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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평점 :
머리말
"지금까지 스페인 내전은 자주 좌파와 우파의 충돌로 묘사돼 왔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좌우의 충돌 말고도 이 전쟁에서는 두 개의 갈등 축이 더 나타나는데, 하나는 국가의 중앙집권과 지역적 독립 간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와 개인의 자유 간의 갈등이다. 우파 국민 진영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결속력이 강한 세 가지 극단적 경향이 한데 결합했기 때문에 공화 진영에 비해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익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반면에 공화 정부는 공존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중앙집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자들이 지역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어지럽게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 시기의 열정과 증오는 건강하고 안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비군사적 환경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시민권과도 거리가 먼 그야말로 '다른 세계'였다."(12-3)
# 국민 진영(nationalists) : 공화 정부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내전의 계기를 제공한 우파 연합 세력
제1부 제2공화정의 탄생
"세 가지 서로 다른 이 갈등─좌우 대립, 중앙과 지방의 대립, 권위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의 기원은 과거 무어인들에게서 빼앗긴 스페인 땅을 되찾으려는 재정복 운동이 만들어낸 스페인의 사회 구조와, 그 운동이 카스티야 정복자들의 태도를 형성해낸 방식까지 거슬러올라간다. 8세기에 서고트족 군벌들이 무어인들과 간헐적으로 벌이기 시작한 전쟁은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두 공동왕이 위풍당당하게 그라나다에 입성하면서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스페인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수백 년 동안 끌어온 십자군 운동의 정점이자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었다. 그런 생각은 1936년 (쿠데타를 주도한) 국민 진영 연합 세력에게도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가톨릭 공동왕 시대의 영광을 찬미하고, 자신들의 싸움이 제2의 재정복 운동이라고 말했으며, 자유주의자들, '적색분자들', 분리주의자들에게는 현대판 이교도(이슬람교도 무어인)의 역할을 부여했다."(26-7)
"1873년 2월, 국민투표를 거쳐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여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카를로스파 주력 부대는 바스크 지역의 완고한 가톨릭 신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무엇보다도 마드리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분리주의적 야심에 자극받고 있었다." "장군들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스페인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그런 생각은 아메리카 제국의 마지막 거점을 상실하고 나서 더욱 강해졌다. 장군들은 카스티야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자들이었는데, 피레네 산맥 국경 지역에 자리 잡은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독립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들은 연방제에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자치적 주정부를 선언하자 주저하지 않고, 카를로스파와 바스크인들 못지않게 중앙집권적 통치에 반대하는 이 움직임을 박살내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제1공화국은 불과 몇 달 만에 붕괴되었다."(35-6)
# 아메리카 제국의 마지막 거점 : 미국과의 전쟁(1898)에서 패배하면서 상실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지방에서는 때로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서로 악의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수도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은 사실상 신사협정을 맺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지지는 받지 못하지만 강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이 생길 때마다 보수주의자들이 그것을 실행하고 나서 물러나면 이제 그들과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된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해 집권했다. 부패를 고발하는 신망 높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설령 귀족이더라도 반역자로 몰리고 기피 인물로 낙인 찍혔다. 군대·왕정·교회의 삼위일체는 과거에는 제국을 만들어낸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제국을 무너뜨리는 주역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항해서 부상(浮上)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그것은 19세기 초의 자유주의와는 달리 지배 구조에 흡수되지 못했다. 결코 양립할 수 없었던 '영원한 스페인'과 새로이 떠오른 정치 운동은 충돌로 발전했고, 그것이 후에 국가를 갈가리 찢어놓는다."(37)
"일찍이 1830년대에 스페인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첫 시도가 있었고, 19세기 중엽이면 비정치적인 소규모 조합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후 새로운 정치 이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다. 아나키즘적 혹은 절대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먼저 들어왔는데, 이 이념과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불화는 훗날 스페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초기에 아나키즘이 스페인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나키즘은 자유롭게 연합하는 공동체들의 협력 구조를 주장했는데, 이것이 스페인 노동자들의 뿌리 깊은 상호부조 전통과 맞아떨어졌다. 또한 아나키즘이 내세우는 연방주의적 조직은 중앙집권적 경향에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많은 관찰자들은 아나키즘이 안달루시아 지방의 무토지 농민들에게 불어넣은 순진한 낙관주의를 지적하기도 했다."(41-2)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들, 즉 '권위주의자들'은 더디게 성장했다. 1871년 말에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파리코뮌이 붕괴된 후 스페인에 입국했고, 그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마드리드에 스페인 사회주의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그들이 중앙집권적 국가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농촌 특성이 강했던 스페인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세력 확장이 더뎠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마르크스가 농민들은 물론, 그 자신이 '농민적 삶의 어리석음'이라고 한 것에 경멸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 자체의 산물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만이 타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산업의 주요 부문은 이미 아나키즘의 아성이 되어버린 카탈루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카스티야 사회주의자들은 산업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빌바오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43-4)
