방 인민 위원회(GKO) 산하에 조직된, 독소 전쟁 당시 최고 사령부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무적이라는 명성 이상을 상실했다. 히틀러가 현지 사수를 명령한 데다 악천후 속에서 두터운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독일군은 극소수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수천 명의 부상병만이 돌아오는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6군의 전멸 양상은 이전에 있었던 소련군의 포위 소멸 때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소련군의 경우는 충분한 기간 요원과 지휘관을 탈출시켜 새롭게 부대를 재건하고 다시 전투에 참가했다. 독일 제6군은 완전히 파멸되었으며, 147,000명의 전사자와 91,000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500,000명에 달했다. 상당수의 병력이 스탈린그라드에 2개월 이상 매달려 있으면서, 소련군의 차후 동계 공세는 산술적인 영향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1942년 겨울도 1941년과 같은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즉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여 아슬아슬한 외줄에 매달려 전략적인 대규모 공세를 펼침으로써 전선이 과도하게 확장된 것이다."(186-7)


"아마도 1942~1943년에 서방 연합군이 소련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분야는 항공전이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에 가해지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942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400대의 독일 공군기가 러시아 전선에서 지중해로 이동했다. 실제로 지중해 전역에서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까지의 공군기 손실은 2,422대에 달했고, 이것은 독일 공군 전체 전력의 40.5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때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헛된 보급 임무 외에도 수송기 조종사들은 2회에 걸쳐 북아프리카로 병력과 장비를 보급하고 증강하는 과중한 임무에 시달렸다." "6개월간에 걸쳐 진행된 3회의 주요 항공 보급 작전에서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즉 항공기의 손실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이 귀중한 조종사 양성 교관들까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항공 수송력이 없어지면서 훗날 공수 작전과 항공 보급 작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197)


"1942~1943년의 기간은 상당한 양의 〈무기 대여법〉에 따라 원조 물자가 소련에 도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소련의 공식적인 기록을 보면 랜드리스 물자의 총량이 소련 생산의 4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 랜드리스 덕분에 소련의 생산 능력은 급속히 재건되었다. 서방 연합군은 천연자원 외에도 34,000,000벌의 군복과 14,500,000켤레의 군화, 4,200,000톤의 식품을 제공했으며, 11,800량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도 제공했다." "특히 원조된 트럭들은 소련군의 가장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다. 즉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을 돌파하고 나서 후방으로 깊이 진격하는 데 있어 재보급과 기동 집단의 전력 유지에 필수적인 문제점을 해결했다. 트럭이 없었다면 1943~1945년에 이루어진 소련군의 공세는 얕은 돌파만 달성하고 곧 공세의 탄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이 곧 방어선을 재건해서, 소련군은 또 다른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198)


"1943년 봄, 돈바스와 하리코프 일대에서 거둔 만슈타인의 빛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심한 소모전을 거친 독일군은 암울한 미래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유연 방어 전략을 거부하고, 1916년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이 시행했던 완강하면서도 인명 피해가 많은 고착 방어를 고집했다. 하지만 이 방어 개념은 충분한 보병 전력과 함께 대량의 가시철조망, 대전차 지뢰와 방어 구역을 요새화하는 다량의 물자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안고 있었다. 두 번째로, 히틀러는 방어에 임하는 부대에 소련군의 주 진격 축선 양측으로 이동하여 방어 전력을 증강할 것을 요구했다. 이 개념은 독일 방어 병력이 소련군의 집결을 정확히 파악하고 향후의 주 공격로를 예측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히틀러의 간섭은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에 큰 획을 그었던─즉 지휘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달성할메 있어 방법적 선택의 독립성 보장─상징에 크나큰 오점이 되었다."(200-1)


"(쿠르스크 돌출부를 향한) 독일군의 공격 시간은 최종적으로 1943년 7월 5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 탈주병들과 정찰 보고서를 통해 독일군이 몇 시 몇 분에 공격을 할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프로호롭카 점령을 놓고 격전이 벌어지던 7월 12일 무렵,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제2 SS 기갑 군단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시칠리아에 상륙한 서방 연합군을 맞으러 보낼 것을 명령했다. 폰 만슈타인은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승복했다. 그로써 비록 현실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독일군이 재개하려고 했던 모든 공세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다." "이로써 소련군의 공병과 짜임새 있는 대전차 방어 준비, 우수한 정보력, 새 전차군의 기동성 있는 운용으로, 전격전의 주역인 독일군은 최악의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 결과는 그때까지 독일군이 시도했던 전략적 공세 가운데 적의 방어선을 뚫고 전략적 종심 돌파를 달성하기도 전에 실패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217-9)


"독일군은 지금껏 그래 왔던 대로 소련군의 공세를 꺾을 계획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더 이상 과거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소련군이 아닌 독일군이 지쳐 있었고, 전선이 지나치게 늘어나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저지하고 제1 전차군 소속 3개 여단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지만, 다음 날 제5 근위 전차군이 증원 병력을 파견했고,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독일군은 후퇴 작전을 위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소련의 2개 전차군은 8월 28일 코네프의 보병들이 하리코프 시가지를 점령할 때까지 엄호를 위해 그 일대를 장악했다. 보고두호프 일대의 전차전을 포함한 루먄체프 공세를 소련군은 〈벨고로드-하리코프 작전〉이라 부르고, 독일군은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이라 부른다. 이 작전은 쿠르스크 전투의 종말, 즉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주도한 마지막 전투였음을 뜻한다. 동시에 소련군의 하계-추계 전역의 시작이기도 했다."(222-3)


독소 전쟁 제3기 1944.1~1945.5


"1943년 12월 초 스타브카는 세 번째 겨울의 작전 계획을 발표했는데, 북에서는 레닌그라드로의 접근로, 중앙에서는 벨로루시, 남쪽에서는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남쪽에서는 제1, 제2, 제3,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관여하였다. 공세는 1943년 12월 말에서 1944년 4월까지 번갈아 가며 이어졌는데, 초기에는 차례로, 나중에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수행되었다. 스타브카는 계획된 공세의 목표를 한동안 은폐한 채 중요한 포병과 기계화 부대들을 한 전선군에서 다른 전선군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사이 파르티잔들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쪽이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원하는 쪽이건 독일군의 후방 지역을 점점 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5회의 초기 공세로 2월 말에 드네프르 강의 독일 방어진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강을 이용한 방어진이 없어지자 만슈타인은 이제 광활한 우크라이나 평지에서 완패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241-6)


"남부에서는 크림 반도의 탈환을 위한 또 다른 공세가 벌어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크림 반도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이유는 크림 반도가 루마니아 유전을 겨냥한 폭격기의 기지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의 저항은 거칠었지만, 2년 전 소련군의 저항만큼은 아니었다. 5월 6일에서 10일 사이 여전히 소련군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히틀러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지만, 해상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원래 150,000명에 달하던 제17군 병력 가운데 40,000명 이하가 크림 반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4년 5월에 소련군은 남부의 거의 모든 영토를 수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온통 남부 지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련의 6개 전차군이 모두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다음 하계 공세가 남부에서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탓에 다음 여름 소련군이 중부 집단군을 노린 웅대한 공세를 펼쳤을 때 독일은 경악하게 되었다."(248-9)


"스탈린이 1812년의 영웅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 명명한 공세는, 1944년 여름에 계획된 5개의 공세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 시각에 대해서는 독일과 소련의 기록이 다소 상이한데, 이것은 소련군의 공격이 시차를 두고 일어난 탓도 있다. 1944년 6월 19~20일 밤, 잔존한 파르티잔들이 중부 집단군 후방의 철도 교차점, 교량, 기타 중요한 수송 거점에 공격을 가했다. 독일군은 많은 경우 소련 파르티잔의 공격을 꺾어 놓기는 했지만 수천 개소에 달하는 수송 거점들이 망가졌고, 그 결과 추후 퇴각과 보급뿐 아니라 부대 간 이동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6월 21~22일 밤이 되자 독일군 후방 지역에 폭격이 가해졌고, 소련군 수색 대대들은 드문드문 있는 독일군 전방 거점들 사이로 이동하며 방어진을 1겹씩 벗겨 내고 있었다. 주공은 사실 23일에 실시되었는데, 수색 부대들의 성공으로 많은 경우 긴 시간의 준비 포격 없이 공세가 개시되었다."(264)


"바그라티온 작전, 그리고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과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의 결과로 소련군은 네만 강을 건너 동프로이센 경계까지 진격했고, 중부와 북부 폴란드에서는 비스와 강과 나레프 강을 건넜다. 바르샤바와 리투아니아에서의 독일군의 반격을 예외로 하자면, 소련군의 진격을 멈춘 것은 독일군 때문이 아니라 병참선의 지나친 신장(伸張) 때문이었다. 이 2개월간 독일이 겪은 인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중부 집단군은 거의 450,000명을 잃었고, 양 측면에서의 보충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888,000명에서 445,000명으로 줄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도 100,000명 정도가 사라졌다. 3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사단들의 인적 손실도 컸던 데다가 소련 기계화 부대의 진격이 30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 독일 집단군 가운데 한때 가장 강했던 중부 집단군이 와해되었다. 북(北)우크라이나 집단군도 심한 손실을 입었고, 이제 붉은 군대는 독일 본국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275)


"전반적으로 1944년 여름과 가을은 독일군에게는 영락없는 재앙의 연속이었다. 하계 공세만으로도 추축군은 465,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6월 1일에서 11월 30일 사이, 모든 전선에서의 독일군 손실은 1,457,000명이었는데, 이 중 동부 전선에서의 손실이 903,000명이었다. 기갑 부대는 제쳐 놓고라도 차량도 그리 많지 않은 독일군은 이 기간 동안 254,000필의 말과 다른 견인용 동물을 잃었다. 1944년 말에는 헝가리군만이 독일군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북쪽의 동프로이센에서 폴란드의 비스와 강, 헝가리의 도나우 강까지 소련군이 발을 들여놓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의 서부 국경에 가까이 오면서 독일군은 포위되고 고립되어 갔다." "이제 어느 군대가 1945년에 어디까지 진주하느냐가 전후 유럽에서의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명백한 사실이 베를린을 향한 차기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동시에 소련은 서방 연합국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296-7)


"2개월도 지나지 않아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의 독일군 방어진이 붕괴되었고, 소련군은 서쪽으로 700킬로미터나 진격하여 베를린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밀고 갔다. 이 과정에서 독일 A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2월과 3월, 독일군이 베를린 방위를 위해 오데르 전선을 강화하자 소련군은 다시 측면에 신경을 써서 바익셀 집단군을 연신 두들겼고, 남부 집단군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를 제거했다(이 전략 예비대는 사실 독일 전체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였다). 4월 중순, 소련군은 슈테틴에서 체코 국경의 괴를리츠에 이르는 오데르-나이세 선에 도달하였고, 빈 북쪽의 체코 국경에서 그라츠 외곽까지 뻗어갔다. 1944년에 그랬듯이, 소련군이 지나간 곳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해 줄 공산 정권의 핵심들이 들어왔다." "이제 소련군 6,461,000명이 가장 중요한 축에 집중될 수 있었다. 전체 병력 중 3분의 1 이상의 다음 목표는 베를린이 될 것이었다."(324)


"베를린 작전 기간 동안 소련군은 한때 무적이었던 독일 국방군의 잔존 병력을 박살냈으며, 48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대가도 컸다. 소련군과 폴란드군에서 361,367명의 전 사상자가 발생했다. 베를린 작전이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베를린에 있는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고 베를린을 점령한다는 목표는 17일 만에 완수했다. 소련은 그 이후로 이 작전을 거의 공식적으로,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여러 개의 전선군이 공세를 취한 전형적인 사례로 여겨 왔다. 300킬로미터 구간에서 3개의 전선군이 6개의 돌파구에서 거의 동시에 공세를 취하여 독일 예비대를 묶고, 독일군의 지휘와 통제를 혼란시키고, 경우에 따라 작전적, 전술적 기습까지 이루었다. 베를린 작전은 다른 측면에서도 교훈적이었다." "다소 도시화된 베를린과 그 주위의 숲이 많은 지형에서의 전투는 소련 입안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공격 측의 손실이 매우 컸다. 이 경험과 교훈은 전후 소련군의 개혁에 기초가 되었다."(343-4)


"1945년 봄에 실시된 작전들의 군사적 결과는 명확했다. 한때 자부심 강하고, 일견 불패일 것 같던 독일 육군의 잔존 부대는 동쪽과 서쪽에서 연합군이 공격을 하자 격파되었다. 나치 독일은 전례 없는 폭력과 파괴를 동원한 전쟁의 토대 위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완벽히 무너졌다. 베를린 작전의 어마어마한 범위와 크기는 이전의 전쟁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이 작전은 섬뜩할 정도의 소련군 인명 손실을 가져왔고, 마찬가지로 독일의 수도도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여러 독일 참전자들이 느꼈듯이 동부 전선의 전쟁이 완전히 전율로 가득한 것이었다면, 서부 전선의 전쟁은 품위 있는 여흥이었다." "그렇지만 서방은 전쟁의 승리에 뒤따른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소련의 권리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몇 년 안 가서 전쟁의 참혹함은 냉전의 험악함으로 바뀌었고, 서방이 갖는 소련에 대한 의심이 소련 인민의 유례없는 고통과 승리를 가려 버렸다."(347-8)


"소련의 대단히 숙련된 교전 기술에 대한 공로는 스탈린뿐만 아니라 그의 정부 전체에게 되돌아갔다. 공산 정권은 독일의 침공에 대항하며 승리를 일궈 낸 정권으로서 유례없는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정권에 냉담했던 국민들은 침략자에 대한 투쟁에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연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순수성보다는 애국심을 강조하여, 자신들과 전체 국가의 생존을 동일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병들이 공산당이나 콤소몰에 가입하는 것이 매우 쉬워졌고,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군과 전체 국가에 널리 퍼졌다. 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거의 모든 소련 국민이 독일군을 몰아낸 일과 1941~1942년의 참혹함을 다시 겪지 말자는 결의로 하나가 되었다. 전후 소련 경제는 이미 전쟁을 겪으면서 충격을 받았었는데, 다시금 가장 소중한 자원들을 국가 방위를 위해 할당해야 했다."(363-4)


"보다 일반적으로, 독일 침공은 침략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정당화되어 온 걱정을 강화시킨 셈이 되었다. 대조국 전쟁은 그 결과 주어진 황폐, 고통과 함께 역대 소련 지도자들의 전략적 사고에 덧칠을 했다. 전후 소련 정부는 침공으로부터 소련을 보호하기 위해, 충격 완화의 역할을 하는 위성 국가들을 다루는 정교한 체계를 구축했다. 바르샤바 조약 가입국이 소련의 방위와 경제에 도움을 주었을런지는 몰라도, 반항적인 인민들은 계속해서 소련 정권의 치안에 대한 관념을 위협하였다. 쿠바나 베트남 같은 전초 국가가 서방과의 냉전에 쓸 만한 희생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소련 경제에 부담만 가중시켰다." "돌이켜 보자면, 승리의 과실을 지키고 미래에 침공받지 않으려는 결심은 소련 정부에 위험한 짐이 되었다. 이 결단은 막대한 군사 지출과 잘못된 방향의 대외 정책과 함께 소련 경제를 파멸로 내몬 장본인이었고, 소련이라는 국가도 결국 그렇게 되었다."(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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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지음, 진중근 옮김 / 일조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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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1940년의 기적


"1940년 5월, '너무나 어이없는, 현대 전쟁사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4년 동안이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 4일 만에 스당 돌파에 성공하면서, 총 6주 만에 전역이 종결된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독일의 승리는 결코 예견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우연히 맞물리면서 발생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치 선전가들은 독일의 승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정립된 개념에 따라 실행·달성된 것이라는 일종의 전설을 창조해냈고, 여기에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전격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와 동시에 이 새로운 전략의 창시자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라고 선전했고, 그는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국 측은 너무나 처절하게 패배한 지휘관들의 그럴싸한 구실 찾기를 위해 이 전설을 자진해서 받아들였다."(30-2)


제1장 '전격전'의 기원과 개념


"제1차 세계대전은 무기체계의 발전에 따라 화력 요인이 기동 요인을 압도했고 대부대급 작전들은 종종 시작하기도 전에 우박처럼 퍼붓는 포탄과 기관총탄의 세례 속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급기야 전쟁 양상은 소모적인 장기간의 진지전으로 치달았고, 장군들은 작전술 차원의 지휘기법이 퇴색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제국의 군사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통해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전투력이 월등히 우세한 적을 상대로 해서는 결코 '속전속결'을 단행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40년 스당에서의 승리 이후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비로소 '전격전'에 있는 '승리의 열쇠', 즉 신속한 결전을 통해 경제적으로─그리고 전략적으로도─ 훨씬 우위에 있는 적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작전술 차원의 '기적의 무기'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산업화 사회에서 이러한 망상은 훗날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고, 독일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43-5)


제2장 '전격전' 개념이 없는 '전격전'과 서부전역의 배경


"독일 군부는 독일제국의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다시 한번 양면전쟁을 치를 가능성을 고심한 결과, '신속한 전쟁'을 통한 '즉각적인 결전'을 시도하고자 했다. 폴란드 전역은 개전 4일 만에 사실상 승패가 결정되었고 18일 후에는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역은 복잡한 기동으로 적을 포위해야 하는 몰트케와 슐리펜의 작전계획과는 달리, 오히려 지형 조건을 이용한 자연적인 포위작전으로 전개되었다." "기갑부대, 즉 전차의 운용 면에서도 폴란드 전역은 서부전역과 근본적으로 판이했다. 서부전역이 '지헬슈니트Sichelschnitt(낫질) 계획'(1940년 5월)에 의거해 기갑부대를 주축으로 실시한 대규모 작전이었던 반면, 폴란드 전역의 경우 기갑부대는 작전술 수준의 독립 제대조차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기갑부대는 통상 사단급 수준(전술적 수준)으로 편성·운용되었다. 폴란드 전역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 개념을 적용한 일종의 시험장이었을 뿐이다."(58-9)


"1940년이 서부전역이 애초부터 전격전으로 계획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적 자원의 동원을 살펴보면 더 명확해진다. 그 단적인 예가 Uk 계층(노동자 계층)의 존재와 이들의 징집면제였다. 서부전역이 발발하기 전에 육군은 이 민간인들을 무기한으로 방위산업체에 동원했으나 동부전역 전에는 기한을 정확히 3개월, 1941년 9월까지로 한정해서 동원했다. 3개월 이내에 전격전으로 덩치만 크고 내실이 없는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서부전역을 계획할 때 독일군 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장기전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당시 산업화된 전쟁 시대에 군사적 대결도 결국에는 후방에서의 방위산업 능력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이러한 정책을 입안한 것이다." "히틀러와 그의 군사 고문들은 기갑부대에 의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작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서방국가들과의 장기간의 투쟁을 위해 경제적·군사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72-3)


"적의 규모를 부풀리고 아군 전투력을 축소하는 것은 전쟁을 선전할 때의 기본원칙이다. 특히 아군이 승리했을 때, 이 원칙은 승리를 더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게 하지만, 패배했을 때는 패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서부전역에 관한 많은 문헌들은 독일의 전력이 연합국의 그것보다 월등히 우세했다는 비상식적인 내용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괴벨스에 의해 완벽히 조율되던 독일의 선전기관들은 서방국가들의 언론에 나타나는 공포스런 독일군의 이미지를 한층 더 강조할뿐더러, 더 나아가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써야만 했을까?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독일 측 선전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영국의 계속되는 전쟁 수행에 제동을 걸고 미국을 위협해 참전을 막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방군이 '천하무적'이라는 선전을 통해, 강철로 된 파도처럼 쇄도해 어떤 적이라도 무너뜨린다는 독일 '전격전 부대'라는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83)


