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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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 - 고통, 불안, 불쾌, 수치, 모멸, 부족(미흡)... - 이 제거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젊음, 쾌락, 평온만이 있는 세상, 셰익스피어의 희곡『템페스트』 5막1장 中의 “오오 멋진 신세계여!”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오직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 그래서 행복이외의 것들은 모두 버려진다. 이제 인간이란 존재는 다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감정과 정서, 의식과 무의식, 즉 인간의 삶을 구성하던 여타의 요소들이 싹 걷어진 새로운 존재의 탄생(생산) 말이다.

 

소설은 이 필요성의 장치에서 시작된다. 외부생식을 통한 수십, 수백의 똑같은 인간에서 최고의 지식을 갖춘 소수의 인간 등 예정된 사회계급별로 인공배양과 부화의 조건을 차별하고, 조건반사 훈련과 수면 교육법을 통해 획일화된 인간을 생산한다.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등 사회계급에 따라 배양되고 양육된 인간들은 동일한 일의 반복된 노동과 직업에 배치되어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모두 행복하다. 사랑, 충성이란 감정과 정서는 없으며, 저항할 유혹이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감정을 가지면 사회는 동요한다.”는 불안을 제거하기위해 인간의 내적 동요자체가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유아기에서부터 남녀의 성적 접촉이 권장되고, 쾌락을 위해 섹스 파트너는 결코 고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 혹여 삶의 행복이 감소하면 ‘소마’라는 환각제를 복용하여 순간의 비(非)행복감도 차단한다. 조건 반사교육으로 노예화된 인간들, 자아의식도 없으며 자신들이 생존하는 고맙고 안락한 요소에 별도의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안주할 수 있는 세계이며, 계급제도의 숲속을 자연스럽게 거니는 사람들로 조직화된 사회이다. 또한 “옷이 해지면 버리고 새 것을 사라!”는 소비지상의 신성불가침의 원칙이 있는 곳, 수선(修繕)은 반사회적 행동으로 처벌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묘사된 인공의 조작된 신세계가 그리 낯설지 않다. 이미 소비자유주의가 판치고 쾌락지상의 공리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 사고와 내적성찰의 겨를도 없이 생존의 경쟁에 매달리도록 학습된 오늘의 우리들과 소설 속 인간들에게서 그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에서도 개인의 의의와 중요성을 의식하는 존재는 출현한다. 단독의 개인이라는 자각, 자의식에 대한 의문이 자라는 것이다. ‘버나드’, 그리고 ‘헬름홀츠’라는 최고 계급의 인간은 우울과 고독, 애착과 비판에서 막연한 자유의 원기를 느낀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인간이 존재하는 보호구역에서 조건반사 양육소의 소장 ‘토마스’로부터 버려진 베타 계급의 '린다‘와 그녀의 아들 ’존‘을 발견하게 된다. 토마스의 적의에 맞서기 위해 버나드는 총통 ’무스타파 몬드‘의 허가 하에 린다와 존을 그들의 세계로 데려온다.

 

내부 생식에 의한 태생을 하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은 소외되기만 했던 버나드를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고, 자신이 그들 세계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식을 고조시킨다. 세계가 그를 중요하게 인정하는 한 그 세계의 질서는 훌륭한 것이 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을 ‘보수’의 본질이라 해야 할 것이다. 비판과 의혹의 자의식은 사라지고 기득권의 유지와 확장에 몰두하는 추오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호구역에서 버나드가 데려온 야만인인 존은 그가 그리던 신세계가 쾌락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없음에 절망하고, 무절제와 획일화된 인간들의 비인간성에 좌절한다. 자신의 시선을 매혹했던 여성 ‘레니나’로부터 억제되지 않은 성적 충동 그 자체, 만나면 바로 끝장내는 그녀의 행동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에게 신세계의 최고 여성인 레니나는‘매춘부!’일 뿐이다. 존은 더 이상 버나드를 위해 인간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행사에 나서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버나드의 명성은 치명적 상황을 맞이하고, 이는 버나드를 다시금 의혹하는 인간, 인간의 단독성을 생각하는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것은 사회 체제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총통 무스타파 몬드에게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고, 버나드와 헬름홀츠, 야만인 존은 추방되고 격리되어야 하는 존재이상이 아니다. 아마 이 소설이 제기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가장 논쟁적인 대화라 하여야 할 것이다. 존과 무스타파 몬드의 인간과 인간세계의 당위에 대한 난상 토론이 전개된다. 니체적 힘에의 의지에 대한 궁극의 논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신 과 과학, 보수와 진보, 긍정과 부정, 이성과 감정의 대립.

 

“우리는 우리자신을 만들지 않았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우리는 신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신은 문명(기계, 의약품, 보편적 행복)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행복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맞서고, 순결과 절제, 고귀함과 비장함을 얘기할 때 순결은 신경쇠약이며, 이것은 곧 불안정이고 문명의 종말이라고 대극에 선다. “타락한 쾌락이 풍부하지 않고서는 영속적 문명은 기대할 수 없다.”고 무스타파는 강변하는 것이다. 자연자원의 남용, 물질의 무한 소비, 공리적 쾌락의 끝없는 추구, 바로 오늘의 인간사회가 지향하는 것들이다. 과연 우리는 영속적 조달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종말을 향해가는 인간들, 인류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지 않는가?

 

오늘의 우리들은 매양 ‘행복’을 노래한다. 마치 행복해지는 것만이 삶인 것처럼. 과연 “불행해질 권리도 없으며, 성병에 걸릴 권리도 없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와 온갖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없는 것”이 행복인 것일까?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추구할 권리도 없다면 그것이 행복이겠는가? 고통도 좌절도 죽음의 운명도 긍정하는 삶, 긍정을 향한 힘에의 의지를 말한 니체의 사변이 절절하게 울려대는 것만 같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라는 존의 외침만큼 진실의 언어는 없는 것만 같다. 낡은 등대에 은신하지만 끝내 다름의 이해를 지니지 못한 인간들의 호기심, 그 과잉의 쾌락주의를 버리고 흔들거리는 그의 다리만큼이나 오늘의 사회, 이 역설의 언어인 멋진 신세계는 다름 아닌 지옥을 향한 통과세계가 아니겠는가? 과학은 없고 공학만 있으며, 예술은 사라지고 예능만이 넘실대고, 종교는 이성적 인간이 대체한 행복 추구의 세계. 정말 아아 멋진 신세계여가 아닌가? 시대가 제아무리 흘러도 이 소설은 인간에게 무수한 반성의 언어를 발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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