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최대의 전투 : 모스크바 공방전
앤드루 나고르스키 지음, 차병직 옮김 / 까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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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모스크바 전투는 모르긴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고, 이론의 여지없이 두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투였다. 양측을 합쳐서 약 700만 명의 장병이 참전했고, 그중 250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러시아 군사 기록에 의하면 전사자, 실종자, 포로로 잡힌 병사를 포함한 95만 8,000명이 결국에는 모두 〈사라졌다.〉 그 외 93만 8,500명의 군인들이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소련군의 전사자 수는 모두 189만 6,500명에 달했다. 반면 독일군의 희생자 수는 61만 5,000명이었다." "모스크바 전투는 국제사회 전체가 주시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미국, 영국, 일본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이 전투의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느냐에 따라서 중요한 정책 결정을 달리 하고 있었다. 독일군을 모스크바 근교에서 저지하지 못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의 귀추를 포함한 전반적인 국제정세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10-1)


1장 히틀러는 1941년에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개전 전야 : 2인의 독재자


"스테판 미코얀은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경고를 담은 첩보를 계속 수집해서 보내던) 자국 정보원들을 불신했던 스탈린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제시한다. 〈정보원들의 보고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은 인간에 대한 그의 극도의 불신을 드러냅니다. 스탈린은 모든 인간이 그를 속이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어요.〉" "스탈린의 의심증을 놓고 보았을 때, 히틀러가 머지않아서 그를 배신할 것이라는 서구 국가들의 경고를 무시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1년 4월,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인 로렌스 스타인하트와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에게 히틀러의 계획을 알리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독일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리려는 다른 시도들, 특히 영국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이러한 경고를 독일과 소련을 이간질해서 결국에는 서로를 배신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자신들이 득을 보려고 한다〉면서, 스탈린은 불만을 터뜨렸다."(43)


"스탈린이 시간을 벌려고 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전기작가였던 아이작 도이처는 스탈린이 나폴레옹과 화해함으로써 전쟁을 준비할 4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던 알렉산드르 1세처럼 되고 싶어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스탈린이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는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군대를 준비시키는 데에 활용할 수 있었던 시간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준비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게다가 스탈린이 당시 폴란드 동부와 발트 해 연안국가들에서의 소련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는 소련과 나치 독일 사이에 영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믿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독일과 연합국이 오랜 갈등 속에서 서로를 지치게 하는 동안 소련은 숨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고, 어쩌면 후에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47-8)


2장 우리가 얼마나 똑똑한지 이 꼴을 보고 말해보라지─기습, 개전, 반격


"공격 개시 한 달 만에 독일군은 약 700킬로미터 이상을 진군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경이적인 속도였는데, 이는 그들이 공격한 대부분의 지역들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독일군의 사기는 그들이 소련 영토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면서 맞닥뜨린 소련군의 혼란에 비례해서 치솟았다." "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일리야 드루즈니코프는 아들 유리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대에는 10명당 1대의 총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는 곧 무기가 없는 병사들은 총을 든 병사의 뒤를 줄줄이 따라다녀야 한다는 뜻이었다. 총을 들고 있던 병사가 쓰러지면, 다음 병사가 얼른 그 총을 집어들어야 했다. 장교들은 적군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에 도망치려고 대열을 이탈하는 병사를 언제든지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병들은 전장으로 달려가서 적군의 시체에서 무기 탄약, 군복 등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거두어오라는 명령도 종종 받았다."(58-9)


"모두가 우왕좌왕 헤매는 상황에서 소련군 최고 사령부, 일명 스타브카(Stavka)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스탈린도 심리적 압박감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고 크렘린 궁에 복귀했고, 그 순간부터 다시 통제권을 손에 쥐었다. 7월 3일, 그는 마침내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시작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동지들! 형제들과 자매들이여! 우리의 육군과 해군 전우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말하고 있소, 친구들이여!〉 스탈린은 외쳤다. 독재자 스탈린이 국민들을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친구들〉이라고 부른 것은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국민들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이 국민들을 신하가 아니라 공동의 싸움을 함께 치러나갈 동료로 대하려고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매우 혁명적인 변화였고, 연설을 듣는 국민들 모두 그렇게 느꼈다."(67)


