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지음, 이상길.배세진 옮김 / 킹콩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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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생생한 목소리로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meconnaissance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는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이 분석하는 사회공간에 그 자신 또한 위치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기반이 되는 '합리적 유토피아주의'의 근간에는 사회학 작업이 내포하는 이런 자기분열이 놓여 있다. 이를 견뎌 내거나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회학자를 포함해) 사회세계의 행위자를 구속하는 결정요인들을 밝힐 수만 있다면, 결국 외양의 허상과 기만적인 자명성을 비판하고 속박 상태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비록 모든 사람이 완수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될 기회를 살리게 될 것이다."(18-9)


1장 사회학자의 직능


"역사학자에게는 많은 것이 자명한 사실로 주어지고 심지어는 [그런 사실만 발견해도] 업적으로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보죠. 만일 어떤 역사학자가 특정한 역사적 인물과 다른 역사적 인물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발굴한다면, 그러니까 친분을 찾아낸다면, 이는 일종의 발견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찬사를 보낼 겁니다. 반면에 제가 예컨대 대학 세계, 또는 학문 장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려고 입만 벙긋하더라도 저는 괴물 같은 밀고자 취급을 당할 겁니다. 옳은 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말이죠. 다른 한편 모두가 알다시피, [역사학이 취하는] 시간적 거리는 중립화neutralisation의 미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회학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겪게 합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회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화급한 현장에 서 있고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죽은 것도 아니고, 땅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28-9)


"저는 결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단절 같은, 그런 입장을 취한 적이 없고 지금도 굉장히 비판적인 관점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단절에 불과하며, 조사연구를 실천하는 과학자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 주장하는─이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데─단절입니다. 이런 단절은 우리가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담론에서 발견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한 기능을 갖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것과 속된 것, 달리 말해 성자와 속인, (신성한) 예언자와 평민을 구분하는 기능입니다. 저는 이런 기능이 역겹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우리의 과학이 아직까지는 시작에 불과하고 초보적이며 유아적인 단계에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과학에 관해 논할 수 있고 또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어찌 되었건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혹은 경제학자가 실천하는 과학적 노력과, 예컨대 철학자가 수행하는 노력 사이에는 성격상의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자와 달리] 검증이나 반증 가능한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지요."(32)


"제 작업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과학 그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종 분류체계를 아무런 주저나 성찰 없이 사용하는 대신에 저는 분류체계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범주를 너무 순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일이지요. 일례로, 의사라는 개념 자체가 끝없이 변하는 역사적 산물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18세기 이후 지금까지 의사들의 지위를 비교하는 시계열적 통계를 산출할 수 없습니다[범주 자체가 다르니까요]." "아무튼 역사를 사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 단어, 개념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입니다." "확실히 역사학자는 시대착오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학자는 요즘 널리 쓰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 단어가 아예 없었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된 과거의 실재를 조명합니다." "대체로 이런 오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찰성이 더욱더 중요한 것이죠."(36-8)


"샤르티에 / 선생님이 통시성diachronie, 즉 장기적인 시간에 관해 말한 것은 동시대 사회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집단, 다른 계층이 똑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범주를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무심코 사용합니다." "부르디외 / 역사학자들이 범하는 이런 종류의 시대착오는 사회학자에게는 자계급 중심주의ethnocentrisme de classe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달리 말해 사회학자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남성/여성, 뜨거운/차가운, 건조한/습한, 높은/낮은, 지배계급/피지배계급 등으로 구성된 저만의 고유한 사고범주, 분류체계, 분류틀, 구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죠. 이는 어떤 경우에 시대착오를 빚어내고, 다른 경우에는 자계급 중심주의를 가져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자기 자신의 질문체계를 문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38-9)


2장 환상과 인식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결정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라는 환상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회계층 가운데 자유라는 환상에 특히 경도된 집단이 있습니다. 지식인들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학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거나, 사회학에서 '철학에 대한 증오'를 발견하고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런 거부는 지식인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결정요인들을 알기 싫어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유의 주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결정요인들을 스스로 인식하는 한에서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49-50)


"저는 사회학이 다른 수단에 의해 철학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만일 사회학이 명예로운 계보 안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최초의 사회학자 자리에 소크라테스를 놓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거리로 내려가) 질문을 던지지만, 그 답변에 대해 액면가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학자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런 사고를 통해서, 그리고 극적인 자기 신비화를 거쳐서 스스로에게 사기를 불어넣습니다. 사회학자는 남들의 말을 듣고 남들에게 질문하고 남들이 말을 하게 하지만, 모든 담론을 비판 아래 둔다는 점에서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수단을 갖습니다."(54-9)


"제가 생각하는 사회학은 담론에 저항합니다. 사회학자가 상징생산에 종사하는 사람, 예를 들면 언론인, 주교, 교수, 철학자를 믿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상징생산의 종사자들은 사회세계가 이렇다고 그럴싸한 담론을 제공하면서 말로 먹고 삽니다. 사회학자는 이런 담론의 외양을 애써 조심합니다. 우리 사회학자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것은 실상 사회세계에 관한 일상적 담론, 헛똑똑이들의 수사학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는 상징적 호신술의 교사입니다." "예를 들면, 선거방송에서 한쪽에서는 언론인이 정치가를 논평하고, 반대쪽에서는 정치학 교수가 언론인을 반박합니다. 그런데 이들 각자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한 사람에 대해 메타-담론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메타'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메타'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내가 말해 줄게〉라고 하는 것이죠."(62-4)


3장 구조와 개인


"가짜 문제들, 그러나 실제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가짜 문제들의 장점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게다가 과학의 관점에서 이런 가짜 문제는 대체로 진정한 정치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제가 볼 때 지리멸렬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대립쌍이지만, 예를 들어 개인과 사회,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개인주의와 전체론holisme 등등, '~주의'isme가 달린 단어들의 대립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 일련의 대립쌍은 사회주의 또는 집단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대립쌍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런 은밀한 유착 관계를 통해서 정치투쟁이 학문 장 안에 슬그머니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학문 장의 자율성은 이런 가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경계를 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컨대 학문적으로 매우 취약한 입장도 그 뒤에 정치적 힘이 있다면 충분히 세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학문장 내에서 정치적 국면을 등에 업은 지적 활동이 가능한 겁니다."(74)


"그렇다면 이 문제들은 왜 가짜 문제일까요? 우리는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자생적] 학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회학의 특별한 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학의 경우도 같은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데, 즉각적 이해라는 바로 이런 환상이 [진정한] 이해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환상과 단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객관화 방법을 도입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뒤르켐의] 유명한 문장에 다다릅니다.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 다루어야 한다.〉" "저는 연구대상이 제게 말한 것, 그가 체험한 것, 그가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말한 것, 그의 정신적 경험이나 표상 등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심지어 의심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뒤르켐의 '선관념',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또는 자생적 사회학을 뜻하는데, 그 이름이 뭐든지 간에 저는 의심을 지우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객관주의적 입장입니다."(74-5)


"나는 세계에 속하는 하나의 사물입니다. 나는 하나의 신체로 존재합니다. 나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특정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다양한 힘에 복속됩니다." "저는 또한 세계를 이해합니다. 달리 말해 저는 세계에 관한 표상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안에서 제가 차지하는 위치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의 작업은 [위치와 관점] 두 가지를 포괄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라는 문제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 대 사회는 전적으로 가짜, 허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대립쌍은 객관주의적 공격이나 주관주의적 공격 모두에서 사용될 수 있기에 매우 유용한 허구입니다." "사르트르가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주관주의적 위치를 구현한다면,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객관주의적 위치를 구현하고 있죠. 어느 편을 드는 대신에 우리는 사르트르에 반대하면서 레비-스트로스에 찬성하고, 레비-스트로스에 반대하면서 사르트르에 찬성해야 합니다."(77-8)


"사르티에 / 선생님의 이런 주장은 결국 역사학자들의 경우 인식론적 실험의 상황에 거의 놓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상 역사학의 대상과 역사학자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고, [사회학과 달리] 연구 주체의 고유한 이해관심이 [대상과의] 직접적인 연루가 아닌 다른 층위에 놓이기 때문이죠. 물론 여기서 현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예외가 되는데, 그 경우 [역사학과 사회학 사이의] 학문적 경계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물론 [역사학 장에도] 두 개의 대립극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구조의 축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의미지향의 축에 속합니다. 이와 같은 대립쌍이 사료의 종류, 역사쓰기의 방식, 역사학자 사이를 구분하긴 하지만, 분열이 심하지는 않지요. 그 덕분에 상이한 접근들이 아주 원만하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계는 완전히 통일된 장이 아니라, 다양한 연구주제와 역사쓰기의 방식들이 몰려 있는 일종의 모자이크 상태와 유사한 것이죠."(82-3)


4장 하비투스와 장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 이후에는 후설, 모스, 뒤르켐, 베버 등 다양한 학자가 하비투스 개념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 개념은 결국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 줍니다. 즉 사회적 '주체'는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정신esprits instantanes이 아니란 것입니다. 달리 말해, 어떤 사람의 실천을 이해하려면 그에게 가해진 자극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는 [과거로부터 꾸준히 축적된] 모종의 성향 체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면서 어떤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화됩니다. 하비투스 개념은 대강 이런 뜻입니다. 자세히 논의하자면 끝이 없는데, 이 개념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행위자는 역사를 가지며 개인사의 산물이자 환경과 연관된 교육의 산물이고, 집단적 역사의 산물입니다. 특히 사고범주, 이해범주, 지각도식, 가치체계 등은 사회구조가 체화된 산물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하비투스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92-3)


"그렇지만 하비투스는 숙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저를 두고 해석하는 식의 불가피한 운명fatum이 아닙니다. 하비투스는 성향들의 열린 체계입니다. 그것은 경험들의 영향 아래 끊임없이 노출되고, 그런 경험들에 의해서 마침내 변화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말한 다음, 이런 주장에 재빨리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일련의 경험이 하비투스를 [변화시키는 대신] 강화할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개연성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 연계된 사회적 숙명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하비투스를 형성한 경험들과 조화로운 방향으로 경험을 쌓아 가게 됩니다. 또 하나의 난점을 해소해 봅시다. 하비투스는 잠재성virtualite의 체계로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남들이 저를 두고 해석하는 바와 달리, 하비투스는 특정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만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그것은 스프링과 같지만, 방아쇠가 필요한 것이죠. 게다가 상황에 따라 하비투스는 정반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99)


# 하비투스는 통상적으로 순응 기제로 작동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달리 말해 하비투스가 실행되는 장이 달라지면 저항 기제로 발현될 수도 있다.


"저는 거대한 경향적 법칙에 대해서 일종의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방법론적인 이유에서 저는 그런 법칙을 거의 믿지 않아요. 반면에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인기를 끌었고, 일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에게 언제나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는 해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이런 문제들 중에서 엘리아스의 문제들이 가장 공감이 간다고 말이죠. 그는 국가 형성이라는 실제의 거대한 과정에서 자신의 역사진화론적인 사회심리학을 추구합니다. 국가는 물리적 폭력(저는 여기에 상징폭력을 추가합니다)을 시작으로 온갖 형식의 권위를 독점하면서 구축됩니다. 일례로, 교육체계는 누가 똑똑하고 누가 멍청한지 선언할 수 있는데, 이런 발언권을 독점하는 거대한 진보의 과정이 결국은 교육체계를 형성합니다. 이런 과정은 제가 하비투스라고 하는 것, 그리고 역사학자들이 다소 애매하고 위험한 용어로 심성이라고 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어요."(102-3)


"사르티에 / 선생님의 저작에서 장들은 언제나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장들이 그 자체로 국가의 발현으로 묘사됩니다." "부르디외 / 그렇기는 해도 저는 우리가 만일 국가에서 출발한다면, 국가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예로, 제가 연구한 예술 장에서 인상주의 혁명은 국가에 맞서서,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맞서서 일어나지만, 이와 동시에 국가와 더불어 일어납니다. 달리 말해,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장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경제 장에 대해 독립적인 소우주들이 어떻게 창출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 국가는 메타-투쟁의 장소, 즉 장들에 대한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장소가 됩니다. 예를 들어, 법률 제정을 두고 벌어지는 투쟁이 있습니다. 주택가격이나 은퇴연령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는 장들을 가로질러 일어나는 투쟁이지만, 세력관계를 재편하는 투쟁이기도 합니다."(109-11)


5장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


"아카데미가 지배하는 통합된 사회세계에서는 하나의 노모스nomos, 즉 근본적 법칙과 분할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그리스어 노모스는 나누다, 분할하다를 뜻하는 동사 네모nemo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중에 분할의 원리도 있는데, 이는 동시에 시각의 원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적/남성적, 습한/건조한, 뜨거운/차가운 등이 그렇지요. 잘 통합된 아카데미 세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화가이고 저 사람은 화가가 아니다.〉 이 사람은 '보증'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화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화가로서 인증받았기 때문에 화가입니다. 이것이 아카데미죠. 이런 상황에 마네가 일격을 날린 겁니다. 그때부터 더 이상 누가 화가인지 아무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노모스에서 아노미anomie로 이행한 셈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정당성[혹은 인정체계]을 놓고 정당하게 투쟁할 수 있는 세계로 옮겨 간 것이죠. 그리고 어느 쪽도 서로의 도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117-8)


"장에서는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이 전개됩니다. 사회학자는 언제나 도전에 처합니다. 사회학자로서 그의 정체성이 언제나 문제시될 수 있지요. 게다가 장이 발전할수록, 그 장에 특수한 자본이 축적될수록 다른 화가의 정당성에 도전하려는 사람은 그 자신이 화가로서의 특수한 자본을 점점 더 많이 갖춰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개념 미술가는 회화를 근본까지 의심합니다. 그들은 캔버스를 찢으면서 이런 도전을 선포했습니다. 그 이의제기 형식을 살펴보면, 그들은 유치한 우상파괴자와 달리 회화적인 방식으로 회화를 문제화합니다. 그런데 이를 적절히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회화의 역사에 통달해야 합니다. 엄청난 지식이 필요한 것이죠. 예술가가 수행하는 특수한 우상파괴는 예술 장에 대한 거의 완벽한 숙달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분명히 역설이지만, 장과 더불어 생겨난 역설입니다. 〈그는 세 살짜리 우리 아들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식의 순진한 발언은 그 장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소리죠."(119)


"이번엔 철학의 사례를 들어 보지요. 어떤 사람이 철학 게임에 들어가고 싶은데, 이른바 '나치'식의 관념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하이데거가 직면한 상황입니다. 철학 게임에 들어가기 위해 그는 철학계의 작동 법칙에 자기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설령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말이죠. 장은 이런 식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반유대주의'는 '반칸트주의'가 됩니다. 사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매개 요인이 개입합니다. 하이데거가 [학계에] 등장할 때, 유대인들은 합리주의의 표상으로 칸트를 옹호했습니다. 만일 제가 나치식 관념을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철학자로 인정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관념을 [철학 장의 법칙에 맞추어] 철저히 변형시켜야 합니다. 하이데거가 나치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말입니다. 그는 분명히 나치죠.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가 어떻게 존재론의 언어 속에서 나치식 주장을 했는지 아는 데 있습니다."(121-2)


"많은 사람이 발자크를 사회학의 선구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소설가 가운데 최고의 사회학자, 사회학의 창시자는 바로 플로베르입니다." "특히 『감정교육』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추구한 형식주의 때문입니다. 정확히 우리는 마네에 관해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형식을 탐구했지만, 이는 동시에 사실주의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은 쓸모없는 대립 가운데 하나입니다. 플로베르 사례에서 형식의 탐구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것의 회귀, 즉 사회적 상기anamnese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는 '이야기하기'만 가지고 소설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순수소설, 순수하게 형식적인 탐구에 힘입어 플로베르는 사회세계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뱉어 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국 그는 당대의 지배계급에 대한 객관화에 성공합니다. 플로베르가 이룬 성취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분석들과 견줄 만합니다."(124-6)


"역사학에서 멋진 이야기는 환기evocation 작용을 합니다. 학문적 대상을 구성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그 대상을 느끼게 하고 보게 하는 데 있으며, 거의 미슐레적 의미에서 [즉 역사를 실감 나게 그려 내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대상 자체를 환기시키는 데 있죠. 제가 이런 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우리는 구조를 환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역사학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면에 사회학자는 즉각적인 직관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는 기능이 다르지요. 만일 선거방송에서 해설을 한다면, 사회학자는 시청자들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핵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학자는 때때로 멋진 형식에 너무 많은 걸 희생시킵니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역사학자는 원초적 경험, 심미적 선호, 대상관계의 쾌락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지요."(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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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 《국가》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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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몇몇 사람들이 페이라이에우스(피레우스) 항 근처에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나눈 대화를 소크라테스가 전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밋밋한 대화가 아니라 격정과 냉소, 찬탄과 질책이 오고가며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희곡이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호적인 이들도 있고 적대적인 자들도 있다. 적대적이라 해서 당장 상대방을 죽이려 드는 이들은 아니다. 그 정도로 적대적이면 아예 마주앉아 대화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 그 자리에 끼어들었을 리 없다. 설득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이들이다. 말을 섞는 것조차 곤란한, 상종도 하기 싫은,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호적이라 해서 좋은 말만 하고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의외로 그런 자들이 하기 마련이다." "(대화편 《정치가》나 《법률》과는 달리) 《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이끌고 가지만 다른 이들도 끌려가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화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16-7)


서론 또는 문제 제기: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수월하지 않았다. 폴레마르코스는 단순히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붙잡은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이겨 보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대화가 시작된 상황은 평온하지 않았다. 격렬한 대결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약간의 긴장, 이 정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와는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거의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강하게 질타한다. 《국가》는 '대화를 통한'(dia logon) 설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설득은 철학자의 과제다. 이 대화가 끝날 때쯤 여기서 시비를 걸던 사람들이 모두 소크라테스의 말에 승복하거나 적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그의 목표는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테스들의 목적도 설득에 있다. 플라톤은 그들의 설득과 자신의 설득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26-8)


#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1. 케팔로스 : 넉넉한 재산을 갖고 있어서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갚을 것은 갚는 것'이 올바름이다.

