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테러리즘 - 중동의 새로운 질서와 IS의 탄생
홍준범 지음 / 청아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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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스라엘 건국과 아랍 민족의 대응


"1881년 3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가두에서 한 젊은이가 던진 폭탄으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사망했다. 러시아 정부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 유대계라는 이유로 러시아 거주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남부 러시아 칼호프 지방과 우크라이나까지 유대인 학살이 확산되었고, 차르 제정은 1882년에 소위 '5월 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을 박해했다. 1882년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서는 유대교도를 비밀리에 셋으로 분류해, 3분의 1은 물리적 제거, 3분의 1은 국외 추방의 대상으로 정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차르 제정에 순응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조직적인 유대인 대학살은 포그롬(pogrom, 러시아어로 파괴, 학살)이라 불린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에서 BILU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19세기 말 포그롬은 폴란드로도 파급되었으며 이들 지역에서 제1차 유대인의 귀향(제1차 알리야)이 있었다. 1891년 설립된 유대인 식민협회(ICA)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토지를 매입해서 이민자들에게 배당하고 자본도 융통해 주었다."(24)


# BILU : 이사야서 2장 5절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러 가자(Beit Yaakov Lekhu Ve-nel kha)'의 약성어(略成語)이다.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다. 연합국으로 참전한 영국군이 1917년 오스만 제국의 통치 지역인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군사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어서 1920년 4월 24일,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산레모 조약을 통해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이라크), 트랜스요르단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영국에 부여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서는 같은 해 7월 1일부로 영국 군정(軍政)이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다. 또한 1922년 7월 2일에는 새로 창설된 국제연맹이 영국의 위임통치 결의안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30여 년간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 끝에 결국 한계와 실패를 자인한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생 국제연합(UN)으로 이관하고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에서 자진 철수했다. UN이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를 설립하고자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내놓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32-3)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중동 지역에는 각기 다른 4개의 민족주의가 발생했다. 유대 민족주의, 페르시아 민족주의, 튀르크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캠페인을 공유하면서 발생했으며, 민족적, 종교적으로 대립하면서 성장했다. 유대 민족과 아랍 민족은 영토, 종교, 공동체 등 모든 면에서 분쟁으로 격돌했고, 아랍 민족과 페르시아 민족은 이슬람교를 공유하면서도 시아와 수니의 종파적으로 대립하였으며, 튀르크와 아랍은 이슬람교 수니파라는 종교적 이념을 공유하면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세력다툼으로 분열을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랍 국가들이 독립하자 아랍 민족주의는 신생 국가의 통합 기폭제이자 이스라엘 건국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아랍 국가 간 연합과 통일국가 구성 등에서 실패를 거듭했고, 이스라엘과의 4차례 전쟁에서 연속된 패배와 영토 상실을 겪으면서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다."(38, 43-4)


# 4차례의 중동 전쟁

1. 제1차 중동 전쟁(1948. 5. 16~1949. 3)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식을 계기로 발발한 전쟁.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감되었으나, 아랍 참전국 일부도 전과를 챙겼다. 이스라엘은 UN이 할당한 56%를 넘어 갈릴리 북쪽과 네게브 남쪽, 서예루살렘까지 팔레스타인 땅의 77%를 차지했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 주변 해안 평야를, 요르단은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역을 얻었다.

2. 제2차 중동 전쟁(1956. 10~1957. 5)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개입하면서 발발한 전쟁. 3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으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철수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패배했다. 반면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이집트는 소련의 중동 정책에서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제3차 중동 전쟁(1967. 6. 5~6. 10)

골란 고원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 전쟁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단 6일 만에 정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예루살렘 및 베들레헴을, 시리아는 다마스쿠스를 사정권에 두는 군사 요충지 골란 고원을,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를 잃었다.