"히틀러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한 순간, 생사를 건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일군으로서는 소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모스크바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1941년 여름, 목표가 가시권 안에 들어오자 히틀러는 주저했다. 모스크바의 운명,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두 독재정부의 운명이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평소에는 대담하던 히틀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히틀러의 장군들도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공격 초반의 성공이 가져다준 낙관적 관측은 히틀러에게 동부전선의 다른 목표, 특히 우크라이나를 정복할 여유가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한편, 모스크바 점령에 대한 내심의 초조함이 히틀러로 하여금 모스크바 공격을 미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게 했다. 머지않아서 히틀러의 그 결정이 스탈린에게 한 가닥 희망을 안겨준 중대한 오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마치 두 독재자들이 상대방의 실수에 자신의 실수로 대응하기로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80)


3장 숙청의 대가─혼란의 방어


"스탈린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 자들과 탈주병들을 처형당해 마땅한 '변절자'라고 칭하면서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는 지휘관들도 실책을 범하는 경우에는 병사들과 똑같은 처지에 빠진다고 경고하고 싶었다. 게다가 전쟁 초반에 계속된 치욕스런 패배의 책임을 전가할 몇 명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서부전선의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의 부대는 민스크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는 독일군을 막지 못했고, 그의 수석 부관들은 그 희생양의 역할을 맡을 자들로 즉시 지목되었다. 그들은 체포되었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혐의는 〈반소련군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서 대략 15만 8,000명의 소련군 병사들이 처형되었다. 반면에 독일 군사법정은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모든 전선에 걸쳐서 총 2만 2,000명에게 도주를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자기 군대의 병사나 장교를 처벌하는 일에 관해서라면 스탈린은 히틀러를 가볍게 능가했다."(94-5)


"스탈린의 지지자들과 옹호자들은 그의 숙청 정치 전략이 독일의 침략 전후를 막론하고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1986년 사망하는 그날까지 스탈린에게 충성했던 몰로토프는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의 군부 숙청을 이렇게 옹호했다. 〈물론 과도한 면은 있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그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 즉 국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오직 진정한 스탈린주의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당신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그 자신조차 그것을 모를지라도, 누구나 인민의 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전쟁 전 스탈린의 논리였고,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던 전쟁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논리였다.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도망치는 아군의 등 뒤에 총을 쏘는 〈저지부대〉의 형태이든 힘들여서 피란시킬 필요를 없애기 위한 수감자들에 대한 광란의 처형의 형태이든, 오직 숙청 또 숙청만이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107-8)


4장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좌충우돌의 공격


"히틀러가 생각하는 동쪽 정복지의 미래상이란 숙청 정치에 따르는 죽음과 예속 외에는 없었다." "히틀러의 말은 결코 허황된 수사가 아니었다. 군인들 사이의 전우의 개념을 잊으라는 히틀러의 선언은 그 악명 높은 코미사르 지령(Commissar Decree)으로 이어졌다. 붉은 군대 소속의 정치 장교들은 설사 투항할 의사를 표시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처형하라는 지시였다.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하기 한 달도 더 전인 5월 12일에 작성된 코미사르 지령은 이러했다. 〈붉은 군대의 정치 군인은 생포되더라도 전쟁포로가 아니다. 전쟁포로들과 함께 일시적으로 임시수용소에 수용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 독일군의 코미사르 지령은 발령과 동시에, 붉은 군대의 정치 장교들로 하여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확고한 결의를 다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어차피 패배는 곧 처형으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114-5)


"독일군에게 좋은 소식도 있었는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스크바로 곧장 통하는 지형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이 독일 중앙집단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간신히 병력을 보강하여 버티는 가운데, 스몰렌스크까지 도착한 중앙집단군 지휘관 페도르 폰 보크에게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적은 동부전선 중 오직 한 곳에서 철저하게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다. 바로 중앙집단군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대단한 자기 확신에서 오는 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초기의 여러 목적을 달성했던 히틀러는 부하 장군들의 간청에 대답하기까지 약 3주일 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내 그가 내린 결론은 보크나 할더뿐만 아니라 브라우히치와 다른 최고 간부들의 제안과도 완전히 상반되는 명령이었다. 핵심은, 현재 북부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로 향한 진군을 최우선으로 하고, 남부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캅카스까지 밀어붙이는 데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돌발적인 결정이었다."(128)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명령은 됭케르크 바로 목전에서 구데리안 부대의 진군을 멈추게 했던 결정보다 더 중대한 실수로 느껴졌다."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도 그의 장교와 병사들이 적군의 군사적 행동에 의한 희생보다 다른 요인에 의해서 더 큰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었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병사들의 희생자 수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었다. 그 결과, 마침내 모스크바를 향하게 된 독일군은 여전히 승리를 구가하고 강력한 힘을 과시했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처럼 통제 불가능할 정도의 괴물은 아니었다. 독일군은 한 번 이상 호되게 당했고, 구데리안의 경우과 같은 경로와 목표의 갑작스런 변경을 포함하여 그렇게 빠르게 그리고 그렇게 멀리까지 이동하는 데에 따른 긴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어려운 시련에 직면하기 직전이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은 커져갔다."(134-8)


