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테러리즘 - 중동의 새로운 질서와 IS의 탄생
홍준범 지음 / 청아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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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스라엘 건국과 아랍 민족의 대응


"1881년 3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가두에서 한 젊은이가 던진 폭탄으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사망했다. 러시아 정부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 유대계라는 이유로 러시아 거주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남부 러시아 칼호프 지방과 우크라이나까지 유대인 학살이 확산되었고, 차르 제정은 1882년에 소위 '5월 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을 박해했다. 1882년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서는 유대교도를 비밀리에 셋으로 분류해, 3분의 1은 물리적 제거, 3분의 1은 국외 추방의 대상으로 정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차르 제정에 순응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조직적인 유대인 대학살은 포그롬(pogrom, 러시아어로 파괴, 학살)이라 불린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에서 BILU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19세기 말 포그롬은 폴란드로도 파급되었으며 이들 지역에서 제1차 유대인의 귀향(제1차 알리야)이 있었다. 1891년 설립된 유대인 식민협회(ICA)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토지를 매입해서 이민자들에게 배당하고 자본도 융통해 주었다."(24)


# BILU : 이사야서 2장 5절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러 가자(Beit Yaakov Lekhu Ve-nel kha)'의 약성어(略成語)이다.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다. 연합국으로 참전한 영국군이 1917년 오스만 제국의 통치 지역인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군사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어서 1920년 4월 24일,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산레모 조약을 통해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이라크), 트랜스요르단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영국에 부여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서는 같은 해 7월 1일부로 영국 군정(軍政)이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다. 또한 1922년 7월 2일에는 새로 창설된 국제연맹이 영국의 위임통치 결의안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30여 년간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 끝에 결국 한계와 실패를 자인한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생 국제연합(UN)으로 이관하고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에서 자진 철수했다. UN이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를 설립하고자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내놓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32-3)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중동 지역에는 각기 다른 4개의 민족주의가 발생했다. 유대 민족주의, 페르시아 민족주의, 튀르크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캠페인을 공유하면서 발생했으며, 민족적, 종교적으로 대립하면서 성장했다. 유대 민족과 아랍 민족은 영토, 종교, 공동체 등 모든 면에서 분쟁으로 격돌했고, 아랍 민족과 페르시아 민족은 이슬람교를 공유하면서도 시아와 수니의 종파적으로 대립하였으며, 튀르크와 아랍은 이슬람교 수니파라는 종교적 이념을 공유하면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세력다툼으로 분열을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랍 국가들이 독립하자 아랍 민족주의는 신생 국가의 통합 기폭제이자 이스라엘 건국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아랍 국가 간 연합과 통일국가 구성 등에서 실패를 거듭했고, 이스라엘과의 4차례 전쟁에서 연속된 패배와 영토 상실을 겪으면서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다."(38, 43-4)


# 4차례의 중동 전쟁

1. 제1차 중동 전쟁(1948. 5. 16~1949. 3)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식을 계기로 발발한 전쟁.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감되었으나, 아랍 참전국 일부도 전과를 챙겼다. 이스라엘은 UN이 할당한 56%를 넘어 갈릴리 북쪽과 네게브 남쪽, 서예루살렘까지 팔레스타인 땅의 77%를 차지했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 주변 해안 평야를, 요르단은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역을 얻었다.

2. 제2차 중동 전쟁(1956. 10~1957. 5)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개입하면서 발발한 전쟁. 3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으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철수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패배했다. 반면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이집트는 소련의 중동 정책에서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제3차 중동 전쟁(1967. 6. 5~6. 10)

골란 고원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 전쟁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단 6일 만에 정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예루살렘 및 베들레헴을, 시리아는 다마스쿠스를 사정권에 두는 군사 요충지 골란 고원을,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를 잃었다.

4. 제4차 중동 전쟁(1973. 10. 6~10. 25)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이 유대교 축제일인 속죄일(Yom Kippur, 욤 키프르)에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 양상으로 격화되면서, UN 안보리가 즉각 휴전을 촉구했고, 결국 승패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결되었다. 이스라엘에 맞선 OPEC 국가들의 석유 감산 조치는 제1차 석유 파동으로 이어졌다.


제2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팔레스타인 건국


"1964년, 이집트에서 개최된 아랍 연맹 정상회의에서 정상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게릴라전을 동반한 무장투쟁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정규 전쟁으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이스라엘 투쟁의 방법으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라는 정치 조직을 결성하였다." "PLO는 이전에 비밀 저항운동을 전개하던 다양한 팔레스타인 방계 조직의 지도부를 통일했다. 그리고 파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 해방인민민주전선, 검은 구월단 등 PLO 내에서 활동하거나 PLO와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들을 산하 조직으로 두었다." "제3차 중동 전쟁의 패배로 아랍 사회에서는 정규전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더욱 고착되었고, 이를 계기로 1968년 3월 카라메 전투에서 승리하여 '불패의 군대'라는 이스라엘군의 이미지를 불식시킨 타파가 PLO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했다. 1969년에는 파타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 의장에 임명되었다."(69-71)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PLO의 정치적 위상도 크게 향상되었다. 1973년 11얼 알제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담에서는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하고, 1976년 PLO가 아랍연맹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아랍 세계에서 PLO의 정체성은 팔레스타인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기관으로 정착되었다. PLO는 대이스라엘 정책에서도 모든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킨다는 목표를 버리고 서안과 가자 지구를 포함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설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은 자국 영토를 공격하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군대의 본거지를 무력화하고자 레바논을 공격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리비아로 본부를 옮긴 이후 PLO의 대이스라엘 투쟁 양상도 바뀌었다. 해외 이스라엘 시설물 공격을 이스라엘 점령지 내로 변경하고, 투쟁 방식에서도 테러보다는 '인티파다(Intifada, 봉기)'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저항과 반란이 대두된 것이다."(72-3)


"1980년대 들어 PLO가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등 무장투쟁 노선을 완화하고 평화 협상에 참여하자 이에 반발하는 강경파들을 규합하여 조직된 무장 조직이 하마스이다. 1987년 12월,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었던 아메드 야신이 창설하였으며, 그 등장에는 1987년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제1차 인티파다가 촉매제가 되었다." "하마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인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해방 및 이슬람 교리를 원리원칙대로 받드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하마스는 대이스라엘 무장투쟁과 병행하여 빈민가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 팔레스타인 빈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2006년 1월 25일 치러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선에서 132석 가운데 73석을 차지하며 40년 동안 집권해 온 파타당을 누르고 집권당이 되었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집권당인 파타당의 연정 제의를 거부하고, 가자 지구를 무력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다."(75-7)


# 중동 평화 회담

1. 마드리드 평화 회담(다자 회의 1991. 10. 30~11. 1, 양자 회의 1991. 12~1992. 1)

다수의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을 대화 상대로 인정한 최초의 회담. 협정의 핵심은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반대급부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1991년 2월 걸프전 이후 미국이 팔레스타인에게는 땅, 이스라엘에게는 평화를 보장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주도했지만,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2. 오슬로 협정(초안 1993. 9. 13, 자치 협정 1994. 5)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협상 모토가 결실을 맺은 최초의 중동 평화 협정. 주요 합의 내용은 첫째, 이스라엘이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공식 기구로 인정, 둘째,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 시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보장, 셋째,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자치권 인정(외교, 국방 제외), 넷째, 점령지에 대한 영구 지위 협상 지속, 다섯째, 이스라엘군 철수 이후 자치 실행 등이다.

3.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협정(1994. 10)

요르단이 이집트(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를 맺은 회담. 요르단은 이스라엘이 점령해 온 국경 지대 영토를 반환받았고(대신 이스라엘 정착민에게 보상 지급),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에 대한 정치적 발언권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요르단의 동예루살렘 관리권 보장은 이곳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삼으려는 PLO와 여타 팔레스타인 강경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다.

4. 오슬로 협정2(1995. 9. 28)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자치를 확대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속 조약. 그러나 양쪽 모두 내부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혀 합의 사항을 이행할 수 없었다. 특히, 1995년 11월 4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유대인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1996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극우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양측의 관계는 급속도로 경색되었다.

5. 와이리버 협정(1998. 10. 23)과 와이리버 협정2(1999. 9)

미국의 주도로 '땅을 주고 평화를 얻는' 합의를 재진척시킨 협정. 1996년 총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의 40%를 자치영역으로 확보하는 대신, 〈PLO 헌장〉에서 '이스라엘 파괴' 조항을 폐기했다. 그러나 내부 강경파의 반대(암살, 폭탄 테러)로 협정 이행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1999년 9월5일에 협정2를 타결시켰지만 2000년 9월 최종 협상이 결렬되었다.


제3장 중동의 새로운 질서 모색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에 평화 조약(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었고, 양국 간 교전이 중지되었으며,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1982년 4월에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고, 이스라엘 선박은 수에즈 운하와 아카바 항구를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랍 동맹국으로 참전했던 시리아, 요르단 등의 실지 회복 문제가 방치되었고, 중동 평화의 본질인 팔레스타인 영토 문제는 전혀 협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특히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 문제 및 팔레스타인 국가의 자치 문제는 추후 교섭하자는 규정만 있고, 교섭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9년 5월부터 이집트, 이스라엘, 미국 등 3국이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 협의를 시작했으나, 협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점령지 주민들이 참여를 거부하였고, 1980년대 중반까지 10여 차례 더 시도된 자치 협의는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121)


"일찍이 1905년에 발생한 이란의 입헌 혁명은 정치 체제를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등 근대화 추진의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입헌군주제하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크 수상은 1951년 국왕이 영국, 미국 등의 석유 이권을 보호하는 데 반발하여 5월 1일 모든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다." "1953년, 팔레비 왕이 (석유 산업 국유화 조치에 불만을 품은) 미국의 지원으로 샤(Shah, 왕)에 등극한 뒤 모사데크 수상을 축출하였다. 팔레비 국왕은 1963년에는 농지 개혁, 국영 공장의 민영화, 참정권 등의 목표를 내세운 이른바 '백색 혁명'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은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이슬람 사회의 변질을 우려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반정부 운동을 부추겼다. 따라서 미국의 제국주의와 팔레비의 전체주의 정책을 반대하는 성직자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세력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팔레비 왕정의 급격하 서구화가 이란 혁명의 배경이 된 것이다."(126-7)


"이란 혁명의 슬로건은 이슬람적이었다. 이슬람 혁명은 가담한 이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고, 그들이 맞서야 할 적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적시해 주었다. 이 적들은 역사와 법과 전통을 통해서 매우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으니, 대외적으로는 이교도들이며, 국내에서는 배교자들이었다. 물론 혁명에 있어서 배교자란 이슬람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공유하려고 하지 않고, 이교도적인 방식을 들여와서 이슬람 공동체에 살고 있는 신앙과 법을 전복시키려는 세력들을 의미했다. 원칙적으로 이슬람 혁명의 목적은 외세의 지배와 영향을 받던 시기에 이슬람 영토와 국민들에게 강요되었던 모든 이질적이고 이교도적인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알라가 만든 진정한 이슬람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란 혁명에서 유래되고, 영감을 얻고, 맥락을 같이하는 이슬람 혁명운동들은 다른 아랍 국가들에도 전파되었고, 그곳에서 혁명론자들은 권력 쟁취를 위해서 싸우는 경쟁자가 되기도 했다."(128-30)


"이집트 사다트가 1979년 3월 데이스라엘 평화 회담을 조인함에 따라 전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와의 단교를 선언했고, 이로써 이집트의 아랍 내 패권은 사라졌다. 이집트의 추락과 이란의 배신으로 기존의 미국 주도 안보 벨트인 테헤란-리야드-카이로의 축이 붕괴됨으로써 중동에서 미국 등 서방 국가의 위상이 불안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또한 보수 왕정 국가들에서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 붕괴가 도미노처럼 발생할 것을 우려했고, 특히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연안 국가들은 자국으로 혁명이 확산될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국민 60%가 시아파인 이라크에도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1979년 7월 이후 정권을 잡은 사담 후세인은 혁명으로 인한 이란의 군사력 약화와 사다트의 대이스라엘 평화 회담이 남긴 아랍 지도력의 공백이야말로 중동 지역에서 이라크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8년간 지속될 이란-이라크 전쟁(1980. 9. 22~1988. 8. 20)의 출발점이었다."(135)


"걸프 협력회의(GCC)는 1981년 5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에미리트연합 등 걸프 연안 6개 왕정국이 설립한 지역 안보기구이다. 걸프 연안의 산유국들이 정치, 경제, 군사 등 분야에서 협력하여 역내 경제 통합 및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6개국은 석유를 생산, 수출하며,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있다. 또한 세습 왕정 체제를 유지하며, 아랍 민족국가이고, 지리적으로 인접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최상의 결속력을 자랑한다." "사우디는 미국 및 서방과의 안보 협력하에 GCC 회원국 간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구축해 아랍, 중동 국가 안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14년 9월 본격화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IS) 소탕에 아랍연합을 이끌고 참전한 것이나, 이슬람 수니파의 맹주로서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 예멘에서 벌이는 세력다툼에 대규모 공습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등은 중동에서 사우디의 역할과 위상을 잘 보여 주는 예다."(142-5)


제4장 9.11 테러와 미국의 대테러 전쟁


"오사마 빈 라덴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간 무력 침공 후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아프간 인접 국경도시 페샤와르에 거주하며, 소련군에 대항하는 아프간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1988년, 소련의 철수가 논의되고 아프간 전쟁이 끝나갈 무렵, 무자헤딘은 자신들의 전투 경험을 살려 이슬람 지하드를 전 세계로 확장하기를 희망했다. 빈 라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88년 9월 10일,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은 아랍어로 '알 카에다(Al-Qaeda, 근거지, 본부)'라는 명칭의 조직을 공식 창설하기로 결의했다." "알 카에다는 지상(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파), 해상(2000년 예맨 미 해군 군함 폭파), 공중(2001년 미국 뉴욕 9.11 테러) 등 육해공 3곳 모두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한 최초의 조직이다. 테러 활동이 통상 계획, 준비, 실행, 탈출 등 4단계로 구성된다고 볼 때, 자살 테러는 4단계 중 가장 어려운 탈출 단계를 생략해 주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현대 테러리즘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대두되었다."(172-4)


"빈 라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두 명이 있었다. 바로 사우디 킹 압둘 아지즈 대학 재학 시절 수학한 압둘라 아잠 교수이다. 그는 빈 라덴의 막대한 재산을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지원하도록 유도한 사람이며, 지하드의 개념을 폭력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슬람을 배신한 정권과 이교도인 외국의 적에 대해 폭력을 동반한 지하드가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 사상가는 알 카에다의 2인자 이집트인 자와히리이다. 그는 빈 라덴으로 하여금 '유대인과 십자군과의 지하드를 위한 세계 이슬람 전선'이라는 새로운 연합 조직을 결성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었다." "알 카에다는 빈 라덴의 파트와(Fatwa, 교시)를 받들어, 1991년 걸프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사우디의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에 반발해 반미 조직의 성격을 굳혔다. 따라서 알 카에다의 지하디스트들은 각자가 속한 지역에서 미국을 목표로 공격을 가하도록 훈련받았고, 이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9.11 테러이다."(175-6)


