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 강유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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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파시즘의 기원은 하나 혹은 여럿의 사회에 침투하는 사유가 하나의 필연적 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적 우연과 시대적 제약을 관통하고 살아남은 질긴 생명력의 구조물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대 갈등이 기대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멸되지 않고 반복, 변주되는 현실의 한 측면을 설명해주며, 집단 전체가 겪는 직접 체험이 무의식에 남기는 상처란 쉽사리 아물지 않고 계속 자라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개인과 집단 차원 모두에서 정신과의 대면을 둔감하게 만들며, 둔감해진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생생한 유사 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18세기가 가동한 산업화의 자장 안에 머무르고 있다. 소수 엘리트와 다수 대중, 현상 유지와 질서 전복의 어디에도 해답은 기거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무미건조한 제도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불러오는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라 다수의 의지가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군말없이 뒤따르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앎은 삶을 재단하는 일에 대체로 무력하며, 바이러스를 색출하는 신중함이 곧장 과감한 투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의지와 이성을 대립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의지와 이성을 혼융하려는 충동을 넘어서지 못한다. 문제는 방법론이 아니다. 전간기를 휩쓸고 지나가는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열정의 무게에서 파시스트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헌신'과 과학기술의 결합은, 중세 천년을 지배한 강박적 믿음의 무게를 불과 수십년만에 초월할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파시즘은 진리를 상정하고 도덕의 회복을 내세우는 각종 정치적 활동이야말로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와 가장 멀리 서 있다는 명백한 역사적 반증이다. 언어는 솟구치는 의지의 열정에 쉽게 타오르고, 냉혹한 합리성의 제단 위에 모든 가치를 올려놓는다. 그 무대에 등장한 선동가는 오셀로의 불안을 충동질하는 이아고이다. 외부에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내부를 지향하는 그의 언어는 사회적으로 제도화될 때 파멸적인 위력을 동반한다. 재에서 태어난 불사조의 숙명은 오직 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파시즘은 전간기 유럽과 그 시대의 사회적 갈등이라는 특정한 맥락—제1차 세계대전과 지식인들의 논의라는 유산(특히 인간사회와 국가들 간의 관계를 자연법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의 흔적을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파시즘은 일단 생겨나면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잠재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파시즘이 거의 수정되지 않은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60)

대다수의 엘리트들이 세기의 변환기에 민주주의가 발전하며 `대중의 시대`가 열린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생학과 인종주의의 틀을 가지고 대면했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에게 인종주의와 우생학 이론들은 위험한 대중을 통치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새롭고 더욱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였다. 72)

모든 참전병사들이 폭력을 숭배했던 것은 아니며 많은 이들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간기 유럽 전역에서 준군사주의 운동이 등장한 것은 명확히 전쟁의 산물이었다.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고려하지 않고 파시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시즘이 전간기 유럽이라는 시간적, 지리적 맥락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88)

1968년 학생시위는 무의식중에 반파시즘을 더 약하게 만들었다. 급진적인 학생들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파시즘을 냉소적으로 조작한 것이라며 비웃었다. 학생들은 무차별적으로 당시의 정부를 파시즘이라 비난했고 그 말에서 쓸모 있는 내용들을 비워버렸다. 154)

파시스트들은 여성이 가정에 있길 원하면서도 이전에는 단순히 `가정적`이라고 여겨진 기능을 정치화했다. 출산, 교육, 소비 이 모든 것이 민족적 의무가 되었다. 게다가 가정적 의무를 여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파시스트들은 여성을 당과 연결된 조직으로 동원해야 했다.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파시즘은 그들을 가정 밖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208-9)

타인의 동의 없이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가졌던 확신, 다시 말해 `과학적인` 방법이 자신들에게 공적인 선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부여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확신이었다. 정확하게 말해 의사들이 홀로코스트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의학이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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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일본 근현대사 5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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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아우르는 일련의 분쟁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시각은 '중일간의 국교 회복과 평화 정착을 저해하는 잔존 세력의 토벌전'이었고, 군부의 시각은 '조약에 명시된 일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보상 행위의 연장'이었다. 여기서 국교 회복은 만주가 일본에 귀속된 지역임을 상호 확정하는 것이고, 조약의 이행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과 맺어온 각종 이권의 보장을 뜻한다.

