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인 모세 - 서구 유일신교에 새겨진 이집트의 기억 프리즘 총서 1
얀 아스만 지음, 변학수 옮김 / 그린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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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이라'와 소설 '람세스'를 재미있게 보고 읽었으나 이집트에 관한 그 외의 학술적 탐구에는 흥미가 없는 사람에게, 전자의 매체가 주는 기억과 이미지는 역사적 사실로 간주될 정도로 강렬하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소설 '칼의 노래'에 감명받은 시청자(독자)에게 삭풍이 몰아치는 출정전야의 고독함은 지척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생생한 체험으로 각인된다.

전승된 기억이 스스로 환타지임을 망각한 채 현재적 해석을 거쳐 거듭나면, 그 서사의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분명한 실체로 현현하여 자신의 본질을 재조정하고, 당면한 현실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기억사'라는 분명한 경계 안에서 집단 무의식 너머에 출렁거리는 원초적 체험을 상상, 구성하고 해석, 체험하는 저자의 학술 여행은 현란한 서술과 시각 효과를 덮어쓰지 않고도 양자의 행복한 만남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억은 '객관적 증거'와 대조해 보지 않고는 역사적 자료로서 유효하지 않다. 이런 사실은 개별 기억의 경우뿐 아니라 집단 기억에도 적용된다."

"기억이 이렇게 '계속 살아남는' 이유는 사건들의 지속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중요성은 그들의 역사적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이런 사건들이 중요한 사실로 기억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에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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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히스토리아 문디 3
키스 W.휘틀럼 지음, 김문호 옮김 / 이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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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은 가상의 존재를 창조해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에서 지배적 점유에 대한 실체가 불분명하거나 여러 토착민들과 뒤섞여 있던 유대 종족의 위치를 급격히 격상시킨 후 그 외의 모든 배경을 장막 뒤로 쓸어넣고 가려버린 행위를 가리킨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전개된 이러한 일련의 주장은 현재 팔레스타인 지방의 이스라엘 점령을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역사에 근거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은혜에 힘입은 정당한 정착임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이 작업은 과거를 발굴하고 정립하는 학문적 행위가 현재의 정치, 사회적 위계관계를 구속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주요 방법이 '분류'와 '명명'이다.

'분류'는 이 지역의 역사적 시기를 선이스라엘기와 이스라엘 정착기, 다윗왕의 제국 건설기 등과 같은 용어로 정리하여, 여타 종족들의 부침을 여기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말하며, '명명'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전체 명칭과 12지파와 같은 하위 명칭으로 고대 근동 지역을 구획짓고 호명하는 방식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신라 중심의 삼국시대라는 시대분류 속에 발해나 가야의 역사가 외면되는 현상과, 간도와 만주라는 명칭 사이의 미묘한 차이와 '소수민족 정착지'가 아닌 '잃어버린 고토'라는 호명이 주는 울림을 생각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즉, 근대 이후의 발명품인 '국민국가'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개개인이 자발적이고 뿌듯한 마음으로 내면화할 수 있도록 문화적 정당화라는 세련된 논리구조를 밑돌로 다져넣은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문명과 (훗날의 명칭이긴 하지만) 에게해 문명 그리고 페르시아 문명 사이에 교역과 점령의 교차로 역할을 해야했던 이 지역은 태생적으로 장구한 시간에 걸쳐 거대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부분적인 정착과 파괴, 비자발적인 유랑과 약탈, 종족간의 혼합과 대립이 순환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따라서 유대민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성경이라는 비역사적 텍스트 외에는 제대로 된 역사적 기록도 고고학적 유물도 빈한한 상황 아래에서 승자의 필체로 눌러쓴 현재의 모습은 일견 당연하지만, 중립과 객관적 서술의 외형을 띤 학술적 대공세에 감춰져 있는 이면의 욕망을 찬찬히 되새김질 해야하는 이유 또한 적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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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 - 제4판
존 브라이트 지음, 엄성옥 옮김 / 은성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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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암시된 시대적 흔적들을 기본 가정으로 삼아 역사상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역사적 증거에서 서사를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서 유대민족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을 되짚고 있으니,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런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집트의 기록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언급이 전혀 없지만, 성경의 전승은 선험적으로 이를 믿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민족이 창안해 낼 수 있는 그런 류의 전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이스라엘 역사 연구의 권위서인 본 저작은,

