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선배가 남편의 퇴직을 전환점으로, 일찍부터 장만해 두었던 청양 시골집으로

 몇 달 전부터 내려갔다. 멋진 전원주택도 아니고 원래 있던 시골집을 조금씩 고쳐가며 전부터

 귀촌을 준비했는데 이번에 아주 내려간 것이다. 서울 아파트에는 직장 다니는 작은 따님과 고양이

 뽀삐만 남겨두고 한달에 한 두번 씩 올라와, 예약된 진료도 받고 밑반찬도 해놓고 시골에서 

 필요한 장도 보아 내려가곤 했는데 선배를 엄마로 아는 고양이 뽀삐를 이번에 아주 데리고 내려

 갔다. 겨울 같으면 난방때문에 괜찮은데 여름이라 이 무더위에 낮에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 혼자

 놓아 두기는 이번 여름이 너무나 덥기 때문에.

 

 '뽀삐'는 세 살된 고등어태비 고양이다.

 

 일년 전에, 아파트 경비실 근처에서 아주 삐쩍 마른 어린 고양이가 왔다갔다 하길래, 그 댁 큰

 따님이 안고 들어와 방송으로 이 고양이를 잃어버린 집을 수소문했지만 며칠 동안 소식이 없어

 선배집에서 얼떨결에 키우게 되었다.

 뼈가 보이게 마르고 등가죽이 바짝 붙고 너무 작은 고양이라

 처음엔 새끼인 줄 알았는데, 동물병원에 진찰차 가니 두살쯤 되었다고 한다. 아마 집을 나와 못

 먹고 헤매고 다니느라 그렇게 마르고 왜소했던 모양이다. 그후 몇개월 후, 그 집에 가서 보니

 아주 뚱뚱하고 커다랗고 예쁜 고양이가 떡하니 흔들의자에 누워 베란다의 꽃향기를 맡으며

 우아하게 누워 있었다. 그간 못 먹었던 것의 한을 푸는 듯 무서운 식탐과 과식으로 드뎌 자신의

 생리적 나이를 되찾은 것이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도도하기가 하늘을 찔러 언제 가봐도

 "뽀삐야~뽀삐야~^^" 온갖 애교로  불러도 새침하게 한 번 쳐다볼 뿐, 조금의 접촉도 허하지

 않는 도도고양이가 되어 버렸당.

 

 이번에 데려가려 아저씨가 밥그릇이며 화장실이며 장난감들을 주섬주섬 싸는 걸 보더니 눈이

 똥그래져 쳐다보고 있다가, 평소엔 절대 들어가려 하지 않았던 이동장에도 냉큼 들어가고,

 청양으로 가는 차안에서도 얌전히 있고  운전석 위에다 발을 살짝 걸치고 차창밖도

 내다보며 내심 즐기는 눈치였다 한다.  드디어 시골집에 도착.

 

그런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디선가 나타난 옆집 할머니댁 고양이 나비가  선배의 다리에

부비부비를 하자 뽀삐가 하악질을 하며 심한 경계와 적대감으로 나비를 제압했고 놀란 나비는

자기집으로 후다닥 도망을 치고. 

 

 '나비'도 사연이 많은 귀촌고양이다.

 

 할머니의 서울 아들집에서 키우다 보낸, 예쁜 페르시안 고양이 두 마리중의 한 마리인데

 두 마리 고양이를 졸지에 맡아 키우게 된 할머니가 고양이수발에 힘이 부쳐 어느날 멀리 산옆

 에 버리고 오셨다 한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 장에 갈 일이 있어 정류장으로 가던 길에

 불현듯  고양이들이 생각난 할머니가 문득, "야야~야야~"부르니 어디선가 한 마리가 풀썩,

 나타나 반가워 하길래 할 수 없이 장보기를 포기하고 다시 데리고 와 키우는 고양인데 얘는 이제

 하도 바깥에서 뛰놀고 헛간에서 잠자고 이제는 완전 처음의 우아함은 다 사라지고 애교쟁이 날쌘

 시골고양이로 변했는데, 선배의 집에 자주 놀러 오고 그러면 또 집에 두고온 뽀삐생각에

 고기도 주고, 간식도 주며 귀여워 해주니까 이젠 아예 선배집에 눌러 앉아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어쩌다 생각나면 자기집으로 놀러가는 그런 형편이 되었다 한다.

 그런 나비를 보자, 뽀삐가 얼마나 분노의 하악질을 하는지

 나비도 놀라서 급히 제집으로 줄행랑을 친 모양이다.

 

 밤이 되어 잠을 자야 하는데, 뽀삐의 흙과 먼지 묻은 발과 뭉텅뭉텅 빠지는 털때문에 도저히

 방에서 재울수가 없어서 뽀삐를 부엌방에다 넣고 잠을 자려하는데 이때부터 울고불고하는

 뽀삐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할수없이 방에다 들이고 이번엔 부부가 모기장을 치고

 안에서 자려하자 또 모기장 안에 들어오겠다고 '야옹! 야옹!!~'  울다 급기야는 무조건 막

 모기장으로 돌진하는 통에, 할수 없이 선배가 일어나 뽀삐를 데리고 마루로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때부턴 울지 않고 얌전히 엄마옆에 누워있더라한다.

 아, 뽀삐가 원한 건 방에 들어가 자는 게 아니라  엄마 옆에서 자는 것.

 

 그렇게 새벽 3시에서 5시까지 있다가 뽀삐가 잠이 들어 선배도 다시 들어가 잠을 좀 자고

 선배 남편도 잠을 설쳐 피곤해하고.

