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무속고 - 역사로 본 한국 무속, 서남동양학자료총서 서남동양학자료총서
이능화 지음, 서영대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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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조선무속고」 역주


1장 조선 무속의 유래


"조선 민족은 상고시대에 신시(神市)가 있어 자신들의 종교로 삼았으며, 천왕환웅(天王桓雄)과 단군왕검(壇君王儉)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 혹은 신과 같은 인간이라 했다. 옛날에는 무당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으므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무당이라는 말을 왕자(王者)의 호칭으로 삼았고[차차웅次次雄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고유어로 무당을 뜻한다], 고구려에는사무(師巫)라는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마한의 천군(天君)·예(濊)의 무천(무天)·가락(駕洛)의 계욕(계浴)·백제의 소도(蘇塗)·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에 이르기까지 단군 신교의 유풍(遺風)과 잔존 민속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이것이 이른바 무축의 신사(神事)이다. 후세로 내려와 문화가 진화하고 유교·불교·도교가 연이어 수입되어, 유교에는 길흉의 예(禮), 불교에는 분수(焚修)의 법, 도교에는 초제(醮祭)의 의식이 있었고, 이 외래의 종교들이 고유의 풍속과 뒤섞이게 되었다."(71-2)


2장 고구려의 무속


"고구려의 무속을 살펴보면 무당은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을 말하고, 뱃속의 아이를 점치고, 재이(災異)에 대해 말하고, 인귀(人鬼)가 자기에게 내렸다고 말하며, 시조 왕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사무(師巫)라는 것은 주(周)나라의 태사(太師)가 국가를 위해 길흉을 점쳤다거나, 살만(薩滿, shaman의 한자 표기)이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한 것과 같다. 그리고 사무는 왕에게 덕을 닦아 재앙을 물리칠 것을 권했는데, 그 말이 대단히 이치에 맞았다. 만약 이 말이 『좌전(左傳)』이나 『한서(漢書)』 속에 있었다면 현명한 신하나 좋은 관리가 재이에 대해 논하는 것과 그 뜻이 서로 비슷하여, 당연히 조금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이 무당의 입에서 나온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새겨 보면 당시에 왕의 사표(師表)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라에 재이가 있으면 반드시 사무에게 물었던 것이다."(85-6)


3장 백제의 무속


"백제 무속의 역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여, 마지막 왕의 마지막 해에 무당이 거북의 예언을 해독한 기록이 하나 있을 뿐이다. 대개 백제는 본디 부여·고구려에서 나왔으므로, 백제의 무속이 고구려와 같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서는 무당이 여우의 변괴를 설명한 것이 있고, 백제에는 무당이 거북의 예언을 해석한 것이 있는데, 이러한 것이 동일 계통에서 나온 것임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溫祚王) 25년(AD 7) 봄 2월 왕궁의 우물물이 넘쳐흐르고, 한성(漢城)의 인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었다. 일자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넘쳐흐른 것은 대왕께서 발흥할 징조이며, 소가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병합할 조짐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마(辰馬, 진한과 마한)를 병탄할 마음을 가졌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일자(日者)라고 한 것도 아마 무당일 것이다."(91-2)


4장 신라의 무속


"신라 말로는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했다. 웅(雄)을 가리켜 무당이라 함은 반드시 신시(神市)의 환웅(桓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니, 대개 환웅의 신시란 곧 고대 무축(巫祝)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하는 까닭에 단군(檀君)이라 했으니, 단군은 곧 신권천자(神權天子)이다. 신라인은 차차웅이 제사를 받들고 귀신을 섬기는 까닭에 이를 두려워하고 공경했고, 마침내 웃어른을 차차웅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고유어는 삼한에서 시작되었다. 환(桓)과 한(寒)은 음이 서로 가깝고 한(寒)의 훈은 차(次)이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신라 제2대왕)은 단지 무당이라는 칭호만 빌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제사를 주관하고 신을 섬기는 자였으니, 그 또한 한 사람의 단군이라 할 수 있다." "남해차차웅은 그의 친누이인 아로(阿老)로 시조묘(始祖廟)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대개 신라의 풍속에서는 무당이 제사를 숭상하고 귀신을 섬겼으니, 아로 또한 필시 무당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93-4)


5장 고려시대의 무속


"무당을 모아 비를 빈 것은 바로 고대에 무당으로 하늘에 제사한 증거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말하기를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세상에 머물면서 통치를 했다. 바람 신[風伯], 비 신[雨師], 구름 신[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을 주관했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재했다. 그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檢)이 나라를 열어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람 신과 비 신을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을 주관하며, 하늘과 귀신을 제사한 것은 곧 고대의 신권군주(神權君主)가 백성의 생명을 위해서 풍년을 기원하고 비를 빌던 무축적 신사(神事)였다고 하겠다. 이것이 후세에 하늘이 가물어 기근이 들었을 때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든지, 시장을 옮겼다든지 하는 것의 근원이다. 고려는 국초부터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무릇 가뭄을 만나면 반드시 무당을 모아 비를 빌거나, 혹은 시장을 옮기곤 하였다."(96-7)


6장 조선시대의 무속


"승려나 무당이 비를 비는 것은 고려시대에도 이미 그러했지만, 대개 고대에는 비단 무당으로 비를 빌었을 뿐만 아니라 무릇 하늘과 땅, 일월과 성신, 산천 제사에서부터 바람 신·비 신에 대한 제사에 이르기까지 무당을 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옛 무당은 이집트의 제사장이나 인도의 바라문(婆羅門, 브라만)과 마찬가지로, 제사와 기도 등 일체의 의례를 주관하던 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3교[유교·불교·도교]가 수입된 다음부터는 승려·도사·무격이 신을 제사하는 데 함께 쓰이게 되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기우 의식에 대하여 논하기를 〈성안의 집집마다 병에 물을 담고 버들가지를 꽂았다〉고 했고, 『인조실록』에서는 〈마을의 집집마다 물병을 마련하여 버들가지를 꽂아놓으며, 눈먼 무당이 기원을 한다〉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대자대비하여 고난을 구제할 때 버들가지로 감로수를 뿌린다고 한다. 물병에 버들가지를 꽂고 승려나 무당이 비를 비는 것은 곧 이런 뜻에서이다."(116-8)


7장 궁중에서도 무당을 좋아함


"태종 18년 무술(戊戌=1418) 봄 2월 임진(11일), 형조에서 무녀를 처벌하기를 청하면서 아뢰었다. 〈성령대군(誠寧大君)의 병환에 대해 국무 가이(加伊)는 기양(祈禳)해도 화를 면하게 하지 못했고, 무녀 보문(寶文)은 병세를 살피지 않고 궁궐에서 잡신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제사하여 불측한 일을 초래했으니,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합니다〉라 했다. (『태종실록』)" "세종 2년 경자(庚子=1420) 여름 6월 신해(14일), 무당을 시켜 별을 제사했으니, 대비의 뜻이었다. 계해(16일)에 임금께서 대비를 모시고 선암(繕巖) 아래 개천가로 납시어, 무당에게 명하여 장막에서 신에게 제사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성종이 일찍이 병에 걸리자 대비가 여자 무당을 시켜 기도하면서 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의 벽송정(壁松亭)에서 음사를 했다." "왕(연산군)은 무당굿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당이 되어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추어 폐비(廢妃, 그의 어머니 윤씨이다)가 빙의된 형상을 하였다. (『연산군일기』)"(126-30)


"중종 10년 을해(1515) 윤 4월 을해(18일), 이때 무녀(巫女) 돌비(乭非)가 스스로를 국무라 하고 대궐을 드나들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기도 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선조 8년(1575), 인순왕후(仁順王后)가 편찮았다. 그때 요망한 무당이 대궐을 출입하면서 오로지 기도와 현혹을 일삼았고 약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에 속아서 큰 변고를 초래했다." "이익(李瀷, 영조 때 사람이다)의 『성호사설』에서 이르기를 〈가까이는 서울에서부터 멀리는 주읍(州邑)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어[대궐을 출입하는 자를 국무녀(國巫女)라 하고, 주읍에 출입하는 자를 내무당(內巫堂)이라 한다] 마음대로 출입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속이 이를 따르게 되었다〉고 했다." "고종 때 두 무녀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성이 이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윤씨였다." "이·윤씨 뒤에 또 수련(壽蓮)이라는 여자 무당이 있어 대궐을 출입하며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의례를 했고, 두 아들은 모두 고관이 되었다."(131-4, 139-41)


8장 무격이 소속된 관서(官署)


"조선시대 초기를 보면 국무(國巫)를 성수청(星宿廳)에 두었는데, 아마도 이 제도는 고려시대에 유래된 듯하며, 이것은 곧 무당이 도교와도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격을 활인서(活人署, 의료기관)에 두어 병자의 치료를 맡겼는데, 이것은 무당이 의술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개 옛날에는 무당이 의약을 주관했음은 『산해경』에 보이며, 그러므로 의(醫)라는 글자는 무(巫)자를 따랐으니, 조선시대에 무로써 병을 치료한 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세종 18년(1436) 여름 5월 정축(12일), 삼정승인 황희, 최윤덕, 노한 등을 불러 정사를 논의하였다." "황희와 최윤덕 등이 아뢰기를 〈율에 따라 다스리지 않고 갑자기 놓아주면 요망한 무당들이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오니, 율대로 다스려서 그 죄를 알게 하고, 그 다음으로 특별한 은혜로써 감등해서 죄를 결정하여 활인원에 소속시키면 어짊과 위엄이 함께 행해질 것이며, 요망한 무당들도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했다. (『실록』)"(142-7)


9장 무업세(巫業稅)와 신포세(神布稅)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말했다. 〈민간의 풍속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기도와 축원을 하면서 이를 신사(神事)라 하는데, 법으로 능히 금하지 못하고 있다······무릇 무녀들은 모두 세금을 내고, 관에서는 그 물건으로 이득을 보는데 무녀의 재물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이는 모두 기도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 그래서 금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긍익(영조 때 사람)의 『연려실기술』에서 말했다. 〈우리 동방은 서울로부터 두루 8도에 이르기까지 무격의 번성함이 거의 남초(南楚)보다도 심한데, 이것은 부녀자들과 어리석은 백성들이 지성으로 믿고 부지런히 섬기는 탓이다. 재산을 없애고 풍속을 그르치며 나라의 기강을 경멸하고 거리와 마을을 음란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여러 읍의 수령들 중에 간혹 그것을 몹시 싫어하는 자가 있어 마음속으로는 쫓아내고 철저하게 금지하고자 하지만, 해마다 무포를 거두어들이는 이익이 있는 까닭에 이를 탐하여 감히 다스리지 못하니 개탄할 일이다.〉"(171-4)


10장 무병(巫兵) 제도


"고려 말에 무당으로 하여금 말을 내게 하여 군용에 충당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조선조 말에는 무당을 병사로 삼았다." "고종 9년 임신(1872) 5월 15일 무술(戊戌)에 충청수영의 포과(砲科) 설치 요청을 허락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수사 이규안이 보고한 바를 보니, 도내의 무부(巫夫) 가운데 대포에 정통한 자 3백명을 엄선하여 난후포수라 이름하고 청(廳)을 설치하여 교대 근무시키려고 한다 하니, 보고한 바에 따라 윤허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해서, 이를 윤허했다. (『일성록』)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말했다. 〈병인양요에서 교훈을 얻은 대원군은 대대적으로 군비를 정돈했는데, 전담기관을 설치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화약을 제조했다. 팔도의 배우[배우는 또한 광대라고 하는데, 곧 무부(巫夫)이다]와 놀이패의 무리들을 대오로 편성하여 총포에 대한 기술을 연습하도록 하고, 난후군이라 이름하여 여러 고을[州郡]에 배치하였다.〉"(179-81)


11장 요망한 무당과 음사(淫祀)를 금하다


"태조 7년 무인(1398) 여름 4월 경인(3일), 요망한 인물[妖人] 복대(卜大)가 처형당했다. 복대는 문주(文州) 사람으로, 여자 옷을 입고 무당 노릇을 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하고 어지럽혔다. (『실록』)" "태종 11년(1411) 12월 기미(9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사전(祀典)을 살펴보면 주작의 신만 따로 남방에서 제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그것을 없애라고 명령했다. (『실록』)" "세종 12년(1430) 8월 갑오(2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런 말에 현혹되어 병이나 초상이 나면 곧 야제(野祭)를 행하고, 야제가 아니면 재앙의 원인을 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남녀가 무리를 이루고 무격을 불러 모아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려 놓습니다. 예를 깨고 풍속을 무너뜨림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수령으로 하여금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관리나 리(里)의 정장(正長)·색장(色掌) 등도 함께 그 죄를 다스립시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실록』)"(183-85, 191)


"성종 9년 무술년(1478) 정월 경인(27일), 사헌부(司憲府)에 전지(傳旨)하시기를 〈음사를 금하는 법은 『경국대전』에 기재되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즉 도성 안에서 야제를 행하는 자,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친히 야제 및 산천·성황사(城隍祠)의 제사를 행하는 자, 사노비를 사찰이나 무격에게 바치는 자, 임금의 행차 때 길가에서 신에게 제사하는 자, 조부모나 부모의 영혼을 무당의 집에 맞이하여 혹은 지전(紙錢)을 쓰거나 혹은 형상을 그려 제사를 지내는 자, 상인(喪人)이 무격에게 가서 음사를 행하는 자, 공창무격을 믿고 따르는 자 같은 것은 이미 금지했다. 그러나 담당 관청에서 이를 받들어 시행하는데 점점 해이해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한결같이 『경국대전』에 의하여 엄하게 조사하여 금지하도록 하라〉 했다. (『실록』) 『대전회통』[형전(刑典)][속(續)] 신을 제사하는 것을 금한다[서울 안팎의 대소 음사는 성 밖 10리로 한정한다. 관에 신고하고 제사하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199)


12장 무당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8년(1533) 2월 16일(기축)조에 '용산강(龍山江) 무녀의 집' 운운이라는 기록이 있고, 근세에는 서울 남대문 밖의 우수현과 용산강의 노량진에 무격이 모여서 사는데[정조 때 무격을 강 밖으로 쫓아냈다. 강 밖이란 노량(露梁)을 말한다], 이는 모두 서울에서 쫓겨나 부락을 이룬 것들이다. 조선시대 이래로 유학자들의 무리가 이단을 공격하고 좌도(左道) 배척을 과업으로 삼아 무격을 쫓아내어 도성 안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하고, 승려들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개진하면서 '좌도와 이단은 백성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몰아내자'고 했다. 그렇다면 경성 문밖의 땅은 왕의 땅이 아니며, 경성 문밖의 백성은 왕의 신하가 아니라는 말인가." "고종 을미년(1895)에 내린 단발령의 경우에도, 성문 밖의 백성은 불문에 부쳤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만 도성 안만 법을 세우고 정치를 행하는 구역이고, 문밖의 8도 360주는 교화의 범위 밖에 두었다는 의미이다."(204-5)


13장 무격의 술법


1. 공중에서 소리를 냄[空唱] : 귀신이 공중에서 지르는 소리를 무당이 받아 사람의 화복을 말하는 것

2. 신탁(神托) : 신이 몸에 내리는 것

3. 거울을 걸어둠[掛鏡] : 신이 안에 있는 거울을 걸어두는 것

4. 부적[符呪]

5. 운명을 점침[卜命]

6. 쌀점[米卜]

7. 무당의 점복[巫卜]

8. 고리짝(대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 긁기 : 신에게 기도할 때 노래의 반주로 삼음

9. 접살법 : 사람이 죽으면 대략 사흘 뒤에 살신(저승사자)과 함께 돌아오는데, 이때 사자와 살신을 잘 대접하는 의식

10. 칼날 위를 뛰면서 추는 춤

11. 강신술(降神術)

12. 죽은 영혼을 위해 길귀신을 내리게 하다 : 죽은 넋에게 길을 알려주는 길귀신을 내려주는 의식


14장 무고(巫蠱)


"우리말에 무고(巫蠱)나 저주하는 일을 '방자(方子)'라고 하는데, 저주로 번역되는 것이 이른바 무고이다." "조선시대 여러 임금 때도 궁중에 또한 무고의 변괴가 많았고, 그때마다 당쟁에 이용되었다. 또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늘 저주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모두 여자 무당들의 짓이었다." "이러한 풍속이 대단히 성행했는데, 남의 집의 종이나 첩들이 조금이라도 원한이 있으면 곧 새나 짐승, 썩은 뼈나 허수아비 등의 물건을 사용하여 온갖 술법을 꾸며서 담 밑이나 부엌과 굴뚝에 묻어서 다른 사람에게 병이 전염되도록 한다. 이를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가끔 죽게 되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어서 시주병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는 자가 잇달아도 오히려 줄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무격 가운데 저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남의 집에 들어가면 바로 흉물(凶物)이 있는 곳을 알아 끄집어내서 없애버리며, 또 범인의 이름을 말하기도 하는데, 혹은 맞기도 하고 혹은 맞지 않기도 한다."(239-43)


# 시주병(尸주病) : 죽은 사람의 혼이 딴 사람의 몸에 붙어서 생기는 병


15장 무축(巫祝)의 용어와 의식(儀式)


1. 어라하만수(於羅瑕萬壽) : 백제 고유어로 왕을 어라하(於羅瑕)라 한다. 우리 임금님 만세라는 뜻이다.