제3장 지헬슈니트 계획을 둘러싼 갈등


"A집단군 참모장 만슈타인 중장은 10월 21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최초 공격명령을 수령했다. 수령 직후 그는 훗날 '지헬슈니트 계획'이라고 불린, 획기적인 사상이 내재된 대안을 발전시켰다." "만슈타인이 기획한 방책이 기발했던 이유는, 단 하나의 조치로 두 가지 문제─우익을 주공으로 삼으면 적 방어부대의 주력과 부딪히기 때문에 기껏해야 국지적인 승리만 얻을 수 있고, 차후에 적에게 작전술 규모의 치명적인 역습을 당할 우려가 있다─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북부에 위치한 B집단군이 아닌 중부의 A집단군을 주공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적이 예상치 못한 공격, 즉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아르덴 산림지대로 강력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슈타인은 A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승인하에 총 일곱 차례 건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육군 총사령부는 만슈타인의 주장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무시해버렸다."(125-7)


"만슈타인과 별개로 히틀러도 스당에서 결정적인 돌파를 감행하려는 계획을 구상했다. 육군 총사령부는 히틀러의 구상을 '어설픈 생각'이라 치부하며 말렸지만 그는 자신의 방책을 고집했다." "히틀러의 비서실장 슈문트 대령은 베를린의 수상관저에서 신임 제7기갑사단장 롬멜을 포함한 6명의 신임 장관급 지휘관들과의 조찬식 날짜를 2월 17일로 정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이 자리에는 요들과 슈문트만이 동석했다. 다른 장군들이 발언했다면 불안함이 섞인 독백을 내뱉은 후 이내 말을 끊어버리고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히틀러였지만 이번만은 태도가 달랐다. 그는 만슈타인의 설명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 조용히 경청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매혹적인 논리에 감동받은 나머지, 그에게 느꼈던 혐오감도 잊어버렸다. 히틀러는 감격해 하며 만슈타인의 최종 결론인 '강력한 전차[부대]'의 투입에 강한 공감을 표시했다."(128-9)


"지헬슈니트 계획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거론되는 인물은 3명(할더, 히틀러 그리고 만슈타인)이다. 그러나 기갑부대 전문가로서 이 구상을 현실화하는 방법을 만슈타인에게 조언한 사람이 구데리안 장군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게다가 구데리안이 작전 지역의 지형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이라 할 만했다. 구데리안은 1914년 아르덴 지역 공격작전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1918년 당시 독일 영토였던 스당에서 4주간의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따라서 이 계획은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이라는 쌍두마차가 창안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슈타인이 A집단군 참모장 지위를 잃은 후에도 구데리안은 그와 공동으로 창안한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열을 쏟았다.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구데리안은 상부의 지시와 명령을 여러 번 무시했으며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그러므로 만슈타인이 지향한 작전이 현실화된 것은 구데리안의 덕택이었다."(126-30)


"히틀러는 전술적이고 단순히 귀납적으로 생각해 스당을 떠올렸지만, 만슈타인은 연역적으로, 한 차원 높은 전략적 심사숙고를 거쳐 스당을 선택했다. 여기에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스 강 극복 이후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였다. 스당 돌파 이후 기갑사단들이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이 의도했던 대로 급속도로 대서양 해안으로 돌진하자 이 독재자는 공황에 빠져, 성공을 눈앞에 둔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다." "스당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군사 분야에 문외한인 히틀러가 전술적·작전술적 그리고 전략적 개념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마치 아마추어 체스 선수가 우연히 천재적인 행마에 한 번 성공한 후 자신을 챔피언이라고 굳게 믿는 것처럼, 히틀러는 자신을 챔피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한판승을 거둔 자신의 총참모부에 어줍잖게 참견해 됭케르크 바로 앞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키고 영국군을 살려줌으로써 외통수를 놓치고 말았다."(142-3)


제4장 1940년의 아르덴 공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장군들은 군사 사상 면에서 날이 갈수록 독단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총사령관 가믈랭 장군조차도 마스 강을 '유럽에서 가장 탁월한 대전차 장애물'이라 평가했고, 지리학적으로 이중이 장애물인 아르덴-마스 강은 우회는 가능해도 돌파는 불가능한 천연적인 전략적 방어체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군은 적이 스당으로 침략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2등급 부대들만으로 방어를 준비하는 등 상대적으로 이곳의 벙커나 방어시설에 소홀했다. 또한 프랑스군 지도부는 만일 독일이 아르덴을 통해 대공세를 취할 경우 이곳으로 병력을 이동 및 증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과오는, 제1차 세계대전 식의 시간 개념으로 독일군의 '전격전 공세' 템포에 대응할 수 있다는 프랑스 장군들의 경험적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독일군이 마스 강을 도하하기까지 약 2주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확신했다."(229-30)


"지헬슈니트 계획의 혁명적 사상은 혁명적 방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그 중 핵심은 역사상 최초로 기갑부대를 작전술적으로 독립 운용하는 것이다." "당시 국방군에서 작전술은 야전군(예외적으로 군단급) 단위부터 적용되었다. 구데리안은 작전술 차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 편성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서부전역에 대비해 마침내 클라이스트Kleist 기갑군이 창설되었다. 그 예하에는 5개의 기갑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3개의 차량화보병사단이 편성되었다. 이른바 '고속기동부대', 즉 기갑사단과 차량화보병사단이 도보로 행군하는 보병부대들을 훨씬 앞서 완전히 독립적인 공격작전을 수행한다는 편성은 세계 전쟁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로써 A집단군은 크게 2개 제대로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작전술 차원의 돌파를 실시하는 고속 기동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그를 후속에서 잔적殘敵을 소탕하거나 점령지역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보병 중심의 야전군들이었다."(173-5)


"공세 이튿날인 5월 12일,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우측에서 일시적인 교통대란이 발생했다. 원래 우측방에서 전진하기로 한 인접 보병사단들의 차량들이 기갑사단에 할당된 비교적 널찍한 도로에 계속해서 끼어들어 예상치 못한 혼란이 일어났다. 경쟁심을 느낀 보병부대가 기갑사단에 '승리의 영광'을 뺏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A집단군의 작전 착오로 말미암아 전 유럽에서 전무후무한 대규모 정체현상이 야기되었다. 북부 기동로에서는 5월 13일 마스 강에서부터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독일 국경을 통과하여 라인 강변까지 총 250km에 이르는 교통마비 현상이 발생했다." "(끝없는 혼란이 이어지자) 기갑병과 장군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주적이 벨기에, 프랑스군이 아니라 기갑부대를 적대시하는 보병 야전군과 A집단군의 지휘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들의 오판은 아르덴을 거의 '독일 기갑부대의 무덤'으로 만들 뻔했다. 이 사건으로 A집단군 지휘부는 예하부대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193-5)


"제1기갑사단이 단 3일 만에 아르덴을 통과해서 마스 강까지 진격한다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한 비밀은 바로 '중단 없는 연속적인 공격' 방식에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독일군의 진격이 정형화된 고정불변의 교리나 방법, 시스템 등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킬만스에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를 '즉흥곡 연주'에 비유했다. 다시 말해 일단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을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에 대한 개념도, 문서상의 특별한 방책도 없었다. 아직 발전되지 못한 '전격전 전략'이 작전술-전술로 표출된 것이 아니라, 난해한 과제를 기발하고 비범하게 스스로 해결하는 행동이 독일군의 몸에 배어 있었다는 점이 성공의 열쇠였다. 난해한 과제란 바로 '3일 안에 마스 강변까지'였다. 이 전역에서 전개된 모든 비범한 전투방식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려는 행위의 결과물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사건들을 고차원적으로 해석했고 나아가 일종의 시스템으로 개념화했다. 이것이 바로 '전격전'이다."(224)


제5장 결전 :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5월 13일 스당에서 시행된 독일 공군의 집중적인 폭격작전은 서부전역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인 동시에 이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술적 기습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때에 제1차 세계대전 중 최초로 전차가 출현하고 독가스를 사용하던 때에 버금가는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클라이스트 장군이 마스 강 도하작전 명령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독일 공군의 가용한 모든 전력이 이곳에 투입되었다. 비록 전 전력이 투입되지는 못했으나 당시 스당 지역만큼 공중전력이 집중된 경우도 없었다." "특히 16시 직전까지 시행된 집중 폭격은 프랑스군에게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프랑스군 방어체계상의 종심지역은 그 후 물론 폭격 강도가 줄어들었지만, 1시간 반 동안이나 독일 공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그 결과 프랑스 제55보병사단의 포병을 장시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고, 구데리안이 예상한 대로 계속되는 '롤러식 폭격'은 심리적 효과 면에서 적의 전투의지를 상실시켰다."(260-3)


# 롤러식 폭격작전 : 임무수행을 완료한 일정 규모의 전력을 복귀시키고 후속부대가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복귀한 부대는 재무장시켜 다시 전선에 투입하는 방식


"라퐁텐 장군의 사단 지휘소 벙커는 스당에서 8km 남쪽에 위치한 퐁다고의 삼림지대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월 13일, 이곳에서 서부전역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발생한 집단공황이 프랑스군을 급격한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 시각, 이 지역 어디에도 전차는 물론 단 한 명의 독일군 병사도 없었다. 이 혼란의 진원지는 라 르나르디에르 고지였다. 이곳에서 최초로 '유령전차'가 출현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이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다." "인파를 저지하려던 후방지역의 장교들마저도 탈영 대열에 동참했고 일부 병사들은 이곳에서 100km 떨어진 랭스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헌병들도 집단 탈영병들에 대해 손쓸 방도가 없었다. 단 몇 시간 내에 제55보병사단은 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히 몇몇 제대를 제외하고는 최하급 부대들까지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들은 독일군 전차의 제물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쇠약해진 정신력 때문에 이러한 파멸을 겪은 것이다."(284-6)


"5월 14일 전투기와 대공포 부대들은 연합국 공군의 집중폭격으로부터 마스 강의 교량들을 보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중화기와 전차를 마스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킬 유일한 통로는 제1기갑사단이 설치한 골리에의 교량이었다." "구데리안은 처음부터 스당 일대의 취약한 교량을 전체 작전의 성패가 걸린 아킬레스건으로 보았다. 그는 〈집중하라! 분산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부르짖었으며 스당 지역, 특히 골리에 교량 일대에 방공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전례 없이 조밀한 화망을 구성했다." "결론적으로 5월 14일 스당 일대에서 벌어진 공중전은 독일 국방군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첫째, (골리에 교량을 폭파하기 위해 출격한) 연합군 폭격기 부대의 '중추부'가 와해되어 이때부터 연합군은 집중적인 공군력 투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구데리안 장군은 이날 그의 군단 주력을 마스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작전술 차원의 돌파작전이 성공한 것이다."(288-93)


"5월 14일,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장면이 셰메리에서 펼쳐졌다. 구데리안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기갑부대를 서쪽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이것은 그가 상급자의 명령과 히틀러의 지시를 어긴 행동일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모든 전쟁술의 원칙'에 위배된 행동이었다. 그의 결정으로, 그를 따르는 다른 기갑사단들도 공세에 동참하게 되는 일종의 눈사태 효과가 일어났다. 기갑사단들은 완전히 고립된 채 대서양 해안을 향해 작전술적 쐐기를 박는 공격을 실시했다. 보병사단의 측방 방호는 전혀 없었다. 이 공세는, 훗날 윈스턴 처칠의 표현처럼, 가느다란 낫 형태를 띠었다." "역사상 최초로 기갑부대가 주축이 된 작전술 차원의 독립 작전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 전투는 새로운 군사사적 전환점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별안간 현대적인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이 등장함에 따라 1918년 이래 주축을 이뤄온 '진지전' 양상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러한 기동전 개념은 '전격전'이라는 암시적인 슬로건 뒤에 숨게 되었다."(314-5)


제6장 마스 강 전선의 붕괴


"독일군 기갑부대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5월 14일 오후였다. 바야흐로 이 시점이 서부전역의 가장 결정적인 국면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같은 절호의 기회가 프랑스군이 계속해서 역습 시기를 미루는 바람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제1,2기갑사단을 교두보 일대 확보에 투입할 수 없었고, 제10기갑사단의 주력은 후방에 위치한 터라 그 지역에 전력을 투입하지 못해 두 사단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만일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적시에 돌진했다면 결과는 뻔했다." "그러나 공격명령은 하달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역습의 전권을 위임받은 제21군단장 플라비니 장군이 전선으로 가는 내내 두려움에 휩싸여 전장을 이탈하는 수많은 병사들을 목격했는데, 이들은 수백, 수천 대의 독일군 전차들이 공격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끊임없는 악재와 기갑부대의 공격대기지점 점령이 지연되는 데 초조해하던 플라비니는 결국 역습을 취소하고 말았다."(323-4)


"문제의 근원은 더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훗날 많은 프랑스인들은 1940년 패배의 원인을 '저지'라는 단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개념 이면에 내재된 잘못된 사상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제2군사령관 욍치제르 장군의 명령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지휘방식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는 독일군의 돌파 시도에 다음과 같이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①돌파를 정면에서 저지한다. ②포병화력으로 적을 격멸한다. ③작전지역 내의 적을 섬멸하고 그 지역을 탈환한다. 이 방책은 일자형 전선을 다시 회복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에 대응하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독일군은 이와 유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 정면을 차단하기보다는 기갑부대로 적의 측방을 역습했다. 뒤집어서 만일 플라비니가 강력한 역습을 시행했다면,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프랑스군의 기갑부대가 북쪽으로 수 km 정도만 기동했다면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측방을 기습적으로 찌르는 대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325)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프랑스가 구데리안이 스톤 일대에서 실시한 '공세적 방어'를 작전술 차원의 주공으로 오판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역습을 실시하는 대신, 실제로 돌파가 일어난 교두보의 서쪽 지역을 간과하고 예상되는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작전술 수준의 예비대로 편성된 정예사단을 방어작전에 투입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손쉽게 서쪽 방면을 돌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또다시 독일군의 기만작전에 속았다. 지헬슈니트 작전이 시작될 때 독일군은 주공을 우익에 둔 것처럼 적을 속이고 중앙에서 돌파를 감행했다. 반면 스당에서 구데리안은 주공을 중앙에 둔 것처럼 가장하고 우측(서쪽)으로 돌진했다. 스당에서 돌파를 성공시킨 뒤 부대를 서쪽으로 진격시키되 동시에 그 역량 중 일부를 남쪽으로 투입할 것을 주장한 만슈타인의 구상이 또 한번 적중했다. 프랑스 지휘부는 물론, 대부분의 독일군 장군들도 만슈타인의 기가 막힌 행마行馬를 이해하지 못하긴 매한가지였다."(340)


"전투가 개시되자, 프랑스군 전차부대는 줄곧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경직된 교리에 따라 행동했다. 프랑스군 기갑부대들의 작전은 너무나 정적이고 선형적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전차들은 기동력을 발휘해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면서 전투를 수행했다. 또한 독일군의 통합된 무전통신 체계의 우수성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순식간에 주공의 위치를 변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전차들은 극소수만이 무전기를 장착하고 있어서, 장교들이 자기 전차에서 내려 다른 전차로 찾아가 명령을 전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바로 이때 프랑스군 전차들은 독일군의 기습을 받았다. 또 하나 구별되는 무기체계의 특징은 전차포탑의 형태였다. 프랑스군 전차의 포탑에는 단 한 사람만 탑승할 수 있어서 모든 전차장은 전술적인 판단과 결심, 전투지휘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탄약수와 포수의 임무도 병행해야 했다. 반면 포탑에 2~3명이 탑승한 독일군 전차의 지휘자들은 전투지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380)


제7장 대서양 해안을 향한 진격과 측방 노출 문제


"구데리안은 자신의 기갑부대들이 마스 강을 넘자마자 즉각 주도권을 쥐고 적 종심 깊이 돌진했다. 이것은 선형 전투지휘에서 비선형 전투지휘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그러나 대서양 해안으로 진격하는 동안 동시에 2개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전장에서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장군단 내부에서 발생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선형 전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격 발생과 노출된 측방에 대한 공포는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철저히 고립된 기갑사단이 적 후방으로 진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특히 지나치게 빠른 공격 템포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측방 방호를 위해 보병사단들이 기갑부대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전차의 진격 속도를 늦출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 진보주의자, 특히 그 선봉에 선 구데리안 같은 이들은 그런 속도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397-8)


"5월 17일 아침, 클라이스트 장군은 상급부대의 지시에 따라 마지못해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이 지휘권 분쟁은 독일군 최고지휘부에까지 큰 소동을 일으켰다. 이날 오후에 5월 15일자로 클라이스트 기갑군을 배속받은 제12군사령관 리스트 상급대장이 구데리안을 찾아왔다. 그는 상황을 진정시키고 룬트슈테트를 대신해서 구데리안에게 원래의 지휘권을 돌려주었다. 동시에 그는 A집단군의 동의하에 회유적인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는 구데리안에게 '전투 전위부대' 규모의 전진은 허락했지만, 군단 지휘소가 전방으로 진출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구데리안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각 전차부대로 공격을 재개했지만, 무전기로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고 후방의 지휘소에서 야전 전화로 예하부대들과 연락을 취했다. 지휘소는 전방에 있는 제대와 수 km 길의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어서 구데리안은 무전기를 쓸 필요가 없었고 상급 지휘관들의 감청을 피할 수 있었다."(401-2)


"5월 17일과 18일 '친히' 명령을 내려 기갑부대를 정지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총통 히틀러였다." "독일 군사사軍事史상 군사적 문외한이 군사작전에 개입한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1940년 5월 17일의 사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독일군 총참모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엘리트 집단이었고 이들은 냉철한 전문가적 판단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지금 비이성적인 외부인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전쟁과 군사적인 면에서 문외한이라는 것보다, 그의 심리 상태가 종종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항상 총통은 어떤 가능성에 대한 극단적인 과대평가와 과장된 위기 사이를 오갔다. 지헬슈니트 작전 중에는 시간이 갈수록 성공 가능성이 커져갔는데도 그의 신경과민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작전의 성공을 확신한 유일한 인물인 히틀러는 스당 돌파의 성공을 보고받은 순간에도 사실을 믿지 못하고 '기적'이라며 말을 더듬었다."(404-5)


"히틀러는 '마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1914년 슐리펜 계획의 실패가 재연되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노심초사했다. 반대로 할더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연합군이 솜 강과 엔 강을 따라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조치를 저지하려면 A집단군의 정예부대들 중 일부를 대서양 해안 방면이 아닌 콩피엔느를 거쳐 남서방향으로 선회시켜야 했다. 할더는 대서양 해안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적들을 포위·섬멸하는 데 몇몇 기갑사단과 제4군으로 증강된 B집단군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할더는 경쟁자 만슈타인보다 더 만슈타인다워졌다. 만슈타인은 2개의 개별적인 대규모 작전('황색계획'과 '적색계획')으로 연합군을 격멸하려고 했으나, 할더는 과거의 슐리펜처럼 단숨에 모든 것을 얻고자 했다. 히틀러는 이 아슬아슬한 계획에 기겁을 하고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로써 '남측방 방호의 문제는 공세적으로 해결한다'는 만슈타인의 구상은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406-7)


"몽코르네에서의 정지명령이 발령된 후 클라이스트 기갑군뿐만 아니라 제4군 예하의 호트 기갑군단도 멈춰서야 했다. 이 명령은 돌파구의 북측방에 연한 구데리안을 정지시킬 수는 있었으나 롬멜을 정지시키지는 못했다." "롬멜은 5월 16일 18:00시경 클레르파이에서 프랑스 국경을 넘어섰다. 곧 롬멜은 전방에 펼쳐진 연장된 마지노선과 함께 구축된 철조망과 지뢰지대 그리고 장갑화된 반구형의 포진지, 콘크리트 벙커 등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장군들 같았으면 망설이다가 더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다음날 공격을 개시했을 것이다. 게다가 중포병과 추가 보병부대, 공군 슈투카의 지원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기습의 효과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롬멜은 상급 지휘관들의 지시를 거역하고 주저 없이 기습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아군이 공격할 준비가 완벽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야간에 전차부대를 집중 투입해서 강력하게 구축된 적 방어진지를 돌파한 것이다."(417-9)