4. 제4차 중동 전쟁(1973. 10. 6~10. 25)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이 유대교 축제일인 속죄일(Yom Kippur, 욤 키프르)에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 양상으로 격화되면서, UN 안보리가 즉각 휴전을 촉구했고, 결국 승패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결되었다. 이스라엘에 맞선 OPEC 국가들의 석유 감산 조치는 제1차 석유 파동으로 이어졌다.


제2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팔레스타인 건국


"1964년, 이집트에서 개최된 아랍 연맹 정상회의에서 정상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게릴라전을 동반한 무장투쟁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정규 전쟁으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이스라엘 투쟁의 방법으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라는 정치 조직을 결성하였다." "PLO는 이전에 비밀 저항운동을 전개하던 다양한 팔레스타인 방계 조직의 지도부를 통일했다. 그리고 파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 해방인민민주전선, 검은 구월단 등 PLO 내에서 활동하거나 PLO와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들을 산하 조직으로 두었다." "제3차 중동 전쟁의 패배로 아랍 사회에서는 정규전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더욱 고착되었고, 이를 계기로 1968년 3월 카라메 전투에서 승리하여 '불패의 군대'라는 이스라엘군의 이미지를 불식시킨 타파가 PLO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했다. 1969년에는 파타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 의장에 임명되었다."(69-71)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PLO의 정치적 위상도 크게 향상되었다. 1973년 11얼 알제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담에서는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하고, 1976년 PLO가 아랍연맹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아랍 세계에서 PLO의 정체성은 팔레스타인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기관으로 정착되었다. PLO는 대이스라엘 정책에서도 모든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킨다는 목표를 버리고 서안과 가자 지구를 포함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설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은 자국 영토를 공격하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군대의 본거지를 무력화하고자 레바논을 공격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리비아로 본부를 옮긴 이후 PLO의 대이스라엘 투쟁 양상도 바뀌었다. 해외 이스라엘 시설물 공격을 이스라엘 점령지 내로 변경하고, 투쟁 방식에서도 테러보다는 '인티파다(Intifada, 봉기)'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저항과 반란이 대두된 것이다."(72-3)


"1980년대 들어 PLO가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등 무장투쟁 노선을 완화하고 평화 협상에 참여하자 이에 반발하는 강경파들을 규합하여 조직된 무장 조직이 하마스이다. 1987년 12월,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었던 아메드 야신이 창설하였으며, 그 등장에는 1987년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제1차 인티파다가 촉매제가 되었다." "하마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인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해방 및 이슬람 교리를 원리원칙대로 받드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하마스는 대이스라엘 무장투쟁과 병행하여 빈민가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 팔레스타인 빈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2006년 1월 25일 치러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선에서 132석 가운데 73석을 차지하며 40년 동안 집권해 온 파타당을 누르고 집권당이 되었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집권당인 파타당의 연정 제의를 거부하고, 가자 지구를 무력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다."(75-7)


# 중동 평화 회담

1. 마드리드 평화 회담(다자 회의 1991. 10. 30~11. 1, 양자 회의 1991. 12~1992. 1)

다수의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을 대화 상대로 인정한 최초의 회담. 협정의 핵심은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반대급부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1991년 2월 걸프전 이후 미국이 팔레스타인에게는 땅, 이스라엘에게는 평화를 보장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주도했지만,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2. 오슬로 협정(초안 1993. 9. 13, 자치 협정 1994. 5)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협상 모토가 결실을 맺은 최초의 중동 평화 협정. 주요 합의 내용은 첫째, 이스라엘이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공식 기구로 인정, 둘째,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 시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보장, 셋째,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자치권 인정(외교, 국방 제외), 넷째, 점령지에 대한 영구 지위 협상 지속, 다섯째, 이스라엘군 철수 이후 자치 실행 등이다.

3.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협정(1994. 10)

요르단이 이집트(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를 맺은 회담. 요르단은 이스라엘이 점령해 온 국경 지대 영토를 반환받았고(대신 이스라엘 정착민에게 보상 지급),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에 대한 정치적 발언권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요르단의 동예루살렘 관리권 보장은 이곳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삼으려는 PLO와 여타 팔레스타인 강경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다.