2. 폴레마르코스 : 친구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 올바름이다.

3. 트라쉬마코스 : 더 강한 자의 편익이 바로 올바름이다.

4.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 올바름은 그 자체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논증해야 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많은 사람이 약정을 하면 된다. 글라우콘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법률(nomoi)과 약정(계약: syntheke)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nomos)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nomimon)이며 올바르다(dikaion)고 한다.〉 법이 〈올바름의 기원(genesis)이며 본질(ousia)〉이라고까지 말한다. 합법성과 올바름(정당성)이 법을 통해서 결합된다. 체제가 법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되어 있기만 하다면 정당성을 얻는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옳은 것으로 간주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참된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 것인지는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결국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77-8)


"담대한 글라우콘과 섬세한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하는 것은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밝히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윤리적인 행동 지침을 세우는 차원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만한 것까지 고려해야 할 주제이다. 한 사람의 올바름과 한 나라 또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올바름 모두에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올바름을 원리로서 탐구할 것을 요구하는 글라우콘, 올바름의 작용과 이로움을 밝혀 달라는 아데이만토스, 이 두 사람의 문제 제기는 아테나이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이면서도 지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가 언급했듯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들에 대해서〉, 한 사람의 영혼과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올바름의 원리와 작용을 구축하는 작업, 즉 올바름의 학學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담대함과 섬세함으로 수행되는 이 작업은 '기쁨'을 낳아 놓을 것인가."(80-1)


제1부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의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것이 공공 영역인 폴리스에서 정치적인 쟁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주귀감서에 그것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지배자의 쾌락이 아닌 피지배자들, 주권자가 아닌 자들, 신민의 쾌락은 그저 억누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민주 정체가 성립하면서 바로 이들이 폴리스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자신들의 쾌락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 '돈 놓고 돈 먹기'와 같은 보수 획득술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의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지는 선거의 핵심 주제, 심지어 당락을 가르는 쟁점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부를 쌓아 올리려는 애타는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이다." "즉, 《국가》는 민주 정체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정치적 문제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89-90)


"《국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올바름의 기준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철학적 정치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호자는 한 가지 일만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수호자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나라의 원칙인 '한 사람이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수호자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한 사람마다 하나의 직업을 갖는 나라에서 수호자들도 그 명칭은 '하나의' 직업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성향은 교육을 통해서 다면적으로 변화하였으며 바로 그 다면성이 수호자 또는 통치자의 근본적인 특성이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수호자(와 통치자)만 유식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 무식한 상태로 만들자는 것인가라고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민정치를 하자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과잉해석일 것이다."(113-4)


"시가 교육이 좋은 성격과 그에 이은 지성의 측면을 위한 것이었다면 체육 교육은 '격정'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혼을 위해서 양쪽 다를 제도화한 것〉(410c)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의 혼이 가지고 있는 두 측면을 위해서 그 두 가지 교육이 요구된다. 〈수호자들은 성향상 이들 양면을 지니고 있어야만〉(410e)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시가와 체육의 기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양 측면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둘을 골고루 쓸 수 있다. 이것이 혼화混和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적절한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름은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 활동을 가리킨다. 올바름은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최선의 것을 궁리해 내는 사유활동이다. 플라톤에 있어 올바름은 혼의 혼화에 이르는 과정을 이끌어서 혼화의 상태와 적절함을 만들어 내는 사유의 힘이다."(124-6)


"신분제가 엄격한 나라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양 중세에서 장남은 집안의 문장紋章을 이어받는다. 차남은 자신의 운명에 승복하고 다른 방책, 이를테면 일확천금을 노리고 십자군에 참전한다. 왜 불평이 없는가? 그것이 자신의 기본값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음을 굳이 따져서 알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정함 따위를 따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장남이 될 수 없다. 노력하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체제에서만 올바름과 공평함이 문제된다." "플라톤이 올바름에 대해 논의를 했다는 것은 민주 정체에서 핵심적인 쟁투가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테나이에서는, 민주정 시기는 물론 참주정 체제에서도 이런 일이 끝없이 일어났다. 그는 민주정에서 조화로운 정치적 행위들이 가능한 방법, 체제 붕괴를 불러오는 당파적 쟁투를 막는 민주 정체 지도자들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궁리한 것이다."(128-9)


"통치자의 기본적인 자질은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든 관계를 없애야 하는 데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무원들도 한 명의 주권자이지만 그들이 공직에 있는 한 그들은 공직이라는 기구(apparatus)의 한 조각이다. 거대한 조직(organization)의 한 기관(organ)에 불과한 것이다. 이 조직과 기구는 그 안에 어떤 인간이 들어온다 해도 규범과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플라톤 시대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민주 정체는 시민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민회에서 모든 공적인 사안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민주정을 흔들고 불안으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가 추상적인 권력 기구라 부르는 장치를 구상한 것이다. 수호자들의 사적인 관계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권력 기구와 전면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나'는 사라지고 '우리', '폴리스'만 남는다. 그들은 폴리스의 일(ergon)을 수행하는 기계와 마찬가지다."(191)


제2부 공동체의 궁극적 근거와 철학적 정치가


"현실은 현실이다. 그것은 결코 이상이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구상을 제시하였을 때 그것에 상응하는 제도와 조직이 만들어질 가망이 없는 것을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하며 실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을 현실적이라고들 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치적 제도와 조직이라는 실제 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유형有形의 것들이 있다. 그것에 상응하거나 그것을 반영하는 정치적 사유를 했다면 그것은 현실적인가. 이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치적 사유가 현실의 정치적인 것을 반영한다 해도 인간의 사유는 정확하게 그것을 반영할 수 없다. 모든 사유에는 인간의 반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반성은 사유이고 관념이다. 관념(idea)은 이상적(ideal)이고 이상주의적인(ideal) 것이다. 플라톤이 내놓는 생각, 곧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든지 정치가가 철학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의 아테나이에서 펼쳐지는 정치를 검토한 다음에 나온 것이므로 관념이고 이상적인 것이다."(200-1)


"현실은 내버려두면 그대로 흘러간다. 가끔은 그것을 되짚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살펴볼 때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만들어 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닮은 것이라도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본本이 있어야 그것에 대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하찮아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그러다 보면 뭐가 되더라도 되겠지,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겠어'라는 태도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가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현실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으로서의 '좋음의 이데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정치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자는 것이다. 반드시 그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되는 정치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출발점이다."(201-2)


"소크라테스는 자체를 아는 것이 앎이고,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진리로 간주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견 속에서 산다. 그들을 어떻게든 이끌고 가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는 이가 자신의 모름을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이 무지의 자각은 앎인가, 의견인가? 아직은 의견이다. 자신이 무식한 건 알지만 아직 앎은 없다.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중간 단계다. 이것은 모름과 앎의 운동 과정이다. 앎과 모름은 이처럼 연속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서로 모순 관계가 아닌 반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흰색과 까만 색도 반대 관계이다. 흰 색에 때가 묻으면 회색이 된다. 그러다가 때가 아주 많이 묻으면 까만 색이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간 단계를 우리는 '생성'이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생성에 나섰을 때 그것을 인도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국가》에서는 누가 그런 일을 할 것인가. 일단 앎을 가진 철학자가 하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212-3)


"형상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것이다. 본은 형상을 닮은 것이다. 형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접근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의 면적을 계산할 때 원주율에 반지름의 제곱을 곱한다. 이는 원을 다각형으로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무한히 쪼갠다고 가정해서 얻어 낸 원의 면적이 원의 진짜 면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무한히 쪼개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주율 자체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얻어 낸 면적은 원의 진짜 면적에 접근해 있을 뿐이다. 원의 진짜 면적은 신만이 알 수 있다. 인간은 그 면적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이 알고 있는 것은 신적인 것이고 인간은 신 닮은 것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차원을 구분한다. 하나는 완전하게 자기 스스로와 합치하는 차원, 즉 신의 차원, 형상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극한의 노력을 기울여 형상의 차원에 가깝게 간 '본'의 차원이다."(213-4)


"형상을 알아내는데서 그치면 그는 철학자일 뿐이다.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한다. 천상에 올라가 지식을 얻은 다음 그들을 인도하러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올라가면 철학자이고 내려가면 정치가이다.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라 하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철학자는 형상을 앎으로써 스스로 완성된다. 그것으로써 목적에 이르러 끝난다. 형상의 세계는 고요하고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곳이다. 인간 세상은 변화에 얽매여 있는 곳이다. 천상의 세계는 질서 잡혀 있으며 한정되어 있으나 아래는 혼돈스러우며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들 각각은 진리와 비진리이니 겹칠 수가 없다. 인간의 삶에 자족성(autarkes)이 있다면 본을 가진 정치가가 요구되지 않는다. 인간 실존은 논리적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인간 공동체는 불완전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천상에 있는 형상을 '전체에 따라서'(kata holon) 모방한 본을 가지는 것일 뿐이다. 이 본은 어중간하게 중간에 있는 것이다."(220-1)


"폴리스에서 어떤 정치적 행위를 할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근본적인 까닭으로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를 제시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를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면 '공동선'共同善이다. 이러한 최종 근거의 원초적 형태는 자연적 우주론, 즉 우주적 혼(cosmic soul)의 선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가 이것에 관한 정신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근대적 형태의 우주론은 칸트의 초월론적 선험론에서 주장하는 '실천이성의 요청'과 같은 것이다. 최고선, 자유의지, 영혼불멸은 증명할 수 없지만 그것들은 인간 삶의 윤리적 국면을 위해서 목적론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현대 국가에 있어서는 공공복지 같은 이념이 정치에서의 최고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이 설정됨으로써 정치의 궁극적 과제가 도출되며, 이것으로써 정치는 사적인 이익의 극대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정치의 궁극적 정당화 근거'이다."(253)


"많은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해 내려가야만 한다. 상승과 하강,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묶어서 '이행'(메타바시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동굴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를 매정하게 설명했다. 폴리스에서는 특정한 부류가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지내게 하는 것이 규범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자면 정치가는 공화주의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보고서 그곳에서 누리는 '관상적 삶', 현실로 내려와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 이 두 가지 모두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 둘은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철학적 정치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양립 불가능한 모순을 견뎌 내는, 서로 다른 상태인 올라감과 내려감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인 것, 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다."(282-3)


제3부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와 시민들


"아테나이, 로마 공화정, 현대 민주정 등을 제외한 정치 체제들에서는 정치적 공직이 출생, 군주의 호의, 확립된 과두제 안에서의 지위의 획득에 의해서(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 성취될 수 있었다. 이는 공직을 귀속적으로 충원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구상한 폴리스에 적용되는 방식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교육적 충원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체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정체의 쇠퇴가 일어나는 원인이 정체의 구조 문제라기보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이상적인 정체에 살고 있다 해도 그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사느냐, 즉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체는 얼마든지 퇴락할 수 있다." "시민들에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정치 체제의 상태를 평가하고 이름 붙이고 있으므로 플라톤이 정치학적 의미에서의 체제론을 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302)


#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

1. 크레테 및 라코니케(스파르타) 식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은밀하게 추구함

2. 과두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드러내놓고 추구함

3. 민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인이 추구함

4. 참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족시켜 줄 사람을 광적으로 찾아내서 지도자로 추대함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극대화되어 겹치면 민주정으로 가게 된다. 욕망 충족과 멋대로 하기에는 민주정만한 곳이 없다." "민주 정체에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에 불변의 고정적 정의가 없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의미를 규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중선동에 능한 자가 민주 정체에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데 왜 전통을 지켜야 하느냐면서 기존의 것을 엎어 버리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것이다. 전통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전통을 깨는 합의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극도의 대중영합주의 시대가 되어 버리면 다수의 합의에 의해 모든 것이 깨져 나간다." "모든 즐거움은 동일하고 똑같이 존중되어야만 하는 것이 민주정의 핵심에 자리한다. 날마다 마주치게 되는 욕구에 영합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 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소비자주의'다. 가치의 위계질서가 해체된 상태, 이것이 민주 정체의 필연적인 귀결이다."(324-8)


"참주 정체로 나아가는 씨앗은 이미 민주 정체 안에 들어 있다. 민주정은 다수의 동의를 얻은 자나 정당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지배하게 되므로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이 법을 어기고 대중의 격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뭔가를 하게 되는 지점, 즉 선도자가 되면 참주정으로 가게 된다. 마지막에 선도자는 '참주'로 변한다. 시민이 다양한 명칭을 갖는 것처럼, 똑같은 정치가가 상황의 변화와 진전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군중을 거느리고 동족의 피를 흘리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그때부터 참주가 된다. 그는 늑대인간이다. 〈다른 제물들의 내장들 속에 잘게 썰어 넣은 인간의 내장 한 조각을 맛본 자는 반드시 늑대가 된다는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다. 참주 정체에서는 이러한 일이 사법살인의 형태로 자행된다. 대중선동가, 선도자, 참주, 이 연속 단계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339)


"인간이라는 존재는 쾌락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쓰면 이기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 개인들이 그 쾌락을 충족시키려 하는 상태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다." "플라톤도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오니 누구나 자기의 쾌락을 충족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 정체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상태의 이기적인 개인들의 싸움을 그치게 하려면, 불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면 된다. 즉 법을 강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이 만든 법에 대해 궁극적인 신뢰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인간이 내놓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진리 닮은 것이다. 진리는 항상 저쪽에 있는 것이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니 어떻게 이것을 강제하겠는가. 결국 마음을 닦으라는 말만 하게 된다. 공동체의 법을 어기는 불법과 결합된 한 사람의 쾌락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처방은 한 사람의 심신수련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341-2)


제4부 참된 올바름과 궁극적 보답


"플라톤은 철학자가 언어를 이용하여 말하는 것을 진리라 하고, 시인이나 화가가 말하는 것은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철학자나 시인이나 모두 모방(mimesis)을 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모방의 범주로 넣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행위자가 초월적 실재로서의 진리를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은유의 후보자들이 있다. 은유는 인간이 만들어 낸 임의적인 것이라 약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모방한 결과물이 은유인 것이다. 은유는 초월적 실재인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다. 한마디로 모방은 은유를 형성해 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모방은 진리와 인간이 은유를 통해 오고가는 것, 즉 이행(metabasis)이다. 진리는 인간으로, 인간은 진리로 오고가는 것이다. 진리가 아무래도 위에 있다는 느낌이 있으니 그것을 알기 위해 인간이 올라가서'(anabasis) 진리를 가지고 '내려오는'(katabasis) 것이다. 은유는 오르내리는 사다리다."(369-70)


