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회고록 -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
이해찬 지음 / 돌베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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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당을 정기노선으로 다니는 대형 노선버스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 지방자치 선거를 정기적으로 치러 내야 하는 정치조직입니다. 지향하는 노선이 있어야 하고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내야 합니다. 특정 후보가 선거 때 올라타서 패배하면 버리고 마는 중고 승용차가 아닙니다. 특히 언론, 노조, 시민사회가 취약한 우리나라에서는 정당의 역할과 책임이 매우 큽니다. 2018년 당대표로 취임한 이후 2년 동안 한 일들, 당원이 참여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경선 제도를 정비하며 시스템 공천으로 21대 총선을 치른 것 모두, 국민들의 뜻에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민주적이고 유능한 국민정당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21대 총선의 큰 승리도 그 여정에 있어 하나의 결과일 뿐입니다." "2022년 봄 대선 과정에서 보듯이 선거는 패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패배 이후에도 당과 진영이 흔들리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 내는 것, 그리고 그다음 선거를 준비할 수 있는 힘과 안정감이지요." (7)


"33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온전한 공인(公人)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려면 공인의식(Public Mind)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올바른 공인의식을 가지려면 역사와 현실을 함께 사고하는 사회과학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정치인은 책임과 열정과 균형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막스 베버는 정치인의 덕목으로 열정, 책임감, 균형을 강조했지요. 제 오랜 공직 생활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은, 이런 덕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책과 사안을 다룰 때 경중과 선후와 완급을 가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일이 더 중요한지,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급히 해야 할 일인지 좀 더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할 일인지를 생각해야 실수도 적고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일이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성실한 태도로 끈기 있게 해 나가며, 반드시 이 사안을 꼭 해결하겠다는 절실한 심정이 중요합니다." (8)


"이 책을 준비하고 구술하며 새삼 확인한 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꿈이 모이면 현실이 되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어렵고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꿈을 나누고, 그 꿈을 향해 진실하고 성실하며 절실하게 오늘을 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꿈꾸었던 일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한 하루하루 삶의 축적이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저는 그 꿈이 이루어지는 이야기,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 책에 담고자 했습니다." "2년 가까이 준비하고 구술한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모아 놓고 나니, 참으로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 그 시대를 함께 살아왔고 지금을 함께 사는 분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한 것인지, 그분들이 제 입을 빌려 이야기를 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해찬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려 함께 살아온 모든 분들의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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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세계사 - 나폴레옹 전쟁은 어떻게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는가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지음, 최파일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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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문


"혁명가도 권력에 굶주린 미치광이도 아니었던 보나파르트는 (공화국의 제1통령이라는 직함을 취하면서) 프랑스에 일종의 '민주적 이상들'이라는 외관에 가려진 계몽 전제정을 선사했다. 주권은 인민이 아니라 오로지 통치자에게 있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은 그를 '혁명의 자식'으로 묘사하지만 그를 '계몽주의의 자식'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흔히 가져오는 혼돈과 혼란,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에 인내심이 별로 없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경로를 좌지우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군중에 대한 멸시를 여러차례 공공연히 드러냈다. 혁명 대신 보나파르트는 관용과 법 앞에서의 평등, 합리주의와 강력한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는 전통 안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계몽 전제정의 신조에 충실하게, 그는 자신이 믿기에 인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줌으로써 강한 프랑스 국가를 건설하고자 애썼지만 민주공화정을 끌어안거나 주권을 인민의 의지에 넘긴다는 전망은 결코 제시하지 않았다."(13)


"나의 의도는 1792년과 1815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펼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 진동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반향을 낳았다는 사실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아우스터리츠, 트라팔가르, 라이프치히, 워털루는 모두 나폴레옹 전쟁의 표준적인 역사서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장소들과 더불어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올리언스, 퀸스턴하이츠, 루세, 아슬란두즈, 아사예, 마카오, 오라바이넨, 알렉사드리아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로 파견된 영국 원정군과 이란과 인도양에서의 프랑스-영국의 외교적 책략, 오스만 제국에 대한 프랑스-러시아의 공작, 핀란드를 둘러싼 러시아-스웨덴의 힘겨루기를 다루지 않고는 이 시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17)


1장 혁명적 서곡


"프랑스 혁명전쟁[엄밀하게는 1792년부터 1802년까지 벌어진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들을 지칭한다]에 대한 전통적인 서사는 특정한 패턴을 따른다. 그 서사는 1792년 무렵에서 출발하여, 이웃한 군주정들로부터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프랑스의 노력과, 결국 차례차례 프랑스와의 강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군주정들의 상황을 비롯해 서유럽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법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을 제시하며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의 여러 중요한 사태들, 즉 프랑스의 정치적·군사적 취약성으로 인해 전개된 사태들을 간과한다. 혁명과 혁명전쟁은 프랑스 권력의 허약성을 노출시킨 기존의 정치적 긴장관계 속에서 벌어졌고, 그에 따라 세계 여타 지역에서 유럽 열강의 제국적 야심을 부추겼다. 아닌 게 아니라 동유럽과 남동유럽, 북동태평양 지역, 카리브 해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혁명 전야에 국제 정치와 바다 건너 유럽 본토의 상황에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32-3)


"프랑스 혁명은 일단의 복잡한 정치적·재정적·지적·사회적 문제들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그 기원이 프랑스 외부에서 유래했다. 가장 결정적인 발전상으로는 16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대양 무역의 확립과 17세기 전 세계적인 상업 회로들의 등장이 있다. 둘 다 외교적·군사적·경제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유럽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어났다. 열강은 가공할 함대를 구축하고, 무역 회사를 인가하고, 해외 식민지 팽창을 장려하고,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함으로써 대륙 간 통상에 접근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7년 전쟁(1756~1763) 동안 겪은 정치적·군사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프랑스는 진짜 상업 제국을, 아메리카와 인도양, 아프리카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며, 늘어나는 국제 무역량을 수용하기 위해 급속히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어가던 금융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상업 제국을 보유하고 있었다."(33-4)


"혁명전쟁은 국왕들의 사안이었던 전쟁을 국민들의 사안으로 탈바꿈시켰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거의 중단 없이 이어진 싸움은 국가의 자원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투입되고 소모되는 것을 목격하며 무력 충돌의 지속과 확대를 가능케 했다.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위협은 이 무력 충돌에서 혁명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배경을 이루었다. 프랑스 군대는 점령 지역에서 지금 우리가 〈정권 교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해 광범위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결과들을 가져왔다. 혁명가들은 혁명이 유럽 전역에서 반갑게 맞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혁명가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만약 유럽 군주정들이 〈국왕들의 전쟁〉을 개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인민들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 그들은 왕위에서 쫓겨난 폭군들에 맞서 서로를 끌어안으리라.〉 인류는 임박한 무력 충돌에서 틀림없이 고통을 겪겠지만 혁명가들은 전 세계에 자유를 가져오기 위해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53-4)


2장 18세기 국제 질서


"18세기의 막이 올랐을 때, (유럽 대륙 전체로 확대된 세력 균형의) 평형 상태는 프랑스(에스파냐와 몇몇 독일 국가들에 의해 때로 지지를 받는) 대 오스트리아(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합세한)라는 구도였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이 끝난 뒤에 평형 상태는 더 많은 강대국들을 포함하고 훨씬 넓은 지리적 범위를 아울렀다. 이 전쟁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희생시켜 해상과 식민지에서 영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세력 다툼의 분명한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즉 프랑스보다 두 배가 넘는 전함을 보유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함대가 앞바다에서 중요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고, 물자 보급을 차단하고,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군사력을 대륙에서 봉쇄하는 사이, 영국은 대륙에서 동맹 세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해외에서 군사적·상업적 패권을 확립했다. 1789년에 이르자 영국은 분명히 유럽에서 앞서 나가는 상업, 식민 열강이었다."(58-9)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 치하에서 프로이센의 혜성 같은 등장과 엘리자베타(재위 1740~1762)와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치하에서 러시아의 부상은 오랫동안 서쪽에 있던 유럽의 무게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시켰고, 새로운 '문제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바로 발트해 지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운명을 둘러싼 '북방문제'와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둘러싼 '동방문제'였다. 신흥 강국과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열강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무력 분쟁에서 거듭 좌절을 겪었고, 재정적·정치적 난국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전야에 다섯 국가로 이루어진 명확한 집단이, '강대국'으로 이미 등장했다. 집단적으로,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는 일단 외교술이라는 고상한 수단이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면 전쟁을 통해 유럽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쟁쟁한 한 역사가가 적절하게 평가했듯이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포식자가 될 것인가 먹잇감이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59)


"유럽 열강들 간 경쟁을 개관하는 가장 편리한 출발점은 오스트리아-러시아-오스만 제국 전쟁이 발발한 1787년이다. 이 전쟁은 강대국들 간의 기존 경쟁관계들─유럽 중심부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경쟁관계와 동부에서 러시아-프로이센의 경쟁관계, 남부에서 영국-러시아의 경쟁관계─을 특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그 경쟁관계들을 강화했다. 남동유럽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19세기에 가장 골치 아픈 외교 문제 가운데 하나, 즉 점차 약해지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유럽 국가들 간의 각축전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제의 시초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에서 강화를 중재하려는 프랑스의 시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사안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전통적으로 맡아왔던 역할이었다. 프로이센이 네덜란드 소요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 프랑스의 무능력은, 프랑스가 더 이상 일류 강국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만큼 프랑스 군주정에 굴욕이었다."(73-9)


"영국과 프랑스는 카리브 해역에서도 충돌을 벌였다. 유럽의 통상에 미치는 식민지 생산의 경제적 중요성이 워낙 커서 서인도제도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각국의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식민지 경쟁관계는 혁명으로 불붙은 노예 봉기로 복잡해졌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혁명적 사건들, 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1789년 8월)은 프랑스령 식민지들, 특히 생도맹그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1791년 5월, 자유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재산 자격 기준을 갖춘 모든 남성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프랑스 국민의회의 결정은 생도맹그의 포르토프랭스에서 공공연한 시가전으로 이어졌고, 1791년 11월 초에 이르자 마르티니크의 여러 교구들은 노예 반란으로 들썩였다." "1792년 4월 4일 프랑스 국민의회는 모든 자유 유색인에게 시민권을 확대했고,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얻어내길 희망했다. 그로부터 고작 16일 뒤에 세상을 바꿀 전쟁이 시작되었다."(94-6)


3장 1차 대불동맹전쟁, 1792-1797


"혁명은 위협을 제기했지만, 혁명이 강력한 사상들에 의해 추동되어서가 아니라 그 사상들이 총포를 함께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혁명적 〈의견〉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질타를 받았을 때 영국 총리는 유명한 답변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골방의 의견들이나 학교의 사변들에 맞서 무기를 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장을 한 의견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 정부는 외교정책에서 진심 어린 이상주의를 한껏 드러냈고, 심지어 정복과 영토 확장을 배격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1792년 후반에 이르자, 첫 성공을 맛본 뒤 혁명의 〈자유를 위한 전쟁〉은 이미 더 전통적인 목표들을 향한 무력 충돌로 진화한 상태였다." "혁명의 보편적 원칙들은 많은 이웃나라들로부터 정말로 환영받았지만 그 해방의 수혜자들이 〈프랑스의 살인적인 박애〉의 희생자처럼 느끼기 시작하자 프랑스의 점령은 더 많은 주민들로부터 원망과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104-5)


"1794년 7월에 공안위원회를 전복하고 출범한 프랑스의 신정부는 사방으로부터 공격에 시달렸다. 오른편에서는 왕당파가 군주정을 복귀시키려고 한 반면, 왼편에서는 자코뱅파의 재집권 희망이 계속되는 경제적 문제들로 되살아났다. 총재 정부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다가 왕정주의의 재기로 위협을 받자 다시금 왼쪽으로 돌아갔고, 이러한 정치 스펙트럼의 이동은 다시금 자코뱅주의의 부활을 부추겼다.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총재 정부가 허약하고 부패했으며 국내외 정책과 재정에서 무능했다고 비판해왔고, 이러한 평가는 자연히 보나파르트 장군의 정권 타도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통령 정부와 제정의 핵심적인 제도들이 중앙집권화와 정부 행정의 공고화를 진지하게 추구한 총재 정부 치하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수년간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혼란으로 피로감에 쌓인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극복할 만큼 충분한 공적 신뢰는 받지 못했다."(109-10)


"1797년 10월 17일에 체결된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혁명전쟁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차 대불동맹은 실질적으로 끝장났고 프랑스가 승리했다. 비록 조약은 바타비아(네덜란드) 공화국과 관련한 어떠한 단서 조항도 달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세력권 안에 바타비아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또한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저지대 지방과 북부 이탈리아를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 아래 두어 프랑스를 서유럽의 헤게모니 세력으로 만들었고, 영국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맞수가 되었다. 과거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이오니아제도를 보유할 것을 고집한 보나파르트의 뜻이 관철됨에 따라 프랑스의 이해관계는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뻗게 되었고, 동지중해에서 그 입지가 적잖게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발칸반도, 특히 그리스에 혁명의 이상들을 전파했다. 대체로 파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합의한 조약은 공화국의 일개 군인에서 커다란 정치적 야심을 품은 정치가로서 보나파르트의 부상을 만천하에 과시했다."(114)


4장 라 그랑 나시옹la Grande Nation의 형성, 1797-1802


"1797년부터 1802년까지 5년간은 유럽사의 경로를 그리는 데 결정적이었다. 프랑스의 군사적 승리와 재정상의 시급한 사안들은 새로운 점령지의 정치 사정들과 맞물려서 라 그랑 나시옹이란 관념을 향해 외교정책을 몰아가는 데 일조했다. 라 그랑 나시옹은 타민족을 '압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발상과 프랑스의 국익을 보호한다는 발상을 조화시키려는 관념이었지만, 물론 프랑스의 국익은 현지 애국자들의 열망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입장 변화였는데, 자유와 공화주의라는 초기의 혁명 원칙들을 암묵적으로 뒤엎고 그 대신 프랑스의 더 폭넓은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제국적인 힘의 정치machtpolitik의 요구들을 지지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1797년에 루이 드세 장군은 일기에 보나파르트가 〈이 모든 민족들에게 프랑스 국민이라는 원대한 관념을 부여하는 위대하고 기민한 정책을 갖고 있다〉라고 적었다. 그는 프랑스 최대의 적부터 시작해 지구적 규모로 그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139-41)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은 (영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동시에) 동지중해에서 프랑스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아시아에서 더 큰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을 터였다. 1798년 봄 총재 정부는 취약해 보이고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토양이 비옥한 이집트는 귀중한 상품 공급원이 될 수 있을 듯했다(생도맹그의 상실을 상쇄할 훌륭한 대체물이었다). 그러한 제안들은 고대 이집트의 영화榮華를 되살린다는 〈재문명화〉 임무라는 관념 안에 틀이 짜여 있었다. 이것은 '동방 전제정'에 관한 계몽주의 시대 논쟁들, 그리고 독재와 압제에 맞선 혁명 에토스의 연장이었다. 탈레랑은 총재 정부에 보내는 각서에서 〈이집트는 한때 로마 공화국의 속주였다. 이제 그곳은 프랑스 공화국의 속주가 되어야 한다. 로마 정복은 저 위대한 나라[이집트]에 퇴락의 시대였다. 프랑스 정복은 그 번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자애로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명했다."(147)


"바스티유 습격 이후 고작 9년 만에 북아프리카 바닷가에 프랑스 병사들이 상륙했다는 사실은 혁명이 얼마나 재빨리 프랑스 국경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계도 벗어났는지를 드러낸다. 이집트 원정은 학문과 문화 영역에서 항구적인 유산─이집트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을 남겼지만 본질적으로는 군사적·정치적 실패였다. 원정은 레반트에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책들을 정면으로 위배하며, 영국 식민 권력을 강타하는 대신 프랑스의 전통적 맹방(오스만 제국)이 숙적 러시아와 영국과 손을 잡게 몰아갔다. 정치적으로는 총재 정부의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1798년 후반기에 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도록 촉진했다. 그것은 공화주의 이상들을 식민주의와 영토 확장과 결합하려는 기획의 실패를 의미했다. 이제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이제 인도로의 해상 접근로만이 아니라 아대륙의 인접 영토들을 통한 접근 경로도 고려해야만 했다."(154-5)


"프랑스인들이 도입한 기본 원칙들이 너무 급진적이고 이질적이라 심한 저항에 부딪혔기에 점령 자체는 이집트 사회를 그다지 '근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진공 상태를 만들어냈고, 이 진공은 곧 카발랄리 메메트 알리 파샤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알리 파샤는 프랑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지 10년 안에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세력을 무찌르고, 이후 중동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근대화되고 강한 이집트 국가의 토대를 놓기 시작했다." "이집트 원정이 배태한 오리엔탈리즘은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집트 원정은 이슬람 사회를 유럽의 제국에 편입하려는 최초의 (그 마지막은 아니지만) 근대적 시도를 대변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으로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계기,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성 요소들이 수렴되고, 서구 지배의 온갖 수단들이 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하기 위해 이용되는 계기였다."(155-6)


5장 2차 대불동맹전쟁과 그레이트 게임의 기원들


"프랑스의 활동은 근동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부활시켰지만 영국 정부는 다음 행보를 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윌리엄 그렌빌이 이끄는 외무부는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의 심각성을 경시했다. 그는 유럽에서 대불동맹을 떠받치는 데 더 열성적이었고, 동맹은 프랑스를 저지대 지방에서 축출하기를 원했다. 전쟁부 장관이자 동인도회사 인도 운영위원회 회장이던 헨리 던다스는 이러한 접근법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영국은 제국이며 제국의 전략적·상업적 이해관게를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반면, 유럽에서 프랑스를 억제하는 임무는 대륙 열강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운영위원회는 일단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면 필연적으로 아시아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무력으로 제국을 얻어냈고, 그 제국은 계속해서 무력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수단에 의해 더 우세한 열강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한 동인도회사의 임원은 말했다."(174-5)


"1780년대에 이르자 러시아는 남부 캅카스, 특히 카르틀리-카케티의 에레클레 국왕이 오스만 제국과 이란에 맞서 러시아의 도움을 구하던 동부 조지아에 점차 관심을 보였다. 남부 캅카스는 여러 목적에서 유용한 교두보였고, 〈러시아 땅 끌어 모으기〉는 오랫동안 모스크바 정책의 특징이었다." "러시아의 정계, 상업계, 지성계는 그러한 개입이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여겼는데, 러시아가 서구 열강과 대등하다는 인식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식민지 수립 사업에서 빠져 있었던 러시아는 이제 그 주변부에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열강의 일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비춰볼 때 특히 중요했다. 1795년 이란의 티플리스 유린은 캅카스에서 러시아의 개입에 전환점이었다 그 사건은 동부 조지아와 그 너머에서 러시아 군주정이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추겼기에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구적인 개입에 기여했다."(185-90)


6장 평화의 의례들, 1801-1802


"1799년 10월, 이집트에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파리에 도착했을 때 명확한 계획이 없었지만 현 정부에 맞서 음모를 꾸미는 일단의 정치가들이 그에게 접근해왔다. 스스로가 총재 정부의 일원인 에마뉘엘 시에예스가 주도하는 이 당파는 보나파르트 같은 어수룩한 군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전쟁 영웅인 그의 위상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보나파르트는 결코 어수룩하지 않았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겸손하고 학구적인 시민의 배역을 취하고서, 석학들을 만나고 프랑스 학사원에서 이집트 원정의 학문적 성과에 관해 연설을 하는 등 자신을 지식을 추구하고 지성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곳에서 변화가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고, 어느 한편에 가담하기 전에 모든 정파와 분파를 탐구하면서 정치적 저류─당시 총재 정부에 맞서 꾸며지고 있던 음모는 예닐곱 가지 이상이었던 것 같다─를 면밀히 주시했다."(200-1)


# 1799년 11월 9~10일(브뤼메르 18~19일) 쿠데타


"프랑스에서 통령 정부(1800~1804)는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혁명은 이제 끝났다. 급진적 자취들은 싹 치워졌고,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으며, 망명 귀족들은 귀환이 허락되었다. 화해와 질서 회복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새 정부에 대한 공적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고 보나파르트가 일련의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 개혁 정책들이야말로 그의 경력 가운데 가장 건설적이고 항구적인 유산이었다." "그 과정에서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국민 다수가 새로운 국가수반에게 허락한 무비판적인 승인을 활용하는 다양한 전략에 의존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합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정치 지도자였고, 그런 관행은 20세기에 어디서나 만연하게 된다. 남성 보통선거권과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허울 속에서 보나파르트 정권은 통치받는 대중에게 아무런 실제 권력을 주지 않았고, 그 대신 정치 과정을 솜씨 좋게 형성하고 통제했다."(203-4)


"통령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궁극적으로는 나폴레옹 법전으로 알려지게 된 프랑스 민사법의 집대성이었다." "새로운 법전들의 혁신으로 꼽히는 첫 번째 원칙은 명료성이었다. 수백 가지 면제 조항과 변칙 사항을 둔 관습법에 젖어 있는 법률가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종교를 국가의 사안에서 분리시키는 세속주의였다. 이 원칙에 따라 혼인은 이제 세속적인 민사 계약으로 인식되고 이혼이 허용되며,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개인적·시민적 존재를 위한 길이 닦였다. 세 번째는 절대적이고 침해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개인의 재산권 원칙이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법 앞의 평등 같은) 혁명의 주요 법적 승리들을 유지했지만 가정생활의 영역에서 가부장제로의 후퇴도 의미했다. 재산 소유 중간계급에게 크게 유리하도록 옹호된 사적 소유권의 불가침성은 19세기 내내 프랑스 노동계를 괴롭히게 된다."(206-7)


7장 전쟁으로 가는 길, 1802-1803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영국은 거의 2년 동안 이어진 협상의 성과인 아미앵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지난 6년 동안 프랑스가 대륙에서 정복한 땅과 관련한 쟁점은 논의 자체를 거부했고, 영국이 이 점을 묵인한 것을 고려할 때, 아미앵 조약은 혁명전쟁의 결정적 성과 두 가지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지지했다. 바로 프랑스의 서유럽 지배와 영국의 해상 패권이었다." "아미앵 강화는 혁명전쟁의 공식 종결을 가져왔다. 2차 대불동맹이 이제 누더기가 되었으니 영국은 부활한 프랑스를 쓰러뜨릴 전망이 별로 없음을 시인했고, 그러므로 분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대 지방과 라인란트,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용인한 채 대륙의 현 상태를 대체로 수용했다. 아미앵 조약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완전한 전환을 가져왔고, 윌리엄 피트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로 수립된 국제 체제가 〈완전히 폐지되어 (···) (그것을) 유효한 것처럼 여겨봐야 부질없다〉고 시인해야 했다."(229-36)


