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 서해역사책방 7
안토니 비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제1부 세계가 숨을 죽이리라


"1941년 6월 21일, 지난 8개월 동안 발령된 80차례의 경고와 함께 독일의 의도가 점점 명확히 드러나자, 크렘린은 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진 듯한 분위기였다. NKVD의 부책임자에게서 그 전날, 그러니까 6월 20일 하루 동안에 최소한 '독일 공군이 39회 이상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독일 국방군의 전쟁 준비는 날이 갈수록 노골적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복잡했던 스탈린은 그조차도 보다 많은 양보를 이끌어 내기 위한 아돌프 히틀러의 책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스탈린은 대부분의 경고를 이른바 '영국의 선동'으로 간주했는데, 여기에는 소련의 숙적 윈스턴 처칠이 소련과 독일 사이에 전쟁을 유발하기 위해 꾸민 계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독일의 침공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여전히 행여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를 뱀의 최면에 걸린 토끼에 빗댄 괴벨스의 비유에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다."(18-21)


#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개전 소식이 알려지자, 스탈린그라드 기술대학 학생들은 벽에다 큼직한 지도를 내걸었다. 독일로 진격하는 붉은 군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지도였다. 당시 학생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던 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독일을 초전에 박살낼 거라고 생각했다.〉 공장에서 탱크와 전투기가 생산되는 뉴스 화면을 수도 없이 봐 온 그들로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업과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술적으로 후진국에 머물러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에 대한 환상은 더욱 커졌다. 게다가 스탈린 체제의 권능이 적어도 국내에서는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 탓에 소련 국민들은 그 체제가 천하무적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앞날에, 나아가 많은 공장과 공원과 깨끗한 고층 아파트들이 위대한 볼가 강을 내려다보는 시범 도시 스탈린그라드의 앞날에 어떠한 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28)


"독일군 사령관들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이반(Ivan)', 즉 평범한 소련군 병사들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포위를 당하거나 명백한 수적 열세 때문에 다른 병사들 같으면 항복을 해도 벌써 했을 상황에서도 이 '이반'들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첫날부터 소련군 병사들의 남다른 용기와 희생은 사방에서 빛을 발했다. 물론 집단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련군의 전반적인 혼란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1945년 종전과 함께 석방되어 조국으로 돌아온 포로들은 영웅 대접을 받는 대신, 스메르시(SMERSH)에 의해 그 길로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적군에게 생포된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반역죄를 면할 수 없다는 스탈린의 지침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7월 16일, 비테브스크 근교에서 독일군에게 생포된 자신의 아들 야코프와 부자 관계를 끊어버리기까지 했다."(48-9)


"독일에서도 전면전을 치르는 동안의 역학 관계는 필연적으로 강압적인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1941년 12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재 위치를 사수한다는 히틀러의 입장에 반대했던 장군들은 하나같이 제거되었다. 히틀러는 강제로 브라우히치를 물러나게 한 뒤, 국가사회주의자의 의지를 갖춘 장군이 아무도 없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동쪽에 굳건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가진 우리는 이제 1941년 12월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고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추축국에 대한 힘의 균형이 지정학적, 산업적, 경제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의 심리적 전환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도시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결투의 양상으로 전개된 이듬해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다려야 한다."(78-9)


제2부 바르바로사의 부활


"전 세계의 이목이 독일군의 모스크바 진격에 쏠려 있던 1941년 11월, 동부 우크라이나의 전세는 숨가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남부 집단군의 진격이 정점에 달했던 11월 19일,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제1기갑군의 선봉은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돈 강변의 로스토프에 도착했다. 다음 날 그들은 카프카스로의 진격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인 이 거대한 강의 다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헝가리 군이 맡고 있는 독일군 선봉의 왼쪽 측면이 허술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소련군 사령관 티모셴코는 맹렬한 반격을 개시한 끝에 클라이스트의 부대를 격퇴했다. 모스크바와 카프카스의 유전이 둘 다 코앞에 와 있다고 믿었던 환상에 큰 상처를 입은 히틀러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게다가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들어 독일군 최초의 퇴각 사례로 기록된다는 점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1942년 1월 6일, 그때까지 사단이나 군단을 지휘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파울루스가 졸지에 제6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게 되었다."(82-4)