# 빌바오 : 바스크 지역의 대표적 산업 도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수출 붐이 수그러들자 노동자들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 갔다. 또한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은 좌파 세력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유럽의 양쪽 끝(러시아와 스페인)이 혁명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라는 얘기들이 오갔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안달루시아에서는 폭동이, 바르셀로나에서는 대규모 노동쟁의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시기는 '볼셰비즘의 3년'으로 알려졌다." "전국노동연합이 과격해지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이끌던 노동자총동맹의 온건 노선과 자주 충돌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노동계급에 대한 반역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량주의자 정도로 여겼다." "한편 농촌에서는 안달루시아 지역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결국은 실패로 끝날 불운한 농민 폭동을 이어 갔다." "마드리드의 정치가들조차 모종의 토지 개혁 프로그램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문제와 진지하게 씨름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정부가 거의 없었다."(49-50)
"1931년 4월 14일 아침 6시에 에이바르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이 소식은 즉각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로마노네스 백작은 공화주의자들을 이끌던 알칼라 사모라와 회동했는데, 사모라는 왕과 그의 가족이 그날 오후에 스페인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은 군대가 지켜줄 것이라는 한 장관의 조언을 거부하고, 배를 타기 위해 마드리드를 출발해 카르타헤나 항으로 갔다. 왕의 출발은 아무런 소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미겔 마우라는 〈왕정은 그것이 붕괴되기 오래 전에 이미 스페인 사람들의 마음에서 증발해버리고 없었다〉라고 썼다. 같은 날, 코르도바 출신의 가톨릭 신자이자 지주였던 알칼라 사모라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위원회가 공화국 임시정부로 전환되었다. 이어 알칼라 사모라가 국가 수반이자 총리로 취임했다. 공화국 지도자들은 농업 개혁, 비타협적인 군부 문제,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 스페인 사회의 뿌리 깊은 난제들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58-9)
"1934년 10월에 발생한 아스투리아스 혁명은 좌파의 지각 있는 사람들마저도 엄청난 재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급진 투사들, 특히 라르고 카바예로 같은 사람에게 반란은 마치 마약에 취한 것과 같은 혁명의 열정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반면에 우파에게 반란은 칼보 소텔로가 주장한 것처럼 오직 국가의 중추인 군대만이 혁명적 상황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반란은 국가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스페인 민주주의에 치명타였다. 보수 세력에게 이 반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창출하려는 또 다른 시도를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신념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라르고 카바예로는 〈나는 계급 투쟁 없는 공화국을 원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한 계급이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스투리아스로 인해 보수 세력은 이제 러시아 혁명 이후의 대공포와 부르주아를 절멸하겠다는 레닌의 결심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었다."(77-8)
# 아스투리아스 혁명 :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무장 노동자들이 코뮌을 설립했지만 불과 2주 만에 치안유지군에게 진압되어 1천 명 가량이 희생되고 수천 명이 해고 및 구속된 사건
"1936년 1월 7일에 선거 일정이 공표되었고, 선거 운동은 곧바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전에 치렀던 선거 결과를 보면 정치적으로 연합한 쪽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이렇게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연합체를 구성하도록 자극하는 분위기는 중간 지대를 공동화하고 사람들을 좌우로 양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좌파의 혁명적 폭동과 군대와 치안대의 잔인한 진압은 타협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어서 민주주의가 숨쉴 만한 여지가 없었다. 양쪽 모두 종말론적 언어로 상대편을 공격했고, 지지자들의 기대를 정치적 결과가 아니라 폭력적 결과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만일 이번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하면 우리는 곧장 내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뒤질새라 우파도 비슷한 태도로 맞섰다. 우파는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하면 폭력 혁명과,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미 약속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81-2)
"각 주 선거위원회에서 2월 20일 선거 결과를 발표했는데, 인민전선이 15만 표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민전선은 총 투표의 2퍼센트도 안 되는 근소한 차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에서는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좌파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들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 압도적인 통치 위임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우파는 군중들이 사면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갇혀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러 감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는데,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총참모부 부장 프랑코 장군은 치안대 사령관 포사스 장군에게 밀사를 보내 스페인의 질서와 복지 수호를 위해 단행하려는 결정에 동참해 달라고 권유했다. 프랑코는 또한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게도 사람을 보내 인민전선에 권력을 넘겨주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군대의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치안대와 돌격대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87-8)
