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덮기 -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
욘 엘스터 지음, 최용주 옮김 / 진인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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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부 이행기 정의의 세계


제1장 기원전 411년과 403년의 아테네


"완전한 형태의 아테네 민주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시민들이 민회의 결정을 실행할 사람들─추첨이든 선출이든 모든 행정관─에게 행사하는 통제의 정도일 것이다." "BC 5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잇따른 개혁으로 통제되지 않은 대중권력이 남용될 개연성이 점점 커졌다. 마틴 오스트발트 저작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아테네인들은 인민으로서 주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직 법 지배의 골격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발트가 기술한 바와 같이, 한동안 〈페리클레스의 지적, 심리적, 그리고 정치적 통찰력이 비이성적 정책이 집행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훌륭한 지도력이 창출하는 결과만으로 제도의 견고함을 판단할 수는 없다. 계몽된 정치가가 항상 주도권을 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약하고 신중하지 못한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제도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체제 안에 몇몇 통제장치를 갖추고는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군사적 결정 영역에서는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18-9)


"411년의 정권교체는 정권 내부붕괴와 반란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403년에는 스파르타의 통제 아래 타협적 이행이 있었다." "411년 이행기 정의의 주된 목적은 응보적 조치에 있었다. 참주들의 처형과 관련해서 그들을 투옥해서 무해화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아테네에는 감옥이 없었다) 물리적으로 무력화하는 것이 주된 동기였을 것이다. 403년에는 응보적 조치와 억제 효과도 작용했을 수 있으나, 주된 목표는 화해였다. 광범위하게 소추를 면제하고 사면이 곤란한 사람에게 망명선택권을 제공하는 등 화해조약을 통해 매우 온건한 형태의 이행기 정의를 구현했다. 아테네사람들은 이전 경험을 통해 가혹한 처벌이 원래 목적에 반해 억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온건한 조치는 ① 스파르타에 의해 주어졌거나, ② 권력을 포기한 대가로 참주들이 요구조건으로 내걸었거나 ③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37-8)


"411년 이후, 참주들은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군인들은 400인체제 기간 동안 아테네에 남아있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403년 이후, 살인교사는 사면대상이었지만, 그 살인에 직접 가담한 경우는 제외되었다. 30인 폭군이 통치하는 동안, 기병이나 평의회 의원을 지낸 경력이 있으면 공직후보자가 될 수 없었다. 위법행위(그리고 위법행위로 얻은 이득)에 대한 제재는 처형, 벌금, 면직, 시민 및 정치적 권리의 상실 등이었다. 403년의 화해조약은 참주들에게 추방을 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비록 자발적으로 선택했더라도 제재의 일종으로 받아들였다." "이행기 정의는 사적 개인의 실천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기소, 공직후보자에 대한 이의제기, 임기만료된 공직자에 대한 고발 등이 있다. 배심원들은 대체로 시민들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했지만, 403년 이후 사후조사를 담당하는 배심원은 참주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성되었다. 이것을 〈패자의 정의〉라 부를 수 있다."(38-9)


"403년 후 승리한 민주주의자들은 노예와 그들 편에서 싸운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을 폐지할 때 자제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도시의 권력균형이 패배한 참주들을 도외시하는 것을 방지했다. 참주들이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사면조약 위반으로 연결되는 소송제기의 위험부담을 늘리는 절차를 도입하여 온건한 조치를 더 강화했다. 이때 소급입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행기 정의는 합법적 형태로 수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행기 정의는 사법개혁과 헌정질서 개혁으로 보완되었다. 411년 이후, 주요 목표는 쿠데타를 획책하려는 참주들에게 부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403년 이후, 목표는 과거에 전권을 행사한 민회에 제약을 가하여 의원들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인센티브를 제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403년 이후에는 추방됐던 민주주의자들이 몰수당한 재산을 반환받을 수 있는 조항을 마련했다. 다만 개인에게 팔린 유동자산(노예를 포함하여)은 돌려받을 수 없었다."(39-40)


제2장 프랑스의 1814, 1815년 왕정복고


"두 차례의 왕정복고는 타협적 이행이었고, 연합국 세력의 후원 아래 전개되었다. 연합국 세력은 또한 이행기 정의를 통제했는데, 한편으로(1814년) 복귀하는 부르봉 왕조를 자제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1815년) 나폴레옹 지지자들의 숙정을 요구했다. 1814년 이행을 수행해야 했던 나폴레옹 정권 하 상원의원들은 과거의 정치적 행위와 견해들에 대한 사면, 처벌의 형태로서 몰수 효력의 폐지, 혁명기간 동안에 몰수되어 개인에게 매각된 자산 인정 등을 요구하면서 자기이익 중심적 동기에 따라 행동했다. 이는 사회적 평화와 화해를 열망하던 루이 18세의 의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국유재산의 전前소유자에 대한 배상을 제안하거나 지지투표한 사람들 일부는 이기심이 동기가 되기도 했다. 재산구매자는 배상이 소유권을 둘러싼 의혹과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자산가치가 높아지게 되므로 이해관계가 동일했다. 자유주의자만이 구입자들의 불안에 의존(그리고 자극)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상충했다."(69-70)


"배상계획은 여러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① 재산이 매각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재산을 돌려받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금전적 보상만 받았다. ② 몰수된 교회재산은 매각되지 않았음에도 반환되지 않았다. ③ 보상은 몰수된 현물자산에만 한정되었고, 훼손된 자산은 포함되지 않았다. 다양한 배상계획을 여러 주장들이 옹호했다. ① 이주자에 대한 배상은 대부분 엄격하게 자격의 문제와 관련되었다. ② 그 중 일부, 재산의 원상회복 또는 구입자가 조성한 기금으로 배상 받는 행위는 구입자에 대한 징벌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③ 혁명에서 피해를 입은 여러 집단들에 대한 차등적 대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통을 가장 심하게 겪은 사람들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④ 일부는 또한 자격이나 과거의 고통보다는 현재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⑤ 많은 사람들은 국가이익에 기여하는 복구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70-1)


"1815년 6월 28일 루이 18세는 징벌적 조치를 의회에 위임한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연합국 세력과 이주자의 압력으로 그는 7월 24일에 제한적이지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로 하원을 장악하게 된 급진왕당파는 루이 18세에게 모든 '국왕살해 재범자'들을 축출할 압박했고, 더 급진적인 조치를 도입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백일천하 기간 중 나폴레옹에 합세한 사람들에 대한 이주자들의 1815년의 분노는 국왕살해(1793년) 가담자에 대한 이전(1814년)의 처벌요구보다 더 강했다. 정부는 공공행정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을 단행했다. 현직에 남아 있던 추종자 때문에 나폴레옹의 복귀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정부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1815년 여름의 〈백색테러〉에서 수백 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대 받았다. 루이 18세는 그의 조카가 남부에서 자신과 대립하는 독립행정부를 수립하면서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잠시 잃었다."(71)


제3장 이행기 정의의 새로운 세계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나라들이 독립전쟁에 성공하면 대체로 식민지권력과 함께 했던 내부부역자들을 처벌대상으로 삼는다. 전쟁이 끝난 후 그 세력은 이전 동맹 상황을 완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한 예로 미국과 알제리의 독립전쟁을 잠깐 살펴보자. 미국의 경우 내부협력자들은 영국정부 충성파(Loyalist) 또는 〈토리당〉이었고, 알제리에서는 〈하르키스〉(harkis)였다. 각각의 경우, 이 협력자들은 전 인구의 15% 정도에 달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국에서 적과 협력했던 사람들의 비율보다 훨씬 많았다. 충성파와 하르키스파는 각각의 평화조약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미국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알제리에서는 아예 무시되었다. 이런 장기화된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는 건 어렵다. 알제리해방전선(FLN)은 의도적으로 온건파 알제리인들과 프랑스인들을 암살대상으로 지목했다. 미국에서도 역시 〈무관심과 중립은 지지받을 입장이 아니었다.〉"(81-2)


# 하르키스 :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 군대에 협력한 알제리 무슬림인들


"2차대전 이후 몇몇 국가에서는 〈국가모독〉이라는 새로운 범죄를 적용했다. 이 범죄는 〈국민박탈〉─즉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상실─의 형벌을 받는 하급반역의 한 형태였다. 프랑스에서 이 자격박탈은 투표권, 피선거권, 공공부문 취업금지, 법조계와 교적을 비롯하여 준공기업, 은행, 신문, 라디오 등의 분야 진출금지 등을 포함했다." "벨기에에서는 자격박탈의 범위에 정치적 권리를 포함하여 의사, 변호사, 성직자, 언론인, 교사직은 물론이고, 조직 형태와 관계없이 그 조직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법원이 부역자의 투표권, 피선거권, 군복무, 공무원 진출 등의 권리를 박탈할 수 있었고 특정분야로의 진출도 금지할 수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투표권, 피선거권, 병역의무가 박탈되고, 공공부문에 진출할 수 없고, 변호사와 의사 또는 기타 자격증이 필요한 직종과 교사, 성직자로 일할 수 없었으며, 영화, 극장, 신문사 등의 관리직과 경리직에도 진출할 수 없었다."(89-90)


"스페인은 민주주의 이행에서 이행기 정의를 실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유일한 사례다. 1976년 7월, 정부는 부분적 사면을 선언하여 약 400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다음으로, 〈1977년 10월의 사면법은 새롭게 들어선 민주정부가 의회 지지로 승인한 최초의 정치적 조치로 다음 두 가지를 달성했다. 첫째, 대부분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는데, 여기에는 폭력 혐의로 기소된 사람도 포함되었다. 둘째, 물러나는 정권 인사들에 대한 전면적 기소중지를 승인했다.〉 또한 실직 공직자들의 복직과 연금지급을 승인했는데, 실직기간 중 받지 못한 급여는 보상하지 않았다. 비밀경찰의 기록은 전부 봉인했다(왜 소각하지 않았을까?). 이 법은 공산당 합법화와 새 헌법에 대한 합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과도기 협상의 일부였다. 스페인 사례는 헝가리나 폴란드 등에서 하나의 모델로 구상되기는 했으나, 과거를 문제삼지 않기로 한 이 타협적 결정을 실제로 직접적으로 모방한 사례는 없었다."(92-3)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이행은 대부분 퇴장하는 군사정권 인사들이 자신들의 면책을 보장받기 위해 벌인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르헨티나는 군 간부들을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한 두 국가 중 하나이지만, 수많은 기소에 반발한 군부의 무력시위 이후 도입된 '기소전면금지법'과 '명령준수법'으로 대다수가 기소면제된 반면, 소수 고위급 장교만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볼리비아는 오랜 지연 끝에 몇몇 군 장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유죄를 선고한 또 다른 국가다. 유죄선고를 받은 48명 중 11명만 실제로 수감되었고, 나머지는 도피했다." "브라질에서는 군장성들이 1978년에 자기사면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브라질의 민주주의로의 긴 여정이 1990년 카르도소 대통령 선출로 이어질 때까지 유효했다." "칠레에서는 피노체트가 설계한 상원, 국가안전보장회의, 헌법재판소 그리고 대법원으로 구성된 중추적 세력집단들이 민주적 개혁과 이행기 정의의 실행을 방해했다."(93-6)


"2차대전 이후 서유럽의 이행기 정의와─그리고 그 가해행위의 규모와─비교해볼 때, 탈공산주의 이행에서는 재판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몇몇 지도급 인사들이 기소되기는 했지만, 유죄판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탈공산주의 사회에서 공공부문 숙정은 여러 형태를 취했다. 구 동독에서는 부패관리 해고라는 전통적인 방식이 관찰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이 지역의 여러 국가들이 〈정화〉(lustration)라는 명목의 인적 청산 방식을 채택했다." "정화조치의 동기는─최소한 공식적인─보안분야에 몸담고 있던 고위급 공산당간부와 협력자들이 새로운 체제에서 중요직책을 맡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치는 해고, 자격상실, 또는 단순한 경력공개 등을 포함했다." "폴란드에서는 고위 선출직 또는 임명직 후보자는 1945년부터 1990년 사이에 자신이 〈적극적인 협력자〉였는가 여부를 선서해야 했다. 이를 인정하면 기록 공개 말고는 다른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98-100)


"남아프리카는 민주주의로의 타협적 이행의 산물인 진실화해위원회라는 독특한 과거청산 방식을 제시하였다." "사면(형사 및 민사소송 면제)은 신청인의 행동이 ① 악의나 개인적인 이익 추구가 아닌 정치적 동기로 이루어졌고, ② 그 행동을 촉발한 경우와 비례적으로 관련이 있음이 증명될 때 가능하다. 또한 신청인은 자신이 관여한 행위와 관련된 명령계통의 증거를 비롯한 범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사면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은 기소나 소송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소명 메커니즘은 자신의 행위가 ①과 ②의 조건을 만족한다고 주장하거나 완전한 진실을 말할 의사가 있다고 나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사면청문회에서는 불법행위를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가해자의 이름도 공개하였기 때문에 대중의 보복이 두려워서 신청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한 평가에 따르면 〈많은 수의 가해자들은 신청하지 않았다. 이것은 앞으로도 기소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03-4)


"민주주의 이행에 선행하는 독재체제는 국가 그 자체에서 기원하거나 아니면 외세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행기 정의의 과정은 새로운 체제가 스스로 시작하거나 아니면 외부의 퉁제 아래 진행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사회가 '스스로를 정리해야 하는' 이중으로 내생적인(내생적 독재 체제와 내생적 이행기 정의) 경우다. 이행 이후에도 구체제의 지도자와 행위자들은 여전히 사회조직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폭력수단이나 투표함을 이용하는 직접적인 방식이든 경제재건과 발전에 갖는 비중에서 기인하는 간접적인 방식이든 할 것 없이 그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사회는 아무리 결함이 있더라도 일단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열린 바다에서 스스로를 재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법관들이 민주주의 이전 체제와 깊이 관여됐더라도 그들을 활용하거나 아니면 그들 중에서 가장 덜 타협적인 인물과 타협하는 것 외에는 실질적인 대안이 없을 수 있다."(105-7)


제2부 전환기 정의의 분석학


제4장 이행기 정의의 구조


"나는 (정의의 개념과 집행에 영향을 미치는) 동기의 삼분법─이성, 이익 그리고 감정─을 18세기 프랑스 도덕주의자들, 특히 라브뤼예르에서 차용한다." "프랑스 왕정복고의 경우, 현물배상을 원한 원소유자들에게 추상화된 신성한 재산권 개념(이성), 구입자들을 향한 복수의 욕구(감정), 그리고 재산을 되찾고 싶어하는 욕구(이익) 동기가 동시에 작용했다. 물론 이성적 동기가 사실은 감정이나 이익추구 동기의 반영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1789년 이후 왕당파 출신으로서 귀족도 이주자도 아닌 베르가세 역시 똑같이 현물보상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런 의구심이 다소 줄어든다. 1989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현물보상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사익을 기대하고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익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평의 원칙을 주장한다 해서 그들을 위선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정말 그런지를 확인하려면 그들의 행위를 다른 맥락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122-3)


"정의실현의 욕구가 이행기 정의 행위자를 추동하는 여러 동기들 가운데 하나의 동기에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회에는 1차 동기에 메타동기를 유발하는 '동기화의 규범적 위계'(normative hierarchy of motivation)가 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리스의 선을 고취하는 열망이 가장 가치 있는 동기였으며, 두번째는 적에 대한 복수의 열망이고, 세번째는 사익추구, 그리고 질투의 동기가 최악으로 간주되었다. 동기의 위계를 전제할 때, 낮은 수준의 동기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마치 높은 수준의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가능한 한, 자신들의 참된 동기가 자신들에게 제시하는 그런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 사람은 개인적인 이익에 이끌려 행동하면서 동시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자기의 행동이 그런 동기에 이끌리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작동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1차동기화와 메타동기화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 각각 고유한 전략적 배열을 사용한다."(123)


# 이행기 정의의 제도적 유형

1. 사법적 정의

2. 행정적 정의(사법적 정의와 정치적 정의 사이의 연결지점)

3. 정치적 정의


"내가 〈순수한 정치적 정의〉라 부르는 유형은 새로운 정부(또는 집권세력)의 집행기구가 일방적으로 그리고 상대방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가해자를 지목하고 처리절차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1815년에 연합군세력이 나폴레옹을 세인트헬레나로 유배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순수한 정치적 정의는 '극장재판'(show trials)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 경우 이미 재판의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합법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연합국 간의 합의과정에서 소련은 재판정이 단지 주요전범의 형량만 결정하는 극장재판을 원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재판은 사법적 정의의 두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즉 적법절차의 준수와 재판결과의 불확실성(23명의 피고 중 3명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처럼)이 그것이다." "반면, 도쿄재판은 순수한 정치적 정의에 가장 근접한 사례다.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라는 용어는 도쿄재판에서 가장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125-7)


# 순수한 사법적 정의의 특징

1. 법을 가능한 한 모호하지 않게 규정해야 한다. 

2. 사법부는 정부의 다른 기구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3. 판사와 배심원들은 법을 해석할 때 편견이 없어야 한다.

4. 적법절차─변호사 선임 권리, 항소권, 무죄추정의 원칙, 반대심문과 공개 청문 등─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 이행기 정의의 행위자들

1. 가해자(wrongdoers)

2. 피해자(victims)

3. 가해행위의 수혜자(beneficiaries)

4. 가해행위를 막고자 노력한 조력자(helpers)

5. 가해자들에게 대항하고 투쟁한 저항자(resisters)

6. 가해자, 피해자, 조력자, 저항자도 아닌 중립자(neutrals)

7. 이행 이후 이행기 정의의 옹호자와 조직가인 촉진자(promoters)

8. 이행기 정의의 집행을 반대, 방해하고 지연하는 파괴자(wreckers)

※ 하나의 행위자는 연속적, 동시적으로 하나 이상의 행위자 범주에 중첩되어 나타날 수 있다.


"진주만 공습, 북아프리카, 스탈린그라드, 시실리 침공 이후 독일 점령국가의 많은 지도자들과 부역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44년 봄, 출판계의 거물인 장 프로보스트는 거액의 자금을 레지스탕스에게 제공하고 받은 영수증을 고등법원에 증거로 제출해서 자신의 행위를 '속죄'받으려고 했다. 1944년 1월, 어느 피고는 감동적인 사직 편지(라발Laval이 수취인이었다)를 보냈는데 〈아마도 언젠가는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또 어떤 사람은 〈SS 대원들에게 동료들이 죽을 때 르노 공장의 옥상에 삼색기를 게양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영웅적인(의도는 불분명하지만) 행위를 인정받아 1944년 8월에 무죄방면되었다. 당시 고등법원에서 재판 받은 사람들 중에는 독일 패전이 가까워오자 재빨리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해 무죄를 받은 경우도 제법 있었다."(145-6)


"저항자들은 그들 행동이 전체주의 정권의 복수를 촉발하면 가해자로 비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종전이 다가오면서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지만, 1944년에 독일로부터 야만적인 보복행위를 당했던 이탈리아 중북부의 세 마을의 경우는 달랐다. 50년이 지난 후에 이뤄진 인터뷰에 따르면, 〈빨치산을 향한 세 마을 일부 주민들의 적대감은 여전했다.〉 이 마을에서 빨치산은 학살에 간접적 또는 심지어 '실제로' 책임이 있다고 간주됐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었다. 저항자들은 또한 자신이 속한 조직 또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저항조직에게 가해자로 비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레지스탕스 집단은 〈독일에 정보를 제공한 부역자로서 '명백히' 반역자이기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고 비난받았다. 각 집단은 자기들만의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집단의 블랙리스트가 다른 집단과 연계된 사람을 포함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151)


"피해자임을 강조하면서 가해행위를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1954년 독일헌법재판소가 1945년의 공직자 지위는 제3제국에 협조한 행위이므로 박탈해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 대법원은 해당 관리들이 〈사실상 피해자인 자신들에게 가한 부당한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나치 가해자들도 다른 의미에서─요컨대 히틀러체제가 아니라 전후 처리 과정에서─피해자임을 강조했다. 1950년, 일부 연방의회 의원들은 나중의 모호한 기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엄격한 기준 때문에 이른 시기에 탈나치정책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같은 시기에 〈나치에게 억압받은 사람에게 보상을 실시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된 용어인 '회복'(Wiedergutmachung)이 탈나치화 과정에서 해고당한 관리들의 복직에도 적용〉되었다. 결국 이런 나치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처음에는 히틀러, 나중에는 연합군에게 부당하게 피해받은 〈이중의 피해자〉로 간주했다."(151-2)


"새롭게 들어선 민주체제가 과거와 직면하게 되면 대답해야 할 수많은 질문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정의와 진실'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그 중 하나다.(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정의보다 진실을 우선시하는 결정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낮은 기소율과 과거의 가해행위에 대한 정보제공 간에는 간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 1982년 이후 설립되어 활동한 20여 개가 넘는 진실위원회는 대부분 가해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처벌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남아프리카진실화해위원회는 대표적인 예외인데, 여기서도 정치적 동기로 자행된 가혹행위는 기소를 면제했다. 엘살바도르의 진실위원회는 가해자 실명을 공개했으나, 위원회의 보고서가 발간된 지 5일만에 의회는 전면적인 사면을 결정했다. 브라질에서 상파울로 교구가 실명을 공개한 444명의 고문행위자들은 이미 사면된 상태였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1990년대에 등장한 〈진실재판〉은 사면법 때문에 기소로 이어지지 못했다."(162-3)


제5장 가해자


# 가해자의 범주 분류

1. 기회주의자 :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

2. 패배자 : 자기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중요한 존재로 비치기를 바라는 심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

3. 악당들 : 적이나 경쟁자가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에 만족하는 자

4. 순응주의자 : 물질적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로 작동하는 자

5. 광신자 :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자

6. 원리주의자 : 광신자와 유사하지만 특정이념이나 가치가 없거나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경로를 변경하는 자

7. 무無사유자 : 무관심과 부주의가 행위의 동기를 형성하는 자


"대부분의 독재정권 하에서 하위직급 가해자는 순응자와 무사유자인 경우가 많은데, 주로 원리주의자들이 이들을 후원하고 결속한다. 엘리트 가해자들은 대부분 광신자들이다. 기회주의자와 악당은 가해자정권을 유지하는 동력이 아니라 거기 빌붙는 기생세력이다.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말기처럼 정권이 주로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면 체제는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순응주의자와 무사유자들은 분노(anger)와 격분(indignation)을 유발하고, 광신자와 악당은 증오를 촉발하며, 기회주의자와 패배자는 경멸을 자극한다. 순응주의자와 무사유자는 그들의 '행위'가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데 반해서, 그 외 다른 유형은 그들의 '존재' 때문에 감정을 유발한다. 후자 중에서 광신자와 악당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증오를 유발하고, 기회주의자와 패배자는 허약하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 된다. 가해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법률적 대응은 이러한 정서적 반응과 연계된 내재적 행위경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204-5)


# 가해혐의의 반사실적(counterfactual) 정당화

1. 차악적 정당화 1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했을 것이며,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2. 차악적 정당화 2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일이 벌어졌을 것이며,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3. 도구적 정당화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억압적인 체제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대체적 변명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그걸 했을 것이다.