군부는 소련과 미국이라는 현실적이고도 잠재적인 적대 세력과의 일전에 대비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열도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바로 만주(몽골까지 포함한)의 영구 점령이라고 판단했다. 가난한 농민과 도시 빈민으로 구성된 군대의 여론전은 국민들의 열광적인 정서를 적절히 자극했고, 정치권은 군부의 폭주에 때로는 당황하면서도 곧 적절한 수용과 전략적 이용을 모색했다.

본 저서는 만주를 둘러싼 일본의 군사적 도발과 외교적 수사, 경제의 총동원, 이념적 정당화까지 일체화된 군국주의가 어떠한 인간 행위자와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서 점차 강고화되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거기에는 정념의 선동과 대결하는 이성의 숙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진군을 뒷받침하는 '계산적' 이성의 모습이 가감없이 들어있으며, 달리기 시작한 열차는 스스로 브레이크를 거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만주사변은 1) 상대국 지도자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점, 2) 본래는 정치 간섭이 금지된 군인에 의해 주도된 점, 3) 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도록 계획된 점, 4) 지역 개념으로서의 만몽의 의미를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었다는 점, 이 4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17)

(만몽개념의 확대 과정에서) 일본이 취한 방법은 우선 지역을 말로 표현하고 다음으로는 말에 표현되는 실태를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팽창시키는 방법이었다. 44)

이시하라라는 존재가 당시 사회에서 가졌던 의의는 세계 공황을 맞아 (만몽지역 확보를 통한 일본 국방경제의 자급자족정책 확립이라는)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지구전은 두렵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선동성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방비 부담 경감에서 오는 경제효과 때문에 군축에 찬성해 온 사람들은 `일본 내지에서 돈을 한 푼도 지출하지 않고`도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동을 통해 조용히 이시하라에게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124)

1920년 신 4국 차관단 교섭에서 일본 측이 만몽권익에 관한 열거적 제외를 영미 열강에게 요구할 때의 설명은 `우리 국방 및 국민적 생존`상의 필요라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국민적 생존이라는 말은 만몽을 제외하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에서 시작된 세계 공황이 일본에 파급되자 현실은 이러한 수사를 밀어냈다. 138)

조르게는 중일전쟁을 통해 일본의 전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하는 사이에 23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육군에서 독일이나 적군 규모의 큰 육군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중일전쟁까지는 기술상으로도 훨씬 뒤떨어져 보였으나 지금은 모든 근대 병기를 갖추어 기술상으로도 뛰어난 역전의 육군으로 변화했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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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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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는 가장 전형적인 무대가 바로 전쟁터이다. 전쟁은 국민이 국가의 실체를 자각하고,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며,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리도록 요구한다. 여기에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와 '국가적 지도자(천황)'라는 "국가의 현현(顯現)"을 덧붙이면,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받은 상징 조작이 구체적인 행위를 지휘하는 통제실이 된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국가는 살아남았다. '천황'은 전범의 혐의를 벗었고, 전쟁을 수행한 국가기구와 집행자들은 최소한의 손실만 안고 상층부로 귀환했다. '열렬한' 군국주의자가 '열렬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은 정념이 인간 본성의 근본 기제임을 감안하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부정적인 비판보다 긍정적인 위안이 매력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과거에서 열광을 소진하고 남은 잿더미를 안쓰러운 자신들의 처지와 동일시했다. 전쟁 자체가 가장 큰 '희생의 강요자'이며, 일본이야말로 현대 전쟁의 가장 전형적인 희생자라는 관점은 자신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가한 희생의 무게를 외면하도록 허용했다. 이 '적극적인 소극성'이야말로 전쟁 중에도 전후에도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강력한 이상주의로 무장한 미군정의 열의 역시 역설적으로 상황의 역전에 기여했다. 일본에 주어진 '자율'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선택을 고심하다가 길을 잃어버렸고, 일본에 부과된 '강제'는 자신이 놓는 길이 더디게 진척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파괴를 일삼았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현재는 불투명했다. 폐허가 백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래지 않아 명확해졌다.