"뤼네빌 조약과 아미앵 조약은 대륙의 상황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광범위한 양보는 8년간의 전쟁으로 얻어낸 전략적 이점들을 내주는 것처럼 보였기에 국내에서 우려와 허탈감을 자아냈다. 영국 정치인 오클랜드 경 윌리엄 이든이 지적한 것처럼 물론 그 조약들이 〈지나치고 무시무시하게 비대해진 프랑스 권력〉을 만들어내기는 했다. 영국 혼자서는 그 현실에 도전할 수 없었다. 필요한 것은 시간, 다시 말해 국내의 난제들을 처리할 시간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이 영국 제독 조지 키스 엘핀스톤이 표현한 대로 〈프랑스가 지금처럼 강한 상태로 있는 한 유럽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할 시간이었다. 〈유럽 대륙의 열강이 마침내 이 점을 확신하게 되면 프랑스를 합당한 경계 안으로 되돌아가게 하도록 모두 기꺼이 힘을 합치게 되지 않을까?〉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아미앵 강화는 단명하게 되고, 1802년 말에 이르자 벌써 뚜렷한 긴장의 신호가 보이기 시작했다."(239)


# 뤼네빌 조약 : 1801년 2월 9일에 체결된 프랑스-오스트리아 강화 회담


"한편 생도맹그 원정의 실패─1804년 1월 1일, 아이티 독립 선언─는 프랑스에 즉각적인 결과를 야기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가장 수익성 좋은 식민지와 카리브 해역의 상업 중추를 상실한 셈이었다. 더욱이 생도맹그 대참사는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웅대한 비전을 산산조각 냈다.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새로 수복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보나파르트는 생도맹그를 확고하게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위협과 영국과의 전쟁 재개 전망은 루이지애나 보유가 프랑스에 커다란 짐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한다면 영국이 서반구에서 전리품을 얻을 가능성을 초장에 제거하고, 미국과의 갈등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미국을 장래에 영국의 경쟁자로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보나파르트는 그러므로 뉴올리언스 매입에 관한 미국의 문의에 선뜻 반응했다."(252-4)


# 1803년 5월 2일, 루이지애나 영토 이전 합의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을 해체한) 남독일 국가들에 대한 프랑스의 헤게모니 수립은 군사적·외교적 승리 둘 다의 결과였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의 영토 변경을 좌절시키려고 무력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 보나파르트는 재빨리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에 후한 보상을 제안해 그들과 한편이 되었다. 1801년 프랑스와 러시아의 합의는 남독일에서 프랑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기보다는 그들과 공통의 대의명분을 찾고자 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이 동의하는 게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중유럽에서 오스트리아 권력이 축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자기편이 전혀 없는 오스트리아로서는 물러서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협조를 얻고, 프랑스의 궤도 안으로 중급 규모의 독일 국가들을 끌어당김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 중점을 둔 보나파르트의 외교는 그러므로 독일의 운명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268-9)


8장 파열, 1803


"아미앵 조약이 와해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몰타섬의 미래와 관련이 있었다.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은 몰타의 전략적 가치를 드러냈다. 그 섬은 동방으로 가는 관문이었고, 동방에서 프랑스의 정복은 그곳이 어디이든 간에 영국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터였다." "진짜 장애물은 양측이 몰타의 가치에 눈을 떴다는 사실이었다. 한 영국 장교가 표현한 대로 〈해협들[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의 입구와 시리아 해안으로부터 거의 동일 거리에 위치해, 전쟁 발발시 지중해와 레반트의 무역 전체가 몰타섬 소유자의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몰타는 지중해의 무역을 쉽사리 좌지우지할 수 있을 테고, 파리와 런던 둘 다 두려워하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런던으로서는, 프랑스의 의존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에 희망봉을 넘겨서 인도로 가는 도상의 핵심 지역에 대한 접근권을 이미 상실했다. 영국이 몰타에서 철수한다면 대안 경로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하게 될 터였다."(278-80)


"아미앵 조약의 파기는 근대사의 전환점 가운데 하나다. 전쟁과 참화의 12년 세월을 열었고, 유럽과 그 너머 세계의 운명들을 좌우했다." "보나파르트가 (다른 많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을 혐오했으며 그의 대륙 정책과 식민지 정책이 영국과의 전쟁 결정에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1800년과 1815년 사이에 벌어진 모든 분란에 그 혼자만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기만적인 것 같다." "1800~1803년에 보나파르트의 정책은 지구적 경제 체제에서 전통적인 라이벌에 맞서 프랑스의 지위에 대한 두려움에 뿌리박고 있는 지정학적 논리를 따랐다. 영국의 급속한 산업화, 국제 무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 폐쇄적인 식민지 체제, 우월한 해군력은 프랑스가 시장과 원자재로부터 차단되고, 더 넓은 국제 체제에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전망에 직면함을 의미했다. 프랑스 엘리트 계층은 그러한 우려를 공유했고, 보나파르트의 팽창 정책은 국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누렸다."(300-3)


#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


"그렇다고 보나파르트가 1803년 3월에 시작된 12년간의 유혈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제1통령의 언행은 권력을 향한 강력한 추진력을 가리켰으니, 대륙의 평화를 유지했을 수도 있는 신중함과 유화적 특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실제로 전쟁을, 프로이센 군사 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책의 연장일 뿐〉이라고 봤고,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은 나폴레옹 시대에 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이웃 국가를 최대한 자극하고 찔러보면서, 결국에는 전쟁의 열매를 맺은 원한의 씨앗을 뿌렸다. 개별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프랑스의 행위들은 도발적이었지만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그 행위들은 프랑스가 헤게모니 국가로서 유럽과 해외에서 제국적 구상을 공세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적 현실을 창출했다.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고 느꼈다."(306-7)


9장 코끼리 대 고래 : 프랑스 대 영국의 전쟁, 1803-1804


"영국의 제해권에 도전하기 위해 해군을 증강하는 동안 프랑스는 서유럽을 가능한 한 많이 지배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하노버점령은 영국-프랑스 전쟁 동안 유럽의 정세에서 핵심 지표였다. 선제후령은 10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1803년 한 해에만 프랑스는 1700만 프랑이 넘는 금액을 뜯어갔고, 하노버는 주변국들로부터 다시금 수백만 프랑을 융자해야 했다. 더 중요하게도, 하노버 위기는 유럽 열강에 만연한 태도─상호 불신, 협력의 결여, 지역적 이해관계에 대한 몰두─의 예시이며, 바로 그런 태도가 다음 10년 동안 프랑스가 유럽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비록 북독일은 유럽 열강 모두의 관심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프랑스가 하노버를 침공해 북독일에서 패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협조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1803년 봄 내내 애매모호한 정책을 추구했고 프로이센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스의 하노버 점령을 가능케 했다."(324)


"(보나파르트가 모든 것을 지휘·감독하는) 국가 원수와 총사령관의 권위의 결합은 뚜렷한 이점들을 지녔다. 나폴레옹은 적수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목표를 설정해 외교와 전략을 추구할 수 있었던 반면, 그의 적수들은 동맹전쟁 수행에 따르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 회의나 군주에 의해 종종 손발이 묶였다. 전쟁 수행의 모든 측면을 확고하게 1인이 총괄할 때의 이점은 조타기를 잡은 그 사람이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역사상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로 더욱 커졌다. 정치적·군사적·병참적 그리고 무수한 여타 요인들의 세부 사항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하는 능력은 경이로웠다. 하지만 의사 결정 권한의 극단적인 집중화는 이점과 더불어 대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통신이 속보로 가는 말보다 더 빠르지 않은 시대에 제아무리 유능할지라도 단 한 사람이 방대한 거리에 걸쳐 흔히 널찍이 분리된 전쟁 권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병력을 조율하는 것은 때로 불가능에 가까웠다."(337)


10장 황제의 정복, 1805-1807


"1804년 가을과 1805년 봄 내내 유럽 열강의 외교관들은 프랑스에 맞선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부지런히 오고 갔다. 그러나 주요 열강은 서로의 야심을 의심했고, 일부 국가들은 이미 프랑스에 두 번이나 패퇴한 동맹을 부활시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다." "힘겹게 결성된 3차 대불동맹은 하노버와 북독일에서 프랑스의 철수, 스위스와 네덜란드 독립의 재확립,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복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의 완전한 축출을 원했다. 이것만도 만만찮은 목표였지만 동맹 세력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조약 조항에 따르면 〈여러 국가들의 안보와 독립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향후의 찬탈을 막을 견고한 방벽을 제시하는 유럽 내 질서의 수립〉을 추구했다." "하지만 대불동맹은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프랑스 내 정권 교체를 실시할 생각은 없었다. 동맹국들은 나폴레옹의 대관과 더불어 프랑스의 혁명 급진주의(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위협)는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356-9)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의 승리는 나폴레옹에게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패권을 안겼고 그 지역에서 그는 설득과 압박을 통해 남독일 핵심 국가들(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냈다. 다른 유럽 열강은 그가 거둔 승전들의 규모와 신속함에 깜짝 놀랐다. 이 전역으로 열강이 부활한 프랑스를 패배시킬 만큼 강력한 동맹을 결성하고 주도할 능력이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나마 허레이쇼 넬슨이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의 3분의 2를 섬멸한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가 위안거리였지만, 이 전투는 또한 해양 강국은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 해상에서의 승전들은 잠시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지만 육상에 기반을 둔 강국을 상대할 때 내재한 제약들을 상쇄할 수 없었다." "다음 7년 동안 영국은 나폴레옹과 그의 제국을 몰락시키기 위한 시도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375-80)


"1800~1801년에 그랬던 것처럼 가장 심대한 변화는 독일에서 일어났다. 3차 대불동맹 소멸의 여파로 제국의회가 폐지되자(1806년 1월 20일) 나폴레옹은 독일 국가 재편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개시했다. 3월에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 다스릴 새로운 독일 군소국을 처음 수립했다. 신설된 베르크 대공국은 매부인 뮈라에게 주었다. 더 중요하게도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을 프랑스가 지배하는 독일 정치체로 완전히 탈바꿈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맞선 완충국이자 프랑스 상품을 위한 시장, 제국을 위한 군대 인력의 원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1806년 7월, 독일 제후들이 파리 조약을 수용하고 카를 테오도어 폰 달베르크를 〈대제후〉로, 나폴레옹을 〈수호자〉로 인정하면서 라인연방이 정식으로 구성되었다. 최초의 16개 연방 가입 국가들 가운데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헤센-다름슈타트, 바덴, 베르크는 모두 8월 1일 신성로마제국에서 탈퇴해 사실상 제국에 종말을 고했다."(387)


11장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 유럽과 대륙 봉쇄 체제


"많은 이들이 나폴레옹의 최대 실수로 꼽는 대륙 봉쇄 체제는 나폴레옹이 집권하기 훨씬 전에도 줄곧 시도되었던 전통적 정책들의 지속,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프랑스 배들이 트라팔가르만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야심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여전히 실현될 수 없었고, 프랑스 상선 자원은 꾸준히 감소했으며, 프랑스 산업가들은 영국과의 경쟁에서 확연히 뒤처졌으니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으로부터 브리튼제도의 효과적인 고립만이 영국을 굴복시킬 유일한 수단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 상품은 일체 통과할 수 없는 [무역] 장벽 뒤로 프랑스가 대륙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그에 따른 시장의 상실은 영국 경제에 처참한 타격을 입히고 어쩌면 국내의 정치적·사회적 소요를 야기해 나라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을 터였다. 반대로 유럽 대륙을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종속시킴으로써, 이 체제는 제국에도 큰 혜택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다."(412-4)


"대륙 봉쇄 체제는 고작 6년만 존속해, 영국을 굴복시키기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실패 원인은 이 체제를 충분히 긴 기간 동안 철저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 있다. 실패를 야기한 요인들은 첫째, 에스파냐에서 나폴레옹의 패착과 더 중요하게도 러시아에서의 패착은 이 체제에 결정타를 가했다. 둘째, 영국의 국가적·경제적 안보는 봉쇄에 대처해 스스로를 조정한 영국 재정 시스템의 유연성 덕분에 진정으로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해군은 영국의 제해권을 위협하거나 유럽 대륙에서 영국 상품을 배제할 수 있는 봉쇄를 실효적으로 강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대륙 봉쇄 체제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영국이 프랑스의 해외 시장 접근을 막고 여타 지역에서 상품 판매를 늘림으로써 유럽 시장의 상실을 부분적으로 상쇄할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경제의 최악의 시기는 유럽과 미국 둘 다에 대해 수출이 막혔던 1810~1811년에 발생했다."(421-2)


"대륙 봉쇄 체제는 심대한 무역 교란, 산업에서 농업으로의 대규모 자본 이동, 사회적 불안과 인력 손실, 전쟁과 전쟁이 초래한 격변으로 인한 자본 파괴를 이미 경험한 유럽 일부 지역에서 산업 공동화에 일조했다. 또한 대륙 상당 부분을 영국과의 활발한 교류로부터 고립시키고, 신기술과 공법의 유입을 저해해 일부 산업들은 영구적인 쇠락이 야기되었다." "대륙 봉쇄 체제가 설치한 보호 장벽은 대륙의 산업이 성숙할 만큼 오래가지 못했고, 그래서 1814~1815년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관세 폐지와 시장 개방으로 대륙의 산업 부문들이 영국의 경쟁자들로부터 심한 타격을 받으면서 극심한 경제위기가 초래되었다." "경제적 고통은 결국에는 나폴레옹의 전 유럽 지배의 꿈을 끝장낸 민족주의 부흥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대륙 전역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궁핍에 일조한다고 대륙 봉쇄 체제를 비난했다. 외국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분노는 깊고도 정당했다."(428-30)


12장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쟁탈전, 1807-1812


"1807년 여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정에 영국의 통상에 대해 포르투갈의 항구를 폐쇄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포르투갈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자신들의 선택 여하에 따라 자국의 해외 식민지(특히 브라질)와 상업적 번영이 위험에 빠지거나, 프랑스의 침공과 점령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1807년의 위기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군의 입성에 앞서) 포르투갈의 사적·공적인 자산, 정치 지도자 대다수, 사실상 나라의 해상력 전체가 빠져나갔다. 다음 15년 동안 브라질에 머물게 될 왕실의 망명은 포르투갈 구체제의 소멸과 심대한 정치적·문화적·경제적 결과를 낳은 대서양 건너편으로의 이전을 알렸다. 유럽 국가를 다스리는 왕가가 최초로 해외 식민지에 정착해, 본국의 삶에서 식민 영토가 하는 결정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상당한 재정적·물질적 원조를 받아 1808년부터 1821년까지 〈영국의 보호국〉이 되다시피 했다."(435, 445-6)


"프랑스 황제는 에스파냐에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정치적 혼란과 만연한 반反 고도이 정서를 이용하는 데 열심이었다."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16일,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맹방으로서 에스파냐 궁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좌시할 수 없으며 반목하는 정치 분파들을 중재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는 발표와 함께 부르봉 왕조에 개입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아란후에스 [궁정] 혁명이 벌어지자 나폴레옹은 부자를 프랑스의 비욘시로 초대했고, 두 사람은 거기서 악명 높은 희비극의 일부가 되었다." "부자 모두를 강제로 퇴위시킨 바욘 퇴위는 추악한 강압과 기만을 결합한 것으로 한 저명한 역사학자의 결론을 정당화한다. 〈재능 면에서 나폴레옹은 위대한 장군이었다. 품성과 수법 측면에서는 대단한 마피아 두목이었다.〉 바욘 사건으로 황제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으니, 그 순간 나폴레옹은 곧 지극히 난감한 형국으로 탈바꿈할 상황에 확실하게 발을 담근 것이었다."(452-7)


# 아란후에스 [궁정] 혁명 : 프랑스의 간섭 이후 흥분한 군중들이 왕가의 도피를 막기 위해 과격한 행동에 나서자, 페르난도 왕세자는 부모에게 그들의 신변안전과 대신 고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전면 퇴위 뿐이라고 설득하여, 자신이 새로운 왕위에 오른 사건


"에스파냐 점령은 나폴레옹의 가장 근본적인 판단 착오 가운데 하나이며,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될 실수였다. 그는 자신의 친척을 페르난도 왕세자와 결혼시킴으로써(왕세자 본인이 거듭 청한대로) 에스파냐와 혼인동맹을 수립하는 훨씬 더 안전한 경로를 추구할 수 있었다. 그 대신 황제는 황제는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를 축출하고 그 왕국을 직접 떠맡는 더 과격한 노선을 취했다. 그렇게 하면서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인들이 자국 왕실에 적대감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외세의 지배를 열렬히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에스파냐에 속국(봉신 군주정)을 수립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는 에스파냐의 국가적 직조 표면 아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원심성 지방분권주의의 엄청난 힘을 풀어헤치는 혁명을 유발했다." "바일렌에서의 패배를 필두로, 그때까지 무적이었던 (프랑스) 제국 군대의 패배는 대륙 곳곳에서 들뜬 흥분을 불러와, 유럽 전역의 반프랑스 정서에 새로이 불을 지폈다."(458-64)


"한편 웰링턴이 리스본 반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구축한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은 반도전쟁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드러났다. 웰링턴에게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영국은 최소의 손실만 입으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대중은 꼼꼼하고 체계적인 웰링턴의 파비우스적Fabian 성격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이런 전략이 결정적 전투나 승리를 가져오지 않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링턴의 전략은 포르투갈의 시골 지방에 파괴적이긴 했어도 실용주의적이고 통찰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프랑스는 또 다른 포르투갈 침공 작전을 기획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영국은 이 성공을 발판 삼아 에스파냐로 반격에 나섰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영국-포르투갈 동맹이 이 혹독한 시험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리스본에서는 어떤 친프랑스 진영도 생겨나지 않았고, 포르투갈인들은 끝까지 결연하게 전쟁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영국군을 지원했다."(490-1)


# 파비우스적 전략 :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장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한니발에 맞서 정면 전투를 회피하고 지연 전술을 써서 전략적 승리를 추구한 데서 나온 표현


13장 대제국, 1807-1812


"나폴레옹 제국은 어떤 목적들에 복무했는가? 이 제국 건설 뒤에 자리한 타당한 원동력으로서 '가족적 친밀성'을 내세우는 논의는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일 것이다.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며, 주로 영국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논의는 세계 지배를 추구하는 나폴레옹의 과대한 권력욕에 대한 주장이다. 한편 나폴레옹 예찬자들은 그를 행동하는 인간, 낡아빠지고 억압적인 제도들을 무너뜨리고 수 세기에 걸친 관습과 전통을 폐지했으며, 교육과 사법 체계를 개편하고, 개인의 권리들과 능력의 옹호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새 유럽을 위한 토대를 놓은 혁명가로 봤다(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본다). 이 질문에 대한 좀 더 분명한 뉘앙스가 담긴 답변은 나폴레옹은 한 가지 형태의 전제정을 또 다른 형태의 전제로 대체했다는 것, 개혁을 전파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를 약화시키고 점령지를 착취했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알렉산더 그랩의 표현을 빌리면 〈나폴레옹 지배의 야누스적 얼굴〉은 여전하다."(504)


"현재의 유럽연합 체제는 회원국들 간 평등에 바탕을 둔다. 유럽에 대한 나폴레옹의 비전은 본질적으로 프랑스의 강성함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모델을 수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가 우월한 행정 체제와 법적 체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럽 나머지 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 거기에는 이기적인 동기도 있었는데 프랑스 노선에 따라서 다른 나라들을 변모시키면 나폴레옹 자신의 지배와 자원 착취가 크게 용이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정권은 결코 하나의 '유럽적' 정체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에 제국의 생존 자체가 프랑스 무력의 지속적인 우위에 의존했지 제국 지배의 대중적 지지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어떠한 초월적 이상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것은 동등한 국가들로 구성된 연방의 이상이 아니라 보편 제국의 이상, 그 정신에서 유럽연합보다는 샤를마뉴 제국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510-1)


"나폴레옹 체제의 혜택들은 따라서 프랑스 치하 영토들에 대해 프랑스가 한 요구들과 나란히 놓고 고려해야 한다. 나폴레옹은 전쟁은 전쟁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었고, 실질적으로 그것은 프랑스 점령이 법 앞에서 평등과 종교의 자유 같은 높은 이상들만이 아니라 병력 모집과 물적 착취의 증대를 동반한다는 뜻이었다. 프랑스 벙력의 주둔은 그들의 군사적 필요 일체를 충족시키기 위해 현지 인구에 무거운 부담을 지웠다는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나폴레옹의 〈대제국〉은 본질적으로 소속 국가들이 각자 병력과 재정 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적 체제였고, 그것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정적 기여에 덧붙여 나폴레옹 정권은 그 군사적 위력을 유지하기 위해 징병을 요구했다." "나폴레옹 징병 메커니즘의 규모와 범위는 러시아 침공 준비 과정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당시 그는 전체 60만 병력의 절반을 위성국과 동맹국에 의존했다."(514-5)


"증세, 강제 분담금, 징병제, 탄압은 나폴레옹 정권이 유럽 곳곳에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지 못한 핵심 이유였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저지대 지방이든 간에 귀족층은 프랑스 개혁 조치들이 수반하는 결과들에 당연히 심기가 불편했고, 이런 변화들로부터 가장 혜택을 입는 부르주아들은 새로 얻은 권리와 지위에 대한 기쁨과 억압받고 검열당하고 과중한 세금과 대륙 봉쇄를 겪어야 하는 데 따른 괴로움을 조화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농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고 군대에 식량과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나폴레옹 주둔군의 부담을 주로 짊어졌다. 프랑스 황제는 혁명의 화신이라는 온갖 말들에도 불구하고 한때 자코뱅이었던 그는 1793~1794년의 원칙들을 체현하지 않았고 그의 개혁 정책들은 결코 사회경제적 평등의 달성을 겨냥하지 않았다. 그는 1789년의 원칙들을 온전히 대변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와 점령지에서 나폴레옹은 여론에 영향을 미치거나 여론을 표현하는 모든 조직적 수단을 억압했다."(519)


