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2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4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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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마술


7장 마술치료


"마술치료에는 중세교회의 신유(神癒) 능력에 대한 해묵은 믿음이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가톨릭 기도문을 라틴어로 외우는 것은 마술치료의 오랜 단골메뉴였다." "그 밖에 무자(巫子)가 사용한 주문들 중에는, 기독교 기도문의 저급한 변형, 해독하기 힘든 종교 시구, 그리스도나 성인의 생애에서 이끌어낸 것으로 보이는 일화도 주문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질병은 몸 안에 불청객이 들어와 발생하는 것이니 그 불청객을 불러내거나 쫓아낼 필요가 있다는 관념이 작용했다. 이와 더불어 종교적 언어가 이런 실용적 목적에 적합한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는 믿음도 가세했다. 어떤 주물(呪物)은 시술자의 능력과 무관하게 효험을 낼 수 있었지만 치료자의 특별한 능력에 의존하는 주물도 있었다." "주문·약·특별한 시술조건 등 원시치료법의 3요소를 행할 때, 비밀스러움은 늘 중요했다. 환자가 처방된 주물을 휴대하고 다닌 것은 무조건적인 신뢰 때문이었다."(14-6, 20-2)


"민간마술사의 의료행위에서 가장 이채로운 특징은 환자의 질환에 대해 늘 초자연적 원인을 진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민간마술사는 환자가 악령이나 유령이나, '잡귀'에 사로잡혔다, 혹은 환자가 '저주받았다', '악마 들렸다', 쉬운 말로 주술에 걸렸다(bewitched)는 식으로 진단했다. 민간마술사의 명성은 이런 진단에서 누린 권위에 크게 의존했다." "주술을 진단하기 위해 무속인은 다채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민간에 잘 알려진 기술은 주로 희생자의 오줌을 끓이거나, 주술 용의자의 초가지붕에서 짚을 한 움큼 떼어내 불태움으로써, 주술을 거는 장면이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것이었다. 거울, 수정구, 체와 가위, 부리는 영 등 다른 점복수단이 대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단 환자가 주술에 걸렸다고 판단되면 민간마술사는 다양한 치료법을 제시했다. 일부 치료법은 기독교적 수단─대체로 가톨릭과 연관성을 가진─을 적절히 운용하기만 하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기에 충분하다는 관념을 반영했다."(27-9)


"마술치료들 중에서도 공식 은전(恩典)으로 널리 활용된 것이 하나 있는데, 국왕의 안수치료가 그것이다. 국교회 지도급 성직자가 집전한 특별예배에서 국왕은 긴 줄을 이룬 환자 하나하나에게 안수로 축복을 내렸다. 환자가 차례로 나아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으면 국왕은 환자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고 임석한 성직자는 〈저들이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병든 자가 회복되리라〉는 《마가복음》의 구절(16장 18절)을 큰 소리로 낭독했다. 그러면 환자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국왕을 향해 나아갔고 이때 국왕은 흰 비단 리본으로 묶은 금화를 환자의 목에 걸어 주었다. 이것은 '왕의 병'이라 불린 연주창이나 갑상선종, 즉 목의 임파선에 생긴 결핵성 염증에 대한 치료의례였다." "그렇지만 국왕 안수의 치료효과에 대해 정확히 어떤 위상이 부여되었는지는 꼭 집어 말하기 힘들다. 국왕이 개인적으로 치유능력을 갖는지, 아니면 국왕의 역할은 환자를 대신해 종교에 호소하는 것으로 한정되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40-4)


"마르크 블로크에 의하면, 국왕 기적에 대한 신앙은 왕권의 초자연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집단오류의 산물이었다. 그 믿음에는 나름의 사회적 효용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왕을 모든 신민의 통일성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신비한 위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국왕이 다른 신분과 너무 밀접히 일체화되는 것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7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신비함이 약화되고 있었다. 군주를 가부장처럼 섬기는 자세는 공화주의의 노골적인 회의론에 직면했다. 이를테면 〈왕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라는 주장이 점증하는 추세였다. 이 점에서 국왕 치유력에 대한 신앙은 쇠퇴일로에 있던 정치적 태도, 즉 왕실혈통에는 독특한 특성이 있고 노아로 소급되는 특별한 족보가 있다는 믿음에 연결된 것이었다. 왕은 다른 인간존재와 구별되었고 하나님께 직고(直告)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이 쇠퇴하고 하노버 왕가가 승리하면서 국왕 기적도 종지부를 찍었다."(67-8)