"소크라테스는 시인에 대한 비판보다는 진리의 인식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온갖 착시에 빠져 있다. 〈같은 것들이 물속에서 볼 때와 물 밖에서 볼 때, 구부러져 보이기도 하고 곧은 걸로 보이기도 하는가 하면, 색채들과 관련되는 착시로 인해서 오목하게도 또는 볼록하게도〉 보인다. 시각을 통해 보는 것은 왜곡이 된다. 이것을 꼭 시각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비판적인 안목 없이 사태를 바라보면 대상이 던져 주는 정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산된 것과 측정된 것 또는 계량된 것'을 이용해야 한다. 이것들은 비판적 검토를 거쳐서 객관화된 것들이다. 계산된 것, 측정된 것, 계량된 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미디어를 왜곡시키는 자들이요, 플라톤 시대에는 시인이었다. 시인들이 '혼의 헤아리는 부분'의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플라톤의 미디어론으로 읽을 수 있다."(370-1)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제시된 것은, 살아서 혼을 순수한 상태로 만들고 올바름을 지켰던 사람은 죽어서도 훌륭한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살아서의 삶이나 죽어서의 삶 모두에 대한 궁극적인 보답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야기의 보전'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해야 할 과제라 천명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이 이야기를 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설득할 의무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설득된 자들은 '잘 지낸다'(eu zen)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삼아 인간들과는 물론 신과도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올바르게 살았던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보존하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보존하는 것, 사실 이것은 철학자가 하는 일이다. 앞날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안 가 본 길들을 철학자가 갈 수 있겠는가. 안 가 본 길들은 정치가들이 가는 것이다."(385-6)


추기追記


"아테나이 민주정의 결정적 계기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었다. 그는 정치적 선택을 조직하는 방식을 개조하였고, 정치적 선택을 아테나이 전래 집단인 데모스에 전체적으로 할당하였다. 여기서 민주정은 근대의 개인주의 방식이 아닌 집단의 선택으로 작동하였다." "클레이스테네스 이후로 민주정 체제에 숨은 문제는 '쾌락'과 연관된 부의 문제였다. 아테나이에서는 정치적 투쟁의 핵심인 부의 원천을 둘러싼 분배방식의 쟁투가 민주정으로 봉합되었고, 전쟁 시기에는 일당지급제도(misthophoria)라는 편법이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로 충당된 국가의 핵심인력으로서의 해군에 대한 사회적 지위 부여 문제와도 얽혀 있는 것이다. 부를 분배하는 방식은 민주정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으나 부의 원천 자체는 토지 이외의 것이 획기적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기술혁신이 불가능했던 고대 경제는 약탈 경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제국주의로 표출된 것이다."(394-5)


"민주정의 지도자가 가진 문제는 권력 획득의 과정과 기술에 있다. 달리 말해서 정치적 기술로서의 연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인정할 것인가, 오늘날의 술어로 표현하면 '대중영합주의'의 문제다." "한 개인의 내면적 심성의 특성이나 도덕성보다는 대중을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기술, 곧 연설술이 민주정에서는 탁월한 정치술의 중심을 이룬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이를 배척한 것은 체제의 요체를 곧바로 겨냥한 것이다. 더 나아가 플라톤은 민주정이 실현한 일종의 '세계의 탈주술화'를 되돌리려 하였다. 주지하듯이 민주정은 절차적 합리성만을 최종심급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민주정에서는 최종적 정초가 되는 이념이 없는데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라는 이념을 도입한다. 이는 탈주술화의 귀결인 민주정을 다시 주술화하려는 시도이다. 《국가》의 주제가 '올바름'이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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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 체제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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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사 주해


▶ 읽게 될 것


"역사, 그리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사 모두 궁극적으로는 '읽기'다. 읽는 것은 정신의 연습이다. 헬라스 신화에는 아홉 명의 무사mousa 여신들이 있는데, 그것 이전에 보이오티아에서 기원한 신화에는 아오이데 여신과 므네메 여신, 멜레테 여신 이렇게 세 명의 여신이 있다. 아오이데 여신은 노래와 목소리(song, voice)를, 므네메 여신은 기억(memory)을, 멜레테 여신은 연습과 기회(practice, occasion)를 관장한다. 앞의 두 여신들은 구체적인 대상에 관여하는 반면 멜레테 여신은 이들과 달리 행위, 즉 노래를 잘하거나 기억을 잘하기 위한 연습에 관여하므로, 이 여신은 다른 여신들에게 있어 일종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습을 통해서 얻게 될 통찰력 또는 창발創發(emergence)은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앎과 그것들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원리로 올라서는 힘이거니와, 이 원리는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이론'(TOE, Theory of Everything)은 아니다. 사실 '모든 것의 이론'은 '아무것도 아닌 이론'(TON, Theory of Nothing)이다."(125-6)


▶ 우리가 시도하는 바


"철학은 서사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맥락에서 탈피한 추상적 보편성에 이르러야 한다는 요구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요구는 '오늘의 나'가 역사적 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망각해야만 충족될 수 있다. '오늘의 나'를 소거하고 탈시간적 보편성의 규준을 가지고 텍스트를 읽는 것은 배진적背進的 소급적遡及的 태도로 과거에 접근하는 것인데, 이는 취사선택한 부분적 과거에 근거하여 오늘을 섣부르게 정당화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떻게 하여도 공정한 재해석이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실천철학이 '사상사적 탐구를 통한 역사성'과 '철학적 관상으로써 얻어지는 보편성'을 통일한 참다운 사상이려면 어제의 발현이라 할 '오늘의 희미한 빛'이 주는 실마리를 잘 살펴봄으로써 사태 자체(사상事象)의 보편적 원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세계사의 진행과정과 미래를 꿰뚫어 알아야 한다는, 그러한 이상(Ideal)이 지배하던 관념론(Idealismus)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그것은 섣부른 목적론적 형이상학으로 간주될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단언을 삼가고 각각의 시대가 드러내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 짐작되는(또는 그것이라고 상정想定한) 것을 살펴보는 데 만족해야만 한다."(126-7)


서문


▶ 쾌락에 빠진 시민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 같은 이들은 현전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초월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당장 여기서 즐거운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불안의 시대는 초월적 이념에 눈을 돌리게 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초월적 이념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차안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피안의 세계와 불변하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절박한 동경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그러한 동경에서 이끌어 낸 이념적 열정으로써 현실을 개조하려 한다. 아테나이 폴리스 쇠퇴기에 등장한 플라톤의 형상形相(eidos) 이론은 이러한 동경과 변혁의 강력한 전조이다. 현세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냥 헛소리이지만, 적어도 초월적 이념을 주창하는 이에게는 그 이념이야말로 진짜이며 생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에게는 세계가 둘이 된다─거짓 세상과 참다운 세계, 땅 위의 세속 세계와 하늘의 신성한 세계." "현세의 삶에서 고통과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 그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초월적 반성을 요청했던 사람이 아주 가끔 등장했던 세계, 그 요청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세계가 고전 시대 전반기의 폴리스라는 역사적 공간이었다."(130-3)


1장 민주정이 시작된 역사적 공간 '폴리스'_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 정의는 정의로운 것의 심판 


"정의(dike)는 법적인 정의이고, 정의로움(dikaiosyne)은 넓은 의미에서의 올바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용어로 '합법성'(legality)과 '올바름'(justice)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체제가 법 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만 되어 있다면 합법성을 획득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현대의 개체주의적 자유 민주정은 내면의 양심과 이념을 사적인 영역에 국한시킴으로써 절차적 합법성을 체제 구축의 필요조건으로서 승인한다. 절차적 합법성에 따라 선출된 권력은 바로 그 합법성으로부터 권위의 '정당성'(legitimacy)까지 부여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정의로움, 즉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은 격렬한 이념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폴리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규정을 준용한다면, 폴리스의 정당성이 올바름에 정초되지 않았을 때, 또는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어떠한 합법성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137-8)


2장 민주정의 절정기, 체제 유지를 위한 패권 싸움_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 《헬레니카》


▶ 전쟁이 시작


"전쟁의 시작에 관한 논의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 투퀴디데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한국어 판은 모두 '원인'으로 옮겨져 있지만 헬라스 어 원문에는 두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prophasis와 aitia이다. aitia는 〈양쪽이 공공연하게 제기한 (···) 원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알고 있고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원인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당시의 헬라스 세계 사람들은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휴전협정 파기와 선전포고의 원인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완결될 수 없다고 보아 alethestate prophasis, 즉 〈진정한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아테나이의 세력이 커진 것에 대한 펠로폰네소스 지역 사람들의 두려움이다." "〈진정한 원인〉은 일종의 내면적인 원인 또는 의도인데, 이것에 실현 도구가 더해지면 〈공공연한 원인〉이 도출된다. 즉 'prophasis+도구=aitia'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투퀴디데스를 비롯한 고대의 기록자들은 prophasis까지 파고들어야 참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prophasis는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심상 지도(mental map) 같은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실현되려면 도구라는 매개를 거쳐야만 한다. 그 도구들이란, 작용하는 토대인 지리적 구조와 현실의 힘(자본, 제해권, 함선 건조기술 등과 같은 인간사를 구성하는 것들)을 통칭한다."(155-7)


▶ 민중이 원하는 대로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exousia)를 가리킨다. 플라톤은 《정체》(Politeia)에서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를 논하면서, 과두 정체에서 〈올바르지 못한 짓을 아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는 경우〉(554c)가 등장하고 이것을 누구나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민주 정체로의 이행이 생겨난다고 본다. 〈그러니까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바뀌는 것은 (···) 그것이 내세우게 된 '좋은 것'에 대한, 즉 최대한 부유해져야만 한다는 데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aplestia) 때문〉(555b)이다." "민주 정체의 시민들은 개인이 가진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가치가 절대로 공격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마비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에도 목격할 수 있는, '미숙한 평등주의'로 변질된 자유이다. 이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은 공허한 자만심에 편승하여 떼를 쓰는 이들이며, 그것에서 정치적 자산을 취하는 이가 나쁜 의미의 '포퓰리스트'이다."(167)


▶ 30인 참주를 축출


"뤼시아스에 따르면 30인 참주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편, 돈을 갈취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7)다. 그들의 주요한 행동 동기는 이익이었다. 그들은 〈불의를 당한 이들〉(52)이나 〈페이라이에우스 측 사람들을 위해서나 부당하게 죽어가고 있던 이들을 위해서 분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56)다. 이들은 명료하게 나쁜 짓을 한 이들(Wrongdoers)이다. 불의를 당한 이들은 저항자들(Resisters)이나 희생자들(Victims)을 가리킨다. 그런데 뤼시아스는 다른 이들도 있었음을 알린다. 〈그 민회에 참석했던 이들 중 훌륭한 시민이었던 이들은, 사전에 준비된 것과 강제된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일부는 그 자리에 머무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적어도 도시에 대해 그 어떤 해악도 표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떠나고 있었습니다〉(75). 침묵을 지키거나 표결에 불참한 사람들은 중립적인 이들(Neutrals) 또는 수동적 방관자들(passive By-stander)이다.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이들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으며, 다름 아닌 그 협조자들에 의해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지금 올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을 말입니다〉(85). 이들은 나쁜 짓에서 편익을 얻을 것이라 기대했던 협조자들(Beneficiaries from Wrongdoing)이다. 저항했던 이들과 희생당한 이들이 한 쪽에 서고, 나쁜 짓을 한 자들과 나쁜 짓에서 편익을 얻은 자들이 한덩어리가 된다."(168-9)


3장 민주정 시대를 체감한 소크라테스_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 기록


"플라톤의 철학적 사색(필로소피아philosophia)은 궁극으로 추상적인 기하학과 초월적 형이상학으로 귀결한다. 이는 서구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전통(metaphysical tradition)의 시원이 되고, 기독교 신학에서도 신플라톤주의로 계수된 것이 접합되어 핵심적인 한 줄기를 이룬다. 이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 개념은 신념 체게가 실제적 삶의 영역에서 작동하고 기여해야 한다고 여기는 인문주의적 전통(humanist tradition)의 원천 중 하나이다. 이 둘의 구분은 플라톤이 《정체》에서 제시한 '선분의 비유'(509d~511e)에 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참된 앎은 의견(doxa)이 아닌 최상위에 있는 사유(noesis)이고 철학자는 그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에게는 의견에서 시작하여 합의에 이르는 것이 합당한 탐구활동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는 철학자는 고독한 진리 탐구자이나 이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는 철학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사람이다." "이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현명한 사람의 궁극적 관심사는 인간사이다. 인간의 일이 이소크라테스의 관심사이고, 소크라테스에 관한 크세노폰의 기록들도 소크라테스가 인간사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던 일들을 집중적으로 담고 있다."(173-5)


4장 체제의 정당성을 묻는 '이념 혁명'_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소한 이들의 행동에서 치명적인 결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이러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고발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진실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잘못된 행동은 바로 이 수치심 결여에서 나온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여러분께서는 저한테서 모든 진실을 들으시게 될 것입니다〉(17b).  소크라테스가 자기 변론 첫머리에 내놓는 핵심은 이처럼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밝히려 하는 진실은 도덕이 포함된 진실이고, 이는 부끄러움과 관련된 것이다. 이 부끄러움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 이들에게 강하게 반론할 때 취하는 주제이다. 부끄러움은 좋은 것에 대한 보편적 욕구와 앎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 공명심이나 명예욕에서 생겨나는 굴욕감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을 고발한 이들에 대한 규정 두 가지, 즉 거짓말을 한다는 것과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자."(74-5)


"앎에 대해서는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하나는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다. 이는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어디까지를 알고 있고 어디부터는 무지한지를 아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무지의 지이다. 마지막은 뭔가 아는 것이 있기는 한데,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상태이다. 소크라테스는 두번째 경우를 선택하겠다고 한 것이다. 무지의 무지가 최악이다. 차라리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 낫다. (무지의 무지는 오만함이다. 무지를 낯설게 느끼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시인과 정치가와 장인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이 사람들은 무지의 무지 상태에 있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 무지를 아는 자,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자와 대립하는 자, 인간을 넘어서는 자가 아닌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있는 자임을 의미할 것이다."(81-2)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아테나이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들 중 일부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열광하였음을 알았다. 그들은 그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며, 그들의 민주 정체는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했었다.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그저 청렴하고 고고한 도덕주의자의 상투적인 지탄이 아니다. 자신이 눈으로 목격한 사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그가 일부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촉구한 것은 혼을 돌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질문을 하고 캐묻고 심문〉(29e)한다. 이것이 그가 행하는 신에 대한 봉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신의 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당대의 사람들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아테나이 사람들 중 일부는 〈혼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결심했던 것이다."(91-2)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영혼을 돌보라고 깨우치는 일을 '개인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올바름을 늘 말할 수 있으려면 특정 당파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 당파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반정치, 정치 혐오가 아니라 불편부당한 진리의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아테나이는 전쟁의 격변 속에서 그리고 패배의 혼란 속에서 정치 체제가 계속 바뀌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정파에 가담하는지는 올바름의 기준이 아니었다. 특정 정파에 가담하는 것은 공인의 입장에서 그 정파에 동조하는 것이어서, 그 정파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주장할 때에도 반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사인의 입장을 고집한 것은 공인으로서의 법적 책임보다 더 근본적인 부끄러움을 짊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치를 혐오한 것도 아니요, 민주정도 참주정도 찬성하거나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올바름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인 입장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92-6)