14장 황제의 마지막 승리


"나폴레옹이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가를 몰아낸 것을 비춰볼 때 오스트리아 주전파─프랑스와의 공공연한 대립을 옹호하는 쪽─는 합스부르크 군주정의 생존은 나폴레옹에 대한 단호한 도전으로만 보장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1808년 가을 주전파는 카를 대공의 반대를 극복하고 프랑스와 새로운 무력 분쟁을 벌여도 좋다는 프란츠 황제의 승인을 얻어냈으니, 이것이 5차 대불동맹전쟁이다." "1796년이나 1805년의 상황들과 비교할 때 오스트리아는 입지가 더 강력해진 것 같았다.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더 허약하고 군사적으로 지나치게 확대 배치되었다고 여겨졌다. 오스트리아의 어느 고위 관리가 자랑스럽게 천명한 대로 이전의 패배들은 비전과 지도력 결여의 결과었지만 그러한 과거의 잘못들에서 배운 바가 있었다. 〈다름 아닌 적의 무기들로 적과 싸우자. 그에게 자신의 총알들을 되돌려주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위신에 도전해 그것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더 이상 존재하지 말아야〉 했다."(543-6)


"1809년 4월 10일, 카를과 오스트리아 군의 주력이 바이에른을 침공하고, 요한 대공의 또 다른 오스트리아 군이 북부 이탈리아로 진군하면서 시작된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565-6)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또 한 차례의 참패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과 굴종적인 동맹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 몇 년 동안 그 동맹에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가져온 최대의 충격파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승리로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는 기대치를 조정해야 했고 그에 따라 미래의 협력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 전쟁은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나폴레옹 제국을 무너뜨리는 1813~1814년의 대동맹을 위한 길을 닦는 데 보탬이 되었다."(566)


15장 북방문제, 1807-1811


"덴마크는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보다는 영국의 해군력에 관해 더 걱정하면서 혁명전쟁 기간 내내 중립을 유지했다. 영국은 발트 지역과 교역을 유지하고 그곳에 영국 해군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영국의 해군력에 결정적인 요소였으므로 당연히 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덴마크가 프랑스의 세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면, 영국 해운이 발트 해역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인 좁은 외레순 해협이 폐쇄돼 영국의 무역과 접근권은 위협받게 될 터였다. 더욱이 덴마크 해군의 규모와 우수성을 감안하면, 덴마크, 프랑스-네덜란드, 에스파냐 해군력이 연합할 경우 대서양은 아니라고 해도 영국의 북해 지배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려는 덴마크의 노력을 간과하는 편을 택했다. 1807년 코펜하겐 원정은 성공적이었지만, 영국도 무거운 대가를 치렀다. 영국군이 떠난 지 고작 열흘 뒤에 덴마크는 나폴레옹과 동맹조약을 맺었고, 11월 4일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602-14)


"스웨덴과 영국의 동맹관계는 발트해에서 영국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던 러시아를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부동항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이고 그 결과 수익성 높은 해외무역에 참여할 수 없었던 러시아에게 발트해는 특히 중요했다. 발트해는 서유럽으로 통하는 최단거리 통로를 제공했다. 발트해로 접근할 수 없다면 러시아는 경제를 발전시키거나 유럽에서 강대국이 될 수 없었다. 발트해에서 러시아의 존재는 그 제국적 정체성과 밀접하게 엮여 있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모든 외국(즉 영국) 전함에 대해 발트해를 폐쇄할 것을 요구했다. 스웨덴 군주정이 응답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고, 1807년 12월 30일 러시아는 스웨덴이 계속 답변을 회피한다면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1808년 1월, 구스타브는 프랑스 병력이 발트해에 존재하고 나폴레옹이 독일 항구를 영국에 폐쇄하는 한, 이전의 합의 내용을 지킬 수 없다며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했다. 러시아는 이 거절을 개전 사유로 여겼다."(622-5)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강화를 위한 세 가지 선결조건을 주장했다. 스웨덴은 핀란드 전체를 할양하고, 영국과의 동맹을 공식 파기하며, 프랑스·덴마크·노르웨이와 화평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대륙 봉쇄 체제에도 가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 달 간의 협상 끝에 1809년 9월 17일에 서명된 강화조약은 러시아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다. 이로써 스웨덴은 전체 영토 가운데 거의 절반을 상실한 반면, 러시아는 그 지역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발트해에서 입지를 다졌다. 아닌 게 아니라 핀란드 주민들은 600년 넘게 스웨덴의 패권 하에 살다가 이제는 새로운 제국의 주인을 맞게 되었다." "프레드릭스함 조약은 스웨덴이 외교정책도 재조정하도록 강요했는데,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러시아와 또 한 번 파멸적인 전쟁을 낳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쟁 대신에 스웨덴은 전략적 고려에서 아예 〈핀란드 문제〉를 제거하는 쪽을 택하고 동부에서의 영토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서 노르웨이에 초점을 맞췄다."(651-2)


"발트해 사안에서 영국의 개입은 영국의 의도를 불신하던 스웨덴의 냉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사실 저강도 영국-러시아 전쟁─한 러시아 역사학자가 인상적으로 표현한 대로 〈연기 없는 전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사실 프랑스-러시아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영국은 가능성 있는 동맹의 기초 작업에 나섰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뒤에 영국-러시아 동맹이 드디에 외레브로 조약(7월 18일)으로 현실화됐으니, 이 조약은 영국-러시아 전쟁을 정식으로 종결시키고 6차 대불동맹 수립의 토대를 놓았다."(638-42)


16장 사면초가의 제국 : 오스만 제국과 나폴레옹 전쟁


"동방문제의 기원은 오스만을 상대로 한 러시아의 계속되는 군사적 성공과, 그 결과 흑해 연안 지역을 따라 이뤄진 러시아의 영토 확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럽 정치가들에게 당대의 중요한 질문은 오스만이 러시아의 영토적·전략적 야망을 막아낼 수 있는가, 막아낼 수 없다면 상호 경쟁하는 열강이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였다. 프랑스 혁명전쟁 전야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오스만이 지배하는 발칸 지역 한 조각을 얻기를 기대하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전쟁에 가담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태도는 유럽에서 혁명적 격동이 시작되자 바뀌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라인란트와 이탈리아에서 패배한 뒤 빈의 태도는 당연히 중유럽과 서유럽의 사건들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오스만 국경지대는 뒤로 밀려났다. 인도에서 자국 세력이 증대함에 따라 영국 정부는 유럽 내 세력 균형유지와 더불어 인도 방어를 뒷받침하기 위해 대체로 오스만 제국을 떠받쳐주려고 애썼다."(672-3)


"그래서 19세기 초에 러시아 정부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할 때 비교적 운신의 자유를 누렸고 세 가지 상호 연결된 목표를 추구했다. 첫 번째는 일방적인 병합이나, 다른 유럽 열강과 함께 오스만 영토를 분할해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술탄의 기독교 신민들에 대한 가호와 민족주의적 정서의 유발을 통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을 얼마간 남겨두어 완충지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때로 〈허약한 이웃〉 정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지막 목표는, 1802년 한 러시아 대신의 표현으로는 〈현재의 영토 판도에서 러시아는 더는 확장이 필요하지 않고, 튀르크인들보다 더 고분고분한 이웃도 없으며, 우리의 이 자연스러운 적의 보존이 향후 우리 정책의 근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일단 러시아가 오스만한테서 충분한 영토를 빼앗으면 두 제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결코 대등하지는 않을 터였다."(673-4)


"프랑스와 오스만의 관계는 1798년, 프랑스 공화국이 오스만령 이집트를 장악해 영국 무역을 위협함으로써 영국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는 원대한 구상을 추구하면서 악화되었다.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은 치외법권 내 프랑스 상인들의 보호와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라틴(로마가톨릭) 기독교도 비호라는 레반트에 대한 프랑스의 전통적 정책들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침공은 영국의 식민 권력에 타격을 주는 대신, 전통적인 맹방인 오스만 제국이 적국 영국과 손잡게 만들었다. 오스만 정부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책의 중대한 전환으로서 1798년 9월에 러시아 해군 전대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가운데 양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고,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동부 지중해에서 영국-러시아 함대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러시아 및 영국과 조약을 체결해 대불동맹에 가담했으니, 오스만 제국이 유럽 동맹의 일원이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676)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806년 12월 29일 베오그라드, 1807년 2월 샤바츠 함락으로 이어진 일련의 군사적 승리들로 이전 베오그라드 피샬리크[파샤 관구]는 세르비아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세르비아는 오스만튀르크의 저항을 무너뜨릴 중요한 압력 수단을 제시한 셈이었다." "러시아가 러시아인과 세르비아인을 잇는 공통의 정신적·종족적 유대를 언급하는 가운데 (세르비아의 지도자) 카라조르제는 자연스레 장래 세르비아 독립에 관한 러시아의 확약을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약속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사실 세르비아의 완전한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고 일정한 형태의 후원-의존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다." "비록 프랑스-러시아 간 틸지트 조약은 세르비아를 언급하지 않지만 두 나라는 오스만튀르크가 러시아-오스만 전쟁의 종식을 위한 프랑스의 중재 제의를 거절할 경우 발칸 지역을 〈해방〉시키기로 동의했다."(733-4)


"1809년 1월, 기회를 틈탄 영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자, 런던과 화평을 맺지 말라고 프랑스가 오스만튀르크에 거듭 경고하는 가운데 석 달간의 협상을 거쳐 칼라이 술타니예(다르다넬스 해협) 강화는 영국-오스만 관계를 복원했다. 영국 정부는 오스만 영토 내 모든 병력을 소개하는 데 동의한 한편 술탄은 영국에 치외법권적인 특권들을 복원시켜주었다. 런던은 술탄의 영토를 보전하고 프랑스의 속셈을 저지할 오스만-러시아 강화를 이끌어내도록 러시아를 중재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조항 가운데 하나는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이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외국 전함에 대해 상시 폐쇄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지중해에서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 간 연합 가능성에 관한 영국의 우려를 반영한 조항이었다. 다음 3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오스만 전쟁을 틀어막고, 오스만튀크르·오스트리아와 삼자동맹을 발전시키며, 오스만 제국에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 둘 다를 억제하는 복잡한 전략을 추구했다."(730)


"1812년 5월 28일, 프랑스의 침공 위협이 높아짐에 따라 심한 압박감을 느낀 러시아가 전쟁 종식에 합의하면서, 술탄 마무드는 세르비아로 군사적 자원을 전환할 수 있었다. 오스만군은 1813년에 세르비아군을 궤멸했고, 그해 말에 이르면 베오그라드를 점령한다. 이로써 1차 세르비아 봉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카라조르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반면 카라조르제의 라이벌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일부 크네제스는 오스만 지배의 복귀를 수용했다." "하지만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세르비아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탄 마무드는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신중히 처신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 군주로 인정했다. 그렇게 그는 저도 모르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해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746-8)


17장 카자르 커넥션 : 이란과 유럽 열강, 1804-1814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캅카스에서 러시아-이란 분쟁을 배경으로 하는 핑켄슈타인 조약(1807년 5월 4일 체결)은 동방에서 프랑스의 입지를 떠받치고자 오스만 제국 및 이란과 삼자동맹을 결성하는 것에 대한 나폴레옹의 관심을 반영했다. 1월 17일자 샤에게 쓴 다소 아첨하는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자신의 승리를 알리고 공통의 적에 맞서 프랑스-오스만-이란 합동 전선의 전망을 내놓았다. 〈우리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영구적인 동맹을 결성합시다〉라고 그는 샤에게 촉구했다. 핑켄슈타인 조약은 이 같은 야심의 표명이었다. 그것은 파트 알리 샤를 이용해 공동의 적 러시아에 맞서 양동작전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고, 이란이 인도의 서쪽 이웃이라는 위치를 활용해 아대륙에서 영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약은 이란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동부 조지아와 여타 남부 캅카스의 정치체들을 카자르의 속령으로 인정하는 프랑스-이란 동맹을 수립했다."(764)


"카자르 군대의 최대 문제는 러시아군의 기술적 우위보다는 군사 조직과 유지, 그리고 전쟁 수행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에서 기인했다. 이란군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부족 병사들은 통제와 협조가 어려웠다. 그들은 자연스레 부족의 이해관계를 국가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했고 서구식 전쟁 방식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므로 틸지트 조약 체결로 러시아와의 적대행위가 재개되었을 때, 새롭게 편성된 사르바즈 부대는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점은 이 개혁 조치들이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은 개혁 조치들이 비非이슬람적이라고 맹비난했다. 이 시책들을 초기 이슬람 관행의 부활─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코란의 특정한 언급들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로 묘사하려던 카자르 군주정의 시도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사르바즈 병사들은 프랑스 장교들이 부과하는 엄격한 규율을 싫어했고 부족적 연대감을 없애려는 일체의 시도에 반발했다."(768-9)


"시간이 흐르면서 파트 알리 샤는 비록 본의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리란 점을 깨닫고 다시금 영국이란 대안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사절 존스는 틸지트 조약에 따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러시아에 맞서 영국과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1809년 3월에 체결된 두 번째 영국-이란 조약은 카자르 왕조가 이전에 유럽 열강과 체결했던 조약들의 핵심 결함들을 바로잡았다. 영국은 이란 군대를 훈련·무장시키는 것은 물론 재정 지원도 약속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는 이란이 프랑스에 했던 모든 양보와 합의 사항을 폐지하고 유럽 열강이 인도에 도달하기 위해 이란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막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유럽'이란 자구의 삽입은 카자르 측의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란에게 그것은 러시아를 의미한 반면, 런던에게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프랑스를 의미했다. 영국은 캅카스에서 러시아의 제국적 구상을 억지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776-7)


"1812년 6월에 개시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에서 영국을 애매한 입장에 빠뜨렸다." "러시아에 맞서 영국의 계속되는 지원을 기대한 파트 알리 샤는 영국인들로부터 이란은 적과 강화해야 한다는 말─그것도 아주 명확한 어조의─을 들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하고 프랑스에 맞서 새로운 유럽 동맹이 결성되는 마당에 영국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자 맹방인 러시아를 이 먼 구석에서까지〉 도울 결심이었고, 영제국의 이해관계에 더 이상 보탬이 되지 않는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영국 대사 우즐리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해, 샤가 1813년 여름에 강화 회담을 수용하도록 설득했다. 1813년 10월 24일, 마침내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확인하는 강화조약이 러시아와 이란 사이에 체결되었다. 그러나 남동부 캅카스 영토들에 대한 러시아의 지속적인 잠식은 무슬림에 대한 부당한 취급과 더불어 러시아-이란 관계를 심각하게 긴장시켰다."(787-8)


18장 영국의 해외 원정, 1805-1810


"영국은 남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서인도제도 등지에서 프랑스를 겨냥해 해외원정을 행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방대한 조선 프로그램으로 대응했다." "프랑스의 새로운 전함들이 건조됨에 따라 다양한 항구들에서 출동 태세를 갖춘 전함들이 유지되었고, 영국 해군은 광대한 지역에 걸쳐 배치되어 적이 봉쇄를 뚫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이는 불가피하게 인력과 선박을 상당히 소모시켰다. 함대는 몇 달씩 바다에 머물면서 식량을 소비하고 대서양이나 지중해의 강풍을 견뎌야 했다. 함대의 능률을 유지하는 일은 영국 해군부가 전쟁 동안 맞닥뜨린 최대의 과제로서, 대규모 선박 수리에 필요한 건선거 시설이 극히 드문 사실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어려운 과업이었다.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나 에스파냐 조선소를 활용할 수 없었고, 몰타에 있는 것은 완공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파도와 바람에 의한 지속적인 마모와 파손에 직면해 영국 전함들은 플리머스나 포츠머스, 채텀의 모항母港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816-7)


"이 모든 활동은 머잖아 미래에 나폴레옹이 영국 해군과 거의 대등한, 적어도 전열함 수에서는 거의 대등한 전력을 꿈꿀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력 균형은 화력을 고려한다면 프랑스 쪽으로 우세하게 기울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결정은 영국에게는 시기상으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영국 해군은 전력의 한계 수준까지 확대 전개되어, 발트해와 지중해만이 아니라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서까지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만약 나폴레옹이 반도전쟁에만 노력을 집중하고 해상에서 충분한 우세를 점했다면 유럽 패권 투쟁은 프랑스에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잘 보호되는 항만에서 해군을 건설함으로써 나폴레옹은 자신의 함대가 바다에서 영국 해군에 도전할 날을 준비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침공 준비는 프랑스 조선소에서의 작업들을 늦추고 나중에는 완전히 중단시켰는데, 조선공과 선원들이 프랑스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징발된 탓이었다."(822-3)


19장 영국의 동방 제국, 1800-1815


"영국 식민주의에 결정적인 요인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해상력이었다. 해상력이 없다면 아시아의 지배 영토는 그야말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상력 자체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인도는 중앙 권위를 파괴하다시피 한 세력 투쟁을 겪었다." "무굴 제국이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권위를 공고히 했다면 영국 동인도회사는 18세기 후반에 훨씬 더 만만찮은 적과 대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대륙은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고, 중앙의 정치 리더십만이 아니라 단일한 정체성과 공통의 대의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인도 병사들은 국가에 헌신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에게 헌신했고, 그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경쟁관계, 시기심이 아대륙의 계속되는 내분을 지탱했다. 그 덕분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다양한 인도 세력의 연합 전선에 직면한 적이 없었고 강압적 조치와 위협, 외교를 통해 현지 통치자들의 단결 투쟁을 차단할 수 있었다."(833)


"1808년에 벌어진 마카오 사건은 자국 영토가 침해된다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영국이 가늠해볼 기회가 되었고, 청나라 조정이 그런 일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리란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해가 향후 영국의 대중국 정책을 형성했다. 남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그리고 그 이후로도) 영국은 중국을 향해 중립적 자세를 유지하고 영국 경제와 전쟁 수행 노력을 지탱하는 무역으로부터 계속 이익을 얻는 편을 선호했다. 광둥 무역은 계속해서, 특히 동인도회사가 아편 공급에 뛰어들면서 성장했다." "1805년과 1813년 사이에 동인도회사는 무려 900퍼센트에 가까운 이윤을 거둬들였고 영국의 대중국 주요 수출품이던 면화를 아편이 대체했다. 이 밀수 무역은 막대한 통화 유출을 촉진하고 중국 정부가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재정 출혈에 기여했다. 1830년대 후반에 아편 무역을 둘러싸고 중국의 '강경' 자세에 직면하자 영국은 해군력과 포격 능력을 이용해 중국에 빠르고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860)


# 마카오 사건 : 1808년 9월, 드루리 제독 휘하의 해군 전대가 마카오를 무단 점령하면서 중국과 충돌한 사건. 중국의 강력한 대응에 굴복한 영국군은 12월 20~23일에 걸쳐 마카오에서 철수한다.


"1803년 이래로 유럽에서 프랑스가 새로 영토를 획득할 때마다 동방 바다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영토 상실이 뒤따랐다. 1811년 자바 함락에 이어, 1812년이 되자 나폴레옹은 희망봉 동쪽에 더는 작전 근거지가 없었고, 프랑스 함대가 인도양에서 매우 철저하게 일소되어 프랑스 황제는 러시아와 진행 중인 갈등관계를 해소할 때까지 그 지역에서 해군 작전에 대한 생각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1812년과 181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의 동인도제도 함대는 지금까지의 성과들을 단단히 다지고 가능한 위협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마땅히 거둔 성공에 만족했다. 인도, 중국, 아시아의 여타 지역들을 상대로 한 영국 무역은 번창했고 이베리아반도에서 전쟁을 이어가고 중유럽에서 동맹 수립을 위해 자금이 절실한 정부의 금고를 채워주었다." "1803년과 1815년 사이에 영국의 승리들은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얻은 잡다한 속령들을 단단히 다져서 궁극적으로 영제국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77)


20장 서방문제? : 아메리카 대륙 쟁탈전, 1808-1815


"1793년 에스파냐는 1차 대불동맹에 가담했지만, 불과 2년 뒤에는 바젤 조약에 의거해 일방적으로 프랑스와의 적대행위를 종결하고 영국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영국이 에스파냐 해운을 공격하면서 에스파냐의 대서양 무역은 붕괴했고, 남아메리카 식민지들과의 연계가 약해지면서 외세의 침입을 부추겼다. 1796년 산로렌소 조약은 미국인들에게 미시시피강 항행권을 보장해, 오랫동안 에스파냐가 지배해 온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길을 닦았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 지도부는 미국과 국경을 맞대는 에스파냐 영토를 유럽 열강이 일체 손 댈 수 없게 하고 싶었다." "미국인들은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가) 자신들이 아닌 (누구에게도) 넘겨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파냐가 그곳을 계속 소유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한 이웃이며 우리는 머잖아 틀림없이 이 (지역을) 미국에 병합하게 될 (···) 날을 조바심 내지 않고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888-9)


"19세기에 들어섰을 때 영국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프랑스와 미국 둘 다 에스파냐 영토를 탐내는 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1801~1803년 내내 영국 정치가들은 어떤 행동 노선을 취해야 할지를 놓고 머뭇거렸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영토를 이전하도록 에스파냐를 압박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영토를 획득하는 미래가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폴레옹이 신생 공화국을 위협할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끔찍한 그림을 그려 보이며 미국을 영국과의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1803년 애딩턴 총리는 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는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차원〉에서 미국 영토에 추가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미국 쪽 상대방[미국 국무부]에게 〈폐하(조지 3세)께서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라고 알렸다."(890)


"에스파냐-아메리카 세력 투쟁, 그리고 궁극적으로 독립을 촉발한 사건은 1808년 프랑스의 에스파냐 찬탈이었다." "포르투갈 군주정이 브라질로 탈출하고 에스파냐 부르봉 궁정이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은 에스파냐 식민지들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그들은 바욘에서 벌어진 희비극─에스파냐 왕실이 포로가 된 것─과 뒤이은 전국적 봉기에 관해 알게 되었고,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 곳곳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합법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부르봉 군주의 부재는 유례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일부 식민지 지도자들은 부르봉의 대의에 계속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군주의 부재라는 상황을 이용해 더 큰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랐다. 후자의 주장은 아메리카 대륙이 통치 군주하에 인적人的인 연합으로 에스파냐와 이어져 있으며, 페르난도 7세의 폐위로 식민지들과 본국을 하나로 묶는 그 끈이 끊어졌다는 전제에 근거했다."(894-6)