5. 강압의 변명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해당하거나 심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6. 무익의 변명 : 내가 그걸 거절했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차악적 정당화 주장은 자기보호를 위한 위장이 태반이지만, 많은 경우 진실을 포함하기도 한다." "독일점령하 프랑스에서 페탱에게 충성맹세를 거절한 판사는 괴팍한 딱 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잡혀온 레지스탕스들이 자신들보다 더 페탱에 충성하는 법관들에게 재판을 받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비시 정권에 충성한 광신자들에게 재판받아 사형을 선고받는 사태는 피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독일인들은 중형을 선고해서 인질로 잡으려고 했으며, 반면에 무죄판결을 받으면 격리나 추방 등이 뒤따를 수도 있기 때문에 판사들은 때때로 변호인의 요청에 따라 〈중간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사임한 법관들은 임무수행을 포기한 군인 또는 중환자의 고통을 외면한 의사에 비교되었다. 덴마크에서도 점령세력이 사법제도를 장악하여 결국은 자국민들에게 더 많은 해를 입힐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관들이 독일과 협력한 사례가 있었다."(206-7)


"1989년 이후 동유럽에서 반사실적 정당화의 변종이 등장했다. 즉 〈우리가 반대파를 호되게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침공했을 것이고 그 결과는 훨씬 참혹했을 것이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1981년 계엄령 주모자의 기소 가능 여부를 조사한 폴란드의회 위원회가 이 조사를 철회했을 때, 이 주장이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이 사건의 주동자인 야루젤스키는 계엄령이 차악의 선택이었으며, 그것은 소련의 침략뿐만 아니라 국가를 파멸시키는 경제적 무정부 상태에 비교해서도 차악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관심을 끄는 추가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실 야루젤스키가 계엄령 발동에 실패했더라도 소련이 침공하지 않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행 이후 〈폴란드 법학자 대다수는 위험을 초래하는 잘못된 판단이 졸속과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잘못된 신념도 행위 당시에 획득가능한 증거로 잘 설명된다면 용인할 수(정당화는 안되더라도) 있는 것이다."(209-10)


"'적'의 존재는 개별적으로 보면 가해로 비칠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축소하면서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만행을 볼셰비즘과의 전투 때문에 불가피하게 빚어진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어느 영국인은 〈(서)독일인들은 수세기 동안 아시아의 야만에서 유럽문명을 지키는 것을 자기가 부여받은 역사적 사명으로 간주했다〉고 썼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그들을 기소하기보다 연합국은 그들이 한 일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독에서 과거의 나치즘은 〈신뢰할 수 없고 부정직한 사람들에 대한 전후 독재를 정당화하는데〉 활용되었다. 라틴아메리카 독재자들은 진부할 정도로, 때로는 진지하게, 공산주의와 테러리즘, 그리고 게릴라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라면서 억압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내부의 적〉을 만행의 정당화로 삼기 어려운 것은 그 적이 가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점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 폭력은 그에 대한 무장저항에 선행했다."(213-4)


"나치와 공산정권 인사 중에서 광신자 또는 기회주의자는 더 엄하게 처벌되어야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비인간적 이념에 대한 개인적 헌신은 가중처벌 사유인가 아니면 정상참작 사유인가?" "똑같이 나쁜 이상을 신봉하고 실행했더라도 경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런 행위를 한 기회주의자가 더 나쁘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덴마크 검찰총장은 독일을 위해 급여를 받는 일에 종사한 행위는 군인으로 복무한 것보다 〈윤리적 관점에서 훨씬 나쁘다〉고 지적했다." "기회주의보다는 광신주의에 대한 선호(이렇게 불러도 된다면)는 악독한 반유태주의 프랑스 정치인 자비에르 발라에 대한 고등법원 재판에서도 잘 나타났다. 검사는 〈발라의 행위에 광신주의 요소가 있지만, 그것이 저급하고 이기적인 동기로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것이 검사가 발라는 '중형'을 받아야 하지만 '극단적인 제재'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근거다. 곧 광신주의는 경감사유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224-5)


제6장 피해자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가해행위는 피해자(또는 제3자)에게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첫째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가해자에게 부과하려는 욕구다. 이른바 눈에는 눈이다. 둘째로는 피해를 가능한 한 수준에서 원상회복하려는 욕구가 있다. 영국의 속죄금(Wergeld) 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균형을 회복하려는 이 두 가지 방법은 서로 대체 가능하다." "범죄자가 속죄금을 지불할 수 없으면 처벌이 그 대체물이 된다. 그러나 현재 법제도에서 처벌은 피해자의 요구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가해행위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가해자 처벌과 분리되어 있다. 그럼에도 보상절차는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징벌적 목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왕정복고 과정에서 일부 이주자들은 자기 재산을 구입한 사람에게 처벌적 목적의 배상금을 부과하기 원했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현금보상이나 바우처 대신 현물배상에 치중했는데, 그 목적 중 하나는 재산이 과거 특권계급에 귀속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241-2)


# 피해자의 고통의 유형

1. 물질적 고통 : 개인재산의 손실

2. 신체적 고통 : 신체 또는 자유 등에 걸친 피해

3. 무형의 고통 : 기회 박탈이나 기회 상실


"파괴된 재산은 몰수된 재산보다 인색하게 보상되는 경향을 보였다. 1815년 이후 프랑스에서 국왕을 위해 싸우다가 재산이 파괴된 방데 반란 가담자들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한 반면, 왕에 대한 충성보다 자신들의 안정을 더 중요시하다가 재산을 몰수당한 이주자들은 나중에 보상을 받았다. 이 차이는 결국 국가가 재산 몰수와는 다르게 재산 파괴에서는 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걸 의미한다. 일부를 대상으로(상대적으로) 완전한 보상을 실시하는 대신 모두를 대상으로 부분적인 보상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결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45년 이후, 많은 독일 점령국가에서 파괴된 재산을 개인별로 보상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조치의 개념적 기초는 보상 권리가 아니라 필요와 연대였다. 노르웨이에서도 전쟁피해에 대한 '회복적 보상(regressive compensation) 원칙이 확립되었다. 즉 〈모든 국민이 고통을 겪었으며, 각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정서가 일반화되어 있었다.〉"(245)


"몰수의 경우에는 흔히 제기되는 이중소유라는 골치 아픈 쟁점이 있다. 국가가 몰수재산을 선의로 구매할 의사를 밝힌 사적 개인에게 팔았을 경우, 새 소유자는 취득한 재산이 법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 재산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보상하기 위해서 불의를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잘못이 초래한 불의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그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불의와 사회적 분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증가하게 되며 결국에는 최초의 불의를 지배하게 된다." "부당취득 후 한 세대가 지났을 때에만 새로운 소유자에게 재산을 보유할 자격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 왕정복고와 1990년 이후 구동독에서 새로운 소유주가 〈정직한 방식〉으로 취득했을 때 몰수재산 반환에 예외가 가능하다는 예외조항을 둔 독일의 통일 조약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반대로 영국의 왕정복고 때 재산은 대부분 원래 소유자에게 반환되었다."(247-8)


"과거의 고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필요 중 무엇이 타당한 보상근거일까? 두 사람의 피해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 사람은 과거에 심하게 고통을 겪었지만 현재는 회복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상적인 상태로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은 과거에 고통을 덜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지금은 일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목표가 과거의 후생손실을 보상하는 것이라면 첫 번째를 우선시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 후생에 관심이 있다면 두 번째 사례가 더 강력한 근거를 갖는다. 프랑스 왕정복고 과정에서 나온 이 질문은 나치만행을 둘러싼 보상논쟁에서도 중요한 쟁점이었다. 1953년에 독일 최초의 보상법이 제정됐을 때, 피해자배상권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인 오토 퀴스터는 필요를 보상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정부관리와 정당 대표들을 비판했다. 퀴스터는 박해당한 사람은 자신들만의 특수한 상황에 기초한 특수한 권리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정당한 보상권이다.〉"(253)


"무형의 고통은 기회의 결여 또는 상실로 구성된다. 직관적으로, 모든 기회의 박탈을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고통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 기회─예를 들면 법조인 경력 취득─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의 후생은 기회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변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의 박탈이 피해로 간주되는 이유 또한 다양하다. 만일 그 사람이 법률적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이 경력을 향한 욕망의 결여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부재에 기인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불확실성도 피해로 간주된다. 특정 측면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 역시 피해의 유형에 속한다.(이 효과는 모든 사람이 박탈당한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좀 더 급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후생 자체보다는 후생의 기회가 도덕적으로 더 중요한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배상·보상 프로그램은 기회의 박탈에 대한 보상을 포함하지 않는다."(256-7)


제7장 제약요인


"사면 또는 관대한 처분이 포함된 타협을 통해 체제 이행이 시작되는 경우, 차기정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이행기 정의를 구현할 자유가 제약된다." "새로운 세력은 성공적인 이행과 이행기 정의라는, 상충하는 두 가지 열망을 갖는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물러나는 지도자들과 협상을 하면, 두 번째 목표를 희생해야 할 수도 있다. 만약 협상자가 자신들이 차기 첫 정부를 구성하고 일정기간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믿으면 사면과 불처벌 약속은 평판에 대한 의식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퇴장하는 엘리트가 이행 이후 협상자가 나중에 그 약속에 구속되지 않는 다른 사람들로 대체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메커니즘은 성공하지 못한다. 또한 구엘리트가 미래의 법원과 입법부가 독립적인 지위를 잡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 최종협상 역시 성사되지 않을 수 있다. 모순적이지만, 법원이 부패해 있거나 과거체제와 얽혀 있을수록 면책 약속은 더 신뢰를 받는다."(272-5)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이행기 정의는 복합적인─서로 충돌하기도 하는─제약 요인에 사로잡혀 있었다. 몇몇 연합국은 독일인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특히 그 생산기반의 철저한 파괴─만이 독일군국주의의 부활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봤다. 모겐소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독일이 1810년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징벌적 조치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별로 효과적이지 않으며, 이런 〈카르타고적 평화〉는 비생산적이라고 보는 측도 있었다. 또 서유럽 전체가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있는데, 그 산업적 기반을 파괴해 독일을 응징하는 행위는 유럽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은 연합국으로 하여금 초기의 엄격한 대독일 조치를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소비에트연방의 도발에 맞서기 위한 완충지대로서 강력한 독일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전범기소와 보상조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282-3)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이행기 정의의 핵심적 딜레마는 베르사이유조약에 대한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평가에서 이미 잘 드러나 있다. 〈관대함과 공정 그리고 평등한 대우에 입각한 평화만이 독일재건 기간을 단축하고 독일이 또다시 수많은 우수한 자원과 기술을 프랑스에 내던지는 날을 늦추는 효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보증'이 필요한데, 각각의 보증은, 독일의 점점 커지는 분노와 거기서 이어질 일련의 보복 가능성 때문에 또 다른 추가적인 조항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 카르타고적 평화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이다.〉 관대하게 다루면 독일은 새로운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원〉을 갖게 되고, 혹독하게 다루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초에 클레이 장군은 독일인을 궁핍으로 몰아넣는 정책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1,500 칼로리의 공산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1,000 칼로리의 민주주의 신봉자가 될 것인가 사이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293)


"경제적 제약요인은 또한 정권 퇴진(1815년의 프랑스 또는 1945년 이후의 유럽처럼)이나 정권 붕괴(1989년 이후의 동유럽)에 따른 이행과정의 처벌과 보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만일 새로운 체제가 광범위한 보상을 실시(1815년 이후)하거나, 경제재건을 추진(1945년 이후처럼)하거나, 또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촉진한다면(1989년 이후처럼), 이행과정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과제들은 이행기 정의를 심대하게 제약할 것이다." "1945년 이후, 독일에 협력했거나 또는 점령됐던 국가에서 경제적 협력자에 대한 기소는 활발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 〈경제재건과 나치청산 사이의 선택〉은 전자를 선호하는 쪽으로 귀착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중앙(산업 부문)숙정위원회는 경제협력자가 경제재건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되면 숙정대상에서 제외했다.〉 벨기에에서 적과 경제적으로 협력한 행위를 다소 관대하게 다룬 1945년 5월 25일의 특별법은 경제재건과 사회적 화합을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294)


"이행기 정의의 저변에 깔려 있는 감정의 급박한 특성을 감안하면 신속한 재판에 대한 요구가 과도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속함에 대한 열망은 철저함과 정의(절차적 공정의 의미에서)를 동시에 추구하는 열망과 자주 충돌한다." "법의 지배가 제약요인(또는 파괴되는)이 아닌 때에도 사법제도의 제한된 능력 때문에 신속함과 철저함에 대한 열망이 상호배타적 관계에 놓일 수 있다." "사법부는 재판을 받아야 할 정권의 일부이자 나아가 그 핵심 세력인 경우가 아주 많다. 1945년 이후의 독일사법부는 나치범죄자(특히 나치판사들)의 기소를 방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나아가 유죄판결이 자신들의 유죄증거를 없애는 인센티브로 작용하는 문제가 있다. 가해자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으면 한결 수월하게 그 기회를 갖는다. 패전 이후 〈종전과 점령 간의 상당한 지연은 일본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와 기록을 조직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다.〉"(299-300)


제8장 감정


"감정은 그 고유의 '행동 경향' 때문에 신중하게 고려된 행동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가장 중요한 방해기제가 감정의 두 가지 특성과 관련있다고 주장한다. 긴급성(urgency)과 조급성(impatience)이 그것이다. 나는 이 용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조급성은 후일 보상보다 조속한 보상에 대한 선호, 즉 시간 할인율을 1 이하로 낮추려는 경향이고, 긴급성은 나중 행동보다 조속한 행동에 대한 선호이다. 조급성은 신중함과 양립 불가능하며, 장기적인 이기심에 따른 행동으로 이해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늘 비루하고, 잔인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긴급성은 신중함과 양립할 수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신중함의 요청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진출하는 기회비용은 엄청나게 비쌀 수 있다. 자기방어를 위한 행위는 지체를 허용하지 않지만, 응보적 행위는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311-2)


"감정의 세 번째 특징은 감정의 짧은 반감기다. 예를 들어 폴 에크만은 그가 〈기본감정〉이라고 정의한 특징 중에서 〈급발진〉(sudden onset)과 〈짧은 지속〉(brief duration)을 제시한다. 많은 헌법의 핵심적 이념, 즉 양원제가 속도조절 및 냉각효과로 정당화된다는 논리는 이와 같은 감정기제에 의존하고 있다. 감정 소멸과 기억 소멸 간에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개입한다. 일반적인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멸한다. 감정이 기억에 의해서 촉발되는 한, 감정 소멸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감정이 개입된 사건의 기억은 좀 더 느리게 소멸한다. 〈감정은 망각을 늦추기는 하지만 제거하지는 않는다〉는 진술은 이 측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기억이 관련된 감정의 행동 경향을 촉발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가 여부다. 모욕의 기억이 총천연색에서 흑백 상태로 희미해지면, 사건의 정확성은 유지할지 모르나, 그 생생함과 동기부여의 힘은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313)


"많은 이행에서 즉각적인 정의실현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관찰된다. 객관적인 차원에서는 경제재건과 같은 다른 문제들이 우선 과제일 수 있다. 주관적인 차원에서는 이전체제의 독재자들과 협력자들의 처벌이 더 시급한 과제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 초법적 처벌은 한 가지 설명지표를 제공한다. 프랑스는 사람들이 자의적 기준으로 직접 정의를 집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식 군사재판정을 설치했다. 모라스 롤랑은 〈정부는 철도 건설보다 정의를 먼저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속한 재판 요구가 감정으로 촉발된 긴급성과 연결되는 한, 즉각적인 재판결론에 대한 요구는 재판에 임하는 우리가 느끼는 조바심과 연결되기도 한다. 따라서 법적 절차를 단순화하는 작업은 단지 다뤄야할 사건이 많아서가 아니라 복수에 대한 열망을 즉각적으로 충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실제의 경우 긴급성과 조급성의 효과를 각각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315-6)


"감정이 그것을 촉발한 사건 이후에 시간경과에 따라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이탈리아, 덴마크, 프랑스에서는 1942~43년 이후 새롭고 더 억압적인 점령정권이 등장했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퇴각하는 과정에서 초토화 전술을 펼쳤다. 이런 최근의 기억은 부역자 처벌요구를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1945년 여름에 독일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그간 다소 침잠해있던 처벌 요구가 최고조에 달했다. 반대로, 1989~1990년 동유럽의 공산당정권이 몰락할 당시, 이 체제는 이미 50년이나 이어졌고, 최악의 만행은 비교적 먼 과거에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최악이었던 스탈린시대는 1953년에 끝났다. 무력으로 진압된 항쟁(1953년의 동독, 1956년의 헝가리), 침공(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계엄령(1981년의 폴란드)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과거에 속했다. 따라서 1945년 이후와 같은 처벌에 대한 긴급한 요구는 없었다."(317-8)


# 기억과 감정의 소멸을 막는 기제들

1. 가해행위의 피해자 간 소통

2. 피해자에게 복수를 요구하는 사회의 명예 규범

3. 가해 행위를 상기시키는 물리적 흔적

4. 가해 행위가 초래한 사건의 영속성


"체코의 반정부활동가였던 작가 야힘 토폴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94년에 나는 수사과정에서 나를 고문했던 공산당비밀경찰(StB)의 주소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내 친구 중 하나를 죽이고 다른 하나를 감옥에서 강간했다. 나와 두 동료는 그를 처벌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그 전직 비밀경찰을 납치해 은밀한 장소로 옮겼다. 우리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잠시 그와 단둘이 있게 되었는데, 그가 너무나 두려워하고 낙담한 상태여서 그를 풀어주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한 짓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세 개의 동기부여가 작동한다. 복수를 향한 열망, 실질적인 응보적 정의를 향한 열망, 그리고 실질적 정의의 실행에서 절차적으로 정확한 원칙을 따르려는 열망이 그것이다."(329-30)


