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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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불타는 도시


"외부 세계는 중국이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혹독한 대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약 1500만 명이 죽었다. 대규모의 피란민이 발생했으며, 이 나라의 초보적 근대화가 파괴된 것은 전쟁에서 치른 대가였다."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는 거대한 투쟁에서 중국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미국, 소련, 영국이 전쟁의 주역을 차지한 것에 비해 중국은 고작 이류 선수나 단역 배우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은 1937년 추축국의 맹공격에 직면한 첫 번째 국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2년 뒤, 미국은 4년이 지난 뒤에야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의 목표 중 하나는 〈중국으로 하여금 그 전쟁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수많은 일본군을 중국 본토에 묶어놓음으로써 중국은 전반적인 동맹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중국은 다른 동맹국들에 비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었다."(12-3)


"또한 이 전쟁은 중국의 미래에 이상을 품고 있던 세 사람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 동안 모든 존경과 비판의 시선은 중국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에게 쏠렸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심지어 적인 중국공산당까지도 전 중국을 대표해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장제스라고 생각했다. 장제스는 이 전쟁이 정화의 불이기를 꿈꿨다. 중국이 이 전화戰火에서 일어나 번영하는 주권국가가 되고, 전후 아시아와 그 밖의 세계 질서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 희망이었다. 결과적으로 장제스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마오쩌둥에게 국가를 잃었다." "한편 전쟁은 한 남자의 명성을 날려버렸다. 그의 이름은 왕징웨이汪精衛다. 왕징웨이는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다. 그는 청년 시절 장제스나 마오쩌둥보다 더 유명한 민족주의 혁명가였고, 위대한 혁명가 쑨원孫文 다음의 지위였다. 그러나 항일전쟁 중 중국인들에게 '천고의 배신자'라고 비난받을 만한 결정을 했다."(14-5)


"중국의 전시 역사를 다루면서 각국은 모두 자신의 냉전 상황에 맞게 편의적으로 해석했다. 일본과 중국은 1945년과 1950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의 보호 아래 서로 자리를 맞바꾸었다. 일본은 전시의 적에서 냉전의 자산이 되었고, 중국은 항일의 동맹국에서 수시로 분노를 터뜨리는 예측 불가능한 거인이 되었다. 전시 중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은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라는 정치적인 질문과 함께 미국 정부를 꼼짝 못하게 했다. 그 시절 몹시 험악했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중국의 다양한 기여와 결점을 신중하게 평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한편, 1949년 이후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관변 역사가들은 항일전의 승리에서 주인공은 중국공산당이었다고 재빨리 수정했다. 국민당의 역할은 부정당했다." "중국에서 항일전쟁은 비극 대신 평면적인 악인과 영웅이 나오는 멜로드라마로 각색되었다. 모든 사람이 중일전쟁은 수치스러우며, 마오쩌둥이 만들어낸 신중국의 영광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19-20)


"그동안 중국의 항전 노력, 특히 국민당 정권의 역할에 대한 서구의 비판적인 시각은 장제스 정권의 부패와 대중적 지지를 상실했다는 질책에 근거한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전시 유머 중 하나는 중국 지도자의 이름Chiang Kai-Shek이 〈내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줘Cash My-Check〉였다는 것이다. 진실은 훨씬 복잡했다. 연합군의 유럽 우선 전략은 장제스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제스는 연합국의 전략적 이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작 자신들의 이익에는 위배되는 방식으로 군대를 배치하도록 거듭 강요당했다. 1945년 평화가 찾아왔을 때 국민당 정권이 절뚝거리며 동정받지 못하는 불구가 된 이유는 맹목적인 반공과 항일의 포기(진주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4년 반 동안 홀로 일본에 맞섰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억지다) 또는 멍청하거나 원시적인 군사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국내 혼란,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들 때문이었다."(22)


제1부 전쟁으로의 길


"1856년과 1864년 사이에 태평천국은 중국 내에 실질적인 독립국가를 세웠다." "청 조정은 신뢰할 만한 지방관 증국번에게 맡겨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결정했다. 그는 태평천국군을 진압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상군湘軍)'를 양성했다. 새로운 군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다. 1864년 난징의 마지막 전투에서 약 1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이 사건은 청의 통치에 또다른 취약성을 가져왔다. 태평천국이라는 당장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중앙에서 지방으로 군 지휘권의 이양은 중앙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흔히 '군벌'로 알려진 군국주의자들이 자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분열되고 군벌화된 중국은 점점 취약해졌다. 1860년 이후의 권력 분산이 없었다면, 1930년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확률은 훨씬 낮았을 것이다. 군벌화와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은 청의 마지막 50년 통치 동안 중국을 뒤흔든 광범위한 폭력 문화를 초래했다."(31-2)


"1905년 러일전쟁은 아시아 국가가 유럽 강대국에 승리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 성공으로 일본은 세계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롄大連 항을 포함한 만주 동부 연해의 랴오둥遼東반도에 대한 권리를 일본에 넘겨주어야 했다. 이어서 일본은 남만주철도를 건설해 이익을 극대화했다. 남만주철도는 수송망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부분적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상업적, 준정부적 조직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강력한 발판을 제공했다. 또한 러일전쟁은 일본 대중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일본에는 '센유戰友' 같은 군가가 유행했다. 여기에는 〈이곳은 고향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 멀리 만주의 석양이 들판 가장자리의 돌을 비춘다. 그곳에 잠든 나의 전우〉라는 가사가 담겨 있었다. 이러한 노래는 일본이 중국에서 큰 대가를 치르며 영토를 손에 넣었으며 그런 희생을 통해 자신들의 이웃 땅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았다는 정서를 부추겼다."(36)