4. 오슬로 협정2(1995. 9. 28)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자치를 확대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속 조약. 그러나 양쪽 모두 내부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혀 합의 사항을 이행할 수 없었다. 특히, 1995년 11월 4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유대인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1996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극우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양측의 관계는 급속도로 경색되었다.

5. 와이리버 협정(1998. 10. 23)과 와이리버 협정2(1999. 9)

미국의 주도로 '땅을 주고 평화를 얻는' 합의를 재진척시킨 협정. 1996년 총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의 40%를 자치영역으로 확보하는 대신, 〈PLO 헌장〉에서 '이스라엘 파괴' 조항을 폐기했다. 그러나 내부 강경파의 반대(암살, 폭탄 테러)로 협정 이행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1999년 9월5일에 협정2를 타결시켰지만 2000년 9월 최종 협상이 결렬되었다.


제3장 중동의 새로운 질서 모색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에 평화 조약(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었고, 양국 간 교전이 중지되었으며,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1982년 4월에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고, 이스라엘 선박은 수에즈 운하와 아카바 항구를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랍 동맹국으로 참전했던 시리아, 요르단 등의 실지 회복 문제가 방치되었고, 중동 평화의 본질인 팔레스타인 영토 문제는 전혀 협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특히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 문제 및 팔레스타인 국가의 자치 문제는 추후 교섭하자는 규정만 있고, 교섭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9년 5월부터 이집트, 이스라엘, 미국 등 3국이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 협의를 시작했으나, 협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점령지 주민들이 참여를 거부하였고, 1980년대 중반까지 10여 차례 더 시도된 자치 협의는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121)


"일찍이 1905년에 발생한 이란의 입헌 혁명은 정치 체제를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등 근대화 추진의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입헌군주제하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크 수상은 1951년 국왕이 영국, 미국 등의 석유 이권을 보호하는 데 반발하여 5월 1일 모든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다." "1953년, 팔레비 왕이 (석유 산업 국유화 조치에 불만을 품은) 미국의 지원으로 샤(Shah, 왕)에 등극한 뒤 모사데크 수상을 축출하였다. 팔레비 국왕은 1963년에는 농지 개혁, 국영 공장의 민영화, 참정권 등의 목표를 내세운 이른바 '백색 혁명'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은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이슬람 사회의 변질을 우려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반정부 운동을 부추겼다. 따라서 미국의 제국주의와 팔레비의 전체주의 정책을 반대하는 성직자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세력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팔레비 왕정의 급격하 서구화가 이란 혁명의 배경이 된 것이다."(126-7)


"이란 혁명의 슬로건은 이슬람적이었다. 이슬람 혁명은 가담한 이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고, 그들이 맞서야 할 적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적시해 주었다. 이 적들은 역사와 법과 전통을 통해서 매우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으니, 대외적으로는 이교도들이며, 국내에서는 배교자들이었다. 물론 혁명에 있어서 배교자란 이슬람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공유하려고 하지 않고, 이교도적인 방식을 들여와서 이슬람 공동체에 살고 있는 신앙과 법을 전복시키려는 세력들을 의미했다. 원칙적으로 이슬람 혁명의 목적은 외세의 지배와 영향을 받던 시기에 이슬람 영토와 국민들에게 강요되었던 모든 이질적이고 이교도적인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알라가 만든 진정한 이슬람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란 혁명에서 유래되고, 영감을 얻고, 맥락을 같이하는 이슬람 혁명운동들은 다른 아랍 국가들에도 전파되었고, 그곳에서 혁명론자들은 권력 쟁취를 위해서 싸우는 경쟁자가 되기도 했다."(128-30)