"아테나이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 혁명과 정치 혁명의 난관을 이겨 내고 마침내 민주 정체를 성취하였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고 시민들은 폴리스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테나이 시민들의 삶은 '쾌락이라는 참주'에게 굴복한 것이다. 민주 정체에서 산다고 해서 곧바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생활양식이 올바름을 지향해야만 '더 많은 이의 더 나은 삶'이라고 하는 민주 정체의 탁월함이 참으로 실현될 것이다. 달리 말해서 민주 정체가 그저 하나의 정치적 의사결정 방식이 아닌, 만민의 평등과 행복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매개로서 완성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은 바로 올바름인 것이다." "어떤 정체에 살고 있는지보다 훨씬 더, 아니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올바름이다. 이 올바름에 대한 철저한 촉구 때문에 미묘한 경계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체제 정당성에 대한 급진적 이념 혁명가가 된다."(101-2)


5장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정치적 지향_플라톤 《메넥세노스》


▶ 나라 체제는 인간들의 생활양식


"나라 체제, 즉 어떤 정치 체제(politeia)에서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양식(trophe)이 규정된다. 정치 체제는 생활양식을 조건 지우고 생활양식은 정치 체제를 조건 지운다. 서로 스며들어서 서로를 적신다. 그런데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다. 나라 체제가 올바르면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올바르다. 나라 체제가 올바르지 못하면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올바르지 못하므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하려면 나라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올바르지 못하면 나라 체제를 올바르게 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사람들이 악해져 있으니 체제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은 정치 체제가 생활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보다는 미약하지만 생활양식도 정치 체제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므로 《정체》에서는─나라와 개인의 올바름이 반드시 상응하지는 않지만─한 나라의 올바름을 먼저 따진 후 한 사람의 올바름을 따지는 것이다. 더 큰 것이기에 따지기 쉽기도 하지만, 나라가 올바르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도덕주의적 처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주의 처방은 그저 사람이 올바르면 된다는 처방이다. 시민들의 생활양식이 지혜롭고 사려 깊다면 그러한 것이 정치 체제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메넥세노스》에서 제시된 연설은 생활양식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정치 체제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해서 보여 줌과 동시에 두 영역의 미묘한 경계선도 보여 준다. 이 경계선, 즉 사인이 공적인 일에 개입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가 역사다."(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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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회학 - 개정판
오경환 지음 / 서광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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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


"우리는 종교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고 여타의 사회 현상들과 지속적이며 상호적인 관련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종교의 본질이 사회적·경제적 현상의 부산물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종교에는 사회적인 측면이 있고, 그 사회적인 측면은 다른 사회 현상들과 지속적인 상호 관련성을 유지한다는 입장을 취할 것이다." "종교 사회학은 종교를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는 어떤 것이나 가치가 있다거나 종교는 전부 거짓이라는 독단적이고 평가적인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특정 종교는 진실한 종교이고 다른 종교는 거짓 종교라는 판결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종교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학은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학은 어떤 종교이든지 사회적 사실 혹은 현상으로 간주하면서 종교와 여타의 사회 현상과의 관련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13-4)


제2장 종교의 사회학적 정의


"사회학에서 최근에 사용되는 종교 정의는 현상학적(phenomenological)인 접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종교를 어떤 다른 것의 표현으로 보려는 환원주의적 경향을 지양하고 종교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것 자체를 그대로 가지고 만들어지는 정의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의 사회학적 정의는 종교의 본질을 지적하는 것보다는 종교의 경계선을 지적하는 데 일차적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사회학은 종교를 포함하는 많은 사회현상들 가운데서 종교와 종교 아닌 것들을 구분하는 적당한 기준점이나 경계선을 지적하는 것이 종교 정의의 목표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사회학적 정의는 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고, 또한 연구에 필요하여 임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경계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정의들은 연구 작업을 위한 임시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도 아니고 영구적이고 절대적인 정의도 아니다."(41-2)


# 종교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종교 정의

1. 실체적(substantive) 정의 : 〈성스러운 것the sacred〉(뒤르켐), 〈거룩한 것the holy〉(오토)에 대한 체험, 이러한 경험들이 외적으로 표현되어 세 가지 양식─이론적 표상인 교리, 실천적 표상인 의례, 사회적 표상인 공동체─으로 나타나는 것

2. 기능적(functional) 정의 : 종교적 믿음과 실천은 그 집단의 통합에 기여(뒤르켐), 종교 의식은 사회적 가치와 규범에 관한 생생한 느낌을 참여자의 정신 안에 재생산함으로써 사회 통합에 기여(래드클리프-브라운), 인간이 직면하는 궁극적 질문들─죽음, 고통, 악의 문제 등─에 대한 의미 부여·개념화(베버)


제3장 개인의 종교성의 형성


"사회학은 종교의 사회적 측면에 많은 관심을 두기 때문에, 종교 집단과 종교의 사회적 표상을 강조한다. 그러나 종교 단체에 속해 있는 개인들은 동시에 사회적 행동자, 즉 나름대로의 동기와 의미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각 신자들의 태도, 신념, 행동은 종교 단체에 의하여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고 보이지만, 종교 집단의 믿음과 신자 개인들의 믿음 사이에 언제나 뚜렷하고 결정적인 일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다양한 종교 단체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종교에 속해 있다 해도 신자 개인들의 종교성(religiosity)은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는 것이다." "종교는 어떤 집단의 소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개인의 소유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종교가 사회 현상에 어떤 영향을 행사하는 경우에, 개인의 종교성은 중요한 변수로서 작용한다. 종교가 종교성이 약한 개인들을 통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73-4)


# 개인의 종교성의 형성 과정

1. 내재화 : 어린아이가 출생 이후로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종교적 개념과 실천을 배워서─비공식적으로는 개인적 접촉을 통해, 공식적으로는 강의나 설교를 통해─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이때 기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부모, 형제, 친구 같은)들과의 상호 관계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여부가 결정적 영향

2. 개종(conversion) : 해당 종교의 사상적 성격, 개종자의 인격적 특성, 경제·사회적 또는 신체적 박탈감, 기성 신자와의 친밀한 상호 작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존의 종교적 믿음 체계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종교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여 그 단체에 대한 소속감을 발전시키는 경우


제4장 개인적 종교성의 측정과 사회 조사


# 글러크와 스타크의 종교성 측정

1. 이념적(ideological) 차원 : 신도들이 교리를 얼마나 깊게 수용하고 있는지 여부

2. 의례적(ritualistic) 차원 : 종교 예식에 얼마나 참여하고 실천하는지 여부

3. 경험적(experiential) 차원 : 신도들이 개인적 종교 경험을 얼마나 하는지 여부

4. 지성적(intellectual) 차원 : 자신의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지 여부

5. 결과적(consequential) 차원 : 종교적 믿음, 의례, 경험, 지식이 신도의 세속 생활에 미치는 정도


"로버트슨은 사회의 종교성이 그 구성원들의 종교성을 종합함으로써 측정될 수 있다는 글러크의 주장에 반대하며, 그러한 견해는 개인주의적 착각이라고 비난한다. 마치 사회의 민주주의성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성향의 종합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듯이, 사회의 종교성을 시민들의 종교성의 종합과 동일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종교 인구가 많다고 해서 사회적 종교성이 높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문화의 종교성을 개인적 종교성의 종합과 동일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술과 언어의 종교적 내용이 그것의 좋은 지표라고 본다. 그래서 로버트슨은 예술과 문학에 종교적 내용이 많을수록,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가 많이 참작될수록 문화적 종교성은 높은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세속화는 종교성의 반대되는 현상이라고 볼 때, 종교성의 이러한 개념은 세속화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133-4)


제5장 종교 진화론 : 종교와 과학


"19세기에 이미 원시 사회의 여러 현상과 종교에 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진화론적 사고의 경향을 갖기 시작하던 서구인들에게 1858년에 출판된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은 커다란 확신을 심어 주었다." "종교 진화론자들은 자료에 근거해서 종교란 원래부터 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원시인(Primitive)의 여러 가지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서 발생한 것이라고 보았고, 종교는 그 본질상 〈미숙한 과학〉이며 과학의 초기 형태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종교는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원시인의 노력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도 훈련되지 않은 원시인의 사고와 이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대수롭게 생각할 가치가 없는 미숙한 과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진실한 과학 지식이 발전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약화되고 결국에는 소멸할 운명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면, 종교 진화론자들은 이전의 세속화 이론을 보강하고, 왜 종교가 과학에 의해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더욱 이론화했다고 보인다."(136-7)


# 19세기의 종교 진화론자들

1. 허버트 스펜서 : 조상 숭배가 가장 동질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종교이며, 영(ghosts)에 대한 믿음이 영혼이나 신에 대한 믿음에 앞서 발생했다. 불가해한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점차 신의 개념이 탄생했다.

2. 에드워드 타일러 : 문명 사회의 종교는 원시 사회에서 전수된 문화적 잔재로서, 습성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 문화적 습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대의 종교는 별다른 의미나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다.

3. 제임스 프레이저 : 인간의 지적 발전은 주술(일종의 거짓 과학이며,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종교(탈주술화 과정을 거쳐 신과 같은 높은 존재에게 호소하고 기원)로, 다시 종교에서 과학으로 단계적으로 나아간다.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고, 과학에 의하여 종교는 약화되고 나아가 소멸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응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신학과 사회학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이것은 전통적인 종교의 이론적 표상 혹은 믿음 체계가 자연과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 체계들이 현대인의 상황에도 적합성을 지니는 실존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종교의 믿음 체계에 신화(myth)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과학이 사용하는 언어와 종교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것이며, 두 개의 언어는 실재(reality)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이지만 다른 실재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과학이 탐구하는 실재가 아니라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어떤 역사적 사건이 종교 이야기 안에 등장하여 묘사되고 있어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다루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162)


"종교는 일종의 가짜 지질학이나 역사학이나 물리학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의 신앙 체계는 사람들이 가졌던 총제적 경험에 대한 진술이다. 종교는 경험된 총체(felt-whole),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들을 포함하며 인생과 사건들의 의미를 제공하는 하나의 맥락의 구실을 하는 어떤 전체를 묘사하고 상기시키는 상징 체계(symbol system)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렇다고 종교의 신앙 체계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연결시키고 그것들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궁극적 질서에 대한 종교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종교는 인생의 여러 사건과 경험에 대하여 의미를 제공하는 보편적 질서를 표현하는 상징 체계인 까닭에, 종교는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다루어지고 발견되는 실재와는 판이한 특유의 실재(reality suigeneris)를 묘사하는 것이다. 종교의 실재와 과학의 실재는 다른 것이어서 서로 대치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것이지만, 두 가지 모두 진실이다."(165)


제6장 마르크스의 종교 이론


"마르크스는 신이란 인간의 (절대성을 향한) 열망이 투사(projection)된 것에 불과하다는 포이에르바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로 포이에르바하는 아직도 인간의 본성을 다룰 때 개인 안에 있는 본성을 생각하는 반면에 인간의 사회적 맥락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조건을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보고, 인간을 논의하자면 반드시 사회적 현실, 물질적 조건, 노동의 역할, 생산 조건 등을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두번째 비판은 포이에르바하가 아직도 인간을 역사와는 분리해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헤겔과는 달리 그는 감각적이며 육체를 가진 구체적 인간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인간을 역사나 세계와는 동떨어진 보편적 종(species)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역사적 과정 안에서 그리고 특수한 역사적 시대 배경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173)


"마르크스는 불의하고 비인간적이며 냉혹한 사회, 인간에게 사회적 소외와 고통을 안겨 주는 사회에서 종교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사회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소외 가운데서 고통스럽게 사는 인간들이 자신의 소망을 투사하고 종교를 만든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진정한 고통에 대한 반항적이고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라고 말하면서 소외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박탈에 대하여 말한다." "사회 계층에 따라서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에 대한 의미와 경험은 다르고 그들의 고통의 정도 또한 다르다. 마르크스는 그 점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자주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박탈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윤택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의 중심부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보다는 변두리로 밀려나서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은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보는 것이다."(174-6)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종교가 발생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하여 설명한다. 분업의 결과로 인하여 생산 수단은 개인들의 사유 재산이 되는 까닭에, 노동자들은 노동 이외에 상품으로서 제공할 것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임금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임금이 되지 못한다.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이 잉여 가치, 즉 임금과 상품의 교환 가치의 차액을 떼어먹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자본이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는데, 노동자의 생산품은 노동자에게서 분리되어 소외된 상품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신비스럽게 가치가 상승하여 물신(物神, fetish)으로 변한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인간의 손의 산물이 물신의 특성을 갖게 되듯이, 인간 정신의 산물, 종교와 하느님이 신비스러운 특성을 얻어서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는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와 노동자의 고립을 초래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매우 부합하는 종교 형태라고 보았다."(178-9)


"마르크스는 종교란 인간 소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에서 얻는 행복은 환상적 행복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종교에서 어떤 행복을 얻는다 해도, 그들은 환상에 빠져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종교는 실제로 있는 진정한 고통의 상징이고 표현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종교를 없애자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찾자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종교와 함께 공존하는 그 현실은 틀림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소망을 투사하도록 강요할 만큼 고통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현실을 제거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출현시키는 그 현실을 제거하지 않고는 의미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종교 비판은 사회 비판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래서 종교 비판 다음에는 정치 비판이 따라야 하는 것이며 또한 혁명의 실천이 그 뒤를 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과업은, 진실이 아닌 세계가 사라지자마자 이 세계의 진실을 건설하는 것이다.〉"(180)


제7장 자본주의 발전과 종교에 대한 베버의 관점


"마르크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종교 연구가들이 원시 사회의 종교를 연구하던 시대에, 베버는 서양의 천주교와 개신교, 중동의 이슬람교와 고대 유태교, 그리고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 중국의 유교와 도교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 마르크스를 포함해서 당시의 학자들이 종교의 본성이나 기원에 많은 관심을 둔 데 비하여, 베버는 종교의 기원보다는 그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관심을 두었다. 종교 사회학에서 베버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역사 발전에 있어 종교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그는 17세기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동서양의 상이한 역사 발전에 세계 종교들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논제를 검토하기 위하여 역사적 분석을 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버는 동양의 힌두교, 불교, 유교보다는 이슬람교, 유태교, 천주교, 특히 개신교, 다양한 개신교 종파 가운데서도 칼빈의 사상(Calvinism)이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 활동의 합리화를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201)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론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가 사상의 요인을 무시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관념이 역사 안에서 효과적인 세력이 되는 양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역사의 변천을 설명하면서 관념과 사상의 역할을 전혀 무시할 뿐 아니라 관념을 단지 사회경제적 조건들의 반영이나 부수 현상으로만 간주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과 사상의 역할을 철저하게 도외시하는 역사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는 베버의 견해를 말해 준다. 베버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조건들이 종교를 포함해서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따라서 사회경제적 구조와 조건들의 변화에 의하여 종교 사상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사상에 대한 물질적 조건의 영향만을 주장하고 물질적 조건에 대한 사상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반대하는 것이다."(204)


"마르크스가 자본의 원시 축적과 혁명을 중요시한 것과 달리, 베버는 원시 축적에 관하여 별로 논의하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서나 충분한 자본의 축적은 있었으므로, 자본주의 발전과 산업화의 출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특별한 방법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자본 축적이 아니고 오히려 합리적 경제 활동이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적 개혁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베버는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중세 도시들의 반란은 자본가들이 주도한 것이며, 이러한 혁명은 비합리적이고 약탈적인 귀족들의 법률을 자본주의 발전에 적합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법률로 대치했다고 본다. 이러한 혁명은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의 재산을 탈취하는 혁명이 아니라, 재산에 관련된 제도의 개혁을 가져오는 혁명이다. 그래서 베버는 경제 활동의 계산 가능성과 예측성을 높여 주는 법률 체제를 도입하는 정치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필요했다고 보았다."(232-3)


제8장 종교에 대한 뒤르켐의 시각


"뒤르켐은 당시에 혼란에 빠져 있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신과 이념을 옹호하며 그것의 학문적 토대를 건설하려는 데 정력을 쏟은 이론가였다고 파악할 수도 있다. 그 공화국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수렴하여 그것을 제도화하려는 데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르켐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적·경제적 질서의 중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편이었다. 뒤르켐의 주된 학문적 관심은 전통 사회들이 합리화, 산업화, 그리고 개인주의로 말미암아 혼란은 겪으며 비틀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진실된 토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인간들의 행동에 질서와 틀을 마련해 주는 사회적 요소들인 종교, 법률, 도덕, 그리고 교육이 뒤르켐의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도 뒤르켐의 중심적 질문은 자유와 권위, 합리적 선택과 전통의 준수, 개인의 자율과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236)


