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급진의 20대 - K-포퓰리즘, 가장 위태로운 세대의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김내훈 지음 / 서해문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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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대 현상, 렌즈를 바꾸자


이 책은 ‘20대 현상’이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 그 해답을 찾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한다. 기존의 담론은 공론장에 새롭게 등장한 의제들 — 페미니즘 및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 — 에 20대 남성들이 보이는 일련의 반동을 ‘이대남 현상’으로 규정한다. 미디어와 정치권은 20대 남성의 돌출된 경향을 뚜렷한 근거 없이 20대 전반의 것으로 일반화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젠더갈등에 편승하는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다. 특별히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페미니즘을 제외한 정부·여당발 의제에서, 20대 여성들의 입장과 태도가 남성들과 크게 다르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20대 현상’에서 젠더갈등-차이를 사고하려 할 때 발생하는 혼란은 ‘이대남 현상’의 렌즈로 20대의 보편적 여론을 검토하는 한 피할 수 없다. ‘20대 현상’을 먼저 경유해 ‘이대남 현상’을 사고해야 한다. 그렇다면 ‘20대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렌즈는 무엇일까? 바로 포퓰리즘Populism이다. 12)


1. 만들어진 세대 ? 20년간의 롤러코스터


뇌는 인간이 보는 것을 능동적 추론으로 다시 구성해낸다. 요컨대 우리의 시각 경험은 눈이 아니라 뇌에서 일어난다. 촉각, 청각, 후각도 마찬가지다.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은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광경, 소리, 냄새)은 직접 경험이 아니라 캄캄한 극장 안에서 펼쳐지는 전기화학적 연극이다. (…) 다양한 감각기관에서 들어오는 신호들을 비교하고 패턴을 감지함으로써 뇌는 ‘바깥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최선의 추측을 한다.” 여기서 ‘최선의 추측’ 메커니즘이 바로 가추법적abduction 추론이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지각하는 간단한 행위에도 다분히 능동적인 주관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 사이는 텅 빈 공간이지만 우리는 눈에 비치는 사물이 딱딱하고 고정된 물체라고 믿는다. 요컨대 우리가 사물을 사물로 보는 것은 착시나 환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늘 이러한 환각 속에 산다. 17)


공정을 지선至善으로 삼는 것도 아닌데 90년대생들이 그토록 공정을 문제 삼는 까닭은 무엇일까? 임명묵은 90년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을 정서적인 것, 느낌의 문제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90년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공정하다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일종의 해열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불안감을 경감해주는 것이다. 현재는 노력하면 보상이 따라오고, 잘살 수 있다는 신화가 깨진 상태다. 남은 것은 덜 노력한 이에 대한 응징이다. 점수가 낮은 사람에게,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응분의 푸대접이 가해지는 것만큼은 확실해야 한다는 게 90년대생 사이의 암묵적 합의다. 이들이 보기에 고용에서의 각종 할당제,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정규직화는 주관적 개입으로 시스템을 교란하는 것이며, 합의와 신뢰를 깨트리는 행위다. 90년대생들이 탈-가치화함으로써, 정작 90년대생들의 지향점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결집은 반反, 안티anti의 네트워크로만 이루어진다. 24-5)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2021)에서 중요하게 검토할 지점은 청년층은 상위 계층을 자임할수록 보수성이 뚜렷해진다는 사실이다. 덧붙여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계층으로 인식한 청년 남성에서 다른 집단들보다 ‘기회가 되면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도울’ 경향이 가장 높다는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착해서’ 그렇다기보다 서로 도울수록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위 계층일수록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돕는 행위, 혹은 그러한 의향을 밝히는 것을 위선으로 간주한다. 그들의 생각에,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은 노력을 덜한 사람들이다. 그에 합당한 응징을 받는 것이며, 이에 온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시스템의 교란이자 위선이다. 조사에 응한 청년 남성들은 일말의 공동체적 가치도 부정한다는 눈총을 받을지언정 위선에만큼은 명확하게 거부 표시를 한 것이다. ‘안티의 네트워크’로 결집한 청년 남성 집단이 반-위선의 네트워크도 견고하게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7)


