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의 계절, 나무와 곤충, 새, 작은 설치류에서 포식동물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풍요로움과 본능의 노래소리가 무르익어 진녹색 녹음속에 울려퍼진다. 생태주의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이러한 대자연 속에서 인간의 인위적 교란과 맞서는 여인들의 당찬 삶의 목소리와 그녀들의 진솔한 사랑과 성의 아름다움을 들려준다. 감각적이고 우아한 문장과 지적인 섬세함, 그리고 아름다운 서사가 만들어내는 정말의 여름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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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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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 - 고통, 불안, 불쾌, 수치, 모멸, 부족(미흡)... - 이 제거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젊음, 쾌락, 평온만이 있는 세상, 셰익스피어의 희곡『템페스트』 5막1장 中의 “오오 멋진 신세계여!”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오직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 그래서 행복이외의 것들은 모두 버려진다. 이제 인간이란 존재는 다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감정과 정서, 의식과 무의식, 즉 인간의 삶을 구성하던 여타의 요소들이 싹 걷어진 새로운 존재의 탄생(생산) 말이다.

 

소설은 이 필요성의 장치에서 시작된다. 외부생식을 통한 수십, 수백의 똑같은 인간에서 최고의 지식을 갖춘 소수의 인간 등 예정된 사회계급별로 인공배양과 부화의 조건을 차별하고, 조건반사 훈련과 수면 교육법을 통해 획일화된 인간을 생산한다.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등 사회계급에 따라 배양되고 양육된 인간들은 동일한 일의 반복된 노동과 직업에 배치되어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모두 행복하다. 사랑, 충성이란 감정과 정서는 없으며, 저항할 유혹이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감정을 가지면 사회는 동요한다.”는 불안을 제거하기위해 인간의 내적 동요자체가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유아기에서부터 남녀의 성적 접촉이 권장되고, 쾌락을 위해 섹스 파트너는 결코 고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 혹여 삶의 행복이 감소하면 ‘소마’라는 환각제를 복용하여 순간의 비(非)행복감도 차단한다. 조건 반사교육으로 노예화된 인간들, 자아의식도 없으며 자신들이 생존하는 고맙고 안락한 요소에 별도의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안주할 수 있는 세계이며, 계급제도의 숲속을 자연스럽게 거니는 사람들로 조직화된 사회이다. 또한 “옷이 해지면 버리고 새 것을 사라!”는 소비지상의 신성불가침의 원칙이 있는 곳, 수선(修繕)은 반사회적 행동으로 처벌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묘사된 인공의 조작된 신세계가 그리 낯설지 않다. 이미 소비자유주의가 판치고 쾌락지상의 공리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 사고와 내적성찰의 겨를도 없이 생존의 경쟁에 매달리도록 학습된 오늘의 우리들과 소설 속 인간들에게서 그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에서도 개인의 의의와 중요성을 의식하는 존재는 출현한다. 단독의 개인이라는 자각, 자의식에 대한 의문이 자라는 것이다. ‘버나드’, 그리고 ‘헬름홀츠’라는 최고 계급의 인간은 우울과 고독, 애착과 비판에서 막연한 자유의 원기를 느낀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인간이 존재하는 보호구역에서 조건반사 양육소의 소장 ‘토마스’로부터 버려진 베타 계급의 '린다‘와 그녀의 아들 ’존‘을 발견하게 된다. 토마스의 적의에 맞서기 위해 버나드는 총통 ’무스타파 몬드‘의 허가 하에 린다와 존을 그들의 세계로 데려온다.

 

내부 생식에 의한 태생을 하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은 소외되기만 했던 버나드를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고, 자신이 그들 세계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식을 고조시킨다. 세계가 그를 중요하게 인정하는 한 그 세계의 질서는 훌륭한 것이 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을 ‘보수’의 본질이라 해야 할 것이다. 비판과 의혹의 자의식은 사라지고 기득권의 유지와 확장에 몰두하는 추오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호구역에서 버나드가 데려온 야만인인 존은 그가 그리던 신세계가 쾌락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없음에 절망하고, 무절제와 획일화된 인간들의 비인간성에 좌절한다. 자신의 시선을 매혹했던 여성 ‘레니나’로부터 억제되지 않은 성적 충동 그 자체, 만나면 바로 끝장내는 그녀의 행동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에게 신세계의 최고 여성인 레니나는‘매춘부!’일 뿐이다. 존은 더 이상 버나드를 위해 인간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행사에 나서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버나드의 명성은 치명적 상황을 맞이하고, 이는 버나드를 다시금 의혹하는 인간, 인간의 단독성을 생각하는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것은 사회 체제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총통 무스타파 몬드에게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고, 버나드와 헬름홀츠, 야만인 존은 추방되고 격리되어야 하는 존재이상이 아니다. 아마 이 소설이 제기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가장 논쟁적인 대화라 하여야 할 것이다. 존과 무스타파 몬드의 인간과 인간세계의 당위에 대한 난상 토론이 전개된다. 니체적 힘에의 의지에 대한 궁극의 논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신 과 과학, 보수와 진보, 긍정과 부정, 이성과 감정의 대립.