"많은 경우 절차적 정의를 향한 열망과 실질적 정의를 향한 열망─자신을 이전체제와 구분하려는 열망과 그 체제를 엄중하게 처벌하려는 열망─간에는 갈등이 있다." "내 견해로는, 새롭게 들어선 민주주의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 첫째, 소급입법의 금지나 공소시효 연장 등 기본적인 사법원칙의 존중을 강조할 수 있다. 1989년 이후 헝가리 헌법재판소의 일관된 접근방식이 그 예다." "둘째, 새로운 체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이 원칙을 파괴해야 할 필요를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소급입법을 채택했다." "셋째, 가장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절차인데, 위장술을 사용해 위 두 방법을 모두 시도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법무부는 특정범죄에 대해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은 그 가해자가 전쟁 전의 법체계에서도 똑같은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소급입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331-2)


"이행 이후, 중립을 지켰던 사람들은 자신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있으며, 분노와 경멸적 행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설사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가해자들에 대한 이행 이후의 공격이 마치 이행 이전의 그들의 소극성을 마술적으로 무효화할 수 있는 것마냥 응징에 대한 요구를 강화한다. 협력과 저항 사이의 회색지대에 놓여있는 중립자들이 오히려 더 보복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1944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부역자로 의심받던 판사들이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엄하게 재판에 임했다." "프랑스에서 해방 이후 초기의 법원선고가 엄중했던 이유를 〈많은 배심원들이 레지스탕스에 늦게 가담했으며 그들이 이전에 증명하지 못한 열의를 증명하고 싶어한 사실〉로 설명하기도 한다." "알제리 독립 과정에서 가장 늦게 민족해방정선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슬림 알제리인(하르키스) 살해에 가장 열성적으로 가담했다."(336-8)


제9장 정치


"정당은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여 표획득(vote seeking)에 전념한다. 또 자신들이 내세운 정책안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는 측의 선거권을 빼앗는 표저지 전략(vote denying)을 구사─전후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원의 선거권 박탈─할 수도 있다." "프랑스 왕정복고 정치에서 소수의 자유주의 진영 의원들은 재산환수에 반대했고 국유재산 구입자의 권리를 옹호했다. 따라서 몰수된 재산을 둘러싼 의혹과 불확실성의 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의원들은 원래 소유주들에 대한 보상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고객은 자기 이익이 관철되었다고 생각하면 계속 고객으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같은 논리로 선거에 임하는 의원들의 관심사는 지지자의 경제적 이익증진에 있지 않았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재산환수 소문을 퍼뜨리는 등 사실을 왜곡한 선거전략을 동원하여 재산구입자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지지로 연결되기를 원했다.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착취행위였다."(351-3)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톨그리아티는 모스크바 망명 시절에는 숙정과 재판의 필요성에 대해 강경노선을 취했다. 1944년 봄, 귀국했을 때 그의 입장은 다소 완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주력정당으로 키우고 〈탈파시즘 정책의 추진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게 자명한 중산층의 지지를 끌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톨그리아티는 북부에서 일어난 이른바 〈야만의 숙정〉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1946년,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그는 이탈리아의 이행기 정의를 거의 종식시킨 사면법을 제안했다. 이 법은 특히 법원에 재량권을 크게 위임하였다. 〈파시스트와의 거래에서 항상 단호했던 사회주의자들은 사면반대 투쟁에 앞장 섰다. 물론, 공산당과 양립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다음 해에 연립정부를 떠났을 때, 그들은 비타협적인 노선으로 돌아섰으며, 사면을 반동세력의 작태로 규정하고 강경한 어조로 반대했다."(354-5)


"〈퇴장하는〉 엘리트들은 의회정치에 참여하는 유권자의 힘을 빌려야 했다. 이 전략은 이전의 독재체제가 정치적 추종세력이나 협력자를 광범위하게 구축할 만큼 장기간 권력을 쥐고 있었거나, 새로운 체제가 자신들에게 정당 또는 압력단체를 조직하여 기존 정당에 영향력을 발휘할 정치적 기회를 제공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1989-90년 이후에도 구공산권 국가에서는 공산당을 계승한 정당들이 합법인 가운데 정화법(lustration law) 제정은 동유럽 이행기 정의 정치의 주요 골격을 이루었다." "헝가리에서는 이행 이후 첫 번째 정부가 1994년 3월에 1만 2천명이 심사대상이 되는 가혹한 정화법을 통과시켰지만, 같은 해 12월에 헌법재판소가 폐지했다. 1994년 5월의 선거 이후, 후기 공산주의자들이 집권에 성공했다. 헌법재판소가 이미 정화법을 위헌 처리했기 때문에 새 정부도 그대로 따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는 1996년에 600명을 심사대상으로 하는 온건한 수준의 정화법을 새로 제정했다."(364-5)


"모니카 날레파는 이러한 자기징벌 조치는 사실상 차기정부가 더 강력한 숙정법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선제적 조치'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숙정문제에 소극적으로 임하면 차기정부가 더 가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소 온건한 조치를 도입하면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선제적 조치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아래로부터의 개정 전망이 없도록 정부가 독점적으로 법안을 도입해야 한다. 둘째, 후기공산주의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잃겠지만, 강경파인 반공산주의 세력이 의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반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강경파보다는 덜하지만 후기공산주의자에 비해서는 엄격한 이행기 정책을 선호하는 온건파 주류정당의 지지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후기공산주의자들은 집권기간 동안 온건한 법을 제정할 인센티브를 가진다."(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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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옹호함 -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버나드 크릭 지음, 이관후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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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정치적 지배의 본질


"정치─〈순전히 실천적이거나 즉자적인〉 행위가 아닌─는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곧 종속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정치가 그 자체로 생명력과 독자적 특성을 가진 어떤 것으로 칭송받는 경우는 드물다. 정치는 종교, 윤리학, 법, 과학, 역사나 경제가 아니다. 정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란,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단일한 정치적 교리가 아니다. 비록 이런 교리들이 가진 요소들을 대부분 자기 것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정치란 결국 정치다. 정치란 그것보다 더 소중하거나 특별한 어떤 것과 〈같기〉 때문에 혹은 〈실제로〉 그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 그 무엇이다. 정치는 정치다. 정치 때문에 문제를 겪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도외시하는 사람이야말로, 실은 모든 일을 선의善意로만 대하다가 정치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20)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치란, 공통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영토 단위 내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전통을 가진 다양한 집단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집단들이 문화나 정복 혹은 지리적 조건 등 어떤 방식으로 통합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원시사회와는 달리 정치가 그 사회의 통치, 곧 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타당한 대안이 될 수 있을 만큼 사회구조가 충분히 다원적이며 분화돼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질서가 수립되는 원리는 다른 질서들의 그것과는 상이하다. 그것은 자유의 탄생 또는 승인을 뜻한다. 정치란 서로 다른 진실들을 어느 정도 관용해야 한다는 것, 곧 통치란 서로 경쟁하는 이해관계들이 공개적인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가능하다는 것, 실로 그래야 통치가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란 자유로운 인간의 공적 행위이며, 자유는 공적인 행위와 구별되는 사적인 일이다."(23-4)


"모든 통치가 정치를 수반한다고 말하는 것은 수사修辭이거나 혼란일 뿐이다. 물론 참주정이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도, 지배자가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기 전까지는 정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본질적으로 취약한, 마지못해 하는 그런 상황이다. 설령 이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고 해도, 통치자는 이를 정상적 상황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치란 전혀 안전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장애물로 여겨질 뿐이다. 정치란 때로 자유가 없는 정체regime에서도 존재할 수 있지만, 그런 곳에서 정치는 달갑지 않은 무엇이다. 통치자들에게 이것은 통합성을 저해하는 부적절한 진보다. 통치자들은 피지배자들이 그저 분란을 알지 못하도록, 그리고 〈공중〉이 형성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따라서 궁정 정치는 사적인 정치라는 말은 용어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정치적 행위의 독특한 성격은 문자 그대로 그것의 공개성publicity에 있기 때문이다."(28)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밖에서 살 수 있는 존재는 야수가 아니면 신뿐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신성한 기원을 가진 무엇이 아니라 자연적인 어떤 것, 말 그대로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최고의 학문〉이었다. 정치가 최고의 학문인 이유는 그것이 다른 모든 〈학문〉(모든 기술, 사회적 활동, 집단의 이해 등)을 포괄하거나 설명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개별 공동체에서 희소한 자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시적 경쟁들 사이에서 우선순위와 질서를 정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은, 생존이라는 공통의 목표 속에서 다양한 〈학문들〉이 자신들의 실제적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적절한 제도의 발전을 의미한다. 정치란 말하자면 모든 사회적 요구들이 거래되는 시장이자 가격 결정 메커니즘─물론 정당한 가격이 매겨진다는 보장은 없다─이다. 정치에서 자연발생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신중하고 지속적인 개인들의 행동에 의존한다."(33-4)


"정치란 대화의 과정이며,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대화란 본래 변증법적 논증을 요구한다. 대화가 진실되고 유익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주장할 때 그것과 상반되는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나은 방법은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그것을 듣는 것이다. 자유로운 정부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것으로, 오래됐지만 확실한 테스트가 있다. 그곳에서 가능한 효과적인 방식으로 공개적 비판이 허용되는지, 곧 반대가 허용되는지의 여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정치란 자유롭게 행위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치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회는 분열돼 있고, 정치란 분열된 사회를 과도한 폭력 없이 통치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런 시도야말로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정치 따위〉를 존중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선택을 할 수도 있는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매우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9)


2 이데올로기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전체주의적 지배는 정치적 지배에 대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가장 명확한 대조를 보여 주며, 이데올로기적 사고는 정치적 사고에 대한 명백하고도 직접적인 도전이다." "자유 정부를 그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동의에 기초를 둔 정부로만 보는 관점은 전체주의 정권 앞에서 완전히 무색해진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썼듯이, 〈전체주의자들이 언제나 대중 운동에 의해 인도되고, 그들의 목적을 위해 '대중을 통솔하고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소련과 공산화된 중국에 대한 대중의 광범한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한때 나치 독일을 부정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량한 자유주의자인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수가 통치에 대해 완전히 기만적인 이론, 곧 인민의 합의가 필연적으로 자유를 창출한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잘못되고 위험한 징후다."(53-4)


"밀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된 대표제 정부는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주장의 핵심은 자주 오해되곤 했다. 사람들은 〈자유 정치〉의 특징을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규정하려 했는데, 이들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민주적임을 표방하는 것이 어찌하여 그토록 그럴듯해 보였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전체주의 정권들은 실로 민주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그 정권들은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전체주의자들은 사회를 마치 단일한 하나의 대중이나 그것과 가까운 어떤 것처럼 다루는 방법을 알아냈다. 여기서는 물지 않고 짖기만 하는 반대자들조차 제거될 것인데, 그들이 독재 정권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이론들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독재 정부에서는 잠자는 개조차 가만히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꼬리를 흔들며 반길 때까지 채찍질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54-5)


"나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그저 예외적으로 효과적이며 거대한 몸체를 가진 [정치적] 신조의 집합체가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정치적 신조들과는 수준을 달리 한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각각 자신들이 사회의 모든 측면에 존재하는 총체적 관계의 필연적이고 배타적인 산물이라고─그래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을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명확히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사회가 그 자체로 자유로울 때에만, 아니면 사적 소유권이 지닌 분열적 요소로부터 또는 가능한 최대한의 일관성과 일반성, 통일성을 방해하는 인종적 이질성으로부터 자유로울 때에만, 이데올로기는 모든 내적 모순들로부터 안정적이고 최종적이며 자유로울 수 있다. 전체주의자들이 보기에, 정치 〈따위〉가 가진 제한적인 역할은 오류투성이의 기만적인 술책이자 〈사회〉의 지배를 방해하는 〈국가〉의 눈속임일 뿐이다. 『공산당선언』이야말로 〈공적 권력〉에서 〈그것의 정치적 성격〉을 제거하자고 주장한 책이었다."(62-3)


"우리 시대의 거대한 두 전체주의 정권이 모두 (열광적인 대중적 미신을 등에 업은) 한 개인을 국가의 지도자로 숭앙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단 국가가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단일한 형태로 압축하고자 하면, 그리고 사회가 일단 완전히 통합된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이고자 한다면, 그것이 바그너의 〈종합예술〉이든, 아니면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나오는 〈인공의 동물〉이든 간에, 거기에는 어쨌든 예술가가 필요하다. 토마스 만의 파시즘에 관한 우화 『마리오와 마술사』가 잘 보여 주듯이, 국가를 운영하는 기술이 '신비로운 비밀'처럼 보이려면 가짜 마술사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규율하는 전통적인 제약이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을 분명하게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하나 이상 필요하다. 그는 매우 무질서하게 분산돼 있는 사회적 힘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필수적인 폭력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 관점을 사기와 간계 혹은 마술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70-1)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시기가 곧 비상 상황이다. 자유로운 인간에게 이것은 실로 부조리한 일이다. 광신자는 대의명분에 입각한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는 자신이 자유를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희생이 곧 자유라고 생각하게 된다."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보았는데,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교는 대규모의 진정한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 희생은 노예의 본성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예는 희생당할 뿐이다. 오직 자유인만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위대하고 최종적인 대의명분을 위해─최후의 (그러나 실제로는 영원히 지속되는) 싸움에서─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 대의명분을 위한 폭력은 그래서 자기해방적이다. 즉, 그것은 개인을 자아로부터 해방[분리]시켜, 개인을 거대한 집단성에 결합시킨다."(81-2)


"정치란 지저분하고, 따분하며, 결론이 없고, 엉망으로 뒤엉키는 일이다. 거기에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열정이나 전체주의적 지식인들을 괴롭혔던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을 매력적인 질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최악의 정치적 상황에서도 한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고, 일단의 다양한 공동 경험과 그 자신의 영혼을 통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한 정치 공동체에서 〈근본 원칙들〉에 대한 합의는 결코 강압이나 기만을 통해 이루어질 수만은 없다. 정치적 정부에서 가장 기본적인 합의는 정치적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치란 행위이며, 신뢰의 체계나 고정된 목표들의 조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정치적 사고는 이데올로기적 사고와 배치된다. 정치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를 제공할 순 없다. 이데올로기란 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 만약 이데올로기들이 약하고 체제가 충분히 강하다면, 정치 체제 안에서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각축을 벌일 수는 있을 것이다."(88-9)


3 민주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라는 의미로 가장 흔하게 쓰이지만, 다른 모든 특별한 의미들이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민주적) 다수로부터 (민주적)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토크빌처럼 평등의 동의어로 사용할 수도 있다. 허버트 스펜서에게 민주주의는 지위나 부의 격차가 크지만 동시에 계층 이동성이 매우 높은 (다원주의적) 자유기업 사회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뽑힌 (민주적) 정부에 대해 헌법적 제한이 가해지는 정치체제를 의미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인민의 의사〉 혹은 〈일반의지〉가 헌정적 제도라는 〈인위적〉 제한을 넘어서는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단지 〈1인 1표〉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진정한 선택권〉이라는 의미를 덧붙이려고도 한다. 포괄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란 특정한 제도적 원리나 〈삶의 방식〉, 특정한 유형의 정치나 통치 방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94-5)


"민주주의가 식민지 아메리카처럼 이미 자유로운 체제가 수립된 곳에서 나타났을 때, 그것은 정치적 자유를 확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그것이 혁명기 프랑스나 러시아에서 나타났을 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민주주의는 실제로 중앙집권화와 전제정치를 강화할 수도 있다. 통치의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대중적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유지하며, 기계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마침내 모든 반대파들을 괴멸시켜야 할 필요를 만들어 낸다. 인민은 국가와 당을 파괴하려는 지속적인 음모(잘해야 절반의 진실이거나 전적으로 거짓인)에 대한 소식 때문에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미래의(그리고 항상 미래형인) 막대한 이익이라는 거창한 약속과 희망에 고무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자유 정부를 안정화시킬 뿐 아니라, 비자유주의적인 정부를 강화하기도 하고, 실제로 전체주의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처음으로 사회의 모든 계층이 통치자에게 중요해졌지만, 동시에 그들 모두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97)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적 교리는, 모든 발전된 사회는 다원적이며 다차원적이라는, 정치의 씨앗이나 뿌리에 다름없는, 핵심 관념을 위협한다." "토크빌은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민주적 국가를 위협하는) 이 새로운 현상을 〈민주적 전제정〉이라 이름 붙이고, 그 특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회에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계급 간의 구별도, 고정된 신분도 없다. 개인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인민은 서로 대단히 닮아 있는데 사실 똑같다. 이런 혼란스러운 대중이 유일하게 정당한 주권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 대중은 그들의 정부를 직접 통제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조차 박탈당한 상태다. 이 대중 위에는 그들과의 어떠한 협의도 없이 그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단일한 행정의 지도자가 존재한다. 이 지도자를 통제할 수 있는 대중의 의견은 제거돼 있다. 그를 체포하려면 법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하다. 원칙적으로 그는 심부름꾼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주인이다.〉"(103-4)


"민주주의란, 지성사적으로는 인간이란 어떤 면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신념을, 헌정적 차원에서는 다수의 통치를, 사회학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의 통치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정체나 혼합정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지만, 민주주의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직접 통치라는 불가능한 위업을 달성하려는 시도이며, 다수의 직접 통치란 실은 다수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휘두르는 자들의 통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통치는 정치에 선행하지만, 민주주의는 정치에 선행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는 둘 다 가능하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특히 〈선동가들의 오만〉에 의해 독재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반짝이고 아름답다〉라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현대의 경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확한 묘사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104-5)


4 민족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민족주의는 다음의 네 가지 중에서 하나 이상의 주장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소수자를 억압하는) '민주적 민족주의' 또는 〈인민주권〉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기능할 수 있다. 둘째, 그것은 제국주의 또는 '외부의 압제와 착취'에 대한 모든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데, 그로부터 민족[인민]을 해방시킨 사람들이 저지르는 과도함을 모두 용인해야 한다는 식의 마음을 심어 준다. 셋째, 그것은 끔찍하게도 '인종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오래된 국가에서 등장한 민족주의'조차 위기의 시기에는 외국인 혐오를 낳을 수 있고 그것은 그 위기 자체보다 더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며, 최소한 한 국가가 외국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아마도 민족주의의 주장에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에 차가운 회의주의를 섞음으로써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비등점으로부터 정치적 관용이라는 인간적 체온으로 그 온도가 내려오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124)


"민족주의는 정치적 정의正義와 그 어떤 특별한 관계도 없다. 마찬가지로 부정의와도 별 관계가 없다. 민족주의와 관련해서 가장 분명한 것은, 어쨌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국가의 자격에 대한 그 어떤 객관적 기준도 제공하지 못하며, 무엇이 민족인지에 대한 객관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주관적 힘만은 대단히 강력하다. 르낭은 이렇게 말했다.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다.〉 민족성은 민족을 형성하겠다는 결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폴란드인, 독일인, 헝가리인, 아일랜드인, 미국인, 페루인, 알제리인, 가나인, 말리인이라는 의식은 누군가가 설득한다고 사라질 그런 것이 아니다─아마도 누군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민족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을 통해 민족의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강제하려는 시도가 너무 멀리 가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정도일 것이다."(127-8)


"근대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산물이다. 그것은 봉건제의 몰락과 함께 사라져 버린 공적 질서에 대한 귀속감을 대체했다. 프랑스혁명은 그런 귀속감을 만들었지만, 또한 파괴도 했다. 군중들은 넘실대는 파도 위에 떠있는 것처럼 들떴고, 때로 이전보다 영광스럽게 대우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뿌리를 잃어버렸고 어디에 소속돼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민족주의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래는 일정한 영역 내에서 하나의 가족이었다고 말했다. 민족을 무장시키는 일이 유럽 전체로 번졌다. [민족으로 구성된] 시민군은, 첫째, 패배할 때조차 믿을 만하다는 점이 증명되었고, 둘째, 용병들에게는 불가능한 분투와 희생을 그들에게는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의 보편주의가 무너지는 가운데 나타났다. 민주주의가 그것의 힘과 신념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지만, 이와 동시에 통치 체제로서는 참혹하게 실패했을 때, 나폴레옹의 민족주의가 등장했다."(129-30)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이 민족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줘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혁명적 정의의 시대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으며, 한때 민족주의가 개인의 자유가 넘쳐흐르기 위한 조건이자 [자유를 위한] 최선의 기반으로 주장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자주 상기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이 아직 사실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자유와 민족주의 사이의 균형은 전 세계적으로 흔들리고 있고, 이 균형이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근거들도 충분하다." "아마도 가장 깊고 가장 폭력적인 억압을 당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고 거기에 천착할 것이다. 반면 오직 모욕과 불의만 알고 있는 사람은 국가적 복수심이나 민족적 위신에 대한 열망 앞에서 자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될 것이다. 파드라크 피어라스[패트릭 헨리 피어스]의 자랑, 곧 식민지에서 자유인으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아일랜드에서 죄수가 되고자 한다는 말은 참으로 사실일 것이다."(150-1)


# 파드라크 피어라스 : 아일랜드의 교사, 변호사, 작가이자 민족주의 운동가로서, 1916년에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에 반대하는 '부활절봉기'를 이끌었다.


