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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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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근대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는 가장 전형적인 무대가 바로 전쟁터이다. 전쟁은 국민이 국가의 실체를 자각하고,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며,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리도록 요구한다. 여기에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와 '국가적 지도자(천황)'라는 "국가의 현현(顯現)"을 덧붙이면,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받은 상징 조작이 구체적인 행위를 지휘하는 통제실이 된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국가는 살아남았다. '천황'은 전범의 혐의를 벗었고, 전쟁을 수행한 국가기구와 집행자들은 최소한의 손실만 안고 상층부로 귀환했다. '열렬한' 군국주의자가 '열렬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은 정념이 인간 본성의 근본 기제임을 감안하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부정적인 비판보다 긍정적인 위안이 매력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과거에서 열광을 소진하고 남은 잿더미를 안쓰러운 자신들의 처지와 동일시했다. 전쟁 자체가 가장 큰 '희생의 강요자'이며, 일본이야말로 현대 전쟁의 가장 전형적인 희생자라는 관점은 자신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가한 희생의 무게를 외면하도록 허용했다. 이 '적극적인 소극성'이야말로 전쟁 중에도 전후에도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강력한 이상주의로 무장한 미군정의 열의 역시 역설적으로 상황의 역전에 기여했다. 일본에 주어진 '자율'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선택을 고심하다가 길을 잃어버렸고, 일본에 부과된 '강제'는 자신이 놓는 길이 더디게 진척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파괴를 일삼았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현재는 불투명했다. 폐허가 백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래지 않아 명확해졌다.
이러한 역사의 부정적인 순환은 회의주의를 불러오며, '적극적인 소극성'을 정당화하는 주요 요인이다. 그러나 역사가 그저 반복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얼룩진 것이라도 현재의 평화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도화된 이념이 가장 단단한 위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아베 정권이 헌법9조를 폐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방송에서 천황은 절대로 `항복`이라든가 `패배`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 "견디기 힘듦을 견디고 참을 수 없음을 참아라." 이것이야말로 이후 몇 달 동안 수도 없이 인용될 말이었다. 이 칙어에서 천황은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 애썼다. 그것은 바로 굴욕적인 패전 선언을 일본의 전쟁 수행과 시공을 초월하는 천황의 도덕성에 대한 다른 식의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33)
전시의 미사여구들은 전후 목표와 관계가 있을 경우 쉽게 변형 가능했다. 그 표현들은 대체로 전후 재건에 알맞게 건설적이고 이상적이었기 따문이다. 일본인들도 `군국주의와 침략 만세!`를 외치며 전쟁을 향해 행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평화와 안보, 공존과 공영, 일본과 아시아 전체의 밝은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선언한 것이다. 217)
교조주의적 좌파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 인민 전체가 뛰어난 영도자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는 데 한몫했다. ... 맥아더의 GHQ, GHQ의 개혁 과제를 따라야 했던 구 지배층, 일본의 `진보적 문화인`, 일본 공산당 모두가 실제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천황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었다. 305)
미국인들은 그를 설득하여 그의 이름으로, 또한 그의 허락으로 이루어진 억압과 폭력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인정하지 않게 했다. 황실 측근 일부에서 그를 퇴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SCAP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실 점령군은 천황을 성전으로부터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혀 버린 것이다. 356)
사토 다쓰오는 헌법 번역 마라톤이 끝나자마자 이 작업을 기초하기 시작하여, 민정국에 대해 일견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요구, 즉 법적 보호의 제공은 헌법의 다른 부분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므로 중복이고, 따라서 그 삭제를 요청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일본인들이 말을 조금 바꿔 외국인을 법적 보호로부터 제외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미국인들은 이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고쿠민`을 `모든 일본 국적자(all nationals)`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정부는 대만, 특히 조선 식민지 출신의 수십만 신민들에 대해 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는 데 성공했다. 508-510)
난바라의 전향은 그가 기리며 추모한 진리를 추구했던 학생들처럼 자신도 일본 지도자들에게 속았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항복 후에 가장 많이 사용된 수동 표현은 `다마사레타(속았다)`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난바라의 감정은 이 점에서 일반 국민들의 감정과 완전히 일치했다. 심지어는 전시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선전 선동을 일삼던 자들까지도 자기들의 전쟁 책임을 세탁하는 세제로 이런 유의 기만적 표현을 동원했다. 638-9)
하급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기세이(희생)`를 자주 언급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국가를 위한 고귀한 희생자`이거나 `피로써`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거나 혹은 `패배`나 `일본의 재건`, `일본 민족`,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희생시킨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로 생각이 통일되지 않았다. 677)
(전쟁 포기라는) 이상을 헌법이나 법률로 명기한 예는 일본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재무장을 둘러싼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법률과 헌법에 의한 보증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 하는 기본 문제, 평화와 전쟁이라고 하는 기본선이라는 원점으로 논의가 되돌아와 있었다. 이것은 다른 국가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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