8장 민간마술사와 민간마술


"치료는 민간마술사나 무녀가 수행한 다양한 마술적 기능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능 중에서 가장 공통된 것은 도둑잡기와 도난품 되찾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회에는 이를 대체할 만한 대안이 별로 없었다. 이런 경우에 무속인은 여러 가능한 점복방법들─체와 가위, 열쇠와 책을 이용하는 식의─중 하나를 이용해서 분실물을 훔친 자가 누구인지를 판단했다." "이런 도둑잡기 방법은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 방법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도둑 탐지는 백지상태에서 출발하지 않았고, 고객이 제공한 용의자 명단을 꼼꼼하게 조사하는 형식을 취했다. 민간마술사는 그 명단에서 진범을 골라내면 되었다. 민간마술사는 고객이 가장 강하게 의심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채는 것을 자신의 주 임무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현대 아프리카에서 점술사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러한데, 사회인류학자들이 관찰했듯이, 그의 활동은 잉글랜드 민간마술사의 활동과 매우 유사하다."(82, 88-9)


"도둑잡기 마술의 두 번째 특징은 범인은 겁에 질리게 하는 경향이었다. 이것도 현생 원시주민들의 점복에서 공통된 측면이다. 시죄(試罪) 기술이 고안되어 모든 용의자를 시험하는데, 여기에는 무고한 자는 해를 입지 않겠지만 진범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리라는 가정이 전제된다." "이런 절차가 탐지방법으로 비능률적인 것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기껏해야 비합리적이라고 기술될 수 있을 뿐〉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옳지 않다. 다양한 현존 원시사회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시죄는 용의자가 먼저 파악되기 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시죄는 용의자가 유죄임을 확정하는 부가적 수단이었을 뿐, 범죄자 탐지를 개시할 때부터 사용된 수단은 아니었다. 시죄의 사용은 초자연적 존재의 승인이 추가되지 않고는 형벌을 강제하기 힘든 중심권력의 취약성을 반영한다. 시죄는 심리적 목적에서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 중세 사법절차상의 시죄에서는, 의례 중 우물쭈물하거나 실수를 범하면 이를 가차 없이 유죄의 증거로 간주했다."(92-3)


"(이처럼 마술을 긍정하는 전통 위에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크게 고양시킨 것은 르네상스기에 유럽을 휩쓴 신플라톤주의 사조였다. 고대 이교 철학들 중 마지막 학파를 형성한 신플라톤주의가 부활하면서, 물질과 영혼 간 차이를 흐리는 경향이 조성되었다. 지구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물질덩어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활기찬 존재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영적 위계로 빼곡히 들어찬 우주는 온갖 은비한 영향과 감응이 무시로 교차하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우주는 살아 있는 유기적 통일체요 우주의 각 부분은 나머지 모든 부분들과 상응관계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색채, 철자, 수(數)에도 마술적 속성이 부여되었다. 이런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철학자의 일차적 과제였지만, 이를 자기 나름의 목적에서 이용한 것은 마술사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여기에는 지상계의 은비한 속성을 이용하는 자연마술, 별의 영향을 다루는 천체마술, 영적 존재에게 도움을 청하는 제례마술이라는 3개의 유형이 있었다."(100-1)


"지적인 마술연구는 (신플라톤주의를 재발견한) 피렌체 르네상스에서 촉발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시발점은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 같은 저자들의 플라톤주의였고, 파라켈수스와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작품들을 통해 알프스 이북으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헤르메스 전서》의 라틴어 번역본이었다. 피치노는 그 원전을 고대 이집트 신 토트,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의 교시로 알고 번역했다. 그 편찬서는 그리스도 탄생 후 몇 세기에 걸쳐 집성된 것이었지만, 르네상스 지성인들은 그리스도보다 훨씬 전에, 플라톤보다도 전에, 아마 모세와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믿었다. 《헤르메스 전서》는 이제 인류는 신비한 거듭남에 의해, 실낙원하면서부터 상실한 [아담의] 자연 지배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책에 수록된 점성술적·연금술적 지식은 온갖 종류의 신비하고 마술적인 활동에 우호적인 지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104)