"파울루스가 처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1942년 1월은 마침 스탈린이 간신히 모스크바를 지켜 낸 뒤 총공세를 시도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사실 그 무렵은 남부 전선의 모든 독일군이 상당한 곤욕을 치르던 시기였다. 크림의 폰 만슈타인 장군과 그 휘하의 제11군은 아직 세바스토폴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12월 말부터는 카프카스에서 반격에 나선 붉은 군대가 케르치 반도까지 밀고 내려온 상태였다. 분노에 사로잡힌 히틀러는 군단 사령관 폰 스포네크 장군을 군법 회의에 회부해 버렸다." "독일군이 소련군에 '질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믿음에 변함이 없는 히틀러는 따로 예비 전력을 남겨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마치 군단 사령관들을 해임함으로써 최근의 실패에 대한 기억까지도 모조리 씻어졌다는 듯한 태도였다. 해임된 장군들 가운데 가장 먼저 복귀한 폰 보크 원수는 과연 자기네에게 카프카스 유전을 장악할 만한 힘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97-101)


"5월 12일, 카르코프를 봉쇄하기 위해 볼찬스크와 바르벤코포 양쪽에서 공격을 감행한 붉은 군대는 말 그대로 전멸을 면치 못했다. 파울루스와 클라이스트 군은 24만 명에 이르는 포로와 2천 문의 야포, 그리고 티모셴코 탱크 부대의 전력 가운데 상당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들의 손실은 2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졸지에 나치 언론에서 영웅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반동적인 귀족들에 대해 다분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언론이 평범한 가문 출신의 파울루스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통은 그에게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했으며, '수적으로 압도적인 적군에게 승리한 제6군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는 전문을 보내왔다. 파울루스의 참모장 슈미츠는 훗날 이 전투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히틀러에 대한 파울루스의 태도였다고 주장했다. 야심만만한 반격을 지원하기로 한 총통의 결단은 파울루스에게 전술적 상황을 판단하는 히틀러의 능력과 현명함을 새삼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105)


"제6군과 제1기갑군이 6월 28일로 예정된 '청색 작전'의 출발선을 준비하는 동안, 지휘 본부는 적지 않은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6월 19일에는 제23기갑 사단의 작전 장교인 라이헬 소령이 일선 부대를 방문하기 위해 피셀러 스토치 경비행기를 타고 이륙했다. 그는 치밀하게 구상된 보안 지침에도 불구하고, '청색 작전'의 모든 계획이 자세하게 적힌 명령문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그가 탄 경비행기가 독일군 점령 지역 너머에서 격추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문건을 노획했다는 보고를 들은 스탈린이 틀림없이 위조 문서일 거라며 철저히 외면해 버렸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많은 생존자와 냉전 시대의 독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교활한 소련군의 함정에 말려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소련군의 후퇴를 용인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스탈린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110-3)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는 스탈린의 명령이 가장 큰 의미를 함축했던 때는 물론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집단 농장은 비축해 둔 곡물을 붉은 군대에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애국적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자들을 재판하는 법정도 설치되었다. 가족 가운데 탈영하거나 징집을 거부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신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의무를 위반할 경우 10년형에 처해졌다." "법정은 또한 민간인 '탈영자'에 대한 결석 재판도 처리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피난민이었다. 유죄 선고를 받은 자는 '당과 소비에트에 대한 반역자'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한동안 스탈린그라드 전선 정치국에서는 '1941~42년 겨울 사이에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징집된 남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자신이 살던 마을에 머물며 '피난을 거부한' 자들은 '체계적인 반소비에트 활동'이나 독일군에 부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146-9)