"할더는 수차례 건의한 끝에 5월 19일, 히틀러에게서 모든 부대들이 대서양 해안까지 자유롭게 기동해도 좋다는 승인을 얻어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서 수년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치열한 진지전을 치렀던 격전지들을 가로지르며 재개된 지헬슈니트 작전의 결정적인 공세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독일군 기갑부대는 연합군 전선에 쐐기를 형성함으로써 정예사단들이 집중되어 있던 연합군 북익 전체를 대서양 해안을 따라 완전히 포위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포위망은 종심이 약 200km, 정면이 약 140km에 이르는 경이적인 규모였고 이곳에 포위된 부대는 벨기에군뿐만 아니라 프랑스 제1집단군 예하 제1영국원정군, 프랑스 제1,7군, 제9군의 패잔병 일부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수였다. 연합군 사단들은 동쪽과 북쪽에 아직도 국지적인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들도 독일군 B집단군에게 집중공격을 당하고 있었으며, 남쪽에서 독일군 제4군이 그들이 후방으로 돌진하고 있었다."(429-31)


"롤멜이 사실상 '아라스의 승리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롬멜은 연합군의 장군들과 달리 관행을 거부하고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선 한가운데서 자신의 사단을 지휘했다. 극도의 위험 속에서도 부하들과 함께한 그의 용기와 냉철함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갑자기 닥친 위험에 번개처럼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응해 위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공명심에 휩싸인 그는 자신의 업적을 한층 더 높게 평가받기 위해 위협의 정도를 과장되게 표현해, '수백 대의 적 전차'가 자신의 부대를 공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보고 때문에 상급자들은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서부전역 이후에 롬멜이 히틀러에게 제출한 이른바 롬멜 보고서는 영국군의 역습 상황을 가리키는 적색 화살표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이렇게 하여 역설적이지만, 5월 21일 실패한 영국군의 역습은 '아라스에서의 정지 명령'을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됭케르크의 전투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451-2)


제8장 됭케르크의 기적


"5월 24일, 독일군은 유일하게 연합군의 지배하에 있던 항구도시 됭케르크의 15km 전방까지 도달해 있었다. 선두부대는 이미 마지막 자연장애물인 아 운하를 넘어섰다. 독일군 기갑부대와 됭케르크 사이에는 이들을 저지할 만한 연합군 부대가 없는 진공 상태였다. 마지막 피난처가 봉쇄되어 약 백만에 가까운 영국군,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포위망에 갇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됭케르크에서 100km나 떨어진 동쪽에서 B집단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후방에서 다가오는 치명적인 위협에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이때 20세기 군사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 중 하나인 '됭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났다. 연합군 병사들도 독일군 전차들이 마법의 손에 붙들린 것처럼 갑자기 정지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지명령은 히틀러에게서 비롯하지 않았다. 그는 장군단 내부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에야 개입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간의 대립 양상이 바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455)


"됭케르크 직전에서의 정지명령은 독일 육군 내부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단 한 차례의 명령으로 이처럼 격렬한 집단 항명이 일어난 경우는 없었다." "훗날 구데리안은 〈최상급 지도부의 간섭이 전체적인 전쟁 결과에 최악의 영향을 미쳤다〉라고 비판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 부대들의 입장에서 이 명령은 정지명령이 아니라 철수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아 운하의 동쪽에 확보한 교두보를 포기하고 이 선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연합군 부대는 아무런 제약 없이 그곳에 진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친위대 부대장이었던 제프 디트리히는 히틀러가 친히 내린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역했는데, 이 일만 보더라도 이 지시가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구데리안조차도 히틀러의 가장 충직한 부대가 반동행위를 취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이 독단적인 행위는 관대하게 처리되었다."(463-6)


"5월 26일 18:57분, 드디어 다이나모Dynamo 작전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철수작전은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고 5월 28일까지 겨우 9,965명만이 승선해 영국으로 수송되었다." "5월 29일에는 47,310명이, 5월 31일에는 그보다 많은 68,014명이 구조되었다. 마침내 '됭케르크의 기적'이 하나둘씩 실현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기상조건도 연합군의 철수작전에 톡톡히 한몫을 했다. 파도가 높고 거칠기로 유명한 도버 해협의 바다가 며칠 동안이나 잠잠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이나모 작전이 시행되던 9일 동안 해수면은 마치 연못처럼 잔잔했다." "연합군의 철수작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그 기간 동안 하늘에 낮고 짙게 드리워져 있던 시커먼 구름이었다. 이 덕분에 독일 공군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연합군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실시된 다이나모 작전에서 영국으로 구조된 연합군 병력은 총 338,682명이었다."(472-3)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됭케르크의 수수께끼'를 언제나 객관적인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독재자의 순수한 주관적인 동인을 배제했기 때문에 진정한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게는 어떠한 전술적, 작전술적, 전략적, 그리고 정치 이데올로기 논리보다도 군사적 최고지도자로서의 개인적인 권위가 훨씬 더 중요했다. 히틀러는 됭케르크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다기보다는 육군 총사령부 장군들의 지휘권 행사를 중단시켰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에게는 분명 자신의 이념, 즉 '총통의 이념'이 가장 중요했다." "서방국가들에 대한 공세는 명백히 '그의 전쟁'이었다. 군사 보좌관들은 하나 같이 서부전역에 승리할 수 없다고 예견했는데 뜻밖에 그가 옳았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그렇게 세계 전쟁사상 가장 스펙터클한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던 순간에 히틀러는 이 전쟁의 위대한 승리자가 자신이 아니라 휘하의 장군들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다."(490)


"5월 24일, 샤를르빌에 위치한 A집단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히틀러는 자신이 신임하는 룬트슈테트가 권한을 박탈당해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았다. 육군 총사령부는 자신의 의지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 같은 조치를 결정하고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예하 장군들 중 감히 자신을 무시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에게 도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육군 총사령부의 일부 고위급 장교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감정이 폭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지휘권을 바로 세우고, 누가 절대적인 군사 지도자인가를 과시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당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이미 정지한 기갑부대를 얼마나 오랫동안 대기시킬 것인지에 관한 결정권을 (차하급 지휘관인) 룬트슈테트에게 위임함으로써 브라우히치와 할더를 엑스트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491)


제9장 서부전역의 종결


"남서쪽을 향한 새로운 공세가 시작된 시점에 A집단군 예하부대가 재편성되었다. 5월 31일부로 구데리안 군단은 기갑군으로 승격되었고 구데리안은 대서양 해안에서 스당의 남쪽으로 공세를 전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A집단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구데리안은 스당과 스위스 사이에 배치된 프랑스 제2집단을 포위하기 위해 측방으로 기동한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스위스 국경을 목표로 공격했다. 이로써 그는 1939년 가을, 만슈타인이 착안한 작전술 차원의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1939년) 만슈타인은 A집단군 참모장으로서 제2단계에서는 프랑스군의 후방, 즉 〈마지노선 후방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슐리펜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격렬한 프랑스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6월 9일 A집단군의 전면적인 공세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할더는 그 다음날 자신의 일기에 매우 유쾌한 어조로 이렇게 기록했다. 〈칸나이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군〉."(497)


"그 사이에 C집단군 예하 제7군도 브라이자흐에서 라인 강을 도하해 마지노선 돌파에 성공했다. 이들은 남부 알자스 방면으로 진출하여, 6월 19일에는 구데리안의 기갑군 중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일부와 벨포르에서 연결작전을 성사시켰다. 그리하여 낭시와 벨포르 사이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 이곳에 있는 3개의 프랑스 야전군을 에워쌌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슐리펜 계획의 결정판이었다. 됭케르크에서 실패했던 '칸나이'를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시킨 것이다. 이 '로트링엔'의 포위망에서 독일군은 50만 명의 프랑스군을 포로로 획득했다. 사실 서부전역은 6월 17일에 종결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날 새로 임명된 프랑스 수상 페탱 원수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자 휴전을 제의했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 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콩피에뉴의 숲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히틀러는 1918년 11월 11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곳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498)


제10장 승리와 패배의 원인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승리한 프랑스에게 파로스의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전국 국민 중 프랑스인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실종자와 사망자가 도합 약 15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18~27세 남성 인구 중 27%가 전장에서 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베르됭 콤플렉스'라는 정신적 상흔이 프랑스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육체적·심리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런 상태였다. 이즈음 전쟁피로증과 평화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는 노련하게 평화 선전공세를 펼치며 그 위장막 뒤에서 군사력을 증강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기 위해 수차례 프랑스와 영국 출신의 영향력 있는 평화주의자들을 몇 명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했다." "서유럽 사람들은 독일의 군사력 재건에 대해서도, 주데텐 위기 때에도 그리고 폴란드 침공 시에도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505-6)


"전쟁이 종식된 후 프랑스에서는 패전의 책임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시행되었다. 그들은 소위 좌익이라 불린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몇몇 장군들이 포함된 우익집단들은 평화주의라는 독극물로 사회를 분열시킨 이들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들로 인해 군의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논리였다. 장군들은 특정 시민계층의 타락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실책을 무마할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냈다. 조국 패망의 결정적 원인은 군사적 실책이 아닌 오로지 '사회적 문제'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비시 괴뢰정권 하에서 리옹에서 재판이 열렸을 때, 피고로 지목되어 제1열에 기립한 사람들은 장군들(가믈랭을 제외하고)이 아니라 붕괴한 제3공화국의 정치가와 지식인이었다. 더 기막힌 사실은 조국 패망의 가장 큰 책임자 중 하나인 욍치제르 장군이 국방장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를 비판했지만,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만은 패전의 결정적인 책임이 프랑스군 장군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508)


"마지노선에 대해 모든 역사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그 효과가 극히 미미했던 비경제적 투자였다는 것이다." "마지노선이 원래 순수 방어전략의 일환으로 계획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이를 이용해 국경지대를 강력하게 방비함으로써 수많은 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전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확보했고, 이로써 마지노선의 존재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행하게도 이른바 '마지노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의 르네상스가 태동한 반면,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개활지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마지노선 뒤에 안주하려 했다. '선형 방어' 교리에 집착했던 프랑스군 장군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의 참호전투를 재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지노 사상'은 수동적인 태도, 수세적인 자기 구속, 주도권의 단념을 의미하는 엄청난 재앙이었다."(509-10)


"연합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전투력 및 경제력의 양적 우위를 확신했고, 이 때문에 전쟁을 막대한 물량전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다. 반면 독일군은 진지전의 선형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공격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연합군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회에 의거해 포병과의 협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병진대형으로 전 부대가 동시에, 정확히 규정된 시간과 정확히 지시된 선까지 공세를 실시해야 했다. 이와 정반대로, 독일군 돌파부대 지휘관들은 철저히 독단적으로, 인접 부대와의 연결과 측방 노출을 고려하지 않고 쇄도해 들어갔다." "연합군은 적의 저항이 가장 강력한 지점(강점)에 예비대를 집중한 반면, 독일군은 적의 저항이 가장 취약한 지점에서 예비대를 집중 운용했다. 공격 작전 시 최초 제1제대는 적의 강점을 회피하고, 후속부대가 이곳을 무력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중단 없는 '제파식 공격'의 목표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적의 종심 지역으로 돌진하는 것이었다."(529)


"리들 하트에 따르면, 독일군 돌파부대의 성공의 열쇠는 바로 '간접접근'에 있다. 이들에게는 적 부대의 격멸과 적 부대와의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가급적 교전을 회피하고 종심 깊이 진격해서 적의 병참선과 지휘통제의 중추부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더욱이 이와 같이 전역이 진행되면 적에게 '혼란'이라는 치명적인 심리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실제로 돌파부대가 일단 적의 최전방 부대의 후방으로 돌진하는 데 성공하면, 방어선상의 진지들에 투입되어 있던 연합군 병사들은 매번 혼란에 휩싸였다. 즉 전선의 아주 미세한 지점, 단 한 곳이 돌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체계 전체가 붕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술적인 돌파가 실패한 이유는 기갑부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940년의 성공에는 이러한 역사적 근원이 있었다. 구데리안은 과거의 '돌파부대 전술'의 기본원칙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현대적인 기갑부대와 결합시켰다. 전격전의 핵심요소는 이렇게 창안되었다."(530)


마무리 총평과 에필로그


"결론적으로 1940년의 '전격전'은 히틀러가 탄생시킨 그리고 그가 주창한 '전격전 전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인간은 〈절망의 정점에 이르면 엄청난 위기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으며, 다른 탈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대담한 돌출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마스 강을 건너 대서양 해안을 목표로 기동한다는 만슈타인의 지헬슈니트 계획은 대담한 돌출행동이었다. 연합군 장군들은 이 같은 대담한 행동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작전의 숨가쁜 진행에 연합군 장군들은 적잖이 당황했는데, 우유부단했던 히틀러도 예하 지휘관들이 점차 작전을 독단적으로 진행함에 따라 자신의 손에서 지휘권이 빠져나가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됭케르크를 눈앞에 둔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는데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러므로 '전격전 사상'은 서부전역의 승리의 근원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549-50)


"독일 국방군에게 서부전역은 찬란한 대승리이자 비극이었다. 특히 스당의 신화가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1870년과 1940년, 두 번씩이나 독일군은 큰 승리를 달성했으나, 매번 그 승리에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혹독한 파멸을 맞게 되었다. 프랑스 육군은 베르됭에서의 승리로 진지전을 과대평가하게 된 반면, 독일군은 스당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서부전역이 종결된 후 독일군 장군들은, 특히 이전까지 개혁적 사상에 회의를 품던 이들까지도, '전격전'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는 정반대로 신속한 작전술적인 결전을 시행하여 경제적·전략적으로 우위에 있는 적과도 대적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격전'은 칸나이 사상에서 비롯된 '기계화된' 기동전의 르네상스였다. 하지만 슐리펜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장군들은 누가 결국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자였는지를 간과했던 것 같다."(551)


"독일은 서방국가들과의 전쟁을 사전에 장기전으로 계획했으며 전쟁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시작한 반면, 소련과의 전쟁은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더구나 이러한 확정적인 종료 시점에 의거해 인적·물적 자원을 제한적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모스크바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41년 12월 영하 36도까지 떨어지는 뜻밖의 강추위 속에서 동복을 준비하지 못한 대부분의 독일군 병사들은 하복을 입고 적과 맞서 싸워야 했다. 더욱이 당시 국방군의 지상군, 공군 그리고 해군이 서로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한창 해당 전역의 전투를 치르고 있던 중에도 히틀러와 휘하의 장군들은 소련의 적군赤軍을 마치 '진흙으로 빚어진 거인' 같은 존재로 보고, 최초 돌파 단계에서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독일군이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는, 전략적 차원에서 전격전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선제타격능력이 열세에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552-3)


"결론적으로 1940년의 서부전역은 계획되지는 않았지만 성공한 '전격전'이었으며, 1941년의 동부전역은 반대로 기계획되었지만 실패한 '전격전'이었다. 1942년, 독일군은 새로운 전법으로 다시금 공세에 돌입하여 볼가 강변과 나아가 코카서스 일대까지 진격하여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작전술 측면에서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찰나적 승리였으며, 독일은 전략적 차원에서 조만간 파멸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그 동맹국들의 경제적 우위가 효과를 발휘했다. 이것은 전차의 생산능력에서 잘 드러난다. 독일제국은 다른 무기체계를 제쳐두고 오로지 전차 생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겨우 2만 5천 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 반면 연합국 중 주요 3개국인 미국, 영국, 소련은 도합 20만 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제2차 세계대전도 결국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장에서의 전투력보다 후방의 병참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이다."(554)


"여기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일어난다. '전격전'이라는 현상도 또다른 관점에서 시대착오적이지 않았는가? 산업화 시대에 두 번의 세계대전은 순수 전략적으로, 무엇보다도 방위산업의 생산 능력이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었건만,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너무나 편협하게 군사적인, 특히 작전술적 측면에만 집착했다. 따라서 '전격전'은 혁명과 보수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순수하게 작전술 차원만을 고려한다면 독일군 장군들은 현대적인 방책을 이용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전쟁 양상에 몰두했다. 이미 19세기에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군사적으로 더 우세한 남군이 경제적으로 월등한 북군에게 패망함으로써 군사력이 경제력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말이다. 돈키호테는 시대착오적인 전쟁 양상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요컨대 독일군 기갑부대 작전의 '전격전'은 우월한 산업 잠재력이라는 풍차에 맞선 장창 공격이었을 뿐이다."(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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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 - 헬무트 폰 몰트케부터 아돌프 호이징어까지
게하르트 P. 그로스 지음, 진중근 옮김 / 길찾기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1 도입


2 전술-작전-전략의 정의


"전술은 일반적으로 계획적, 계산적 또는 목표지향적, 단기 및 중기의 행동으로 이해되었던 반면, 전략은 장기적으로 구상된 목표달성 또는 유리한 상황조성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최초에는 오로지 전술만 존재했다. 고대부터 전술은 명확하게 정의된 군사적인 전문용어였다. 전술에는 행군과 진지구축, 군을 집결시키고 병력을 회전장에 배치하는 능력이 포함되었다. 유럽군대의 복잡한 발전과정에서 대대나 연대의 기동과 같은 단순한 전술과 대부대의 전술을 구분하고자 하는 관념들이 근대 초기에 최초로 등장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과정에서 발전한 대규모 육군으로 인해 18세기 말경 유럽의 군사사상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게오르크 하인리히 베렌호르스트, 헨리 로이드, 하인리히 폰 뷜로브, 앙투안 드 조미니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당대의 군사학자들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전쟁수행에 관해 연구하면서 군사학 전체를 포괄하는 전쟁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37)


"클라우제비츠와 조미니의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군사적 사고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전략적 측면에서 처음부터 치명적인 오류를 초래했다. 독일에서는 일종의 순수 군사적 관점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개념이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정치 우위에 바탕을 둔 전략개념만은 배제되었다. 대몰트케가 바로 그 시초였다. 대몰트케는 정치가 전쟁 개시와 종결만 통제하고 그 외의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대몰트케와 그의 후임자들은 전쟁수행을 순수 군사적인, 비정치적인 행위로 이해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야 비로소 독일에서도 '참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개념은 정치 우위의 대전제 아래 정치와 전쟁수행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시켰고 동시에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관점을 결합시켰다. 그 모두를 포괄하지만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있는 개념이 바로 정치적 개념이다."(39)


"독일에서는 대규모 육군의 출현과 함께 이미 18세기 말경부터 작전을 부대의 기동과 동일시했다. 따라서 1789년 프리드리히 마인네르트는 '전쟁에서의 작전은 적을 격파할 목적으로 폭력을 사용 또는 사용하지 않는 전쟁에서의 모든 행위이며 (···) 그 핵심은 바로 기동술'이라고 기술했으며, 게오르크 벤투리니는 작전이 기동술에 속하며 육군이 어떻게 기동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본 연구에서 정의한 가설로서 작전을 정의하면 작전이란 독립적인, 지리적으로 주어진 상황과 적의 움직임을 지향한, 세계대전 시대에서는 통상 육·해·공군의 합동 하에 전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최초에는 전략적 행동으로 개시되어 종국에는 전술적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작전적 사고는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해 단일 전역에서의 대부대의 지휘와 전개에 관련된 시간, 공간과 전투력과 같은 특정한 요인 또는 상수에 대한 고찰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41-4)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첫 번째 주제는 '시간'을 지배하는 '공간'이다. 모든 지리적 공간은 시간뿐만 아니라 형체를 통해 구체화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군사지리적 조건을 작전계획과 실행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장군참모장교들은 공간을 단순히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던 반면, 오늘날에는 인류지리학적 관념에서 종교적, 사상적인 환경을 포함한 인간생활의 총체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작전적 수준의 공간과 전술적 수준의 지형 분석은 모든 군사적 상황평가의 출발점이다. 여러 자연환경과 사회기반시설, 기상학적인 요인들은 전쟁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군사적 결심수립과정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상황평가 시 한 국가의 경제력, 인적자원의 능력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정이 가능한 변수인 군비 문제와 달리 물리적-물질적인 전투공간의 형체는 진지구축이나 요새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이다."(48-9)


"이제는 한 국가의 지리전략 상황이 자연과학적인 공간으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공간은 영원불변한 요인이 아니다. 인간이 건축을 통해, 이익을 위해 변화시킬 수 있고 그 이익은 정치적 평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유럽의 정중앙이라는 공간은 교통의 요지 또는 문화교류 차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군사적인 차원에서는 위협적이며 부정적일 수 있다. 총참모부는 오래 전부터 군사적 관점에서 공간을 평가한 결과, 양면 또는 다면전쟁의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지리적 패권을 추구했는데, 이는 독일이 유럽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현실을 기회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위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군참모장교들은 독일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조성된 전략적 전쟁수행의 기초이자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의 중요한 요인이 되는 내선의 강점을 만들어냈고 이를 정확히 실행에 옮겼다."(49-50)