"잉글랜드 명사들, 혹은 대학에서 활동한 마술사들이 르네상스기 마술적 사색에 큰 영향을 받았음은 입증될 수 있지만, 이것이 마을 무속인들에게도 참일 수는 없다. 무속인이 책을 소유한다든지, 스스로 선택한 이론체계에 의존해서 활동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물론 델라 포르타나 아그리파로부터 일부 점술과 비법을 발췌해 인쇄된 대중용 안내서는 무속인도 소장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속인의 비법은 거의 모두 친지나 이웃에게서 구술로 배운 것이었다. 그 바탕을 이룬 이론이라야 중세 종교로부터 파생된 것, 혹은 르네상스기에 이미 케케묵은 것으로 취급된 사고양태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치료법, 대항주술, 도둑잡기 마술 등은 동시대 지성인들의 사색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민간마술사의 절차 중에는 신플라톤주의 이론이나 헤르메스주의 이론을 열등한 형태로 반영하는 듯 보이는 것도 있지만, 민간마술사는 판에 박힌 인습과 의례에 의존했을 뿐, 선행 이론을 응용한 적이 없었다."(113-4)


"(점술사가 행하는) 점복은 고객 스스로 본심을 깨닫도록 해 주는 상담과정이었다. 점복은 고객의 염원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수정구 응시 같은 주관적 행위에는 최면술에서 말하는 자기암시 요소가 있었다. 이런 요소야말로 왜 반역자들이 자주 마술사를 찾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마술사에게 얻어내어 반역 결단을 재차 북돋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점술사는 고객의 결심을 더욱 굳혀 주고 고객이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도록 하는 존재였다." "점복은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한 자의 결정을 더욱 굳혀 주기도 했지만,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합리적인 근거에서는 선택이 불가능해 이리할까 저리할까를 망설이는 자에게, 점복은 무엇이든 선택하게 하며 그 자의적 선택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해준다." "점복은 사람들이 각자 환상을 따르는 것을 허용했다. 규범에 묶인 전통사회에서 그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을 허용한 것이 점복이었다."(141-3)


9장 마술과 종교


"16세기 중반에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가톨릭 세력은 너나 할 것 없이 민간마술에 강한 적대감을 표출했다." "일례로, 엘리자베스의 1559년 왕령은 평신도들이 〈주물, 흑마술, 마법, 주문, 마술원, 주술, 점치기 등 악마가 발명한 모든 기술이나 이미지〉를 이용하지 말도록 금했고, 마술사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하는 것마저 금했다." "가장 흔하게 언급되는 마술유형에는 도난품 되찾기, 주물을 이용한 사람과 가축 치료, 개개인의 운수에 대한 예언, 불법 기도문이나 주문의 이용 등이 포함되었다." "16세기 초에 교회는 의사와 조산원에 대한 면허권을 장악했는데, 이 조치의 주된 이유 중 하나도 민간마술을 억제하려는 교회의 조바심이었을 것이다. 개업의 면허권을 주교에게 부여한 1512년 법령은 당시 떠돌이 치료인과 경험치료인의 미신활동을 그 조치의 정당화 근거로 제시했다. 헨리 8세 치세기에 조산원 면허체계가 도입된 배후에도 분만시 마술 사용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음이 분명하다."(169-71)


"교회의 반(反)마술운동은 그것이 지속된 기간에조차 그 실효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교회법원이 주도한 모든 반(反)마술운동의 성패는 마을 성직자와 소교구 위원들이 얼마나 협조하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주교나 주교 대리인의 질의에 답해 용의자를 보고할 의무는 바로 이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민간마술사가 교회법원에 기소된다 하더라도─실제로도 수천 명이 기소되었지만─그의 최종 운명은 이웃주민과의 관계에 크게 좌우됐다. 그가 혐의를 부인하면, 통상적인 다음 절차는 교회법원 판사가 그에게 소교구 이웃 중에서 무죄를 증언해 줄 여러 명의 면책선서자를 대동하도록 명령하는 것이었다. 필요한 인원(대체로 4명~8명 사이)을 채우는 데 성공하면 훈방조치로 풀려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전반적인 상황은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가 거의 비슷했다. 교회의 억압수단이 민간마술을 공동체로부터 뿌리째 뽑아낼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던 것이다."(175-9)