5 기술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과학〉, 〈기술〉, 〈행정〉 등과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정치 혐오를 조장한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들은, 타협의 과잉과 확실성의 결여에 시달리고 있는 정치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특정한 사고 양식을 구성하는 상징들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믿음은 종종 과학이나 기술 또는 행정과 같은 행위들에 연관돼 있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지 속에서 유지되는데, 그럼에도 그것은 상당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발휘한다." "물론 기술은 과학적 원리를 도구나 상품에 단순히 적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사회적 교리를 왜곡하기도 한다. 인간 문명이 맞닥뜨린 모든 중요한 문제들은 곧 기술적인 것이며, 그래서 충분한 자원만 뒷받침된다면 현존하는 지식이나 조만간 얻을 수 있는 지식들에 기초해 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기술〉은 갖게 한다."(155-6)


"그래서 〈기술주의자〉에게 모든 국가란 단지 사회를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보인다. 국가를 권리의 보호자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의 중재자가 아니라 행복이라는 소비재의 생산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이 같은─주인인 사회를 위해 국가가 하인으로 종사하는 복지국가로서의─관념조차도 진정한 〈기술주의자〉에게는 지나치게 온화하고, 자유주의적이며, 정치적인 해석이다. 자기 완결적 개념으로서의 〈기술〉에서는 모든 사회가 그 자체로 하나의 공장이며 국가는 그것의 관리자다. 공장은 생산자의 필요와 행복을 위해 생산하며, 모든 사람은 곧 생산자로 상정된다. 물론 관리자의 지시나 기술, 허가 없이는 아무것도 생산될 수 없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위의 목적이 그 행위 자체에 있는) 행위들, 곧 예술, 사랑, 철학 그리고 휴식─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하에 관리자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면─은 그 자체로는 생산과는 관계없는 비효율적인 것들이다."(158)


"모든 산업 문명을 〈기술〉을 통한 공통된 발전 단계의 하나로 보는 사람에게 전형적인 시민상은 '엔지니어'다. 엔지니어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시민 영웅이다. 그가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서 정치인, 사업가, 관료, 장군 또는 정당 지도자들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그는 정치와 굶주림의 고통(그리고 질투심?)이라는 딜레마로부터 우리를 구해 낼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모든 종류의 교육을 기술과 훈련으로 집약할 것이고, 그것의 목적은 사회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엔지니어들을 배출하는 데 있다. 엔지니어들은 유지나 관리가 아니라 발명과 건설의 관점에서 사고하며, 일반적인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스럽게 〈정치 따위〉를 공격하는 교리에, 그리고 기존의 위대한 기술적 진보를 보여 주었고 이제는 스스로를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분야에 개입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한 정부에 매료될 것이다."(159-60)


"진정한 과학적 활동에 대한 왜곡, 곧 과학을 그 자체의 고유 영역을 넘어서 적용하려는 모든 시도를 〈과학만능주의〉scientism라고 불러 보자. 과학만능주의가 주장하는 것의 규모는 [하나의 원리로 전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이데올로기의 그것과 일치한다. 하나의 과학 법칙은 일반화라는 목표를 위해 그것이 다루는 모든 사례들에 적용돼야 한다. 단 하나의 반대 사례도 과학적 이론을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세계 질서의 기반임을, 곧 모든 것에 대한 포괄적 설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거대한 주형틀을 주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전체주의의 신봉자들의 관점에서는 눈앞의 정치적 이슈들이란 단지 완전히 합리적인 세계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전략의 한 부분으로서의 전술, 곧 역사적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보편적 일반화의 범위[크기]와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다."(166-7)


"과학만능주의와 별로 관계가 없는 기술적 사고도 있다. 그들은 행정이 항상 정치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일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서 어떤 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보다는, 공무원의 경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바보들끼리 경쟁하도록 두면 된다. 최상의 행정을 가진 국가가 최상의 국가다.〉 [그들이 보기에는] 경험 없이 하는 말이 곧 이론이며, 국가 사무를 실제로 돌보는 사람들이 정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다." "물론 그 공무원은 모든 문제를 다 기술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을 보다 나은 〈민주적 의사 결정 기구〉의 〈수단이자 방법〉 역할을 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부의 '모든' 결정이 〈과학적으로〉 또는 명확하고 사전에 잘 준비된 기술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부는 그런 기술을 통해 가능한 일들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177-8)


"그런 〈전문화〉에 대해 극심한 경멸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모하게 위장한 테크노크라트 유형도 존재한다. 심지어 그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맞서 다재다능하고 현명한 다방면의 아마추어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스스로를 전문가주의에 맞서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그는, 심지어 공무원을 위한 그 어떤 형태의 특별 교육에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정말로 정치 이전pre-political의 발상이다. 그는 정부의 첫 번째 의무가 통치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개혁적인 정치인들이 대체로 이 같은 점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매우 정확하게 느낀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정치 이전의 통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다." "어떤 정부에서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행정이 아니라 정부 그 자체다. 공무원들은 정치인들에게 그들이 잘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비난하지만, 정치야말로 질서 속에서 다양성과 변화를 가져온다."(178-9)


"〈기술주의〉는 자원의 [정치적] 배분이라는 문제와 자원이 [기술적] 적용이라는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여기서 적용은 기술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에 투입될 자원과 그 결과물의 배분에 대한 권위 있는 결정이 내려진 다음에야 적용될 수 있다. 이런 결정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바로바로는 아니더라도 수개월 또는 소년이 지나도록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사실 이런 결정이 〈시장〉에서 내려지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경제란 과학이며,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학은 우리에게 자원의 배분에 대한 정치적 결정에 유용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증거들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경제학이 그 자체로 어떤 결정을 미리 내릴 수는 없다. 모든 자원이 경제적인 것도 아니며, 모든 대체물들─가령, 자유 같은─이 다 값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80-1)


6 정치의 친구들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 정치의 (거짓) 친구들

1. 비정치적 보수주의자

2. 정치에 무관심한 자유주의자

3. 반反정치적 사회주의자


"자신이 정치보다 상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정치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들 모두의 위에 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이 탐욕스럽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국정 운영에 마음대로 개입하는 온갖 정치인들과 로비스트들, 그리고 출세주의자들로부터, 국가에 필수적인 질서를 수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개들에게 언제든 뼈다귀를 던져 줄 준비가 돼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정부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라면 통치의 한 수단으로 후견주의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 그가 존스 박사에게 말한 대로, 정치란 바로 〈이 세계에서 성공하는〉 한 가지 방법인 것이다. 비록 저 졸부들과 약탈자들을 제거할 수 없다고 절망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정치 위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으며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한다. 다시 말해, 이 용기가 지속되는 동안만큼 그는 이 〈작은 개〉들을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186)


"이런 보수주의자는─적어도 그가 속한 인민들에게는─압제자는 아니다. 그가 훈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저 자의적인 것 혹은 자의적이라는 평판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편협한 사람은 아니다. 대중을 그 이전보다 더 불안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떤 이념이라도 허용할 것이다. 검열은 사회를 통제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신사들이나 기본적으로 인기가 별로 없는 작품들에는 적용될 필요가 없다. 또한 그는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어떤 일반적인 이념을 박해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모든 광신주의를 혐오하는 그의 태도는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있지만, 그는 정치인 역시 경멸한다." "재산이야말로 인간에게 여가를 가능하게 하는 지식과 자립의 조건을 제공하는 유일한 요소다. (토지 귀족의 후예와도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재산권은 정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며, 결코 정치적 입법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권리다. 그는 재산권이라는 비밀 뒤에 자신을 감춘다."(187-8)


"다음으로, 정부의 첫 번째 임무는 통치하는 데 있다는 케케묵은 사실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가 있다. 이런 관점이 잘못된 진실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필요한 진실이라는 점을 자유주의자들이 자주 상기해야 하는 만큼, 보수주의자들도 이것이 충분한 진실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모종의 질서가 존재하는 상태와 완전한 무정부 상태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통치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국가를 유지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그저 통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잘 통치할 것인가의 측면을 더 자주 생각해야 한다. 잘 통치한다는 것은 피통치자들의 이해관계를 잘 관리한다는 뜻이며, 그들의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면 정치적 주권 기관을 통해 그들이 대표되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또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모두 또는 단번에 충족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면, 어떤 국가에서도 이해관계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 경험하고 눈으로 보게 하는 수밖에 없다."(189-90)


"모든 내용을 다 제거해버리고 [보수주의를] 단지 정치학 연구의 방법론이라고 말하면, 이 주장은 동어반복이 되고 만다. 즉, 모든 것이 전통이라면, 모든 것이─정말로─전통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 경우, 우리는 경험의 모든 흐름을 인식 가능하고 유용한 차원으로 통제하기 위해 다른 기준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학문적 보수주의는, 겉으로는 방법과 교육, 철학에 대해서만 말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내용과 본질을 몰래 들여온다. 〈전통〉이 각기 다른 전통들의 총합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전통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경우,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매우 흡사한 개념이 된다. 어떤 하나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고, 다른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통주의자와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은,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꾸지 않고는 어떤 중요한 것도 바뀔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똑같이 과장된 전제로부터 단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뿐이다."(198-9)


"보수주의자가 기대가 너무 적은 사람이라면, 자유주의자는 기대가 너무 많은 사람이다. 자유주의자는 어떤 비용이나 고통 없이 정치의 모든 열매를 즐기고자 한다. 그는 나무가 아니라 그 과실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 한다. 그는 열매─자유, 대표제 정부, 정직한 정부, 경제적 번영, 무상교육이나 보통 교육 등과 같은─를 수확하기를 바라지만, 수확한 후에는 그것들을 정치와의 접촉이라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 한다. 그는 어떤 가치들을─정치의 밖에서 정의함으로써─자연적 권리로 취급하거나 정치란 단순히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일이라는 식의─그래서 정치에 대해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매우 좁은─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자유주의자는 정치와 행정, 국가와 사회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존재한다고 믿는 테크노크라트에 가깝다." "그는 이성의 힘과 여론의 일관성을 과대평가하는 반면, 정치적 열정이 가진 힘과 자신들에게 분명히 좋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괴팍함을 과소평가한다."(205)


"그는 실용성을 위해 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할 것이다. 그는 계몽된 여론이 [어떤 조정이나 타협도 없이] 있는 그대로 단순 명료하게 대표 기관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정치인들은 단지 그 여론의 힘 안에서 눌려 찌그러지는 존재다. 그들은 창조적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중개인들에 불과하다. 사실 미국 영어에서 〈정치인〉politician이라는 단어에는 18세기적인 부당한 비난의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의 정치인이란 부당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해결사〉이며, 사업가들조차 이들을 나쁜 사람 취급한다. 자유주의자는 이런 요소들을 정화해 버리기 위한 정치적 성전聖戰에는 참여하겠지만, 직업 정치인은 혐오한다." "그는 어떤 한 개인[특히 자신]을 대통령보다 더 옳은 사람이라고 찬양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위험과 그것이 얼머나 무책임한 태도인지 알지 못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독선과 내숭이라는 악덕을 품은 정치의 유형이다."(206)


"자유주의자들은 정치를 한편에 제쳐 놓고 다른 대안들을 찾았다. 자유의 순결성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큰 나머지, 그들은 정치라고 하는 남자들의 세계로부터 그녀를 떼어 놓으려 애쓸 정도다. 자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정치와의 관계만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대단히 훌륭하고 분명하다. 하나의 신조로서 자유주의를 본다면 그것이 추구하는 개별적 목표들은 가치가 있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정치에 대해 적절하지 않은 설명과 이해를 제공한다. 자유주의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개인에게 가해지는 모든 박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에 따르면] 그 견해들은─정치적 견해가 도덕적·종교적 견해와 같은 수준의 경험에 기초하는 것처럼─그것이 [단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협력적 수단들을 제거해 버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정치적이지 않은 자기 이익이란 없으며, 정치적이지 않은 공동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11-2)


"개인주의는 그 자체로는 정치적 신조가 될 수 없다. 그가 가진 자기 정체성은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정치는 이데올로그들이 하듯이 개별성을 해소해 버리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물론 어떤 유형의 정치도 자기 정체성이라는 위대하고 분명한 사실에서 곧바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 그 자체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모든 행위란 결국 개별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정치를 만들어 내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은 전체로서 하나의 도덕적·사회적 통일체로 간주될 수 없는 영역 내에서의 집단적 이해들이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 집단의 이해는, 자신의 양심이라는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진 온화하고 명확한 것이라기보다는 매우 거칠고 즉흥적인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옹이투성이의 비틀어진 나무를 돌볼 생각은 없이 그저 부드러운 열매만 좋아하는 사람들이다."(212)


"정치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보수주의의 편협성과 자유주의의 보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과 사상가들이 가진 특징적인 위험은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확실성을 추구하고 정치를 경멸하는 경향을 낳는다. 정치적 방식의 느린 속도를 견디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정치가 평등의 진전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기 위해 부르주아들이 이용하는 속임수나 음모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의 유혹에 다시 빠지게 된다." "사민주의적인 정책이 집행된 실제의 경험을 보면, 그것은 공상적 이상주의나 진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유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과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사민주의 역시 기존의 정치적 맥락에서 출현한 것이다. 사민주의 그 자체는 기존의 정치적 관습과 가치를 확장시킨 것이지, 비정치적 정부를 지향한다는 쪽으로의 급작스런 방향 전환이나 [전에 없던] 도전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책임감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위대한 스승이다."(217-9)


"그들은 보수주의자처럼 현실에 안주하거나 자유주의자들처럼 고상한 척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그들은 어디로든지 가서 사회의 모든 층위를 들여다볼 것이고, 그들의 연민은 더욱 열정적이며 광범위해질 것이다. 물론 이런 그들의 태도는 [결국에는] 위선적인 것이 된다.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이 세운 기준이나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당이 사회주의적 원리들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선거에서 지는 게 더 낫다〉라는 식의 말을 누구나 듣는다. 요지는 간단하다. 그런 태도는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 막스 베버의 구분에 따르면, 그들은 책임 윤리보다는 신념 윤리를 추구한다. 그들은 〈순전히 정치적인〉 고려 사항들, 곧 모든 정치 공동체에는 상호 조정돼야 하는 서로 다른 다양한 이해관계와 도덕적 목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멸한다. 이 같은 사실은 누구든지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222-3)


"이런 부류의 정치적 반反정치가 가져오는 최종적인 부조리는 너무나 편협한 나머지 〈학생 정치〉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 행동 유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현실의 정치적 활동을 회피하고자 하는) 아마추어들이 (정치적 교리들과 대의명분들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원하기보다는, 하나의 교리와 하나의 〈대의명분〉을 원하는) 광신자들의 행동 양식에 빠질 때 나타나는 유형이다. 이것은 선거에서 승리해 유권자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광범하고 제한적이지만 직접적인 이익보다는, 〈푸르고 상쾌한 대지 위에 세워지는 영국의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는 사람들의 행동 유형이다. 〈학생 정치〉는 확신의 정치다. 집단들, 특히 학생 집단은 그들이 가진 대의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당대의 모든 개별 이슈들에 대해 특정 원칙이나 〈그들만의 기준〉을 확정적으로 적용하려는 전형적 집단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생각은 그런 정치가 실제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게 만든다."(224-5)


"모든 문제를 원리적 차원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사람은 정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x나 y를 얻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든지, 〈우리는 a나 b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코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심지어 정치적 시스템 안에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우리의 이상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절망 속에 내던지거나 권위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상이란 이상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가까운 시일 내에 나타날 새로운 질서를 위한 계획이 아니다. 또한 이상은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를 위한 수단과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이상─〈진정한 평등〉이나 〈사회적 정의〉 같은─과는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더 많은 국유화〉나 〈민주주의〉가 결코 포기되거나 수정될 수 없는 첫 번째 원칙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것들은 상대적 수단에 불과하며, 그것들이 적절한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것이다."(227-8)


7 정치를 찬미함


"정치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정치는 자유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그것의 존재 여부가 곧 자유의 기준이다. 자유민의 칭찬만이 노예근성과 잘난 척하며 겸양을 떠는 위선, 양자 모두로부터 자유롭다." "정치란─기존 질서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이익을 보존한다는 점에서─보수주의적이다. 정치란─특정한 자유들과 결합돼 있고 관용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자유주의적이다. 정치란─여러 집단들이 공동체의 번영과 생존을 위한 공정한 기준을 확보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의식적인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조건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사회주의적이다. 이 가운데 무엇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는 시간, 장소, 조건은 물론 사람들의 정서 상태에 따라 다양하며, 어떤 경우에는 이 모든 요소들이 동시에 나타나야 한다. 그들 간의 대화를 통해 진보가 가능하다. 정치란 단지 요새를 지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벽의 밖에서 다양한 언어를 가진 풍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235-6)


"정치적 권력이란 (문법적으로 보자면) 가정법의 권력이다. 정책이란 과학에서의 가설과 같을 수밖에 없다. 그 가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을 상정하고 수용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그것이 진실인지 확인할 수 있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정치 역시 창조적인 쪽과 회의적인 쪽 모두에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을 때 찬사를 받아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그 정책을 바꿀 수 없도록 하는 어떤 장치들을 고안해 내려 한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헌법 제정자들이 정치에 무엇인가 영구적인 것을 담아내려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무용한 시도인 동시에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정치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반대를 금지하거나 파괴해 버리려는 독재적 시도이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정치 역시 언제나 물러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기 때문에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다."(243-4)


"확실히 잘 뿌리내린 법적 질서는 자유와 정치를 위해 언제나 필요하다. 법은 모든 복잡한 사회에 필요하며, 사람들은 비교적 정확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상당히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자유 사회의 필요악은 정치가 아니라 소송이다)." "정치란 분명히 절차라는 측면에서 찬사를 받아야 한다. 정치의 업무가 서로 다른 이해들을 조정하는 것인 한, 정의는 그저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현되는 과정을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법의 통치〉라는 문구가 담고 있는 의미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조정을 위한 체계는 절차적으로 복잡하고 양측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지만, 모든 중요한 반대의 목소리와 불만을 듣기 전까지는 결정이 내려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절차가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하지만, 이는 반대의 목소리가 얼마나 타당한지를 평가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246-7)


"정치적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절대적인 이념이나 그 자체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보통 사람들의 판단 속에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도덕성은 이상적인 행위에 대한 그 어떤 믿음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정치적 도덕성은 사람들이 원할 때 그런 진리들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할 뿐이며, 그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정부의 강압적 수단으로 격하시키지도 않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고 어떤 이념의 활동이 〈완전한 자유〉에 의해 보장된다면, 그런 진리나 이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강요된 복종이라는 가짜 자유에 끌어들이지 않는 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도록] 하자." "물론 자유freedom and liberty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도덕성을 대체하는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일부이며, 정치 역시 정치일 뿐이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실제로 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256-7)


"〈공화당은 노예제가 우리 안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제거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그리고 그것에 관한 모든 헌법적 의무들을 특별히 고려해 왔습니다. (···) 우리 중에서 노예제가 제가 말씀드린 어떤 측면에서도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장소를 잘못 택한 것이며 우리와 함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중에 노예제가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나머지, 그것이 우리 사회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단숨에 제거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무시하는, 또한 그와 관련된 헌법적 의무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정당에 있다면, 그 역시 잘못된 곳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 행동에서 그 사람에 대한 공감을 부인하는 바입니다〉(1858년 10월 15일 링컨의 연설에서). 이것이 진정한 정치적 도덕이며 진정한 정치적 위대함이다."(258)


"정치인들은 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위선자들, 그리고 개혁의 반대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을 할 때 시간을 들먹인다." "1955년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공적 지원을 받는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인종에 근거한 차별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책임 당국에 즉각적으로가 아니라─이것은 자유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의 사용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신중한 속도〉로 통합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아마 법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혜가 담긴 행위였다. 그 법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이 법원과 도덕주의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다. 물론 현재의 연방정부 기구들이 시간이 걸린다는 핑계를 대면서 기존의 입장[차별 관행]을 시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방치한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비열한 행위가 될 것이다. 시간 그 자체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정치적 시도는 또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259-60)


"〈이 싸움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를 유지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단 한 명의 노예도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만약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떤 노예는 해방시키고 어떤 노예는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또한 그렇게 할 것입니다. (···) 나는 공적 의무에 대한 내 견해에 입각해서 내 목표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제가 자주 언급했던, 모든 사람은 어디에서든 자유로워야 한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수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링컨은 연방의 수호라는 정치적 질서 그 자체를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시했는데, 그것은 그가 흑인들의 고통과 배제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다─그는 그것을 염려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연방이, 곧 북부와 남부 사이에 공동의 정치적 질서가 다시 복원되어야만,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261-2)


"정치에는 존재하지만 경제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상대와의 창조적 대화다. 정치는 자유로운 문명이 의지하는 대담한 신중함, 다양한 통합성, 무장된 유화책, 자연적인 인공물, 창의적인 타협이자 진지한 게임이다. 정치인은 개혁하는 보수주의자이며, 희의하는 신자이고, 다원적인 도덕주의자다. 정치는 활기 넘치는 냉철함, 복잡한 단순성, 난잡한 고상함, 거친 정중함, 그리고 장구한 신속성을 지녔다. 그것은 대화로 귀결되는 갈등이며, 우리에게 인간적인 차원에서 인도적인 과제를 부여한다. 그것이 직면하게 될 위험에는 끝이 없는 반면, 자유에 대한 책임이나 그것의 불확실성을 회피하려고 내세울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들은 너무나 많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반복해서 상기해보자면, 〈폴리스가 점점 더 하나의 통일체가 되어 가면, 그것은 마침내 폴리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 폴리스를 그런 통일체로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 결과는 폴리스의 파멸일 것이기 때문이다.〉"(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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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성찰하다 - 중산층 붕괴,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유럽중심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
다니엘 코엔 지음, 김진식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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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20세기가 낳은 세 번의 좌절

1.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경제성장이 실종되자 단조로운 노동과 빈곤한 소유를 떨쳐버리고 풍요로운 부를 만나리라는 기대가 무너졌다.