"미국은 대아프간 군사 작전을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으로 명명하고, 2001년 10월 7일 밤, 아프가니스탄 전 영토를 대상으로 OEF를 시작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탈레반 정부군과 북부동맹 반군 간의 내전과 미국-탈레반 전쟁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무력 분쟁이 병존하는 전장이 형성되었다." "개전 3개월 만인 2002년 초에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난 것으로 보였다. 탈레반 정권이 항복함으로써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잔존 세력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 되었다. 주요 도시 및 교통망은 미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탈레반 정권이 사실상 와해되고, 전쟁은 탈레반 잔당 소탕작전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02년 6월, 미국은 파슈툰족 출신 하미드 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아프간의 전통적인 토착 세력인 부족회의의 지지를 받지 못한 꼭두각시 정부에 불과했다."(179-81)


"2003년 3월, 아프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이 제2의 테러 전쟁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다. 2개의 태러 전쟁을 동시에 치르게 된 미국은 아프간 전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상당수의 주력 전투 병력을 이라크로 이동 배치했다." "괴멸 직전이었던 탈레반은 미군 전력의 약화를 기회로 다시 재정비에 돌입했다. 전 아프간 총리를 지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이끄는 무장 조직 '헤즈비 이슬라미'와 연대함으로써 전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2009년 1월,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공화당 부시 대통령이 물러나고,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다. 아프간 전쟁이 과연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논란의 중심에 서서 오바마 대통령은 2곳의 전장 중 이라크를 종전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소탕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5월, 전쟁의 목적인 빈 라덴을 처단하는 데 성공한 미국은 탈레반과 2013년 6월부터 전쟁 발발 12년 만에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181-2)


"제2차 걸프 전쟁은 2003년 3월 20일 새벽, 미군과 영국군이 합동으로 이라크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5월 1일, 미국은 개전 40일 만에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종전을 선언하고, 후세인까지 처형했다(2006년 12월 30일). 그러나 기대했던 것처럼 이라크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폭탄 테러와 게릴라전이 난무하는 등 치안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정세 불안은 미군을 8년간이나 더 이라크에 묶어 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으로서는 이라크 내의 고질적인 종파 간, 종족 간 무장 대립을 안정화시키는 데 한계를 절감하였다. 이라크의 치안 불안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쉽게 종결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내분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의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과 이라크 간의 분쟁이 아니라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 아랍인과 20%를 차지하는 쿠르드족 수니파, 15%를 차지하는 수니파 아랍인 간의 분쟁이었다."(191)


제5장 재스민 혁명과 민주화 열풍


"2011년 봄, 중동에서 시민들에 의해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권위주의 체제 및 군주제에 항거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시민 봉기는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2~3개월 사이에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는 놀라운 속도를 보였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26세의 청년 노점상 모함마드 부아지지가 단속 경찰의 폭력에 저항하여 분신자살한 사건이 촉매제가 되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은 23년간 장기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을 몰아냄으로써 중동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2011년 1월에는 이집트로 전파되어 코샤리 혁명을 통해 30년 집권의 무바라크 대통령을 하야시켰으며, 동시에 예멘으로도 확산되어 33년간 집권한 살레 대통령은 국외로 도망가야 했다. 2월에는 리비아로 확대되어 42년을 집권한 카다피를 사살하는 등 그칠 것 없이 번져 갔다. 바레안, 요르단 등 왕정 국가에서도 역사상 최초의 반정부 민중 봉기를 경험했고, 시리아에서는 2011년 3월부터 현재까지 무정부 상태의 내전이 진행 중이다."(199-200)


# Jasmine, 재스민은 '신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튀니지의 국화로 중동 혁명의 상징으로 불린다. 구체적으로는 실업 상태의 20대 젊은이가 길거리에서 물 담배(후카)와 재스민 차를 마시면서 소일하다가 정치적 격변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 Koshary, 코샤리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곡물 가격 인상과 생활수준 저하로 인한 불만을 상징하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22개 아랍 국가 중 단 한 나라도 자유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하지 못한 것이 중동 정치의 실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의 봄 혁명은 아랍인의 새로운 도전으로, 21세기 이슬람 세계의 민주주의를 향한 의미 있는 출발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중동 정치의 현실은 서구 민주주의를 그렇게 쉽게 용인하지 않았다. 2015년 12월 현재, 이집트는 모르시의 민간 정부를 대신해 군부가 쿠데타로 재집권했다. 예멘은 내전으로 다시 남북이 분리될 상황에 놓였으며, 리비아는 500여 개 1,700여 무장단체들이 난립하는 무정부 상태로 변했다. 그나마 혁명의 출발지였던 튀니지만이 유일하게 민간 정부를 구성한 후 모범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룩하고 있다. 문제는 또 다른 갈등 요인인 부족 간, 종파 간 대립으로 무정부 상태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IS)와 같은 극단주의 테러 세력들은 이러한 불안한 정세를 이용하여 발호하고 있다."(200-1)


"아랍의 봄은 다양한 성격으로 분류된다. 이집트와 튀니지는 시민혁명, 리비아는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와 동부 키레나이카를 각각 거점으로 하는 종족 분쟁, 예멘은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파 분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시리아의 경우 초기에는 시민혁명적 성격이었으나, 점차 부족 간 갈등에 따른 내전 양상을 보였고, IS가 등장하면서 전형적인 종파 분쟁 성격이 발현되었다(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이라는 국제정치 측면도 포함)." "시리아 반군이 사분오열되어 있고, 반군 내 주도 세력이 점차 자유 시리안군에서 이슬람 전선, 더 나아가 알 누스라 전선이나 ISIL로 전이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서방 국가들은 우려를 금치 못한다. 자칫 알 아사드 퇴진 이후 이슬람 극단 세력 혹은 알 카에다 방계 세력이 시리아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서방 국가 사이에 확산 중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 아사드 퇴진 가용 수단의 부재 및 향후 불확실성이 맞물려 미국으로서는 뚜렷한 전략을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230, 238)


제6장 중동 테러리즘의 변천사


# 중동 테러리즘의 환경적 분류

1. 종교 테러리즘 : 보편적으로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유일 신앙을 방어하려고 수행한다.

2. 국가 테러리즘 : 정부가 개입하여 수행하는 위로부터의 테러리즘이다.

3. 반체제 테러리즘 : 비국가적 운동이나 집단이 수행하는 아래로부터의 테러리즘이다.

4. 국제 테러리즘 : 국가 경계를 넘어 국제적 이해관계의 상징이라는 가치 때문에 선택된다.


"중동에서 아사신(Order of Assassins)이라는 테러 조직이 있었다. 암살 형제단(Brotherhood of Assasins)이라고도 하며, 11세기 페르시아 왕조 당시 이슬람 이스마일파의 칼리파 알 사바가 조직했다." "설립 초기에 암살단은 페르시아의 도시들, 현재의 이라크, 시리아 및 기독교 십자군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으로 흩어졌다. 아사신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고 상대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십자군에게 정규전 방식으로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장기적으로 테러 전술을 택했다. 암살단은 기만, 비밀 활동, 기습 살해에 능숙했고, 암살(Assassinat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자살 공격 임무도 흔했다. 암살단은 자신들의 대의와 방법론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살해하는 것과 살해당하는 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죽음 뒤에는 천국이 보장되기 때문에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믿음은 오늘날의 수많은 종교적 테러리스트들에게도 전수되고 있다."(256-7)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랍 무슬림 세계의 행동주의는 다양한 지적 국면을 거치면서 발전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학습 현상이 나타났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럽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식민 민족주의, 나세르 사상에 기초한 범아랍 민족주의(나세르주의),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통치 원칙을 채택하고, 종종 자국 정부에 저항하는 세속적인 급진 좌파주의 등이 등장하고 확산되는 추세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새로운 운동이 이전 세대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자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랍 공화정 정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탈냉전 정치 환경에서 해방의 도구로 이슬람을 택하는 것은 필연의 결과였다. 그와 동시에 수니파와 시아파의 이데올로기적인 차별성도 존재하였다. 특히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한 저항에서 별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이슬람 극단주의가 테러에 의존하는 경향은 더욱 확산되었다."(257-8)


"현대에서 대표적인 이슬람 혁명 조직은 사우디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의 세포조직인 알 카에다이다. 알 카에다는 성전(聖戰)을 통하여 전 세계 무슬림을 통합하려 한다. 또한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가진 혁명 조직이 아니며, 추종자들에게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적 테러에 참여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알 카에다를 잘 표현한 것은 '동질적인 이슬람 혁명주의자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알 카에다는 다음 6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영토를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후원을 받지 않는다. 조직의 상하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인종-민족 단체의 대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모호한 정치적 요구를 공표한다. 완성된 종교적 세계관을 가진다.〉 알 카에다의 종교적 성향은 빈 라덴의 분파적 이데올로기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뉴테러리즘(New Terrorism)의 중심적 특징이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은 이러한 전략을 구사한다면 자신들의 의제와 불만이 광범위한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261-3)


"국제 테러리즘은 비대칭전(Asymmetrical Warfare)의 가장 대표적 사례로, 비전통적이고 예기치 못한, 거의 예측이 불가능한 정치적 폭력 행위이다. 테러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비대칭전은 뉴테러리즘의 주요 특징이다. 이론상 비대칭전을 통해 테러리스트들은 새로운 고성능 무기로 예상치 못한 목표를 타격하여 대량살상을 야기하거나 독특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테러 희생자나 대테러 정책 당국의 딜레마는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전술을 통해 전통적인 방어나 억지 정책을 무력화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국제 안보 환경을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각적인 미디어의 관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들도 전 세계적인 주목을 끄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정치적 동기에서 벌인 항공기 납치, 폭탄 테러, 암살, 유괴, 고문, 기타 범죄 행위 등이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경우 상당한 주목을 끌고 더 큰 기회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83)


"아랍의 봄으로 각국에서 무정부 상태, 내전 등 정세 불안이 지속되는 틈을 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들이 발호하고 나섰다. 특히 2014년 6월 이라크에서 이슬람 국가(IS)라는 극단주의 테러 세력이 등장했다." "IS는 요르단 출신의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라크에서 조직한 유일신과 성전(Jamaat al-Tawhid al-Jihad, JTJ)이 모태이며, 이라크 내전 국면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이 조직은 2004년 알 카에다의 지도자 빈 라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2006년 자르카위가 미군 공습으로 사망하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여러 이슬람주의 단체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알 카에다의 자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우선 시리아, 이라크 땅에 이슬람 수니파를 중심으로 신정 체제 칼리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문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지의 자생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IS에 충성을 맹세하고 테러에 동참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297-8)


제7장 이슬람 국가 출현


"IS의 모태조직인 '유일신과 성전'을 통해 지명도를 높이고 조직을 키운 알 자르카위는 이후 이라크 알 카에다(Al-Qaeda in Iraq, AQI)로 조직 이름을 바꾸고, 과거 사담 후세인의 잔당 중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시아파가 이끄는 이라크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이라크 내 최대 반정부 조직으로 송장시켰다. 2006년 6월 7일, 자르카위가 피살 된 후 AQI는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소규모 반정부 투쟁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2011년에 미군이 철수하자 시아파 누리 알 말리키 정권에 대한 수니파의 불만이 거세진 틈을 이용하여 이라크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of Iraq, ISI)로 이름을 바꾸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알 카에다의 일원으로 월경(越境)하여 알 누스라 전선 휘하로 시리아 반군 진영에 가담하여 반아사드 저항운동을 펼쳤다. 시라아 반군 진영에 가담한 ISI는 영역을 확장하여 이라크 시리아(샴 또는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S 또는 ISIL)로 재편했다."(316-7)


"IS의 부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이슬람 정치 세력의 부침과 성격 변화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정권 상실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아랍 통합을 주창했던 아랍 민족주의(Nasserism)와 바티즘(Ba'athism)이 쇠락한 뒤 중동 지역의 지배 이념은 공동화 현상을 겪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함께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이슬람이 부상했다. 이들 이슬람 정파는 크게 지하 투쟁 세력과 제도권 진입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슬람 계열의 여러 정파는 아랍의 봄 혁명으로 인한 정치 변동 국면과 맞물려 대거 수면 위로 부상했다. 선거를 통한 제도권 진입을 시도했으며, 중동 전역에서 이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이슬람의 봉기' 현상이 발현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집권 사례가 바로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출신 모하메드 모르시의 대통령 당선이었으며, 튀니지에서도 이슬람주의 정당 엔 나흐다(En-Nahda)가 부상하는 등 이슬람계 정당들이 도처에서 약진하였다."(319)


"사실상 중동 각처에 잠재해 있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초법적 탄압 수단을 통해 봉쇄하고 있던 주체가 바로 각국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이들 독재 체제의 동시다발적인 붕괴는 곧 권력의 진공상태로 이어졌고, 다양한 이슬람 세력들이 분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가장 극적인 이슬람 집권 사례였던 모르시 정부가 또다시 국방장관 압둘 파타 엘 시시에 의해 붕괴되고 2014년 군부 정권이 재집권하자, 이슬람 정파들 사이에서 분노와 박탈감이 만연했다. 이로써 제도권을 떠나 새로운 투쟁의 전기를 모색했다. 권력을 획득하고자 절차적 정당성, 즉 선거 및 정치 프로세스를 거쳐야 할 이유가 굳이 없으며, 준비되었을 때는 지하드, 즉 무장 투쟁을 통해 이슬람의 이름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폭력 강경론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IS는 무장 투쟁의 자원과 역량을 획득했다는 판단 아래 칼리파 국가 건설을 선언하고, IS가 신의 통치에 기반을 둔 주권국가임을 천명했다."(319-20)


"IS의 이념은 이슬람의 극단적 수니 근본주의(Takfirism, 탁피리즘)를 신봉한다고 할 수 있다. 수니파의 4대 법학 사조 중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 입장을 견지하는 한발리파의 주류보다 더욱 고루한 중세 전통주의를 추종한다. 단순히 종교적 계율과 실행에 있어 전통적, 보수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IS는 투쟁, 곧 지하드 과정에서 일반적인 이슬람의 통념과 전통을 넘어서는 극도의 잔인성과 공포를 통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슬람 주류는 이러한 비주류 극단주의자들을 탁피리스트라 칭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그랜드 무프티(Grand Mufti, 보수적인 이슬람 신학의 최고 권위자에 대한 호칭)조차 이들을 비이슬람으로 간주하고, 금기(Haram)로 규정했다. IS의 잔인성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자 심지어 파키스탄 소재 알 카에다 본부까지 이들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들의 극단주의 노선은 일종의 선명성 확보를 통한 국제사회에서의 존재감 부각 의지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322-3)