"우파 중에서 격렬한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단체는 팔랑헤당이었다. 팔랑헤당은 1936년 봄, 국민행동 청년당원 1만 5천 명이 합류하면서 당원 수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팔랑헤주의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이었다는 점에서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달랐다. 무솔리니는 단지 선전 효과를 노리고 연설할 때 로마의 상징과 제국의 형상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팔랑헤당은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은 반동적이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스페인다움(Hispanidad)의 핵심이었다. 새로운 국가는 '전통적 가톨릭의 정신에서 영감을 끌어낼' 것이라고 했다. 팔랑헤당의 상징은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상징물인 권위주의 국가의 멍에와, 이단을 쓸어버리기 위한 절멸의 화살이었다. 그들은 상징물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카스티야식 정신도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팔랑헤 전사는 '반은 수도승, 반은 병사'인 사람이었다."(91-2)
제2부 두 스페인의 전쟁
"마드리드의 공화 정부는 7월 17일 저녁에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발생한) 반란 사실을 알았다. 다음날 아침 정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번 사태가 보호령의 일부 지역에 국한한 것임을 밝혀 둔다. 그외 본토에서는 어떤 지역도, 결단코 어떤 지역도, 이 터무니없는 모험에 가담하지 않았다.〉 7월 18일 오후 3시 카사레스 키로가는 정부를 지원하겠다는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모두에게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하고 '국가의 군사력을 신뢰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공화 정부 편에 서서 안달루시아 중부 지역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케이포 데 야노는 이미 그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카사레스 키로가는 〈정부의 신속한 예방 조치로 반란은 이미 소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누구라도 내 승인 없이 무기를 내주는 자는 총살에 처할 것이다〉라며 다시 한 번 노동자들의 무장을 거부했다."(119-20)
# 7월 19일, 노동자 조직에게 무기 배포 시작
"해군은 군사 반란 계획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해군 소속 선박들은 아프리카 주둔 육군을 이베리아 반도 본토로 이송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 병력 수송은 카나리아 제도 인근에서 함대 기동 훈련을 수행할 때 이미 프랑코 장군과 해군 고위 장교들이 합의한 일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곧바로 전함들이 전속력으로 스페인령 모로코로 달려오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파죽지세 같은 점령 계획은 성급한 판단으로 드러났다. 육군 장교들보다 더 귀족적이었던 해군 장교들은 압도적 다수가 반란을 지지했지만, 해군 병사들은 7월 13일 엘페롤에서 비밀 회합을 열고 만일 장교들이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미 태도를 정리해 두었다." "마드리드의 전신 기사 벤하민 발보아는 해군부의 명령을 받고 즉각 승선 중인 모든 무전병들과 연락하여 사태의 추이를 잘 지켜보고 '파시스트 깡패 집단인 장교들의 행동'을 잘 감시하라고 지시했다."(143-4)
"영국 해군 장교들은 지브롤터에서 사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하급 수병들이 한 행동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영국 해군 장교들이 마음속으로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그 점은 여러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당장은 대부분의 전함들에서 반란 세력이 제압되자 반란 가담자 다수는 아프리카 군대가 본토로 건너올 수 없으므로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몰라 장군도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위기가 국민 진영의 재난으로 끝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병력을 공중 수송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병력의 공수(空輸)는 얼마 되지 않은 스페인 공군의 브레게트기, 니에우포르트기, 이탈리아의 사보이아기들이 반란 시작과 함께 거의 즉각적으로 시작했지만 히틀러가 보낸 융커52기들이 도착하고 나서부터 본격화됐다."(146-7)
"8월 초에 이르자 각각의 진영이 분명해지고 전선이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반란 세력은 서쪽 갈리시아와 레온에서부터 동쪽 나바라와 북부 아라곤까지 좌우로 넓게 퍼져 있는 띠 모양의 땅을 차지했다. 이 띠 모양의 지역이 반란 세력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던 아스투리아스, 산탄데르, 바스크 등의 북부 해안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남쪽과 서쪽에서는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 안달루시아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페인이 폭력적 형태로 권력을 다투는 쿠데타가 아니라 진짜 내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공화 정부 측이 초기에 즉각적으로 쿠데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한 것은 이제 그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싸움, 즉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질이 필요한 그런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무렵 국민 진영은 병영 국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공화 진영에서는 혁명 과정이 시작되었다."(156-7)
"지역적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공화 진영을 통틀어 최악의 폭력이 자행된 것은 개전 초기 처음 며칠 동안이었다." "공화 진영이 지배한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의 주요 특징은 반란 초기 며칠 동안 폭력 행위에 거의 아무런 통제가 없었다는 점, 살인 행위가 집중적이고 신속했다는 점, 좌파나 공화 정부 지도부가 폭력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9월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공산주의자로 구성된 라르고 카바예로의 '통합 정부'가 법과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인민 법정을 설치했는데, 그것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개선책이었다. 그리고 시위원회를 구성하여 순찰대를 대체하고 순찰대원들은 전선으로 보냈다. 이런 조치로 약탈과 살인 건수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내전 기간 동안 공화 정부 지역에서 적색 테러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3만 8천여 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이 마드리드(8815명)와 카탈루냐(8352명)에서 1936년 여름과 가을에 발생했다."(168-70)
"'백색' 스페인에서 나타난 살인 양상은 '적색' 스페인에서 나타난 것과 상당히 달랐다. 반란 세력의 전략 핵심은 '정화(limpieza)' 개념이었는데, 그 과정은 어떤 한 지역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가자마자 시작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의 장소는 바다호스였다. 국민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야구에 중령의 군대가 저지른 대학살과 뒤이은 탄압은 전쟁 초기에 양측이 앞다투어 선전전에 이용했다. 국민 진영은 전투에서 입은 인명 손실과 그에 앞서 좌파가 살해한 우파 인사의 수를 크게 부풀려 발표했다. 그러나 사실 야구에 측의 인명 피해는 사망자 44명, 부상자 141명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민군 측이 좌파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한 인원은 243명을 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바다호스 주에서 국민군이 살해한 사람은 적게는 6천 명, 많게는 1만 2천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군 부대들은 마드리드로 진격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마을들을 장악하고 초토화했다."(171-7)