5장 모스크바가 위험하다─함락이 목첩에


"키예프 전투에서는 스탈린이 그의 장군들에게 우크라이나 수도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했으므로, 소련군은 독일군에 포위된 채 큰 손실을 입었다. 주코프 장군과 다른 지휘관들은 후퇴하는 것만이 큰 손실을 막고 전력을 재편성하여 이후의 다른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키예프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소리를 질렀다. 히틀러처럼, 스탈린도 그의 장군들의 충고를 조금도 주저함 없이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 "이와 달리 비야즈마 근교에서 일어난 비극은 통신수단과 사령부의 명령 전달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타이푼 작전을 시작하면서, 가능한 많은 붉은 군대 병력을 비야즈마 근교에 포위하여 가두려고 독일군이 신속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소련의 지도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따라서 그곳은 죽음과 파멸의 지옥인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141)


"9월 11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함락하는 데에 곧 성공할 것처럼 보이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보로실로프 원수의 임무를 대신 맡도록 했다." "새로 임지에 도착한 주코프는 신속하게 명령을 하달하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보이는 장교들을 해고하거나 재배치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후퇴를 금지하고 다시 공격을 시도할 것을 요구했으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총살형을 집행하는 부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달 말 독일군의 진군은 저지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해서 결국 주민들을 아사 상태에 빠뜨리는 900일 동안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전개되었다." "스탈린과 그의 장군들이 처음에 인식하지 못한 것은, 9월의 후반부 동안 히틀러가 많은 군대를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타이푼 작전에 대처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부대를 재배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레닌그라드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가 약화된 이유였다."(157-8)


"스탈린의 귀환 명령을 받고 서부전선의 사령부로 달려갔던 10월 6일 밤, 주코프는 그곳의 장교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상황이 정말 암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휘관들은 비야즈마 근처에서 포위된 부대들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주코프의 표현에 따르면 〈서부에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전선이 없었다. 보충할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공백과 결함을 메울 수가 없었다.〉" "주코프는 포돌스크 사관학교에서 4,000명의 사관후보생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방어선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취약한, 독일군이 진군해서 접근한 말로야로슬라베츠 부근을 맡도록 했다." "그들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시간을 벌었다. 그동안 다른 부대는 모스크바를 완전히 둘러싸며 참호를 파고, 사격 진지와 대전차 장애물을 구축하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면서 결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또한 장교들이 부대를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강화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부대를 끌어모을 시간을 만들어주었다."(163-5)


"그런 와중에도 독일군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10월 14일, 독일군은 르제프를 점령했다. 르제프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2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독일군이 북쪽에서 모스크바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따라서 르제프의 함락은 독일군이 이제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절호의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르제프에서도 곧 비야즈마에 비교할 수 있을만큼의 대량 학살이 일어나서, 그곳 또한 또 하나의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집어삼킬 지옥의 도가니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비야즈마와 르제프 두 곳에서의 패배는 모스크바에 대한 최종 전투가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은 전투가 장기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모스크바는 대혼란에 휩싸이기 일보직전이었다."(167-8)


6장 인간의 형제애─기만의 동맹


"소련의 수도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맹공격을 주시했던 것은 당사자였던 모스크바 시민들이나 히틀러 또는 스탈린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 윈스턴 처칠은 영국에 대한 압박의 부담을 완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소련이 히틀러의 군대를 묶어두기를 바라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공격만 했다 하면 승리를 거둔 독일의 기계 군단에 홀로 저항하여 오랫동안 버텨온 터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틀림없이 주시하고 있었는데, 국민들에게는 털어놓지 않았지만 조만간 미국도 불가피하게 그 국제적 분쟁에 휘말려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도 분명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군의 공격 진행 과정을 신중하게 관찰하면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붕괴될 소련이라면 독일의 편에 가담하여 동쪽에서 공격을 시도해야 할 것인지를 저울질했다."(169)