# 이슬람 법학에는 하나피파, 한발리파, 말리키파, 샤피이파 등 정통 4대 법학파가 존재하며, 수니파는 이들 모두를 인정한다 .한발리파의 창시자 한발리는 가장 철저한 원리주의자로서, 모든 법리는 신적인 것에 철저히 의존할 것을 주장하며, 꾸란과 하디스의 어구에 따른 해석에만 의존한다. 14세기까지 이라크, 시리아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현재는 사우디와 카타르의 공인 법학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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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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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팔레스타인 토착 사회의 해체는 새로 만들어진 영국 위임통치 당국(유대인 정착민들의 자치 구조 구성을 도운)이 지지하는 가운데 대규모로 유입된 유럽계 유대인 정착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의 지배에 맞선 1936~1939년 아랍 대반란이 철저히 탄압을 받으면서 원주민 인구는 한층 더 감소했다. 영국이 10만 명 규모의 병력과 공군을 동원해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진압하는 가운데 당시 성인 남성 인구의 10퍼센트가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투옥되거나 추방당했다. 한편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에 따라 유대인 이민자가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가 1932년 총 18퍼센트에서 1939년 31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1948년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에 필요한 인구학적 임계점과 군 병력이 마련되었다. 이후 시온주의 민병대에 이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인구의 절반 이상을 쫓아냄으로써 시온주의의 군사적·정치적 승리가 완성되었다."(24-5)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 오스트랄라시아 (또는 아일랜드) 등 어디서든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지배하려 한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특유의 언어로 언제나 원주민을 경멸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통치한 결과로 토착민들이 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식민주의의 이론적 근거와 나란히, 유럽의 시온주의 식민화가 도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은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으며 후진적인 땅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골몰하는 수많은 문헌이 존재한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오직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이 앞장서서 땀 흘려 일한 덕분에 이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꽃피는 정원으로 바뀌었고, 오로지 그들만이 이 땅에 일체감과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이 주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이즈라엘 쟁윌 같은 초기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을 지지한 기독교인들까지 소리 모아 외친 구호로 요약된다. 「사람 없는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주자.」"(26-8)


1 첫 번째 선전포고, 1917~1939


"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 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 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게 제2언어나 제3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비드 벤구리온이나 이츠하크 벤츠비(훗날에 각각 이스라엘 총리와 대통령이 된다) 같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를 포함해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일부 젊은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처음에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통합되려고 했다."(40)


"벨푸어 선언은 부드럽고 기만적인 외교의 언어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데 찬성한다는 모호한 구절을 담았다. 이 선언으로 영국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전체에 유대 국가를 세워 주권을 확보하고 이민을 통제한다는 테오도어 헤르츨의 목표를 지지한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벨푸어는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당시 약 94퍼센트)에 대해서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라고 애매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서술되었고, 확실히 한 민족이나 집단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67개 단어로 이루어진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이나 〈아랍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은 정치적·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종교적 권리〉만을 약속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벨푸어는 당시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6퍼센트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46-7)


# 벨푸어 선언(1917. 11. 2) :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대중적 신화는 팔레스타인인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집단적 의식이 부재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유대인의 민족 자결에 대한 터무니없는 반대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거의 정확히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여러 민족 정체성은 근대적이고 우연한 현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상황에서 생겨난 소산이다.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시온주의가 원주민에게 이득을 준다는 헤르츨의 식민주의적 견해와 일맥상통하며, 벨푸어 선언과 그 후속 조치들로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민족의식을 삭제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55-6)


"1922년,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발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 공동체〉에 대해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계속해서 문서에는 벨푸어 선언의 조항들을 지지한다는 국제적 약속이 제시되어 있다. 이 후속 문구에 분명하게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 민족 한 집단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결국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 대비를 이룬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위임통치령 세 번째 문단에는, 오직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60)


"1937년 7월, 필 경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소요 사태─1936년에 6개월간 진행된 총파업─를 조사하는 책임을 맡은 왕립위원회가 나라를 분리해서 영토의 약 17퍼센트에 작은 유대 국가를 형성하고 이 지역에서 200만이 넘는 아랍인을 추방할 것(추방expulsion 대신에 〈이동transfer〉이라는 완곡한 단어가 사용되었다)을 제안하자, 이런 개입의 실망스러운 결과가 드러났다. 이 계획에 따르면, 나라의 나머지는 계속 영국이 통치하거나 영국에 예속된 트랜스요르단의 아미르 압둘라에게 양도할 예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아무 변화도 없는 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족적 실체나 집단적 권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대우를 받았다. 비록 팔레스타인 전체는 아니더라도, 팔레스타인인을 제거한다는 시온주의의 기본 목표가 충족되고, 팔레스타인 쪽이 열렬하게 바라는 자결권이라는 목표가 부정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봉기를 한층 더 전투적인 단계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73)


"숱한 희생이 벌어지고 반란이 잠깐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만 남았다. 영국의 야만적인 탄압과 수많은 지도자의 죽음과 유형,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방향을 잃고 분열되었고, 1939년 여름에 반란이 진압될 무렵에는 경제도 허약해졌다." "하지만 1939년 유럽에서 전운이 확대되는 가운데 영제국에 새롭게 제기된 중대한 전 지구적 도전이 아랍의 반란과 결합되어 런던 당국의 정책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겼다. 앞서 시온주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제국의 핵심적인 전략적 이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한편 대반란Great Revolt을 강제로 진압하는 것에 대한 아랍 각국과 이슬람 세계의 분노를 다독이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잔학 행위에 대해 추축국이 중동 지역에 선전 공세를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78-9)


"1939년 봄,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인도 무슬림의 분노한 여론을 달래려는 시도로 백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의 전폭적 지지를 대폭 삭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유대인 이민 유입과 토지 판매를 엄격하게 제한할 것(아랍의 주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을 제안하였고, 5년 안에 대의 기관을 마련하고 10년 안에 자결권을 주겠다(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백서를 발표했을 당시 체임벌린 정부는 임기가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고, 체임벌린 후임으로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정게에서 아마 가장 열렬한 시온주의자였을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도,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고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진정한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가운데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참이었다. 이제 이 세계에서 영국은 기껏해야 이류 강대국일 뿐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이제 영국의 수중을 벗어날 터였다."(79-81)


2 두 번째 선전포고, 1947~1948


"전쟁 이후 연달아 일어난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은 팔레스타인인들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여러 아랍 정권들과의 관계는 이미 불안했다." "영국의 후원으로 아랍 6개국이 아랍연맹을 결성한 1945년 3월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회원국들이 아랍연맹의 창립 성명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고 팔레스타인 대표자에 대한 선택권을 계속 자신들이 갖기로 결정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쓰라린 실망감을 느꼈다." "더욱 원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46년 구성된 영국-미국 조사위원회였다. 영국과 미국 정부가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유럽의 난민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미국과 시온주의가 선호하는 방안은 이 불운한 사람들이 곧바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는데(미국이나 영국이나 그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1939년 백서의 취지를 부정하는 방안이었다."(96-7)


"주로 이라크의 누리 알사이드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그의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아랍청은 결국 다른 아랍 국가들을 소외시켰다. 특히 범아랍권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소외시켰다. 양국 지도자, 그리고 시리아와 레바논의 지도자는 아랍청 창설이 이라크가 지역 차원에서 야심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아마도 정확하게─의심했다." "한편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최대한 넓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 이 나라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놓고 시온주의자들 및 영국의 지지자들과 타협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쪽으로 옮겨 가자 국왕은 협정 체결에 대한 기대를 품고 비밀리에 유대인기구 지도자들과 거듭 회동했다." "따라서 이라크의 누리와 달리, 압둘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팔레스타인의 독립 지도부가 필요 없었고, 팔레스타인의 외교 부서 역할을 할 아랍청 같은 기구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106-7)


"1947년 애틀리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를 만들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엔을 지배하는 미국과 소련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반면,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 힘의 재조정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소수의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한 다수 의견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의 제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이었는데, 1937년 필위원회 분할안에서 제안한 유대 국가의 규모가 훨씬 작은 17퍼센트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 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111)


"나크바─1947년 말부터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인을 강제 이주, 추방하고 심지어 말살하려는 목적에서 행한 집단 학살 행위를 가리킨다─는 마치 열차 사고가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몇 달에 걸쳐서 펼쳐졌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의 첫 번째 단계에서 하가나Haganah와 이르군Irgun을 비롯한 시온주의 준군사 집단은 무장과 조직력이 형편없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을 도우러 온 아랍 지원병들을 잇따라 물리쳤다. 이 첫 단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는 1948년 봄 플랜 달렛Plan Dalet이라고 명명된 전국 차원의 시온주의의 공세에서 정점에 달했다. 플랜 달렛은 4월과 5월 전반에 아랍의 양대 도시인 야파와 하이파, 그리고 서예루살렘의 아랍인 구역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랍 도시와 소읍, 마을을 정복하고 주민들을 쫓아내는 결과를 낳았다."(112-3)


"추방을 피해 이스라엘로 바뀐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을 수 있었던 16만 명 정도의 소수 팔레스타인인은 이제 그 국가의 국민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다수가 된 유대인을 위해 전력을 다한 이스라엘 정부는 이 남아 있는 팔레스타인인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잠재적 제5열로 바라보았다. 1966년까지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엄격한 계엄령 아래서 살았고, 가진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이스라엘 국가가 합법으로 간주한 수용을 거쳐 가로챈 이 땅은 경작 가능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는데, 유대인 정착촌이나 이스라엘토지공사에 양도되거나 유대민족기금에 통제권이 넘어갔다. 유대민족기금의 차별적 헌장에 따르면, 이런 토지는 유대인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자기 나라와 종교에서 상당한 다수의 지위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은 갑자기 적대적 환경에서 멸시받는 소수로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스스로를 절대 전체 국민의 국가로 정의하지 않은 유대 정치체의 피지배자가 되어야 했다."(126-7)


"아랍 국가들과 국제사회가 1948년의 재앙적 결과를 뒤집으려는 의지나 능력을 보이지 않자, 나크바 이후의 황량한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행동주의가 여러 형태로 되살아났다. 소규모 집단들이 이스라엘에 맞서 무기를 집어들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상태를 바로잡으려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시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대에 대처하는 것 외에도 아랍의 난민 수용 국가, 특히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등의 정부와 대결해야 했다. 유대 국가에 비해 군사력이 크게 뒤지는 상황에서 이 나라들은 이웃에 대한 공격을 묵인하기를 대단히 꺼렸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운동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에도 그들은 일부 아랍 국가가 이런 운동을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활용하려는 시도를 물리쳐야 했다. 1964년 이집트의 요청에 따라 아랍연맹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설한 것은 이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독립적 팔레스타인 행동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아랍 국가들이 이 운동을 통제하려는 가장 중요한 시도였다."(136-7)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 때문에 종종 이스라엘이 가자를 어떻게 표적으로 삼았는지가 가려졌다. 강대국이 직접 참여하는 국가 간 충돌이 더 많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가자 지구는 1948년 이후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이는 저항의 용광로였다. 파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립한 지도자 대부분이 이 기다란 해안 지대의 비좁은 동네에서 등장했다. 또한 전투적인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은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을 그곳에서 끌어모았고, 나중에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에 맞서 가장 끈질기게 무장투쟁을 주창한 이슬람지하드와 하마스의 탄생지이자 요새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나크바로 겪은 충격과 굴욕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을 빼앗긴 것을 묵인하지 않고 저항하자, 자국 문제에 정신이 팔린 채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의지나 각오가 전혀 없었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대결로 이끌려 들어갔고, 이 대결은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143-4)


3 세 번째 선전포고, 1967


"벨푸어 선언과 위임통치가 한 강대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발표한 첫 번째 선전포고였고,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에 관한 유엔 결의안이 두 번째 선전포고였다면, 1967년 전쟁의 결과는 세 번째 선전포고─안보리 결의안 SC 242의 형태로─를 낳았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242조는 이스라엘의 영토 획득을 용인하고 있다. 결의안 문안은 대부분 영국 상임 대표 캐러돈 경이 작성했지만, 사실상 미국과 이스라엘의 견해를 압축한 내용으로 6월의 압도적인 패배 이후 아랍 각국과 그들의 후견인인 소련의 입지가 약화된 사정이 반영되었다. 결의안 제242호에는 〈전쟁을 통한 영토 획득을 용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철수하기만 하면 아랍 국가들과 강화 조약을 맺고 안전한 국경을 확립할 수 있음이 언급되어 있었다.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직접 교섭하는 것을 꺼리는 상황에서 사실상 이 말은 이스라엘의 철군은 어떤 것이든 조건이 붙고 지연될 것임을 의미했다."(152, 156-7)


"게다가 결의안 제242호에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공인된 안전한 국경의 창설과 연계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정하는 대로 안보 기준 충족을 위해 국경을 확장할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조항이 실렸다. 핵무장을 갖춘 이 지역 강대국은 그 후 이 조항을 이례적으로 폭넓고 유연하게 해석해 왔다. 마지막으로, 결의안 제242호의 모호한 언어는 이스라엘이 방금 전에 점령한 영토를 계속 보유할 수 있는 또 다른 허점을 열어 주었다. 결의안의 영어 원문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그 영토from 'the' territories occupied〉가 아니라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한다withdrawal from territories occupied〉고 규정한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미국이 지원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점령지를 식민화할 수 있게 만든 이런 언어상의 허점을 한껏 활용했다. 실제로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의 경우에 수십 년간 간헐적으로 직간접적 교섭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면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57)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결의안 제242호가 사실상 1949년의 휴전선(그 후 1967년 국경이나 그린라인이라고 불렸다)을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국경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로써 1948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을 정복한 것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194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핵심적 쟁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보상을 받을 권리가 무시되는 결과로 이어져 그들의 열망은 다시 타격을 받았다." "결의안 제242호는 이런 탁월한 날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점령당하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2년이 지난 1969년에야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인 같은 건 없었고,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전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유명한 선언을 했다. 그리하여 총리는 정착민-식민주의 기획에 특징적인 존재 부정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원주민이라는 건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159)


"1950년대에 실지회복주의를 주창하며 생겨난 소규모 전투적 집단들을 창설한 것은 중간계급과 하층 중간계급의 젊은 급진주의자들로서 대부분은 셰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의 후예를 자처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사망해 1936년 반란을 촉발함으로써 여전히 영웅적인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기려지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1956년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이런 시도는 두 가지 주요한 추세 속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하나는 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창설한 범아랍 조직으로 1967년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을 창설한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 이끌었다. 나머지 하나는 1959년 쿠웨이트에서 공식 설립되어 1965년에 공개적으로 파타Fatah라는 이름을 밝힌 집단이 주도했다. 두 집단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갔는데, 당시 최초의 지도자들은 대학생이나 최근에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다."(166-7)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가까워서 학생과 식자층, 중간계급, 특히 좌파 정치에 이끌리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또한 난민촌에서 헌신적인 추종자들이 있었다. 인민전선의 급진적 메시지가 가장 고통을 받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강하게 공명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타는 공공연하게 팔레스타인 좌파를 표방하는 그룹과 비교할 때 정치적 입장에서 확실히 이데올로기와 무관했다. 창립 당시 파타는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나 바트당 같은 아랍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들과, 공산주의, 좌파, 팔레스타인 같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앞서 우선 사회 변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슬림형제단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 양쪽 모두에 대한 반발을 상징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직접,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파타의 호소,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폭넓은 입장이야말로 파타가 순식간에 최대의 정치 집단으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170)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67년 이후 외교와 선전에서 (제한적이나마) 잇따라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성공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번 여러 적수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여러 차례 항공기를 납치하고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세력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자, 하심 가문 정권과 파국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저항 운동 쪽에 승산이 없는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에 직면하고 대중적 공감도 일부 상실한 저항 운동은 그해에 검은구월단 사건 속에서 암만에서 밀려났고, 1971년 봄에 요르단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요르단 와해 사태를 거치면서 저항 운동의 일부 요소들, 특히 팔레스타해방인민전선이 그 시점까지 유지하던 성공적인 역동성의 아우라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무모하게 적들을 도발하고, 의지처가 되는 나라들을 소외시키며, 결국 쫓겨나게 되는 저항 운동의 이런 양상은 11년 뒤 베이루트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180-1)