"장군들의 반란은 공화국 붕괴의 주요 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기에 직면한 중앙 정부의 지리멸렬한 대응을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중도 좌파 정부는 한편으로는 우파의 반란에 맞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의 혁명에 대처해야 했으므로 그러한 마비 상태는 아마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각자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의 사회적 공존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각각의 정치 철학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것은 다른 정치 집단들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협력하자는 의미였다.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극히 단순한 견해였다. 노동자 관리 혹은 자율 경영의 개념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저주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두 집단은 후에 아나키스트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처음에는 아나키스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원칙 가운데 많은 것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나중에는 권력의 자리에서 그들을 쫓아냄으로써 거둔 승리였다."(195-202)
"제대로 편제를 갖춘 정규 군대가 거의 없었던 공화 진영에서 장군들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노동자 의용군이었다. 그런데도 아나키스트, 통합노동자당, 라르고 카바예로를 포함한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의용군을 필수 요소로 보기보다는 단지 부가적 장점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마드리드 공화 정부, 정규군 장교들, 중앙집권적 정치가들, 공산주의자들은 국민 진영의 공세를 막아낼 유일한 방법으로 전통적 군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는 자신들이 중앙집권적 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규율, 위계, 조직화'를 주장했다.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군대화' 계획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주장은 '반(反)혁명적'일 뿐더러 정부가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해 통제권을 회복하려고 내놓은 술책으로 보았다. 아나키스트들은 더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에게 정규 군대는 국가의 최악의 측면이었다."(231-2)
제3부 내전의 국제화
"반란 세력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정부와 노동조합들이 반란을 신속히 제압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스페인은 피비린내 나는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오랜 싸움에서 무기의 필요성은 양측 모두를 외국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였다. 이것이 스페인 내전이 국제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첫 번째 중요한 행보였다. 중립을 선언한 가장 중요한 세 나라 가운데 영국의 역할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고립주의를 견지해 왔던 미국은 국제 문제에 개입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스페인의 분쟁이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될까 우려한 영국 외무부는 프랑스 정부에게는 프랑스가 스페인 공화 정부를 돕는 것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국민군을 돕도록 자극할 뿐이라고 경고했다."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외국군의 간섭이 없다면 프랑코 측과 공화 진영, 양쪽의 군사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므로 어느 쪽도 쉽게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했다."(243-6)
"유화 정책이 네빌 체임벌린의 발명품은 아니었다. 유화 정책의 뿌리는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926년의 총파업과 경기 침체는 영국 보수 정치가들에게 혁명의 가능성을 매우 현실적인 걱정거리로 만들어놓았다. 그 결과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분쇄한 독일과 이탈리아 체제에 호오(好惡)가 뒤섞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많은 유권자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로 전쟁을 혐오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 강요한 굴욕에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에 무기 판매를 거부한 것은 사실 공산주의자들의 힘을 강화하고 비공산주의 중도파나 좌파의 힘을 약화했을 뿐이다. 1936년 여름에 에스파냐 공산당이 공화주의 연합 세력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의 군사적 도움이라는 효과적인 수단과 권위였다."(247-50)
"무솔리니는 지중해에 파시스트 국가가 하나 더 들어서기를 기대했고, 더구나 자신에게 빚을 진 국가가 들어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의 야심은 영국에 맞먹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를 능가하는 힘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동맹국'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장악하여 해협을 통제하고, 발레아레스 제도에 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략적으로 프랑코를 지원했다. 스페인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 프랑스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고, 또한 수에즈 운하로 가는 영국의 해상 루트에도 중대한 위협이 될 터였다. 또한 대서양 해안에 U보트 기지를 건설할 수도 있다는 즐거운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스페인 내전은 히틀러의 대 중유럽 전략이 유럽 각국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해주고, 반면에 독일의 인적 자원을 훈련하고 장비와 전술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251-5)
"1920년대 이래로 스페인에서 소련은 대개는 문화적 선전의 형태로 꾸준히 세를 넓히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스페인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서 했던 일과 마찬가지로 침투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 그 이상은 하지 않고 있었다. 1936년 7월 18일 쿠데타 소식을 듣고 나서 코민테른은 주요 대리인들, 그중에서도 1932년 이후 에스파냐 공산당의 감독관으로 활동해 오던 아르헨티나인 비토리오 코도비야로부터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한편 소련 당국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9월에 이르러서야 소비에트 체제는 스페인 내전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뿐더러 국내와 국제적 지지 모두를 얻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스크바의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스페인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한편으로 코민테른은 국제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소련 시민들은 공화 진영 스페인에서 펼칠 인도주의 활동을 위해 2억 7400만 루블(약 225억 원)을 모금했다."(276-7)