"8월 23일 거행된, 동부 전선에서 가장 격렬했던 스탈린그라드 공습은 게르니카 이후 리히토펜의 경력 가운데 정점을 차지한다. 제4항공 함대는 그날 하루 동안의 출격 횟수만 1,600회를 기록했으며, 1천 톤의 폭탄을 투하하면서 단 3기만이 격추되었다. 어떤 분석에 의하면 당시 스탈린그라드에 60만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공습 첫 주에 4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볼가 강 서쪽에 그토록 많은 시민과 피난민이 남아 있었던 이유는 전형적인 체제의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NKVD는 강을 건너는 모든 선박의 통제권을 거의 장악한 반면, 민간인을 소개하는 일에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탈린 역시 공황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스탈린그라드 주민들을 볼가 강 건너편으로 철수시키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주로 이 지역 출신인 의용군이 더욱 결사적으로 도시를 방어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57-8)


제3부 운명의 도시


"할더가 '만족스러운 스탈린그라드 진격'을 언급한 9월 7일, 카프카스 진격 실패에 따른 히틀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한 임무를 달성하기에는 리스트 원수의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폴란드와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등지에서 승리를 거둔 후 히틀러는 마치 자신이 정상적인 전쟁의 요소들을 초월한다는 듯 연료나 병력의 부족 등과 같은 '사소한' 요소들을 얕잡아보기 시작했다." "카프카스를 차지하지 못하면 전쟁을 끝내야 할 거라고 장군들에게 말한 바 있듯이 어쩌면 히틀러 본인도 진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차마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볼가 강이 봉쇄된 이상 스탈린그라드의 군수 산업은 파괴되어도 좋지만 지금의 히틀러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그 도시를 무슨 일이 있어도 장악해야 했다. 이 위험한 몽상가는 이를 벌충할 다른 상징적 승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히틀러는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178-9)


"이 위기의 시기에 예레멘코와 흐루시초프가 내려야 했던 가장 중요한 결단은 스탈린그라드 사수라는 신념을 상실한 것이 분명한 제62군의 후임 사령관으로 누구를 선택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9월 10일, 제62군은 도심 깊숙한 곳까지 밀려났다. 제29차량화 보병 사단이 스탈린그라드 남쪽 외곽에서 쿠포로스노에를 통해 볼가 강을 건넜을 때, 제62군과 그 남쪽의 제64군은 서로 차단되어 있었다." "예레멘코와 흐루시초프는 지휘 본부를 강 건너편으로 철수해도 좋다는 스탈린의 허락을 간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볼가 강 서쪽에 아직 지휘 본부가 남아 있는 부대는 제62군밖에 없었다." "마침내 스탈린그라드의 새 사령관으로 추대된 추이코프 장군은 이미 독일군이 백병전, 특히 어둠이 내린 이후의 근접 전투를 가능한 한 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모든 독일군이 소련의 총부리가 뒷덜미를 겨누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했다."(181-4)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자 로딤체프는 독일군의 야포와 공습을 조금이라도 둔화시키기 위해서 적군과의 거리를 항상 50야드로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혹독한 전투의 피로에 눈이 붉게 충혈된 독일군 병사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탓에, 그 동안 팽배했던 승리감도 자취를 감추었다. 상황이 갑자기 일변한 것이다. 그들은 도시 지역에서는 야포가 훨씬 더 위협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탄의 파편만이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층 건물이 포격을 당하면 포탄 파편뿐만 아니라 건물의 잔해까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독일군 병사들은 고층 건물의 저격수들에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수시로 하늘도 올려다보아야 했다. 독일 공군기가 나타나면 독일 보병 역시 소련군과 똑같이 은신처를 찾아 몸을 날려야 했다. 그들은 스투카 폭격기가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이 어우러진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203-4)


"독일군 장군들은 이 폐허의 도시에서 무엇이 자신의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통적인 범주와 차원의 군사 작전과는 동떨어진 근접 전투는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안겨 주었다. 군사 이론가들은 진지전이야말로 '변칙적인 병법'이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시가전에서는 독일군 특유의 기동력이라는 장점을 살릴 수 없었고 전투의 상당 부분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제6군은 1918년 1월에 선을 보인 이른바 '폭풍 쐐기 작전'까지 동원했다. 이는 열 명 가량의 병사들이 짝을 이루어 기관총과 경박격포, 화염 방사기 등으로 무장한 채 벙커와 지하실, 하수구 등에 숨어 있는 적군을 섬멸하는 방식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베르됭에서의 야만적인 살육보다 훨씬 더 끔찍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독일 병사들은 무너진 건물이나 벙커, 지하실과 하수구 등을 뒤져야 하는 근접 전투를 '쥐들의 전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12-3)


