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삼위일체론 - 살림지식총서 384 살림지식총서 384
유해무 지음 / 살림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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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기독교의 정체성인 삼위일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행복관을 제시한다. 첫째, 바깥에 있는 물질적 대상을 조작한 결과와 업적으로 얻는 행복이 있다. 두 번째로, 도시 공동체 안에서 지혜로써 정의, 용기, 절제 등의 미덕을 추구하여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 삶, 곧 ‘실천적 삶’이 주는 행복이다. 세 번째로, 철학자는 외적 대상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지 않고, 도시 공동체를 통한 일시적 쾌락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정신적 대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관조적 삶’의 양식을 찾아 은거함으로 신적 자족에서 행복을 실현한다. 이 책에서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또는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의 양 구도를 기독교적으로 원용하고 통합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려고 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관조하는 삶이 믿음이며 동시에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원초적인 삶인데, 그리스적 배경에서와는 달리, 이 삶은 세상에서 물질적 대상을 잘 다루고 공동체에서 미덕을 추구하여 인정받음으로써 기독교회의 독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3-4)


관조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외적 대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찬양하고 즐기는 것이다. 이런 관조는 예전(禮典)적 예배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원용하여 사용하려는 관조는 ‘관상’과는 다르다. 관상은 물질이나 육체 등 외적인 모든 것을 경시하는 이원론을 전제로 삼는다. 그러면 실천적 삶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관조하는 예배로 이루어지는 교회 공동체는 동시에 실천의 장이 된다. 즉, 하나님과 대면하고 교제하는 예배자는 이차적으로 예배 중에 다른 예배자와 교제한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는 일차적인 ‘실천적 삶’의 현장으로 거듭난다.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가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고 대리하는 실천의 현장은 세상이다. 관조적 삶은 관조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성도는 관조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상이라는 실천의 현장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믿음은 세상에서 행하는 실천이며, 실천의 현장은 동시에 지속적인 관조의 현장이다. 4)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기초: 성경


예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 예수는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하고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요 5:18). 성부는 성자를 고난과 십자가로 내몰았다. 그것은 곧 자기 아버지를 증거하는 일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요 17:4).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영화롭게 한다(요 17:24). 그런데 성령으로가 아니면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성자를 성육하게 하신 이가 성령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았다(눅 1:35). 이처럼 성령은 성자를 세상에 임하게 하고 예수를 다시 살리신 능력의 영이시면서도, 부활한 예수께서 보내시는 영이시기도 하다. 이처럼 예수 사건이 중심에 있다. 성부께서는 아드님을 나사렛 예수로 보내셨고, 아드님은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 성도에게 부어 주셨고(행 2:33), 성령은 아드님을 증거한다(행 5:32). 6-7)


구약은 그리스도의 전(前)역사이며,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계시의 목표점이고 성취이다. 따라서 계시의 시작조차도 완성된 계시의 관점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신약은 (구약의) 기존 의미가 아니라 성취 사실에서 시작하며, 그런 다음에 필요한 내용을 구약에서 찾는다. 구약은 신약에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취의 빛 아래서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진술에서 예언을 찾아낸다. 구약은 창세기 3장 15절부터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다. 이 본문은 전통적으로 ‘원시 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으로 지칭되었다.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에 대한 약속(창 12:1~3), 다윗에게 주신 왕위에 관한 약속(삼하 7:11~16, 23:1~7), 여러 시편들(2편, 16편, 110편 등)과 여러 예언서의 약속들(사 7:14, 9:6, 11:1~10, 52:13~53:12 등)은 모두 오실 메시아와 그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구약을 읽어야 구약을 구약 그대로 읽을 수 있다. 9)


삼위일체론의 내적 현장: 예배


세례는 신비적 연합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일이며 그분의 몸인 교회에 가입하는 일이다. 이전의 삶을 등지고 이제부터는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서약이다. 이 연합과 더불어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그분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다. 세례의식에는 이른바 종교적 요소뿐만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 대한 관심도 컸다. 곧,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이웃을 향한 봉사의 임무도 동반한다. 이제부터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신 성전(고전 3:16)이다. 세례는 완전한 교인됨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의식이다. 세례 받기 전에 학습자는 오직 설교 말씀만 들을 수 있었다. 학습자는 세례교인만이 참석할 수 있는 성찬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당을 떠나야 했다. 고대 교회에서 예배는 두 부분, 즉 말씀과 성찬으로 구성되었고, 성찬이 예배의 중요한 핵심이었다. 비록 세례는 예배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성찬에 참석할 수 있는 완전한 예배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연계적으로 중요시되었다. 14-5)


성찬에서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교제와 그분의 과거 사역에 대한 기억과 재림의 미래에 대한 대망이 중심을 이룬다.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은 떡과 포도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이 교제가 기초가 되어 함께 참여한 교인들과도 교제한다. 성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한다. 나아가 그분의 부활을 고백하고 우리의 부활을 소망한다. 성찬에는 예수께서 행한 모든 사역, 곧 성육신과 3년의 지상 사역, 고난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을 기억하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일이 포함된다. 성찬은 과거의 사건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 가운데 현재 임재하신 그분을 만나 교제하고, 나아가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것, 곧 종말론적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령과 함께 성자 예수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를 둔 성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현장이다. 16)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발전: 교회사