"뒤르켐은 〈인간의 종교적 본성, 다시 말하면 인간성의 한 가지 본질적이고 영구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를 종교 연구의 목표로 정하고 있다. 그는 이 말을 통해서 종교란 인간의 본질적이고 영구적인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일시적인 측면에 불과하다고 보는 여러 사람들의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종교 연구의 자세는 공정하고 동정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학의 하나의 기본적 가정은 인간의 제도가 착오와 거짓의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뒤르켐은 원시 사회의 종교도 실재(reality)에 관련된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확신 아래 다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뒤르켐은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기이한 의례와 가장 이상한 신화라도, 인간의 어떤 요구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삶의 어떤 측면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는 거짓된 종교란 없고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진실하며, 모든 종교가 그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 실존의 주어진 조건에 응답한다고 보았다."(238)


"뒤르켐에 의하면 종교 현상은 두 개의 근본적 범주, 즉 믿음과 의례로 짜여져 있다. 전자는 신념과 견해, 표상(representation)들이고, 후자는 일정한 행동의 양식이다." "이전의 학자들, 특히 종교 진화론자들이나 마르크스, 아마도 베버까지도 종교란 어떤 믿음 체계라고 보면서 종교 의례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늘날 의례가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견해가 종교 연구자들 사이에 보편화된 것은 뒤르켐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울러 종교 정의에는 주술과 종교를 구분해 주는 종교의 다른 요소가 또하나 포함되어야 한다. 뒤르켐은 그것이 집단이라고 보았다.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과 단체로 만드는 경향을 가진다." "뒤르켐의 정의에 따르면, 〈종교는 성스러운 것─따로 보관되고 금지된 것─에 대한 믿음과 실천의 통일된 체계이다. 그 믿음과 실천은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교회라고도 불리는 하나의 도덕적 공동체로 규합시킨다.〉"(244-6)


"뒤르켐은 성스러움이 물체들의 내재적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스러운 것들은 결국 모두 하나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종교 진화론의 문제는 성스러운 것들이 상징이라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인간이나 자연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특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다른 원천에서 받아야 한다. 그래서 뒤르켐은 종교 경험, 즉 성스러움의 근원을 개인이나 물리적 세계가 아닌 어떤 다른 실재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의 원천으로는 〈개인과 물리적 세계를 떠나서, 틀림없이 어떤 다른 실재가 있다.〉 뒤르켐에게 그 실재는 바로 사회이다." "뒤르켐은 사회란 수많은 개인들,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토대,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그들의 움직임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고와 관념이라고 보았다." "종교는 현실의 불의, 죄악, 고통, 죽음뿐 아니라 현실의 사회 안에서 실현되지 않은 이상과 가치들도 표현하는 것이다."(248-52)


# 뒤르켐은 사회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뒤르켐은 과학이 발전한 다음에라도 종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두 가지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종교의 신앙 체계가 쓸모없는 것이 되더라도 인간은 아직도 집합적 감정을 일으키고 행동을 향하여 밀어 줄 집회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에는 언제나 도덕, 즉 집합적 감정과 관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제의적 집회를 통해서만 지탱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있어서 과학이 결코 종교를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종교 없이는 사회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과학은 느리게 발전할 뿐 아니라 모든 문제를 풀지도 못하고 언제나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당장 행동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을 기다릴 수가 없다. 뒤르켐에 의하면 종교 사상은 과학이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 그리고 나아가서 과학이 영영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해답을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신앙 체계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262)


제9장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적 종교 이론


"프로이트는 종교 역사에 관해서 진화론자들이 제시한 자료를 토대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기보다는, 이미 설정되어 있었던 자신의 종교 이론을 보강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료를 이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07년과 1910년의 논문에서 발견되듯이, 그는 벌써부터 에디푸스 컴플렉스와 그로 인한 노이로제가 종교의 토대라는 견해를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의 종교 이론은 그의 정신 분석학 이론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 분석학은 실제로 세 가지의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정신 분열증의 임상 치료법, 인성(人性) 이론, 그리고 도덕성, 집단 생활, 사회, 역사, 예술 및 종교를 포함하는 문화 이론이다. 종교에 관한 모든 설명은 정신 분석학적 방법에서 출발하며, 두 개의 개념, 즉 무의식과 어린 시절이 그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의도적·의식적 생활은 언제나 무의식적 감정, 의도, 그리고 지향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279-80)


"종교 관념이 받아들여지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긴급한 소망에 뿌리를 박고 있는 환상이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종교 관념은 〈경험의 침전물이나 사색의 결정체가 아니라, 그것들은 환상이고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긴급한 소망의 충족이다. 그 힘의 비결은 그 소망의 힘 안에 들어 있다.〉 그 소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린 아이 같은 무력한 인간이 인생의 위험에서 보호받고, 이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며, 후세에서도 지상의 생활을 연장하고, 우주의 기원과 아울러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이해하고 싶은 소망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종교 관념들이 오류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실증적 증거를 통해서 입증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부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종교 관념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지 혹은 반대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289-91)


"보통 유아기의 신경성 질환의 대부분은 성장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극복되고, 나머지는 나중에 정신 분석학적 치료를 통해서 제거될 수 있다. 인류 전체가 그 발전 단계에서는 비슷한 신경성 질환에 처할 수 있고, 무지하고 지성이 약하기 때문에 본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종교에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성숙을 포기하고 미숙하고 유아기적인 상태에 머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무엇을 제안하는가? 개인이나 인류는 영원히 어린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은 발전의 유아적 단계에 지나지 않는 종교를 떠나야 한다. 인간은 성장해야 하고, 자신의 자원과 과학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의 현실을 지배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의 운명에 대해서는 체념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종교적 신앙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지성과 과학, 그리고 실증적 검증을 통해서 얻어진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장래성이 있다고 확신했다."(294-6)


"프로이트는 종교 진화론자들, 마르크스, 그리고 뒤르켐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팽배했던 실증주의 철학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실증적 증거를 통해서 입증되지 않는 종교의 가르침과 내용의 진실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종교의 진실성을 부인하고 종교가 말하는 초월적 세계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 사회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종교를 종교 아닌 다른 어떤 현실의 상징이나 표현으로 환원시키려는 이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적 생활 밑바닥에는 거대한 무의식이 있고, 이것이 의식적 정신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프로이트의 귀중한 공헌이다." "이 무의식은 겉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는 흔히 상징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상징들은 허황된 어떤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숨겨진 중대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표출하는 상징들 중 특히 꿈과 종교 관념을 중요시한다."(309-10)


제10장 종교와 사회 변화 : 종교와 정치


"종교와 사회 변화와 관련해서 볼 때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종교 조직체가 분화되어서 종교가 비교적 독립적인 조직체를 형성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종교의 분화는 종교가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조직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제의와 신앙 체계에도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종교가 분화된 시대에 살고 있으나, 원시 사회에서는 종교 사상, 예식, 조직체가 다른 사회적 사상이나 예식, 조직체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로 한데 엉켜서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의 분화가 발생한 것은, 그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지역에서도 3000여 년을 거의 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에서는 최근까지도 종교는 분화되지 못했었다. 그리고 종교 조직체가 분화되지 않고 다른 조직체와 혼합되어 존재하는 경우에 그것은 사회학에서 확산 종교라고 불리고, 분화된 종교는 흔히 제도 종교라고 불린다."(324-5)


"종교 조직체가 분화한다는 것은 우선 종교 지도자의 역할이 독립되고 신도의 역할도 따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러면 가장이나 추장이 더 이상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겸임하지 않고 대신에 종교 전문가가 출현하고, 동시에 더 이상 단순히 어떤 부족의 성원이라 해서 누구나 자동적으로 그 부족 종교의 신도가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되면 지도자와 신도들은 종교 생활만을 목적으로 삼는 종교 조직체를 형성한다. 종교의 분화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고, 그 다음이 불교와 이슬람교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와 힌두교의 분화는 아직도 미약한 정도이다. 종교가 분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부족 혹은 국가와 같은 사회 조직들이 종교 조직체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다른 비종교적 조직체에 맡겨졌던 종교 기능을 분화된 종교 조직체가 전담하게 되기 때문에 종교적 기능이 좀더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분화는 종교의 진보나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325)


"그렇다면 종교가 사회의 기존 체제를 강화·유지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회 제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정당성을 인정하며 협력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제도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타당하고 정당하다고 말하는 해명과 설명을 필요로 하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설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 제도의 정당화에는 격언, 속담, 현인의 말, 전설 등이 이용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종교는 제도의 정당화와 합법화를 위해서 가장 널리 사용된 수단이었다. 그것은 종교가 사회 제도를 매우 효과적으로 정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종교가 여러 가지 제도를 영원 불멸의 빛 아래서 바라보며, 경험적 사회 제도를 궁극적 실재나 세계와 연결시키는 데에서 발생한다. 종교는 사회 제도를 성스럽고 우주적인 세계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역사 안에서 발생한 제도는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것으로 인식된다."(330-1)


"한편, 세계 종교와 함께 비로소 진정한 분화된 종교 혹은 제도 종교가 출현하였다. 세계 종교의 출현, 그리고 종교의 조직상의 분화는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는 문제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오고, 사회적 갈등과 긴장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며, 따라서 종교가 사회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은 현저하게 증대한다. 이제 정치 엘리트는 종교의 지도권을 독점할 수가 없고, 기존 체제의 정당화는 보장된 것이기보다는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 사이의 힘의 미묘한 균형에 의해 좌우된다. 고대 종교의 유일한 사회적 기능은 기존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제도 종교의 사회적 역할은 상반된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이 특색이다. 제도 종교는 위정자를 옹호할 수 있는가 하면, 비판하고 반대할 힘도 갖게 된다. 이것은 종교가 어떤 경우에는 사회 변화를 방해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사회 변화를 촉진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화된 종교의 출현은 언제나 위정자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332-3)


"위정자들은 종교를 예속시키고 종교의 비판적 자세를 예방할 목적으로 매우 다양한 법률적 내지 정치적 전략을 사용하였다. 서양에서 흔히 사용된 것은 정교 협약(concordat)이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경우에 따라 변했지만, 대체로 정부가 특정 종교를 지원하고 보호할 의무와 아울러 간섭할 권리를 포함할 뿐 아니라, 관련된 종교가 정부에 대하여 수행할 의무와 간여할 권리들을 담고 있었다. 위정자는 그것을 통해 종교 지도자의 선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동시에 정당화의 획득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에, 종교는 정치 체제를 정당화해 주는 대가로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였다. 중국 청나라에서는 정부는 특히 불교와 도교가 정치 질서를 위협하는 활동을 하거나 위험한 종교 사상을 퍼뜨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많은 법률적 조치를 취했다. 예를 들면 정부는 상제(上帝)에게 제사드리는 일을 황제에게만 국한시키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336-7)


제11장 종교 조직체의 종류, 변화와 갈등


# 종교 조직체의 종류

1. 종파(sect) : 사회적 제도나 관습을 비판하는 예언자를 중심으로 모여든 열성적인 신도들로 구성된 집단

2. 교회(church) : 종파의 지도자가 가진 카리스마가 일상화(routinization)의 과정을 거쳐 발생하는 집단

3. 교단(denomination) : 교회보다 한층 더 나아가 사회의 기존 가치와 제도를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집단

4. 제의 운동(cult) : 기성 종교의 전통뿐만 아니라 사회적 전통과도 극단적으로 단절한 이질적인 종파 운동


제12장 현대 사회와 세속화 과정


# 세속화와 세속주의(secularism)

1. 세속화 : 종교가 사회 여러 분야에 대한 통제를 상실해가는 과정, 세속적인 목표들이 성스러운 목표를 지향하는 의례와 행위들을 대치해 가는 과정들

2. 세속주의 : 모든 형태의 성스러운 세계를 부인하고 개인의 윤리와 사회 조직의 기반으로서 비종교적인 또는 반종교적인 원리를 주장하는 사상 체계


"피터 버거는 세속화에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보았다. 사회 구조적·문화적·개인의 의식적 세속화가 그것이다. 사회 구조적 세속화에 대하여 그는, 〈교회의 통제와 영향 아래 있던 영역으로부터 그리스도교회가 퇴거하는 데서, 즉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고 교회령을 몰수하고, 교회의 권위로부터 교육이 해방되는 데서 세속화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문화와 상징 체계의 세속화는 사회 구조적 세속화 이상을 의미한다. 문화의 세속화는 〈예술, 철학, 문학의 영역에서 종교적 내용이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이 세계에 대한 자율적이고 철저하게 세속적인 시각으로서 나타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이상의 두 가지 차원 외에 주관적이고 의식적인 세속화가 있다. 개인 의식 차원의 세속화는 개인들의 종교성이 약화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근대의 서구 사회가 종교적 해석을 빌리지 않고서도 세계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개인들의 수를 증가시켜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397)


# 여기에 네 번째로 제도 종교의 세속화─내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에서 현세적인 가치로 무게중심 이동, 신도수와 참여율의 감소, 종교의 신앙 진술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개인적 자율성의 증가─를 추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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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상의 역사 - 마키아벨리에서 롤스까지
사카모토 다쓰야 지음, 최연희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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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사회사상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사회(society)'의 의미는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 면면히 구축되어온 인간의 사회 일반을 뜻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회'는 실질적으로는 근대사회, 특히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시작되는 유럽 사회와 그 연장선상에서 성립된 북미 대륙 사회를 가리킨다. 즉, 거기에는 같은 유럽이라 해도 고대·중세 사회는 포함되지 않으며 같은 근대라 해도 유럽과 북미가 아닌 방대한 영역들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의 '사회'는 첫째로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합리적 국가'를 가지는 사회를 말하며, 둘째로는 '시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말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사회'는 인류역사상 근대 이후의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책에서 펼쳐질 사회사상의 역사는 근대국가와 시장경제의 관계를 원리적으로 고찰한 사상의 역사이며, 각 시대에 각 지역에 살았던 사상가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출현한 국가 및 시장에 관한 문제들과 씨름한 역사이다."(12-3)


"이 책에서는 사상가들의 사상이 주로 두 가지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본다. 첫째는 사상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문맥'이며 둘째는 각 사상가가 과거로부터 계승한 '사상의 문맥'이다." "각 시대의 사회사상의 단면을 살펴보면, 같은 시대의 문맥 내부에서 사고하면서도 다른 사상 전통에 뿌리내린 이질적 사회사상의 경우가 있고, 다른 시대에 살며 전혀 다른 문제와 씨름한 듯 보이지만 같은 사상 전통에 뿌리내린 동질적 사회사상의 경우도 있다. 전자의 예로서는 18세기 유럽에 살며 문명사회의 위기라 일컬어진 동질의 문제와 씨름한 스미스와 루소, 19세기 유럽에 살며 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의 발흥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밀과 마르크스의 경우가 전형적이다. 후자의 예로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혹은 이성주의라는 같은 사상 전통 속에 있으면서도 18세기 유럽과 20세기 영국 및 미국이라는 다른 세대와 사회의 문맥 속에서 사고했던 흄과 하이에크, 칸트와 롤스의 조합을 들 수 있을 것이다."(21-2)


"이 책은 근대 이후 사회사상의 전개 과정을 '자유'와 '공공'이라는 두 개념의 관계를 통해 추적한다. 그것은 근대국가와 시장경제의 관련을 둘러싼 사상가들의 사색의 궤적을 탐구하는 작업의 최종 목적이기도 하다. … 근대 사회사상 속에서도 '사私'의 입장을 관철시킨 듯한 사상가의 계열(홉스, 스미스, 벤담 등)과 '공公'의 사상 계열(루소, 헤겔, 마르크스 등)은 언뜻 보아도 확연히 구별된다. 그리고 벌린의 『자유론』에 나오는 '자유의 두 개념'의 구별에 관한 유명한 논의(위의 두 계열에 대응시켜 말하면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별)는 거의 이 구별에 대응한다. 그러나 벌린 자신이 이 구별의 엄밀한 적용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듯이 사회사상사에서 '사'의 사상가와 '공'의 사상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 사회사상의 전체를 되짚는 시도이며, 오늘날까지 '사'의 사상가로 여겨져온 이들에게 '공'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려는 시도이다."(26-9)


제1장 마키아벨리의 사회사상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농업 생산력 증가와 원격지 무역의 출현, 지대의 금납화로 농노의 신분전환 촉진(자치도시의 시민, 독립 자영농), 영주권력의 몰락과 국왕 권력의 강화, '단일한 영역을 단일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선구적 형태들 등장

2. 사상의 문맥 : 르네상스의 전성기로서, '한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근대국가 사상 출현, 새로운 학문 기관인 '대학'에서 인문주의 교양교육 실시, 그리스·로마 고전 연구를 바탕으로 당대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정치가와 관료를 양성하는 기반 구축


"마키아벨리는 키케로의 사고방식을 계승해 자유로운 시민이 공통의 룰(법)에 기초해서 서로 결합해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공화제에 의한 '법의 지배'라고 생각했다. '법의 지배'는 군주제(일인에 의한 지배)로도 귀족제(소수자에 의한 지배)·민주제(다수자에 의한 지배)로도 실현될 수 있지만, 군주제는 개인의 재능이나 이해관계에 좌우되기 때문에 무엇보다 공화정체(귀족제·민주제)에서야 진정한 '법의 지배'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그 기본적 견해였다. 그의 과제는 이 고전적 공화주의 사상을 근대사회의 현실(시장경제와 근대국가의 출현)에 들어맞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의 공통된 주제가 바로 자유로운 국가의 조건으로서의 '법의 지배' 실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군주론』은 '법의 지배'를 주체적으로 담당하는 정치 지도자의 '덕(비르투)'을 그린 인간론이며, 『로마사 논고』는 '법의 지배'를 객관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기구론·제도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45-6)


#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법의 지배'는 훗날 로크나 루소의 그것과 같은 정밀한 이론이 아니라 위정자가 인민을 통치·지배하는 기술이라는 소박한 성격을 지닌다. 