"독일군의 예비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련군은 보다 일반적인 전술도 구사했다. 추이코프는 야간 공격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는데, 이는 독일 공군의 대응을 피하기 위한 전술이기도 했지만 독일군이 대부분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점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특히 바티우크 대령이 지휘하는 제284소총사단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시베리아 출신의 병사들이 어떤 먹잇감도 놓치지 않는 천부적인 사냥꾼 기질을 타고 났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독일군 병사들은 밤만 되면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이 발견될 때마다 총을 발사하곤 했고, 누구 한 사람이 발포를 시작하면 주변의 다른 병사들까지도 맹목적인 일제 사격을 불사하는 바람에 9월 한 달 동안에만 2천 5백만 발의 탄약이 소모되었다. 소련 병사들은 가끔씩 밤하늘에 조명탄을 쏘아 올려 공격 개시가 임박했다는 암시를 풍김으로써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키곤 했다."(214-5)


"도시 안쪽에서는 10월 말이 되면서 피로와 탄약 부족 때문에 독일군의 공세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11월 1일, 붉은 10월 공장에 대한 제79보병 사단의 마지막 공격은 볼가 강 쪽에서 날아오는 강력한 포격 아래 그 막을 내렸다. 제6군 지휘본부는 소련군의 야포가 자신들의 공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1월 6일자로 모스크바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지난 이틀 사이에 적군의 전술이 바뀌었다. 아마도 지난 3주에 걸친 막대한 손실의 여파가 아닐까 추정되는데, 이제는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는 작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1월 초로 접어들자 소련군은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앞 갑판에 T-34 탱크의 포신을 장착한 볼가 함대 소속의 포함들이 리노크의 제16기갑 사단에 포격을 가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야간 공습은 독일군 병사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295-6)


"제6군의 공세에 맞선 소련군 측의 대반격, '천왕성 작전'은 그 전해 겨울에 스탈린이 보여 준 조급증에 비춰볼 때 비정상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불타는 복수심이 그의 조급증을 누그러뜨려 주었던 것이다." "붉은 군대는 '천왕성 작전' 준비 상황을 위장하기 위해 은밀한 기만 작전이 필요했지만, 기대하지 않은 두 가지 행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히틀러가 소련군에게 예비 병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일의 두 번째 오판은 붉은 군대에게 그보다 훨씬 큰 도움을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주코프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근처의 북쪽 측면에 배치된 제14기갑 군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그 효과는 지극히 미미했다. 독일은 그 같은 작전 수행 능력으로는 절대로 독일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6군 전체를 완전히 포위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305-10)


"독일이 한 달에 500대의 탱크를 생산하던 그해 여름, 할더 장군은 히틀러에게 소련이 한 달에 1,200대의 탱크를 생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총통은 탁자를 내려치며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사실 소련은 그보다 훨씬 많은 탱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히틀러는 산업 지역을 거의 다 빼앗긴 소비에트 연방이 독일보다 더 많은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나치 지도자들은 소련 인민들의 애국심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산업 설비를 우랄 산맥으로 옮겨 가고자 하는 소련 측의 필사적인 노력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 서부 지역에 건설되었던 1,500개 이상의 공장이 볼가 강 동쪽, 특히 우랄 산맥 부근으로 옮겨졌다. 일단 가동되기 시작한 생산 라인은 기계가 고장을 일으키거나 전력이 부족한 경우, 혹은 부품이 부족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중단되는 법이 없었다."(310-1)