"1911년 가을 중국 중부에 위치한 도시 우한武漢이 독립을 선포하자 많은 도시가 연달아 독립을 선포했다. 정치적으로 권력화된 신흥 상인 계층으로 새롭게 세워진 각 성의 의회는 신생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미국에 체류 중이던) 쑨원을 대총통으로 추대했다. 소식은 순식간에 청조의 전복을 준비하던 젊은 애국자들에게 전파되었다. 장제스는 서둘러 일본에서 돌아온 뒤 고향인 저장성에서 급조된 혁명군을 이끌고 첫 번째 전투를 경험했다. 청조의 통치가 매우 불안정했음이 드러났다. 지방 봉기는 갑작스레 불이 붙었지만 체제 전체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1911년 말 청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중국 북부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인 베이양 군을 통솔했던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조정에 들어가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는 여섯 살 난 황제 푸이溥儀가 물러나는 대가로 황실에 안정된 거처와 연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1912년 2월 12일 청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했다."(41-2)


"1926년 3월 20일, 장제스는 광저우에 계엄을 선포했고, 강한 영향력을 지닌 소련인 고문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비록 그가 (저우언라이를 포함해) 체포된 고위 중국 공산주의자와 소련 고문단들을 즉시 풀어주었지만, 권력이 장제스에게 넘어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6월 5일, 장제스는 국민당 군대인 국민혁명군을 공식적으로 장악했다. 역설적이게도 1912년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군사력이 쑨원의 권력과 명성을 무력하게 만들었듯 이제는 군대를 장악한 장제스가 쑨원의 실질적인 후계자(왕징웨이)로부터 승리했다. 국민혁명군은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군사력은 중요했다. 그 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민혁명군은 북벌전쟁을 전개하여 전투나 압박을 통해 중국 중부와 동부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실상 1911년의 혁명 후 잃었던 국가 통일이 완수되었다." "마오쩌둥은 북벌의 열기 속에서 중국 전체를 지배하기 위한 정책을 시도하는 정치 실습생 중 한 명이었다."(51-2)


"1928년, 장제스는 수도를 중국 중부의 도시 난징南京으로 정하고 그곳에 자신의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석탄이 풍부한 산시山西성은 옌시산閻錫山이 통치하는 실질적인 자치 지역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군벌로 예전에는 전족纏足 반대운동을 강력하게 펼치기도 했다. 만주의 둥베이東北 3성은 '젊은 원수' 장쉐량張學良의 세력권이었다. 화베이華北 지방에서는 지역 군벌 쑹저위안宋哲元이 지반을 다졌다. 일본 역시 만주에서 산화이관山海關 이남 지역까지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했다. 중국 서부 변경의 칭하이靑海성은 사이가 좋지 않은 숙질 관계인 마린馬麟과 마부팡馬步芳이 통제했다. 칭하이성 북쪽의 신장新彊성은 1933년부터 성스차이盛世才의 지배지였다." "군벌 류샹劉湘이 청두成都에서 통치했고, 서쪽의 비옥한 쓰촨四川성은 국민당의 완벽한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장제스의 불확실한 통치력은 진정한 통일을 이루는 데 큰 장애가 됐다."(54-5)


"1928년 6월 만주 군벌이자 '노원수' 장쭤린은 관동군이 설치한 폭탄 때문에 전용 열차가 폭발하면서 죽었다. 일반적으로 일본 군부는 외무성 관리들에 비해 한층 과격한 방법에 익숙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중국 본토는 침략자들, 특히 소련과의 완충지대였다. 만약 일본에 적대적인 세력이 중국을 차지한다면 일본에게 한층 불리해질 것이라고 여겼다. 1905년 러시아에게 이겼다는 기억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생명선'이라는 용어는 만주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 흔히 인용되었다." "일본 지배층은 반제국주의적 구호를 외치는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적대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국민당이 대중적 정당성을 가졌으며 중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이념적 과제를 가진 운동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장제스를 뇌물을 좋아하고 유약한 또 하나의 중국 군벌로 취급했다." "장제스가 권력을 잡았을 때, 동아시아에서 두 국가의 서로 다른 이상은 존립을 건 대결을 예고했다."(58-60)


"1932년 2월 만주는 일본에 완전히 점령당하고 만주국의 '독립 선언'이 이어졌다." "장제스 정부는 일본과의 타협을 모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1933년 5월 1일 양국은 '탕구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내용은 쌍방의 체면을 세워주는 데 있었지만 사실상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왕징웨이는 여전히 열렬한 민족주의자로서 활기차고 독립된 중국을 보고 싶었지만, 항전을 시작하기에는 중국의 군사력이 너무 약하다는 장제스의 신념을 공유했다. 또한 중국이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는 중국 영토에 식민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이나 미국과의 동맹이 일본과 손을 잡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 최소한 일본은 중국과 문화적인 유대감은 있었다.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지해야 하는(어쨌든 정부 방침이었다) 불행한 위치에 있었고 대중이 보기에 그는 비할 바 없는 친일파였다. 이로 인해 미움 받는 대상이 되었다."(73-4)