 

“우리는 우리자신을 만들지 않았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우리는 신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신은 문명(기계, 의약품, 보편적 행복)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행복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맞서고, 순결과 절제, 고귀함과 비장함을 얘기할 때 순결은 신경쇠약이며, 이것은 곧 불안정이고 문명의 종말이라고 대극에 선다. “타락한 쾌락이 풍부하지 않고서는 영속적 문명은 기대할 수 없다.”고 무스타파는 강변하는 것이다. 자연자원의 남용, 물질의 무한 소비, 공리적 쾌락의 끝없는 추구, 바로 오늘의 인간사회가 지향하는 것들이다. 과연 우리는 영속적 조달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종말을 향해가는 인간들, 인류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지 않는가?

 

오늘의 우리들은 매양 ‘행복’을 노래한다. 마치 행복해지는 것만이 삶인 것처럼. 과연 “불행해질 권리도 없으며, 성병에 걸릴 권리도 없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와 온갖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없는 것”이 행복인 것일까?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추구할 권리도 없다면 그것이 행복이겠는가? 고통도 좌절도 죽음의 운명도 긍정하는 삶, 긍정을 향한 힘에의 의지를 말한 니체의 사변이 절절하게 울려대는 것만 같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라는 존의 외침만큼 진실의 언어는 없는 것만 같다. 낡은 등대에 은신하지만 끝내 다름의 이해를 지니지 못한 인간들의 호기심, 그 과잉의 쾌락주의를 버리고 흔들거리는 그의 다리만큼이나 오늘의 사회, 이 역설의 언어인 멋진 신세계는 다름 아닌 지옥을 향한 통과세계가 아니겠는가? 과학은 없고 공학만 있으며, 예술은 사라지고 예능만이 넘실대고, 종교는 이성적 인간이 대체한 행복 추구의 세계. 정말 아아 멋진 신세계여가 아닌가? 시대가 제아무리 흘러도 이 소설은 인간에게 무수한 반성의 언어를 발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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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월드북 204
칼 구스타프 융 지음, 김양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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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상징』은 내게 있어서 어떤 절실한 필요에 의해 수없이 반복해서 읽은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삶의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으로 인해 무지하기 그지없는 내적(內的)상태에 도달하는 길을 찾으려는 간절함이었다고 해야 할까? 특히, ‘칼 구스타프 융’이 쓴 「무의식에 대한 접근」은 분명 이러한 내게 접근가능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꿈의 기능은 심리적 평형 상태 회복”이라는 정의이다. 아마 ‘프로이트’의 “꿈 상징의 원인은 억압과 욕망충족”이라는 주장의 연장이었다면 이 책은 결코 인연이 없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즉, “꿈은 하나의 사실이자 무의식 고유의 표현”이며, “정당한 이유에서 생겨난 인과(因果)적 현상”이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꿈 자체에 대한 사실적 가치의 부여라는 무의식 접근로(接近路)로서의 꿈의 발견이다.

 

마음의 표출인 ‘의식’, 그리고 의식에 끝없이 정보를 보내는 ‘무의식’이 발설하는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본능의 영역에서 분리되어버린 의식이외에는 무지했던 내 마음에 다가가는 하나의 길을 찾은 것이다. 물론 이 책은 60년에 걸쳐 이룩한 ‘꿈과 상징’의 연구를 정리한 융 심리학의 입문서로서 꿈과 무의식, 통과의례, 집단 무의식, 마음의 성장패턴,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 등 개성화 과정을 비롯한 상징의 심리적 기원과 사례분석, 현대 물리학과 무의식의 상보성에 이르는 꿈의 상징성 연구의 걸출한 집약서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분석심리학에 대한 현학적 호기심만으로 대하기에는 오늘의 세상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막대한 정서적 에너지의 회복, 차단된 잠재적 역량의 발견과 같은 인간에 대한 정말의 공부를 놓칠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무의식과 소통하는 방법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어머니와 같은 대지” 혹은 “태모(太母)”로서의 나무와 같은 ‘물질’이 지닌 정서적 의미를 말하면, 이를테면 나무(木)나 돌(石)에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거나, 달 정령 운운하면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렇듯 관념에서 정서적 에너지를 몰아내고 무의식과 단절되어 버렸다.