제4부 주코프의 함정


"11월 19일, 독일 시간으로 5시 20분에 야포 및 박격포 부대는 '사이렌'이라는 암호에 따라 포탄을 장전했다." "이윽고 최초의 포성이 적막한 대지를 뚫고 터져 나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탄착점을 수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조준을 해둔 탓에 비교적 정확하게 목표 지점을 타격할 수 있었다." "제6군이 폰 바이흐스 장군으로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공격이 시작된 지 17시간 만인 그날 밤 10시경의 일이었다. 루마니아 제3군이 주둔했던 지역의 상황 변화 때문에 제6군의 후미를 보호하고 통신망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스탈린그라드의 모든 공격 행위는 '즉각 중단'되었다.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가 급히 서쪽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대한 준비가 워낙 부족했다. 추이코프의 제62군은 예상대로 독일군의 이동을 막기 위해 강력한 공세를 취해왔다."(329-39)


"이날 벌어진 사건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파울루스 장군이 별다른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적군의 공격에 대비한 전력을 충분히 구축해 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벌어진 후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붉은 군대의 공격이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제6군의 후미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한편 B 집단군은 총통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상황을 혼자 힘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히틀러의 집착이 최대한의 신속성이 요구되는 시기에 실로 한심한 무기력증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적군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해 차분히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제6군의 후방을 지키기 위해 상당수의 병력을 돈 강 부근으로 철수시킨 탓에 독일군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은 크게 줄어들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그 때문에 남쪽 측면의 대문이 활짝 열려 버렸다는 점이다."(336-40)


"'일시적인 포위'의 위험에 굴하지 말고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파울루스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그가 니즈네치르스카야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파울루스에게는 스탈린그라드 남쪽에 머물러 있던 호트의 병력과 루마니아 제6군단 잔여 병력의 지휘권을 책임지라는 지시까지 함께 떨어졌다. 핵심은 '철도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볼가 강 주변에서 후퇴하여 B 집단군과 합류할 것을 고려하고 있던 파울루스는 이러한 갑작스런 명령이 무척 난감하게 느껴졌다." "파울루스가 니즈네치르그카야로 날아간 것은 지휘 본부가 그곳에서 B 집단군 및 라스텐부르크 부근의 볼프산체와의 비밀회의를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왔다는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그가 소련을 탈출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즉각 적군의 포위망 안쪽에 해당하는 굼라크로 돌아가 참모들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363-4)


"파울루스는 스트레커가 '모든 군인에게 가장 어려운 양심의 문제'라고 표현한 고민에 봉착했다.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과 상부의 명령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고민이 그것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제6군의 거의 모든 장교들이 소련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믿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군단장과 사단장, 참모 장교 등은 확실히 돌파 작전을 선호한 것이 사실이지만, 보병 부대, 특히 연대장과 대대장 선에서는 그 정도의 확신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벙커 속에 진지를 구축한 병사들은 은신처를 버리고 붉은 군대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벌판으로 나가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히틀러가 머지않아 자기네를 구출해 줄 강력한 반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374-6)


"제6군을 구출하기 위한 만슈타인의 계획 '겨울의 폭풍 작전'은 총통의 지휘 본부와 철저한 논의를 거친 끝에 수립되었다. 이것은 제6군에게 돌파구를 열 기회를 제공하고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한 통로를 뚫음으로써 '1943년의 작전을 염두에 두고' 제6군으로 하여금 볼가 강 주위에 '전초 기지'를 고수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 본인은 제6군의 돌파 작전을 허락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차이츨러에게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퇴각이 불가능한 이유는 〈대의를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고 주장했다. 클루게가 만슈타인에게 경고한 바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직도 전해 겨울에 있었던 일을 떨쳐 버리지 못한 셈이었다. 히틀러는 참모장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한 부대가 도주하면 그 패배의 물결 속에 법과 질서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한다.〉"(398-401)


"파울루스 군의 의사들이 추위를 싫어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날이 추울수록 환자들의 회복이 그만큼 늦어졌다. 상처 부위에 서리라도 끼는 날이면 치명적인 결과가 빚어진다." "12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심각한 동상으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발이 자줏빛으로 부어오르는 정도의 증세는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서 돌려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발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얼른 잘라 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12월 둘째 주부터 의사들은 아주 곤혹스러운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하거나 병에 걸리지도 않은 병사들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보급품이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기아에 의한 사망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병리학자들은 이들의 죽음이 '극심한 피로(포위망 안쪽에서 근무하던 600명의 의사들 가운데 감히 기아라는 표현을 입에 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와 정체불명의 질병' 때문이라고 보고했다."(409-10)