"1970년대 초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성원들은 이런 압력─아랍 국가들이 점차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존재론적 차원이 아니라 국경을 놓고 국가들끼리 벌이는 대결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제한적 관점─에, 특히 소련의 촉구에 부응하여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 사실상 두 국가 해법을 내놓았다. 이 방식은 특히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1969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다)이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과 함께 주창한 것으로, 파타 지도부도 조심스럽게 권장했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파타의 일부 간부들은 일찍부터 두 국가 해법에 저항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라파트를 필두로 한 지도자들이 이 방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주국가라는 최대주의적 목표와 여기에 담긴 혁명적 함의에서 벗어나 이스라엘과 나란히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좀 더 실용적인 목표로 나아가는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의 시작이었다."(187)


"카터 시절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권리와 교섭 참여를 거의 지지했지만, 양쪽 사이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멀어졌다. 캠프 데이비드와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은 미국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신호였고, 이 제휴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베긴과 리쿠드당의 후임자들인 이츠하크 샤미르,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나 주권 확보,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지배권 회복에 철저히 반대했다. 제에브 자보틴스키의 이데올로기적 상속자인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체가 오직 유대인의 땅이라고 믿었다. 〈현지 아랍인들〉에게 주어진 자치권은 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을 뿐이다." "향후 이뤄지는 교섭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과도기를 위한 자치 조건에 제한되었고, 주권, 국가 수립, 예루살렘, 난민의 운명, 팔레스타인의 토지와 물과 대기에 대한 관할권 등에 관한 논의는 죄다 배제되었다."(202-3)


4 네 번째 선전포고, 1982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1948년 5월 15일 이래 아랍 각국 군대가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관여해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팔레스타인 페다인은 1960년대 중반부터 줄곧 요르단의 카라메에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레바논 남부, 특히 1978년 리타니 작전에서, 그리고 1981년 여름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포격전 등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대결했다. 하지만 존재 자체를 없애려는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레바논에서 굳건한 입지를 구축해 놓은 까닭에 비교적 제한된 성격의 군사 작전으로는 최소한의 영향만 미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대레바논 침공을 이끈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시리아 무장 세력을 레바논에서 축출하고 베이루트에 말 잘 듣는 동맹 정부를 만들어 그 나라의 상황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주요한 목표는 팔레스타인 자체였다."(209)


"원래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벌이는 활동은 공식적인 틀─1969년 채택된 카이로 협정─안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통제하고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중무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의 여러 지역에서 점차 지배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이 되었다. 레바논의 보통 사람들은 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렇게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세력이 더욱 강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에 세운 일종의 미니 국가는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군사 행동에 자극받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이스라엘을 겨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공격은 종종 민간 목표물을 대상으로 삼았고,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대의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라도 진척시키는 데 가시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222)


"1982년 전쟁이 낳은 가장 중요한 지속적인 결과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부상한 것과 레바논 내전이 격화되고 장기화된 것이었다. 이 내전은 훨씬 더 복잡한 지역적 분쟁으로 비화했다. 1982년 침공은 여러 가지로 최초의 사건이었다. 1958년 미군이 잠깐 레바논에 파병된 이래 미국이 최초로 중동에 군사 개입한 사례였고,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제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사례였다. 이 사건들 때문에 많은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인, 아랍인 사이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훨씬 격렬한 반감이 생겨나면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한층 악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1982년 전쟁을 개시하면서 내린 선택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결과였다."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정교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민간인들의 끔찍한 이미지가 널리 퍼져 나갔고, 그 결과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지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38-9)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자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심각하게 약해진 듯 보였고, 샤론은 핵심 목표─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축출하는─를 전부 달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태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다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들로부터 점차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5년 뒤인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발발한 곳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스라엘과 세계의 여론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수십 년 전에 나크바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뼈아픈 패배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다면적인 전쟁에 맞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일으켰다. 샤론과 베긴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점령지를 흡수하기 위해 침공에 착수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을 자극하고 팔레스타인 내부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40)


"미국 입장에서 보면, 중동 외교를 독점하려 하고 이스라엘의 야심을 부추긴 것은 자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레바논의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헤즈볼라의 부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을 창설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을 겨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많은 젊은이들이 1982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나란히 싸운 이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젊은이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투사들이 떠난 뒤에 남아서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인들과 나란히 자신들과 같은 시아파 수백 명이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국 대사관 폭발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병영에서 목숨을 잃은 해병대원들, 그리고 베이루트에 납치되거나 암살당한 많은 미국인들은 대개 나중에 헤즈볼라가 된 그룹들의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 점령자들이 공모한 대가를 그들이 치른 셈이다."(241-2)


5 다섯 번째 선전포고, 1987~1995


"이른바 1차 인티파다는 점령지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가자 지구가 용광로였고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데 가장 애를 먹은 지역으로 남았다. 인티파다를 거치면서 마을과 소읍, 도시와 난민촌에서 광범위한 지역 조직이 생겨났고, 비공개 조직인 통일민족지도부가 이끌게 되었다. 인티파다 시기에 결성된 유연하고 비밀스러운 풀뿌리 네트워크들은 군사 점령 당국이 진압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인티파다 시기 내내 팔레스타인의 젊은 시위대가 병력 수송 장갑차와 탱크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군대를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는 광경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장면에 주목했다. 영원한 피해자라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의 다윗과 싸우는 골리앗으로 바뀌었다."(246-7)


"인티파다는 누적된 좌절감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난 저항 운동이었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의 공식적 정치 지도부와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 1936~1939년 반란과 마찬가지로, 인티파다가 장기간 광범위하게 지속된 것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누렸다는 증거다. 봉기는 또한 유연하고 혁신적이었다. 활동가들도 남성과 여성, 엘리트 전문직과 사업가, 농민, 마을 사람, 도시 빈민, 학생, 자영업자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집단을 아울렀다." "1936~1939년 반란과 달리, 인티파다는 폭넓은 전략적 전망과 통일된 지도부에 따라 진행되었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악화시키지 않았다. 인티파다가─1960년대와 1970년대의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과 대조적으로─팔레스타인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대체로 총기와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국제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서 결국 이스라엘과 세계 여론에 심대하고 오래가는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252-3)


"1982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패배한 뒤, 이 조직은 튀니스를 비롯한 아랍 각국 수도에서 별 성과 없는 망명 활동에 갇혀 힘을 잃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풀뿌리가 주도하는 봉기가 발발하자 깜짝 놀라면서 곧바로 이 봉기를 조직으로 흡수하고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문제는 튀니스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들이 근시안적 시각과 제한된 전략적 전망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지도자들 대다수는 이스라엘의 지배가 20년이 흐른 뒤 점령 체제의 본성이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복잡한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점차 인티파다를 튀니스에서 원격 통제 방식으로 관리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침을 발표하고 상황을 관리하면서 애초에 봉기를 시작해서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의 견해와 우선순위를 종종 무시했다."(254-5)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고압적인 시리아 정권에 오래전부터 격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반사적으로 균형추를 모색했다. 이집트가 한때 아사드 정권이 행사하는 압력에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했지만, 사다트가 독자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룬 뒤에는 이제 그런 역할이 가능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능한 다른 균형추는 필연적으로 시리아의 경쟁자인 이라크였다." "이렇게 의존하게 되자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라크의 정책에 순응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라크 정권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다잡아 두기 위해 걸핏하면 응징했다." "무지몽매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서 정보부장 아부 이야드만이 예외였다. 그는 걸프전을 앞두고 이라크를 지지한다는 아라파트의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아부 이야드가 내다본 대로 상황이 펼쳐졌지만,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공세가 시작되기 3일 전인 1991년 1월 14일 튀니스에서 암살당했다."(265-8)


"아라파트가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결과가 나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웨이트가 해방된 뒤 팔레스타인인 수십만 명이 쫓겨나는 비극이 시발점이었다.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한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했고, 1982년 베이루트에서 철수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부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던 나라들까지 일부 포함해서 많은 아랍 나라가 이 기구를 추방했다. 그리하여 1990~1991년 걸프전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아라파트와 그의 동지들이 올라탄 빙산은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고, 그들은 단단한 땅에 뛰어내리고자 필사적으로 애썼다. 공교롭게도 이런 위기 상황과 동시에 미국은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련이 종언을 고하면서 의기양양한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평화회담이 차질을 빚은 것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애초에 쿠웨이트에 대해 심각하게 오산을 한 탓이 컸다."(268-9)


"샤미르 정부 대신 노동당이 주도하는 연정이 들어선 뒤, 총리가 된 라빈은 시리아 경로와 팔레스타인 경로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할지 망설였다. 언제나 전략가였던 그는 시리아와 먼저 협상을 타결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켜서 그들과의 교섭이 용이해지는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양쪽은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갈릴리호 동쪽 연안에 있는 몇 평방마일의 전략적 땅의 처분을 둘러싸고 불거진 견해차가 주된 요인이었다. 골란고원에서 조금이라도 철수를 하는 것에 대해 이스라엘의 몇몇 집단(과 미국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스라엘에서 정권이 교체되어도 실질적인 입장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팔레스타인 대표단 내부와 튀니스에서는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1995년 10월, 크네셋에서 라빈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조직체〉가 만들어지더라도 〈국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지 않아 그는 암살당했다."(279-81)


"1993년 6월, 오슬로에서 양측이 서명한 내용은 점령지의 한쪽 땅에서 아주 제한된 형태로 자치를 하고 땅과 물, 경계선, 그 밖에도 많은 부분에 대해 통제권이 없는 것이었다. 이 협정과 이후 여기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협정들은 오늘날까지 약간의 수정을 거친 채 시행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온갖 특권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땅과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셈이다. 주권의 속성들도 대부분 이스라엘 손에 있다."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고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오슬로 합의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점령은 계속되었을 테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치라는 포장이 없고 이스라엘이 수백만 명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재정적 부담을 더는 일이 없으며, 이스라엘 식민 정착민들이 점점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군사 정권 아래 사는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 데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 협력〉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289-90)


"1995년 양쪽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관한 잠정 협정, 일명 오슬로 협정Ⅱ에 합의하면서 오슬로 협정Ⅰ의 파괴적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 협정으로 두 곳이 악명 높은 누더기 지역들(A, B, C)로 쪼개졌고, 전체의 60퍼센트가 넘는 C지역이 완전하고 직접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18퍼센트에 해당하는 A지역의 행정·치안권, 22퍼센트인 B지역의 행정권을 부여받은 한편, B지역의 치안권은 여전히 이스라엘 손에 있었다. A지역과 B지역을 합치면 면적으로는 40퍼센트였지만 팔레스타인 인구로 따지면 87퍼센트 정도였다. C지역은 한 곳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었다. 이스라엘은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의 진입과 출입에 대해 계속 전면적인 권한을 가졌고 인구 등록의 배타적인 권리도 갖고 있었다." "마침내 요르단강 서안은 수십 곳의 군사 검문소와 수백 마일에 해당하는 장벽과 전기 울타리 때문에 점점이 박힌 섬들처럼 고립되었다."(292-3)


"오슬로 협정 이후 사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상황은 흔히 거의 동등한 세력, 즉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이라는 준국가의 충돌이라고 그릇되게 묘사되어 왔다. 이런 묘사는 변함없이 불평등한 식민지적 현실을 가린다." "오슬로 협정Ⅰ은 또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점령의 하청업자로 끌어들이는 결정을 수반했다. 라빈이 아라파트와 끌어낸 안보 합의의 실제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고, 1993년 6월 나와 동료들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 합의에 관해 발표했다. 핵심은 언제나 이스라엘, 즉 점령과 정착민을 위한 안보였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복종시키는 비용과 책임은 팔레스타인 쪽에 떠넘겨졌다." "오슬로 협정은 사실 100년 묵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획을 진척시키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적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발표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47년이나 1967년과 달리,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적들과 공모하는 쪽을 선택했다."(295-7)


6 여섯 번째 선전포고, 2000~2014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새롭게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인 하마스 입장에서 보면, 오슬로가 팔레스타인 쪽 지지자들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증거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 초기에 창설된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발전한 조직이었다. 점령 당국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는 데 유용했기 때문에, 하마스를 너그럽게 방치했고 이들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인티파다 시기에 하마스는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고집하면서 통합민족사령부에 합류하지 않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보다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대안 세력으로 자신을 홍보하면서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가 1988년 독립 선언에서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외교로 전환한 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력 사용을 통해서만 팔레스타인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했다."(302-3)


"오슬로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의 경쟁이 격화되어 가다가 결국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로 분출했다. 인티파다가 불붙는 데는 성냥불 하나면 충분했다. 아리엘 샤론이 보안 요원 수백 명에 둘러싸여 하람알샤리프를 도발적으로 방문한 것이 성냥불 역할을 했다. 하람─유대인들이 성전산Temple Mount 이라고 부르는 곳─은 최소한 1929년의 유혈 사태 이래로 양쪽 모두에 민족주의적·종교적 열정이 집중되는 장소였다. 당시 수정주의적 시온주의 극단론자들이 이웃한 서쪽 벽Western Wall에서 깃발을 흔들며 떠들썩한 시위를 벌이자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 양쪽에서 수백 명씩 사상자가 발생했다." "2차 인티파다 시기에 사망한 이스라엘인의 대다수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내에서 벌인 자살 폭탄 공격의 민간인 피해자였으며, 전체 사망자의 3분의 1에 약간 못 미치는 332명은 이스라엘 군경이었다."(306-8)


"2차 인티파다의 끔찍한 폭력 때문에 1982년 이래 팔레스타인인들이 1차 인티파다와 평화교섭을 통해 쌓아 온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워졌다. 연이어 벌어지는 자살 폭탄 공격의 소름끼치는 광경이 세계 각지로 전송되자 (그리고 이런 보도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훨씬 더 거대한 폭력이 가려지자), 이스라엘은 이제 압제자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으로 괴롭히는 세력의 희생자라는 익숙한 역할로 돌아갔다." "민간인을 겨냥한 이런 공격이 치명타가 되어 이스라엘 사회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사고도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이론은 이스라엘이 뿌리부터 분열되어 있는 〈인위적인〉 정치 체제라는, 널리 퍼져 있지만 치명적 결함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 이 분석은 한 세기가 넘도록 명명백백한 성공을 거둔 시온주의의 민족국가 건설 노력뿐만 아니라 많은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응집력을 무시한 것이다."(310-2)