"『로마사 논고』에서 다루는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공화국에서도 탁월한 지도자의 '덕'은 불가결하며 지도자는 법률과 제도의 형식적 해석과 운용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적절한 판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공화국을 떠받치는 것은 탁월한 지도자의 덕만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국민 대중의 덕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리비우스를 비롯한 〈모든 역사가들〉의 민중관을 비판하고 〈가령 법률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군주와 법률에 구속되는 인민을 비교해보면 군주보다 오히려 인민에게서 보다 많은 덕(비르투)을 찾아볼 수 있다〉(제1권 58장)고 말한다. 그는 민중을 이성을 결여한 동물적 욕망에 휘둘리는 존재로 보는 전통적 우민관을 거부하고 민중을 군주 못지않게 '법의 지배'에 복종할 수 있는 존재로서 새로이 파악한다. 이것이야말로 공화국에서의 국민의 '덕'이며, 현명한 지도자의 덕은 국민의 덕과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그 나라의 '법의 지배'를 확고하게 한다."(51)


"마키아벨리의 공화국 구상은 그 내부에 중대한 균열을 배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근대적 개인이라는 인간상과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최우선시하는 정치가·국민의 '덕'의 모순이며, 둘째로는 그러한 '덕'과 당시 출현중이던 시장경제의 모순이었다." "그가 이러한 모순과 대립을 자각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그려낸 자기 이익을 대담하게 추구하는 인간은 군주든 일반 국민이든 사치나 부의 향수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긍정하는 자기 이익의 추구는, 그가 공화국의 조건으로서 '청빈'을 옹호한 것이 상징하듯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공공'의 선(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적 인간에 의한 권력과 명예의 추구였다. 따라서 그는 중세 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던 근대적 인간의 모습을, 권력과 명예의 추구라는 목적을 위해 합리적 수단을 냉철히 계산하여 추구하는 정치 지도자(군주)를 모델로 삼아 정식화했던 것이다."(55-6)


제2장 종교개혁의 사회사상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종교개혁은 유대교·그리스도교적 고대 세계로의 회귀를 통해 봉건사회의 지배 구조를 타파하려는 운동으로 귀결, 평범한 농민, 상인, 직인 같은 '직업인'의 광범위한 운동에 불을 지펴 르네상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학적 형성력'을 가짐

2. 사상의 문맥 : 절대왕정 확립이 영국보다도 뒤늦은 유럽 대륙에서 모어의 유토피어보다 훨씬 뒤처진 사회적 현실을 마주하여, 성서의 학문적 연구 성과를 대담하게도 로마교회에 대한 정치적 비판에 직결시킴으로써, 인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사상을 전개


"루터는 성직자의 특권과 권위를 부정하고 신앙의 자유에 기반한 만인평등 사상을 내세웠다. 이때 루터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내면의 자유이며 그것은 외면적 세계에서의 부자유와 일체를 이룬다. 외면적 부자유는 첫째로 물리법칙에 지배되는 자연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부자유를 의미하며 둘째로는 현실 사회의 부자유를 의미하므로 루터의 사상에는 전통적 사회질서를 바꿀 수 없다고 보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경향이 불가피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루터는 신앙에 의해 자유로워진 영혼은 곧장 육체를 부린 사회적 실천으로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식이나 근행(勤行) 등과 함께 세속적 직업의 실천인 '노동'을 중시한다. 여기서의 '노동'은 생활의 양식을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니며 신에게 의로움으로 여겨지기(구원받기) 위한 활동도 아니다. 사람은 이미 신앙에 의해 의로움을 인정받고 있으므로 그가 종교적 의의를 인정하는 노동은 민중이 스스로의 신앙을 표현하는 활동으로서의 그것이다."(70-1)


"칼뱅 이전의 개혁자들은 세속의 정치 질서에 적극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노력은 로마교회('보이는 교회') 비판과 진정한 그리스도교회('보이지 않는 교회')의 확립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 결과 루터의 경우에는 현존하는 정치 질서에 대한 보수적 태도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와 달리 세속의 국가나 정치기구가 종교개혁 수단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보았던 칼뱅의 경우에는 종교개혁의 이념에 적합한 국가나 교회의 제도 설계가 주된 사상 과제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신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현실의 정치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혁명)의 정당화론을 포함해 전제 지배에 대한 저항권과 혁명권 사상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원천이 된다. 프랑스의 '폭군방벌론자(暴君放伐論者, 모나르코마키)'나 스코틀랜드의 인문주의자 조지 부캐넌을 거쳐 잉글랜드의 존 로크가 쓴 『통치론』(1690)으로 흘러드는 정치적 급진주의의 주요한 원천은 칼뱅주의 정치사상이었다."(76)


"마키아벨리가 개인의 자유와 공화국의 자유를 '덕'이라는 정치적 공공성의 개념으로 결합시키려 했던 것과 달리 루터와 칼뱅은 부패한 국가나 교회의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신의 '은총'과 구원의 '확신'이라는 고독한 내면세계로의 일시적 퇴행을 우선 요구한다. 이것은 신의 절대성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확립하는 방법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귀결로서 '직업'이나 '영리'가 새로운 사회적 의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뱅의 비인간적인 이웃 사랑─'예정설'을 받아들인 신자가 구원의 불안에서 오는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영리 활동에 진력하는 가운데, 고객이나 동업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베푸는 사랑─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굴절된 사회화의 논리이며, 17~18세기 후대의 도덕적 공공성과는 동떨어진 세계이다. 바꿔 말하면 종교적으로 자립하여 가톨릭 지배의 속박에서 해방된 개인들을 다시금 현세적 사회의 결속으로 재결합시키는 데에 종교개혁 이후 사회사상의 과제가 있었다."(77-8)


제3장 고전적 '사회계약' 사상의 전개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30년전쟁 이후 종교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 원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권국가들의 등장, 경제적 권익이 국익의 중심이 되면서 '세력균형' 원칙에 의거하여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합종연횡이 다수 발생

2. 사상의 문맥 : '과학혁명'의 영향 아래, 베이컨은 반복 '실험'과 '일반 명제' 수립을 되풀이하는 '경험'적 학문론을, 데카르트는 감각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며 '이성'적인 학문론을 주창. 그로티우스는 자연법에 기초한 사회계약설의 선구적인 모델 제시


"홉스와 로크가 제기한 사회계약설의 공통 과제는 현실의 사회질서를 일단 논리적으로 해체한 다음 그것이 역사의 특정 단계에 출현한 필연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류 사회의 기원을 역사적 혹은 인류학적 의미에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회와 정부(국가)의 정통성을 원리적으로 되묻는 작업을 의미했다. 이렇게 보면 '사회계약'의 논리에는 현존 정치체제의 권위와 권력을 논리적으로 해체해 그것의 성립 근거와 정통성을 되묻는 비판적·혁명적 측면과, 그렇게 재구성된 현존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보수적 측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극적 요소가 '사회계약'의 논리에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역사상 출현한 '사회계약' 사상의 성격과 역할을 좌우하기도 했다. 홉스가 절대왕정의 지지자로 여겨져 고단한 인생을 보냈던 것과 대조적으로 로크가 명예혁명 체제의 자유의 상징으로서 행복한 인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사회계약'의 논리가 수행한 대조적인 역할 때문이었다."(96)


"홉스가 보기에 전쟁상태를 벗어나 국가(commonwealth)를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라는 정념이다. 이 경우에 국가 주권은 절대적인 것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주권을 수립하는 개인들의 의지가 주권자의 의지와 동일하다는 주권 수립의 논리 자체에 국가 주권의 절대성의 근거가 있다. 사람이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에 반대하기가 불가능한 이상, 그런 무수한 의지가 떠받치는 주권자의 권위와 권력은 절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반면 로크의 '사회계약'은 ①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정치사회 수립을 서로 '동의'하는 '결합 계약'과 ② 정치형태(정체)를 확정하고 특정한 개인 혹은 단체에 개인들의 자연권을 '신탁(trust)'하는 '지배 복종 계약'이라는 두 단계로 나뉜다. 홉스에게 주권자는 사회계약의 주체도 당사자도 아니었지만, 로크의 경우 자연권을 신탁받은 위정자는 계약의 한쪽 당사자로서 국민에게 책임을 지며, 신탁 위반이 있으면 국민에 의해 비판·고발되는 관계에 있다."(100, 107)


"이러한 차이의 배경에는 두 사람이 전제로 하는 사회상의 큰 차이가 있었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가 발달한 문명사회를 선취한 로크의 자연 상태와 영국의 피비린내나는 내전이나 아메리카 신대륙의 미개사회와 오버랩이 된 홉스의 자연 상태는 언뜻 보아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었다. 홉스는 경제 질서를 정치 질서(절대 주권)의 확립을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었지만, 로크는 경제 질서라는 기반 위에서 정치 질서(자유로운 정부)의 형성·확립을 전망했다. 게다가 로크의 경우에 정치와 경제라는 두 질서는 '신의 법'으로서의 '자연법' 논리에 의해 관철된 것이었다. 자연법이 없으면 자연 상태에서의 평화로운 생산 활동은 없으며 이중의 사회계약도, 권력자의 신탁 위반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나 혁명이라는 정치 행동도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로크 사상은 종교개혁 사상의 전통 속에 있었다. 로크의 자연법은 기계적인 에고이즘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존과 양립하는 한에서 각자의 자기보존을 명하는 것이었다."(110-1)


제4장 계몽사상과 문명사회론의 전개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영국의 명예혁명(1688)에서 프랑스혁명(1789)까지의 '계몽의 시기', 당대 유럽 국가들은 정치적 안정과 착실한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좀더 진전된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그 목표는 바로 '문명사회(civil society)'의 실현

2. 사상의 문맥 : 계몽은 절대왕정하의 프랑스에서는 급진적 정치사상으로, 입헌군주제하의 영국에서는 기존 체제의 틀 안에서 자유와 부를 키워드로 한 점진적 개혁의 입장으로, 독일에서는 칸트의 철학이나 레싱의 문학 등에서 관념적·이념적으로 표현


"17세기의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 사상이 그 시대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평화로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정치사회(civil society)'의 이론으로서 전개되었다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기조로 하는 18세기 사회사상은 기본적으로 '문명사회(civilized society)'의 이론으로서 전개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종교'와 '정치'에서의 근본적 대립(가톨릭 대 프로테스탄드, 공화제 대 군주제)을 일단 보류해두고 주된 관심을 '도덕'과 '경제'로 옮겨갔다." "종교·정치에서 도덕·경제로 중심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선악과 옳고 그름의 규준을 묻는 도덕상의 기본 문제나 국부의 본질과 원인을 묻는 경제학의 문제가 정치체제나 종교 신조의 차이를 뛰어넘은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 문제이자 '문명사회'의 기본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계몽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주된 문제는 정치와 종교의 질서에서 상대적으로 독립한 도덕과 경제 질서의 해명이었다."(120)


"정치사회론에서 문명사회론으로 문제가 바뀐 것에 상응하여 인간 본성론에서도 17세기로부터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특히 영국에서 현저한 경향을 보여, 사회사상의 논의의 중심이 '이성(reason)'에서 '정념(passion)' 혹은 '감정(sentiment)'으로 이동했다." "17세기의 이성주의에서 18세기의 정념(감정)주의로의 전환이라는 계몽사상의 큰 흐름은 영국의 섀프츠베리와 네덜란드 출신의 맨더빌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반사회적 정념을 이성이 통제한다는 전통적 도식을 비판하고 '정념'이나 '감정' 자체에서 인간의 사회적 결합의 원리를 발견하려 했다." "두사람은 상이한 사상 계보를 지니면서도 홉스와 로크에게 마지막까지 찾아볼 수 있었던, 이기심의 반사회성이라는 관점에 기초한 사회질서 이론을 넘어 이기적 정념 자체가 사회화됨으로써 문명사회의 거대한 시스템이 성립되는 메커니즘을 탐구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이 새로운 사상의 전개는 18세기 문명사회론의 기초가 된다."(121-3)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들에게 자유는 사회계약 사상이 자연 상태의 가설을 통해 이상화한 것과 같은 원리적·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장하는 사회적·경제적 자유였다. 이러한 현실적 자유를 정당화하려고 한 선구가 맨더빌의 '사악은 공익'이라는 사상이었다." "맨더빌 본인은 개인들의 이기적 정념을 국부 증대와 공공성 확대로 절묘하게 이끄는 정치가나 입법가의 존재를 대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그는 단순한 자유방임론자도 자생적 질서론자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가·입법자의 영지와 판단력에 이끌리면서도 일반 대중의 이기적 정념을 추진력으로 하는, 말하자면 시장적 공공성의 이론이었으며 18세기 문명사회 사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맨더빌 이후 계몽사상의 전개 과정은 맨더빌의 역설의 핵심을 계승하면서 그 역설성을 갖가지 방법으로 극복하고 개인의 자유를 정치적·경제적 공공성으로 매개하려는 다양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137-8)


제5장 루소의 문명비판과 인민주권론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미국의 독립선언(1776)과 프랑스혁명(1789)은 인류의 야만(빈곤)에서 문명(부유함)으로의 진보라는 계몽사상의 역사적 한계─당대의 문명사회가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의 불평등을 본질로 하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라는 사실─입증

2. 사상의 문맥 : 루소는 문명사회의 불평등을 '자연법'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不정의로 단정, 자연법학이 현실의 국가·사회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의 질서와 타협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잘못을 범한다고 지적


"로크와 같은 자연법학자에게 사유재산을 둘러싼 정의·부정의의 관념은 신의 명령으로서의 자연법에 근거하는 것이며 인류의 이성에 선천적으로 각인된 것이었다. '생명·자유·재산'이 일체적인 '프로피티(property)'로 여겨졌으며, 그 정당한 기원은 노동에 의한 획득이었다. 이 원리에 근거해 로크의 자연 상태에서는 사유재산과 계약에 기초한 평화로운 질서가 확립되며, 사회적 분업(시장 사회)도 발달한다. 로크의 경우에 정부의 출현이 불가피했던 것은 화폐의 도입에 의한 빈부 격차의 발생 때문이며, 사유재산의 성립과 정부의 출현은 별개의 사건이었다. 이와 달리 루소의 경우에는 정치권력(국가)이나 경제권력(재산) 모두 농업 생산과 함께 나타나는 강자에 의한 약자 지배의 산물이며, '자연법'과도 '정의'와도 무관한 것이었다. 최초의 국가는 '법의 지배'를 따르는 군주제 국가이며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지배를 가장하지만, 이는 '강제된 동의'에 불과하다."(149)


"그런데 루소에 따르면 이 단계는 '동의'의 개관을 가장하고 있는 만큼 차라리 나은 것이었다. 문명사회의 좀더 진전된 발달은 사회 전체의 부를 크게 키우는 한편 그 분배를 더욱 불평등하게 하여, 외견상 부와 번영을 구가하는 문명사회의 현실은 공공연한 전제 국가가 된다. 이제까지의 정치적 지배·피지배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던 정치적 관계는 마침내 전제적 폭력에 의한 주인·노예 관계로 바뀌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온 선이나 정의의 관념이 완전히 소멸하여 사회는 사실상의 무법 지대가 된다. 바로 이것이 프랑스를 비롯한 동시대 유럽의 현실이었다." "루소는 이렇게 해서 사회적 불평등이 인간의 자연(본성)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의 어느 발전 단계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것임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는 이런 인류 진보의 역사를 단순히 부정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적 창조 행위로서의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와 사회의 재건을 꾀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사회계약론』에서 다룬 근본 문제였다."(149-50)


# 루소의 '일반의지'

1. 일반의지는 인간의 '영혼'에 해당하며 국가 '주권'의 본질이다. 일반의지 혹은 주권에 구체적 형태를 부여한 것이 바로 '입법권'이다.