"이집트 사다트가 1979년 3월 데이스라엘 평화 회담을 조인함에 따라 전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와의 단교를 선언했고, 이로써 이집트의 아랍 내 패권은 사라졌다. 이집트의 추락과 이란의 배신으로 기존의 미국 주도 안보 벨트인 테헤란-리야드-카이로의 축이 붕괴됨으로써 중동에서 미국 등 서방 국가의 위상이 불안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또한 보수 왕정 국가들에서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 붕괴가 도미노처럼 발생할 것을 우려했고, 특히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연안 국가들은 자국으로 혁명이 확산될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국민 60%가 시아파인 이라크에도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1979년 7월 이후 정권을 잡은 사담 후세인은 혁명으로 인한 이란의 군사력 약화와 사다트의 대이스라엘 평화 회담이 남긴 아랍 지도력의 공백이야말로 중동 지역에서 이라크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8년간 지속될 이란-이라크 전쟁(1980. 9. 22~1988. 8. 20)의 출발점이었다."(135)


"걸프 협력회의(GCC)는 1981년 5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에미리트연합 등 걸프 연안 6개 왕정국이 설립한 지역 안보기구이다. 걸프 연안의 산유국들이 정치, 경제, 군사 등 분야에서 협력하여 역내 경제 통합 및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6개국은 석유를 생산, 수출하며,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있다. 또한 세습 왕정 체제를 유지하며, 아랍 민족국가이고, 지리적으로 인접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최상의 결속력을 자랑한다." "사우디는 미국 및 서방과의 안보 협력하에 GCC 회원국 간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구축해 아랍, 중동 국가 안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14년 9월 본격화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IS) 소탕에 아랍연합을 이끌고 참전한 것이나, 이슬람 수니파의 맹주로서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 예멘에서 벌이는 세력다툼에 대규모 공습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등은 중동에서 사우디의 역할과 위상을 잘 보여 주는 예다."(142-5)


제4장 9.11 테러와 미국의 대테러 전쟁


"오사마 빈 라덴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간 무력 침공 후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아프간 인접 국경도시 페샤와르에 거주하며, 소련군에 대항하는 아프간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1988년, 소련의 철수가 논의되고 아프간 전쟁이 끝나갈 무렵, 무자헤딘은 자신들의 전투 경험을 살려 이슬람 지하드를 전 세계로 확장하기를 희망했다. 빈 라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88년 9월 10일,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은 아랍어로 '알 카에다(Al-Qaeda, 근거지, 본부)'라는 명칭의 조직을 공식 창설하기로 결의했다." "알 카에다는 지상(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파), 해상(2000년 예맨 미 해군 군함 폭파), 공중(2001년 미국 뉴욕 9.11 테러) 등 육해공 3곳 모두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한 최초의 조직이다. 테러 활동이 통상 계획, 준비, 실행, 탈출 등 4단계로 구성된다고 볼 때, 자살 테러는 4단계 중 가장 어려운 탈출 단계를 생략해 주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현대 테러리즘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대두되었다."(172-4)


"빈 라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두 명이 있었다. 바로 사우디 킹 압둘 아지즈 대학 재학 시절 수학한 압둘라 아잠 교수이다. 그는 빈 라덴의 막대한 재산을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지원하도록 유도한 사람이며, 지하드의 개념을 폭력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슬람을 배신한 정권과 이교도인 외국의 적에 대해 폭력을 동반한 지하드가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 사상가는 알 카에다의 2인자 이집트인 자와히리이다. 그는 빈 라덴으로 하여금 '유대인과 십자군과의 지하드를 위한 세계 이슬람 전선'이라는 새로운 연합 조직을 결성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었다." "알 카에다는 빈 라덴의 파트와(Fatwa, 교시)를 받들어, 1991년 걸프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사우디의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에 반발해 반미 조직의 성격을 굳혔다. 따라서 알 카에다의 지하디스트들은 각자가 속한 지역에서 미국을 목표로 공격을 가하도록 훈련받았고, 이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9.11 테러이다."(175-6)