"하마스와 파타의 분열은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잠재적인 재앙이었고, 이런 우려의 정서는 여론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006년 5월에 파타, 하마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이슬람지하드 등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주요 조직의 지도자 다섯 명이 〈수감자 문서〉를 발표했다. 두 국가 해법을 토대로 삼은 새로운 강령에 기반해서 정파 분열을 끝내자고 호소하는 문서였다." "연립정부를 구성하려는 이런 노력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두 나라는 하마스가 자치당국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서구와 아랍의 재정 지원자들이 파타에게 하마스를 멀리하라고 가한 압력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에 속한 파타의 베테랑들에게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다. 애당초 그들은 라말라의 금박 거품 속에서 누리는 물질적 혜택이나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훨씬 강력한 적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험에 내맡기기보다는 팔레스타인 정치 체제가 분열로 무너지는 쪽을 선호했다."(316-8)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전면적인 포위에 나섰다. 가자 지구에 들어오는 물자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정기적인 수출은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연료 공급이 차단되었고, 가자 출입은 극히 드물게 허용되었다. 가자는 사실상 지붕 뚫린 감옥이 되었다. 2018년에 이르면 200만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53퍼센트가 빈곤 상태에서 살았고, 실업률은 무려 52퍼센트로, 청년과 여성은 훨씬 높은 수치였다. 국제사회가 하마스의 선거 승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사태는 팔레스타인의 파국적인 분열과 가자 봉쇄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의 연속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새로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공공연한 전쟁을 국제적으로 은폐하는 가림막을 제공했다." "세 차례의 대규모 공격(2008, 2012, 2014년)에서 나타난 43:1이라는 일방적인 사상자 비율과, 이스라엘 사망자의 대부분이 군인인 반면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대다수가 민간인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319)


"팔레스타인 문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화해에 관한 한, 미국의 주요한 전략적·경제적 이해가 전혀 없어 보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반대를 상쇄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듯하다. 트루먼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은 이런 반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기를 원치 않았고, 따라서 대체로 이스라엘이 진행 속도를 정하고 심지어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인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미국의 입장까지 결정하도록 놔두었다." "게다가 중동은 오랫동안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집중된 독재 정권의 통치를 받아 왔다. 이런 비민주적 정권들은 역사적으로 방위, 항공, 석유, 금융, 부동산 산업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롯한 소중한 후원자들에게 영합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국의 친팔레스타인 여론을 무시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지원하는 미국이 어떤 역풍도 맞지 않도록 도와주었다."(332)


결론


"수십 년간 시온주의자들은 종종 국가의 독립 선언을 언급해 가며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이면서 민주국가〉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 정식화에 내재한 모순들이 한층 더 분명해지자 이스라엘의 일부 지도자들은 만약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유대 국가가 우선이라고 인정했다(실제로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2018년 7월, 크네셋은 헌법에 그런 선택을 명문화하면서 〈유대 민족국가에 관한 기본법〉을 채택했다.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민족 자결권을 부여하고 아랍어의 지위를 격하하며, 유대인 정착촌을 다른 요구보다 우선시하는 〈민족적 가치〉로 선언함으로써 이스라엘 시민들 사이에 법적 불평등을 제도화한 법이다. 유대인의 우월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이 법의 발의한 전 법무장과 아옐레트 샤케드는 법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몇 달 전에 솔직하게 이런 주장을 펼쳤다. 「유대 국가라는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을 확고히 유지해야 하는 장소들이 있는데, 때로는 이를 위해 평등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350)


"상황이나 시대가 달랐다면, 18세기나 19세기라면, 원주민을 몰아내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데 대해 오랫동안 저항한 사실을 보면,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말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너무 늦게 도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특유의 분리주의 기획을 이미 앞서 나가고 있는 세계에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세워지면서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력한 민족운동과 번성하는 새로운 민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원주민을 완전히 밀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시온주의는 최종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정착민-식민주의와 원주민의 대결은 세 가지 결과 가운데 하나로 끝났을 뿐이다. 북아메리카에서처럼 토착민이 제거되거나 완전히 정복되는 경우, 극히 드물지만 알제리에서처럼 식민주의가 패배하고 쫓겨나는 경우,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아일랜드에서처럼 타협과 화해의 맥락에서 식민주의의 패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343-4)


"이스라엘이 자신의 기획을 지속하면서 누려 온 이점은 대다수 미국인과 많은 유럽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대결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들 눈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민족국가로 보인다. 비타협적이고 종종 반유대적인 무슬림들(많은 이들은 기독교인이 있든 말든 팔레스타인인을 무슬림으로 뭉뚱그린다)의 비이성적인 적대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이런 이미지가 확산된 것이야말로 시온주의가 거둔 위대한 업적이며 시온주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시온주의가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탈식민적 미래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고 분쟁의 진정한 성격을 분명히 드러낼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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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3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지음, 박수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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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종종 승전국은 패전국에 보상금(indemnity)을 부과했다. 가까운 사례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뒤 신생국가인 독일이 프랑스에 보상금을 부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대부분의 전투와 그에 따른 파괴는 독일 바깥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1919년 파리 강화회의의 강화조약 작성자들은 배상금(repa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뒤이은 협상과 논의에서 패배에 따른 벌금을 내는 대신에 독일은 자국이 입힌 피해에 대한 복구비를 지불하게 되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 1923년 고의적으로 인플레이션을 통해 화폐 가치를 훼손했고, 1931~32년에는 급격한 디플레이션에 의지했다. 그에 따라 독일은 극히 적은 배상금을 지불했다. 승전국은 복구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했고, 국력을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 내부에서는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만과 국가사회주의자가 지지하는 다른 형태의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2)


"1차대전에서 패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수 군인과 일부 정치 지도자들은 독일이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롯한 이른바 체제전복 세력들에 의해 등뒤에서 칼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초래한 패배의 수혜자였던 이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새로운 시스템에는 다수 정당으로 인한 국론 분열도 설 땅이 없다.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는 유일 정당의 단일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가 승리를 보장할 것이다. 이런 메시지로 차츰 지지를 받은 정당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국가사회주의당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이 미래로 가는 길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잃은 자투리땅을 되찾는 것, 자신이 '그렌츠폴리티커(Grenzpolitiker)' 즉 '국경정치인'이라고 부른 이들이 옹호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라움폴리티커(Rarumpolitiker)' 즉 '공간정치인'이 요구한 것처럼 거대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생활공간'을 확보하는 전쟁에 달렸다고 주장했다."23-4)


2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독일 공군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기갑부대가 동원된 작전은 적진을 신속하게 돌파해 진격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폴란드 특유의 지형과 열악한 도로 및 비행장 탓에 군용 장비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이것은 독일군 수뇌부가 폴란드 침공을 준비할 때 고려하지 못한 점이었다. 독일군은 야포 운반을 비롯해 부상자 운송까지 각종 수송을 말에 크게 의존했지만,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독일 육군의 기계화를 강조하는 선전 영화 때문에 이런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 전 독일군에는 폴란드의 성직자와 권력 집단 대부분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최종적으로는 전체 폴란드 인구를 독일인 이주자로 대체할 예정이어서, 저항 세력을 조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빨리 제거해야 했다. 독일군이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일제 검거 작전을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의 폴란드 국민과 상당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39-41)


"독일군의 해상 작전을 지원한 스탈린은, 독일이 우선은 유럽 대륙 북부, 다음에는 서부, 뒤이어 남부에서 연합군을 몰아내는 것을 지원하는 활동이 결국 동부에서 소련이 홀로 독일을 상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원으로 침몰한 연합국 선박을 소련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뒤 바다에서 들어올려 보급품 수송에 이용할 수 없을 것임을 알지 못했다. 결국 스탈린은 독일로부터 일부 해군 장비와 건조가 완료되지 않은 순양함을 얻는 대신에 독일 해군이 무르만스크항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또한 무르만스크 서쪽 북극해에 해군 기지 하나를 제공했으며, 독일군 보조순양함이 태평양에 진입해서 연합국 선박을 격침시키도록 시베리아 북쪽 항로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독일군의 전쟁 활동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철도 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석유와 비철금속, 고무를 비롯한 중요 물자를 동아시아에서 철도를 이용해 공급하는 일이었다."(45)


3 서부 전선: 1940년


"프랑스 정부는 1차대전 때처럼 남서부 항구 도시인 보르도로 소재지를 옮겼다. 필리프 페탱 원수와 피에르 라발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프랑스 해군을 동원해 식민지 제국을 기반으로 싸움을 계속하기보다는 전쟁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휴전 제안을 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에 관한 무솔리니의 요구를 거부하고 프랑스의 모든 해협과 대서양 연안을 포함한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일부 지역만 임시로 페탱의 통솔 아래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었다. 페탱은 독일이 장악한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독일은 새 프랑스 정권과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페탱은 그런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1940년 6월 24일 밤 독일-프랑스 및 이탈리아-프랑스 휴전 협정이 발효되었다. 100만 명이 넘는 프랑스 병력이 독일에 포로로 잡혔다. 소수의 프랑스인이 당시 갓 진급한 샤를 드골 장군의 '자유프랑스운동' 활동에 합류했다."(66-7)


"독일의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가 히틀러로 하여금 1941년 영국 침공을 미루게 했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1940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미루게 했을 것이다. 대규모 독일군 병력이 서부에서 독일 동부와 이미 점령된 폴란드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장비는 수리하고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서부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조치하고 항공기, 전차를 비롯한 무기도 교체하거나 수리해야 했다.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고 동쪽으로 진격할 군대에 물자를 공급해야 할 동부 지역에서는 운송 및 저장 시설도 꼭 개선해야 했다." "1940년 8월 독일의 이같은 준비에 따른 외교적 입장도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핀란드에 대한 정책을 수정했다. 이제는 핀란드를 흡수하는 대신에 소련 공격 때의 지원을 기대했다. 독일은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의 영토 분쟁도 해결했다. 그 결과 루마니아의 영토를 보장하고 독일군을 파병했으며, 대신에 루마니아가 소련 침공에 참여할 것을 기대했다."(73-4)


"한편, 롬멜은 3월 말에 리비아를 공격해서 서둘러 영국군을 이집트로 후퇴시켰다. 4월에 이라크에서 일어난 친추축국 반란은 주로 인도에 주둔하는 영국군에 의해 5월에 진압되었다." "독일이 이라크의 반란 세력에 제공할 수 있는 작은 지원은 비시 정부가 독일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프랑스 위임통치령인 시리아를 통해 제공되었다. 이 일 때문에 영국군은 6월 8일 시리아를 침공했다." "작전상 곧이어 진행할 소련 침공에 집중하던 독일군은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었다. 독일군의 계획상 중동 지역 장악은 소련을 침공한 뒤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가 임박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시리아를 드골에게 넘겼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국군의 승리가 가져온 중요한 효과는 소련으로 가는 남부 보급로가 된 지역이 연합국의 손에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쪽에서 캅카스를 위협하는 추축국의 기지가 되었을 터였다."(82-3)


4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의 소련 침공


"독일이 소련 침공 계획을 수립하던 1940년 여름과 가을, 그리고 1941년 초에 독일군 수뇌부의 전쟁 계획은 여러 가지 가정을 기반으로 했는데 그 대부분이 오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의 겨울에 핀란드군을 상대로 보여준 소련군의 실망스러운 전투력은,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이 악조건 속에서 싸움을 지속했을 뿐 아니라 독일과 그 동맹이 상대할, 이전에는 과소평가된 소련군 전력이 이제는 한층 강력해진 사실을 가렸다." "독일군은 많지도 않고 대체로 상태가 좋지 않은,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작전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온갖 종류의 기갑차량이나 트럭을 위한 예비 부품과 수리 장비 같은 보급 문제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소련을 조기에 제압한 뒤 중동으로 진출할 생각이어서 보충용 전차는 소련군을 물리친 뒤에야 동부에 있는 부대에 보낼 예정이었고, 따라서 이런 전차는 사막용 위장 칠이 되어 있었다."(86-7)


"독일군이 진격하고 점령하던 처음 몇 개월간 독일이 취한 정책의 주요 특징은 해당 지역 소련 주민들에게 아주 명확하고 중요해졌다. 그런 사실은 소문으로 돌거나 여러 수단을 통해 전달되어 다른 지역의 소련 국민들에게도 똑같이 분명해졌다. 독일군은 소련 국민을 대량으로 살육했다. 전쟁 포로를 조직적으로 굶겨 죽였고, 병원과 정신 진료 기관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 포로에게 음식과 물을 주는 주민도 총살했다. 소련 국민들은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점을 즉각 상기했다." "주민들이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든지 상관없이 대개는 자신이 다음 차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42년 봄 개전 첫 7개월 동안 200만 명이 넘는 소련군 전쟁포로가 살해되거나 독일측에 수감된 채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그것은 하루 평균 1만 명에 달하는 수치였다." "독일은 스탈린을 혐오스럽고 두려운 독재자에서 인자한 보호자이자 소련인들의 구원자로 바꿔놓았다."(96-8)


5 일본, 중국과의 전쟁을 확대하다


"1941년 7월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남부를 점령했다. 이것은 남태평양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있는 네덜란드·영국·미국 영토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치로, (역설적으로) 중국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토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말레이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필리핀을 비롯한 태평양 내 미국령 섬을 공격할 세부적인 준비도 진행되었다. 도쿄의 일본 지휘부는 동남아시아에서 빼앗은 유전이나 광산, 고무 농장에서 나온 자원을 일본 본토로 옮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땅을 차지하는 것일 뿐, 물자는 타국에서 빌린 배의 도움 없이 일본 선박으로만 본토로 옮겨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일본이 싸움을 시작할 시점에 매우 중요한 점은 자국의 제한된 선박 운송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거나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진지한 준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111)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중단시켰고, 8월의 과달카날에서는 미군이 반격할 길을 열었다." "다만 전반적인 전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은 일본군의 진격은 비록 중단되었지만 미국이 '유럽 우선' 전략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대신에 작전 가능한 전력 다수를 새로 동원해 1942년 내내 그리고 1943년 초반 몇 개월까지 태평양 전역에 투입시킨 점이다. 이 때문에 지중해와 유럽 전역에서 미군의 작전이 지연되었다. 하지만 추축군은 작전 조율에 실패함으로써 미군의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었다. 일본이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전투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패한 사실을 일본인들이 미완성 상태의 독일 항공모함 그라프체펠린을 구입해 태평양에 투입하기를 바랐을 때에야 독일이 비로소 알아차린 점은 양국 간 조율의 실패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된 통신 활동을 감청한 미국은 독일이 일본의 요청을 거부한 사실에 실망했을 것이다."(125)


6 전세 역전: 1942년 가을~1944년 봄


"1943년 7월 5일 독일은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소련군을 괴멸시키고 동부 전선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치타델 작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며칠간 전선 양 부분에서 격전을 벌인 뒤 앞으로 치고나가 소련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지만 여전히 돌파하지는 못했다. 사상자 수에서 독일군은 비록 소련군에 비해 적었지만 손실된 전력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의미 있는 돌파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작전상 큰 실패를 뜻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공격한 뒤 실행된 소련군의 오룔 지역 공세뿐 아니라 서방 연합군의 시칠리아섬 상륙 소식 때문에 독일군의 공세 종료 시점은 앞당겨졌다. 이때부터 소련군이 주도권을 쥐었고,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독일 본토와 지중해에 분산되어 전력이 약해진 전장에서 제공권을 장악하며 유리한 상황을 활용했다. 소련군의 일련의 대규모 공세로 중부 전선의 독일군은 후퇴해 우크라이나까지 밀려났다. 그해 말에는 레닌그라드 포위도 뚫렸다."(135-7)