2. 강남조선(江南朝鮮) : 중국의 강남 일대는 무격을 숭상하고 귀신 섬기기를 좋아했으니, 그곳에 빗댄 말이다.

3. 일출세계(日出世界)·월출세계(月出世界)·사해세계(四海世界) : 조선 태조가 도읍을 청할 때 왕사인 무학이 이를 점쳐서 한양에 도읍함에 따라 태평의 기상이 깃들어있음을 송축하는 말이다.

4. 만신(萬神) : 동이 민족의 고대 신사(神事)의 기록에 나온 것으로 추정하며, 우리 동방을 '신들의 집'이라 칭한 것에 근거를 둔다.

5. 삼신(三神) : 단군의 삼대인 환인(桓因)·환웅(桓雄)·왕검(王儉)을 가리킨다.

6. 시왕(十王) : 무속의 도교화 혹은 불교화를 보여주며, 명계(冥界)의 10대왕(제5가 염라대왕)을 가리킨다.

7. 삼불(三佛) : 무당이 사용하는 부채에 그려진 세 부처, 곧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가리킨다.

8. 만명(萬明) : 신라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을 신으로 삼은 칭호이다.

9. 칠금령(七金鈴) : 무당이 노래할 때 손에 들고 흔드는 7개의 금속제 방울이다.

10. 신단(神壇) : 무당이 굿할 때 부르는 노래말에 들어 있는 초단(初壇)·이단(二壇)·삼단(三壇)을 가리킨다.

11. 강신(降神)

12. 어비대왕(魚鼻大王)과 바리공주[鉢里公主] : 어비대왕은 『삼국유사』에 기재된 처용랑(역신에게 부인을 빼앗겼으나 이를 보고도 물러난 자)를 가리키며, 그의 일곱번째 딸이 바리공주이다(처용의 아내라는 설도 있다).

13. 법우화상(法祐和尙) : 지리산의 엄천사를 창건한 화상으로 불법 수행이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16장 무당이 행하는 신사(神事)의 명칭


"무당이 행하는 신사(神事)를 통칭해서 '굿'이라 하는데, 대개 우리의 속어에는 흉하고 험한 일을 가리켜 '굿'이라 한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비가 오는 날을 '궂은 날'이라 하고, 초상이 나면 '궂은 일'이라 한다. 이로 미루어 무당이 신사를 행하는 것은 그 목적인 흉사나 재난을 기원을 통하여 물리치려는데 있다 하겠고, 그런 까닭에 이를 이름하여 '굿'이라 하지 않았는가 한다. '굿'의 다른 이름은 '풀이' 혹은 '석'이라 한다." "'석'의 음을 한자로 옮기면 '석(釋)'인데, 이는 곧 석방과 해탈이라는 의미이다. 대개 인간의 운명은 본래부터 재난과 고통에 속박되어 있으므로 신에 대한 제사의 힘을 빌려 석방·해탈의 길을 얻는다는 말이다. '석'이라는 말의 근본은 불교의 용어에서 나왔다. 대개 우리 한국의 사찰에서는 새벽에 종을 치고 범패(梵唄)를 창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석(釋)이라 한다. 그 뜻은 곧 지옥의 중생이 이 종소리와 범패를 들으면 해탈과 석방을 얻고, 그 고뇌를 면한다는 것이다."(282-4)


1. 성주신사(城主神祀) : 10월 농사가 끝난 후 속칭 무오(戊午) 말의 날에 행하는 신사

2. 낙성신사(落成神祀) : 방이나 집을 다 짓고 난 후에 행하는 신사

3. 제석신사(帝釋神祀) : 제석은 곡식을 주관하는 신으로서, 농사가 끝난 후 성주신사와 같은 시기에 행하는 신사

4. 칠성신사(七星神祀) : 인간의 탄생과 수명 등을 관장하는 칠성신(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신)에게 행하는 신사

5. 조상신사(祖上神祀) : 조상신을 청하고 대접하는 신사

6. 삼신신사(三神神祀) : 태(胎)를 지켜주는 삼신에게 행하는 신사

7. 지신석(地神釋) : 토지신을 위안하기 위한 신사

8. 성황제(城隍祭) : 성황당(서낭신을 모시는 서낭당으로서, 소망을 기원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에서 행하는 신사

9. 당신신사(堂神神祀) : 특정 지역을 진호(鎭護)한다고 여겨지는 산신에게 행하는 신사

10. 별신사(別神祀) : 봄이 여름으로 바뀔 때 산과 강의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행하는 신사

11. 도액신사(度厄神祀) : 정월 보름 전에 1년의 재액을 예방하기 위해 행하는 신사

12. 예탐신사(豫探神祀) : 약혼한 남녀에게 흉액이 있을 때, 재액을 예방하기 위해 행하는 신사

13. 마마신사(마마神祀) : 천연두 신을 내보내기 위해 행하는 신사

14. 용신신사(龍神神祀) :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면서 밤과 쌀로 밥을 지어 물고기들에게 공양하는 신사

15. 초혼석(招魂釋) : 혼신을 불러 편안하게 하며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신사

16. 지로귀산음신사(指路歸散陰神祀) : 산 사람들이 현세에서 좋은 일을 하고 이를 망자에게 돌리기 위해, 곧 망자의 극락천도를 빌기 위해 행하는 신사


17장 성황(城隍)


"성황은 본디 『주역』의 태괘(泰卦) 상육(上六) 효사(爻辭)에서 나온 것으로, 성지(城池)를 말하는 것이며, 전(傳)에 이른바 '해자의 흙을 파서 높이 쌓아 성을 만든다'라 한 것이다. 추측하건대 성지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성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서 이로 하여금 옳게 죽지 못한 귀신들을 이끌도록 한 것인 듯하다." "이익은 『성호사설』 성황묘조(城隍廟條)에서 〈성황신에 고하여 여러 영혼들을 소집해서 맑은 술과 여러가지 음식을 권해드리니, 너희들 여러 귀신은 와서 이 음식을 흠향하고 전염병과 재앙으로 사람들의 화기(和氣)를 해치지 마라〉고 했다." "이익은 또한 〈우리나라 풍속은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여 혹은 꽃 장대를 만들고 여기에 지전(地錢)을 어지럽게 걸고, 마을마다 무당이 돌아다니면서 성황신이라 하면서, 백성들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을 계책으로 삼고 있으나, 어리석은 백성은 이것이 두려워서 앞을 다투어 재물을 바친다. 그런데도 관에서는 금령을 만들지 않으니 괴이하구나〉라고 하였다."(310-4)


18장 서울의 무풍(巫風)과 신사(神祠)


"우리나라 풍속에 무릇 사람이 노래와 춤을 하면서 흥을 북돋우면 '신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대개 무당에서 비유를 취한 것이다. 여자가 장차 무당이 되려면 먼저 수십일 병을 앓는데,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고, 반드시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춘 다음에야 마음이 시원하게 되며, 이것으로 무신(巫神)이 있어 그렇게 시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여러 집을 다니면서 쌀을 얻어다가 떡과 과자를 갖추고 무당에게 스승이 되어줄 것을 청하는데, 이를 불러 신어미라 하고, 큰 굿을 행하는데 이를 몸굿이라 한다. 이 여자가 한바탕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추면 무신이 접하고 병은 씻은 듯이 나으며, 이때부터 신어미로부터 무업(巫業)을 배운다. 서울에서는 무당을 만신(萬神)이라 하는데, 대개는 빌지 않는 신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서울 무당이 받드는 신에는 부군신(付君神)·군왕신(君王神)·대감신(大監神)·전내신(殿內神)이 있으며, 또 남산 국사당(國師堂)·인왕산(仁王山)·칠성당(七星堂) 등이 있다."(321-2)


1. 부근당(付根堂) : 서울의 관청마다 있는 신사(神祠)를 부근당이라 하는데, 이 말이 와전되어 신당의 네 벽에 남자 성기처럼 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매달아놓기도 한다.

2. 군왕신(君王神) : 고려 군왕의 신이라고도 하고, 군왕으로서 정상적인 죽음을 하지 못한 자(사도세자 같은)라고도 한다.

3. 대감신(大監神) : 대감은 집안에 재복을 가져다주는 신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4. 망량신(망량神) : 망량은 도깨비를 가리킨다.

5. 전내신(殿內神) : 관성제군(關聖帝君), 곧 관우를 가리킨다.

6. 손각씨(孫閣氏) 귀신 : 손씨 집안의 규수가 출가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를 일컬어 손각씨 귀신이라 한다.

7. 목멱산신사(木覓山神祠) : 목멱산은 남산을 가리킨다.

8. 백악산(白岳山) 정녀부인묘(貞女夫人廟)

9. 숙청문(肅淸門, 서울 도성의 북문)의 신상 : 숙청문기둥에 여러 신상을 걸어놓고, 연초에 여염집 부녀자들이 복을 빌었다.

10. 인왕산(仁王山)의 칠성당(七星堂)

11. 가택신(家宅神) : 집에는 호신이 있고, 부엌에는 조신이 있으며, 땅에는 토신이 있고, 우물에는 우물신이 있으니, 이들 모두를 합쳐 가택신이라 한다. 성주신(城主神) 역시 가택신 모두를 관할하는 명칭이다.

12. 천연두 신

13. 태자귀(太子鬼) 혹은 명도귀(明圖鬼) : 신에 의탁해서 말을 전하고 점을 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신령한 노파를 가리킨다. 민간에서는 어린아이나 천연두에 걸려 죽은 자의 영혼이 붙은 노파라고 생각했다.


19장 지방의 무풍(巫風)과 신사(神祠)


1. 경기도 : 송악신사(松岳神祠)는 성황(城隍), 대왕(大王), 국사(國師), 고녀(姑女), 부녀(府女)를 모신다. 그 밖에 개성 덕물산의 최영장군사, 적성 감악산의 신사등이 있다.

2. 황해도 : 해주 구성산의 신사, 장산도의 천비(天妃) 등이 있다. 천비는 해난(海難)을 구제해주는 바다의 여신이다.

3. 함경도 : 안변의 선위대왕신(宣威大王神), 경원의 두만강신사, 숙신각씨의 신사 등이 있다.

4. 충청도 : 충주의 월악신사(月岳神祠, 몽고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진천 길상산의 김유신사, 진천의 용왕신 및 삼신당, 속리산의 대자재천왕신(大自在天王神), 제천 등지의 김부대왕신(金傅大王神,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말한다) 등이 있다.

5. 강원도 : 원주의 치악산사, 고성신사(정월 보름 전에 귀신을 쫓는 의식을 행한다), 삼척의 오금잠신(오금잠은 쇠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태백신사(太白神祠) 등이 있다.

6. 경상도 : 합천의 정견대왕사(대가야국의 왕후 정견(正見)을 모신다), 군위의 김유신사, 진주 지리산의 성모사(聖母祠, 왜구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안동의 오금잠신, 경주의 두두리신(목랑[木郞]에게 제사 드린다) 등이 있다.

7. 전라도 : 광주의 무등산신사, 나주의 금성산신사, 전주의 용왕제, 고군산도(古群山島, 군산시 해상에 위치한 섬들)의 최고운신사(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을 말한다) 등이 있다.

8. 제주도 : 광양당(廣壤堂, 한라산신의 동생이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차귀당(遮歸堂, 목축·농경신의 성격을 띤 뱀에게 제사 드린다), 가상명혼(시집 못간 처녀와 장가 못간 총각의 혼백을 맺어준다) 등이 있다.


20장 부록: 중국 무속사의 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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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3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5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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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주술


14장 잉글랜드 주술 : 범죄와 주술의 역사


"주술은 마술의 나머지 종류들과 뚜렷이 구분할 수 없다. 성직자들이 마술이란 무슨 목적을 가진 것이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밀스런 수단을 이용해 (또는 이용하는 척하면서) 일반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방식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종류의 '주술'만을 따로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주술은 불행을 누군가의 은밀한 개입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주술사는 성별을 불문하고 (여성이 훨씬 많았지만) 은비한 수단으로써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자를 뜻했다. 그녀가 끼칠 수 있는 해악은 전문용어로 'maleficium'(저주염력)이라 불리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타인의 신체를 손상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가축을 해칠 수도 있었고, 자연을 거슬러 젖소의 젖이 나오지 못하게 할 수도, 버터나 치즈나 맥주의 실내제조를 좌절시킬 수도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주술혐의를 받은 활동은 대체로 이런 죄목들 중 하나에 속했다."(11-3)


"중세 말에 이르면 유럽은 다른 원시주민들의 주술신앙과는 구별되는 주술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주술사의 능력이란 악마와 계획적인 밀약을 맺은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녀는 충성을 맹세한 대가로 적에게 앙갚음할 초자연적 수단을 얻는 것으로 믿어졌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주술의 본질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마숭배라는 이단성에 있었다. 주술이 오래전부터 기독교 이단이라는 최악의 죄로 취급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숙적에게 충성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저주염력'은 부차적 활동, 즉 그 거짓 종교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타인을 해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주술사는 하나님을 배신한 죄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자였다. 바로 이런 개념에 의존해 제례 형태의 악마숭배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정립되었고, 이는 특히 주술사들이 함께 모여 그들의 주인에게 경배하고 그와 성행위하는 야간집회, 즉 '사바스'를 겨냥한 것이었다."(16-7)


"그러나 주술을 악마와의 밀약에 기인한 능력으로 보는 편협한 신학적 정의는 잉글랜드에서 완승을 거둔 적이 없었다. 많은 영어 논고들 및 주요 판례보고서들을 통해 대륙적 관점이 널리 보급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조차 그러했다." "비록 법원에서는 대륙 노선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는 편파성이 증가하고 있었지만, 민간에서의 주술 개념은 결코 악마숭배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았다. 이단에 대한 두려움이 시골마을에서 고발을 자극한 것도 아니었다. 대다수에게 '주술'의 본령은 여전히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능력이었다." "대륙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에서도 백주술과 흑주술을 싸잡아 비판하는 태도는 민간신앙에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에식스의 성직자 조지 기퍼드가 1587년에 강조했듯이, 주술사를 향한 사람들의 증오심은 악마와의 가상된 제휴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증오심이 아니라, 이웃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증오심이었다."(34-5)


15장 주술과 종교


"당시 종교가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인간적이고 내재적인 악마라는 관념을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면, 악마와의 밀약을 다룬 이야기들도 유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탄은 원래 구약성경에서는 중요성이 덜했으나 훗날 유대교와 기독교에 의해 우주 내 하나님의 강력한 적수라는 위상으로 제고되었다." "중세 신학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정교하고 세련된 악마론을 개발했던바, 대중에게는 그것이 한층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형태로 스며들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 이런 악마 개념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오래전에 소멸되었다. 하지만 기성 종교가 전력을 다해 인간적 사탄의 관념을 형성해온 수세기를 거친 16세기에는, 사탄을 가장 심지 굳은 마음마저 장악할 만큼 강력한 현실성과 직접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이런 개념을 약화시켰다기보다 강화시켰음이 거의 분명하다. 루터 자신이 가시적인 현실세계와 육신은 전적으로 이승의 주인인 마왕의 소유물인 것처럼 자주 언급했다."(74-6)