2. 혐오 ? 우울과 불안의 그릇된 방어기제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뇌의 해석이자 추론 결과다. 코나투스conatus(자기보존 능력)가 계속해서 감소하는 상태를, 뇌는 으레 우울감이라고 추론한다(질병으로서 우울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불안감은 자신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존재가 명확하지 않은 채로 그 상태가 지속될 때 생성된다. 이런 우울과 불안에 대한 신체적 반응이 경멸이다. 자신보다 형편이 나쁜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위안하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발현된 경멸은 깎아내릴 대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는 나의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외부 존재를 자의적으로 점찍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혐오다. 그런데 (방어기제로써의) 경멸은 대개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겨냥한다. 문제를 의인화하는 대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내부 모델에 견고히 자리 잡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 뒤부터는 깨지기 힘든 고정관념과 편견이 타인을 대하는 판단 근거가 된다. 33)


혐오의 견고한 내부 모델을 구축한 사람은 편견을 반증하는 새로운 지각정보가 입력되어도 좀처럼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다. 반례를 한 트럭으로 접해도 예외적 경우로 치부하지, 편견을 반성하는 이는 드물다.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주고, 다양성 교육을 진행하는 데서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혐오에 빠진 사람에게 그 불합리함을 증명하는 온갖 데이터는 부질없는 처방이다. 난민이나 이주민을 혐오하는 사람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범죄 통계가 거짓이라고 설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떻게든 혐오할 이유를 다시 찾고 만들게 되어 있다. 교육의 가치와 효용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훈계와 계몽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혐오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신경증 환자에게 곧이곧대로 ‘당신의 행동은 그릇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현실을 직시하고 언행을 고쳐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만으로 증세가 나아지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34)


3. 포퓰리즘 ? ‘그들’과 ‘우리’의 항시적 투쟁


포퓰리즘은 어떤 사상 체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정치운동이나 정치체제가 아니다. “보통 이들을 포괄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단순히 합쳐놓은 것도 아니다.” 정치학자 폴 태가트Paul Taggart는 포퓰리즘의 근본적 특징으로 유동성을 꼽는다. 실체라고 부를 내용이 결여되어 있기에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등에 붙어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포퓰리즘은 일반적으로 인민주의, 대중주의, 민중주의 등으로 번역된다. 풀이하면 인민을 중심으로, 인민을 위하고 인민에게 소구하는 사상·체제·어젠다·메시지를 망라하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는 단 하나의 가치를 정해두고 그에 걸맞지 않은 이는 인민이 아닌 존재로 밀어낸다. 인민이 아닌 존재는 부패한 엘리트 집단일 수도, 하층민일 수도, 이주민일 수도 있다. 단 하나의 공동선이 존재하고 그걸 표방하는 자신들만이 인민의 유일한 대표라고 주장하는 포퓰리스트들은 자연히 다른 세력을 악마화한다. 자신의 당내에서조차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40-1)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혹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포퓰리즘’이라는 명제는 포퓰리즘이 항상 민주주의와 함께 있다는 논의에서 출발한다. 정치학자 벤저민 아르디티Benjamin Arditi는 프로이트의 증상symptom 개념을 빌려와 포퓰리즘-민주주의 관계를 증상-자아 관계와 같다고 주장한다. 자아가 완전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결여하고, 무언가에 억압되어 있는 한, 증상은 자아에 내속해 있으면서 이따금 불안과 소요를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포퓰리즘도 민주주의에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내재하면서 이따금 증상으로 나타난다. 현대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는 정치인과 관료 등에 위임되어 있다. 그런데 인민은 대표를 직접 뽑는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이에 개입한다. 이렇듯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는 비전문가·대중의 개입이 일으키는 소요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항상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42-3)


4. 낡은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 포퓰리즘의 정치경제적 계기


자본주의가 발전한 20세기 이후 프티 부르주아는 신·구-중간계급(각각 경영관리직·전문기술직 등과 자영농)으로 나뉜다. 노동자라 할지라도 관리직이나 전문기술직에 종사할 경우 신-중간계급으로 분류된다. 정치철학자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는 비생산적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모두 중간계급으로 묶은 바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구-중간계급이 크게 감소하고 노동계급이 증가했다. 문제는 노동계급의 숫자보다는 신-중간계급의 가파른 증가에 있다. 풀란차스의 계급 범주에 따르면 후기산업사회에서 노동계급으로 분류되는 상당수 노동자들은 실은 신-중간계급일 수 있다. 계급정치에서 이들의 위상은 논쟁의 대상이다. 이념적으로 이들은 모순되는 위치에 있으며, 따라서 단일 대오로의 결집이 쉽지 않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계급 정체성을 사회적 적대의 기본 단위로 상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늘날 한국의 계급구조는 이런 입장의 현실적 근거가 된다. 55-7)