"그러나 (두 적국이 서로 떨어져 있는) 내선에서의 전쟁수행은 시간적 요인에서 매우 큰 위험부담을 내포하고 있다. 두 적국 중 어느 하나가 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까지 반드시 다른 하나를 속전속결로 격멸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만일 조건을 충족하는데 실패한다면 곧바로 상황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도 있기 대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간과 시간의 밀접한 연관성과 이 둘을 별개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모든 군사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공간과 시간이야말로 전술적, 작전적 또는 전략적 본질을 결정짓는 핵심요소다. 또한 군사적으로 시간 개념은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시간적인 개념상 전쟁이 촉발되기 이전의 과정은 동원기간과 최후 통첩의 순이었으며, 냉전 시대에는 이 과정들이 정치적 반응시간으로 축소되었다. 시간은 그밖에도 심리적, 물리적 전투력과 화기, 차량, 물자들의 사용 가능성을 제한한다."(53)


"전투, 회전 그리고 전쟁에서 수적인 우세는 승리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지휘와 보급의 문제들이 무시되고 있다. 모든 군지휘관들은 결정적인 지점에 국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달성하고자 노력한다. 수적으로 열세한 쪽이 적의 우세를 상쇄시키기 위한 두 가지 방책이 있다. 양호한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의 이점을 활용하거나 국지적인 아군의 수적 우세를 달성하여 적의 일부를 격멸하는 것이다. 이 두 방안은 중장기적으로 전투력의 균형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전투방식 측면에서 수동적인 방어는 주도적인 공격에 비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방책은 바로 월등히 우수한 교육 훈련과 지휘능력을 통해 상대보다 질적 우위를 달성하는 방법이다. 즉 복잡한 작전들을 신속히 공세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질적 증강도 현실(수의 법칙)적인 표준화된 힘을 상쇄시킬 수는 없다."(57-8)


"공간과 시간 요인은 세계대전 시대에 독일 군부의 작전적-전략적 계획수립과 인적, 물적 전쟁준비의 중심에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독일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전투력이라는 요인과 함께 이들은 1950년대 말까지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영역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원칙을 형성했다. 독일이 유럽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독일의 장군참모장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까지 상호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된 변수들을 상수로, 더욱이 특별한 경우에는 결정적 요소로 인식했다. 장군참모장교들은 지리적 조건과 정치로 인해 초래된 이러한 요인들을 변경시킬 수도 없었고 영토 확장으로 현실을 바꾸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안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적국에 비해 열세에 있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인적, 물적으로 고도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로 예견된 양면전쟁에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가둘 수 있는 군사적인 방책을 발전시키는 일뿐이었다."(58)


4 시초 : 계획수립, 기동 그리고 임기응변의 시스템


"몰트케는 체계적인 군사이론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실용주의자이자 이론의 실천가일 뿐이었다." "몰트케는 작전의 개념을 대부분 전장에서 부대의 기동과 연관해 사용했다. 그의 글에서는 작전이 육군의 기동으로 정확히 대체될 수 있었다. 또한 작전계획, 작전선과 작전목표 등의 관련 용어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몰트케는 작전목표를 때때로 전투목표와 동일하게 적 부대, 즉 싸워야 할 대상의 격멸로 인식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략을 정치의 일부로 보았던 반면, 몰트케는 전략을 전쟁 개시단계로부터 종결단계까지 최초부터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행동'으로 인식했다." "몰트케는 전쟁을 정치적인 전쟁개시와 종식단계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순수 군사적인 전쟁단계로 구분했고 작전은 후자에 포함시켰다. 즉 작전이란 통합된 전쟁행위, 전역으로서 총참모장이 계획하고 군사령관들에게 지참으로 하달되는 것을 의미했다. 작전의 성공 여부는 전투의 수단인 전술이 결정했다."(60-2)


"몰트케는 전략을 임기응변의 시스템으로 이해하여 군 지도부에게 최악의 조건하에서도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반응할 것을 요구했다. 즉 작전적 사고 차원에서 일반화된 교리들과 그로부터 도출된 규칙들은 실제 전쟁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군지휘관들은 이론적인 지식과 더불어 전쟁사를 배워서 얻은, 자신의 인생을 통한 군사적 소양과 경험을 갖추어야 하고 이를 '실제에서 자유롭게 응용하고 술(術)적으로 승화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몰트케에게 작전적 지휘는 결국 부분적으로만 습득될 수 있는 일종의 술(術)이었다. 또한 몰트케에게 있어 작전적 수준의 지휘관의 필수조건은 정신적인 유연성, 신속한 상황파악능력 그리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몰트케는 분명히 작전의 범주를 상정하고 있었지만 어떠한 이론적인 작전적 사고모델을 도입하거나 명확한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62-3)


"1857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몰트케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병력의 문제에 직면했다. 프로이센군은 개혁 이후에도 수적으로 적국들 가운데 하나를 겨우 상대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지속적으로 거대화되어가는 육군을 어떻게 기동시키고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몰트케가 찾아낸 해법, 즉 독일군 장교들의 전유물로 이어져 온 '분진합격, 즉 분산해서 기동하고 집중해서 적을 쳐라'라는 슬로건으로 대변할 수 있는 이 전법은 몰트케가 창조해 낸 혁신적인 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당시에 주어진 상황에 부합하는 그러한 전투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 전법을 실행에 옮긴 곳이 바로 쾨니히그래츠와 스당이었다. 몰트케는 육군을 다수의 거대한 야전군으로 분할, 편성하고, 가능한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통로로 이들을 분산, 기동시켜 회전이 벌어질 장소에서 적시에 결전을 위해 집중시키고자 했다."(66-8)


"육군을 다수의 야전군으로 분할, 편성하면서 새로운 부대 지휘 방식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공간적으로 흩어진 채로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야전군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19세기의 통신 환경에서는 단 한 사람의 총사령관이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전진중인 야전군들을 현지에서 직접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트케는 대부대급 지휘관들에게 그들의 임무 달성을 위한 폭넓은 독단 활용을 보장해 주기로 결심했다." "책임은 상급지휘부에서 감수하는 동시에, 하급부대는 상급부대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지휘개념, 즉 지휘의 분권화를 채택했다. 몰트케는 개별적인 책임의식, 즉 책임의 분권화를 증대시켜서 수직적인 지휘구조와 지휘수준을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작전적 사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제는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투에 관한 공동의 사고로 이어진 통찰에 의해 부대지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71-2)


# 몰트케식 사고의 원칙

1. 대규모 육군을 독립된 야전군 단위로 편성한 후에 철도를 통해 신속하게 기동한다.

2. 상급부대의 지침에 따라 분산된 대부대를 현지 지휘관들이 자율적으로 지휘한다.


"독일제국의 적국들이 대동맹을 결성하는 등 지속적으로 독일제국에게 불리한 정세가 유지되자 몰트케와 후임자들은 1914년 전쟁 발발까지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정부에 예방전쟁을 요구했다. 총참모장들은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사례를 프리드리히 대왕에서 찾아냈다. 그는 1756년 작센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7년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는 적대국들이었던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에 관해 '정말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정부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확한 시점을 결정해야 한다'며 정치의 의무를 강조했다. 몰트케와 발더제는 1875년, 1887년과 1890년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위협적인 양면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예방전쟁을 요구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존망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트케와 발더제의 군사적인 논리를 철저히 거부했다."(86-7)


"1871년의 국민전쟁은 속전속결을 지향하는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투철한 애국심으로 동원된 국민이 전쟁의 행위자였던 국민전쟁이 작전적 조치로 이행되었던 결정적 회전의 효과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던 비대칭적인 소규모 분쟁의 증대를 초래했다. 따라서 국민전쟁은 아무리 탁월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도 속전속결을 보장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총참모부는 이러한 진실을 시종일관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했다." "총참모부는 독일-프랑스 전쟁 경험과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양면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작전적 기동전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장차 벌어질 수도 있는 잠재적인 위협, 즉 국민전쟁의 양상을 끝내 무시하고 말았다. 그들이 배제하지 않은 한 가지 가능성은 바로 소모전쟁이었지만 총참모부에서는 그러한 소모전쟁은 위정자들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93-4)


5 양면전쟁, 다모클레스의 칼


"슐리펜은 1891년 총참모장 취임 직후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전임자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한 자신만의 작전적-전략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슐리펜이 생각한 양면전쟁에 대한 전략적 전제조건은 지리한 소모전으로는 독일에게 승산이 없다는 점이었다. 슐리펜은 베른하르디, 골츠와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소모적인 진지전 양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했고 이를 대단히 우려했다. 소모전 상황에서 적국이 해상 및 육상을 봉쇄한다면 경제적인 혼란이 불가피해지는 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국내정치적인 위험을 동반한 국가적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슐리펜은 이러한 위험 때문에 지리한 소모전쟁을 방지하고 장차전을 가능한 한 신속히 종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적국의 봉쇄가 효과를 발휘하기 전에 적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슐리펜의 작전적 사고의 핵심은 바로 속전속결이었다."(111)


"슐리펜은 전임자들처럼 양면전쟁과 같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수세적으로 풀기보다는 오히려 공세적으로 단칼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없는 지리한 소모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찾아낸 유일한 해법이 바로 공격이었다. 그 이듬해부터 슐리펜은 공세적인 작전수행을 더 강하게 주장했고 이렇게 공격에만 편중된 현상은 빌헬름 2세 시대에 독일을 지배했던 시대정신, 즉 정치적인 문제를 공세적으로 해결한다는 정치적 방침에도 철저히 부합되었다. 수많은 정치, 군사, 경제 지도자들은 정열적인 젊은 빌헬름 2세 황제와 결탁하여 종래의 현상유지, 현실안주의 분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방어하는 것보다 오히려 공세적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세계 패권을 지향하는 방책을 택했다. 제국의 정치와 군사 엘리트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양면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했다."(111-2)


"대몰트케와 마찬가지로 슐리펜은, 화력 면에서 방자의 우세와 특히나 독일군의 수적 열세를 고려할 때 성공적인 섬멸회전을 위한 방책은 단 하나, 지속적인 포위작전을 감행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섬멸회전을 달성하기 위해 포위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출했고, 그러한 포위가 슐리펜만의 작전적 사고의 두 번째 핵심이었다. 시간적 압박 속에서 섬멸적 회전으로 이어지는 성공적인 포위를 위한 전제조건은 바로 작전적 수준의 기동전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동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섬멸회전과 포위라는 두 개의 축이 존재할 수 있었고, 중점형성과 기습도 달성할 수 있었다. 기동이라는 요소를 빼고서는 슐리펜의 작전적 사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대몰트케처럼 슐리펜도 대규모 육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기동에만 답이 있다고 주장했다." "작전적 포위는 기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적의 전방과 측방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확신했다."(117)


"1906년 2월 슐리펜은 자신의 후임자 소몰트케에게 '대프랑스 전쟁'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을 넘겨주었다. 이 비망록은 슐리펜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상 양면전쟁을 위한 슐리펜의 계획이 아니라 오로지 프랑스와의 전쟁만을 위한 전역계획이었다." "동시에 사실상 주관적인 관점에서 후임자 소몰트케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따르기를 권유하는 유언장이었다. 왜냐하면 소몰트케는 원칙적으로 슐리펜의 기본적인 구상─서부에 중점을 형성하고 프랑스군의 요새지대를 우회한 후 신속히 섬멸한다─에는 동의했지만 포위에 대한 교조적인 집착은 거부했으며 포위가 효과를 발휘하기에 앞서 정면에서 적을 강력하게 고착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슐리펜은 자신의 일생일대의 역작이 소몰트케 때문에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 앞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후임자에게 자신의 작전적 기본구상을 다시 한 번 문서로 상기시켜 호소하기로 결심했다."(131)


# 슐리펜 독트린

1. 수세적이고 피동적인 전쟁을 거부하고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세적인 전쟁을 수행한다.

2. 양면전쟁을 '내선'을 이용한 순차적인 두 개의 단일 정면전쟁으로 분리하여 시행한다.

3. 우선 서부에서 중점을 형성하여 공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동부에서는 지연전을 실시한다.

4. 강력한 우익으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를 신속히 돌파하여 프랑스군의 요새 지대를 크게 우회, 프랑스군을 포위한 후 신속한 섬멸회전을 실시한다.

5. 서부에서 승리한 후 철도를 이용하여 전투력을 동부로 전환, 동부에서 지연전을 실시하는 부대와 합세하여 적을 격멸한다.


"영국의 역사가 휴 스트라챈이 지적한 대로 총참모부는 작전적 기동전을 시행하기 위한 군수지원의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초래되는 결과들을 무시했다. 또한 비망록과 전쟁연습들에서 알 수 있듯이 슐리펜뿐만 아니라 다른 군사 전문가들도 성공적인 회전 이후 전쟁을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결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위험천만한 국민전쟁과 소모전쟁 양상이 벌어지면 독일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데 모든 군사 전문가들은 동의했다. 따라서 회전에서 승리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개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지만 수많은 독일 군사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심리적, 정신적 요인에서만 찾으려 했다. 용감무쌍한 공격정신, 즉 투철한 '옛 게르만인의 용맹한 돌격정신'으로 무장하고 전장에서 종횡무진 돌진할 수 있는 확고한 필승의 신념과 총검만으로 지리전략적인 상황과 수적인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39)


"1914년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이 아닌 소몰트케 계획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다. 소몰트케가 중점을 변화시킨 이유는 원칙적으로 작전적 차원에서 슐리펜과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전쟁 이전에 오로지 단 하나의 작전계획, 즉 벨기에를 통한 거대한 포위작전에 모든 것을 걸 수 없다고 판단했고 다양한 작전적 대안들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소몰트케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포위 이외에 다른 방책들도 충분히 실행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총체적으로 소몰트케는 기동전 수행 개념 측면에서 전임자 슐리펜보다는 숙부의 작전적 사고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쟁 발발 직전의 철도 운용계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철도를 활용하여 전개 속도를 가속시키려 노력했다. 정치적으로 전쟁 발발이 확실해질 때까지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을 주둔지역에 그대로 대기시켰다. 전쟁이 발발하면 철도를 통해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조치였다."(144-5)


6 혹독한 징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서부에서 기습 효과를 상실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기관총과 현대적인 화포 때문에 전술적으로 방어가 공격보다 훨씬 우세했으며 독일군의 기동속도가 적을 포위하기에는 충분히 빠르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적군을 포위,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독일군의 기동속도는 매우 빨랐다. 실례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제1군의 장병들은 3주 남짓 되는 기간 동일 1일 평군 23km 이상 전진했다. 슐리펜의 계획대로라면 동원령 발령 31일째에는 아미앵-라 페르-르텔 선까지 진출했어야 했지만 독일군은 그 선을 넘어서 이미 파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를 고려하면 이러한 진출속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한 고속 행군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의 파괴된 철도망을 복구하는 문제들과 더불어 군수분야에도 많은 취약점들이 노출되었다. 식량 문제로 인해 벨기에 주민들과의 마찰이 야기되었고, 이로 인해 일부 독일군은 벨기에 주민들에게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158-9)


"또한 여기서 작전적 사고의 결정적인 취약점이 노출되었다. 전쟁 이전 지도 위의 군사작전에서는 마찰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총참모부는 백만 육군을 실제 전장에서 지휘하기 위한 핵심적인 개념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위치한 총사령관이 전신과 전화로 계획대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다는 슐리펜의 신념과 장군참모장교들의 탁월한 지휘능력에 대한 믿음은 현실의 전쟁에서는 망상일 뿐이었다." "전시 독일제국의 지휘구조적인 문제의 핵심은 바로 황제이자 총사령관이었던 빌헬름 2세에게 있었다. 황제는 헌법에 의거한 해군과 육군의 최고통수권자였다. 하지만 그는 군사 분야의 지식이 박약했기 때문에 그러한 통수권을 행사하고 총체적인 전략지침을 하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황제는 군대의 분위기가 만연한 궁정에서 자기만의 생활을 영위했고 참호 속 병사들의 고통과 그들의 고향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의 비애를 전혀 알지 못했다."(160-1)


"서부에서 독일의 공세가 실패하면서 속전속결을 지향한 전략적 개념은 붕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부에서 제8군을 지휘하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군부 핵심세력권 밖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는 모든 예비와 주력을 집중해서 1914년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러시아 나레브군의 측방을 공격, 완전히 포위망에 가두고 섬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탄넨베르크의 영웅'과 탄넨베르크 회전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이 회전을 칸나이와 견주어 그 의미를 부각시키며 아직까지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를 진정한 슐리펜의 후예라고 칭송하고 있다." "이로써 군사적으로 러시아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러시아의 증기기관'은 멈춰섰다." "탄넨베르크의 승리는 오랫동안 정신사(精神史)적인, 그리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잠재되어 있던 독일 장병들과 지휘부의 이러한 우월감이 급기야 제2차 세계대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57)


"독일에서 돌파사상은 오랫동안 경시되었다. 돌파의 성공을 위한 전제조건은 바로 성공적인 기습과 더불어 명확한 인적, 물적 우위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그러한 선결조건을 달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엔 중장은 수적 우위에서 시행하는 공격형태가 바로 돌파이며 이것으로는 결정적인 작전적 승리를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돌파는 오로지 차후의 포위작전을 위한 여건조성 차원의 전투라는 의미만 부여되었다. 따라서 총참모부는 돌파를 항상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육군 총사령부는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다시금 기동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돌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독일과 동맹국들은 1916년 말이나 1917년 초반까지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월등히 우세한 자원력을 보유한 연합국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고 확신했다."(178-9)


"1918년 1월까지도 서부전선에서의 돌파 시도가 모두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에 루덴도르프에게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전술적 돌파 없이는 차후의 작전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돌파지점의 선정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특히 심각할 정도로 기동성이 저하된 독일군에게는 차후 작전의 방향을 결정짓는 문제였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접합점, 즉 두 군대의 전투지경선인 생캉탱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해 엄청난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 둘을 분리시키고 영국군의 남측방을 공격해서 섬멸할 수 있다는 논리는 타당했다." "마침내 1918년 3월 21일, 독일군은 '미하엘'Michael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서 독일군은 당시까지 서부전선에서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던, 전술적 수준에서의 큰 승리를 이뤄냈다. 하지만 전술적 돌파를 작전적 수준으로 확장하지는 못했다. 결국 연합군은 전선을 지켜냈고 예상대로 종심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던 독일군보다 더 신속히 예비대를 투입하여 그들의 공세를 저지했다."(185-6)


"특히 루덴도르프는 작전적 측면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작전이 한창 진행되던 중 작전적 중점을 솜 강 북부에서 남쪽으로 옮긴 것이다. 공격 진출 속도가 더 양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영국군을 격멸하기도 전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규모 회전에 돌입해야 했다. 중점형성의 대원칙에 완전히 위배된 것이었다. 격렬한 회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작전적 수준을 경시하고 전술에만 집착했던 루덴도르프를 향해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1918년의 공세에서 육군 총사령부는 1917년의 방어회전 때보다 더 많은 피의 대가를 치르고 전술적 수준의 지역 획득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연합군이 7월 중순경 반격을 개시하자 이를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1918년 독일 육군은 이른바 '블랙데이'Schwarz Tag 이후 8월 8일에 철수를 시작했고 11월 11일 휴전이 조인됐다. 독일은 마지막 해에 승리를 통한 강화라는 카드에 모든 것을 걸고 프랑스 지역에서 대규모 회전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87-8)


7 새로운 술통 속의 오래된 와인, 제국군과 국방군의 작전적 사고의 현실과 이상


"전략적인 전력 비교를 통해 군사적, 경제적인 능력을 실질적으로 평가했더라면 독일은 패권 욕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는 결국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패권정책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군부 엘리트들은 이러한 인식을 거부했고 근본적으로 태도를 달리했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했고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정치와 동떨어져 오로지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에만 매달렸다. 나아가 정치 우위의 원칙에 따른 전략개념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세적인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통해 월등히 우세한 적국의 잠재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군부 엘리트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보유에 여러 가지 제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허용된 10만 명의 육군만으로도 단지 일부 전술적-작전적 요소들만 새롭게 개선하면 독일의 패권적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199-200)