2. 일반의지는 인민 전체의 의지이며 인민 전체의 이익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개별 의지의 집합체인 '전체의지'와 구별된다.

3. 일반의지는 '분할 불가능'하며 '대표 불가능'하다. '인민' 이외의 집단─가령, 입헌정치 시스템─이 '인민'의 의지를 대행할 수는 없다.


"홉스든 로크든 인간 본성이 사회계약을 전후로 근본적 변화를 겪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이론에서 변화를 겪는 것은 개인의 외적 환경, 즉 그들이 사는 사회의 상태와 제도이며, 그들은 이러한 환경의 변화에 의해 사람들이 본래의 인간 본성을 좀더 평화로운 정치사회 속에서 실현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달리 루소는 '사회 계약'에 의한 정치사회의 확립이 개인들의 외적 환경을 바꿔놓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그들의 성격과 감정을 변화시키며, 그 결과 그들의 생활양식마저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고 생각했다." "자연법학자들의 논의에서는 정치사회 수립의 최대 목적은 생명의 보존(홉스)이며 사유재산권의 확립(로크)이었다. 그러나 루소의 새로운 정치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신체와 재산은 보호되지만, 그 보호는 개인들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한 보호가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 실현의 일환일 뿐이다. 루소의 경우에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의 관계가 말 그대로 '역전'되는 것이다."(158)


제6장 스미스에게서의 경제학의 성립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영국의 중상주의적 경제체제─북미와 인도를 축으로 하는 식민지들을 값싼 원재료 공급지이자 자국의 상품을 판매할 거대한 시장으로 삼는─가 안고 있는 약점, 곧 문명사회의 번영이 식민지 체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모순이 점차 부상

2. 사상의 문맥 :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① 자연신학(자료 소실), ② 윤리학, ③ 자연법학으로 구성되며, 이 중 윤리학이 『도덕감정론』의 모체가 되고, 자연법학에서 '정의(justice)' 부문이 아니라 '편의(expediency)' 부문이 발전해 『국부론』의 토대를 형성


"스미스가 보기에 맨더빌의 (사악은 공익이라는) '역설'과 루소의 (자연으로부터의) '타락' 비판은 언뜻 정반대로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개인은 공공이나 타인의 이익을 그것 자체를 위해서 추구하지 않는다. 맨더빌의 '허영심'도 루소의 '사교성'도 문명사회의 초기 단계에 간사한 정치가나 입법자에 의해 도입된 인위적 정념이며 인간 본래의 자연적 원리가 아니라고 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은 암묵적 전제에 서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미스는 이의를 제기한다. 스미스의 입장은 인간 본래의 자연적 정념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이며, 그 자체에서 문명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스미스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인간 본성 안에 〈사회를 이루고 타인과 결합하게끔〉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어떤 원리가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이며, 자연의 정념에 의한 문명사회 발전의 메커니즘을 '역설'도 '타락'도 아닌 것으로서 설명하는 것이었다."(173-4)


"『도덕감정론』에는 인간 본성(인간의 자연)에 관한 스미스의 기본적 아이디어 세 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첫째로, 인간은 홉스나 맨더빌이 상정한 것처럼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둘째, 그 증거로 인간의 본성에는 이기심과 함께 '동류 감정'이 존재하며 이는 '공감(sympathy)'과 같은 것이다. 셋째, '공감'은 루소의 '연민'과는 다르며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타인의 기쁨이나 쾌락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이는 명백히 스미스가 '서간'에서 맨더빌과 루소에 대해 행한 양면 비판의 귀결을 보여준다. 스미스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쾌락이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한에서 홉스나 맨더빌은 옳았지만, 인간의 동기를 전부 이기적인 것으로 환원하려고 한 것은 그들이 범한 오류였다." "틀림없이 인간 본성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기심이지만, '공감'에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한계 내로 억제하는 힘이 있다고 스미스는 생각했다."(178)


"스미스는 『국부론』 첫머리에서 '분업'의 발전이 바로 국부 증대의 원동력이라고 선언했다. 그러한 문명사회의 밝은 전망을 보여준 스미스가 제5편에서는 분업의 원리를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면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는 〈인간으로서 될 수 있는 한 바보가 되며 무지해진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인간이 가령 공장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다했다 해도 시민으로서의 적절한 판단력을 행사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며, 특히 스미스가 우려했듯이 〈자신이 속한 나라의 중대하고 광범위한 이해〉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스미스가 무엇보다도 우려한 것은 그들이 시민으로서의 기개나 책임감을 상실하여 국방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미스가 주장한 공교육 사업은 지적·기능적 측면에서의 건전한 서민 육성뿐 아니라 문명사회의 개인을 국가가 체현하는 '공공성(나라의 안전과 독립)'에 붙들어놓는, 최후의 생명선으로서의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97-8)


# 스미스가 생각한 정부의 정당한 역할은 ① 국방, ② 사법, ③ 공공사업(시장친화적인 사회기반시설 조성과 시장친화적이지 않은 공교육 사업)이다.


제7장 '철학적 급진주의'의 사회사상: 보수에서 개혁으로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프랑스혁명의 공화주의 이념이 공포정치로 변질되자 영국의 급진주의자들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입헌군주제의 틀 안에서 선거권 확대를 통한 의회 개혁 추진, 한편 산업혁명의 급속한 진전으로 토지·노동·자본의 조화라는 자유경쟁 원리 붕괴

2. 사상의 문맥 : 보수주의(버크, 맬서스)는 산업혁명이 야기하는 변혁에 맞서 전통적인 정치와 사회 제도를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 개혁주의(벤담, 제임스 밀, 리카도)는 전통 사회의 기본 구조가 크게 바뀌더라도 정치적 개혁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


"제레미 벤담, 제임스 밀, 데이비드 리카도 세 사람이 직면한 근본 문제는 영국의 구사회, 즉 1688년 이후 명예혁명 체제의 근본적 개혁이었다. 이 체제는 영국을 근대적 입헌군주제로 전환시킨 획기적 체제였지만, 이제는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미스는 정부의 본래 역할을 재정의함과 동시에 중상주의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명예혁명 체제의 현실에 근본적 비판을 가했지만 그 비판은 체제의 경제정책 비판에 머물 뿐, 과두제적이며 비민주적인 정치 구조 자체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은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버크가 국왕이나 정부의 북미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경제개혁'에 의한 정치의 쇄신을 외치면서도 의회 개혁 자체에는 반대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달리 '철학적 급진주의'는 명예혁명 체제의 지배 구조를 민주화하고 선거권을 대폭 확대함으로써 국정의 중심에 좀더 광범위한 국민의 이해와 의견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218)


"그들은 자연법이나 자연권에 근거한 이론이 현실의 사회 개혁에는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벤담은 과거의 여러 사상이 표현은 제각각일지언정 하나같이 주관적인 권리 개념에 머물러, 어떤 권리를 객관적이고 '외적(external)인' 규준에 의해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런 주관적 이론으로는 산업혁명의 진전 속에서 현실로 나타난 불안정한 사회질서나 치안 악화에 적절하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다. 특정 범죄나 사건이  재판에 처할 경우 관습법의 전통에 따라 재판관이나 배심원의 판단에 의해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 통례인데, 그것은 결국 그들이 과거의 판례를 참고하여 주관적·감정적 판단을 내리는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기득 권익의 옹호로 시종할 뿐이다. 버크가 상찬한 관습법의 논리와 결별해, 관습법을 떠받치는 주관적 권리론과는 다른, 정치적 권리의 객관적이고 '외적'인 규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성과가 벤담과 제임스 밀의 공리주의 철학과 그에 기초한 입법론·정치론 및 교육론이었다."(220-1)


"개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그 활동 범위와 책임 속에서 '최대 행복 원리'에 의해 자기 규제하는 결과로서 사회 전체의 최대 행복이 산출되는 법체계를 확립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벤담의 입법자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오늘날에도 공공사회 전체의 이익이 될 것이 분명한 대사업이나 개혁을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추진하려는 경우에 '신의 의지'나 '이성의 법'을 들고나올 수 없다고 한다면, (국가권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사회통제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벤담 등의 '최대 행복 원리' 이외에 최종적인 정치적 정당화의 근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여전히 반성해야 할 것은 ① 현대사회의 '최대 다수' 중에서 암묵적으로 배제된 이가 있는지 여부, ② 정책 목표인 '최대 행복'의 실현은, 자유와 권리가 간과되기 십상인 소수자의 극심한 고통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지 여부이며, 무엇보다도 ③ 이들 문제에 대해 위정자·권력자의 행동이 최대한의 정보 공개에 의해 국민의 엄중한 감시하에 놓여 있는지 여부다."(235)


제8장 근대 자유주의의 비판과 계승: 후진국에서의 '자유'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대륙 국가들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정치 이념(자유·평등·사유재산)과 각국의 사회적·경제적 현실(봉건제의 잔존과 자본주의의 미발달)의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에,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열망과 근대화 자체에 대한 회의와 굴절된 비판이 등장

2. 사상의 문맥 : 이성적 법칙이 세계에 내재한다는 독단론과 경험적 인식은 불확실하다는 회의론을 모두 비판한 칸트, 자아(개인, 주체)와 세계(국가, 객체)의 통일을 설파한 피히테, 보편 이상에 대한 반동으로 비합리적 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등장


"헤겔에 따르면 근대 자연법이나 사회계약의 이론은 소유권과 계약, 이를 보호하는 국가의 확립을 이기적인 개인들의 동의를 통해 설명했다. 그것은 일정한 설명력을 갖지만, 한편으로는 왜 우리가 정의의 법을 준수해야 하는지, 그 도덕적 근거를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즉, 칸트는 정부의 성립을 이기적인 개인들에 의한 '사회계약'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도덕의 문제를 '정언명령'이라는 선험적 이성의 명령으로 설명하려고 했으나 헤겔은 이러한 편의적 해결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헤겔 법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근대사회에서의 법의 객관성과 도덕의 주관성의 분열, '정의'의 객관성과 '선'의 주관성의 분열이라는 근대사회의 근간과 관련된 모순을 사상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 답이 『법철학 강의』 제3부의 '인륜'론이다. 그것은 '가족' → '시민사회' → '국가'라는 세 단계로 구성되며, 인류 사회가 가족적 단계에서 국가적 단계로 발전하는 역사적 필연의 분석이다."(253-4)


"헤겔은 '가족'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 정신적·물질적으로 독립한 개인을 단위로 하는) '시민사회'로의 발전을 루소와 같이, 본래 무구했던 인류가 사회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부패·타락하는 역사로 그리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성립은 개인의 독립과 자유 획득의 프로세스인 한편, 사랑의 공동체로부터 자립한 개인은 그 온기나 애정 넘치는 관계를 잊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근거해 시민사회에서의 좀더 높은 통일, 자유로운 정신에 기초한 통일을 열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민사회'의 역사적 내실은 자본주의이며, 그 본질은 만인이 만인을 스스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부리는 '욕구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과잉 및 빈곤의 무대가 되며, 양자에 공통된 육체적·정신적 퇴폐의 광경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시민사회의 현실에 〈격분한 나머지 루소 등 깊은 사고와 감정의 소유자들은 시민사회를 거부하고 다른 극단으로 치닫는다〉고 하면서 동시대의 낭만주의자를 비판한다."(254-5)


"헤겔의 국가는 ① 군주권, ② 통치(행정)권, ③ 입법권이라는 3층 구조를 이루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군주권'의 위치이다. 홉스, 로크, 루소 등 헤겔 이전의 대표적 정치 이론에서는 입법권과 통치(행정)권이 국가 제도상의 두 기둥으로 여겨졌으며, 군주의 존재는 두 권한을 인격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헤겔은 군주권을 입법권과 통치(행정)권 위에 군림하는 독자적 권력으로서 파악해 국가의 의지를 체현하는 최고의 존재라고 규정했다. 물론 이때의 군주가 절대왕정 등의 전근대적 군주는 아니다." "헤겔의 '군주'는 〈자기 결정하는 의사(意思)〉이며 '자유의 이념'과 '법의 지배'의 인격화이다. 이렇듯 헤겔은 '자유의 이념'의 인격화로서의 근대적 군주가 인류사에 출현하는 필연성을 『역사철학 강의』에서 상세히 고찰하고 있다."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은 이성적인 군주제 국가의 지도에 의해서만 진정한 공공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헤겔이 최후에 도달한 세계사 인식의 입장이었다."(257-61)


제9장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산업혁명에 따른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와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의 공존, 대자본가층이 전세계로 진출하여 '자본의 문명화 작용'을 꾀하는 동시에, 반체제적 집단 역시 국경을 넘어 자본주의 타도와 사회주의 실현을 내걸고 상호 교류 확대

2. 사상의 문맥 : 생시몽은 조직된 과학자와 산업가의 이성적 관리에 기반한 이상적 산업사회 구상, 푸리에는 이기심과 이성이 아니라 정념과 협동에 기반한 농업 사회 구상, 오언은 환경결정론에 기반한 공동체 운동 구상(오늘날 협동조합 운동의 아버지)


"스미스 이래의 경제학은 가격 결정이나 자본축적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임무로 해왔을지언정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 자본주의의 대전제는 사유재산 제도이며 지주, 자본가, 노동자라는 세 계급은 토지, 자본, 노동이라는 신성한 재산의 소유자로서 등장한다. 그들은 사유재산의 소유자로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각기의 사유재산을 자신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시장에서 판매하여 그 성과를 신성한 사유재산으로서 획득한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으로 시작해 사유재산으로 끝나는 시스템이다. 루소처럼 사유재산 제도 자체를 의문시한 사상가도 있었지만, 경제학자들에게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자 현실로서, 그들의 경제학은 하나같이 이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자본가의 지배 아래서 노동자가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내재된 메커니즘이라는 인식을 마르크스는 뚜렷이 가지고 있었다. 이 현실을 그는 '노동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277-8)


# 자본주의가 낳는 소외의 형태

1.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 노동자가 만들어낸 생산물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의 재산이 된다.

2.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 본래 자유로운 목적의식적 활동이어야 할 노동이 부자유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3. 유적 본질(존재)로부터의 소외 : 2의 결과로서 자유롭고 의식적인 인간의 '본래적 노동'의 본질이 부정된다.