5. 기만과 위선의 정치 ? 포퓰리즘의 문화정치적 계기


서구 선진국의 기득권 엘리트와 리버럴 세력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일환으로 PC와 정체성 정치, 페미니즘 등 자유주의적 가치를 아전인수 격으로 활용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이를 ‘깨어 있는 자본주의’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휘두르며 희화화한다. 자연스럽게,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환멸이 뿌려진다. 한국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한국의 청년들이 PC와 정체성 정치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서구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리버럴의 위선과 자가당착이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주요 창구 중 하나는 도를 넘는 ‘관종’ 행각을 벌이고 있는 ‘사이버 렉카’다. 이들의 목적은 불미스러운 사건을 알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과거에 내놓은 자유주의적 메시지와 그에 어긋나는 행실을 가져다 놓고 ‘내로남불’이라며 조롱하는 것이다. 사이버 렉카 콘텐츠의 소비자들은 PC와 정체성 정치 등 자유주의적 의제와 메시지에 막연한 반감을 가지며, 점차 ‘진보=위선’이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각인하게 된다. 66-7)


6. 20대의 탈-정치적 정치 ? 응징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오늘날 20대의 정치 무관심은 10여 년 전과는 다른 양태를 보인다. 이른바 ‘적극적 무관심’인데, 바꿔 말하면 정치에 대한 강한 환멸과 불신이다. 과거 20대의 정치 무관심이 시큰둥하고 별생각 없는, 말 그대로의 무관심이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한층 공격적인 정치혐오에 가깝다. 정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아도 제도권 정치(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들의 태도가 합리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연구참여자 중 한 사람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 이후로 정치에 관심을 잃었다고 밝혔다. 이제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경제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느냐에만 관심을 둔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히 정치 문제와 개인의 경제적 이해를 분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공동체의 의사결정체로서 정치에 대한 환멸의 적극적 표현으로 보는 게 옳다. ‘함께 잘사는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으로서 정치라는 관념에 대한 회의는 공공성의 붕괴와 각자도생의 문제로 이어진다. 73)


7. 정치 불균형과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 ? 자유주의에서 극우까지의 세계


한국의 청년들 대다수는 한국의 양대 정당을 크게 다를 바 없는 집단이라고 본다. 동시에 현재 정부·여당이 극단적 좌편향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야가 ‘거기서 거기’라면서도 한쪽은 지나친 좌편향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협소해진 사회·정치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진보정치의 우경화가 가져온 착시다. 말하자면 청년세대에게는 보수가 중도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정치 지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보통 한국인’의 정치적 상상력은 자유주의-권위적 보수주의의 박스권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익 포퓰리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목격된다. 특히 현재 20대, 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가 보편화된 시기에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정치적 상상력을 넓힐 기회가 없었다. 여기에 북한 문제와 레드 콤플렉스라는 한반도의 특수성이 겹치며 자유주의에서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나아가는 발상은 극단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79-80)


뚜렷한 지지 정당이 없는, 즉 당장이라면 어느 당에 투표하겠지만 인물과 공약을 보고 선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이들의 선택은 결국 싫어하는 정당의 후보를 떨어뜨리는 투표로 귀결된다. 이렇듯 특정 세력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부정적 투표’ 혹은 ‘응징 투표’를 하는 사람들을 부동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중도층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추정컨대 여론조사에서 특정 정당지지자임을 밝힌 20대의 상당수는 ‘응징 투표’의 일환으로 지지 정당을 그때그때 바꿀 가능성이 크다. 증가하는 부동층은 정치 무관심의 산물이며,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불신, 혐오의 적극적 표현이기도 하다. 정치 현안을 인터넷으로만 접하는 부동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극적 기사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헤드라인이 말해주지 않는 맥락과 사정을 능동적으로 살피는 경우는 드물며, 그러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정치 무관심은 손쉽게 응징 투표로 이어지고, 그렇게 교체된 정권에서 또다시 실망과 응징이 반복된다. 82-3)


8. 진짜 분노를 가리는 학습된 분노 ? 사유의 외주화


디지털 큐레이션이란 그때그때 화제가 되는 이슈들을 흥미로운 것 위주로 선별하고 단숨에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혹은 이해했다는 인상을 남겨주는 콘텐츠의 모음을 일컫는다. 청년들이 시사·정치 뉴스 창구로 이용하는 소셜미디어는 디지털 큐레이션 콘텐츠의 유통에 더없이 적합한 플랫폼이다. 디지털 큐레이션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문제와 중요하지 않은 문제, 본인에게 흥미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판단을 디지털 큐레이션 제작자에게 위탁하고 외주화한다. 이들은 (특히)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정치 일반에 대한 피상적 인상을 쌓는다. 이 지점에서 그 어떤 ‘어그로’를 끌어서라도 클릭을 유도하는 콘텐츠와 그 제작자가 바로 사이버 렉카다. 연구참여자들을 비롯한 청년들은 그거라도 보면서 ‘소셜미디어로 시사를 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디지털 큐레이션과 사이버 렉카의 손에서 연성화·단순화·예능화한 (더 나쁘게는) 왜곡·날조된 이슈의 편린을 접한다고 함이 더 정확할 것이다. 89-90)