"미국은 대아프간 군사 작전을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으로 명명하고, 2001년 10월 7일 밤, 아프가니스탄 전 영토를 대상으로 OEF를 시작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탈레반 정부군과 북부동맹 반군 간의 내전과 미국-탈레반 전쟁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무력 분쟁이 병존하는 전장이 형성되었다." "개전 3개월 만인 2002년 초에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난 것으로 보였다. 탈레반 정권이 항복함으로써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잔존 세력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 되었다. 주요 도시 및 교통망은 미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탈레반 정권이 사실상 와해되고, 전쟁은 탈레반 잔당 소탕작전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02년 6월, 미국은 파슈툰족 출신 하미드 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아프간의 전통적인 토착 세력인 부족회의의 지지를 받지 못한 꼭두각시 정부에 불과했다."(179-81)


"2003년 3월, 아프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이 제2의 테러 전쟁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다. 2개의 태러 전쟁을 동시에 치르게 된 미국은 아프간 전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상당수의 주력 전투 병력을 이라크로 이동 배치했다." "괴멸 직전이었던 탈레반은 미군 전력의 약화를 기회로 다시 재정비에 돌입했다. 전 아프간 총리를 지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이끄는 무장 조직 '헤즈비 이슬라미'와 연대함으로써 전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2009년 1월,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공화당 부시 대통령이 물러나고,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다. 아프간 전쟁이 과연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논란의 중심에 서서 오바마 대통령은 2곳의 전장 중 이라크를 종전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소탕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5월, 전쟁의 목적인 빈 라덴을 처단하는 데 성공한 미국은 탈레반과 2013년 6월부터 전쟁 발발 12년 만에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181-2)


"제2차 걸프 전쟁은 2003년 3월 20일 새벽, 미군과 영국군이 합동으로 이라크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5월 1일, 미국은 개전 40일 만에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종전을 선언하고, 후세인까지 처형했다(2006년 12월 30일). 그러나 기대했던 것처럼 이라크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폭탄 테러와 게릴라전이 난무하는 등 치안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정세 불안은 미군을 8년간이나 더 이라크에 묶어 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으로서는 이라크 내의 고질적인 종파 간, 종족 간 무장 대립을 안정화시키는 데 한계를 절감하였다. 이라크의 치안 불안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쉽게 종결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내분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의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과 이라크 간의 분쟁이 아니라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 아랍인과 20%를 차지하는 쿠르드족 수니파, 15%를 차지하는 수니파 아랍인 간의 분쟁이었다."(191)


제5장 재스민 혁명과 민주화 열풍


"2011년 봄, 중동에서 시민들에 의해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권위주의 체제 및 군주제에 항거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시민 봉기는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2~3개월 사이에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는 놀라운 속도를 보였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26세의 청년 노점상 모함마드 부아지지가 단속 경찰의 폭력에 저항하여 분신자살한 사건이 촉매제가 되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은 23년간 장기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을 몰아냄으로써 중동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2011년 1월에는 이집트로 전파되어 코샤리 혁명을 통해 30년 집권의 무바라크 대통령을 하야시켰으며, 동시에 예멘으로도 확산되어 33년간 집권한 살레 대통령은 국외로 도망가야 했다. 2월에는 리비아로 확대되어 42년을 집권한 카다피를 사살하는 등 그칠 것 없이 번져 갔다. 바레안, 요르단 등 왕정 국가에서도 역사상 최초의 반정부 민중 봉기를 경험했고, 시리아에서는 2011년 3월부터 현재까지 무정부 상태의 내전이 진행 중이다."(199-200)