"독일군 병사들의 희망은 적군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에 대한 갈망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른바 '포위병[Kesselfever]'이라는 증세를 보이는 이들은 SS 기갑 군단이 나타난 붉은 군대를 시원하게 쳐부수고 자신을 구원한다는 공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돈 전선 지휘 본부의 선전국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병사들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확성기가 실린 트럭을 몰고 다니며 선전 방송을 하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방법에 해당했다." "다양한 소리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방법도 개발되었다. 이를테면 한동안 째깍거리는 시계 바늘 소리를 들려준 다음, 동부 전선에서 7초에 한 명 꼴로 독일군이 목숨을 잃는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그런 다음 〈스탈린그라드, 히틀러 군의 거대한 무덤!〉이라는 멘트에 이어, 경쾌한 탱고 음악이 얼어붙은 평원에 울려 퍼진다. 때로는 귀를 찢을 듯한 카튜샤 로켓포의 발사음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기도 했다."(415-6)


제5부 제6군의 종말


"1월 10일에 소련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6군이 안고 있던 주된 관심사는 변함이 없었다. 한 의사는 '공적 1호는 변함없는 배고픔'이라고 단언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경계선을 넘어 무인 지대로까지 나아가서는 죽은 소련 병사들의 시신에서 빵조각이나 말린 완두콩 따위를 찾아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애타게 찾은 것은 소금을 담아 접은 종이였다. 포위망 안쪽의 독일군 병사들의 배고픔도 엄청난 고통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큰 괴로움에 시달린 이들도 많았다. 보로포노포와 굼라크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3,500명의 소련 포로들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의 사망률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몇몇 독일군 장교들은 1월 사이에 이 포로들 사이에서 식인 행위가 급속히 번져 나갔음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한 바 있다. 1월 말에 이들 수용소에 도착한 붉은 군대는 3,500명 가운데 살아남은 이가 불과 2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471-2)


"'고리 작전'은 1월 10일 일요일의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마리노프카와 카르포프카 지역에 토치카와 포상(砲床)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밀물 같은 붉은 군대의 진격을 막는 데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남은 탱크와 보병들로 반격을 시도하는 독일군의 노력은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붉은 군대는 박격포를 이용해 보병을 탱크로부터 분리시킨 후 생존자를 제거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돈 전선의 정치국은 〈항복하지 않는 적군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물리적·물질적 약점을 고려할 때 제6군의 저항은 실로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처음 사흘 동안 이들이 적군에게 입힌 피해 상황을 보면 그 같은 사실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돈 전선은 26,000명의 병사를 잃었으며 절반 이상의 탱크가 파괴되었다. 붉은 군대의 사령관들은 사상자 수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고스란히 노출된 벌판을 진격한 탓에 쉬운 목표물이 되었다."(476-80)


"한편 소련의 주력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포위망의 서쪽 지역을 강타했다. 제29차량화 보병 사단은 효과적으로 제압되었다. 제3차량화 보병 사단은 연료가 떨어져 차량과 중화기를 포기한 채 수북이 쌓인 눈밭을 도보로 걸어서 퇴각해야 했다. 땅을 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병사들을 데리고 허허벌판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월 16일, 제295보병 사단 소속의 한 대대가 완전히 항복을 했다. 포로를 정당하게 처우하겠다는 보로노프의 전단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본 듯했다. 항복한 대대의 지휘관은 댜틀렌코 대위에게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고 한다. 〈도주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행동이다. 나는 부하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하려 한다고 말했다.〉 전직이 영어 교사였던 그 대위는 이렇게 덧붙였다. 〈독일군 중에서 일개 대대 전체가 투항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욱 참담한 심정이었다.〉"(483-5)