"민간미술과의 싸움은 법정에서만이 아니라 설교단에서도 전개되었다. 성직자들은 열성을 가해 신도들에게, 백주술사들과의 거래조차도 결국은 영혼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경고를 반복했다." "이런 충고는 직업집단으로서 성직자들의 이해관계와 너무 눈에 띄게 들어맞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한층 큰 효과를 발휘했을지 모르겠다. 성직자치고 자신의 목회영역에서 민간마술사에게 강력한 경쟁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곤경이나 질환이나 손실이 생겼을 때 주술사에게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성직자의 불평거리였다. 이는 민간마술사가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 중 일부를 찬탈하려 위협한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만사가 하나님의 예측 불가능한 처분에 맡겨져 있으니 악마의 도움으로 분실물을 되찾기보다는 아예 잃어버리는 편이 낫다는 성직자의 고지식한 주장과 비교할 때, 유익한 결과를 제공하겠다는 주술사의 주장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180-2)


"종교가 여전히 마술적 측면들을 유지했다면, 역으로 마술은 동시대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마술사 편에서는 천상의 존재를 불러낸다는 것 자체가 종교의례였기에 당연히 기도가 큰 비중을 차지했고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이 중시되었다." "이 수준에서 마술활동은 종교적 탐색이었다. 그것은 연구와 조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지식을 추구하는 활동이었다. 순결한 삶이 전제되어야 과학적 발견이 가능하다는 것은 장구한 연금술 역사를 관류하는 관념이요, 17세기에 로젠크로이츠 형제단의 신조를 형성한 관념이었다. 그 형제단이 이름뿐이었는지 실체도 있었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형제단이 추구한 가치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영지'(靈知: gnosis)의 오랜 전통, 즉 기도며 금식이며 접신을 통해 계시적 지식을 추구한 기나긴 전통에 맞닿아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교와 마술은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하고 전포괄적인 진리를 향한 고된 여정의 동반자였다."(188-92)


"그러나 종교는 또 다른 경로를 통해 마술요법의 특권을 줄이는 데 기여하였고, 결국은 이것이 더욱 큰 효과를 발휘했다." "프로테스탄트는 마술적 해법이라는 관념 자체를 전면 부정했다. 이러한 시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거둔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닥친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구 노력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마술활동에 기댄 대안은 불경하고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비난에 직면했다. 피땀 어린 노력과 간절한 기도의 미덕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16~17세기 프로테스탄트 교시에서는 물론 가톨릭 교시에서도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이 점에서 양 진영의 종교적 교시는 새로운 정신모형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모형의 주조에 기여했다. 이 새로운 정신모형은 마술의 값싼 해법을 사악하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너무 안이하다는 이유에서 거부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마술요법을 거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208-9)


제3부 점성술


10장 점성술 : 점성술이 수행한 일과 그 범위


"고대 천문학자들은 지상의 생명체가 변화와 성쇠를 겪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천체는 규칙적으로 활동한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들은 우주를 두 영역으로 분할했고, 달 위쪽의 불변적인 천체계가, 모든 것이 죽음과 변화에 귀속되는 달 아래쪽의 지상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보았다. 별들은 저마다 특별한 성질과 영향력을 수동적인 지구로 내려보내는데, 그 성질과 영향력은 별들 상호간의 변화하는 관계에 따라 효과를 달리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천문 관찰기술이 미숙했던 이 초창기 과학자들은 황도 12궁이라는 고정된 배경막에 비추어, 태양, 달, 토성, 목성, 금성, 화성, 수성 등 7행성이 지구에 대해, 그리고 다른 행성에 대해, 위치를 바꾸어가는 단일한 천체계를 가정하게 되었다. 어떤 순간에 천체계가 발산하는 영향의 본성은 다양한 행성과 별자리의 위치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점성술사는 천체지도 곧 천궁도(horoscope)를 만들면서, 그 같은 위치를 분석하고 그 함축을 평가할 수 있었다."(217-8)