"카프의 쿠데타Kapp-Putsch가 벌어지자 1920년 3월, 라인하르트는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으로 한스 폰 젝트 대장이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젝트의 지휘 아래에서 군은 위정자들의 영향력이 전혀 미칠 수 없는, 이른바 '국가 내부의 국가'Staat im Staate, 즉 핵심 권력기관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젝트는 제국 육군을 '현대 육군의 표본'으로서 지휘자의 군대, 엘리트 군대로 만들고자 했다. 참모조직에 장교의 보직 비율을 높이고 병사들이 차상급 지휘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로 교육하여 베르사유 조약의 구제가 폐지될 미래를 미리 준비했다." "한편 젝트는 재임기간 중 비밀리에 공군을 창설했으며 소련 영토 내에서 항공기 조종사 훈련 및 화학무기와 전차부대를 운용하는 훈련을 시행했다. 외형적으로 제국군은 연합국들에 의해 국경수비대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다시금 전쟁수행 능력을 가진 현대적인 강력한 군대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202-3)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들이 결정되기 이전이었던 1919년 2월에 이미 젝트는 훗날 자신의 핵심적인 구상, 즉 최정예 '작전군'Operationsheer의 개념을 담은 초고를 완성했다.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작전적 사고를 철저히 고수했고 또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격전술을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전문적이고도 목표 지향적인 전술적 수준의 전쟁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기동을 통해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의 작전적, 전술적 관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젝트는 진지전을 배제하지도 않았고 전쟁 이전의 교범들과는 달리 방어와 '매복' 전투에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했지만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기동전이었다. 다시는 진지전 양상이 벌어져서는 안 되며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자는 견고한 방어보다 오히려 기동성을 극대화한 공세를 취해야 승산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그의 확고한 소신을 피력했다."(204-5)


"이러한 군 지도부의 노선을 거부하는 세력의 대표자로는 요아힘 폰 슈튈프나겔이 꼽힌다. 그는 장기간의 지연전투를 통해 천천히 적군의 전투력과 물량을 '소진'시키면서 적군의 정신력을 약화시킨다는 구상을 했다." "슈튈프나겔은 이를 위해 극도로 증폭된 적국에 대한 국가적 증오심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야말로 테러나 사보타지보다 더 중요한 국민전쟁의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바이마르공화국이 다시 전체주의 국가로 회귀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반(反)독일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을 제거하고 청소년들에게는 외세에 대한 적개심을 교육시켜야 하며 국민들에게 해방전쟁에 동참해야 할 의무를 자각시켜서 온 국민들이 조직적으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간인들을 전투 행위와 결합시키는 것은 새로운 전쟁관념이자 그에게는 당연한 논리였고 성공적인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의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처에서 현실로 나타났다."(213-4)


"1930년대 중반, 기동전을 지향하는 최종적인 결정으로 중점형성과 포위, 그리고 이와 결부된 돌파와 기습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군부에서는 장차전을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는데 모두 동의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교해서 방어작전에 비중을 더 둔 것은 사실이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적 영토에서의 공세, 즉 신속한 섬멸전으로 쟁취하는 것이었다." "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대령은 적국의 방위산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이전에 재빨리 선제공격을 실시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적군의 측후방으로 공격을 실시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그러한 우회공격에 앞서 돌파가 먼저 시행되어야 하고 이것을 작전적 포위로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장차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수 정예군이 아닌 현대적인 대규모 육군이 더 적합하며 미래의 전쟁은 틀림없이 기동전의 양상을 띠게 되리라고 언급했다."(234-6)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 몇 년 동안 베른하르디는 향후 기동전을 위한 전차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제국군은 전차 보유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군사 저널리즘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이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시 프랑스는 전차를 보병의 지원수단으로 인식하고 기동성이 둔하지만 장갑이 두꺼운 중(重)전차를, 영국은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잇는 경량화된 중(中)전차를 선호했다. 1927년, 구데리안은 전차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기술했다. 그는 영국의 관점에 동의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보여주었듯 현대적인 방어무기체계의 화력효과가 상승함에 따라 신속한 결전을 도모하기 위한 보병과 기병의 돌파력은 충분치 못하게 되었고 이제 전차와 항공기가 그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데리안은 공군과의 협력 하에 독립적인 작전능력을 보유한,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차량이 집중 편성된 부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말했다."(237)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1939년 전쟁 발발 당시 육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부대마다 기동성과 무장, 교육훈련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독일 육군의 157개 사단 중 16개 사단만이 완전히 차량화되어 있었다. 단지 이러한 극소수의 '엘리트' 부대들만 첨단 장비를 갖추고 교육훈련 수준도 높았으며 따라서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90% 정도의 부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도보나 말을 이용해야 했으며 일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더 낙후된 무장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오늘날까지 독일 국방군은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완전히 기계화된 전격전 군대'로 각인되어 있지만 이는 완전히 날조된 나치 선전의 결과물이었다." "이에 육군 총사령부는 강도 높은 교육훈련 혁신을 주문했다. 지휘관에 대한 교육과 야전부대의 훈련 중점을 제병협동전투능력 강화와 공격령 증강에 두었다." "교육훈련에서는 목표치를 달성했지만 전쟁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특정 장비, 물자의 부족은 해결하기 어려웠다."(270-1)


"1940년 5월, 훗날 '지헬슈니트'로 알려진 계획의 중심에는, 슐리펜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른, 신속하고도 기습적인 전쟁종결을 지향하는 섬멸회전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예상대로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마치 1914년의 소몰트케 계획을 재현하듯 연합군의 눈을 속여야 했다. 그러면 독일군의 주노력이 벨기에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신한 연합군은 주력을 벨기에로 투입할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 벨기에를 공략하는 목적이었다. 동시에 최정예 기계화부대들은,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아르덴 삼림지대를 거쳐 스당으로 진격해 들어가야 했다. 지난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이 지역에서의 기동을 고려하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만슈타인은 그 일대에서 돌파에 성공한다면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 솜 강 하구 방면으로 진격하여 벨기에 지역에 위치한 연합군 주력을 포위하는 거대한 섬멸회전으로 전쟁을 종결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74-5)


"1914년의 소몰트케처럼, 당시의 총참모부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전방 지휘관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스당 돌파에 성공한 이후 결정적인 상황에서 할더는 더 신중해졌고 반대급부로 히틀러는 점점 더 깊이 작전지휘에 개입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임무형 지휘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었다. '격분'한 기갑사단장들과 '고집불통'의 집단군 사령관의 반동적인 행동도 문제였지만 총참모부가 자신들의 고유영역인 작전적 지휘를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가장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롬멜과 구데리안 같은 장군들은 출중한 작전적 능력을 갖추었던 인물들인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육군 지휘부와 장군들 간의 내부 권력투쟁 때문에, 그리고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어떻게 상이한 공격속도를 조절해야 할 것인가'라는 작전적 차원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업이 간과되었다. 이러한 태만의 결과 육군 지휘부는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278-9)


"1940년 7월 22일, 히틀러는 영국과의 '평화 협상'이 무산되자 '러시아와의 문제' 해결을 지시했다. 이에 이미 작성된, 영토방위의 수준을 뛰어넘은 구상안들이 제시되었고 며칠 후에 이 계획들은 히틀러가 지향한 '생활권 전쟁'이자 '히틀러의 궁극적인 목표'와 완전히 결합되었다. 히틀러에게 '생활권'은 전략적 차원에서 영국에 대한 투쟁과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소련을 제압한다면 대륙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미국의 전쟁개입을 억제하고, 미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던 일본의 부담도 덜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장기간 세계대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식민지를 획득하고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대 소련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소련군을 격멸하는 예방적 차원의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 침공은 오늘날까지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방전쟁이 아니라 패권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이자 동부에서 생활권을 획득하기 위한 인종, 이데올로기적 섬멸전쟁이었다."(280-1)


"작전을 우선시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대단히 심각했다 .독일군은 종래까지 수행한 작전의 범위를 능가하는 공간에서 신속한 공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이 공격의 성공여부는 광활한 공간에서 300만 명 이상의 병사들과 약 50만 대의 차량, 30만 필 이상의 말에 대한 원활한 보급에 달려 있었다. 환경적 조건도 동쪽으로 갈수록 넓게 펼쳐지는 지형, 불비한 도로망, 빈약한 사회간접시설과 혹한의 기후 등 중부 및 서부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다. 특히 전체적인 군수 부대들은 다모클레스의 칼이 머리 위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과중한 시간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총참모부는 전역 기간 중 예상되는 보급의 문제점들을 인식했지만 단기간의 '전격전'으로 계획, 예측했던 터라 그런 문제들은 무시해도 좋다고 결론지었다. 작전가들은 군수분야의 문제들로 인해 작전에 차질이 발생하거나 위협적인 사태가 일어나리라고는 결코 예측하지 못했다."(291-2)


"총참모부는 '러시아 영토,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히틀러와 총참모부는 소련을 속전속결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소련의 잠재력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고전적인 독일의 작전적 사고로부터 비롯되었다." "결국 나치의 선전으로 탄생한 '전격전 군대'라는 독일군의 이미지는 러시아 전역에서 산산 조각나버렸다. 당시의 육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의 행군능력이 공격 속도를 결정한, 이른바 보병과 우마차의 군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동성이 부족했던 포병을 부분적으로 대체했던 슈투카와 전차는 긴 창의 날카로운 끝을 형성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하나였지만 두 부류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가 러시아 전역에 투입되었고, 작전의 마지막 몇 개월간 입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은 당시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으며, 마침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302-5)


9 핵 시대의 작전적 사고


"오랫동안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에게 전쟁 종식은 단지 패망일 뿐이었다. 그러나 1985년 5월 8일 독일 연방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독일도 나치로부터 해방된 날'이며 나치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적인 반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독과 서독이 과거 문제를 청산하는 방식도 각기 달랐다. 동독은 소위 '파시즘적인 국방군'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군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구분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애초부터 인종 말살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상적인 이유, 특히 파시즘을 극도로 적대시했던 사회주의 성향 때문이었다. 반면 서독에서는 오랫동안 국방군과 나치체제를 별개로 규정했다. 전쟁에 대한 책임,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친위대와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다는 논리였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패전의 책임은 고스란히 히틀러에게 떠넘겨졌고 국방군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346-7)


"주요 작전 전문가들이 암트 블랑크와 새로이 창설된 연방군의 요직을 장악할 수 있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단기간 내에 강력하고도 작전적 수준의 방어에 적합한 독일군의 창설을 기대했던 서방 연합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독일 정부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충분한 자질을 겸비한 군지휘관이 필요했고 따라서 과거 국방군 출신이면서 작전적 측면에서 숙달된, 유능한 장교들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육군의 인적, 지휘구조상 그러한 조건을 갖춘 인물들은 바로 장군참모장교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고위 계층에 있던 장군참모장교들은 제각기 직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동부 전역에서의 범죄적인 전쟁행위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비정치적인 군사 전문가들로서 나치체제에 동조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초 '결백한 국방군'과 '범죄적인 나치체제'를 확실히 구분하려는 인식이 확산되자 이러한 장교들은 더 쉽게 연방군에 편입되었다."(353-4)


# 암트 블랑크Amt Blank : 연방군 국방부의 전신


"과거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이 존재했던 유럽의 중심부였지만, 분단된 동, 서독은 서로 대치하게 된 양 진영의 첨단이자 외곽지역으로 변해 버렸다. 게다가 1950년대 말까지 독일은 독일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연합국의 지배하에서, 연합국이 전시에 사용할 공간일 뿐이었다. 이제 독일은 북대서양을 전략적 중심으로 인식했던 미국인들의 전초기지였고 이러한 위협적인 상황 때문에 서독의 작전가들은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이로써 슐리펜 시대로부터 발전되어온 작전적 사고의 핵심이었던 지리전략적 전제조건이 의미를 상실했다. 서독의 작전가들에게 양면전쟁의 위협은 사라졌고 시간적 압박 속에서 월등히 우세한 적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추구했던 속전속결과 신속한 공격 방법은 더 이상 연구할 가치가 없어졌다. 이제는 새로운 전략 상황에 부합하는 작전, 즉 서방 동맹국들의 월등한 잠재력을 동원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획득하고 독일 영토를 방위하기 위한 방어작전 구상에 몰두해야만 했다."(355-6)


"유럽방위공동체 창설이 좌초되면서 서독은 호기를 맞이했다. 독립적인 주권 행사도 가능했고 NATO 내부에서 다른 국가와 동등한 지위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연합국 장교들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던 독일군 장교들은 전혀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1948년부터 미국은 재정 부족을 이유로 독일의 작전적 구상과는 완전히 상이한 전쟁계획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라인강선에서 지연전을 개시하여 소련군의 공세를 피레네 산맥에서 저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대규모 반격을 실시하여 상실된 지역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핵무기로 러시아군을 무력화시킨다는 복안이었다. 독일은 그 계획을 수립한 미 공군과 미국 정부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독일은 미국의 핵전쟁 계획에 대한 전말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핵무기 투입에 관한 어떠한 정보를 받을 수도, 접근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독일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362)


"동독의 사정은 달랐다. 과거 국방군에서 복무했던 고급장교들은 새로이 창설될 동독군의 전술적-작전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원칙에 따라 군대를 건설하고 군사(軍事)와 프롤레타리아 사상이 결합된 이상적인 징병제도는 실현 불가능했다.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유능한 간부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독 공산당은 창군 단계에서 우선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국방군 출신의 장교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인민군'을 창설하고 인민과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동독 공산당은 국방군의 하급장교 계층에서 지도자를 선발했다. 과거 나치당이 장교단의 귀족화를 철폐하고자 의도적으로 장교단의 문호를 개방했을 때 임관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장교들 중 대다수가 병사 출신으로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작전적 제대를 지휘해본 자들은 매우 드물었다."(362-3)


"시종일관 소련군 지도부는 재래식 전쟁으로 유럽의 정치적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공군의 지원 아래 기갑 및 기계화부대들이 적의 전술적 방어지대를 돌파하고 이어서 신속히 종심으로 진출하여 적군을 섬멸한다는 것이 바로 소련군 작전적 사고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교리를 이행하기 위해 소련군은 1946년부터 차량화에 박차를 가했고 원활한 제병협동을 강조하여 종래까지의 기계화군단을 기계화사단급으로 재편했다. 또한 기동성과 화력을 증강하여 타격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는 많은 부분에서 서방의 사단편제와 유사했다. 소련군 지도부는 증강된 기동성 덕분에 더욱더 단기간의 속전속결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볼 때 인민경찰과 훗날 동독 인민군은 과거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를 의도적으로 거부했지만, 소련군과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가 유사했기 때문에 창군 초기의 동독군 장교들은 큰 혼란 없이 이러한 과정을 수용할 수 있었다."(364-5)


10 끝맺음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는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적 사고는 원거리에 위치한 대규모 육군을 전술적-작전적 수준에서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기 위해 탄생했다. 슐리펜 시대에 와서는 작전적-전략적 수준에서 열세에서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소위 궁여지책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작전은 전술로부터 생겨났으며, 기동, 공격, 속도, 주도권, 행동의 자유, 중점형성, 포위, 기습, 섬멸과 같은 제원칙들이 결합된 일종의 대부대급 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전이 전술과 전략의 매개체로서 한편에서는 작전적-전략적, 다른 한편에서는 전술적-작전적 차원을 모두 공유하고 있지만 독일군은 이러한 작전을 작전적-전략적 수준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즉 독일군 총참모부는 작전적 지휘만을 중시하고 결국 전략적 상황을 간과했다. 제1,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대부분의 장군참모장교들은 독일의 잠재력에 부합하는 현실 정치적인 해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398-9)


"이러한 결과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장교들에게는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읽고 정치 그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는 능력도 없었고 그러한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략적 사고의 본질은 바로 정치적 사고이다. 그러나 장군참모장교들은 군사우위의 원칙에 따라 정치를 군사의 하위개념으로 인식했다. 평시에 장군참모장교들은 민간 정부의 결정에 종종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고 때로는 이를 수용하기도 했지만 '문민정부의 정치'에 대해 매우 무관심했다. 전시에는 클라우제비츠의 논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과업에 간섭하려는 정치권을 무시했다. 제정시대 군부의 국내외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념은 군주와 정부의 구상과 일치했다. 그들의 목표는 유사시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막강한 패권국가의 지위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과 패전 이후)까지도 독일과 유럽에서 군사력 사용은 합법적인 외교정치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399)


"독일의 작전적 사고에 구조적인 결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원인은 바로, 총체적인 전략이 자신들의 잠재력에 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군수분야의 문제로 인해 전쟁범죄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사 독트린의 본질은 범죄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독일의 작전적 독트린은 충분한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기반 없이 대륙국가로서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전략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적 시도였다. 이렇듯 군사적 충돌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결국 불충분한 잠재력을 인정하고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거부했던 세계대전 시대의 독일의 군부와 정부 엘리트들의 무능함에 기인한다. 독일의 작전적 사고는 역사적으로 시종일관 제국의 존망을 좌우하는 고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결코 승리를 위한 해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고육지책'이자 '궁여지책'일 뿐이었다."(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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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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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가(家)


"브란덴부르크 일대는 상당 부분이 척박한 토질이었고, 따라서 농산물 수확이 저조했다. 그곳의 장원 제도는 서유럽이 보여준 도시 발달을 자극할 만한 충분한 잉여 노동력을 내보내거나 구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장래성 없던 이 영지가 어떻게 강력한 유럽 국가의 심장이 되었을까? 열쇠는 통치 왕조의 분별력과 야망에 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남부 독일에서 떠오르는 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다. 1417년에 작지만 부유한 영지인 뉘른베르크의 성주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은 브란덴부르크를 그곳의 당시 영주인 지기스문트 황제로부터 헝가리 금화 40만 길더를 주고 구매해 땅은 물론 세력까지 얻었다. 브란덴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권을 가진 7대 선제후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은 유럽 독일어권의 크고 작은 국가들을 이어 만든 조각이불 같은 형태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은 프리드리히 1세는 오늘날 유럽 지도에서 사라진 정치 세계로 진입했다."(36-7)


2 / 참화


"30년전쟁 기간에 독일은 유럽판 대재앙의 무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와 신성로마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 간의 대치 상황은 덴마크와 스웨덴, 에스파냐,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까지 휘말리며 확대되었다." "육지로 둘러싸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브란덴부르크로서는 이 전쟁이 선제후 국가의 온갖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재앙이었다. 갈등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브란덴부르크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나라의 운명은 전적으로 다른 나라의 손에 달린 꼴이 되었다. 선제후는 국경을 지킬 능력도 없었고, 백성을 지휘하고 지켜줄 수도 없었으며, 자신의 직위조차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마르크 지역으로 군대가 밀려오는 동안 법은 무용지물이었다. 지역 경제는 마비되었고, 일과 가정 생활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1세기 반이 지난 뒤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제후의 땅이 〈30년전쟁 동안 너무 황폐해져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참혹한 흔적이 역력하다〉라고 썼다."(55-6)


"모든 것을 말살한 30년전쟁의 광기는 현실과 무관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집단 기억에 토대를 둔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신화가 되었다.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를 사회의 구원책으로서 합법적으로 독점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로 찬양한 것은 종교적인 내전의 광기 때문이었다. 그는 질서와 정의가 사회적 갈등에 매몰되는 것을 보느니,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군주 국가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이 확실히 더 낫다고 역설했다. 작센의 법학자로서 홉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무엘 푸펜도르프는 마찬가지로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를 폭력과 무질서로 둘러싸인 암흑 세계에서 찾았다." "권력의 집중을 통해 무질서를 제압해야 하는 필연성에서 국가의 정통성이 나온다는 주장은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지만, 브란덴부르크에서 유난히 큰 공감을 얻었다."(77)


