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 강유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파시즘의 기원은 하나 혹은 여럿의 사회에 침투하는 사유가 하나의 필연적 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적 우연과 시대적 제약을 관통하고 살아남은 질긴 생명력의 구조물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대 갈등이 기대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멸되지 않고 반복, 변주되는 현실의 한 측면을 설명해주며, 집단 전체가 겪는 직접 체험이 무의식에 남기는 상처란 쉽사리 아물지 않고 계속 자라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개인과 집단 차원 모두에서 정신과의 대면을 둔감하게 만들며, 둔감해진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생생한 유사 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18세기가 가동한 산업화의 자장 안에 머무르고 있다. 소수 엘리트와 다수 대중, 현상 유지와 질서 전복의 어디에도 해답은 기거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무미건조한 제도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불러오는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라 다수의 의지가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군말없이 뒤따르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앎은 삶을 재단하는 일에 대체로 무력하며, 바이러스를 색출하는 신중함이 곧장 과감한 투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의지와 이성을 대립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의지와 이성을 혼융하려는 충동을 넘어서지 못한다. 문제는 방법론이 아니다. 전간기를 휩쓸고 지나가는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열정의 무게에서 파시스트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헌신'과 과학기술의 결합은, 중세 천년을 지배한 강박적 믿음의 무게를 불과 수십년만에 초월할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파시즘은 진리를 상정하고 도덕의 회복을 내세우는 각종 정치적 활동이야말로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와 가장 멀리 서 있다는 명백한 역사적 반증이다. 언어는 솟구치는 의지의 열정에 쉽게 타오르고, 냉혹한 합리성의 제단 위에 모든 가치를 올려놓는다. 그 무대에 등장한 선동가는 오셀로의 불안을 충동질하는 이아고이다. 외부에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내부를 지향하는 그의 언어는 사회적으로 제도화될 때 파멸적인 위력을 동반한다. 재에서 태어난 불사조의 숙명은 오직 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파시즘은 전간기 유럽과 그 시대의 사회적 갈등이라는 특정한 맥락—제1차 세계대전과 지식인들의 논의라는 유산(특히 인간사회와 국가들 간의 관계를 자연법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의 흔적을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파시즘은 일단 생겨나면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잠재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파시즘이 거의 수정되지 않은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60)

대다수의 엘리트들이 세기의 변환기에 민주주의가 발전하며 `대중의 시대`가 열린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생학과 인종주의의 틀을 가지고 대면했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에게 인종주의와 우생학 이론들은 위험한 대중을 통치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새롭고 더욱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였다. 72)

모든 참전병사들이 폭력을 숭배했던 것은 아니며 많은 이들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간기 유럽 전역에서 준군사주의 운동이 등장한 것은 명확히 전쟁의 산물이었다.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고려하지 않고 파시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시즘이 전간기 유럽이라는 시간적, 지리적 맥락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88)

1968년 학생시위는 무의식중에 반파시즘을 더 약하게 만들었다. 급진적인 학생들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파시즘을 냉소적으로 조작한 것이라며 비웃었다. 학생들은 무차별적으로 당시의 정부를 파시즘이라 비난했고 그 말에서 쓸모 있는 내용들을 비워버렸다. 154)

파시스트들은 여성이 가정에 있길 원하면서도 이전에는 단순히 `가정적`이라고 여겨진 기능을 정치화했다. 출산, 교육, 소비 이 모든 것이 민족적 의무가 되었다. 게다가 가정적 의무를 여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파시스트들은 여성을 당과 연결된 조직으로 동원해야 했다.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파시즘은 그들을 가정 밖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208-9)

타인의 동의 없이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가졌던 확신, 다시 말해 `과학적인` 방법이 자신들에게 공적인 선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부여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확신이었다. 정확하게 말해 의사들이 홀로코스트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의학이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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