 낮에 손님이 오셔서, 손님상을 차려주고 뽀삐랑 둘이 마루에 앉아 뽀삐털을 쓰다듬어 주면서

 "뽀삐야~ 이젠 시골에서 사니까 아파트에서처럼 안에서 못살어. 부엌방이나 헛간에서 자야돼.

 알았지? 뽀삐야." 타이르니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가더니 풀을 막 뽑아 씹어대다 휙,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다.

 손님이 가고 걱정이 된 두 부부가 여기저기' 뽀삐야~뽀삐야' 부르며 한참을 찾고 있으니 그때

 쑥, 마당 뒤켠에서 뽀삐가 나오고, 마루를 보니 그틈에 나비가 나타나 뽀삐의 밥을 다 먹어치우고.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어제 처음으로 뽀삐가 밖에서 별일없이 잘 잤다고 한다.

 

 나비만 보면 분노의 하악질로 접근금지였는데, 이젠 둘이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한다. 다만, 나비가 숫컷이라 미모의 뽀삐에게 자꾸 들이대는 통에 또 새로운 귀찮은 걱정이

 생겼다고. 이젠 옆에 있어도 가만있는데, 나비가 너무 얼굴에 바짝 다가오면 앞발로 빰따귀를

 후려치곤 한다나. 그러면 또 저멀리 도망을 쳤다 다시 뽀삐 옆에 와서 밥도 같이 먹고 또 들이

 대다 빰따귀를 얻어맞고..그러며 그럭저럭  뽀삐는 시골고양이로서의 새 삶에 만족하며 오늘도

 풀도 뜯어먹고 문밖으로 외출도 하고 뒷산으로 마실도 다니며, 별 일 없이 잘 있다고 한다.

 뽀삐야~! 너 참 유기묘에서 주인 잘 만나 이젠 자유롭고 싱그러운 시골고양이로 여생을

 신나게 누리게 되었구나. 옆에 껌딱지같은, 멋진 남자친구도 두고~ㅎㅎ 부럽구먼,ㅋ

 

 좀전에 통화를 하며 덥지 않냐고 물었더니, 시골은 나무가 많아서인지 그리 안 덥다 한다. 오히려

 해가 지면 좀 추워 개조한 부엌외에 따로 일부러 남겨둔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때며 부부가

'모닥불 피워 놓고 둘이 앉아서~' 노래를 하는 시간이 제일 즐거운 시간이라 한다.

 선배의 남편도 마루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보며, "아~정말 좋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하며

 오늘도 두 사람은 행복한 귀촌의 또 하루를 살고 있다. 

 이번 휴가때는 이 댁으로 놀러가 그 행복을...우리도 야금야금 맛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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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30 19:28   좋아요 0 | URL
시골엔 '흙'이 있어 나무가 자라고, 풀도 함께 있으니
한결 시원하지요.

뽀삐가 어쩜 풀 먹는 들버릇(야생버릇)을 잊지 않았군요.
참 잘 즐겁게 살겠네요.

두여자와냥이 만화책은 참 잘 쓰고 빚었어요~

appletreeje 2013-07-30 21:46   좋아요 0 | URL
예~'흙'이 있기에 나무도 풀도 사람도 시원하게 숨을 쉬리란
생각을 합니다.^^

뽀삐는 정말 동무와 함께 즐거운 시골고양이로 즐겁게 잘 살을 것 같아요~
고양이가 풀을 먹는 것은, 저희는 '캣 그라스'만 생각했는데 들버릇이였군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는 저희 식구들도 다 즐겁게 읽고
뽀삐엄마께 선물로 드렸는데...오늘 그분들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셔서
더욱 반갑고 기쁩니다.
저희도 한 십년 후면, 선배님네 옆집에 살고 있지 않을까요~^^ ㅎㅎ

보슬비 2013-07-30 21:50   좋아요 0 | URL
ㅎㅎ 깜놀. 댓글 다는 순간 나무늘보님 댓글이 후다닥...
실시간 댓글이예요. ㅎㅎ

보슬비 2013-07-30 21:49   좋아요 0 | URL
ㅎㅎ 뽀삐와 나비 너무 귀여워요. 시골에서 전학온 새침한 여학생 같은 뽀삐 ^^
시골하면 고양이보다는 강아지들이 떠오르는데, 고양이가 있는 시골 모습도 좋네요.

appletreeje 2013-07-30 22:04   좋아요 0 | URL
히힝~! 실시간 댓글이라 더 반갑고 좋네용~히히히~^^

서울에서 전학온 새침한 여학생 같은 뽀삐,라는 말씀에 저도 모르게
아하하하~크게 웃었습니다. 그만큼 적확하고 정다운 표현이 너무
좋아서요. ^^

처음엔 강아지도 키울 예정이었는데, 뽀삐와 나비가 있어
잠시 보류중이랍니다~
보슬비님! 좋은 밤 되세요~^^

후애(厚愛) 2013-07-30 22:18   좋아요 0 | URL
저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사는 게 꿈이랍니다.^^
꿈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시골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고 이웃집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살고 싶습니다.ㅎㅎ
'뽀삐' '나비' 이름이 참 이쁩니다.
시골에서 '뽀비'는 잘 지낼거에요.^^

appletreeje 2013-07-30 23:29   좋아요 0 | URL
ㅎㅎ 후애님과 저의 꿈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뽀삐'와 '나비'는 정말 요즘엔 아무도 이런 이름 안 지을텐데...
그래서 더욱 예쁩니다..ㅋ
예~뽀삐는 시골에서 나비랑 즐겁게 잘 지내리라 믿습니다~