3 / 독일의 특별한 빛


"참담하고 절망적이었던 1640년에 비춰볼 때, 17세기 후반 브란덴부르크의 부활은 놀라울 따름이다. 1680년대에 접어들었을 때 브란덴부르크는 병력 2만에서 3만을 오가는 규모의 군대를 보유했다. 소규모의 발트 함대도 생겼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자그마한 식민지도 확보했다. 동부 포메른으로 건너가는 지협은 선제후의 영지를 발트해안과 연결시켜주었다. 브란덴부르크는 바이에른이나 작센과 동등한 힘을 갖춘 지역 세력이었으며 주요 평화협상에서 인기 있는 동맹국이자 주요 당사국이었다. 이런 변화를 앞서서 추진한 인물은 '대선제후'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빌헬름(재위 1640~88년)이었다." "그의 세대에 와서 호엔촐레른 가문은 1613년에 요한 지기스문트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방향 설정을 비로소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46년에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오라녜 공작의 19세 된 딸 루이서 헨리에터와 혼인함으로써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결속을 강화했다."(81-3)


"선제후는 자신의 몸값을 올리고 자국 군대의 군사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끊임없이 동맹 파트너를 바꾸었다. 이는 의도적으로 갈피를 안잡는 정책이었는데, 여기에는 황제에 대한 선제후의 충성심이 흐릿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미래의 국가 복지를 위해 신성로마제국을 없어서는 안 될 상대로 보았다. 물론 제국의 이해관계가 합스부르크가 황제의 관심사와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선제후는 때로 황제의 이해관계에 맞서 제국의 제도를 수호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브란덴부르크의 창공에 뜬 항성이었다. 그러므로 선제후가 자신의 후계자에게 〈네가 황제와 제국에 대해 품어야 할 존경심을 늘 명심하라〉고 경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황제에 대한 반역적인 분노와 제국이라는 오랜 제도에 대한 뿌리 깊은 존경심(적어도 존경심을 쉽게 거두지 못하는 태도)의 기묘한 조합은 18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프로이센 외교정책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98-100)


4 / 왕권


"1701년에 베를린은 이전에 종종 그랬듯이 국제 정세의 덕을 톡톡이 보았다. 황제는 브란덴부르크의 지지가 절실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선제후의 국왕 즉위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역사적인 싸움은, 루이 14세의 손자를 공석 중인 에스파냐 왕위에 앉히려는 프랑스의 계획에 맞서 유럽 열강이 동맹을 맺었을 때 새로운 유혈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격전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황제는 자신이 양보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양 진영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선제후는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1700년 11월 16일, '왕위 조약'을 대가로 황제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 합의에 따라 프리드리히 1세는 분견대 8천 명을 황제에게 보내고 그 밖에도 합스부르크가를 여러 모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빈의 궁정은 새로운 왕위의 제정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그리고 유럽 열강 사이에서 그 자리가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한다는 데 동의했다."(124)


"171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의 2대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프로이센군의 병력은 4만 명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1740년에는 8만 명으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다. 그 결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당대에 인구나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인상을 주는 군대를 과시했다. 그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에 대해서, 왕은 잘 훈련되고 독립적인 재무 구조를 갖춘 군사력만이 국제적인 분쟁에서 자신에게 자율성을(자신의 부친과 조부에게는 없었던) 보장해준다는 말로 정당화했다. 하지만 군대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재위 기간 내내 외교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제로 군대를 배치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한 사실을 보면 이런 판단에 힘이 실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의 절대복종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군대는 물론 정책상의 기관이지만, 이 군주가 품고 있던 세계관의 인간적이고 제도적인 표현이기도 했다."(152-4)


5 / 프로테스탄트


"1691년 3월 21일, 드레스덴의 작센 궁정에서 루터교 수석설교사로 있던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는 베를린 교회의 고위 성직에 취임했다. 이것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해 도발적인 임명이었다. 슈페너는 논란을 일으킨 종교개혁 관련 운동에서 널리 알려진 지도자였다. 그는 1675년에 『경건한 소망』(Pia Desideria)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자마자 악명을 떨쳤는데, 이 책은 당시 루터파의 종교 생활에 담긴 여러 가지 결함을 비난했다. 그는 정통파 교회가 교리의 정확성을 옹호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목회자에 대한 보통 기독교인들의 요구는 등한시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교 교구의 종교적 삶은 무기력하고 생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경건하고 이해하기 쉬운 독일어로 슈페너는 다양한 구제 방법을 제안했다. 경건한 토론 모임을 만들어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 생활에 새 활력을 불어넣자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슈페너는 이것을 '경건한 자들의 모임'(collegia pietatis)이라고 불렀다."(188)


"브란덴부르크가 경건주의에 협력한 이유는 (선제후의) 칼뱅파 가문에서 겪는 종파상의 독특한 난관 때문이었다. 루터파의 격렬한 비판을 억누르기 위한 거듭된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두 종파가 자발적으로 통합할 가능성은 여전히 요원했다. 따라서 종파 간의 다툼에 대한 슈페너의 거리낌 없는 비난은 선제후와 그의 가족에게는 달콤한 선율처럼 들렸다." "슈페너는 언제나 기존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성찬식이나 교리에서 전통을 존중했다. 그리고 절대 통합운동을 지지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에서 칼뱅파와 루터파의 경계를 초월하는 종파적으로 불편부당한 기독교 정신의 윤곽을 그려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교리와 성례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진정한 사도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건주의는 프로테스탄트 두개 종파에 대한 최고 감독권을 요구한 프로이센 군주제의 주장에 대한 '내적 토대'를 굳건히 해주었다."(191-2)


"경건주의자들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조의 통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여한 것은 동시대의 뷔르템베르크 경건주의 운동이나 체제 전복적인 영국의 청교도주의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루터교 내부의 제5열로서 경건주의는 칼뱅파의 신앙고백 규정이나 역대 선제후가 내릴 수 있었던 어떤 검열 조치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이념적 도구였다. 하지만 경건주의자들은 단순히 통치자를 보좌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폭넓은 토대를 둔 프로테스탄트의 자발적 운동에서 얻은 에너지를 새롭게 위상이 올라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조의 공공사업에 공급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국가의 목표가 양심적인 시민의 목표가 될 수도 있고 국가에 대한 봉사는 단순히 의무나 사리사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괄적인 윤리적 책임감에 의해서도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홍보했다. 그러면서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를 넘어서는 연대공동체가 출현했다."(205-6)


6 / 땅에 있는 권력


"18세기 마지막 30여 년간, 도시 기반의 상공업 구조에서 일어난 변화는 (전통적으로 군림하던 길드 조합원보다) 주로 상인과 기업가, 제조업자로 이루어진 신흥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중소 도시에서 두드러졌다. 여기서는 지역 행정이 전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명사의 도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프로이센 도시의 통치는 오로지 녹봉을 받는 국가공무원의 손에 달렸다기보다 시민계급의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요소로서 만만찮은 자원을 가진 지역의 자발적인 노력에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이센 영토에 있는 도시에서 '쇠퇴한' 것은 (실제로는 서유럽의 상당 부분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장인조합의 풍습 및 예법에 의해 유지되는 전통적인 신분체제의 특권과 지역의 자율성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대체한 것은 사업의 팽창과 시 업무의 비공식적 리더십을 수용함으로써 그들의 야망을 표현한 새롭고 역동적인 엘리트 계층이었다."(225)


"프리드리히 2세가 1752년에 언급한 '프로이센의 힘'은 국내의 부가 아니라 독특한 '산업 분야의 근면'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대선제후의 집권 이후, 국내 산업 발전은 호엔촐레른 정부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다. 이후의 선제후와 국왕들은 토착 노동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민을 받아들이고 토착 기업의 기초를 다지고 육성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일부 기존 기업은 수입 금지와 관세로 보호받았다. 불확실한 생산 품목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거나 엄청난 이익을 포기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정부 스스로 전매권을 행사하며 관리자를 임명하고 자본을 투입하고 품질 관리를 하며 영업이익을 거두어들였다. 중상주의 원칙에 따라, 원자재를 가지고 다른 데서 가공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가 국왕으로서 먼저 내린 결정 하나는, '상업과 제조업'을 감독하는 새로운 행정기관인 관리총국의 제5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249-50)


7 / 지배권을 위한 투쟁


"1740년 12월 16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병력 2만 7천 명을 이끌고 방비가 허술한 합스부르크의 슐레지엔 국경을 넘었다. 겨울철 원정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은 적진을 휩쓸었고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6주밖에 지나지 않은 1월 말이 되자, 수도인 브레슬라우를 비롯해 슐레지엔의 전 영토는 사실상 프리드리히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침공 작전은 프리드리히의 생애에서 단일한 정치적 사건으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외교 및 군사 부문의 고위 고문관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 단독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슐레지엔의 획득은 신성로마제국 내의 정치적 균형에 항구적인 변화를 불러왔고 프로이센을 강대국 간의 줄타기라는 위험한 미지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프리드리히는 이 침공이 국제적인 여론에 미칠 충격파를 잘 알고 있었지만, 손쉬웠던 이 겨울 원정을 시작으로 앞으로 전개될 유럽의 변화는 거의 예측하지 못했다."(263)


"배후 동기의 상대적인 무게가 어디에 있든, 슐레지엔 침공은 프리드리히를 새로 취득한 지방의 통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길고 험난한 싸움으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는 1741년 봄에 반격했지만,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동력은 4월 10일 브레슬라우 남동쪽의 몰비츠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함으로써 무너졌다. 이것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라고 알려진, 영토 분할을 둘러싼 전면전의 서막이 오른다. 5월 말,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님펜부르크 조약을 통해 황제 선출에 후보로 나선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를 지원했다." "(오스트리아에 맞선) 님펜부르크 동맹이 프리드리히의 이익에 보탬이 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분할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킨 대가로 작센이나 바이에른이 세력을 키우는 것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1742년 여름, 프리드리히는 동맹국들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와 단독 강화를 맺었다."(277-8)


# 2차 슐레지엔 전쟁(1744~45년) 승리 후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권 확정


"이제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반프로이센 동맹을 결성한) 세 개 강대국─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의 적군에 포위되었고, 1757년 봄이면 합동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자신을 상대로 군대를 모으지 않겠다는 것과 공격을 시작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장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불길할 정도로 불확실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적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756년 8월 29일, 프로이센군은 작센 선제후국을 침공했다. 이때 프로이센의 선제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이는 왕 혼자서 내린 결단이었다." "'예방전쟁'으로 시작한 작센 침공은 적들이 군사력을 완벽하게 끌어모으기 전에 프리드리히가 전쟁을 시작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민감한 (베를린에서 8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283-4)


"사실상 모든 연합군 전투가 그렇듯이, 그들에게는 동기부여와 신뢰의 문제가 있었다. 프로이센이라는 '괴물'을 쓰러트리는 것에 목표를 둔 마리아 테레지아의 집착은 좀 더 제한적인 목표를 가진 대부분의 다른 동맹국들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대서양상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그들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뒤(1757년 11월 5일) 프로이센과 싸우는 것에 급속히 흥미를 잃었다. 재협상 끝에 1759년 3월에 체결된 제3차 베르사유 조약의 틀 안에서 프랑스는 동맹군에게 약속한 군대 및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 "동맹세력 안에서 가장 강력한 축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었지만 여기도 문제는 있었다. 양국 어느 쪽도 이 전쟁에서 동맹 상대가 과도한 이익을 얻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런 불신은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승리를 굳히는 데 군사력을 사용하기를 망설이는 태도로 이어졌다."(286)


# 3차 슐레지엔 전쟁(7년 전쟁, 1756~63년)도 프로이센의 승리로 마감


"프리드리히가 국가의 사회적 의무, 특히 목숨과 신체를 아끼지 않고 그의 군대에 복무했던 사람들에 대한 책무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1763년의 여파에서였다. 프리드리히는 1768년에 〈전체 국민을 위해 자신의 신체와 건강, 체력 나아가 목숨까지 바친 병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걸며 지켜주려고 한 바로 그 사람들에게 혜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베를린에는 장애인이 된 상이군인 600명을 수용할 보호시설이 세워졌고 전시구제자금을 위한 기금을 조성해 농촌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에 시달리는 귀환병사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궁핍한 환경에 내몰린 군인들을 위해 소비세와 관세, 담배 전매사업과 관련한 저임금 노동 및 간소한 정부 고용직이 마련되었다. 아울러 아주 일반적인 의미의 사회보장이라는 측면에서, 프리드리히는 식량 부족, 높은 물가와 기근에 대응하기 위해 곡물소비세와 창고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302)


"처음으로 제국의 정치적 삶은 권력 양극단의 균형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이중 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778년 바이에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촉발된 갈등은 오스트리아가 혼자서 프리드리히에 맞서는 것을 얼마나 원치 않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다른 독일국가들의 반응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프리드리히를 합스부르크가가 자행한 강압적인 권력 게임에 맞서 싸우는 제국 통합의 수호자로 바라보면서 프로이센 편을 들었다. 1785년 요제프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바이에른과 바꾸려는 두 번째 시도를 하자, 프리드리히는 다시 한번 황제의 계획에 맞서는 제국 수호자로 등장했다. 이해 여름, 그는 작센과 하노버, 소수의 군소 영방 대표들과 제휴하고 '영주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표는 황제의 계획에 맞서 제국을 수호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프리드리히가 배운, 상대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방식이었다."(306-7)


8 / 감히 알려고 하라!


"프로이센 계몽주의는 대화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제를 놓고 벌이는 비판적이고 공손하며 제한이 없는 대화 같았다. 대화가 중요한 것은 예리하고 정제된 판단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1741년 쾨니히스베르크에 설립된 협회를 포함해 초국가적인 프로젝트라고 할 '독일협회'의 규약은 회원들이 결실이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식적인 조건을 명백히 규정했다. 낭독회와 강의에 이어 토론이 벌어지는 동안 회원들은 독단적이거나 분별이 없는 논평을 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신 낭독의 형식과 방법, 내용을 가지고 구조적인 비평을 해야 했다. 이들은 칸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성의 신중한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논제 이탈과 방해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모든 회원은 궁극적으로 발언할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차례를 기다린 다음에 가능하면 간결하게 말해야 했다. 풍자적이거나 조롱조의 소견과 도발적인 말장난은 용납되지 않았다."(347-8)


"독서회와 프리메이슨 지부, 여러 애국협회도 모임의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이런 신흥 공론장을 나태하고 수동적이며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 집단이나 반대파 혹은 반란을 모의하는 세력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유지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국가와 가까웠거나 사실상 부분적으로 국가와 동일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키워낸 지적 전통의 문제였다. 프리드리히 3세 재위 기간에 프로이센 대학교에서 확립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치하에서 계속 뿌리를 내린 중상주의나 국가에서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과학'과의 연결고리는 대단히 천천히 단절되었다. 게다가 프로이센 인텔리겐치아의 사회적 지위도 이런 전통에 한몫했다. 당대의 프랑스 문단에서는 독립적인 활동을 하던 사람 혹은 프리랜서 작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 데 비해,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지배하던 집단은 공무원 집단이었다."(351-2)


"진보적인 학자나 작가, 사상가들로서는 국가를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파트너로 보기가 쉬웠다. 통치자 자신이 계몽주의 가치관의 유명한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시대'와 '프리드리히 시대'가 동의어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발언을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18세기 유럽의 전체 군주 가운데 프리드리히는 계몽주의의 가치와 사고방식을 가장 열심히 구현했다." "1784년의 기념비적인 글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권력과 계몽주의가 똑같은 한 명의 군주 손에 들어갈 때, 정치적 자유와 시민의 자유의 관계는 완전히 변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계몽 군주가 있는 곳에서는 군주의 권력이 시민사회에 위협이 되기보다 자산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그 결과가 역설적이라고 말했다. 진정으로 계몽된 통치자 밑에서는 정치적 자유의 적당한 제약이 오히려 '대중이 온갖 능력을 활짝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354-7)


"1794년에 반포된 프로이센 국가의 보통법만큼 18세기말 프로이센의 과도기적 상태를 잘 기록한 것은 없을 것이다." "보통법에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안에 서로 다른 관점이 들어 있다는 점이 아니라 서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법전은 이미 지나간 세계, 각각의 질서가 국가와의 관계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중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창안한 세계, 성문화 작업이 끝날 무렵 이미 해체되고 있던 세계로 후퇴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국가에 주권이 있으며, 왕과 정부가 법으로 규정된 세계를 예견하고 있기도 하다." "마담 드 스탈은 프로이센이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한쪽은 군사적이고 다른 한쪽은 철학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전통과 혁신이라는 양극단이야말로 호엔촐레른 국가의 역사적 궤적을 정의한다."(388-91)


9 / 오만과 인과응보: 1789~1806년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이 공동 발표한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원칙적인 반대를 천명한 것이었다. 선언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는 그들의 '형제'인 프랑스 국왕의 운명을 〈모든 유럽 군주의 공동관심사〉로 간주한다는 언급으로 시작했다. 그런 다음 프랑스 왕이 가능한 한 빨리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왕정의 토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제안한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무력 수단〉으로 〈신속하게 제안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끝을 맺었다. 표현은 비록 흐리멍덩했지만, 이것은 각 왕조의 반혁명 연대에서 나온 명확한 선언이었다." "동맹국이 실제로 프랑스를 침공할 것인지, 한다면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 할 것인지는 불분명했지만, 1792년 4월 20일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해졌다."(398-9)


"프로이센군은 공식적인 동맹군으로 남아 있었지만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에 원정 자원을 일부밖에 투입하지 못했다. 베를린 정부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폴란드의 상황이었다." "1788~91년에 러시아가 큰 희생을 치른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는 사이,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왕과 폴란드 개혁파는 정치 체제의 변화를 추진할 기회를 잡았다. 1791년 5월 3일에 반포된 폴란드 신헌법은 최초로 세습 왕조와 중앙 정부의 틀을 다듬었다." "하지만 1794년 10월 10일 바르샤바 남동부에 있는 마체요비체에서 러시아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3차이자 최종적인 폴란드 분할의 길이 열렸다. 1795년, 폴란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동부에서 기대 이상으로 목표를 달성한 프로이센은 (다시 한번 동맹국을 저버리고) 지체 없이 서부의 반프랑스 동맹에서 발을 빼내어 1795년 4월 5일,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조약에 서명했다."(401-5)


"하지만 프로이센이 이룩한 것은 보기보다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지난 6년 동안 프로이센은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와 스스로 동맹을 맺었다가 파기했다. 잘 알려진 왕의 비밀외교 취향과 혼란스러운 이중거래는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고 외교적인 문제에서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곧 프로이센은 강대국의 지원이 없으면 독일의 휴전선을 방어할 수 없고, 따라서 중립 지대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했다. 그와 달리 더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폴란드가 유럽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폴란드를 상대로 강대국이 자행한 영토 분할의 도덕적 무도함을 차치하고라도, 폴란드가 독립해 있으면 동부의 3대 강국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또 중재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더 이상 폴란드가 존재하지 않는 이제, 프로이센은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와 방어가 불가능한 긴 국경을 공유하게 되었다."(406-7)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처음에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나폴레옹과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시도는 퇴짜를 맞았다. 베를린은 10월 24일에 점령되었고, 그로부터 3일 후에 나폴레옹이 수도에 입성했다." "1806년 10월 하순부터 1807년 1월까지 프랑스군은 주요 요새를 강제로 점령하거나 항복을 받아내면서 프로이센 영토를 계속 유린해나갔다." "1807년 6월 25일 황제 나폴레옹과 차르 알렉산드르는 강화를 위해 만났다." "차르의 압박에 못 이긴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이 국가로서 존속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틸지트 조약(1807년 7월 9일)에 따라 프로이센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남은 것은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스웨덴령은 제외),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그리고 여기에 폴란드 1차 분할 때 프리드리히 대왕이 획득한 회랑 지대가 전부였다. 2차와 3차 분할 때 획득한 폴란드 지방은 동부에 프랑스-폴란드 위성국가를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떨어져나갔다."(423-7)


10 / 관료들이 만든 세계


"1806~7년에 패전과 굴욕의 여파 속에서, 대신과 고위 관료로 구성된 새 정부 지도부는 프로이센 정치 행정부의 구조를 개편하고, 경제 규제를 철폐하며, 농촌 사회의 기본 규칙을 새로 짜고, 국가와 민간 사회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일련의 정부 칙령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개혁의 문을 열어젖히도록 만든 것은 바로 패전의 규모였다. 전통적인 사회 구조 및 행정 절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자 오랫동안 내부로부터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반대파들은 침묵하게 되었다. 전쟁은 종래의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재정 부담을 안겨주었다." "여기서 나온 위기감은 강력하고 일관된 행동 계획과 그런 실태를 설득력 있게 전파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은 프로이센 국가 내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던 힘을 한데 모으고 그것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432-3)