제2부 재난이 닥치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중일 군대가 충돌했다." "장제스는 중대한 질문과 맞닥뜨렸다. 이틀 동안의 전투가 이전의 여러 사례처럼 정말로 단순한 충돌이었나, 아니면 1931년의 만주 위기처럼 중국 영토를 본격적으로 침략하려는 일본의 또 다른 시작의 전조인가? 그는 전쟁이냐, 아니냐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1935년부터 중국 북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일본이 중국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여긴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장제스는 일본이 중국을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만약 지금 맞서지 않는다면, 그런 순간이 곧 닥치리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확실히 곧 도래할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도전하는 것은 국가적 자살이나 다를 바 없는 매우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장제스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장제스가 일본과 싸우겠다면 자력으로 해내야 했다."(87-91)


"전쟁이 벌어진다면 국지적 분쟁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장제스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군대를 더욱 전문화하고, 군벌 수장들의 독립 성향을 약화시키며 국가 경제와 재정적 기초를 다지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1937년까지 일본의 전쟁 준비 태세는 중국인들의 노력을 시시하게 만들었다. 1936년 2월의 쿠데타 미수에서 일본 대장성 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뒤 군비는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와 국민 양쪽 모두 〈중국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라는 열망에 점점 고무되었고, 나날이 강화되는 중국의 결속과 민족주의 정서를 경계했다.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달리, 일본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처럼 개인적인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외교 정책을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인과 군대, 일반 국민들이 '전쟁 열풍'에 중독되어 있었다."(92)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선택한 장소는 바로 상하이였다. 장제스가 상하이를 전쟁터로 만든 목적은 두 개의 전역이 하나의 전쟁에 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상하이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팔켄하우젠은 상하이의 복잡한 거리가 중국 북부의 광활한 평원보다 일본군에게 한층 불리하며 중국이 승리할 기회가 있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독일식 부대는 우수하긴 하나 숫자가 부족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싸우는 것은 것은 국내와 국제 어느 쪽이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폭격기 조종사들의 형편없는 활약과는 별개로 중앙군은 상하이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이제는 전쟁이 국가 전체의 싸움이 되었다. 그 전까지 만주의 문제는 중국의 주권과는 별개로 여겨졌고 구호만 요란할 뿐 행동은 거의 없었다." "이제 장제스는 중국 북부가 공격받는다면 남쪽이 앙갚음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116-7)


"전쟁은 중국인들이 갑작스럽게 국가를 인식하게 만들었고 국민의 정체성을 한층 다급하고 중요한 일로 여기게 해주었다. 동시에 항일이냐, 협력이냐를 놓고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였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볼 수 있었던 강한 위기감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 시기 정치는 여러 주요한 측면에서 현대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초기 국민당은 1910년대와 1920년대 5·4운동을 전후하여 일어난 정치적·사상적 자유의 분위기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중국이 직면했던 수많은 위기의 결과였다. 정치는 양극화되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어느 쪽이건 의견 충돌이 때로는 생산적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겉으로는 자신들의 통치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군소 정당을 허용하는 척하면서도 진정한 다원적인 정당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143-4)


"일본 수뇌부는 처음부터 난징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었다. 중국 북부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일본은 국민당 통치 구역을 장악하기보다는 화베이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창장강 하류에서 새로운 전선을 열고 전쟁을 확대하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재검토했다. 11월 7일에는 중지나 방면군中支那方面軍이라는 새로운 지휘 편제를 급조했다. 중지나 방면군에는 일본군 제10군과 상하이 원정군이 배속되었다. 이것은 중국 중부에서 일본군의 전략이 크게 바뀌었음을 의미했다. 7월에 처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일본은 강력한 일격으로 중국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확대와 중국군 수비대의 분투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11월 5일 일본군 제10군의 항저우만 상륙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중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자신들의 대동아공영권을 위협하는 중국 민족주의에 최종적인 패배를 안길 생각이었다."(149-50)


"장제스는 〈혁명정신〉을 강조했다. 12월 11일 그는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정신〉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중국은 제2의 스페인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많은 서구 진보주의자는 스페인과 중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유사하다고 썼다. 그들이 보기에 두 전쟁 모두 진보 세력이 반동 세력과 파시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사고방식은 여러 측면에서 프랑코에 가까웠다. 장제스에게 스페인 내전은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국가적 분열을 이용하여 권력에 침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동시에 그의 눈에 스페인 내전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또 다른 평행세계였다.(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파시스트들의 침략을 받는 스페인 공화정부의 위기를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옮긴이) 장제스는 난징을 떠나면서 열강들의 신속한 개입에 조금의 희망도 품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3년 동안은 중국 혼자서 '힘겨운 투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선견지명이 있는 전망을 내렸다."(153-4)


"쉬저우의 함락은 전략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큰 의미가 있었다. 중국 중부를 장악하고 이 지역으로의 군대 수송을 통제하려는 장제스의 노력은 또 한 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타이얼좡의 승리로 갑자기 고조된 사기는 비록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크게 얻어맞았다. 또한 누군가 항전을 지지할수록 전쟁은 길어질 것이며 일본과의 싸움에서 신속한 승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징후이기도 했다." "1938년 5월, 마오쩌둥은 그 유명한 「지구전을 논함論持久戰」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과도한 낙관주의를 비판했다." "마오는 궁극적으로 중국이 이길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았지만(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신속한 승리는 불가능하다. 항전은 지구전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쉬저우의 상실이 반드시 장기전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일본군의 진격에 따라] 무시무시할 만큼 짧게 끝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할 수도 있었다."(187-8)