"악의 화신에 대한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위대한 신 존재 증명들 중 하나로 격상될 만큼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 교리를 부정하면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해야 하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은 유일신 개념이 승리를 거둔 이후의 일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마왕은 완전한 신격이라는 개념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신의 화신과 악의 화신이 동일한 토대에 의존했던 만큼, 그 두 개념은 불가분으로 얽혀 있었다. 하지만 마왕이 실재함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마니교의 이원론에 가까운 성질을 띠고 있었다." "어디든 악마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다양한 사회적 목적에 기여했다. 낯선 질병이나 동기 없는 범죄나 이채로운 성공에 대해 사탄은 편리한 설명 수단이었다." "사탄이 일상사에 개입한 일화들은 성직자들, 특히 퓨리탄 성직자들이 신도교화용으로 퍼트린 '심판' 및 '섭리'에 관한 이야기들과 동일한 목적에 기여했다."(86-8)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살아간 사람들 대다수에게 악령의 존재는 여전히 생생한 현실이었다. 성직자들이 악령을 막는 전통적 보호기능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금식과 기도를 신봉한 프로테스탄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국교회에 속한] 프로테스탄트들은 퇴마능력이 가톨릭교회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수수방관했던 것 같다. 일부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무속인들과 마법사들에게 의존했다." "국교회 성직자들은 악마추방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특권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당시 식자층이, 이를테면 존 셀던처럼 퇴마의례란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현란한 요술에 불과하다〉고 냉소하기는 쉬웠지만,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은 퓨리턴들이나 가톨릭교도들에 비해 국교도들이 훨씬 약했다. 실제로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사제의 마술능력에 대한 농민들의 믿음이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116-7)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은 일관된 신앙심이 인간 영혼에 대한 마왕의 공격을 빈틈없이 막아주지만 인간 육신과 재화에는 그런 보호막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마왕이 인간의 물질적 재화를 강탈하면서 추구하는 진짜 목적은 그의 신앙심을 약화시켜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을 배신해야겠다고 변심하도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저주염력'은 사탄이 인간 영혼을 사로잡기 위해 임시로 제공하는 미끼였다. 마왕의 희생양은 마왕의 물질적 공격을 피하려고 마술에 의존하며, 일시적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끔찍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욥(Job)처럼 굳센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재화와 육신이 철저히 파괴되더라도, 그의 영혼은 오히려 그 역경을 거쳐 더욱 단단해지지 않았던가." "따라서 저주염력을 물리치기에 적합한 행동은 수동적 인내였고, 마왕이 사람 몸이나 재화에 무슨 짓을 하든 결코 불멸의 영혼만은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인내를 뒷받침해야 했다."(125-6)


"종교는 확실한 보호책을 내놓지 못하면서도 대항마술을 금했다. 따라서 주술에 의한 피해를 저지하는 최종 책임은 법원 몫으로 돌아갔고, 주술사에 대한 법적 기소는 자칫 총체적 난관으로 치달을지 모를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하게 확실한 길이 되었다." "중세인들도 주술이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교회의 마술적 대책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감도 그만큼 강했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사람들은 교회의 처방을 준수하는 한, 주술사에게 피해를 입을 일이 없었다. 교회 처방을 준수하지 않으면 불평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점에서 교회마술에 대한 신뢰는 주술사 기소를 저지한 것이기도 했다. 레키는, 〈사람들이 별 변화 없이 미신에 물들어 있었더라면, 그들의 미신은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주술을 막아 준 장벽은 크게 위축되었다. 교회마술이 산산조각 나면서, 이제 막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주술의 위험에 대해, 사회는 법적 조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29-30)


16장 주술사 만들기


"(특정한 유형의) 저주에 효험이 있다는 지속적 믿음의 진정한 원천은 신학이 아니라 민심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은 비록 저주의례의 적절성과 효험 모두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저주를 유발한 가해 정도가 지나치게 가증스러우면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지지하실 것이라는 믿음도 자주 보여주었다. 그 무엇보다 효과를 발휘한다고 여겨진 것은 가난한 자와 상처받은 자의 저주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모든 저주들이 예외 없이 효력을 발휘한다. 이는 극적 효과를 노린 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자들에게는 없어도 가난한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에게만은 그런 보복능력이 있다는 믿음,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필연이었다. 이렇듯 튜더-스튜어트 시대의 종교이념들은 사회 하층민들이 발하는 저주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국교회의 법원기록이 보여주듯이, 저주와 기도를 구분하는 경계는 극히 애매했고, 저주는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경우가 많았다."(142-8)


"저주는 분노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좌절과 무력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휴 래티머는 우리들이 곤경에 처할 때 일부는 무속인을 찾아가며, 〈또 일부는 욕하고 저주한다〉고 말했다." "피해 당사자가 초자연적 응징을 비는 대안에 의지했던 것은, 그가 너무 약해서 혼자로는 더 이상 확실하게 복수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저주란 약자가 강자에게 사용한 것이었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니었다. 부친의 저주라는 두려운 무기가 적용된 것은, 자녀의 머리가 커져 부모의 일상적 통제수단을 벗어났을 때였다. 거지가 적선을 거부한 부자에게 달려드는 것은 일상적 구걸이 실패로 끝났을 때였다. 가난한 자들의 전형적인 죄는 〈그들이 스스로 바란 만큼 얻지 못했을 때 내뱉는 욕설과 저주〉였다. 단지 악의만으로는 그런 저주가 나올 수 없었다." "이웃의 적대감에 직면해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 대안적 보상수단도 없는 상황에서, 의례형 저주는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151-2)


"사법 관련 기록은 고발된 주술사들에 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준다. 첫째는 그들이 가난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들이 대체로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높은 학식을 지닌 권위자들은 더 심약한 성별이 사탄의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백들이 한 목소리로, 피고인들이 대체로 무기력과 절망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들의 가장 공통된 동기는 한없는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라 여겨졌다. 마왕은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을 약속했다." "홉킨스의 일부 희생자들의 자백들을 검토해 보면, 빈곤만이 아니라 종교적 좌절감도 마왕의 유혹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왕은 메리 베케트 앞에 나타나 그녀의 죄가 너무 커서 〈그녀를 위한 천국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종교적 강박과 물질적 빈곤이 결합해서 야기한 절망감은, 이단적인 구원수단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키울 수 있었다."(172-5)


"튜더-스튜어트 시대 마을생활 기록들이 남긴 단 하나의 인상이 있다면, 그것은 마을 여론의 독재, 그리고 사회부적응이나 사회적 일탈에 대한 불관용이었다. 시골 사회에는 개인의 권리, 사생활 같은 현대적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골 풍습은 기쁜 일과 슬픈 일, 결혼과 장례를 공동체 전원이 공유할 것을 요구했다. 휴일 관념도 없었다. 개개인의 가장 사사로운 일조차 공동체 전체의 정당한 관심사라는 견해에 도전하는 것도 일체 없었다." "이웃 여론의 중요성은 사회 전체적으로 인정되었다. 나쁜 평판은 교회법상 기소사유가 되기에 충분했거니와, 관습법 법원에서도 배심원들을 불편부당한 심사자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죄인과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마을 내에서 죄인의 전반적 위상을 잘 아는 주민들일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허용되었다." "주술사는 마을공동체가 사회적 화합을 도모하고자 일관되게 가혹한 조치를 취해온 악의적인 자나 부적응자의 극단적 사례였다."(186-91)


"공동체 내 나머지 성원들과 사이가 틀어져 외톨이가 된 노파에게는, 단 하나의 또다른 복수수단, 주술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잘 발각되지 않는 수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방화였다. 다른 시대에도 마찬가지지만, 17세기에 방화는 이웃에게 해를 입었다고 믿는 자들의 흔한 보복수단이었다. 그것은 큰 체력이나 재원을 요구하지 않았고 은폐하기도 쉬웠다. 그렇지만 불길은 일단 발화되면 쉽게 번진다는 점에서, 방화는 무차별적인 보복수단이기도 했다." "방화나 악담, 주술 같은 저항들이 얼마나 비효과적이었는지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다. 주술사도 방화범도 자신의 생활고를 이웃주민들의 인격적 결함 탓으로 돌렸을 뿐, 개인과 무관한 사회적 원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양자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쇄신이나 사회개편을 추구하기보다, 타인에게 사적인 위해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고난을 앙갚음하려 했다.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 급진주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가 결국 그것에 의해 폐기되었다."(194-7)


17장 주술과 사회환경


"주술은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일상생활 속 불행들을 설명해 주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돌연사한 자식, 잃어버린 암소, 일상 가정사에서의 이런저런 실패들, 이 모든 예기치 못한 재난들은 어떤 악의적인 이웃의 영향 탓으로 돌려질 수 있었다. 딱히 주술 탓으로 돌리지 못할 개인적 불행의 유형 같은 것은 없었기에, 때로 피해목록은 잡다한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초자연적 설명이 특별한 매력을 발휘한 것은, 위험의 다양함에 비해 인간의 무능력이 너무도 뚜렷한 의료영역이었다. 예컨대, 오늘날 암이나 심장병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돌연사들에 대해 당시에는 만족할 만한 설명방법이 없었다." "병의 원인을 주술 탓으로 돌리는 식의 설명에서 만족을 느낀 것은 서민들만이 아니었다. 주술 신앙은 당시 개업의들이 약점을 감추는 데도 일조했다." "당시 의사들이 주술이라는 진단을 암시하거나 확인해 준 사례들은 문헌사료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들만 추려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200-2)


"물론, 불행에 대한 설명대안들 중 가장 명백한 것은, 불행이란 죄를 처벌하기 위해, 혹은 신자를 시험하기 위해, 혹은 알 수는 없으나 틀림없이 정당한 어떤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야기해온 것이라는 신학적 견해였다. 하지만 이것은 편안히 받아들일 만한 교리가 아니었다." "불행에 대한 신학적 설명에서 가장 큰 난점은, 점성술적 설명을 위시한 여러 설명들과 공유한 난점으로, 진단이 주어져도 시정할 수단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하나님께 구제를 기도할 수는 있어도 확실한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어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술신앙의 매력은 바로 그 시정의 전망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은 각자의 불행을 자기 것으로 개인화함으로써 상황을 시정할 수 있었다. 우선, 상투적인 마술적 보호수단들 중 하나를 이용해서 닥쳐올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주술사가 이미 공격하고 난 이후라면, 그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 주문(呪文)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항주물들도 많이 있었다."(213-5)


"주술사 사건들에서, 최초 고발로부터 최종판결에 이르는 모든 절차가 매 단계마다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있으니, 사람들은 이미 참이라고 믿은 것에 대해서는 높은 수준의 증명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사법절차에서 피고 측은 죄목이 무엇이든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지만, 주술 유죄판결에 필요한 증거기준은 특히 부실했다. 17세기 악마론자들은 그 기준을 높이려 했지만, 주술이라는 불능범죄에서 단순한 〈추정〉과 확실한 〈증명〉을 구별하려 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수준에서는 용의자의 유죄를 손쉽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마왕의 낙인을 조사해 보면, 그녀의 몸은 반점이나 사마귀를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이 안 보인다면, 그녀가 잘라내 버렸거나, 마술로 감추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마왕의 낙인은 신비롭게도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술사가 자백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백을 거부하면 그녀에게는 위증죄가 추가되었다."(228-9)


"옛 장원체계는 고유한 구빈시스템에 의해 과부들과 노인들을 성심으로 배려했다. 빈민에 대해서도 지역마다 다양한 관습적 특혜들이 있었다. 하지만 튜더-스튜어트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배려들 중 다수가 쇠퇴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구증가는 많은 관습적인 소작인 권리들을 파괴하는 압력으로 작용해, 공유지 점유를 초래했고 경쟁적인 소작료 인상을 가져왔다." "공동체 내 빈민층의 처지가 열악해지고 있었던 것과 동시에, 상부상조라는 오랜 전통도 침식되고 있었다. 토지 확장, 가격 상승, 농경전문화의 진척, 도시 성장, 상업적 가치의 증가 등 새로운 경제적 발전 때문이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영주법원과 종교 길드들이 과거에 제공했던 마을 갈등 해소 메커니즘들도 소멸되었다. 많은 동시대인들은 그들이 분열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믿었고, 이를 중세의 사라져 버린 조화로움과 대조했다. 일례로 로버트 버튼은 소송사건이 유례없이 늘어난 것을 오랜 사회적 유대들이 쇠퇴한 탓으로 돌렸다."(248-50)


18장 주술의 쇠퇴


"17세기 후반 잉글랜드에서는 주술 기소도 현저히 줄었고 주술적 범죄가능성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확산되었다." "주도적인 회의론 저자들은, 주술이 악마숭배라는 '대륙적' 관점은 성경에 정당한 근거를 둔 것이 아니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사탄의 대중적 이미지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았음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회의론자들은 당시의 새로운 철학 조류로부터도 강력한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데카르트 추종자들과 토마스 홉스 같은 유물론자들은 무형적 실체라는 개념 자체를 용어모순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렇게 그들은 악마들을 자연세계 밖으로 쫓아냈다." "주술 기소 반대자에게 중요한 것은 마왕에게 아무 세속적 권력도 없다는 교리였다. 마왕은 육신을 가질 수 없었기에 그의 공격은 영적인 것으로 한정되었다." "공위기에 여러 신흥종파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조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마왕은 억압된 욕망을 표상할 뿐, 정말로 어떤 사람이나 피조물이 될 수는 없었다."(263-6)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해석은 정통파 집단들 사이에서도 한층 수용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 아이작 뉴턴 경은 악령이란 마음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교 스틸링플리트는, 기독교 도래 이전에는 악마들이 물리적 힘을 행사했을 수도 있지만, 이제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으니 그들 자신에서든 자식들에서든 재화에서든 더 이상 악마들로부터 해를 입을 리 없다고 단언했다." "이런 추세를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은 지옥의 몰락이었다. 많은 17세기 지식인들은 육체적 고통의 특화된 장소로서의 지옥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것을 어떤 정신상태, 즉 내면의 지옥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왕을 지옥 왕국에서 추방한 것 자체만으로도 주술사들이 마왕과 밀약을 맺을 가능성을 논박하기에 충분했다. 설령 어떤 노파가 마왕에게 자신을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하더라도, 그 보답으로 그녀에게 초자연적 능력이 주입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266-8)


"근본적으로 새로운 태도가 두 방면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첫째는 우주란 질서 있고 규칙적인 것이어서 하나님이나 마왕이 무시로 개입해 뒤바꿀 수 없다는 가정이었다. 이런 세계관은 새로운 기계론 철학에 의해 강화되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신학자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진척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질서정연하게 일하시며, 인간의 연구로 접근가능한 자연적 원인들을 이용해 역사하신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적을 논하는 것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회의론적 태도를 뒷받침한 두 번째 가정은, 이제껏 미궁으로 남은 일들도 하루 안에 자연적 원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낙관적 확신이었다." "17세기에 과학자들이 이룬 진보는 거의 모든 동시대인들이 자연지식의 응용력을 자각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일부 동시대인들에게는 인류의 미래 성장 잠재력에 대한 엄청난 확신을 심어 줄 정도로 극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주술이 수행해온 설명 역할을 추호도 미련 없이 폐기할 수 있게 해 주었다."(276-8)


"회의론적 태도는 단기적으로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유행한 신플라톤주의 우주관, 즉 수많은 비가시적이고 은비한 영향력들이 교차하는 우주라는 개념으로부터 큰 지원을 받았다. 많은 저자들이 주술을 회의했던 것은, 주술 외의 다른 문제에서 경박한 믿음을 유지한 덕이었다. 그들은 감응치료나 원거리 작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광석은 숨은 속성들을 갖는다, 사체는 살인자가 접근하면 피를 흘릴 수 있다, 눈에서 어떤 빛을 방출해 다른 사람을 〈흘릴〉 수 있다고 믿어졌다. 존 웹스터가 주술을 회의하면서도, 무기연고, 별의 영(星靈), 사티로스, 피그미, 인어, 바다괴물 등을 믿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회의론자들이 신비한 사건들에 대한 설명수단에서 주술을 배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연현상으로 가정한 범위가 그만큼 넓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학풍의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훨씬 쉽게 주술사의 저주염력을 〈자연적 원인에 의해〉 설명할 수 있었다."(278-9)


"이러한 지적인 원인 못지않은 사회적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 자주 주술사 고발을 일으켰던 자선과 개인주의 간 갈등이 17세기 후반부터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적 구빈법이 체계를 갖추면서, 빈민구제가 법적 의무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빈민구제는 더 이상 도덕적 의무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에 주술혐의를 유발했던 사회적 긴장과 죄책감은 점진적으로 약화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빈손으로 쫓아 돌려보내도 그의 양심에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다른 수단들이 존재한다고 자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술고발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이라면 그가 느꼈을 양심의 가책을 이제는 더 이상 느낄 필요가 없었다. 주술고발은 상부상조라는 공동체적 규범과 자조(自助)라는 개인주의적 윤리 간의 갈등을 반영했다. 그렇지만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갈등은 거의 해소되고 있었다. 상황이 변하면서, 주술고발을 자극해온 요인 자체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284-6)


