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지음, 이상길.배세진 옮김 / 킹콩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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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생생한 목소리로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meconnaissance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는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이 분석하는 사회공간에 그 자신 또한 위치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기반이 되는 '합리적 유토피아주의'의 근간에는 사회학 작업이 내포하는 이런 자기분열이 놓여 있다. 이를 견뎌 내거나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회학자를 포함해) 사회세계의 행위자를 구속하는 결정요인들을 밝힐 수만 있다면, 결국 외양의 허상과 기만적인 자명성을 비판하고 속박 상태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비록 모든 사람이 완수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될 기회를 살리게 될 것이다."(18-9)


1장 사회학자의 직능


"역사학자에게는 많은 것이 자명한 사실로 주어지고 심지어는 [그런 사실만 발견해도] 업적으로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보죠. 만일 어떤 역사학자가 특정한 역사적 인물과 다른 역사적 인물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발굴한다면, 그러니까 친분을 찾아낸다면, 이는 일종의 발견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찬사를 보낼 겁니다. 반면에 제가 예컨대 대학 세계, 또는 학문 장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려고 입만 벙긋하더라도 저는 괴물 같은 밀고자 취급을 당할 겁니다. 옳은 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말이죠. 다른 한편 모두가 알다시피, [역사학이 취하는] 시간적 거리는 중립화neutralisation의 미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회학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겪게 합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회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화급한 현장에 서 있고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죽은 것도 아니고, 땅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28-9)


"저는 결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단절 같은, 그런 입장을 취한 적이 없고 지금도 굉장히 비판적인 관점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단절에 불과하며, 조사연구를 실천하는 과학자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 주장하는─이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데─단절입니다. 이런 단절은 우리가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담론에서 발견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한 기능을 갖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것과 속된 것, 달리 말해 성자와 속인, (신성한) 예언자와 평민을 구분하는 기능입니다. 저는 이런 기능이 역겹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우리의 과학이 아직까지는 시작에 불과하고 초보적이며 유아적인 단계에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과학에 관해 논할 수 있고 또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어찌 되었건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혹은 경제학자가 실천하는 과학적 노력과, 예컨대 철학자가 수행하는 노력 사이에는 성격상의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자와 달리] 검증이나 반증 가능한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지요."(32)


"제 작업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과학 그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종 분류체계를 아무런 주저나 성찰 없이 사용하는 대신에 저는 분류체계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범주를 너무 순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일이지요. 일례로, 의사라는 개념 자체가 끝없이 변하는 역사적 산물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18세기 이후 지금까지 의사들의 지위를 비교하는 시계열적 통계를 산출할 수 없습니다[범주 자체가 다르니까요]." "아무튼 역사를 사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 단어, 개념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입니다." "확실히 역사학자는 시대착오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학자는 요즘 널리 쓰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 단어가 아예 없었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된 과거의 실재를 조명합니다." "대체로 이런 오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찰성이 더욱더 중요한 것이죠."(36-8)


"샤르티에 / 선생님이 통시성diachronie, 즉 장기적인 시간에 관해 말한 것은 동시대 사회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집단, 다른 계층이 똑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범주를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무심코 사용합니다." "부르디외 / 역사학자들이 범하는 이런 종류의 시대착오는 사회학자에게는 자계급 중심주의ethnocentrisme de classe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달리 말해 사회학자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남성/여성, 뜨거운/차가운, 건조한/습한, 높은/낮은, 지배계급/피지배계급 등으로 구성된 저만의 고유한 사고범주, 분류체계, 분류틀, 구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죠. 이는 어떤 경우에 시대착오를 빚어내고, 다른 경우에는 자계급 중심주의를 가져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자기 자신의 질문체계를 문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38-9)


2장 환상과 인식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결정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라는 환상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회계층 가운데 자유라는 환상에 특히 경도된 집단이 있습니다. 지식인들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학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거나, 사회학에서 '철학에 대한 증오'를 발견하고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런 거부는 지식인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결정요인들을 알기 싫어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유의 주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결정요인들을 스스로 인식하는 한에서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49-50)