"1938년 6월 8일, 장제스 정권은 국민에게 최악의 폭력 중 하나라고 할 만한 일을 저질렀다.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정저우 일대의 황허강 제방을 폭파한 것이다. 황허강 범람으로 인해 50만 명이 사망하고 300~5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당의 행위를 되짚어보면서 그들이 우한에 매달리지 말아야 했다거나 제방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행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다. 그러나 1938년의 무더운 여름, 장제스에게 유일한 희망은 가능한 한 일본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중국 내륙에서 장기 항전을 위한 최상의 여건을 만들어내고 일본의 만행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유지하는 얼이었다. 홍수를 통한 잠깐의 지연 또한 전략의 일부였다. 국민당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갈등에서 적어도 한동안은 냉혹한 계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제방 파괴로 인한 재앙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국민당 스스로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198)


"1938년 10월 25일, 마침내 우한이 사방이 포위된 채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전 세계의 이목은 새로운 항전의 중심이 된 임시 수도 충칭으로 향했다. 장제스의 〈자유중국〉은 쓰촨성과 후난성, 허난성을 가리켰지만 장쑤성이나 저장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국 동부 지역은 완전히 빼앗겼다. 중국의 주요 관세 수입,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 가장 근대화된 기반 시설 또한 모두 잃었다. 정치적 중심지는 머나먼 서부로 옮겨졌다." "관찰자들(중국의 사업가, 영국 외교관, 일본 장군들)은 매번 새로운 재앙이 나타날 때마다 틀림없이 중국이 항전을 끝내고 신속하게 항복하거나, 적어도 중국 정부가 도쿄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일이 해결되리라 예견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난징에서, 우한에서 저항을 분쇄하는 일본군의 가공할 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침략자의 동원력과 기술력, 경제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싸우고 있었다."(203-4)


제3부 고군분투


"중일전쟁사에서 1938년 말 우한이 함락된 뒤 1941년 말 진주만 공격까지 3년의 시간은 얼핏 보기에는 지리한 교착 상태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3개 세력이 서로 대치하면서 지구전에 돌입한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3년 동안 중국의 정세가 평온하거나 안정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 남부와 중부를 차지한 국민당, 북부의 공산당 그리고 동부의 일본군은 중국의 분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전쟁의 성격은 공격에서 방어로 바뀌었다. 전쟁 첫해와 같은 격렬한 전투는 줄어들었다. 그 대신, 중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변덕스러운 동맹관계, 비밀 외교, 앞으로 자신들의 진로를 영원히 바꾸게 되는 사회적인 변화였다. 변화의 중심에는 사회복지라는 새로운 발상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국가가 인민의 일상적인 복지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제 전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체제들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였다."(206)


"많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장제스의 새로운 전시 수도 충칭에 주목했다." "충칭의 위치는 중국의 지리적 감각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중국의 서부 지역, 그중에서도 쓰촨성은 변경에 있었고 국민당의 통치를 거의 받지 않았다. 이제 동부의 심장부가 점령당한 동안 쓰촨성이 국민정부의 중심부였다. 1931년에도 또 다른 변경인 만주가 침략당한 사실은 민족주의가 결집하도록 한층 더 강하게 자극했다. 서부 지역으로 쫓겨난 국민정부는 티베트와 신장성처럼 이전에는 공화정의 허약함 때문에 중국의 영향력 바깥에 있었던 지역의 통합을 강화하는 데 나섰다. 국민당 통치 구역 내 여러 대학의 인류학자들은 서부 변경 민족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광범위한 중화 민족주의에 흡수하려고 했다. 정부 전체가 창장강 1400킬로미터 안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광대한 중국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206-8)


"일본은 완고한 반공주의 국가이면서도 정작 주된 목표는 장제스였다. 전 중국이 일본의 지배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쪽은 (옌안에 은거한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의 항전이었다. 끝없는 폭격에 시달리는 국민당 정권은 중국 언론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옌안은 고립된 곳이라 충칭에 비해 피란민의 수가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은 외부의 관찰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마음껏 추진할 수 있었다. 옌안은 미지의 장소로 남았다. 외국 대사관도 없었고 장기 체류하는 언론인도 없었다. 그곳으로 초대된 외국인들은 대부분 에드거 스노, 아그네스 스메들리처럼 무명은 아니지만 급진적이면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옌안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국제적인 주목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 마오쩌둥에게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훨씬 더 많은 기회를 안겨주었다."(231-2)


"193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저우포하이는 국민정부 선전부의 부부장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몇 주, 몇 달 동안 저우포하이는 (승리에 대한) 회의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소위 〈저조구락부低調俱樂部〉라고 일컫는 정치인,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이들은 일본과의 평화 협상 가능성을 조심스레 열어두기를 원하는 집단이었다. 저우포하이가 왕징웨이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저조구락부〉를 통해서였다." "1938년 11월 3일, 고노에는 라디오 연설에서 일본과 중국이 (아마도) 동등한 지위 아래 진정한 위협인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위 아시아의 〈신질서〉라는 그의 목적을 공식 선언한 것이었다. 비록 이 성명은 일본이 국민정부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1월의 선언을 완전히 뒤엎지는 않았지만 국민당 내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도쿄와 한층 우호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고노에의 메시지는 왕징웨이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244-8)


