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오스트리아 마을에서
그곳 시인들과 저녁을 먹고
보리수 곁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어떤 손이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나는 그 말을 알아 들었다
그가 몸을 돌려준 방향으로 하늘을 보니
산맥 위에 초승달이 떠 있었다
달 저편에 내가 두고 온 세계가 환히 보였다
그후로 초승달을 볼 때마다
어깨에 가만히 와 얹히는 손 있다
저 맑고 여윈 빛을 보라고
달 저편에서 말을 건네는 손
다시 잡을 수 없음으로 아직 따뜻한 손
굽은 손등 말고는 제 몸을 보여주지 않는 초승달처럼 (P.29 )
재로 지어진 옷
흰 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러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P.37 )
빛은 얼마나 멀리서
저 석류나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주홍색 뾰족한 꽃이
그대로 아, 벌린 입이 되어
햇빛을 알알이 끌어모으고 있다
불꽃을 얹은 것 같은 고통이
붉은 잇몸 위에 뒤늦게 얹혀지고
그동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사랑의 잔뼈들이
멀리서 햇살이 되어 박히는 가을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아, 하고 누군가 불러본다 (P. 53 )
聖 느티나무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느티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잔가지 끝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 그루 榕樹처럼
제 아궁이에서 자꾸만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렇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 살을 달여 내놓는다
낮과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 가지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 채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P.95 )
-나희덕 詩集, <사라진 손바닥>-에서
![](http://image.aladin.co.kr/product/51/31/cover150/8932015325_1.jpg)
아침에 일어나, 처음으로 하는 일이 식구들이 마실
茶를 우리는 일이다. 맑고 건강한 기운으로 오늘 하루도
향기롭고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며.
아침에 남은 차를 한 잔, 또 마시고 있다.
차는 여전히 향기로운데 내 마음은 어쩐지 흐림,이다.
오후에 있을 미팅을 생각하고, 이번 일을 함께 하게 된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이미 상실됐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는 공적인 사이를 떠나 사적인 친교까지 나눈 관계지만
그 과정에서, 뭐라 표현키 힘든 유대감으로 타인의 날개까지
자신의 날개로 생각하곤 하는 이상한 순진함(?)의 속을 전에
이미 보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희덕님의 시를 읽다가, 초승달같은.. 어깨에 가만히 와 얹히는
손과 느티나무의 푸른 날개를 생각하며, 다시 빛을 찾아 나선다.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