 

1. 무의식의 존재성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은 이러한 정서적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으며, 심리적 균형이 무너지면 의식에 정보를 보낸다. 다만, 의식이 이 신호를 받아 들일지, 억압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무의식의 존재는 부정되거나,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개의 주체는 터무니없다고 반박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 분열 증세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분리된 마음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의식적 내용이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되살아나거나, 한 번도 의식되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일상에 필요성이 사라지거나 불편한 것이어서 억압하여 치워버리거나 의식 속 모든 개념은 그 자체의 심리적 연상으로 무의식속에 침잠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스며든 냄새가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옛 기억을 되살려내는 무의식의 존재를 알린다. 또한 우린 직관적으로 ‘뭔가 있는 것 같다.’라든가, ‘왠지 수상쩍다.’처럼 잠재적 지각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 ‘영감(靈感)’으로 천재적인 문학, 철학, 예술작품은 물론 과학적 발견에 이르기도 한다. 무의식에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상실했지만 무의식은 이렇듯 인간 의식의 표층에 불현 듯 나타나 그 존재성을 알린다.

 

2. 꿈은 무의식의 표출이다

 

그런데 마음의 평형을 잃어 내적상태를 헤아려 그 불균형의 소재를 이해하고 싶어도 현대인은 알 도리가 없다. 아마 융의 공적은 이것이라 할 것이다. 프로이트를 넘어서 ‘꿈’ 자체가 무의식의 사실적 표출임을. 프로이트는 ‘자유 연상 기법’을 통해 억압된 욕망으로서의 꿈을 해석하는 데 그쳤지만, 융은 상징적 이미지로 구성된 꿈 자체가 꿈 꾼 사람의 심리적 균형 회복을 위한 사실로서의 현상을 말하고 있음을.

 

꿈의 분석을 통해 잊었던 본능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꿈은 이해하기 어렵다. 의식적 마음이 하는 이야기와 다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꿈은 직접적으로 시원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불쾌한 생각이 주는 충격으로부터 잠을 보호하기 위해 이미지를 왜곡하고 변질시켜 참된 주제를 은폐시키는 ‘검열 기관’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융은 이것이야말로 무의식 상태에서 취하고 있는 본질적 상태라고 반론한다.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난 심리에너지 그대로의 표출로서 당연한 표상인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꿈은 원시적 사고나 신화, 제의(祭儀)와 비슷한 이미지나 심리적 연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고통스러운 잔재’라고 기억의 찌꺼기로 해석하지만,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잔존해 온 심리적 요소, 즉 ‘원형’, ‘원시적 심상’으로서 잃어버린 정서적 관념의 중대한 맥락을 제공하는 예지로서 분석한다. 이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표상으로 형상시키는 본능적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융의 분석심리학에 있어서 ‘상징’의 이해는 꿈 분석의 핵심 토대가 된다.

 

3. 왜 무의식의 이해가 필요한가?

 

융은 현대 문명사회가 무의식과 소통하는 법을 상실함으로서 자연의 일원인 인간이 의식의 무지함과 교만으로 자연과 자신의 균형을 파괴하고 마침내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현대인은 “자기네 합리주의가 인류를 심적인 지하세계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무의식에 은밀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계획이나 결정에 몰래 개입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주인일 수 없다.”는 심리적 무능상태에 빠져있는 인간과 인간사회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간 사회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개인의 정서적, 도덕적 자질에 달려있기에 통계적이고 평균적인 실재하지 않는 인류라는 추상적 관념에서 탈피하여 유일한 현실인 ‘개인’에 대한 본질적 이해만이 생명의 연속성, 행복, 평화, 안정적 삶의 유지를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강조한다. 그래서 융은 탄식한다. “정신이었던 것이 지능과 동일시되고, 막대한 정서적 에너지는 지능이라는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고.