"전투지역이 모스크바에 점점 더 가까워짐에 따라서, 모스크바에 주재하던 영국,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각국의 외교관들은 소련이 독일의 진격을 막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점점 더 부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런 진단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국가의 재외공관에서는 내부 동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가 표면화되기도 했다. 모스크바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매우 위태로운 근무지였는데,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에 기인한 격한 내부 갈등이 재외공관들 안에서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이 그 도시를 점령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은 그런 갈등을 격화시켰다. 모스크바가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각국의 외교관들은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의 원조 요청에 서구 국가들이 어떻게 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토론했다."(171-2)


"독일의 침략 전날 밤, 처칠의 개인 비서 존 콜빌은 처칠에게 확고한 반공산주의자로서, 소련 정부를 돕는다는 사실에 고민이 되지 않는지 물었다. 처칠은 대답했다. 〈전혀. 나의 목적은 오직 하나, 히틀러의 파멸이네. 그것으로 내 인생은 아주 단순명쾌해지지. 만일 히틀러가 지옥을 침략한다면, 국회에서 나는 악마에게 최소한 호의적인 언급은 해줄 것이라네.〉" "루스벨트와 그의 최측근들은 곧 처칠을 비롯한 영국 관료들 이상으로, 러시아의 전쟁 수행 노력을 칭찬하고 지원의 대가로 스탈린으로부터 무엇인가 양보를 얻어내려는 그 어떤 현실적 고려도 하지 않는 성선설적 입장의 정책을 펼쳤다.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루스벨트가 러시아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가치가 있는 동맹국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루스벨트는 일시적으로 상호주의 외교관계를 제안한 스타인하트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정책에 의해서 명백히 폐기되었다."(185-8)


7장 대혼란의 모스크바─1941년 10월


"소련의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식적 견해에 일관된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독일의 침략자들에 대한 항전에서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고 또 엄청난 희생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41년 10월 16일은 다른 어떤 날보다도 결정적으로 그러한 신화를 산산히 부수어놓았다." "아무리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도 모스크바 사태에 대한 다음 두 가지의 극단적 현상을 조화시킬 수는 없다. 하나는 매우 정화된 해석들이다. 다른 하나는 강탈, 파업 그리고─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체제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여러 행위들을 포함한 법과 질서의 갑작스런 붕괴라는 현실이다. 그러한 일은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그들의 도시가 독일군에 의해서 점령되기 직전이라고 확신했던 순간에 발생했다. 도시의 시민들은 단결되어 있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분열되었고,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한 상황이었다."(205-6)


"독일군은 거의 매일 공중폭격을 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스탈린은 자주 키롭스카야 지하철역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그는 합판으로 만든 벽에 의해서 역의 다른 공간이나 다른 열차들로부터는 가려진 특별히 준비된 열차칸에서 일하고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한 번은 스탈린은 지상에서 폭격을 직접 목격했다." "스탈린이 그 순간 느낀 것이 용기였든 공포였든 간에, 모스크바가 마치 안팎으로 무너질 듯이 보였던 10월 16일 그날, 그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무것도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시민 다수가 스탈린은 이미 도망갔다고 믿고 있던 상황에서,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들 훨씬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의 결정은 자포자기 또는 결단의 신호로 비추어질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 며칠 동안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스탈린의 고민의 이유였을 것이다."(222-3)


"여전히 결정을 서두르지 않고 있던 스탈린은 마침내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갑자기 다시 모든 업무를 장악했다. 그가 생애를 통틀어서 의지해온 전략인 폭력의 사용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10월 19일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내무인민위원부의 군대를 거리에 출동시켰다. 그들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자는 누구든지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상 재판소는 약탈자들은 물론 법과 질서를 위반한 자들을 규율할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즉각적인 처형을 의미했다." "그 뒤로 계속 이어진 강압적 단속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다. 다만 스탈린이 다시 지휘한다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는 없었다. 약탈은 순식간에 중단되었고, 모스크바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독일의 점령을 저지하고야 말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다지기 시작했다."(224-5)