이러한 역사의 부정적인 순환은 회의주의를 불러오며, '적극적인 소극성'을 정당화하는 주요 요인이다. 그러나 역사가 그저 반복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얼룩진 것이라도 현재의 평화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도화된 이념이 가장 단단한 위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아베 정권이 헌법9조를 폐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방송에서 천황은 절대로 `항복`이라든가 `패배`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
"견디기 힘듦을 견디고 참을 수 없음을 참아라." 이것이야말로 이후 몇 달 동안 수도 없이 인용될 말이었다.
이 칙어에서 천황은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 애썼다. 그것은 바로 굴욕적인 패전 선언을 일본의 전쟁 수행과 시공을 초월하는 천황의 도덕성에 대한 다른 식의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33)

전시의 미사여구들은 전후 목표와 관계가 있을 경우 쉽게 변형 가능했다. 그 표현들은 대체로 전후 재건에 알맞게 건설적이고 이상적이었기 따문이다. 일본인들도 `군국주의와 침략 만세!`를 외치며 전쟁을 향해 행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평화와 안보, 공존과 공영, 일본과 아시아 전체의 밝은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선언한 것이다. 217)

교조주의적 좌파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 인민 전체가 뛰어난 영도자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는 데 한몫했다.
...
맥아더의 GHQ, GHQ의 개혁 과제를 따라야 했던 구 지배층, 일본의 `진보적 문화인`, 일본 공산당 모두가 실제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천황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었다. 305)

미국인들은 그를 설득하여 그의 이름으로, 또한 그의 허락으로 이루어진 억압과 폭력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인정하지 않게 했다. 황실 측근 일부에서 그를 퇴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SCAP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실 점령군은 천황을 성전으로부터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혀 버린 것이다. 356)


사토 다쓰오는 헌법 번역 마라톤이 끝나자마자 이 작업을 기초하기 시작하여, 민정국에 대해 일견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요구, 즉 법적 보호의 제공은 헌법의 다른 부분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므로 중복이고, 따라서 그 삭제를 요청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일본인들이 말을 조금 바꿔 외국인을 법적 보호로부터 제외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미국인들은 이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고쿠민`을 `모든 일본 국적자(all nationals)`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정부는 대만, 특히 조선 식민지 출신의 수십만 신민들에 대해 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는 데 성공했다. 508-510)

난바라의 전향은 그가 기리며 추모한 진리를 추구했던 학생들처럼 자신도 일본 지도자들에게 속았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항복 후에 가장 많이 사용된 수동 표현은 `다마사레타(속았다)`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난바라의 감정은 이 점에서 일반 국민들의 감정과 완전히 일치했다. 심지어는 전시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선전 선동을 일삼던 자들까지도 자기들의 전쟁 책임을 세탁하는 세제로 이런 유의 기만적 표현을 동원했다. 638-9)

하급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기세이(희생)`를 자주 언급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국가를 위한 고귀한 희생자`이거나 `피로써`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거나 혹은 `패배`나 `일본의 재건`, `일본 민족`,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희생시킨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로 생각이 통일되지 않았다. 677)

(전쟁 포기라는) 이상을 헌법이나 법률로 명기한 예는 일본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재무장을 둘러싼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법률과 헌법에 의한 보증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 하는 기본 문제, 평화와 전쟁이라고 하는 기본선이라는 원점으로 논의가 되돌아와 있었다. 이것은 다른 국가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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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대륙 - 20세기 유럽 현대사 커리큘럼 현대사 1
마크 마조워 지음, 김준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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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톨릭의 완고한 지배가 풀려난 땅에서, 신의 영역에 진입한 과학기술을 찬미하고, 이성을 단련하여 사회의 계몽을 추구하며,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권장하고, 각자의 능력에 걸맞는 사유재산을 축적하는, 자유의 모든 정의(定義)를 누리는 '개인'이 바로 19세기 자유주의가 바라본 유럽의 자화상이었다.