후애님!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드림모노로그 2013-07-31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한동안 , 시골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ㅎㅎ
이제 시골이 더 좋아요 ㅎㅎ 자유롭고 신선한 공기 ~
유기묘를 살뜰이 돌본뒤에 살이 토실토실 찌으신 선배님의 정성에
읽으면서 흐뭇함이 밀려오네요 ㅎㅎ
시골에도 유기묘들이 꽤 많거든요 .
한때 버려진 고양이도 자주 돌봐주곤 했는데 ㅎㅎ 아파트에 이사오니 그런 재미가 없어졌네요 ^^
뽀삐와 나비, 이름 참 이쁘네요 ㅋㅋ
우리가 남여 고양이 두마리를 거둔 적이 있는데 ㅋ
이름을 고놈이 고년이로 ㅋㅋ 지었는데 왜, 미안함이 드는지 ㅋㅋ
그 놈들 지금은 잘 살고 있으려나 .. 싶은 것이 ㅋㅋ

마음이 따뜻해지는 페이퍼 잘 읽고 가요 , 오늘도 행복한 하루 ~~!! 보내시구요 ㅎㅎ

appletreeje 2013-07-31 16:04   좋아요 0 | URL
예~이 부부께서는 정말 좋아하셔요~^^
그댁 따님들은 아직도 한번씩 내려 가면 적응을 못하지만요. ㅎㅎㅎ
그리고 좋아하는 분들께서 정말 행복해 하시니..저까지 더불어 행복하네요~

이래저래 '뽀삐'의 묘생은 '나비'와 함께 해피할 듯 합니다. ^^
'고놈'이와 '고년'이~!! 우히히히...이왕이면 '이놈'이와 '이년'으로 지으셨다면..ㅋㅋㅋ

드림님! 오늘 날씨 정말 장난이 아니군요...도무지 맥을 못 추겠어요...헥헥,
드림님께서도,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노이에자이트 2013-07-31 16:24   좋아요 0 | URL
칠갑산이 있는 청양인가요? 옛날엔 정말 첩첩산중이었다는데...귀여운 고양이들 뛰노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집니다.

appletreeje 2013-07-31 16:47   좋아요 0 | URL
예~칠갑산이 있는 그 청양 맞습니다.
이분들이 내려가신 곳은 읍내에서도 자동차로 한 20~30분 들어가는 곳이라는데
인근에 인가도 이댁 포함 다섯 가구인..주변 어르신들이 70세에서 90세이신 조용한
곳이라 하네요.
귀여운 고양이들 뛰노는 모습을 떠올리니..괜히 웃음이 피어 납니다~
 

 

 

 

 

 

                                날개 여사와 고구마 씨

 

 

 

 

                             내가 가겟집에 신용거래 하러 갈때

                             사지와 얼굴이 다 비뚤어진 고구마씨가

                             말복 더위를 쫓으러 나왔는지 길 가운데 서 있고

                             날개 여사가 그옆에 서서 구겨진 손을 힘겹게 저으며

                             잘 결합하지 않는 자음과 모음으로

                             말이란 걸 하는데

                             얼핏 보기에 말다툼을 하는 것 같다

                             분명 길에서 마주쳐 따뜻하게 속삭이는 것인데

                             어찌 인사 주고 받는 일에

                             저렇게 힘이 들어가야 하나

                             하늘하늘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날개 여사가

                             그 그래서 머......먹었냐고 하자

                             모......못 먹었어 고구마씨가 말하고

                             날개 여사가

                             내가 해......해......해줄께 하고

                             골목에 핀 능소화와 베란다에 나와 있는 봉숭아꽃을

                             정처없이 찔러댄다

                             라면 한봉지와 사이다 한 병을 그어 놓고

                             돌아오다 보니

                             능소화 담장 밑에 날개 여사와 고구마 씨가 쭈그리고 앉

                           아서

                             사람 구경을 하고 있다

                             무심코 날개 여사를 보다가

                             저, 저, 저런!

                             날개 여사가 활짝 열려 있다

                             코앞의 깊이 하나 변변히 가리지 못하는 날개 여사가 남

                            걱정이다

                             날개 여사가 고구마 씨 입에

                             상갓집에서 가져온 돼지수육 한 조각을 찢어 넣는데

                             코로 들어갈지 입으로 들어갈지 아슬아슬하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순간순간 극복이다 저렇게 저리도록

                             끝끝내 살고 싶게  (P.13 )

 

 

 

 

 

 

                                      예천 사과장수

 

 

 

 

 