"저우포하이와 그의 보스였던 왕징웨이는 생애 마지막까지 자신들을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공격으로 중국이 파괴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소련에 의해 공산 중국이 세워질 것인가 두 가지 미래에 직면한 왕징웨이 일행은 평화 협상만이 전란에서 중국을 구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기보다는 소위 대아시아주의의 미래를 건설한다는 순수한 이념적 열정에 스스로 도취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제국주의를 강요하는 열강들의 행태는 그들에게 일본을 보다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일본의 생활 방식을 동경한 열렬한 부역자라는 의미의 '친일'은 결코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민족주의 혁명의 대의에 그토록 헌신했던 한 사람에게는 기묘한 입장이었다." "(왕징웨이가 보기에) 1870년에 프로이센에게 당한 패배를 1918년에 와서야 설욕한 프랑스의 경우처럼 중국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동안은 자신들의 승리 가능성에 대해서 현실적일 필요가 있었다."(250)


"1939년 늦여름, 두 개의 사건이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던 독일과 영국, 프랑스 사이의 전쟁 발발, 그리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독일과 이념적인 숙적인 소련의 해빙 무드였다. 후자는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불가침 조약이 발표되면서 명확해졌다." "장제스는 항일에 소련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소련은 사실상 나치의 동맹국이 되었고 나치는 도쿄와 동맹 관계였다." "가장 큰 타격은 유럽 북부의 동토에서 일어난 사건의 여파였다. 1939~1940년의 겨울 전쟁에서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당장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연맹에서 소련을 제명하는 결의안을 지지했다. 국제연맹 회원국이었던 중국은 결의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거절했다. 소련은 자신들의 제명을 막지 않은 장제스에게 분노했고 남은 전쟁 기간 장제스와 스탈린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중국은 더 이상 소련의 원조를 받지 못한 채 일본과 싸워야 했다."(256-9)


"1940년 봄 중국의 처지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신세였다. 3월에는 일본 고위 협상가들이 장제스와 타협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왕징웨이는 난징에서 자신의 신정권을 인정받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중국에서는 〈통공작桐工作〉, 일본에서는 〈기리공작〉으로 알려진 이 전략에 따라 1940년 3월 7일부터 10일까지 홍콩에서 (비공식적인 중일 양국) 회담이 열렸다. 국민당은 군사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미국은 여전히 중립을 고수했고 유럽은 혼란스러웠다. 실제로 그해 봄, 프랑스의 몰락이 초읽기가 되자 영국 역시 독일과 평화 협상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유사한 방법으로 상대의 의중을 신중하게 떠보는 중이었다. 중국이 서구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일본인들에게는 장제스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일본군은 중국 북부에 병력을 주둔할 것과 만주국의 승인을 원했지만 장제스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은 장제스를 한층 압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266-7)


"장제스는 결연한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특유의 책략을 적절하게 발휘했다. 1940년 8월 일본과의 협상에 찬성했던 그는 일본이 국민정부와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했던 〈상대하지 않는다〉를 철회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내세워 돌연 회담을 취소했다. 국민당은 일본과 왕징웨이 정권의 결탁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들의 중요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공식 회담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일본과 대화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제스의 전략은 두 개의 중요한 이점을 제공했다. 하나는 결국 왕징웨이가 난징에서 신정권을 수립하는 1940년까지 일본의 입장을 보류시켰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서방 열강들을 향해 충칭에 더 이상 원조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들의 적과 어떤 식으로든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11월 30일, 왕징웨이 정부는 도쿄의 공식 승인을 얻었다. 이날 미국 정부는 자유중국에 1억 달러의 차관과 더불어, 50대의 군용기를 제공키로 했다고 발표했다."(268-9)


"1939년 초부터 국민당은 공산당의 확대를 막기 위한 조치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해에 충칭 폭격이 시작되면서 국민정부의 지위가 큰 타격을 입었다. 폭탄이 떨어지는 동안 장제스와 그의 측근들은 동북쪽에서 경쟁자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제스는 마오의 심장부를 겨냥해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조치를 지시했다. 특히 공산당이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여기는 허베이성과 산시성, 허난성, 산둥성에 대한 통제를 되찾을 생각이었다. 국민당은 4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산·간·닝 변구의 서남부를 봉쇄했다." "갈등은 기묘하고도 은밀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어느 쪽도 대중이건, 국제사회에서건 국공합작이 실제로 끝났다고 여기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처지였다. 산·간·닝 변구의 경계에서 국민정부군과 공산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산당은 국지적인 충돌일 뿐, 국공합작의 총체적인 파국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장제스 역시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았다."(269-70)


"1941년 1월, 공산당 신4군의 행보를 두고 벌어진 완난 사변에서 국민당이 거둔 군사적 승리는 여론의 후폭풍에 직면했다. 대다수 외부 관찰자의 반응은 공산군 부대가 지시에 불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장제스가 일본군 대신 국내의 적을 제거할 속셈으로 동맹자들을 배반했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일본군과 공산당 양쪽 모두를 동시에 상대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산군을 억지로 창장강 이북으로 쫓아내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다시는 그러한 시도가 없었다. 반면, 홍군은 더 이상 장제스를 신경쓸 필요 없이 세력 확장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싸움의 승자는 공산당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마오였다. 마오의 경쟁자였던 샹잉의 패배와 죽음으로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옌안의 마오에게 더욱 속박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앙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행운을 상승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274-5)