제6부 관련 믿음들


19장 유령들과 정령들


"가톨릭 신학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반동종교개혁 이론가들은 영혼들이 몸을 떠나면 세 범주들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첫째 범주와 둘째 범주는 구원받은 자들과 저주받은 자들로, 이들이 되돌아올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셋째 범주는 연옥에 배정된 자들로 구성되는데, 가톨릭교시에 따르면 이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되돌려질 수 있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들은 유령에 대한 믿음을 가톨릭교회의 사기와 기만에서 나온 결과로 취급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치는 허깨비들은 무엇이냐는 의문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은 그것들이 영적 존재들로 인정될 수는 있으나 몸을 떠난 영혼들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극히 드물게만 선한 영들이요, 대체로는 마왕이 덫을 놓아 사람들의 충성을 확보하려고 보낸 사악한 영들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이 믿을 만한 존재들인지는 엄밀하게 검증되어야만 했다. 단호한 회의적 태도만이 그것들의 유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대책이었다."(294-5)


"그렇지만 대체로 신학자들은 가시적인 영들의 완전 폐기를 꺼렸다. 그들이 유령이라는 개념에 공감을 표한 것은, 무신론이 가톨릭교회보다도 참된 종교에 더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인 랠프 커드워스가 지적했듯이, 그런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무신론자를 막는 보루였다. 〈일단 가시적인 유령들이나 영들이 영원한 존재들로 인정되기만 하면, 그들과 세상 전체를 관장하는 유일하고 지고한 영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손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보스웰의 《존슨 전기》에 수집된 이야기들이 보여주듯이, 18세기 많은 지식인들에게 유령의 존재가능성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합리주의자들이 아무리 그들을 비웃었을지라도 말이다." "심오한 철학수준에서는 그 출현가능성이 신플라톤주의자들, 파라켈수스주의자들, 뵈메주의자들 등의 비학(秘學) 이론들에서 생생하게 유지되었다. 그들이 믿기에, 육체가 소멸되어도 별로부터 온 영은 그 주변을 계속 맴돈다는 것이었다."(298-300)


"당시 사람들은 유령을 위시한 허깨비들이 실존한다고 배웠기에 그것들을 더 쉽게 볼 수 있었다. 유령은 아무 곳이나 정처 없이 떠돈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반드시 뭔가 목적을 갖고 등장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무슨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결론내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주술사들처럼 유령들도 늘 동기를 갖고 움직였고,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일례로 셰익스피어 희곡들에서 많은 유령들은 늘 어떤 목적을 갖고 등장한다. 그들은 보복수단이나 보호수단이 되기도 하고, 예언하기도 하며, 제대로 된 매장을 염원하기도 한다. 그들은 늘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유령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코미디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거니와, 18세기 이전에는 가벼운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 편에서 보면, 유령에 대한 믿음이 수행한 역할은 한층 뚜렷해진다. 그 믿음은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발각될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범죄를 막는 추가 억지수단이 될 수 있었다."(308-13)


"유령은 윤리기준들을 전체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화목한 인간관계를 편들고 죄인의 잠을 방해했다. 하지만 유령은 조상을 향한 의무를 강화하는 데 특히 중요했다. 망자를 존경하도록 만드는 것, 유해를 훼손하거나 유언에서 원한 바를 이행치 않으려는 자들을 포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유령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런 기능이 모든 사회들에서 똑같이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중세 가톨릭교도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지 않으면 그 영혼이 연옥에 머물게 된다고 믿었던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교리는 각 세대가 앞 세대의 영적 운명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제 모든 개개인은 각기 대차대조표를 유지하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지은 죄를 후손들의 기도에 의해 속죄받을 수 없었다. 여기에 함축된 것은, 이제 사회구성원들이 서로의 관계를 철저히 원자론적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조상의 명복을 우선시한 의례집행에 그토록 많은 재원을 할애하지 않게 되었다."(320-3)


20장 시간과 징조


"길일과 흉일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 고전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은 그들에게 고유한 '불용일'을 유지했고, 중국을 위시한 고대 동양에도 비슷한 개념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길흉일에 대한 관념은 산업화 이전 사회라면 어디서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중세교회는 시간들 각각에 고유한 성질을 부여한 이런 미신들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정작 교회는 연중 모든 날들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장본인이었다. 시간이 균질적이지 않다는 확신을 강화한 면에서 교회력(敎會曆)을 능가한 것은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에조차 교회 역년(曆年)은 일자에 따라 금해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로 점철되었다. 모든 금요일들과 사순절 동안 육식을 금한 것은 특정 시점에 특유한 식습관을 조장했다. 모든 노동이 금지된 성인축일들은 시골 주민들 삶에서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따. 1년이 축일들을 경계로 분할되어, 어떤 과업이 연중 어느 시점에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더욱 편리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었다."(345-50)


# 불용일(不容日)은 국가의 공식행사가 열려서는 안 되는 날을 뜻한다.


"퓨리턴들은 교회축제들로 불규칙하게 점철된 전통 교회력 대신에, 6일간의 규칙적 일과와 뒤이은 하루의 안식일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해, 17세기 말에 이르면 사회 전체가 고루 받아들이게 되었다. 노동습관에서의 이와 같은 변화는, 사회가 점차 비균질적이고 불규칙한 원시적 시간감각을 포기하고 시간이 균질적으로 운동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수용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 안식일이 모든 일과가 금지된 금기일로 출발했던 것처럼, 퓨리턴들 사이에서도 일요일은 철두철미하게 준수되어야 할 엄격한 규칙으로 출발했다. 아무리 불편해도 상관이 없었다." "1651년 서리에서 어떤 젠틀맨 장례식 설교를 위해 초청된 목회자는 고인이 일요일에 병에 걸리자 의사를 부르지 않았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노라고 칭송했다. 이 장면에서 보이듯이, 합리적 계산에서 안식일을 지킨 측면은 그보다 훨씬 원시적인 가정에 의해 잠식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357-8)


결론


21장 상호연관성


"종교, 점성술, 마술은 어떻게 불행을 피할 것인지, 불행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가르침으로써, 일상문제들에서 사람들을 도우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 요점을 강조한다고 해서, 종교가 폄하되거나 마술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당시 기독교는 인간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기독교의 정교한 자기충족적 의례들은 인간 경험을 전체적으로 반영하는 상징체계를 형성했는데, 이 상징체계가 사회와 심리에 영향을 미친 범위는, 기독교의 마술적 측면들이 적용된 특수하고 제한된 범위를 훨씬 능가했다. 잉글랜드에서 민간마술이 수행한 기능들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것은 주술을 막는 보호를 제공했고, 질병, 도난, 불행한 인간관계 등에 대해 다양한 치료법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민간마술은 포괄적 세계관을 제시한 적도, 인간존재를 설명하거나 내세를 약속한 적도 없었다. 기독교 신앙이 삶의 구석구석을 지도한 원리였다면, 마술은 갖가지 구체적 난관들을 극복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383-4)


"불행에 대한 비종교적 설명들은 대체로 신학자들과 동일한 윤리적 가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고통은 누군가의 도덕적 과오에 기인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특히 고통받는 자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기인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목회자들은, 비록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이유를 하나님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받는 고통은 받을 만하기에 받는 것이라는 가정으로 되돌아갔다. 마찬가지로, 정령들과 유령들도 사회적 의무를 저버린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향이 강했다. 본인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시도처럼 보일 수 있는 주술조차도, 피해자 자신에게 어느 정도 도덕적 자책감이 없다면 이용하기 힘들었다. 이렇듯 불행과 죄책감 사이에 함축된 상관관계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도덕적 과오를 반성하게 함으로써, 기존 사회규범들 강화에 일조했다. 이 점에서 마술과 종교는 공히 중요한 사회 통제수단이 될 수 있었다."(386)


"비록 이 책에서 다룬 시대는 종교가 마술에 승리한 것으로 끝났지만, 승리한 종교는 처음과는 다른 종교였다. 이제 성직자들은 점차 불행한 사건들을 개별적으로 설명하길 꺼리게 되었고, 보상 없는 고통도 흔하다는 것을 차츰 인정하게 되었다. 스코트는 불행을 주술 탓으로 돌리는 자들에 대한 논박을, 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욥은 무고했으나 하나님만이 아는 불가해한 목적을 위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자연신학이 이룬 업적은 바로 죄와 불행을 잇는 고리를 최종적으로 끊어 버린 점이었다. 죄와 불행을 연관 짓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검토한 많은 원시적 믿음들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으니 말이다. 이런 변화에 편승해 17세기 후반의 기계론 철학은 정통교리와 편안하게 동행할 수 있었다." "마왕이 지옥에 유폐된 것만큼 하나님도 자연원인들을 통해서만 역사하는 존재로 제한되었다. 〈특별섭리〉나 개인적 계시는 자연법칙을 지키는 섭리 개념에 굴복했다."(389-90)


22장 마술의 쇠퇴


"마술의 쇠퇴를 가져온 한 가지 조건은 17세기 과학·철학혁명을 이룬 일련의 지적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식자(識者) 엘리트층의 사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일반대중의 사고와 행동으로 영향력을 확장해갔다. 그 혁명의 핵심은 기계론 철학의 승리였다. 기계론 철학은 중세 이래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뿐만 아니라, 한때나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자리를 넘보던 신플라톤주의 이론도 거부했다. 소우주 이론이 붕괴하면서, 점성술, 수상술, 연금술, 관상술, 점성마술 등 관련 마술들의 지적 토대도 모두 파괴되었다. 우주 삼라만상이 불변적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한다는 관점은 기적 개념에 치명상을 가했고, 기도로 육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약화시켰으며, 신이 직접 계시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위축시켰다. 데카르트의 물질 개념은 악령이든 신령이든 모든 영들을 영계에 유폐시켰는데, 영을 불러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의미한 야망이 될 수 없었다."(396)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합리주의적' 태도는 갈릴레오나 뉴턴의 작업보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16세기 초 파도바학파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피에트로 폼포나치는 자연세계 규칙성, 기적 불가능성, 영혼 필멸성 등을 주장했으며, 이런 주장은 16세기 이탈리아, 17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자유사상가들'에 의해 반복되었다. 이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은 새로운 과학이라기보다 고전고대 합리주의적 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종교적 설명이나 마술적 설명이 쇠퇴하면서 발생한 공백을, '자연적'이기는 해도 그릇된 원인들로 대체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감-반감 같은 신비한 영향력에 의존한 설명을 추구했다. 그들은 온갖 경이로운 것들을 모두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자연인식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과학혁명이 한 일은, 바로 이 같은 추론 방식을 극복하고 기계론 철학에 기초한 훨씬 안정적인 지적 토대로 고대 합리주의적 태도에 버팀목을 제공한 것이었다."(403-5)


"주술사, 유령, 하나님 섭리 같은 견지에서 불행을 설명하는 신비주의 설명법을 대체할 새로운 지식도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 못지않게 중요했다. 갓 태어난 경제학과 사회학은 이 기간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 개인의 경제적·사회적 곤경은 개인 외적인 원인들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 인적·계급적 차이는 교육 및 사회제도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자각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미 상식으로 통했다. 그것은 계몽운동의 핵심 주제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새로운 사회과학 분과들은 점성술의 설명력을 대체해갔다. 사회현상이 우연히, 제멋대로 발생한다는 관념은 거부되었다. 모든 사건에는 숨어 있을지언정 뭔가 원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베이컨은 '포르투나'(운명)을 비존재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제 운명은 새로운 역사법칙으로 대체될 터였다." "제임스 해링턴은 〈땅이나 하늘뿐만 사회에도 필연적 결과를 낳는 자연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420-1)


"역설적이게도 잉글랜드에서는 적절한 기술적 해법이 마술을 대체하기 이전에 이미 마술은 매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마술을 포기한 것이 기술의 분출을 가져왔지, 그 역은 아니었다." "따라서 17세기에 진행된 것은 기술적 변화라기보다 정신적 변화였다." "이 새로운 기대를 구체화한 것은 그 누구보다 과학자들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염원하는 것들'을 열거한 목록에는, 수명연장, 회춘, 불치병 치료, 고통 경감, 자연과정 단축, 새로운 식량자원 발견, 날씨 통제, 감각적 쾌락 증진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그는 점복이 자연에 근거하기를 원했다." "그가 염원한 것은 점성술사나 마술사나 연금술사가 염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설계한 방법론은 달랐다. 베이컨은 저들의 비밀주의 관행을 혐오했다. 저들의 믿음은 〈인간 이성보다는 인간 상상력에 협력하고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목적하거나 표방하는 것들〉만은 〈고귀하다〉는 점을 인정했다."(424, 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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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2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4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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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마술


7장 마술치료


"마술치료에는 중세교회의 신유(神癒) 능력에 대한 해묵은 믿음이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가톨릭 기도문을 라틴어로 외우는 것은 마술치료의 오랜 단골메뉴였다." "그 밖에 무자(巫子)가 사용한 주문들 중에는, 기독교 기도문의 저급한 변형, 해독하기 힘든 종교 시구, 그리스도나 성인의 생애에서 이끌어낸 것으로 보이는 일화도 주문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질병은 몸 안에 불청객이 들어와 발생하는 것이니 그 불청객을 불러내거나 쫓아낼 필요가 있다는 관념이 작용했다. 이와 더불어 종교적 언어가 이런 실용적 목적에 적합한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는 믿음도 가세했다. 어떤 주물(呪物)은 시술자의 능력과 무관하게 효험을 낼 수 있었지만 치료자의 특별한 능력에 의존하는 주물도 있었다." "주문·약·특별한 시술조건 등 원시치료법의 3요소를 행할 때, 비밀스러움은 늘 중요했다. 환자가 처방된 주물을 휴대하고 다닌 것은 무조건적인 신뢰 때문이었다."(14-6, 20-2)


"민간마술사의 의료행위에서 가장 이채로운 특징은 환자의 질환에 대해 늘 초자연적 원인을 진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민간마술사는 환자가 악령이나 유령이나, '잡귀'에 사로잡혔다, 혹은 환자가 '저주받았다', '악마 들렸다', 쉬운 말로 주술에 걸렸다(bewitched)는 식으로 진단했다. 민간마술사의 명성은 이런 진단에서 누린 권위에 크게 의존했다." "주술을 진단하기 위해 무속인은 다채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민간에 잘 알려진 기술은 주로 희생자의 오줌을 끓이거나, 주술 용의자의 초가지붕에서 짚을 한 움큼 떼어내 불태움으로써, 주술을 거는 장면이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것이었다. 거울, 수정구, 체와 가위, 부리는 영 등 다른 점복수단이 대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단 환자가 주술에 걸렸다고 판단되면 민간마술사는 다양한 치료법을 제시했다. 일부 치료법은 기독교적 수단─대체로 가톨릭과 연관성을 가진─을 적절히 운용하기만 하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기에 충분하다는 관념을 반영했다."(27-9)


"마술치료들 중에서도 공식 은전(恩典)으로 널리 활용된 것이 하나 있는데, 국왕의 안수치료가 그것이다. 국교회 지도급 성직자가 집전한 특별예배에서 국왕은 긴 줄을 이룬 환자 하나하나에게 안수로 축복을 내렸다. 환자가 차례로 나아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으면 국왕은 환자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고 임석한 성직자는 〈저들이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병든 자가 회복되리라〉는 《마가복음》의 구절(16장 18절)을 큰 소리로 낭독했다. 그러면 환자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국왕을 향해 나아갔고 이때 국왕은 흰 비단 리본으로 묶은 금화를 환자의 목에 걸어 주었다. 이것은 '왕의 병'이라 불린 연주창이나 갑상선종, 즉 목의 임파선에 생긴 결핵성 염증에 대한 치료의례였다." "그렇지만 국왕 안수의 치료효과에 대해 정확히 어떤 위상이 부여되었는지는 꼭 집어 말하기 힘들다. 국왕이 개인적으로 치유능력을 갖는지, 아니면 국왕의 역할은 환자를 대신해 종교에 호소하는 것으로 한정되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40-4)


"마르크 블로크에 의하면, 국왕 기적에 대한 신앙은 왕권의 초자연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집단오류의 산물이었다. 그 믿음에는 나름의 사회적 효용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왕을 모든 신민의 통일성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신비한 위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국왕이 다른 신분과 너무 밀접히 일체화되는 것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7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신비함이 약화되고 있었다. 군주를 가부장처럼 섬기는 자세는 공화주의의 노골적인 회의론에 직면했다. 이를테면 〈왕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라는 주장이 점증하는 추세였다. 이 점에서 국왕 치유력에 대한 신앙은 쇠퇴일로에 있던 정치적 태도, 즉 왕실혈통에는 독특한 특성이 있고 노아로 소급되는 특별한 족보가 있다는 믿음에 연결된 것이었다. 왕은 다른 인간존재와 구별되었고 하나님께 직고(直告)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이 쇠퇴하고 하노버 왕가가 승리하면서 국왕 기적도 종지부를 찍었다."(67-8)