제4부 대리인들의 세계 대전
"역사는 결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1936년 12월에 일련의 전투가,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유형의 전투들이 마드리드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과 같은 방식의 구식 전투에서 공화 진영 의용군이 패한 것은 1937년 2월 단기전으로 치렀던 말라가 전투가 마지막이었다. 총통 프랑코는 상상력이 빈곤한 전략에 발목이 잡혔다. 독일 외교관들이 냉소적으로 '투우 경기'라고 부른 것이 10월에 불러일으킨 엄청난 기대와, 11월 마드리드 점령 실패로 프랑코는 집착과도 같은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공화군 지원군이 도착하자 전선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양측 모두 힘이 고갈된 상태였고, 1월 중순 양측 군대 모두 방어 진지에 꼼짝없이 들어앉은 상태가 되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국민군은 엘에스코리알도로(라코루냐 가는 길)를 따라 마드리드 코앞(아라바카)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그러나 공화군은 서부 전선에서 국민군의 마드리드 포위를 이겨내는 데 성공했다."(339-44)
"만약 공화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예정되었던 전투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말라가 전투였다. 공화군 점령지의 지형적 특성과 길게 늘어진 형태 때문에 국민군은 언제 어디서든 원하기만 하면 적진(敵陣)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당시 말라가는 전쟁이라는 현실과 단절된 채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방어 태세가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공화군 병력은 의용군 1만 2천 명에 불과했고, 3분의 1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총을 가진 병사들도 대부분 실탄이 몇 발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무엇보다도 공화 정부의 고의적인 태만 때문이었는데, 공화 정부는 이 지역의 변함없는 독립 의지를 극도로 싫어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말라가에는 탄약 한 발도 주지 마라〉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공화군 사령관 비얄바 대령이 의도적으로 도시 방어를 방해했다고 믿을 만한 강력한 근거가 있는데, 공화군이 전쟁에서 패한 뒤에 비얄바는 국민군에게 예외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357-8)
"의용군 부대를 인민군으로 전환하는 일은 '군대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나키스트, 통합노동자당, 좌파 사회주의자 등은 원칙의 토대 위에서 의용군 체제를 고수하려 했고, 의용군 체제로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또한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스페인의 경우를 억지로 비교하려고 했다. '전쟁 기계'는 오직 더 나은 전쟁 기계나 비정규전의 사보타주 전술로만 격퇴할 수 있는데 의용군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즉흥적 속성은 혁명 상황이라면 모를까 군사적 덕목은 아니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잘 조직된 적에 대항하는 군대로서도 그들은 시대에 많이 뒤떨어졌다." "아나키스트들과 통합노동자당은 비록 전통적 전쟁에서 '통일된 지휘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지만 공산주의자들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367-8)
"이탈리아인들은 북부 지역에서 바스크의 가톨릭 교도들을 공격하는 것이 교황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걱정했고 바스크의 주도인 빌바오를 폭격하는 데 머뭇거렸다. 추정컨대 아마도 이에 따른 리히트호펜의 좌절감이 콘도르 군단의 작전을 통틀어 가장 악명 높았던 게르니카 폭격을 실행하는 데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4월 25일 하루 동안 많은 피난민들이 지친 모습으로 마르키나를 떠나 게르니카로 들어왔다. 당시 게르니카는 전선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4월 26일, 부르고스에서 출발한 3개 비행대대가 두 시간 반에 걸쳐서 20분 간격으로 게르니카 시에 매우 체계적으로 융단 폭격을 가했다." "콘도르 군단의 4월 27일 치 전투 일지는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리히트호펜이 말했듯이 도로 봉쇄가 공습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외 나머지 모든 요소는 공습의 주요 목적이 공중 폭격의 효과를 실험해보려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411-5)
"바스크에서 국민군이 비교적 신속하게 승리를 거둔 데는 무엇보다도 콘도르 군단의 기여가 컸다. 나치 정부는 지체 없이 국민 진영에 그 대가를 청구했다. 독일 기술자들은 (독일 공군이 치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이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공장과 제강소로 달려가 시설물을 접수했다. 그에 비해 프랑코는 비록 북쪽 바스크 지역을 함락시킴으로써 결국에는 북쪽에 주둔 중인 군대가 중부와 남부로 이동할 수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익을 보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했다. 만일 유럽 내부의 갈등이 먼저 폭발하지만 않는다면, 바스크 점령은 공군과 포병 지원에서 점증하는 우위와 함께 프랑코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안겨줄 중요한 승리였다. 이제 프랑코에게 전쟁은 계속적인 공격에 다름 아닌 것이 되었고, 적군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는 일만 남았다. 프랑코는 바스크 지역 전투를 통해 자신의 동맹군들이 적의 동맹군들보다 훨씬 우수한 타격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했다."(423)
"국민 진영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정서에 호소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최대한 이용했다." "국민 진영은 자신들이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맞서 기독교, 질서, 서구 문명의 대의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공화 정부를 열정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은 좌파가 부르주아를 절멸하려고 했던 위협과 1936년 봄에 전개된 혁명 직전의 상황이 우파로 하여금 자위적 차원에서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러시아 내전이 불러일으킨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이어 출현한 억압적인 소련 체제는 우파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었다." "양측 모두 역사관이 매우 선택적이고 조직적이었다. 후에 공화 진영 지지자들은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출발점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프랑코주의자들은 스페인 내전이 서구 문명과 공산주의가 벌이는 세 번째 세계 전쟁의 서막이었으며 자신들이 나치와 파시스트들로부터 받은 도움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425-7)
제5부 내전 속 내전