"저는 사회학이 다른 수단에 의해 철학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만일 사회학이 명예로운 계보 안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최초의 사회학자 자리에 소크라테스를 놓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거리로 내려가) 질문을 던지지만, 그 답변에 대해 액면가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학자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런 사고를 통해서, 그리고 극적인 자기 신비화를 거쳐서 스스로에게 사기를 불어넣습니다. 사회학자는 남들의 말을 듣고 남들에게 질문하고 남들이 말을 하게 하지만, 모든 담론을 비판 아래 둔다는 점에서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수단을 갖습니다."(54-9)


"제가 생각하는 사회학은 담론에 저항합니다. 사회학자가 상징생산에 종사하는 사람, 예를 들면 언론인, 주교, 교수, 철학자를 믿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상징생산의 종사자들은 사회세계가 이렇다고 그럴싸한 담론을 제공하면서 말로 먹고 삽니다. 사회학자는 이런 담론의 외양을 애써 조심합니다. 우리 사회학자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것은 실상 사회세계에 관한 일상적 담론, 헛똑똑이들의 수사학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는 상징적 호신술의 교사입니다." "예를 들면, 선거방송에서 한쪽에서는 언론인이 정치가를 논평하고, 반대쪽에서는 정치학 교수가 언론인을 반박합니다. 그런데 이들 각자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한 사람에 대해 메타-담론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메타'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메타'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내가 말해 줄게〉라고 하는 것이죠."(62-4)


3장 구조와 개인


"가짜 문제들, 그러나 실제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가짜 문제들의 장점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게다가 과학의 관점에서 이런 가짜 문제는 대체로 진정한 정치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제가 볼 때 지리멸렬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대립쌍이지만, 예를 들어 개인과 사회,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개인주의와 전체론holisme 등등, '~주의'isme가 달린 단어들의 대립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 일련의 대립쌍은 사회주의 또는 집단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대립쌍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런 은밀한 유착 관계를 통해서 정치투쟁이 학문 장 안에 슬그머니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학문 장의 자율성은 이런 가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경계를 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컨대 학문적으로 매우 취약한 입장도 그 뒤에 정치적 힘이 있다면 충분히 세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학문장 내에서 정치적 국면을 등에 업은 지적 활동이 가능한 겁니다."(74)


"그렇다면 이 문제들은 왜 가짜 문제일까요? 우리는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자생적] 학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회학의 특별한 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학의 경우도 같은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데, 즉각적 이해라는 바로 이런 환상이 [진정한] 이해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환상과 단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객관화 방법을 도입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뒤르켐의] 유명한 문장에 다다릅니다.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 다루어야 한다.〉" "저는 연구대상이 제게 말한 것, 그가 체험한 것, 그가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말한 것, 그의 정신적 경험이나 표상 등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심지어 의심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뒤르켐의 '선관념',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또는 자생적 사회학을 뜻하는데, 그 이름이 뭐든지 간에 저는 의심을 지우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객관주의적 입장입니다."(74-5)


"나는 세계에 속하는 하나의 사물입니다. 나는 하나의 신체로 존재합니다. 나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특정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다양한 힘에 복속됩니다." "저는 또한 세계를 이해합니다. 달리 말해 저는 세계에 관한 표상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안에서 제가 차지하는 위치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의 작업은 [위치와 관점] 두 가지를 포괄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라는 문제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 대 사회는 전적으로 가짜, 허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대립쌍은 객관주의적 공격이나 주관주의적 공격 모두에서 사용될 수 있기에 매우 유용한 허구입니다." "사르트르가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주관주의적 위치를 구현한다면,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객관주의적 위치를 구현하고 있죠. 어느 편을 드는 대신에 우리는 사르트르에 반대하면서 레비-스트로스에 찬성하고, 레비-스트로스에 반대하면서 사르트르에 찬성해야 합니다."(77-8)


"사르티에 / 선생님의 이런 주장은 결국 역사학자들의 경우 인식론적 실험의 상황에 거의 놓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상 역사학의 대상과 역사학자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고, [사회학과 달리] 연구 주체의 고유한 이해관심이 [대상과의] 직접적인 연루가 아닌 다른 층위에 놓이기 때문이죠. 물론 여기서 현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예외가 되는데, 그 경우 [역사학과 사회학 사이의] 학문적 경계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물론 [역사학 장에도] 두 개의 대립극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구조의 축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의미지향의 축에 속합니다. 이와 같은 대립쌍이 사료의 종류, 역사쓰기의 방식, 역사학자 사이를 구분하긴 하지만, 분열이 심하지는 않지요. 그 덕분에 상이한 접근들이 아주 원만하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계는 완전히 통일된 장이 아니라, 다양한 연구주제와 역사쓰기의 방식들이 몰려 있는 일종의 모자이크 상태와 유사한 것이죠."(82-3)