모든 개인들의 이기적인 행위를 '보이지 않는 손'이 아름답게 조화시켜 줄 것이라는 이 유토피아적 환상은 20세기 목전까지 유럽 대륙을 견인하였지만, 신의 손길마저 지워버린, 온전히 인간적인 세계의 최종 기착지는 전진하는 욕망이 충돌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거기서 흘러내린 죽음의 강이었다.

환희에서 절망으로 몰락한 개인들은 국가의 구원을 열망했다. 대중의 열광을 먹고 돌진하는 국가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으로 내달렸고, 대중의 냉소를 피하고자 주저하는 국가는 자유주의의 뒷자락을 붙잡거나 사회민주주의라는 타협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양 진영의 품 속에서 자라난 것은 민족주의였다.

평화가 감도는 현재의 눈으로 되돌아보면 돌진하는 국가의 얼굴은 호전성과 강압성으로 얼룩져 있다. 민족주의는 피의 상징이며, 분쟁의 씨앗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확실성 속에서 삶을 지켜야 했던 당대인들에게 무너지는 하늘을 붙잡고 군림하는 국가야말로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었다.

유럽 대륙은 이처럼 프랑스 혁명 이래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구현한 낙원이 아니라, 어둠 속의 절망을 간신히 이겨내고 일어선 상처 가득한 역사적 대지이다. 이 잊혀진 실패는 60년이 넘도록 이념도 물질도 압축적으로 겪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저 관망해도 좋은 타인의 역사가 아니다.


파시즘이 자유주의와 확실히 구별되는 지점은 권위주의 국가를 드러내 놓고 옹호한다는 점이다.
...
파시즘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공격하면서 혁명적인 사회적 기획을 제안했다. 그것은 삶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구분하는 부르주아적 방식을, 완전한 경험이라는 `전체주의적` 정치관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36-7)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는 소수였다. 동유럽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인민 동원의 결과가 아니라 베르사유 체제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막판에 안겨 준 선물임을 말해 준다. 투쟁하지 않고서 획득한 것을 상실하게 될 때 사람들이 이를 순순히 따랐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의 정치적 전통에서 민주주의의 뿌리가 깊지 않다는 사실은 반자유주의 체제들이 왜 그렇게 별다른 저항 없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50-1)

"정치의 신성화"는 기념 건축물이나 대규모 집회 장소, 선전을 위한 전시와 출판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
...
이런 과정을 단순히 사람들이 강력한 정권의 검열과 조작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도부와 국민이 공유하고 또한 함께 주장했던 가치와 관련된 것이다. 각 국가마다 일국 사회주의 건설, 독일 민족 공동체, 또는 이탈리아 제국의 건설 등과 같은 유토피아적 기획들에는 새롭고 통일된 국가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었고 실제로 인기가 많았다. 63-4)

파시스트 복지국가는 대중 정치 시대에 인민들의 충성을 확보하려면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교훈을 민주주의자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121)

전 유럽 대륙에 걸쳐 1920년대에 나타났던 모더니즘적 예술 사조들–국제주의나 기계화 같은–은 유기체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민족주의적 사조에 자리를 내주었다. 합리주의는 본능에 대한 강조로, 개인주의는 공동체적 삶으로, 머리는 몸으로 대체되었다.
...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기계•미래주의•과거의 파괴를 숭배하면서 시작되었으나, 1930년대에 가서는 고전주의•역사•토지를 끌어안게 되었다. 140)

1930년대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몰락과 대조되는 성공적 대안이자, 현대사회의 경제적 난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 본보기였다. 공산주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차르제국을 몇 년 만에 주요 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 그것은 실제로 작동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167)