"구제도 아래서 개인 보좌관의 영향력은 왕이 어느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가에 따라 들쑥날쑥했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주장을 펼치고 설득을 해서 결정된 안건도 바로 그 다음 날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새로운 제도하에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벌이면서 왕을 '관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개혁 진영에서는 항상 왕에게 더 과감한 결정기구에 대한 통제권을 제공함으로써 군주의 권위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는 점을 강조했다(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불손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는 자문이라는 빗장을 걸어 잠금으로써 왕의 운신의 폭을 제한했다. 이들은 좀 더 광범위한 국가의 책임과 의무 구조에 군주제를 묶어놓고 관료화할 작정이었다. 왕은 이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슈타인이 앞으로 왕이 반포하는 법령은 다섯 명의 대신이 서명할 때만 효력이 발생되도록 하자고 건의했을 때 묵살했다."(444-5)


"군 개혁을 주도한 샤른호르스트는 나폴레옹의 사단 체제를 프로이센에 도입하고 예비군으로 지역민병대를 설치할 것을 주문했다. 크네제베크(프로이센 토박이)를 비롯한 다른 장교들도 순수하게 '민족적인' 프로이센군의 창설을 내다보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은 카스트 제도 같은 장교단의 배타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군대는 절도 있는 애국심의 보고가 되어야 하고, 1806년에 명백히 결여되었던 활기와 책임감을 불어넣는 존재여야 했다. 샤른호르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군인정신의 함양과 고취를 통해 군대와 국민을 좀 더 유대가 굳건한 연합체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군과 프로이센 '국민' 간에 이같이 새로운 관계를 다각도로 달성하는 효과를 올리기 위해, 개혁파는 보편적인 병역 의무를 주장했다. 직접 군에 입대하지 않는 사람은 향토 방어를 위해 복무하도록 하고, 프로이센 사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온 (특히 도시에서) 병역 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46-9)


"프로이센 발전의 특이성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법은 나폴레옹 시대에 독일 지역 각국에서 진행된 광범위한 개혁 활동의 맥락에서 조명해보는 것이다.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3국 역시 이 무렵에 집중적인 행정개혁을 겪었는데, 거기서 빚어진 결과는 헌법개혁이라는 본질적으로 훨씬 더 파급력이 큰 것이었다. 3개국 모두 헌법과 전국 선거, 의회를 받아들였다.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런 배경으로 볼 때, 1823년 이후 프로이센에 새로 설치된 주의회(Land-tag)는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한편, 프로이센 사람들은 경제 근대화에서 일관되게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뮌헨과 슈투트가르트의 개혁파가 구체제의 중상주의가 걸어왔던 보호주의 노선을 옹호한 데 비해, 프로이센 사람들은 무역과 제조업, 노동시장의 규제 철폐에 목표를 두었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남부 독일 3개국보다 덜 '근대적인' 헌법 체계를 가진 채 나폴레옹 시대를 벗어났다. 대신 국민경제는 더 '근대적'이었다."(466)


11 / 강철 시대


"1809년 봄이 되자, 승리의 여신은 마침내 나폴레옹을 외면한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은 군주 주변의 인물들을 분열시켰다. 일부는 러시아의 지원 없이 프랑스에 선제 공격을 하는 것은 프로이센으로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군 개혁파와 외무대신 아우구스트 프리디르히 페르디난트 폰 데어 골츠, 법무대신 카를 프리드리히 바이메를 비롯한 나머지는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왕은 완강하게 방임정책을 고수했다. 자칫 국가의 완벽한 멸망을 부를지도 모를 어떤 움직임도 자제하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의 눈에 국왕이 신중하게 기다리는 태도는 비열하고 비난받아 마땅해 보였다." "1809년의 위기 기간에 군주는 강제 퇴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일시적인 몽상일 수도 있지만, 혁명기의 격동적 상황에서 나온 덧없는 감정이 전통적인 군주의 자화상을 얼마든지 뒤바꿔놓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474-9)


"1813년 3월 17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결별한다고 공식 선언했고, 3월 25일에는 러시아와 칼리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러시아의 차르와 프로이센 국왕은 통일 독일에 대한 구상을 추진하기로 약속함으로써 국민적 열기를 견인할 길을 모색했다." "6월 4일 이후, 연합군의 정책에서 가장 시급한 목표는 오스트리아를 설득해 연합군에 합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외무대신인 클레멘스 벤첼 폰 메테르니히는 1813년 초 이래로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미 러시아를 발칸반도 최대의 위협으로 보고 있었고 독일에 대한 나폴레옹의 지배권이 러시아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 중재를 위한 메테르니히의 노력이 나폴레옹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실패하자,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연합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힘의 균형은 프랑스에 불리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496-9)


"프로이센군은 1813년의 원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들은 연합군의 지휘 체계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구성원이었다. 뷜로는 명목상 신중한 성격의 북군 소속 군단장 베르나도트의 부하였지만, 원정 기간에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 몇 차례의 중요한 고비에 상관의 명령을 무시했다." "이와 똑같은 흐름은 이듬해의 원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1814년 2월에 연합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접근하자, 슈바르첸베르크와 메테르니히는 지금이야말로 전력이 약화된 나폴레옹에게 강화를 제안할 때라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무사히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도 늦추지 말고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압박한 사람은 블뤼허였다." "프로이센의 전쟁기획자들은 나폴레옹군을 궤멸시켜 그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자는 야심찬 목표를 겨냥했다. 이런 전쟁관은 훗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다."(506-7)


"조국에 대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훈장만큼 프로이센 전시 동원 체제의 대중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없을 것이다. 왕실 주도로 설계되고 도입된 철십자훈장(Der Eiserne Kreuz)은 모든 계급을 대상으로 수여되는 프로이센 최고의 훈장이었다. 〈병사도 장군과 동등한 조건이다. 장군과 병사가 똑같은 훈장을 단 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장군이 훌륭한 지휘를 통해 그것을 받은 데 비해 병사는 한정된 자신의 영역 내에서도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용기와 솔선수범은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라는 인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이센은 이때 '강철 시대'(eiserne Zeit)였다. 이리하여 철십자훈장은 이 전쟁을 기념하는 상징으로 변했다.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한 뒤, 왕은 모든 프로이센의 깃발과 기장에 철십자훈장을 넣고 전쟁 내내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철십자훈장은 처음부터 프로이센의 '기억의 공간'으로 설계되었던 것이다."(511-2)


12 / 역사를 통한 신의 행진


"프로이센은 독일 국가들의 미래의 조직에 관한 복잡한 협상에서 그들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하르데베르크와 훔볼트가 대표로 활동한) 프로이센이 원한 것은 강력한 중앙집행기관을 갖춘 독일이었다. 이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군소국들에 대한 권한을 공유하는 체제로서, 간단히 말해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이원 체제 방식'이었다. 이와 반대로 오스트리아는 중앙기관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느슨한 독립국가 연합을 선호했다. 1815년 6월 8일에 합의를 본 독일 연방약관(Deutsche Bundesakte)은 프로이센의 구상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프로이센 국가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나폴레옹 이후에 찾아온 안정 상태의 중요성을 떨어뜨린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호엔촐레른 왕국은 독일 북부 전역에 걸친 거대한 땅덩어리가 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 19세기 프로이센의 (그리고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발전은 무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531-2)


"1815년의 협상 결과 사상 최초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보다 더 많은 '독일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 연방은 베를린이 북부 독일을 공식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줄 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프로이센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 비공식적이고 제한된 주도권을 행사할 정도로는 융통성이 있는 집행기구를 두었다. 독일 연방이 영토를 초월한 자체의 제도를 확립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행사할 문은 열려 있었다. 1815년 이후 프로이센 행정부가 주목한 것은 특히 관세 일원화와 연방 안보정책 두 개 분야였다. 이 두 가지는 프로이센이 발전시킨 분야로서, 1848년 혁명 이전에 수십 년간 '독일 정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1834년 1월 1일에 발효된 독일 관세동맹(Zollverein)으로 현실화된 관세의 일원화는 독일 영토에서 영향력과 특권을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오랜 경쟁을 위한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532-5)


"프로이센의 협상대표단은 1818~19년에 좀 더 응집력이 있고 '민족적'인 색깔을 띤 (베를린의 지휘를 받는) 연방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애썼지만,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는 군소국 대표는 독일 군소국의 군사적 자율성을 양보하는 그 어떤 방안도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이 국가들은 독일에 연방 군사기구를 두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것은 강력한 연방기구가 궁극적으로는 프로이센에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오스트리아의 마음에 드는 결과였다. 연방 군사정책을 시험해볼 최초의 기회는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과 더불어 찾아왔다. 혁명사상의 침투와 나폴레옹 침략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했고, 당대 사람들, 특히 남부 사람들은 1830년 여름의 격동적인 상황이 (1790년대처럼) 서부 독일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프로이센의 정책입안자들은 때를 놓지지 않고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프로이센에 이롭게 이용하는 데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537)


"보수파는 오래전부터 어떤 형태의 '국민' 대표성에도 반대해왔다. 그들이 볼 때, 실현 가능한 대표성의 형태는 사회 내부에 역사적인 뿌리가 있는 기존 신분제의 이익과 특권에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프로이센 국민을 차별성이 없는 전체로 묘사하는 헌법은 반란과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메테르니히는 1818년 11월, 비트겐슈타인 왕자에게 프로이센 왕은 〈지방 신분제의회를 설치하는 것보다 더 나가면 절대 안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1823년 6월 5일의 일반법을 통해 정부는 국민에게 의도를 드러냈다. 프로이센은 성문 헌법도 국민 의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왕의 백성들은 지방의회로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보수 경향은 개혁 이전 상태로 복귀할 수도 없었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개혁을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보수파는 점점 개혁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사고(가령 '국민'이라는 관념)를 채택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였다."(549-53)


"1831년에 프로이센 왕국의 인구는 1,315만 1,883명이었다. 이 중에서 약 543만 명(약 41퍼센트)이 작센과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지방에 살았는데, 이들 지역은 1815년 이후에야 프로이센 땅이 된 곳이었다. 여기에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에 따라 프로이센에 병합된 포젠 대공국의 주민들까지 더하면 그 비율은 50퍼센트 가까이 올라간다." "따라서 (전국적인 의회와 헌법이 부재하던) 프로이센 왕국은 행정적인 의미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형태로 남아 있었으며, 언어와 문화의 측면에서도 조각보 같은 구조였다." "국가는 모든 프로이센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한 유일한 기관이었다. 하필 이 시기에 국가의 개념을 둘러싼 담론이 전례 없이 활발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815년 이후 프로이센 국가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데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은 없다." "헤겔에 이르러 국가는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주체에게 보편성을 되찾게 해주는 신성해 보이는 기구가 되었다."(577-82)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의 아들로서 새 '프로이센인'이 된 마르크스는 1836년에 법학과 정치경제학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베를린에 왔다. 마르크스에게 헤겔 사상과의 진정한 첫 만남은 종교적 개종과 비슷할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1837년 11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며칠간은 전혀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지저분한 슈프레 강변의 밭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 집주인의 사냥에도 따라나섰지요. 베를린 길모퉁이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훗날 마르크스는 관료 계층을 '보편적인 신분'으로 본 헤겔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와 상관없이 헤겔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프롤레타리아를 '일반 이익의 순수한 화신'으로 이상화한 마르크스의 생각이 헤겔 철학의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마르크스주의도 프로이센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587)


13 / 정치적 혼란의 확산


"1840년 신분제의회의 충성 맹세에 따라 신문지상에서 논쟁이 벌어지자, 쾨니히스베르크 주지사인 테오도르 폰 쉔은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저술하여, 〈삼부회가 있을 때만 우리 나라에 공적 생활이 시작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쉔의 저서에 대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반응은 날카롭고 솔직했다. 왕은 자신과 백성 사이에 끼게 될 '종잇조각'(헌법)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프로이센을 계속 '가부장적'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선언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즉위에 뒤따른 정치적 좌절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정치 환경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정치적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고 격화되었다. 의사이자 유대인 급진파였던 요한 야코비는 1841년 그의 팜플릿 「네 가지 물음에 대한 동프로이센인의 답변」에서 양보나 호의로서가 아니라 '빼앗길 수 없는 권리'로서 국민의 '합법적인 국정 참여'를 요구했다."(598-600)


"1840년대 프로이센 땅에서 많은 소요와 기아로 인한 폭동이 일어났지만, 슐레지엔 직조공의 반란처럼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은 없었다." "여기에는 공장의 노동 조건, 인구밀집 지역의 주택 문제, 신분조직의 해체(예를 들면, 길드와 신분에 따른 지위 등), 경쟁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경제로 변화, 새로 부상하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종교 및 도덕의 타락 등 복합적인 문제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대하고 핵심적인 문제는 하층계급이 점차 가난해지는 '궁핍화' 현상이었다. 당시의 '빈궁'(Pauperism) 상황은 여러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전통적인 빈곤의 형태와 달랐다. 그것은 질병과 부상 혹은 흉작에 따른 개별적인 우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현상이었고 게절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때의 빈곤은 장인계급(특히 도제와 조수)과 영세자작농처럼 그 이전 시기에 상대적으로 지위가 안정적이었던 사회 집단을 삼키는 특징을 드러냈다."(611-2)


"생존을 위한 폭동은 자발적이고 비정치적인 동기에서 일어날 때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도로 정치적이었다. 그것은 참여자의 주변 영역 너머로 확장된 정치화 과정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와 보호무역주의자는 물가 상승과 정부의 복지부동에 따른 대량 빈곤, 자유주의 관료들이 도입한 규제 해제식의 개혁을 비난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공장 시스템'을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산업화와 기계화는 사회를 위기에 빠뜨린 원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이라고 주장하며, 투자를 방해하고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정부 규제의 철폐를 요구했다. 1844~47년의 사회적 위기에 놀란 보수파는 이후 19세기 독일식 복지국가를 내다보는 처방으로 실험을 했다. 생존 폭동은 특히 급진파에게 그들의 수사와 이론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더 날카롭게 벼릴 기회를 제공했다." "자원을 둘러싼 극심한 사회적 갈등은 프로이센의 정치적 분화의 속도를 촉진하는 부정적 에너지를 방출했다."(617-8)


14 / 프로이센 혁명의 찬란함과 비참함


"1848년 2월 말, 베를린 시민은 혁명 소식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1847년 겨울에는 스위스의 진보적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보수적인 가톨릭 주와 내전을 벌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자유주의적 헌법을 실현한 새로운 스위스 연방주가 탄생했다. 그 다음 이탈리아반도의 불안한 정세에 대한 보고가 있고 나서, 1848년 1월 12일에는 팔레르모에서 반란군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로부터 2주가 지난 뒤, 나폴리 왕이 이탈리아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국민에게 헌법을 양보하자 팔레르모 혁명의 성공이 확인되었다. 베를린을 흥분시킨 것은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뉴스였다. 2월에 자유주의 반체제 운동은 군대와 시위대의 유혈 충돌로 절정에 오르면서 파리에서 세를 얻었다." "파리로부터 프로이센의 수도로 뉴스가 들어오자, 베를린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보를 수소문하면서 토론을 벌이기에 바빴다. 독서클럽과 커피하우스, 온갖 종류의 공공시설은 사람들이 터질 듯이 들어찼다."(633-4)


"거리를 휩쓰는 군중의 '투지와 불손'이 격화되는 것에 놀란 베를린 경찰국장 율리우스 폰 미누톨리는 3월 13일 시내에 새로운 군부대의 투입을 요청했다. 군중과 진압부대는 시가지를 장악하기 위해 싸우는 집단적인 적대세력이 되었다." "3월 18일, 베를린 전역에서 손에 잡히는 것들로 즉석에서 만든 바리케이드가 생겨났다. 이 임시변통 장벽에서 대부분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시가지 곳곳에서 비슷한 형태로 치러졌다." "긴장이 고조되던 이튿날 정오 직후에 내려진 왕의 군대 철수 결정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아주었다. 이것은 3월 18~19일 밤에 있었던 잔인한 전투─300명이 넘는 반군과 100여 명의 장병이 희생된─를 감안하면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로 인해 국왕은 수도의 격렬한 대치 상태로 인해 명성을 더럽히지 않은 공적 인물로 떠올랐다. 이것은 독일 지역의 문제에서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행사할 기회가 혁명에 의해 주어졌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636-43)


"허약한 베를린의 정치적 타협을 가장 뒤흔든 것은 민간과 군당국 사이의 관계 설정이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다음 세대가 다시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였다. 7월 31일, 슐레지엔의 도시 슈바이트니츠 지역의 군 사령관이 멋대로 내린 명령에 따른 격렬한 충돌로 민간인 1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폭력사태가 번졌고 그 와중에 브레슬라우 의원 율리우스 슈타인은 군 장병이 헌법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기준을 도입하자는 발의를 했다." "국왕과 의회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지던 11월 3일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시민군이 해산(무장해제)되었다. 정치 클럽이 폐쇄되고 급진적인 신문 중에 유명한 것은 폐간되었다." "11월 9일, 브란덴부르크 신임 수상은 국민의회 임시의사당으로 가서, 의회는 브란덴부르크 시에서 모이는 11월 27일까지 휴회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많은 의원은 11월 27일에 브란덴부르크 시에서 모이려고 했지만, 이내 흩어지면서 국민의회는 12월 5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648-50)


"군대의 충성이란 그렇게 간단한 현상은 아니었다. 결국 그것은 프로이센 시민의 군대였다. 대다수의 병사가 혁명을 지지한 바로 그 사회 계층에서 뽑혀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많은 군인이 탈영하거나 복무를 거부하지 않았는지, 또 왜 군대 내에 혁명조직을 결성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일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군 지휘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부대원 대다수는 계속 왕과 그들의 사령관에게 충성했다." "이들이 왕에게 순종하는 동기는 지역의 조건과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양했지만,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있었다. 각 지역의 반란에 대한 진압 임무를 맡은 병사들 사이에는, 그들이 혁명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보호'하는 것이며, 다만 급진파의 무정부적 혼란에 맞서 헌법을 수호하고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혁명 세력 내의 주도권이 빠르게 급진 좌파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에 의해 일정한 신뢰를 얻었다."(654-5)


"J. P. 테일러의 말을 빌리자면, 1848년 프로이센의 봉기는 프로이센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를 놓치게 만든 '갈림길'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 놓인 분수령이었다. 1848년에 시작된 10년의 세월은 정치적·행정적 현실의 엄청난 변화, 즉 '정부혁명'의 과정이었다." "이제 프로이센은 (자체의 역사에서 최초로) 선출된 의회를 가진 입헌국이었다. 이런 사실 자체가 프로이센 왕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 전적으로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냈다. 1848년의 프로이센 헌법은 선출된 의회가 입안했다기보다 국왕에 의해 선포된 것이었지만 이 헌법은 대다수 자유주의자와 온건 보수파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해온 것을 대부분 반영했으며 그런 점에서 '인민의 작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의회의 비준을 거치지 않고 공표함으로써 자유주의 원칙을 어겼다는 사실은 거의 무시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헌법은 '프로이센의 공적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676)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에서도 혁명 기간에 발생한 정치적인 인쇄물과 정치적인 독자층이 확대된 현상은 되돌릴 수 없는 물결이었다. 정부는 여론을 형성하는 사업에 좀 더 유연하고 협조 체계가 잘 이루어진 접근방식으로 대처했다." "만토이펠 수상은 정부가 각 부처 내의 독점적인 정보원을 활용해 국가의 활동과 외국의 사건과 관련한 뉴스를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정부 활동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사전에 정립해야 한다는 만토이펠의 혁신은 부담스러운 검열기구로 언론의 글감을 걸러내는 시스템에서 뉴스와 정보의 미묘한 차이를 만드는 방법으로 변화를 이끌어나갔다. 이 모든 것은 1848년에 의해 만들어진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증거였다." "만토이펠의 현금을 우호적인 기자와 편집자에게 지급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 중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1851년의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서 프로이센 의원이 된 인물이었다."(683-4)


15 / 네 개의 전쟁


"1859년에 발발한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프로이센의 국가정책을 새로운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대 사람들이 볼 때 이탈리아와 독일이 곤경에 처한 상황이 유사하다는 것은 명백했다. 양쪽 모두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 내에서) 역사적·문화적 민족성에 대한 강렬한 정서가 왕조 및 정치적 분열이라는 현실과 공존했다. 또 양국 모두 오스트리아가 민족 통합에 방해가 된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뚜렷한 유사점은 피에몬테와 프로이센 사이에도 있었다. 양국 모두 자신만만한 관료체제와 근대화의 개혁으로 주목받았으며 (1848년 이후로) 입헌군주국이었다. 그리고 대중의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동시에 자국의 이익 범위 안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군소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작전을 펼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 열광하는 소독일 옹호자들은 1859~61년에 일어난 이탈리아 사태를 자연스럽게 독일의 정치 지형에 투사하게 되었다."(689-90)


"비스마르크는 1862년 가을에 베를린에서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의 목표는 국왕의 권력과 군대의 능률을 보호하면서 '의원들 대다수의 이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2년 복무라는 자유주의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한편 군대의 병력을 증강하고 핵심 영역에서 정부의 통제력을 확보하는 수정된 군사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런 작전은 지지를 유보하도록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에트빈 폰 만토이펠의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그것은 권력 측근의 해묵은 문제였다. 비스마르크는 지위를 유지하는 열쇠는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모든 정적을 무력하게 만다는 것임을 즉각 깨닫고 그에 걸맞게 자신의 정책을 바꾸었다. 타협을 포기한 비스마르크는 오로지 군주와 그의 이익에 전념하겠다는 것을 확실하게 왕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개적인 대립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는 곧 왕에 대한 영향력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702-3)


"덴마크 전쟁은 덴마크가 어쩔 수 없이 강화를 청한 1864년 8월 1일에 끝났다. 이 분쟁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세 가지다. 첫째,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보다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세기 동안 전투 경험이 없는 군대로서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분쟁의 두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적 리더십이 군의 리더십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덴마크 전쟁은 프로이센으로서는 민간 정치인이 통제권을 행사한 최초의 군사적 분쟁이었다. 전쟁 내내 비스마르크는 갈등의 전제가 자신의 외교 목표에 확실히 기여하도록 유도했다." "마지막으로 전쟁 기간 내내 우위를 차지한 비스마르크의 위상은 긴장과 동시에 반감을 두드러지게 유발했다." "프로이센 최고 지도층은 1848년의 혁명 이후 자리잡은 민군 관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회피하고 외면해왔다. 이것은 1918년에 호엔촐레른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프로이센(그리고 독일)의 정치에 붙어 다녔다."(707-12)


# 전쟁 결과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양 공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국에게 이양되면서, 프로이센의 대오스트리아 전쟁의 단초로 작용한다.