제4부 독이 된 동맹


"시작부터 새로운 동맹자들이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물론 겉보기에는 화기애애했다. 12월 10일, 장제스는 새로운 현실에 관해 국민들에게 연설했다. 〈이제 전 세계 90퍼센트가 전쟁에 끼어들었다.〉 그는 연합국이 자신들의 〈자유, 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다 함께 싸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쑨원의 삼민주의를 인용하여 중국은 〈스스로를 구함으로써 세계를 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수 년 동안 절망적인 저항에 매달려야 했던 중국의 희망은 다른 강대국이 자신들의 편에 서서 전쟁에 끼어드는 것이었다. 이제 두 개의 강대국이 중국의 편에 섰다. 미국과 대영제국이었다. 장제스는 일본만이 아니라 지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 두 나라가 과거에 중국에서 저질렀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단순히 항전의 완전한 승리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기도 했다."(292)


"문제는 중국과 서구가 서로 전혀 다른 관점에서 중국의 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구 연합국들이 보기에 중국은 일본군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이 나타나 자신들을 만행으로부터 구해주기만을 무릎 꿇고 간절히 기다리는 애처로운 나라였다. 반면, 장제스와 대다수 중국인의 생각은 자신들이야말로 추축국의 침략에 맞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싸워온 맞수였다. 전쟁을 그만둘 기회가 수없이 있었지만 중국은 외부의 개입 가능성이 제로인 절망적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과 동등한 열강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중국의 연합국위원회Allied Commission 참여나 충칭에 ABCD(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합동참모본부를 설치하게 해달라는 요청은 거부당했다. 영국인이나 미국인 어느 쪽이건 장제스를 진정한 동맹자로 대우하거나 중국을 주전장主戰場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94-5)


"마셜은 모든 전력을 유럽에 집중키로 결정하면서도, 미국인이 아시아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또한 여전히 중요하다고 인정했다. 어쨌거나 미국에게 싸움을 건 쪽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 육군 병력을 중국에 배치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가 생각해낸 해결책은 중국군이 미군 참모장 한 사람을 받아들이도록 장제스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미국인이 중국인들과 나란히 하는 것처럼 생색은 내되, 실질적인 병력을 보내라고 요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스틸웰은 그 역할을 맡기 위해 마셜이 고른 사람이었다." "[옮긴이] (나약하고 무능한 중국인들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스틸웰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어 양국 사이에 근본적인 신뢰를 쌓기보다는 중국의 난처한 처지와 미국의 대중 원조를 무기삼아 일방적인 복종만을 요구하면서 중국인들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이 때문에 양국 관계를 왜곡시킨 것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경력마저 망치게 되었다."(303-4)


"1942년 이후부터 정부는 매년 약 6000만 석(300만 톤)의 곡물을 징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부담은 현재 국민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성들, 특히 쓰촨성에 가중하게 짊어지워졌다. 또한 이 정책으로 인해 부패와 투기를 위한 새로운 기회가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제도에서는 전쟁 수행의 훨씬 많은 책임이 농촌으로 전가되었다. 전쟁 초반부터 농촌은 징병 대상으로 큰 부담을 안아야 했지만 농민들은 심각한 식량난을 겪지 않았다. 수확이 괜찮고 현물세가 없다는 것은 농민들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어느 순간 군대 부양의 책임은 농민들이 직접 떠맡아야 할 몫이 되었다. 국민당과 일본군 사이에 있는 최전선이자 전통적으로 풍요로운 허난성은 1942년 여름에 심각한 고초를 겪게 될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그해 흉작이 들었고, 굶주림이 허난성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부패한 관료들은 자연 재해를 인공 재해로 바꾸어놓았다."(326-8)


"허난성의 기근은 국민당의 재정 압박에 따른 결과가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제아무리 개별적으로는 서로 다른 행동을 취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비극적)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랬다. 부패와 무관심, 냉담함은 하나같이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영은 투기와 사재기가 〈현지 주민들이 국민정부를 적대시하게 만들었으며, 농촌 민심이 공산당 쪽으로 돌아서는 데 일조했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정적 조치로 곡물을 징발한 것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정부의 자금 확보를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라고 주장했다. 국민정부가 항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곡물세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른 이들은 시어도어 화이트가 목격했듯이 허난성의 들판에서 죽어가던 농민들이었다."(336)


"도시의 삶 역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만연한 부정부패에 시달리면서 국민당 정부를 향한 환멸에 잠식되고 있었다. 장제스의 서방 연합국들이 가장 즐겨했던 비난은 국민당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을 모으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서방의 도움을 받아 이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그레이엄 펙이 장제스를 비판했던 핵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 동일한 관찰자들은 (이미 경제가 한계에 직면한 상황에서) 경제적 생산성이 전혀 없는 수십만 명의 군인을 한데 모아두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부담인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국민당 중국은 옌안과 다른 의미에서 봉쇄당한 신세였다. 마오는 상대적으로 군비 부담이 낮아 국민당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재정 수입을 배분할 수 있었다. 국민당 통치 구역에서의 삶이 갈수록 가혹하고 불평등해지는 동안, 공산당은 점점 희망의 상징이 됨과 동시에 국민당과 명확히 비교되었다."(343)