                              예천 사과 한 트럭 실어오면 아침나절에 다 팔고

                              우거지갈비탕과 마주 앉아서

                              낮은 생태계의 시끌벅적한 오후를 논하였어

                              아이들에게 줄 페페로니 피자를 사고

                              어머니의 골다공증에 잘 듣는 칼디텍을 사면

                              사과즙 같은 가랑비 내려

                              난전의 과일상들은 오므라이스 같은 지붕을 얹었지

                              그해 시월에는 사과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았어

                              비닐봉지에 담으면 안에서 선홍빛 날개가 푸득거렸어

                              꼭 한개씩은 더 얹어주었고

                              어떤 놈은 스스로 날아올라 손님들의 혀에 가서 달라붙

                           었어

                             당도 높은 농사꾼과 직거래를 튼 덕에

                             비바람과 햇빛과 소쩍새가 담긴 다디단 소가지를 활짝

                          열어 보였지

                             다 팔고 남은 못난이 사과와 짐칸에서 뒹굴며 칼날보다 푸

                          른 돈을 세면

                             돈에도 분명 혈관이 있어

                             손끝에 뜨거운 피가 묻었어

                             돈이 횟집의 우럭처럼 펄떡거렸고 아가미가 싱싱했어

                             돈도 생물마냥 싱싱한 게 좋아

                             오늘도 그해처럼 비 내리는 시월

                             썰물 든 저녁의 시장 입구에서 사과들은 날고 싶고

                             강원도에서 온 송이버섯 장수와

                             짬뽕국물 시켜놓고 식어가는 위장을 데워

                             술 한잔 털어넣고 목청에 힘주고 싶지만

                             함께 갈 트럭이 잔을 가로막아

                             지금은 사과나무 네그루가 대문 앞에 나와서

                             발갛게 익은 볼로 저녁을 기다리는

                             바로 그 담운(淡雲)의 시간이거든  (P.28 )

 

 

 

 

 

                               네가 꿀배를 팔 때

 

 

 

 

 

                               김장배추 심어놓은 것이 손바닥만하고

                               방아꽃이 피어 추어탕 생각나는 점심나절 너는

                               예비군 모자를 쓰고 길 위에 섰다

                               가을 하늘이 뼛속에서 푸른 너는

                               밥도 되고 반찬도 되는

                               작은 농업의 영농일기다 그 촘촘한 기록들이

                               제대로 읽히지 못해

                               체면? 그런 것 개 밥상에 던져주고 국도변에 나와서

                               꿀배와 꿀사과와 꿀다래를 내놓고

                               지나가는 차들에게 꾸벅꾸벅 절을 한다

                               그 옆을 지나가던 나는

                               너를 조금 안다고 꿀배를 몇개 사가려는데

                               한여름 수숫대처럼 꼿꼿했던 네가 나한테까지 허리를 꺾

                            는다

                               이게 어찌 농부의 가을인가

                               서울 사는 게 무슨 벼슬이라고

                               눈치 보며 몇 줄 적은 비겁한 서정이 또 무슨 벼슬이라고

                               찰랑찰랑 낚시대를 흔들며

                               소나기도 물꼬도 소쩍새도 없는 만원으로

                               나의 생존을 찔러본 것일 뿐인데

                               이미 나는 너의 소문을 초라한 가을바람에게 들었다

                               밤이 이슥도록 독을 타듯 진도 7.5의 귀뚜라미 소리를

                               꿀배에 새겨넣었다더라고

                               네가 꿀배를 팔 때

                               귀뚜라미 아파 먹지도 못하고

                               마산발 서울착 새마을호에서 너의 꿀배에 귀를 대어본다  (P.124 )

 

 

 

 

 

                                                     -박형권 詩集, <전당포는 항구다>-에서

 

 

 

 

 

 

 

 

 

 

 

 

'창비시선' 364권. 생명력이 펄떡이는 이미지와 구수한 입담으로 민초들의 소박한 삶을 그리며 '새로운 민중서정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박형권 시인의 두번째 시집.

시인은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삶의 현장에서 빚어낸 진솔한 언어로 자본주의 사회의 '낮은 생태계'에서 가난한 삶을 꾸려가는 서민들의 변두리 인생을 곡진하게 그려내면서 섬세한 감성의 실타래를 풀어놓는다. "거대도시 주변부 동네와 사람살이에 대한 증언"으로서 삶의 진정성이 오롯이 녹아든 시편들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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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9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9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07-29 14:34   좋아요 0 | URL
사과내음과 사과빛
곧 온 들판에 퍼지는
가을 찾아오겠네요~

appletreeje 2013-07-29 22:08   좋아요 0 | URL
예~지금은 혹독한 폭염의 여름이지만 곧,
사과내음 사과빛 가득한 가을이 오겠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지난 여름은 위대했습니다'처럼요. ^^

드림모노로그 2013-07-29 14:45   좋아요 0 | URL
서민들의 삶이야 말로 소박하고 진솔함이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 아이들과 시장을 자주 가보고는 하는데
생동감과 활달함, 이런 분위기가 참 좋더라구요 ㅎㅎ
장볼때 마트보다는 불편하긴 하지만,
자본주의 생태계의 가장 하층에 위치한 서민들이야말로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
처음 만나는 시인의 시들에서 삶의 참의미를 새겨 보게 되네요 ^^
오늘도 좋은 시, 감사드려요 ^^ 오늘도 행복한 하루 ^^~!!

appletreeje 2013-07-29 22:08   좋아요 0 | URL
언제나 드림님의 싱싱한 댓글에 저마저 다시 한 번
읽은 시들을 아름답게 다시금 그 의미를 새기며 읽어보는
좋은 밤입니다.^^
드림님! 내일도 여전히 행복한 날 되세요 ^^~!!