"독일군을 피해 퇴각하는 군인들을 총살하는 사격이 보여주듯이, 소련 지휘부의 상투적 수법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누구든지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소련 정부로서는 현재의 전투와 관련이 있든 없든, 공포 정치를 철회할 어떠한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반대로 억압체제는 계속 유지되었고, 종종 강도가 배가되기도 했다. 주코프가 인민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한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스탈린의 총살 집행관들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1930년대의 군부 숙청 재판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을 없애버렸다. 희생자들 중에는 1938년에 재판에 회부되어서 총살된 투하쳅스키 원수와 다른 몇몇 고위 장교들의 부인들, 스페인 내전에서 활약한 유명한 전투기 조종사들인 파벨 리차고프와 야콥 스무시케비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모스크바를 살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조차, 내부의 유혈 사태를 중지시킬 수 없었다."(233-4)


8장 파괴 공작원, 곡예사, 스파이─끊임없는 계략


"1941년 10월 초, 내무인민위원회는 독일군이 곧 모스크바를 점령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최후의 저항수단은 지하조직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서 이전이 불가능한 공장과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예이틴곤의 메모에 적힌 다른 특수 공작원들의 조직 이름은 '어부들', '노인들', '충신들', '무법자들' 그리고 '소가족' 등이었다. 개별 첩보원들의 신상은 모두 코드명으로 기재되었고 각자가 맡은 구체적인 특수 임무도 표시되었다. 예를 들면, '무법자들' 조직의 지휘관 '마르코프'는 전에 강도였다. '무법자들'의 임무는 〈독일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행하는 것〉이었다. '소가족'의 조직원 '그립 바이스'는 〈엔지니어, 스포츠맨 그리고 귀한 집안 출신〉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 직원과의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8년 동안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용당하는 선고를 받았지만, '그립 바이스' 자신은 〈아주 충직한 첩보원〉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었다."(237-43)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정확한 보고서 때문에 스탈린을 격노하게 만든 이래로, 소련군 첩보부에 있는 그의 상관들은 조르게가 독일의 스파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바로 그 때, 조르게는 소련 정부가 원하는 내용을 보고했다. 9월 중순, 주일 독일 대사 오트와 다른 독일 외교관들은 일본이 독일의 참전 요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소련을 공격하는 대신에 일본 정부는 동남 아시아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야망을 달성하는 데에 미국을 최대의 장애물로 보고 있었다." "그 결과, 스탈린은 소련 극동 지역의 대부분의 병력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서 이동시키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다. 10월로 들어서자, 그들 스스로 시베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극동 지역의 병사들이 소련의 심장부로 이동했다." "거의 대부분이 방한용품을 제대로 갖춘 시베리아 부대의 지원병이 도착하자, 모스크바 방위군의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263-4)


9장 하느님, 오 하느님─혁명 기념일 : 전쟁의 전환점


"1941년 8월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한 독일 병사는 붉은 군대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사용되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인해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 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자 〈기관총 사수의 환상적 표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회상했다. 〈적이 600미터 전방까지 다가오면 우리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면 파도처럼 밀려오던 맨 앞쪽의 적군들은 거의 쓰러지고, 살아남은 몇 명만이 마치 아무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계속 앞으로 걸었다. 그런 모습은 기분 나쁠 정도로 기이했으며, 믿을 수 없었고, 비인간적이었다. 우리 독일 병사들 같았으면 결코 그렇게 혼자 걸어서 계속 전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된 사격으로 독일군의 기관총은 과열되었고, 소련군 측에서는 끊임없이 병사들을 내보냈다. 소련 병사들은 3일 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동안 소련 진영에서는 사상자를 위한 들것 운반병을 단 한명도 보내지 않았다."(275)


"구데리안은 한때 모스크바 돌파라는 독일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지만, 어느새 그의 탱크부대가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10월 3일, 구데리안 탱크부대가 오렐을 제압하고 난 직후, 그들은 소련의 T-34 전차와 맞붙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바로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탱크의 우수한 성능을 즐길 수 있었다. T-34를 만난 직후부터 상황은 역전되었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다른 중요한 변수는 날씨였다. 10월의 진흙탕은 그 자체가 막강한 적이었다. 독일군 중앙집단군 사령관 육군 원수 페도르 폰 보크는 10월 21일자 야전 일기에 〈러시아놈들보다 습기와 진흙탕이 우리를 더 괴롭히다니!〉라고 썼다." "11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서리가 진흙탕 길을 얼어붙게 만들어서 구데리안 부대가 진군하기에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얻은 안도감은 하강하는 기온이 부대에 미칠 영향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상쇄되었다."(279-80)