"한편으로, 일부 미국인들 마음속에서는 자신들이 장제스를 과연 어디까지 지원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굳어갔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고 대원수가 복귀하자 가우스 대사는 코델 헐에게 중국의 항전 역량이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해 우려를 드러내는 편지를 썼다. 그는 명망 있는 국민정부 경제부장인 윙원하오가 자신과의 대화에서 현물세의 징수로 인해 농민들의 깊은 원한을 샀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고 보고했다. 〈중국인들이 절망적인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우스는 이렇게 주장하면서 중국 정부가 이제는 전략적으로 〈완전히 수세적〉이며 〈모든 면에서 수동적이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중국군의 영양 상태가 매우 심각하고 부패로 가득하며 군사적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행동만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1943년 말이 되면 국민정부는 더 이상 애정과 존경을 받기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388-9)


"1943년 가을 일본 대본영은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위치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평양에서 미군이 공세에 나서면서 일본군이 1942년 초에 쌓아올린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점차 분명해졌다. 1944년 봄이 되자 연합군의 공격은 도쿄가 태평양 중부에 있는 점령지의 일부라도 지킬 요량으로 병력을 재편성하도록 압박했다. 1944년 2월 마셜 제도를 상실한 후, 이제 일본군은 1941년에 그러했듯, 판돈을 두 배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과감하면서 예측불허의 행동이 다시 한 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리라 기대하면서 아시아 대륙에서 최후의 대규모 일격을 가할 속셈이었다. 〈우고 작전五號作戰〉은 8만 5000여 명의 병력으로 버마 북부에서 인도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주요 전역은 이 전쟁에서 중국을 영원히 끝장내기 위한 〈이치고 작전一號作戰〉이었다. 도쿄의 대본영은 중국 중부를 확실하게 관통할 군사 작전을 승인했다."(397)


"4월 중순, 일본군의 강력한 공세가 허난성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이제 군대는 지난 몇 년 동안 일본군과의 싸움에 따른 소모와 국민정부의 부패, 무능의 결과를 절감해야 했다. 병력의 충원은 1941년 이후 줄어들고 있었고 신병의 강제 모집이 훨씬 보편화되었다. 징집은 흔히 범죄 집단과 결부되어 밧줄에 묶인 채 고향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졌다. 만약 자기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면 그들은 손쉽게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군대 봉급을 갉아먹은 덕분에 군 복무는 한층 인기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윈난성의 Y군을 비롯한 그나마 남아 있는 중국군 최정예 부대의 일부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버마에서 스틸웰의 지휘를 받으면서 미치나의 포위를 풀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중국 중부에서 중국군의 서류상 전력과 만신창이가 된 현실 사이의 어마어마한 격차는 1944년 5월 악몽 같은 시간 속에서 그대로 드러났다."(398-9)


"일본군이 중국 중부를 박살내면서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이 향한 쪽은 (쑨원의 아들) 쑨커가 아니었다." "1944년 1월 미국 외교관 존 데이비스 주니어는 미국이 옌안의 공산당 본부와 정식으로 접촉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했다. 〈오직 한 명의 미국인 공식 관찰자만이 공산당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건 이미 6년 전의 일이었다.〉 공산당은 일본의 군사적, 산업적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요 근거지를 구축했으며 일본에 대한 쓸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소련이 전쟁에 개입한다면 공산당 지역을 통해서 공격에 나설 것이었다. 그는 공산당이야말로 〈중국에서 장제스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단일 도전자〉라고 못 박았다. 또한 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내놓았다.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다는 암시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단결되어 있으며 규율을 갖추었고 정력적으로 항일에 나서고 있는 정권〉이라는 것이었다."(408-9)


"장제스와 스틸웰의 악감정은 전시 동맹 동안 미중 불화를 가장 선명하고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이는 정보 영역에서의 다툼부터 재정적 원조와 부대 임무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갈등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스틸웰과 장제스의 개인적인 충돌은 중요하지만, 마셜과 다른 연합국 수뇌부가 전쟁 초기에 내린 보다 광범위한 전략적 결정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즉, 중국은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서 주요 전역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중국인들이 스스로 소모품이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합국은 장제스가 동맹국들에게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허구를 강요함으로써 미중 관계를 갉아먹었다. 가치가 의심스러운 버마를 되찾으려고 계속 시도하기보다는, 장제스가 제한된 자원을 중국을 방어하는 데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었을 것이다."(434)


"단기적으로 스틸웰의 소환과 루스벨트의 재선은 미중 동반자 관계에서 곪아 있던 종기를 제거한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를 바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비록 공식적으로는 1945년 2월까지도 끝나지 않았지만) 12월 이치고 작전이 갑자기 멈추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치고 작전에서 일본군은 중국 영토 안에 가장 깊숙이 들어오면서 1938년 여름에 점령한 영토보다 더 많은 지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장기적인 목표의 대부분은 달성하지 못했다. 비록 구이린 주변의 미 공군 비행장들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었지만 비행장들은 간단히 훨씬 깊숙한 내륙으로 옮겨졌다. 더 중요한 사실은 태평양에서 사이판의 함락으로 미국은 1944~1945년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 중국 외 다른 곳에서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치고 작전으로 국민정부군은 거의 75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허난성과 후난성의 거대한 곡창지대와 병력 충원 지대를 상실했다."(437-8)