"한편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각종 시도를 이어갔다. 에스파냐 국왕에게 충성하는 당국자들로부터 계속되는 저항에 직면한 그는 정책을 조정해 이베리아 에스파냐와 아메리카 에스파냐 간의 공식적 단절을 재촉하고자 해다. 그는 1809년 12월 12일 입법원 연설에서 〈(나는) 아메리카 대륙 나라들의 독립에 결코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음 몇 년 동안 식민지 훈타 정부와 에스파냐 훈타 정부(그리고 나중에는 섭정위원회) 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나폴레옹은 반란을 부추기고 선언서를 발표하도록 수십 명의 대리인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견했다. 그는 남아메리카 군사 원정 계획을 고려하고 반란자들에게 재정적·군사적 원조를 제공했지만, 결국 이 문제를 러시아 침공 준비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시도들 중 어느 것도 뚜렷한 혜택을 가져오지 않았다. 영국 해군의 보호 속에서 해상을 통한 일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에스파냐 식민 정부는 내부의 난제들에만 집중했다."(900-1)


#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내부 분쟁

1.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현 멕시코) : 1813년 11월 6일 애국파가 독립을 선언했으나 1815년 근왕파에게 패배하면서 1차 멕시코 혁명 종결

2.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 1810년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수립 선언 후 8년간 지속된 아르헨티나 독립전쟁 발발

3. 누에바그라나다(현 콜롬비아) : 근왕파가 우세를 점했으나 1816년, 시몬 볼리바르의 공화파 세력이 귀환하면서 10년간 지속된 독립전쟁 발발

4. 페루 부왕령 : 확고한 근왕파 지역으로 남았지만, 1812년 반도전쟁의 베테랑 산마르틴이 애국파에 합류하면서 칠레 재정복 투쟁의 기틀 마련


21장 전환점, 1812


"러시아와 프랑스 두 제국의 관계는 1808~1811년에 갈수록 긴장이 높아졌다. 알렉산드르가 틸지트 조약에 의거해 가담하기로 동의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체제는 러시아 경제에 대단히 불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러시아는 여전히 농업 근간의 제국이었으며 핵심 원자재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제조업 공장 수가 점차 늘어나기는 했어도 프랑스나 영국과 비교할 때 러시아의 산업적 기반은 한참 뒤쳐져 있었다. 러시아는 자원을 수출하기 위해 자국 상선보다는 외국 상선에 더 의존했고, 영국이 러시아의 주도적인 무역 상대국이었다." "러시아가 느끼는 답답함은 영국이 흉작으로 고생하고 있는 반면 러시아는 풍작을 누린 1810년에 극에 달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지배하는 항구들에서 영국으로 곡물 수출을 허용했지만(그러면서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러시아는 대륙 어느 곳보다 최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단 한 톨도 팔 수 없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러시아 지주들은 이런 상황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926-7)


"폴란드는 양국 지도자 간 마찰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대공국 창설은, 알렉산드르 황제가 〈러시아라는 몸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한 대로, 폴란드 국토와 국가 정체성의 온전한 복원에 대한 러시아의 두려움을 일깨웠다. 나폴레옹은 폴란드가 복원되지 않을 것이라는 문서상의 보장을 받아내려는 러시아의 시도에 퇴짜를 놨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이 러시아에 맞선 전략적 장벽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랑스-러시아 이해관계는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놓고도 충돌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확보하려는 알렉산드르의 야심을 가로막으려고 나폴레옹은 작심한 것 같았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발칸반도 분할에 관한 구상에서도 뜻이 일치하지 않았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라인연방 재편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핵심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첫 10년대가 끝날 무렵 틸지트에서 합의된 정치적 타협은 수명이 다했고, 새로운 유럽 전쟁이 곧 불붙을 것이라는 점이 명백했다."(929-30)


"정말이지 그렇게 어마어마한 군사와 방대한 거리, 병참상 난관들이 개입되고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결정적인 결과가 나온 전쟁의 실례도 드물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 가량이 투입되었지만─주력 침공군은 45만 명이었고 나중에 약 15만 명의 증원군이 더 불려왔다─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 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946-7)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것은 '동장군'이었다고 오랫동안 얘기되어왔지만 그런 주장들은 근거가 의심스럽다. 기상관측소에서 나온 당대의 관측 자료들은 그해 겨울이 사실 11월 후반까지 온화했음을 드러내는데, 그때쯤이면 나폴레옹은 이미 전쟁에서 졌다. 대육군은 전력의 거의 절반을 전쟁의 첫 8주 사이에 수비대 배치와 질병, 탈영, 사상자로 인해 상실했다. 또 이번 원정군에는 이전의 전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규율이나 전폭적인 헌신이 없었다. 7~8개 국에서 온 병사들이 원정군을 구성했고, 따라서 그들은 패배의 부침 앞에서 단결력과 규율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은 병참에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러시아 내 수송 기간시설의 미비는 가용한 물자를 병사들에게 때맞춰 전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전략적인 퇴각과 초토화 작전을 통한 러시아의 소모전 전략으로, 적군은 시골에서 식량, 특히 마초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이로 인해 짐을 나르는 동물과 군마가 엄청나게 희생되었다."(947-8)


22장 프랑스 제국의 몰락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세력 균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릴 기회를 알리면서 유럽 전역에 충격파를 몰고 왔다. 1812년 12월 러시아 협상가들과 프로이센 장군 요한 폰 요르크 사이에 체결된 타우로겐 협약은 나폴레옹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프랑스 군대 내 자신의 휘하에 있는 프로이센 분견대는 중립을 유지한다고 선언한 프로이센 장군의 결정은 프랑스 상관들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 대한 분명한 반역 행위였다. 여태까지 프로이센 국왕은 더 애국적 성향의 프로이센 장교들과 정치가들이 공공연하게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것을 줄곧 말려왔다. 비록 국왕은 협약을 공식 부인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공식적 규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행위들이 프로이센 전역에서 되풀이되어 광범위한 봉기를 촉발했고, 결국 프로이센 군주정도 편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967-8)


"알렉산드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란츠 1세가 자기들 편에 가담하기를 바랐지만 독일에서 그들의 행보는 빈의 우려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궁정은 러시아에서 프랑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반겼고, 나폴레옹이 유럽에 부과한 제국적인 합의 내용들을 변경할 수 있으리란 전망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황제가 확실히 패배한다면 프랑스 헤게모니가 러시아의 지배로 대체될 게 뻔했고, 이는 오스트리아에게 전혀 반가운 전망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외무대신 메테르니히의 안보 목표들은 오스트리아가 1813년 봄 내내 와일드카드(예측 불가능한 수)로 남는 데 초점을 맞췄다." "빈에게 똑같이 걱정스러운 것은 독일 군주들에게 러시아 황제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프랑스가 좌우하는 라인연방을 대체해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라고 촉구하는,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3월 후반에 발표한 선언이었다." "오스트리아에게 핵심 질문은 이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새로운 독일〉이 될 것인가였다."(970-1)


"영국의 전략은 세 가지 폭넓은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이 식민지와 해상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때쯤에 영국은 이미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식민지들을 모조리 점령했고, 아직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은 유일한 해외 영토는 영국 맹방들의 식민지였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륙의 전후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휘두를 수 있는 외교적 무기를 제공했다." "두 번째로, 영국은 이전 협정들에 의거해 떠맡은 책무들을 이행해야 했다. 여기에는 노르웨이에 대한 스웨덴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한다는 약속은 물론 포르투갈, 에스파냐, 나폴리에서 이전 정부들을 복귀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제는 프랑스를 나폴레옹 이전 국경선으로 축소하고, 부상하는 러시아 세력을 억제함으로써 대륙에서 항구적인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런던은 오스트리아와 어느 정도 공통의 기반을 공유했다."(982-3)


"1813년 6월 26일, 메테르니히는 드레스덴에서 나폴레옹과 긴 면담을 가졌다. 그것은 전쟁 전체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대신이 전달한 예비 제안들과 나중에 7월 12일과 8월 10일 사이에 프라하 강화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바르샤바 공국의 해체(바르샤바 공국은 동맹 열강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라인연방의 재편, 오스트리아에 일리리아 자치주 반환, 1810년 프랑스가 병합한 한자동맹 도시들의 복원, 1806년 이전 상태로 프로이센의 지위 복귀 등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열띤 대화를 이어가다가 제의를 거부했고, 그의 발언은 러시아 참사를 겪은 뒤에도 아무도 자신을 꺾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분명히 드러냈다. … 결국 메테르니히는 프랑스 군주와 진정한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품고 드레스덴을 떠났다.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동맹 세력─6차 대불동맹 수립─에 가담해 나폴레옹에게 제시한 강화 조건들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기로 약속했다."(985-6)


"나폴레옹이 (관대한 조건과는 거리가 먼) 협상을 내켜하지 않은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가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목표가 없었다거나 동맹국들이 최소 조건들을 바탕으로 나폴레옹과 강화를 맺는 데 합의했다는 주장은 상황을 잘못 짚은 것 같다. 상대방들처럼 프랑스 황제도 유럽 대륙의 평화에 관해 자신만의 특정한 비전을 추구하고 있었고, 여기서 승리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드레스덴에서 제시된 일단의 요구 사항은 오로지 예비 교섭을 시작하기 위해 정해진 것이었고, 만약 나폴레옹이 요구들을 수용했다면 동맹국들은 최종 협상에서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더 제기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 점을 알았으며, 자신이 군사적으로 비교적 우위에 있는 한 그러한 조건들에 동의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비타협성은 두 가지 구체적인 목적을 감추고 있었다. 동맹의 가장 강력한 구성원인 러시아와 직접 해결을 보겠다는 것과,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이탈한 오스트리아를 혼내주겠다는 것이었다."(987)


"1814년의 전역을 치르면서 러시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지원과 영국의 보조금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반대로 메테르니히는 영국-오스트리아 상호 이해가 확고한 한, 러시아의 야심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알았다." "영국 외무장관 캐슬레이는 동맹세력 대표들에게 군사적으로 동맹 세력의 입지가 여전히 강력하다고 지적하고, 상호 불신을 누그러뜨렸으며, 가장 결정적인 공헌으로서 대륙에 영국이 바라는 바와 같은 평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해외 식민지들을 원상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캐슬레이의 노력은 곧 반목하는 동맹 세력을 다시 규합하고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다는 공동의 목적의식을 되찾아주었다. 그들은 캐슬레이의 도움을 받아 체결한 쇼몽 조약에서 4국 동맹으로 알려진 것을 구성했다. 동맹 세력은 나폴레옹이 정전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의 〈유구한 국경선〉 제의를 수용할 때만 그의 제위 보유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1011-4)


"동맹군이 수도 파리의 목전에 이르자, 1814년 3월 31일 마르몽과 모르티에 원수는 항복 조건에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나폴레옹의 권력 부상에 그토록 결정적 역할을 한 탈레랑이 이제 그의 몰락에도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전직 외무대신은 사실상의 쿠데타를 도모해, 동맹 세력과 협상을 개시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프랑스 왕위에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키도록 동맹 새력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1814년 4월 2일 원로원으로 하여금 나폴레옹을 퇴위시키는 특별 선언문을 채택하게 한 것은 탈레랑과 그의 동료 변절자인 전직 치안대신 조제프 푸셰였다." "4월 11일 나폴레옹의 운명은 퐁텐블로 조약의 조건들로 공식적으로 정해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왕위를 공식 포기하고 그 대신 엘바섬의 군주로 인정되며 프랑스로부터 연 200만 프랑을 받기로 했다. 동맹 세력과 그렇게 지독하게, 그렇게 오랫동안 싸웠던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가혹한 처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큰 몰락이었다."(1019-20)


"5월 30일에 서명된 파리 조약은 6차 대불동맹전쟁을 공식 종결시켰다." "그동안 프랑스에 경제적 착취를 당했고 향후에도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쉽다고 느끼는 프로이센과 독일 국가들은 프랑스의 핵심 국경지대를 박탈하고 상당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리는 더 가혹한 조건들을 요구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영국은 과거의 숙적을 이류 국가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대륙에서 이제 간신히 도달한 위태로운 정치적 안정을 더욱 해칠 뿐이라고 판단해 좀 더 유화적이었다." "최종 조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참패를 당한 프랑스에 대해 동맹 세력이 놀랄 만큼 관대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양보로서 그들은 최종 조약이 공식 비준되기도 전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군대의 향후 규모에 아무런 제한을 부과하지도 않았고, 프랑스가 내야 할 배상금을 산정하거나 프랑스 군대가 점령지와 정복지에서 뜯어낸 막대한 액수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1021-2)


23장 전쟁과 평화, 1814-1815


"나폴레옹의 귀환이 대단히 비범하긴 하지만 그가 엘바섬에 남았다면 나라에는 더 좋았을 것이다. 동맹 세력이 그를 무찌르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러가며 10년 넘게 싸웠는데 이제 와서 그의 귀환을 순순히 묵인하리라는 희망을 나폴레옹이 진지하게 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동맹 구성원들은 내부 분열로 고생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입장 차이 중 일부는 깊이 뿌리박힌 것이라 해도, 무엇도 나폴레옹 제국과 상대해온 지난 과거를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한 지 닷새 뒤인 1815년 3월 25일에 이르자 8대 강국은 7차 대불동맹을 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군대를 제공하고, 나폴레옹이 확실하게 패배해 동맹조약의 표현대로 〈더는 말썽을 일으키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기로 서약했다." "나폴레옹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프랑스인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대불동맹을 쪼갤 신속하고 압도적인 승리였다."(1060-2)


"워털루는 전술적 수준(여기서 나폴레옹은 사실상 자신의 권한을 부관들, 특히 정면 공격을 감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전술을 들고 나오지 못하는 미셸네 원수에게 위임했다)과 작전적 수준(여기서의 실패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리니 전투 이후 그루시의 행위로 초래되었거나 아니면 그로 인해 약화되었다) 모두에서 프랑스군의 총체적인 패배였다. 이런 측면에서 워털루 전투는 유럽에서 프랑스 패권의 종식으로서 마땅히 기려질 만하다. 하지만 워털루는 새로운 한 세기를 연 전투가 아니었다. 유럽의 운명은 라이프치히의 굽이치는 언덕들에서 이미 결정되었고 빈의 무도회와 여러 경축 행사 와중에 굳어졌다. 역사 결정론처럼 들릴 위험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서 주장하자면 나폴레옹은 첫 포탄이 발사되기도 전에 전략적 수준에서 이미 전쟁에 졌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라도 동맹 세력이 그를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1069-70)


#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6일~18일) : '민족들의 전투'라고도 불리며 병사 수와 화력 면에서 프랑스를 압도한 동맹군이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 군을 물리치고 사실상 6차 대불동맹전쟁의 승리를 확정지은 전투


24장 대전쟁의 여파


"빈 회의에서 도출된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평화 정착은 네 가지 원칙을 토대로 했다. 첫째, 유럽 열강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고 평화 유지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장려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세력들 간의 국제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비록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는 수시로 충돌했지만 그들은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를 구축해 자신들의 주권을 잠재적 침략자(들)로부터 안전히 지키기에 충분한 상호 이해관계가 되었고, 유럽 협조 체제의 주요 목적은 평화와 안정이었다." "빈 회의 이후로 거의 한 세기 동안 유지된 이 평형 상태는 나폴레옹 이후 40년 간의 평화를 가져온 한편, 19세기 후반기의 무력분쟁들은 결코 더 커다란 전화戰禍로 탈바꿈하지 않았다.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들이 빠짐없이 개입한 장기 무력 분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18세기와 달리 탈나폴레옹 유럽의 무력 분쟁은 대체로 두 나라나 세 나라가 개입한 사건이었고, 2년 이상 지속된 적이 드물었다."(1077-9)


"두 번째는 정당성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은 합법적인 군주정들을 복귀시키고 그리하여 대륙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보전을 외견상으로는 꾀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에서 많은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귀족계급이 주관하는 군주제 국가들의 구질서는 살아남았고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주요 관념들─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방임 경제─은 1815년에 결코 패배한 게 아니었다. 탈나폴레옹 시대에 자유주의가 중간계급과 동일시되면서 많은 지식인들과 더 큰 사회집단들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줄만큼 더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군주제를 공화정으로 교체하길 열망한 새 세대의 급진주의자들은 더 큰 경제적·사회적 평등을 추구했고 이런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보수 정권들에 맞선 투쟁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때로는 힘을 합쳤지만 딱 어느 정도까지였다."(1079)


"(혁명적 행위들에 질겁한) 보수주의자들은 사회란 과거와 현재, 미래 세대 간 영구적인 동반자 관계, 다시 말해 러시아 보수주의적 작가 니콜라이 카람진의 표현을 빌리면,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해왔고 사멸하지 않으려면 과거로부터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살아 있는 사회적 유기체라고 주장했다. 살아 있는 만물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신의 피조물이며, 어느 한 세대도 사회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 그보다는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것이 한 세대의 도리다." "그러므로 나폴레옹 이후 평화 정착의 세 번째 기둥은 '개입'이었다. 강대국들은 혁명 정신의 전염에 맞서 서로서로 그리고 유럽 일반을 보호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 나라가 동란으로 위협을 받을 때마다 열강은 기존의 조약에 의거하고 현행 영토상의 합의를 존중해, 그 나라에 개입해 합법적(이라고 쓰고 보수적이라고 읽는다) 질서를 옹호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협력했을 때 열강은 자유주의 혁명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당대의 보수적 질서를 유지했다."(1080-1)


"마지막으로 앞의 세 가지 원칙은 네 번째 원칙, 상호 보상의 원칙으로 조절되었다. 유럽을 전체적으로 다시 짜면서 승전국들은 만일 한 나라가 영토를 내놓거나 특정 이익을 놓고 타협한다면 일정한 형태나 형식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그러한 보상들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불러일으킨 민족자결의 정신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다." "유럽 대제국들의 문화와 정체성은 꽤 다양했다. 물론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은 군주에 대한 유대와 하나의 전체로서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체코인이나 폴란드인이나 헝가리인이나 불가리아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다른 누구든 간에─은 점점 더 자신들의 문화적 고유성과 그 고유성을 보존하는 일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 민족적 개별성에 대한 의식은 민족자결로 가는 첫 단계였고, 민족자결은 제국들의 통합성을 위협하고 빈 회의에서 재편된 유럽 정치 질서를 위험에 빠뜨렸다."(1082-3)


"1815년의 합의는 1814년의 강화 조건보다 상당히 가혹했다. 프랑스는 국경지대의 영토와 요새들을 추가적으로 할양해야 했고, 국경선도 1792년이 아니라 1790년의 국경선으로 축소되었다. 프랑스가 1814년에는 보유했었던 사보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 라인란트의 일부를 내놓아야 했다는 소리다. 더욱이 확정 조약은 7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최대 5년까지 동맹국 군대의 점령 비용을 부담할 의무를 프랑스에 부과했다." "경제사가 유진 N. 화이트의 표현으로는 〈배상은 이제 새로운 유럽 질서를 위협한 잘못에 대한 벌금을 산정하고 장래의 (적대적인) 시도들을 억지하는 역할을 하며, 더 가혹한 강화 패키지의 일부가 되었다. 배상금 지불은 또한 인센티브이기도 했는데, 지불을 이행하면 프랑스는 유럽의 사안을 처리할 때 다시 강대국의 역할을 맡는 것이 허용될 예정이었다.〉 또 다른 혁신은 패전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군사 점령 체제의 운용이었다."(1084-6)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공산품과 설비 물자에 대한 수요가 곤두박질치면서, 오히려 전후 불황이 찾아왔고, 전 지구적인 기후 재앙(1815년 탐보라 화산 폭발)은 한 세기 이상 만에 최악의 흉작을 야기해 식량 가격의 급등을 초래했다. 무역 개방을 되살리려는 시도보다는 협소한 경제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고, 유럽의 농업과 산업은 유럽 국가들이 세운 새로운 관세 장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탈나폴레옹 시대의 농업과 제조업 경기의 후퇴는 수만 명의 귀환병들에게 제공할 일자리가 별로 없음을 의미하는 한편, 빈곤층의 생활 조건은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 여전히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개인적 자유와 성문成文 권리 보장을 촉구하는 시위를 부채질하고 민주적 대의제와 공평한 부의 분배를 옹호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출현에 기여했다. 탈나폴레옹 시대의 소요는 그러므로 근대 유럽의 탄생에 일조한, 변화의 힘들과 전통 사이에 벌어지는 더 큰 투쟁의 발로였다."(1107-8)


"나폴레옹 전쟁이 몰고 온 정치적 격동은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위협들에 대처할 때 유럽 정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한 가지 중요한 유산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전쟁이 낡은 행정적 결함과 부조리를 일소해버려서 유럽 정부들은 이제 관료제와 법 집행 과정, 과세를 더 단단히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억압적 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었다." "보수 지배 체제는 1820년, 민중 반란이 에스파냐와 나폴리 군주정을 위협했을 때 탄력을 얻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와 피에몬테에 개입하는 것을 지지한 한편, 프랑스는 반동적인 부르봉 왕가가 에스파냐에서 권력을 탈환하는 것을 도왔다. 1825년 러시아에서는 일단의 군 장교들이 알렉산드르 황제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제한적이나마 입헌 정체로의 변화를 꾀했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고작 하루를 간 뒤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1108-9)


"탈나폴레옹 시대의 혁명들 가운데 남아메리카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혁명만이 결국 성공했다." "남아메리카의 1차 독립전쟁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파라과이를 제외하면 모든 독립운동은 사실상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왕가의 권위가 휘청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폴레옹 프랑스의 몰락은, 에스파냐 근왕파가 소망한 것과 달리 반란의 즉각적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다." "마침내 1823년 멕시코는 공화국이 되었고 자결권을 끌어안아 중앙아메리카 연합주 구성을 위한 길을 닦았다."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애국파는 1821년 근왕파를 무찌르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를 합친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근왕파는 칠레에서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산마르틴이 이끄는 아르헨티나 군대의 도움을 받은 칠레 크리오요들은 1817년에 근왕파를 무찌르고 독립을 선언했다." "페루 독립은 1820년 12월에 선언되었지만 공화파가 권력을 확실히 다지기까지는 6년이 더 걸렸다."(1110-15)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은 군주제, 귀족제, 노예제 같은 제도들의 정당성과 전통적 생활방식을 뒤흔들었다. 또한 해소되지 않은 여러 쟁점들을 남겼다. 그러므로 후속 세대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 공화주의와 군주정주의, 산업화와 급진주의의 유산들을 두고 씨름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 갈등이었지만, 유럽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력 분쟁은 유럽 국가들이 개혁과 근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도록 강요하고 촉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들 간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유럽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문명들에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릴 때쯤 군사적 문제, 산업 발달, 기술력 측면에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는 확연했다. 이는 대분기의 시작이었고, 이 전환의 엄청난 의미는 19세기가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다."(11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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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김응종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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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혁명과 반혁명