4. 인간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 인류 동포로부터의 소외로서, 대표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인간의 '유적 본질(존재)로부터의 소외'를 자연발생적 분업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분업이 인간의 외부에서 강제력을 발휘하여 '소외'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소외'에 대한 논의에서 마르크스는 네 가지의 소외로부터 자유로운 본래적 노동의 모습으로서 두 개의 서로 다른 비전을 제시한다. 하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노동'이라는 노동관이고, 또하나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노동관이다. 인간 노동의 이 두 측면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수고』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설명은 반드시 명확하지만은 않다. 인간의 노동이 본래는 '자유롭고 의식적'이라는 것을 마르크스는 다른 동물과의 비교를 통해 보여준다. 꿀벌이나 비버는 변변찮은 건설 노동자보다 훨씬 집을 잘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본능에 따른 활동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인간의 노동은 본능이나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이 행해지며 대상에 '미의 법칙'을 부여하는 것조차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노동의 본래 모습은 첫째, 둘째, 셋째의 소외의 현상 형태 속에서 '소외'라는 부정적 형태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지만, 넷째의 소외 형태인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는 '사회적 노동'의 부정으로서 나타난다."(279-80)


"마르크스 사상의 원점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이념이 존재하며, 마르크스 사상은 그 유토피아적 성격으로 인해 영속적인 생명력을 획득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모순(노동력의 상품화에 의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자본주의의 본질인 한 거기서 유래하는 여러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한에서 시장과 선거라는 한정된 경제활동, 정치활동 이외에 무언가 진정한 '자유인의 연합'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나아가 그것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의 지배와 착취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항축을 형성해온 것도 사실이며,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그것이 항상 마르크스 사상의 계승이라는 스타일을 취하리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가 아무리 영속하고 마르크스 사상이 훗날의 사상가들에게 아무리 비판당해도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인 한 마르크스는 죽지 않는 사상가로 남을 것이다."(294-5)


제10장 J. S. 밀에게서의 문명사회론의 재건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제2차 선거법 개정(1867)으로 상층의 숙련 노동자들이 체제 내로 편입, 언론 자유의 신장과 초등교육 보급 등으로 국민의식의 동질화, 국민 여론의 획일화가 진행되면서 국민 다수의 의견이 정치의 동향을 결정하는 대중민주주의가 등장

2. 사상의 문맥 : '최대 대수의 최대 행복'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깊이 바라게 되지는 않는다는 '철학적 급진주의' 비판, 사유재산을 부동의 사실로 보는 고전경제학은 일시적 유효성밖에 갖지 못한다는 비판, 여성인권(특히 참정권) 옹호


"밀과 토크빌은 동시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통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근대사회의 두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제도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생활양식과 여론의 획일화·평준화, 나아가 그 최종적 귀결인 '다수의 전횡'이라는 문제였다. 토크빌은 유럽의 전통 사회와는 달리 시민 간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미국 사회 속에서 근대사회의 순수배양 과정을 목격하고 그 우월성과 함께 우려할 만한 문제 역시 일찌감치 지적했다. 밀은 그런 문제 제기에서 큰 시사를 얻어 토크빌적 분석을 통해 미국 사회와 공통된 문제를 낳고 있던 당시 영국 사회의 구조 변화를 고찰하게 된다." "그러한 밀의 사고법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론이나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론과도 달랐으며, 자본주의 문명이 필연적으로 초래할 '다수의 전횡'을 중심으로 한 구조적 위기를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 자체가 준비하는 새로운 정치적·경제적 가능성을 통해 극복하려는 것이었다."(312-3)


"인간이나 사회의 역사적 가변성을 경시하고 그 가변성이 가져오는 사회의 다양성이나 발전 가능성에서 눈길을 거두는 보수적 정신이야말로 유럽 문명사회의 새로운 개량과 변혁을 가로막고 있는 원흉이라고 밀은 생각했다. 〈여러 가지 분명한 증거를 무시하려 하는 현대 일반의 경향이야말로 큰 사회문제들을 합리적으로 다루려 하는 태도에 대한 주요한 방해물의 하나요, 인류의 개선에 대한 가장 큰 장애의 하나라는 사실〉(『자서전』)이야말로 그가 단순한 '역사주의'와는 구별되는, '역사적 방법'에 기초한 사회과학의 혁신을 통해 호소하고 대항하려 한 것이었다." "밀이 〈여러 가지 분명한 증거〉라고 생각했던 것 중에는 노동자나 여성의 참정권, 종속으로부터의 여성해방이라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 일반의 〈편견은 오직 철학에 의해서만 타파될 수 있으므로, 편견이 자기편에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는 한 편견을 이겨내고 전진하기는 요원〉하다는 것이 밀을 지탱한 신념이었다."(315-6)


"밀은 로크에서 벤담, 아버지 밀에 이르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문제 설정 자체가 그의 시대에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밀의 시대, 즉 선거권이 국민의 다수에게로 확대된 시대에는 정치가가 겉으로는 국민 다수파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한편, 그들이 다수파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소수파를 희생시킨다는, 과거와는 정반대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벤담이나 아버지 밀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는 이러한 귀결을 적극적으로 추인하는 것으로도 여겨졌다. 다수파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치권력의 존재는 소수자의 '고통'을 크게 웃도는 다수자의 '쾌락'을 실현함으로써 정당화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은 '소수 의견(minority)의 존중'과 '개성(individuality)의 존중'을 현대 '자유'론의 핵심으로서 설정한다." "강한 개성의 소유자는 동질화된 사회에서는 눈에 띄고 부각되어 배제된다. 바로 이것이 밀이 가장 우려하며 경고한 '다수의 전횡'이 끼치는 해악이었다."(326-7)


제11장 서구 문명의 위기와 베버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대량 소비 사회의 출현,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급증 등으로 노동자계급의 부르주아화 진행, 이는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에 기여하는 한편, 반대 세력들 역시 사회개량주의 노선으로 선회하도록 자극(페이비언협회, 수정주의 논쟁)

2. 사상의 문맥 : 콩트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회과학에 응용한다는 의미에서 '실증주의' 사회학을 주창, 실증주의는 제국주의와 대중화시대의 주요 사회사상으로 자리매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사상가들은 실증주의의 지배에 맞서 각자의 사상 확립

※ 사회과학의 자연과학화는 '물리학화(수리적 방법 중시)'와 '생물학화(다윈의 진화론 중시)'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베버는 유럽의 합리화 과정을 '세계의 탈주술화'라 부르고 그 본질을 '주지주의적 합리화'로서 파악한다." "이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우리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삶에 어떤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이 작동할 까닭은 없다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원칙적으로─예측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다양화되고 개인화되어도 그 가치나 이념은 그 사람에게는 절대이자 '신'이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을 섬기면서 각자의 목적을 추구하고 그 실현을 위해 희소한 경제재(화폐)나 정치재(권력)를 놓고 다툰다.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신들의 투쟁'이라는 아수라장이 출현하며 그 연장선상에서 전쟁이나 혁명이 발발한다. 당시의 실증주의적 과학이 자본주의적 경제 경쟁과 제국주의적 권력투쟁의 아수라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학이라는 것을 베버는 인식하고 있었다."(352-3)


"베버에 따르면 과학(학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직접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조건 아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칠 수는 있다. 즉, 어떤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떤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지를 오직 과학만이 진정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가르쳐줄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 무한히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여러 가치가 공존·경합하는 현대 세계는 제임스 밀의 '다신론'이나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세계이기도 하다. 제임스 밀이나 보들레르의 정신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스스로의 가치를 믿고 학문에 종사하는 경우에 학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각자가 믿는 가치(신)의, 과학적 정합성에 기초한 실현을 돕는 것이며, 각자의 궁극적 가치와 그 실천적 선택이나 행동 사이에 모순이 있는지 여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나아가 모순이 있는지 여부, 사람이 어떤 행위를 선택할 것인지 여부는 학문이나 과학이 책임질 수 없는 궁극의 개인적 선택의 문제이다."(352-4)


"러시아나 독일의 혁명주의자들은 타오르는 정열과 숭고한 목적('심정 윤리')에 휘둘려 정치운동으로 나아가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테러리즘에 호소하는 등 본래의 목적과는 모순되는 행동을 한다. 혁명 지도자에 의한 운동 참가자의 '영혼의 프롤레타리아화' 역시 불가피하다. 혁명가를 포함한 정치가는 이 모순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가('책임 윤리') 하는 것이 두 윤리 사이의 〈심연과 같이 깊은 차이〉이며 바로 그것이 베버의 최종적 문제였다." "불타는 정치 신념에서 출발하면서도 그 모든 행동에 대한 일체의 결과책임을 한몸에 떠안고 게다가 필요하다면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자기의 신념·심정에 따라 대담한 결단과 행동을 감행하는 인간이 바로 베버가 생각하는 이상적 정치가상이었다." "이러한 베버의 정치가론은 비단 직업적 정치가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의회민주주의라는 전형적인 관료제적 조직에 의해 성립된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360-1)


제12장 '전체주의' 비판의 사회사상: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케인스, 하이에크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두 차례 세계대전의 전간기(戰間期)로서, 러시아혁명(1917), 세계 대공황(1929), 나치 독일의 성립(1933)이 발생, 세가지 사건 모두 19세기에 계속 성장·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그 질서의 불안정성을 반영한다는 공통점

2. 사상의 문맥 : 자본주의 비판과 옹호라는 양극단의 입장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케인스, 하이에크를 한데 묶는 사상적 공통항은 '전체주의 비판', 이때의 전체주의는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 스탈린주의를 동일시하는 헐거운 개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본주의 문명은 부와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왜 ('문화산업'과 '반유대주의'라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 하는 문제이다." "'계몽'이 낳은 서구 문명의 궁극적 모습은 현대의 자본주의이다. 그것은 특히 '문화 산업'에서 집약된다. 거기서 목적과 방향을 잃은 '계몽'의 이성과 주체성은 '신화'의 '모방' 원리로 전락한다." "사람들은 미디어나 광고로 보급되는 유행에 따르기를 소비생활 속에서 강제당하며, 그 강제가 '강제'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지므로 거기에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는 이가 외려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돌출된다." "반유대주의의 병리 역시 고도 대중 소비사회의 병리로서 파악해야 한다. 자본이 대중매체나 광고를 통해 만들어내는 획일적인 '자연'의 질서에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에 대한 '모방'에 빠지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이 차별적인 낙인찍기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 배제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383-4)


"『계몽의 변증법』의 전체주의 비판이 '좌우의 전체주의' 문제를 자본주의 문명의 병리적 현상으로서 파악하고 이에 대해 유럽 문명의 원리(노동에 의한 자연의 억압과 소외) 자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답하려고 한 것이라면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전체주의 비판은 눈앞에 펼쳐지던 전체주의의 현실을 자본주의 문명의 사수라는 공통된 목적의 범위 안에서 해명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좌우의 전체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자본주의 문명을 지켜내면서도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 부패 혹은 타락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며 그 근원에 다가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 공통된 틀 안에서도 두 사람의 사상적 입장은 대극적으로 달랐으며 이는 케인스의 '새로운 자유주의'와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각의 의미에서 '자유주의'의 변혁(케인스)이나 부흥(하이에크)을 주장했다. 요컨대 둘 모두 각각의 의미에서 엄연히 '자유주의자(리버럴)'이었다는 사실은 강조할 만하다."(384-5)


"케인스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문명사회의 핵심 원리인) '개인주의'는 하이에크의 '참된 개인주의'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둘은 기본적으로 같다고 생각된다. 개인의 자유롭게 다양한 삶을 옹호하기 위해 '전체주의'와 대결하는 자세도 그들 사이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케인스가 마지막까지 자유당의 입장을 견지하고 마르크스주의자, 국가사회주의자를 중추에 품은 영국 노동당의 체질을 엄중하게 비판한 것 역시 하이에크의 노동당 비판과 공명하는 성질을 갖는다. 거기서 남겨진 차이는 자유로운 사회를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을 어떻게 구상해야 할지이며 그 정책적 구체화로서 어떤 정치적 선택을 장려할 것인지 하는 문제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참된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로운 문명사회의 옹호라는 근본적 가치관을 공유하면서도 그 구체적 실현방법에 대한 견해를 (경우에 따라서는 180도) 달리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396-7)


제13장 현대 '리버럴리즘'의 여러 흐름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종전 후 수립된 '냉전' 체제와 베를린 장벽 붕괴로 촉발된 '냉전' 체제의 붕괴, 고르바초프는 정치적 민주화에 초점을 맞춰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촉발, 덩샤오핑은 정치적 자유·민주화 없는 경제개혁을 추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 수립

2. 사상의 문맥 : 인간의 상호 승인 욕구(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를 억압하던 사회주의 세계의 붕괴를 '역사의 종언'으로 판단한 후쿠야마, 소련·동유럽 붕괴 후에 세계가 크고 작은 여러 종교·민족 분쟁에 노출되는 '문명의 충돌'을 예상한 헌팅턴

※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 승자(주인)는 노예의 노동에 의존해 점차 인간으로서 열악해지고, 패자(노예)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점차 주인과 대등해진다는, 상호 승인을 추구하는 인간상을 제시한 변증법


"하버마스의 제안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18세기의 '계몽적·커뮤니케이션적' 이성─시민적 공공권(public sphere)에서 귀족주의적인 공적 정치 세계에 맞서 형성된 자유로운 '여론'의 바탕─을 민주화하여 현대에 복권시키자는 것이다. 즉, 그는 현대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정치적·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조건을 계몽적 이성의 민주화에 의한 '시민적 공공성' 혹은 '시민사회'의 현대적 재생이라는 전략으로써 재검토한 것이다. 그가 '화폐'와 '행정권력' 양쪽을 싸워야 할 상대로 명시한 것은 국가가 자본주의의 반사회적 양상을 관리·억제한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을 자신이 기본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국가가 관료제에 의한 '시민사회'의 억압 장치로 전화할 위험성도 강하게 의식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공공성'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민주주의 운동('연대')이 불가결하며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자유와 정의를 실현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421-2)


"하버마스가 계몽 시대의 시민적 '공공권'으로 돌아가 '커뮤니케이션적 이성'의 복권을 제기한 것처럼, 롤스는 로크, 루소, 칸트의 '사회계약설'의 전통으로 돌아가 '공정으로서의 정의' 사상을 부활시키려 했다." "롤스는 고전적 공리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 간, 계급 간의 사회적·경제적 대립과 불평등의 존재를 전제하여 이를 사후적으로 '시정'한다는 기본적 사고방식에 입각해 있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불평등·불공정한 사회의 현실을 정치와 정책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평등·공정하게 하려는 발상이다. 이에 대해 롤스는 고전적 사회계약설의 논리에 따라 법도 정부도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 상태'를 논리적으로 상정하고 거기서 전원이 합리적으로 선택할 사회를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로서 구상한다. 현실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불평등·불공정이 발생할 수 없는 사회 구조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 근본적 원리가 바로 '정의의 두 원리'이다."(422-4)


# 롤스의 정의의 두 원리

1. 자유 원리 : 기본적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2. 평등 원리 :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되고〉(차등 원리),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하에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도록〉(기회균등 원리) 편성되어야 한다.


"노직은 롤스와 마찬가지로 로크적 사회계약론을 기초로 논의를 전개했지만, 로크 이론에 좀 더 충실한, '노동에 의한 소유'의 논리를 기축으로 하는 '권원(權原) 이론'을 전개했다. 그것에 따르면 노직이 '최소 국가'라 부른 정당한 정치권력의 기원은 ① 무주물(無主物)을 획득한 결과로서의 소유물의 보호, ② 동의에 의한 소유권 양도의 보장, ③ 앞의 두 가지에 대한 부정행위를 바로잡는 것이라는 세 가지뿐이다. 이에 비해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공통선'의 사상 전통으로 돌아가 '올바름'이 '선'보다 우월하다는 롤스의 기본적 견해를 비판한다. 개인은 본디 다양한 정치적·종교적·문화적 배경을 지닌 공동체 속에서 나고 자라며 거기서 살아감으로써 저마다의 자아를 확립한다. 공동체는 종교적·문화적으로 규정된 '공통선'의 세계이며 사람들은 '공통선'을 갖춰나가는 가운데 그 공동체 고유의 '정의'를 갖춰나간다. 따라서 '선(the good)'이야말로 '올바름(the right)'에 우선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430)


종장 사회사상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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