8장 민간마술사와 민간마술


"치료는 민간마술사나 무녀가 수행한 다양한 마술적 기능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능 중에서 가장 공통된 것은 도둑잡기와 도난품 되찾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회에는 이를 대체할 만한 대안이 별로 없었다. 이런 경우에 무속인은 여러 가능한 점복방법들─체와 가위, 열쇠와 책을 이용하는 식의─중 하나를 이용해서 분실물을 훔친 자가 누구인지를 판단했다." "이런 도둑잡기 방법은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 방법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도둑 탐지는 백지상태에서 출발하지 않았고, 고객이 제공한 용의자 명단을 꼼꼼하게 조사하는 형식을 취했다. 민간마술사는 그 명단에서 진범을 골라내면 되었다. 민간마술사는 고객이 가장 강하게 의심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채는 것을 자신의 주 임무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현대 아프리카에서 점술사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러한데, 사회인류학자들이 관찰했듯이, 그의 활동은 잉글랜드 민간마술사의 활동과 매우 유사하다."(82, 88-9)


"도둑잡기 마술의 두 번째 특징은 범인은 겁에 질리게 하는 경향이었다. 이것도 현생 원시주민들의 점복에서 공통된 측면이다. 시죄(試罪) 기술이 고안되어 모든 용의자를 시험하는데, 여기에는 무고한 자는 해를 입지 않겠지만 진범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리라는 가정이 전제된다." "이런 절차가 탐지방법으로 비능률적인 것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기껏해야 비합리적이라고 기술될 수 있을 뿐〉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옳지 않다. 다양한 현존 원시사회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시죄는 용의자가 먼저 파악되기 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시죄는 용의자가 유죄임을 확정하는 부가적 수단이었을 뿐, 범죄자 탐지를 개시할 때부터 사용된 수단은 아니었다. 시죄의 사용은 초자연적 존재의 승인이 추가되지 않고는 형벌을 강제하기 힘든 중심권력의 취약성을 반영한다. 시죄는 심리적 목적에서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 중세 사법절차상의 시죄에서는, 의례 중 우물쭈물하거나 실수를 범하면 이를 가차 없이 유죄의 증거로 간주했다."(92-3)


"(이처럼 마술을 긍정하는 전통 위에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크게 고양시킨 것은 르네상스기에 유럽을 휩쓴 신플라톤주의 사조였다. 고대 이교 철학들 중 마지막 학파를 형성한 신플라톤주의가 부활하면서, 물질과 영혼 간 차이를 흐리는 경향이 조성되었다. 지구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물질덩어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활기찬 존재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영적 위계로 빼곡히 들어찬 우주는 온갖 은비한 영향과 감응이 무시로 교차하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우주는 살아 있는 유기적 통일체요 우주의 각 부분은 나머지 모든 부분들과 상응관계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색채, 철자, 수(數)에도 마술적 속성이 부여되었다. 이런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철학자의 일차적 과제였지만, 이를 자기 나름의 목적에서 이용한 것은 마술사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여기에는 지상계의 은비한 속성을 이용하는 자연마술, 별의 영향을 다루는 천체마술, 영적 존재에게 도움을 청하는 제례마술이라는 3개의 유형이 있었다."(100-1)


"지적인 마술연구는 (신플라톤주의를 재발견한) 피렌체 르네상스에서 촉발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시발점은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 같은 저자들의 플라톤주의였고, 파라켈수스와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작품들을 통해 알프스 이북으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헤르메스 전서》의 라틴어 번역본이었다. 피치노는 그 원전을 고대 이집트 신 토트,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의 교시로 알고 번역했다. 그 편찬서는 그리스도 탄생 후 몇 세기에 걸쳐 집성된 것이었지만, 르네상스 지성인들은 그리스도보다 훨씬 전에, 플라톤보다도 전에, 아마 모세와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믿었다. 《헤르메스 전서》는 이제 인류는 신비한 거듭남에 의해, 실낙원하면서부터 상실한 [아담의] 자연 지배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책에 수록된 점성술적·연금술적 지식은 온갖 종류의 신비하고 마술적인 활동에 우호적인 지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104)


"잉글랜드 명사들, 혹은 대학에서 활동한 마술사들이 르네상스기 마술적 사색에 큰 영향을 받았음은 입증될 수 있지만, 이것이 마을 무속인들에게도 참일 수는 없다. 무속인이 책을 소유한다든지, 스스로 선택한 이론체계에 의존해서 활동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물론 델라 포르타나 아그리파로부터 일부 점술과 비법을 발췌해 인쇄된 대중용 안내서는 무속인도 소장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속인의 비법은 거의 모두 친지나 이웃에게서 구술로 배운 것이었다. 그 바탕을 이룬 이론이라야 중세 종교로부터 파생된 것, 혹은 르네상스기에 이미 케케묵은 것으로 취급된 사고양태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치료법, 대항주술, 도둑잡기 마술 등은 동시대 지성인들의 사색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민간마술사의 절차 중에는 신플라톤주의 이론이나 헤르메스주의 이론을 열등한 형태로 반영하는 듯 보이는 것도 있지만, 민간마술사는 판에 박힌 인습과 의례에 의존했을 뿐, 선행 이론을 응용한 적이 없었다."(113-4)


"(점술사가 행하는) 점복은 고객 스스로 본심을 깨닫도록 해 주는 상담과정이었다. 점복은 고객의 염원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수정구 응시 같은 주관적 행위에는 최면술에서 말하는 자기암시 요소가 있었다. 이런 요소야말로 왜 반역자들이 자주 마술사를 찾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마술사에게 얻어내어 반역 결단을 재차 북돋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점술사는 고객의 결심을 더욱 굳혀 주고 고객이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도록 하는 존재였다." "점복은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한 자의 결정을 더욱 굳혀 주기도 했지만,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합리적인 근거에서는 선택이 불가능해 이리할까 저리할까를 망설이는 자에게, 점복은 무엇이든 선택하게 하며 그 자의적 선택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해준다." "점복은 사람들이 각자 환상을 따르는 것을 허용했다. 규범에 묶인 전통사회에서 그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을 허용한 것이 점복이었다."(141-3)


9장 마술과 종교


"16세기 중반에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가톨릭 세력은 너나 할 것 없이 민간마술에 강한 적대감을 표출했다." "일례로, 엘리자베스의 1559년 왕령은 평신도들이 〈주물, 흑마술, 마법, 주문, 마술원, 주술, 점치기 등 악마가 발명한 모든 기술이나 이미지〉를 이용하지 말도록 금했고, 마술사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하는 것마저 금했다." "가장 흔하게 언급되는 마술유형에는 도난품 되찾기, 주물을 이용한 사람과 가축 치료, 개개인의 운수에 대한 예언, 불법 기도문이나 주문의 이용 등이 포함되었다." "16세기 초에 교회는 의사와 조산원에 대한 면허권을 장악했는데, 이 조치의 주된 이유 중 하나도 민간마술을 억제하려는 교회의 조바심이었을 것이다. 개업의 면허권을 주교에게 부여한 1512년 법령은 당시 떠돌이 치료인과 경험치료인의 미신활동을 그 조치의 정당화 근거로 제시했다. 헨리 8세 치세기에 조산원 면허체계가 도입된 배후에도 분만시 마술 사용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음이 분명하다."(169-71)


"교회의 반(反)마술운동은 그것이 지속된 기간에조차 그 실효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교회법원이 주도한 모든 반(反)마술운동의 성패는 마을 성직자와 소교구 위원들이 얼마나 협조하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주교나 주교 대리인의 질의에 답해 용의자를 보고할 의무는 바로 이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민간마술사가 교회법원에 기소된다 하더라도─실제로도 수천 명이 기소되었지만─그의 최종 운명은 이웃주민과의 관계에 크게 좌우됐다. 그가 혐의를 부인하면, 통상적인 다음 절차는 교회법원 판사가 그에게 소교구 이웃 중에서 무죄를 증언해 줄 여러 명의 면책선서자를 대동하도록 명령하는 것이었다. 필요한 인원(대체로 4명~8명 사이)을 채우는 데 성공하면 훈방조치로 풀려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전반적인 상황은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가 거의 비슷했다. 교회의 억압수단이 민간마술을 공동체로부터 뿌리째 뽑아낼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던 것이다."(175-9)


"민간미술과의 싸움은 법정에서만이 아니라 설교단에서도 전개되었다. 성직자들은 열성을 가해 신도들에게, 백주술사들과의 거래조차도 결국은 영혼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경고를 반복했다." "이런 충고는 직업집단으로서 성직자들의 이해관계와 너무 눈에 띄게 들어맞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한층 큰 효과를 발휘했을지 모르겠다. 성직자치고 자신의 목회영역에서 민간마술사에게 강력한 경쟁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곤경이나 질환이나 손실이 생겼을 때 주술사에게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성직자의 불평거리였다. 이는 민간마술사가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 중 일부를 찬탈하려 위협한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만사가 하나님의 예측 불가능한 처분에 맡겨져 있으니 악마의 도움으로 분실물을 되찾기보다는 아예 잃어버리는 편이 낫다는 성직자의 고지식한 주장과 비교할 때, 유익한 결과를 제공하겠다는 주술사의 주장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180-2)


"종교가 여전히 마술적 측면들을 유지했다면, 역으로 마술은 동시대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마술사 편에서는 천상의 존재를 불러낸다는 것 자체가 종교의례였기에 당연히 기도가 큰 비중을 차지했고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이 중시되었다." "이 수준에서 마술활동은 종교적 탐색이었다. 그것은 연구와 조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지식을 추구하는 활동이었다. 순결한 삶이 전제되어야 과학적 발견이 가능하다는 것은 장구한 연금술 역사를 관류하는 관념이요, 17세기에 로젠크로이츠 형제단의 신조를 형성한 관념이었다. 그 형제단이 이름뿐이었는지 실체도 있었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형제단이 추구한 가치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영지'(靈知: gnosis)의 오랜 전통, 즉 기도며 금식이며 접신을 통해 계시적 지식을 추구한 기나긴 전통에 맞닿아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교와 마술은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하고 전포괄적인 진리를 향한 고된 여정의 동반자였다."(188-92)


"그러나 종교는 또 다른 경로를 통해 마술요법의 특권을 줄이는 데 기여하였고, 결국은 이것이 더욱 큰 효과를 발휘했다." "프로테스탄트는 마술적 해법이라는 관념 자체를 전면 부정했다. 이러한 시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거둔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닥친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구 노력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마술활동에 기댄 대안은 불경하고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비난에 직면했다. 피땀 어린 노력과 간절한 기도의 미덕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16~17세기 프로테스탄트 교시에서는 물론 가톨릭 교시에서도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이 점에서 양 진영의 종교적 교시는 새로운 정신모형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모형의 주조에 기여했다. 이 새로운 정신모형은 마술의 값싼 해법을 사악하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너무 안이하다는 이유에서 거부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마술요법을 거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208-9)


제3부 점성술


10장 점성술 : 점성술이 수행한 일과 그 범위


"고대 천문학자들은 지상의 생명체가 변화와 성쇠를 겪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천체는 규칙적으로 활동한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들은 우주를 두 영역으로 분할했고, 달 위쪽의 불변적인 천체계가, 모든 것이 죽음과 변화에 귀속되는 달 아래쪽의 지상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보았다. 별들은 저마다 특별한 성질과 영향력을 수동적인 지구로 내려보내는데, 그 성질과 영향력은 별들 상호간의 변화하는 관계에 따라 효과를 달리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천문 관찰기술이 미숙했던 이 초창기 과학자들은 황도 12궁이라는 고정된 배경막에 비추어, 태양, 달, 토성, 목성, 금성, 화성, 수성 등 7행성이 지구에 대해, 그리고 다른 행성에 대해, 위치를 바꾸어가는 단일한 천체계를 가정하게 되었다. 어떤 순간에 천체계가 발산하는 영향의 본성은 다양한 행성과 별자리의 위치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점성술사는 천체지도 곧 천궁도(horoscope)를 만들면서, 그 같은 위치를 분석하고 그 함축을 평가할 수 있었다."(217-8)


"이런 일반적 가정들에는 신비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16세기 초 식자층에게 점성술 이론들은 우주와 그 작용에 대한 이미지의 일부였다. 달 아래 세계를 구성하는 4원소(흙·공기·불·물)는 천체운동의 영향으로 끊임없는 교체 상태에 놓여 있다고 널리 이해되었다. 다양한 행성들은 열과 냉, 건과 습이라는 4개의 감각적 성질을, 서로 다른 정도로 전달하고 있었다. 이에 기인하는 상호작용 안에 모든 물리적 변화가 포섭되었다." "이 점에서 점성술은 독립적인 분과학문이라기보다, 널리 수용된 세계상(世界像)의 일부였다. 점성술은 생리학과 의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별이 식물과 광물에 미치는 영향을 가르친 것이었기에, 점성술은 식물학과 광물학의 골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심리학과 민족지학도 점성술 신조에 크게 의존했다. 점성술은 중세보다 르네상스 시대에 과학적 사고 구석구석에 더욱더 깊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제공한 지적 틀의 중요한 일부였다."(218-9)


"점성술적 관심이 중세에는 궁정사회나 왕실 측근으로 거의 한정되었던 데 반해 16~17세기에는 민간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이는 주로 인쇄술의 발명에 힘입은 것이었다. 궁정에 기반을 둔 중세 점성술사의 독자층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넓은 독자층이 인쇄술 덕에 점성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확산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근대 초 잉글랜드의 떠돌이 문헌류 중 가장 널리 유통된 것, 즉 책력이었다. 엄밀하게 말해, 책력이란 전혀 별개인 3종의 문헌을 합쳐 부른 것이다. 그 본령은 이듬해에 있을 일월식, 회합 같은 천문현상들과 [부활절처럼] 변동될 축일을 예고한 책력이었다. 둘째는 일·주·월과 교회의 고정된 축일들을 제시한 달력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당해 연도의 굵직한 사건들을 점성술적으로 예측한 예언력(豫言曆)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언이었다. 책력의 저자는 예언을 통해 다음해의 정치, 날씨, 작황, 지역민 건강 등을 상세하게 예측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보였다."(236-8)


11장 점성술 : 그 사회적·지적 역할


"점성술을 매력 있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그것의 원대하고 야심찬 지적 가정이었다. 점성술은 변화무쌍한 인간행동과 자연현상에 대해 하나의 일관된 설명체계를 제공하였으니, 원칙상 점성술이 답하지 못할 문제는 없었다. 지상의 모든 일은 점성술에 의해 설명이 가능했다." "이런 포괄성이야말로 점성술을 그토록 흡인력 있는 기술로 만든 것이었다. 이에 필적할 만한 과학적 설명체계, 특히 사회학이나 사회인류학이나 사회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체계는 아직 출현하기 전이었고, 기존의 사고체계 중에는 그처럼 어지럽고 다양한 인간사를 전체적으로 포괄해서 설명하려 애써보기라도 할 만한 것이─종교를 제외하고는─존재하지 않았다. 자연계에 대해서도 의학, 생물학, 기상학 같은 과학분과들이 설득력 있고 빈틈없는 이해를 제공할 수준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점성술은 보편적 자연법칙에 대한 가장 이른 시도로 무장한 채, 바로 이런 지적 공백을 파고들어 채워 주었다. 이 대안은 꽤 오랜 세월을 버텼다."(298)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에 점성술 이론들은 행성회합의 반복성과 그 회합이 세상사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고, 이는 역사학에서 말하는 '시대'(period) 개념의 형성에 일조했다. (20년 주기의) 소회합과 (240년 주기의) 중회합과 (960년 주기의) 대회합은 어쩌면 무한하고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남을 뻔했던 인간사의 흐름을 마디마디로 나누어 주었고 각 마디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이 점성술 이론들은 16~17세기 동안 잉글랜드 역사학에 영향을 미쳤다." "존 부커에 의하면 점성술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로 다른 풍토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간의 관습이며 의례며 예절이며 법률이며 기질이 왜 서로 다른지〉라는 문제에 답하는 경우처럼, 〈다른 학문들이 제시하지 못하는 이치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귀스트 콩트가 인정했듯이, 점성술사들은 진정한 역사학적 설명체계를 개척했다. 인간사회의 발전을 이끈 원리들을 인간 스스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성술의 가정에서, 우리는 근현대 사회학의 맹아를 탐지할 수 있다."(302-4)


