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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무수하게 읽힌 작품 중 하나여서, 또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인용되는 작품 중에 아마도 순위권에 들 정도로 그 노출의 빈도가 높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출판사 비채가 출간한 김욱동 교수의 번역 판본을 접하면서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이 작품의 감상을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이 어떻게 한국사회에 유독 많은 번역 판본을 갖게 되었는지는 아이러니이지만 추정되는 이유가 있긴 하다. 우리사회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된 195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첨예한 장이었으며, 소위 우익은 이 소설을 소비에트연방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의 패악과 실패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활용한 것이었고, 좌익은 노동자가 끊임없이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는 삶의 현실을 설명하는 효과적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극렬한 이념의 갈등이 낳은 참으로 모순되는 좌우의 아전인수는 이 작품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야 되는 권장도서가 되는데 서로 이의가 없었다. 여기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떠나 얼마나 다양한 관점으로 읽히고 서로 다른 해석을 갖게 하는지, 바로 이것이 문학특성의 일면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게 하는 것이다.
소설은 장원농장의 주인인 인간‘존스’로부터 동물들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착취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려는 동물의 반란과 이후 동물들의 공동자치, 그리고는 권력의 갈등과 지배권력의 등장, 다시금 반복되는 계급사회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무력한 동물들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사실 너무도 극명한 플롯으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간과 인간사회, 그리고 사회주의를 나아가서 당대 소비에트연맹(구 소련)을 상징하는 동물들과 동물농장을 통해 후기산업자본사회의 노동자인 대다수 시민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과 부와 권력의 비열한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견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맹 건설이란 특정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의 인물과 사건들을 실제의 인물들과 사건의 연장으로 해석하면 그야말로 단순명료해져서 정작 작품의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의도들을 놓치고 말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비에트공산주의의 초기 권력투쟁이나 자본주의 사회와의 갈등과 기만적 협력이라는 협소한 틀에 고정시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하나의 가능한 독해로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지, 마치‘조지 오웰’이, 이 작품을 하나의 단순한 맥락으로만 썼다고 주장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본권력이 무산계급인 노동자의 노동력 착취기반에 서있음으로서 이 구조는 여하한 방식으로 개선하여야 할 당위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소재는 하나의 구성요소일 뿐이지 소설의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획득하고 권력을 유지 존속키 위해 계층을 다시금 분리하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발단은 농장동물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메이저 영감이란 돼지의 훈시로 착취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등, 동물다운 동물(인간다운 인간의 은유)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기본 권리에 대한 자각과 선동이다. 즉, 자본권력에 억압되어 착취만 당하는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혁명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이론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시작은 당대의 무산계급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주의의 염원으로 시작되지만, 이 후 돼지‘나폴레온’이 정적(政敵)인‘스노볼’을 무참히 쫒아내는 것과 같이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연상하게 하지만, 이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본성의 발현이라 보는 것이 오히려 현대적인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이 획득되었을 때, 또한 이의 유지존속을 위해 인간이 하는 행동에 대한 일련의 통찰로 보면 권력자의 정당성 확보와 특권의식의 발효, 시민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두려워하는 요소를 통해 언로를 차단하거나 반대의견을 묵살하는 사악한 논리전술을 볼 수 있다. 동물들의 회의(懷疑)와 반대가 예상되는 정책을 권력자의 의도대로 실현코자 할 경우, 동물들이 끔찍스럽게 싫어하는 인간‘존스’나 추방된 ‘스노볼’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여 아무도 이의를 말 할 수 없게 하는 형식이다. “존스가 다시 돌아오는 거요! ~ 여러분 중에 존스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는 아마 하나도 없겠지요?”이의를 달면 반동이 되는데 어느 누가 의견을 말 할 수 있겠는가? 한국사회에도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보수집권당이 한결같이 사용하는 전술이 있는데, 서민의 복지를 이야기하거나 정당한 배분과 같이 평등을 말하면 여지없이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것과 같다. 빨갱이에 동조하면 반역이 되고마는 희한한 왜곡전술인데 권력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가장 천박하고 사악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동물농장은 권력의 탐욕, 사악함, 타락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경쟁자를 숙청하고 추방하는 방법, 반대세력을 굴복시키는 방법, 추방된 정적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법, 권력을 부의 축적수단으로 이용하는 방법, 특권화하고 계급화하는 수단과 과정 등 인간사회의 평등한 공동체의 구축이란 이처럼 어렵고 도달하는데 고통스러운 장애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랄 수도 있다. 소설에는 시종일관 시니컬한, 상황의 변화에 냉담함 혹은 무관심을 지속하는‘벤저민 영감’이란 당나귀가 있다. 이 자는 인간인 존스의 농장시절이나, 돼지 나폴레온의 농장시절이나 “굶주림과 고통과 실망은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라고 단순한 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시민 생활의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네발달린 짐승인 돼지가 이윽고는 두발로 서서 인간의 흉내를 내기에 이르는데, 결국은 권력이 지향하는 것은 소유, 즉 물질을 향한, 그리고 차별을 통한 권위의 확보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의 결말은 인간사회에 하층계급이 있다면 동물농장에는 하층동물이 있으며, 더 열심히 일하면서 식량을 적게 배급받는 사회의 실현이라는 권력의 독재화, 전제화라는 권력이 부패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체제도 기만과 허위, 실패를 야기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한다면 소비에트공산주의의 위선과 실패를 고발했다고 하겠지만, 이젠 보다 폭넓은 읽기를 위한 독해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번역 판본에는 「문학과 정치」라는 김욱동교수의 동물농장과 조지오웰에 대한 해설이라 할 수 있는 평론이 80여 쪽 수록되어있어, 작가 오웰의 문학과 정치사상은 물론 소설 동물농장에 대한 심화된 읽기와 연구가 가능토록 지원되고 있다. 또한 소설의 본문에는 풍부하고 세심하게 주석들이 설명되고 있어 은유된 시대상과 결부하여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도록 되어있다. 이것이 자유로운 독서의 이해를 방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이를 배경지식으로 참고한다면 초행길인 독서자에게는 유용한 안내자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