1 인권선언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드라마이다. 1791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93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95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 세 인권선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은 자유, 평등, 소유권이다. 1789년 인권선언에서 '자유'는 '소유',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과 함께 자연권이라고 선언되었다. 평등은 권리의 평등으로 제한되었지만 소유권이 보장되고 권리가 평등한 상태에서 평등은 자유와 충돌하지 않았다. '소유권'은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권리〉라고 재차 강조되었다. 1789년 인권선언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선언하여 구체제의 특권적인 신분사회에서는 벗어났으나 '자유'와 '소유권'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사회적 조치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인권선언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사회적 조치에 대한 많은 요구가 거부된 것은 1789년 인권선언이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61)


"1793년 새로운 헌법은 파리 민중의 요구를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 〈공동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랐으며 '평등'이 '자유'보다 우선적 지위를 차지했고 '소유'는 네 자연권 가운데 말석으로 밀려났다. 공적인 자유가 개인적인 자유보다 우선시되었고,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열월 정변' 이후 제정된) 1795년 헌법은 민중의 정치 참여와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다는 목적 아래 제정되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이 되어 권리의 남용을 막고자 했으며, 자연권 개념이 삭제되어 〈자유, 평등, 안전, 소유〉는 사회적 권리로 강등되었다. '소유권'을 존중하는 것은 '의무'라고 규정함으로써 소유권을 강화했다. 1795년 헌법은 1791년 헌법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1795년에 혁명이 다시 부르주아 단계로 복귀하면서 혁명은 동력을 상실했다. 좌절한 혁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폴레옹의 독재였다."(62)


# 열월 정변 : 테르미도르 반동(reaction)을 가리킴


2 방데 전쟁의 폭력성


"방데 전쟁은 1793년 3월에 시작되어 1793년 12월 23일 사브내 전투로 끝났다. 역사적으로 논란이 된 것은 혁명정부의 가혹한 전후처리였다." "19세기 이래 프랑스혁명사를 지배해온 공화주의 역사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을 반혁명 전쟁으로 규정하고 방데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들은 방데 전쟁이 벌어진 시기의 공포정치는 외전과 내전의 시기에 국가와 혁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받아들인 반면, 방데 전쟁의 폭력적인 전후처리에 대해서는 외면해왔다. 이들의 역사 서술에서 방데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이들과 달리 수정주의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는 공안을 이유로 폭력을 용서하는 것에 반대했다. 〈방데의 파괴와 동시에 진행된 방데인들의 대량살육은 공안이라는 이유로 사면될 수 없는 공포정치의 최대 집단학살이었다.〉 다만 퓌레는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시대착오적이고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86-7)


"제노사이드 논쟁을 가열시킨 사람은 레날 세셰였다. 그는 방데 전쟁 이후 벌어진 전후처리는 공안위원회가 주도한 제노사이드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클레망 마르탱은 공안위원회가 주도하지도 않았으며, 세셰의 주장은 역사적 비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공격이라고 반박했다." "제노사이드를 〈집단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 학살〉이라고 정의할 경우, 방데 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제노사이드의 범위를 이렇게 확대하면 사실상 모든 학살이 제노사이드에 속하게 되어 제노사이드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제노사이드는 '다른 종족의 전면적인 파괴를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학살'로 한정되어야 한다." "방데 학살이 제노사이드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프랑스혁명이 아무런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구체제에서 자행되던 야만적인 폭력은 '자유-평등-형제애'를 외친 혁명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87-8)


3 리옹 반란


"파리에 대한 지방의 저항은 1792년 8월 10일 이후, 특히 9월 학살 이후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를 무시하고 '주권'의 담지자임을 주장하고, 산악파 의원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시작되었다. 보르도를 위시한 지방 대도시는 파리가 주권을 독점하는 데 반대했고, 프랑스 전체 국민의 대표인 국민공회가 주권의 담지자라고 주장했다. 연방주의 반란은 근본적으로는 주권의 소재를 놓고 벌인 투쟁이었다. 서부의 방데 전쟁이 지역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장기간 항전한 반면, 연방주의 반란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단명했다. 캉은 도주한 지롱드파 의원들이 주도했고 보르도는 지역 출신 지롱드파 의원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지롱드파의 반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르세유, 리옹, 툴롱의 반란은 과격한 산악파에 대한 중산계급의 반란이라는 성격의 강했다. 계급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특정 계급이 처벌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란에 참여한 계급이 가장 가혹한 처벌 대상이었다."(115-6)


"연방주의 반란은 파리 정부를 크게 위협했다. 방데 전쟁과 대외전쟁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파리 민중의 사회적 요구도 과격했으며, 파리의 혁명군은 리옹의 전후처리에 동원되어 잔혹함을 과시했다. 콜로 데르부아와 푸셰는 리옹을 없애라는 혁명적 수사를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폴 핸슨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 연방주의 반란이 공포정치를 의사일정에 오르게 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라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공회가 방데 전쟁을 진압한 후 2만~4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행위나, 리옹에서 2천 명의 시민을 학살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것은, 팔머에 의하면, 〈무책임하고 통제불가능한 극단주의자들이 자행한 전제정치〉였다. 그것은 정상적인 국가의 처벌 수위를 넘어선 광적인 사회적 복수였다."(117-8)


4 슈앙 반혁명 운동의 여러 모습


"빅토르 위고의 《93년》은 엄밀히 말하면 서부의 반혁명 전쟁 가운데 슈앙 반혁명 전쟁을 다룬 책이다. 그는 두 반혁명 전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성격의 저항으로 보고 있다. 슈앙 반혁명 전쟁을 제2의 방데 전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공화주의자 위고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그에게 서부의 반혁명 전쟁은 〈진리와 정의와 권리와 이성과 해방에 맞선, 당당하되 긴 무지의 저항〉, 중앙에 대한 지역의, 문명에 대한 야만의 저항이라는 오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저항,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지만, 〈진보에 공헌한〉 저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고는,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고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고뇌한다. 〈도대체 인간을 변질시키는 것이 혁명의 목적이란 말인가? 가족을 파괴하고 인간성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혁명을 감행했단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1789년 혁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지고의 실체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지 그것들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146-7)


5 가톨릭교회의 수난


"1789년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자 오랜 기간 왕정과 공생해오던 가톨릭교회 역시 붕괴를 면하기 어려웠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과는 반대로, 프랑스혁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박해했다. 혁명은 선서 거부파는 물론이고 선서파도 박해했으며, 나아가 프로테스탄트교회, 유대교회 등 일체의 종교를 박해했다. 기존의 종교는 미신에 불과했고, 프랑스혁명이 계시이자 섭리이자 진정한 종교였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와 양립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혁명은 종교를 종교 본연의 일에만 전념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속화'라는 유산을 남겨주었다. 세속화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정치는 종교에 개입하지 않고 종교 역시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속화는 이런 의미에서 종교가 정치라는 오염에서 벗어나 순수해진 것으로, 공포정치 시대에 극성을 부리던 파괴적인 탈그리스도교와 구분된다."(170-2)


6 '열월 정변'과 공포정치의 청산


"역사학에서 reaction이 반동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후다. 레닌이 죽은 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을 혁명을 '타락'시킨 새로운 열월파라고 비난했다. 프랑스혁명사의 자코뱅 해석에 의하면, 자코뱅과 산악파와 상퀼로트가 순수하고 강고한 혁명을 전개하던 혁명력 2년의 영웅적인 시기는 열월 9일에 파괴되었고 그 후 '반동'이 진행되었다. 반면, 수정 해석을 지지하는 역사가들은 〈열월의 반동〉 대신 〈열월 9일〉 혹은 〈열월파 국민공회〉 같은 용어를 선호하며, 열월 9일의 사건을 〈과거로의 회귀〉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프랑수아 퓌레는 열월 9일을 혁명 자체의 끝이 아니라 민중적 형태의 혁명에 의해 감추어졌던 또 다른 형태의 혁명을 드러내준 사건으로 본다. 그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전쟁과 공포정치 때문에 궤도에서 이탈한 혁명을 본궤도로 복귀시킨 사건이었다. 박즈코가 열월의 사건을 혁명의 종식이 아니라 〈공포정치의 종식〉으로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175-6)


"혁명력 2년 열월 9일,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파를 제거했다. 공포정치의 청산과 함께,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공포정치가들도 청산되었으며 민중운동도 쇠퇴했다. 전쟁, 내전, 공포정치에 지친 민중운동은 열월 9일 이전에 이미 동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통제경제를 폐지하고, 상퀼로트를 축출하는 등 민중운동을 억압했으나 민중의 저항은 약했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혁명력 3년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정치의 재림과 상퀼로트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온갖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혁명은 민중혁명에서 벗어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했다. 열월파 국민공회 시기는 억울한 혐의자들을 석방하고, 지롱드파 의원을 복권시키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야만적인 박해를 중단하고, 방데인을 사면함으로써 내전을 완화시키고, 과격한 자코뱅 혁명가와 상퀼로트를 제거하는 등 사회를 안정시키고 혁명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시기였다. 한마디로 공포정치를 청산한 시기였다."(207)


2부 혁명가


7 라파예트─세 혁명의 영웅


"라파예트는 '혁명'과 '질서'의 조화를 잡으려고 노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인들부터 현대인들에 이르기까지 양분된다. 라파예트에 대한 가장 유명한 평가는 그를 〈두 세계의 영웅〉이요 프랑스의 워싱턴으로 보는 것이다. 이 평가는 라파예트가 자유의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1792년에 공화정이 수립된 후 혁명 프랑스를 탈출한 라파예트는 당시의 혁명가들로부터 혁명과 조국을 배신한 자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다. 라파예트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그의 성격과 능력에 대한 것이다." "19세기 공화주의 역사가인 미슐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가는 미라보와 나폴레옹의 평가를 수용하여 라파예트를 현실 정치와 사회적 갈등에 무지한 미성숙하고 무식하고 공상적이고 허영심 가득한 모험가로 보았다. 라파예트 전문가인 고트촉은 젊은 귀족 라파예트가 미국 혁명에 뛰어든 것은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젊은이가 도피한 것으로 보았다."(239-40)


"역사가들과 달리 대중은 라파예트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2007년 라파예트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두 세계의 영웅'을 팡테옹에 안치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라파예트가 자유의 대의에 헌신했음을 인정한다 해도, 혁명전쟁이 한창일 때 조국을 버린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라파예트의 팡테옹 이장 시도는 무산되었다. '두 세계의 영웅'은 '자유'의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권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가 자연권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은 자유였다. 그에게 '자유'는 종교와 마찬가지였다. 1790년 라파예트는 〈봉기는 인간의 권리들 가운데 가장 신성한 권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구체제의 폭정이건 자코뱅의 폭정이건 외국의 폭정이건 어디에서건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에 맞서 저항이라는 신성한 권리를 행사했다. 1793년 6월,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라파예트는 에냉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유를 〈나의 신성한 광기〉라고 소개했다."(241-2)


8 시에예스 신부─혁명의 시작과 끝


"시에예스에 따르면, 제3신분은 국가의 모든 생산을 담당하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일 계급인가? 제3신분은 크게 부르주아와 비부르주아─도시 수공업자와 농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부르주아는 자본가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자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부르주아는 어원대로 도시bourg 거주민이라는 뜻이다. 중세 이래 구체제에서 부르주아는 시민권과 정치적인 권리를 가진 도시 거주민으로 '법적으로' 인정된 계급이었다. 부르주아의 18세기 의미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귀족, 교양인, 부유한 토지 소유 계급이었다. 우리가 흔히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할 때 그 부르주아의 의미는 자본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민이라는 의미이다. 시에예스는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으로 태어났고 본인도 이런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 시에예스가 혁명적 역할을 기대한 계급은 제3신분 모두가 아니라 제3신분 가운데 부르주아 계급이었다."(252-3)


"시에예스를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민중을 경멸하고 상황과 권력에 따라 변절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르주 르페브르는 시에예스를 주교가 되지 못해 귀족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정치가라고 평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말한 '두더지'라는 평도 유명하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 부르주아 혁명의 관점에서 시에예스를 바라보면 다른 면이 보인다. 시에예스는 산악파와 상퀼로트가 지향한 직접민주주의에 반대했고, 그것의 토대가 된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덕에도 반대했다. 시에예스에게는 정치적 덕이 아니라 물질적 복지가 근대 유럽 국가의 목표였다. 시에예스는 혁명이 19세기와 20세기에 유럽과 유럽 이외의 지역에 전달한 대의제 관념을 가장 완벽하게 대변한 인물이었다. 시에예스는 루소와 달리 대의제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사상은 뱅자맹 콩스탕 같은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269-70)


9 콩도르세─계몽사상가에서 혁명가로


"콩도르세는 계몽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이성주의자였다. 볼테르보다 과격한 반교권주의자였고 과격한 무신론자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장애물은 〈편견, 불관용, 미신〉이었다." "콩도르세는 보호무역주의자 네케르에 반대하여 튀르고의 중농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자유무역이야말로 인류의 진보에 필수라고 생각했다." "혁명 발발 후 콩도르세는 프랑스 전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도량형 단위를 통일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791년 3월 26일 의회는 '미터'를 국가 도량형의 표준 단위로 결정했다. 콩도르세는 달랑베르의 뒤를 이어 《백과전서》의 편집에 적극 참여하여 수학 관련 논문 24편을 기고했다. 콩도르세를 통해서 수학과 통계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응용되는 근대적인 학문이 되었다." "콩도르세는 미국의 인권선언과 헌법이념을 지지했으며, 여성·프로테스탄트·유대인·흑인노예 같은 소수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팸플릿들을 발표했다."(275-6)


"콩도르세의 계몽사상과 혁명사상은 그의 유작인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역사적 개요》에 종합되어 있다. 혁명이 폭력과 아나키의 위협을 받고 자신의 앞날에는 기요틴이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계몽사상가로서 인류의 진보는 계속될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간직했다." "'진보'가 콩도르세의 독창적인 개념은 아니다. 보댕, 파스탈, 데카르트 같은 프랑스 근대 철학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했으며, 18세기의 사상가 가운데 카스텔뢰,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볼네도 진보를 지지했다. 특히 콩도르세의 정치적 멘토인 튀고르는 1750년 소르본대학에서 《인간정신의 연속적인 진보에 대한 철학적 개요》를 발표한 바 있다. 콩도르세는 섭리의 개념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완전히 세속적인 차원에서 '진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진보론에서 진보했다." "콩도르세 사후인 1795년에 출판된 《개요》는 계몽철학의 유언이었고 포스트 테르미도르의 참고서가 되었다."(297-301)


10 당통─구국의 영웅인가 부패한 기회주의자인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다. 그들은 서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혁명을 이끌어왔다. 그들은 〈혁명의 두 기둥〉, 〈자유의 두 기둥〉으로 불렸다. 19세기에 공화주의 전통은 당통을 복권시켰다. 미슐레는 1792년 여름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한 당통을 혁명의 화신이라고 평가했고, 당통의 죽음과 함께 공화국이 죽었다고 보았다. 에드가 키네는 당통의 〈대담함〉 연설에서 민중의 함성을 들었다. 그 무렵, 실증주의자인 콩트는 당통을 실증주의의 예언자로 묘사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에는 볼테르의 부정적 합리주의, 루소의 종교성, 디드로의 원原실증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혁명기에 각각 〈지롱드파의 회의주의, 로베스피에르의 신정정치, 당통의 갱생적 해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갱생적 해방이란 그리스도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제3공화국의 공화주의자들은 혁명의 공화주의적 화신이면서도 공포정치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을 찾았는데 당통이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333)


"로베스피에르는 '청렴지사'였다는 점에서 당통의 부패는 더욱 비교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당통은 부패했을까? 거의 모든 역사가는 당통이 돈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프랑수아 퓌레는 마티에가 입증한 자료들이 당통의 부패를 확인해준다고 인정했지만, 역사는 〈도덕의 학교가 아니다〉라며 당통이 혁명의 대의를 위해 기여한 바를 간과하지 않았다." "국가가 혁명과 전쟁이라는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혁명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도덕'이나 '이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통은 혁명을 이상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거나 '덕의 공화국'을 건설한다거나 하는 천년왕국적인 관념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게 혁명은 인간의 조건을 현실적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현실에 발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적을 박멸하기보다 화합하려 했고,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려 했으며,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다."(334-6)


11 로베스피에르─혁명의 수사학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루소와 동일시했다. 그가 쓴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장 자크 루소의 영혼에게 바치는 헌사〉는 정치적 유언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가 꿈꾼 새로운 사회는 '덕'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 '덕'은 〈신과 같은 분〉으로 추앙하는 루소가 제시한 것이다. 〈헌사〉에서 유독 《고백》만 강조한 것은 '박해받는' 루소의 이미지를 자기의 이미지에 투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가 동시대의 계몽사상가들로부터 박해받았듯이 자신도 동시대의 혁명가들로부터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박해의식은 혁명이 심화될수록 그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혁명기의 일반적인 정신병리가 그렇듯이 로베스피에르는 의심, 불안에 시달렸으며 그럴수록 집요하게 음모를 고발했다. 그에게 비우호적인 매체들은 그를 〈정신병자〉, 〈광인〉이라고 부르는 등 그의 심리 상태를 의심하기도 했다."(341)


"로베스피에르가 요구하는 (정치적) '덕'은 국가의 법을 따르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바로 이 덕으로부터 공포가 나온다.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은 반혁명적이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평화시라면 이런 사람들은 정상적인 법 절차에 따라 재판받고 처벌받을 것이지만 혁명시에는 이러한 절차를 따를 수 없다. 〈신속하고 준엄하며 단호한 정의〉가 필요하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정부는 폭정에 대한 자유의 전제專制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자유의 전제〉라는 모호하고 모순적인 말은 자칫 로베스피에를 아나키스트 같은 자유주의자로 오해하게 할 수 있으나, 그가 말한 자유는 혁명기의 자유였고, 개인적인 자유나 시민적인 자유가 아니라 공적인 자유, 국가의 자유였다. 따라서 자유의 전제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반反자유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에게 공포정치, 자유의 전제, 덕의 공화국은 동일한 수사였다."(363)


12 마라와 코르데─혁명의 두 순교자


"마라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의 재산, 자유, 생명을 침해할 권리가 있다.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압하고 노예화하고 학살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마라는 의회의 혁명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라는 《민중의 친구》를 간행하면서 철저하게 민중의 입장을 대변했다." '1793년 4월 5일 자코뱅 클럽 의장으로 선출된 후 마라는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지롱드파에 맞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반혁명이 국민공회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봉기합시다. 예, 봉기합시다! 혁명의 모든 적과 혐의자들을 체포합시다. 우리가 절멸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음모자를 가차 없이 절멸시킵시다. 뒤무리에가 왕정을 회복하기 위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축출된 이후에도) 마라는 욕조에 들어가서도 쉬지 않고 국민공회에 보복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의원들은 마라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라의 생물학적 생명은 물론 정치적 생명도 사실상 끝났던 것이다."(381-4)


"(마라를 살해한) 코르데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구국의 영웅이자 통합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코르데는 귀족이면서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공화파와 왕당파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는 인물로 기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그리스도교 이름 Marie Anne Charlotte Corday은 쉽게 그녀를 공화국의 수호여신 '마리안'으로 변모시켰다. 코르데는 원했던 대로 마라를 죽였고 희망했던 대로 천사로, 잔다르크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기대했던 마라의 죽음과 함께 자유가 찾아왔는가? 마라는 이미 정치적 생명이 끝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다. 마라의 경쟁자들은 내심 마라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코르데는 본의 아니게 그들을 도와준 셈이 되었다. 코르데는 마라를 영웅으로, 자유의 순교자로 만들었고, 그의 숭배에 불을 붙인 것이다." "마라를 '민중의 친구'로, 코르데를 반혁명적인 왕당파로만 보는 것은 복잡한 역사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411-2)


3부 혁명사


13 버크와 페인의 엇갈린 예언


"국민의회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며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 불가능하고 신성한 권리들〉을 선언했지만, 버크는 이러한 추상적인 계몽주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버크에게 자연법과 자연권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진리이지만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허위다. 국민의회 의원들이나 파리 민중같이 무지하고 천박한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지혜가 없고 미덕이 없는 자유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있을 수 있는 모든 해악 중 최대의 것이다. 그것은 감독이나 규제가 없는 상태의 어리석음, 죄악, 광기이기 때문이다.〉" "버크는 10월 6일 사건에서 공화주의를 예감하며, 광신적인 혁명가들과 무지한 민중이 지배하는 '민주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지배하는 전제정보다 훨씬 잔혹할 것임을 예견한다. 버크는 또한 프랑스혁명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자의적인 전제정으로 전락한 다음 최종적으로는 민중적 장군의 지배로 끝맺을 것임을 예언한다."(425-7)


# 10월 6일 사건 : 파리 민중이 왕과 왕비를 튈르리 궁에 감금한 사건


"페인은 시종일관 공화주의라는 시각으로 프랑스혁명을 바라본다. 페인이 생각하기에 정부 형태는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대의정의 네 종류가 있다. 공화정은 군주정을 제외한 다른 세 형태의 정부와 결합할 수 있는데 대의정과 가장 잘 어울린다." "페인은 미국 독립혁명을 이어받은 프랑스혁명이 유럽혁명 나아가 세계혁명의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불법적인 전제군주에서 해방되어 공화국을 수립하면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낙관했으며 '유럽의회'의 구성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혁명은 전쟁과 공포정치로 탈선했다. 혁명이 전쟁과 민중 개입을 유발해 공포정치로 탈선할 것이라는 혁명의 메커니즘을 내다보지 못한 페인에게 그것은 탈선이었다. 페인은 프랑스에서도 미국 독립혁명과 같은 공화주의 혁명이 성공하여 번영을 이룰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통적인 왕국 프랑스와 신생국 미국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페인의 이상주의는 고상했으나 비현실적이었다."(442-3)


14 미슐레의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


"미슐레가 시도한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의 주인공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민중이다. 민중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옳다는 그의 민중관은 다분히 낭만적인 인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학살의 민중은 7월 14일의 민중이나 8월 10일의 민중과는 다른 민중이었다는 미슐레의 변론은 역사적이지 못하다. 민중은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이나 브리소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민중을 덜 계몽된 존재로 파악했고,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인식했다." "미슐레는 혁명이 본궤도를 달리던 시기를 민중 혹은 민중과 엘리트가 함께 혁명을 주도하던 시기로 보는데, 바로 1789년 7월 14일부터 1792년 8월 10일까지이다. 민중이 혁명 전선에서 물러나고 엘리트 혁명가들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혁명은 궤도에서 이탈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공포정치 시기가 바로 그 시기이다. 미슐레는 이 두 시기를 대조적으로 바라본다."(464-5)