"장제스는 1945년의 지상 공세를 위해 스틸웰이 중국으로 복귀한다는 어떤 제안도 거절했지만 웨드마이어는 중국 동부를 탈환하기 위해 새로운 중국군 39개 사단을 훈련시킨다는 스틸웰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옮긴이] 장제스는 중국 전구에서의 반격을 위해 1945년 2월 9일 쿤밍에서 중국 전구 육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군정부장 허잉친을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스틸웰 소환 이후 미국의 원조물자가 쿤밍으로 수송되면서 4개 방면군 19개 군 64개 사단에 달하는 부대들은 우선적으로 미국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했으며 미군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받았다. 1945년 3월부터 5월까지 후베이성 라오허카우와 후난성 즈장에 대한 일본군의 공세는 1년 전과 달리 새로운 중국군에 의해 완전히 저지되었으며 〈중국판 과달카날〉이라고 불릴 만큼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중국군은 그 여세를 몰아서 1945년 6월 광시성을 탈환함으로써 비로소 전세를 완전히 뒤엎었다."(456)


"끝은 갑작스러우면서, 또한 뜻밖에 닥쳐왔다. 1937년 7월 거의 우연히 시작된 전쟁은 베이징 교외의 소규모 충돌이 몇 주 안에 확대되면서 중국 동부로 옮겨가 8년 동안 계속되었다. 중국은 엄청나게 변했다. 1945년 8월, 중국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국제적 지위─유일한 비유럽국가로서 유엔 강대국의 일원─를 차지함과 동시에 지난 1세기 동안 한층 약화되었다." "중국은 이제 민국 시기 내내 손에 넣을 수 없었떤 자주적인 역할을 갖게 되었다. 일본과의 전쟁은 1911년 혁명의 유산이었던 국가의 지위와 자주권을 위한 싸움이었고, 중국은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끔찍한 대가 또한 치러야 했다. 일본과의 전쟁은 중국을 도려냈다." "심지어 승리의 순간에도, 나라는 분열되었다. 중국은 두 개로 쪼개어졌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타협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전이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가장 아이러니한 사실은 마오쩌둥이 대승리를 거두어 장제스가 거둔 승리의 열매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459-60)


결론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조지 마셜 장군의 임무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어느 진영도 진정으로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당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공산당의 군사적, 정치적 조직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불확실한 국민당의 지휘 구조에 넘기는 것을 주저했다. 1946년 1월 10일 양측은 정전에 동의했다. 하지만 마셜은 그들을 다음 단계로 안착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46년 전반기 6개월 동안 진정한 돌파구를 찾으려는 마셜의 시도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투가 확대되면서 한층 악화되었다. 1946년 여름이 되자 공산당은 둥베이(만주)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장제스는 공산당에게 (아마도 그들이 너무 약해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계속 요구한 반면, 공산당은 국민당이 1946년 동안 차지한 영토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1월 7일 마셜은 두 당의 중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464)


"일단 내전이 시작되자,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대부분 장제스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다. 항일전쟁 동안, 장제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는 역할을 했다. 내전 중에는 판단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이웃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업고 마오쩌둥을 지탱하는 공산당의 심장부였던 둥베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전선을 확대하기로 결정한 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소련은 미국이 일본에서 자신들에게 연합 지휘권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국민당과 맺은 협정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1946년 봄이 되자 둥베이 지역 탈환 가능성은 한층 비관적이 되었다. 1947년이 가까워졌을 때, 공산당 장군이 린뱌오의 눈부신 전역은 국민정부군을 중국 북부에서 점점 반대쪽으로 몰아붙였다." "1949년 상반기, 장제스는 해군과 공군 사령부를 타이완으로 옮겼다. 많은 민간인도 뒤따랐다. 5월 장제스는 타이완을 향해 떠났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본토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468-9)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일본군을 상대로 중국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 거의 없다는 설명만이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1949년에 (공산군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였다. 〈항일전쟁〉에서 중국 인민을 이끈 모든 공은 공산당, 좀더 구체적으로는 마오쩌둥 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옌안에서 마오쩌둥의 혁명을 둘러싼 신화는 이 나라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다. 영국과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이 전쟁으로 그들의 사회에 초래한 엄청난 변화들에 기뻐하거나 고통스러워할 때 중국에서는 8년 항전의 경험이 대중의 기억에서 사실상 제거되었다. 난징 대학살, 충칭 대폭격, 왕징웨이의 배신, 마오쩌둥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았던 공산당 지역들은 모두 열외로 취급되거나 심지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논의의 대부분은 진정으로 반성한 사람들과의 〈화해〉를 실현하려는 쪽으로 기울었다. 진정한 증오심이 향할 곳은 미국 해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바다 건너 타이완을 위해 따로 남겨두었다."(471-2)


"중국은 망각당한 연합국으로 남아 있다. 그마저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들의 경험이 희미해져감에 따라 더욱 존재감이 없어지고 있다. 중국의 싸움은 인종과 세력 다툼에서 필사적으로 싸운 소련만큼 참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 견뎌야 했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이 컸다. 전쟁은 1500만 명에서 2000만 명의 사망자, 8000만 명에서 1억 명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1928년에 국민당이 착수했던, 비록 결함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었던 근대화 노력은 모조리 붕괴되었다. 난징의 칼에 의해서건, 충칭에서의 폭격이건, 심지어 궁지에 몰린 그들의 정부에 의해 제방이 파괴되면서였건, 8년 동안 중국 민중에게 그러한 잔혹한 죽음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나약한 불구의 국가는 적에게 항복할 수도 있었지만 8년 동안 계속 싸웠다." "중국이 싸움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중국의 수렁'이 없었다면, 일본 제국의 야심은 훨씬 쉽게 실현되었을 것이다."(4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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