4장 하비투스와 장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 이후에는 후설, 모스, 뒤르켐, 베버 등 다양한 학자가 하비투스 개념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 개념은 결국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 줍니다. 즉 사회적 '주체'는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정신esprits instantanes이 아니란 것입니다. 달리 말해, 어떤 사람의 실천을 이해하려면 그에게 가해진 자극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는 [과거로부터 꾸준히 축적된] 모종의 성향 체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면서 어떤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화됩니다. 하비투스 개념은 대강 이런 뜻입니다. 자세히 논의하자면 끝이 없는데, 이 개념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행위자는 역사를 가지며 개인사의 산물이자 환경과 연관된 교육의 산물이고, 집단적 역사의 산물입니다. 특히 사고범주, 이해범주, 지각도식, 가치체계 등은 사회구조가 체화된 산물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하비투스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92-3)


"그렇지만 하비투스는 숙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저를 두고 해석하는 식의 불가피한 운명fatum이 아닙니다. 하비투스는 성향들의 열린 체계입니다. 그것은 경험들의 영향 아래 끊임없이 노출되고, 그런 경험들에 의해서 마침내 변화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말한 다음, 이런 주장에 재빨리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일련의 경험이 하비투스를 [변화시키는 대신] 강화할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개연성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 연계된 사회적 숙명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하비투스를 형성한 경험들과 조화로운 방향으로 경험을 쌓아 가게 됩니다. 또 하나의 난점을 해소해 봅시다. 하비투스는 잠재성virtualite의 체계로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남들이 저를 두고 해석하는 바와 달리, 하비투스는 특정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만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그것은 스프링과 같지만, 방아쇠가 필요한 것이죠. 게다가 상황에 따라 하비투스는 정반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99)


# 하비투스는 통상적으로 순응 기제로 작동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달리 말해 하비투스가 실행되는 장이 달라지면 저항 기제로 발현될 수도 있다.


"저는 거대한 경향적 법칙에 대해서 일종의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방법론적인 이유에서 저는 그런 법칙을 거의 믿지 않아요. 반면에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인기를 끌었고, 일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에게 언제나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는 해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이런 문제들 중에서 엘리아스의 문제들이 가장 공감이 간다고 말이죠. 그는 국가 형성이라는 실제의 거대한 과정에서 자신의 역사진화론적인 사회심리학을 추구합니다. 국가는 물리적 폭력(저는 여기에 상징폭력을 추가합니다)을 시작으로 온갖 형식의 권위를 독점하면서 구축됩니다. 일례로, 교육체계는 누가 똑똑하고 누가 멍청한지 선언할 수 있는데, 이런 발언권을 독점하는 거대한 진보의 과정이 결국은 교육체계를 형성합니다. 이런 과정은 제가 하비투스라고 하는 것, 그리고 역사학자들이 다소 애매하고 위험한 용어로 심성이라고 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어요."(102-3)


"사르티에 / 선생님의 저작에서 장들은 언제나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장들이 그 자체로 국가의 발현으로 묘사됩니다." "부르디외 / 그렇기는 해도 저는 우리가 만일 국가에서 출발한다면, 국가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예로, 제가 연구한 예술 장에서 인상주의 혁명은 국가에 맞서서,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맞서서 일어나지만, 이와 동시에 국가와 더불어 일어납니다. 달리 말해,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장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경제 장에 대해 독립적인 소우주들이 어떻게 창출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 국가는 메타-투쟁의 장소, 즉 장들에 대한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장소가 됩니다. 예를 들어, 법률 제정을 두고 벌어지는 투쟁이 있습니다. 주택가격이나 은퇴연령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는 장들을 가로질러 일어나는 투쟁이지만, 세력관계를 재편하는 투쟁이기도 합니다."(109-11)


