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기 낚시
- 흐름에 대하여
여울에 앉아
낚시대를 잡고 있다
물살에 떠다닌 내 생애가
얹혀 있다
우수수 옥수수 머리를 밟으며
바람이 자꾸 지나간다
손으로 전해오는
나를 끌고 가는 시간의 묵직함
좀 더 기다려야 하리라
나는 이 밤을 바쳤지만
메기는 일생을 걸고 있다 (P.11 )
편지 고양이
고양이는 잔잔한 강과 언덕 마을을 오가며 산다 마을을
버리고 잔잔한 강으로 간 사람들도 전에 친했던 고양이
는 잊지 않는다 언덕 마을에 남은 가족들이 하고 싶은 말
이 있으면 고양이 목에 편지를 달아 보낸다 고양이가 돌
아올 때 답장은 없으나 편지가 없는 것을 보면 읽은 것이
분명하다 편지가 있던 자리에는 꽃이나 열매가 대신 매
달려 있는데 그것을 마당에 심으면 금세 자라 키 큰 나무
가 된다. 그러면 서로 잘 있는가 보다 미루어 짐작한다 (P.47 )
사는 법
강변을 포기하고 남은 땅으로 먹고살려니 모두 부지런
히 일해야 한다 여자가 많고 아이들은 빨리 자라지 않으
니 노인이라도 쉬지 않고 일한다 사람들은 곡식은 적게
먹고 자연히 나는 것을 많이 먹게 되었다 봄에는 꽃을 먹
고 여름엔 과일을 먹는데 가을에는 메뚜기들이 많이 잡
힌다. 더덕, 고사리, 곤드레, 딱주기 같은 나물이
흔하고 겨울에는 강에 내려가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
는다 한쪽에 그물을 치고 지팡이를 두들기며 발을 굴려
쫓으면 필요한 만큼 잡을 수 있다 짐승이 함께 먹는 도토
리가 많이 나는 나무는 베지 않으며 떨어진 것의 반은 줍
지 않는다 눈이 많이 내리면 산에서 소나 개 같은 짐승들
이 내려오기도 하는데 일단 마당 안으로 들어오면 광을
열어주고 제 발로 나갈 때까지 둔다 한 집을 정해 일정하게
내려오는 일도 많으며 밖에서 마주치면 알아보고 길동무
가 돼주기도 한다 (P.54 )
늦은 인사
바닷가에서 당신은
버스를 탔겠지 싸우다 지친 여름의 부스름한 새벽
내가 잠든 사이
분홍 가방 끌고
동해와 설악산 사이
외줄기 길은 길기도 해
다시는 만날 수 없었네
자고나면 귀에서 모래가 나오고
버스만 타면 멀미를 했지
아무리 토해도 멈추지 않고
정신없이 굴려가던 날들
가는 사람은 가는 사정이 있고
남는 사람은 남는 형편이 있네
더 이상 누구를 기다리지 않는 나이
잘가 엄마
아지랑이 하늘하늘 오르는 봄
이제야 미움 없이
인사를 보내 (P.108 )
-전윤호 詩集, <늦은 인사>-에서
황동규 (시인)
: 원산지에선 벌써 사라져버린 ‘부조리시(不條理時)’가 새 것으로 유행하는 지금,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일에 시의 전부를 건 전윤호의 시는 오히려 신선하다. ‘초현실주의’를 마지막으로 지난 50년간 세계의 모든 ‘주의(主義)’가 사그라졌다. 남은 것은 시인의 삶이고, 그 삶을 지탱해주거나 무너트리려 드는 현실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전윤호의 시에서처럼 지나친 과장이나 분노 없이, 지나친 자괴심 없이, 살아 있는 예를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정선의 혼을 ‘도원(桃源)’이라 부르지만 이상향으로 그리지 않고, 오지(奧地)만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일찍 이별한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상징 꽃인 별로 화려하지 않은 물봉숭아 정도로 그리워한다. 정선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한밤중/정선역까지 밀려왔다면/강릉여인숙으로 가자/연탄재 부서진 마당엔/세상의 배꼽 같은 수도꼭지가 반짝이고/빙 둘러선 방들이/묶인 배처럼 흔들리는 곳”(「강릉여인숙 1」), 그런 곳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삶의 중심(세상의 배꼽)을 이룬다. 그런 삶이 시를 만드는 고통과 기쁨을 이 시집은 줄 것이다.
전윤호의 한 마디
살아 있는 것들은 소리를 낸다. 가만히 들어보면 말없는 사물들조차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소리를 낸다. 세상은 그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때는 너무 어지럽다. 도원이 그립다. 지금 내 주변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눈을 뜨면 도원이 사라질 것 같다. 눈을 뜨면 모든 게 곧 잊힐 것 같다. 그러나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강변이었다. 식구들의 근심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산 너머 마을로 가겠다고 결심했을 뿐, 어떻게 떠내려온 건지 기억이 없다. 하지만 도원에 관한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점점 더 생생해졌다. 머릿속에 예쁜 문신을 새겨놓은 것처럼. 환하게 욱신거리는 그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