"국민군 내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인 아프리카 군대 사령관이었던 프랑코는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권력의 정점을 향해 오를 수 있었다. 그에게 도전할 만한 경쟁자는 없었으며 국민 운동의 성격 자체가 단일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요구했다. 그 결과 프랑코는 시의적절한 두 번의 단계(1936년 9월과 1937년 4월)를 통해 최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법률상의 지도자가 되었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모든 잠재적 반대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사실상 독재자가 되었다. 팔랑헤당, 카를로스파, 전임 알폰소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인 '에스파냐혁신', 자치우익연합의 '국민행동' 같은 우파 집단들이 프랑코의 명령으로 하나의 당으로 통합되고, 그 당은 프랑코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강제 합병에서 카를로스파는 가장 큰 패배자였다. 이제 프랑코는 장기간의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향후 스페인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구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454-6)
"권력 투쟁은 1936년 겨울과 1937년 봄 기간 동안 공화 정부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투쟁의 승자인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프랑코에게 맞먹는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매우 제한된 기반에서 출발한 데다가 권력을 집중화하려는 그들의 정책은 공화 진영 내 주요 동맹 세력이었던 아나키스트들의 완강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동시에 발렌시아 정부는 독립적 성격을 띤 지역, 특히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역에서 확실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탈린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외교 정책에 장애가 되는 것을 회피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특히 스탈린에게는 한편으로는 나치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영국, 프랑스와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스탈린은 〈스페인의 적들이 스페인 공화 정부를 '공산주의 공화국'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회 공화국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56-7)
"공화 정부의 통치 시스템은 차츰 네그린과 공산주의자들이 후에 '통제된 민주주의'라고 부른 것으로 변해갔다." "모스크바의 여론 조작용 공개 재판과, 1937년 스페인의 분위기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통합노동자당에게 뒤집어씌운 파시스트 집단이라는 혐의를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었는지, 또한 통합노동자당 지도자 안드레스 닌과 그의 추종자들이 납치되어 고문을 받고 나서 '실종되었는데' 정부는 왜 스탈린주의자들이 수행한 '더러운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훈련된 기계'는 민중의 지지를 인수하기는 했으나 민중의 에너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지켜야 할 이상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얀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 무리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482-5)
"7월 6일, 공화 정부는 마드리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인 브루네테를 공격했다. 이 작전은 국민군 전선의 취약 지점을 돌파하여 마드리드 외곽까지 뻗쳐 있는 돌출부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루네테 공세는 북부 지역에서 국민군의 압박을 줄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패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민군의 월등한 공군력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브루네테 공세가 전체적으로 볼 때 자신들의 승리라고 세계에 선언했다." "자주 자기편 병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대한 집착은 국제여단 내부에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제13국제여단 소속 미국인, 영국인, 폴란드인 병사들이 일으킨 소규모 소요들은 모스크바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기록되었다." "병사들은 엄청난 희생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특히 그 죽음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죽음이 아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분노가 더욱 컸다."(505-7)
"1937년 가을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군이 개선되었다며 대대적인 선전 공세를 펼쳤다. 부대 수준에서 보면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휘관이나 참모 중에 군사적 능력이나 전술적 감각을 입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병참 조직은 여전히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도 후방에서 벌어지는 사건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의 제 식구 챙기기와 전선에서 퍼붓는 전향 공세는 도가 지나쳐 정규군 장교 중에서 과거에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사람들까지도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프리에토는 공산당원이 아닌 부상병들이 자주 치료를 거부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공산당 입당을 거부한 대대장들에게는 무기나 전투용 식량이 제공되지 않는가 하면 심지어는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의 급료가 거부되기도 했다. 반면 입당 요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진급도 빨리 되고, 공문서나 신문기사 등에서도 그들의 평판이 과장되어 소개되었다."(541)
제6부 파국으로 가는 길
"1937년 말이면 국민군의 군사적 우위가 명백해졌다. 그 무렵 그들이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면 북부 지역 점령은 승리로 가는 과정에서 핵심 중간 단계였다. 북부 지역 점령을 계기로 국민군은 개전 이후 처음으로 병력 수에서 공화군과 균형을 이루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 균형은 국민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었다. 칸타브리아 해안 지역 정복은 그곳에 묶여 있던 병력을 중부 지역으로 내려보낼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국민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상의 포상도 얻게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스크 지역의 무기 공장, 빌바오 지역의 중공업 지대, 북부 광산 지대의 석탄과 철광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공화군 참모들과 소련 군사 고문들은 정규군의 방어를 계속 유지하면서 적 후방에 비전통적인 게릴라 공격을 시도하여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과, 전선에서는 적의 취약 지점 몇 곳을 동시다발로 급습하는 것만이 공화군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549-50)
"1937년 12월 중순, 공화군의 공세로 시작된 테루엘 전투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참혹한 시가전이 벌어진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국민군 사상자는 4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4분의 1은 동상이 원인이었다. 공화군 측 손실은 더 심해 약 6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 공중전에서 국민군 전투기들은 자신들이 공화군 전투기들에게 격추당한 것보다 훨씬 많은 공화군 전투기들을 격추했다." "공화군 보병은 테루엘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바로 그 점이 테루엘 작전 전체의 비극성과 무가치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화군은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고 점령할 필요도 없는 이 도시를 점령하려고 했던 것이다. 엄청난 인명과 장비를 희생하면서 말이다. 다시 한 번 선전 목적 때문에 성급한 승리에 발목이 잡혀 있던 공화군 지도자들의 고집이 최정예 부대 대부분을 헛되이 희생시키고 만 것이었다. 생존자들의 참담한 상태, 사기 저하와 체력 고갈은 수 주 안에 또 한 번의 더 큰 재난으로 이어지게 된다."(563)