"따라서 점성술적 설명이 매력을 발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적인 측면, 즉 점성술이 정합적이고도 포괄적인 사고체계를 제공한 측면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한층 실용적인 측면이었다. 점성술사는 개개인의 기질에 대한 현실적 평가를 제공함으로써, 각 개인이 자기인식으로부터 출발해 더욱 큰 자유를 전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누군가 천궁도 점성괘를 얻는 것의 매력은 오늘날 정신분석치료를 받는 것의 매력과 다르지 않았다. 개인의 가장 깊숙한 내면적 특징들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그 보답으로 주어져, 각 개인은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경계해야 할 터였다. 물론 점성술사들은 특정 개인의 탄생천궁도에서 얻은 점성괘란 그를 바람직한 미래로 안내하는 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점성괘가 불가피한 운명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이를 미리 알리는 것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311-2)


"그러나 만간수준에서는 점성술의 매력이 반드시 지배적 과학이론들에 좌우된 것은 아니었다. 점성술은 사회생활 환경 구석구석에 뿌리내린 상태였다. 서민들은 오늘날에 비해 천체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오늘날 인공조명은 우리를 별들의 끊임없는 변화에 상대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대도시 주민들 중에는 월령(月齡)을 실시간으로 정확히 아는 이들이 거의 없으며, 일월식은 전문 천문학자를 제외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지나가곤 한다. 그러나 산업화 이전 세상에서는 길을 밝히기 위해 횃불을 휴대했고 보름달에 맞춰 여행계획을 세웠다.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에서 하루 노동시간은 여름이 겨울에 비해 길었다. 민간에서는 낮 길이의 12분의 1을 1시간으로 보는 인위적 시간체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태양을 이용해 시간을 알렸다. 사람들이 천체운동에 해박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천체 변화를 지상 현상에 연결 지으려 한 시도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315-6)


"점성술은 예언에서 거듭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체계였다. 그렇다면 지성인들에게 정확한 예언을 거의 제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점성술은 그들의 충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점성술사들, 적어도 저명한 점성술사들은 그들의 예언이 구속적이거나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예언은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그들이 말한 전부였다.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패트리지에 이르기까지, 별들은 뭔가 의도하기는 해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모든 점성술 논고들에 공통된 상투어였다. 릴리는 자신의 세시력(歲時曆) 표지그림으로 자신의 초상을 삽입했는데, 그 초상 속 점성술사는 의미심장한 좌우명이 새겨진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별들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자유의지와 자기결정권을 발휘하면 천궁도상에 암시된 운세(tendencies)를 언제나 극복할 수 있었다."(319-20)


12장 점성술과 종교


"그토록 대대적인 신학적 반론을 자초한 것은 점성술이 자연과학을 표방한 탓이 아니었다. 점성술의 지적 취약성 때문도 아니었다." "신학자들이 점성술을 공격한 진정한 이유는 점성술사들이 가르치는 별 결정론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자유의지며 도덕적 자율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확신에 있었다. 이것은 중세교회 대표자들이 점성술사들과 결별한 지점이기도 했다. 그들은 점성술의 '자연'에 근거한 주장, 이를테면 천체계가 기후, 식물 생장, 생리 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여 점성술이 농업이나 의학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점성술의 '판별적' 측면, 즉 날씨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집단이든 개인이든 인간 행동에 대해서도 정확한 예언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점성술적 예언이 구체적일수록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은 그만큼 더 침해될 수밖에 없었다." "별들이 육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영혼까지 건드린다는 것은 [신학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372-3)


"하지만 이 수준에서조차 실질적 갈등보다는 표면적 갈등이 훨씬 많았다. 점성술사들은 인간 행동에 대한 자신들의 예측이 잠정적 추측에 불과함을 기꺼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천궁도는 확실성이 아닌 경향성을 가리킬 뿐이었다. 별들은 배려할 뿐 강요하지는 않았다. 점성술적 진단의 지향점은 의뢰인에게 자신 앞에 열려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주지시킴으로써 선택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의뢰인들이 이런 유보를 늘 명심한 것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식자층조차 개인적 약점과 불행을 서둘러 행성의 치명적인 영향 탓으로 돌렸으니 대중 수준에서는 당연히 (신학자들이 예견한 대로) 점성술로 인해 도덕적 책임감이 느슨해질 수 있었다." "점성술이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과 양립가능하다는 점성술사들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틀린 곳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그토록 미묘한 차이를 늘 구별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성직자들이 점성술의 함축을 걱정한 것은 옳았다."(374-5)


"성직자 편에서는 자신이 늘 해결해 주던 것이라고 예상할 만한 문제를 주민들이 점성술사에게 의뢰하는 것을 알고는 쓰린 속을 달랠 길이 없었다. 추상적 설명체계를 제공하기로는 점성술과 종교가 다르지 않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비스 사업이었던 점성술은 개개인이 처한 온갖 어려움에 조언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의뢰인들은 아내 문제, 하인 문제, 사업파트너 문제에서 도움을 청했고, 처신이나 충성 면에서 곤란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도 지도편달을 요구했다. 고통스런 시간에 의뢰인들이 교회의 오랜 목자적(牧者的) 보살핌에 기대기보다 점성술사를 향한다는 점, 바로 이 점이 분쟁 해결과 조언 제공을 특권으로 여겨온 성직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도덕적 지배력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보였다." "지적인 측면에서는 점성술 이론을 신학적 틀에 어느 정도 끼워 맞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점성술사들의 상담사업이 성직자의 목자로서의 역할을 잠식해 들어가자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382-3)


"모든 종파의 성직자들이 점성술을 의심했지만 종교개혁 이후 잉글랜드에서 가장 일관된 적대감을 보인 것은 퓨리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퓨리턴들이 분노한 것은 (숙명론을 긍정하는) 점성술 이론이 그들의 교리와 내용상 반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상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두 설명체계는 경쟁적으로 인간 삶의 흥망성쇠를 어떤 불변적이고 무소불위한 섭리의 견지에서 설명하면서 미래 사건의 가능한 경로에 대해 포괄적 예언을 제시하고자 했는데, 칼뱅주의와 점성술은 출발부터 숙적이었던 셈이다. 어떤 동시대인이 퓨리턴들에 대해 기록했듯이, 〈점성술사들은 하늘에서 징후들[궁들]을 살필 수 있을 뿐이지만 ··· 우리의 거만한 원칙주의자들(퓨리턴들)은 ··· 부당하게도 이보다 훨씬 비밀스러운 조짐들과 ··· 징후들에 의해 만인의 미래 상태와 구원을 판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칼뱅주의 사상가들은 예정의 비밀이란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385, 393)


제4부 과거에 기대기


13장 옛 예언들


"옛 예언들의 본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그것들은 늘 중세적 기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고, 태고성을 가장해 특권적 지위를 이끌어냈다. 나아가 일부 동시대인들은 예언자의 예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지 접신이나 점성술로부터 유래하는지 따지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예언의 엄밀한 기원과 토대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언의 존재 그 자체였다." "예언의 영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는, 역대 정부들이 한결같이 예언의 유포를 금지하고 그 유포자를 처벌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우려는 예언과 정치활동 간에 상존해온 긴밀한 관계에 의해 촉발되었다. 멀린의 예언들은 14세기에는 잉글랜드의 프랑스 왕위계승권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15세기에는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대권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비슷하게 아일랜드인들도 적절한 예언들을 퍼트림으로써 외래인 정복자를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444-8)


"이렇듯 전통적 예언들은 자의적 해석을 거쳐 반정부 선동에 널리 이용되었다. 그렇지만 국왕 지지자들도 로마교황청과의 불화를 정당화하는 작업에서 예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리처드 모리슨은 《에스드라》 상하권에 등장하는 사자를 헨리 8세와 동일시한 왕당파적 예언을 구성해서 웨일스 예언들을 맞받아쳤다." "예언과 반란의 연동성은 에드워드 6세 통치기간 내내 이어졌으며, 특히 1549년 전국을 뒤흔든 일련의 반란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요크셔의 노스라이딩과 이스트라이딩에서 일어난 반란은 족 폭스가 〈맹목적이고 허황한 예언〉이라 부른 것에 의해 촉발되었다." "에스파냐와의 갈등도 이런 예언들에 대한 관심을 유지해 준 힘이었다. 무적함대가 침공한 해가 1588년이었다는 것은, 중세 독일 천문학자 쾨니히스베르크의 요하네스 뮐러(레기오몬타누스)가 행한 것으로 믿어졌고 당시에도 널리 유포되어 있던 예측, 즉 1588년이 '경이로운 해'가 되리라는 예측에 대해 소급적인 정당화를 제공했다."(458-9, 464)


"그렇지만 옛 예언의 진짜 전성기는 내란과 함께 찾아왔다. 제프리 예언들은 점성술적 예언력 및 종교적 계시문학과 결합해 전례 없이 많은 양의 예언적 조언을 평신도 대중 앞에 제시했다. 비록 그 세 장르는 서로 구별되었지만 각각의 정체성이 늘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점성술사 릴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옛 예언들이 다시 유통될 수 있게 만든 주역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력에 〈잉글랜드인 멀린〉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제프리 예언들을 집성한 편찬서에는 케플러의 점성술적 예언들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런 예언들의 저자들로 믿어졌던 비드나 그로스테스트 같은 옛 성인들이 모두 가톨릭교도들이었음을 걱정한 인사들이 없었던 거 같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종류의 계보 엮기는 예언의 권위를 현저하게 높일 수 있었다. 가톨릭적 과거는 사제들이 프로테스탄트 후배들에게는 없은 마술적 권능을 발휘한 시절로 보였고 성인들에게만은 예언과 예지가 허용되었던 시절로 보였기 때문이다."(472-4)


"예언신앙의 중심에는 현대인의 가장 혁명적인 과업조차 옛 현인들이 이미 예언한 것이라고 믿고픈 충동이 놓여 있었던 것 같다. 예언이 실천한 것은 현대인의 열망과 태곳적 열망 간에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지금 일어나는 변혁은 옛 선배들도 예언했으니 그리 급진적인 것은 아니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는 혁명적인 조치를 오래전에 인정된 것이라는 인증서로 감춤으로써, 그 조치를 포장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것은 현재의 강력한 금제를 무릅쓰고 추진되는 새로운 사업에 (인류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면허장'을 제공했다. 예언은 전쟁이나 반란을 정당화해 주었고 전대미문의 변화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 격동의 시대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존 하비가 주장했듯이, 예언이 거듭되는 것은 〈현재의 변화를 돕기 위해서요, 분주하고 열성적인 자들의 활기를 진작하기 위해서인즉, 그럼으로써 이런저런 혁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502-3)


"이런 면허장이 굳이 필요했던 것은, 16세기 잉글랜드인들이 기존 정치질서를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편리한 물건처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안배한 질서였으니 그것에 도전할 정도로 사악한 반역자에게는 하나님이 처벌을 내릴 것이었다. 누군가 모반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 순간부터 그는 그 시대의 도덕률을 어긴 셈이요 자신을 키워 준 사회정치적 질서를 등진 셈이었다. 당시에 예언은 이런 극단 행동에 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호소력을 발휘했다. 이상적으로 말해 예언은 신성한 것이었기에 반란행위가 하나님 의지에 따른 것이요 따라서 죄가 아니라 적극적 의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내란기 동안 혁명집단들이 잇따라서 자신들의 열망을 신학적 언어로 포장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학적 언어의 대안으로 옛 예언들에 의존하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이었다. 옛 예언들은 그 애매하고 중의적인 표현으로 인해 얼마든지 새로운 조건에 맞추어 각색될 수 있었다."(503)


"순환적 역사관이 왜 직선적 역사관으로 교체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지성사의 큰 수수께끼들 중 하나이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추측성 답변을 시도하자면, 변화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변화 그 자체라고 답할 수 있겠다. 특히 사람들 마음에 자신들의 세계가 선조들의 세계와 다르다는 의식을 새겨준 것은 뚜렷이 구별되는 기술적, 지적 추세였다. 화약, 인쇄기, 선원용 나침반이 등장했고 지리상 발견의 영향으로 세계의 외형이 바뀌고 있었는데, 이런 추세는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스·로마인의 세계를 정말로 답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운 기술을 개선하고자 헌신하며 이에 힘입어 지식은 날로 축적된다는 장인적(匠人的) 관념도 이런 변화에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 인쇄술이 현재와 과거의 차이를 크게 부각시켰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모든 서적에는 고유한 출판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승된 서적은 낡은 가정과 관념을 위한 기념비에 불과했다."(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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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3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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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환경


"튜더와 스튜어트 시대의 잉글랜드는 한편으로는 영양부족과 무지에 시달린 인구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한 저개발 사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문필문화를 꽃피우고 과학과 지적 활동에서 전대미문의 흥분을 경험한 사회였다." "이 시대는 희곡, 시, 산문, 건축학, 신학, 수학, 물리학, 화학, 역사학, 문헌학, 기타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엄청난 창조활동이 분출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인구의 압도적 다수(17세기 중반에 성인 남성의 2분의 1에서 3분의 2 사이)는 여전히 문맹이거나 기호로 서명하는 수준이었다. 생계, 교육수준, 지적 감수성에서 이토록 큰 편차는 당시의 잉글랜드를 다양한 사회로, 그만큼 일반화하기 힘든 사회로 만든다. 16~17세기 내내 조건이 변화했는데, 그 기간 내의 어떠한 시점에서든 다수의 이질적 신앙체계가 존재했고 지적 정교함의 수준도 가지가지였다. 더욱이 활판인쇄술의 발명은 공간상 먼 사회나 시간상 먼 고대로부터 유입된 다양한 사고체계가 유지되고 확산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31-2)


# 튜더 왕조(1485-1603)와 스튜어트 왕조(1603-1714)


"이런 공동체[소규모의 동질적 공동체]에서는 모든 주민이 동일한 믿음을 공유하며 다른 사회로부터 유입된 믿음은 별로 없다. 반면에 역사가가 떠안는 것은 그처럼 단순하고 통일적인 세계가 아니라 역동적이고도 무한히 다양한 사회이다. 그것은 사회적·지적 변화가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사회요, 무수한 세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 사회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신앙체계들도 다양한 사회적·지적 층위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신앙체계들의 핵심 특징 중 하나는 불행을 설명하고 줄이는 데 골몰했다는 점이다. 공통 관심사가 그러했다는 것은 환경이 매우 불안정하고 위협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말은 환경적 위협이 그런 신앙체계들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대다수는 오래전부터 전승되었으며, 그것들이 만개한 사회보다 훨씬 일찍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17세기 환경에서 몇몇 고유한 특징이 그 신앙세계들에 덧칠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33)


"이 시대의 사회환경에서 빈곤과 질병과 돌발 재난은 만성화된 특징이었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 처한다면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히겠지만, 당시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느꼈을 것이라는 가정은 시대착오의 오류이다. 튜더-스튜어트 시대 잉글랜드에서 질병과 낮은 기대수명은 친숙한 일상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유아기에 잃을 수도 있음을 잘 알았기에,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야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부는 한쪽이 죽은 후에야 남은 다른 쪽이 재혼한다는 관념에 익숙했다. 빈민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스토아 철인처럼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곤 했다. 많은 부르주아 논평자들이 페스트의 위험에 대한 그들의 불감증을 언급했으며, 사람들이 자기 안전을 위한 규제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빈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릴 때는 식량을 구하려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당시 정치적 급진주의에는 거의 기여한 것이 없었고,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58)


제1부 종교


2장 중세교회의 마술


"종교가 초자연적 수단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지상의 생활환경을 통제할 수단에 대한 전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도 이런 규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라는 신생 종교로의 개종은 개종자들의 기대에 자주 의존했다. 개종자들은 저승에서의 구원수단만이 아니라 새롭고도 한층 강력한 마술도 얻으려 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 제사장들이 대중 앞에서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켜 바알 신의 숭배자들을 압박하고 무력화하려 부심했듯이, 초대 교회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키고 초자연적 치료를 수행함으로써 추종자 무리를 이끌었다. 신약성경과 교부문학은 이 같은 초자연적 활동이 선교와 개종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은 곧 신성함의 필수불가결한 증거가 되었다. 초자연적 권능은 앵글로색슨 교회의 이교(異敎) 반대투쟁에서 필수적 요소였으며, 선교사들은 기독교 기도문이 이교 주문(呪文)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한목소리로 강조했다."(70)