# Jasmine, 재스민은 '신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튀니지의 국화로 중동 혁명의 상징으로 불린다. 구체적으로는 실업 상태의 20대 젊은이가 길거리에서 물 담배(후카)와 재스민 차를 마시면서 소일하다가 정치적 격변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 Koshary, 코샤리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곡물 가격 인상과 생활수준 저하로 인한 불만을 상징하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22개 아랍 국가 중 단 한 나라도 자유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하지 못한 것이 중동 정치의 실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의 봄 혁명은 아랍인의 새로운 도전으로, 21세기 이슬람 세계의 민주주의를 향한 의미 있는 출발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중동 정치의 현실은 서구 민주주의를 그렇게 쉽게 용인하지 않았다. 2015년 12월 현재, 이집트는 모르시의 민간 정부를 대신해 군부가 쿠데타로 재집권했다. 예멘은 내전으로 다시 남북이 분리될 상황에 놓였으며, 리비아는 500여 개 1,700여 무장단체들이 난립하는 무정부 상태로 변했다. 그나마 혁명의 출발지였던 튀니지만이 유일하게 민간 정부를 구성한 후 모범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룩하고 있다. 문제는 또 다른 갈등 요인인 부족 간, 종파 간 대립으로 무정부 상태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IS)와 같은 극단주의 테러 세력들은 이러한 불안한 정세를 이용하여 발호하고 있다."(200-1)


"아랍의 봄은 다양한 성격으로 분류된다. 이집트와 튀니지는 시민혁명, 리비아는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와 동부 키레나이카를 각각 거점으로 하는 종족 분쟁, 예멘은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파 분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시리아의 경우 초기에는 시민혁명적 성격이었으나, 점차 부족 간 갈등에 따른 내전 양상을 보였고, IS가 등장하면서 전형적인 종파 분쟁 성격이 발현되었다(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이라는 국제정치 측면도 포함)." "시리아 반군이 사분오열되어 있고, 반군 내 주도 세력이 점차 자유 시리안군에서 이슬람 전선, 더 나아가 알 누스라 전선이나 ISIL로 전이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서방 국가들은 우려를 금치 못한다. 자칫 알 아사드 퇴진 이후 이슬람 극단 세력 혹은 알 카에다 방계 세력이 시리아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서방 국가 사이에 확산 중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 아사드 퇴진 가용 수단의 부재 및 향후 불확실성이 맞물려 미국으로서는 뚜렷한 전략을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230, 238)


제6장 중동 테러리즘의 변천사


# 중동 테러리즘의 환경적 분류

1. 종교 테러리즘 : 보편적으로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유일 신앙을 방어하려고 수행한다.

2. 국가 테러리즘 : 정부가 개입하여 수행하는 위로부터의 테러리즘이다.

3. 반체제 테러리즘 : 비국가적 운동이나 집단이 수행하는 아래로부터의 테러리즘이다.

4. 국제 테러리즘 : 국가 경계를 넘어 국제적 이해관계의 상징이라는 가치 때문에 선택된다.


"중동에서 아사신(Order of Assassins)이라는 테러 조직이 있었다. 암살 형제단(Brotherhood of Assasins)이라고도 하며, 11세기 페르시아 왕조 당시 이슬람 이스마일파의 칼리파 알 사바가 조직했다." "설립 초기에 암살단은 페르시아의 도시들, 현재의 이라크, 시리아 및 기독교 십자군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으로 흩어졌다. 아사신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고 상대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십자군에게 정규전 방식으로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장기적으로 테러 전술을 택했다. 암살단은 기만, 비밀 활동, 기습 살해에 능숙했고, 암살(Assassinat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자살 공격 임무도 흔했다. 암살단은 자신들의 대의와 방법론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살해하는 것과 살해당하는 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죽음 뒤에는 천국이 보장되기 때문에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믿음은 오늘날의 수많은 종교적 테러리스트들에게도 전수되고 있다."(256-7)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랍 무슬림 세계의 행동주의는 다양한 지적 국면을 거치면서 발전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학습 현상이 나타났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럽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식민 민족주의, 나세르 사상에 기초한 범아랍 민족주의(나세르주의),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통치 원칙을 채택하고, 종종 자국 정부에 저항하는 세속적인 급진 좌파주의 등이 등장하고 확산되는 추세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새로운 운동이 이전 세대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자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랍 공화정 정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탈냉전 정치 환경에서 해방의 도구로 이슬람을 택하는 것은 필연의 결과였다. 그와 동시에 수니파와 시아파의 이데올로기적인 차별성도 존재하였다. 특히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한 저항에서 별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이슬람 극단주의가 테러에 의존하는 경향은 더욱 확산되었다."(257-8)