"미슐레는 〈의심〉, 〈질투〉, 〈고발〉, 〈무고〉, 〈비방〉, 〈독선〉, 〈위선〉 등과 같은 용어로 로베스피에르의 행동을 분석하며, 로베스피에르를 〈대고발자〉, 〈이단 재판관〉이라고 규정한다. 미슐레는 로베스피에르가 〈청렴지사〉라는 세간의 평가를 거부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도덕주의를 무기 삼아 〈내적인 숙정〉을 외치는 사람보다는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적과 타협하고 필요하면 매수하는 당통을 위대한 정치가로 보았다." "미슐레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당시 국민은 국왕 처형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산악파는 다수파인 지롱드파에 대한 정치공세 차원에서 국왕 처형을 주장했고, 그 결과 왕을 순교자로 만들어 왕국을 신성하게 만들고 교회를 부활시킴으로써 공화정에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루이 16세는 유죄였으나 〈당시로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고, 처형은 국가 이익을 해쳤다는 것이 공화주의 혁명사가가 〈당시의 모든 역사가에 맞서서〉 국왕 처형을 비판한 이유이다."(463-4)


15 한나 아렌트와 프랑스혁명


"아렌트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미국혁명과 마찬가지로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섰으나, 빈자들이 혁명에 개입하면서 '정의'가 '법'을 위협했고 역사적으로 누적된 고질적인 사회문제가 사회혁명을 일으켜 최종적으로 '자유의 전제', '덕의 공포', '공포정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은 공화국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혁명을 넘어 사회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이유로 진정한 혁명의 지위를 누려온 반면, 미국혁명은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에 그쳤을 뿐 혁명으로 진화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렌트는 이러한 인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렌트는 불평등, 빈민 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한 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공화국의 수립을 진정한 혁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미국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혁명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이 프랑스혁명을 모델로 삼음으로써 그 역시 재앙으로 끝나고 말았다."(485-6)


16 알베르 소불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


"소불이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한 역사가라는 사실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불이 근대의 농민을 중세의 농노처럼 묘사한 것, 귀족의 특권을 과장한 것,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한 것, 민중혁명의 폭력성에 대해 둔감한 것 등은 바로 이념적 편향성에서 나온 것이다." "소불이 외면한 것,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이고, '자유, 평등, 형제애'에 가려진 폭력이며, 롤랑 부인이 절규한 자유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이다. 소불이 1791년 헌법을 부르주아 헌법이라고 폄하하고 1793년 산악파 헌법을 〈정치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확정지은 헌법〉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1793년 헌법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졸속 제정되었고, 콩도르세 헌법안보다 민주주의가 후퇴한 헌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 헌법은 헌법으로 시행하기에 적절하지 못했고 산악파 혁명가들에게는 의회 선거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시행이 유보되었다가 폐기되었다."(505-6)


"소불은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고, 로베스피에르를 〈어떤 상황에서도 통찰력 있고 단호하게 민중의 권리를 옹호했다〉라고 평가했다." "소불은 로베스피에르가 부르주아로서 노출한 모순과 한계를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라 유심론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임을 노출하는 또 다른 편견이다." "소불은 마르크스주의 도식에 의거하여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규정하며, 부르주아 혁명에서 민중혁명으로 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주목한다. 그는 '자유의 전제'에서 희망을 본다. 그는 민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혁명사를 해석하며 평가한다. 민중사가에 의하면 전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왕의 전제는 나쁘지만 민중의 전제는 그렇지 않다. 왕의 폭력은 나쁘지만 민중의 폭력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클로드 마조리크의 말대로 소불의 《프랑스혁명사》가 '고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고전이다."(506-7)


17 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면, 부르주아 혁명의 발발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구체제는 봉건적 생산양식의 모순이 축적된 위기의 시기여야 한다. 대부분의 프랑스혁명사 개설서가, 특히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가 한결같이 '구체제의 위기'로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세가 끝나고 300~400년이 지났음에도 혁명 전 프랑스 농촌은 여전히 가혹한 봉건적 부과조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기에다가 혁명 전에 나타난 '귀족의 반동'은 구체제의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것이니, 봉건제를 타파하는 부르주아 혁명은 필연성과 정당성을 획득한다." "퓌레는 '상황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혁명 초부터 〈혁명은 전쟁이었고 평화는 반혁명이었다〉며 전쟁에 혁명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 역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혁명에서 생겨난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퓌레의) 관점은 혁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반혁명파의 혁명관이기도 하다."(518-21)


"퓌레는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자코뱅주의에서 찾는다. 퓌레가 보기에, 러시아혁명은 자코뱅의 이데올로기를 이어받았다. 퓌레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혁명의식을 떠받치는 두 개의 신념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는 모든 개인적·도덕적·지적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정치적인 해결 대상으로 보는 신념체계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행동과 지식과 도덕 사이에는 완전한 합치가 존재한다는 신념체계이다. 정치가 진실과 허위의, 그리고 선과 악의 영역이 될 때, 그리고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것이 정치라고 할 때 역사의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동력을 지니게 된다. 마르크스가 적절히 말했듯이, 혁명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환상'을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혁명은 사회경제적 적대감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적 환상의 산물이다. 프랑스혁명사가로서 퓌레는 환상에 의해 과거를 바라보지 말 것과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525-7)


18 장클레망 마르탱의 프랑스혁명 구하기


"장클레망 마르탱이 자신의 저서 《폭력과 혁명》에서 자코뱅 프랑스혁명사 해석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전략은 폭력의 '평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폭력은 프랑스혁명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동시대의 대서양 연안 국가들에서 일어난 혁명에서도 자행되었다. 여기에서 장클레망 마르탱은 프랑스혁명은 다른 혁명들보다 더 폭력적이었음을 인정한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이 극심했던 것은 그것이 구체제의 폭력과 연속이면서 동시에 '혁명'이라는 '새로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폭력이었다〉는 수정 해석의 공세에 맞서 자코뱅 혁명사가들이 취한 전략은 '비교'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혁명의 폭력성을 당연시하는 것이었다. 혁명만 폭력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반혁명도 폭력을 자행했으며, 프랑스혁명만이 아니라 다른 혁명에서도, 구체제에서도 폭력이 자행되었는데 왜 프랑스혁명만 비난하느냐는 것이다."(534-8)


"그러나 '공포정치' 특히 1794년 봄 이후 자행된 '대공포정치'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에서 혁명이 책임질 사안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가장 중대한 과제와 맞닥뜨린) 장클레망 마르탱의 전략은 '공포terreur'는 인정하되 '공포정치Terreur'는 부정하는 것이었다. 방데 전쟁에서 학살은 있었어도 제노사이드는 없었듯이, 공포는 있었어도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법적인 공포, 즉 '공포정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장클레망 마르탱은 로베스피에르의 권력 집중을 두려워한 과격 공포정치가들이 목월의 법을 악용하여 죽음을 양산함으로써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 공포정치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열월 정변'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한 후 〈공포정치〉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모든 책임을 로베스피에르에게 전가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가 실제로 의사일정에 오른 것은 1793년 9월 5일이 아니라 '열월 정변' 이후이며, 명실상부한 공포정치가 자행된 것도 이때라는 것이다."(543-8)


4부 맺음말


"프랑스혁명은 미국 독립혁명과 달리 정치혁명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오랜 절대군주정 체제를 지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그만큼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반발은 혁명 못지않게 커서 내전으로 충돌하기 십상이었다.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은 혁명가들은 이상주의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도 대외전쟁을 도발할 필요을 느꼈고, 유럽의 강국인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과 체제 변화는 주변의 왕정 국가들에게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은 대외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전쟁은 비상 체제를 요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공포정치였다. 공포정치를 낳은 것은 직접적으로는 전쟁이지만 근원적으로는 혁명이었다. 혁명은 구체제를 타도하고 신체제를 건설하여 역사의 진보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지만 공포정치와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위험한 실험이다."(576)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이탈한 것은 프랑스가 충분히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혁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계몽사상가들은 프랑스 민중이 충분히 계몽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이 점에서는 루소도 마찬가지였다. 혁명 전부터 공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라파예트나 브리소 같은 혁명가들도 당시의 프랑스에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입헌군주정의 수립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은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혁명, 그것은 순수, 선함, 독선, 위선, 오만, 광기가 용솟음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잔혹한 격전장이다. 혁명은 전쟁이고 폭력이다.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프랑스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의 모범적인 시민혁명으로 동경하고,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5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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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공포정 - 혁명의 특효약인가, 위약인가?
휴 고프 지음, 주명철 옮김 / 여문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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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와 공포정


# 프랑스 혁명을 대하는 기존 입장

1 우파 : 혁명은 폭력 그 자체였으며, 혁명이 품고 있던 공포정은 20세기 독재정의 본보기를 제공했다.

2 좌파 : 혁명은 공화국을 위협하는 적들에 맞서 전략적으로 공화국을 수호한, 현대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수정주의 주장의 중심에는 18세기 프랑스의 정치문화와 제네바 출신의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퓌레는 루이 14세가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이후 공개적 정치 토론을 의도적으로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 사회지도층은 독서회, 문학 아카데미, 프리메이슨 집회 같은 사적 모임에서 만나 정치 주제를 토론했다. 이처럼 흔치 않은 풍토에서 그들은 권력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치를 추상적으로 토론했고, 이성만이 국가의 당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행정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마치 기하학적 대상처럼 대하는 추상적 관념에 끌렸다. 그런 점에서 퓌레의 주장은 버크의 주장과 매우 가깝지만, 퓌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루소의 영향을 강조했다." "루소는 인민주권을 바탕으로 정부를 수립하고, 공동체의 '일반의지'가 모든 결정을 통제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한다면 원시사회의 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41)


"루소의 사상은 다른 방향에서도 혁명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치로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했지만, 국민의회는 정기적인 선거로 국회의원을 뽑는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했다. 그 결과, 인민주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던 급진주의자들은 곧 루소의 사상을 이용해서 이 제도가 인민주권을 부인한다고 비판하고,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 실력행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급진적 민주주의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합친 결과 이따금 민중 폭력 사건이 터졌고, 1793~94년의 공포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루소가 사회적·도덕적 갱생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역시 불안의 원인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행동이 사람들의 품행을 하룻밤 사이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고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친 낙관론이 분명했다. 사회와 도덕을 완전히 갱생하지 못했을 때 급진주의자들은 실패의 원인이 음모 때문이라고 비난했으며, 음모와 싸워 이기려면 공포정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1990년대에 등장한 후기 수정주의에 속하는) 이서 울럭과 파트리스 이고네는 공포정을 근대 사회민주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라고 묘사했고, 장 피에르 그로스는 공포정 시기에 지방으로 파견된 자코뱅파 의원, 이른바 '파견의원'의 활동을 연구해서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로스는 수정주의자들이 공포정 시기에 내란이 일어난 지방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공포정이 내포한 것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전 지역에서 4분의 3 이상이 내란을 겪지 않았고, 파견의원들은 대부분 법적 평등·교육 확산·사회정의 사상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 실용주의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반대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격하게 말했지만 대개 수사법에 그쳤다. 그들은 현장에서 실제로 재산권을 존중했고, 누진세·학교 설립·식량 공급·복지 정책을 개혁의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 자코뱅주의는 단두대를 생각나게 하지만, 건설적인 사회개혁에 대해서도 많은 얘깃거리를 제공했다."(45-6)


"공포정의 발단에 초점을 맞추어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정주의자들은 1789년과 1790년 사이 혁명의 첫 해가 공포정의 기초를 확립한 결정적 시기였다고 주장했지만, 티모시 타케트는 국민의회가 이룩한 업적에 관한 연구에서, 혁명은 처음부터 과격했고 폭력 지향적이었다는 퓌레의 의견을 부인했다. 그 대신 그는 의원들이 처음에는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귀족과 힘을 합쳐 나라를 개혁하려고 노력했지만 귀족이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급진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1789년의 사건들은 [퓌레가 주장했던 것만큼] 이념에 좌우되지 않았다. 실제로 타케트는 루소의 영향도 비교적 가벼웠다고 주장했다. 그보다는 우파도 좌파만큼 '급진적'이었고 타협을 몰랐기 때문에 정치적 과정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1789년의 군중 폭동에 대한 연구는 협상으로 해결책을 마련하는 시도가 실패했을 때 폭력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타케트의 방법론을 뒷받침했다."(46-7)


2 공포정의 서막? 1789년 혁명부터 1793년 공화국까지


"1789년의 빛을 바래게 만든 첫 번째 요인은 정치적 갈등이었다. 1789년부터 1791년까지 수행한 개혁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화가 났다. 그들은 변화의 속도와 범위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양원제 군주정주의자인] '모나르시앵monarchiens'과 [모든 개혁에 반대하는] '사악한 자들noirs'이 생겼다." "우파가 개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결과는 중대했다. 다수파 애국자들은 혁명의 반대자들과 의미 있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대를 반혁명의 증거로 해석하고 우파가 모든 변화를 차단하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씌웠다. 비판을 음모의 증거로 보는 경향은 18세기에는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1789년과 1790년의 긴장이 높은 정치 풍토에서 '음모'는 혁명가와 반혁명가가 모두 애용하는 정치적 수사학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파 집단이 왕을 파리 밖으로 빼돌리거나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음모론은 그럴듯하게 보였다."(56-8)


"불안을 조성한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왕의 태도였다. 1791년 6월 20~21일 밤에 거행된 '바렌 도주' 사건은 굴욕적인 실패로 끝났다." "도주 소식을 듣자마자 국민의회는 왕권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대다수 의원은 자신들이 거의 2년 동안 매진했던 헌법을 유지하기 원했고, 입헌군주정이야말로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제도라고 필사적으로 믿었다. 그들은 공화국이라는 대안을 혼란 수습용 처방으로 보았다." "1789년 이래 애국파 가운데 급진좌파의 소집단은 온건파 애국자들을 비판하고 있었다. 북부의 아라스 출신 변호사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좌파는 헌법이 민주주의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1789년 겨울에 우후죽순처럼 생긴 정치 클럽과 급진적 신문에서 비슷한 견해를 볼 수 있었다. 센 강 왼쪽 인쇄업자 구역에 있던 코르들리에 클럽이 가장 유명했다." "코르들리에 클럽은 노골적으로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군주정을 어떻게 할지 민주적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요구했다."(61-5)


"(루이 16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1792년 8월 10일의 (상퀼로트) 봉기는 혁명이 일어난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다. 그날 튈르리 궁 스위스 수비대 약 800명과 공격진 중 376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 후 6주는 '첫 공포정'으로 알려졌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더욱 격렬하게 정치 폭력을 자행했다." "8월말 파리 코뮌은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로 향한 도로를 보호하는 마지막 요새인 롱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혁명 혐의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이센군이 베르됭 요새를 지나 진격한다는 소문이 9월 2일 파리에 퍼지고 그때까지 최고조에 달하던 긴장이 폭력으로 분출했다." "상퀼로트는 여러 패로 나뉘어 감옥에서 '혁명' 재판을 실시하고 즉격처분했다. 닷새 동안 1,100~1,300명의 수용자들이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감옥 마당에서 죽을 때까지 난도질이나 곤봉질을 당했다. 이것을 '9월 학살'이라 불렀다."(71-3)


"1789년 혁명을 돌이켜볼 때 아주 눈부신 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분명히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나라를 두쪽으로 갈라놓았다. 애국파가 밀어붙인 변화에 귀족 대다수, 적어도 가톨릭교도 절반과 왕이 저항했다. 왕의 바렌 도주는 애국파를 분열시키고 유럽과 치른 전쟁의 망령을 불러오면서 위기를 고조시켰다. 애국파는 좀더 차분한 정치적 분위기에서 온건한 왕정주의자를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어야 옳았겠지만 1791년 가을까지 화해를 추구하는 일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브리소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지롱드파는 전쟁으로 유럽에 혁명을 일으키고 역적들을 쓸어버리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뒤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군사적 승리와 국내 반혁명 세력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말을 늘어놓아 정치적 온도를 끌어올렸지만, 그들이 장담했던 것과 달리 연전연패했을 때 자코뱅 급진파·상퀼로트와 견딜 수 없을 만큼 쓰라린 틈만 넓혔다."(81)


"지롱드파의 의사와 달리 왕을 몰아낸 사람들은 급진파와 상퀼로트였다. 그들과 지롱드파의 갈등은 9월 학살과 왕의 재판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6개월 이상 더욱 확산되었다. 근본적으로 지롱드파는 민중의 급진주의와 폭력을 싫어하는 온건한 공화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더욱이 폭력과 타협해야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미처 그럴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반면 국민공회의 경쟁자인 몽타뉴파(산악파)는 폭력과 타협할 태세를 갖추었다. 1793년 봄, 프랑스는 공화국이 분명했지만 분열한 상태였고, 정치 토론을 한답시고 서로의 계략과 음모를 비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유럽과 전면전을 앞두고 여차하면 폭력이 난무할 만큼 날마다 급진화하는 파리를 만나야 하는 공화국이기도 했다. 분열한 공화국, 유럽과 벌인 전쟁, 음모의 소문, 민중 폭력의 두려움은 공포정을 불러올 치명적인 요소였다."(81-2)


3 1793년 3~9월, 공포정의 시작


"1793년 3~4월에 국민공회는 긴급조치를 내리면서 공포정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상퀼로트와 손잡은 몽타뉴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한 뒤 국민공회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지만, 공화국은 새로운 문제를 떠안았다. 남부의 몇 개 도시에서 숙청을 반대하고 사태를 원상복구하려고 이른바 '연방주의 반란'을 일으켰다. 몽타뉴파는 군사적 패배를 역전시키고 연방주의와 반혁명을 진압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파리의 급진파와 상퀼로트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상퀼로트 역시 군사적 승리와 내전 종식을 원하는 한편, 혁명으로 이룩할 사회적·정치적 모습도 분명히 그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리에 식량 공급을 확실히 보장하려면 국가가 경제를 통제해주고, 혁명의 적들에게 단두대를 더 많이 이용하고, 인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구민의회와 시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이 몽타뉴파와 맺은 동맹은 쉽게 깨질 터였다. 양측은 공화국을 구하고자 했지만 공화국의 의미를 달리 생각했다."(85-6)


"1793년 봄, 서부의 4개 도(방데·되세브르·멘에루아르·사르트)에서 장인과 농민이 징집에 저항하고 징병관들을 공격하면서 내란(일명 방데의 난)이 일어났다." "국민공회는 징집으로 불거진 소요에 대처하기 위해 '파견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의원 82명에게 방대한 권한을 주어 각 도에서 징집을 감독하고 공공질서를 회복하도록 했다. 반혁명의 위협을 분쇄하기 위해 혁명법원을 3월 10일에 설치했다. 판사 다섯 명과 배심원 열두 명으로 법정을 열어 평결을 내리면 24시간 안에 실행해야 하고, 피고에게 항소권을 주지도 않았다. 국민공회는 방데에서 권위를 강화하려고 3월 19일에 무장반도를 대상으로 명령을 내렸다. 징집에 반대하고 폭동에 참가하는 자를 붙잡아 재판도 하지 않고 24시간 안에 처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후에는 크고 작은 마을마다 감시위원회를 꾸려 외국인을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3월 28일에는 외국에서 국내로 돌아온 망명자들을 무법자로 취급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형한다고 규정했다."(87-92)


"국민공회의 구국위원회는 전쟁을 수행하려고 한층 더 노력하는 한편 식량 공급에 힘쓰라는 상퀼로트의 요구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상퀼로트의 요구는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시장이 아니라 보통 사람도 구입할 수 있는 '적정 가격'이어야 한다는 '도덕경제'의 원리를 따랐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식료품·연료 같은 생필품 가격을 통제해달라고 요구했다. 또 민간인으로 '혁명군'을 창설하고, 시골을 뒤져 가격을 올릴 속셈으로 시장에 내놓지 않고 곡식을 쌓아놓은 투기꾼을 찾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몽타뉴파와 구국위원회는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가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국가가 가격을 통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으로 평시의 시장경제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제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불운하게도 어떤 조치─암시장 개입, 사재기 처벌, 공공 곡식창고 설치 등─도 즉시 효력을 보지 못했고, 상퀼로트는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100-1)


"6개월 전인 3월과 4월에 국민공회는 공포정 시기에 나라를 운영하게 될 구국위원회·파견의원·혁명법원 따위의 중요한 기관들을 설치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름을 지나면서 사태가 악화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기관들은 더욱 나빠진 정치 상황에 적응하고 있었고, 공화국이 존속하려면 급진적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군사적 패배와 전반적 붕괴의 두려움이 상황을 약화시킨 주요인이었음이 분명했다. 방데의 난, 연방주의 반란, 통제경제를 실시하라는 상퀼로트의 압력, 더욱 심화한 공포정이 상황을 악화시킨 주범이었다. 그러나 여름의 사건은 국민공회 의원들의 태도도 바꿔놓았다. 이제 의원들은 공화국이 비엔나에서 런던까지, 로마에서 방데까지 방대한 지역을 무대로 펼쳐진 음모 때문에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과 그 음모를 무찌르는 길은 무자비한 힘을 끊임없이 휘둘러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힘은 공포정을 뜻했고, 그 후 네 달간 공포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104-5)


4 1793년 9~12월까지 파리와 지방의 공포정


"급진적 활동가들과 상퀼로트는 9월 대부분을 강하게 압박하는 데 보냈고, 10월에는 기독교를 전방위로 공격해 나라의 대부분 지방에서 교회 문을 닫게 만들었다. 구국위원회는 그들의 압력을 막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급진주의자들이 정치 일정을 완전히 쥐고 흔들지 못하게 막으면서 합헌적 정부를 보호했다. 구국위원회는 몇몇 문제에는 뒤로 물러났고 또 다른 문제에는 선제적으로 행동해서 분란을 막았다. 이미 구국위원회는 연방주의·방데의 난·전쟁에 맞설 힘을 강화해나갔다. 사실상 그들은 두 개 전선에서 공화국의 적, 동맹인 상퀼로트 세력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해가 끝날 즈음 그들이 성공하기 시작했고, 사태의 흐름은 공포정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연방주의자 반란은 실패했고, 방데의 난은 통제 상태에 들어갔으며, 제1차 대프랑스 동맹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국은 안전했고 구국위원회는 전쟁 내각으로 발전해서 3개월 전까지만 해도 갖지 못했던 권위를 과시하게 되었다."(109-10)