"1월 20일 아침, 붉은 군대는 새롭게 구성한 병력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제65군은 이미 그날 밤 곤치라 북서쪽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몇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굼라크가 그들의 주요 목표였다. 다음 날 저녁, 비행장과 그 부근의 지휘 본부가 철수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미 카튜샤 포대의 공격으로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다." "그 무렵 이미 파울루스 장군은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었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괴벨스가 '전면전'을 주창하며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을 희석시킬 준비를 한 다음 날인 1월 22일, 제6군은 히틀러로부터 운명의 마지막을 알리는 전문을 받았다. 〈항복은 절대 안 된다.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 전투 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병사들을 총동원하여, '요새'를 사수하라. '요새'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새로운 전선을 구축할 기회를 제공하였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제6군은 독일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498-501)


"히틀러는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파울루스의 결단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언급했다." "북쪽 고립 지역에서는 스트레커 장군 휘하의 6개 사단 잔여 병력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 제11군단의 지휘 본부를 설치한 스트레커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 부대는 중화기도, 보급품도 없는 상태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탈진해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한다. 그러나 그들은 얼어 죽는 순간까지도 무기를 놓지 않는다. 스트레커.〉 그의 메시지는 아주 생생했지만, 나치 특유의 상투적인 표현은 빠져 있었다. 그의 전문을 수령한 히틀러는 그날 오후 늦게 답신을 보냈다. 〈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위망 북쪽이 유지되기를 기대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잠시 후 또 하나의 명령을 전달했다. 〈제11육군 군단은 적의 전력이 다른 전선에서 마음 놓고 작전을 펼치지 못하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붙들어 두어야 한다.〉"(524-5)


"2월 2일 아침은 짙은 안개로 시작되었다. 이 안개는 싸락눈을 동반한 세찬 바람이 밀려와서야 서서히 걷혀 갔다. 제62군 전체에 독일군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볼가 함대의 수병들과 반대편 강둑의 병사들이 다섯 달 동안 폐허 속에 갇혀 있었던 스탈린그라드의 시민들을 위해 빵 덩어리와 통조림을 들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왔다. 기쁨에 들뜬 사람들은 자신이 마주친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소련 수비대는 정말로 스탈린그라드가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먼저 죽은 동료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랍게만 느껴졌다. 볼가 강을 건너갔던 사단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살아남은 병사가 채 1백 명이 되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붉은 군대는 11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가운데 485,751명이 목숨을 잃었다."(528)


"독일 육군이 입은 정확한 손실은 지금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지금까지의 독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패배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제6군과 제4기갑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천왕성 작전이 시작된 이래 포위망 안쪽에서만 60,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대략 130,000여 명이 포로로 생포되었다. 여기에는 8월과 11월 사이 스탈린그라드 주변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숫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 이 기간에 4개의 동맹군이 궤멸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슈타인의 구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점, 또한 소(小)토성 작전 때 발생한 피해 등을 모두 합치면 추축국은 50만 명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셈이다." "이런 와중에 괴벨스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사실을 왜곡하는 뻔뻔스러운 재주를 총동원하여 이 사태를 헤쳐 나갔다." "제6군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던 그들이 이제 180도 방향을 바꾸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533-4)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전쟁이 끝나면 파울루스와 그의 장군들을 군법 회의에 회부하여 자신이 하달한 명령, 즉 마지막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벌을 받게 하겠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식탁에서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던 습관이 이제 거의 사라진 대신, 혼자 식사를 하고 싶어 했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발견했다. 〈왼손이 약간 떨리기 시작했고, 등은 구부정하게 굽었으며,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었고, 두 눈은 튀어 나왔으나 전의 광채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뺨에는 붉은 반점이 생겼다.〉 그러나 히틀러는 밀흐를 만났을 때도 스탈린그라드의 엄청난 희생에 대해 어떤 유감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또 하나의 모험을 일으켜 더 많은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금년 내에 이 전쟁을 종결지을 생각이네, 이미 그에 따라 독일 국민의 모든 힘을 동원할 방안을 세워 놓았어.〉 히틀러가 밀흐에게 한 말이다."(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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