5장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


"아카데미가 지배하는 통합된 사회세계에서는 하나의 노모스nomos, 즉 근본적 법칙과 분할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그리스어 노모스는 나누다, 분할하다를 뜻하는 동사 네모nemo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중에 분할의 원리도 있는데, 이는 동시에 시각의 원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적/남성적, 습한/건조한, 뜨거운/차가운 등이 그렇지요. 잘 통합된 아카데미 세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화가이고 저 사람은 화가가 아니다.〉 이 사람은 '보증'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화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화가로서 인증받았기 때문에 화가입니다. 이것이 아카데미죠. 이런 상황에 마네가 일격을 날린 겁니다. 그때부터 더 이상 누가 화가인지 아무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노모스에서 아노미anomie로 이행한 셈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정당성[혹은 인정체계]을 놓고 정당하게 투쟁할 수 있는 세계로 옮겨 간 것이죠. 그리고 어느 쪽도 서로의 도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117-8)


"장에서는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이 전개됩니다. 사회학자는 언제나 도전에 처합니다. 사회학자로서 그의 정체성이 언제나 문제시될 수 있지요. 게다가 장이 발전할수록, 그 장에 특수한 자본이 축적될수록 다른 화가의 정당성에 도전하려는 사람은 그 자신이 화가로서의 특수한 자본을 점점 더 많이 갖춰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개념 미술가는 회화를 근본까지 의심합니다. 그들은 캔버스를 찢으면서 이런 도전을 선포했습니다. 그 이의제기 형식을 살펴보면, 그들은 유치한 우상파괴자와 달리 회화적인 방식으로 회화를 문제화합니다. 그런데 이를 적절히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회화의 역사에 통달해야 합니다. 엄청난 지식이 필요한 것이죠. 예술가가 수행하는 특수한 우상파괴는 예술 장에 대한 거의 완벽한 숙달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분명히 역설이지만, 장과 더불어 생겨난 역설입니다. 〈그는 세 살짜리 우리 아들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식의 순진한 발언은 그 장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소리죠."(119)


"이번엔 철학의 사례를 들어 보지요. 어떤 사람이 철학 게임에 들어가고 싶은데, 이른바 '나치'식의 관념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하이데거가 직면한 상황입니다. 철학 게임에 들어가기 위해 그는 철학계의 작동 법칙에 자기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설령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말이죠. 장은 이런 식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반유대주의'는 '반칸트주의'가 됩니다. 사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매개 요인이 개입합니다. 하이데거가 [학계에] 등장할 때, 유대인들은 합리주의의 표상으로 칸트를 옹호했습니다. 만일 제가 나치식 관념을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철학자로 인정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관념을 [철학 장의 법칙에 맞추어] 철저히 변형시켜야 합니다. 하이데거가 나치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말입니다. 그는 분명히 나치죠.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가 어떻게 존재론의 언어 속에서 나치식 주장을 했는지 아는 데 있습니다."(121-2)


"많은 사람이 발자크를 사회학의 선구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소설가 가운데 최고의 사회학자, 사회학의 창시자는 바로 플로베르입니다." "특히 『감정교육』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추구한 형식주의 때문입니다. 정확히 우리는 마네에 관해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형식을 탐구했지만, 이는 동시에 사실주의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은 쓸모없는 대립 가운데 하나입니다. 플로베르 사례에서 형식의 탐구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것의 회귀, 즉 사회적 상기anamnese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는 '이야기하기'만 가지고 소설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순수소설, 순수하게 형식적인 탐구에 힘입어 플로베르는 사회세계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뱉어 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국 그는 당대의 지배계급에 대한 객관화에 성공합니다. 플로베르가 이룬 성취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분석들과 견줄 만합니다."(124-6)


"역사학에서 멋진 이야기는 환기evocation 작용을 합니다. 학문적 대상을 구성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그 대상을 느끼게 하고 보게 하는 데 있으며, 거의 미슐레적 의미에서 [즉 역사를 실감 나게 그려 내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대상 자체를 환기시키는 데 있죠. 제가 이런 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우리는 구조를 환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역사학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면에 사회학자는 즉각적인 직관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는 기능이 다르지요. 만일 선거방송에서 해설을 한다면, 사회학자는 시청자들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핵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학자는 때때로 멋진 형식에 너무 많은 걸 희생시킵니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역사학자는 원초적 경험, 심미적 선호, 대상관계의 쾌락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지요."(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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