후애(厚愛) 2013-07-29 18:57   좋아요 0 | URL
관심책 중에 하나에요.ㅎㅎ
<웃음 공장>과 <돼지 오월이>도 제 눈길을 끄네요.^^
모두 재밌어 보입니다.
담아두고 나중에 봐야겠어요.^^

더위 조심하시고 행복한 저녁시간 되세요~*^^*

appletreeje 2013-07-29 22:29   좋아요 0 | URL
오늘 이 시집을 읽는데, 참 좋더군요~
저 멀리 있는 감상적인 관념이 아니라...언제나 곁에서 만날 수 있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라서요. ^^
이 시집도 보내드릴께요~ㅎㅎ

후애님께서도 무더위에 더욱 건강 조심하시고,
언제나 편안하고 기쁜 날들 되세요~^^
 

 

 

 

 

 

 

                              메기 낚시

                                       - 흐름에 대하여

 

 

 

 

                           여울에 앉아

                           낚시대를 잡고 있다

                           물살에 떠다닌 내 생애가

                           얹혀 있다

                           우수수 옥수수 머리를 밟으며

                           바람이 자꾸 지나간다

                           손으로 전해오는

                           나를 끌고 가는 시간의 묵직함

                           좀 더 기다려야 하리라

                           나는 이 밤을 바쳤지만

                           메기는 일생을 걸고 있다  (P.11 )

 

 

 

 

 

 

                                       편지 고양이

 

 

 

 

                              고양이는 잔잔한 강과 언덕 마을을 오가며 산다 마을을

                           버리고 잔잔한 강으로 간 사람들도 전에 친했던 고양이

                           는 잊지 않는다 언덕 마을에 남은 가족들이 하고 싶은 말

                           이 있으면 고양이 목에 편지를 달아 보낸다 고양이가 돌

                           아올 때 답장은 없으나 편지가 없는 것을 보면 읽은 것이

                           분명하다 편지가 있던 자리에는 꽃이나 열매가 대신 매

                           달려 있는데 그것을 마당에 심으면 금세 자라 키 큰 나무

                           가 된다. 그러면 서로 잘 있는가 보다 미루어 짐작한다  (P.47 )

 

 

 

 

 

 

                                        사는 법

 

 

 

 

                                강변을 포기하고 남은 땅으로 먹고살려니 모두 부지런

                             히 일해야 한다 여자가 많고 아이들은 빨리 자라지 않으

                             니 노인이라도 쉬지 않고 일한다 사람들은 곡식은 적게

                             먹고 자연히 나는 것을 많이 먹게 되었다 봄에는 꽃을 먹

                             고 여름엔 과일을 먹는데 가을에는 메뚜기들이 많이 잡

                             힌다. 더덕, 고사리, 곤드레, 딱주기 같은 나물이

                             흔하고 겨울에는 강에 내려가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

                             는다 한쪽에 그물을 치고 지팡이를 두들기며 발을 굴려

                             쫓으면 필요한 만큼 잡을 수 있다 짐승이 함께 먹는 도토

                             리가 많이 나는 나무는 베지 않으며 떨어진 것의 반은 줍

                             지 않는다 눈이 많이 내리면 산에서 소나 개 같은 짐승들

                             이 내려오기도 하는데 일단 마당 안으로 들어오면 광을

                             열어주고  제 발로 나갈 때까지 둔다 한 집을 정해 일정하게

                             내려오는 일도 많으며 밖에서 마주치면 알아보고 길동무

                             가 돼주기도 한다   (P.54 )

 

 

 

 

 

 

                           늦은 인사

 

 

 

 

                              바닷가에서 당신은

                              버스를 탔겠지 싸우다 지친 여름의 부스름한 새벽

                              내가 잠든 사이

                              분홍 가방 끌고

 

                              동해와 설악산 사이

                              외줄기 길은 길기도 해

                              다시는 만날 수 없었네

 

                              자고나면 귀에서 모래가 나오고

                              버스만 타면 멀미를 했지

                              아무리 토해도 멈추지 않고

                              정신없이 굴려가던 날들

 

                              가는 사람은 가는 사정이 있고

                              남는 사람은 남는 형편이 있네

                              더 이상 누구를 기다리지 않는 나이

 

                              잘가 엄마

                              아지랑이 하늘하늘 오르는 봄

                              이제야 미움 없이

                              인사를 보내   (P.108 )

 

 

 

 

                                                -전윤호 詩集, <늦은 인사>-에서

 

 

 

 

 

 

 

 

 

 

 

 

: 원산지에선 벌써 사라져버린 ‘부조리시(不條理時)’가 새 것으로 유행하는 지금,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일에 시의 전부를 건 전윤호의 시는 오히려 신선하다. ‘초현실주의’를 마지막으로 지난 50년간 세계의 모든 ‘주의(主義)’가 사그라졌다. 남은 것은 시인의 삶이고, 그 삶을 지탱해주거나 무너트리려 드는 현실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전윤호의 시에서처럼 지나친 과장이나 분노 없이, 지나친 자괴심 없이, 살아 있는 예를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정선의 혼을 ‘도원(桃源)’이라 부르지만 이상향으로 그리지 않고, 오지(奧地)만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일찍 이별한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상징 꽃인 별로 화려하지 않은 물봉숭아 정도로 그리워한다. 정선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한밤중/정선역까지 밀려왔다면/강릉여인숙으로 가자/연탄재 부서진 마당엔/세상의 배꼽 같은 수도꼭지가 반짝이고/빙 둘러선 방들이/묶인 배처럼 흔들리는 곳”(「강릉여인숙 1」), 그런 곳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삶의 중심(세상의 배꼽)을 이룬다. 그런 삶이 시를 만드는 고통과 기쁨을 이 시집은 줄 것이다.