"이런 일반적 가정들에는 신비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16세기 초 식자층에게 점성술 이론들은 우주와 그 작용에 대한 이미지의 일부였다. 달 아래 세계를 구성하는 4원소(흙·공기·불·물)는 천체운동의 영향으로 끊임없는 교체 상태에 놓여 있다고 널리 이해되었다. 다양한 행성들은 열과 냉, 건과 습이라는 4개의 감각적 성질을, 서로 다른 정도로 전달하고 있었다. 이에 기인하는 상호작용 안에 모든 물리적 변화가 포섭되었다." "이 점에서 점성술은 독립적인 분과학문이라기보다, 널리 수용된 세계상(世界像)의 일부였다. 점성술은 생리학과 의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별이 식물과 광물에 미치는 영향을 가르친 것이었기에, 점성술은 식물학과 광물학의 골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심리학과 민족지학도 점성술 신조에 크게 의존했다. 점성술은 중세보다 르네상스 시대에 과학적 사고 구석구석에 더욱더 깊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제공한 지적 틀의 중요한 일부였다."(218-9)


"점성술적 관심이 중세에는 궁정사회나 왕실 측근으로 거의 한정되었던 데 반해 16~17세기에는 민간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이는 주로 인쇄술의 발명에 힘입은 것이었다. 궁정에 기반을 둔 중세 점성술사의 독자층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넓은 독자층이 인쇄술 덕에 점성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확산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근대 초 잉글랜드의 떠돌이 문헌류 중 가장 널리 유통된 것, 즉 책력이었다. 엄밀하게 말해, 책력이란 전혀 별개인 3종의 문헌을 합쳐 부른 것이다. 그 본령은 이듬해에 있을 일월식, 회합 같은 천문현상들과 [부활절처럼] 변동될 축일을 예고한 책력이었다. 둘째는 일·주·월과 교회의 고정된 축일들을 제시한 달력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당해 연도의 굵직한 사건들을 점성술적으로 예측한 예언력(豫言曆)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언이었다. 책력의 저자는 예언을 통해 다음해의 정치, 날씨, 작황, 지역민 건강 등을 상세하게 예측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보였다."(236-8)


11장 점성술 : 그 사회적·지적 역할


"점성술을 매력 있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그것의 원대하고 야심찬 지적 가정이었다. 점성술은 변화무쌍한 인간행동과 자연현상에 대해 하나의 일관된 설명체계를 제공하였으니, 원칙상 점성술이 답하지 못할 문제는 없었다. 지상의 모든 일은 점성술에 의해 설명이 가능했다." "이런 포괄성이야말로 점성술을 그토록 흡인력 있는 기술로 만든 것이었다. 이에 필적할 만한 과학적 설명체계, 특히 사회학이나 사회인류학이나 사회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체계는 아직 출현하기 전이었고, 기존의 사고체계 중에는 그처럼 어지럽고 다양한 인간사를 전체적으로 포괄해서 설명하려 애써보기라도 할 만한 것이─종교를 제외하고는─존재하지 않았다. 자연계에 대해서도 의학, 생물학, 기상학 같은 과학분과들이 설득력 있고 빈틈없는 이해를 제공할 수준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점성술은 보편적 자연법칙에 대한 가장 이른 시도로 무장한 채, 바로 이런 지적 공백을 파고들어 채워 주었다. 이 대안은 꽤 오랜 세월을 버텼다."(298)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에 점성술 이론들은 행성회합의 반복성과 그 회합이 세상사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고, 이는 역사학에서 말하는 '시대'(period) 개념의 형성에 일조했다. (20년 주기의) 소회합과 (240년 주기의) 중회합과 (960년 주기의) 대회합은 어쩌면 무한하고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남을 뻔했던 인간사의 흐름을 마디마디로 나누어 주었고 각 마디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이 점성술 이론들은 16~17세기 동안 잉글랜드 역사학에 영향을 미쳤다." "존 부커에 의하면 점성술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로 다른 풍토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간의 관습이며 의례며 예절이며 법률이며 기질이 왜 서로 다른지〉라는 문제에 답하는 경우처럼, 〈다른 학문들이 제시하지 못하는 이치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귀스트 콩트가 인정했듯이, 점성술사들은 진정한 역사학적 설명체계를 개척했다. 인간사회의 발전을 이끈 원리들을 인간 스스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성술의 가정에서, 우리는 근현대 사회학의 맹아를 탐지할 수 있다."(302-4)