"테루엘 전투 이후 공화군 병사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으며 장비도 형편없었다. 전선에 새로 투입된 부대들은 경험 없는 신병이 다수를 차지했다. 후퇴는 일시적 철수라기보다는 패주(敗走)라 할 수 있었다." "공화군의 후퇴는 쫓아오는 적이 쉬느라 멈출 때에만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측면 부대의 철수는 공황 상태를 불러일으켰다. 혼란의 와중에서 누구도 인접 부대에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던 것 같다. 휴대 식량과 탄약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적 전투기들은 시종일관 사냥개처럼 후퇴하는 공화군을 쫓아가면 괴롭혔다. 전투기들은 곡예를 하듯이 급강하하여 공화군에게 수류탄을 떨어뜨리고 기총 소사를 퍼부었다. 전쟁 초기에 의용군들을 파괴했던 고립의 공포가 이제 인민군의 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마침내 4월 15일 국민군이 해안 도시 비나로스를 점령했다. 이로써 카날루냐와 공화 정부가 지배하는 스페인 나머지 지역을 둘로 가르는 회랑 지대가 만들어졌다."(568-71)
"전쟁 피로감이 공화 정부 진영에 퍼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일반인들이 정부 지도자들의 행동에 냉소적 태도를 보이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직접적으로든 국제 사회의 중재를 통해서든 양 진영이 협상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공화 정부가 선전하더라도 궁극적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종전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절망과 패퇴의 공황 상태를 떠올렸다. 반면에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전쟁을 더 계속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르티네스 바리오 같은 사람은 프랑코가 승리하면 자신들이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참혹한 처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8년경에는 특히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또한 오랜 무역 파트너인 프랑스와, 특히 영국이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는 데 분노했다. 그들은 패배주의에 빠져들었으며, 민족주의자들도 혁명적 좌파도 싫어하는 카탈루냐 중도파에 가담했다."(581-2)
"프랑코가 군대 전체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고, 그 자신이 (하느님과 역사에만 책임을 지는) '국민 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나서, 그는 초기 시대의 기술위원회를 정식 정부로 대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1938년 1월 30일 프랑코는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하여 발표하고 국가 중앙 행정법을 제정했다." "3월 동안 프랑코 장군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 폐지를 포함하여 세라노 수녜르가 들고 온 모든 법령을 승인했다. 법무부와 교육부 장관은 공화 정부에서 제정된 교회와 교육 관련 법령을 모두 파기하는 일에 착수했다. 각급 학교 지배권은 다시 교회 지도부로 넘어갔고, 교실에는 십자가를 내걸게 했다." "4월 5일에는 카탈루냐 법령이 폐지되었다. 4월 22일에는 모든 간행물이 프랑코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규정한 출판법이 제정되었다." "5월 21일에는 카스티야어가 스페인의 유일한 공식 언어로 선언되어 공식석상에서 바스크어와 카탈루냐어를 더는 쓸 수 없게 되었다."(593-6)
"네그린은 평화 협상 제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차례 위대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통해 국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성공한다면 공화 정부는 더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군사적 명분은 바다로 통하는 국민군 회랑 지역을 재탈환함으로써 분리된 두 공화군 지역을 다시 연결하겠다는 공허한 구상이었다." "7월 25일에 시작된 에브로 강 전투 작전은 처음부터 중대한 결점을 안고 시작되었으며, 일단 초기 기습의 이점이 소진되고 나자 공산당 야전 지휘관들은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그들은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 목적도 없이 병사들의 목숨만 희생시키는 예의 관행으로 돌아갔다. 처음 한 주 동안에만 공화군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났는데, 폭격과 기총 소사에 당한 데다가 이질과 발진티푸스까지 덮쳤다."(608-14)
"다시 한 번 공화군의 대공세는 주요 목표물을 향해 달려가는 대신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적의 진지들을 제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그에 이은 마무리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 같은 상황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아무런 정당성도 없었으며, 특히 공화군이 당시 매우 허약한 상태에다 원래 공세 목적을 달성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 지도부는 훗날을 기약하며 최정예 부대를 질서정연하게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는 쪽을 택했다. 모든 것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 네그린의 판단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정치적인, 그리고 선전상의 고려가 재난을 자초했던 것이다." "11월 16일, 전투가 시작된 지 113일 만에 종결된 에브로 강 전투에서 공화군은 참혹한 인명 손실은 물론 카탈루냐 방어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무기를 잃고 말았다."(616-22)
"1938년 4월에 체결된 영국-이탈리아 조약은 이탈리아의 전쟁 개입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어떻게든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노력하던 공화 정부의 희망에는 치명타였다. 9월에 체결된 뮌헨 협정은 더 심각한 타격이었다. 유화 정책의 정점이랄 수 있는 이 조치는 스페인에 대한 영국의 기존 정책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의미했을 뿐 아니라, 스탈린이 소련의 이익은 히틀러와 화해하는 것이라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의 공화 정부 지원은 이제 난처한 일이 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를 지켜본 스탈린은 마침내 히틀러에 대항하는 동맹 세력으로서 영국과 프랑스를 믿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자신의 약점을 독일과 동맹을 맺어 보완해야 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화 정부의 운명을 온전히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과 연계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공화 정부의 생존 가능성은 적어도 뮌헨 협정을 체결하기 한 달 전인 에브로 강 전투에서 이미 파괴되기 시작했다."(628-32)