 

인간의 마음(무의식)에는 온갖 진화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여기에는 개인의 콤플렉스라는 개별적 역사가 있듯이, 원형의 성질을 띤 사회적 콤플렉스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인류 전체의 고뇌와 불안에 대한 축적된 정신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이 무의식과의 대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비인간화되고 오직 지적 관념에만 몰두하는 무미건조함과 물신화로 타자에게 상처를 주고, 독선과 기만에 찬 이기심을 양육한다. 무의식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만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변화를 시작해야 타자도, 사회도 변화 할 것이다. 무의식의 이해는 오류와 왜곡과 무지를 바로잡고 내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 된다. 우리 세계는 신경증 환자처럼 분열되어 있고 언제나 적대자만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한다. 자신의 그림자와 사악한 행위인 무의식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본성을 제어할 방법조차 모르고 있지 않는가? 융의 꿈과 상징에 대한 언어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 ‘자기’를 둘러보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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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5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인간과상징 이윤기선생이 번역하신책도 혹시 보셨나요 ?

2014-06-15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해 여름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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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들과 언어, 그리고 소중한 섬에 바치는 경의”라는 산뜻한 소개의 말 이상은 외려 이 작품을 누추하게 표현할 것 만 같다. 그럼에도 여기에 감히 덧붙인다면 우아함 넘치는 쾌활함과 코끝을 스치는 봄바람에 실려 오는 아득한 추억의 향수를 가득 품고 있다고 할까? 얼마간의 거드름조차 순수와 고움이 묻어나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의 작은 섬사람들의 가슴 따뜻한 시선과 건강성이 유쾌하게 지면을 꽉 채운다.

 

섬이라는 고독과 고립에 자유를 입히고 대양의 드넓은 상상력을 품고 있는 토속적 투박함이 물씬한 B섬에, 죽었기에 더 이상은 간섭할 수 없는 이들의 작품만을 느릿느릿 번역하는 번역 작가 '질'은 어렵사리 둥지를 튼다. 우연히 마주한 사제의 초대에 응하고, 본당 신부와의 대화를 통해 영어를 불어로 번역하는 자신을 빗댄 사나포선(私拿捕船)선장이란 소문은 마을 사람들에 퍼지고 그렇게 그는 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섬 자연의 풍광에 매료되어 “애쓰거나 권태를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미끄럼을 타며 가뭇없이 달아”나는 시간을 보내던 질에게 출판사에서 계약안과 계약의 현실성을 입증하는 거액의 수표, 그리고 살아있는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이 동봉된 번역의뢰 편지가 날아든다. 번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는 죽은 작가의 작품만을 작업하던 질에게 살아있는 그것도 번역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보코프의 작품이 “저는 곧 부당한 명성을 누리는 졸렬한 번역가들을 상대로 한바탕의 전쟁을 벌일 생각입니다. 운운”하는 자부심과 교만에 찬 편지들과 함께 도착한 것이다.

 

 

비가 줄줄 새는 집수리와 바닥이 보이는 생활고에 질은 나보코프의 작품 번역을 수락하지만, 이내 “어려서부터 포충망을 들고 나비를 쫓아다닌 탓에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이 성격 장애자의 문체에는 나비의 교태가 배어있었다.” 번역가는 나비의 그 가벼움과 자유로움과 변덕을 옮겨야 하는 끔찍한 장애에 부딪친다. 한 문장도 손을 대지 못한 채 우울한 날을 보내던 그에게 극(極)지대를 탐험하는 남편과 떨어져 지내며 화단을 가꾸던‘생텍쥐베리’여사의 친절이 다가온다. 여름이면 박사논문을 쓰고, 무언가를 연구하기에 더없이 매혹적인 섬의 환경 탓에 몰려든 학자, 교직자들, 하물며 아이들 돌보미로 고용된 영국인 처녀들까지 “가족사이자 근친상간의 연대기인”나보코프의 소설 『에이다』의 번역에 돌입한다.

 

출판사가 있는 파리에 적개심을 가득품고, 번역가 질을 압박하는 무례에 저항하기라도 하는 듯 마을 사람들은 각기 나누어진 몫에 매달려 열성을 쏟는다. 그러나 그것엔 무언가 향긋한 관능이 맴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모녀가 나란히 우리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되도록 조심스럽게 두 여자의 비누 냄새를 맡곤 했다.”