"따라서 점성술적 설명이 매력을 발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적인 측면, 즉 점성술이 정합적이고도 포괄적인 사고체계를 제공한 측면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한층 실용적인 측면이었다. 점성술사는 개개인의 기질에 대한 현실적 평가를 제공함으로써, 각 개인이 자기인식으로부터 출발해 더욱 큰 자유를 전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누군가 천궁도 점성괘를 얻는 것의 매력은 오늘날 정신분석치료를 받는 것의 매력과 다르지 않았다. 개인의 가장 깊숙한 내면적 특징들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그 보답으로 주어져, 각 개인은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경계해야 할 터였다. 물론 점성술사들은 특정 개인의 탄생천궁도에서 얻은 점성괘란 그를 바람직한 미래로 안내하는 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점성괘가 불가피한 운명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이를 미리 알리는 것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311-2)


"그러나 만간수준에서는 점성술의 매력이 반드시 지배적 과학이론들에 좌우된 것은 아니었다. 점성술은 사회생활 환경 구석구석에 뿌리내린 상태였다. 서민들은 오늘날에 비해 천체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오늘날 인공조명은 우리를 별들의 끊임없는 변화에 상대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대도시 주민들 중에는 월령(月齡)을 실시간으로 정확히 아는 이들이 거의 없으며, 일월식은 전문 천문학자를 제외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지나가곤 한다. 그러나 산업화 이전 세상에서는 길을 밝히기 위해 횃불을 휴대했고 보름달에 맞춰 여행계획을 세웠다.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에서 하루 노동시간은 여름이 겨울에 비해 길었다. 민간에서는 낮 길이의 12분의 1을 1시간으로 보는 인위적 시간체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태양을 이용해 시간을 알렸다. 사람들이 천체운동에 해박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천체 변화를 지상 현상에 연결 지으려 한 시도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315-6)


"점성술은 예언에서 거듭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체계였다. 그렇다면 지성인들에게 정확한 예언을 거의 제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점성술은 그들의 충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점성술사들, 적어도 저명한 점성술사들은 그들의 예언이 구속적이거나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예언은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그들이 말한 전부였다.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패트리지에 이르기까지, 별들은 뭔가 의도하기는 해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모든 점성술 논고들에 공통된 상투어였다. 릴리는 자신의 세시력(歲時曆) 표지그림으로 자신의 초상을 삽입했는데, 그 초상 속 점성술사는 의미심장한 좌우명이 새겨진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별들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자유의지와 자기결정권을 발휘하면 천궁도상에 암시된 운세(tendencies)를 언제나 극복할 수 있었다."(319-20)


12장 점성술과 종교


"그토록 대대적인 신학적 반론을 자초한 것은 점성술이 자연과학을 표방한 탓이 아니었다. 점성술의 지적 취약성 때문도 아니었다." "신학자들이 점성술을 공격한 진정한 이유는 점성술사들이 가르치는 별 결정론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자유의지며 도덕적 자율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확신에 있었다. 이것은 중세교회 대표자들이 점성술사들과 결별한 지점이기도 했다. 그들은 점성술의 '자연'에 근거한 주장, 이를테면 천체계가 기후, 식물 생장, 생리 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여 점성술이 농업이나 의학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점성술의 '판별적' 측면, 즉 날씨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집단이든 개인이든 인간 행동에 대해서도 정확한 예언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점성술적 예언이 구체적일수록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은 그만큼 더 침해될 수밖에 없었다." "별들이 육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영혼까지 건드린다는 것은 [신학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372-3)


"하지만 이 수준에서조차 실질적 갈등보다는 표면적 갈등이 훨씬 많았다. 점성술사들은 인간 행동에 대한 자신들의 예측이 잠정적 추측에 불과함을 기꺼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천궁도는 확실성이 아닌 경향성을 가리킬 뿐이었다. 별들은 배려할 뿐 강요하지는 않았다. 점성술적 진단의 지향점은 의뢰인에게 자신 앞에 열려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주지시킴으로써 선택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의뢰인들이 이런 유보를 늘 명심한 것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식자층조차 개인적 약점과 불행을 서둘러 행성의 치명적인 영향 탓으로 돌렸으니 대중 수준에서는 당연히 (신학자들이 예견한 대로) 점성술로 인해 도덕적 책임감이 느슨해질 수 있었다." "점성술이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과 양립가능하다는 점성술사들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틀린 곳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그토록 미묘한 차이를 늘 구별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성직자들이 점성술의 함축을 걱정한 것은 옳았다."(374-5)