선지자들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등장하고 발언하였는가를 신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데 만족할 수 있는 신자들을 위한 지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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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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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단락 글쓰기>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표면적으로 육체적 시련의 과정이지만 그가 짠 바닷물을 삼키면서 단련한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읽는 자세이다. 그는 선악과 호오가 뒤얽힌 인간 군상의 속내를 무던히도 많이 관찰한 끝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에 걸맞는 같은 마음을 더욱 갈구한다. 페넬로페의 같은 마음이 여전히 고향을 품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흔쾌히 미소 지으며 긴 여정에 함께 오른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 전이나 전쟁의 와중에는 그저 꾀가 많고 영리한 사람이었던 오뒷세우스는 귀향 길의 간난신고 속에서 정말 많이도 떠돌아다닌 자로 거듭난다. 이 거듭남은 각종 시련영웅적으로 이겨낸 흥미만점 여행기의 주인공이 발산하는 호방함이 아니라 이전에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 자가 느끼는 ‘발견의 환희에 바탕을 둔다. 이제 오뒷세우스는 고향의 평온함에 묻혀 살던 자신을 끌어내어 폭풍우 속으로 내친 신들의 주사위 놀음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같은 마음이라는 정신적 귀향에 대한 열망을 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 궁극적인 목적지로서의 고향은 근심 없던 과거의 이상향으로의 귀환이 아니다. ‘같은 마음을 알게 된 후에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한 인간의 소망(素望)이 집약, 질적으로 고양된 장소이다.

 

지난한 고민이나 관찰을 동반하지 않고도 같은 마음을 본능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전장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갯길에서 10년 간이나 몸을 부대낀 전우들 사이에서는 굳이 같은 마음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전리품을 배분하는 자리에서 탐욕을 드러내고, 귀향선에 올랐지만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동료들의 태도에서 오뒷세우스는 같은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되었다. 칼륍소의 유혹과 키르케의 환대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놀라운 기회이었지만,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반자의 포옹이 아니라 일방적인 초대에 불과했다. ‘다른 마음을 가진 타인의 존재같은 마음에 대한 향수를 더욱 진하게 불러온다. ‘같은 마음은 신체적 친밀함이 아니라 영혼의 교감을 요청하는 행위가 된다.

 

같은 마음은 타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내면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치는 타인이 필요하다. 타인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그 모양을 읽는 기술을 갖춰야만 세계 일반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세계 이해의 관문을 거치고 돌아온 사람의 내면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파악했던 예전의 내면과 겉모양만 같을 뿐 본질이 다르다. 순환하는 여정을 겪은 사람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고, 자신 psyche를 돌보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조화를 깨달은 사람은 육체의 부대낌을 넘어서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 절차는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통합되고 다시 모순이 싹트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페넬로페의 같은 마음을 확인한 오뒷세우스는 이제 그 여정을 흔쾌히 미소 지으며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오뒷세우스가 칼륍소의 호의를 뿌리치고 신이 되기를 거부한 것은 같은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루노 스넬의 말처럼 신은 지상에 현현(Epiphanie)하기 전에도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공동체 안에서 껍질을 깨고 ‘발견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부여 받는다. 신의 언어에 없는 같은 마음을 향한 줄기찬 탐구는 인간의 고유성을 고양하여 역사의 씨앗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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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성경 How To Read 시리즈
리처드 할로웨이 지음, 주원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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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착한 사마리아인이 있다. 강도를 당해 피죽음이 된 행인을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여관으로 데려가 씻기고 치료하고 편안히 누이도록 한 그는 '이교도' 사마리아인이다.

율법을 행하러 가는 레위 제사장은 제단에 오르기 전에 부정한 피를 가까이 할 수 없다는 핑계로 고난에 처한 형제를 외면했건만,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이때의 사마리아인의 심정을 '애가 끊어지는'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요, 부모가 자식의 불행과 고난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할 때 드는 마음이다.

이처럼 헤어날 수 없는 아픔에 빠진 타인을 '애가 끊어지는' 마음으로 다가가 감싸 안는 결단이 바로 예수님이 역설한 사랑의 본질이다. 톤즈 신부님 정도는 되야 가능하겠지만, 최소한 그런 마음을 동경하고 잊지 않는 삶을 살아가라는 당부 아니겠는가.

성경 내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좀 더 깊은 사고를 전달하는 명상집 같은 이야기. 입문서가 아니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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