"구국위원회의 전략이 성공하자 그 지위도 확고해짐에 따라 국민공회는 보상책으로 위원회의 힘을 강화해주었다. 10월 10일 국민공회는 〈평화 시기가 올 때까지 혁명정부〉 체제를 유지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1793년 헌법'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효력을 정지하는 한편, 구국위원회는 장관들과 중앙정부의 모든 부서를 감독하고 장군을 지명할 권한을 행사하며, 행정부서의 권한이 중첩되어 효율성이 떨어지는 폐단을 바로잡고 행정관을 임명하는 권한까지 장악했다. 그러고 나서 구국위원회는 행정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그 결과, '프리메르 14일 법'(1793년 12월 4일 법)이 나왔다. 그것은 이름과 달리 실질적으로 '긴급헌법'이었다. 이로써 도 행정권을 대부분 빼앗고, 디스트릭트와 시정부가 혁명법을 집행할 책임을 지게 했다. 또한 '긴급헌법'은 파견의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열흘마다 구국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며, 오직 법에서 정한 임무만 수행하도록 했다."(127-8)


"9월 초부터 3개월 안에 공화국은 혼돈 상태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안정된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12월에만 3,000명 이상 처형하면서 혹독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결과였다. 구국위원회와 파견의원들은 연방주의와 방데가 혁명을 뒤집어엎고 구체제로 돌아가려는 국제 음모의 일부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반도들도 특히 방데에서 야만적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들만이 일방적으로 과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란이 공포정을 고조시킨 이유를 일부나마 설명해준다면, 상퀼로트도 국민공회를 압박해서 혁명법원을 강화하고, 반혁명 혐의자의 범위를 확장하고, 통제경제 체제를 강행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포정의 과정에 이바지했다. 1793년 가을에 대다수 의원은 온건한 유화정책이 더는 효과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민공회도 공범이었다. 그들은 프랑스를 구체제로 되돌리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국제 음모에 맞설 합법적인 정치무기야말로 공포정이라고 생각했다."(128-30)


5 1793년 12월~1794년 4월, 파벌 타파


"공화력 2년 프리메르 14일(1793년 12월 4일)의 '프리메르 법'을 적용하는 데 여러 달이 걸렸다. 12월 중순에는 파리의 상황마저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구국위원회의 권위를 위협하고 공포정의 미래에 전반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논쟁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관용파Indulgents로 부르는 온건파 집단이 이제 공포정을 완화하고 정상적인 헌정질서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주장에 발끈한 급진파, 이른바 에베르파는 오히려 공포정을 강화해 반혁명의 뿌리를 영구히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파가 지난 여름부터 시작한 갈등의 바람은 12월에 표면으로 올라왔고, 1794년 봄까지 사납게 휘몰아쳤다. 결국 구국위원회는 두 집단을 체포하고 처형해서 사태를 수습했다. 이로써 논쟁은 끝났지만 혁명기에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적 인물이었던 에베르와 당통이 함께 제거되었다. 게다가 공포정의 무기가 내란과 외적이 아니라 정치비평가와 자코뱅파 동료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135-6)


"구국위원회의 위원 열한 명은 모두 비교적 중산층 출신이지만 정치적 성향은 달랐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는 민주주의자였지만 루소의 영향을 받아 정치를 도덕적으로 고찰하고 공포정을 실시해서 프랑스를 애국심과 시민의 덕을 바탕으로 한 이상주의적 민주국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카르노·생탕드레·바레르·랭데 같은 의원들은 실용주의자로서 공포정을 주로 전쟁에 승리하고 반혁명을 물리치는 길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전반적인 성공 비결은 궁극적으로 공화국의 모양새를 갖추는 일보다 공화국을 어떻게든 존속시키려고 함께 헌신했다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이 함께 일하던 거의 열두 달 동안 일부는 지방에서, 다른 이들은 튈르리 궁의 구국위원회 사무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군사작전을 세우고 정책을 결정하고 법안을 기초하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회의를 열고, 자코뱅 클럽과 국민공회에 정기적으로 들르면서 혹독한 일과를 수행했다."(140-1)


"로베스피에르는 공화국이 시민의 덕 관념 위에 서지만, 덕이 전쟁 중의 공화국을 지켜주지는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덕을 뒷받침하려면 공포를 이용해야 했다. 공포는 그 자체만으로는 위험하지만, 덕과 결합하면 공화국과 시민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공포정은 자코뱅주의의 반대자들만이 아니라 지지자들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에베르와 당통이 모두 정치적 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주 불길했다. 그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을 공적인 저항도 받지 않고 쓸어버릴 수 있는데 누가 안전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공포정이 새 단계로 들어갔음을 뜻한다. 이제부터 두 통치위원회를 거스르는 정치토론은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다. 공포정을 끝내자는 관용파 운동은 오히려 반대 결과를 가져와 혁명정부가 모든 비판을 반혁명 음모로 고발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혁명정부는 공포정을 구체제에서 볼 수 없을 만큼 무한히 폭압적인 정치무기로 마음껏 개발했다."(156-61)


6 1794년 4~7월의 대공포정


"프레리알 22일(1794년 6월 10일)에 쿠통은 구국위원회를 대표해서 법안을 발의했다. 그것은 그와 로베스피에르가 기초한 안이었다. 그는 그 목적이 기존의 법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데 있다고 의원들을 안심시켰지만, 사실상 그보다 훨씬 멀리 나간 안이었다. 콜로는 법원이 수많은 역적을 무죄로 판결하고 무고한 애국자를 많이 벌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혁명이 〈자유에 대항하는 폭군을 물리치고, 덕에 대항하는 범죄와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혁명이 존속해야 한다면 덕이 승리해야 하고, 그래서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민 자들을 혁명법원의 과업을 급히 성취함으로써 분쇄해야 했다. 쿠통은 이렇게 말했다. 〈조국의 적을 벌하는 일을 늦춘다면 앞으로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프레리알 법의] 중요한 조항은 바로 그 일을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제 죄에 대한 벌은 오직 사형뿐이었다."(171-2)


"프레리알 법은 공포정의 역사에서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수감자의 50퍼센트 정도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법이 효력을 발휘한 뒤 무죄는 20퍼센트로 떨어졌고, 유죄가 급증하자 처형도 급증했다." "'푸르네', 또는 '한 묶음'[또는 한 배腹]이라는 방식으로, 변론의 기회도 주지 않고 단일한 죄목으로 수십 명씩 한꺼번에 단두대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수를 처형할 수 있었다." "프레리알 법은 지난해 12월 프리메르 법이 나온 뒤 진행하던 중앙집권 과정의 일부라는 설명이 아마도 가장 설득력 있을 것이다. 과단성 있는 파견의원들이 공포정을 혼란 상태로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각 도 법원이 지방민을 가볍게 처벌하지 못하게 하려고 구국위원회는 모든 정치재판을 파리로 집중시킨 뒤에는 처형 속도를 높여 수형자의 수를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길 외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프레리알 법이 그 일을 했고, 그 법의 잔혹성은 거의 모든 수형자가 유죄라는 구국위원회의 신념을 반영했다."(173-8)


"구국위원회는 공포정을 강화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전쟁이 끝난 뒤 덕의 공화국을 맞이할 사회개혁을 설계했다. 핵심 요소는 탈기독교 운동으로 생긴 공간을 채울 새로운 종교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존재 신앙과 영혼의 불멸성이 마련해줄 수 있는 도덕률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인가? 영적인가? 최고존재 숭배는 필시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가졌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롭다는 사실을 잘 알았음에도, 새 종교의 가치가 자코뱅파 이상, 전쟁이 끝나면 창조하고자 했던 사회적 이상향에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최고존재와 단두대는 봄부터 공포정의 핵심이 된 재생과 근절의 두 요소를 함께 지닌 계획의 한 부분이자 조각이었다. 두 가지 모두 반대의 마지막 흔적까지 뿌리 뽑고 군사적 승리와 프랑스 국민의 도덕적 재생을 성취해서 혁명을 '완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178-83)


7 새 공화국의 새 시민 만들기


"자코뱅파의 기본 가치는 평등이었다. 그들은 법 앞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다." "법적 평등은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하 「인권선언」)에 등장했고 그 후의 모든 혁명기 법으로 표현되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지만, 1791년의 헌법에서 매년 최소한 [사흘치 임금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성에게만 선거권을 주었기 때문에 누구나 똑같이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는 못했다(1792년 8월 남성 전체 보통선거로 개정).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남성은 '수동시민'이었고, 이들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혁명 초기에 남녀평등권 사상을 지지하는 정치가와 활동가들의 수는 아주 적었다. 극작가 올랭프 드 구즈는 1790년 가을 「인권선언」을 [「남성의 권리선언」으로] 풍자해서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는 「여성의 권리선언」을 발간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고, 훗날 공포정 시기에 지롱드파에 공감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189-93)


"구국위원회의 사회개혁을 방해하는 온갖 장애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돈이 부족했다는 점이고, 특히 교육 분야에서도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1789년의 「인권선언」보다] 한층 더 발전한 1793년 헌법의 「인권선언」은 교욱권을 '보편적으로 필요한 권리'로 규정했다. 〈사회는 모든 힘을 쏟아 공중의 이성을 증진하고 모든 시민이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혁명의 이상에 어울리는 시민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길을 교육에서 찾았다." "1789년의 혁명은 전반적인 문화활동을 질식시키는 구체제 검열제도를 폐지하면서 시작했으며, 출판의 자유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크게 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공포정 시기에 그는 모든 상황이 바뀌었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위험하며 체제를 뒤집어엎는 것이라고 보았다." "구국위원회와 국민공회는 신문기자·인쇄업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한편, 신문사와 저술가들에게 돈을 주고 찬양 글을 쓰게 했다."(205-9)


"공포정이 18개월 이내에 끝났기 때문에, 그것이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의 태도를 얼마나 바꿔놓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단기적으로 그것은 분명히 실패했다. 공포정이 1794년 늦여름에 끝났을 때 공포정의 사회정책은 대부분 뒤집히거나 페기되었기 때문이다. 빈자가 토지를 살 수 있게 배려한 법도 포기했고, 장소 이름은 옛날식으로 되돌아갔으며, 국가 차원의 초등 의무교육도 붕괴했다. 1794년 12월에 가격과 임금의 최고가격제를 폐지하고, 자유시장경제는 도시 빈민에게 비참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최고존재 숭배도 사라지고, 자코뱅 클럽의 연계망도 강제로 페쇄했다. 테르미도르 반동파는 공포정뿐만 아니라 자코뱅주의의 사회적 이상을 전반적으로 적대시했고, 1789년에 떠오른 재산권과 자립주의에 의존하게 되었다." "19세기 왕정복고 시절로 넘어가면서 혁명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프랑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공포정의 야망은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222-3)


8 1794~1795년, 테르미도르 반동과 공포정의 끝


"수많은 상퀼로트가 공포정 시기의 정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에베르와 코르들리에파의 처형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구국위원회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위원회가 에베르에게 씌운 혐의를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베르와 코르들리에 클럽의 급진파는 거의 1년 전부터 공포정과 가격통제를 요구하는 상퀼로트를 지지했다. 그래서 상퀼로트는 그들을 우상으로 보았는데, 그들이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웠고 두려웠다." "상퀼로트의 공포정 지지가 쇠퇴한 것처럼 국민공회 지지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의원은 군사적 패배를 피하고 내란을 진압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공포정을 지지했지만, 이제 그들은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성취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투옥당하거나 처형당한 사람들의 친구였고, 그 자신의 생존 문제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그들도 역시 분개했다." "아무도 구국위원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지만, 은밀한 장소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논의했다."(231-3)


"[구국·안보] 두 위원회가 언쟁을 시작했을 때 기회가 왔다. 4월에 구국위원회가 공안국을 설치했을 때부터 은근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치안업무는 안보위원회가 맡았는데, 이제 안보위원들은 사전 협의도 없이 자기네 권위를 훼손했다고 분개했다. 프레리알 22일(6월 10일) 법이 마찰을 더욱 심화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쿠통이 안보위원회와 상의하지 않고 국민공회에서 발의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틈을 더 벌려놓았다. 안보위원회 위원 몇 명은 무신론자였고 최고존재 숭배를 역겹게 생각했으며, 심지어 로베스피에르가 슬그머니 기독교를 되살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두 위원회의 차이는 구국위원회 내부의 갈등으로 더욱 심화했다. 카르노는 지난 봄에 군사공격 계획을 세울 때 생쥐스트가 간섭한 것을 두고 분노했다. 콜로 데르부아는 리옹에 파견되어 조제프 푸셰와 함께 일했는데, 로베스피에르가 푸셰를 극단주의 혐의로 소환했기 때문에 분개했다. 수많은 긴장관계에 로베스피에르가 끼어 있었다."(233-5)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7월 29일 국민공회에서 구국위원회의 바레르는 혁명정부가 위기를 딛고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고 주장했다. 안보위원회도 분명히 예전처럼 자기 임무를 계속 수행할 의지를 가지고 로베스피에르 지지자들의 체포영장을 무더기로 발행[하고 모두 106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양대 위원회는 상황을 아주 오판했고, 국민공회가 정치적 권위를 되찾게 되면서 공포정은 몇 주 안에 [쓰나미가] 덮치듯이 무너졌다. 7월 29일 국민공회는 모든 위원회 위원을 4분의 1씩 매달 새로 뽑으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구국위원회와 안보위원회가 권력을 유지하는 기반이던 구성원의 지속성을 무너뜨렸다. 구국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쿠농이 남긴 세 자리를 온건파로 채웠고, 8월 말 즈음에는 옛 위원이 단 세 명만 남았다." "공포정이 붕괴하면서 후폭풍이 불어닥쳤다. 수십 가지 정치 책자와 신문이 나와 공포정을 고발하고 부역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239-40)


"정치적 반동과 개인적 복수가 이내 지방으로 퍼지면서 '백색 공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백색은 부르봉 가문의 색깔이었다. 1793~1794년의 공포정에 동조한 사람은 누구나 공격을 받았다. 1793년 여름 연방주의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자코뱅파가 아주 잔인하게 탄압했던 곳에서 독한 복수의 바람이 불었다." "파리의 상퀼로트도 지방 자코뱅파와 비슷한 처지였다. 이미 1794년 봄 구국위원회는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박탈했고,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나사를 더욱 조였다. 구민회의를 열흘마다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이고, 반혁명 혐의자를 체포하는 혁명위원회 권한을 박탈했으며, 그 결과 중류 계급이 구민회의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궁핍에 시달리던 상퀼로트는 급진파의 주도로 1795년 4월 1일과 5월 20일에 두 차례 봉기했다." "봉기는 진압되었고, 1,200명 이상의 상퀼로트가 붙잡혔다. 수천 명이 무장해제를 당했고, 차후 1830년까지 파리에서 그 정도 규모의 민중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241-3)


결론


"공포정 시기에 압도적인 다수의 희생자는 전쟁과 반혁명 지역에서 나왔고, 국민공회의 권위에 반대하다가 죽었다. 그들의 혐의를 분석해보면 93퍼센트 이상이 망명·선동·반역·음모·왕정주의 때문에 죽었다. 단지 1.5퍼센트만이 투기나 최고가격제를 무시한 '경제' 범죄로 죽었다." "그러나 공포정을 탄압과 중앙집권으로만 볼 수 없다. 인민주권 이론에 바탕을 둔 정치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이루고, 재산권의 근본 원칙에 도전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자코뱅파의 행동강령도 공포정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전쟁과 내전의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토지를 나누고, 세속적 기본교육 체제를 수립하며, 새로운 종교를 창조하고, 사회복지를 실천하려는 계획은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자코뱅파가 전후에 건설하려는 세계에 대한 순수한 목적을 반영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상퀼로트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저 냉소적인 정치적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250-2)


"공포정 시기 사망자 수에서 정치적 영향으로 눈을 돌리면, 군사적 패배에서 공화국을 구했다는 사실이 가장 명백하다. 방데 반란이 성공했다면, 연방주의 군대가 파리까지 진격했다면, 제1차 동맹이 중대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공화국은 아마 붕괴했을 것이며, [절대군주정이든 입헌군주정이든] 어떤 형태로든 군주정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경우를 종합해볼 때, 공포정은 완강한 성격 때문에 반대파를 만들고, 그 반대를 이용해서 더 많은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스스로 강화하는 힘을 가진 사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정 시기 정치가들이 저항과 반란의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2세기가 지난 오늘날 분명해졌다고 당시에도 항상 분명했다고 볼 수 없으며, 수많은 문제를 음모로 해석하는 습관은 공포정의 수단을 보복하는 데 동원한 것이 정당하다는 그릇된 확신을 심어주었다. 공포를 가한 사람들은 그 자신도 종종 공포를 느꼈다."(253-4)


"1789년까지 지방은 줄곧 독자성과 개성을 많이 유지했다. 혁명이 일어나 초기에 국가통합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지방의 독자성과 개성을 쓸어버렸고, 공포정은 1793년 12월 프리메르 법으로 새로운 지도 위에 중앙집권 국가를 강요했다. 나중에 총재정부가 그 법을 폐지했지만 여전히 행정의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고, 나폴레옹은 도지사 제도를 창설해 프랑스인의 정치생활에 그 체제를 확고히 심어놓았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 정치평론가들이 여전히 보나파르트보다 자코뱅파가 중앙집권 국가 전통의 원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혁명이 프랑스에 200년간 정치적 불안을 가져온 출발점이라면, 공포정은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거쳐 앞으로 정치가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면서도 국가의 존립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전통을 남겨주었다. 그것을 공포정의 업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이 그것을 가치 있는 일로 인식했는지 아닌지는 별개 문제다."(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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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혁명 -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 셀러 역사도서관 1
로버트 단턴 지음, 주명철 옮김 / 알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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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8세기 프랑스 독자의 눈으로 볼 때 불법 문학은 실질적으로 근대문학 전체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는 루이 14세의 절대주의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국가기관이 인쇄물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것을 뿌리 뽑는 책임을 맡은 관리였던 말제르브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참으로 그는 그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1750년까지 서적감독관들은 합법적인 출판물을 아주 미묘한 차이에 따라 여러 범주로 구분했다. 그들은 합법성의 영역을 특허, 묵인, 단순 허가, 경찰 허가, 단순 관용의 범주로 넓혔다. 이렇게 해서 합법성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단계를 몇 차례 넘어 비합법성과 맞닿게 되었다. 한편 자유사상의 문학이 앙시앵 레짐의 정통 가치 체계의 밑동을 자르면서 자라났다. 체제수호자들은 탄압을 강화하면서 맞섰다. 이들이 탄압한 책들은 법의 울타리 밖 먼 바깥에 있는 책, 말하자면 순수하게 비합법적인 책이었다. 내가 연구하고자 제안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책이다."(36-7)


1부 금지된 문학과 문학시장


"앙시앵 레짐의 말기는 일부 역사가가 상상하는 세상과 달랐다. 그것은 즐겁고 관대한 자유방임식의 세상이 아니었으며, 게다가 바스티유도 별 셋짜리 호텔이 아니었다. 비록 바스티유는 혁명 전 선전가들이 생각해낸 것처럼 고문을 자행하던 곳으로 혼동되어서는 안 되지만, 문학과 관련해서 그곳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의 삶을 망쳐놓았다. 그러나 문학을 창작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문학을 존재하게 만든 전문인이라 할 출판인과 서적상이 저자보다 더 많이 들어갔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상의 사업에서 날마다 합법과 불법을 구별해야 했다." "금서를 구분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문제로 보인다. 경찰은 바스티유에 수감된 랭스의 서적상 위베르 카쟁을 심문하면서 그의 편지에 종종 나타나는 '철학적 상품'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모든 종류의 금서와 의심스러운 문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된 카쟁은 그 말이 '업계에서 금지된 것을 표현하기 위한 관습상의 표현'이라고 규정했다."(49-50)


"18세기 프랑스 인쇄물의 세계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계몽주의'라든가 '혁명'이라든가 하는 범주로 분류하기 어렵다. 그러나 1789년 이전에 독서 대중에게 문학을 전달하던 개인들은 자신들이 취급하던 책에서 진짜 위험한 요소를 구별하기 위해 아주 쓸 만한 범주를 고안해냈다." "우리는 《사회계약론》을 정치이론으로, 그리고 《동 부그르 이야기》를 음란서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18세기의 책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책을 한데 묶어 '철학책'으로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자료를 그들 방식대로 본다면, 음란서적과 철학 사이에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구분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1789년의 정신을 구현한 미라보가 10년 전에는 가장 저급한 외설서와 가장 대담한 정치논문을 썼다는 사실은 더이상 그다지 어리둥절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자유와 난봉은 함께 연관된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은밀한 도서목록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이 모두 닮았음을 볼 수 있다."(69-70)


"앙시앙 레짐의 마지막 30년 동안 평범한 독자들은 처음으로 무신론을 책의 형태로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책들은 권두화frontispiece·표제지title page·머리말·부록·주 같은 인습적 예절의 표시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정통 신학은 대체로 들고 읽기 어려운 2절판의 큰 책으로 여전히 외풍이 센 독서실의 선반에 쇠사슬로 묶어놓는 경우가 있었지만, 무신론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작은 판본에 실려 사사로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정통 교리의 냄새를 풍기도록 편집했지만('철학'으로 알려진 형태를 즐겨 채택했지만), 판본의 크기 때문에 마치 이성의 영역에 호소할 목적을 띤 것처럼 보였다. 독자는 이성의 영역에서 고요한 양심에 비추어 찬반의 태도를 심사숙고할 수 있었다. 계몽사상가들의 전집이나 인기 있는 작품을 편찬한 책들도 대부분 '호화로운 인쇄'를 피했다." "자유사상은 공짜가 아니었지만, 1770년경 중류계급은 물론 장인과 소매상의 상위층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는 범위 속에 들어왔다."(133-5)


"논문들이 정통 교리에 전면적인 공격을 일선에서 퍼붓고 있는 동안, 그보다 규모가 작고 덜 진지한 작품들은 교회와 국가가 존중하던 것이면 무엇이건 저격했다." "'순수 포르노그래피'는 시대착오인 동시에 모순 어법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책에 나오는 수도사와 수녀는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주요 목적에 따라다니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러한 범주의 전체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엿보기 취미voyeurism였다. 난봉꾼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열쇠구멍을 통해서, 또는 장막이나 나무 뒤에서 서로 관찰했다. 그리고 독자는 그들의 어깨 너머로 그 인물들의 행위를 지켜보았다. 삽화는 종종 화자가 은밀히 지켜보는 앞에서 결합하는 짝들을 보여주었다." "삽화와 본문은 상승작용을 하여, 모든 몸짓에 연극적인 기운을 불어 넣으면서 거울 속의 거울 같은 효과를 증대시켰다. '철학책'에 나오는 성은 철학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135-7)