"현대에서 대표적인 이슬람 혁명 조직은 사우디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의 세포조직인 알 카에다이다. 알 카에다는 성전(聖戰)을 통하여 전 세계 무슬림을 통합하려 한다. 또한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가진 혁명 조직이 아니며, 추종자들에게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적 테러에 참여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알 카에다를 잘 표현한 것은 '동질적인 이슬람 혁명주의자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알 카에다는 다음 6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영토를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후원을 받지 않는다. 조직의 상하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인종-민족 단체의 대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모호한 정치적 요구를 공표한다. 완성된 종교적 세계관을 가진다.〉 알 카에다의 종교적 성향은 빈 라덴의 분파적 이데올로기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뉴테러리즘(New Terrorism)의 중심적 특징이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은 이러한 전략을 구사한다면 자신들의 의제와 불만이 광범위한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261-3)


"국제 테러리즘은 비대칭전(Asymmetrical Warfare)의 가장 대표적 사례로, 비전통적이고 예기치 못한, 거의 예측이 불가능한 정치적 폭력 행위이다. 테러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비대칭전은 뉴테러리즘의 주요 특징이다. 이론상 비대칭전을 통해 테러리스트들은 새로운 고성능 무기로 예상치 못한 목표를 타격하여 대량살상을 야기하거나 독특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테러 희생자나 대테러 정책 당국의 딜레마는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전술을 통해 전통적인 방어나 억지 정책을 무력화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국제 안보 환경을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각적인 미디어의 관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들도 전 세계적인 주목을 끄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정치적 동기에서 벌인 항공기 납치, 폭탄 테러, 암살, 유괴, 고문, 기타 범죄 행위 등이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경우 상당한 주목을 끌고 더 큰 기회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83)


"아랍의 봄으로 각국에서 무정부 상태, 내전 등 정세 불안이 지속되는 틈을 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들이 발호하고 나섰다. 특히 2014년 6월 이라크에서 이슬람 국가(IS)라는 극단주의 테러 세력이 등장했다." "IS는 요르단 출신의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라크에서 조직한 유일신과 성전(Jamaat al-Tawhid al-Jihad, JTJ)이 모태이며, 이라크 내전 국면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이 조직은 2004년 알 카에다의 지도자 빈 라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2006년 자르카위가 미군 공습으로 사망하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여러 이슬람주의 단체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알 카에다의 자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우선 시리아, 이라크 땅에 이슬람 수니파를 중심으로 신정 체제 칼리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문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지의 자생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IS에 충성을 맹세하고 테러에 동참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297-8)


제7장 이슬람 국가 출현


"IS의 모태조직인 '유일신과 성전'을 통해 지명도를 높이고 조직을 키운 알 자르카위는 이후 이라크 알 카에다(Al-Qaeda in Iraq, AQI)로 조직 이름을 바꾸고, 과거 사담 후세인의 잔당 중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시아파가 이끄는 이라크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이라크 내 최대 반정부 조직으로 송장시켰다. 2006년 6월 7일, 자르카위가 피살 된 후 AQI는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소규모 반정부 투쟁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2011년에 미군이 철수하자 시아파 누리 알 말리키 정권에 대한 수니파의 불만이 거세진 틈을 이용하여 이라크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of Iraq, ISI)로 이름을 바꾸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알 카에다의 일원으로 월경(越境)하여 알 누스라 전선 휘하로 시리아 반군 진영에 가담하여 반아사드 저항운동을 펼쳤다. 시라아 반군 진영에 가담한 ISI는 영역을 확장하여 이라크 시리아(샴 또는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S 또는 ISIL)로 재편했다."(316-7)