 

 

 

 

전윤호의 한 마디

살아 있는 것들은 소리를 낸다. 가만히 들어보면 말없는 사물들조차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소리를 낸다. 세상은 그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때는 너무 어지럽다. 도원이 그립다. 지금 내 주변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눈을 뜨면 도원이 사라질 것 같다. 눈을 뜨면 모든 게 곧 잊힐 것 같다. 그러나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강변이었다. 식구들의 근심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산 너머 마을로 가겠다고 결심했을 뿐, 어떻게 떠내려온 건지 기억이 없다. 하지만 도원에 관한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점점 더 생생해졌다. 머릿속에 예쁜 문신을 새겨놓은 것처럼. 환하게 욱신거리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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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7 20:12   좋아요 0 | URL
부조리시이든 초현실주의이든
이런 사조를 만든 나라에서는
이런 시도 썼겠지만
모두 이녁 나라와 이녁 고향을 읊는 시가
많았으리라 생각해요.
그저 한국말로 번역되지 않았을 뿐이겠지요.

한국에도 아름다운 시는 많으리라 생각해요.
그저 시집으로 태어나지 않을 뿐일 테지요.

appletreeje 2013-07-27 23:40   좋아요 0 | URL
그렇겠지요~
시란, 결국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아름다운 '삶의 노래'이겠지요.^^

후애(厚愛) 2013-07-28 15:48   좋아요 0 | URL
전 밤 낚시를 좋아하는데...
어릴 적에 딱 한번 아버지와 함께 밤 낚시 갔던 추억이 나네요.^^
시들이 참 좋습니다.*^^*

appletreeje 2013-07-28 22:53   좋아요 0 | URL
저희 집에도 밤 낚시 좋아하는 일인이 있습니다~
요즘은 바다 낚시를 가려 자꾸 새 낚시용품이 날마다 도착합니당. ㅎㅎ

후애님께서도 밤 낚시를 좋아하신다니~오오...멋지시군요!
 

 

 

 

 

 

 

"한겨레신문 여론매체부 기자입니다. 한겨레에 글을 써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2005년, 갑자기 날아온 한 통의 메일에 화들짝 놀랐다. 진보신문의 대명사인 한겨레신문에 나 같은 사람이 글을 쓰는 게 말이나 되는가. 더 말이 안되는 건 메일의 마지막 대목이었다. "최근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나왔으니 천우신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 이 사건이 내가 칼럼을 쓰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단칼에 거절했다. 다시 메일이 왔다. 또 거절했다. 이 과정을 한 번 더 되풀이하자 그쪽에서 연락이 왔다. 한번 만나자고. 얼굴이 안보일 때라면 모르겠지만 마주보고 앉아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그와 난 굳은 악수를 나눴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그 기자가 날 주목했던 건 인터넷 서점 사이트인 알라딘에 내가 썼던 글들 때문이었다. 내가 알라딘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기자는 내 글에 기본적으로 유머가 깔려 있다면서 그런 점이 좋다고 했다. 게다가 난 글을 쓰는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소재 발굴에 대한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3주마다 한 편씩 칼럼을 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 기자의 판단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마감을 넘기고 만 첫 번째 글부터 시작해서 글을 연재하는 1년 동안 난 시종 헤맸으며, 기자의 기대와 부응한 글을 쓴 건 두 번에 불과했다.

3주마다 있는 글 마감은 내게 지옥이었다.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가 지나치다보니 나머지 2주도 편히 지내질 못하기까지 했다. 알라딘에서 하루 3~4편씩 글을 쏟아내던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이유는 '너무 잘 쓰려고 발버둥을 쳐서'였다. 홈런을 치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타자가 삼진을 당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좋은 글을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재미있는 글이 나올 리는 없었다. 수만 명의 독자가 내 글을 본다는 생각에 난 잔뜩 주눅이 들어 버렸고, 20분이면 글 한 편을 뽑아내던 평소와 달리 컴퓨터 모니터 앞에 몇 시간을 앉아 있어봤자 몇 줄을 쓰기 힘들었다.

 첫 번째 칼럼을 쓰던 저녁, 참다못한 난 악마와 손을 잡는다. 이전에 동창 사이트에 써서 칭찬을 받은 글을 칼럼으로 우려먹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글의 요지는 이랬다.

 

 

TGI 프라이데이스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시켜 서로 나눠 먹음으로써 상생의 정신을 기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대표 음식인 삼겹살은 불판에 젓가락질이 난무하는 경쟁적인 음식이다. 우리나라 정치가 싸움질로 일관하는 건 혹시 우리나라가 삼겹살을 좋아하기 때문 아니냐.

 

 

 이 글을 읽은 동창들은 재미있다고 넌 정말 천재라고 날 칭찬했지만 한겨레 독자들은 달랐다.

 " 대학교수가 서양 물을 조금 먹었다고 저 정도니.....쯧쯧. "

 "우리 식문화에 대한 제대로 이해조차 없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오마이뉴스의 한 기자는 장문의 반박글을 쓰기도 했다.

 "문제는 우리의 식문화를 천대하는 그의 의식에 있다. 글을 쓴 교수님께 묻습니다. 당신들이 채 익지 않은 핏빛 벌건 쇠고기를 즐기실 때 돈 없는 서민은 겨우 삼겹살로 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글들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난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미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데다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갔다. 또한 내가 삼겹살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삼겹살을 가르치는 건 아니다. 내 전공은 엄연히 기생충학이며, 학생들에게 당연히 기생충을 가르친다. 게다가 난 친구들 사이에서 삼겹살 매니아로 통하며, 그간 먹은 돼지들이 저승에서 단체로 날 기다리고 있을까봐 걱정하는 중이다. 물론 다음 댓글에는 격하게 공감한다.