2. 레이건 당선은 도덕성에 기반한 절제된 자본주의를 수립하겠다는 '구호'의 승리였지만, 그 실상은 무절제한 부의 불평등과 '탐욕'의 승리였다.

3. 후기산업사회를 지나면서 경제적 풍요도, 도덕적 기반도 잃어버린 시민들은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포퓰리즘의 손을 들어주었다.


제1부 떠나다, 돌아오다


"20세기 초에 나온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은 기업의 성서로 통했다. 그는 작업 시간 단축을 위한 엄밀한 시간 관리를 위해 '작업장 스톱워치' 도입을 권한다." "테일러는 자신의 시스템이 인간적 비극을 낳으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 스스로 〈우리 동료 노동자들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리는 것이 보인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새로운 생산 방식 덕분에 더 부유해진 노동자들이 작업장 밖에서는 번영의 결실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동차의 헨리 포드는 재빨리 이를 깨우쳤다. 노동자들을 힘든 연속 작업에 붙들어두려면 가능한 한 많은 임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생하는 시간이 있지만 즐기는 시간도 따로 있다는 것이다. 소비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산업사회 밑바닥에 녹아들어 있는 이런 정신분열증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환경에서 생겨나는 피로뿐 아니라 예상치 않았던 권태와 무기력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소비 때문이었다."(21-2)


"(소비사회가 소시민들에게 '계산과 질서'로 된 행복을 약속해준다고 말한) 롤랑 바르트에게서 영감을 얻은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에는 근본적으로 긴장이 관통하고 있다고 본다. 소비사회는 안락도 원하지만 동시에 비범함도 갖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소비사회는 〈그 자체의 수동성과 본질적으로 행동과 희생에 들어 있는 사회적인 도덕〉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미디어를 통해 삶을 각색, 극화하는 것이다. 소비자가 보여주는 평온함은 파렴치한 시장 거리를 간신히 빠져나온 대단한 위업처럼 보이게 된다. 그리고 폭력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폭력을 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평온함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소비사회는 풍요롭지만 위태롭게 포위된 예루살렘 같은데, 이게 바로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다. 베트남전의 공포 앞에서도 긴장을 풀고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의 이데올로기 또한 바로 이것이다.〉"(23-4)


"보드리야르의 분석을 보완한 앨버트 허시먼은 소비사회 인간의 무기력은 바로 번영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고 있다고 여길 때는 좋은 경제 상황으로 풍요가 기대치를 뛰어넘을 때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더 큰 만족과 더 큰 비범함, 더 많은 관대함을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번영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이미 도달한 풍요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 만족이 끝나는 순간 소비 욕망은 재빨리 되살아난다. 저성장 시대에는 우선권의 본말이 전도된다. 위기를 접하면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변하면서 자신의 이해로 물러서게 된다. 그러면서 경제적 불황과 정신적 불황이라는 두 방향의 불황이 전개된다. 허시먼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경제 사이클에 역행한다. 인간 욕망은 호경기에는 진정성을 원하고 불경기에는 물질적인 부를 원한다. 이 이론을 통해서 허시먼은 1960년대를 해석하고 또 경제 위기로 인해 소시민적인 안락의 요구가 강해지는 1980년대의 보수주의 혁명을 예상할 수 있었다."(24)


"1973년 10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욤키푸르 전쟁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생산 감축을 결정하자 유가는 급등한다. 갑자기 선진국의 경제성장이 무너지면서 더 이상 예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다. 오일쇼크가 실은 더 깊은 파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난 뒤였다. 전후의 눈부신 성장기는 오늘날의 중국처럼 유럽이 미국을 따라잡던 시기였다. 유럽인의 생활 수준이 미국인의 생활 수준에 가까워질수록 성장은 조만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이런 사실을 예측한 경제학자는 거의 없었다. 대량 생산을 기반으로 한 생산성 향상은 미국에서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갤브레이스의 『풍요로운 사회』에 나오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영광의 30년은 생산 증가가 분배를 대신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지배보다는 시스템 조절 기구에 가까웠다. 경제 위기와 함께 노동자의 보루나 막강한 노동조합 권력 같은 것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노동계급은 괴멸하고 있었다."(52)


"탈공업화는 여러 요소가 섞여 있는 복합적인 현상이다. 말하자면 공업은 자기 성공의 희생물이라 할 수 있다. 예전의 농업처럼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 이익은 마침내 그 자체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제조 비용을 절감한 기업은 처음에는 이익을 보았다. 자동차나 전자시계가 저렴해지자 누구나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수요를 창출하고 생산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100퍼센트 가까이 자동차를 소유하면 높은 생산성으로 인해 재고용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산업이 쇠퇴하자 거기에 맞춰져 있던 사회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산업과 함께 기업 지도자와 엔지니어와 중견 간부를 거쳐서 현장의 노동자를 연결하던 견고하고도 연대감 있던 회사 조직도 사라진다. 전기와 내연기관이 제공해준 이점을 모두 소진한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엄청난 불확실성의 시대가 열리면서 임금 인상의 약속은 해고와 실업의 위협으로 바뀌고 회초리가 당근을 대체하게 된다."(53-4)


"68혁명으로부터 거의 정확히 10년이 지난 1978년 5월 9일, 68혁명이 꿈꾸던 해방의 유토피아는 폭력으로 기울어졌다. 그날 이탈리아 정치인 알도 모로의 시체가 자동차 트렁크에서 발견되었다.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극좌 조직인 붉은여단에 납치된 지 55일째 된 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 집권한 정당인 기독교민주당 대표였던 모로는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사이의 '역사적인 타협'의 주역이었다." "이러한 정치 폭력은 치명적인 이념 속에서 길을 잃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기존 규범을 대체한 비공식 문화의 유행과 약물 사용 확산 같은 훨씬 더 일반적인 현상과 연관된 것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프랑스 혁명의 방향을 잘못 틀었던 것처럼 1970년대의 범죄와 폭력은 결과적으로 1960년대의 반문화를 망가뜨렸다. 외형적으로는 도덕적 질서의 복귀와 경제 위기의 해결책이라 천명하는 보수의 반혁명을 유발한 것이 바로 이런 범죄 폭력이었다."(66, 70-2)


"네오콘, 즉 새로운 우파는 〈시장을 정부 간섭으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무관심과 쾌락주의와 도덕적 혼돈으로 빠지는 추세를 끝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힘을 얻었다." "레이건의 강점은 하나의 정책으로 월가의 엘리트와 백인 서민층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이 구원이다'라는 간단한 생각을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는데, 이런 생각은 '더 많이 벌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일해야 한다'던 20년 후의 니콜라 사르코지의 말로 이어진다. 많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가난에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레이건은, 빈곤층이 빈곤한 원인은 빈곤층에 대한 원조 때문이라며 비난한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곧 '흑인'을 의미했다." "토머스 소웰과 월트 윌리엄스는 흑인들을 돕고 싶다면 흑인을 위한 긍정적인 차별 정책은 포기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들에 따르면, 복지국가는 불행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불행을 사라지게 하지 않고 유지시킨다는 것이다."(76-8)


"2008년 금융 위기는 보수 혁명 초기부터 누적되어온 불균형의 결과였다. 콘드라티에프 주기가 맞닥뜨린 큰 장애물은 상부 부유층의 부가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레이건이 주장하던 트리클다운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는 탐욕이나 돈에 대한 열망이 특징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탐욕은 중동 지방의 페니키아 상인이나 향신료 무역으로 부유해진 베네치아에서 발전된 것이리라. 그러나 탐욕은 영국 그리고 미국과 북유럽에서 활개쳤다. 탐욕이 인간 활동의 기본 동인 중 하나임을 인정하면서 베버는 자본주의가 신뢰와 계약 관계를 구축하고 규칙, 법 책임 '윤리' 전체를 재조정하면서 탐욕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보수주의 혁명이 약속한 회복은 자본주의의 근본 가치인 청교도적 가치의 회복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수주의 혁명은' 탐욕의 승리'라는 정반대 결과를 낳았다."(92-7)


제2부 타락한 시대


"레이건과 대처의 보수주의 혁명이 자본주의 승리의 축배를 들 때 서구에는 포퓰리즘이라는 새로운 유령이 배회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89년 붕괴된 공산주의의 자리를 이 유령이 점령했다. 산업계의 다른 종교였던 공산주의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 "좌파는 서민을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위기에서 서민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도덕 회복 정책으로 선출된 우파는 서민들을 탐욕의 제단에 갖다 바쳤다. 서민들은 산업사회 붕괴의 피해를 정면으로 받았다. 산업사회는 결점도 지녔지만 적어도 사회 통합 환경을 제공하는 이점은 있었기 때문이다. 원한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셸러에 따르면 원한의 완벽한 표현이 바로 '포퓰리즘'이다. 셸러는, 그것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면 갑자기 참을 수 없게 되는 권력, 교육, 지위와 유산의 뚜렷한 차이와 함께 개인들은 똑같다는 형식적 평등성이 공존하는 오늘날 사회의 특별한 현상이 바로 원한이라고 분석한다."(103-4)


"〈뿌리깊게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모든 정책이 펼쳐지는데, 이상한 것은 그런 정책이 이런 불평등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르펜, 헝가리의 오르바, 이탈리아의 극우 정파 리그당과 오성운동의 연정과 같은 유럽 포퓰리즘의 특징으로 도미니크 레이니에는 '자산 포퓰리즘'을 지적한다. 이 포퓰리즘은 유권자들에게 '그들을 위한' 복지국가와 '그들의' 도시와 '그들의' 일자리를 약속한다. 유럽 포퓰리즘은 그들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두 계층, 즉 위로는 사회 엘리트와 아래로는 이민자 집단에 대한 증오를 응집시킨다. 이탈리아 포퓰리즘 운동에는 엘리트 혐오라는 위를 향한 증오, 즉 첫 번째 요구를 만족시키는 성향은 있었지만, 외국인 혐오라는 두 번째 아이템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 선거에서 우파에 뒤졌다. 스웨덴의 '민주당', 덴마크의 '인민당', 핀란드의 '진짜 핀란드당', 오스트리아의 '자유당FPO', 그리스의 '금빛 새벽당', 이탈리아의 '북부 리그당'은 모두 외국인 혐오에 기반을 두고 있다."(106)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원자화된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들이 기존 질서를 증오하면서 응집된 감정적 반응이라 보고 있다. 경제 위기로 몰락한 중산층들, 즉 이전에는 그 안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회에서 그 자리를 상실하게 된 사람들이 원한의 무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귀스타브 르봉은 『군중심리학』에서 군중의 감정적인 충동을 따를 때 개인의 이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아렌트는 르봉의 자료를 참조하여 자신의 세대를 〈계급사회가 군중사회로 변해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세대라고 규정한다." "계급과 달리, 군중은 공동 이익을 의식하고 묶인 것이 아니다. 군중에게는 제한적이며 실현 가능한 정확한 목표 같은 특별한 논리가 없다. 〈군중은 정당이나 시의회나 직장 조직이나 노조 같은 공동 이익에 바탕을 둔 조직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 다른 정당들은 모두 포기했던 이런 군중 속에서 지지자를 모았다는 것이 나치의 부상 과정의 특징이다.〉"(120-1)


"사회학자 로베르 카스텔은 사회적으로 성공해 스스로 사회적 관습을 극복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지나친 개인주의'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한 서민 계층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부족한 개인주의'를 구분한다. 카스텔의 이 구분은 오늘날 정치의 양극화를 잘 설명해준다." "이들을 가르는 기준은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더 이상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자와 어떤 빈자를 가르는 대각선이다." "르펜의 지지자들은 '고등 교육을 받지 않는 백인'이라는 트럼프의 지지자들과 닮은꼴이다. 사회의 능력주의를 신뢰하지 않는 이들의 의구심은 국가가 그들을 도와준다는 것마저 의심할 정도에 이르고 있다. 스스로가 그 수혜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부의 소득 재분배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재분배 없는 보호 정책'을 주장하는 역설적인 요청도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장벽'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요청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123-4)


"원주민들이 이민을 꺼리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경제위기와 함께 '무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이민족에 대한 지속적인 증오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심리학자 샬롬 슈바르츠는 수많은 나라를 연구하면서 이런 기질의 영향이 시공간에서 놀랍도록 충분히 분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말하면, 언제 어디에나 이상주의자가 4분의 1 정도 있고, 파시스트 또한 4분의 1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추론에 따르면 인간의 열정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열정이 표현될 수 있는 환경이 변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민 혐오에 대해 말하자면, 경제 위기 이전에는 없었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위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 위기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다른 세력과 동맹해 아무런 거리낌이나 부끄러움 없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을 뿐이다. 다른 세력과 동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생각은 아주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140-1)


제3부 미래로 돌아가기


"산업사회와 이 사회를 지탱하던 하부 구조가 무너지면서 디지털 사회가 도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디지털 사회의 거대 서사가 기대고 있는 신화는 1960년대의 이상에서 나온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는 스스로를 '1960년대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네오 펑크 해커의 후계자'로 소개하길 즐긴다. 정보혁명 개척자들에게 1970년대 문화는 자신들 이상의 지평에 실체를 부여하는 자유의 공간으로 비쳤다.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에 따르면, 미국 대학의 저항 문화 속에서 자란 대학생들이 부모 세대가 만든 세계의 표준화를 깨뜨릴 방법을 찾았던 것도 바로 1970년대가 열어준 그 지평 위에서였다. 〈대학은 확산과 사회 혁신의 핵심 요인이었다. 대학에서 청년들은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행동과 새로운 소통 방식을 발견하고 택한다.〉 역사학자 프랑수아 카롱은 〈1970~1980년대 사회의 기술화가 달성한 것은 바로 1960년대의 반체제 쾌락주의다〉라고 말한다."(157-8)


"오늘날의 현실은 컴퓨터 혁명이 꿈꾸었던 이상과 거리가 멀다. 이러한 실망은 새로울 것도 없다. 처음 전기가 발명되었을때, 그때까지 산업 생산의 혈액 역할을 하던 수많은 소규모 작업장이 전기로 큰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용 가능한 동력원을 갖고 있지 않던 소규모 작업장들은 증기엔진을 장착한 '대규모 회사'와 치열한 경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전기는 생산 공정을 좀더 편리하게 조절하고 세분화함으로써 라인 생산을 하는 '대규모 공장' 회사를 탄생시키면서 소규모 작업장의 결정적 쇠퇴를 가져왔다. 디지털 사회에 대한 실망도 같은 종류의 것이다. 규모의 경제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약속은 다시 한번 배신을 안겨주었다. 구글, 애플, 아마존은 과거의 일류 기업인 GM, 크라이슬러와 비교해보면, 주식 시가총액은 9배나 높지만, 직원 숫자는 3배 더 적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두려움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노동자 수의 감소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182)


"노동의 미래에 대한 논쟁은 종종 쳇바퀴를 돌 때가 많다. 비관론자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계를 파괴한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이나 리옹의 견직공처럼 항상 과거의 실수와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낙관론자들이 실수를 되풀이하게 하는 일도 아주 쉽다. 인간의 일자리를 보호하는 제방은 모두 허물어졌다. 로봇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복잡한 움직임으로 간주되던 운전도 곧 자동화될 예정이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봤던 공감도, 감정을 느끼는 로봇이 일본의 노인을 돌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디지털화가 일자리에 궁극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19세기 전반이 노동계급에게 특별히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경제사가들은 산업화 과정에는 오랜 임금 정체기가 동반됐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런 현상을 조엘 모키르는 '생활 수준의 역설'이라는 말로 설명했는데, 이때는 마르크스가 공장 생활에 대해 종말론적인 글을 쓰던 시절이다."(184)


"경제학자들은 어떤 기술이 실제로 사용되기 전에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도치 않았던 결과를 특징짓기 위해서 '일반 목적의 기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증기기관이나 전기는 최초 발명가의 의도를 완전히 넘어서는 방식으로 세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증기기관은 탄광의 물을 펌프질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지, 승객을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를 이동시키는 데 사용될 예정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전기세탁기나 텔레비전이 발명되기 전에 전기가 나왔다. 원래 발명자가 자신의 발명이 어떻게 쓰일지 몰랐다고 해서 흠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에디슨은 축음기가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을 기록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기술 혁신들은 모두 일련의 후속 발명을 통해 성장했다. 컨베이어 벨트 같은 라인 작업은 전기가 작업 구성을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방식이 되든 인간 노동의 미래는 사회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새로운 보완성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186-7)


"아이폰 세대는, 한 프랑스 영화에서 집안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아 부모의 분노를 유발하는 주인공 이름에서 나온 탕기 효과의 희생자다." "'안전'은 이 세대의 강박관념을 말해주는 키워드다. '트라우마'는 자주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인데, 구글 도서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트라우마라는 말은 1965년보다 2005년에 4배나 더 많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밀레니얼과 그다음 아이폰 세대의 차이가 생겨난다. 밀레니얼 세대는 낙관적이고 스스로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지만, 10년 후 경기침체의 영향을 받은 아이폰 세대는 더 불안해져 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가령 교실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이들은 자신의 연구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 밀레니얼 세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자신의 '소유'와 '박탈' 사이의 커다란 단절에 대해 마음 깊이 불안해하고 있다. 이들은 또 예술이나 정치 참여와 같이 스스로의 활동에서 나오는 '본질적' 가치보다는 성공과 돈이라는 '비본질적' 가치에 더 관심이 많다."(196-7)


"아이폰 세대와 정치의 관계는 이상하다. 무관심과 극단적 참여라는 정치적 양극화를 오가는 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사람의 사진을 수백만 번이나 돌아다니게 하고 또 날카로운 증오의 표현도 너무나 쉽게 전파시키고 있다."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54퍼센트)는 스스로를 민주당이나 공화당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를 '극좌'나 '극우'로 여기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역사적 시간과의 관계에도 변형이 일어난다. 프랑스의 젊은이들 가운데 13퍼센트만이 미래에 살고 싶다고 선언하고 있다. 엄청난 약속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기하급수적 발전은 미래에 대한 바람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역사적 감각'이 온전히 자리잡고 있던 1960년대의 전망에 대한 엄청난 반전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현재는 더 이상 과거와 미래 사이의 긴장의 순간이 아니고, 영원한 현재라는 일종의 늪지대와 같은 것이 되었다. 이전 세대의 역사주의를 오늘날의 '현재주의'가 대체한 것이다."(198-200)


"소셜 네트워크 세상에서 태어난 신세대의 역설은 인간이 이만큼 스스로를 많이 드러낸 적도 없지만 이만큼 가면을 사용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개인주의 전통의 상속자로 자처하는 디지털 문화는 네트워크와 알고리즘의 혼합체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어떤 이벤트를 경험하기보다는 널리 알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우리는 유비쿼터스라는 말처럼 동시에 어디서나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똑같은 약속을 하는, 친구 찾기 서비스인 틴더나 다른 소프트웨어가 제시해주는 것처럼, 하나의 대화에서 다른 대화로,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스크롤해서 넘어가기만 한다. 그래서 에스캉드-고키네와 네벵은 〈소셜 네트워크는 즉발적인 것에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초자아와 자기 통제가 발현될 가능성은 차단하고 인간의 모든 충동이 분출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놓는다〉라고 결론짓는다. 호모 디지털리스, 즉 디지털 인간은 다양한 장치를 통해서 오로지 〈우리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라〉고 위협하고 있다."(207-8)