"중세교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일으키는 것이 교회의 진리 독점권을 증명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라는 전통에 편승하고 있었다. 그 전형을 일찍이 정립한 것은 12~13세기의 성인(聖人)전기물이었다." "성인숭배는 중세 사회조직의 중요한 일부였고, 모든 교회는 각기 나름대로 수호성인을 모셨다. 강한 지방색은 토템숭배에 가까운 성격을 성인숭배에 부여했다." "이렇듯 어떤 개인을 특정 성인과 엮어 준 것은 지엽적인 충성심이었다. 하지만 성인숭배를 전체적으로 지탱해 준 것은 옛 성인과 성녀가 도덕적 행위의 귀감이요, 초자연적 능력으로 추종자들이 지상에 서 겪는 불행과 재난을 줄여 주는 존재라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종교개혁이 임박한 시점에서 기성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다." "성인은 매개자에 불과하니 하나님이 그의 간원을 못 들은 체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교회는 신자들이 낙관적 기대에 부풀어 성인에게 기도하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다."(71-5)


"퇴마의식으로 정화된 성수는 악령과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질병과 불임 치료제이기도 했고 가옥과 음식에 축복을 비는 도구이기도 했다." "이런 절차들이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살얼음 걷듯이 만든다고 주장한 신학자는 없었다. 오히려 신학자들은 그 절차들이 단지 영적이나 상징적인 힘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굳게 믿었다." "성수뿐만 아니라 교회는 갖가지 예방부적과 기복부적의 사용을 장려했다." "비기독교적 상징물을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복음서 성구나 십자가 형상을 종이에 적거나 메달에 새겨 착용하는 것은 미신이 아니라고 신학자들은 주장했다. 이런 부적들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원래 부활절 양초로 제작되고 교황의 성별을 거쳤던 작은 양초 케이크에는 이제 어린 양과 깃발의 이미지가 새겨졌다. 이 이미지는 악마의 급습을 막는 수호기능만이 아니라 천둥, 번개, 화재, 익사, 분만 중 사망 등 다양한 위험에 대한 예방기능을 의도한 것이었다."(78-81)


"그러나 중세교회가 의도적으로 정교한 마술체계를 개발해 평신도들에게 전파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억지주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도문 암송, 성인숭배, 성수 이용, 성호 그리기 같은 의례들은 모두 속박용이 아니라 위무용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 성육신의 영속적 확장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자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따라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 주는 시혜자임을 자임했다. 물론 성사들은 집전 사제의 도덕성과는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즉, 행해진 일 그 자체로부터 ex opere operato) 효력을 발휘한 것이었고, 따라서 중세 기독교에 현저히 마술적 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성사를 제외한 교회 사업은 대체로 선량한 사제와 경건한 평신도에 의해서만 (즉, 행한 자의 행한 일로부터 ex opere operantis)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 대다수 교회 사업은 참여한 자들의 영적 조건에 의존했다. 일례로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을 지닌 자도 신앙심이 약하면 그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11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란 신앙기관인 것 못지않게 마술적 기관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강화한 몇몇 조건을 검토해보면, 첫째는 최종 개종이 남긴 유산이었다. 앵글로색슨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모신 성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이 있음을 강조했으며, 나아가서는 그 성인들이 이교도가 제공한 어떠한 마술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예화들을 유포했다." "교회의 마술적 주장을 강화한 또 다른 조건은 교회 스스로 퍼트린 선전이었다. 신학자들은 종교와 미신 사이에 뚜렷한 선을 그었지만, 그들의 〈미신〉 개념은 상당한 융통성을 가진 것이었다."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의례는 미신이고 교회가 수용한 의례는 미신이 아니었다." "신학자들은 그 신비한 권능이 신자를 악령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주목한 것은 교회 수중에 있는 대항마술이었다. 교회는 바로 이 대목에서 독점권을 주장했다."(112-6)


3장 종교개혁의 영향


"마술과 종교 간 경계선을 흐린 것이 중세교회였다면, 그 경계선을 다시 뚜렷하게 부각시킨 것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가톨릭 의례의 근간에 잠복한 것으로 보인 마술적 함축을 처음부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많든 적든 이용할 수 있다는 교회 주장을 전면 부정했다. 교회가 주관하는 축원, 퇴마, 주문, 성별, 그 어떤 것에도 효험이 있을 수 없었다. 성직자가 평신도 죄인들에게 내리기로 한 저주도 마찬가지로 효험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법을 위반했다면 하나님이 이미 그에게 저주를 내렸을 것이니 교회가 상관할 바 없으며, 위반하지 않았다면 교회의 저주가 효험이 없을 터였다. 이처럼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하나님이 정한 길을 따라 수행되는 것처럼 가장하는 교회마술을 거부했다. 교회가 도구적 권능을 소유한다는 주장, 교회가 그리스도의 일과 직분을 능동적으로 공유할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주장은 부정되었다."(119-22)


"이 모든 것은 가톨릭 핵심교의인 미사에 대한 공격을 예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주문과 퇴마에 효험이 없다면, 성변화도 거짓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집트의 어느 마술사도 실천할 수 없었고 감히 비슷한 짓조차 시도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빵과 포도주를 변성한다는, 명백히 마술적인 권능을 가장하는 것은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칼뱅은 교황의 무리가 〈진정으로 효험이 있는 신앙과는 무관하게, 성사들에 미술적 힘이 있음을 가장한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성별된 성체의 기적적인 성변화 의례는 약식추모의례로 대체되었고 성체유보도 중단되었다. 성체배령이나 성체묵상이 세속적 이익과 직결된다는 낡은 관념 역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의 표적이었다. 성체배령자 수만큼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는 과거의 신중한 태도조차 공격을 받았다. 성찬례에 대한 그들의 처방은 그 해묵은 미신을 뿌리부터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123-4)


"성사의 마술적 측면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공격은 기성 교회 의례들을 현저하게 잠식하였다. 가톨릭교회의 7성사(세례, 견진, 혼례, 미사, 서품, 고해, 종부) 가운데 세례와 미사(성체성사)만이 성사로서의 뚜렷한 특징을 유지했지만, 그 두 성사의 경우에도 중요성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547년과 1549년 사이에 교회는 성찬례용 물과 기름과 빵도 모두 폐기했다. 2차 에드워드 기도서에 규정된 환자방문 의례에서는 환자 도유가 생략되었다. 성별된 종이 악마를 쫓는다는 믿음도, 성찬례용 양초와 십자가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포기되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의례만으로 물질적 효험을 기대할 수 없고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은총을 이끌어 내거나 강압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 견해가 실질적으로 수용되었다. 신흥종파 지도자 존 케인이 적시했듯이, 〈하나님을 위하도록 규정된 성사들이 주물이나 흑마술처럼 ···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130-1)


"프로테스탄티즘은 초대 교회가 유화적인 태도로 수용했던 이교 유산에 대해서도 새로운 투쟁에 착수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교 제민족의 미신들〉이 총결집된 거대 창고로 묘사되었으며, 가톨릭 의례의 대부분은 고대 이교의례의 눈가림식 변형으로 간주되었다. 성수는 로마의 정화수(aqua lustralis)에, 성축일 전야제는 로마의 바커스 축제(Bacchan alia)에, 참회의 화요일은 로마의 농신제(Saturnalia)에, 기원 행진은 로마의 풍년제(ambarvalia)에서 각각 유래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많은 노력이 기울어졌다." "동시대인들에게 뚜렷한 퓨리턴적 특징으로 각인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철저함이었다. 존 해링턴 경이 풍자했듯이, 누군가 〈예수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독실한 퓨리턴은 〈그런 것은 주술이니 저주받아 마땅하리라〉고 말할 터였다. 사소한 문제조차도, 퓨리턴들은 비기독교적이거나 마술 낌새가 있는 모든 의례, 모든 미신, 모든 관행을 일소하려는 욕망을 표현했다."(146-9)


4장 섭리


"종교개혁 이후로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승에서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모든 글들을 관류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연(혹은 운)을 그 가능성마저 부정한 점이었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우연이나 운의 작용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던 반면에, 필킹턴 주교 같은 16세기 저자는 우연 따위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보에티우스에서 단테에 이르는 중세 기독교 문학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믿음과 함께 운의 여신 포르투나라는 이교 전통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튜더 시대의 신학자들에게는 운이라는 관념 자체가 하나님 주권에 대한 모독이었다." "삶이란 제비뽑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합목적적 설계가 반영된 것이라는 자각은 이런 양상으로 모든 기독교도의 가슴에 새겨졌다. 뭔가 잘못되면 불운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작용했다고 믿어야 옳을 터였다. 이승의 모든 사건은 제멋대로가 아니라 정연한 질서를 갖는다."(174-6)


"17세기 후반의 기계론 철학은 특별 섭리─하나님은 서로 다른 갈래의 인과(因果)사슬에 한꺼번에 작용함으로써 동시다발적으로 대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개념─의 교의에 큰 압박을 가했다. 기계론 철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저자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태초 창조행위에 국한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창조 이후로 세계는 창조주가 처음 작동시킨 법칙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으로 굴러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00년 이전에는 아직 이처럼 정교한 합리화가 필요치 않았다. 세계는 창조주가 원하는 바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전개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제 의지대로 움직일 권리를 위임하고 숨어 버렸다는 '숨은 신'(deus abconditus) 관념은 아직 비난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기적이 가끔 일어날 가능성마저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매개 없이) 직접 작용한다는 것은 자연사건의 일상적 작용(규칙성) 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될 수 있었다."(178-9)


"아이러니하게도 곤경과 역경의 경험만큼 인간정신을 종교로 향하게 하는 것은 없었고 세속적 성공보다 큰 신앙의 적은 없었다. 종교는 고통받는 자에게 위안을 주었고 자신감마저 줄 수 있었다." "신성한 섭리의 교리는 자기 확인적 성질을 가진 이론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놓쳐서는 안 될 요점이다. 그 이론은 일단 수용되기만 하면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악인이 역경에 처하면 하나님의 처벌임이 분명하지만, 선량한 신자가 괴로움을 당하면 하나님의 시험일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은 형편이 좋을 때면 자신의 행운을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지, 배교자인 이웃이 자기와 똑같이 잘 산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고난을 수반하지 않은 삶이란 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잃었다는 끔찍한 징표일 수도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고통은 하나님이 그 고통을 겪는 자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서 거의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이렇듯 종교는 고단한 삶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181-2)


"무엇보다 신학적 접근이 용이한 것은 발병(發病)이었다. 엘리자베스 기도서는 소교구의 병든 신도를 방문할 때 성직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환자가 자신의 질병─성병이나 전염병이라면 더욱더─이 하나님의 처벌임을 깨닫도록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내과의가 자연적 수단을 사용해 치료를 시도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내과의의 치료는 하나님이 허용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전제하에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할 터였다. 1637년에 어떤 성직자는 독자에게 경고조로, 〈물질적 수단에 너무 기대할 것이 아니라 ··· 그 수단을 허용된 만큼 이용하되 하나님을 조심스레 살피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건강을 되찾아 주는 것은 하나님이지 내과의가 아니었다. 외과의도 수술 전에 기도해야 하며 [수술 후] 자기 환자가 신앙심 없는 내과의를 이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17세기 후반까지도 대다수 신학자와 윤리개혁가(moralists)는 그렇게 가르쳤다."(188)


"섭리적 역사관의 저변에 깔린 것은 해묵은 믿음─인간의 도덕적 행동과 무시로 변하는 자연환경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모든 국민의 흥망은 하나님의 불가해한 목적이 표현된 것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이런 유형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안다고 자처한 부류였다. 존 폭스를 통해 민간에 널리 영향을 미친 신화를 예로 들어보자. 이 신화에 따르면 잉글랜드인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한 국민이요, 섭리의 기획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 받은 선민(選民)이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만든 신화에서 강력한 요소였고 종교개혁 후 1세기에 걸쳐 역사서술에 큰 영감을 주었다." "미덕은 미덕대로, 악덕은 악덕대로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는 일반적 가정은 당시 윤리의식의 강력한 잣대로 작용했다. '매너의 개혁'을 향한 퓨리턴의 열망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도, 사람이 개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분노가 직접적이고도 뚜렷하게 이 땅에 내릴 것이라는 확신이었다."(201-3)


"대체로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편견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심판과 섭리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섭리에 대한 믿음에 힘을 실어 준 것은 바로 그 주관적 성격이었다. 오직 유리하게 해석될 만한 일화를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은 저마다 주님이 자기편이라는 확신을 견고히 굳힐 수 있었다." "이런 관념의 배후에는, 세상살이가 보상받을 사람만 보상받고 처벌받은 사람만 처벌받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보편적 성향이 놓여 있었다. 결국에는 미덕이 보상을 받고 악덕은 처벌을 비켜 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섭리의 교리는 겉보기에 제멋대로인 인간운명에 철두철미한 질서를 부과하려 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도덕적 혼란이 자리하던 곳에, 전능한 하나님이 주재하는 질서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고안물은 설명체계로서는 완벽했지만 설득력 면에서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해설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성과 물질적 성공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하는 많은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는 정도였다."(231-4)


5장 기도와 예언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이 신성한 섭리라는 주제에 관해 가르친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사에 간여해 자신의 백성을 돕는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경건한 기독교도가 기도로 간원해서 얻지 못할 유익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론집》은 기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육신에 속한 것이든 영혼에 속한 것이든 뭔가가 필요하거나 부족할 때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야 마땅할 것인즉 모든 유익한 것을 내려주시는 유일한 시혜자가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같은 간원을 허용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의무였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혼자의 노력으로는 최말단의 물질적 조건조차 충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날마다 재확인되었다." "이례적 곤경에서 벗어나고 구제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건강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간원기도는 규칙적으로 드려야 마땅한 것이었다."(245-6)


"1640년에 장기의회가 열리고 교회법원 및 특권법원이 폐지된 후로 전개된 광신적 활동은 그 규모면에서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이 기간에 다양한 신흥종파가 왜 그토록 폭발적으로 증가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프로테스탄트의 고삐 풀린 자제력이 분열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종교집단들은 국교회가 적절히 배려하지 못한 빈민계층의 정치사회적 열망을 대변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신흥종파 교도들이 세속적 문제에 대해 초자연적 해결책을 제공하려 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주역들이 완강히 거부한 초자연적 해결책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고, 중세 가톨릭교회의 기적 의존적인 측면을 부활시켰다. 로마풍의 위계적인 특징까지 부활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예언과 신앙치료를 수행했다." "이런 종류의 치료와 퇴마는 종교개혁이 전복시키려 한 바로 그 종교행태로 되돌아간 측면이 있었다."(271-6)


"내란기에 흔한 일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정치적으로 특정인을 편든다고 선포한 환상을 해설함으로써 국왕이나 군지도부에게 로비를 벌이곤 했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목표가 항상 뚜렷했던 만큼 그들의 접근방법은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언자는 사적인 개인으로서는 무명인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이 인정한 무소불위의 능력을 내세움으로써, 일시나마 경의를 표하는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특정 권리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이론이 기득권 유지에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편에 서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은 모든 개혁가에게 중차대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개혁가는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듯이 보이는 성경구절에서 도덕적·정치적 권면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 논증의 오랜 관행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데 제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 성경인용보다 폭넓은 이용가능성을 가진 것이 바로 계시였다."(299-301)


"왕정복고와 국교회 부활이 비국교회 신흥종파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면서, 예언의 불길은 급속히 잦아들었다. 통치계급은 공위기─찰스 1세 처형 후 왕이 없던 시기─에 있었던 사회무질서가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신흥종파 교도들도 대체로는 스스로 준법정신을 입증하고자 부심했다." "이미 중세에도 종교적 예언을 빙자한 활동을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여긴 예리한 관찰자가 있었다. 17세기에는 이런 태도가 일상화되는 추세였다. 베이컨과 홉스는 생생한 예지몽과 전조예감을 육체적·심리적으로 설명할 길을 모색했다. 주교 스프랫은 질병이 계시라는 가면을 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흥종파 교도들의 예언능력이나 환시능력은 그들의 금식 및 금욕과 육체적으로 연과된 것임을 지적한 이들도 있었다." "16세기에는 자칭 예언자의 주장이 결국 사실무근으로 밝혀질지언정 늘 신중하게 조사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면 식자층 대다수가 그런 주장을 검증절차 없이 간단한 허풍으로 무시했다."(310-3)