"성직자 편에서는 자신이 늘 해결해 주던 것이라고 예상할 만한 문제를 주민들이 점성술사에게 의뢰하는 것을 알고는 쓰린 속을 달랠 길이 없었다. 추상적 설명체계를 제공하기로는 점성술과 종교가 다르지 않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비스 사업이었던 점성술은 개개인이 처한 온갖 어려움에 조언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의뢰인들은 아내 문제, 하인 문제, 사업파트너 문제에서 도움을 청했고, 처신이나 충성 면에서 곤란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도 지도편달을 요구했다. 고통스런 시간에 의뢰인들이 교회의 오랜 목자적(牧者的) 보살핌에 기대기보다 점성술사를 향한다는 점, 바로 이 점이 분쟁 해결과 조언 제공을 특권으로 여겨온 성직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도덕적 지배력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보였다." "지적인 측면에서는 점성술 이론을 신학적 틀에 어느 정도 끼워 맞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점성술사들의 상담사업이 성직자의 목자로서의 역할을 잠식해 들어가자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382-3)


"모든 종파의 성직자들이 점성술을 의심했지만 종교개혁 이후 잉글랜드에서 가장 일관된 적대감을 보인 것은 퓨리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퓨리턴들이 분노한 것은 (숙명론을 긍정하는) 점성술 이론이 그들의 교리와 내용상 반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상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두 설명체계는 경쟁적으로 인간 삶의 흥망성쇠를 어떤 불변적이고 무소불위한 섭리의 견지에서 설명하면서 미래 사건의 가능한 경로에 대해 포괄적 예언을 제시하고자 했는데, 칼뱅주의와 점성술은 출발부터 숙적이었던 셈이다. 어떤 동시대인이 퓨리턴들에 대해 기록했듯이, 〈점성술사들은 하늘에서 징후들[궁들]을 살필 수 있을 뿐이지만 ··· 우리의 거만한 원칙주의자들(퓨리턴들)은 ··· 부당하게도 이보다 훨씬 비밀스러운 조짐들과 ··· 징후들에 의해 만인의 미래 상태와 구원을 판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칼뱅주의 사상가들은 예정의 비밀이란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385, 393)


제4부 과거에 기대기


13장 옛 예언들


"옛 예언들의 본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그것들은 늘 중세적 기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고, 태고성을 가장해 특권적 지위를 이끌어냈다. 나아가 일부 동시대인들은 예언자의 예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지 접신이나 점성술로부터 유래하는지 따지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예언의 엄밀한 기원과 토대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언의 존재 그 자체였다." "예언의 영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는, 역대 정부들이 한결같이 예언의 유포를 금지하고 그 유포자를 처벌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우려는 예언과 정치활동 간에 상존해온 긴밀한 관계에 의해 촉발되었다. 멀린의 예언들은 14세기에는 잉글랜드의 프랑스 왕위계승권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15세기에는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대권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비슷하게 아일랜드인들도 적절한 예언들을 퍼트림으로써 외래인 정복자를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444-8)


"이렇듯 전통적 예언들은 자의적 해석을 거쳐 반정부 선동에 널리 이용되었다. 그렇지만 국왕 지지자들도 로마교황청과의 불화를 정당화하는 작업에서 예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리처드 모리슨은 《에스드라》 상하권에 등장하는 사자를 헨리 8세와 동일시한 왕당파적 예언을 구성해서 웨일스 예언들을 맞받아쳤다." "예언과 반란의 연동성은 에드워드 6세 통치기간 내내 이어졌으며, 특히 1549년 전국을 뒤흔든 일련의 반란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요크셔의 노스라이딩과 이스트라이딩에서 일어난 반란은 족 폭스가 〈맹목적이고 허황한 예언〉이라 부른 것에 의해 촉발되었다." "에스파냐와의 갈등도 이런 예언들에 대한 관심을 유지해 준 힘이었다. 무적함대가 침공한 해가 1588년이었다는 것은, 중세 독일 천문학자 쾨니히스베르크의 요하네스 뮐러(레기오몬타누스)가 행한 것으로 믿어졌고 당시에도 널리 유포되어 있던 예측, 즉 1588년이 '경이로운 해'가 되리라는 예측에 대해 소급적인 정당화를 제공했다."(458-9, 464)