결론: 딜런에서 딥 마인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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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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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편리하지만 궁극적으로 매우 잘못된 두 종류의 해답이 있다. 하나는 국민을 비난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고,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다양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다수에 의한 독재로 전락할 지속적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인식을 물려받아 고뇌하는 리버설 사이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소위 '우익 포퓰리즘의 전 지구적 부상'이라는 현상을 19세기 군중심리학의 클리셰를 재소환할 핑계로 삼곤 한다. 즉 대중이 그 모든 재앙을 자초하며,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잘 알더라도 비합리적일 뿐인 평범한 자들이 언제나 선동에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해결책은 명확하다. '게이트키퍼'라고도 불리는, 사실은 전통적인 의미의 엘리트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투표같은 무책임한 직접민주주의적 관행을 다 없애버리고 정치가 전문직의 영역임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다."(13-4)


"다른 하나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격변을 권력층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역사를 잠깐만 살펴보아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민주주의를 폐지하자고 결정한 경우는 거의, 어쩌면 아예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서구에서 우익 포퓰리즘 권위주의 정당이나 정치인이 기성 보수 엘리트의 협조 없이 정권을 잡은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도 독일의 나치당도 당시의 보수 기득권이라 불릴 만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확실하게 권력을 획득했다." "실제로 최고 특권계층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분리'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비판할 거리가 많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가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악하고, 부패하고, 비뚤어진 데서 비롯된다는 단순한 주장은 상황의 복잡성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러한 주장을 좌파가 하건, 우파가 하건 마찬가지다. 힘 있는 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건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인데, 그 힘은 결국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한 제도를 통해 주어진다."(15-6)


1장 가짜 민주주의: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권위주의적 포퓰리즘 통치의 확산─은 20세기의 경험과 유사점이 거의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으나 우리는 은연중에 선한 이들만이 역사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형태의 반민주주의적 과거가 반복되지 않는 이유는 오늘날의 반민주주의자들 역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대 권위주의 정치의 레퍼토리에 눈에 띄는 대규모 인권 침해 사태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20세기 독재 정권들을 연상시키면 곤란하다는 것쯤은 이들에게 상식이다. 2016년 이래 터키의 에르도안 정부가 저지르는 대규모 탄압도 강력함보다는 나약함의 징후로 보아야 한다. 트럼프가 극우 취미 워리어와 음모론자, 컨트리클럽 공화당원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군대'를 부추겨 의회로 보낸 것을 파시즘적 국가 장악을 위한 마스터 플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25-6)


"포퓰리스트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진짜 국민' 또는 '침묵하는 다수'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선출직을 두고 경쟁하는 다른 모든 이가 근본적으로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포퓰리스트는 자신의 라이벌이 부패하고, 악하고, 비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국민의 뜻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포퓰리스트는 자신의 국민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국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짜 국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진짜 국민이 아닌 사람'의 존재를 내포한다." "포퓰리스트는 언제나 자신이 국민을 통합했다거나 사회가 이미 통합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실제 정치 모델은 시민들을 최대한 분열시키는 것이다. 일부만이 진짜 국민에 속한다는 메시지는 특정 시민의 입지를 구조적으로 약화한다. 포퓰리스트가 권력을 잡게 되면 어떤 시민은 더 이상 법 앞에서 온전한 평등을, 심지어는 법의 보호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27-9)


"따라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은 끊임없이 사회를 분열시키려 들며 특히 '진짜 터키인', '진짜 인도인', '진짜 미국인' 같은 이상을 계속해서 앞세운다. 문화적 지배를 강화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훨씬 더 일상적인 작업과 함께 진행된다. 바로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적 경향이다. 오늘날의 권위주의 정권 중 다수가 해당되는 '도둑정치kleptocracy' 체제에서는 법적·정치적 규제의 부재로 공금의 사적 이용이 훨씬 더 용이해지고, 미래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법과 정치 체제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한편 정치적인 설명도 가능하다. 범죄 행위에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정권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 좋다. 대중 후견주의, 즉 지지에 대한 대가로 지지자의 뒤를 봐주는 것은 곧 대중의 충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일자리나 복지로 위협하면, 직접적 정치 탄압이라는 무기를 지나치게 휘두르지 않고도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다."(30-1)


"힘을 충분히 갖추게 되면 포퓰리스트는 국가 전체를 식민지화하려 든다. 오르반과 피데스Fidesz 당이 2010년 집권하자마자 바꾼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무원법이었다. 초당파적이고 중립적이라 여겨지는 관직에 정권 지지자를 앉히기 위한 조치였다. 리버럴 좌파가 나라를 장악해왔기 때문에 이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헝가리의 피데스당이나 폴란드의 집권당 '법과 정의'PiS당은 공통적으로 법원을 장악하고 국영 매체를 압박하는 작업에 주저함이 없었다. 언론인이 '국가의 이익', 즉 집권당의 이익에 반하는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곧 명확해졌다. 마치 나폴레옹 3세처럼, 이들도 법관과 언론인에게서 받는 모든 비판을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게 누구더라?〉라는 질문으로 받아쳤다. 인도의 재무장관은 〈민주주의가 비선출직의 독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고, 폴란드의 법무장관 역시 독립된 사법부를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폴란드는 민주주의 국가지 '법원지배'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34)


"시민사회 내부로부터의 저항은 포퓰리스트에게 특별한 골칫거리를 안긴다. 자신만이 국민을 대변한다는 주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블라디미르 푸틴이 완벽하게 다듬어둔 전략을 따르는 것이다. 푸틴은 여러 면에서 현대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롤모델이자, 도둑정치계의 진정한 혁신가라 부를 만한 인물이다. 푸틴은 시민사회가 사실은 전혀 시민사회가 아니며, 거리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진짜 국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증명'하면 그만이라는 점을 몸소 보여주었다." "답변은 늘 준비되어 있다. 우익 포퓰리즘 정권은 NGO와 평범한 시위대에 외부 세력의 도구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심지어는 이들을 외국의 스파이로 낙인찍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일례로 트럼프는 무슬림 입국 금지 법안에 반대한 수백만 시민을 〈돈 받고 일하는 활동가〉라 칭했고, 브렛 캐버노 대법관 지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때도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36-7)


"시민들이 정말로 그렇게 강력한 권위를 원하는 것일까? 정말로 대다수가 극우파로 개종해버린 걸까?" "트럼프의 당선은 어찌 보면 가장 시시한 정치학적 설명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당파 정치의 결과일 뿐이었다." "공화당원 중에도 공식 석상에서 트럼프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말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 뒤에도 그들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자아분열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동의 배경에는 어떤 명분에 대한 열렬한 지지보다 어떤 것 또는 어떤 이에 대한 열렬한 반대가 더 중요해진 오늘날의 선거가 있다. 정치적 편 가르기는 존 스튜어트 밀이 칭한 '공동의 지지'보다는 '공동의 반감'에, 또는 정치학자들이 '부정적 정체성'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해 이루어진다. 다수의 미국 우파, 그리고 일부 좌파에게 힐러리 클린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뽑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수의 브라질 유권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건 룰라의 노동당에 표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40-1)


"양극화의 책임이 포퓰리즘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퓰리스트의 주요 전략이 양극화임을 이해하는 건 중요하다. 포퓰리스트는 사회를 여러 집단으로 나눈 다음, 일부 집단이 근본적으로 정당성을 결여했고 심지어 존재론적인 위협이 된다는 점을 넌지시 시사한다. 포퓰리스트의 정치 세계에서 집단의 성격은 다양한 정치 집단을 가로지르는 정체성이나 이해관계로 규정되지 않으며, 존재론적 중요성을 갖는 하나의 선에 의해 단순화된다. 대략 '나쁜 편이 이기면 우리 모두 죽는다'는 식이다. 포퓰리스트의 세계관에서 상대편의 승리는 단순히 우리의 일시적인 패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을 향한 중대한 위협이며 나아가 정치 체제의 종말을 의미한다(2016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45퍼센트, 민주당의 41퍼센트가 상대당을 '국가의 안녕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많은 이가 '우리가 도대체 왜 여기 함께 있는가? 왜 내가 이 이질적인 사람들과 운명 공동체로 묶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44-6)


"부자는 단지 돈이 많을 뿐 아니라 돈을 지킬 힘이 있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중요한 건 이 같은 실질적인 분리가 어떤 음모를 통해서가 아니라 두 주류 정당 중 한쪽을 장악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점이다(물론 다른 한 정당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공화당과 그 후원 세력은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 방향이 유권자 전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는 문화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키면서 거기에 경제 정책을 엮어간다. 문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그저 비도시 지역 유권자가 (특히 상원에서) 과대대표되는 미국 선거 제도상의 구조적 이점을 누리기 때문이다. 또 항상 대비책으로 투표 억압 등의 전략을 구사하여 실질적인 소수 독재 체제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이는 공화당이 존경한다고 주장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면서 깊이 우려했던 시나리오다."(54)


# 양극화를 부추기는 이중 분리 현상

1. 특권층의 분리 : 자기분류와 동질화 경향이 강한 계층(주로 부유층)은 자신들과 나머지 사람들을 같은 공동체로 묶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2. 저소득층의 분리 : 저소득층은 투표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정치 참여에 소극적이며, 이는 자신들의 삶과 정치가 무관하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시민들이 자신과 아래 세대의 경제에 대해 점점 비관적으로 전망한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미국인의 60퍼센트, 유럽인의 64퍼센트가 자식 세대는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세대 간 진보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의 붕괴는 문명 규모의 현상〉이다. 중산층이 민주주의 원칙과 법치의 파괴를 때로는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적어도 오르반이나 트럼프 부류가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럼에도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실질적 이익이건, 공허한 기대건)을 위해 그 정도는 눈감아줄 의사가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 일부 시민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듯한 것, 또는 자기 자식의 미래에 도움을 줄 듯한 것과 민주주의 훼손을 일종의 트레이드오프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부유층의 지지는 언제나 조건부였다."(57-9)


2장 진짜 민주주의: 자유, 평등, 불확실성


"민주주의를 특정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인식을 공유하면 좋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번영과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면, 다른 어떤 정치 체제가 같은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달성 가능한 경우 민주주의는 버릴 수 있는 안이 된다. 이상화된 중국 권위주의 체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반면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 구성원 일부가 근본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카스트 사회라면, '인간의 얼굴을 한 권위주의'라는 대안이 있더라도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선호할 것이다. 그 경우에는 높은 성과를 내는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지저분하고 느리고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민주주의 체제를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평등에 대한 두 가지 이해가 있다. 하나는 평등한 권리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평등', 즉 상대가 나와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고 여기는 구성원들의 관계에 관한 이해다. (평등의 반대는 '다름'이 아니라 '불평등'이다.)"(67-8)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포퓰리스트가 종종, 자신의 이익에는 완전히 부합하지만 정치적 절차를 해치는 전략을 택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스트 정당이 정권을 잡지 못했을 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표를 많이 받지 못한 포퓰리스트 정당은 명백한 모순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면서 동시에 유일한 국민의 대변자인데, 어떻게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로 승리하지 못할 수 있는가?' 이 모순을 타개할 가장 쉬운 방법이 있지만 모든 포퓰리스트가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포퓰리스트가 좋아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인 '침묵하는 다수'를 끌고 나온다. 만약 침묵하는 다수가 침묵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미 정권을 잡았으리라는 것이다.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침묵하는 다수가 '침묵당하는 다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다수의 목소리를 억압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포퓰리스트는 부패한 엘리트층이 무대 뒤에서 수작을 부렸다는 점을 어필한다."(85-6)


"게임이 불공정해지더라도 반대파는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민주주의 사회는 〈호구suckers〉와 〈악당scoundrels〉이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분열될 위험에 처한다. 게임 이론에서는 '팃포탯tit-for-tat' 즉 맞받아치기 전략을 통해 제대로 된 규칙을 재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부정을 부정으로 받아치다가는 규범 위반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불을 불로 받아치는 전략을 구사하다가는 집을 몽땅 태워버릴 수도 있다. 정치 갈등에서는 모든 규범 위반이 다 똑같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투표 억압에 맞서기 위해 상대편 유권자들을 똑같이 투표소에서 내쫓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 심적으로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해결책을 도모해야 한다.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도,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94-5)


"현실의 대의민주주의에는 고도의 균형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우리 편이 졌지만 다음에 다시 이길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면 이 게임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동시에, 언제나 우리 편의 승리가 확실하다면 우리야 좋겠지만,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민주주의가 사라졌다는 의심을 살 수 있다. 애덤 셰보르스키가 민주주의를 〈제도화된 불확실성〉의 한 형태로 정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거 등 정치적인 결과는 불확실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당들이 선거에서 지는 정치 체제〉라는 그의 정의는 싱거운 소리처럼 들리지만 실은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다. 즉 민주주의는 여러 정당이 선거에서 지는 정치 체제이지, 똑같은 정당이 계속해서 지는 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생각,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규칙에 대한 생각이 바뀔 가능성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99-100)


"시민이 비이성적이고 식견이 부족함을, 시민 개인에게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지식이나 일관된 시각이 부족함을 입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 전체가 무작위로 돌아가거나, 정치적 보상이 늘 가장 뛰어난 선동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에 대해 충분한 감을 가지고 있으며 동료 시민이나 정당, 언론, 노조 등의 단체에서 선호를 얻어 판단한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름길을 택했다는 게 비합리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시민이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대부분 선동가의 말에 속거나 허위의식에 젖어서가 아니다. 도덕적·문화적 이슈, 심지어는 감정적인 이슈와 연관된 다른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E. E. 샤츠슈나이더가 말했듯이 사람들에게는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관념도 있다. 관념이나 가치관은 단순히 '합리성 대 비합리성'의 문제로 볼 수 없다."(104)


"어떤 철학자들은 고대 아테네식 '로또크라시lottocracy'의 부활을 주장하기도 한다. 로또크라시는 추첨에 의해 선발된 시민들이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정책 과제를 해결하는 체제다." "문제는 로또크라시가 기술관료적 사고방식, 즉 정치란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의 연속이며 올바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누가 결정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첫인상이 로또크라시와 정반대인 능력주의는 전문가가 직접 임무를 수행하는 체제이자 하나의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음을 전제하는 시스템이다. 민주적 대표성을 놓고 지저분하게 싸워야만 문제라는 것이 드러나고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해결책이 있을 수도 있다는 관점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제비를 잘 뽑은 운 좋은 승자이건, 시험에 통과한 능력 있는 인물이건 일단 지도자가 결정되고 나면 나머지 시민은 그냥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점에서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에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115-6)


"특정 맥락 속에서 여러 장점을 띤다고 해도,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에는 결국 정기적인 선거에 기반한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중요한 미덕, 즉 역동성과 창의성이 없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도, 로또크라시와 능력주의는 선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시회 내 서로 다른 집단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패자에게 미래의 승리라는 여지를 남겨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의제와 참여를 반대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의의 반대는 배제이며, 참여의 반대는 정치적인 삶으로부터의 분리 또는 기권이다. 패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패자도 여전히 자기 주장을 펼칠 자유가 있고, 배제되거나 구조적인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 이 같은 인프라는 민주주의 사회를 와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116-8)


3장 필수 인프라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 즉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기본권의 가치는 권리 행사를 돕는 이른바 '매개 권력'이라는 행위자들의 존재로 인해 크게 높아진다." "조직, 정당, 그리고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라 불리는 전통 매체는 내 메시지에 말 그대로 날개를 달아준다. 정치적 평등이란 무엇보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다. 일정 수준의 접근성을 갖춘 매개 권력과, 새로운 매개 권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반면에 매개 권력은 오히려 불평등을 공고하게 하고 심지어는 악화시킨다는 어두운 시각도 있다. 실제로 매개 기구는 잘해봤자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대개는 노골적으로 귀족적이라는 유구한 시각도 있다." "가장 박한 평가는 매개 권력이 국민의 목소리를 아예 바꾸어 전달한다는 주장이다. 루소가 매개 권력에 적극 반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119-20)


"핵심은 매개 기구가 갈등을 드러내고 구조화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동기가 반드시 건전한 민주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정당은 선거에서 이기고 싶어 하고, 언론 소유주는 (대부분)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목표가 정치판의 싸움을 정치 체제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 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패자가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일과 양립 불가한 것은 아니다." "법이론가 한스 켈젠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상대주의와 철학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이들이 반드시 이기적이거나 멍청하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다."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진실 찾기가 관건이라면 '충실한 반대파'와 같은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는 패자는 그저 거짓말쟁이일 뿐이다."(128-9)


"매개 기구는 진실을 가려내거나 기계적으로 특정 현실을 복제해내는 주체가 아니다. 이상적으로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선택지란 모두가 자신의 현실을 선택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가 각기 다른 가치관에 따라 특정 현실에 대해 시각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매개 기구는 외적 다원주의와 내적 다원주의를 모두 가능케 해야 한다. 외적 다원주의란 다양한 종류의 정당과 전문 언론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문제에서 의견의 불일치는 팩트를 둘러싸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 여러 집단을 창의적으로 대표해내는 데서 생겨난다." "내적 다원주의는 외적 다원주의에 비해 겉으로 덜 드러난다. 개별 매개 기구 안에도 시각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다. 즉 정당은 내부적으로도 경선이나 집중 토론과 같은 적절한 민주 절차를 따라야 한다. 내부적으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정당은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131-2)


"매개 기구의 역할은 이게 다가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의 전장을 열고 다원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매개 기구는 정치의 시간표를 그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정당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경선을 실시하고, 신문과 방송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뉴스와 논평을 제공한다. 정당의 역할에 대한 제임스 브라이스의 설명대로 매개 기구는 〈수많은 유권자에게 혼란 속에서 질서〉를 가져다준다." "특히 시민들의 생각을 한 곳에 모으는 절차인 선거는 특정한 날짜에 모든 시민에게 공통의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주기적으로 일깨우는 의식으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선거의 단면을 이상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세기 미국에서 선거일은 엄숙한 시민의식을 실천하는 날이 아니라, 공짜 위스키가 흘러넘치고 주먹 다툼이 난무하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정기적인 행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정당 지지자들의 정치 활동에 기준점을 제시한다."(139-40)


"기술이 스스로의 적용 환경을 결정하는 일은 없다. 물론 인터넷이 새로운 인프라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프라의 구체적인 모양은 우리가 이미 가진 인프라, 즉 지난 2세기 동안 기본적인 규제(또는 규제 완화) 정책을 만들어온 정당 제도와 공론장이 좌우한다. 미국만 봐도 그렇다. 2016년 대통령 선거를 분석한 하버드대학교의 사회학자 세 사람은 뚜렷한 우익 미디어 생태계의 존재를 확인했다. 스스로 담을 쌓아 올린 공간 안에서 '뉴스'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자기인정의 형태로 기능한다. 목적 있는 허위 정보든 단순히 오류가 있는 정보든 수정되는 일은 거의 없다. '우익 정치 엔터테인먼트 집단'의 관객들은 《월스트리트 저널》 정도의 중도우파 뉴스 매체와도 거의 접촉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보나 왜곡된 정보는 어떠한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빠르게, 멀리 퍼져나간다. 〈비이성의 전염〉이라는 리프먼의 표현은 다소 비하적이기는 하나 이런 상황을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151-2)


"하버드대학교 연구팀 논문의 핵심은 이처럼 좌측에 대칭을 이루는 짝이 없는 우익 미디어 생태계의 등장이 인터넷의 탄생보다 훨씬 앞선다는 것이다. AM 라디오를 통해 확산된 보수 토크쇼와 1987년 공정성 원칙의 폐지 후 등장한 고도로 당파적인 케이블 뉴스는 우익 미디어 생태계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케이블 TV 등 여러 매체를 흥하게 한 규제 정책은 정치적인 선택의 결과였고, 그 과정에서 기술적 혁신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결정은 양극화를 불러왔는데, 알고 보니 그건 엄청나게 돈이 되는 시장이었다. 특히 우파 측에서 이른바 '오피니언 저널리스트'를 자처하던 이들에게 큰 사업의 기회가 생겼다." "재규제reregulation가 마술처럼 양극화와 허위 정보를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기술은 이미 존재하는 인프라에 얽혀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며, 민주주의에 해가 되는 걸림돌을 더 크게 만들 수는 있어도 없던 문제를 새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152-3)


"정당은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유도함으로써 특정한 자기인식을 강화하고자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공동의 지지〉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순간부터 반향실echo chamber 효과는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한층 정교해진 온라인 환경이 현재 비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과두 엘리트 계급의 특징 한 가지는 성격과 성격과 관련된(〈움켜쥐고 움켜쥐고 또 움켜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개 기구를 포함한 정치적인 구조를 자기 뜻대로 재편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것이다. 권력이 집중된다는 것은 곧 책임지지 않는 개인들이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정부가 플랫폼의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정치 성향도 바꿀 수 있는 개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트럼프와 저커버그 같은 인물은 각각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지만, 그런 인물들이 서로를 이용하게 되면 위협은 훨씬 더 커진다."(159-61)