"랭게의 《바스티유 회고록》과 미라보의 《봉인장과 국립감옥에 대하여》는 모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가 재판 절차도 없이 감옥에 처넣은 저자가 직접 쓴 논평으로서 쌍벽을 이뤘다." "독자는 역겨운 음식, 가학적인 옥사장, 벌레가 우글거리는 깔개, 지하감방을 둘러보면서, 거기 아무 죄도 없이 갇힌 희생자가 모든 인간세상과 단절되고 합법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빼앗긴 채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독자에게 전율과 감동을 두 배로 느끼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진실한 어조로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재현했다. 그들은 제 손으로 가면을 뜯어버리고, 장막을 젖히고, 허울을 찢어버리고, 왕의 비밀조직을 폭로했다. 그래서 그들도 또한 엿보기 취미를 다뤘지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경찰국가의 국내 공작을 까발렸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프랑스는 지하감옥, 쇠사슬, 봉인장(구속명령서)으로 다스리는 나라라는 신화를 널리 퍼뜨렸다."(140-1)


"똑같은 주제가 정치적 비방문(libelles, 사사로운 중상비방보다는 정치적인 비방의 뜻을 지니고 있다)이라는 하위범주에 나타났다. 그러나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다른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전제주의의 희생자들에 대해 통속극 같은 논평을 하는 대신, 전제주의의 고위직 봉사자, 그리고 권력자에 대해 공작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비밀을 파헤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적시적소에 나타날 수 있는 정확한 능력을 가졌거나, 보이지 않는 제3의 화자로서전지전능함을 지닌 것 마냥 장막 뒤나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엿들을 수 있는 대화도 실었다. 그러므로 중상비방문도 엿보기 취미를 이용했다."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그러한 환상을 부추기기 위해 차분하게 머리말을 썼다. 그들은 남들이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가'나 회고록의 '편집인' 행세를 했다. 그들은 증거의 규칙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는 당대의 역사와 전기로 위장한 저널리즘의 일종으로 나타났다."(142-3)


"그러나 우리는 '철학책'에 담긴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전갈message을 앙시앵 레짐을 뒤집어엎으려는 의도의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1789년을 되돌아보면서, 군주정이 인쇄된 말의 힘에 의해 마구 두드려 맞아 불구가 되었다고 쉽게 상상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금서는 그 체제의 뿌리를 흔들어 정통성을 허물어갔을지 몰라도, 그것을 쓰러뜨릴 목적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금서는 단지 문학시장의 불법적 부분에 대한 수요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흥밋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정보에 대한 수요, 사생활만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 추상적인 사상의 금지된 열매만이 아니라 새 소식에 대한 굶주림이었다. 그 체제는 이러한 주제를 모두 법률의 바깥에 놓으면서 그것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자제력마저 몰아냈다. 철학을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구석으로 몰아내면서, 그 체제는 형이상학에서 정치학까지 모든 전선에서 두루 공격을 받았다."(149)


2부 주요 작품


▶ 철학적 포르노그래피


"16세기 초기의 아레티노는 성교를 찬미하고 육욕의 언어를 인쇄함으로써 오비디우스를 능가했다. 그의 《화려한 소네트》와 《논리적 사고》는 표준을 세우고 주제를 확립했다. 16가지 고전적인 '체위', 외설적인 말을 자극적으로 사용하기, 본문과 그림의 상호작용, 여성이 이야기하게 하고 대화체 사용하기, 논다니집과 수녀원을 돌면서 엿보기, 이야기 선을 구성하기 위해 질탕한 난교 파티를 줄줄이 엮어내는 방식으로 아레티노는 포르노그래피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18세기는 그 나름의 아레티노를 만들어냈다. 18세기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인 《현대의 아레티노》나 그 밖의 작품에서는 아레티노를 기리고 있다. 18세기의 아레티노는 2세기 전에 살다 간 선배처럼 비방과 외설스러움을 조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이 범주의 문학은 1780년대 미라노의 포르노그래피성 작품이 나오면서 다시 한 번 기운을 회복했다. 그리고 18세기는 사드 후작과 함께 끝났다."(155-7)


"18세기 말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아직까지 포르노그래피라는 딱지가 붙지는 않았지만, 앙시앵 레짐 시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품위의 경계 밖으로 성애를 멀리 가져간 문학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우뚝 섰다. 당시 사람들은 테레즈가 성애와는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테레즈는 계몽주의를 상징했던 것이다. 테레즈는 계몽사상가philosophe였다. 그의 칭호는 계몽주의 시대 초기에 나온 주요 작품에서도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것은 특별한 시점이었다. 《계몽사상가 테레즈》가 발간된 1748년은 성욕을 자극하는 문학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시대에 속하는 동시에 지적 지형도가 바뀌는 시대에 속하기도 했다. 사실 두 방향의 폭발을 일으킨 원동력을 하나였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고와 자유로운 삶을 결합한 자유사상libertinism이었다. 이 사상은 성적 규범만이 아니라 종교적 교리에도 도전했다. 디드로 같은 자유로운 사상가들은 양쪽 전선에서 싸웠다."(160-1)


"테레즈의 성 이야기는 교양소설Bildungsroman, 다시 말해서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쾌락의 교육인 만큼, 철학 하기와 쾌락 찾기는 결국 철학적 향락주의로 집중될 때까지 이야기 속을 함께 달린다. 이 철학을 면밀히 연구하면 수많은 원전─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 홉스, 그리고 18세기 초반에 원고 상태로 나돌던 자유주의 문학 전반─에서 나온 요소가 뒤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영향은 아마 루크레티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테레즈와 그의 선생들은 계속해서 현실을 물질의 작은 조각으로 축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감각에 작용하여 의지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그들은 인간이란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쾌락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라고 묘사한다." "기계의 은유는 17세기의 기계론적 철학의 유산으로서 후대의 자유사상가들에게 알맞은 세계관을 구축하는 방법을 제공했다."(172-7)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철학으로서 기독교를 공격하고 사회정책으로서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공유하는 논점을 끌어들였다. 볼테르와 마찬가지로 원장신부 T.도 반기독교적 진리가 소수정예 집단에만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속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듣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한꺼번에 도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달려든다면 그 누구의 재산이나 신체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종교는 거짓인 동시에, 모든 종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들은 역설로 포장되어 나온다. 원장신부 T.는 비밀로 봉인해 마담 C.에게 전해주지만, 누구나 돈 주고 살 수 있는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고상하지 않은 독자들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귀가 있는 사람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세계에 던진 전언의 후렴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였다."(185-7)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일종의 사고실험이었다. 그것은 결혼제도와 어머니의 지위를 상상의 차원에서 가늠하고, 향락주의적 계산에 종속시켰으며, 부족한 제도임을 알았다. 역사가들이 과거의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늠할 때, 그들은 좀처럼 공상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인은 종종 수수께끼 놀이를 했다. 그들은 물었다. 무신론자의 사회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바람기 있는 여성이 사회는?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그들에게 자유로이 사랑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여성 계몽사상가라는 단일한 공상 속에 두 가지 위험을 한데 묶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이룩한 빼어난 공훈이었다. 그것은 독자를 법의 밖으로 끌어가 유동적인 지대에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독자는 거기에서 다른 사회질서를 생각하면서 놀 수 있었다.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각각 《페르시아인의 편지》와 《사회계약론》에서 같은 일을 했다."(191-2)


▶ 이상향의 공상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가 쓴 《2440년》은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묘사한다. 그것은 메르시에가 먼 미래에 자리매김한 공상이다." "미래 공상과 립 밴 윙클 효과에 익숙한 오늘날의 독자는 이 작품을 날렵하지 못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18세기 독자는 몹시 매혹적인 작품으로 보았다. 그들은 결코 공상과학소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의 이상향도 꿈꾸지 못했다. 플라톤, 토머스 모어,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이상향 건설가들은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여행이나 엉뚱한 조난사고로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사회를 상상했다. 그러한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그러나 메르시에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이미 시작된 역사적 과정의 결과로 제시하고, 파리에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2440년》은 독자가 미래의 진지한 안내서로 읽어주기를 요구했다."(197-8)


"우리는 미래를 상상할 때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것들로 채울 것이다. 그러나 메르시에의 미래에는 광선총도, 우주 기계도, 시간을 왜곡하는 텔레비전도, 어떤 형태로든 이 은하계에서 저 은하계로 오고 가는 장치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이상향은 도덕적 차원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수사법은 도덕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처럼 그는 다른 소설가들이 독자에게 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즐겨 쓰던 장치를 대부분 이용하지 않았다. 《2440년》은 단지 독자를 미래의 파리로 데려가기 때문에, 그의 정서가 개입할 수 있는 줄거리나 오늘날에는 생각할 수 없을 책략을 사용하고 있다. 이국적인 묘사로써 독자의 눈길을 끈 다음 각주를 활용하여 교화하는 방법이다. 《2440년》에는 종종 텍스트 자체를 압도할 정도로 방대한 주를 달아놓았다. 독자는 각쪽의 위에 있는 본문과 아래의 주를 오가면서 읽어야 한다. 텍스트는 2440년에, 주는 18세기에 각각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202-3)


"각주는 메르시에가 꿈꾸는 미래의 주요 경향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실 메르시에는 단지 자기가 사는 시대의 프랑스에서 모든 폐단을 몰아낸 상태만을 상상했던 것이다." "메르시에의 이상향에 루소주의가 반영되고 있기는 해도 여전히 앙시앵 레짐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의 꿈은 계속 모순 속을 헤맨다. 그는 가난과 귀족을 없애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부유한 귀족을 묘사하기도 한다. 궁정이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는 왕 주위에 아첨꾼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의 첫머리에서 왕은 오직 상징적인 권력만 행사한다. 그러나 끝부분에서 왕은 사회 전체를 위해 법률을 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메르시에는 일관성 없는 내용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상에 이끌려다닌다." "메르시에의 작품은 급진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군주제를 옹호하는 감정으로 고동치고 있다. 그것은 물론 루이 14세풍의 변종이 아니라,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군주제이다."(204-8)


"메르시에의 상상은 앙시앵 레짐 시대의 정신자세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당시의 정신자세는, 고등법원의 반란과 내란이라는 관념은 수용할 수 있어도 체제 자체의 변화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메르시에는 특히 종교와 정부라는 두 가지 민감한 영역에서 사회정치적 질서의 근본원리에 도전했다. 그는 단순히 가톨릭 교회의 가장 눈에 띄는 제도─수도원, 십일조, 고위성직, 교황제─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정신적 정통성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2440년의 이신론적 사제는 이신론 자체나 적어도 볼테르의 형식적인 이신론을 넘어서는 종교적 감정에 호소한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메르시에도 정치와 종교를 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시민의 축제는 하느님과 조국에게 시민이 더욱 헌신하도록 만들어준다." "학교와 성전은 젊은 남성의 교육을 완성해준다. 따라서 그들이 어른이 될 때, 개인적인 욕망이 일반의지와 조화를 이룬다. 메르시에는 루소의 생각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211-2)


▶ 정치적 욕설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거리낌없이 아무 책에서나 자료를 가져다 이용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디서 처음 나왔는지, 누가 처음 썼는지 출처를 밝히기 어려울 정도다. 표절이라는 오늘날의 개념은 손으로 쓴 새 소식이 담긴 쪽지를 소매 안에 넣고 다니다가 카페에서 서로 교환하고, 신문에 옮겨넣고, 다시 책에 끼워넣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고정된 내용이나 심지어 저자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시대착오라 할 수 있다. 중상비방은 집단행위였으며, 중상비방문은 소문·추문·농담·노래·만화·포스터처럼 근대의 파리 시내를 휩쓸고 다니던 것들 사이에 끼어서 떠다니는 인쇄물에 속했기 때문이다. 오직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말과 그림만이 책 속에 낄 수 있었고, 오직 소수의 책만이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적의 지하판매망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던 수많은 작품을 포함한다.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는 혁명 직전에 가장 잘 팔리던 베스트셀러로서 이러한 문학의 모든 작품을 앞질렀다."(222-3)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사를 뒤돌아보는 역사가들은 대개 1769~1774년의 기간을 1787년 혁명이 시작되기 전의 가장 큰 정치적 위기로 본다. 그들은 이 위기를 다양하게 해석하지만, 위기의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슈아죌 공작이 지배하던 정부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먼저 외교 문제를 보면, 프랑스는 7년전쟁(1756~1763)으로 모욕을 받은 결과 세력균형체제에서 차지하던 지위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영국이 제국을 해외로 널리 확장하는 데 비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와 아무런 효과도 없는 동맹관계를 맺은 채 거기에 구속받고 있었다. 슈아죌의 외교적 업적으로 간주되는 부르봉 왕가협정 때문에 프랑스는 에스파냐가 영국에 대항해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 말려들었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을 다시 한 번 치를 능력은 없었다. 더욱이 동맹국인 폴란드를 다른 동유럽 열강들이 분할하려 드는 것을 보면서도 그 나라를 지켜주기 위한 조치를 취할 능력도 없었다."(234-5)


"외교 문제에서 프랑스가 보여준 약점은 국내의 재정 문제를 정돈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안고 있는 두 번째 큰 문제였다. 취약한 징세 기반─모든 종류의 면세특권과 불평등 때문이다─과 낡은 징세제도 때문에 국가를 무력하게 만드는 적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국가는 수입을 늘릴 수 없었다. 고등법원이 세금을 신설하려는 왕령은 등기부에 등록하지 않으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등법원의 소요사태가 불안정을 낳는 세 번째 원인이었다." "물론 우리는 당시 프랑스인이 1769~1774년의 대위기를 얼마나 느끼고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사건들에 대해 당대인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화》의 화자는 베르사유와 파리 사이를 흘러다니던 정치적 험담거리를 모아, 그 자료를 체로 치고 온갖 '일화'를 한데 짜맞추어 루이 15세 말년의 전체 역사를 구축했다."(235-7)


"우리의 저자는 새 소식을 요구하는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글을 썼다. 그는 종종 '대중'과 '새 소식' 같은 낱말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했다. 대중을 말할 때 그는 두 종류의 청중을 넌지시 구별했다. 왕국에 흩어져 있는 '소박한 시민들'의 일반 독서 대중과 그들보다 더 세련된 파리의 대중, 그는 자기 책을 일차적으로 사교계의 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전자를 대상으로 썼다. 그래서 그는 도시의 이야기에 양념 노릇을 하는 요소─말장난, 농담, 숨은 뜻 따위─를 해석하고 설명해주면서 그들의 통역 노릇을 했다. 그가 파리의 대중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공원과 카페에 옹기종기 모여 그날의 소식을 토론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다. 이 사람들은 궁정과 대조되는 도시에 속했다. 궁정la cour과 도시la ville는 각자 나름대로 정보의 유통경로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두 체계는 서로 교차했으며, 둘은 함께 왕국에 유통되는 모든 소식을 실제로 생산해냈다."(245)


"내 생각에 《일화》는 단순히 일화를 전하는 작품이 아니라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혁명적'이라고 해서 프랑스혁명 같은 것을 기대했거나 조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작품은 부르봉 군주정의 정통성을 바로 그 기초부터 공격했다는 뜻이다. 왕들의 성생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선동적이라 할 수 없다. 프랑수아 1세, 앙리 4세, 루이 14세의 애첩들은 마치 전쟁의 승리처럼 정복이라는 관점에서 축하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바리는 창녀였다. 그래서 그는 왕의 위업을 보여주는 대신 중상비방문에서 왕의 무능력의 상징으로 제시되었으며, 한층 더 나쁘게는 왕좌의 품위를 하락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만일 우리가 왕의 몸이 18세기 다수의 프랑스인에게는 여전히 신성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면, 이러한 해석은 엉뚱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파리인들이 거리에서 루이 15세의 성불구에 대한 노래를 불렀을 때, 그들은 왕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종교적 뿌리에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255-8)


3부 책이 혁명을 일으키는가?


"20세기 초 다니엘 모르네의 손에서 비롯한 지성사의 하향식 전파라는 관념은 앙시앵 레짐의 문화생활을 놀랍도록 풍부하게 그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1933)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날학파 역사가들이 내놓은 대부분의 연구의 청사진 구실을 했다. 그러나 모르네는 이 자료를 좁은 틀 속에 넣고 짰다. 모든 것이 똑같은 유형 속에 들어가, 계몽주의에서 혁명으로 넘어가는 일직선 운동을 보여주었다. 결국 모르네의 주장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789년에서 시작해 볼테르와 18세기 초 자유사상가들의 머릿 속에 있는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결과에서 원인을 추론해냈다. 모르네는 문화적 매개자와 사회적 기관들을 강조했지만, 모르네 식의 지성사는 궁극적으로 공격받을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었다. 결국 계몽주의는 위대한 사람의 위대한 책으로 추진되었고, 혁명은 계몽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리하여 혁명은 '볼테르의 잘못, 루소의 잘못'으로 남아 있다."(266-7)


"그러나 책의 전파가 여론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여론은 정치적 행동을 어떻게 굴절시키는지 이해하는 문제가 남는다. 키스 베이커와 모나 오주프는 계몽사상가들의 작품에 표현된 여론에 대한 관념을 다룬 논문에서 사물 그 자체보다는 관념을 연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역사가들은 철학자들보다는 사물 그 자체에 잘 접근하지 못한다. 사건들은 의미에 싸여서 온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을 해석과 분류할 수 없고, 역사를 순수한 사건으로 발가벗길 수 없다. 그렇다고 사건이 전적으로 철학적 담론을 통해서만 추론할 수 있다거나, 보통사람이 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철학자에게 의존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의미를 만드는 일은 책뿐만 아니라 길거리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여론은 시장과 선술집에서도 형성된다. 대중이 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자들의 작품을 넘어서 질문을 확장시키고 일상생활의 의사소통 얼개까지 들어가야 한다."(277)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의미를 파악하는가? 내 생각에,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통찰력을 끌어내 환경에 투영하는 방식은 아니다. 차라리 틀 속에 인식을 맞추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틀을 문화에서 얻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대로의 현실은 사회적 구축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조직된 채로 온다. 그것은 여러 범주로 나뉘고, 관습에 따라 형성되며,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서로 물드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부터 물려받은 인식체계 안에 그것을 맞춘다. 그리고 종종 그것을 말로 옮긴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의미를 왜곡하는지에 상관없이, 의미도 언어처럼 사회적이다. 우리는 의미를 만들면서 사회적 활동에 깊이 개입한다. 특히 우리가 글을 읽을 때 그렇다." "그래서 독서는 두 가지 요소─의사소통의 매체인 책의 성격, 그리고 독자가 내면화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일반적인 기호체계─에 따라 결정된다."(285-6)


"말하자면 아무리 개념을 명확하게 한다 해도 경험적 연구의 부족을 메울 수 없으며, 독서의 역사 연구는 적절한 증거가 부족하여 난관에 부딪힌다." "의사소통의 순환에서 수용의 측면에 관한 어려움을 비켜가기 위해 우리는 여론의 문제와 직접 부딪칠 수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일반 대중은 정치화하기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많은 권력 갈등이 궁정의 테두리 밖에서 일어났으며, 참여하는 관찰자로서 대중은 점점 정치화했다. 이러한 종류의 정치는 소송의 형태─청원·저항·낙서·노래·인쇄물·이야기─를 띠었고, 대부분의 재담, 악담, 공공연한 소문은 집단 폭력(민중 소요)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18세기의 파리는 거대한 의사소통의 그물이었다. 그것은 모든 이웃을 한 울타리로 엮고, 당시 파리인이 '공공연한 소음'(선동적 소문)이라고 부르던 것, 또는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 담론이라고 알고 있는 것으로 언제나 윙윙거리는 그물이었다."(287-9)


"어떤 특별 주제가 험담이나 인쇄물 가운데 어디에 먼저 나타났는지 묻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주제는 모두 다른 지점에서 생기고 다른 방향으로 여행하면서 여러 매체와 사회환경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질문은 전갈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증폭과 동화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고 대중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었던 방법에 관한 질문이었다. 금서는 이 과정에 어떻게 이바지했는가? 재담과 민요는 사라지고 잊혀지기 쉬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책은 이러한 주제를 인쇄물로 고정시켰다. 그리하여 그것을 보존해서 널리 퍼뜨리고 그 효과를 늘려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이 폭넓은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 속에 그것을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카페에서 주고받은 일화나 혼잣말도 인쇄물로 탈바꿈하면 실제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책은 사소하게 보이는 요소를 섞어서 규모가 큰 서사구조 속에 집어넣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290-1)


"1787년경 독서 대중은 모든 종류의 불법 서적에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서적은 앙시앵 레짐의 정통 가치를 모든 방면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정치적 중상비방문은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1787~1788년의 사건들을 특별한 방식에 맞춰놓았다. 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은 갈라서서 자기 편을 찾았다. 그들은 견문이 넓은 사람들, 말하자면 여론을 구성하던 '대중'의 편에 섰다." "1787~1788년에 나온 소책자들은 문제를 수백 개 조각으로 쪼개는 대신 단순화시켰다. 모든 소책자는 그 상황을 정부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 고등법원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 가운데 선택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로 제시했다. 그것들은 편가르기를 선동했다. 그것들은 여론을 두 개 극으로 나누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여론을 표현하기도 했다. 여론의 형성과 소책자 작가의 흥분은 원인과 결과로 동시에 작용하면서 서로를 강화시켜주었다. 절대다수의 소책자 문학은 당면 문제를 단일한 주제, 곧 (대신들의) 전제정으로 축소했다."(364-5)


"이렇게 해서 하나의 문학 장르가 르네상스 궁정에서 주고받던 불분명한 입씨름에서 출발해 베스트셀러 책의 완전한 전집으로 성장했다. 그것은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수사학적 기술을 이야기의 집합체, 정치적 민담에 동화시키고, 단일한 윤리를 가진 중심 주제를 조직해갔다. 그것은 군주정이 전제정으로 타락했다는 주제였다. 이 문학은 국사를 진지하게 논할 공간을 마련하는 대신 토론을 닫아버렸고, 견해를 양극화시켰으며, 정부를 고립시켰다. 그것은 급진적인 단순화의 원리 위에서 작동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흑이냐 백이냐, 그들이냐 우리냐 편가르기를 해야 하고, 당면 문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 위기의 시대에는 효과적인 방책이었다. 루이 16세가 백성의 안녕 이외에는 바랄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1787년과 1788년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체제는 계속 비난받고 있었다. 그것은 여론을 통제하기 위한 오랜 투쟁의 마지막 판에서 졌다. 그것은 정통성을 잃어버렸다."(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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