"그렇지만 옛 예언의 진짜 전성기는 내란과 함께 찾아왔다. 제프리 예언들은 점성술적 예언력 및 종교적 계시문학과 결합해 전례 없이 많은 양의 예언적 조언을 평신도 대중 앞에 제시했다. 비록 그 세 장르는 서로 구별되었지만 각각의 정체성이 늘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점성술사 릴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옛 예언들이 다시 유통될 수 있게 만든 주역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력에 〈잉글랜드인 멀린〉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제프리 예언들을 집성한 편찬서에는 케플러의 점성술적 예언들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런 예언들의 저자들로 믿어졌던 비드나 그로스테스트 같은 옛 성인들이 모두 가톨릭교도들이었음을 걱정한 인사들이 없었던 거 같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종류의 계보 엮기는 예언의 권위를 현저하게 높일 수 있었다. 가톨릭적 과거는 사제들이 프로테스탄트 후배들에게는 없은 마술적 권능을 발휘한 시절로 보였고 성인들에게만은 예언과 예지가 허용되었던 시절로 보였기 때문이다."(472-4)


"예언신앙의 중심에는 현대인의 가장 혁명적인 과업조차 옛 현인들이 이미 예언한 것이라고 믿고픈 충동이 놓여 있었던 것 같다. 예언이 실천한 것은 현대인의 열망과 태곳적 열망 간에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지금 일어나는 변혁은 옛 선배들도 예언했으니 그리 급진적인 것은 아니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는 혁명적인 조치를 오래전에 인정된 것이라는 인증서로 감춤으로써, 그 조치를 포장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것은 현재의 강력한 금제를 무릅쓰고 추진되는 새로운 사업에 (인류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면허장'을 제공했다. 예언은 전쟁이나 반란을 정당화해 주었고 전대미문의 변화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 격동의 시대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존 하비가 주장했듯이, 예언이 거듭되는 것은 〈현재의 변화를 돕기 위해서요, 분주하고 열성적인 자들의 활기를 진작하기 위해서인즉, 그럼으로써 이런저런 혁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502-3)


"이런 면허장이 굳이 필요했던 것은, 16세기 잉글랜드인들이 기존 정치질서를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편리한 물건처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안배한 질서였으니 그것에 도전할 정도로 사악한 반역자에게는 하나님이 처벌을 내릴 것이었다. 누군가 모반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 순간부터 그는 그 시대의 도덕률을 어긴 셈이요 자신을 키워 준 사회정치적 질서를 등진 셈이었다. 당시에 예언은 이런 극단 행동에 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호소력을 발휘했다. 이상적으로 말해 예언은 신성한 것이었기에 반란행위가 하나님 의지에 따른 것이요 따라서 죄가 아니라 적극적 의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내란기 동안 혁명집단들이 잇따라서 자신들의 열망을 신학적 언어로 포장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학적 언어의 대안으로 옛 예언들에 의존하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이었다. 옛 예언들은 그 애매하고 중의적인 표현으로 인해 얼마든지 새로운 조건에 맞추어 각색될 수 있었다."(503)


"순환적 역사관이 왜 직선적 역사관으로 교체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지성사의 큰 수수께끼들 중 하나이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추측성 답변을 시도하자면, 변화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변화 그 자체라고 답할 수 있겠다. 특히 사람들 마음에 자신들의 세계가 선조들의 세계와 다르다는 의식을 새겨준 것은 뚜렷이 구별되는 기술적, 지적 추세였다. 화약, 인쇄기, 선원용 나침반이 등장했고 지리상 발견의 영향으로 세계의 외형이 바뀌고 있었는데, 이런 추세는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스·로마인의 세계를 정말로 답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운 기술을 개선하고자 헌신하며 이에 힘입어 지식은 날로 축적된다는 장인적(匠人的) 관념도 이런 변화에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 인쇄술이 현재와 과거의 차이를 크게 부각시켰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모든 서적에는 고유한 출판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승된 서적은 낡은 가정과 관념을 위한 기념비에 불과했다."(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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