4장 민주주의 다시 열기


"영국 철학자 오노라 오닐의 말대로, 민주주의 인프라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매개 기구가 접근성과 자율성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매개 기구가 시민의 판단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들도 시민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저 매개 기구의 재정적 기반은 무엇인가(언론사의 경우, 사주가 누구인가)? 어떤 의제를 갖고 있는가? (베를루스코니의 TV 정당처럼) 부도덕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의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나? 정당 후보의 진정한 배후 세력이 미국의 '그림자 정당'이나 '준정당parapaties' 같은 것은 아닌가? 선거 운동 비용 지출에 제한이 없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다크 머니'가 투입되고 있지는 않은가? 외부 세력이 재정적으로 개입하고 있지는 않은가?" "폭스TV 같은 방송국의 문제는 (전 앵커인 빌 오라일리의 표현대로) 〈보수적인 노동자 계층의 시각〉을 대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너그럽게 표현해도) 부정확한 보도를 한다는 것이다(편파적이면서 그렇지 않은 척 오도한다)."(189-90)


"선거는 확장된 기간에 걸친 정치적 동원이기도 하다. 정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기인식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2016년 초에는 트럼프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불과 몇 년 후 다수의 미국인이 자신을 영혼까지 트럼프주의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이들은 트럼프가 정계를 떠나더라도 오랫동안 트럼프주의자로 남을 것이다. 이들에게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습격은 트럼프의 대선 승리 주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엘리트의 배신이라는 신화의 밑거름으로 피해자성과 분노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자, 순교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일부 국가에서 〈전투적 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제를 수립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투적 민주주의란 정치 제도를 훼손하려는 정당이나 개인들에게서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권리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다."(196)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오면, 불관용을 관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나치당은 선거 제도에 찬성했지만, 권력을 잡은 후에는 민주주의 폐지를 추진했다. 나치당원들은 처음부터 딱히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1928년,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당이 〈민주주의의 무기고에서 가져온 무기로 무장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민주주의가 자신을 무너뜨린 철천지 원수에게 자기 무기를 직접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농담으로 남을 것〉이라며 기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역사의 교훈은 분명해 보였다. 민주주의는 반민주적 행위자들이 〈민주주의의 무기고〉를 악용하는 존재론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법적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특히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반드시 필요해 보였다." "이는 민주주의와 상대주의를 결합한 한스 켈젠의 개념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대신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가치, 특히 인간 존엄성을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면서 그 가치들을 수호하겠다는 입장이었다."(197-8)


"이런 문제가 과거, 즉 20세기의 전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전투적 민주주의를 고안해낸 이론가들은 이런 정당들이 시민의 기본권을 해치고자 하는 희망을 공개적으로 내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정당은 거의 없다. 바이마르 시대와는 다르다. 물론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일부 시민은 '진짜 국민'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지만, 이들조차 조심스럽게 말을 고른다.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마주한 위협은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선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오히려 법원이나 관료주의 내부의 감시 기구, 선거 위원회와 같은 독립적인 민주주의 수호자에 대한 장악이나 정치 절차의 체계적인 재편이며, 제도화된 불확실성은 크게 줄어들었다. 트럼프가 자기 행정부의 부패상을 노출시킬지 모르는 감찰관에게 실질적인 보복 조치를 감행한 일이나, 연방 선거 위원회라는 중요한 선거 감시 기구를 초당적으로 구성하는 전통을 깨고 공화당 다수로 만들어버렸던 일이 그렇다."(206-7)


"이론상 (반反다원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시민 불복종은 권위주의 포퓰리스트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시민 불복종의 고전적인 정의는 1970년대 초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가 정립했다. 시민 불복종은 공공연한 법 위반을 의미했다. 당연히 모든 법 위반이 시민 불복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에 따른 비폭력적인 행위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법이 기본권의 침해와 같은 심각한 불의를 낳고 있으므로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동료 시민들에게 설득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롤스는 또한 시민 불복종에 나서는 이들이 법 위반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와 제도가 〈거의 정의로운〉 상태여야 한다는 조건을 조심스럽게 덧붙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정해진 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모습을 능동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오늘날엔, 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 시위마저도 '시만답지 못한' 행위, 또 이미 양극화된 사회에서 분열을 부추기는 행위로 종종 비판 받는다."(210-1)


"오늘날의 대중은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킹이 한때 이야기한 하나의 〈국가적 의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불복종 운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분열된 공론장,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매우 오염된 공론장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때로는 장애물을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이 TV로 중계되지 않는다고 해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불복종 운동을 널리 알릴 수 있다. 2020년 미국에서 경찰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활약한 독립 미디어 그룹 '유니콘 라이엇'이나 2020년 벨라루스에서 일어난 반루카셴코 시위에서 사용된 텔레그램 체널 '넥스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둘러 가는 길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개 기구에 대해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개 기구가 접근성과 자율성을 잃고 사회 구성원의 평가를 받지 않게 되면, 분열과 방해 시도는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악순환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213-4)


결론


"정당과 전문 언론은 대의민주주의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적절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 반면 진입 장벽은 상대적으로 낮아야 한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특정 시각을 배제하거나 일부 구성원에게 힘을 더 실어주게 되더라도 정당의 핵심적인 신념이나 전문가로서의 윤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매기 기구는 접근성이 높아야 하고, 정확하며 자율적이며, 평가 가능해야 하고, 따라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당파성이 없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정당의 경우에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목표는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갈등에서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팩트가 언제나 깨지기 쉬운 것이라 해도 그 과정은 팩트에 의해 가능해지고 또 팩트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고 한탄하나, 이 새로운 매개체가 시민들에게 전례 없는 접근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222-3)


"클로드 르포르는 민주주의의 '끝이 열린' 절차에 대해 설명했다. 민주주의는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부당한가에 대한 토론의 정당성 위에 세워진 체제〉이며 〈토론에는 반드시 보증인(입회인)도, 끝도 없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민주주의에는 어떠한 보장도, 미리 정해진 목표도 없다(〈이제 민주주의는 완벽하게 실현되었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불확실성과 전반적인 자유의 행사는 두 가지의 타협할 수 없는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 정치 체제의 자유롭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동료 시민의 입지를 훼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누구도 자신만의 팩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기존 규칙이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핵심 요소에 위배될 때는 명백히 민주적인 형태의 불복종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다만, 불복종하는 이는 자신의 저항이 당파적 갈등에서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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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 : 시간의 물리학 - 지금이란 무엇이고 시간은 왜 흐르는가
리처드 뮬러 지음, 장종훈.강형구 옮김, 이해심 감수 / 바다출판사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말


1부 시간의 놀라움


# 물리주의physicalism : 물리적으로 알아낼 수 없는 어떤 것은 실재의 부분이 아니라는 주장


"지금 당신의 현재 속도는 얼마인가?" "가만히 앉아 있기 때문에 '영'이라고 답했는가? 어쩌면 1만 2,000미터 상공을 나는 비행기에 앉아 있더라도 영이라고 답할지 모른다. 좌석벨트 등에 불이 커져 있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방송이 나오니까.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까 속도는 영일 것이다. 아니면 혹시 비행기가 날아가는 속도와 같은 '시속 900킬로미터'라고 답했는가? 아니면 아마존 강 하구에 떠 있는 보트 위에서 이 책을 보면서 '시속 1,600킬로미터'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적도에서 지구의 회전 속도가 그쯤 되니까. 혹은 천문학에도 해박해서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 속도도 포함해서 '초속 30킬로미터'라고 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 은하를 도는 태양의 속도, 우주에 대한 우리은하의 속도(우주배경복사를 기준으로 정해진다)도 포함한다면 '시속 160만 킬로미터'라고 답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정답일까? 당연히 모두 맞다. 당신의 속도는 어떤 좌표계를 기준으로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32-3)


"상대성이론의 놀라운 성질은 바로 속도뿐 아니라 시간 자체도 기준 좌표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절대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표면, 비행기, 지구, 태양 등 어떤 기준 좌표계를 고르는가에 따라 시간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달라진다. 두 사건 사이의 시간, 시계의 똑딱임은 우주 어디서나 똑같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좌표계를 고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당신은 아마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들이 서로의 관찰 결과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상대성이론에서 나오는 관찰자들이 서로의 관찰 결과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은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의 속도에도 동의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속도가 상대적이고, 기준 좌표계에 따라 달라지며, (상대성이론을 배웠다면)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33-4)


"당신이 다른 책에서 시간 지연이란 〈움직이는 시계가 당신의 시계보다 느리게 째깍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봤다면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 아니라 당신의 고유 좌표계에서 측정하면 정말로 느리게 간다." "시간 지연은 어떻게 보면 미래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간단한 방법이다.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고유 시간은 당연히 느려질 것이고, 당신 시간으로 1분이면 100년쯤 후의 미래로 갈 수 있다. 냉동 수면을 하고 미래에 다시 해동시킬 방법을 찾을 거라는 기대 따위도 필요 없다. 그냥 속도를 올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세부 사항들이 있다. 우선 어디 부딪히지 않도록 경로 설정을 잘해야 한다. 그 정도 속도에서는 살짝 부딪히는 걸로도 끝장날 수 있다. 다음은 목표지점(아마도 지구)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 일단 미래로 가면 미래로 올 때 썼던 것처럼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비슷한 방법이 없다."(35, 41-2)


"아인슈타인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지금' 이 순간) 일어난 사건은 다른 기준 좌표계에서는 더 이상 동시가 아니라는 것을 보였다. 거기서는 한 사건이 다른 사건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가 될까? 그건 좌표계에 따라 다르며 어느 쪽이든 먼저 일어날 수 있다. 즉 시간의 순서가 뒤집힐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별로 우주여행을 떠난다고 해보자. 그럼 지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잠깐, 이 질문 속에는 다들 어련히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즉 '지금' 지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하지만 목적지인 그 별에 도착해 정지해서 당신의 고유 좌표계를 움직이는 좌표계에서 그 별의 정지해 있는 좌표계로 바꾸자마자, 그 좌표계에서 일반적인 '지금'의 의미는 바뀌게 된다. 정지한 후 당신의 고유 좌표계가 다른 기준 좌표계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고유 좌표계가 다른 기준 좌표계로 점프할 때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시각도 바뀐다."(44-5)


"아인슈타인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둘 다를 바꿔놓았다. 그는 논문에서 두 사건의 시간 간격과 물체의 길이 둘 다 기준 좌표계(지상, 비행기, 위성)에 따라 달라진다고 결론지었다. 버스의 길이를 잰다고 해보자. 버스의 길이를 정확히 재려면 앞과 뒤의 위치를 '동시에' 재야 한다. 동시에? 바로 그것이 문제다. 동시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한 기준 좌표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더라도 다른 기준 좌표계에서는 동시가 아닐 수 있다. 이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좌표계에서는 길이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물체와 함께 움직이는) 자신의 고유 좌표계에서는 길이가 L인 물체가 있다면, 상대속도가 v인 좌표계에서 길이는 아인슈타인의 계산에 따라 감마만큼 짧아진다." "흔히 움직이는 막대는 〈짧아진 것처럼 보인다〉라고 표현하는데, 사실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막대는 실제로 짧기 때문에 짧아 보이는 것이다."(46-8)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기하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10년을 연구했고, 곡률과 신축을 포함하는 임의의 기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는 시공간 개념을 들고 왔다. 이것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 지구 표면에 산과 계곡이 있듯, 4차원 시공간도 꼬이고 회전하고 압축·팽창할 수 있지만 여전히 연속적이고 부드러운(미분 가능한) 형태를 가진다. 기하학의 시각에서 보면 무거운 천체 주변을 공전하는 행성과 위성들은 그저 '측지선'이라 불리는 '똑바른 직선'으로 느끼는 길을 따라 직진하고 있다. 뉴턴이 사용한 오래된 중력장의 개념은 사라지고, 주변의 (질량 에너지를 포함하는) 에너지 밀도에 따라 변화하는 기하 구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질량이 있다는 것은 에너지가 있다는 뜻이고 에너지는 시공간을 왜곡시키며, 시공간의 왜곡은 물체가 중력장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사실 그들은 그저 복잡한 시공간 속에서 그들이 보기에 직선인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92-3)


"공간은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 공간은 팽창하거나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공간을 작은 구역에 우겨넣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바로 방정식이 시간 지연을 다루는 방법이다. 근처 구역에 블랙홀이 있다면, 한 곳에서 블랙홀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는 데 무한한 거리를 가야 한다. 마치 산을 가로지르는 것과 비슷한데, 지도에서 보는 직선거리는 단순히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는 오르고 내릴 산 대신, 어떤 구역에 다른 구역보다 더 많은 공간과 거리가 우겨져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공간은 단단히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어떤 구역region에 포함된 공간space의 크기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공간의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를 설명할 때 여분의 차원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상대성이론에서 설명하듯, 시간 간격과 거리는 유동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만 하면 충분하다."(93-6)


"당신이 태양 정도 질량을 가지는 아주 작은 블랙홀에서 1,000마일쯤 떨어진 꽤 큰 궤도를 돌고 있다면 딱히 특별하다고 느낄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추진 로켓을 분사해서 궤도 공전을 멈추게 되면 여느 무거운 물체 쪽으로 인력을 느끼는 것처럼 당신이 블랙홀 쪽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인공위성을 궤도에서 벗어나게 해서 재진입시키는 것도 바로 이 방식이다. 역추진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감속시켜 중력이 잡아당기게 한다.) 당신의 기준 좌표계로 10분이 지나기 전, 10분간의 나이를 먹기 전에 당신은 블랙홀의 표면이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시간에 대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낙하를 시작한 지 10분 후, 그 표면에 닿을 때 궤도 정거장에서 측정한 시간은 무한대가 된다. 그렇다. 외부 관찰자의 좌표계에서 측정하면 블랙홀에 떨어지는 데에는 무한대의 시간이 걸린다. 떨어지고 있는 당사자의 가속하는 좌표계에서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말이다."(102-3)


"여러분과 내가 공간상으로 몇 피트 정도 떨어져 있고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하자. 우리의 고유 좌표계는 동일하고, 둘 다 정지 상태에 있다고 하자. 이제 몇 킬로그램 정도밖에 안 나가는 작은 (완전히 형성된) 원시 블랙홀이 있다고 해보자. 이 블랙홀을 당신과 나 사이에 끼워넣자. 이 블랙홀의 인력은 같은 무게의 다른 물체들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딱히 별다른 힘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블랙홀을 끼우면 당신과 나의 직선거리는 무한대가 된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달라졌지만 우리의 위치는 그대로다. 그럼 우리는 '움직였나?' 그렇지 않다.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가 바뀌었나? 그렇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공간은 유동적이고 변형될 수 있다. 늘어날 수도 압축될 수도 있다. 무한한 밀도의 공간이라도 질량은 가볍기 때문에 쉽게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 있다. 그 말은 물체 사이의 거리는 임의의 빠른 비율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은데도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110-1)


2부 부러진 화살


"열역학 제2법칙은 물체의 집합에 대해 정의되는 '엔트로피'라는 양이 있으며, 이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지되거나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에너지와는 대비된다. 에너지는 이 물체에서 저 물체로 옮겨갈 수 있지만 모든 물체의 에너지의 총합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제1법칙과 달리 제2법칙은 절대적이지 않고 확률적이다. 이 법칙은 깨질 수 있지만 많은 수의 입자가 모인 상황에서 예외가 나타날 확률은 무시할 만큼 작다. 부서진 달걀도 분자 사이의 힘들이 우연히 딱 맞는 방식으로 주어지기만 한다면 원래대로 합쳐져서 탁자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 다만 그런 일은 거의 있을 법하지 않을 뿐이다. 엔트로피와 시간은 같이 증가한다. 둘은 연관되어 있다. 아서 에딩턴의 새로운 추측은 엔트로피가 '시간의 방향성', 시간이 뒤로 흐르지 않고 앞으로만 흐르는 것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열역학 제2법칙이 우리가 왜 미래가 아닌 과거를 기억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0-1)


"어떤 물체에서 모든 열을 제거했을 때 엔트로피는 0으로 정의된다. 물체가 따뜻할 때의 엔트로피를 알고 싶다면 절대온도 기준으로 0도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열을 가하면서 온도의 증가를 계속 지켜보면 된다. 미량의 엔트로피 증가는 더해진 열을 온도 증가로 나눈 값으로 정의된다. 이런 작은 엔트로피 변화들을 모두 더하면 따뜻한 물체의 엔트로피를 얻을 수 있다. 만약 물체의 온도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린다면 엔트로피는 감소한다. 일반적으로, 차가운 물체는 낮은 엔트로피를, 뜨거운 물체는 높은 엔트로피를 가진다. 그런 면에서는 엔트로피는 에너지와 비슷하지만, 에너지와 달리 엔트로피는 한계값이 없고 쉽게 생성될 수 있다. 고립된 물체의 집합에서 전체 에너지는 이 물체에서 저 물체로 옮겨지거나 포텐셜 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 변환되거나 질량이 열로 변할 수는 있지만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이다. 하지만 엔트로피는 보존되지 않으며 제한 없이 증가할 수 있다."(129-30)


"엔트로피는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에 따라 늘어날 수 있다. 엔트로피를 만드는 건 쉽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시원한 방에 놔둔다고 하자. 커피에서 열이 빠져나가면 커피의 엔트로피는 감소하지만(음의 열 흐름), 방의 엔트로피는 그것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증가한다. 그러므로 커피가 식도록 내버려두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되돌릴 수도 없는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를 의도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는 셈이다." "엔트로피가 만들어 진다는 것은 에너지가 '낭비'되었다는,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열이 이동할 때 피스톤을 미는 것처럼 유용한 형태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현실 속의 엔진은 카르노 효율─생성되는 초과 엔트로피를 0으로 줄인 최적화 장치─을 달성하지 못하므로, 에너지를 절약한다는 것은 가능한 한 적은 일에너지로 어떻게든 해보자는 것도 의미한다. 결국은 유용한 일에너지마저도 열로 변하게 되므로 이것도 우주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게 된다."(130-1)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척도, 곧 무질서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 구석에 모든 분자가 몰려 있는 경우처럼 기체의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는 고도로 정렬된 상태다. 분자들이 흩어져 있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는 무질서한 상태다. '엔트로피가 높다'라는 것은 그 상태가 임의의 과정들을 거쳐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다. 반면 '엔트로피가 낮다'라는 것은 그러한 조직된 상태가 있을 법하지 않다는 뜻이다. 고도로 조직된 상태는, 거의 정의 그대로 임의적인 자연 과정을 통해서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상적인 카르노 열기관을 돌려서 뜨거운 기체에서 기계적인 일을 하는 경우처럼 당신이 계에 뭔가를 할 때, 이론적으로는 전체 엔트로피가 변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기관은 만들어질 수 없으므로 현실에서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즉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국소적인 엔트로피 감소에 기반을 두고 있다."(143-4)


"아서 에딩턴은 물리학에서 오직 하나의 법칙만이 시간의 화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바로 열역한 제2법칙이다. 고전역학, 전자기학, 심지어는 현재 계속 진화하고 있는 양자물리학 같은 모든 다른 물리학 이론들은 과거를 미래와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행성들은 정확하게 동일한 규칙들을 따르며 궤도를 역행해서 움직일 수 있다. 전파를 송출하는 안테나는 전파를 수신하는 안테나로도 사용될 수 있다. 원자는 빛을 방출하지만 빛을 흡수하기도 한다. 동일한 방정식들이 빛의 방출과 흡수를 모두 기술한다. 영화를 거꾸로 돌려도 열역학 제2법칙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물리법칙도 위배되지 않는다." "당신이 두 개의 순간에 대해 우주의 신과 같은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두 순간 중에서 어떤 순간이 먼저인지를 판가름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대답은 단순하다. 두 순간의 엔트로피를 계산하라. 더 낮은 엔트로피를 가진 순간이 먼저 일어난 순간이다."(149-51)


"만약 상자의 구석에 기체를 가두어놓았다가 기체가 상자 안으로 퍼지게 한다면 상자 안의 엔트로피는 급격하게 증가할 것이다. 구석에 갇혀 있는 기체처럼 우주에 있는 물질은 거의 밀집되어 있다. 가시적인 질량의 대부분은 항성들에서 발견되고 일부는 행성들에서 발견되는데, 이 질량들은 거의 텅 빈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나는 당시 에딩턴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암흑물질을 무시하고 있다). 우주에는 채워 넣음으로써 엔트로피를 증가시킬 수 있는 빈 공간이 무척 많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조직화는 아주 있을 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주가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화되어 있다는 사실 덕택에, 그리고 우주가 좀 더 무질서한 상태로 이행할 가능성이 큰 까닭에,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우주가 가질 수도 있었던 상태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조직화와 낮은 엔트로피를 가지는 우주의 현재 상태가 신의 존재를 함축한다고 생각한다."(152-3)


