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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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2월 말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건물마다 빨간색 깃발이나,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군중의 모습이었다. 겉으로 볼 때 그 도시는 부유한 계급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곳이었다. 소수의 여자와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모두가 노동 계급의 거칠거칠한 옷을 입었다." "이 모든 것이 신기했고, 또 감동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면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 도시의 모습을 보자마자 내가 싸워서 지킬 만한 어떤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나는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라고 믿었다. 그것이 정말로 노동자들의 〈국가〉이며, 모든 부르주아는 달아났거나, 죽음을 당했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의 편으로 넘어왔다고 믿었다. 많은 수의 부유한 부르주아가 기회를 엿보며 당분간 프롤레타리아 행세를 하고 있을 뿐임을 깨닫지 못했다."(11-3)


"나는 레닌 병영에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전선에 가기 위한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의용군에 입대했을 때는 다음날 전선으로 파견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새로운 센투리아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노동조합들이 급조한 노동자 의용군은 아직 일반적인 군대처럼 조직되지 않았다. 서른 명 가량으로 이루어진 지휘 단위는 그냥 〈과〉라고 불렀다. 센투리아는 백 명 가량으로 이루어졌다. 사람만 많으면 무조건 〈대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영 전체는 더럽고 혼란스러웠다. 의용군은 건물을 점령하기만 하면 모두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혁명의 부산물인가 보다. 구석마다 부서진 가구, 망가진 안장, 놋쇠로 만든 기병대 군모, 기병대가 쓰던 빈 칼집, 썩어가는 음식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음식, 특히 빵은 엄청나게 낭비되었다. 내가 있던 내무반에서도 식사 때마다 빵을 들통으로 하나씩 버렸다. 민간인이 빵이 모자라 난리인 것을 생각하면 면목 없는 일이었다."(14-5)


"병영에서 지낸 지 이틀째 되는 날 〈교육〉이라는 우스운 일이 시작되었다. 신병들은 대부분 바르셀로나 뒷골목 출신의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짜리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혁명적 열정은 가득했지만 전쟁의 의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줄을 제대로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규율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열에서 빠져나와 장교와 심하게 말싸움을 벌였다. 우리를 교육한 중위는 몸집은 건장하지만 얼굴은 해맑은 유쾌한 젊은이였다. 정규 육군장교 출신이었다. 절도 있는 몸가짐과 말쑥한 옷차림 때문에 여전히 정규 육군장교로 보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신실하고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모든 군인들 사이에 완전한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부하들보다도 더 열심히 고집을 부렸다. 무지한 신병이 그를 〈세뇨르〉라고 부르자 그는 무척 당황했다. 〈누가 나를 세뇨르라고 부릅니까? 우리는 모두 동지가 아닙니까?〉 그런 평등 정신 덕분에 그의 일이 더 쉬워졌던 것 같지는 않다."(17)


"이른바 교육이라는 것은 연병장 훈련이었는데, 그나마 가장 어리석고 낡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향우, 좌향좌, 뒤로돌아, 차려 자세로 3열 종대 행진 등, 내가 열다섯 살 때 배웠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 게릴라군이 받는 훈련치고는 의외였다고 할 수 있다. 병사를 훈련시킬 기간이 며칠밖에 없다면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숨는 방법, 열린 공간에서 전진하는 방법, 보초를 서고 흉벽을 쌓는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기를 다루는 방법. 그러나 마음만 뜨거운 이 어린 무리는 며칠 후면 전선으로 내던져질 것임에도, 소총을 쏘거나 수류탄의 핀을 뽑는 방법조차 아직 배우지 못했다. 무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의 소총 부족은 심각했다. 전선에 도착하는 부대는 물러나는 부대의 소총을 인계받아야 했다. 레닌 병영 전체를 통틀어 소총이라고는 보초들이 사용하는 것 외에 한 자루도 없었던 것 같다."(18)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하사가 되었다. 나는 보초 열 두 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처음에는 그랬다. 센투리아는 대부분 흔련받지 못한 십대 소년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의용군에서는 열 한 살, 열두 살짜리 아이들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파시스트 지역에서 피난 온 아이들로, 먹고 사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의용군에 입대한 것이다. 그들은 보통 후방에서 쉬운 일을 맡았다. 그러나 때때로 살금살금 전선까지 오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떤 조그만 녀석 하나가 〈장난으로〉 개인호의 모닥불에 수류탄을 던진 일도 있었다." "밤이 되면 내 소대에 소속된 가엾은 아이들은 발을 붙잡고 참호에서 질질 끌어내야만 잠을 깼다. 그것도 잠시, 등만 돌리면 그 즉시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잠잘 곳을 찾아 들어갔다. 그 아이들은 몹시 추울 때도 참호 벽에 기대어 그대로 잠들곤 했다. 적군들이 모험심이 강하지 않기 망정이었다."(39-40)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특히 카탈로니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막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또 유지하지도 않았다. 암만 내키지 않아도, 모두가 조만간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했다." "훗날 나는 바르셀로나 폭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기관총 사격을 피해 다녔고, 마침내 경찰이 뒤쫓아오는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스페인을 빠져나왔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일어난 것은 내가 P.S.U.C.(통일사회당)이 아니라 P.O.U.M.(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서 복무했기 때문이다. 그 두 종류의 머리글자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66-8)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다. 당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비방은 물론이고 모든 일반적인 전쟁 선전 활동, 즉 탁자를 치며 열변을 토하거나, 과장된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적을 헐뜯는 일들 역시 보통 모두 싸우지 않는 사람들, 많은 경우 싸우느니 차라리 백 킬로미터 가량 먼저 달아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전쟁의 우울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좌익 언론도 우익 언론만큼이나 똑같이 거짓되고 부정직하다는 것을 내개 가르쳐주었다는 점이다."(88-9)