# 뮌헨 협정 : 1938년 9월 30일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체결한 협정.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쪽의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병되었다.
"바티칸에서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만이라도 휴전하라고 호소했지만 국민군은 12월 23일에 카탈루냐 공격을 시작했다." "1939년 1월 3일, 발라게르 지역에서 출발한 국민군은 그 지역 거점도시인 아르테사를 점령했다." "보르하스블랑카스는 1월 5일에 함락되었다." "솔차가 장군의 군대가 1월 6일 비나이샤를 점령했다." "1월 12일, 국민군은 몬트블랑크를 점령했고, 14일에는 발스를 점령했다." "국민군은 2만 3천 명을 포로로 잡고 전사자 5천 명과 부상자 4만 명이라는 손실을 적군에게 안겨주었다. 카탈루냐 전투는 영토의 3분의 1이 점령된 상태에서 이미 승패가 결정났다고 할 수 있다." "1월 22일, 국민군은 페랄레다델사우세호를 되찾았고, 사흘 후에는 푸엔테오베후나를 수복했다." "1월 26일에 선발대, 특히 야구에가 이끄는 모로코인 레굴라르들은 소유자가 우파인지 좌파인지에 상관없이 며칠 동안 도시에 있는 가게나 아파트를 약탈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것이 그들이 거두는 '전쟁세'였다."(647-54)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부르고스에 있는 국민 진영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코를 '서유럽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검'이라고 부른 필리프 페탱 원수가 스페인 주재 프랑스 대사로 부임했다. 파리에서는 호세 펠릭스 데 레케리카가 프랑스 대통령 르브룅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 전쟁부 장관 달라디에는 프랑스에 남아 있는 공화군의 무기와 전쟁물자 전부, 몽드마르상에 보관 중이던 공화 정부가 맡긴 금을 프랑코 정부에게 넘겨주었다. 달라디에는 또한 프랑스 땅에서 공화 진영 사람들이 국민 진영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런던에서 알바 공작은 세인트제임스 궁정에서 스페인 대사로 취임했다. 체임벌린은 정치책임법이 공포된 지 불과 2주 만에 프랑코가 모든 정치적 보복을 포기했다고 말함으로써 영국 하원 의원들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미국 역시 프랑코 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공화 정부에 파견했던 클로드 바우어스 대사를 소환했다."(669)
# 정치책임법 : 2월 12일에 프랑코가 발표한 법으로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공화 진영 사람들에게 내전 기간 동안 벌어진 모든 종류의 파괴와 전복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한 법률
"국민군은 3월 28일 아침 카사데캄포 전선에 머물던 부대를 시작으로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마드리드는 1936년 7월 19일보다 더 극적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인민전선의 슬로건은 국민군 슬로건으로 바뀌었다. 언어 자체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좌익에서 쓰던 '여성 동무' 대신 '아내'를, '건강하세요' 대신 '안녕하세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돌아갔다. 3월 31일 프랑코 군대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프랑코에게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우리의 온 마음을 하느님께 올리면서, 가톨릭 스페인의 승리를 위해 애쓰신 각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치아노는 일기에서 〈마드리드는 함락되었고, 수도와 함께 적색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도 모두 함락되었다. 이는 파시즘의 새롭고 위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지금껏 거둔 가장 큰 승리일 것이다〉라고 썼다. 런던에서는 프랑코가 승리의 입성을 하고 나서 정확히 3주 후에 불간섭위원회가 해체를 선언했다."(685-6)
제7부 끝나지 않은 전쟁
"새 정부가 추진한 첫 번째 우선 사업은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1936년의 혁명 기간 동안에 몰수된 토지뿐만 아니라 공화 정부에서 추진했던 토지 개혁의 영향을 받은 토지도 포함되었다. 임금이 동결되어 농촌에서는 공화 정부 때 농촌 노동자들이 받은 것보다 약 절반으로 줄었는데, 1956년에 가서야 1931년의 임금 수준을 회복했다. 국가는 농산물 판매를 통제했고, 가격도 동결했다." "일종의 자급 경제 체제를 만들어내려는 목적에서 국가가 산업을 통제했는데, 유럽 수준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경제의 우선순위를 군수품 생산에 둔다는 내용이었다. 산업 소유주들과 경영자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병영식 통제 경제에 들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파업이 불법화되어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노동 현장의 활동가들은 사라졌고, 임금은 고정되고 노동 시간은 늘어났다. 그러나 공장주들도 원료 구매나 완제품 판매에서 발언권을 박탈당했다."(693)
"프랑스 국경을 넘어 다시 국민 진영 스페인으로 돌아온 15만 명의 공화 진영 사람들은 비록 참호 속에 사람들은 없었지만 사회가 아직도 전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1940년 4월 26일에 제정된 것과 같은 탄압법들은 '1936년 7월 18일 쿠데타 발생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적색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사항에 보복을 요구했다. 조사는 대인(對人) 범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예술, 국가 재산 등에 대한 '도덕적' 범죄까지 망라했다. '책임의 귀속'은 '인민전선 내 여러 당, 노조, 프리메이슨 단체 간부들의 물리적 파괴'와 '공화 정부를 후원하고 지지한 정치 세력의 절멸'을 목표로 삼았다. 프랑코 정부가 저지른 테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진 3만 5천 명에, 비공식적이고 무작위적 살인과 전쟁 중에 이루어진 처형, 자살, 굶주림, 감옥에서 병으로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사망자 수는 20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696-7)
"프랑코 체제와 스탈린 치하 러시아가 공통적으로 지녔던 역설적 유사성은 외래 이데올로기의 오염에 대한 비정상적인 두려움이었다." "볼셰비즘의 오염이라는 개념은 좌익 쪽의 한 설명에서 보듯이 엉터리 과학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마드리드 대학 정신의학 교수였던 안토니오 바예호 나헤라 소령은 1938년 여름 '마르크스주의 탐닉 정신병'을 연구하기 위해 국민 진영에 14개의 클리닉을 둔 심리학 연구센터를 설립했다. 그의 결론은 스페인의 종족적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 적당한 기관에 맡겨 국민 진영이 추구하는 가치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43년에 1만 2043명의 아이들을 엄마 품에서 억지로 떼어내 팔랑헤 사회구호소, 고아원, 종교시설에 인계했다. 일부 아이들은 선택된 가정에 양자로 넘겨졌는데, 이 방식은 30년 후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체제에서 그대로 되풀이된다."(695-700)
"1944년 11월 4일 연합통신과 기자회견을 하면서 프랑코는 국민 진영 스페인은 한 번도 파시즘이나 국가사회주의였던 적이 없으며, 추축국들과 동맹을 맺은 적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히틀러는 '프랑코 선생의 뻔뻔스러움'은 끝이 없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코는 1945년 7월 17일, 스페인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내전 이후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에게 일반 사면을 베푸는 내용이었다. 7월 18일에는 새 내각을 구성했는데, 중요한 자리를 가톨릭 정치가들에게 할당함으로써 국정의 중심을 국민 운동에서 국가 가톨릭주의로 옮겼다. 1946년 12월 13일 국제연합은 각국 정부에 스페인에서 대사들을 철수시킬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 후 40년 동안 지속되는 냉전이 프랑코 체제를 구해주는 구세주 역할을 했다. 1948년 4월 17일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내에서 전쟁 상태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내전이 시작되고 거의 12년이 지나고 나서였다."(7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