"공간과 시간은 상대성이론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 살고 있다. 이제 이 사실의 철학적 함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만약 공간이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면, 만약 공간이 생성된 것이라면, 이는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간과 시간 모두 빅뱅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이전'이라는 단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묻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전이라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두 사물 사이의 거리가 0보다 작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묻는 것과도 같다. 만약 당신이 고전적 물체를 절대영도보다 낮은 온도로 만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 경우 아무런 운동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보다도 운동이 더 느려질까? 이러한 질문들은 대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의미한 질문들이기 때문이다."(166)


"초기의 우주는, 당신이 이를 무한한 공간에서 떠다니는 밀집된 암석 덩어리로 생각하든 르메트르 모형처럼 우주 전체를 채우고 있는 질량으로 생각하든, 밀집된 상태였다. 공간이 물질 주변에서 생성되면서 점점 공간이 넓어졌고, 이는 물질과 에너지가 분포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간의 팽창은 물질이 가질 수 있는 상태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했다. 공간의 생성은 추가적으로 접근가능한 상태들의 추가적인 엔트로피를 위한 빈 공간이 많음을 의미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빅뱅에서 일어난 일이다. 더 넓은 공간이 제공되면서 이전의 좁은 공간에서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있었던 물질은 더 넓어진 새로운 공간에서는 더 이상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있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설명은 지금의 낮은 엔트로피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며, 이는 에딩턴에 따르면 시간의 화살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167-9)


"그러나 이 책이 출판된 2016년 현재, 즉 시간의 화살을 설명하기 위한 에딩턴 이론이 제시된 지 88년이 지났지만 이에 대한 단 하나의 실험도 없었다. 어떤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고, 심지어 단 하나의 실험도 제안되지 않았다. 혹시 그런 실험이 있었을까? 만약 특정한 효과들이 에딩턴의 엔트로피 화살 이론과 일치한다고 드러났다면, 이 효과들은 엔트로피 화살 이론을 증명했다고 널리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들이 보이지 않으면 그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는 이론에 반하는 증거라고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에딩턴의 이론은 예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오직 현상을 '설명해줄' 뿐이다. 예측을 하지 않는 이론은 반증될 수 없다." "국소 중력은 시계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국소 엔트로피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밤에 지구 표면의 엔트로피가 떨어질 때, 우리는 시간 흐름의 변동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국소적으로 느려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206-7)


"에딩턴이 알고 있었던 엔트로피는 지구, 태양, 태양계, 다른 별들, 성운, 별빛 등과 같이 우리가 보고 탐지할 수 있는 것들의 엔트로피였다." "그러나 펜지어스와 윌슨이 우주 마이크로파 복사를 발견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막대한 양의 엔트로피가 최초로 드러났다. 마이크로파 복사는 1세제곱미터당 많은 양의 엔트로피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다른 평범한 물질과 달리 이는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이 마이크로파의 엔트로피가 모든 별들과 행성들의 엔트로피보다 대략 1,000만 배 정도 더 클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와 같은 우주 마이크로파의 막대한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서 어떻게 바뀔까? 놀랍게도 이 엔트로피는 변하지 않는다.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서 마이크로파가 더 많은 공간을 채우지만 마이크로파는 에너지를 잃는다. 마이크로파가 가진 엔트로피의 총합은 일정하다. 별들의 엔트로피보다 훨씬 큰 이와 같은 엔트로피의 거대한 저장소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앞으로 흘러간다."(207-8)


"1970년대 이래로 질량 없는 입자들의 집합이 가지는 엔트로피는 우주가 팽창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핵심은 초기 우주에서 모든 물질의 엔트로피는 질량이 없고 열평형을 이룬 입자들 뭉치 속에 있었고 증가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시간의 화살이 진정 엔트로피 증가 덕분에 나아가고 있었다면, 초기 우주에는 시간의 화살이 없고 시간이 멈추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 시기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정지함에 따라서 우주 팽창 역시 정지했을 것이다(또는 결코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우주는 팽창했고 질량 없는 입자들로 구성된 아일럼─빅뱅 이론에서 초기 우주를 채우고 있는 물질로 상정한 아주 조밀하고 뜨거운 플라즈마─은 식었으며 힉스 장은 자발적 대칭성 붕괴 덕분에 작동하여 입자들은 마치 질량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다."(215)


"빅뱅의 발견과 함께 우리는 시간의 화살이라는 주제를 진정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 엔트로피 기제는 실제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과연 엔트로피가 필요한가? 만약 우리가 우주를 시공간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왜 우주는 공간의 측면에서만 팽창해야 하는가? 시간에서도 팽창할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사태는 분명히 그렇다. 매초마다 우리는 시간에 새로운 초를 더하는 셈이다. 아마도 시간의 흐름이란 이렇게 새로운 시간의 생성으로 생각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도전적인 질문을 한 바 있다. 당신이 두 순간의 우주에 대한 완벽하고 신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떤 순간이 먼저인지를 묻는다고 하자. 당신은 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내가 제시했던 답은 두 순간 각각의 엔트로피를 계산하라는 것이었다. 두 순간 중 낮은 엔트로피를 가지고 있는 쪽이 먼저 등장한 순간이다. 그 대신 당신은 우주의 크기를 살펴볼 수도 있다. 더 작은 우주가 더 먼저인 우주다."(240-1)


3부 유령과도 같은 물리학


"슈뢰딩거의 고양이에게 삶/죽음 진폭은 그것을 제곱했을 때 특정 시간대의 끝에서 어떤 확률이 얻어지는지를 알려주는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진폭이 위치와 시간에 의존한다면 그 진폭은 파동함수라 불린다. 고양이 이야기를 만든 슈뢰딩거는 파동함수가 외부 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떻게 파동함수가 시간과 공간에서 이동하고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방정식인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들었다. 파동함수는 공간을 통과하거나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를 기술할 수 있다. 화학에서 파동함수는 '오비탈orbital'이라 불린다. 파동함수는 점과 같은 것이 아니라 퍼져 있으므로, 입자의 (탐지될) 위치가 불확실하다. 파동함수의 패턴에 의해서 정의되는 입자의 속도 역시 불확실하다. 모든 파동함수는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며, 입자의 에너지는 진동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데, 이때 아인슈타인이 광자에 대해 발견한 것과 동일한 공식인 E=hf를 따른다."(253-4)


"당신이 측정을 하면 파동함수는 '붕괴하여' 당신의 측정 결과와 일치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붕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변화가 파동함수를 전형적으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보기 위해 상자를 열면 파동함수는,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고양이를 나타내기 위해 붕괴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측정의 단순한 결과이며, 이 결과에는 죽어있으면서도 살아 있는 이상한 조합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저 죽어 있거나 살아 있을 뿐이다. 이러한 파동함수는 진정 유령과도 같다. 파동함수 자체는 측정되지 않는다. 함수의 모든 점들은 대개 두 개의 수로 구성되어 있으며(실수부와 허수부), 만약 중첩이 있으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측정을 하면 새로운 파동함수는 훨씬 단순해진다. 이것이 보른-하이젠베르크의 코펜하겐 해석 중 일부이며, 여전히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를 양자컴퓨터에 이용함으로써 파동함수의 숨은 유령과 같은 측면들을 이용하고자 시도하고 있다."(254-5)


"파동함수의 붕괴는 빛의 속도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한 좌표계에서는 파동함수의 붕괴가 시간에 역행할 수 있다. 파동함수가 실재와 유일하게 연관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파동함수를 조사할 때, 우리가 파동함수가 나타내는 입자의 위치 또는 에너지를 측정하고자 시도할 때뿐이다. 양자물리학을 따르면 우리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할 때 파동함수는 우리의 직관을 위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자물리학의 방정식들은 가령 전자의 파동함수에 당신이 힘을 가했을 때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파동함수가 실제로 전자는 아니다. 파동함수의 진폭은 전자의 정신, 유령, 영혼이다. 우리는 결코 파동함수를 탐지하거나 측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그것을 계산하거나, 한 점에서 그 값을 조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측정을 함으로써 그러한 조사를 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영원히 파동함수를 변화시킨다."(258-9)


"('나비 효과'로 대변되는) 혼돈은 행성들의 움직임, 날씨의 패턴, 개체군 동태론 등에서 관측된다. 혼돈에 관한 수학 이론은 최소한 초기에는 작은 변화의 결과가 시간에 따라서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무한소의 정밀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혼돈의 효과는 많은 경우 한정되어 있다. 때때로 결과는 단순히 두 개의 아주 제한된 행태 사이를 왔다갔다 반복한다. 지수함수적 증가는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나비들이 날개를 펄럭이더라도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온다. 기후 변화는 나비보다는 더 큰 원인을 필요로 하는데, 예를 들자면 지구의 궤도 변화나 수십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내로 주입하는 것이다." "혼돈 이론은 인과성 또는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이론은 단지 먼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외적인 정확성을 갖춘 측정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점에서 혼돈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270)


"아인슈타인 이후 디랙의 시기 전까지 진공은 텅 빈 공간으로 생각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절대공간에 대한 운동이 탐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에테르는 죽어서 물리학의 어휘 목록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진공이란 무엇인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디랙은 진공이 음-에너지 전자들로 차 있다고 주장했다. 진공은 무엇인가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대의 음전하 및 무한대의 음-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공에 부여된 이 모든 구조에도 불구하고 진공을 통과하는 운동은 여전히 측정될 수 없었다. 디랙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수학 범위 내에서 구성되었으며, 음-에너지 전자들로 넘실대는 바다에 대한 운동은 탐지될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래된 에테르가 다시 태어난 셈이었다. 에테르는 물리학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진공'이라고 부른다."(306-7)


"오늘날 우리는 진공이 끊임없이 물질과 반물질을 생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물질과 반물질은 블랙홀 근처를 제외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면모는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복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호킹의 이론은 슈바르츠실트 표면 근처의 강력한 중력장이, 배경이 되는 물질과 반물질 쌍을 서로가 소멸되기 전에 분리시켜, 하나는 블랙홀 쪽으로 끌어들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히 먼 곳으로 방출시킬 때 일어나는 복사를 발견법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진공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진공을 하나의 사물처럼 다룬다. 진공은 (최소한 탐지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움직이지 않으며, 팽창할 수 있다. 이는 빅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이다. 진공은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불변하는 힉스 장을 포함하며, 힉스 장은 입자에게 질량을 부여한다. 진공은 우주의 팽창 가속의 원인이 되는 암흑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 진공은 맥스웰이 상상했던 기어와 바퀴들의 더미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다."(308)


"디랙의 방정식에서는 곱 Et와도 같이 에너지의 항이 항상 시간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디랙의 양전자는 음의 부호를 가진 항인 -Et를 포함하고 있었다. 디랙은 음의 부호가 음의 에너지를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파인만은 방정식이 음의 시간과 결합한 양의 에너지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역행하는 시간 개념이 어리석게 들릴 수 있으나, 이 개념이 음-에너지 전자들로 찬 무한대의 바다 개념보다도 더 황당한가? 파인만은 시간 역행을 처음으로 고려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를 자세한 이론으로 구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양전자가 실제로는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전자라고 제안했다. 이러한 관점은 왜 양전자가 전자와 같은 질량을 가지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사실 전자였으며 양의 에너지를 가진다. 사실상 전자는 음의 전하를 유지하며, 전자의 시간 역행 이동이 양의 전하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할 뿐이다. 무한대의 음-에너지 바다는 사라졌다. 음의 부호는 에너지에서 시간으로 이전됐다."(309)


4부 물리학과 실재


"괴델의 정리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진술될 수 있다. 즉 '모든 수학적 이론들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당신이 고안하는 모든 수학적 체계 안에는 증명될 수 없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진리는 진리라고 식별되지조차 않을 것이다. 괴델이 수학이 불완전함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정의, 공리, 정리로 구성된 어떤 집합도 필연적으로 불완전함을 증명했을 뿐이다." "가령 모든 짝수가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독일 수학자 크리스티안 골드바흐의 추측을 보자. 이 아이디어 역시 증명되지 않았으며 이것의 참을 결정할 수 있는 경험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정리를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하다고 식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당신이 이러한 정리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다면, 이 정리의 참됨에 대한 증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정리들은 단 하나의 반례만 있어도 반증될 수 있다. 이는 괴델의 정리들에 대해서는 가능하지 않다."(330-1)


"모든 수학은 물리적 실재 바깥에 있는 지식이다. 경험상으로 우리는 수학의 규칙들이 근사적으로 참임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정확할까? 아니면 3-4-5 삼각형의 최대 내각이 90도가 아니라 단지 89.999999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당신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가? 물리학에 의해서, 측정에 의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굽은 공간에서 이 각은 90도가 아님이 드러난다.) 수학은 실험적 시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기 일관성에 의해서 진리를 탐구한다. 당신은 한 점을 지나는 서로 다른 직선이 결코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고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상정할 수도 있다. 첫 번째 가정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기초이고, 두 번째 가정은 일반상대성이론의 닫혀 있고 휘어진 시공간에 대해서 참이다." "√2가 무리수임을 발견한 피타고라스학파의 히파소스는 물리적 검증이 허용되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비물리적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341-2)


"물리학자들은 대개 수학을 과학의 일종으로 포함시킨다. 모든 것이 경험적으로 시험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의 '귀결'을 시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2가 무리수라는 것을 안다. 즉 √2는 두 개의 정수 간의 비율로 기술될 수 없다. 이 주장은 만약 우리가 √2를 제공하는 두 개의 정수를 찾아낼 경우 반증될 수 있다. 오직 추상적이고 자기 일관적인 수학의 영역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리학자들은 양자 진폭과 파동함수라는 측정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사용하지만, 이들에 대해서 당혹해하며 이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다. 물리학자들은 언젠가 양자 진폭과 파동함수를 제거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와 더불어 물리학자들은 이들에 대한 해석에 관해 말하기를 피한다. 물리학은 물리학이 실패하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이 생산해내는 기적들에 의해서 그 타당성을 얻는다. 라디오, 레이저, MRI, 텔리비전, 컴퓨터, 원자폭탄 등등이 그렇다."(345-6)


"특정한 아이디어를 지지하기 위해 쓰인 〈과학에 따르면······〉이라는 구절을 마주쳤을 때, 아주 많은 경우에 이 아이디어가 과학에서 실제로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많은 경우 이 아이디어는 가면을 쓴 물리주의다." "우리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예측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언젠간 인간의 행동이 완전히 결정론적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는 평균적으로 방사성 탄소가 수천 년 안에 붕괴할 것임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이 평균적으로는 자신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인간들을 생산해낼 수 있게 하는 의사결정을 내릴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설사 당신이 이와 같은 최소한의 과학적 결론을 받아들이다고 해도, 이는 윤리적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가치들에 기초한 의사결정을 위한 많은 여지를 남겨놓는다. 과학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포함하지 않고서도 인간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346-7)


"상대성이론까지도 포함하는 고전 물리학은 결정론적이었다. 우주는 인과적이었다. 과거는 미래를 완전히 결정했다. 이는 원리상으로는 이전 사건들에 의해서 행동조차도 결정됨을 암시했다. 이후 이루어진 혼돈 이론의 발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는 우리가 과거를 결코 잘 알지 못할 것임을 암시했지만, 이는 결정론의 논변을 바꾸지는 못했다. 인간의 행동을 포함하는 모든 행동은 예정되어 있다. 칼뱅주의자들이 옳았다. 철학자들로서는 물리학자들의 발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어려웠다. 물리학의 급속한 발전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물리주의의 철학(또는 종교?)에 신뢰를 부여했다." "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결론이 기초하고 있는 바로 그 전제가 거짓임이 밝혀졌다. 이 논증─물리학은 자유의지가 환상임을 보여주었다는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리학이 인과적이지 않으며, 입자들의 미래의 행태는 과거의 경험들보다 더 많은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358-9)


"베바트론을 이용한 실험에서 나는 동일한 두 개의 '파이온pion'(파이 중간자pi meson)을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시각에 붕괴했다. 두 파이온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들의 파동함수는 서로 동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간섭은 이들의 파동함수가 동일함을 보여주었다." "파이온이 정말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파이온이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인간중심적인 처사일 것이다. 오히려 이 예는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는 물리주의자의 주장이 물리적 관측에 의해 반증되었음을 보여준다. 동일한 입자들은 동일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혼돈을 없앨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정확성으로 과거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특정한 중요 측면들은 예측될 수 없다. 자유의지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역사적 논증이자 고전 물리학의 성공을 형성했던 그 논증, 물리학이 결정론적이라는 논증은 그 자체로 하나의 환상이었던 것이다."(360-1)


5부 지금


"조각그림 퍼즐을 맞출 때 진정한 장애물은 빠진 조각이 아니라 잘못된 곳에 맞춰져 있는 조각이다. 시간의 방향에 대한 엔트로피 설명은 그처럼 잘못 맞춰진 조각이다. 문명은 엔트로피의 증가가 아니라 국소적인 엔트로피 감소를 근거로 성립되었다." "지구의 엔트로피는 지구 핵이 식어감에 따라 줄어들고 있다. 국소적 엔트로피 감소는 생명 전파와 문명의 특성이다. 시간을 엔트로피의 '감소'와 연관시키는 것은, 멀리 떨어진 블랙홀의 변화가 아니라 국소적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에서 두드러진 장점을 가진다. 사실 궁극적으로는 엔트로피 감소가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땅과 공기에서 조직화되지 않은 영양소들을 가지고 와서, 이들을 가장 먼저 음식으로 만들고(식물 생산을 통해), 살로 만들고(음식 섭취와 소화를 통해), 이로써 성장하고 학습한다. 결국 우리 몸의 엔트로피가 극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오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을 죽음이라고 부른다."(377-8)


"빅뱅은 3차원 공간의 폭발인가? 그렇다. 그러나 시공간을 통일하고자 하는 정신에 더 가까운 좀 더 합리적인 가정은 빅뱅이 4차원 '시공간'의 폭발이라는 것이다. 허블 팽창에 의해 공간이 생성되고 있는 것처럼 시간 역시 생성되고 있다. 새로운 시간이 연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것은 시간의 방향과 진행 속도를 결정한다. 매 순간 우주는 조금씩 커지고 시간은 좀 더 많아지며, 이처럼 확장되는 시간의 앞 모서리를 우리는 '지금'이라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공간의 연속적 생성을 반직관적인 것처럼 여기지만, 시간의 연속적 생성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매 순간 새로운 시간이 나타난다. 새로운 시간이 바로 '지금' 생성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우주의 엔트로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빅뱅 그 자체에 의해서 설정된다. 미래는 아직까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계속 생성되고 있다. '지금'은 경계선이자 충돌의 전방이며, 무로부터 생성되는 새로운 시간이자 시간의 앞 모서리다."(379-80)


"시간 축은 (대부분의 경우) 또 다른 하나의 공간 축처럼 취급된다. 시간의 진행이라는 특별한 측면은 완전히 빠져 있다. '지금'은 이 축 위에 있는 또 하나의 점일 뿐이고, 미래는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경험되지 않았을 뿐인 것처럼 여겨진다. 시간여행은 그러한 '지금'을 변경시키는 것, 이 축을 따라 앞쪽 혹은 뒤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4차원 빅뱅의 앞 모서리다. '지금'은 방금 막 생성된 순간이다. 진정한 시공간 다이어그램의 시간 축은 무한대까지 확장되지 않는다. 시간은 '지금'에서 멈춘다." "나는 현재와 과거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먼 미래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미 그렇게 된 것은 그렇게 된 것이다. 아직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물리학 법칙들로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우리는 물리학 그 자체만으로 결정론을 성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382-3)


"'지금'은 우리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며, 우리가 스스로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을 틀어서 국소적 엔트로피가 감소할 수 있도록 지휘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와 같은 국소적 감소는 확장된 생명과 문명의 원천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엔트로피를 방향 잡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자유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 능력을 물리주의자들은 환상이라고 부르지만, 오늘날의 양자물리학 이론은 이와 유사한 행동을 그 본질상 내장하고 있다." "자유의지란 결정을 내릴 때 비물리적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유의지는 접근 가능한 미래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멈추지 않지만, 접근 가능한 상태들에 대한 통제를 발휘하며 이를 통해 엔트로피에게 방향을 부여한다. 자유의지는 찻잔을 부수는 일에도, 새로운 찻잔을 만드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 자유의지는 전쟁을 벌이는 일에도, 평화를 찾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3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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