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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대륙 - 20세기 유럽 현대사 ㅣ 커리큘럼 현대사 1
마크 마조워 지음, 김준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가톨릭의 완고한 지배가 풀려난 땅에서, 신의 영역에 진입한 과학기술을 찬미하고, 이성을 단련하여 사회의 계몽을 추구하며,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권장하고, 각자의 능력에 걸맞는 사유재산을 축적하는, 자유의 모든 정의(定義)를 누리는 '개인'이 바로 19세기 자유주의가 바라본 유럽의 자화상이었다.
모든 개인들의 이기적인 행위를 '보이지 않는 손'이 아름답게 조화시켜 줄 것이라는 이 유토피아적 환상은 20세기 목전까지 유럽 대륙을 견인하였지만, 신의 손길마저 지워버린, 온전히 인간적인 세계의 최종 기착지는 전진하는 욕망이 충돌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거기서 흘러내린 죽음의 강이었다.
환희에서 절망으로 몰락한 개인들은 국가의 구원을 열망했다. 대중의 열광을 먹고 돌진하는 국가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으로 내달렸고, 대중의 냉소를 피하고자 주저하는 국가는 자유주의의 뒷자락을 붙잡거나 사회민주주의라는 타협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양 진영의 품 속에서 자라난 것은 민족주의였다.
평화가 감도는 현재의 눈으로 되돌아보면 돌진하는 국가의 얼굴은 호전성과 강압성으로 얼룩져 있다. 민족주의는 피의 상징이며, 분쟁의 씨앗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확실성 속에서 삶을 지켜야 했던 당대인들에게 무너지는 하늘을 붙잡고 군림하는 국가야말로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었다.
유럽 대륙은 이처럼 프랑스 혁명 이래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구현한 낙원이 아니라, 어둠 속의 절망을 간신히 이겨내고 일어선 상처 가득한 역사적 대지이다. 이 잊혀진 실패는 60년이 넘도록 이념도 물질도 압축적으로 겪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저 관망해도 좋은 타인의 역사가 아니다.
파시즘이 자유주의와 확실히 구별되는 지점은 권위주의 국가를 드러내 놓고 옹호한다는 점이다. ... 파시즘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공격하면서 혁명적인 사회적 기획을 제안했다. 그것은 삶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구분하는 부르주아적 방식을, 완전한 경험이라는 `전체주의적` 정치관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36-7)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는 소수였다. 동유럽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인민 동원의 결과가 아니라 베르사유 체제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막판에 안겨 준 선물임을 말해 준다. 투쟁하지 않고서 획득한 것을 상실하게 될 때 사람들이 이를 순순히 따랐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의 정치적 전통에서 민주주의의 뿌리가 깊지 않다는 사실은 반자유주의 체제들이 왜 그렇게 별다른 저항 없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50-1)
"정치의 신성화"는 기념 건축물이나 대규모 집회 장소, 선전을 위한 전시와 출판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 ... 이런 과정을 단순히 사람들이 강력한 정권의 검열과 조작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도부와 국민이 공유하고 또한 함께 주장했던 가치와 관련된 것이다. 각 국가마다 일국 사회주의 건설, 독일 민족 공동체, 또는 이탈리아 제국의 건설 등과 같은 유토피아적 기획들에는 새롭고 통일된 국가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었고 실제로 인기가 많았다. 63-4)
파시스트 복지국가는 대중 정치 시대에 인민들의 충성을 확보하려면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교훈을 민주주의자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121)
전 유럽 대륙에 걸쳐 1920년대에 나타났던 모더니즘적 예술 사조들–국제주의나 기계화 같은–은 유기체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민족주의적 사조에 자리를 내주었다. 합리주의는 본능에 대한 강조로, 개인주의는 공동체적 삶으로, 머리는 몸으로 대체되었다. ...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기계•미래주의•과거의 파괴를 숭배하면서 시작되었으나, 1930년대에 가서는 고전주의•역사•토지를 끌어안게 되었다. 140)
1930년대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몰락과 대조되는 성공적 대안이자, 현대사회의 경제적 난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 본보기였다. 공산주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차르제국을 몇 년 만에 주요 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 그것은 실제로 작동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167)
1943년 무렵, `유럽인`이라는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추축국에 동조했던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레지스탕스는 다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사회경제 정책과 애국심이라는 동기를 가졌을 뿐, 그들의 지평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전쟁은 연방주의를 자극한 만큼이나 동시에 민족주의 정서를 강화했다. 결국, 애국주의가 `유럽주의`보다 훨씬 중요한 저항의 동기였던 것이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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