"추위에 언 것은 독일군만이 아니었다. 탱크를 비롯한 모든 차량에 들어있던 윤활유까지 얼어붙었다. 모스크바 진입로에 주둔하던 독일군 부대에는 부동액은 물론, 꼼짝하지 않고 멈춘 차량을 끌 수 있는 체인조차도 보급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독일군 전투기가 로프를 던져주어서 그것으로 차량을 견인했다.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독일 전쟁 계획 수립자들로 하여금 겨울 장비를 공급할 생각조차 못하게 한 조기 승리론의 지나친 낙관주의적 기대는 점점 심각해지는 보급 수송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시베리아 부대는 모스크바 북서쪽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재탈환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났다." "그 전투에 참전한 예델만은  전쟁의 기록을 정확히 하고자 애썼다. 〈사람들이 '조국을 위하여!', '스탈린을 위하여!'라고 소리쳤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 누구도 그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전쟁 뒤에는 수많은 신화만 남았습니다. 진실은 조각조각 발견될 뿐이지요.〉"(290-3)


10장 감상에 빠지지 말라─1941년 11월, 생사의 결전


"스탈린이 주코프에게 12월 6일 최초의 반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하는 동안, 히틀러는 독일군이 한계에 이르렀고 지칠 대로 지쳤다는 장군들의 간청에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히틀러는 겨울 동안 모스크바 점령과 다른 주요 목표를 위한 군사작전을 잠시 멈추라고 지시했다. 12월 8일에 내린 지령 제39호의 내용은 이러했다. 〈동쪽에서 놀랄 만큼 빨리 찾아온 혹독한 겨울 날씨와 이에 따른 군수물자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모든 주요 공격작전을 중단하고 방어태세로 돌입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실책, 특히 겨울 전투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결과로 일어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표면상으로는 히틀러가 독일군이 방어태세로 전환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전투 현장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열악했다. 그는 여전히 장군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모스크바 전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상황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군사적 판단을 맹신함으로써 스탈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298-9)


"히틀러는 12월 8일 마지못해서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 동안 방어선을 구축하고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모스크바 근방에 포진한 부대 지휘관들의 조언을 계속 묵살했다. 독일군이 이듬해 봄에 다시 모스크바 장악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전력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처럼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인명을 걱정하는 것은 나약함을 드러낸다고 보는 사람이었다. 스탈린이 희생시킬 수 있는 병사들이 히틀러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육군 총사령관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구데리안에게 제한적인 후퇴를 허락했고, 구데리안을 재빨리 이행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러한 퇴각이 예외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12월 16일 밤에 구데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은 다소 불안정했지만 히틀러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구데리안은 현재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며 더 이상의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306-8)


"1942년 3월 6일의 일기에서 괴벨스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이래 모스크바 근교 전투를 포함한 동부전선 전체에서 발생한 병력 손실을 계산해보았다. 전사자들은 약 20만 명에 달했고, 사상자들과 실종자들까지 포함한 숫자는 거의 1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는 겨울 날씨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특별히 지적했다. 〈2월 20일까지 11만 2,627명의 동사자와 동상 환자가 보고되었다. 그중 1만 4,357명이 3도 동상이었고, 6만 2,000명이 2도 동상이었다. ······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혹한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 그는 그러한 사태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을 다시 한번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래도 최종 집계한 피해자 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늘 그렇듯이 괴벨스의 결론이 의미하는 것은, 나치 지도부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만큼의 위엄과 금욕적 인내를 발휘하지 못한 병사들 때문에 그런 희생자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315-6)


11장 최악의 시나리오─전후의 세계 질서 구상


"1941년 7월, 처칠 정부의 재촉에 따라서 주영 소련 대사 마이스키는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의 지도자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장군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비록 영국이 폴란드의 동맹국으로 참전하긴 했지만, 이제는 소련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 일이 처칠의 주요 관심사였다." "7월 30일에 체결된 소련과 폴란드의 조약은 소련 영토 내에서의 폴란드 군부대 결성과 소련에 감금된 폴란드인들의 사면 조항을 포함했고, 소련과 폴란드 사이의 외교관계를 복원시켰다. 그러나 1939년의 독소 조약을 무효로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영토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영국 하원에서 외무장관 이든은 1939년의 영토 변경은 승인하지 않는다는 영국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영제국이 국경 문제와 관련해서 어떠한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치에하노프스키가 표현한 대로, 그로써 폴란드인들은 〈영국의 새로운 회유정책의 개막과 함께 첫 먹잇감〉이 되었다."(330-2)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즉시 이든에게 두 가지 조약 초안을 내놓았다. 하나는 영국과 소련 사이의 전시 군사 동맹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래 유럽의 국경선 획정(劃定) 같은 영토 문제를 포함한 전후 체제 구상에 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곧장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달복달 화를 냈다. 그는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얻어낼 수 있는 데까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언제 물러나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자신의 공격적인 전략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느끼면 바로 한 발짝 양보했다." "이든은 가까스로 스탈린이 요구한 약속을 모두 회피할 수 있었지만, 그 첫 번째 방문이 앞으로 계속될 사건들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든은 알고 있었다. 이든은 처칠에게 보낸 전부에 스탈린은 영토 야욕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우리는 이 문제에 계속 시달릴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라고 썼다."(333-9)