삼위일체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로, 인간이 고안한 사변이라는 오해가 있다. 니케아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론을 확립했는데, 인간들이 주재하고 토론했던 회의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결정한 것은 신뢰할 만한 권위가 없으며, 삼위일체론은 사변일 따름이라는 오해이다. 둘째로, 이단 논쟁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오해이다. 아리우스와 같이 그 당시 그리스 교양에 익숙했던 자들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 계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단의 도전이 없었다면 삼위일체론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해이다. 셋째로, 삼위일체론은 내용과 표현 용어에서 복음의 그리스화라는 오해이다. 하르낙(1851~1930)은, 삼위일체론으로 대표되는 교의는 그리스 정신이 복음의 토양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지 오해일 따름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삼위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성령의 교제 중에 고백했다. 21)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주(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일체성)과 예수와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종속설이 당시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선신(善神)이라는 주장을 폈다(마르키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가 정착되자 그리스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그리스 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1-2)


하나님과 함께 선재(先在)하던 로고스는 세계 ‘이성’이나 우주 원리이며, 작은 씨앗으로서 만인에게 임재하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전능한 본질에는 속성인 ‘이성적 능력’이 세상 창조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에게서 나와 독자적 존재가 된다. 두 입장 다 로고스는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보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양태설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구속역사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등장하나 한 본질의 세 외현(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원성을 강조하는 단원론의 반격을 촉발했다. 단원론(군주론 또는 주권론은 합당한 번역어가 아님)은 성부의 단원성, 곧 성부를 신성의 단일한 원인으로 고수하기 위하여 성자의 신성을 성부의 신성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성부의 외현(外現) 방식이라고 보았다. 22)


라틴어를 사용한 서방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160~220년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일체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일체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substantia)’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원역사를 위하여 일체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일체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에겐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그는 ‘위격(hypostasis)’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그리고 ‘본질동등(homoousios)’으로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일체성을 표현했다. 즉,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본 것이다. 22-3)


아리우스(256~336년경)는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성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일체성과 성자의 종속성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無)에서 창조되었다. 게다가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다만 완전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에 불과하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된 것일 뿐이다. 23)


3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일체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비공유적 속성)을 각각 사용했다. 안카라의 감독 대(大)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부성(父性), 성자의 자성(子性), 성령의 성력(聖力) 또는 성화(聖化)를 말했다.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태어나심을 각각 성부와 성자의 고유성으로 보았고,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으며,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두 사람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9~390)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나아가 그들은 ‘본질동등성’을 ‘본질유사성’으로 해석하는 것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25)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본질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세 명의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유개념(類槪念)으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하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비교는 일체성보다는 구별을 부각시킨다. 이를 빌미로 삼아 아리우스파들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란 삼신(三神)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일체성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으며 본질은 곧 속성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26)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존재를 직접 알 수 없다는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 등의 입장을 비판한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원형인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식은 경험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 신 인식을 신 체험에서 출발시켜서 그 원인자를 찾아 나선다. 최초의 원인자인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 자체이다. 그래서 신 인식과 신 언설은 유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유비론은 신과 세상의 관계를 원인성과 완전성의 관점에서 표현한다. 세계의 피조성에서 나오는 인식은 하나님이 제1 원인자임과 그분의 본질의 일체성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육신이나 삼위일체론은 본성적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창조는 자연적 필연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산물이다. 즉,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성육한 성자와 성령의 선물로 완성되는 구원을 올바르게 사유할 수 있다. 29)


종교개혁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데서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을 말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을 학당이 아니라 교회의 소관사로 삼았다. 루터(1483~1546)는 삼위일체론에서 정착된 용어들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삼위일체론’도 용어로서는 만족하지 않았다. ‘관계’는 신성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했고, ‘본질동등성’도 원래 성경 바깥에서 온 용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어들, 이를테면 삼위일체론이라는 용어도 이단을 경계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칼뱅(1509~1564)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성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성부가 아니며, 성령도 성자가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별된다는 사실만을 공유한다면, 모든 용어들은 사라져도 좋다고 말한다. 30)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 교회와 세상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인 교회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배로 이루어지며, 예배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를 이룩한다. 이 하나님은 내적으로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서 서로 관계하고 교제하시며, 외적으로는 예배자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교제로 예배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며 참여한다. 예배자는 이 원초적 교제에 기초하여 형제자매로 결합하고 서로서로 교제한다. 예배자가 나누는 인간적인 교제는 이 신적인 교제 위에서야 가능하다. 구원의 경륜과 배포(配布)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했다. 구원을 삼위 하나님의 협의와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삶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구원이 오로지 구원론적으로만 제한되고 급기야는 인간론적인 개인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제와 참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그의 본질에 참여함에 있다(벧후 1:4).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도의 교제도 포함한다. 35-6)


나오며: 예배와 삶의 세계의 통합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삶이다. 삼위일체론은 이론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이다. 예배에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뵐 수 있고, 그분과 누리는 교제에서 그분을 받는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배자의 위격을 주고받는 교제이다. 예배자는 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엄밀히 말해서 예배자는 예배에서 받을 뿐이다. 물론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자 자신을 드린다. 그렇지만 예배자가 자신을 드리는 곳은 교회와 세상이다. 예배자는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받아 교회와 세상에서 그분들을 드러내고 높이고 영광을 돌린다. 예배가 이론(관조)에 해당한다면, 교회와 세상은 실천에 해당한다. 예배가 튼튼하지 못하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만들 수가 없다. 교회가 예배가 아닌 일에 열중하거나, 무신론,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종교형태와 구별될 수 없다면,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딤후 3:5)과 다를 바가 없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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