“<She had been prevailed upon to clothe her honey-brown body.> 정말 옮기기가 쉽지 않군요.”

 

섬의 본당 신부가 이러한 섬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성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그 부도덕성을 질책하고 손에 쥐고 있던 『롤리타』를 집어던지며, 신성모독자인 나보코프에 매달리지 말아야 함을 역설한다. 이것은 작품의 면면에 감도는 친화력과 유쾌함, 그리고 관능과 엘레지(élégie)풍의 서정성을 더욱 부추기는 기발한 에피소드로 마음에 들어찬다. 여기에 아르헨티나를 떠나 섬의 고독에 잠겨있는 ‘호세 마리아 페르난데스’의 감각을 통해 이 야릇한 섬을 가득 채우던 기운이 더해진다. “섬의 어디에나 색정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中略) 향긋한 냄새로 미루어 근처 어디에선가 교접이 한바탕 벌어지고 있으려니 짐작하고 있었다.” 『에이다』가 발산하는 번역의 열기로 채워진 섬의 분위기가 이보다 잘 묘사될 수 있겠는가?

 

이윽고 호세의 무선통신기 TS801, 즉 전리층, 하늘까지 공모자로 활용하는 아마추어 번역가들은 전 세계의 불어권 사람들을 향하여 난해한 문장의 도움을 받는다. 일상의 언어를 풍부하고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번역가들의 고뇌의 한 단면이리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전환, 아마 ‘노스탤지어’를 그저 ‘향수(鄕愁)’라고만 번역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듯이, 또한 자칫“생동감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데다, 너무나 밍밍하고 시르죽은”것이 되고 말기에 까다롭기 이를데없는 번역가의 고충이 이렇듯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독촉에 시달리는 번역가, 다행스럽게도 나보코프는 매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의뢰 받은지 3년이 넘어서고, 드디어 수상자 선정이 임박했을 때 출판사 편집위원이 섬에 최후의 통첩을 위해 찾아든다. 이 파리로부터의 인물에 막연한 적대감을 지닌 섬사람들은 질을 위해 이 사자(使者인 동시에 死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리곤 노벨상 선정 발표일에 맞추어 출판될 수 있는 더 이상 변명을 꾸며댈 수 없는 이유있는 구체적인 최후의 날자가 통보된다. 낱말, 고양이, B섬의 사람들..., 자유와 오만불손한 독립성이 닮아 있는, 그러나 상상력과 사랑이 풍성한 그것이 『에이다』의 번역 완성본이 되어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안에서 섬을 떠난다. 마치 본당 신부의 저주에 답을 보내듯이, 아니 번역의 고통스런 시련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자연과 언어가 주는 행복의 장면들이 우아함과 경쾌함, 그리고 익살맞은 웃음에 실려 한바탕 소동의 즐거움, 막연한 옛 추억에 묻히는 시간이 된다. 자신들의 토착어를 지키는 사람들, 돛배로 항해하는 법과 떠나는 법을 아는 사람들, 고독과 사랑이 풍성한 섬 ‘브레아’에 대한 작가의 경의에 독자의 경의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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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 문명의 편견 마이크로 인문학 4
이근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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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동서(東西)문명의 ‘효율성’에 대한 세계관의 차이를 통해 양자의 전략적 장단점을 규명하고 이의 조화를 위한 종합적 성찰이자 제언이라 하겠다. 100쪽 남짓한 팸플릿이지만 문명 상호의 편견을 이루는 관념과 행동 양식을 비교적 풍부한 근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서구식 사고에 익숙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동양(중국)의 전통사상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1)서구의 효율성 인식

 

서구는 어떤 과제를 수행하기 이해서는 우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이 계획을 수행한다. 즉, “실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관념적으로 먼저 구상하고, 그 후에 의지와 행동을 통해 관념적 구상을 현실 속에 구체화 하는”, ‘모델화’의 정식을 따른다. 그러나 이 관념적 구상은 이상적이고 완벽성에 가깝지만 이를 100%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제를 매개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려깊음, 또는 신중함이라는 의미의 프로네시스(phronesis)를 상정하여 완전성을 지향한다.