"1942~43년에 영미 양국은 독일과 독일이 장악한 유럽에 대한 공습을 대폭 늘렸다." "독일이 대공 방어를 위해 자원을 전용한 사실은 1943년 가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한 공중전에서 전세를 역전시킬지도 몰랐다. 대공포와 더불어 독일군의 전투기 다수는 공격해 오는 폭격기에 점점 더 큰 손실을 입혔다. 손실률이 높은 수준에 이르자 연합군은 작전을 바꿔야 했다. 서유럽에서 완벽한 제공권 장악은 독일의 영국 침공만큼이나 중요한 연합국의 서유럽 공략의 필요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폭격기가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전투기가 호위할 필요성이 F-51 머스탱 전투기의 성공적인 역할과 1944년 2~3월 대규모 공중전까지 이어진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유럽의 전황은 두 가지 사실에 큰 영향을 받았다. 우선은 독일이 1943년 6월 바다에서 패배를 뒤엎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연합국 공군이 그해 가을 직면했었던 문제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142-3)


"모든 전역에서 연합국이 전세를 뒤집은 확실한 표식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쟁 초기에 장악했다가 그때껏 유지하던 지역에서 저항 운동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뿐 아니라 서유럽과 동남부 유럽이 그런 지역이었다." "전세의 확실한 전환은 그때까지 중립을 유지하던 일부 국가의 행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터키는 독일로의 크롬 반출을 줄이고 1945년 2월에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 전투에서 연합국이 아조레스제도를 이용하는 상황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전세 변화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연합국이 적어도 각국의 활동을 조정하려는 의지였다. 회담에서, 그리고 외교적이고 군사적 임무에서 각국은 잦은 논쟁과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했다." "반면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전력을 조율하거나 동맹국과 정보를 공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연합국은 때때로 비밀 정보까지 공유했지만, 추축국은 그러지 않았다."(151-2)


7 각국의 국내 상황과 기술·의료 분야의 발달


"폴란드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나라였다. 독일은 세계 곳곳에 있는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기로 결정했는데, 그에 따라 3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결국 숨거나 추방당한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소련은 많은 유대인을 그냥 추방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가 죽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중앙아시아로 쫓겨났기 때문에 독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독일은 폴란드에서 그리스도교인을 완전히 제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독일군이 쫓겨나기 전, 폴란드 그리스도교인 약 300만 명이 이런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국 이 지역에는 독일계 이주민만 거주하게 되었다. 반면에 소련은 그리스도교든 유대교든 상관없이 모든 폴란드인을 충실한 스탈린 공산주의자로 바꾸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죽거나 추방되는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조치를 1939~41년에 시작했고, 1044~45년 독일군을 내쫓은 뒤 재개했다."(156-7)


"소련도 전쟁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소련인 2500만 명이 살해되거나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국내 소수민족 수백만 명이 침략자에게 부역했거나 부역했을 것이라는 의혹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소련 정권이 국민 단합을 위해 전쟁 기간에 허용한 일시적인 통제 완화는 확대되기보다는 철회될 터였지만, 국제 관계에서 소련이 얻은 새로운 위상에 의해 국민 다수에게는 전반적으로 상쇄되었다. 소련인들에게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은 고국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정부 기관에서 일하던 이들은 이전 전쟁에서 러시아가 처했던 운명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 데서 어떤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영토를 잃기는커녕 얻었고, 유럽의 이웃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지 않고 동유럽과 남동 유럽을 장악했다. 게다가 1905년 일본에 빼앗긴 동아시아의 일부 영토도 되찾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거나 신경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165-6)


8 연합국의 승리: 1944~45년


"1944년 12월 중순에 마지막 예비전력을 동원해 아르덴에서 미군을 공격했다. 벨기에 북부 앤트워프(안트베르펜)의 주요 항구를 탈환하는 가운데 미국 측이 대규모 패배의 충격으로 국내 전선이 무너지면서 유럽 전쟁에서 발을 빼길 기대한 작전이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나고 그에 따라 동부 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 벌지 전투로 알려진 독일군의 공세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일시적으로 미군을 후퇴시켰다. 하지만 미군은 버텼고, 독일군이 병력과 장비를 크게 잃으면서 전세는 대패로 뒤바뀌었다. 1945년 2월 서방 연합군은 대공세를 재개했는데, 독일군이 라인강 서안에 집중하면서 병력 다수를 잃자 연합군은 곧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장애물을 넘어 독일로 향했다."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자 권력을 넘겨받은 되니츠 제독은 5월 8일 무조건 항복을 명령했다. 사소한 예외도 있었지만 독일의 모든 육해공군 부대는 항복 명령에 따랐다."(182-3)


"일본 수뇌부는 미군의 대규모 공습에도 꿈쩍하지 않았지만, 두 번의 핵공격이 벌어지자 어전회의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내부 동요의 가능성과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 가능성을 우려하는 조언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히로히토 일왕은 직접 항복 지시를 내렸다." "연합국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가 더 수월하도록 해주었다. 비록 연합국의 통제를 받을 테지만 일본이 원한다면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겠다고 천명했고, 영국의 제안으로 일왕 대신에 지정된 관료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대신에 히로히토는 왕족을 포함한 특사를 보내 야전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항복하는 것을 돕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도쿄가 구역으로 나뉘는 점령지 분리도 없었다. 미군과 영연방군이 일본을 점령했지만 정부와 행정은 일본인의 손에 남았고,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감독을 받으며 개혁을 했다. 극소수의 일본군이 1970년대까지 저항했지만 대체로 일왕의 항복 명령은 이행되었다."(190-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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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4
스티브 브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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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학의 위상


"좋은 과학 이론은 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를 통해 일상적 추론과 과학적 이론이 즉시 구분된다." "좋은 과학 이론은 증거와 합치해야 한다. 뻔한 소리인 것 같지만, 이런 면에서 과학자들이 마땅히 요구하는 기준은 일반인들이 습관적으로 수용하는 수준에 비해 훨씬 더 엄격하다." "과학적 발견이 절대적·영구적으로 참인 경우는 결코 없다. 과학적 발견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늘 개선의 여지가 있다." "좋은 과학은 주제와 관련된 '광범위한' 자료의 수집을 어떤 설명을 다른 설명으로 대체할 때의 핵심 요건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런 구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엽기적인 생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믿어야 할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훨씬 더 강력한 검증 방법은 믿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다. 좋은 과학에서 가장 설득력 있다고 여기는 개념들은 곧 틀렸음을 입증하려는 반복적인 시도에도 살아남는 개념들이다."(13-5)


"사회과학은 선택에 따라 행위하는, 지각 있는 존재들을 연구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운지에 대한 익숙한 논쟁에 발목 잡힐 필요가 없다. 인간 행위의 획일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든 그 근원들이 전면적인 구속력을 지니는 건 아니라는 점만 인정하면 된다. 아주 억압적인 체제는 우리가 가진 선택지를 순응 아니면 죽음 두 가지로 축소시킬 수 있겠지만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과학의 대상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물은 가열되더라도 증발성을 높이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없다.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한, 물은 나흘 동안은 섭씨 100도에서 끓다가 닷새째에는 그러기를 거부할 수 없다. 인간은 그럴 수 있다. … 화학자는 실험을 통해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면 탐색을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자에게 그건 시작일 뿐이다. 특정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이 항상 특정한 뭔가를 한다는 걸 알아내더라도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할 것이다."(26-7)


"신념이나 가치관, 동기, 의도에 대한 사회학자의 관심에는 자연과학 분야에는 없는 우려가 딸려온다. 바로 인간을 이해하려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그들 자신의 시각이나 진술을 어떤 식으로든 얻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한 단계 전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사회학자는 어떤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해할 만한 사회적 행위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동기에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순간을 규명하기 위해 액체의 정신 상태를 참고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위는 관찰만으로는 알 수 없다. 즉, 물리적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자신과 같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보이는 단순한 행동들에 대해서는 종종 그 의미를 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의 의미를 단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그 사람에게 〈뭐하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뿐이다. 행위를 알아보는 데만도 의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28-9)


"하지만 질문을 던지고 받는 행위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상호작용의 일부다. 사람들이 내놓는 진술은 고의적 허위일 수 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물론 사회학에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불순물에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정보를 걸러내는 간단한 마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법원은 이따금씩 진실에 도달하고, 유능한 심문자들은 모호한 변론에서 구멍을 찾아내며, 연인들은 기만행위를 알아차리고, 여론조사원들은 소위 '순응효과'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낸다. 예컨대 〈다음 중 지난 주말에 한 행동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스포츠, 쇼핑, 친지 방문, 영화 관람 등이 들어간 긴 목록 안에 종교 활동이라는 항목을 끼워넣으면 〈지난 주말에 종교 활동에 참여하셨습니까?〉라고 직접 물을 때마다 종교 활동을 했다는 응답이 적어진다. 사람들의 말에서 진실을 추출하는 단 하나의 확실한 기술이 없다고 해서 예상되는 문제들을 피할 창의적인 방법들을 고안하지 못한 채 늘 실패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29, 34-5)


2 사회적 구성


# 사회학의 기본 전제 : 현실이란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우리의 행동에는 숨겨진 사회적 원인이 있고, 사회적 삶의 많은 부분은 본래 모순적이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생물학에서 출발하는 게 유용하다면, 그건 동물은 삶의 대부분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데 비해 인간은 그렇지 '않은' 정도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학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자기관리의 문제가, 집단 차원에서는 협동의 문제가 생긴다." "아르놀트 겔렌의 말마따나 인간은 '본능의 결핍' 때문에 생긴 틈을 메우기 위해 사회적 틀을 만들어낸다. 그런 틀 중 일부는 형식법으로 정해질 수 있지만 많은 부분은 관습으로 남는다. 그 어떤 법률도 관리직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짙은 색 정장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위직 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옷 입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경우, 구속복은 외부의 신체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에까지 입혀진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사회화되고, 이에 따라 문화의 중요한 요소들이 우리의 성격에 새겨진다."(42-6)


"세상을 실제적인 부분과 상상된 부분으로, 객관적인 외부의 현실과 주관적인 내면의 풍경으로 나누는 건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영역들은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다. 상상에 참여하는 사람이 충분히 많다면 그 상상은 객관적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 지속적이고 억압적이기까지 한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윌리엄 토머스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이라고 정의하면 그 결과는 현실이 된다고 했다. 집에 불이 났다고 믿는 사람은 집에서 도망칠 것이다. 집이 불타 무너지지 않으면 그가 틀렸다는 사실이 입증되겠지만, 그의 행위를 이해할 때 중요한 건 그의 생각이지 진실이 아니다." "단,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공유되는 한에서만 사회적 구성도 효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어낸 것이든 아니든 모두가 그것을 믿는다면 그건 더이상 신념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다. 소수만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그런 견고함을 획득하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남아 있다."(53-5)


"인간은 자신이 속한 문화의 외적 윤곽을 자신의 정신과 성격 속에 복제할 때에 비로소 사회적 존재가 된다."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배우들이 자기 배역을 그냥 대본대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배우들은 실제로 그 배역에 몰입해 살아가는 '메소드 연기자'다. 대본과 무대 지시, 대사 일러주기 등 외부의 도움은 더이상 필수적이지 않다. 배우들은 등장인물 자체가 된다. 사회학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다. 사회학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은 타인이 그를 보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를 서로 맞물린 역할들의 체계라고 설명하면서, 먼저 이 현상을 거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되려면 아들이나 딸이 필요하다. 교사가 되려면 학생이나 제자가 필요하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자녀들이 그를 좋은 아버지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배우자, 자녀의 조부모, 친구, 이웃들)이 그런 관점을 공유해야 한다."(75-6)


"사회적 상호작용이 정체성 형성에 끼치는 중요한 영향 중 한 가지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자기충족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소녀가 방 정리, 약속시간 지키기, 과제 준비물 챙기기 등에 자주 실패하면 그때마다 아버지가 그녀를 '바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이름표 붙이기가 일상적으로 반복되면, 소녀는 자신에 대한 그런 이미지를 내재화할 수 있다. 소녀는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기고 그 배역을 점점 더 충실히 연기한다." "그렇지만 이름표가 붙게 되는 사람도 그저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체성은 '협상'된다. 소녀는 아버지의 뇌리에 박힌 자신의 상을 그냥 받아들이고 거기에 함축된 예상에 부응하는 것 외에도 달리 반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소녀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동등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아이에게는 부모(혹은 부모의 대리인)가 가장 중요한 타자가 되겠지만, 연상의 친구들이나 다른 친척들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77-8)


3 원인과 결과


"사회학이 상식과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우리가 하는 생각과 행위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만족스러운 자아상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을 설명하려면 그가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도 규칙적 패턴이 있어야 하고, 그 패턴은─최소한 부분적으로─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외부의 힘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유와 제약 사이에서 빚어지는 이런 역설을 〈우리는 운명을 만들어나가지만, 우리가 선택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나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깔끔하게 표현했다. 예컨대 나는 일요일 오후에 어디로 차를 타고 갈지 정할 수 있지만, 내가 운전하는 방식은 교통법규나 다른 운전자들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에 더해 우리의 정체성이나 행위의 상당 부분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 사회학자는 규칙적 패턴을 탐색하고 여러 세계를 체계적으로 비교하여 그러한 원인을 조명할 수 있다."(86-7)


"현대인들에게는 부와 교육, 직업을 근거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행위가 진정한 감정에 대한 배신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배우자의 여러 특성을 분석해보면, 사랑과 애정에 근거해 내렸다는 결정들이 정작 선명한 '선택 결혼'의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의식하거나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종교, 인종, 계급, 교육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한다. 부분적으로는 기회의 차이에서 생기는 결과다. 우리는 우리와 유사한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묘한 세뇌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속한 사회집단은 우리를 사회화하여 특정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태도, 말투, 억양, 어휘 등을 다른 것에 비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한다. 선택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지(혹은 어떤 사람을 멀리할지)를 결정하는 요소들은 성실한 중매인이 짝을 맺어줄 때 고려할 법한 요소들과 거의 같다."(88-9)


"사회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 요소는 비의도적 결과다.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즈가 간결하게 표현했듯, 〈쥐들과 인간들이 최선을 다해 세운 계획은 자주 잘못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겠다고 작정하지만, 작동 중인 힘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늘 예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아주 다른 무언가를 달성하게 된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독일에서 좌파 정치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로베르트 미헬스는 좌파 노동조합과 정당들이 진화할 때 나타나는 공통적 패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런 조직들은 모두 세상을 재구성하겠다는 급진적 시도로서 시작되지만 점차 보수화되어 현실과 화해했다." "겉보기에는 다른 영역이지만, H. 리서츠 니버가 보수주의 개신교 분파들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했다. 18세기 후반의 감리교 운동은 급진적이었다. 초기에 이들은 세상의 재건을 설교했지만 점차 사회적으로 보수화됐다."(93-4)