분노와 경멸, 혐오는 정치와 무관하고 사이버 렉카 콘텐츠도 아닌 평범한 게시물을 통해서도 전이된다. 경로는 이렇다. 예컨대 유튜브에서 비디오 게임 콘텐츠를 찾아본 사람에게 해당 영상의 시청자들이 많이 본 또 다른 영상이 추천된다. 그런데 20대 남성 게이머들은 대개 정치적 올바름PC에 적대적이다. PC와 페미니즘의 영향에 따른 게임 캐릭터 재현과 서사 구조 변화를 자신들만의 문화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 관련 유튜브 영상을 몇 차례 접한 이는 의도치 않게 반-PC, 반-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콘텐츠로 유인되기 쉽다. 인터넷 여론이 청년세대의 보편적 생각이 아님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반만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일단 생산된 비하·혐오 콘텐츠는 특정 커뮤니티에만 고여 있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렉카 계정들이 퍼뜨리는 이러한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분노 어린 댓글을 마주할수록, 천천히 그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학습하게 된다. 94)


9. 외부인의 생성 ? 공정한 차별주의자들


연구참여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전반을 공정성의 문제와 결부한다. 즉 대북 지원에 대한 이들의 반감은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및 정규직화에 대해 갖는 반감과 같은 논리를 공유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진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체제에서 더 가혹해진 공안정치와 수탈은 한국사회의 공공성을 붕괴시켰다. 이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생존 문제가 되었다. 공공성이 실종된 사회에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펙을 쌓고,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깜깜한 미래를 대비해 일상의 소박한 즐거움은 물론 연애와 결혼, 출산까지 미루거나 포기하며 노력했다. 그렇게 확보한 한줌의 상대적 우위는 어떤 식으로라도 보상받아 마땅하다. 이들에겐 그것이 ‘공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연구참여자들은 여건이 못 되어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임금과 처우와 시선에서 응분의 푸대접을 받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까지가 본인들에게 주어진 ‘공정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98-9)


20대에게 ‘공정’은 정체성 정치를 평가할 때도 중요한 잣대가 된다. 남성 연구참여자 대다수는 양성 할당제 등의 정책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들은 기업이 지금까지 성별을 불문하고 능력에 따라 직원을 뽑아왔다고 믿고 있다. 설사 특정 성별을 선호하고 석연치 않은 가산점을 부여하는 식의 행태가 있더라도 그것은 입맛에 맞는 노동자를 채용하는 기업·고용주의 권한으로, 자연스러운 시장의 논리일 뿐 정치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할당제 때문에 더 자격 있는 남성 대신 여성 지원자가 뽑힌다고 상상하며 탈락한 남성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남성 연구참여자들이 보기에 ‘남성 특권’은 최소한 자신들이 사는 한국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역차별’론으로 나아간다. 자신들을 “선행 차별에 대한 일종의 차별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어떤 과도기에 놓인 피해자 혹은 희생자로 인식한다. “이미 피해자인데 또 피해를 감수하는 (…) 가중차별을 당한다는 정서인 것이다.” 99)


10. 미래는 중단되었다 ? 부모보다 ‘가난할’ 세대로 산다는 것


연구참여자들은 자동화와 경제인구 감소의 상관관계가 자본주의 경제의 순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음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기본소득 의제에 거부감을 보이던 일부 연구참여자들도, 보수우파 진영의 기본소득 프레임에는 반감이 훨씬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파 버전의 기본소득은 국가 규모를 줄임으로써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한다. 즉 기본소득을 분배하되 국가의 사회복지 재정을 대폭 축소하고 나머지 사회보장을 개인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좌파 버전의 기본소득은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엄격한 과세로 재원을 마련해 양극화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파 프레임을 먼저 소개한 다음 좌파 프레임을 설명하자 연구참여자들은 후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듯했다. 인간 노동력의 투입 없이 가치의 생산이 가능한 상황을 맞이하면서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자본의 정언명령의 유효기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107-8)