 

그런데 모델화는 이처럼 이론과 실제의 괴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전쟁과 같은 동태적 영역, 다시 말해서 수많은 부수적, 우연적 사건이 연속하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계획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결국 부딪친 난관과 같이 고착화된 구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서구인은 영웅적인 행동주체의 출현을 기대한다. 아마 서구의 무수한 영웅의 출현은 이러한 배경을 설명하는 하나의 사례로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사실 효율성(效率性: efficiency)이란 단어가 이미 서구적 표현일 것이다. 완전성인 모델에 도달한 실행 결과의 비율이란 의미이니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구인은 완전성의 추구를 향한 지속적인 목표에의 도전이 가능했던 것은 아닐는지.

 

(2)동양(중국)적 효율성

 

서구의 영웅주의, 모델화가 지닌 한계, 즉 모델화에서 실재가 이탈할 때, ‘주체’의 임기웅변, 탁월한 대처능력이 요구된다. 영웅, 천재에 의존해야만 하는 서구적 합리성의 내적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바로 이것이 전략의 중심축이 된다. 바로 상황의 흐름을 감지해내고 그 흐름을 이용하는 능력에 동양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계획이니 모델이니 하는 서구의 복잡한 구상이 필요치 않다. 형세(形勢)라는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힘의 관계를 살피며, 그 상황 속에 함축되어 있는 잠재력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즉, 작동중인 역학관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그것이 곧 형세의 귀결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서구처럼 동태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계획을 이탈한 요인을 해결하기 위한 주체의 개입이 존재치 않는다. 마찰도, 운도, 천재성도 필요 없다! 결과는 단지 매순간 일어나는 함축된 힘의 관계에서 생겨난 필연적 귀결일 뿐이다. 객관적 조건이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을 만들거나 기다리면 된다. 쉽다. 아마 “실재는 운행이다. 천지는 말없이 행할 뿐이다.”라는 중국식 사고야말로 이를 잘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일례로 중국 외교 전략에서 이러한 형세에 대한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타인에 나의 지배력은 주체의 인위적 개입이나 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상황을 활용하는 것”, 귀곡자가 말한 ‘세를 세워서 장악(立勢而制事)’한다는 그것이다. 굳이 효율성을 비교하고 따질 이유가 없다. 동양에서는 이처럼 효율성은 근원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동서의 조화를 위해서

 

이렇게 보면 서구의 모델화, 영웅주의, 계획과 실천이라는 이원적 구조가 동양(중국)의 형세라는 근원적 효율성의 개념에 비해 열등한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형세의 개념에는 내밀함, 폐쇄성, 비가시성이 있다. 즉 객관적 조건의 조성에 참여하지 않은 구성원은 그것의 결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서구의 모델화가 지닌 입장정리와 반대의 제기와 같은 토론의 과정이 없다. 바로 형세에는 이 공론화라는 과정이 부재(不在)하다는 점이다. 책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의 오늘로부터 이러한 형세의 이용을 발견한다.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세계의 공장이 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쉬운 성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수동성의 전략인 상황과 세의 효율성 추구만으로 1등이 될 수 있겠는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논쟁이 조직과 공론화와 같은 민주주의적 상호 인정과 타협이 없이 자신의 효율성만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리곤 “의미의 문제는 분명 중국을 뒤흔들 것이다”라는 이익이 아닌 이념의 추구, 즉 새로운 모델의 제시가 요구된다고 제안하고 있다. 세계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델화는 당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념의 추구’라는 유일한 노선만 있는 것일까? 20세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오히려 이념은 폭력의 온상이고 처참한 잔악성이란 상처만 남기지 않았던가? 민족주의, 군국주의, 공산주의의 전체화 등등, 그리고 사적 권력의 존속을 위해 조잡하게 만들어진 무수한 이념들은 인류에게 분열과 고통만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동서의 조화, 인류의 평화와 번영이란 이상을 구실로 다시금 이념(Ideology)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젠 인류를 패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일일지도 모른다. 외려 상황, 형세의 철학과 같이 자연을 객관화 혹은 대상화시키지 않으면서 협의와 참여가 가능한 어떤 자연적 실천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같이 책은 서구의 모델화와 동양의 전통 사상에 대한 종합적 성찰의 과제를 충분한 논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를 바깥에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서로의 편견이 드러나고 그때야 대화가 가능해진다.”는 몰이해의 제방을 터뜨리는 시작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철학의 가능성은 타성의 파괴”라는 아포리즘이 있듯이 우리의 인식을 옥죄고 있는 그 습관적 사고를 파괴하고 보다 넓고 멀리 바라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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