 "이따위 글이면 나도 신문 칼럼 쓸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내 칼럼의 수준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년이 다 되어갈 무렵에 한겨레에 전화를 걸어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안 그래도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 그만 쓰시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한 답변이 서운하면서도 고마웠고 역시 내가 있을 곳은 알라딘밖에 없다고, 앞으로는 다시 이쪽으로 발을 딛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칼럼을 그만두고 나니까 세상은 다시금 잿빛에서 푸른빛으로 변해 있었다. 원래 그랬던 것 처럼 여기저기에 부담 없는 글들을 쓰면서 살았는데, 그러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신문에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칼럼을 썼다고 해 봤자 '그래서 어쩌라고?'란 반응이 돌아왔다. 직장 동료들이야 그렇다 쳐도 친한 친구들까지 내 칼럼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신문 아홉 부씩을 사서 친구들에게 돌리셨던 어머님밖에 없었다. 아무도 안 보는데 왜 나는 그렇게 신경을 썼을까 하는 아쉬움은 그로부터 3년 뒤 경향신문에서 제의가 들어왔을때 오래 생각하지 않고 수락하는 이유가 됐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기회라는 건 자주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한겨레에서 철저히 실패한 내게 경향에서 손을 내밀어 줬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제의가 왔을 땐 나 역시 손이 좀 근질근질하던 터였는데, 바로 거절하면 없어 보일까봐 생각해 보겠다고 전화를 끊었다가 10분이 채 못 돼어 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서민의 과학과 사회'라니, 테마도 근사했다. 이번엔 3주가 아니라 2주마다 칼럼을 보내야 했지만 난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화요일 점심이 마감이었는데, 난 대부분 그 전 주말에 글을 보내 줬으며, 심지어 두 편씩 보내서 "마음에 드는 글 실으세요."라고 부탁하는 여유를 부렸다. 만 3년간 글을 쓰면서 마감일에 쫓겼던 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글 한 편을 쓰는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게 다 아무도 안 본다는 걸 알았기에 가능한 거였다.

 여유가 생기자 '평소 실력'이 그대로 나왔다. 한겨레 칼럼 중엔 특별히 주목받은 게 없었지만, 경향에 쓴 글들 중엔 그래도 널리 회자된 쪽이 더 많아졌다. "어쩌면 비판을 이렇게 재미있고 웃기게 할 수 있는지, 벤치마킹 하고 싶은 분이다." <88만원 세대>의 저자로 유명한 우석훈 선생은 어느 글에선가 이렇게 얘기하셨다. "서민 교수, 존경한다." 그렇다고 해서 길을 가다가 알아보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글을 쓰는 걸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어 보면 글쓰기에는 특별한 왕도가 없고,

 

다만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게 글을 잘 쓰는 유일한 방법이란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백일장에서 단 한 번도 상을 타지 못했던 내가 신문에 고정 칼럼까지 쓰게 된 건 순전히 알라딘 덕분인데, 거기서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게 됐고, 남들과 경쟁을 하며 하루 3~4편씩 글을 썼던 것도 아주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되었다. 명색이 교수인데 연구도 별로 안하고 블러그질만 했다고 후회하던 그 시절이 사실은 오늘의 영광을 만든 셈. 그래서 젊은 학생들한테 말한다.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고, 블로그를 만들어 하루 한 편씩 글을 쓰라고. 블러그에 글을 쓰는 건 낭비가 아니라 먼 미래를 위한 저축이며. 10년쯤 그렇게 하면 나중에 큰 돈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학생들 중에 내말을 새겨듣는 이는 드물었는데, 요즘엔 스마트폰이라는 엄청난 장난감까지 나왔으니 글과 가까워지기는 더 힘들어진 듯싶다. "아직도 그런 전화기를 쓰냐?"는 비아냥에도 내가 스마트폰을 안 사는 이유는 다 오래오래 칼럼니스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함이다. 젊은이들이여, 칼럼니스트가 되어 보고 싶지 않은가? 내가 해 봐서 아는데, 굉장히 보람 있다.  (P.113~118 )  /  서민은 기생충학과 교수이자 칼럼니스트다.

 

 

 

                                                             -<세상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에서

 

 

 

 

 

 

 

 

  어제 보내온 <세상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를 읽다가, 문득 마태우스님의 글을 만나

  더욱 반갑고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 이 책을 읽었다. 

  꼭 책을 낸다거나 칼럼니스트가 되는 일이 아니더라도, 알라딘에서의 시간들이 내게도

  冊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또 다른 분들이 쓰신 훌륭하고  좋은 글들을 읽는 즐거움을

  매일매일 만날 수 있었으며... 또 공감할 수 있던 덕분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읽고 쓰는 일은,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보다 더

  재밌고 즐겁고 충만한 가치의 지향과 유연함으로 확장시키기도 하며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

  는 기쁨과 함께, 어쩌면 스스로에게 보내는 '즐거운 편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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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4 21:44   좋아요 0 | URL
글을 쓸 적에는
살가운 벗과 이웃과 살붙이한테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음이 되지 싶어요

appletreeje 2013-07-25 10:02   좋아요 0 | URL
예~~그래서 그 글들을 읽을때는
더욱 정답고 참 좋습니다~

2013-07-24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4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5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3-07-25 00: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나무늘보님 서재에서 마태님 글이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요즘 넘 잘나가셔서 말걸기 망설여지기까지 하지요

appletreeje 2013-07-25 10:3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다가 깜짝!! 괜히.. 더 반갑고 좋았습니다~
아마 하늘바람님 글도 어느 책에선가 만나면,
다른 알라디너님들의 글들을 만나도 굉장히 기쁘고 반갑겠지요~?^^