"이런 활동의 일부는 표방된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그 부수효과 때문에도 존중되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런 활동을 액면 가치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산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역병퇴치를 위해 합심해 기도한 사람들이 단지 물질적 효과만을 노리고 그런 형식의 마술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하니님의 구제를 간원한 것은─비록 그 간원이 받아들여질 것인지 확신하지는 못했겠지만─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또 다른 의도는 공동체에 닥친 위협이 공동체 전체에 야기한 관심사를 한목소리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역병에 대항해 함께 뭉침으로써 사회적 연대감을 증명했으며, (그들이 믿기에) 역병을 야기한 그들의 죄를 함께 고백함으로써 공동체의 윤리규범을 재확인했다. 이 같은 집단표현은 공포심과 무질서를 저지하는 데도 탁월한 수단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늘 헛되지 않다. 기도는 명시된 기능만이 아니라 사회학에서 말하는 잠재(latent) 기능도 갖는다."(314)


"성경주석이나 정치철학은 일정한 교육을 요구하는 활동이었기에 상류계급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많은 예언자는 전혀 교육받지 못한 자였다."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는 믿음은 하층민 급진주의자들에게 자신감과 혁명추동력을 주었다. 유산자들이 그런 믿음을 증오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로서는 어떤 제5왕국파 교도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특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맹남과 무식녀의 한 무리가 어두운 예언에 능통한 기술과 미래사건에 대한 예지를 내세우는데, 이런 능력은 가장 박식한 랍비나 가장 유능한 정치가조차 감히 희망하기 힘든 것이다.〉 왕정복고 이후로 지배계급 머릿속에는 종교적 광신과 수평화 운동이 한통속으로 엮였다. 광신과 수평화는 주교 애터베리가 〈모든 것을 공유하려는 천민의 자포자기식 음모〉라 부른 것의 두 얼굴로 간주되었다. 지배계급은 이제 다시는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와 혼동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319-22)


6장 종교와 사람들


"종교개혁 후 공식 종교가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요새를 선점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정통성을 결핍한 이 신앙체계들이 보여준 도전 강도는 언뜻 보아도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실제로 잉글랜드 국교회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회였고 그 사회적 기능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모든 아이는 교회의 품에서 태어날 운명이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마을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고 부모나 그의 주인에게 넘겨져 신앙의 걸음마로 교리문답을 익혔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은 범죄였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도 사회 전체의 축소판이었다. 중세교회가 입장순서를 신중히 정했던 것처럼, 국교회 좌석배치는 소교구민들 간의 사회위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마술적 믿음은 종교가 갖춘 제도적 기반도, 체계적 신학도, 윤리규범도, 광범위한 사회기능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종교가 사람들의 충성심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외부의 경쟁자에게 매우 취약했다."(323-7)


"성직자들은 고해성사를 대체할 (설교와 권면 이외의) 새로운 수단을 개발해서 평신도들이 결단을 내릴 때 영향을 주려 했다. 중세에 고해신부용 매뉴얼의 특징은 결의론(決疑論)으로, 이것은 노련한 신학자들이 제시한 풍부한 사례에 의존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은 〈양심사례들〉을 방대한 분량으로 편찬했고, 식자층 독자는 그것들 중 자신이 부닥친 문제와 상황 면에서 가장 유사한 선례를 찾아내 해결책을 배울 수 있었다. 독실한 평신도를 내향화하는 것도 가능한 대안이었다. 이는 온갖 의문과 불확실한 것을 영적 일기에 담고 기도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평신도를 이끄는 것이었다. 퓨리턴에게 일기나 자서전의 심리적 기능은 가톨릭의 고해성사의 기능과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개인적 조언을 대체할 만한 것은 없었다. 제레미 테일러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언제나 생생한 안내자를 선호하기 마련〉이었다."(336-7)


"세례, 혼례, 거룩한 장례 같은 의례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극빈층 중 다수는 정규 교인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증거로, 어떤 저자는 빈민의 여러 죄목 가운데 〈소교구 교회에 출석해 그들의 의무를 더 잘 듣고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을 포함시켰다. 18세기 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옥스퍼드셔의 어떤 성직자는 그의 소교구 교회의 축일 출석률이 저조한 이유에 관해, 〈불참석자는 모두가 빈민 노동자로, 법정기준을 초과해 구호품을 지급하지 않고는 그들의 참석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변명했다." "17세기 동안 독실한 신자들은 자신들이 이 타락한 세상에서 극히 열세에 놓여 있음을 자각했고, 천민을 참 종교의 최대 적으로 간주했다. 1691년 리처드 백스터는, 〈누군가가 지식과 종교를 박멸할 군대를 모집한다면, 수선공, 개백정, 짐꾼, 거지, 뱃사공 등 글모르는 자들이 앞다투어 그런 군대에 입대할 것〉이라고 외쳤다. 백스터는 〈훨씬 더 많은 주민〉이 실천 신앙을 혐오한다고 생각했다."(340-5)


"회의론의 강한 전염성은 공위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 위력을 한껏 발휘했다. 물론 1648년 '신성모독 금지령' 입안자들은 영혼불멸성을 부정하는 자, 성경을 의심하는 자, 그리스도와 성령을 인정하지 않는 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 심지어는 하나님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런 이단설의 일부는 신흥종파들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소치니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 란터파는 영혼불멸성, 부활의 사실성, 성경의 절대적 권위,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부정했다. 이 파는 패밀리스트파와 마찬가지로 이런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되 상징적 의미로만 사용했다. 이를테면 사람이 웃을 때가 천당이고 찌푸릴 때가 지옥이라는 식이었다. 지옥은 상상 속에나 존재할 뿐이었다. 리처드 코핀은 〈우리가 지옥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한에는, 우리에게 지옥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단설들은 결국 종교 전체에 대한 공식 거부로 흘렀다."(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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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코 자서전 - 지성사의 숨은 거인
잠바티스타 비코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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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소년기(1668~1686)


"비코는 제수이트회의 또다른 신부 주세페 리치의 지도 아래 다시 철학으로 돌아갔다. 리치 신부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둔스 스코투스 학파에 속했지만 밑바닥에서는 제논주의자─엘레오의 제논이 아니라 키티온의 제논을 가리킨다─였다. 비코는 리치 신부로부터 〈추상적인 실체〉가 유명론자 발조 신부가 말하는 〈양태modi〉보다 더 큰 현실성을 갖는다는 가르침을 기꺼이 배웠다. 이것은 비코가 언젠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철학에서 즐거움을 찾게 될 것임을 예견해준 것이었는데, 스콜라 철학의 어느 누구도 스코투스만큼 플라톤 철학에 근접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비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제논의 〈논점〉에 대해 논했던 것을 따라했지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심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비코의 눈에는 리치 신부가 존재와 실체 사이의 형이상학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데에만 너무 오랫동안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새로운 앎을 원했다."(23-4)


"펠리페 아쿠아디아에게 법학을 배운 비코는 종종 시민법의 좋은 문구들을 되뇌어보면서 두 가지 일을 대단히 즐겨 했다. 첫째는 명석한 해석자들이 법을 요약하면서 법학자들과 황제들이 공정한 재판을 위해 행했던 형평성과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고려한 사항을 어떻게 일반적인 격률로 추출해내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코로 하여금 고대의 해석자들에게 이끌리도록 만들었는데, 훗날 그는 이들이 자연적 형평성의 철학자라고 인식하고 판단하게 되었다. 둘째는 법학자들 스스로가 얼마나 공을 들여 자신들이 해석하던 법과 의회의 포고령과 집정관의 칙령의 언어를 검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박식한 해석자들을 향하게 만들었는데, 훗날 그들을 로마의 시민법을 다루는 순수한 역사가로 인식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그 두 가지 즐거움은, 하나는 보편법의 원리를 탐구하기 위해 그가 쏟아부은 온갖 노력의 징표요, 다른 하나는 라틴어의 연구로부터 얻은 혜택의 징표였다."(27-8)


2 바톨라 시기의 자기완성을 위한 공부(1686~1695)


"바톨라 성에 머무는 동안, 교회법에서 교리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튼 것에 힘입어 그는 어느덧 은총에 대해 기술한 가톨릭 교리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별히 소르본의 신학자 리카르두스의 책을 정독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버지의 서점에서 그 책을 챙겨갔던 것이다. 리카르두스는 기하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가 캘빈과 펠라기우스라는 두 극단은 물론 그 두 극단을 따르는 다른 견해들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이려 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민족들의 자연법의 원리에 대해 숙고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마법의 기원은 물론 다른 모든 민족들의 시민법을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에 발판이 되어주었으며, 도덕철학과 관련된 은총에 대한 올바른 교리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로마의 법학자들이 우아한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비난한 로렌조 발라는 키케로부터 시작하여 라틴어 능력을 배양하도록 이끌었다."(36-8)


"비코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모두의 도덕철학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둘 모두가 고독자들의 도덕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신들만의 작은 정원에 갇혀 있는 게으른 사람들이었고, 스토아학파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명상가들이었다. 또한 애초에 비코가 논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건너뛴 것은 이후 그로 하여금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마지막으로는 르네 데카르트의 물리학을 경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래로 그는 플라톤이 따랐던 티마이오스의 물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세상이 수數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에 수긍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세상이 점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스토아학파의 물리학도 경멸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둘 사이에 어떠한 실체적인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에피쿠로스나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물리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둘은 모두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43-4)


3 나폴리로 귀환: 초기 비코 철학의 형성(1695~1707)


"비코는 모든 지식인들 중에서 단 두 명에게만 찬사를 보냈는데, 그들은 플라톤과 타키투스였다. 견줄 바 없는 형이상학적 정신으로 타키투스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플라톤은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관조했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톤이 보편적인 지식을 통해 이데아를 아는 인간(철학자)을 구성하는 덕성의 모든 부분을 널리 알렸듯, 타키투스는 행운과 악운의 무한히 불규칙적인 사건들 속에서 실천적인 지혜를 가진 인간(정치가)이 줄 수 있는 혜택을 조언 하러 내려왔다고 보았다. 이 두 명의 위대한 작가에 대한 비코의 찬사는 그가 훗날 공들여 만들 계획의 전조였다. 그 계획이란 모든 시간에 걸친 보편적 역사가 밟아가는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를 말하는데, 그것은 인간사의 영원한 속성에 따라서 모든 민족이 흥기하고 정체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겪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명한 사람이란 플라톤처럼 숨겨진(철학적) 지식도 알아야 하고, 타키투스처럼 범속한(실천적) 지식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 뒤따른다."(81)


"마침내 비코는 베룰람 경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는 범속한 지식과 숨겨진 지식 모두에 있어 그 누구보다 능통한 사람으로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드문 철학자였다." "플라톤이 지혜의 제왕이지만 그리스인들에게 타키투스가 없듯이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는 베이컨이 없다. 또한 그는 단 한 사람의 존재가 학문의 세계에 결여된 많은 것들을 얼마나 새롭게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결함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게다가 가톨릭교를 침해했던 몇몇 사례를 제외한다면 그는 특정 직업이나 분파에 대한 편견 없이 모든 학문을 존중하면서 각 학문마다 보편적인 문필 공화국을 구성하는 전체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제 비코는 언제나 무엇을 성찰하거나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세 명의 뛰어난 저자들을 눈앞에 두고 있듯이, 창의력에 대한 저작에 몰두하여 최종적인 결과로 『보편법의 한 원리』를 탄생시켰다."(81-3)


4 비코 철학의 두번째 형성(1707~1716)


"후고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의 법』(1635)을 읽고난 후에, 비코는 그로티우스를 네번째 저자로 추가하였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민중적 지혜로 자신의 심원한 지혜를 확인하였다기보다는 장식하였다. 타키투스는 자신의 형이상학과 윤리학과 정치학을 아무런 체계도 없이 분산되고 혼돈되어 자신의 시대까지 전해져 내려온 사실들로 채웠다. 베이컨은 자신의 시대의 인간과 신에 대한 지식의 총체가 보충되고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직시했지만 법과 관련해서는 모든 도시와 모든 시간에, 즉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그로티우스는 보편법의 체계 속에서 철학과 문헌학 모두를 포용한다. 그는 문헌학을 이루는 두 부분인 역사와 언어에 모두 능통했는데, 실제의 역사이건 신화의 역사이건 사실과 사건을 다루는 역사는 물론 기독교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의 가장 수준 높은 세 언어였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잘 알았던 것이다."(117-8)


5 비코 철학의 결정적인 형태와 1723년의 공채(1717~1723)


"이러한 공부와 이러한 인식과 어느 누구보다도 찬양했던 이 네 명의 저자와 가톨릭 종교에 기여하고 싶다는 간절함과 더불어 비코는 마침내 최고의 철학, 즉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 신앙에 종속시키려고 고안된 체계가 문필의 세계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철학은 문헌학과 조화를 이루며, 그 문헌학은 언어의 역사와 사물의 역사라는 두 분야에서 학문적 필연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719년 연례 연설에서 다음의 논지를 제시했다. 〈첫째, 모든 학문의 원리는 신으로부터 온다. 둘째, '인식(nosse), 의지(velle), 능력(posse)'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한 영원한 진리의 신성한 빛은 모든 학문에 스며들어 그들 서로 간에 긴밀하게 결합되는 순서에 따라 처리하며 그들의 근원으로서 신에게 연결시킨다. 셋째,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의 원리에 대해 지금까지 그 어떤 것이 씌어져왔고 말해져왔든 그것이 [신으로부터 온] 그 원리와 일치하면 옳고 일치하지 않으면 그르다는 것을 논증하도록 하자.〉"(121-3)


6 『새로운 학문』 초판본(1723~1724)


"인류의 형이상학이란 민족들마다 갖고 있는 자연신학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인간이 갖는 신을 향한 어떤 자연적 본능을 통해 그들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은 민족 최초의 창건자들로 하여금 어떤 여인들과 삶의 영원한 반려로 결합하도록 이끌었고, 그것이 혼례에 의한 최초의 인간사회였다. 그렇게 비코는 이교도 신학의 대원리와 신학적 시인들이 쓴 시의 대원리를 발견했던 것인데, 그들은 이교도 문명 최초의 시인이자 세계 최초의 시인이었다. 비코는 이러한 형이상학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도덕과 정치를 발견했고, 그 위에 인류의 법학을 근거시켰다. 민족들마다 그들 본성에 대한 관념을 펼쳐내고, 그에 따라 그들 정부의 형태도, 법학도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최종적인 정부의 형태는 군주제인데 여기에서 민족들마다 마침내 본성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비코는 아시리아의 니노스 왕국에서부터 시작되는 세계사에 남겨져 있던 큰 공백을 메웠던 것이다."(149-50)


"언어를 다룬 부분에서 비코는 노래와 시 모두를 포함하는 시학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노래와 시 모두 초기의 모든 민족에게 균일한 본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 원리를 따라서 그는 영웅(귀족)들의 '임프레제(위업)'의 원리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초기의 민족들이 분절된 언어를 형성하지 못했을 시기에 사용했던 묵음의 언어였다. 거기에서 그는 문장학紋章學의 새로운 원리도 발견하였다." "언어의 기원의 발견이 초래한 다른 결과들 중에는 모든 언어들에 공통적인 어떤 원리들이 있고, 그 예로서 라틴어의 참된 기원을 찾았다. 그 예가 다른 모든 언어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비코는 보여주었다. 먼저 모든 토착어에 공통적인 어원의 관념을 제시한 뒤 외래어의 어원의 관념을 제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어원의 관념을 펼쳐낸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민족의 자연법을 적절하게 논의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언어의 과학이었다."(150-1)


"이러한 관념의 원리와 언어의 원리, 즉 인류의 철학과 문헌학과 함께 그는 섭리의 관념에 근거하고 있는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를 전개시킨다. 그에 따라서 민족들의 자연법이 제정되었음을 비코는 저작 전체를 통해 논증한다. 이런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에 따라 시간 속에서 출현하고 발전하고 성숙하고 쇠퇴하다가 종말을 맞는 과정을 특정한 민족들의 역사마다 밟아간다. 이렇듯 비코는 그리스인들을 고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말하며 조롱했던 이집트인들로부터 고대의 중요한 파편 두 조각을 받아들여 활용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전의 시간 전체를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 셋으로 구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이집트인들이 이전에 말했던 언어를 세 가지로 나눈 것이다. 첫번째는 신성한 언어로서 상형문자 또는 신성문자를 통한 묵음의 언어이다. 두번째는 영웅의 언어로서 그것은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한다. 세번째는 서간체 언어로서 일상적인 삶의 용도를 위해 사용한다."(151)


7 부차적 저술들(1702~1727)


8 〈반론〉과 『새로운 학문』 재판본(1728~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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