"전쟁 중에 몇 달 간격으로 바르셀로나에 가본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서 일어난 특별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이상하게도 8월에 갔다가 1월에 다시 가본 사람이 하는 이야기와 나처럼 12월에 갔다가 4월에 다시 가본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똑같았다. 혁명적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거리의 피가 아직 다 마르지 않고, 의용군이 고급 호텔에서 주둔하고 있던 8월에 그곳에 가본 사람들에게는 12월의 바르셀로나가 부르주아적인 분위기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갓 건너온 나에게는 그때의 바르셀로나도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노동자들의 도시를 닮았다. 그러나 이제 물결은 뒤로 밀려났다. 그 곳은 다시 평범한 도시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약간 뜯기고 부서졌지만, 노동 계급의 지배를 보여주는 외적인 표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 즉 민간인들은 전쟁에 관심을 잃었다. 또한 빈부 상하의 계급 구분이라는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145-7)


"도시의 표면적인 모습 속에, 사치와 점증하는 가난 속에, 꽃가게가 늘어서고 색색깔의 깃발이 나부끼며 선전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는 활달할 거리의 분위기 속에 정치적 경쟁과 증오라는 무시무시한 감정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었다.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뭔가를 예감한 듯 입을 모아 말했다. 「머지않아 일이 터질 거야」 그 위험은 아주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혁명이 진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혁명이 더 진전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의 반목이었다." "한편 개인이 소지한 모든 무기는 반납하라는 포고가 발표되었다. 당연히 이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 기간 내내 카탈로니아 전역에서 소규모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신문 검열 때문에 그런 사건은 늘 모호하고 모순된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곳곳에서 무장한 경찰대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요새를 공격했다."(155-6)


"발렌시아 정부는 바르셀로나 전투를 통해 오랫동안 찾던 구실을 얻었다. 카탈로니아를 좀더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구실이었다. 정부는 노동자 의용군들을 해산시켜 인민군에 재배치할 계획이었다." "전국노동자연맹의 요새에서 대규모의 무기가 몰수되었다. 물론 몰수되지 않은 무기들도 많았을 것이다. 《라 바탈랴》는 계속 발간되었다. 그러나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1면이 거의 백지로 나오곤 했다. 통일사회당 신문들은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노동자당의 활동 금지를 요구하는 선동적 기사를 내보냈다. 그들은 통일노동자당을 위장한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통일사회당 선동 분자들은 통일노동자당이 망치와 낫이 그려진 가면을 벗자 나치의 하켄크로이츠가 찍힌 무시무시하고 광적인 얼굴이 나타나는 만화를 시내 전역에 배포했다. 바르셀로나 전투에 대한 공식적 해석이 내려진 게 분명했다. 통일노동자당의 공작을 통해 파시스트 〈제5열〉이 봉기한 것이라고 이야기될 것이 뻔했다."(187-8)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난은 결국 이런 뜻이 된다.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수만 명의 사람들, 외국에서 그들에게 공감하여 그들을 도우러 온 많은 사람들─그 대부분은 파시스트 국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그리고 수천 명의 의용군이 모두 파시스트에게 매수된 엄청난 규모의 첩자 집단이다. 이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또한 전쟁 동안에도 친파시스트적인 활동의 기미는 없었다. 통일노동자당이 정말로 파시스트 단체라면 그 의용군이 왜 충성을 유지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1936-37년의 겨울 동안 견디기 힘든 조건에서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 속하는 8천 내지 만 명의 병사들은 전선의 주요 부분을 담당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한번에 너댓 달씩 참호에 있었다. 그들이 왜 그냥 전선에서 빠져나오거나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는지 알기 힘든 일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그런 행동은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싸웠다."(221-3)


"내 역할에 무력함을 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런 참사─어떻게 끝이 나건 스페인 전쟁은 살육과 신체적 고통은 별도로 하고라도 경악할 만한 참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내가 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바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하지도 않고 또 진실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며, 모두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당파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 나의 당파적 태도, 사실에 대한 오류, 사건들의 한 귀퉁이만 보았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왜곡을 조심하라. 또한 스페인 전쟁의 이 시기를 다룬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똑같이 조심하라."(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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