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해서 남해안으로 내려왔더니 그 두 달 전에
원균의 함대가 칠천량에서 대패해서 조선 수군은 전멸하고 남해에서 조선 수군의 깨진 배와 송장이 떠돌아다니고 그 쓰레기로 덮인 바다에 봄이 오는
풍경을 묘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버려진 섬이란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빈 섬이란 뜻으로, 거기
꽃이 피었다는 거예요.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소설은 몽매해집니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시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해서
끌고 나가는 그런 전략이 있어야만 내가 원하고자 하는 문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본문 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