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여사와 고구마 씨
내가 가겟집에 신용거래 하러 갈때
사지와 얼굴이 다 비뚤어진 고구마씨가
말복 더위를 쫓으러 나왔는지 길 가운데 서 있고
날개 여사가 그옆에 서서 구겨진 손을 힘겹게 저으며
잘 결합하지 않는 자음과 모음으로
말이란 걸 하는데
얼핏 보기에 말다툼을 하는 것 같다
분명 길에서 마주쳐 따뜻하게 속삭이는 것인데
어찌 인사 주고 받는 일에
저렇게 힘이 들어가야 하나
하늘하늘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날개 여사가
그 그래서 머......먹었냐고 하자
모......못 먹었어 고구마씨가 말하고
날개 여사가
내가 해......해......해줄께 하고
골목에 핀 능소화와 베란다에 나와 있는 봉숭아꽃을
정처없이 찔러댄다
라면 한봉지와 사이다 한 병을 그어 놓고
돌아오다 보니
능소화 담장 밑에 날개 여사와 고구마 씨가 쭈그리고 앉
아서
사람 구경을 하고 있다
무심코 날개 여사를 보다가
저, 저, 저런!
날개 여사가 활짝 열려 있다
코앞의 깊이 하나 변변히 가리지 못하는 날개 여사가 남
걱정이다
날개 여사가 고구마 씨 입에
상갓집에서 가져온 돼지수육 한 조각을 찢어 넣는데
코로 들어갈지 입으로 들어갈지 아슬아슬하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순간순간 극복이다 저렇게 저리도록
끝끝내 살고 싶게 (P.13 )
예천 사과장수
예천 사과 한 트럭 실어오면 아침나절에 다 팔고
우거지갈비탕과 마주 앉아서
낮은 생태계의 시끌벅적한 오후를 논하였어
아이들에게 줄 페페로니 피자를 사고
어머니의 골다공증에 잘 듣는 칼디텍을 사면
사과즙 같은 가랑비 내려
난전의 과일상들은 오므라이스 같은 지붕을 얹었지
그해 시월에는 사과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았어
비닐봉지에 담으면 안에서 선홍빛 날개가 푸득거렸어
꼭 한개씩은 더 얹어주었고
어떤 놈은 스스로 날아올라 손님들의 혀에 가서 달라붙
었어
당도 높은 농사꾼과 직거래를 튼 덕에
비바람과 햇빛과 소쩍새가 담긴 다디단 소가지를 활짝
열어 보였지
다 팔고 남은 못난이 사과와 짐칸에서 뒹굴며 칼날보다 푸
른 돈을 세면
돈에도 분명 혈관이 있어
손끝에 뜨거운 피가 묻었어
돈이 횟집의 우럭처럼 펄떡거렸고 아가미가 싱싱했어
돈도 생물마냥 싱싱한 게 좋아
오늘도 그해처럼 비 내리는 시월
썰물 든 저녁의 시장 입구에서 사과들은 날고 싶고
강원도에서 온 송이버섯 장수와
짬뽕국물 시켜놓고 식어가는 위장을 데워
술 한잔 털어넣고 목청에 힘주고 싶지만
함께 갈 트럭이 잔을 가로막아
지금은 사과나무 네그루가 대문 앞에 나와서
발갛게 익은 볼로 저녁을 기다리는
바로 그 담운(淡雲)의 시간이거든 (P.28 )
네가 꿀배를 팔 때
김장배추 심어놓은 것이 손바닥만하고
방아꽃이 피어 추어탕 생각나는 점심나절 너는
예비군 모자를 쓰고 길 위에 섰다
가을 하늘이 뼛속에서 푸른 너는
밥도 되고 반찬도 되는
작은 농업의 영농일기다 그 촘촘한 기록들이
제대로 읽히지 못해
체면? 그런 것 개 밥상에 던져주고 국도변에 나와서
꿀배와 꿀사과와 꿀다래를 내놓고
지나가는 차들에게 꾸벅꾸벅 절을 한다
그 옆을 지나가던 나는
너를 조금 안다고 꿀배를 몇개 사가려는데
한여름 수숫대처럼 꼿꼿했던 네가 나한테까지 허리를 꺾
는다
이게 어찌 농부의 가을인가
서울 사는 게 무슨 벼슬이라고
눈치 보며 몇 줄 적은 비겁한 서정이 또 무슨 벼슬이라고
찰랑찰랑 낚시대를 흔들며
소나기도 물꼬도 소쩍새도 없는 만원으로
나의 생존을 찔러본 것일 뿐인데
이미 나는 너의 소문을 초라한 가을바람에게 들었다
밤이 이슥도록 독을 타듯 진도 7.5의 귀뚜라미 소리를
꿀배에 새겨넣었다더라고
네가 꿀배를 팔 때
귀뚜라미 아파 먹지도 못하고
마산발 서울착 새마을호에서 너의 꿀배에 귀를 대어본다 (P.124 )
-박형권 詩集, <전당포는 항구다>-에서
'창비시선' 364권. 생명력이 펄떡이는 이미지와 구수한 입담으로 민초들의 소박한 삶을 그리며 '새로운 민중서정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박형권 시인의 두번째 시집.
시인은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삶의 현장에서 빚어낸 진솔한 언어로 자본주의 사회의 '낮은 생태계'에서 가난한 삶을 꾸려가는 서민들의 변두리 인생을 곡진하게 그려내면서 섬세한 감성의 실타래를 풀어놓는다. "거대도시 주변부 동네와 사람살이에 대한 증언"으로서 삶의 진정성이 오롯이 녹아든 시편들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