"이런 사례들은 인간의 성찰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곤 한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을 때, 혹은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변화하고 싶지 않을 때 자신을 위로할 목적으로 사회학적 설명을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실수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을 통해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미헬스의 결론은 흔히 과두제의 철칙이라 불리고 니버의 주장은 사회 진화의 기본 법칙을 미헬스와 비슷하게 발견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것들은 자연과학적 법칙이 아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무정부주의자들은 타협과 사회적 존중을 향한 인력(引力)을 회피할 수 있다. 급진적 정치운동은, 결과적으로 그 운동의 파멸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최초의 에토스에 계속 충실을 기할 수 있다. 분파들은 종파로서의 체면을 향한 인력에 저항할 수 있다." "브롬화물은 항상 부롬화물이 작용하는 방식대로 작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을 할지 생각할 수 있다."(98-100)


4 현대


"사회학은 관찰 대상이 되는 세계와 거리를 둔 객관적 학문인 동시에, 자신이 설명하는 대상의 징후이기도 하다. 과학에 청교도들이 끼친 영향을 연구한 로버트 머튼은 처음에는 유대교가, 다음에는 기독교가 합리화를 이끈 힘이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할 때가 많은) 여러 신들 대신에 단 하나의 신만 상정하되 그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결국 종말로 이끌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는 별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제한을 둠으로써, 세상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고 가정하고 물질세계에 대한 과학적 태도를 허용했다. 더욱이 체계적인 연구를 저해하는 방식으로 물질세계 자체를 신성시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권위가 거부된 이후, 과학자들은 종교적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을 추구할 수 있었다. 머튼에 따르면, 현대 과학이 가능해진 것은 기계사용에서의 기술적 진보보다(이 역시 중요하긴 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덕분이었다."(102-3)


"사회학이 하필 이 시기에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 14세기 아랍 철학자 이븐 할둔과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 및 역사 관련 저술을 하면서 사회학적 관찰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통해 현대 사회학자들이 승인할 수 있는 학문적 업적이 확인된 것은 18세기 말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애덤 퍼거슨에 이르러서야 일어난 일이다." "일관적·총괄적인 문화, 소수이지만 강력한 사회 제도, 그 제도들을 신의 권위로 떠받치는 종교가 있는 전통 사회에서는 세상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 문화가 아주 다른 외국으로 여행을 간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이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사회적 세계가 너무 견고해서 상대주의적 사고는 억제되었다. 전통의 약화, 종교적으로 정당화되는 사회 질서의 쇠퇴, 사회적 다양성의 증대는 모두 사회학의 필수적 전제조건이었다."(103-4)


"로버트 머튼에 따르면, 사회에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두 영역, 즉 문화와 사회 구조가 있다. 문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지시한다. 구조는 권력, 부, 지위를 배분한다. 전통 사회는 구조가 위계적이었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쪽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무력하고 가난했으며, 문화는 그런 격차를 정당화했다.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삶에서 아주 다른 것들을 기대하고 각자의 분수에 맞는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얻는 것은 균형을 이루었다." "현대 사회 체제의 핵심에 갈등이 뿌리내리게 되는 건 문화와 사회 구조가 더이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민주적이다. 물질적 성공이라는 목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열망의 평등은 기회의 평등과 어우러지지 않는다. 실력주의라는 수사는 모두에게 같은 것을 원하도록 장려하지만, 계급 구조의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적법하게 목표를 이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127-8)


"안정적인 사회들은 대부분의 일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방식대로 돌아간다는 합의를 깔고 있다. 사회적 절차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정당화하는 단일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보편적이고 열정적으로 수용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응분의 보상을 정당하게 받는다는 전반적인 느낌은 어느 정도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현대 세계의 중심적 특징인 평등주의적 충동은 눈에 띄는 삶의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한다. 실력주의가 현실이라기보다 소망으로만 남아 있는 한, 어떤 해우이에 동참하라고 독려받았으되 받아야 할 몫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응당 자기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취하게 된다." "인간 욕망의 무한성을 감안하면, 모든 것을 가진 사람도 여전히 좀더 많은 것을 원할 수 있다. 세속적인 성공을 강조하는 동시에 개인의 권리를 공동체의 이득보다 우선시하는 문화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객관적 지위와는 별개로 박탈감을 느끼게 만든다."(132-3)


"포스트모더니티는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발전상을 가정한다. 즉,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요성 하락과 개인적 선호 및 정체성의 중요성 증가다." "일부 사람들에게 개인적 선호는 객관적이고 상호주관적인 현실을 능가하는 카드로 여겨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민족국가가 무력해졌다고도 가정한다. 무역과 금융이 세계화되면서, 경제를 통제하는 국가의 능력은 감소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에서는 고착되고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중요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설명은 심각하게 과장되었다." "위성과 인터넷 덕분에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보는 드라마는 디킨스의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이 우리 시대의 디지털 콘텐츠를 상당 부분 제공한다." "민족국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국가가 무너지는 건 대체로 국가적 정체성이 약회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민족적 소수자들이 그들만의 국가를 원하기 때문이다."(136-9)


5 사회학이 아닌 것


"사회학이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혹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사회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사회학 분야에 속한 사람들도 이를 모르지는 않는다. 이해할 만하지만 그래도 잘못된 생각이다. 이해할 만한다고 말한 것은 사회학의 발전에 기여한 초기 학자들 중 다수가 사회적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사회학에 필수적인 가치(정직성, 명확성, 성실성 등)와 제쳐두어야 하는 학문 외적 관심사를 구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에만 생산적인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사회학 강의를 하다보면 학생들이 사회적 문제와 사회학적 문제를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흔히 보인다. 연구 프로젝트의 주제를 선택하라고 하면, 학생들은 거의 틀림없이 세계의 어떤 나쁜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노숙자나 알코올 중독이나 가정폭력에 대해 '뭔가 하고' 싶어한다. '한다'는 탄력 없는 동사야말로 설명과 개선을 혼동하는 뚜렷한 증상이다."(148-51)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는 원칙을 벗어나면 특히 쉽게 무너진다. 핵심적 원칙을 오해하면 틀림없이 당파성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현실이 인간의 산물, 즉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면 인지와 객관적 현실 사이의 확고한 연결이 약화되고 우리 자신이 하는 진술과 설명에 대해 취하는 입장도 의문시하게 된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이 사태를 보는 방식도 그들의 공통적인 이해관계에 엄청나게 좌우된다는 점을 지적하게 된다. 이는 (밀접하게 연관될 수는 있겠지만) 정직성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거짓말보다 미묘한 뭔가에 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신봉자들이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점에서 시치미떼기와 구별된다. 청소년 임신율이 높아진 건 무신론자들이 공립학교에서의 기도를 금지한 결과라고 주장하는(일단 이런 주장이 오해라고 해보자)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도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신념에서 영향을 받아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된 것이다."(157-8)


"자신의 시각을 정확한 것으로, 타인의 시각을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싶은 충동이 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학은 이데올로기가 갈수록 많은 사회집단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그런 충동을 방해한다. 1960년대에는 의사나 변호사 등이 장기간의 훈련을 통해 전문성을 획득하고 외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우며(동료가 임무를 태만히 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의사뿐이다) 직업상의 신규 진입을 통제할 수 있고 높은 수준의 보상을 누린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전문직을 여타 직업과 구별하기 일쑤였다.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접근을 제한하여 보상을 높이려는 다른 형태의 (기계공업 같은) 숙련노동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그어졌다. 전문직 종사자들은 어떤 높은 차원의 사회적 선(예컨대 보건이나 정의)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그런 행위를 해도 정당화되었다. 엔지니어들이 그런 행위를 하면 직업에 대한 부당한 제약으로 여겨졌고, 많은 국가에서는 그런 행위를 불법화했다."(158-9)


"당파주의자들을 변호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은 민족 연구와 여성학 분야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 분야에서 주장하는 것은 객관성의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객관성이 사회학적 기획을 방해한다는 얘기다. 그들은 설명하려면 일단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려면 일단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흑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오직 흑인만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오직 여성만이 다른 여성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의심하게 되는 타당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주장이 공평하게 제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회학자들은 오직 귀족만이 귀족정을 유용하게 연구할 수 있다거나 파시스트만이 파시즘을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의 특별한 주장은 연구자 자신에 의해서거나 연구자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만 제기된다. 많은 경우 이는 그저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법일 뿐이다. 미덕을 과시하는 일이다."(161-2)


"이데올로기적 오염의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응답이 노골적인 당파성이라면 또다른 응답은 상대주의이다." "문화연구에서 상대주의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가나 화가로서의 전문적 기술을 비교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제인 오스틴이 애거서 크리스티보다 좋은 작가이고 존 컨스터블이 잭 비트리아노보다 나은 화가인지는 대체로 취향에 달린 문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위계가 취향의 위계를 만들어낸다. 특정 계급이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결정한다. 1950년대 영국에서는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안다〉는 표현이 교육 수준이 낮은 전형적인 하위 계급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종의 농담이었다. 1990년대에는 이것이 숭고한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표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사고와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모든 이에게 믿고 싶은 것을 믿을 권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어떤 믿음은 틀렸다고 주장할 권리도 주어야 한다."(168-70)


"상대주의에 대한 종합적 반박은 창조와 발견을 구별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설명과 이론이 사회적 구성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설명이나 이론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사실은 창조해낸 것들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뉴턴은 '중력'을 발견했지만, 그의 지적 활동 전에도 사람들은 지표면에 발을 붙이고 사는 데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중력을 발견한 것이다. 또다른 반격은 사회적 설명들이 한낱 내러티브일 뿐이라는(또한 모든 내러티브는 동등하다는) 상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사회학자들은 증거에 대해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합의 자체가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뭔가에 합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저 바깥에 진짜 세계가 우리의 믿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못해도 개인적 선호를 표현하는 것 이상의 방식으로 그 세계를 탐사하고 싶은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171)


"문화적·사회적 경계를 넘어서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상대주의에 대한 이런 반응이 어려운 것은 교전수칙 자체를 거부하는 상대주의자들이 이런 응답에도 별다른 감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전면적 거부를 넘어 합의에 이르는 최선의 응답은, 상대주의자들에게 그들 자신은 한결같이 그들이 공언한 철학적 입장에 걸맞게 행동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분명 그들은 그렇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책을 쓰고 강연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주장을 전하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들 스스로 처방한 약을 약효가 발휘될 만큼 충분히 복용했다면, 그들은 장사를 집어치워야 한다. 어떤 책도 다른 책보다 낫지 않다면, 왜 그런 주장을 펴겠다고(그것도 누차) 나무를 베는가? 오류로부터 진실을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시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가?"(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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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8
벤체 나너이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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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미학을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술가와 음악가, 하물며 철학자들까지. 이것은 미학의 대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며 그런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미학의 영역은, 고급·저급에 관계없이 예술의 영역보다 훨씬 넓으며 우리가 살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것을 아우른다." "미학은 어느 예술품이 훌륭한지 말해주지 않는다. 어느 경험이 가치 있는지, 가령 거리에서 쇼팽을 듣는 경험이 가치 있는지 아니면 연주회에서 쇼팽을 듣는 경험이 가치 있는지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험이 당신에게 가치 있다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경험은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미적 쾌감을 얻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미학은 어느 경험이 용인되는지를 가르쳐주는 휴대용 도감이 아니다. 미적 쾌감을 찾도록 안내해주는 지도도 아니다. 미학은 가치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석하는 방편이다. 미학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10-11)


2 섹스와 마약, 로큰롤


"미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경험은 어찌 보면 각양각색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경험뿐 아니라 유튜브에서 '극장골' 장면 모음을 보거나 신고 나갈 구두를 고르는 경험, 커피 메이커를 조리대 어디에 둘지를 결정하는 경험도 미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모든 경험의 공통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서도 안 된다. 철학자들은 예술에 대한 경험을 마약을 통한 경험이나 성적 흥분의 경험과 (또 '로큰롤rock 'n' roll'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대로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것과 같은 쾌락 경험 일반과도) 곧잘 구분한다. 이런 전통적 미학관에 따르면 우리는 미적인 것과 비非미적인 것 사이에 어떻게든 선을 그어 섹스와 마약은 배제하고 헤어스타일과 음악은 용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미학에 접근하는 기존 방법들을 우리가 살펴보면 미적인 것과 비非미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18-9)


"미학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통념은 그것이 아름다움을 다룬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어떤 것은 아름답고, 또 어떤 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면 미학은 우리가 그것들을 구분하게 도와주고, 나아가 아름다운 것이 왜 아름다운지도 설명해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미용실 접근법'이라고 부르는데, 미용 산업에서는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름답지 않은지의 개념이 상당히 명확하기 때문이다." "미용실 접근법은 섹스와 마약, 로큰롤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미적 경험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다. 하지만 마약을 통한 경험이나 성적 경험, 로큰롤의 경험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경험들은 미적으로 여겨질 수 없다." "미용실 접근법의 진짜 문제는 고상한 척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런 경계선을 긋는다는 사실 자체다. 아름다움은 시대와 맥락, 관찰자가 바뀌어도 늘 한결같은 대상의 특성이 아니라는 말이다."(20-1)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의 차이를 따질 때 자주 등장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즐거움이다. 요컨대 미학은 즐거움을 다룬다." "심리학자는 즐거움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중 첫째는 불쾌한 것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안도의 즐거움'이다. 안도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불쾌한 상황이 끝났을 때의 즐거움은 안도의 순간을 나타낸다. 그리고 안도의 즐거움은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가 될 수는 있어도 우리가 그 일을 더 하도록 북돋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북돋는 즐거움'은 지금 하는 일을 우리가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런 즐거움은 안도의 즐거움과 달리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 "이것은 섹스와 마약, 로큰롤의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어떤 성적 활동이나 마약을 통한 활동은 북돋는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섹스와 마약을 무차별로 거부하고 그것들을 미적 활동이라는 엘리트 범주에서 몰아낼 수 없다."(25-7)


"미적 영역을 규정하는 셋째 방법은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요컨대 미적 경험은 곧 감정 경험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감정이 수반하는가? 미적 참여를 할 때 촉발하는 감정은 모두 늘 같은 종류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엇에 참여하고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인가?" "미적 참여의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가령 그랜드캐니언의 경치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에 대한 미적 경험은 각기 매우 다른 감정을 수반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단 하나의 두루뭉술한 감정을 찾겠다는 것은 결국 미학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은폐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미적 참여가 꼭 감정적이기만 할까?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신의 미적 경험을 〈사고나 감정 없이 표류하면서 내 감각에만 주목〉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감정이 뒤서는 친숙한 한 형태의 미적 참여를 가리키는 듯하다. 적어도 이떤 경우의 미적 경험에서는 감각이 감정에 앞선다."(29-33)


"수전 손택은 미적 경험을 초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감정뿐 아니라 분노와 찬동, 나아가 현실적 관심사로부터 초연함, 이것은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을 구분해줄 마지막 유력 후보로, 미적 참여가 (단지 미적 쾌감) '그 자체를 목적'하는 참여임을 뜻한다."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이루려고 그 활동을 하는가, 아니면 오직 그 활동 자체를 위해 그 활동을 하는가? 문학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나는 다른 어떤 목적(시험 통과)을 이루려고 어떤 활동(소설 읽기)을 하는 것이다. 반면 단지 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이 활동은 미적 영역에 더 가깝다. 하지만 미적 경험은 문학 수업 때문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경우 나는 순전히 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데도 그 활동에 미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참여가 덜 미적일 수밖에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중도의 사례들은 '그 자체를 목적하는 것'이 미학의 성배(聖杯)가 아님을 보여준다."(33-5)