"처칠의 냉정한 계산에 따른 접근이 전쟁 후반 스탈린의 야욕을 꺾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면, 루스벨트의 해결 방식은 순진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진심으로, 비밀 협약을 맺거나 나중에 처리하고 싶어했던 영토 문제에 대해서 서면으로 약속하는 것을 피하기를 원했다. 특히 그는 영토 문제에 대한 입장 덕분에 전후의 폴란드 고위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폴란드계 미국인 유권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다른 신호를 보냈으며, 스탈린의 의도를 호의적으로 해석했다. 그 모든 것들이 소련 문제와 관련한 영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을 조성했다." "결국 1945년 얄타 회담에서 동유럽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었고, 스탈린이 바랐던 대로 국경선이 재획정되었다." "비록 서로 다른 전략을 구사했지만, 처칠과 루스벨트 모두 결국 스탈린에게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만 심어준 셈이 되고 말았다."(342-5)


12장 참혹한 승리─상처뿐인 영광


"1942년 1월 11일, 스탈린은 칼리닌 전선의 지휘관에게 부근의 르제프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을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하달했다. 르제프는 인구 5만 4,000명의 도시로, 1941년 10월 14일 이래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북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르제프는 소련과 독일 군대 모두에게 모스크바로 향하는 핵심 발판기지로 간주되었다." "모스크바 전투의 연장전이나 다름없었던 르제프 전투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독일군을 몰아내라는 스탈린의 반복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일련의 작전은 거듭 실패했다. 당시 통계가 과장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소련 측의 사상자 수는 충격적일 정도로 많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소련군 참전용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르제프 전투를 〈르제프 고기 분쇄기〉라고 표현한다. 독일군이 결전을 벌이지 않고 후퇴하기로 결정해서 마침내 1943년 3월에 소련군이 르제프에 입성하기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359)


"훗날 주코프와 그의 옹호론자들은 소련군의 그 희생 덕분에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육군 원수의 제6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묶어두었다고 주장했다. 우라누스 작전을 수행하던 붉은 군대는 11월에 파울루스 부대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해서 독일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주코프가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르제프에서의 실패를 우라누스 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의 하나로 정당화하는 것은 〈잘 봐줘야 솔직하지 못한 변명 아니면 뻔한 거짓말〉이라고 군역사학자 데이비드 M. 글랜츠는 지적했다. 글랜츠는 그의 저서 『주코프의 대패』에서, 마르스 작전이라는 이름의 북부 공격은 스탈린의 최고 군사사령관으로서 그가 초래한 최악의 패배라고 주장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1943년 1월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그토록 집착했던 르제프는 그해 3월까지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었던 것이다."(363-4)


"소련은 전쟁 기간 중 계속된 스탈린의 숙청정책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반역, 대열 이탈, 그외의 다른 범죄에 대한 혐의를 받은 소련 병사들은 임의로 처형되었다." "그 결과 전대미문의 수많은 탈주자와 망명자가 생겼다. 훗날 러시아 해방운동을 조직한 블라소프 장군만이 독일군 편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었다. 전쟁 시작과 함께 〈히비스들〉이 있었다. 히비스(Hiwis)란 독일어 힐프스빌리게(Hilfswillige)의 약칭으로, 자발적으로 독일군에 협력한 러시아인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대부분의 히비스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절박하게 구하던 소련군 전쟁포로들이었고, 그들은 독일군에 협력함으로써 생존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를 기대했다. 많은 변절자들은 자신이 정말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스스로 초래한 정책의 실패를 히틀러의 공포 정치에 의해서 만회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점령정책으로 현지 주민들에게 불러일으킨 공포심이 스탈린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된 셈이었다."(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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