1943년 무렵, `유럽인`이라는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추축국에 동조했던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레지스탕스는 다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사회경제 정책과 애국심이라는 동기를 가졌을 뿐, 그들의 지평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전쟁은 연방주의를 자극한 만큼이나 동시에 민족주의 정서를 강화했다. 결국, 애국주의가 `유럽주의`보다 훨씬 중요한 저항의 동기였던 것이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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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과정 1 한길그레이트북스 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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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태로 타인들과 함께 살아갈 것을 강요받은 사람들은 타인들의 행동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행동규율이 점차적으로 엄격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더욱 강하게 요구된다.
...
지금 사회의 개혁과 함께, 인간관계의 새로운 토대 위에서 천천히 변화가 시작된다. 즉 자기통제의 압박이 증가하는 것이다. 214-5)


서구의 중세와 근대의 경계선에 놓인 '문명화'의 한 가지 측면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제 개인은 사회적 태도를 스스로 규율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으며, 타인과 대면하는 자신을 재규정–본성을 억누르고 예절의 가면을 쓴–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사교 공간뿐만 아니라 사적 공간에서의 자기 통제는 당연시되던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적극적인 절제의 의미로 사용된다. 인간 고유의 성취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도 '미개'와 결별한 '문명화'를 요구받게 된 것이다. '문명화'는 호의의 교제만이 아니라 공격성의 표출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 사회의 안정성에 기여한다.

이것은 단순히 습속의 개선만이 아니라 중앙 집권 국가와 과학 기술의 발전이 조성한 개인들의 이념적 일체감이라는 사회 체제의 변화를 동반한다. 즉, 개인의 발견은 개성을 존중하는 체제의 출현이 아니라 분업화된 상업의 발달을 뒷받침하는, 그렇지만 집단 규율을 스스로 내면화한 순응하는 개인을 요구한 시대의 반영이었다.


프랑스의 궁정적 개혁지식인들은 오랫동안 궁정의 전통 속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좀더 나아지기를, 변화를, 개혁을 원했다. 루소와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그들이 내세운 이상과 모델은 지배적 이상, 모델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을 개량한 것이었다. `잘못된 문명`이란 표현 속에 이미 독일운동과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
독일의 시민계급 지식인이 주창하는 `교양인`과 `인격`의 이념과는 달리, 그들은 `문명인`에 전적으로 다른 인간형을 대립시키지 않고, 궁정적 모델을 받아들여 그것을 변형시키려고 한다. 155-6)

프랑스에서 시민계층은 이 당시 벌써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독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일 지식인층이 정신과 이념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모든 인간적 문제들과 더불어 사회적•경제적•행정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들도 궁정귀족 지식인층의 사상적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독일의 사고체계는 프랑스와 달리 순수한 연구였으며, 그들의 사회적인 활동장소는 대학이었다. 159)

에라스무스의 견해는 그 시대의 몇몇 소수의 저자들과 함께 예법서 전통 가운데서도 예외에 속한다. 왜냐하면 일부 매우 오래된 규정과 규칙들의 설명 속에 개인적인 열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시대의 징표`이며, 사회적 변동의 표현인 동시에 비록 맞지 않는 개념이긴 하지만 우리가 보통 `개인화`라고 부르는 것의 징후이다. 203)

이제 이 자연스러움에 인간관찰이 덧붙여지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타인에 대한 고려가 첨가된다. 218)

이 시대(중세)의 문헌들을 펼쳐보기만 하면 언제나 비슷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즉 우리와는 다른 감정구조를 가진 삶, 안정도 없고 미래를 위한 장기적 예측도 불가능한 존재들이 눈에 띈다. 이 사회에서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못했던 사람, 열정의 유희에서 사나이답게 행동하지 못한 사람은 수도원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세속적인 삶에서 그는 패배자였다. 이와는 반대로 후대의 사회에서는, 특히 궁정에서는 자신의 열정을 억제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문명화`될 수 없었던 사람이 패배자였다.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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