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 카페
유자는 얽어도 손님상에 오르고
탱자는 고와도 똥밭에 구른다는 옛말 있다지만
탱자나무 제 처지 탓한 적 없을지니
그것만으로 그 심성 족히 짐작 가리라
햇빛을 좋아해서 저무는 석양 오래 기웃거리며
가만히 얼굴 붉히는 게 일과이고,
오전마다 계모임 하는 참새들의 수다를 묵묵히 들어주
면서
자릿값으로 고작 햇살 몇웅큼 받는 게 전부,
어쩌다 호랑나비 신사가 몸에 묻은 햇빛을 털어내며
어둑한 입구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마담은 얼른 거울을 반짝이며 매무새를 고치곤 했다는데,
탱자나무 카페엔 가시 굴형 사이로 난 비밀통로와
허파꽈리 같은 밀실들이 하도 많지만
퇴폐업소 따위로 단속된 적은 한번도 없다는데,
스쿠루지 굴뚝새할아범이 들락거리며 맡겨놓은
금화들을 지키는 비밀금고라는 소문도 떠돌았고,
어떤 이는 거길 지날 때마다
촛불 빛이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걸 보았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익어가는 술 냄새가 제법 그윽했다는데,
탱자나무 카페엔 그 누구도 들어가본 적 없는
밀실 중의 밀실이 있으니
수다쟁이 참새들은 감히 얼씬도 못하는 곳이라네 (P.20 )
햇볕 아래 2
무덤 옆 풀밭 공터 귀퉁이에
이주노동자의 것인 듯한 여행가방 하나 버려져 있다
그 옆에 단정하게 놓인 낡은 구두 한켤레는
주인이 마치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을 증명하듯
땡볕 아래 환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어쩌면 육체이탈*중인지도 모르겠다
구름 속에 머리를 밀어넣자**, 신발만 남겨둔 채
온몸이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구름마저 사라지고, 쨍쨍한 햇빛이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가?
생각하노라니, 문득 내가 전생의 어느 별에선가
가방마저 버린 채, 신발마저 벗어놓은 채
허둥지둥 떠나왔던 것은 아닌가 싶다
호기심 많은 누가 열어보았는지
반쯤 벌어진 가방에
내의며 남방 몇벌 흐트려져 있다 (P.24 )
* '유체이탈(幽體離脫)'에 빗대어 만든 신조어.
** 박진형 시인의 시, 홍창룡 화가의 그림제목.
노래
가설식당 그늘 그 늙은 개가 하는 일은
온종일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를 듣는 것
턱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려 가만히 듣거나
심심한 듯 벌렁 드러누워 멀뚱멀뚱 듣는다
곡조의 애잔함 부스스 빠진 털에 다 배었다
희끗한 촉모 몇 올까지 마냥 젖었다
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슬렁거릴 힘마저 없다
눈꼽 낀 눈자위 그렁그렁 가을 저수지 같다
노래를 틀어대는 주인아저씨보다
곡조의 처연함 몸으로 다 받아들인 개가
여가수의 노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
뼛속까지 사무친다는 게 저런 것이다
저 개는 다음 어느 생에선가 가수로 거듭날 개다
노래가 한 생애를 수술 바늘처럼 꿰뚫었다 (P.39 )
-엄원태 詩集,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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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순간,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바치는 레퀴엠
육체적 고통의 삶을 끌어안는 ‘견딤의 시학’과 소멸하는 생에 대한 ‘쓸쓸한 긍정’을 서정적 명상의 언어로 노래해온 엄원태 시인의 네번째 시집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가 출간되었다. 12년의 공백기를 거쳐 나온 <물방울 무덤>(창비 2007)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소멸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의 한계를 껴안으며 고통의 삶을 따듯한 시선으로 감내하는 마음을 성찰의 언어에 담아 소멸의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다. “덧없이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기록이자 애도”(시인의 말)로서 애잔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간절한 시편들이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가슴 서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