하늘바람님! 오늘도 상쾌하고 좋은 날 되세요!~
 

 

 

 

 

 

                              탱자나무 카페

 

 

 

 

                           유자는 얽어도 손님상에 오르고

                           탱자는 고와도 똥밭에 구른다는 옛말 있다지만

                           탱자나무 제 처지 탓한 적 없을지니

                           그것만으로 그 심성 족히 짐작 가리라

 

                           햇빛을 좋아해서 저무는 석양 오래 기웃거리며

                           가만히 얼굴 붉히는 게 일과이고,

                           오전마다 계모임 하는 참새들의 수다를 묵묵히 들어주

                        면서

                           자릿값으로 고작 햇살 몇웅큼 받는 게 전부,

                           어쩌다 호랑나비 신사가 몸에 묻은 햇빛을 털어내며

                           어둑한 입구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마담은 얼른 거울을 반짝이며 매무새를 고치곤 했다는데,

 

                           탱자나무 카페엔 가시 굴형 사이로 난 비밀통로와

                           허파꽈리 같은 밀실들이 하도 많지만

                           퇴폐업소 따위로 단속된 적은 한번도 없다는데,

                           스쿠루지 굴뚝새할아범이 들락거리며 맡겨놓은

                           금화들을 지키는 비밀금고라는 소문도 떠돌았고,

                           어떤 이는 거길 지날 때마다

                           촛불 빛이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걸 보았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익어가는 술 냄새가 제법 그윽했다는데,

 

                           탱자나무 카페엔 그 누구도 들어가본 적 없는

                           밀실 중의 밀실이 있으니

                           수다쟁이 참새들은 감히 얼씬도 못하는 곳이라네  (P.20 )

 

 

 

 

 

 

                              햇볕 아래 2

 

 

 

 

 

                             무덤 옆 풀밭 공터 귀퉁이에

                             이주노동자의 것인 듯한 여행가방 하나 버려져 있다

                             그 옆에 단정하게 놓인 낡은 구두 한켤레는

                             주인이 마치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을 증명하듯

                             땡볕 아래 환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어쩌면 육체이탈*중인지도 모르겠다

                             구름 속에 머리를 밀어넣자**, 신발만 남겨둔 채

                             온몸이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구름마저 사라지고, 쨍쨍한 햇빛이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가?

                             생각하노라니, 문득 내가 전생의 어느 별에선가

                             가방마저 버린 채, 신발마저 벗어놓은 채

                             허둥지둥 떠나왔던 것은 아닌가 싶다

 

                             호기심 많은 누가 열어보았는지

                             반쯤 벌어진 가방에

                             내의며 남방 몇벌 흐트려져 있다  (P.24 )

 

 

                             * '유체이탈(幽體離脫)'에 빗대어 만든 신조어.

                             ** 박진형 시인의 시, 홍창룡 화가의 그림제목.

 

 

 

 

 

 

                           노래

 

 

 

 

                            가설식당 그늘 그 늙은 개가 하는 일은

                            온종일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를 듣는 것

                            턱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려 가만히 듣거나

                            심심한 듯 벌렁 드러누워 멀뚱멀뚱 듣는다

 

                            곡조의 애잔함 부스스 빠진 털에 다 배었다

                            희끗한 촉모 몇 올까지 마냥 젖었다

                            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슬렁거릴 힘마저 없다

                            눈꼽 낀 눈자위 그렁그렁 가을 저수지 같다

 

                            노래를 틀어대는 주인아저씨보다

                            곡조의 처연함 몸으로 다 받아들인 개가

                            여가수의 노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

 

                            뼛속까지 사무친다는 게 저런 것이다

                            저 개는 다음 어느 생에선가 가수로 거듭날 개다

                            노래가 한 생애를 수술 바늘처럼 꿰뚫었다  (P.39 )

 

 

 

 

 

                                    -엄원태 詩集,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에서

 

 

 

 

 

 

 

 

 

 

 

 

 

이 아름다운 순간,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바치는 레퀴엠
육체적 고통의 삶을 끌어안는 ‘견딤의 시학’과 소멸하는 생에 대한 ‘쓸쓸한 긍정’을 서정적 명상의 언어로 노래해온 엄원태 시인의 네번째 시집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가 출간되었다. 12년의 공백기를 거쳐 나온 <물방울 무덤>(창비 2007)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소멸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의 한계를 껴안으며 고통의 삶을 따듯한 시선으로 감내하는 마음을 성찰의 언어에 담아 소멸의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다. “덧없이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기록이자 애도”(시인의 말)로서 애잔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간절한 시편들이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가슴 서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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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3 11:56   좋아요 0 | URL
새도 개도
나무도 풀도
저마다 사람들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며
온누리에 고운 빛 뿌려 줍니다.

appletreeje 2013-07-23 15:07   좋아요 0 | URL
1987년부터 만성신부전증을 앓아온 시인의...그러나
병마에 시달린 자의 쓸쓸한 정서가 아니라 생의 순환을 정당하게
수용하려는 온화함의, 아름다운 詩集을 비가 많이 내리는 날..세상의 '빛'으로
감사히 읽습니다.
새와 개와 나무들과 타나 호수와 사람들의 이야기를요..

2013-07-23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3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3-07-23 20:27   좋아요 0 | URL
오늘 수락산에 장어 포장하면서 잠깐 청상병시인님 시가 있는곳까지 걸어가보았답니다. 살짝 산안개가 끼고 시를 읽으니 참 좋더라고요. 이제는 시하면 나무늘보님 생각이 나요. ^^

2013-07-23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