"1866년 프로이센 승리의 주역은 참모총장인 헬무트 폰 몰트케였다. 보헤미아에서 몰트케는 덴마크에서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혁신적인 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전쟁에 임하는 그의 접근법은 프로이센군을 최고 속도로 공격 지점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소규모로 쪼개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개별 부대를 마지막 순간에 한곳으로 집결하게 해서 적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의 이점은 비좁은 국도와 단선 철도에 따른 수송 부담을 줄이고 교통체증을 피하는 데 있었다. 야전군의 증가된 진격 속도와 기동력은 적군보다 프로이센군이 결정적인 전투의 시기와 무대를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또한 철도와 도로, 전신 같은 최신 기반시설 자원을 교묘하게 활용하고자 하는 동원 개념이었다." "이 접근법의 단점은 각 부대가 진로를 이탈하거나 서로 속도를 조절하는 데 실패하면, 적군이 월등한 병력으로 이들을 각개 격파할 수도 있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721-2)


"새롭게 탄생한 프로이센 보병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장교의 명령에 따라 적군이 있는 방향으로 모여드는 가축 떼가 아니라 전투의 전문가였다." "그 결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는 야전 운영의 차이가 점점 커졌다. 오스트리아군이 '총검 돌격 전술'을 가다듬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특히 1859년의 재난 이후) 프로이센군은 바늘총에 중점을 둔 '화력 전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몰트케는 전투 현장에 질서정연한 보병부대를 방어적인 전술로 배치하는 동시에 대단위 부대는 공격적인 전술로 배치하여 유연성과 속도를 조합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와 달리 오스트리아군은 전략적으로는 방어에, 전술적으로는 공격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보헤미아에서 벌어진 전쟁은 속도의 이점이 사거리의 이점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총검을 꽂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보병들은 유리한 위치에서 후장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쏘아대는 연속 사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724-5)


# 전쟁 결과 :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하는 것에 동의했다. 남독일 국가들은 프로이센과의 동맹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야기하는 안보 위협이 통일을 촉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 황제는 1866년에 프로이센이 거둔 어마어마한 성공에 충격을 받고 그것이 프랑스의 이익을 위협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프랑스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사실에 분노했다. 1867년 봄, 비스마르크는 룩셈부르크 위기라고 알려진 외교 전략에서 이런 긴장을 활용했다. 룩셈부르크를 통합해서 기대를 충족하라고 은밀하게 나폴레옹 3세를 부추기면서 먼저 독일 신문에 나폴레옹의 계획에 대한 소식을 흘렸다. 이 뉴스가 민족주의적인 분노를 유발할 것이고, 비스마르크 자신은 국민의 뜻을 집행하는 명예와 신념에 따르는 정치가로 부상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위기는 독립 공국으로서 룩셈부르크의 지위를 보장하는 국제회의를 통해 해결되었지만, 비스마르크가 예상했듯이 간단히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결말이었다."(734-5)


"그러다가 에스파냐 왕위에 대한 호엔촐레른가의 계승 자격을 둘러싸고 다시 프랑스와의 갈등을 이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이것은 1864년 및 1867년과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위기였다. 그는 누구보다 왕조의 메커니즘과 대중 민족주의의 힘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활용하는 데 능숙한 인물이었다. 비스마르크의 기량과 술책은 탁월하기도 했지만 기만적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프랑스가 그의 손에 놀아났다고 말한다면 과장일 것이다. 전쟁도 불사하려는 프랑스의 준비 태세는 비스마르크의 행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유럽의 국제질서 속에서 특권적 지위가 축소되는 그 어떤 사안에도 원칙적으로 반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1870년에 프랑스가 전쟁을 벌인 것은 그들이 승리할 것(충분히 타당한 근거가 있다)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획했다'고 말하는 것도 과장일 것이다."(735-7)


# 전쟁 결과 : 프랑스 정부군이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강화 조약이 조인되었다. 남독일 국가들과의 통일이 진전되고 독일제국이 선포되어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1870년의 전쟁 이후 부상한 두 가지 요인(베를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긴밀한 유대 그리고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반목)을 통일 이후 수십 년간 유럽 정세의 상수로 본다면, 왜 프로이센-독일이 1914년 이전 수십 년간의 아주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고립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았는지를 더 쉽게 알게 된다. 파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주요 목적은 반독일 동맹을 결성해서 독일을 견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협력 체제를 위해 가장 매력적인 상대는 러시아였다. 베를린은 러시아를 독일의 동맹 체제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그런 프랑스의 의도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양쪽을 섞는 동맹 체제는 그 어떤 형태라고 해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정책은 점점 발칸반도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곳은 빈의 이익이 곧장 러시아의 이익과 충돌하는 지역이었다."(743-4)


16 / 독일로 합병되다


"공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 독일 안에서 프로이센의 위치는 1871년 4월 16일의 제국헌법(Reichsverfassung)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 주목할 만한 문서는 복잡한 역사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독일제국을 세우기 위해 모여든 독립 군주국들의 야망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했다는 말이다. 비스마르크 자신은 주로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다지고 확대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지만, 이런 정책은 바덴이나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정부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결과로 나온 헌법은 유난히 각국에 위임된 성격이 강했다. 사실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헌법이라기보다는 독일제국을 세우는 데 합의했던 주권국들 사이의 '조약'이었다." "새 제국이 통치 영주의 연방, 즉 '영주동맹'이라는 취지에 따라서, 제국의 각 구성국은 그들 자체의 의회 입법부와 헌법을 계속 유지했다. 즉, 복수의 독일 왕위와 궁정이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각국은 여전히 다양한 특권과 전통적인 위세를 떨쳤다."(748)


"비록 비스마르크 수상은 언제까지나 독일이 '영주동맹'으로 남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헌법에서 보장한 연방상원의 권한은 결코 충족되지 못했다. 그렇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군사적으로나 영토의 크기로나 프로이센의 위상이 지나치게 앞선다는 현실이었다. 연방 전체에서 영토 면적으로 65퍼센트를, 인구로는 62퍼센트를 차지하는 프로이센이 사실상 연방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프로이센의 독보적인 위치는 제국 행정기관의 상대적인 부실함으로도 나타났다. 신통찮은 제국 행정부는 폭증하는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새 부처가 세워진 1870년대에 등장했지만 계속 프로이센 행정조직에 의존했다. 제국 관청(외무, 내무, 법무, 체신, 철도, 재무)의 각부 수장은 정확하게 말하면 장관이 아니라 제국 수상에게 직보하는 낮은 직급의 차관이었다. 프로이센의 관료기구는 제국의 조직보다 규모가 컸으며 이 상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750-1)


"프로이센의 헌법은 시간의 변화를 좇아가지 못했지만, 프로이센의 정치문화는 그렇지 않았다. 보수당의 주도권은 인상적이었으나 동시에 중요한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제국의회의 의원들(이들은 다수가 사회당이거나 자유당 좌파였다)이 포진한 프로이센과 주의회 의원들이 지배하는 시골의 프로이센은 양극단으로 갈렸다." "보수파 일색의 중심지 바깥에서, 특히 서부 지방과 다수의 도시에서는 왕성한 중산층의 정치문화가 두드러지게 융성했다. 많은 대도시에서는, 제한적인 도시 선거 덕에 유지된 자유당 과두 체제가 기반시설의 합리화나 사회복지 같은 정책을 주관했다." "1890년의 선거에서 사민당은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최다득표를 한 독일 정당이 되었다." "20세기로 바뀔 무렵, 프로이센은 유럽에거 가장 크고 잘 조직된 사회주의 운동의 구심점이었는데, 이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대한 적절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754-6)


"한편, 프로이센 정부는 유대인의 공직 응모에 대한 차별정책을 지속했다. 심지어 1890년대에는 유대인 시민이 기독교식 성(姓)을 채택하는 것까지 막기 시작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누가 유대인인지 아닌지 혼란을 일으킨다는 인종주의적 이유로 유대인의 성씨 개명을 반대했다. 프로이센 정부 당국(특히 보수적인 내무장관 보토 폰 오일렌부르크)은 기존의 방침에서 벗어나 특별히 유대인 지원자를 차별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기조를 따랐다. 1916년 10월,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전방에서 현역에 복무하는지를 판단할 목적으로 프로이센 전쟁장관이 실시한 '유대인 통계조사'도 같은 이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망치연맹'(1912년 설립) 같은 전국적인 반유대주의 조직은 오래전부터 독일 유대인은 조국 수호에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고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들은 전쟁 발발 이후, 특히 1915년 말부터 익명의 비난과 불만 제기로 프로이센 전쟁부를 맹공격했다."(782-3)


"황제의 임무에 대해서는 독일 헌법에 확실한 근거가 없었고, 그와 관련한 정치적인 전통도 없었다. 가장 분명한 것은 황제 대관식이 열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1888년에 즉위한 빌헬름 2세도 이런 약점을 알았다. 그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직무를 황제의 위상에 맞게 격상시키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그는 끊임없이 여러 독일 국가를 여행했고, 독일 국민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준 성스러운 전사로서 조부를 찬양했다. 그리고 새로운 경축일과 기념일을 도입했다. 말하자면, 프로이센 왕위의 헌법적·문화적 벌거숭이 상태를 국가의 역사라는 외투로 가리려고 한 것이다. 그는 독일 대중에게 자신이 '제국 개념'(Reichsidee)의 화신으로 비쳐지게 했다. 이렇게 독일인의 마음에 황제 지위가 정치적·상징적인 현실로 자리 잡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와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연설이었다." "빌헬름 개인에게 연설은 그가 종종 자각하는 정치적 압박과 무기력한 상황에 대한 보상이자 효과적인 통치 도구였다."(794-5)


"프로이센 왕조의 마지막 며칠간은 비극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빌헬름 2세는 측근들이 숨기는 바람에 1918년 독일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최악의 뉴스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9월 29일 루덴도르프로부터 패전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로 눈앞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통치자로서 빌헬름의 미래가 경각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종전이 임박한 몇 주간, 특히 10월 중순 검열이 완화되고 나서 폭넓게 논의되었다." "11월 9일 오후 2시에 그가 프로이센 왕이 아닌 황제로서 퇴위에 관한 성명서에 막 서명하려고 할 때, 신임 제국총리인 막스 폰 바덴이 이미 한 시간 전에 황제가 두 개의 직위에서 퇴위했다고 발표했으며 정부는 사회민주당 소속인 필리프 샤데만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소식이 사령부로 들어왔다." "충격에 빠진 빌헬름은 1918년 11월 10일 이른 시간에 네덜란드 국경을 넘은 뒤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815-7)


17 / 종말


"패전 이후에도 프로이센 주는 살아남았다. 온건 노선의 사민당 지도부가 정책적으로 연속성과 안정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통일 공화국에 약속한 정책을 제쳐놓고 여전히 멀쩡한 프로이센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겠다는 의미였다. 1918년 11월 12일, 대(大)베를린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 집행위언회는 지방자치단체 및 국가 단위의 모든 행정 관청은 기능을 계속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튿날 혁명 집행위원회는 「프로이센 인민에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철저하게 반동적인 과거의 프로이센을 (···) 완벽하게 민주적인 인민궁화국〉으로 바꿀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11월 14일, 사민당과 더 좌파 색을 띠는 독립사민당의 의원들로 구성된 프로이센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공무원들은 그들의 충성이 소멸한 왕정이 아니라 혁명위원회가 관할하는 현재의 프로이센 주를 향한 것임을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에 확실하게 다짐하면서 변화를 이끌었다."(829)


"마치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다. 프로이센은 패전과 혁명을 거치면서 정치 시스템의 양극단이 반대로 바뀌었다." "1920년 11월 30일에 나온 프로이센 헌법에 따르면, 새 프로이센의 주권은 '국민 전체'의 손에 있었다. 프로이센 의회는 더 이상 상급기관에 의해 소집되거나 해산되지 않고 헌법이 정한 법률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집했다. 독일 대통령 한 사람에게 엄청난 권력이 집중된 바이마르 (국가) 헌법과는 대조적으로, 프로이센 체제에는 대통령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보다 민주적인 요소는 더 철저하고 권위주의적인 요소는 더 약했다." "프로이센은 독일에서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정치적 안정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바이마르의 정치가 전국적인 차원에서 극단주의와 갈등, 정부의 빠른 교체 같은 특징을 보인 데 비해, 프로이센의 대연정은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온건개혁의 길로 나아갔다."(840-1)


"하지만 그 변화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사법제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새 집권층의 업적은 대수로울 것이 없다." "판사 대부분이 좌익 정치범에게 강경하고 극우 범죄에 관대하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이 분야에서 국가가 급진적 행동을 취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판사의 기능적·개인적 독립에 대한 깊은 존중이었다(특히 자유주의자와 가톨릭 중앙당 연정 파트너 사이에서). 판사의 자율성(정치적 보복과 영향력 행사로부터의 자유)은 사법 절차의 진실성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간주되었다. 일단 1920년에 이 원칙이 프로이센 헌법에 소중하게 반영된 이상, 사법부의 반공화주의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신임 판사를 임명하는 절차를 바꾸고 정년제를 도입함으로써 미래를 위한 개선을 약속했지만, 1920년에 도입한 제도는 효과를 볼 만큼 오래 가지 못했다. 1932년 베를린 헌법재판소의 한 재판관은 프로이센 판사 중에 공화주의자가 5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평가했다."(842-3)


"프로이센 연립정부는 당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 곧 점진적으로 공화국화를 추진하는 길로 나아갔다. 다만 그들은 이런 정책이 완벽한 효과를 내기 전에 독일 공화국이 소멸될 것이라는 점은 알지 못했다. 아무튼 프로이센의 존립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국가공무원 조직이 아니라 국가 조직 바깥의 강력한 이익집단에서 발생했고, 이는 결국 공화국의 몰락에 기여하게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 위협은 1919~20년에 진압되었지만, 극좌파는 선거에서 꾸준히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우익 세력은 이들과 이념적으로는 다르다 해도 과격하고 단호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였고 수적으로는 훨씬 많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프로이센의 (또한 독일 전체에서 일반화된) 정책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보수적 환경'이 새 공화국의 정치문화에 전혀 수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후에 등장한 지리멸렬하지만 규모가 큰 야당 극우 세력은 새로운 질서의 합법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845-6)


"1932년 7월 17일 '알토나의 피의 일요일'에 나치는 (주로 공산주의자가 많은) 노동계급 거주 지구를 행진하며 도발했다. 이에 따른 혼전의 와중에 (경찰의 발포로) 18명이 피살되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파펜과 각료들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프로이센 정부가 법질서 수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이 준군사조직의 활동 금지를 풀어준 사람이 파펜 자신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막히게 어이없는 혐의였다) 총리는 1932년 7월 2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서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오토 브라운 프로이센 수상이 이끄는 정부를 해산시키도록 했다. 프로이센의 장관들은 '판무관'으로 대체되었다." "사민당 지도부는 이렇게 터무니없는 불법 행위에 지극히 소극적이고 체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몇 주 전부터 해산 조치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이것을 막기 위한 어떤 계획이나 조직적인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859)


"사민당 지도부가 이토록 무기력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프로이센의 사민당과 그들의 연정 파트너는 1932년 4월 지방의회 선거에서 주의회의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뒤로 이미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원칙에 충실한 민주주의자로서 그들은 유권자의 심판에 의해 정치적으로 힘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토 브라운처럼 준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관료 집단이 반란을 감행하는 것이 내킬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비서에게 〈40년간 민주주의를 신봉해온 내가 반란군의 수괴가 될 수는 없지〉라고 말했다. 브라운과 그의 수많은 동료는 긴 안목으로 볼 때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프로이센의 분할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책략에 의해 섬뜩한 일을 당하더라도 국가권력이란 사안을 위협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권력의 균형추는 프로이센 정부의 반대편으로 기울었다."(860)


"(괴벨스가 주도한) 나치의 프로이센 과거 읽기는 기회주의적이고 왜곡되었으며 선별적이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 주의 전체 역사는 인종차별적 사고에 물든 민족적인 독일 역사의 패러다임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치는 프로이센 계몽주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치는 민족주의적 공약 때문에 프로이센의 개혁가인 슈타인을 높이 평가했지만, 대조적으로 친프랑스 성향의 '현실정치가'이자 프로이센 유대인의 해방론자인 하르덴베르크는 완전히 무시했다. 또 피히테와 슐라이어마허에게는 열광했지만 헤겔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국가의 초월적인 위엄을 강조하는 헤겔의 견해가 나치의 '민족주의적' 인종차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치가 내세우는 프로이센은 전설적인 과거의 파편 중에 번쩍이는 것들을 모아놓은 물신 숭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가공된 기억이고 정권의 가식에 대한 부적 기능을 하는 장식품 같은 것이었다."(880-1)


"따라서 1943년 1월의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프로이센 정신'이라는 요소는 연합군이 채택한 무조건 항복이라는 정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45년 가을이 되자, 점령지 독일을 다스리는 영국의 여러 행정기관에서는 (확실히 쓸모없는 형태로) '송장이나 다름없이 빈사 상태에 빠진 프로이센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명줄을 유지해봤자 '위험한 시대착오 정신'만 조장하리라는 것이었다. 1946년 여름, 이런 생각은 재독일 영국행정부의 확고한 정책이 되었다." "미국과 프랑스 대표도 이런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단지 소련만이 꾸물거리며 결정을 미뤘는데, 주로 소련이 궁극적으로 통제권을 확보할지도 모르는 통일 독일의 중심축으로 프로이센을 이용할 수 있다는 희망을 스탈린이 여전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7년 2월 초가 되자, 그들도 보조를 맞추면서 프로이센 주를 법적으로 종료시키기 위한 길이 열렸다."(8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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