3 경험과 주목


"미적인 모든 것의 공통성은 아주 단순한 데 있다. 바로 주목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약을 통한 환각이나 성적 흥분을 경험할 때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걸작을 응시할 때라고 해서 쉽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술품을 감상할 때 으레 예술품의 일부 특성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가령 그림을 볼 때 물감의 균열은 무시하고 그 밖의 표면적 특성에만 주목한다. 균열은 고려 대상에서 배제한다. 바로크 시대에 재건축한 로마네스크양식의 교회를 볼 때는 그 중세적 구조를 완상하기 위해 바로크적 요소는 무시하려고 할 것이다. 이 또한 예술품의 특성 일부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품의 어떤 특성을 주목해야 하고, 어떤 특성을 무시해도 되는지 혹은 적극적으로 배제해도 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정답이나 손쉬운 방법은 없다. 미적 향유의 성패는 주목에 달렸다." "우리는 자신이 미적 참여를 할 때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주목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42, 50-1)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주목한다고 해서 미적 경험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좋은 출발점은 될 수 있다. 제임스 본드는 시한폭탄을 해체하지 못해 초조해한다. 폭탄의 어느 부분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이때 본드는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주목한다."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대한 주목은 자유롭고 제한이 없어야 한다. 궁지에 몰린 제임스 본드는 시한폭탄 해체 방법을 찾으려고 폭탄의 이쪽저쪽을 굉장히 집중해서 주목한다. 본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본드는 여러 특성에 주목하지만 그 모든 특성에 대한 그의 주목은 극도로 예민하다.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이와 정반대 방식으로 주목한다. 특정한 어떤 것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마주한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풍경(화)의 다양한 특성에 주목하지만 어떤 개별적 특성이나 일단의 특성에도 집중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제한 없이 주목하는 것이다."(58-9)


"우리가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으로 주목을 분산할 때, 단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을 때 나는 이런 주목 방식을 '제한 없는 주목'이라고 부르겠다. 고정된 주목은 결국 심신을 지치게 한다. 반면 제한 없는 주목은 정신을, 적어도 지각계(知覺界)를 이완하는 휴식과 같다. 몸이 근력 운동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있듯 지각계도 고정된 주목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있다." "미적 경험이 지각계의 휴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각계에 무리가 가면 미적 경험도 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일 뿐이다. 제한 없는 주목은 특별하다. 제한 없이 주목할 때 우리는 한 그림 속의 무관해 보이는 두 형태를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독립된 두 멜로디가 한 곡에서 멋진 대비를 이루어나가는 방식도 추적할 수 있다. 또 한 요리에 들어간 재료들의 차이점이나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은 이런 주목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60-1)


"미적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이 보는 대상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 질(質)에도 주목한다. 나아가 양자의 관계에도 주목하는데 이 점이 중요하다." "권위에 한번 호소해볼까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도 이와 매우 유사한 견지에서 미적 경험을 묘사했는데, 그에 따르면 〈참된 경험은 현실과의 접촉을 줄이는 동시에 그 접촉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는 데 있다.〉 여기서 경험 대상과의 접촉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경험 대상과 경험 질의 관계에 대한 주목이다." "제한 없고 통제받지 않는 주목이 중요한 이유 하나는 우리가 지각 대상의 특성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 특성에도 자유롭게 주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힘들여 등산길에 오른 당신은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발아래 펼쳐진 들판과 강 등 전망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전망에만 주목할 것 같았으면 아까운 시간을 들여 등산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당신은 성취감에 젖은 자신의 경험에도 주목할 것이다."(65-7)


"산스크리트 미학에서 예술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모든 감각 양상에 몰두하는 다중양상의 경험이다. 산스크리트 미학의 핵심 개념인 라사(Rasa)에서는 미적 주목을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 경험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 가운데 꼽는다." "미적 경험을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은 바로 주목 방식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아름답게 보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주목이다. 그런데 주목은 감정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를 주목함'에 초점을 맞춘 견해에서 초연함과 제한 없음이 미적 영역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배웠으며, 그 중요성을 금지 구역이 거의 없는 자유롭고 제한 없는 주목의 견지에서 정당화할 수 있다." "당신이 먹고 싶어서 토마토를 바라보는 경우라면, 토마토 자체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미적 경험을 하는 경우라면 당신은 토마토뿐 아니라 그 토마토에 대한 자신의 경험에도 주목한다. 나아가 양자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따라서 미적 경험은 투명하지 않다."(68-70)


4 미학과 나


"'서양' 미학 대부분은 박식한 미적 판단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적 판단은 (보통은 스스로, 때로는 타자에게) 특정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우아하다, 흉하다, 역겹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적 참여 대부분은 전혀 이와 같지 않다." "우리가 미적 판단을 내리는 데서 (가령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의 순위를 SNS에 게시하는 데서) 어떤 즐거움을 얻는다면, 이 즐거움은 판단을 공유하는 것과 더 관계있지 실제로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별로 관계없을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친구와 그 영화에 대해 길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에 반해 미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시간적 펼쳐짐은 재미있고 가치 있으며 우리 각자가 모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 펼쳐짐이 미적 판단의 형태에 이를 때도 있는데, 이 때문에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판단보다 경험에 초점을 맞출 때의 큰 이점은 미적인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갖는 개인적 중요성과 절실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76-7)


"더 박식한 미적 판단을 내린다고 해서 더 강렬하고 더 가치 있는 미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강렬하고 가치 있으며 우리 개인에게 소중한 미적 경험을 미학에 대한 논의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미적 판단에만 골몰하느라 그런 경험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판단에 앞서는 것은 오히려 경험이다." "많은 그림이 걸린 전시실에 들어가 주위를 쓱 한번 둘러보라. 전시작 일부는 마음에 들고 나머지는 그저 그럴 것이다. 당신은 어느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모르며, 따라서 아무런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어느 그림에 다가갈지, 어느 그림을 살펴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초기의 호감이다. 우리가 모든 사항을 고려해 박식한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우리가 일찍이 어떤 예술품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특정 예술품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다."(83)


5 미학과 타자


"우리는 사회적 존재며 사회적 측면을 완전히 결여한 미적 상황은 거의 없다. 안타깝게도 '서양' 미학사에서 이루어진 미학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미적 의견 일치와 미적 의견 충돌이라는 한 가지 사안에만 치중했다." "의견 충돌을 해결하는 데 주어진 선택 사항은 딱 두 가지다. 첫째는 서로가 의견 충돌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고 나는 저것을 좋아한다. 누구도 옳지 않다. 아니 우리 둘 다 옳다. 둘째는 우리 가운데 한 명은 명백히 그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선택 사항의 적합성은 어느 사례를 고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문제는 미적 의견 충돌이 (같은 그림을 보면서) '네모나냐 세모나냐'의 의견 충돌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각자의 할머니를 상기시키느냐 아니냐'의 의견 충돌에 더 가까운가다. 그런 까닭에 '서양' 미학의 주요 문헌들 일부는 순전히 '주관적인'(할머니와 관련된) 의견 충돌과 순전히 '객관적인'(모양과 관련된) 의견 충돌을 중재하는 위치에 서려고 시도했다."(92-5)


"이렇듯 미적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규범성(normativity)이다. 규범성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과 관계있다. 우리의 미적 삶도 어떤 점에서는 매우 규범적인 측면이 많다. 나는 지금까지 미학이 어째서 '서양'에 특권을 주어서는 안 되는지 꽤 규범적인 주장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정도 규범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서는, 가령 한 악곡의 연주가 일정한 악곡을 (정해진 음대로) 연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연주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규범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서는 확립된 미적 관행을 이야기하기 곤란할 것이다. '해야' 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미적 영역을 논하는 대목 곳곳에서 불쑥불쑥 등장한다. 하지만 미학은 규범적 학문이 아니며 이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윤리학의 하위 분야 일부는 실제로 규범적 주장을 다루는 듯하다. 하지만 미학은 다르다. 본래 미학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가를 다룬다."(96-7)


"어떤 경험이 미적이게 되는 것은 그 경험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어서가 아니다. 그 경험이 미적이게 되는 것은 당신이 주목하는 방식 때문이다. 주목 방식에는 정확하고 말고가 없다. 경험은 정확하거나 부정확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정확성과 하등 관계 없다." "당신과 나는 같은 예술품이나 풍경을 보더라도 서로 아주 다른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차이를 의견 충돌로 규정하는 것은 (미적 경험보다) 미적 판단을 은근슬쩍 우위에 두는 것이거나 우리에게 미용실 접근법만 강요하는 것과 같다. 당신과 내가 같은 예술품이나 풍경 앞에서 각자 다른 경험을 할 때 발생하는 차이는 중요하다. 그림의 모양에 대한 의견 충돌이나 그림이 누군가의 할머니를 상기시키는지에 대한 의견 충돌보다 훨씬 중요하다. 미적 참여의 사회적 측면을 미적 의견 충돌의 문제로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미학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일상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깨닫기 힘들다."(99-101)


"비교적 겸허한, 그러나 결코 해가 없지 않은 규범성에의 호소는 미적 평가의 보편적 호소와 관계있다. 이것은 일정한 예술품이 당신에게 일정한 반응을 보일 것을 단순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어떤 미적 반응을 보일 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당신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고, 혹은 어쨌든 그래야 한다고 암암리에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견해로, '서양' 미학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칸트 철학의 지적 성취에 경외심을 갖고 공손히 말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이것은 미학의 역사상 가장 오만한 발상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반응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가정하는 것은 인류의 다양성과 그들이 나고 자란 문화 배경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폄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일이 보편적 호소력 혹은 보편적 전달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이 들라치면, 멈춰 서서 내가 '미적 겸손'이라고 부르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102-3)


6 미학과 삶


"19세기에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이라는 발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많다. 예술 작품을 대하는 방법도 많으며, 그 방법 간에 애당초 우열은 없다. 따라서 자기 삶을 예술 작품으로 바꾸라고(혹은 예술 작품처럼 대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도 안 되고 딱히 의미도 없다." "미학과 우리 삶을 관련짓는 또하나의 인기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기 삶과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초연한 관객이 되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19, 20세기에 널리 유행했다." "이런 주목 방식은 역사적·지리적으로 매우 특정한 유형의 미적 경험을 설명해주며, 이런 미적 경험은 관조로 불리는 경험과 상당히 잘 부합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적 경험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이 유럽에서, 가령 20세기 전반기에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적 경험은 초연할 필요도, 관조적일 필요도, 제한 없는 주목을 수반할 필요도 없다."(119-21)


"예상은 우리가 예술에 참여할 때 중대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상에 주목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순수한 놀라움에 내맡기는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자발성이다." "예술품이나 풍경 앞에서 강렬한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마치 처음 보듯 바라본다. 실제로, 적어도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경험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설령 이전에 여러 번 보았더라도 우리가 정말로 감동할 때 그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한 번도 제대로(really)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처음 본다'라는 이 말이 고리타분한 상투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는 그 이상이다.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당신은 그것을 관습적이고 판에 박은─자신과 관련된 특성들을 가려내고 나머지는 무시하는─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특성들도 유의미할 수 있으므로 두루 주목한다. 이렇듯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당신은 제한 없이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128-31)


"무언가를 처음 본다고 느끼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관습적이고 틀에 박힌 모든 방식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이것이 내 흥미를 끄는 차이, 즉 무언가를 바라보는 틀에 박히고 습관적인 방식과 그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다." "십대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노래를 기억하는가? 그 노래는 당신에게 언제나 감동을 주었다. 음, 그 감동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당신은 그 노래를 완전히 소진해버리고 그 노래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때마다 나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래도 다행히 이런 경험은 종종 다시 할 수 있다. 그 노래를 한동안 듣지 않다가 몇 달 뒤에 다시 들으면 이전보다 훨씬 벅찬 감동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이때 당신은 그 노래를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다. 습관과 관성은 사라진다." "습관은 당신을 무뎌지게 한다. 하지만 당신은 예술의 도움으로 습관을 버리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132-3)


"미적인 것은 또다른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미적 경험은 지속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 효과는 아직 탐구가 덜 이루어진, 예술 항유의 한 가지 독특한 측면이다. 예술 향유는 지속한다. 온종일 미술관에 있다가 나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당신 눈에는 칙칙한 버스정류장이 그 미술관에서 본 어느 그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연주회나 극장에서 멋지 작품을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흉하고 우중충하고 지저분한 거리 풍경이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미적 참여에서 주목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의 이점 하나는 이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술은 당신이 주목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심적 주목 상태는 돌연 중단되지 않는다. 지속한다." "다시 말해 예술은 당신에게 본다는 것의 순수한 즐거움을 되찾아줄 수 있다. 무엇을 보는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볼 수 있게 해준다."(134-6)


7 범세계 미학


"전통적 미학관에 따르면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보편자를 다룬다. 다시 말해 미학은 우리가 예술품과 그 밖의 미적 대상에 참여하는 방식을 우리의 문화 배경과 무관하게 탐구한다는 것이다. 미학자들이 미술사가들에게 곧잘 비난받는 것은 바로 이런 문화 보편주의 때문이다. 신경 과학에 오염된 최신 유행의 미학 연구는 미학의 이런 보편주의를 한층 더 강력히 밀어붙이는데, 그 목적은 다양한 형태의 미적 감상 가운데서 신경 상관자(neural correlates)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 감상 주체의 문화 배경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마음의 경험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이로부터 얻는 실질적 가르침은 문화 보편주의를 완전히 단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각에 미치는 풍부한 하향식 영향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과 신념이 우리가 어떤 문화와 어떤 시대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지각도 우리가 어떤 문화와 어떤 시대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140)


"문제는 지각에 미치는 하향식 영향이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과정에 따라 매개되느냐다. 나는 그 매개 기제로 두 가지를 들 텐데, 하나는 주목이고 또 하나는 심상이다. 주목과 심상은 둘 다 신념이나 지식과 같은 우리의 고차적 정신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편 양자는 모두 우리의 지각과 미적 참여에 영향을 준다. 달리 말해 주목과 심상에는 문화 간 편차가 있다. 따라서 미적 참여에서 주목과 심상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이것은 미적 참여에도 틀림없이 문화 간 편차가 있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한 우리는 보편주의 노선을 택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미적 참여가 현지의 인공품 제작자가 의도한, 또 그 사용자가 행한 참여와 같으리라고 가정할 수 없다." "즉, 인공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하는지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인공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커다란 문화 간 편차가 있음을 뜻한다."(140-1)


"낯선 문화와 그 문화의 예술 제작 양식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낯선 문화를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 문화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미적 경험의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타 문화의 한갓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겸손한 미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늘 자신이 견지하는 문화적 관점을 의식하고 자신의 미적 평가를 겸손하게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의 평가는 매우 특수한 문화적 관점에서 기인한 하나의 평가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미학과 관련해 오만한 태도를 취하기 쉬운데 이것은 미학이 우리 개인에게 갖는 중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미적 평가를 내릴 때 한층 더 신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더 많은 미적 겸손이 필요하다."(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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