11. 헤게모니 전쟁 ? 2016 촛불시위와 20대 현상


2016년 촛불시위의 지상목표는 ‘박근혜 퇴진’이었다. 거창한 사회변혁이나 혁명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권이 시민들에 의해 전복되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그림이었고 실현 가능한 약속이었다. 그랬기에 제각기 다른 정치 성향을 띤, 그토록 많은 사람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치지도 반목하지도 않고 양보를 거듭하면서 한 공간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반면 사회변혁은 추상적이다. 추상적 의제는 정치적·사회적 상상력이 빈약한 대중을 결집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하며,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프로그램을 내세웠더라면 촛불의 에너지를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보좌파 진영에게는 그것을 가능케 할 헤게모니 전략이 없었다. 일부에서는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이 촛불의 소명을 박근혜 퇴진으로 국한시켰고, 집권 이후 이른바 ‘촛불정신’을 배반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촛불은 처음부터 진보좌파의 것이 아니었다. 115)


20대 안에서 남녀는 물론이고 같은 성별끼리도 서로 다른 요구를 갖고 있지만 특정 국면마다 이들을 거대한 반-정권의 전선에 서게 만드는 헤게모니적 기표가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다.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에서 ‘공정’이란 과연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공정은 속이 빈 기표다. 따라서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도 공허하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김정희원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오늘날 공정이라는 말은 일종의 ‘무기가 되어weaponization’ 모든 사안에 관련한 건전한 토론과 숙의를 차단하고 ‘그들’의 배제와 ‘우리’의 투쟁을 성역화하는 데만 쓰인다. 알맹이가 없는 기표로서 공정은 그 자체로 말해주는 바가 없고 해석에 열려 있으며, 따라서 특정 정치 세력에게 전유되기 쉽다. 현재 이 기표는 냉전보수 세력이 전유한 상태로, 그들의 해석에 청년들이 스스로를 동기화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진보좌파 역시 이 기표를 전유할 수 있다. 결국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헤게모니 전략의 구상일 테다. 117)


에필로그: 과격화냐 급진화냐


아주 미세한 빗겨남, 이탈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사소하다. 그러나 그로 인한 마주침들은 상호 축적-연결되며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역사의 전 궤적에 걸쳐 변화를 불러온다. 나비효과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개개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최소한의 일탈이 사회를 근간부터 뒤흔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급진적 마주침과 대중의 자연발생적 조직화의 조건은 일상의 사소한 데서부터 행하는 일탈, 즉 ‘일상의 변용’이다. 이것은 문화적 표피를 띠지만 사실은 금융화된 오늘날의 일상생활에서 등장할 수 있는 급진적 문화정치의 한 형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가 형성되는 삶의 구조가 바로 이러한 일상의 구조이며, 동시에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공존하는 공간이 바로 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여태껏 익숙하게 적용해온 사고방식으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의 해결이 불가능한 때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며 어쩌면 유일한 저항의 방법일 수 있다. 120)


지금 이대로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20대들은 그러나 정치적 상상력이 협소한 탓에,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어떠한 변화를 지향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20대들이 지금 정치와 사회를 대하는 멘털리티는 브레히트의 잠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올바르지만 오래된 것보다 나쁘더라도 새로운 것이 낫다. 그들의 상상력으로 그 새로움이란 정권교체에 머무른다. 그럼에도 그 이상의 열망은 항상 남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변화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다. 이 ‘과격화’를 긍정적인 ‘급진화’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20대 현상의 표피는 헤게모니적 기표에 근간한 헤게모니적 접합의 산물이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자연스럽게 발생하기도 하고, 언론과 정치의 손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지금 한국에서 20대를 동원하는 기표는 보수 세력이 완전하게 전유하고 있다. 127)


20대 현상에 대한 헤게모니 전략의 구상은 20대들을 무엇으로 호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부르주아지, 기득권 엘리트층을 제외한 나머지 보통 사람으로서 20대들이 공동으로 맞이하고 있고 곧 맞이할 문제, 공동으로 답해야 할 질문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노력, 경제 행위를 압도하는 불가항력의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야 한다. 나는 지속되는 일자리 감소 및 그것을 가속화하는 자동화, 불가피한 계층 하강,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등 혼돈 속에서의 실존적 위협에 놓여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있는 이들을 호명하는 기표로 ‘위태로운 자들’을 제안한다. 이것을 단지 제도권 정치 차원에서 표심 공략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제도 정치 바깥으로부터 내부를 재구조화할 압력으로 작용케 해야 한다.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을 벗어나 맹점에 위치한 저 몸부림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새로운 급진 정치로의 전환은 충분히 가능한, 지금 여기의 시나리오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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