"IS의 부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이슬람 정치 세력의 부침과 성격 변화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정권 상실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아랍 통합을 주창했던 아랍 민족주의(Nasserism)와 바티즘(Ba'athism)이 쇠락한 뒤 중동 지역의 지배 이념은 공동화 현상을 겪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함께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이슬람이 부상했다. 이들 이슬람 정파는 크게 지하 투쟁 세력과 제도권 진입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슬람 계열의 여러 정파는 아랍의 봄 혁명으로 인한 정치 변동 국면과 맞물려 대거 수면 위로 부상했다. 선거를 통한 제도권 진입을 시도했으며, 중동 전역에서 이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이슬람의 봉기' 현상이 발현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집권 사례가 바로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출신 모하메드 모르시의 대통령 당선이었으며, 튀니지에서도 이슬람주의 정당 엔 나흐다(En-Nahda)가 부상하는 등 이슬람계 정당들이 도처에서 약진하였다."(319)


"사실상 중동 각처에 잠재해 있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초법적 탄압 수단을 통해 봉쇄하고 있던 주체가 바로 각국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이들 독재 체제의 동시다발적인 붕괴는 곧 권력의 진공상태로 이어졌고, 다양한 이슬람 세력들이 분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가장 극적인 이슬람 집권 사례였던 모르시 정부가 또다시 국방장관 압둘 파타 엘 시시에 의해 붕괴되고 2014년 군부 정권이 재집권하자, 이슬람 정파들 사이에서 분노와 박탈감이 만연했다. 이로써 제도권을 떠나 새로운 투쟁의 전기를 모색했다. 권력을 획득하고자 절차적 정당성, 즉 선거 및 정치 프로세스를 거쳐야 할 이유가 굳이 없으며, 준비되었을 때는 지하드, 즉 무장 투쟁을 통해 이슬람의 이름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폭력 강경론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IS는 무장 투쟁의 자원과 역량을 획득했다는 판단 아래 칼리파 국가 건설을 선언하고, IS가 신의 통치에 기반을 둔 주권국가임을 천명했다."(319-20)


"IS의 이념은 이슬람의 극단적 수니 근본주의(Takfirism, 탁피리즘)를 신봉한다고 할 수 있다. 수니파의 4대 법학 사조 중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 입장을 견지하는 한발리파의 주류보다 더욱 고루한 중세 전통주의를 추종한다. 단순히 종교적 계율과 실행에 있어 전통적, 보수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IS는 투쟁, 곧 지하드 과정에서 일반적인 이슬람의 통념과 전통을 넘어서는 극도의 잔인성과 공포를 통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슬람 주류는 이러한 비주류 극단주의자들을 탁피리스트라 칭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그랜드 무프티(Grand Mufti, 보수적인 이슬람 신학의 최고 권위자에 대한 호칭)조차 이들을 비이슬람으로 간주하고, 금기(Haram)로 규정했다. IS의 잔인성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자 심지어 파키스탄 소재 알 카에다 본부까지 이들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들의 극단주의 노선은 일종의 선명성 확보를 통한 국제사회에서의 존재감 부각 의지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322-3)


# 이슬람 법학에는 하나피파, 한발리파, 말리키파, 샤피이파 등 정통 4대 법학파가 존재하며, 수니파는 이들 모두를 인정한다 .한발리파의 창시자 한발리는 가장 철저한 원리주의자로서, 모든 법리는 신적인 것에 철저히 의존할 것을 주장하며, 꾸란과 하디스의 어구에 따른 해석에만 의존한다. 14세기까지 이라크, 시리아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현재는 사우디와 카타르의 공인 법학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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